이지윤

이지윤 기자

동아일보 문화부

구독 67

추천

여러분이 장바구니에 담은 세상을 들여다봅니다

leemail@donga.com

취재분야

2025-11-22~2025-12-22
문화 일반22%
문학/출판16%
미술14%
인사일반14%
역사14%
음악8%
연극5%
대통령3%
요리/음식3%
기타1%
  • 쏟아지는 3040주부 패러디 콘텐츠… 문제는 ‘혐오-편견’

    명품 패딩과 가방을 걸치고 아들 학원 라이딩에 올인한 ‘제이미맘’. 숫자를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까까’ 개수가 적다는 걸 알아챈 ‘영재적 모먼트’에 감탄해 네 살짜리 아이를 수학 학원에 보낸다. 원어민 교사에게서 “배변 훈련에 성공했다”는 전화를 받고 감격한다. 코미디언 이수지는 원래도 인물 묘사에 특출한 재능을 가진 연기자다. 하지만 최근 젊은 대치동 엄마 ‘제이미맘’을 코믹하게 그려낸 유튜브 영상은 순식간에 그의 최대 히트작으로 등극했다. 한 달에 걸쳐 공개된 영상 두 편의 조회수를 합치면 18일 기준 1380만 회가 넘는다. 최근 3040 주부를 패러디한 콘텐츠들이 연이어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해당 나이대 여성들 사이에 화제가 됐던 특징들을 예리하게 포착해 재현한 덕에 ‘극사실적 풍자’라는 호응을 얻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선 이런 풍조가 과거 ‘된장녀’ ‘맘충’처럼 편견을 고착화한다는 우려도 나온다. 젠더 논란을 폭발시킨 ‘제2의 김 여사’가 될 수 있단 지적도 적지 않다.● 3040 주부 패러디 콘텐츠 범람 ‘제이미맘’만 인기인 게 아니다. 신도시 젊은 엄마 ‘서준맘’ 시리즈도 코미디언 박세미를 스타덤에 올려놨다. 이수지가 ‘대치맘’을 연기했다면, 서준맘은 ‘동탄맘’으로 대표되는 신도시맘을 풍자했다. 아이를 비싼 영어유치원에 보내려 애쓰고 화려한 네일아트를 즐기며, 친한 언니들과 커피숍에서 정보를 공유한다고 바쁘다. 이렇게 30, 40대 주부를 다룬 코미디 콘텐츠는 최근 전성기를 맞았다. 비슷한 스타일의 콘텐츠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피식대학’이 최근 선보인 ‘예쁠림’ 시리즈는 오랜 무명 생활을 한 코미디언 연예림의 얼굴을 단번에 알린 패러디물이다. 예쁠림은 소셜미디어에서 활동하는 40세 인플루언서 캐릭터. 나이에 비해 젊은 외모, 키 190cm 고등학생 아들을 마치 연인처럼 앞세워 자랑한다. 툭하면 ‘팥물’ 공구를 홍보하는 ‘팔이피플’(공동 구매 인플루언서를 비꼬는 명칭)을 다소 우스꽝스럽게 표현했다. 이수지의 ‘제이미맘’이 인기를 끌자, 배우 김동휘의 ‘대치파파의 하루’라는 파생 패러디물도 나왔다. 이 영상은 지난달 27일 공개 이후 조회 수 100만 회를 넘겼다. 주목할 만한 건 유학파 출신 대기업 ‘대치 아빠의 일상’을 다룬 콘텐츠물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을 부인 허락과 지시 아래 하는 그의 고달픈 하루를 통해 자녀 교육과 명품 소비에 올인한 ‘대치맘’ 이미지가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젊은 여성이나 엄마를 소재로 한 패러디물이 인기인 이유로 ‘높은 접근성, 낮은 저항력’을 꼽았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우리 주위에 한 명쯤 있을 법한 친숙한 인물이기 때문에 콘텐츠로 만들어 공감을 얻기가 좋다”면서 “패러디 대상이 시청자 본인일 수도, 이웃일 수도 있기에 정치인이나 연예인처럼 특정 유명인을 지목하지 않으면서도 널리 소비될 수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풍자로 인한 반발이나 저항력이 낮은 것도 장점이다.● “풍자가 조롱이 돼선 안 돼” 하지만 이런 콘텐츠의 생산과 소비가 사회적 풍자를 넘어 특정 집단을 정형화하면서 편견, 혐오를 조장하는 형태로 가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실제로 이들 패러디물에는 “아줌마들 꼴값 토 나온다” “퐁퐁남 잘 만나서 인생 역전” 등의 과도한 댓글이 상당하다. 이수지의 ‘제이미맘’ 영상이 배우 한가인이 유튜브에서 공개했던 자녀 라이딩 일상을 저격했다는 억측이 나오면서, 한가인 유튜브에 몰려가 악성 댓글을 다는 이상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황 평론가는 “콘텐츠 자체는 과장법과 희화화를 사용한 풍자물에 지나지 않지만, 코미디를 얄팍하게 이해한 댓글이 불필요한 갈등을 낳고 있다”고 했다. 유사 콘텐츠가 무분별하게 늘다 보면, 운전하는 여성을 싸잡아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던 ‘김 여사’ 수준의 혐오 문화가 확산할 수 있다는 경계도 나온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풍자는 사회적 권력의 유무, 구체적인 부작용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단순히 성별과 연령, 또는 ‘OO맘’으로 범주화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며 “예전의 ‘맘충’ ‘된장녀’ 혐오 연장선으로 가는 흐름이 보이는 건 우려되는 현상”이라고 경고했다. 김성수 대중문화평론가도 “이런 풍자물이 제기한 과열된 입시 경쟁, 허영적 소비 등 이면의 문제들에 주목해야 한다”면서 “‘나라면 어떨까’에 대한 성찰과 사회의 근본적 문제에 관한 담론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필요하다”고 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 2025-03-1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제이미맘 서준맘, 줄잇는 ‘○○맘’ 패러디…풍자? 조롱? ‘아슬아슬 줄타기’

    명품 패딩과 가방을 걸치고 아들 학원 라이딩에 올인한 ‘제이미맘’. 숫자를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까까’ 개수가 적다는 걸 알아챈 ‘영재적 모먼트’에 감탄해 네살짜리 아이를 수학 학원에 보낸다. 원어민 교사에게서 “배변 훈련에 성공했다”는 전화를 받고 감격한다. 코미디언 이수지는 원래도 인물 묘사에 특출한 재능을 가진 연기자다. 하지만 최근 젊은 대치동 엄마 ‘제이미맘’을 코믹하게 그려낸 유튜브 영상은 순식간에 그의 최대 히트작으로 등극했다. 한 달에 걸쳐 공개된 영상 두 편의 조회수를 합치면 18일 기준 1380만 회가 넘는다.최근 3040 주부를 패러디한 콘텐츠들이 연이어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해당 나이대 여성들 사이에 화제가 됐던 특징들을 예리하게 포착해 재현한 덕에 ‘극사실적 풍자’라는 호응을 얻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선 이런 풍조가 과거 ‘된장녀’ ‘맘충’처럼 편견을 고착화시킨다는 우려도 나온다. 젠더 논란을 폭발시킨 ‘제2의 김 여사’가 될 수 있단 지적도 적지 않다.● 3040 주부 패러디 콘텐츠 범람‘제이미맘’만 인기인 게 아니다. 신도시 젊은 엄마 ‘서준맘’ 시리즈도 코미디언 박세미를 스타덤에 올려놨다. 이수지가 ‘대치맘’을 연기했다면, 서준맘은 ‘동탄맘’으로 대표되는 신도시맘을 풍자했다. 아이를 비싼 영어유치원에 보내려 애쓰고 화려한 네일아트를 즐기며, 친한 언니들과 커피숍에서 정보를 공유한다고 바쁘다. 이렇게 30,40대 주부를 다룬 코미디 콘텐츠는 최근 전성기를 맞았다. 비슷한 스타일의 콘텐츠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피식대학’이 최근 선보인 ‘예쁠림’ 시리즈는 오랜 무명 생활을 한 코미디언 연예림의 얼굴을 단번에 알린 패러디물이다. 예쁠림은 소셜미디어에서 활동하는 40살 인플루언서 캐릭터. 나이에 비해 젊은 외모, 키 190cm 고등학생 아들을 마치 연인처럼 앞세워 자랑한다. 툭하면 ‘팥물’ 공구를 홍보하는‘팔이피플’(공동 구매 인플루언서를 비꼬는 명칭)을 다소 우스꽝스럽게 표현했다. 이수지의 ‘제이미맘’이 인기를 끌자, 배우 김동휘의 ‘대치파파의 하루’라는 파생 패러디물도 나왔다. 이 영상은 지난달 27일 공개 이후 조회수 100만 회를 넘겼다. 주목할만한 건 유학파 출신 대기업 ‘대치 아빠의 일상’을 다룬 콘텐츠물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을 부인 허락과 지시 아래 하는 그의 고달픈 하루를 통해 자녀 교육과 명품 소비에 올인한 ‘대치맘’ 이미지가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젊은 여성이나 엄마를 소재로 한 패러디물이 인기인 이유로 ‘높은 접근성, 낮은 저항력’을 꼽았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우리 주위에 한 명쯤 있을 법한 친숙한 인물이기 때문에 콘텐츠로 만들어 공감을 얻기가 좋다”면서 “패러디 대상이 시청자 본인일 수도, 이웃일 수도 있기에 정치인이나 연예인처럼 특정 유명인을 지목하지 않으면서도 널리 소비될 수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풍자로 인한 반발이나 저항력이 낮은 것도 장점이다. ● “풍자가 조롱이 돼 선 안 돼”하지만 이런 콘텐츠의 생산과 소비가 사회적 풍자를 넘어 특정 집단을 정형화하면서 편견, 혐오를 조장하는 형태로 가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실제로 이들 패러디물에는 “아줌마들 꼴값 토 나온다” “퐁퐁남 잘 만나서 인생 역전” 등의 과도한 댓글이 상당하다. 이수지의 ‘제이미맘’ 영상이 배우 한가인이 유튜브에서 공개했던 자녀 라이딩 일상을 저격했다는 억측이 나오면서, 한가인 유튜브에 몰려가 악성 댓글을 다는 이상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황 평론가는 “콘텐츠 자체는 과장법과 희화화를 사용한 풍자물에 지나지 않지만, 코미디를 얄팍하게 이해한 댓글이 불필요한 갈등을 낳고 있다”고 했다.유사 콘텐츠가 무분별하게 늘다보면, 운전하는 여성을 싸잡아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던 ‘김 여사’ 수준의 혐오 문화가 확산할 수 있다는 경계도 나온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풍자는 사회적 권력의 유무, 구체적인 부작용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단순히 성별과 연령, 또는 ‘OO맘’으로 범주화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며 “예전의 ‘맘충’ ‘된장녀’ 혐오 연장선으로 가는 흐름이 보이는 건 우려되는 현상”이라고 경고했다. 김성수 대중문화평론가도 “이런 풍자물이 제기한 과열된 입시 경쟁, 허영적 소비 등 이면의 문제들에 주목해야 한다”면서 “‘나라면 어떨까’에 대한 성찰과 사회의 근본적 문제에 관한 담론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 2025-03-18
    • 좋아요
    • 코멘트
  • 국립국악원 전·현직 예술감독 “국악원장에 문체부 고위관료 알박기 안돼”

    문화체육관광부가 국립국악원장 자리에 행정직 고위공무원을 임명하려 하면서 국악계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 국립국악원 전·현직 예술감독 27명은 18일 성명서를 내고 “국립국악원장을 특정 행정직 고위공무원으로 알박기하려는 시도를 즉각 중단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성명서에는 “국립국악원을 관치 행정의 틀 안에 가두어 통제를 강화하려는 시도이며, 국악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전문성 없이 국립국악원을 운영하는 것은 국악계의 발전을 저해하고 정체성을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 등 내용이 담겼다. 신임 국악원장으로는 용산 대통령실 비서관을 지낸 유병채 문체부 국민소통실장이 거론되고 있다. 앞서 이달 6일에는 전임 국립국악원장과 국악연구실장 등으로 구성된 국립국악원 현안 비상대책협의회가 국악원 조직 개편과 원장 선임에 대한 성명서를 냈다. 비상대책협의회는 “국악원장은 기존 국악 및 공연 분야 전문가만 지원할 수 있는 경력개방형 직위였으나 지난해 12월 문화체육관광부가 법령 개정을 통해 행정직 공무원도 응모·임명될 수 있도록 개편했다”면서 “혹여 고위직 행정공무원을 임명하려 한다면 이는 반드시 철회되어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한다”고 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 2025-03-18
    • 좋아요
    • 코멘트
  • 獨궁전서 보는 ‘금관총 금관’…25년 만에 한국문화 특별전

    독일 드레스덴을 상징하는 400년 역사의 성에서 우리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들이 대규모 전시된다.국립중앙박물관은 18일 “독일 드레스덴박물관연합(SKD)과 손잡고 드레스덴 레지덴츠 궁에서 특별전 ‘백 가지 행복, 한국문화특별전’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박물관은 “1999년 독일 에센과 뮌헨에서 열린 ‘한국 고대 왕국-무속, 불교, 유교’ 전 이후 독일에서 대대적인 한국문화 특별전이 열리는 건 25년 만”이라고 설명했다. 드레스덴박물관연합은 1560년 궁정박물관에서 시작한,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긴 박물관 기관 중 하나다.8월 10일까지 열리는 전시에선 레지덴트 궁 1, 2층에 걸쳐 총 185건 349점의 유물이 소개된다. 전시 주제별로 나뉜 9개의 방에서는 각각 삼국시대 토기(‘풍요와 안식’ 방)와 다채로운 빛깔의 한복(‘기쁨의 색채’ 방), 고려·조선의 불교미술(‘자비의 약속’ 방) 등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품에는 ‘배 모양 토기’ ‘기린 장식 청자 향로’ 등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품도 포함됐다. 드레스덴박물관연합이 소장한 조선시대 병풍, 갑옷 등 10점도 함께 전시된다. 신라를 대표하는 국보 ‘금관총 금관과 금허리띠’도 전시돼 눈길을 끈다. 지금까지 발견된 6점의 신라 금관 중 하나로, 화려하고 섬세한 세공 기술로 높이 평가된다. 독일에서는 앞서 1962년 프랑크푸르트 공예박물관에서 열린 ‘한국국보전’으로 공개된 적 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 2025-03-18
    • 좋아요
    • 코멘트
  • ‘입원 한달째’ 교황, 가톨릭 3년 개혁활동 신규 승인

    한 달 넘게 입원 중인 프란치스코 교황(사진)이 가톨릭계 개혁을 논의할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Synod)의 신규 활동을 승인했다. 사임설을 부인하고 교황직 수행 의지를 드러냈다는 분석이 나온다. 15일(현지 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교황은 2028년 새로운 시노드를 개최하기 위해 향후 3년간 관련 절차를 진행하기로 11일 결정했다. 시노드는 교황의 소집으로 세계 주교들이 모여 현안을 논의하는 기구다. 프란치스코 교황 재임 동안 교회 개혁 사업이 주요 의제로 논의돼 왔다. 지난해 10월 시노드에선 여성 부제(사제 바로 아래 성직자) 허용, 성소수자 포용 등을 다뤘다. 올 6월엔 가톨릭 개혁안에 관한 연구 조사 결과를 보고 받기로 예정돼 있다. 이번 시노드 활동 승인은 교황의 건강에 대한 우려가 불거질 때마다 거론된 ‘자진 사임설’에 분명하게 선을 그은 것이란 해석이 나오고 있다. 교황은 2023년 2월 콩고민주공화국을 방문했을 때도 “교황직은 죽을 때까지 하는 종신의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다만 2013년 즉위 직후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직무 수행이 불가능할 경우에 대비해 사임서는 미리 작성해 둔 것으로 알려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양쪽 폐에 발생한 폐렴 등으로 인해 지난달 14일부터 이탈리아 로마 제멜리 병원에 입원해 있다. 즉위 이후 최장기 입원이다. 그동안 4차례 호흡 곤란을 겪는 등 위험한 고비를 겪었으나, 최근 병세가 나아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교황청은 15일 언론 공지에서 “교황의 임상 상태는 안정적이고, 지난주부터 개선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며 “다만 여전히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밝혔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 2025-03-17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모네는 천재일까 거장일까… 정점을 언제 찍었나 보라[책의 향기]

    혁명적인 스타일로 예술계를 뒤집었던 파블로 피카소와 영화 ‘네 멋대로 해라’의 감독 장뤼크 고다르. 그리고 ‘현대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폴 세잔과 영화 ‘현기증’을 만든 앨프리드 히치콕. 각 예술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누구나 알 만한 예술가들이지만 전자와 후자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일찍이 두각을 드러낸 천재, 후자는 대기만성형 거장이란 점이다. 이 책은 예술사에 한 획을 그은 조각가, 소설가, 영화감독 등을 ‘개념적 혁신가’(천재)와 ‘실험적 혁신가’(거장)라는 개념으로 분류한 뒤 생애주기에 따라 달리 발현되는 창의성에 대해 논한다.미국 시카고대 경제학과 교수 겸 전미경제연구소(NBER) 연구원인 저자는 ‘예술가의 생애주기와 혁신의 관계’를 탐구함으로써 인간의 창의성을 이해하기 위해 이 연구를 시작했다. 실제 예술가들의 생애주기별 경매가 추이, 교과서에 가장 많이 실린 작품을 제작한 나이 등을 수치로 비교하면서 천재와 거장을 나누는 기준을 증명해 간다. 책에 따르면 천재로 통칭되는 ‘개념적 혁신가’는 특정한 아이디어나 욕구에서 동기를 얻어 즉시 성과를 낸다. 반면 거장으로 분류되는 ‘실험적 혁신가’들은 동일한 주제를 반복해 다루며 성과를 낸다. 이 두 유형의 예술가들은 경쟁을 거듭하면서 근대 예술사를 발전시켜 왔다. 개념적 혁신가들은 실험적 혁신가를 ‘지성이 결여된 단순 장인’으로, 실험적 혁신가들은 개념적 혁신가를 ‘진실성이 부족한 지적 사기꾼’으로 여기며 비난했지만, 실은 끊임없이 서로를 보완·대체하며 예술 발전을 이끌어 왔다는 것이다. 19세기 중후반 실험주의자들이 이끌었던 인상주의는 개념주의자들의 상징주의와 입체파로 대체된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다시 실험주의자들이 득세하며 마크 로스코, 바넷 뉴먼 등 추상표현주의가 대세를 형성한다. 이런 흐름은 이후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 ‘천재들’의 팝 아트로 진화하며 또 한 번 뒤집힌다. 책은 “두 방식 중 하나가 과도하다고 인식되는 시점엔 젊은 예술가와 평론가, 화상(畫商) 사이에 그 반작용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일생에 걸쳐 다수 작품을 남긴 클로드 모네는 어디에 속할까. 60대에 대표작 ‘수련’ 시리즈를 남긴 모네는 오랜 시간 연구와 작업을 반복한 실험적 혁신가, 즉 거장으로 분류된다. 그런 그가 20, 30대에 인상주의 사조를 이끌며 생애 최고가 작품을 그렸다는 사실은 언뜻 모순적으로 보인다. 저자는 “혁신이 전적으로 개별 예술가들에 의해 이뤄지진 않는다”면서 모네의 초기 성과는 그 자신의 천재성이라기보다는 선배 예술가들의 연구 의제에서 비롯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한다. 책 후반부에서 저자는 논지를 예술사 밖으로 넓힌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의 생애주기를 조사한 결과 개념적 혁신가는 가장 많이 인용된 연구를 43세에, 실험적 혁신가는 그보다 늦은 61세에 발표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저자는 개념주의자를 단거리 주자에, 실험주의자를 마라토너에 빗대며 “자신의 기술에 맞춰 창의성을 기르라”고 조언한다. 종류가 다를 뿐, 혁신은 누구에게나 있다. 책 마지막엔 자신이 어느 쪽 혁신가에 속하는지 체크해 볼 수 있는 진단표 등이 수록돼 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 2025-03-1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특별 제작 진열대에 놓인 가로 8m ‘사경’

    “형태는 깨끗한 옥산이요 마음은 물을 좋아하니(形靜玉山 心樂水), 그 누구의 지혜로움이 이와 같고 어느 누구의 어짊이 그와 같으리오(孰如其智 孰如仁).” 서울 강남구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특별전 ‘호림명보’에 전시 중인 18세기 조선 ‘백자 청화철화나비문 시명 팔각연적’에 쓰인 칠언절구다. 이 연적은 보물로 지정된 두 점뿐인 백자 연적 중 하나로, 논어의 구절 ‘요산요수(樂山樂水)’를 빗댄 시구 덕에 더욱 품격이 높게 느껴진다. 국보 8건과 보물 54건, 서울시유형문화유산 11건 등 박물관 소장품 100여 점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의 관람 포인트를 살펴봤다.●‘지금 봐야 할’ 작품사경(寫經·불교 경전을 베껴 쓴 것)은 분량이 방대하지만 통상 도입부인 변상도(경전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그림)까지만 전시된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선 펼쳤을 때 가로 8m에 이르는 사경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다. 특별 제작한 진열대에 놓인 ‘감지금니 대방광불화엄경입불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이 그 주인공. 쪽물을 들인 남색 종이에 금으로 화려하게 쓰인 글자를 눈으로 좇다 보면 간절함과 엄숙함이 느껴진다. 금으로 채색된 14세기 고려 ‘수월관음도’, 임진왜란에서도 살아남은 조선 전기 ‘지장시왕도’ 등 불화 3점은 전시 중간 다시 수장고로 들어가는 탓에 다음 달 6일까지만 볼 수 있다. 조명, 습기 등에 취약해 오래 꺼내 놓기 어려운 탓이다.●미래 보물 후보들 향후 더욱 주목받을 가능성이 있는 유물을 미리 살펴보는 재미도 있다. 1591년 사헌부에서 열린 ‘신참 신고식’을 그린 ‘총마계회도’는 비교적 수수해 지나치기 쉽지만 보물 지정 심사에 올라 있는 작품이다. 유지원 학예연구사는 “행사 날짜와 참석자, 소장자 등이 상세히 기록돼있어 가치가 높다”고 설명했다. 백자 항아리 중 큰 크기로 손꼽히는(높이 61cm) 18세기 ‘백자 대호’, 담청색이 아름다운 13세기 ‘청자 상감쌍룡국화문 반’도 보물 지정 심사 중이다.●이야기가 있는 유물 우여곡절 끝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유물은 특히 반갑다. 1443년 일본으로 유출된 뒤 타지를 떠돌다 1971년 재일교포로부터 인수된 14세기 국보 ‘백지묵서 묘법연화경 권1-7’이 대표적이다. 15∼16세기 조선 ‘분청사기 철화당초문 장군’은 호림박물관을 세운 호림 윤장섭(1922∼2016)이 특별히 아꼈던 유물로 전해진다. 이원광 학예연구실장은 “박물관 설립 후 곧장 출연했던 다른 유물들과 달리 1∼2년 뒤에야 꺼내 놓은 작품”이라고 했다. 전시는 7월 26일까지 열린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 2025-03-1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100여점 유물 속 ‘나만의 보석’ 발굴할 관람 포인트는?

    뽀얀 백자 연적에 나비 한 마리가 단정히 앉았다. 팔각 몸통에는 푸른 청화(靑畵)와 붉은 철화(鐵畵)로 쓴 칠언절구 시 한 편이 한줄한줄 번갈아 적혔다. “형태는 깨끗한 옥산이요 마음은 물을 좋아하니(形靜玉山 心樂水), 그 누구의 지혜로움이 이와 같고 어느 누구의 어짊이 그와 같으리오(孰如其智 孰如仁)”.서울 강남구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특별전 ‘호림명보’에서 전시 중인 18세기 조선 ‘백자 청화철화나비문 시명 팔각연적’이다. 보물로 지정된 단 두 점뿐인 백자 연적 중 하나로, 공자의 요산요수(樂山樂水)를 연적에 절묘히 빗대 더욱 아름답다. 이를 포함한 보물 54건과 국보 8건, 서울시유형문화유산 11건 등 소장품 100여 점이 이번 전시에 총출동했다. 지정 시기에 따라 유물을 소개한 동선 속에서 ‘나만의 보석’을 발굴할 관람 포인트를 알아봤다.①드라마가 있는 유물호림박물관을 세운 기업가 호림 윤장섭(1922~2016)은 간송 전형필, 호암 이병철 등에 견주는 문화유산 수집가로 손꼽힌다. 우여곡절 끝에 고국 품에 안긴 유물은 특히 반갑다. 1443년 일본으로 유출된 후 타지를 떠돌다가 1971년 재일교포에게서 인수된 14세기 국보 ‘백지묵서 묘법연화경 권1-7’이 대표적이다. 조선 15~16세기 ‘분청사기 철화당초문 장군’은 윤장섭 선생이 특별히 아낀 유물로 여겨진다. 거친 백토(白土) 붓칠과 철화(鐵畵) 문양이 눈길을 끄는 보물이다. 이원광 학예연구실장은 “박물관 설립 후 곧장 출연했던 다른 유물들과 달리 1~2년 뒤에야 꺼내놓은 작품으로, 각별히 여겼던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②지금 봐야할 작품방대한 분량의 사경(寫經·불교 경전을 베껴 쓴 것)은 주로 도입부인 변상도(경전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그림)까지만 전시된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전부 펼쳤을 때 가로 길이 8미터에 달하는 사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는 기회다. 특별 제작한 진열대에 놓인 ‘감지금니 대방광불화엄경입불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이 그 주인공. 당시 귀한 쪽물을 들인 남색 종이에 화려한 금으로 쓴 글을 눈으로 좇다 보면 그 간절함과 엄숙함이 절로 느껴진다.조명, 습도 등에 취약해 머잖아 휴지기를 맞는 불화들도 지금을 놓치면 한참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금으로 칠해 은은하게 빛나는 관음보살, 섬세한 파도와 의복 표현이 빼어난 14세기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 임진왜란에도 살아남아 장엄한 매력이 돋보이는 조선 전기 불화 ‘지장시왕도’는 다음 달 6일까지만 볼 수 있다.③미래 보물 후보들아직은 국보, 보물 이름표를 달지 못했으나 향후 그 가능성이 있는 유물들을 미리 살펴보는 재미도 크다. 1591년 사헌부(조선시대의 감찰 기관)에서 열린 ‘신참 신고식’을 그린 ‘총마계회도’는 비교적 수수해 지나치기 쉽지만 보물 지정 심사에 올라 있는 작품이다. 유지원 학예연구사는 “행사 날짜와 참석자, 소장자 등이 상세히 기록돼있어 가치가 높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이외 백자 항아리 중 손꼽는 크기(높이 61cm)의 18세기 ‘백자 대호’, 담청색과 세밀하게 음각된 파도가 아름다운 13세기 ‘청자 상감쌍룡국화문 반’도 보물 지정 심사를 밟고 있다. 전시는 7월 26일까지.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 2025-03-13
    • 좋아요
    • 코멘트
  • “한국 무용수, 재능-감성 풍부… 그들에게서 보석 발견 중”

    이스라엘 출신 세계적인 안무가 오하드 나하린(73·사진)이 18년 만에 내한해 서울시발레단 공연을 지휘한다. 나하린은 12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간담회를 갖고 “재능 있고 감성 풍부한 서울시발레단 무용수들에게서 보석을 발견하고 있다”며 “한국에 온 지 고작 이틀 됐는데 오래 있었던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가 안무를 맡은 작품 ‘데카당스’는 14∼23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된다. 나하린은 무용수의 감각을 극대화하는 훈련 방식 ‘가가(Gaga)’를 개발한 스타 안무가다. 세계적인 현대무용단 ‘바체바 무용단’을 약 30년간 이끌었으며,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과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 등에서 안무를 맡았다. 그의 일대기는 영화 ‘미스터 가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무브’로도 제작됐다. 나하린이 내한해 공연을 갖는 건 2007년 바체바 무용단의 ‘쓰리’ 이후 18년 만이다. 이번 공연은 1993년 초연된 ‘아나파자’부터 2023년 ‘아나파세’ 등 최신작을 아우른다. 그는 “무용단별로, 버전별로 항상 변화하는 작품”이라며 “서울시발레단과 잘 어울리도록 구성을 고민했다”고 했다. 이번 공연은 나하린 특유의 자유롭고도 강렬한 움직임에 이스라엘 전통음악부터 쿠바의 맘보까지 다채로운 음악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그는 “누구나 춤을 춰야 한다는 메시지가 읽히기를 바란다”며 “삶은 어려운 것투성이지만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예술적인 것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 2025-03-13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안무가 오하드 나하린 “누구나 춤춰야 한다는 메시지 읽히길 바라”

    “춤을 추면서 거울을 보는 건 무용계의 실수예요. 거울은 무용수가 세상을, 영혼을 보지 못하게 만들죠. 이번 서울시발레단의 연습 때도 거울은 전부 커튼으로 가렸습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고치기보다 움직임 자체를 느낄 수 있도록요.”서울시발레단이 14~23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하는 ‘데카당스’의 안무가 오하드 나하린(73)은 12일 극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하린은 무용수의 감각을 극대화하는 훈련 방식인 ‘가가(Gaga)’를 개발한 이스라엘 출신 스타 안무가다. 세계적 현대무용단인 ‘바체바 무용단’을 2018년까지 약 30년간 이끌었고,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 등의 안무를 맡았다. 그의 일대기는 영화 ‘미스터 가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무브’로 제작되기도 했다.나하린이 내한해 공연을 여는 건 2007년 바체바 무용단의 ‘쓰리’ 이후 18년 만이다. 이번에 서울시발레단과 호흡을 맞추는 작품은 그의 대표작들을 하나로 엮은 ‘데카당스’. 앞서 2002년 첫 내한 공연에서 선보인 ‘데카당스’와 표지는 같지만 속은 다르다. 지난번 공연이 1992~2002년 안무한 작품들로 이뤄졌던 것과 달리 이번 공연은 1993년 초연된 ‘아나파자(Anaphaza)’뿐 아니라 2023년 ‘아나파세(Anafase)’ 등 최신작을 아우른다. 그는 “무용단별로, 버전별로 매번 변화하는 작품”이라며 “서울시발레단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구성을 고민했다”고 했다.원래 7편의 대표작에서 발췌하려 했던 계획은 열흘 전 서울시발레단의 연습 영상을 본 뒤 8편으로 늘었다. 영상에 담긴 무용수 각각의 목소리와 아름다움, 강렬한 감정이 공연에 더 잘 묻어나면 좋겠다고 직감했기 때문이다. 추가된 작품은 히브리어로 ‘들판’을 뜻하는 ‘사데(Sadeh)21’로, 마치 한 장의 사진처럼 연출된 움직임이 특징이다. 공연에는 서울시무용단 소속 시즌 무용수 18명과 프로젝트 무용수 4명 등 총 22명이 출연한다.“통상 무용수들은 비슷한 것을 반복하다보니 새 아이디어를 시도하는 걸 어려워하게 돼요. 그래서는 관객에게 특별한 뉘앙스를 주기 어렵죠. 그런데 재능 있고 감성 풍부한 서울시발레단 무용수들에게서 보석을 발견했어요. 한국에 온 지 고작 이틀 됐는데 꽤 오래 있었던 느낌입니다.”공연에서는 나하린 특유의 자유롭고도 강렬한 움직임, 이스라엘 전통음악부터 쿠바의 맘보에 이르는 다채로운 음악을 오롯이 느껴볼 수 있다. 그는 “누구나 춤을 춰야 한다는 메시지가 읽히기를 바란다”며 “삶에는 어려운 것 투성이지만, 생존을 위해서가 아닌 그 자체로 예술적인 것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 2025-03-12
    • 좋아요
    • 코멘트
  • ‘장물’ 논란 법률서 ‘대명률’ 보물 지정 9년만에 취소

    2016년 보물 지정 당시 도둑맞은 장물임을 감춘 사실이 몇 달 뒤에 드러났던 조선 초기 서적 ‘대명률(大明律·사진)’이 결국 보물 지정이 취소된다. 국보나 보물이 된 문화재의 지정을 취소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11일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지난달 문화유산위원회 산하 동산문화유산 분과 회의에서 ‘대명률’의 보물 지정을 취소하기 위한 행정처분 취소 계획이 가결됐다. 문화유산위 측은 “(보물) 허위 지정 유도에 따른 형이 집행됐기 때문에 후속 조치를 취한 것”이라며 “법률 자문을 거쳐 결정했다”고 밝혔다. 국보 등으로 지정을 예고했다가 문제가 파악돼 보류한 경우는 있었지만, 지정 자체를 취소하는 건 처음이다. ‘대명률’은 중국 명나라의 형률(刑律)을 담은 서적으로, 조선 시대 형률과 조선 전기 서지학 연구에 중요한 사료다. 1389년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며, 인쇄 및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유일본이다. 대명률은 원래 문화 류씨 집안이 1878년 경북 경주에 세운 서당 ‘육신당’에 보관돼 왔으나, 1998년 무렵 건물 현판 및 다른 고서들과 함께 사라졌다고 신고됐다. 이후 경북의 한 사립박물관장이 ‘선친이 물려준 유물’이라며 보물 지정을 신청해 보물이 됐으나, 지정한 그해에 장물 업자로부터 구입한 사실이 들통났다. 해당 관장은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2021년 유죄 판결을 받고 실형을 살았다. 보물 지정 취소는 30일간 이의 제기가 없으면 다음 달 관보 게재를 통해 최종 완료된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 2025-03-1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19세기 8폭 병풍 벌레먹은 구멍만 1만개, 매일 12시간씩… 구멍 메우는데만 3개월

    조선 3대 누각 중 하나로 꼽히는 평양 부벽루(浮碧樓)에서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도과(道科·각 도 감사에게 명해 실시한 특수한 과거시험)에 급제한 두 유생을 위한 환영회다. 평안감사 오른편엔 관복으로 갈아입은 유생이 앉았고, 뜰에선 줄타기와 극놀이가 한창이다. 부채질하는 양반, 아이를 옆구리에 낀 여인 등 수백 명의 구경꾼이 잔치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이 10일 공개한 ‘평안감사도과급제자환영도’ 8폭 병풍(가로 5m, 세로 1.7m) 가운데 6번째 화폭의 내용이다. 19세기 초 제작으로 추정되는 이 병풍은 미국 매사추세츠주 피보디에식스박물관(PEM)이 1927년 일본 고미술 무역상으로부터 매입해 소장 중이다.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과 리움미술관이 1년 4개월에 걸쳐 보수했다. 보존 처리를 위해 2023년 11월 국내로 들여온 병풍엔 벌레 먹은 구멍이 약 1만 개에 이르렀다. 8폭은 낱장으로 분리된 채였고, 전반적으로 꺾임과 갈라짐 등 손상이 큰 상태였다. 남유미 리움미술관 보존연구실 수석연구원은 “충해가 보존 처리 경력 25년 가운데서도 손꼽을 정도로 심각했다. 연구원 셋이 매일 12시간씩 3개월간 매달려 구멍을 메웠다. 종이 제작 당시 색을 희게 만들려고 섞은 쌀가루가 원인”이라며 “귀한 쌀을 썼고, 그림 일부에 금칠을 했단 점에서 고위 관료의 주문작으로 추정한다”고 설명했다. 그림은 원래 ‘평안감사향연도’라고 불렸으나, 보수 과정에서 낱폭의 올바른 순서와 향연의 목적이 확인돼 더 정확한 이름을 얻게 됐다. 남 연구사는 “그림 속 행렬의 장소와 방향을 19세기 평양성도와 비교해 동선을 파악했고, 급제자가 입고 있는 복식의 변화와 횃불의 밝기 정도 등으로 선후를 유추했다”고 했다. 병풍은 다음 달 6일까지 리움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 2025-03-1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책의 향기]망망대해서 길어올린 삶의 이치

    고도가 높아질수록 기압은 낮아진다. 이 때문에 우주선은 인간이 지상에서 느끼는 대기압만큼의 변화만 견디도록 설계된다. 그러나 바다라면 얘기가 다르다. 수심 45m만 돼도 갈비뼈가 으스러질 만큼의 수압을 받는다. 아무리 최신 장비를 갖춘다고 해도 심해는 접근조차 쉽지 않다. 우주여행을 기대하는 시대지만, 더 큰 미지의 영역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 이처럼 “우주보다 먼 세상”에 직접 배를 타고 나가 파도, 해수, 해양 생명체 등을 관찰하는 해양물리학자가 펴낸 책이다.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인 저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의 97% 이상을 차지하는 망망대해를 떠다니면서 “감옥에 수감된 것과 다름없는” 생활을 한다. 매일 범람하는 정보로부터 숨돌릴 수 있는 공간이자 인류가 쌓아 올린 문명이 무력해지는 곳에서 겪은 파란만장한 에피소드와 삶의 이치를 담았다. 수평선에 걸린 휘황한 노을 등 저자가 선상에서 직접 찍은 아름다운 사진들은 덤이다. 넓고 깊은 바다에서 길어 올린 삶의 이치는 마음을 고요히 잠재운다. 먼 곳에 거센 소나기를 예고하는 비구름이 몰려 있던 어느 날, 배의 선장이 갑판 바비큐 파티를 제안한다. 이에 저자가 비구름을 가리키자 돌아온 답은 “비는 그냥 피해 가면 될 뿐”. 저자는 “정해진 길만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때로는 나쁜 일을 요령껏 피해 갈 수도 있다는 것. 다시 땅으로 올라온 후에도 나는 이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흔히 “아름다운 수평선과 싱싱한 해산물로 기억될 뿐”인 바다가 인류 생존과 직결된 문제임을 부드럽게 타이른다. 기후위기의 주된 요인으로 꼽히는 탄소를 예로 들면, 매년 16억 t 이상의 대기 중 탄소가 심해에 흡수돼 우리를 탄소로부터 보호해주고 있다. 그러나 수온이 상승하면서 그 저장 능력은 떨어지고 있다.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는 심해를 지키고 연구하는 데 소홀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 2025-03-0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길이 14m ‘부여 무량사 미륵불 괘불도’ 국보 승격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형 불화 중 하나인 ‘충남 부여 무량사 미륵불 괘불도’(사진)가 국보가 된다. 사찰의 야외 의식에 쓰이는 괘불도(掛佛圖)의 국보 지정은 1997년 이후 28년 만이며, 무량사 괘불도의 승격도 같은 해 보물이 된 뒤 28년 만이다. 국가유산청은 6일 “조선 후기 제작된 ‘충남 부여 무량사 미륵불 괘불도’를 국보로 승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괘불도는 길이가 약 14m에 이르는 대형 화폭에 장엄신(莊嚴身·화려한 보관을 쓰고 신체를 아름답게 꾸민 부처) 미륵불을 중심에 담고 있다. 속눈썹과 콧수염 등이 세밀하게 묘사되고, 보관 끝에 불상 6구와 동자, 동녀 얼굴 59구가 그려졌다. 유산청은 무량사 괘불도에 대해 “조선 인조 5년(1627년) 제작 연도가 명확하고, 이전에 국보가 된 괘불도들보다 연대가 앞선다”며 “초대형 작품이지만 자세와 비례가 균형 잡혔고, 강렬한 색채 대비 등이 빼어나다”고 설명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 2025-03-07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길이 14m ‘부여 무량사 미륵불 괘불도’ 국보 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형 불화 중 하나인 ‘부여 무량사 미륵불 괘불도’가 국보가 된다. 사찰의 야외 의식에 쓰이는 괘불도(掛佛圖)가 국보에 오르는 건 1997년 이후 28년 만이며, 부여 무량사 미륵불 괘불도가 국보가 되는 것 역시 1997년 보물 지정 뒤 28년 만이다.국가유산청은 6일 “조선 후기 제작된 ‘충남 부여 무량사 미륵불 괘불도’를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괘불도는 길이가 약 14m에 이르는 대형 화폭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신체를 아름답게 꾸민 장엄신(莊嚴身) 미륵불을 중심에 담고 있다. 네모난 얼굴에 속눈썹, 도톰한 입술, 콧수염까지 세밀하게 묘사돼있으며, 보관 끝에는 불상 6구와 동자, 동녀의 얼굴 59구가 빽빽히 그려졌다.17~20세기 주로 제작된 괘불도는 압도적 규모와 다양한 도상 덕에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문화유산으로 평가 받는다. 현재 ‘칠장사 오불회 괘불’을 비롯한 국보 7점과 보물 55점 등 전국적으로 120여 건이 전해지고 있다.유산청은 무량사 괘불도의 국보 지정 배경에 대해 “조선 인조 5년(1627년) 제작된 것으로, 기존 국보로 지정된 다른 괘불도보다도 연대가 앞선다”며 “초대형 작품이지만 자세와 비례가 균형 잡혔고, 강렬한 색채 대비 등이 빼어나다”고 설명했다.고려 중기의 문인인 이규보(1168~1241)의 글을 모은 문집인 ‘동국이상국전집(東國李相國全集)’ 중 권18∼22, 31∼41 등 일부도 보물로 지정 예고됐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 중인 이 문집은 전집 41책 가운데 16권 4책만 남아있으나, 현존하는 자료 중 가장 오래되고 희귀한 판본이며 인쇄 상태도 우수한 것으로 평가된다. 유산청은 “불교 문헌이 주를 이룬 고려시대에 제작된 개인 문집이란 점에서 희소성 있다”고 했다.‘부여 무량사 미륵불 괘불도’와 ‘동국이상국전집’은 예고 기간 30일 동안 각계 의견을 검토한 뒤, 문화유산위원회 심의를 거쳐 지정이 완료된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 2025-03-06
    • 좋아요
    • 코멘트
  • CT로 유물 속내 들여다보니… 진가 드러낸 ‘장인의 세계’

    비색이 아름다운 참외 모양 고려청자 두 점이 있다. 그중 하나가 몸통에 꽃이 그려진 것을 제외하면 두 청자는 크기도, 세로로 난 골도, 벌어진 입구도 비슷하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된 ‘청자 참외 모양 병’과 ‘청자 상감 모란·국화무늬 참외 모양 병’이다. 그런데 고려 인종의 장릉(長陵)에서 출토된 청자 참외 모양 병이 더 단정하고 온화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발간한 보고서 ‘컴퓨터단층(CT) 촬영을 이용한 문화유산의 해석과 이해’에 따르면 그 차이는 “제작 수준의 차이”에서 출발한다. CT 촬영 장비로 청자 참외 모양 병의 기공 분포와 단면 두께 등을 분석한 결과, 일체형으로 제작된 청자 상감 모란·국화무늬 참외 모양 병과 달리 목 부분을 따로 만들어 붙인 사실이 드러났다. 양석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 학예연구사는 “일체형보다 만들기 까다로운 대신 하중을 덜 받아 병의 어깨 곡선이 훨씬 자연스럽다”며 “내부 단면까지 꽃 모양인 것은 오늘날 도예가도 따라 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최근 문화재계에선 CT 기술로 유물을 조사하는 수준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촬영 이미지를 분석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발전한 덕분이다. 1, 2년 전부터는 유물의 기공 분포와 단면도, 실사용 용량 등까지 분석할 수 있게 됐다. 이번 보고서에는 중앙박물관 소장품 13점을 최신 CT 기술로 내부 구조나 제작 기술 등을 분석한 내용이 담겼다. 조선 ‘청화 백자 진사 투각 학모양 사각연적’에는 ‘卍’자로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그런데도 물을 담으면 새지 않는다. 내부에 숨은 이중 구조 때문이다. CT로 분석한 결과, 연적 안에 최대 0.06L의 액체를 담을 수 있는 집 모양 내기(內器)가 있다. 지붕으로 들어간 액체가 집 아래쪽에 연결된 수도를 따라 기둥으로 흘러 나오는 놀라운 구조다. 중앙박물관이 소장한 ‘건칠관음보살좌상’은 높이가 50.6cm로 현존하는 국내 불상 가운데 가장 작다. 이 불상 역시 CT로 촬영했더니 제작 기법의 정교함이 드러났다. 칠포(漆布·옻칠을 한 헝겊)층이 최대 9겹에 이르지만, 총 두께는 2∼5mm에 불과했다. 곽홍인 학예연구관은 “이런 제작 방식에 대한 데이터가 쌓이면 육안에 의존하는 것보다 훨씬 객관적으로 모조품과 구별할 수 있다”고 했다. 중악박물관은 10월 ‘원통형 CT 장비’도 추가 도입할 예정이다. 기존 장비보다 가로세로 길이가 2배가량 길어 목관 등 긴 네모꼴 대형 유물도 촬영할 수 있다. 목재 문화유산의 나이테 분석도 가능하다. 박학수 학예연구관은 “문헌상 조성 시기가 이미 알려진 목재 유물을 기준점으로 절대 연대기를 작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 2025-03-03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유물의 기공 분포와 실사용 용량 등까지 분석…박물관 CT의 세계

    비색이 아름다운 참외 모양 고려청자 두 점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몸통에 꽃이 그려진 것을 제외하면 두 청자는 크기도, 세로로 난 골도, 벌어진 입구도 비슷하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된 ‘청자 참외 모양 병’과 ‘청자 상감 모란·국화무늬 참외모양 병’이다. 그런데 고려 인종의 장릉(長陵)에서 출토된 청자 참외 모양 병이 더 단정하고 온화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발간한 보고서 ‘컴퓨터 단층촬영(CT)을 이용한 문화유산의 해석과 이해’에 따르면 그 차이는 “제작 수준의 차이”에서 출발한다. CT 장비로 청자 참외 모양 병의 기공 분포와 단면 두께 등을 분석한 결과, 일체형으로 제작된 청자 상감 모란 국화무늬 참외모양 병과 달리 목 부분을 따로 만들어 붙인 사실이 드러났다. 양석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 학예연구사는 “일체형보다 만들기 까다로운 대신 하중을 덜 받아 병의 어깨 곡선이 훨씬 자연스럽다”며 “내부 단면까지 꽃 모양인 것은 오늘날 도예가도 따라 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최근 문화재 계에선 CT 기술로 유물을 조사하는 수준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촬영 이미지를 분석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발전한 덕분이다. 1, 2년 전부터는 유물의 기공 분포와 단면도, 실사용 용량 등까지 분석할 수 있게 됐다. 이번 보고서에는 중앙박물관 소장품 13점을 최신 CT 기술로 내부 구조나 제작 기술 등을 분석한 내용이 담겼다.조선 ‘청화 백자 진사 투각 학모양 사각연적’에는 ‘卍’자로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그런데도 물을 담으면 새지 않는다. 내부에 숨은 이중 구조 때문이다. CT로 분석한 결과, 연적 안에 최대 0.06L의 액체를 담을 수 있는 집 모양 내기(內器)가 있다. 지붕으로 들어간 액체가 집 아래쪽 연결된 수도를 따라 기둥으로 흘러 나오는 놀라운 구조다.중앙박물관이 소장한 ‘건칠관음보살좌상’은 높이가 높이 50.6cm로 현존하는 국내 불상 가운데 가장 작다. 이 불상 역시 CT로 촬영했더니 제작 기법의 정교함이 드러났다. 칠포(漆布·옻칠을 한 헝겊)층이 최대 9겹에 이르지만, 총 두께는 2~5mm에 불과했다. 곽홍인 학예연구관은 “이런 제작 방식에 대한 데이터가 쌓이면 육안에 의존하는 것보다 훨씬 객관적으로 모조품과 구별할 수 있다”며 “파편만 남은 도자기, 유리 유물은 기공을 분석해 소성(燒成) 온도 등 제작 방식도 유추할 수 있다”고 했다.중악박물관은 10월 ‘원통형 CT 장비’도 추가 도입할 예정이다. 기존 장비보다 가로·세로 길이가 2배가량 길어 목관 등 긴네모꼴 대형 유물도 촬영할 수 있다. 목재 문화유산의 나이테 분석도 가능하다. 박학수 학예연구관은 “문헌상 조성 시기가 이미 알려진 목재 유물을 기준점으로 절대 연대기를 작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 2025-03-02
    • 좋아요
    • 코멘트
  • [책의 향기]당신의 몸은 생각보다 유능하다

    피아노를 연주하다 보면 의지대로 안 되는 손동작들이 있다. 일상에서 잘 쓰지 않는 손 모양일 때 더욱 그렇다. 그런데 손가락을 자동으로 움직여주는 보조 장치를 사용한 뒤 다시 연주해보는 실험을 하자 이전보다 손가락을 빠르고 복잡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한다. 보조장치 도움으로 터득한 몸의 감각이 새롭게 손 쓰는 방법을 익히게 해줬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지금까지 탐색하지 않았던 몸의 가능성을 개발함으로써 ‘가짜 한계’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랫동안 장애와 몸의 고유성에 대해 연구해온 일본 도쿄공업대 미래인류연구센터장이 첨단 기술 전문가 다섯 명과 함께 우리 몸의 숨겨진 능력과 가능성에 대해 연구하고 취재한 내용을 담았다. 손가락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제어하는 기술을 발명한 레키모토 준이치, 세계적인 컴퓨터과학 연구 기관인 소니 컴퓨터사이언스 연구소의 후루야 신이치 등이 참여했다. 특히 ‘생각이 몸을 통제한다’는 통념을 부수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일본 프로야구 팀에서 21년간 투수로 활동했던 구와타 마스미에게 “똑같은 자세로 볼을 30회 던져달라”고 요청한 실험이 대표적이다. 에이스 투수 출신답게 결과는 안정적이었으나, 의식적으로 동일한 자세를 취하려 했던 노력은 헛수고였다. 공을 놓는 지점은 점점 앞으로 갔고 높이도 낮아졌다. 책에 따르면 이는 ‘똑같은 자세로 던지겠다’는 생각의 결과라기보다는 “오차를 포함한 정답에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자 “몸이 의식에 앞서 어떤 일을 해낸 것”이었다. 인공지능(AI)에 관한 마지막 장은 ‘할 수 있다’의 의미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영어가 서투른 사람이 실시간 AI 자동 번역에 자신의 목소리까지 덧씌울 수 있다면 과연 이 사람은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인가, 여전히 못하는 사람인가.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는 보통 ‘할 수 있다=뛰어나다’, ‘할 수 없다=열등하다’라는 능력주의적 척도가 갈려 있다. 그러나 능력이 확장된 ‘몸’의 관점에서 보면 할 수 있음에 대한 정의부터 달라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 2025-03-0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3면 영상 따라 거니는 창덕궁 후원의 사계절

    빼어난 경치로 유명한 창덕궁 후원이 도심 한복판에서 펼쳐졌다. 24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개막한 실감형 미디어아트 전시 ‘미음완보(微吟緩步), 전통정원을 거닐다’는 16m 길이의 ‘ㄷ’자 벽면에 영상을 투사해 꽃잎 흩날리는 봄에서 눈 덮인 겨울 연못에 이르는 후원의 사계절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국가유산청이 4월 27일까지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전통 조경의 아름다움을 알리고자 기획됐다. ‘나직이 읊조리며 천천히 걷는다’라는 뜻의 전시 제목처럼 정원과 교감하려 했던 조상들의 시선을 담았다.전시에선 전남 담양 소쇄원, 충남 논산 명재고택 등 유명 전통 정원이 미디어아트로 펼쳐진다. 그룹 이날치 출신 음악감독 장영규가 만든 음악, 전문조향사가 맞춤 제작한 꽃향기를 더해 몰입도를 높였다. 지리산 불일폭포를 형상화한 미디어 폭포는 가로 12.7m 벽면에서 약 6m 높이로 쏟아지며, 레이저 센서로 관람객 위치를 인식해 물길이 갈라지게끔 연출됐다. 전시에는 국가유산청이 2021년부터 축적한 전통조경 3차원 실측 데이터가 활용됐다. 김동현 명승전통조경과 주무관은 “모니터링할 때 쓰이던 데이터를 활용해 정원의 아름다움을 재현했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지난해 12월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에서 열흘간 선보인 전시의 앙코르전으로, 올 8∼9월 영국 런던 주영한국문화원에서도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 2025-02-2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국보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해체 후 보수…이르면 내달 착수

    600년 역사의 국보 전남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이 이르면 다음 달부터 대대적인 해체·보수 공사에 들어간다.국가유산청은 24일 “극락보전의 손상이 우려돼 전체를 해체해 보수한다”며 “극락보전을 대대적으로 손보는 것은 1983년 이후 40여 년 만”이라고 밝혔다.1962년 국보로 지정된 극락보전은 조선 세종 때인 1430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무위사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됐다. 직선 위주의 목재로 아름답고 짜임새 있게 설계돼 조선 초기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평가받는다. 다만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수리·보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꾸준히 나왔다. 국가유산수리기술위원회는 지난해 10월 회의를 열고 무위사 극락보전에 대한 해체·보수 안건을 심의해 조건부 가결했다. 자문에 참여한 한 전문가는 “구조적 변위, 각 부재의 성능 저하, 기단 침하 등으로 건물이 전반적으로 변형된 상태”라고 봤다.건물 내 불상 뒤편에 있는 국보 ‘강진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는 해체 후 옮겨 보존 처리하게 된다. 이 벽화는 조선 초기 불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유산청 관계자는 “공동 기술지도단을 구성해 보수를 추진한다. 마무리까지 5~7년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 2025-02-24
    • 좋아요
    • 코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