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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 전력을 가진 가상의 한국형 핵잠수함과 그 기술을 빼내려는 거대 국제테러집단, 이를 막으려는 과학자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부제는 ‘바다를 삼킨 한국형 핵잠수함’. 지명도가 높지 않던 한 조선소가 천재 과학자를 영입한 후 핵잠수함 ‘얼티밋 워리어호’를 만들어 선보인다. 워리어호는 2026년 림팩(RIMPAC·환태평양연합군사훈련)에서 성능을 과시한 뒤 한국 무역선을 괴롭히는 악명 높은 해적단을 격파하고, 추락한 민항기 잔해를 심해에서 찾아내면서 전 세계 무기상의 관심을 끌게 된다. 이어 워리어호의 핵심 기술을 탈취하려는 세력이 과학자를 쫓기 시작하고, 해킹 등으로도 뜻을 이루지 못하자 적대적 인수합병(M&A)을 시도한다. 저자의 이름 ‘찰리’는 필명이고, 하이파이브는 소설의 발간에 도움을 준 독서클럽의 이름이다. 저자는 옛 소련 해체 뒤 러시아가 금방 강대국에 복귀할 수 있었던 배경 가운데 하나로 ‘샤프 파워(sharp power·회유나 협박, 교묘한 여론 조작 등을 통해 비밀스럽게 행사하는 영향력)’를 꼽은 책을 읽고 이 소설의 출간을 결심했다고 한다. 과연 한국이 샤프 파워로 무장한 세력의 공격을 막아낼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는 것.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우리는 국익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 힘의 요체는 하이테크 기술력과 사프 파워를 포함하는 강력한 자위력”이라고 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일을 꼽으라면 멍하니 흘러가는 구름을 쳐다보는 걸 빼놓기 어렵다. 책은 쓸데없는 일을 사랑하는 구름 ‘덕후’가 쓴, 구름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하층운, 중층운, 상층운 등 구름의 분류에 따라 정리된 목차만 보면 과학적인 내용만 담겨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구름이 어떻게 생기고 자라나서 비를 내리는지와 구름의 종류별 특징뿐 아니라 구름과 관련된 세계 각지의 고전과 신화, 예술을 망라한다. 적운(뭉게구름)치고는 큰 편이 아닌 1㎦ 부피의 구름에는 2.5t 코끼리 80마리 정도 무게의 물방울이 담겨 있다고 한다. 비구름이 싫어도 구름이 바닷물을 담수화하지 않으면 우리가 마실 수 있는 물이 사라진다는 것 정도는 알아둬야 한다. 호주 퀸즐랜드 북부 버크타운 일대에서는 길이가 1000km나 되는 두루마리 형태의 장엄한 층적운이 생긴다. ‘모닝 글로리’라는 이름이 붙은 이 구름을 보기 위해 봄이면 수천 km 밖에서 활공기 조종사들이 모여든다고 한다. ‘무해한 덕질의 끝판왕’ 같은 이 책에는 구름과 관련된 온갖 얘기가 나온다. 적란운을 만나 1만4300m 고도에서 비상 탈출한 뒤 난류 속을 40분 동안 떠다닌 전투기 조종사, 베트남전쟁 당시 적의 이동을 힘들게 하려고 미군이 비밀리에 실시한 인공 강우 등이다. “구름계의 다스베이더, 적란운” 등 익살스러운 표현이 책장이 술술 넘어가게 만든다. 영국에 사는 저자는 그래픽디자인을 공부했고, 대학 기상학과 방문연구원을 지냈으며, 왕립기상학회로부터 상을 받았다. 영국에서는 뜬구름 잡는 이 책을 기다리던 사람이 많았나 보다. 출판사 27곳이 이 책의 출판을 거절했지만 막상 출간되자 20만 부 넘게 팔렸다. 저자가 2005년 만든 ‘구름감상협회’는 120개국에 5만여 명의 회원이 있다고 한다. 협회 선언문은 촉구한다. “우리는 ‘파란하늘주의’를 만날 때마다 맞서 싸울 것을 맹세한다.…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라. 그 덧없는 아름다움에 경탄하라. 그리고 구름 위에 머리를 두고 사는 듯, 공상을 즐기며 인생을 살라.”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폭설로 길이 끊어진 산사에서 홀로 굶어 죽은 다섯 살 아이를 관음보살이 데려갔다고 믿는 것은 슬픔을 어찌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흉년 때 자취를 감춘 동네 사람이 원래 살던 하늘나라로 돌아갔다고 믿는 건 죄책감을 어찌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전쟁에 끌려나가 희생된 자식이 큰 구렁이가 돼 집에 돌아왔다고 믿는 건 그리움을 어찌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전설과 민담이 애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전통 시대 공동체는 상상의 이야기를 빌려 비극을 애도하며 끊긴 길을 이었다. 현대에서 이 같은 기능을 맡는 것은 아마 영화나 소설 같은 문화 콘텐츠일 것이다. 최근 국내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애니메이션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영화는 초자연적 힘에 의해 벌어지는 재난을 막으려 애쓰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신화적으로 그렸다. 전작들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진 외로움과 그리움을 그려왔던 감독은 이번에는 이격의 거리를 이승과 저승으로까지 벌렸다. ‘사람의 마음의 무게가 사라져서 재난이 생기는 곳’을 찾아 단속하는 이야기를 통해 영화는 그저 여느 날과 같이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문을 나선 뒤 불의의 재난 탓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던 이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다. 그리고 손도 쓰지 못하고 가족과 지인, 공동체의 구성원을 잃었다는 괴로움에 시달렸을 관객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남녀 주인공의 감정선이 다소 뜬금없긴 하지만 감독 특유의 아름다운 작화와 줄거리가 호평을 얻으며 일본에서 관객이 1000만 명 넘게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개봉 6일 만인 13일 관객이 100만 명을 넘어섰다. 반면 한국의 대중문화 콘텐츠는 공동체의 애도와 치유 기능을 거의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지진이 잦은 일본만큼은 아니어도 우리 역시 비극적 대형 사고가 잦았다. 그러나 이를 소재로 한 대중문화 콘텐츠는 드물다.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개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어쩌면 실제 일어난 비극적 사고를 대중문화 콘텐츠로 다뤄서는 안 된다는 금기 같은 것이 작동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같은 금기는 일상 속에도 암암리에 있다. 웬만큼 친한 사람이 아니면 참사를 화제로 꺼내지 않고, 어쩌다 얘기가 나와도 피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초면인 사람과 정치 얘기를 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나의 애도를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는 탓이다. 참사에서 정치 사회적 맥락을 제거하려는 것은 잘못이지만 순수한 애도의 표현마저 일상에서 꺼릴 정도로 지나치게 정치화되는 것 역시 한국 사회의 고질이라고 본다. 적절히 애도되지 못한 슬픔은 어디선가 곪기 마련이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치는 않다. 공동체가 끊어진 길을 잇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상상의 이야기를 통해서라도 아픔을 승화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다녀 왔습니다.’ 비극을 겪은 이들이 너무나도 듣고 싶었을 이 한마디를 대신해주는 영화를 보고 싶다. 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

미국 킹스턴에 사는 니컬러스는 어린 시절 방치와 학대를 겪었다. 열한 살 무렵 갑자기 몸 전체가 완전히 분리되는 느낌을 받았고, 열두 살에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고 갑자기 “꿈속을 헤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후 수년 동안 주변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과 몸까지 모든 것을 비현실적으로 느끼는 날들이 이어졌다. 스스로를 낯설게 느끼는 이인증(離人症)이 발병한 것. 니컬러스는 늘 불안에 사로잡혔고, 깨어 있는 동안에는 두려움에 혼자 있지도 못했다. 주먹을 쥐었다 펴는 작은 일마저도 자신이 행동하는 게 아니라고 느꼈다. 신경정신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인증 환자들은 실제로 불쾌한 자극에 대한 자율 반응을 측정했을 때 마치 ‘스위치가 꺼진 것처럼’ 나타난다고 한다. 이는 ‘자아’를 만드는 데 신체적 감각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과학기술 주간지 뉴사이언티스트의 부편집장 출신 과학저널리스트가 자아 인지에 문제가 생기는 질병과 정신적 장애들을 일별하며 ‘자아란 무엇인가’를 탐구한 책이다. ‘코타르 증후군’은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망상이다. 환자들은 엄연히 존재하는 신체 일부가 사라졌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의사가 “(나와 대화를 나누는) 당신의 정신은 분명히 살아 있다”고 설득하면 “내 정신은 살아 있지만 뇌는 죽었다”고 답하는 환자도 있다. 심하면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저자가 만난 프랑스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말한다. “이미 죽었는데(죽었다고 생각하는데) 더 이상 어떻게 죽겠어요.” 신체통합정체성장애(BIID)는 팔다리 등 자신의 몸 일부가 자기 것이 아니라고 느끼는 장애다. 자기 몸이 아니라고 느끼는 부위를 절단하는 끔찍한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 장애는 뇌가 발달하는 도중 팔다리 등이 뇌에 적절하게 인지되지 않아 생기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고로 절단된 신체 부위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뇌가 오해하는 환각지(幻覺肢)와는 반대인 셈이다. 저자는 철학자 토마스 메칭거의 글을 인용해 “내 몸과 감각들, 그리고 다양한 부위를 갖는다는 것은 누군가가 된다는 느낌의 핵심”이라고 했다. 책은 이 밖에도 ‘서사적 자아’를 망가뜨리는 알츠하이머병, 자아를 조각조각 해체해 버리는 조현병, 또 하나의 몸이 있다는 느낌과 관련된 환각 ‘도플갱어 효과’, 무아지경을 겪는다는 ‘황홀경 간질(ecstatic epilepsy)’ 등을 차례로 조명하면서 ‘나’를 찾아 나간다. 저자는 “자아는 놀라우리만치 탄탄하면서도 무서울 정도로 연약하다”고 했다. 소개되는 신경심리학적 질병이 흥미롭지만 질병과 자아의 실체 및 유무에 대한 시사점을 연결하려는 저자의 시도가 매번 성공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생생한 여러 사례를 바탕으로 철학과 뇌과학을 오가는 스토리텔링 솜씨가 대단하다. 오늘날에도 여전한 난제인 ‘자아’의 실체에 대한 질문으로 독자를 이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해전을 다룬 영상 콘텐츠에서, 대포에서 발사된 포탄이 적선으로 날아간 뒤 다시 폭발하는 장면은 사실은 거짓이다. 당시 포탄은 대장군전(大將軍箭·나무와 철로 만든 천자총통용 화살)을 비롯한 고체탄이었다. 탄의 운동에너지로 적선을 파괴했던 것. 서양에서도 고체탄은 성벽을 부수는 공성전과 목선을 격파하는 해상전에서 필수로 쓰였다. 14세기 공성포(攻城砲)의 등장 당시부터 ‘날아간 뒤 폭발하는’ 포탄의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이 같은 폭발탄이 서양에서 널리 보급된 것은 19세기 초가 되어서다. 화약을 넣은 포탄이 대포 안에서 찌그러지거나 폭발하는 위험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발사된 뒤 목표물 위에서 내부의 화약이 폭발하면 작은 철탄들이 적에게 퍼부어지도록 설계된 폭발탄이 나중에 발명돼 전장(戰場)에서 빠르게 채택됐다. 이 폭발탄은 발명자인 영국군 중위의 이름을 따 ‘슈라프넬’로 불렸다. 전쟁사 전문가인 미국 라이트주립대 역사학과 교수가 공성포의 등장부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함과 항공기의 활약까지 화기(火器)의 역사를 다뤘다. 14세기 들어 나타난 휴대용 화기는 ‘손 대포(hand cannon)’로 불렸다. 크기만 줄었을 뿐 작동 방식은 대포와 같았다. 발사 자세가 어색하고 총열이 무거워 널리 보급되지는 않았다. 서구 역사상 최초로 제식화된 보병 화기는 15세기 등장한 아쿼버스와 머스킷 총이다. 이 총들은 총가(銃架·총 받침대)가 정교해졌고, 개머리판이 등장해 조준이 비교적 정확해졌으며, 화승(火繩)을 사용해 점화와 동시에 목표물을 겨냥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총기와 비교하면 살상력과 정확도가 턱없이 떨어지지만 밀집 대형과 근거리 전투가 기본이던 당시에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 같은 총기를 운용하기 위해 군대는 상당한 수준의 조직과 협력, 전문성을 발전시켰다. 화약이 서양 최초의 현대식 육군을 창조한 셈이다. 충실한 내용이 밀리터리 마니아들의 눈길을 끌 만하다. 저자는 “전쟁이 오늘날의 국가를 만들었다면, 오늘날의 전쟁을 만든 것은 화기였다”고 강조했다. 원제 ‘FIREPOWER: How Weapons Shaped Warfare’.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해가 진다. 우린 평화를 원한다. 예전에 가졌던 꿈이나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뭐였는지 우리는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예전에 했던 말다툼이나 골머리를 썩이던 문제들도 기억나지 않는다. 과거에 품었던 그런 고민은 더는 중요하지 않다. 전쟁 중엔 단 하나의 목표만이 남는다. 살아남는 것. 힘들고 어려웠던 모든 일이 사소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숨이 걱정되고, 일상은 ‘쾅’ 하는 소리에 망가진다.” 사고가 성숙해 보이는 이 글은 12세 우크라이나 소녀가 일기장에 쓴 것이다. 전쟁은 어린이를 빨리 어른으로 만든다. 책은 러시아 국경과 가까운 우크라이나 제2도시 하르키우에서 할머니와 살다가 전란을 피해 탈출한 소녀가 쓴 약 두 달간의 일기를 담고 있다. 지난해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은 생일 파티와 볼링 게임에 활짝 웃던, 하르키우의 아름다운 공원과 북동쪽 외곽 멋진 동네에 있는 자신의 집을 사랑하던 평범한 소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 뛰어다니며 노는 것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함께 하교한 뒤 숙제를 하고 목욕을 하고 TV를 보고 편안한 잠에 빠지던 소녀는 어느 날 새벽 ‘쨍쨍’ 울리는 금속음에 잠이 깬다. 러시아의 폭격이었다. 급히 지하실로 대피하던 소녀는 두려움에 공황발작을 겪는다. 할머니가 꼭 안아주지만 공포는 가시지 않는다. 이튿날 할머니와 소녀는 정든 집을 떠나 피란을 시작한다.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학교 코앞에서 탱크가 포탄을 쏴대고, 이웃 동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마음을 움켜쥔 공포를 억지로 숨긴 채, 나와 거리가 먼 곳에 로켓이 떨어지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신에게 평화를 달라고 요구하며 하루 종일 기도한다. 삶의 매분, 매초에 절실하게 매달린다.” 그래도 소녀는 소녀다. 서쪽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하르키우 출신 동갑내기 친구 리라를 만난 저자는 반나절 동안 즐겁게 떠들며 지낸다. “리라는 창밖의 갈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얘기해서 날 웃게 했다. 어떤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다음에 뭘 해야 할지를 걱정하지만, 그저 갈대에 감탄하는 사람들도 있는 거다. 하하!” 소녀는 피란길에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담담히 적어 나간다. 소녀의 깨달음은 명확하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니 당장 한 시간 안에, 아니 심지어 1분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전쟁이 어떤 건지 모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다. … 전쟁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으니까.” 다행히도 무사히 탈출한 저자는 헝가리를 거쳐 할머니와 함께 아일랜드 더블린에 머물고 있지만 고향에서 벌어진 일을 뉴스로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진다. ‘아몬드’를 쓴 손원평 소설가가 번역했다. 손 씨는 ‘옮긴이의 말’에서 “전쟁이 어떤 것인지 몰라야 하는 연약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아이들)을 위해, 역설적으로 우리는 전쟁이 어떤 것인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해가 진다. 우린 평화를 원한다. 예전에 가졌던 꿈이나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뭐였는지 우리는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예전에 했던 말다툼이나 골머리를 썩던 문제들도 기억나지 않는다. 과거에 품었던 그런 고민은 더는 중요하지 않다. 전쟁 중엔 단 하나의 목표만이 남는다. 살아남는 것. 힘들고 어려웠던 모든 일이 사소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숨이 걱정되고, 일상은 ‘쾅’ 하는 소리에 망가진다.” 사고가 성숙해 보이는 이 글은 12세 우크라이나 소녀가 일기장에 쓴 것이다. 전쟁은 어린이를 빨리 어른으로 만든다. 책은 러시아 국경과 가까운 우크라이나 제2도시 하르키우에서 할머니와 살다가 전란을 피해 탈출한 소녀가 쓴 약 두 달간의 일기를 담고 있다. 지난해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은 생일 파티와 볼링 게임에 활짝 웃던, 하르키우의 아름다운 공원과 북동쪽 외곽 멋진 동네에 있는 자신의 집을 사랑하던 평범한 소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 뛰어다니며 노는 것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함께 하교한 뒤 숙제를 하고 목욕을 하고 TV를 보고 편안한 잠에 빠지던 소녀는 어느 날 새벽 ‘쨍쨍’ 울리는 금속음에 잠이 깬다. 러시아의 폭격이었다. 급히 지하실로 대피하던 소녀는 두려움에 공황발작을 겪는다. 할머니가 꼭 안아주지만 공포는 가시지 않는다. 이튿날 할머니와 소녀는 정든 집을 떠나 피란을 시작한다.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학교 코앞에서 탱크가 포탄을 쏴대고, 이웃 동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마음을 움켜쥔 공포를 억지로 숨긴 채, 나와 거리가 먼 곳에 로켓이 떨어지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신에게 평화를 달라고 요구하며 하루 종일 기도한다. 삶의 매분, 매초에 절실하게 매달린다.” 그래도 소녀는 소녀다. 서쪽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하르키우 출신 동갑내기 친구 리라를 만난 저자는 반나절 동안 즐겁게 떠들며 지낸다. “리라는 창밖의 갈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얘기해서 날 웃게 했다. 어떤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다음에 뭘 해야 할지를 걱정하지만, 그저 갈대에 감탄하는 사람들도 있는 거다. 하하!” 소녀는 피란길에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담담히 적어 나간다. 소녀의 깨달음은 명확하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니 당장 한 시간 안에, 아니 심지어 1분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전쟁이 어떤 건지 모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다.…전쟁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으니까.” 다행히도 무사히 탈출한 저자는 헝가리를 거쳐 할머니와 함께 아일랜드 더블린에 머물고 있지만 고향에서 벌어진 일을 뉴스로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진다. “매일 밤 자기 전에 나는 우크라이나와 하르키우의 뉴스를 찾아본다. 미사일과 로켓은 우리를 절망에 빠지게 한다. 나의 가족들은 지하 대피소에 숨어 있다. 그 생각은 나를 끔찍하고 두렵게 한다.”‘아몬드’를 쓴 손원평 소설가가 번역했다. 손 씨는 ‘옮긴이의 말’에서 “전쟁이 어떤 것인지 몰라야 하는 연약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아이들)을 위해, 역설적으로 우리는 전쟁이 어떤 것인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했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

주말 저녁 40대 중반쯤 돼 보이는 아재들이 각자 아이의 손을 잡고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상영되는 극장에 앉아 있네. 30년 전 당신은 영화 속 송태섭 같았을까. 포기를 모르는 ‘불꽃 남자 정대만’이 되고 싶었을까. 포털사이트에 실린 리뷰가 눈길을 끄네. ‘너희들은 안 늙었구나’. 맞아, 당신은 늙었네. 군데군데 흰머리도 나기 시작했네. 만화 슬램덩크 1권이 발매된 1992년에 중학교 1, 2학년이었다면 마지막 권이 나온 1996년에는 고등학교 2, 3학년이었을 것이네. 청소년기를 통째로 슬램덩크와 함께했겠네. 당신은 해마다 80만 명이 태어나던 시절 세상에 나왔네. ‘국민학교’ 수업은 오전반·오후반으로 나눠서 하고, 조회 시간 운동장에 우르르 나가다가 누가 크게 다쳐도 잘 모르던 시절이었네. 연탄불에 가래떡 구워 먹던 추억을 가진 마지막 세대이기도 하고, 어렸을 적 배를 곯았던 부모님 슬하에서 ‘제 힘으로 벌어 먹고사는 것이 제일’이라고 배운 세대이기도 하네. ‘쌍싸대기’가 난무하는 교실에서 칠판 지우개가 날아올까 눈치를 살피며 몰래 책상 아래로 슬램덩크를 돌려 읽던 당신. 만화 속에는 지극히 좋아하게 된 일에 몰두하는 아이들의 순수한 열정이 담겨 있었네. ‘아, 그래도 되는 거구나….’ 농구 붐이었네. 실내 체육관은 보기 힘들었고, 모래가 풀풀 날리는 학교 운동장은 미어터졌네. 어머니를 졸라 산 짝퉁 리복 농구화에 혹시 진짜 공기가 들어가지나 않을까 농구공 모양을 눌러보던 당신. 하고자 하는 마음만으로 반짝일 수 있었던 시절. 하지만 당신도 아는 것처럼 삶은 실은 ‘안경 선배’, 부상한 강백호를 교체해 들어갔지만 플레이하는 모습은 영화에 한 장면도 안 나오는 안경 선배. 아니면 산왕전 이후의 ‘내리 3연패’(원래 ‘3회전 패배’가 맞지만 초판의 이 오역이 더 마음에 드네) 같은 것. 영화는 관객이 300만 명 넘게 들었고, 만화 ‘슬램덩크 신장재편판’은 100만 부가 넘게 팔렸네. 이제 만화 전권을 한 번에 사는 정도의 사치는 부릴 수 있겠지. 한정판 굿즈를 사려고 줄을 서서 기다릴 수도 있지. 그래도 ‘아재들의 반란…’ 같은 말은 나오지 않네. 아재들은 반란을 일으키기에는 문화계에서 너무나도 미약한 존재들이네. 깨끗하던 당신의 건강검진 결과지에는 이제 줄글이 쓰여 있네. 강백호처럼 한 경기의 승리를 위해 선수 생명을 걸기에는 몸이 너무 무겁지. 루스볼을 잡으러 벤치로 몸을 날리다가 다쳐서 쉬면 애들 학원비는 어떻게 내나. 영화가 끝나가네. 어디선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오네. 당신, 마스크 벗고 다니다가 감기라도 들었나 보네. 감독의 영화잡지 인터뷰가 떠오르네. “코트 위 강자들의 태연한 얼굴 뒤에도 각각의 삶이 있고 그곳까지 가는 길이 있다. 그건 객석에 앉아 있는 분들도 똑같아서 각자 자신이 주인공인 인생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 조금은 힘이 나지 않을까 한다.” 당신의 아이는 슬램덩크를 처음 보던 당신을 닮았네. 전국 제패를 못 하면 어떤가, 기적 같은 역전승이 없으면 또 어떤가. 당신의 전성기는 아직 오직 않았네 ‘no. 1 가드’, 오늘도 왼손은 거들 뿐.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

물을 내뿜으며 빙빙 도는 스프링클러를 물속에 집어넣고 물을 내뿜는 대신 빨아들이게 하면 어떻게 될까? 역방향으로 회전할까? 아니면 같은 방향으로? 답은 ‘움직이지 않는다’이다. 쉬운 것 같아도 과거 수준급 학자들도 꽤 의견이 갈렸던 문제라고 한다. 미국 프린스턴대의 강의조교 시절 리처드 파인먼(1918∼1988)은 생각만으로는 결론을 못 내리자 슬쩍 실험을 해보려다가 한 연구소 실험실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출입금지를 당했다. ‘괴짜 천재’ 파인먼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다. 양자역학과 전자기학을 통합하는 이론을 완성했고, 아인슈타인과 함께 20세기의 대표적 물리학자로 꼽히는 파인먼의 삶을 다룬 평전이다. 파인먼의 어린 시절 아버지 멜빌은 ‘호기심을 소중히, 겉모습은 하찮게’ 여기라고 가르쳤다. 어려운 용어나 포장에는 현혹되지 말라고 당부했다. “모든 언어로 저 새의 이름을 말할 수 있다고 해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거란다. …저 새를 관찰하고 새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살펴보자는 거야.” 이런 가르침 속에서 파인먼은 편견 없이 지식을 추구하는 법을 체득하며 자라났다. 파인먼은 독창적이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난제를 단칼에 해결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원자폭탄을 개발하기 위해 소집된 물리학자들이 한 달 동안 쩔쩔 매던 문제를 단숨에 풀었다는 얘기가 유명하다. 말년에 희소암을 앓던 파인먼은 1986년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폭발 사고의 조사위원을 맡아 원인 규명에 애쓰기도 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사고 원인이 된 부품(오링)에 대한 증언을 회피하자, 워싱턴 관공서 주변 철물점에서 구한 재료로 오링의 탄성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TV 카메라 앞에서 실험해 보이기도 했다.‘카오스’ ‘인포메이션’ 등을 낸 저명 과학 저술가인 저자는 “파인먼은 겉치레와 인습, 돌팔이, 위선을 증오했고 벌거벗은 임금님을 본 소년이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양자역학 등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는 부분을 건너뛰다 보면 ‘천재’라는 말 뒤에 가려진 파인먼의 진짜 비범함과 인간적 면모가 보인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오래전 일본에서는 된장을 고려장(高麗醬)이라고 불렀다. 된장을 가리키는 일본어 ‘미소(味噌)’가 한국어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660년 나당연합군의 침입을 받고 백제가 멸망하자 많은 백제인이 일본 열도로 이주했는데, 이주자 가운데 된장을 담그는 장인이 많았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한반도의 정치적 격변이 일본의 식문화에 영향을 준 셈이다. 일본에서 된장은 처음에는 음식에 발라 먹었다.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러 미소된장국이 등장했고 에도 시대 들어 서민에게도 보편화됐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610년 고구려 승려 담징이 일본에 맷돌을 들여와 곡류로 만드는 가루음식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 전까지 일본에서는 쌀과 같은 곡물은 모두 알곡으로 먹었다. 홋카이도교육대 교수를 지낸 역사학자인 저자가 일본의 음식문화사를 정리했다. 스시와 덴푸라, 카레라이스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여러 일본 음식의 역사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쌀쌀한 날이면 찾게 되는 우동은 일본과 당나라의 교류 과정에서 출현했다. 일본은 630∼894년 190여 차례에 걸쳐 외교 사절인 견당사를 파견했다. 우동은 원래 견당사가 들여온 ‘훈둔(混沌·혼돈)’이라는 중국식 만둣국이었다고 한다. 밀가루 경단에 콩이나 팥소를 넣어 끓인 것으로 끓어오르는 경단이 빙글빙글 돌며 정신이 없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음식이므로 삼수변(氵)이 먹을식(飠) 변으로 바뀌면서 ‘곤통(餛飩·혼돈)’이라고 부르다가, 뜨겁게 먹는다는 뜻으로 ‘온통(溫飩·온돈)’이 됐고, 다시 지금의 ‘우동(饂飩·온돈)’으로 변했다. 료칸 투숙의 또 다른 즐거움인 가이세키 요리는 선승에 의해 차와 함께 일본에 전해진 것으로 원래는 국 하나와 반찬 2, 3개로 구성된 소박한 요리였다. 그러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았던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1568∼1603)에 이르러 풍성한 식재료를 아낌없이 차린 다이묘의 요리로 바뀌었다. 일본 여행 전 읽으면 식사 때 화제가 풍성해질 것 같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은 27일 국가보훈처로부터 업무계획을 보고받은 뒤 “보훈 대상자를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려면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확실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가의 서훈에 대해서도 재검토해야 할 문제가 여럿 있다. 8차례 기각된 동농 김가진(1846∼1922)의 서훈 문제도 그중 하나다. 대동단을 조직한 동농은 1919년 10월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해 불꽃처럼 독립운동을 벌였다. 대동단 활동으로 서훈된 이가 80여 명에 이르지만 총재였던 동농은 아직도 훈장을 못 받았다. 지난해 순국 100주기를 맞아 서훈과 유해 봉환 추진 여론이 형성됐지만 끝내 무산됐다. 보훈처는 기각 사유를 “일제강점 전후 행적 이상(의병 탄압, 수작(受爵·작위를 받음), 강제병합 찬양 논란 등)과 독립운동에 대한 종합적 평가”라고 밝혔다. 하지만 일제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의치(義齒)까지 뽑아 던지고 상하이로 떠난 이에게 남작 작위가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의병 탄압도 그가 아니라 일본군이 벌인 것이라는 연구가 있다. 그의 서훈에 반대하는 의견이 있지만 동농이 독립운동에 뛰어들기 이전 행적을 문제 삼는 건 수많은 다른 서훈자들과 형평에 맞지 않다. 무엇보다 동농이 숨지자 임시정부는 정부장, 오늘날로 말하자면 국장을 치렀다.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 나라라면 당대인들의 평가도 존중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죽산 조봉암(1898∼1959)의 서훈 문제다. 독립운동가로 7년 옥고를 치렀고,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을 이끈 죽산은 대한민국이 평등한 나라로 출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는 역사학자들이 적지 않다. 죽산은 간첩 누명을 쓰고 살해된 희생자이기도 하다. 죽산을 제대로 서훈해야 역사가 바로잡히고 나라의 정체성이 뚜렷해진다. 보훈처가 죽산의 서훈을 거부하는 건 “인천 서경정에 사는 조봉암 씨가 국방헌금 150원을 냈다”는 1941년 매일신보 단신 기사를 근거로 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의 기사를 그대로 믿기도 어렵거니와 모진 고문과 추위로 손가락 7개를 잃고 출소한 뒤 생계를 위해 비강(왕겨) 조합장으로 일하던 그가 일제의 강요를 거부했어야 했다는 건 너무 가혹한 주장이 아닐까. 이런 식으로 작은 흠을 이 잡듯이 뒤지자면 만해 한용운 선생(1879∼1944)에게 1962년 주어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만해는 1941년 8월 이른바 ‘대동아전쟁’의 지지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열린 임전대책협의회에 참석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다. 사회주의자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을 확대하며 2005년 건국훈장을 받은 몽양 여운형(1886∼1947) 역시 행적 관련 논란이 있다. 시대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고뇌했던 거인들일수록 숨을 곳 없는 일제 치하에서 더 많은 풍파를 겪었기 마련이다. 이들의 생애를 큰 틀에서 평가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이라는 거목의 뿌리를 스스로 앙상하게 만들게 된다. 거목의 정체성을 고사리를 캐 먹다 굶어 죽은 백이, 숙제에게서만 찾을 것인가.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

“금리를 2%까지 낮출 수 있는 풍부한 돈은 부채와 공직 등의 자금 조달 비용을 줄여주며 왕을 구제할 것입니다. 빚을 지고 있는 귀족 지주의 부담도 덜어줄 것입니다. 이들은 농산물이 더 높은 가격에 팔리면서 더 부유해질 것입니다. 상인들은 더 부유해지고 사람들의 일자리는 늘어날 것입니다.” 끊임없는 전쟁으로 프랑스 왕실 재정이 파탄으로 이르렀던 18세기 초 스코틀랜드 출신 인물 존 로(1671∼1729)는 섭정 오를레앙 공 필리프 2세에게 이렇게 진언한다. 돈을 찍어내 금리를 낮추자는 얘기다. ‘왕’이나 ‘귀족’ 등의 단어만 ‘정부’, ‘가계’ 등으로 바꾼다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나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오늘날 각국 중앙은행이 취했던 정책과 다르지 않다. 섭정의 금융 책임자가 된 로는 왕립은행을 통해 ‘종이가 모자랄 정도로’ 지폐를 찍어내면서 세계 최초로 저금리 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로는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지역에 대한 독점거래권을 가진 ‘미시시피 회사’를 인수했는데, 돈이 풀리면서 이 회사 주식에 대한 투기 광풍이 일었다. 주가는 순식간에 40배가량 폭등했고, “모든 사람이 (투기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백만장자(millionaire)’라는 낱말이 이때 생겼다. 이 같은 정책은 파국을 불러왔다. 인플레이션이 심각했다. 1719년 말 물가지수는 연초 대비 2배가 됐다. 외환시장에서 프랑스 통화 가치는 계속 하락했다. 마침내 거품도 꺼져 미시시피 회사 주식 가격은 90% 폭락했다. 미국 투자은행에서 일했던 금융인 출신 저술가인 저자는 금리의 역사를 소개하고 저금리가 만들어 내는 각종 부작용을 지적한다. 저금리는 달콤하다. 일시적으로 투자가 늘고, 소비는 증가하며, 실업률은 낮아진다. 그러나 ‘공짜 점심’은 없다. 저자는 “생산성 둔화, 구매 불가능한 주택 (가격 상승), 불평등 심화, 시장 경쟁 소멸, 금융 취약성 등 우리가 마주하는 많은 문제의 원인이 바로 초저금리”라고 진단한다. 극단적 저금리는 저축 의욕을 꺾을 뿐 아니라 생산적 투자를 유도하기는커녕 자산 인플레이션으로 계층 간 격차만 벌린다. 정부 증권과 우량 채권에 투자하는 연금도 수익률이 하락한다. 대가를 치르게 되는 ‘최후의 심판’은 연기될 뿐 결국은 닥치게 돼 있다.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21세기 급속히 팽창한 세계 교역이 세계의 풍부한 유동성에 의해 가능했던 거품일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저자는 세계화와 금리 사이에 되먹임 고리가 있다고 지적한다. 세계화는 물가 상승 압력을 줄이고, 노동자의 교섭력을 약화시키면서 금리 인하를 유도한다. 역으로 금리 하락은 달러 차입 비용을 줄여 다국적 기업들이 더 긴 공급망을 구축하는 데 기여하면서 세계화를 추동한다. 만약 정말로 세계 교역이 대부분 거품으로 뒷받침되고 있다면 이 거품이 꺼질 때 닥칠 충격은 글로벌 금융위기 등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양적완화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급격히 기준금리를 인상하는 것도 이제 끝이 보인다는 전망이 슬슬 나오고 있다. 세계 경제의 거품이 충분히 걷힌 것인지, 책의 원제 ‘The Price of Time(시간의 가격)’처럼 금리라는 ‘시간의 가격’을 충분히 매겨 이제 미래를 저당 잡히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인지는 아마 모두가 뒤늦게 알게 될 것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금리를 2%까지 낮출 수 있는 풍부한 돈은 부채와 공직 등의 자금 조달 비용을 줄여주며 왕을 구제할 것입니다. 빚을 지고 있는 귀족 지주의 부담도 덜어줄 것입니다. 이들은 농산물이 더 높은 가격에 팔리면서 더 부유해질 것입니다. 상인들은 더 부유해지고 사람들의 일자리는 늘어날 것입니다.”끊임없는 전쟁으로 프랑스 왕실 재정이 파탄으로 이르렀던 18세기 초 스코틀랜드 출신 인물 존 로(1671~1729)는 섭정 오를레앙공 필리프 2세에게 이렇게 진언한다. 돈을 찍어내 금리를 낮추자는 얘기다. ‘왕’이나 ‘귀족’ 등의 단어만 ‘정부’, ‘가계’ 등으로 바꾼다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나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오늘날 각국 중앙은행이 취했던 정책과도 다르지 않다.섭정의 금융책임자가 된 로는 왕립은행을 통해 ‘종이가 모자랄 정도로’ 지폐를 찍어내면서 세계 최초로 저금리 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로는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지역에 대한 독점거래권을 가진 ‘미시시피 회사’를 인수했는데, 돈이 풀리면서 이 회사 주식에 대한 투기 광풍이 일었다. 주가는 순식간에 40배가량 폭등했고, “모든 사람이 (투기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백만장자(millionaire)’라는 낱말이 이 때 생겼다.이 같은 정책은 파국을 불러왔다. 인플레이션이 심각했다. 1719년 연말 물가지수는 연초 대비 2배가 됐다. 외환시장에서 프랑스 통화 가치는 계속 하락했다. 마침내 거품도 꺼져 미시시피 회사 주식 가격은 90% 폭락했다.미국 투자은행에서 일했던 금융인 출신 저술가인 저자는 금리의 역사를 소개하고 저금리가 만들어내는 각종 부작용을 지적한다. 저금리는 달콤하다. 일시적으로 투자가 늘고, 소비는 증가하며, 실업률은 낮아진다. 그러나 ‘공짜 점심’은 없다. 저자는 “생산성 둔화, 구매 불가능한 주택 (가격 상승), 불평등 심화, 시장 경쟁 소멸, 금융 취약성 등 우리가 마주하는 많은 문제의 원인이 바로 초저금리”라고 진단한다. 극단적 저금리는 저축 의욕을 꺾을 뿐 아니라, 생산적 투자를 유도하기는커녕 자산 인플레이션으로 계층간 격차만 벌린다. 정부 증권과 우량채권에 투자하는 연금도 수익률이 하락한다. 대가를 치르게 되는 ‘최후의 심판’은 연기될 뿐 결국은 닥치게 돼 있다.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21세기 급속히 팽창한 세계 교역이 세계의 풍부한 유동성에 의해 가능했던 거품일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저자는 세계화와 금리 사이에 되먹임 고리가 있다고 지적한다. 세계화는 물가상승 압력을 줄이고, 노동자의 교섭력을 약화시키면서 금리 인하를 유도한다. 역으로 금리 하락은 달러 차입 비용을 줄여 다국적 기업들이 더 긴 공급망을 구축하는데 기여하면서 세계화를 추동한다. 만약 정말로 세계 교역이 대부분 거품으로 뒷받침되고 있다면 이 거품이 꺼질 때 닥칠 충격은 글로벌 금융위기 등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미국 연준이 양적 완화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급격히 기준금리를 인상하는 것도 이제 끝이 보인다는 전망이 슬슬 나오고 있다. 세계 경제의 거품이 충분히 걷힌 것인지, 책의 원제 ‘The Price of Time(시간의 가격)’처럼 금리라는 ‘시간의 가격’을 충분히 매겨 이제 미래를 저당 잡히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인지는 아마 모두가 뒤늦게 알게 될 것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창밖으로 하얀 눈이 내린 날이었어요. … 59년을 함께 산 순한 부인이 누워있는 남편의 이불자락을 끌어다 덮으며 ‘한 이불 덮고 있습시다’ 하고 농담하자 모두 크게 웃었어요. 삶의 끝자락에 선 남편에게 건넨 용서와 사랑의 한마디였다고 생각해요. 저도 마지막 인사로 귓가에 나지막이 기도해 드렸고요.” 간병사로 호스피스 병원에서 죽음을 앞둔 노인을 돌보던 저자는 자신이 과거 돌봤던 고인의 임종 장면을 노인에게 이같이 들려준다. 가족이 원해 간병사로서 고인의 임종까지 지켰던 것. 조금 길다 싶은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그는 이내 말한다. “나도 그렇게 해줘.” ‘죽음학(생명윤리학)’과 관련된 일을 하던 저자가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88세 노인을 22일 동안 돌본 기록이다. 드라마틱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노인은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워지고, 저자는 돌볼 뿐이다. 배변 조절이 되지 않자 노인은 당혹스러워한다. 코는 헐어서 딱지가 생기고, 몸에는 줄이 3개가 달린다. 소변줄과 복수를 빼기 위한 줄, 그리고 수액줄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를 돌보며 할 일은 더욱 많아진다. 저자는 ‘한 사람이 살아온 자취를 날것으로 드러내는’ 노인의 발을 마사지하고, 악몽을 꾸는 그를 위로한다. 마지막까지도 삶은 계속된다. 노인은 집에서부터 써 온 ‘황혼일기’를 병원에서도 계속 쓴다. 저자는 “삶의 마지막 자락으로 가는 하루하루가 특별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죽음이 가까워진 노인에게 섬망 증세가 찾아온다. 노인은 뜬금없이 횡설수설하고, 시계를 잘못 본다. 침상을 올리자 비행기에 탄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저자는 노인이 섬망 속에서 “본부에 연락하라”고 지시하자 그에 맞춰 복도에 나가 이리저리 살피는 시늉을 하고 “보고했습니다!”라고 힘줘 말하기도 한다. 현실과 섬망 사이를 오가며 노인은 말한다. “한 열흘간 일하다 죽었으면 좋겠다.” 저자는 “환자는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죽음 문턱에서도 끝까지 존중받아야 할 가치 있는 생명을 지닌 인간”이라고 말한다. 환자와 의료진 간 오해도 생긴다. 의료진은 “시원하게 소변 좀 보게 해드릴까요”라고 묻고 소변줄을 단다. 하지만 노인은 뒤늦게 자신의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고 “나쁜 짓이야”라고 불평한다. 저자는 책에서 “의료진은 환자에게 에두르지 말고 정확한 용어로 설명해 줘야 오해를 방지한다”며 “최소한 신체에 어떤 장치를 하고, 어떤 어려움을 감수해야 하는지는 설명해 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마약성 진통제 사용 여부에 관해서는 “완화의료에 관한 정보를 미리 자세히 파악한 뒤 자신에게 맞는 호스피스를 요구하는 게 좋다”고 했다. 임종의 고통을 겪던 노인은 기다렸던 큰손자가 왔을 때는 말을 못 하게 된 상태였다. 노인의 아들과 함께 임종을 지키던 저자는 그의 귀에 대고 힘주어 말한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북한 콘텐츠를 갈무리해 방송하던 ‘통일TV’의 송출이 18일 중단됐다. 통일TV를 송출하던 KT 인터넷TV(IPTV) 지니TV는 이날 홈페이지 공지를 통해 “방송프로그램 내용상 문제 등으로 인해 고객님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부득이하게 통일TV 방송프로그램 제공이 중단됐다”고 밝혔다. KT는 “채널 평가 과정에서 통일TV가 북한 체제를 선전한 사실을 확인해 긴급히 계약을 해지했다”며 “5개월 전부터 (통일TV에 대한) 고객 불만이 접수됐다”고 송출 중단 사유를 밝혔다. 통일TV는 2021년 5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부터 방송채널사용사업자 인가를 받은 뒤 지난해 8월 17일 올레TV(현 지니TV)에서 첫 방송을 시작했다. 당시 진천규 통일TV 대표는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북녘의 모습과 정보를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북한 조선중앙TV 방송 내용 등을 바탕으로 북한의 경제와 여가생활, 요리, 음악, 예술 등을 소개해 왔다. 정보통신기술(ICT) 업계 관계자는 “채널 사용 인가 당시엔 기본적 방송 계획만 제시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이 방송 홈페이지에 따르면 통일TV 협동조합 이사장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맡고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지민구 기자 warum@donga.com}

아돌프 히틀러(1889∼1945)와 함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꼽히는 인물이 ‘조지아의 도살자’ 이오시프 스탈린(1879∼1953)이다. 1922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그가 대숙청과 소수민족 강제이주 등으로 죽인 사람은 수천만 명에 이른다. 그가 저지른 악의 증거와 피해자들의 고통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러나 비난은 이내 의문과 마주한다. ‘스탈린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나?’ 한 가지 답은 ‘스탈린이 매우 유능했다는 것’이다. 아일랜드 코크대 명예교수로 제2차 세계대전과 소련 외교 정책의 권위자로 꼽히는 저자는 특히 스탈린이 2차 대전 동안 지도자로서 얼마나 성공적인 리더십을 발휘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독소 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전투로는 1942년 7월 시작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꼽힌다. 수십만 독일군이 진격해 오자 스탈린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마라!’로 알려진 명령 제227호를 내린다. 소련이 직면한 위기를 설명하면서 애국적 의무를 설파하는 한편 후퇴한 군을 질타하고 ‘철의 규율’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명령 없이 후퇴하는 이들은 반역자로 규정했다. 규율을 위반한 이들은 ‘형벌 부대’에 배치했고, 적 진영에 대한 정면 공격 같은 위험한 임무를 맡겼다. 명령은 효과를 냈다. 도망치는 지휘관을 총살하는 등 무자비한 규율 체계가 작동한 ‘붉은 군대’는 어마어마한 소모에도 불구하고 전의를 잃지 않았다. 소련군은 이 전투에서 100만 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독일군 사령관을 포함해 9만여 명의 포로를 붙잡으면서 히틀러에게 처음으로 대패를 안겼다. 한 해 전 모스크바 방어전에서도 스탈린의 역할이 컸다. 수도를 빠져나가던 주민들의 불안감은 스탈린이 수도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이 라디오 방송으로 전해지자 누그러졌다. 스탈린은 연설을 통해 히틀러와의 싸움을 ‘유럽의 노예화된 인민을 해방시키는 투쟁’으로 규정하며 군과 주민의 전의를 끌어올렸다. 스탈린은 또한 군의 활력을 높이고 혁신적 분위기를 유도했으며, 전쟁을 위한 자원을 매우 성공적으로 동원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스탈린이 소련에 우호적인 체제를 동유럽에 수립하고, 공산주의 체제를 방어하는 것이 우선이었을 뿐 냉전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전후 소련과 서방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데에는 서방 측의 책임도 크다는 얘기다. 스탈린이 승인한 6·25전쟁에 대한 대목도 나온다. 김일성의 남침을 말리던 스탈린은 1950년 1월 중국이 북한을 지원할 수 있고, 미국의 개입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마음을 바꾼다. “스탈린에게 한국전쟁은 매우 값비싼 계산착오였다. … 한국전쟁은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제국주의 침탈을 단호하게 저지한 투쟁이라고 선전할 수 있었으나, 그런 주장은 심지어 공산주의 집단 내에서도 공허하게 들렸다. 무엇보다도 동서관계에서 러시아인들이 말하는 도베리예(신뢰)가 거의 완전히 붕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독재자의 복잡다단한 면모를 이해해야 제대로 된 비판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찬찬히 읽어볼 만하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아돌프 히틀러(1889~1945)와 함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꼽히는 인물이 ‘조지아의 도살자’ 이오시프 스탈린(1879~1953)이다. 1922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그가 대숙청과 소수민족 강제이주 등으로 죽인 사람은 수천만 명에 이른다. 그가 저지른 악의 증거와 피해자들의 고통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러나 비난은 이내 의문과 마주한다. ‘스탈린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나?’ 한 가지 답은 ‘스탈린이 매우 유능했다는 것’이다. 아일랜드 코크대 명예교수로 제2차 세계대전과 소련 외교정책의 권위자로 꼽히는 저자는 특히 스탈린이 2차 대전 동안 지도자로서 얼마나 성공적인 리더십을 발휘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독소 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전투로는 1942년 7월 시작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꼽힌다. 수십만 독일군이 진격해오자 스탈린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마라!’로 알려진 명령 제227호를 내린다. 소련이 직면한 위기를 설명하면서 애국적 의무를 설파하는 한편 후퇴한 군을 질타하고 ‘철의 규율’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명령 없이 후퇴하는 이들은 반역자로 규정했다. 규율을 위반한 이들은 ‘형벌 부대’에 배치했고, 적 진영에 대한 정면 공격 같은 위험한 임무를 맡겼다. 명령은 효과를 냈다. 도망치는 지휘관을 총살하는 등 무자비한 규율 체계가 작동한 ‘붉은 군대’는 어마어마한 소모에도 불구하고 전의를 잃지 않았다. 소련군은 이 전투에서 100만 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독일군 사령관을 포함해 9만여 명의 포로를 붙잡으면서 히틀러에게 처음으로 대패를 안겼다. 한해 전 모스크바 방어전에서도 스탈린의 역할이 컸다. 수도를 빠져나가던 주민들의 불안감은 스탈린이 수도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이 라디오 방송으로 전해지자 누그러졌다. 스탈린은 연설을 통해 히틀러와의 싸움을 ‘유럽의 노예화된 인민을 해방시키는 투쟁’으로 규정하며 군과 주민의 전의를 끌어올렸다. 스탈린은 또한 군의 활력을 높이고 혁신적 분위기를 유도했으며, 전쟁을 위한 자원을 매우 성공적으로 동원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스탈린이 소련에 우호적인 체제를 동유럽에 수립하고, 공산주의 체제를 방어하는 것이 우선이었을 뿐 냉전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전후 소련과 서방의 전후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데에는 서방 측의 책임도 크다는 얘기다. 스탈린이 승인한 6·25전쟁에 대한 대목도 나온다. 김일성의 남침을 말리던 스탈린은 1950년 1월 중국이 북한을 지원할 수 있고, 미국의 개입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마음을 바꾼다. “스탈린에게 한국전쟁은 매우 값비싼 계산착오였다.…한국전쟁은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제국주의 침탈을 단호하게 저지한 투쟁이라고 선전할 수 있었으나, 그런 주장은 심지어 공산주의 집단 내에서도 공허하게 들렸다. 무엇보다도 동서관계에서 러시아인들이 말하는 도베리예(신뢰)가 거의 완전히 붕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독재자의 복잡다단한 면모를 이해해야 제대로된 비판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찬찬히 읽어볼만하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문화재 관람료 전면 폐지를 목표로 제도를 개선하겠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사진)은 11일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국가가 관리해야 하는 국가지정문화재를 사찰이 신앙적 차원에서 관리·보존하면서 궁여지책으로 문화재 구역 입장료를 받아왔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정부가 올해 예산 421억 원을 확보해 5월부터 사찰 등이 문화재 관람료를 안 받거나 감면하면 해당액을 지원하기로 한 가운데 조계종이 관람료의 ‘궁극적 폐지’를 공식화한 것. 진우 스님은 “(정부 예산이) 종단 입장에서는 굉장히 부족하지만 양보하면서 국민 불편을 없애고 문화재 관리에 소홀함이 없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 해외 연구에 따르면 21세기 초 전 세계 질병으로 인한 사망과 고통의 20%는 말라리아와 결핵, 폐렴, 설사 등의 탓이었다고 한다. 모두 가난한 나라 국민이 많이 걸리는 질병이다. 그러나 이들 질병에 대한 연구비는 전체 생의학 연구비의 0.5%도 안 됐다. 신약 개발에 투입되는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 민간 기업들이 부유한 나라 국민이 많이 걸리는 질병 연구에 더 많은 힘을 쏟기 때문이다. 일부 철학자들은 이 같은 현실을 개선하고자 ‘연구비의 공정 배분’ 원칙을 제안했다. “질병 연구에 배분되는 자원의 비율은 그 질병으로 인간이 겪는 고통의 비율과 일치해야 한다”는 것. 여러 반론도 가능한 주장이지만 확실한 건 ‘무엇을 연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부터 과학은 ‘가치’와 직결돼 있다는 것이다. 흔히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은 별까지의 거리를 계산하고, 세포의 성분을 분석하며, 깊은 땅속 구성 물질을 알아낸다. 사실을 탐구하는 과학이 ‘윤리적으로 옳다, 그르다’ 하는 문제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과학철학자로 미국 미시간주립대 교수인 저자는 “과학적 추론은 가치 판단과 태피스트리(직물)처럼 서로 얽혀 있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과학 정보에 완전히 가치중립적 프레임을 부여하는 것은 오히려 불가능에 가깝다. 과학 연구 역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의미를 갖기에 용어와 프레임은 특정 가치와 관련된 미묘한 함의를 가지게 된다. 과거 많이 사용한 ‘지구 온난화’라는 용어는 ‘지구가 따뜻해져 좋은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는 지적에 ‘기후 변화’라는 말로 바꿔 쓰고 있다. 요즘에는 이 말 역시 문제를 덜 심각한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는 추천사에서 “우리는 사실의 진위를 가늠할 때 거의 항상 가치의 도움을 받는다”며 “과학 활동의 모든 단계에 가치가 영향을 미친다는 걸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라고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업체 간의 전쟁은 곧 콘텐츠 전쟁이기도 하다. 넷플릭스와 디즈니플러스, 아마존 프라임, HBO MAX 등은 가입자를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해 흥미로운 콘텐츠를 확보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다. 지난해 이들의 콘텐츠 전쟁에서 특히 눈에 띄었던 건 고전의 반열에 오른 드라마, 영화 등의 후속작이다. 글로벌 1위 넷플릭스가 최근 내놓은 오리지널 시리즈 ‘웬즈데이’는 1930년대 신문 만화를 원작으로 1960년대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1990년대 여러 차례 영화화된 ‘아담스 패밀리’의 스핀오프(원작의 캐릭터나 상황에 기초해 만든 파생 작품)다. 넷플릭스에서 최초로 6주 연속 시청시간 1위에 올랐다. 후발 주자인 HBO MAX와 아마존 프라임은 판타지 대전을 치렀다. 선공은 세계적 인기를 모은 ‘왕좌의 게임’ 후속작 ‘하우스 오브 드래곤’이었다. HBO MAX에서 지난해 8월 첫 방송 직후 나흘 만에 2000만 명이 봤다. 잘 알려져 있듯 원작은 1990년대 출간되기 시작해 세계에서 수천만 부가 팔린 조지 R R 마틴의 대하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다. 아마존 프라임은 9월 ‘판타지의 아버지’ J R R 톨킨의 레전다리움(미출간 자료 포함 톨킨의 창작물을 아울러 가리키는 이름)을 바탕으로 만든 ‘반지의 제왕: 힘의 반지’로 반격에 나섰다. 1, 2화는 나흘 만에 미국에서만 1300만 명이 봤다. 드라마 제작을 위한 판권은 넷플릭스도 노렸다. 하지만 캐릭터 중심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처럼 만들겠다는 제안에 화들짝 놀란 톨킨재단이 거부했고, 오히려 적은 돈을 써내면서 작업에 재단의 참여를 보장한 아마존이 판권을 가져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레전다리움 역시 1937년 출간된 ‘호빗’이 시작이다. 마블과 수많은 고전 애니메이션을 자랑하는 디즈니 역시 비장의 무기가 있다. 2012년 루커스필름을 인수하면서 확보한 ‘스타워즈’다. 1977년 처음 개봉돼 오리지널과 프리퀄, 시퀄만 9편의 영화로 제작된 이 시리즈는 ‘미국의 건국 신화’에 비유되기도 한다. 디즈니플러스는 ‘만달로리안’ ‘배드 배치’ ‘북 오브 보바펫’ ‘오비완 케노비’ 등의 스핀오프 시리즈를 만들어 재미를 보고 있다. 최근작 ‘안도르’는 시리즈의 다소 낡은 듯한 느낌까지 걷어낸 수작이라고 본다. 이처럼 흥행이 검증된 콘텐츠의 후속작은 연령대가 높은 오랜 팬덤을 신규 시청자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낸다. 이를 통해 글로벌 후발 OTT도 안착하는 모양새다. 지난해 K컬처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올해도 드라마 ‘더 글로리’가 넷플릭스에서 방영돼 해외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지금은 우리 콘텐츠가 글로벌 OTT에 실려 해외로 뻗어나가지만, 토종 OTT가 오리지널 시리즈로 대박을 치고 다시 수십 년 뒤 후속작으로 이를 ‘우려먹으며’ 오랜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때가 올 것이라고 본다. 저들에게 100년 콘텐츠가 있다면 우리에겐 삼국유사 같은 1000년 콘텐츠의 저력이 있다. 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