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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엿한 한국인이 될래요”… 고려인 4세 이고리의 꿈“저는 잘할 것 같아요. 저 자신을 믿어요.” 지난해 12월, 경기 안산시 선일중학교의 한 교실. 선생님과 고등학교 진학 상담을 마친 허가이 이고리(16)가 당차게 말했다. 이고리는 특성화고가 아니라 일반계고를 지망했다. 이고리가 1지망으로 정한 학교는 성적이 중상위권인 학생들이 많이 진학한다. 이고리의 목표는 한국외국어대나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합격. 이고리는 러시아어 통역사로 활약할 꿈을 꾼다. 이고리는 우즈베키스탄 국적의 고려인 4세다. 세 살이 되던 2009년, 엄마를 따라 한국으로 건너왔다. 해외동포 자녀는 특성화고를 선호하는 편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아 취업을 빨리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고리는 애초부터 일반계고에 가기로 마음먹었다.담임 선생님은 이고리에게 경쟁이 덜한 다른 학교를 추천했었다. 이고리가 한국인 아이들에게 밀려 내신에서 불리할 수 있어서다. 이고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학습 분위기가 좋은 환경에서 공부해 원하는 대학에 꼭 합격하고 싶었다. 이고리는 명문대에 합격할 수 있을까. 일감 끊길 걱정 없는 직장을 찾을 수 있을까. 할아버지와 엄마가 그토록 원하는 ‘코리안 드림’을 이뤄 더 나은 삶을 향한 ‘사다리’에 오를 수 있을까.○ 한국인의 조건이고리는 꿈에 부풀다가도 외삼촌을 생각하면 멈칫한다. 외삼촌은 우즈베키스탄 대학에서 한국어학과를 나와 한국에서 러시아어 통역사로 활동했다. 그러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외국인 입국이 줄어 일감이 끊겼다. ‘대학을 나온 삼촌도 힘든데, 대학조차 안 나오면 더 힘들겠구나.’ 불안정한 체류 자격도 ‘이방인’이란 꼬리표였다. 지난해까지 이고리 같은 중앙아시아 국적 고려인 동포는 한국 고교나 대학을 졸업해야 재외동포(F4)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이고리는 아직 고교 졸업 전이라 엄마의 가족으로서 방문동거(F1) 비자를 받아 지냈다. 이 비자로는 체류 기간을 1년마다 연장받아야 했다. 이고리에게 올해 선물같이 체류 자격이 주어졌다. 법무부가 이달 3일부터 국내 초중고교에 다니는 미성년 고려인 동포에게 F4 비자를 부여하기로 했다. 그래도 이고리는 여러 편견과 싸워야 한다. “넌 지금 군대 안 가도 되는데 왜 비자 바꾸려고 하냐.” “외국인 전형으로 대학 쉽게 가서 좋겠다.” 친구들은 질투 반, 부러움 반이 담긴 농담을 하곤 한다. 이런 말을 들을수록 이고리는 굳게 결심한다. ‘반드시 어엿한 한국인이 돼야지.’ 이고리는 F4 비자를 받아 병역의무가 생기면 꼭 해병대에 가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가족 소망 짊어진 이고리세살때 엄마따라 한국으로… 미성년 고려인 동포에게올해부터 F4비자 체류자격, 주변 우려에도 일반고 진학대학졸업하고 반듯한 직장… 미래의 땅에 자리잡고 싶어○ 차가운 ‘할아버지의 땅’이고리의 할아버지인 고려인 2세 김게오르기 씨(65)도 손자의 고민을 알고 있다. 평범한 한국인으로 좋은 직장을 가지려는 손자의 분투를 이해한다. 게오르기 씨도 고향에선 ‘엘리트’였지만 한국에선 바닥부터 시작했다.게오르기 씨는 이고리가 한국에 오기 1년 전인 2008년 한국 땅을 밟았다. 51세, 남들은 은퇴를 꿈꿀 나이였다. 하지만 아내 이로자 씨(62)가 당뇨로 한쪽 눈의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치료가 어려웠다. 게다가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이주민에게 배타적으로 변해 갔다. 이고리 가족은 이방인처럼 소외됐다. 그는 ‘할아버지의 땅’ 한국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더 고향 같은 한국으로. 타슈켄트국립사범대 역사학과 졸업장, 교장까지 지낸 교육자로서의 커리어, 방 4개짜리 아파트, 자동차, 별장까지 모두 가족을 위해 버렸다. 첫 일터는 부산의 조선소였다.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까지 하루 13시간, 20kg에 가까운 장비를 들고 일했다. 매일 밤 손이 저렸다. 끙끙 앓다 몇 달 만에 일을 그만뒀다. 부족한 한국어 실력으로는 변변한 일을 구하기 힘들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선 펜보다 무거운 걸 들어본 적이 없어요. 여기 와선 돌과 쇳덩이를 들었어요. 식용 개 축사에서 일하던 시절은 죽을 때까지 못 잊습니다.” 육체적 고통보다 더 힘든 건 무너진 자존심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이주노동자 김 씨’가 됐다. 조선소를 그만두고 일했던 총각무 농장에서 농장 주인이 퍼붓는 욕설을 견뎌야 했다. 그래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한국은 할아버지의 땅’이라는 가족들 말을 듣고 자랐다. 자식들에게도 입버릇처럼 말했다. “한국이 우리의 미래다.” 딸 옥사나(42) 씨에게도 ‘미래의 땅’ 한국은 녹록지 않았다. 옥사나 씨는 우즈베키스탄 현지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한국어가 능숙하지 않은 그가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일은 아버지처럼 몸이 고된 일뿐이었다.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옥사나 씨는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에 F4 비자를 받았다. 취업은 가능하지만 청소 등 단순노무는 할 수 없었다. 방문취업(H2) 비자를 받으면 이런 일을 구할 수 있지만 본국의 가족을 데려올 수 없다. F4 비자로 이고리와 함께 한국에 온 옥사나 씨는 인력사무소 수십 곳을 돌아야 했다. 사정을 딱히 여긴 안산의 한 공장 대표가 몰래 일을 줬다. 단순작업에 임금도 낮아 한국인들은 기피하는 일이었지만 감사했다. 옥사나 씨는 출입국사무소에서 미등록 노동자 단속을 나왔을 땐 다른 외국인 동료들과 창고에 숨었다. 적발되면 비자가 취소돼 출국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은 아직도 상처로 남아 있다. 어느 날 상사가 그의 엉덩이를 쓱 만지고 지나갔다. 그는 당장 쫓아가 서툰 한국어로 소리 질렀다. “나도 열심히 일해요. 내가 외국에서 왔다고 이렇게 해요? 나도 아빠 있어요. 경찰에 신고해요?”‘한국인의 조건’을 갖출 기회가 없진 않았다. 옥사나 씨는 법무부의 ‘사회통합프로그램(KIIP)’을 이수하면 영주(F5)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456시간 동안 교육을 받고 시험에서 일정 점수를 따면 된다. 낮엔 공부하고 밤에는 아이를 돌보며 일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당장 생계가 급했다. “일하고, 이고리 밥 주면 주말에 공부할 시간이 딱 4시간 있었어요. 밤에 일하고 집에 와서 밤새 공부해서 이고리가 어렸을 때 혼자 컸어요.” 네 가족은 입국한 뒤 5년이 넘도록 원룸살이를 했다. 옥사나 씨가 공장 동료였던 한국인 남편과 2013년 재혼한 뒤 분가했지만 지금도 월세로 산다. 이고리 방에 있는 가구는 이고리 무릎에도 닿지 않는 작은 테이블 하나가 전부다. 그래도 이고리는 긍정한다. “바닥에서 공부하다 보면 나중에 ‘진짜 책상’에 앉게 됐을 때 얼마나 더 감사하겠어요.”○ 26년을 이방인으로 살다26년째 한국에서 이방인처럼 살고 있는 치메도르치 어티겅도야 씨(60) 가족도 비슷하다. 모국에서 좋은 학벌과 직업을 가졌어도 한국에선 저소득층을 못 벗어난다. 어티겅도야 씨는 1996년 세 살, 열세 살이던 두 딸을 두고 한국으로 건너왔다. 몽골에서 사범대를 졸업하고 대학 강사로 일했지만 월급만으로는 두 딸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가 힘들었다. 어티겅도야 씨는 가난을 탈출하려고 관광비자로 한국에 왔다. 산업연수생 제도는 있는 줄도 몰랐다. 그는 서울 광진구 미싱 공장에 취업했다. 월급은 몽골로 부치는 생활비와 월세로 다 나갔다. 관광비자 연장을 위해선 3개월마다 몽골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비행기표 살 여유가 없었다. 결국 미등록 신분이 됐다. 매일 머리를 맞으며 일했다. 공장 앞 공중전화에서 두 딸과 통화하는 시간이 유일한 낙이었다.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시비를 거는 한국인 동료들의 텃세가 심했다. 그는 6개월 만에 공장을 나왔다. 도움을 찾던 그를 구원한 건 역설적이게도 남을 돕는 일이었다. 그는 월 40만 원을 받으며 서울외국인근로자선교회에서 통역을 시작했다. 2년간 전국을 돌며 임금 체불을 겪는 외국인 노동자, 남편에게 맞은 결혼이주 여성들의 통역을 맡았다. 1999년 선교회가 재한몽골인학교를 세우면서 그도 선생님으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안정적으로 일할 곳이 생기자 비행기표 살 돈을 모아 몽골로 떠났다. 관광비자를 재발급받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관광비자 연장을 위해 3개월마다 입국과 출국을 반복했다. 그러다 2005년 특정활동(E7) 비자를 받게 됐다. 재한몽골인학교가 공식 학교로 인가받으면서 그도 외국인 전문인력으로 인정받게 됐다. 한국에 산 지 10년 만에야 안정적으로 머물게 됐다. 미등록 대물림 위기 어티겅도야26년전 지하방 미등록자로 시작, 교사된 어티겅도야이번엔 딸-손자-손녀가 ‘불법체류자’ 될 위기에미싱공장-통역-교사 거쳐 전문인력인정 E7비자 받아美서 석사 받고 한국에 온 딸, 신고없이 알바했단 이유로직장 잃고 비자까지 만료… 불안정-저소득 신분 악순환어티겅도야 씨는 F5 비자를 취득할 생각도 했지만 소득이 발목을 잡았다. F5 비자를 취득하려면 연 소득이 전년도 1인당 국민총소득(GNI) 이상이어야 한다. 지난해 기준 약 3788만 원이다.○ 3대째 대물림되는 미등록 굴레지난해 12월 어티겅도야 씨는 서울 광진구의 한 지하철역 근처 골목을 굽이돌아 걸었다. 15분가량을 걷자 그의 옥탑방이 나타났다. 계단은 난간을 잡지 않고서는 오르기 힘겨울 정도로 가팔랐다. 옥탑방 천장은 바람이 많이 불면 깨질 듯 흔들린다. 그래도 어티겅도야 씨에게 이 집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살게 된 ‘집다운 집’이다. “옛날엔 지하방 원룸 살았어. 냄새도 엄청 났고 벌레들이 기어 다녔어. 어떨 때는 벌레가 귀로 들어가기도 했어.”‘미등록에서 E7 비자’로, ‘지하방에서 옥탑방’으로, ‘미싱 공장에서 몽골학교’로…. 어티겅도야 씨는 피나는 노력으로 체류 자격을 얻어냈다. 집도, 직장도 치열하게 지켰다. 하지만 어티겅도야 씨의 얼굴에 진 그늘은 여전하다. 26년간 겪은 불안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첫째 딸 자야(가명·39) 씨와 손자손녀 때문이다. 자야 씨는 몽골 현지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미국 캘리포니아대(CALMUS)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에 정착한 엄마와 여동생을 따라 2016년 한국에 들어왔다.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제대로 공부해 세계에 알리겠다는 꿈이 컸다. 현실은 생각과 달랐다. 미국 유학까지 마친 자야 씨는 예원예술대 석사 졸업 뒤 2년간 한국에서 구인구직 사이트를 뒤졌다. 하루에 세 곳씩 지원서를 넣었다. 직군도 가리지 않았다. 자야 씨는 몽골어, 중국어, 영어, 한국어까지 4개 언어에 능통하다. 하지만 외국인인 그를 받아주는 회사는 없었다. 올해 초에야 스마트폰을 수출하는 무역회사가 그를 채용했다. 그도 외국인 전문인력이 받는 E7 비자를 받게 됐다. ‘안정적으로 국내에 머물 수 있게 되나.’꿈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다. 자야 씨가 E7 비자를 발급받으려고 출입국사무소에 과거 소득 자료를 제출할 때였다. 사무소 직원은 자야 씨가 과거 유학(D2) 비자를 받은 채 아르바이트한 사실을 문제 삼았다. 자야 씨는 D2 비자로 아르바이트를 하면 당국에 신고해야 한다는 걸 몰랐다. 결국 자야 씨는 첫 출근도 못 한 채 직장을 잃었다. 그의 비자가 만료되면서 남편과 두 아이의 동반(F3) 비자까지 잃었다. 자야 씨 부부와 아이들 모두 미등록 위기에 처했다. 그는 체류 자격을 얻으려 행정소송 중이다. 어티겅도야 씨의 시름도 깊어졌다. 손자 유루티츠(‘우주’라는 뜻의 몽골어)는 세 살 때 한국에 와 어느덧 아홉 살이다. 손녀는 2020년 한국에서 태어나 쭉 자랐다. “애들은 한국이 자기 나라나 다름없어. ‘나는 몽골 안 가고 싶어요. 한국에 있고 싶어요’라고 해. 매일 밤 하나님한테 기도해. ‘욕심 안 부릴 테니까 우리 딸이랑 손주 한국에 있게 해 주세요.’”○ ‘저수지 아이들’을 벗어날 수 있을까안산에서 다문화교회를 운영하는 박천응 목사는 이고리, 유루티츠 같은 이주민 자녀들을 ‘저수지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물려받아 한국 사회의 저층에 고인다는 의미다. “부모 세대는 본국에서 유능해도 한국어나 체류 자격 문제로 대부분 단순 노동에 종사합니다. 경제적 문제로 아이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죠. 공단 지역 노동자 자녀는 공단 인력의 ‘저수지’에 고여요. 부모에 이어 공단 노동자가 되죠.” 안산의 한 고등학교 교사도 저임금 일자리만 바라보며 ‘사다리’를 찾지 못하는 아이들을 걱정했다. “고려인 아이들에게 ‘뭐 하며 살고 싶냐’고 물어보면 ‘공장에서 일하며 돈 벌겠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아요. 아이들은 부모를 보며 꿈을 키우는데, 마땅한 롤 모델이 없는 거죠.” 이주배경 아동들이 저수지 아이들로 남지 않으려면 안정적인 체류 자격을 줘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무부는 중앙아시아 출신 미성년자 고려인 동포들에게 F4 비자를 주기로 하면서 국내 초중고교에 재학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미취학 아동, 경제·언어적 문제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은 제외됐다. 중앙아시아와 달리 러시아 국적의 고려인 동포에게는 조건 없이 F4 비자가 발급된다. 고려인지원센터 ‘너머’의 김준태 서울상담소장은 “국내 고용 상황이나 행정 편의 때문에 국적에 따라 동포 비자를 달리 주는 것은 차별”이라고 했다.자녀들만큼은 저수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애쓴 게오르기 씨와 어티겅도야 씨의 바람은 이뤄질까. 지난해 11월 안산의 한 식당에서 가족들과 모인 게오르기 씨는 담담히 말했다. “자식들 편히 살면 난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내 딸이 잘살기 위해서는 이고리가 공부 잘하고 좋은 직장을 가져야 돼.” 이고리만은 원하는 일을 하며 꿈을 이루기를. 그게 이고리 가족이 ‘사다리’를 오를 마지막 기회다. 이고리는 일반고 진학을 시작으로 통역사의 꿈을 향해 간다. 미국 유학까지 했지만 취업이 좌절된 자야 씨처럼 ‘사다리’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이고리는 마음이 흔들릴 때 자기 이름의 뜻을 떠올린다. ‘이고리’는 그리스어로 ‘지킨다’는 의미다. “제 가족을 지키는 강한 사람이 될 거예요.” 히어로콘텐츠팀▽팀장: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기사 취재: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기자▽사진·동영상 취재: 송은석 남건우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편집: 한우신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사이트 개발: 고민경 임상아 뉴스룸 디벨로퍼▽동영상 편집: 남건우 기자 박세진 PD 안채원 CDQR코드를 스캔하면 ‘공존’을 디지털 스토리텔링으로 구현한 사이트(3)로 연결됩니다. 히어로콘텐츠팀신희철 기자 hcshi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남건우 기자 woo@donga.com}

할아버지-엄마에겐 차가웠던 ‘기회의 땅’16세 소년은 꿈꾼다… 한국서 따듯한 일상동아일보 디오리지널 페이지()를 방문해 보세요. 다양한 사진과 영상, 인터랙티브 효과가 결합된 새로운 형식의 기사로 공존 시리즈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서 저에게 맞는 과를 찾고 싶어요. 그렇다고 제가 안정적인 회사에 들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지난해 12월 어느 날, 경기 안산시 선일중학교. 일반계 고등학교 원서를 쓴 뒤 진로 상담을 하던 허가이 이고리(16)의 목소리가 유난히 작아졌다. 평소 유쾌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과 달랐다.이고리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고려인 4세다. 러시아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장점을 살려 통역가를 꿈꾼다. 목표 대학도 정했다. 한국외대나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러시아어를 잊지 않으려 집에선 엄마와 러시아어로 대화한다.하지만 이런 꿈도 외삼촌을 생각하면 사그라진다. 외삼촌은 우즈베키스탄 현지 대학에서 한국어학과를 나와 한국에서 러시아어 통역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외국인 입국이 급감하며 일감이 끊겼다. 지금 택배 배송을 하고 있다.‘대학을 나와도 한 직장에서 안정적으로 일하는 게 어려운데 졸업장조차 없으면… 나도 삼촌처럼 될 수 있겠구나.’이고리는 이런 생각이 들 때면 꼭 한국의 좋은 대학에 가리라고 마음먹는다.“할 수 있어. 러시아어를 완벽하게 하잖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지구의 6분의 1을 네 땅으로 만들 수 있어.”상담을 해주던 임미은 선생님은 이고리를 격려했다. 하지만 이고리의 걱정을 잘 알고 있다. 이고리가 과연 좋은 대학에 가 일감 끊길 걱정 없는 직장에 취직할 수 있을까.이고리 같은 해외동포 자녀는 특성화고 진학을 선호하는 편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다. 특성화고 졸업 뒤엔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 수 있다.한국어 실력이 부족해 실습 중심인 특성화고를 택하는 아이들도 있다. 외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온 중도입국 청소년들이 주로 그렇다.선일중에서도 지난해 이주배경 학생 52명 중 24명은 특성화고를 지망했다. 특성화고 지망생은 예년보다 줄긴 했다. 경기도 내 일반고도 학비가 무상이 됐기 때문이다. 경제적 부담 때문에 망설이던 이주배경 학생들도 일반고에 지원하게 됐다.“이주배경 아이들은 고등학교 등하교 교통비조차 부담으로 느끼는 경우가 많아요. 학교 공부를 따라갈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죠. 일단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외국인전형으로 대학 가긴 비교적 수월하지만 거기까지 가기 위해선 그 이상의 노력이 필요해요.”(임미은 선생님)이고리는 그럼에도 일반고에 가기로 일찌감치 결심을 굳혔다. 이고리가 1지망으로 쓴 고등학교는 중상위권 성적의 학생들이 지망하는 학교다. 사실 담임선생님은 다른 학교를 추천했었다. 이고리가 내신에서 불리해질 수 있어서다. 하지만 이고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학습 분위기가 좋은 환경에서 공부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서다.이고리는 꼭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대학에 가고 싶다. 엄마 김 옥사나 씨(42)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다. 엄마는 이고리에게 늘 말한다.“너는 힘든 일 하며 살지 말아라.”담임인 장군휘 선생님은 이고리의 타고난 언어 감각과 승부욕을 칭찬했다. 언젠가 그 자질이 빛을 발할 것으로 믿는다.“한국도 단일민족국가에서 다인종국가로 변화하고 있어요. 앞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게 되겠죠. 이고리의 이중언어 능력, 활발한 성격은 선입견 없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14년에 걸친 ‘한국인 되기’이고리는 세 살 되던 해인 2009년 엄마를 따라 한국에 왔다. 한국에서 올해 13년째를 맞는다. 가족들과는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한국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 오히려 러시아어가 어색하다. 가족들이 놀릴 정도다.“이고리, 러시아 발음 어색해졌네.”이고리는 겉보기엔 한국인이지만 법적 한국인은 아니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엄마는 해외동포가 받을 수 있는 F4비자로 한국에 들어온 뒤 한국인 아버지와 재혼했다. 엄마가 재혼한 뒤 한국에서 낳은 동생도 한국인이다.“전 우리 집에서 돌 같은 존재였어요. 아버지와 동생은 한국인이죠. 엄마도 동포비자가 있어 한국인이나 마찬가지고요. 저만 외국인이었죠.”지난해까지만 해도 이고리 같은 중앙아시아 출신 고려인 4세는 체류 자격이 불안정했다.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F4비자를 받으려면 한국 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대학을 나와야 했다. 이고리는 이 조건을 채우지 못해 10년 넘게 어머니의 동반 가족 자격(F1비자)으로 한국에 머물렀다. 중학교에 입학한 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보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F1비자는 취업 등 경제 활동이 금지되기 때문이다. 이고리는 1년 마다 출입국사무소에 가서 비자를 갱신해야 했다.그러던 그에게 올해 선물같이 체류 자격이 주어졌다. 법무부가 이달 3일부터 국내 초·중·고교를 다니는 중국 및 고려인 동포의 미성년 자녀들에게도 F4비자를 부여하기로 했다. F4 비자로는 이고리가 원하던 아르바이트도 할 수 있다. 체류 기간도 3년마다 연장할 수 있다. 기존에는 러시아 국적의 고려인에게만 나이와 상관없이 F4가 주어졌다. 이고리와 같은 중앙아시아 국적의 미성년 고려인은 한국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F4비자가 나왔다. 법무부는 러시아 국적 동포에게는 러시아의 경제규모가 크고 신규 불법체류자 발생 비율이 낮다는 이유로 F4비자를 주고 있다.이고리는 다행히 체류 자격을 얻었지만 운이 좋은 경우다. 미취학 아동이나 언어 또는 경제적 문제로 학교 밖으로 밀려난 이주 아동들은 이 혜택을 못 받는다. 법무부는 체류 자격을 주며 조건을 달았다. ‘국내 초·중·고교에 재학해야 F4비자를 받는다.’안산시 고려인지원센터 ‘너머’의 김영숙 센터장도 이 점을 안타까워한다.“한국어 실력 부족으로 학업을 따라가지 못해 학교를 그만둔 학교 밖 고려인 청소년들이 정말 많아요. 똑같은 동포인데 국적에 따라 체류 자격을 달리 주는 것은 차별이에요.”법무부는 F4비자를 부여할 중앙아시아 국적 고려인 범위를 점차 넓혀 나가겠다고 밝혔다.이고리는 간신히 체류 자격을 얻었지만 여러 편견과 싸워야 한다. 법적 한국인은 아니기 때문이다.“야, 넌 군대 안 가도 되는데 왜 비자 바꾸려고 하냐.”친구들은 질투 반, 부러움 반이 담긴 농담을 하곤 한다. 이런 말을 들을수록 이고리 마음에는 다짐이 생긴다.‘반드시 떳떳한 한국인이 되고 말아야지.’이고리는 F4비자를 받아 병역의무가 생기면 꼭 해병대에 갈 생각이다.이고리의 외할아버지인 고려인 2세 김 게오르기 씨(65)도 손자의 고민을 알고 있다. 평범한 한국인으로 좋은 직장, 좋은 가정을 꾸리려는 손자의 분투를 이해한다. 게오르기 씨도 고향에선 ‘엘리트’였지만 한국에 온 뒤 바닥부터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게오르기 씨는 이고리가 한국에 오기 1년 전인 2008년 한국 땅을 밟았다. 51세, 남들은 은퇴를 꿈꿀 만한 나이였다. 하지만 아내 이 로자 씨(62)가 당뇨로 한쪽 눈의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제대로 치료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오르기 씨는 먼저 한국으로 유학 간 아들의 생계도 돕고 싶었다.결국 큰 결심을 했다. 타슈켄트 국립사범대 역사학과 졸업장, 교장까지 지낸 교육자로서의 커리어, 방 4개짜리 아파트, 자동차, 별장까지 모두 가족을 위해 버렸다. 그렇게 한국으로 떠나왔다.‘할아버지의 땅’에서 그의 첫 일터는 부산의 한 조선소였다.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까지 하루 13시간 동안 20kg 가까운 장비를 들고 일했다. 매일 밤 손이 저렸다. 게오르기 씨는 끙끙 앓다 몇 달 만에 일을 그만 뒀다. 하지만 부족한 한국어로는 변변한 일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쌀 농장, 간장 공장, 건설 현장까지 안 가본 곳이 없었다.“우즈베키스탄에선 펜보다 무거운 걸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여기에 와선 돌과 쇳덩이를 들었어요. 식용 개 축사에서 일하던 시절은 죽을 때까지 못 잊습니다.”육체적 고통보다 더 그를 힘들게 한 건 무너진 자존심이었다. ‘교장선생님’은 ‘이주노동자 김 씨’가 됐다. 조선소 일자리를 그만두고 일했던 총각무 농장에서는 농장 주인이 퍼붓는 욕설을 견뎌야 했다.“한국어를 못 하니 못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한국에 오기 전엔 내가 고려인,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오고 나니 아니었어요.”막상 한국에 오니 철저한 이방인임을 실감한 게오르기 씨. 그래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한국에서 반드시 성공하고 말겠어.’그는 어렸을 때부터 ‘한국은 할아버지의 땅’이라는 가족들의 말을 듣고 자랐다. 자식들에게도 입버릇처럼 가르치곤 했다. “한국이 우리의 미래다.”딸 옥사나 씨에게도 ‘미래의 땅’ 한국은 녹록지 않았다. 옥사나 씨는 우즈베키스탄 현지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한국어가 능숙지 않은 그가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일은 아버지처럼 험한 일뿐이었다.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F4비자 소지자는 경제 활동은 가능하지만 청소, 포장, 주방보조 같은 단순 노무에는 종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력사무소를 수십 군데 돌았지만 그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혼자 아이를 키우는 그의 사정을 딱히 여긴 안산의 한 공장 대표가 몰래 일을 줬다. 옥사나 씨는 3년간 제품에 필름 부착하는 단순 작업을 하며 지냈다. 출입국사무소에서 미등록 노동자 단속을 나왔을 땐 창고에 숨어야 했다. 적발되면 비자가 취소돼 출국해야 했기 때문이다.그 시절은 아직도 그에게 상처로 남아 있다. 어느 날 공장에서 상사가 그의 엉덩이를 쓱 만지고 지나갔다. 당장 쫓아가 소리를 질렀다.“나도 열심히 일해요. 내가 외국에서 살았다고 이렇게 해요? 나도 아빠 있어요. 경찰에 신고해요.”게오르기 씨와 옥사나 씨 부녀는 있는 힘을 다해 돈을 벌었다. 하지만 어린 이고리를 먹이고 입히고, 로자 씨 병원비를 대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네 가족은 입국한 뒤 5년이 넘도록 원룸살이를 했다. 옥사나 씨가 공장 동료였던 한국인 남편과 2013년 재혼한 뒤로는 분가를 했지만 월세로 산다.이고리는 집에서 공부할 공간도 변변찮다. 이고리의 방엔 책상과 침대를 놓을 공간이 없다. 이고리의 무릎 높이에도 미치지 않는 작고 낮은 테이블 하나가 전부다. 집에서 공부할 공간이 없어 이고리는 시험 기간에 학교에 남아 공부를 한다. 그래도 이고리는 긍정한다.“오히려 현재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요. 매일 바닥에서 공부하다 보면 나중에 ‘진짜 책상’에 앉게 됐을 때 얼마나 더 감사하겠어요.”#1. 한국어가 서툴러 출신국 경력을 살리지 못한 채 단순 노무에 종사한다.#2. 열악한 노동 환경에 지쳐 한국어를 배우지 못한다.#3. 한국어가 부족하니 더 좋은 일자리를 찾지 못한다.이런 악순환을 이고리 가족은 충분히 경험했다. 열심히 노력해도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날 ‘사다리’가 없었다.기회가 없진 않았다. 옥사나 씨는 법무부의 ‘사회통합프로그램(KIIP)’을 이수하면 영주비자(F5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어, 한국문화, 한국사회 이해 교육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이수하기엔 버거웠다. 465시간가량 교육을 받고 시험에서 일정 점수를 취득해야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낮엔 공부하고 밤에는 아이를 돌보며 일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당장 생계가 너무 급했다.“일하고, 이고리 밥 주고, 그러면 주말에 공부할 시간 딱 4시간 있었어요. 그래서 공부 잘 못 했어요. 4단계까지는 합격했는데 5단계에서 떨어졌어요. 5단계 붙으려고 야간에 일하고 집에 와서 밤새 공부했는데…. 그래서 이고리가 어렸을 때 혼자 컸어요.”(옥사나 씨)김영숙 센터장은 이주민들이 사회경제적 지위를 대물림받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고려인들은 현지 동화 정책으로 한국어가 서투르고 한국문화에 익숙지가 않아요. 좋은 일자리를 잡기가 힘들죠. F5비자를 받으려면 수업을 들어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는 고려인이 대부분입니다.”고려인 비중이 높은 안산의 한 고등학교 교사도 사다리를 찾지 못하는 아이들을 걱정했다.“고려인 아이들에게 앞으로 ‘뭐 하며 살고 싶냐’고 물어보면 ‘공장에서 일하며 돈을 벌겠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아요. 아이들은 부모가 하는 일을 보며 꿈을 키우는데, 마땅한 롤 모델이 없는 것이죠.”지난해 11월 오랜만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엄마, 동생 수빈이까지 온 가족이 모여 외식을 했다. 할아버지는 기분이 좋아져 목소리를 높였다.“난 결국 성공했어요. 아들도 잘 살고 있고, 딸도 한국인 남편이랑 결혼해 한국에서 살고 있잖아.”게오르기 씨에게 성공은 그런 것이다. 자식들이 ‘온전한 한국인’이 돼 한국 땅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 그가 13년 동안 부드럽던 교사의 손을 굳은살이 알알이 박인 노동자의 손과 바꿔 얻어낸 성공이다. 그에게 손자 이고리는 성공의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이다.“아들, 딸이 편히 살면 난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내 딸이 잘 살기 위해서는 이고리가 공부를 잘하고 좋은 직장을 가져야 돼.”(게오르기 씨)“이고리는 대학교를 꼭 한 개는 가야 해. 하나라도 붙어서 공부해야 해. 그래야 힘든 일 안해.”(로자 씨)“나중에 우리 아들 통역 일 같은 거 하면 얼마나 좋아요. 제가 회사 다니면서 얼마나 힘들었어요. 우리 아들 대학 공부해서 나중에 성공하면 좋잖아요.”(옥사나 씨)이고리만은 단순 육체노동이 아닌 ‘편한 일’을 하기를. 성공하기를. 그게 이고리 가족이 ‘사다리’를 오를 유일한 기회다. 가족들 말을 듣던 이고리가 말했다.“제가 우리 가족의 마지막 남은 희망인 거죠.”26년을 이방인으로 살다26년간 3대가 한국에서 살았다여전히 딸과 손자, 손녀는 추방 위기이고리의 가족처럼 할머니부터 손주까지 3대가 한국에서 성실하게 살아도 불안한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저소득층의 삶을 벗어나지 못한다. 모국에서는 학사, 석사를 취득한 엘리트여도. 한국에서 20년 넘게 사고 없이 열심히 일해도….26년째 이방인처럼 한국에 살고 있는 치메도르치 어티겅도야 씨(60) 가족이 그렇다. 1996년 몽골에서 한국에 와 가정을 이뤘다. 그는 다행히 체류 자격을 유지하고 있지만 딸, 손주들은 모두 미등록(불법체류) 신분이 될 위기다.어티겅도야 씨는 지난해 10월 28일에도 어김없이 출입국사무소를 찾았다. E7비자 연장을 위해서다. 매년 찾는 곳이지만 사무소 앞 횡단보도를 건널 때부터 손이 떨린다.“10월 30일이 지나면 내가 불법 되는 거야. 출입국사무소는 너무너무 무서운 곳이야.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갈 때마다 벌벌 떨면서 가.”(어티겅도야 씨)함께 온 몽골학교 선생님 2명까지 무사히 비자 기간 연장을 마쳤다. 이들은 출입국사무소 밖으로 빠져나와 비로소 손을 마주 잡고 환하게 웃었다.어티겅도야 씨는 1996년 세 살, 열세 살이던 두 딸을 두고 한국으로 건너왔다. 몽골에서 사범대를 졸업하고 대학 강사로 일했다. 하지만 월급만으로는 두 딸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가 힘들었다. 산업연수생 제도도 있었지만 문이 좁았다. 어티겅도야 씨는 가난을 탈출하려 무작정 관광비자만 믿고 한국으로 건너왔다. 서울 광진구 구의동 미싱공장에 취업했다. 번 돈은 월세와 두 딸을 위해 몽골로 부친 생활비로 다 나갔다. 관광비자 연장을 위해선 3개월마다 몽골로 돌아가야 했지만 비행기표 살 여유가 없었다. 결국 관광비자를 연장 못 해 미등록 신분이 됐다. 매일 머리를 맞으며 일해야 했다. 공장 앞 공중전화에서 두 딸과 통화하는 시간이 유일한 낙이었다. 어티겅도야 씨는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시비를 거는 한국인 동료들의 텃세를 버티지 못하고 6개월 만에 공장을 나왔다.일할 곳을 찾던 그를 구원한 건 역설적이게도 남을 돕는 일이었다. 그는 월 40만 원을 받으며 서울외국인근로자선교회에서 통역 봉사를 시작했다. 2년 동안 선교회의 권성희 목사와 전국을 돌았다. 임금체불을 겪는 외국인 노동자, 남편에게 맞은 결혼이주 여성들의 통역을 맡았다.“당시 이주노동자 10명 중 9명은 임금체불을 겪었어요. 어티겅도야 본인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이주민 신분이었지만 자신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도왔죠. 한국어를 못 하는 이주노동자를 대신해 공장까지 찾아갔어요. 임금을 주지 않는 공장주와 싸웠어요.”(권 목사)정의감 강한 그에게 미등록이란 신분은 늘 목에 걸린 가시였다. 1999년 선교회가 재한몽골인학교를 세우면서 그도 선생님으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안정적으로 일할 곳이 생기자 몽골로 떠나 관광비자를 재발급 받은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그렇게 3개월마다 입국과 출국을 반복하다 2005년 E7비자를 받게 됐다. 재한몽골인학교에서 외국인 선생님으로 일하며 비자 발급 대상인 외국인 전문인력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한국에 산 지 10년 만에 어렵사리 미등록 신분을 벗어났다.어티겅도야 씨는 F4비자는 받았지만 이보다 더 안정적인 영주권을 취득할 생각도 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그의 발목을 잡은 건 소득이다. F5(영주)비자를 취득하려면 연 소득이 전년도 1인당 국민총소득(GNI) 이상이어야 한다. 2021년 F5비자를 신청할 경우 연 소득은 3만1881달러(약 3788만 원)를 넘어야 한다.이주민들은 한국어 실력이 부족해 단순 노무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 영주비자 발급에 필요한 소득 요건을 갖추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몽골학교를 세운 서울 광진구 나섬교회의 유해근 목사는 어티겅도야 씨가 안정적인 신분을 갖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몽골학교 선생님 중 한국에 들어온 지 가장 오래됐고, 한국어가 유창해 가장 영주권을 딸 가능성이 높은 분이에요. 하지만 교사 월급으로 영주비자가 요구하는 소득 요건을 맞출 수 없죠.”대물림되는 미등록 굴레지난해 12월, 비자 갱신 이후 한 달여 만에 만난 어티겅도야 씨는 왼쪽 발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집에서 넘어져 왼쪽 네 번째 발가락이 부러졌다고 했다.서울 지하철역 광나루역에서 대로 사이 골목으로 굽이돌아 15분 정도 걸어 그의 옥탑방에 도착했다. 계단은 난간을 잡지 않고서는 오르기 힘겨울 정도로 가팔랐다.어티겅도야 씨는 학교에 출근을 했다가 손녀까지 어린이집에서 하원시켜 오는 길이었다. 그는 깁스한 발을 절뚝이며 옥탑방 계단을 힘겹게 올랐다.옥탑방 외벽은 초겨울 찬바람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다. 헐거운 틈 사이로 바람이 새고, 파이프가 얼어 따뜻한 물이 잘 안 나올 때도 있다. 바람이 많이 불면 천장이 깨질 듯 흔들린다. 그래도 어티겅도야 씨에게 이 집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살게 된 ‘집 같은 집’이다.“16평 정도 될까. 그래도 남편이랑 살기에 넓어. 방도 세 개야. 저쪽 방은 손주 놀이방이야. 옛날엔 지하방 원룸 살았어. 냄새도 엄청 났고 벌레들이 기어 다녔어. 어떨 때는 벌레가 귀로 들어가기도 했어.”미등록에서 E7비자로, 지하방에서 옥탑방으로, 미싱공장에서 몽골학교로. 어티겅도야 씨는 피나는 노력과 인내로 체류 자격을 얻어냈다. 하지만 어티겅도야 씨의 얼굴에 진 그늘은 여전하다. 자신이 26년간 겪은 불안과 고통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첫째 딸 자야(가명·39)와 손자, 손녀 때문이다.자야 씨는 몽골 현지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미국 캘리포니아대(CALMUS)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았다. 한국에 정착한 엄마와 여동생을 따라 2016년 한국에 들어왔다.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제대로 공부해 보겠다는 꿈이 컸다.“K팝, K스타가 세계적으로 유명하잖아요.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공부해서 나중에 몽골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그대로 접목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죠.”미국 유학까지 마친 자야 씨는 석사 졸업 뒤 2년간 한국에서 구인구직 사이트를 뒤졌다. 하루에 세 곳씩 지원서를 넣었다. 무역, 마케팅, 통역 등 직군도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외국인인 그를 받아주는 회사는 없었다. 올해 초에야 스마트폰을 수출하는 무역회사가 그를 채용했다. 이제 외국인 전문인력이 받는 E7비자를 받을 자격이 됐다. 안정적으로 국내에 머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야 씨는 이제야 몽골, 미국,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두루 섭렵한 인재로 인정받는 순간이 오나 싶었다.하지만 꿈은 순간 물거품이 됐다. 자야 씨가 E7비자를 발급 받으려고 출입국사무소에 과거 소득 자료를 제출할 때였다. 사무소 직원은 자야 씨가 D2비자를 소지한 채 아르바이트한 사실을 문제 삼았다. D2비자 소지자는 단순 아르바이트도 당국에 신고해야 하는데 신고 없이 일한 점이 불법이란 설명이었다.결국 자야 씨는 첫 출근도 못한 채 직장을 그만뒀다. 그의 비자가 만료되면서 남편과 두 아이의 동반비자(F3)까지 박탈됐다. 자야 씨 부부와 아이들 모두 미등록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는 현재 체류 자격을 얻으려 행정소송을 진행 중이다.“이 나라에 해 안 끼치고 합법적으로,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미등록이 안 되려고 얼마나 아등바등 살았는데….”딸에 이어 손자와 손녀까지 미등록 위기에 처하며 어티겅도야 씨의 시름도 더 깊어졌다. 자야 씨가 행정소송에서 패하면 비자를 연장 받지 못한다. 손주들도 몽골로 가야 한다.손자 유루티츠(우주라는 뜻의 몽골어)가 특히 걱정이다. 유루티츠는 세 살 때 한국에 와 어느덧 아홉 살이 됐다. 손녀는 2020년 한국에서 태어나 쭉 자랐다.“애들은 한국이 자기 나라나 다름없어. 자기 엄마랑 얘기할 때 ‘나는 몽골 안 가고 싶어요. 한국에 있고 싶어요’라고 한대. 그래서 매일 밤 제가 하나님한테 기도해요. ‘하나님, 너무 욕심 안 부릴 테니까 우리 딸이랑 손주 2, 3년 만이라도 한국에 있게 해 주세요’라고.”저수지를 벗어나 헤엄칠 수 있을까국내 이주배경 아동들이 한국 사회의 ‘하류’에 갇히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기본적으로 안정적인 체류 자격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한국 정부도 미등록 아동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법무부는 지난해 미등록 이주아동이 일정 요건을 갖추면 특별 체류를 허가하겠다고 발표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20년 “장기체류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한 강제퇴거를 중단하고 구제책을 마련하라”고 권고한 뒤다.하지만 유루티츠는 미등록 신분이 되더라도 구제받을 수 없다. 구제책은 한국에서 태어나 15년 이상을 국내에서 체류하며 초등학교를 졸업해야 적용된다. 게다가 2025년 2월까지만 한시적으로 시행된다.국가인권위원회는 이 구제책에 대해 “2만 명으로 추산되는 미등록 이주아동 중 500명 이하 소수의 이주아동만 구제할 뿐”이라고 평가했다.시민단체와 법조계에서도 비판이 나온다. 안산 원곡법률사무소의 최정규 변호사는 정부가 문제를 방치하고 있다고 지적한다.“국내에서 출생했든 중도입국 아동이든 본인 의지와는 관계없이 미등록 신분이 됐다는 점은 같습니다. 이는 출생지로 차별을 하는 셈입니다. 아이들이 자라며 받는 상처와 혼란을 생각해야 합니다.”안산에서 다문화교회를 운영하는 박천응 목사는 이고리, 어티겅도야 씨의 손주들 같은 이주가정 자녀들을 ‘저수지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부모 세대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극복하지 못한 채 사회의 저층에 고인다는 의미다.“이주배경 아이들의 부모님 세대는 본국에서 유능했어도 한국어나 체류 자격 문제로 대부분 단순 노동에 종사합니다. 경제적 문제로 아이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죠. 공단 지역 노동자들의 자녀는 공단 인력의 저수지예요. 부모에 이어 공단 노동자가 되는 악순환에 빠지는 거죠.”이고리의 고등학교 진학, 자야 씨의 대학원 석사 취득. 이 모두 저수지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인 셈이다.이고리는 이제 꿈을 향해 첫걸음을 내디딜 준비를 하고 있다. 일반고 진학을 시작으로 대학을 나오고 통역사가 될 것이다.석사학위가 두 개나 있고 미국 유학까지 했지만 취업이 어려웠던 자야 씨처럼 사다리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이고리는 자기 이름의 뜻을 생각한다. ‘이고리’는 그리스어로 ‘지킨다’는 의미다. 엄마와 가족들을 지킬 수 있도록 강해지고 싶다.“뭔가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고 하잖아요. 전 제 가족을 지키는 강함을 가진 사람이 될 거예요.”공존 - 네번째 이야기 : 나는 인도네시아계 한국인입니다 1월 19일 공개이고리처럼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으면 군대는 가야지”라고 말하며 해병대에 간 인도네시아계 한국인 청년이 있다. 갓 스무 살, 남들은 피하지 못해 안달인 군대를, 그것도 해병대를 왜 자원해서 가려고 했을까.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부터 지속적으로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동행: 그렇게 같이 살기로 했다’는 동아일보가 지켜온 저널리즘의 가치와, 경계를 허무는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기존에 경험할 수 없었던 디지털 플랫폼 특화 보도는 히어로콘텐츠 전용 사이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기사 취재 : 이새샘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기자▽사진·동영상 취재 : 송은석 남건우 기자▽동영상 편집 : 남건우 기자 박세진 PD 안채원 CD▽그래픽 : 김충민 기자▽프로젝트 기획 : 위은지 기자▽사이트 제작 : 임상아 고민경 뉴스룸 디벨로퍼히어로콘텐츠팀신희철 기자 hcshi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남건우 기자 woo@donga.com}

“미등록 아이가 있는데 받아줄 수 있나요?” “미등록이 뭐예요?” “부모님이 불법 체류하는 분의 아이요.” “어휴, 저희는 안 돼요.” 인도네시아인 부부가 한국에서 낳은 조나단(가명·6)은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어린이집을 가지 못했다. 국내에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은 미등록 이주아동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비자 갱신에 실패하면서 영문도 모른채 미등록 신분을 물려받았다. 태어났다는 사실조차 증명하기 어려운 ‘투명인간’이 된 셈이다. 조나단은 미등록 신분 탓에 어린이집도, 문화센터도, 그 어디에도 가기 힘들었다. 조나단에겐 경기 수원시의 두 평(약 7m²) 남짓한 원룸이 거의 유일한 세계였다. 조나단이 자라며 집은 점점 좁게 느껴졌다. 조나단이 돌이 지났을 무렵 엄마 와티(가명·39) 씨는 어쩔 수 없이 조나단을 데리고 뒷산으로, 시장으로 외출을 시작했다.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러웠다. 미등록 아동은 병원 치료조차 거부당할 수 있어 걱정이 컸다. “어디를 데리고 가든 다칠까 봐 겁이 났어요. 비자 만료 후엔 보건소에서 예방 접종조차 거부당했거든요.”○ 조나단의 두 평 세계 와티 씨는 아이를 언제까지 방치할 순 없었다. 아이가 만 세 살이 지난 2019년 말 와티 씨 부부는 인도네시아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내년 봄에 돌아가 애를 적응시켜 2학기부터 어린이집에 보내야지.’ 비행기편을 알아보고 짐도 쌌다. 그런데 이듬해 초 돌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인도네시아에서도 코로나19 확진자가 늘었다. 부부는 방역이 불안한 모국으로 아들을 보내기가 두려웠다. 코로나19가 야속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생계까지 어려워졌다. 일용직 노동자인 남편은 월급이 일정치 않았다. 와티 씨도 돈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조나단을 맡길 어린이집이 없으니 난감했다. 2019년 겨울, 식당 청소 일을 구한 적은 있다. 근무시간은 오전 7시부터 10시까지. 식당이 문을 열기 전이라 조나단을 데려가 일할 수 있었다. 새벽부터 겨울옷으로 꽁꽁 싸맨 조나단을 유모차에 태우고 일터로 향했다. 걸어서 30분 거리를 찬바람 맞으며 오가면서도 일감이 있어 행복했다. 하지만 코로나19 확산세가 심해져 이마저도 그만둬야 했다. 생계를 이으려면 조나단을 돌보며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집에서 인도네시아 음식을 만들어 이주민들에게 팔기 시작했지만 생활비는 여전히 부족하다. 어린이집이 조나단을 받아줄 방법은 없는 것일까. 한국인 아동이 많은 어린이집은 여지를 안 주는 편이다. 학부모들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서다. 더군다나 경기 수원시 이주아동은 비자가 있든 없든 보육비를 전혀 지원받지 못한다. 부모가 보육료 전액을 내야 한다. 어린이집은 이주노동자 부모들의 일자리가 불안정하다는 점을 안다. 보육료가 밀릴까 봐 걱정돼 입소를 거부하는 것이다. 수원어린이집협의회 측은 “수원시청이 외국인 아동을 전산에 등록해야 입소할 수 있다. 미등록 아동은 단체 상해보험 가입도 안 돼 혹시라도 다치면 보상을 못 받는 점도 부담”이라고 했다.돌고 돌아 안산 밖엔 답이 없다미등록 이주아동, 어린이집-학교서 받고 진학-비자 상담 선생님들도 있어 돌아와○ 이주 속의 이주 “미등록 이주아동을 받아주는 어린이집이 안산에 있대요.” 조나단을 거부한 어린이집이 10곳이 넘었을까. 조나단을 안타깝게 여긴 수원의 한 교회 교사가 지난해 와티 씨에게 안산행을 제안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수원으로 이주해 겨우 정착했는데….’ 이주에 이은 이주는 버거웠다. 와티 씨는 수원에서 쌓아온 걸 모두 버려야 했다. 미등록인 조나단을 선뜻 받아준 병원, 육아용품을 물려주던 집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모두. 그래도 와티 씨는 5년째 살던 수원을 떠날 용기를 냈다. 조나단을 위해서. 다행히 안산의 한 어린이집이 그해 5월 조나단을 받아주기로 결정했다. 조나단 부모의 여권과 조나단의 병원 출생증명서만 확인하고 입소를 허락했다. 어린이집 전체 아동의 90% 이상이 이주 배경 아동이어서 별다른 선입견이 없었다. 보육료를 미납한 외국인 부모들을 독려해 본 경험도 있었다. 안산의 이러한 보육 환경 뒤엔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이 있었다. 안산시는 2018년 경기도에서 처음으로 자체 예산으로 등록 외국인에게 보육비를 주기 시작했다. 보육비 지원 덕에 안산 어린이집들은 이주아동들을 수월하게 받게 됐다. 경험이 쌓이면서 이주민 학부모들의 자녀 보육료가 밀릴 것이란 선입견도 깨졌다. 와티 씨는 이사까지 열흘이 남았는데도 일단 등원을 시작했다. 조나단 손을 잡고 수원에서 안산까지 지하철과 도보로 1시간씩, 왕복 2시간을 오갔다. 조나단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곤 근처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제가 좀 길치거든요. 새로운 집과 어린이집 근처 길을 영상으로 찍어서 외웠어요.” 와티 씨는 등원과 하원을 매일 반복하기 힘겨웠지만 뿌듯했다. 조나단은 새로운 한국어 단어와 표현을 금방 배워오곤 했다. 엄마와 헤어질 때도 떼쓰지 않았다. 오히려 인도네시아어로 이렇게 힘줘 말했다. “엄마, 나 너무 빨리 데리러 오지 마. 나 7시간 정도는 있어야 해.” 안산에 정착하는가 싶었다. 조나단이 어린이집을 한 달 다녔을 무렵, 또 위기가 찾아왔다. 지난해 여름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안산 어린이집마저 등원이 중단됐다. 맞벌이 부모 등 특수한 경우에만 아이를 돌봐주는 긴급 보육이 시작됐다. 어린이집에선 긴급 보육을 신청하려면 부모의 재직증명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비자가 만료돼 일용직으로 일하는 조나단 아빠는 재직증명서를 낼 수 없었다. 매월 소득이 일정치 않으니 월급 명세서도 내질 못했다. 게다가 와티 씨는 둘째를 임신했다. 입덧이 심해졌다. 병원 진단서까지 받아 어린이집에 냈다. ‘제발, 잠시만이라도 아이를 받아주세요.’ 간절한 마음이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시 매뉴얼을 따라야 했어요. 여긴 코로나 확진자가 많이 나오는 지역이라 (시 측에) 저희만 봐달라며 (입소를 허용)할 수가 없었어요.”(안산 어린이집 원장)여섯살 조나단-열여섯 아딜벡한국이 자신의 집이라는 조나단어린이집 찾아 수원서 안산으로 이주청주로 이사갔던 아딜벡, 다시 유턴 ○ 언어를 잃다조나단은 수원에 이어 안산의 원룸에 다시 고립됐다. 성인 네 명이 앉으면 꽉 차는 공간. 조나단은 먹고 자는 건 물론이고 공부와 놀이까지 이곳에서 다 해결해야 한다. 친구는 결국 엄마뿐이다. 와티 씨는 조나단이 수원에서보다 더 걱정됐다. 한국어 실력이 제자리걸음도 아닌, 뒷걸음질이기 때문이다. 원래 조나단은 인도네시아어로는 말이 많은 아이다. 주변 이웃들이 ‘짹짹이’란 별명을 붙여줄 정도다. 하지만 놀이터에서 한국인 친구들을 만나면 섣불리 다가가질 못한다. 조나단 가족을 돕고 있는 수원 교회의 인도네시아인 목사 아구스(가명) 씨도 이 점을 심각하게 여긴다. 한국어는 한국에서 살기 위한 기본 중 기본이기 때문이다. “조나단이 여섯 살인데 한국어 수준은 두 살 정도로 보여요. 단어들만 말해요.” 엄마마저 한국어를 거의 못해 악순환이다. 조나단은 엄마의 서툰 한국어를 듣고 자랄 수밖에 없다. 갈 곳이 없다 보니 사회성도 떨어진다. 조나단은 때때로 화를 못 참고 모든 걸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 애들은 화가 나면 울거나 떼를 쓰기 마련이지만 조나단은 어른들의 화난 표정을 따라 한다. 조나단이 한국을 떠나 인도네시아로 가면 모든 게 해결될까. 조나단은 단 한 번도 인도네시아를 가본 적이 없다. “조나단, 보고 싶어. 인도네시아로 와.”(조나단 할아버지) “제 집은 한국이에요. 인도네시아 안 가요.”(조나단) 조나단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영상으로만 만나봤다. 많게는 이틀에 한 번 인도네시아어로 통화한다.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조나단은 분명히 선을 긋는다. “한국에서 살고 싶다”고. 와티 씨는 굴레를 언제 벗어날지 알 수 없다. 방역 여건을 생각하면 인도네시아로 돌아가기도 어렵다. 그러는 동안 아이는 말을 배우고 친구를 사귈 시간을 놓쳐버린다. 미등록 아동을 구제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법무부는 지난해 4월 “국내에서 태어나 15년 이상 거주하고 국내 중·고교를 다닌 아동에게 체류를 허가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 제도는 2025년 2월까지만 시행된다. 조나단은 여섯 살. 9년을 채우고 나면 2031년이 된다. 제도가 종료된 지 한참 뒤일 것이다. 조나단은 지난해 11월 말 간신히 어린이집에 가기 시작했다. 부모가 코로나19 백신 접종 증명서를 제출해 등원 허가를 받았다. 잠시 구제는 받았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임시로 허가를 받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미등록 이주아동의 보육을 보장하는 제도는 여전히 없다.○ 안산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안산으로 모여드는 이주민은 조나단 같은 영유아만이 아니다.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누르가셰프 아딜벡(16)은 카자흐스탄에서 왔다. 아홉 살 때인 2015년, 고려인 3세인 어머니를 따라 안산에 왔다. 카자흐스탄 경제가 악화돼 더 좋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아딜벡 가족은 4년 만에 아버지 직장을 따라 안산시에서 충북 청주시로 이사했다. 아딜벡은 안산에 남으려면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주민이 많은 안산을 떠나 한국인이 많은 곳에서 자신의 실력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아딜벡이 다니던 안산 선일중은 이주배경 학생이 전체의 50%를 넘는다. 하지만 청주의 학교에선 한 학년에 서너 명 정도뿐이다. “처음에 애들이 엉덩이를 툭툭 치며 장난을 거는 거예요. 카자흐스탄에선 절대 남자들끼리 밀접 접촉을 안 하거든요. 안산에선 한국 애들도 그런 장난 안 쳐요. 우리가 싫어하는 걸 아니까요.” 아딜벡은 문화적 차이에 당황했다. 성적도 갑자기 떨어졌다. 청주 학교에서 본 첫 중간고사 점수는 평균 60점대였다. ‘원래 반에서 3등 밑으로 떨어져 본 적이 없었는데….’ 아딜벡은 정신이 번쩍 들어 공부에 매달렸다. 다행히 이듬해에는 평균 80점대 후반까지 점수를 끌어올렸다. 이번엔 고등학교 진학이 문제였다. 아딜벡은 카자흐스탄에서 증권사 애널리스트였던 아버지처럼 금융계 진출을 꿈꾸고 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주식 공부를 시작할 정도로 금융에 관심이 많다. 경영과 금융에 특화된 특성화고 진학이 목표다. 하지만 청주에선 이런 특성화고를 찾을 수 없었다. 진로나 비자 문제를 상담할 곳이 없는 점도 난관이었다. 안산의 선일중엔 다문화부가 따로 있었다. 러시아어에 능통한 선생님이 비자 문제를 상세히 안내해줬다. 다른 선생님들도 이주배경 학생들 처지를 워낙 잘 이해해 ‘맞춤형 진로 상담’을 해주곤 했다. 동네엔 고교 진학을 조언해줄 고교생 이주배경 선배들도 많았다. 하지만 청주에선 이 모든 걸 아딜벡이 알아서 해야 했다. ‘안산밖에 답이 없다.’ 아딜벡 가족은 결국 1년도 채 되지 않아 안산으로 돌아왔다. 여전한 냉대에 좌절하는 ‘그들’안산, 이주민 가족의 보육 환경 월등 경기도 차원 지원 늘리려하자 거센 반발 日-獨은 국적 상관없이 아동 복지 혜택 ○ 섬을 징검다리로안산의 이주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수월하게 건너가도록 징검다리를 놓는 시도도 있었다. 2019년 경기도의회에서는 ‘경기도 이주아동 조례안’이 발의됐다. 조례안은 이주아동을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지지 아니한 18세 미만의 사람’으로 규정해 혜택을 보장했다. 조례안이 통과됐다면 조나단도 수원 어린이집에 갈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례안을 주도한 김현삼 의원은 물론이고 100명이 넘는 경기도의원들에게 ‘문자 폭탄’이 쏟아졌다. 외국인 반대 단체들이었다. 안산에서는 10차례가 넘는 반대집회가 열렸다. 김 의원 집 앞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반대 단체분들은 이주민들이 아이를 앞세워 한국에 들어오고, 한국인의 자리를 빼앗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더라고요.” 김 의원은 ‘실패한 조례안’을 씁쓸하게 회상했다. 1980, 90년대 반월공단에서 일했던 그는 공단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안다. “이주노동자가 부족해 주문량을 생산해 내질 못한다고 사장님들이 하소연합니다. 내국인은 채용하고 싶어도 오질 않고요. 그런데도 이주민에 대한 인식은 바뀌지 않아요.” 특히 영유아 보육은 이주민 지원의 사각지대다. 초등학교 때부터는 유엔 아동권리협약에 따라 외국인이든 내국인이든 공교육을 받을 수 있다. 보육은 다르다. 세금을 꼬박꼬박 내도 외국인에겐 보육비 지원 혜택이 없다. 지난해 경기도의회는 등록 외국인주민 자녀에게 보육비를 직접 지원하도록 명시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경기도 내에서 이주아동에게 보육비를 별도로 지원하는 지자체는 안산, 부천, 시흥, 군포시 등에 그친다. 그마저도 시 자체 예산으로 해결한다. 경기도는 조례 통과 뒤에도 지원 예산을 편성하지 않았다. 경기도 측은 “외국인 보육비 지원은 예산이 많이 들고, 중앙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국가들은 어떨까. 일본은 2019년부터 국적을 묻지 않고 만 3∼5세 어린이에게 무상보육과 부모 대상 육아교육을 시작했다. 독일은 자국에서 태어난 모든 아동에게 출생증명서를 발급한다. 출생등록이 되면 보육 지원이나 예방접종 등 복지 혜택을 받기 수월해진다. 조나단처럼 ‘보육 차별’을 받는 아이들이 많다. 조나단의 수원 친구인 미카엘(가명·3)과 안나(가명·2)도 미등록 이주아동이다. 한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어린이집에 갈 수가 없다. 아이 부모는 조나단처럼 어린이집을 찾아 수원에서 안산으로 이사할지 고민 중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국내 미등록 이주아동은 약 2만 명 규모로 추산된다. 인권단체는 규모가 이보다 더 클 것으로 예상한다. 외국 국적 아동은 출생 등록을 하지 않아 통계에 잡히지 않은 아동들이 있을 수 있다. 와티 씨는 아이들이 부모 탓에 불행으로 삶을 시작하질 않길 간절히 바란다. “아이는 신이 주신 축복이잖아요. 아이의 미래에 부모가 걸림돌이 되는 안타까움을 다른 사람들은 겪지 않았으면 해요.” 히어로콘텐츠팀▽팀장: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기사 취재: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기자▽사진·동영상 취재: 양회성 송은석 남건우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편집: 한우신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사이트 개발: 고민경 임상아 뉴스룸 디벨로퍼▽동영상 편집: 남건우 기자 박세진 PD 안채원 CDQR코드를 스캔하면 ‘공존’을 디지털 스토리텔링으로 구현한 사이트()로 연결됩니다. 히어로콘텐츠팀신희철 기자 hcshi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남건우 기자 woo@donga.com}

외국인 비율 13%. 한국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 한국 다문화의 메카. 이주민들의 강남. 경기 안산. 안산 이주민들은 말한다. ‘내 국적은 안산’이라고. 안산의 토양에서 이주배경의 다양한 한국인이 자란다. 누군가는 ‘진짜 사나이’가 되겠다며 해병대에 가고, ‘한국인의 조건’을 채우려 취업 대신 대학 진학을 꿈꾼다. 어린이집들의 거부에 단칸방에 갇혀 살다 언어를 잊고 26년을 이방인처럼 살며 삼대 가족을 이룬다.외국인 비중이 5% 이상이면 ‘다문화사회’로 불린다. 안산은 이 비중을 2008년 넘겼다. 2008년 한국에서 다문화 지역은 12곳뿐이었다. 이제는 70곳에 가깝다. 제 2, 제 3의 안산이 생겨나고 있다. 2020년, 코로나19 확산에 국내 외국인이 사상 처음 줄었다. 중소기업 10곳 중 6곳은 생산에 차질이 생겼다. 농가 일손 부족에 농산물 값이 치솟았다. 이주민과의 공존은 피할 수 없는 미래다. 과연 한국은 공존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취재팀은 지난해 8~12월 ‘안산인’ 100여 명을 만났다.동아일보 디오리지널 페이지()를 방문해 보세요. 다양한 사진과 영상, 인터랙티브 효과가 결합된 새로운 형식의 기사로 공존 시리즈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구십칠, 구십팔, 구십구, 백!”2021년 12월 6일 경기 안산시의 한 어린이집 인근 놀이터. 그네 타기에 한창인 조나단(가명·6)은 한국어로 크게 숫자를 외쳤다. 엄마 와티(가명·39) 씨가 등을 밀어줄 때마다 박자 맞춰서. 조나단은 인도네시아인 부부가 낳은 아이다.“스낭 다탕 크 테카(어린이집 오니까 좋아)? 푸냐 트만 바냑 디 테카(어린이집에 친구 많아)?”(와티 씨)“이야 스낭(응 좋아). 바냑(많아요).”(조나단)어린이집은 조나단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다. 조나단은 어린이집에 다녀오면 ‘짹짹이’가 된다. 짹짹이는 어른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조나단이 호기심도, 말도 많아서다. 한국어가 서툰 엄마, 아빠에게 한국어도 가르쳐준다.“나 화장실 가요.”(와티 씨)“‘갔다 올게요’라고 해야지.”(조나단)“간지러워.”(아빠)“‘가려워’가 맞아.”(조나단)“어린이집에서 실컷 놀며 에너지를 쏟고 와서 그런지 집에서 잠도 잘 자요. 짜증도 덜 내고요.”(와티 씨)어린아이를 가진 부모에게는 익숙한 풍경이다. 하지만 조나단과 와티 씨는 어렵게 얻어낸 행복이다. 이들에게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인도네시아를 떠난 부부는 경기 수원시에 정착했다. 수원은 ‘제2의 고향’이 됐다. 하지만 안산시로 다시 떠나야 했다. ‘이주 속 이주’를 감행해야 했다. 조나단은 인도네시아인 부부 구스티(가명·41) 씨와 와티 씨의 아들이다. 부부가 결혼한 지 13년 만인 2016년 5월 수원시에서 낳았다. 조나단이 미등록 이주아동이 된 건 부부의 국내 비자가 만료돼서다. 부모가 비자 갱신에 실패하면서 ‘한국밖에 모르는’ 조나단은 한국에 체류할 수 없는 신분이 됐다. 투명인간처럼 살게 됐다.수원시의 두 평 남짓한 원룸방.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38만 원짜리인 조나단 가족의 보금자리. 조나단에겐 이곳이 세계의 전부였다. 미등록 신분 탓에 어린이집도, 문화센터도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조나단이 만 1세가 될 때까진 괜찮았다. 하지만 걷기 시작하니 집이 점점 좁게 느껴졌다. 와티 씨는 조나단을 조심스럽게 데리고 다녔다. 조나단은 다치면 병원조차 가기 힘들기 때문이다.“동네 놀이터, 전통 시장, 어디를 데리고 가든 다칠까 봐 겁이 났어요. 비자가 만료되고 나서는 보건소에서 예방 접종조차 거부당했거든요.”인도네시아에서 온 신도들이 다니는 수원의 한 교회가 그나마 안전한 공간이었다. 비슷한 처지의 미등록 외국인들이 있었고, 인도네시아어로 소통할 수 있었다. 이젠 교회마저 자주 가기 어려워졌다. 2020년 초부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출입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아이가 자라며 원룸은 더욱 비좁게 느껴졌다. 아이의 활동 폭이 넓어졌다. 조나단이 말하고 뛰어다니는 데 익숙해진 세 살 무렵이었을까. 와티 씨의 몸과 마음도 지쳐버렸다.생계까지 어려웠다. 일용직 노동자인 구스티 씨의 소득은 일정치 않았다. 한 달에 80만 원밖에 못 벌 때도 있었다. 와티 씨도 돈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조나단을 맡길 어린이집이 없었다.식당에서 문 열기 전 청소하는 일을 구한 적은 있다. 오전 7시부터 오전 10시까지 청소를 했다. 조나단을 유모차에 태워 놓고서.이마저도 코로나19로 3개월 만에 일자리를 잃었다. 집에서 인도네시아 음식을 만들어 팔아보려 했지만 놀아 달라고 떼를 쓰는 조나단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계속 밖에 나가자고 해요. 집에선 TV와 스마트폰만 보려 하고요. 저는 책이라도 보여주려다가 싸우죠.”조나단은 인도네시아어로는 말이 많은 아이였다. 그런데 동네 놀이터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들에게는 다가가지 못했다.“같이 놀고 싶어 하면서도 어려워하더라고요. 말이 안 통해서 더 그랬던 거 같아요.”수원 교회의 선생님 김모 씨는 어린이집을 해결책으로 제안했다. 한국어를 배우고 친구들도 사귈 수 있는 공간.“미등록 이주아동이지만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야말로 꿈이었죠.” 와티 씨 대신 어린이집을 알아봐 준 김 씨가 당시를 회상했다.“세 살짜리 미등록 아이가 있는데 받아줄 수 있나요?”“미등록이 뭐예요?”“부모님이 불법 체류하는 분의 아이요.”“어휴 저희는 안 돼요.”단칼에 거절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돈을 잘 낼 수 있다’는 말은 입가에만 맴돌았다.“대화가 돈 얘기까지 가지도 않아요. 순화시켜서 ‘미등록’ 아이라고 하면 어린이집에선 무슨 말인지 몰라요. 그러다 ‘불법 체류자’라고 하면 기겁하며 전화를 끊는 패턴이 반복됐죠.”(김 씨)그렇게 거절당한 어린이집이 10여 곳에 달했다. 어느새 3년이 흘렀다.와티 씨도 조나단이 계속 투명인간처럼 지내는 게 싫었다. 2019년 말부터 인도네시아로 돌아갈 계획도 세웠다. 비행기 편을 알아보고 짐까지 다 쌌다. 그런데 돌연 코로나19가 터졌다. 인도네시아에서도 코로나 확진자가 증가하고 있었다.“조나단에게 한국이 더 안전할 것 같았어요. 더 머물 수밖에 없었어요.”(와티 씨)“미등록 이주아동을 받아주는 어린이집이 안산에 있대요.”조나단의 안타까운 사정을 보던 교우 김모 씨가 대안을 내놨다. 안산시로 아예 이사를 하는 것이다.“안산에는 미등록 이주아동들을 받아주는 어린이집이 많았어요. 보육료를 아예 안 내도 되는 곳도 있고, 조금 싼 곳도 있었어요.”(김 씨)안산시에는 외국인주민상담지원센터, 글로벌청소년센터 등 외국인 부모들이 정보를 얻기 쉬운 곳들이 많다. 보육과 교육 여건이 좋은 편이다. 안산은 이주민 학부모들의 ‘대치동’인 셈이다.‘인도네시아에서 수원으로 이주해 겨우 정착했건만 수원에서 안산으로 또 이주해야 하다니.’이주에 이어 이주를 하긴 정말 쉽지 않았다. 수원에서 쌓아온 걸 모두 버려야 했다. 보건소에서 미등록이란 이유로 예방 접종을 거부당한 조나단을 받아준 병원, 육아용품이 모자란 조나단에게 용품을 물려주던 집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모두.와티 씨는 용기를 냈다. 이미 5년째 살아 ‘제2의 고향’이 된 수원이지만, 조나단의 어린이집 입소가 가장 중요했다. 안산의 한 어린이집이 2021년 5월 28일부터 조나단을 받아주기로 했다.안산에서 구한 집에 입주할 수 있는 날짜는 2021년 6월 8일. 조나단의 어린이집 입소일보다 10일가량 뒤였다. 와티 씨는 조나단을 데리고 수원 집에서 안산 어린이집까지 지하철로 왕복했다. 지하철과 도보로 1시간씩, 왕복 2시간이 걸렸다. 조나단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근처에서 기다려야 했다.“‘안산 적응’을 연습했어요. 제가 좀 길치거든요. 새로운 집과 어린이집 근처 길을 영상으로 찍어서 외웠어요. 아직 안산에는 친구가 없어요. 주말에 수원 교회를 가서 교인들을 만나요.”(와티 씨)수원의 일부 어린이집들이 조나단을 거부한 이유는 다양하다. 우선 한국인 자녀들이 많은 어린이집은 굳이 이주아동을 받을 필요성을 못 느낀다. 한국 학부모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더군다나 수원시에서 이주아동은 한국인 아동과 달리 보육비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한다. 부모가 보육료 전액을 내야 한다. 미납하면 어린이집 재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주노동자인 부모는 일자리가 불안정한 편이라 보육료를 밀린 채 달아날 수 있단 시각이 있다.수원시 어린이집 200여 곳을 회원으로 둔 수원어린이집협의회 측은 미등록 아동에 난색을 표했다.“외국인 아동은 수원시청이 전산시스템에 직접 등록해 줘야 입소할 수 있어요. 어린이집이 마음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미등록 아동은 단체 상해보험에 가입도 안 됩니다. 혹시라도 다치면 보상을 못 받는 점도 부담입니다.”안산의 상황은 달랐다. 미등록 이주아동의 입소를 허용하는 곳이 여럿 있었다. 비정부기구(NGO)가 운영하는 일부 어린이집은 아예 보육료를 받지 않았다.“아이는 등록이든 미등록이든 차별받지 않고 교육받을 권리가 있어요. 안산시도 미등록 아동은 보육료를 지원하지 않아요. 그런데 부모가 돈을 낼 수 있다고 하면 똑같이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안산의 한 어린이집 원장)이 어린이집은 조나단 부모의 여권과 조나단의 출생증명서만 확인하고 입소를 허락했다. 전체 아동의 90% 이상은 이주배경 아동이어서 선입견이 없었다. 보육료를 미납한 외국인 부모들을 독려해 본 경험도 있었다.행복했던 기간은 한 달에 불과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같은 해 7월 초 어린이집 등원이 전면 중단됐다. 맞벌이 부모 등 특수한 경우에만 아이들을 돌봐주는 긴급 보육이 시작됐다.조나단은 어린이집에 갈 수 없었다. 어린이집이 부모님의 재직증명서를 요구했지만, 비자가 만료된 구스티 씨는 재직증명서를 제출할 수 없었다. 매월 소득이 일정치 않아 재직증명서를 대신할 만한 월급 명세서도 내지 못했다.“조나단 아빠가 고용됐던 기업이 부도났고, 이후 새로 옮긴 회사에서도 일감이 없어서 계속 회사를 옮겨 다녔어요.”(목사 아구스 씨(가명))이 와중에 와티 씨에게 둘째가 생겼다. 와티 씨는 입덧이 심해지자 병원 진단서까지 받아 어린이집에 냈다. ‘제발, 아이를 받아주세요.’ 간절한 마음이었지만 소용이 없었다.“시 매뉴얼을 따라야 했어요. 코로나 확진자가 많이 나오는 지역이라 (시 측에) 저희만 봐달라며 (입소를 허용)할 수가 없었어요.”(안산 어린이집 원장)2021년 11월 12일. 공사 중인 어린이집을 찾은 조나단은 와티 씨의 손을 잡고 정문 근처에서만 서성였다.멀찍이 서서 바라보기만 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조나단, 어린이집이네. 어린이집 다시 가고 싶어?”와티 씨가 말을 걸었지만, 조나단은 어린이집을 쳐다보기만 했다.어린이집은 낯선 모습이었다. 시멘트 외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공사 폐기물이 자루에 담겨 입구에 잔뜩 쌓여 있었다.조나단이 없는 사이 전면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간 것이다. 긴급 보육 대상인 어린이들은 임시로 마련된 다른 어린이집에 다니게 됐다. 조나단은 어린이집 친구들을 보고 싶지만 어린이집이 어딘지 알 수도 없다.두 평 원룸에 다시 갇히다조나단은 안산의 방 한 칸짜리 원룸에 다시 고립됐다. 어른 네 명이 앉으면 꽉 차는 공간. 조나단은 이곳에서 먹고 자는 것은 물론이고 공부와 놀이까지 다 해결해야 한다. 친구는 결국 엄마뿐이다.집에서 500m 거리에 있는 공원이 조나단의 유일한 놀이터다.“공원에 나가자.”와티 씨의 말에 조나단은 재빨리 일어섰다. 모래놀이용 삽과 통을 들고서. 날씨가 좋을 땐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을 찾는다. 하지만 겨울엔 이마저도 어렵다.와티 씨는 미등록 신분으로, 낯선 안산이란 도시에서 더욱 움츠러든다. 어느 날 조나단이 열이 많이 났다. 수원에서라면 자주 가던 병원을 찾았을 일이었다. 하지만 와티 씨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어느 병원이 미등록인 우리를 받아줄까.’다른 곳도 함부로 갈 수가 없다. 조나단은 책을 좋아하지만 지역 도서관을 아쉽게 지나치기만 한다.와티 씨 모자는 둘 다 한국어가 서투르다.“쉬 안 가? 쉬 안 갈래?”와티 씨가 한국어로 묻자 조나단은 “응”이라고만 했다.서툰 한국어를 듣고 자란 조나단의 한국어도 더디다.“조나단이 여섯 살인데 한국어 수준은 두 살 정도로 보여요. 놀 때 단어들만 말해요. 문장을 만들어서 자기 의사를 전달하는 건 아직 안 돼요. 인도네시아 말은 되게 잘해서 ‘짹짹이’라고 별명을 붙여 줬을 정도인데 말이죠.”조나단 가족을 돕고 있는 인도네시아인 목사 아구스 씨는 조나단의 언어 능력이 걱정이다.사회성도 떨어지고 있다. 조나단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모든 걸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했다.“점점 애 같지 않아졌어요. 애들은 울거나 떼를 쓰는데 조나단은 어른들처럼 화를 내더라고요. ‘너 가만히 안 둘 거야’ 같은 험악한 말을 해요. 표정도 어른들이 눈살을 찌푸리거나 하는 것을 따라 해요.”(와티 씨)조나단이 한국을 떠나 인도네시아로 가면 모든 게 해결될까. 조나단은 단 한 번도 인도네시아를 가본 적이 없다.“조나단, 보고 싶어. 인도네시아로 와.”“제 집은 한국이에요. 인도네시아 안 가요.”조나단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영상으로만 만나봤다. 그럴 때마다 조나단은 분명히 선을 긋는다. 한국에서 살고 싶다고.조나단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은 많다. 조나단이 다니는 교회만 해도 미등록 이주아동 미카엘(가명·3)과 안나(가명·2)가 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다. 미카엘과 안나의 부모들도 어린이집에서 계속 거부를 당했다. 이제 수원에서 안산으로 이사를 고민 중이다.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국내 미등록 이주아동은 약 2만 명 규모로 추산된다. 인권단체는 규모가 이보다 더 클 것으로 예상한다. 외국 국적 아동은 출생 등록을 하지 않아 통계에 잡히지 않은 아동들이 있을 수 있다.이 아이들이 갈 곳은 안산뿐이다. 안산시는 2018년 경기도에서 처음으로 시 예산으로 등록 외국인 주민 자녀에게 보육비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2020년에는 전액 지원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지난해부터 누리과정 보육비 24만 원을 전액 지원하고 있다. 어린이집들이 보육비 지원을 받으니 이주아동들도 입소하기 수월해졌다.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주민 가족들은 안산으로 수렴한다. 안산은 이주민이 모이는 섬 같은 곳이 됐다.경기도의 이주아동 보육 실태를 조사한 이영아 아시아의창 상임이사는 이주민 보육 정책이 안산 외의 지역에서도 확대돼야 한다고 강조한다.“외국인 아동이 늘어난다는 건 한국에서 가족을 형성해 살아가는 이주민들이 많아진다는 얘기입니다. 보육 정책은 가족 전체를 도울 수 있어요. 보육비를 지원하는 지방자치단체가 늘어나야 합니다.”결국 돌고 돌아 안산으로안산의 ‘이주민 인프라’를 찾아 또 다른 이주를 하는 이주민들은 조나단뿐만이 아니다.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누르가셰프 아딜벡(16)은 카자흐스탄에서 온 소년이다. 열 살 때인 2015년, 고려인 3세인 어머니를 따라 안산에 왔다. 카자흐스탄 경제가 악화돼 더 좋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였다.아딜벡 가족은 4년 만에 안산에서 충북 청주로 이사하게 됐다. 아버지가 직장을 청주로 옮겨서였지만 사실 안산에 남으려면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딜벡은 이주민이 많은 안산 밖 다른 지역에서 스스로 실력을 알아보고 싶었다.“공부도 열심히 하고 한국어도 잘하고, 적응을 잘했어요. 그래서인지 ‘한국 아이들과 제 실력으로 경쟁하고 싶다’는 말도 했었죠.”(임미은 선일중 교사)아딜벡이 다니던 안산 선일중은 이주배경 학생이 전체의 50%를 넘는다. 하지만 청주의 학교에선 이주배경 학생이 한 학년에 서너 명 정도뿐이었다. 아딜벡이 처음 겪어보는 환경이었다.“처음에 애들이 엉덩이를 툭툭 치며 장난을 거는 거예요. 카자흐스탄에선 절대 남자들끼리 밀접한 접촉을 안 하거든요. 안산에선 한국 애들도 중앙아시아 출신 애들이 싫어하는 걸 잘 아니까 그런 장난 안 쳐요.”아딜벡은 문화적 차이에 당황했다. 이른바 ‘일진’ 같은 친구들은 적나라하게 대했다.“너희 나라로 돌아가.”아딜벡은 갑작스러운 성적 하락에도 당황했다. 전학 온 청주 학교에서 본 중간고사 점수는 평균 60점대였다. ‘원래 반에서 3등 밑으로 떨어져 본 적이 없었는데….’시험 난도가 높아지며 취약한 한국어 실력이 발목을 잡았다.“2학년 되고 나서 놀긴 했지만…. 사회 같은 과목에선 제가 별로 안 좋아하는 서술형이 정말 많이 나오더라고요.”아딜벡은 정신이 번쩍 들어 공부에 매달렸다. 다행히 이듬해에는 평균 80점 후반까지 점수를 끌어올렸다. 이번엔 고등학교 진학이 문제였다. 아딜벡은 경영 분야에 특화된 특성화고에 가고 싶었다. 카자흐스탄 증권업계에서 일했던 아버지처럼 금융계 진출을 꿈꾸고 있다. 이미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주식 공부를 시작할 정도로 관심이 많다. 특성화고를 가면 의류 사업도 시도해 보고 싶다. 하지만 청주 근처에는 그런 특성화고가 없었다.진로 선택을 상담하고 비자 문제를 상의할 곳이 없는 점도 문제였다. 안산의 선일중엔 다문화부가 따로 있었다. 러시아어에 능통한 선생님이 비자 문제를 상세히 안내해줬다. 일반 선생님들도 이주배경 학생에게 익숙해 ‘맞춤형 진로상담’을 해주곤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주배경 선배들도 있어 쉽게 조언을 구했다. 하지만 청주에선 이 모든 걸 아딜벡이 알아서 해야 했다.아딜벡 가족은 1년도 채 되지 않아 안산으로 돌아왔다. 결국 안산밖에 답이 없다. 이렇게 이주민들은 안산으로 수렴된다. 안산은 이주민의 섬이다.섬이 징검다리가 되려면안산 아이들이 다른 지역으로도 건너갈 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놓아주려는 시도도 있었다.2019년 경기도의회에서는 ‘경기도 이주아동 조례’가 발의됐다. 조례안은 이주아동을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지지 아니한 18세 미만의 사람’으로 규정했다. 미등록이든 등록이든 관계없이 지원 대상으로 본 셈이다.‘이주아동은 출생등록 될 권리를 갖는다’고 명시하기도 했다. 출생등록은 이주아동의 규모를 파악하고 최소한의 복지 지원을 하기 위한 첫 단추다. 조례안이 통과되면 조나단도 수원에서 어린이집에 갈 가능성이 높다.하지만 이 사실이 알려지자 ‘문자 폭탄’이 쏟아졌다. 조례안을 주도한 김현삼 의원은 물론 다른 경기도의원에게 문자메시지가 쏟아졌다. ‘난민 반대’ ‘다문화 반대’를 외치는 외국인 혐오 단체들이었다. 안산시에서는 10차례가 넘는 집회가 벌어졌다. 김 의원 집 앞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단체들과 따로 면담까지 했지만 설득할 수가 없었어요. 반대 단체 분들은 이주민들이 아이를 앞세워 한국에 들어오고, 결국은 한국인의 자리를 빼앗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더라고요.”김 의원은 이 ‘실패한 조례안’을 씁쓸하게 회상한다. 1980, 90년대 반월공단에서 일했던 그는 공단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안다.“요즘 사장님들이 이주노동자가 더 필요하다고 하소연합니다. 일할 사람이 없어 주문량을 못 댄다는 거예요. 내국인은 채용하고 싶어도 오질 않고요. 그런데도 이주민에 대한 인식은 바뀌지 않고 있죠.”독일 정부는 자국에서 태어난 모든 아동에게 출생증명서를 발급한다. 태국이나 베트남 같은 개발도상국도 대부분 국적과 관계없이 출생등록을 해준다. 정부가 아동들을 출생등록 하면 아동의 인권침해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예방 접종 같은 기본적인 복지 지원도 할 수 있다. 일본은 2019년부터 국적을 묻지 않고 만 3~5세 어린이에게 무상보육 및 유아교육을 해준다.보육 측면에서 지원을 강화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지난해 경기도의회는 등록 외국인주민 자녀에게 보육비를 직접 지원하도록 명시한 조례를 통과시켰다. 흔히 외국인 주민이 늘어나면 복지 부담도 늘어날 거라는 예상이 많다. 이민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이주노동자가 한국 전체의 소득세수에 기여하는 액수는 2017년 1조 원을 넘어섰다. 주민 관련 정책 예산은 2018년 기준 8500억 원 규모에 그친다. 세금을 꼬박꼬박 내도 보육에선 차별을 받는 것이다.조례는 통과됐지만 그뿐이었다. 현재 경기도 내에서 이주아동에게 보육비를 별도로 지원하는 지자체는 안산, 부천, 시흥, 군포 등에 그친다. 그마저도 시 자체 예산으로 해결하고 있다. 경기도에서는 조례 통과 뒤에도 지원 예산을 편성하지 않았다.“외국인 보육비 지원은 예산 규모가 크고, 지자체가 아닌 중앙 정부가 해야 할 일입니다.”현재 보건복지부는 지침을 통해 보육비 지원 대상을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자로서 주민등록법에 의해 주민번호를 정상적으로 부여받은 만 0~5세 아동’으로 제한한다. 이 지침의 근거가 되는 영유아보육법을 살펴보면 국적에 따른 차별이 용인되고 있다. ‘영유아는 자신이나 보호자의 성, 연령, 종교, 사회적 신분, 재산, 장애, 인종 및 출생지역 등에 따른 어떠한 종류의 차별도 받지 아니하고 보육되어야 한다.’ ‘국적’이 문구에서 빠져 있다.이 조항에 국적을 포함시키는 영유아보육법 개정안이 지난해 7월 국회에 발의됐다. 하지만 현안에 밀려 본격적인 논의는 시작되지 못했다. 게다가 복지부는 국적 중심으로 설계된 다른 사회보장 제도와 연계해 논의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표류가 끝나는 그날까지와티 씨에게 안산은 여전히 낯선 땅이다. 하지만 조나단을 위해 적응해야 하는 곳이다.“아직 적응 기간이라 조금 낯선 땅이에요. 실은 아직도 수원을 그리워해요. 언젠가는 가족들이 있는 인도네시아로 돌아갈 거예요. 조나단이 한국에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와티 씨는 조나단 같은 아이가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다.“아이는 신이 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아이의 미래에 부모가 걸림돌이 되는 안타까움을 다른 사람들은 겪지 않았으면 해요.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다니기 위해 사는 곳을 옮기지 않고 본인이 사는 곳에서 어린이집을 보낼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좋겠어요.”공존 - 세 번째 이야기 : 이주민을 위한 사다리는 없다 1월 18일 공개어린이집뿐만이 아니다. 조나단 같은 이주배경 아동들은 학교를 다니면서도 한국어를 잘하는지, 체류 자격이 있는지 끊임없이 시험받는다. 이런 조건을 갖춰도 아이들은 한국 사회의 ‘하류’에 고일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이방인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부에 더욱 매달린다. 2009년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에 온 소년에겐 고등학교 진학조차 절실하다.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부터 지속적으로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 ‘공존’은 동아일보가 지켜온 저널리즘의 가치와, 경계를 허무는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기존에 경험할 수 없었던 디지털 플랫폼 특화 보도는 히어로콘텐츠 전용 사이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기사 취재 : 이새샘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기자▽사진·동영상 취재 : 송은석 양회성 남건우 기자▽동영상 편집 : 남건우 기자 박세진 PD 안채원 CD▽그래픽 : 김충민 기자▽프로젝트 기획 : 위은지 기자▽사이트 제작 : 임상아 고민경 뉴스룸 디벨로퍼신희철 기자 hcshi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남건우 기자 woo@donga.com}

‘안산인’ 100명에게 듣다매년 꾸준히 늘던 국내 외국인 수가 2020년 통계 작성 이래 처음으로 줄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비행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그들의 빈자리는 컸다. 일손 부족에 중소기업 10곳 중 6곳은 생산에 차질을 빚었다. 농가는 농산물을 수확하지 못해 아우성이었다. 이듬해엔 국내 총인구도 처음으로 감소했다. 인구절벽 시대, 감소한 인구를 대체하는 이주민과의 공존은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됐다. 다문화사회(주민 중 5% 이상이 외국인)로 분류되는 시군구는 이미 전국에 70여 곳. 우리는 그들과 더불어 살 수 있을까. 한국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은 도시 경기 안산시를 중심으로 답을 찾아본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지난해 8월부터 4개월간 안산에서 100여 명을 만났다. 이주민의 삶을 유아기부터 중장년기까지 생애단계별로 밀착 취재했다. 한국의 척박한 현실에 힘겹게 뿌리 내리는 고려인, 몽골인 삼대 이민가족의 역사를 추적했다. 한국인들의 솔직한 속내도 들어봤다. 동아일보 디오리지널 페이지()를 방문해 보세요. 다양한 사진과 영상, 인터랙티브 효과가 결합된 새로운 형식의 기사로 공존 시리즈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너, 한국인이었어?” 지난해 12월 17일 경기 안산시 단원구 안산원곡초등학교 근처 분식집. 원곡초 5학년 양주원(12)에게 같은 반 친구가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물었다. 주원이는 입안 가득한 떡볶이를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는 주원이와 알게 된 지 3년 만에 주원이의 국적을 처음 알았다. 친구가 놀란 이유는 원곡초에 워낙 한국인이 없어서다. 원곡초 학생 449명 가운데 조부모 때부터 한국에서 산 한국인은 6명뿐이다. 나머지는 외국인이거나 외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한국 국적을 얻었다. 주원이는 1학년 때부터 원곡초에 다녔지만 3학년 때서야 깨달았다. ‘아, 우리 학교엔 한국인이 별로 없구나.’ 2년 전 어느 날, 다른 학교 근처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걸 봤다. 아이들은 한국어만 쓰고 있었다. 주원이에겐 이 모습이 매우 낯설었다. 원곡초에선 러시아어, 중국어가 많이 들리기 때문이다. 난 외국인 친구 좋은데”…주변선 “그 학교 왜 다녀”아파트촌-빌라촌 두 개의 세계애초엔 한동네였던 안산 원곡동-백운동… 이주민 늘어나며 2개의 동으로 나뉘어한국인 외국인 사이 보이지 않는 큰 벽안산시에서도 원곡동은 외국인 비율이 70%나 된다. 원곡동엔 빌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바로 옆 백운동엔 신축 아파트가 즐비해 대조를 이룬다. 원곡동과 백운동 경계에 원곡초가 있다. 원곡초를 중심으로 원곡동과 백운동은 다른 세계처럼 나뉜다.○ 높아지는 ‘국경’이날 오후 1시 반경 원곡초 정문을 나온 아이 50여 명 대부분은 원곡동 빌라촌으로 향했다. 주원이를 비롯한 5명가량만 빌라촌 반대편에 있는 신축 아파트로 갔다. 신축 아파트는 원곡초에서 걸어서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다. 하지만 원곡동이 아닌 백운동에 속한다. 주원이 가족은 지난해 8월 백운동 신축 아파트로 이사했다. 주원이는 이 아파트에서 원곡초 친구를 보질 못했다. “엄마, 우리 반에 한국인이 나랑 선생님밖에 없어.” 주원이 어머니 최지윤(가명·46) 씨는 어느 날 이런 말을 들었다. ‘한국 아이가 별로 없으니 괜히 주원이만 소외되는 거 아닌가.’ 불안감에 주원이를 전학 보낼까 고민도 했다. 주변에서도 걱정을 키웠다. “주원 엄마, 왜 그 학교엘 보내?” “다른 학교에 안 보내?” 하지만 주원이는 원곡초가 좋다. 주원이가 5년째 잘 다니는 모습을 보며 지윤 씨도 생각을 바꿨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김지민(가명·39) 씨는 생각이 좀 다르다. 원곡초보다 조금 더 먼 관산초로 딸을 6년째 보내고 있다. 딸을 관산초에 보내려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딸이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일찍이 주소지를 친정으로 옮겼다. 원곡초 배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원곡초 교육과정이 너무 다문화 아이들 위주로 돌아간다고 들었어요. 다문화 아이들이 오히려 한국 애들을 왕따시킨다는 얘기도 있었죠….” 다른 한국인 학부모들도 마찬가지였다. 저마다 관산초로 배정받을 방법을 찾았다. 가족이 다 같이 관산초 근처로 잠깐 이사를 다녀오기도 했다. 지역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원곡초 배정을 피하는 ‘꿀팁’이 공유됐다. 아파트 입주민들은 입주 6개월 전인 지난해 초부터 “원곡초 배정 반대”를 외치기 시작했다. 안산교육지원청에 100건이 넘는 민원을 넣었다. 통학구역을 관산초까지 넓혀 달라는 요구였다. 이런 움직임에 원곡초도 행동에 나섰다. 안복현 원곡초 교장은 학부모 설명회까지 열었다. 이주배경 학생은 ‘한국어 실력에 따라 수준별 수업을 한다’, ‘한국인 학생에게 피해가 없다’고 알리려 했다. 하지만 학부모들은 언성을 높였다. “왜 그런 학교에 다녀야 합니까?” “학교 성적이 전국 몇 등인 거예요?” 교육지원청은 결국 지난해 7월 아파트 통학구역을 관산초까지 넓혔다. 입주민들은 두 학교 가운데 선택해 지원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통학구역 변경 뒤 원곡초를 선택한 입주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지난해 10월 기준 원곡초 학생 중 이주배경 학생은 98.6%다. 기피 대상은 학교만이 아니다. 주민들은 원곡초 인근 지역을 지나치지도 않으려 한다. 한국인 학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일러두곤 한다. “원곡초 뒤쪽은 가지 말아라.”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지민 씨가 원곡동에 간 건 2년 전 지인 식당을 방문한 게 마지막이었다. “식당 가는 것도 무서워요. 외국인이랑 눈 마주치면 괜히 해코지할 것 같고…. 혼자서는 절대 못 가요.” 하지만 주민들의 두려움은 부풀려진 면이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원곡동 범죄율은 높지 않다. 한국 어느 동네를 가든 벌어지는 술 먹고 다투는 사건이 있는 정도다. 치안은 안정된 편이다”라고 했다. 원곡동과 백운동 사이의 벽이 높지만 두 동은 5년 전까진 하나의 원곡동이었다. 백운동은 원곡1·2동, 원곡동은 원곡본동으로 불렸다. 2017년에서야 지금처럼 나뉘었다. 백운동 주민 수가 크게 늘었고, 숫자로 나뉜 동명을 정비해야 할 필요도 있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송바우나 안산시의원은 “외국인이 많다는 원곡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명칭을 바꾸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원곡동이 처음부터 ‘이주민 동네’였던 것은 아니다. 원곡동은 1970년대 후반 반월공단 배후도시로 성장했다. 도금, 염색 공장에 일자리를 찾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전통 제조업이 점차 기울며 산업단지가 위축됐다. 사람들은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원곡초 앞에서 20년가량 문방구를 운영하는 홍모 씨(66)는 원곡동의 변화를 몸소 체감했다. “15년 전쯤부터 한국인들은 점점 고잔동 같은 동네로 빠져나갔어요. 새 아파트가 올라오는 곳들이죠. 원곡동 빈자리는 외국인들이 채웠어요.” 2012년 35%였던 원곡동 외국인 주민 비중은 지난해 2배로 늘었다. 일손이 부족했던 공단의 중소기업 사장들은 이주민들을 반겼다. 빈 교실이 늘던 학교들도 다시 붐비기 시작했다. 한때는 중국인들이 늘었지만 최근엔 러시아, 중앙아시아에서 온 이주민들이 모여든다.언어장벽탓 잘 못 어울려… 친한 친구는 다 러시아계”안산, 우리 모두의 이야기전국 곳곳 초중고 이주배경 학생들 늘어한국 알리고 뿌리 존중하며 거리 좁혀야한국인 학생 인식 바꿀 ‘공존 교육’도 필요○ ‘국경’ 너머의 아이들어른들이 세운 벽 때문에 원곡초 아이들은 학교 밖을 나올 때 비로소 낯선 세계를 만난다. 우즈베키스탄 국적 고려인 피브키나 이리나(15·여)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을 따라 한국에 왔다. 줄곧 원곡초를 다니다 2020년 졸업했다. 원곡초에선 적응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러시아어를 하는 이중언어 선생님이 공부를 도와줬다. 러시아어로 얘기할 친구들도 많았다. 이리나는 원곡초에서 한국어를 못하는 친구들의 통역을 맡을 정도였다. 매일 2시간씩 꾸준히 학교에서 한국어 수업을 들은 결과였다. 이리나는 정든 원곡초를 졸업하며 한국 학생이 더 많은 원곡중을 선택했다. 지난해 3월 기준 원곡중의 이주배경 학생 비율은 17.8%다. “러시아 애들이 많은 중학교가 있지만 거긴 가기 싫었어요.” 이리나는 한국인이 많은 학교에서 한국어를 더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오히려 중학교에 오고 나서 말수가 더 줄었다. 친한 중학교 친구는 러시아계 아이들 4명뿐이다. “같은 반 한국인 친구들하고 더 얘기하고 싶어요. 놀고 싶고…. 근데 한국인 친구들은 다른 반 애들이랑 친해요.” 한국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니 한국어가 늘기 힘들다. “선생님과 반 애들이 다 같이 있는 단체 채팅방이 있어요. 애들이 ‘레알’(진짜의 속어) 같은 말이나 줄임말을 쓰면 전 잘 못 알아들어요. 다른 애들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채팅방에서 얘기하죠. 근데 저는 글을 읽기만 해요.” 학교 공부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선행학습을 한 수학은 그나마 낫다. 어려운 단어가 많은 국어, 역사가 큰 문제다. “국어, 역사는 머릿속에서 번역이 잘 안 돼요. 문제를 못 풀겠어요. 집에 가서 다시 해석해봐야 해요.” 이리나는 요즘 갓 태어난 조카를 돌보며 틈틈이 미술학원에 다닌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안산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온 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미술대학을 나올 생각이다. ‘대학을 마치면 한국으로 돌아와 디자인 회사에 취업하리라.’ 하지만 이런 꿈은 아득하기만 하다. “한국 사람이 아니니 회사를 다니기 어려울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절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어떡하죠?” 이리나처럼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생겨난다. 학교엔 한국인도, 외국인도 아닌 자신에 혼란스러워하다 본국으로 돌아간 아이도 있다.○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원곡초는 아이들이 벽을 넘어서도록 애쓰고 있다. 경기도교육청이 지정한 다문화국제혁신학교답게 러시아어, 중국어 강사가 주요 교과를 통역해준다. 출신 국가 언어를 가르치는 수업도 마련했다. 이주배경 아이들이 한국에 정착하면서도 ‘뿌리’를 잊지 않게 하려는 취지다. 사물놀이와 민요, 태권도와 테니스 수업도 한다. 밴드부를 따로 운영하며 예체능 교육에 공들인다. 이런 활동이 아이들 간 거리감을 좁힐 것이란 믿음에서다. 원곡초는 이주민 교육 역사가 쌓이며 이주민 학부모들의 ‘8학군’처럼 성장했다. 이주민 학부모들은 통학권에서 벗어난 안산 상록구, 경기 시흥시 등에서도 ‘원정 통학’을 시킨다. 원곡초에도 어려움은 있다. 한국인이 워낙 없다 보니 중국계, 러시아계 아이들은 모국어로 대화하며 끼리끼리 어울린다. 안 교장은 “한국 아이들이 일정 비율 이상이어야 외국인 아이들도 한국어를 배울 의지를 가진다”고 말했다.○ 안산, 우리 모두의 이야기원곡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전국 곳곳에서 이주배경 학생들이 늘고 있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초등학생 중 4.2%가 이주배경 학생이다. 비중이 9년 전(1.1%)에 비해 4배가량으로 늘었다. 이런 학교들은 원곡초에 ‘공존 노하우’를 묻는다. 대구의 신당초등학교도 그중 한 곳이다. 2018년 이주배경 학생이 전체의 절반에 조금 못 미쳤지만, 지금은 65%에 이른다. 대구 신당초에는 인근 성서공단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 자녀들이 다닌다. 원곡초처럼 원거리 통학을 하는 학생도 있다. 이주배경 학생 맞춤형 프로그램이 있다는 소문이 돌아서다. 학교는 급격히 늘고 있는 이주배경 학생을 받아들이느라 분주하다. 교육 현장에서는 ‘언어’가 공존의 첫 단추라고 말한다. 이중언어 강사를 늘리고 한국어 특강을 두루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야 이주배경 학생들이 특정 학교로 몰리지 않기 때문이다. 안상규 안산서초 교감은 한국어 예비학교를 제안했다. “외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학생은 예비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운 뒤 일반 학교에서 수업을 듣도록 지원했으면 좋겠어요.” 안복현 원곡초 교장은 한국인 학생의 인식을 바꿀 ‘공존 교육’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주민이 많은 독일이나 아일랜드는 상호문화 교육을 모든 학교에서 실시한다. “힘든 일은 이주민들이 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혜택이 가면 ‘역차별’이라고 해요. 내 자식이 외국에 갔다면 그런 대우를 받길 원하지 않을 텐데 말이죠.” ○ ‘국경’은 여전히 견고하다원곡초 바로 앞엔 또 다른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원곡초에선 이 단지 한국인 학생들이 원곡초에 입학하리라고 기대한다. 2023년 입주가 시작되면 원곡초에 한국 학생이 늘고, 공존이 더 가능하리라고. 하지만 지역 주민들은 달리 생각하고 있다. 공인중개업소에선 벌써부터 통학구역 변경 얘기가 나온다. “입주 시점에 주민들이 민원을 넣으면 아파트 통학구역이 관산초로 확대될 거예요. 아파트 가격이 좀 더 올라갈 수 있죠.” 이 단지 재개발조합 관계자는 원곡초 이주민 아이들이 오히려 전학 갈 거라고 장담했다. “학교에 한국 아이들이 많아지면 이주민 아이들이 전학을 가게 될 거예요. 1, 2년만 있으면 학교 분위기가 (한국인 중심으로) 바뀔 겁니다. 지켜보세요.” 한국인과 이주민이 어울려 산다는 선택지는 어른들 입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국경은 여전히 견고하다.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2020년부터 지속적으로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공존: 그들과 우리가 되려면’은 동아일보가 지켜온 저널리즘의 가치와 경계를 허무는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기존에 경험할 수 없었던 디지털 플랫폼 특화 보도는 히어로콘텐츠 전용 사이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팀장: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기사 취재: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기자▽사진·동영상 취재: 양회성 송은석 남건우 기자▽그래픽: 김충민 기자 ▽편집: 한우신 기자▽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사이트 개발: 고민경 임상아 뉴스룸 디벨로퍼▽동영상 편집: 남건우 기자 박세진 PD 안채원 CD신희철 기자 hcshi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남건우 기자 woo@donga.com}

외국인 비율 13%. 한국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 한국 다문화의 메카. 이주민들의 강남. 경기 안산. 안산 이주민들은 말한다. ‘내 국적은 안산’이라고. 안산의 토양에서 이주배경의 다양한 한국인이 자란다. 누군가는 ‘진짜 사나이’가 되겠다며 해병대에 가고, ‘한국인의 조건’을 채우려 취업 대신 대학 진학을 꿈꾼다. 어린이집들의 거부에 단칸방에 갇혀 살다 언어를 잊고 26년을 이방인처럼 살며 삼대 가족을 이룬다.외국인 비중이 5% 이상이면 ‘다문화사회’로 불린다. 안산은 이 비중을 2008년 넘겼다. 2008년 한국에서 다문화 지역은 12곳뿐이었다. 이제는 70곳에 가깝다. 제 2, 제 3의 안산이 생겨나고 있다. 2020년, 코로나19 확산에 국내 외국인이 사상 처음 줄었다. 중소기업 10곳 중 6곳은 생산에 차질이 생겼다. 농가 일손 부족에 농산물 값이 치솟았다. 이주민과의 공존은 피할 수 없는 미래다. 과연 한국은 공존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취재팀은 지난해 8~12월 ‘안산인’ 100여 명을 만났다.동아일보 디오리지널 페이지()를 방문해 보세요. 다양한 사진과 영상, 인터랙티브 효과가 결합된 새로운 형식의 기사로 공존 시리즈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한국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 안산. 그중에서도 유독 외국인이 많은 동네가 있다. 바로 원곡동이다.외국인 비율 70%(1만4139명). 10명 중 7명이 외국인이다. 반월공단과 가까원 원곡동 빌라촌, 재개발이 마무리되고 있는 백운동 신축 아파트단지. 그 경계에 국경을 그리듯, 안산원곡초등학교가 있다. “너 한국인이었어?”하교길 분식집에서 안산원곡초 5학년 양주원(12)을 같은 반 친구가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주원이는 입안 가득 떡볶이를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12월 칼바람에 두 볼이 발갰다. 친구는 3년 만에 주원이의 국적을 처음 알았다.“주원이도 다른 나라에서 왔을 거라고 생각했어요.”이런 착각엔 이유가 있다. 원곡초 학생 중 한국인은 단 여섯 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1학년 때부터 원곡초에 다닌 주원이는 3학년 때서야 원곡초의 특별함을 깨달았다. 2년 전 어느 날, 하교하며 다른 학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걸 봤다. 아이들은 한국어만 쓰고 있었다. 주원이에게는 이 모습이 매우 낯설었다. 원곡초 근처에선 하교 시간에 러시아어, 중국어가 많이 들리기 때문이다.‘아, 우리 학교엔 한국인이 별로 없는 거구나….’주원이네 반 수학 시간엔 한국인 선생님과 러시아어 선생님 두 분이 들어온다. 러시아어 선생님은 러시아에서 온 친구들에게 러시아어로 수학을 알려준다. 점심 급식 메뉴는 ‘비프 스트로가노프’(러시아 소고기 음식), 탄두리 치킨에 라씨(인도 음식). 원곡초 근처엔 러시아에서 온 학생들에게 러시아어로 수학과 국어를 가르쳐 주는 학원도 있다.이날 오후 1시 반경 원곡초 정문을 나온 아이 50여 명 중 대부분은 원곡동 빌라촌으로 향했다. 주원이를 비롯한 5명가량만 빌라촌 반대편인 신축 아파트 단지로 향했다. 신축 아파트 단지는 원곡초에서 걸어서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다. 하지만 원곡동이 아닌 백운동에 속한다. 인도가 좁은 빌라촌과 달리 인도도 도로도 넓은 아파트 단지. 원곡초에 다니는 대다수 아이들에겐 낯선 곳이다.주원이 가족은 지난해 8월 백운동 신축 아파트로 이사했다.“아파트에 원곡초 다니는 애가 한 명도 없어요. 원래 6학년 형 한 명이 원곡초 다녔는데 관산초로 전학 갔어요.”주원이가 다니는 아파트 근처 태권도 학원이나 논술 학원에도 원곡초 친구는 없다. 학교와 달리 학원엔 친구들이 전부 한국인이다. 주원이에겐 외국인이 대다수인 학교와 한국인이 전부인 학원이 너무도 다르다.“엄마, 우리 반에 한국인이 나랑 선생님밖에 없어.”주원이 어머니 최지윤 씨(가명·46)는 어느 날 이런 말을 들었다.‘한국 아이가 별로 없으니 괜히 주원이만 소외되는 거 아닌가.’지윤 씨는 불안감에 주원이를 전학 보낼까 고민도 했다. 주변에서도 걱정을 키웠다.“주원 엄마, 왜 그 학교엘 보내?”“다른 학교에 안 보내?”하지만 주원이는 싫다고 했다. 주원이는 원곡초가 좋다. 좋은 친구, 좋은 선생님이 있는 우리 학교니까. 지윤 씨도 주원이가 5년째 잘 다니는 모습을 보며 생각을 바꿨다.“학교에서 중국어나 러시아어를 자연스럽게 배울 수도 있고, 앞으로 외국인이 더 많은 세상에서 살 테니 미리 적응하면 좋다고 생각하기로 했어요.”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김지민 씨(가명·39)는 6학년인 딸을 관산초에 보낸다. 원곡초보다 조금 더 멀다. 이렇게 하기까지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2016년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딸의 주소지를 친정으로 옮겼다.“원곡초 교육과정이 너무 다문화 아이들 위주로 돌아간다고 들었어요. 다문화 아이들이 오히려 한국 애들을 왕따시킨다는 얘기도 있었죠….”주변 한국인 학부모들도 마찬가지였다. 관산초 배정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아이 주소지만 옮기거나, 아예 가족이 다 같이 잠깐 그쪽으로 이사 다녀오기도 했다. ‘위장전입’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부모 마음은 대개 그랬다.‘한국 애라서 소외되면 어쩌지?’ ‘이러다 국어 성적 떨어지면 안 되는데….’지역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원곡초 배정을 피하는 ‘꿀팁’이 공유됐다.“원곡초 배정인데 어떡해요.”“빨리 주소를 옮기세요. 입학하고 난 뒤 전학시키긴 어려워요.”한국인 학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일러두곤 한다.“원곡초 쪽으로는 가지도 말아야 해.”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지민 씨가 원곡동에 간 건 2년 전 지인 식당을 방문한 게 마지막이었다.“식당가는 것도 무서워요. 외국인이랑 눈 마주치면 괜히 해코지 할 것 같고…. 혼자는 절대 못 가요.”높아지는 장벽원곡동과 백운동은 국경으로 갈린 것 같지만 5년 전까진 하나의 원곡동이었다. 백운동은 과거 원곡 1, 2동이었다. 원곡동은 원곡본동으로 불렸다. 2017년에서야 지금처럼 나뉘어졌다.백운동 지역 주민 수가 크게 늘었고, 숫자로 나뉜 동명을 정비해야 할 필요도 있었다. 여기에 원곡동에 선을 그으려는 여론도 작용했다.“외국인이 많다는 원곡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명칭을 바꾸는 데 영향을 미쳤죠.”(송바우나 안산시의원)장벽은 더 높아졌다.“원곡초에 아이들을 보낼 수 없어요.”백운동 신축 아파트 입주민들은 입주 6개월 전부터 원곡초 배정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경기도안산교육지원청에 100건이 넘는 민원을 제기했다. 통학구역을 관산초까지 넓혀달라는 내용이었다.안복현 원곡초 교장은 학부모 설명회를 열었다. 이주배경 학생들은 한국어 실력에 따라 수준별 수업을 하니 한국 학생들 피해가 없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다. 한국인 학생들이 혜택을 볼 수 있는 프로그램도 홍보하려 했다.하지만 안 교장은 그 때만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해진다. 학부모들이 언성을 높였다.“왜 그런 학교에 다녀야 합니까?”“학교 성적이 전국 몇 등인 거예요?”안 교장은 애써 준비한 설명 자료를 다 소개하지도 못했다.교육지원청은 결국 지난해 7월 결단을 내렸다. 신축 아파트 통학구역을 원곡초, 관산초로 지정했다. 학부모들은 둘 중 한 곳을 선택할 수 있게 된 것. 신축단지 일부 동에선 관산초가 가깝다는 이유에서였다. 관산초는 빈 교실이 많지만, 원곡초는 인근 재개발이 끝나면 과밀학교가 될 수 있다는 점도 작용했다.신축 아파트 학부모들에겐 선택지가 두 곳이 됐다. 하지만 원곡초에 입학한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원곡초 기피 현상은 더 심해지고 있다. 원곡초 1, 2학년엔 주원이처럼 조부모 때부터 한국인인 학생이 단 한 명도 없다. 지난해 10월 기준 원곡초 학생 수는 총 449명. 이 중 이주배경 학생은 지난해 기준 98.6%, 443명이다.원곡동은 어떻게 이렇게 변했을까. 원곡초 앞에서 20년가량 문방구를 하는 홍모 씨(66)는 원곡동의 변화를 몸소 체감했다.“15년 전쯤부터 한국인들은 점점 고잔동 같은 동네로 빠져나갔어요. 새 아파트가 올라오는 곳들이죠. 원곡동 빈자리는 이주노동자들이 채웠죠. 그러면서 외국 아이들이 늘었어요.”사람들이 애들을 점점 적게 낳은 탓도 있었다. 인근 공단 때문에 공기가 나빠져 사람들이 떠난다는 얘기도 들렸다. 원곡동 외국인 주민 비중은 2012년만 해도 35%였다. 2021년엔 70%나 됐다.주민 이명자 씨(41)도 원곡동과 함께 컸다. 조부모 때부터 원곡동에 산 토박이다. 자신은 물론이고 딸, 아들까지 같은 원곡초를 나왔다. 명자 씨가 원곡초를 졸업한 시기는 1994년. 당시만 해도 원곡동은 안산의 중심이었다. 활기차게 돌아가는 반월공단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원곡동 중에서도 원곡초는 인기 학군이었다.20년 뒤 큰딸이 입학할 때는 원곡초의 위상이 달라져 있었다. 아이를 원곡초에 보낸다고 하면 다른 학부모들은 명자 씨를 ‘특이하다’고 했다.“거기 외국인 다니는 학교잖아요.”“수준 떨어지는 학교에 왜 굳이 아이를 보내요?”명자 씨는 2018년 원곡초의 마지막 한국인 학부모회장을 지냈다. 지금은 중국인 학부모가 회장을 맡고 있다. 명자 씨가 회장을 맡는 동안 한국 학생들은 한 명, 두 명씩 전학을 갔다. 반면 이주배경 학생들은 경기 안산시 상록구, 경기 시흥시에서 애써 전학을 왔다.국경 너머의 아이들 어른들이 만든 원곡의 국경. 이 너머의 세계를 원곡초 학생들은 졸업 후에야 접한다. 원곡초에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이주배경 학생들만 주로 만나기 때문이다. 졸업하면 학교 때와는 온도가 다른, 차가운 현실과 마주한다.우즈베키스탄 국적의 고려인 피브키나 이리나(15·여)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을 따라 한국에 와 줄곧 원곡초를 다니다 2020년 졸업했다.초등학교 때는 적응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원곡초에는 러시아어를 하는 이중언어 강사가 있었다. 러시아어로 얘기할 친구들도 많았다.“처음에는 한국 애들이랑 놀았어요. 점점 러시아에서 온 친구들이 많아지면서 나중에는 거의 러시아어 할 줄 아는 친구들이랑 놀았죠.”이리나는 원곡초에서 한국어를 못하는 친구들에게 통역사였다. 매일 두 시간씩 꾸준히 한국어를 배운 결과였다. 6학년 때부터는 밴드부에 들어가 학교에서 공연을 했다. 방탄소년단의 ‘봄날’, 노브레인의 ‘넌 내게 반했어’를 기타로 쳤다. 밴드부 활동을 한 뒤부터는 학교에 조금이라도 빨리 가고 싶어졌다. 친구들과 기타를 치고 싶었다.이리나는 정든 원곡초를 졸업하며 한국 학생이 더 많은 원곡중을 선택했다. 지난해 3월 기준 원곡중의 이주배경 학생 비율은 17.8%다.“러시아 애들이 많은 중학교가 있지만 거긴 가기 싫었어요.” 이리나는 한국인이 많은 학교에서 한국어를 더 많이 배우고 싶었다.하지만 이리나는 오히려 중학교에 오고 나서 말수가 더 줄었다. 한국인 친구와 친해지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리나의 중학교 친구는 러시아계 아이들 네 명뿐이다.“같은 반 한국인 친구들하고 더 얘기하고 싶어요. 놀고 싶고…. 근데 한국인 친구들은 다른 반 애들이랑 친해요.”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니 한국어가 늘기 힘들다.“선생님과 반 애들이 다 같이 있는 단체 채팅방이 있어요. 애들이 ‘레알’(진짜의 속어) 같은 말이나 줄임말을 쓰면 전 잘 못 알아들어요. 다른 애들은 학교에서 있던 일을 채팅방에서 얘기하죠. 근데 저는 그냥 글을 읽기만 해요.”공부도 점점 어려워졌다. 수학은 그나마 낫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선행학습을 한 터였다. 하지만 어려운 단어가 많은 국어, 국사가 큰 문제다.“국어, 역사는 머릿속에서 번역이 잘 안 돼요. 문제를 못 풀겠어요. 집에 가서 다시 해석해봐야 해요.”이리나는 요즘 갓 태어난 조카를 돌보는 틈틈이 시간을 쪼개 미술학원에 다닌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는 꿈이 생겼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계획도 세웠다. 안산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온 뒤 프랑스로 유학을 가 미술대학을 나오고 싶다. 대학을 마치면 한국으로 돌아와 디자인 회사에 취업하고 싶다. 한국에서 자랐으니 한국에서 계속 살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꿈이 막막하게 느껴진다.“제가 한국 사람이 아니니 회사를 다니기 어려울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어떡하죠?”공존을 시도하는 사람들원곡초는 국경을 지우려 애쓰고 있다. 이리나 같은 아이들이 벽에 부딪히지 않도록.원곡초 수학시간엔 한국어와 러시아어, 중국어가 들린다. 각 언어 강사가 해당 언어권에서 온 학생들을 돕는다. 러시아어 담당 김율리아 선생님(29)은 나눗셈 기호 등 중앙아시아권과 다른 한국의 부호와 표기법 등을 가르친다.“한국어로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없는 학생이라도 수학문제를 이해하고 푸는 데는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어요. 그런 학생들을 돕기 위해 협력수업을 진행합니다.”원곡초는 경기도교육청이 지정한 다문화국제혁신학교다. 이주배경 학생에게 한국어와 모국어를 같이 가르친다. 한국 정착을 도우면서 뿌리를 잊지 않게 하려는 취지다.정서적 융합도 돕는다. 사물놀이와 민요, 태권도와 테니스 수업을 한다. 밴드부를 따로 운영하며 예체능 교육에도 공들인다. 원곡초 안 교장은 예체능 활동이 아이들 간 거리감을 좁힐 것으로 믿는다.“음악이나 운동은 말이 안 통해도 아이들이 서로 조화롭게 어울리는 계기가 됩니다.”‘세계 음식 체험의 날’도 한달에 한번 운영된다. 급식 때 다양한 국가 음식이 나오는 날이다. 감혜은 원곡초 영양사는 아이들이 급식을 패밀리 레스토랑 외식처럼 반길 때마다 뿌듯하다.“친환경 식자재로 무상 급식을 한다고 얘기하면 아이들이 ‘왜 비싸고 좋은 걸 우리에게 주나요’라고 물어요. ‘여러분이 자라서 이 나라 국민으로 같이 건강하게 살라고 지원하는 거예요’라고 설명해주죠. 그러면 아이들이 ‘감동이에요’라고 해요.”원곡초 덕에 5학년 제임스(가명·12)는 빠르게 한국에 적응했다. 2019년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한국어를 한 마디도 못했다.하지만 제임스는 2년 만에 유성과 나로호 발사에 대해 한국어로 설명하는 ‘우주 소년’이 됐다.“과학자가 돼 우주를 연구하고 싶어요. 학교에서도 과학 시간이 제일 좋아요. 중력이나 가속도 같은 어려운 표현은 유튜브로 예습하고 있어요.”제임스의 동생 3학년 주디(가명·9)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학교 도서관이다. 주디 역시 수준별 한국어 수업의 도움을 받았다. 아직 한국어 발음은 서툴지만 야무지게 표현한다.“음악 시간에는 아름다운 기분이 들고, 체육시간에는 신나는 기분이 들어요.”주디는 작년까지 친구들이 ‘놀자’고 말할 때 친구들을 노려보기만 했다.“‘놀자’는 말을 ‘놀리자’로 알았어요. 날 놀리려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이젠 그 차이를 알아요. 그래서 친구들이 많아졌어요.”원곡초에서도 어려움은 있다. 중국과 러시아계 아이들이 대다수를 이루며 다른 나라 아이들은 소수자가 됐다. 아이들은 끼리끼리 어울리게 된다. 제임스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중국계 친구에게 놀림 받았다.모국어로만 말하는 아이들은 한국어를 배울 기회를 놓친다. 한국인과 이주배경 학생이 골고루 섞인 학교에서 일하다 지난해 원곡초에 온 한 선생님은 이 점이 우려스럽다.“한국 아이들이 일정 비율 이상이어야 외국 아이들도 한국어를 배울 의지를 가져요.”교사들의 부담도 가중된다. 러시아계 학생이 최근 급증해 164명이나 된다. 인근에 러시아어로 한국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학원이 생겨날 정도다. 하지만 원곡초의 러시아어 이중언어 강사는 둘 뿐이다.안산,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런 현상은 원곡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주배경 학생이 곳곳에서 늘고 있다. 교육부에 따르면 2021년 전국 초등학교 학생 중 4.2%가 이주배경 학생이다. 비중이 9년 전(1.1%)에 비해 4배가량으로 늘었다. 실제로 원곡초 인근의 안산서초등학교 역시 지난해 기준 이주배경 학생이 전체의 절반 수준이다.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안산 선일중학교도 이주배경 학생 비율이 50%를 넘었다. 안산국제비즈니스고등학교도 19%가량이 이주배경 학생이다.전국에서 비슷한 환경의 학교들이 원곡초에 ‘공존 노하우’를 묻는다. 대구의 신당초등학교도 그 중 한 곳이다. 2018년 이주배경학생이 전체 학생의 절반에 조금 못 미쳤지만, 지금은 65%에 이른다.대구 신당초에는 인근 성서공단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 자녀들이 다닌다. 다른 동네에서 신당초로 원거리 통학을 하기도 한다. 이주배경학생 학생들을 위한 맞춤형 프로그램이 있다는 소문이 돌아서다.학교는 급격히 늘고 있는 이주배경 학생에 분주하다. 시의적절하게 대응하기 어려울까 우려가 나온다.“언젠가 선생님들이 한국어로 수업하기 어려워질까 봐 걱정이네요.”앞으로 인구가 줄며 외국인을 받아들이는 건 불가피하다. 지금 늘고 있는 이주배경 아이들은 그들의 2세, 3세를 낳을 것이다. 우리 모두를 위한 ‘공존 정책’이 필요할 때다.교육현장에서는 최대한 많은 학교에 이주배경 학생을 위한 제도를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이주배경 학생들이 특정 학교로 몰리지 않기 때문이다.“자꾸 한 학교에만 이주배경학생들이 몰리다보면 한국인 학부모들이 해당 학교를 기피하게 됩니다.”(안복현 원곡초 교장)“우리학교는 베트남 출신 학생들이 많아 자기들끼리 어울리며 베트남어를 주로 써요. 한국 아이들과 어울릴 기회가 적다 보니 한국어를 배우는 속도가 느려요.”(김진성 신당초 교감)안상규 안산서초 교감은 한국어 예비학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외국에서 온지 얼마 안 된 학생은 한국어 예비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친 뒤 일반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지원했으면 좋겠어요.”다문화 교육 초점이 이주배경 학생들에게만 맞춰져 있다는 점도 문제다. 기존 한국인 학생도 달라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공존하도록 교육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지역사회가 국경을 긋지 않게 이해시켜야 한다는 것이다.인구의 27%가 이주배경 출신인 독일에선 일반 학교에 상호문화 교육을 권한다. 이주민에겐 독일 문화를 가르친다. 이민자가 늘어난 아일랜드도 2005년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수준별 상호문화 교육 과정을 마련했다.국경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원곡초 마지막 한국인 학부모회장’ 명자 씨는 원곡초 인근에 공사 중인 신축 아파트 단지에 2023년 입주한다. 원곡초 바로 코앞에 있는 단지다. 원곡초에서는 기대도 나온다. 이 단지의 통학구역만큼은 원곡초에만 배정될 것이라고. 원곡초에 한국 학생이 늘면 공존이 더 가능하리라고.하지만 지역 주민들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인근 공인중개업소에선 벌써부터 통학구역 변경 얘기가 나온다.“입주 시점에 주민들이 민원을 넣으면 아파트 통학구역이 관산초로 확대될 거예요. 아파트 가격이 좀더 올라갈 수 있죠.”이 단지 재개발조합 관계자는 이주민 아이들이 오히려 전학 갈 거라고 장담했다.“통학구역이 바뀌지 않더라도 한국 아이들이 많아지면 그 학교의 이주민 아이들이 전학을 나가게 될 거예요. 1, 2년만 있으면 학교 분위기가 (한국인 중심으로) 바뀔 겁니다. 지켜보세요.”한국인과 이주민이 어울려 산다는 선택지는 좀처럼 어른들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국경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공존 - 두 번째 이야기 : 경기 안산도, 이주민의 섬 1월 17일 공개원곡초 선생님들은 이주배경 학생들에게 적응의 ‘첫 단추’로 한국어를 꼽는다. 하지만 이주배경 아이들은 한국에서 나고 자라도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기 어렵다.조나단은 2016년 한국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인도네시아인이지만 조나단은 한국을 떠나본 적이 없다. 5년 동안 ‘조나단의 세계’는 팔 뻗으면 세간이 손에 닿는 수원의 원룸이 전부였다.조나단은 어린이집에 가고 싶지만 계속 거절당했다. 그들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은 안산뿐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수원으로, 수원에서 안산으로. 조나단의 부모님은 아들을 위해 ‘이주 속의 이주’를 감행한다.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부터 지속적으로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 ‘공존’은 동아일보가 지켜온 저널리즘의 가치와, 경계를 허무는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기존에 경험할 수 없었던 디지털 플랫폼 특화 보도는 히어로콘텐츠 전용 사이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기사 취재 : 이새샘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기자▽사진·동영상 취재 : 송은석 양회성 남건우 기자▽동영상 편집 : 남건우 기자 박세진 PD 안채원 CD▽그래픽 : 김충민 기자▽프로젝트 기획 : 위은지 기자▽사이트 제작 : 임상아 고민경 뉴스룸 디벨로퍼신희철 기자 hcshi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남건우 기자 woo@donga.com}
외국인 비율 13%. 한국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 한국 다문화의 메카. 이주민들의 강남. 경기 안산. 안산 이주민들은 말한다. ‘내 국적은 안산’이라고. 안산의 토양에서 이주배경의 다양한 한국인이 자란다. 누군가는 ‘진짜 사나이’가 되겠다며 해병대에 가고, ‘한국인의 조건’을 채우려 취업 대신 대학 진학을 꿈꾼다. 어린이집들의 거부에 단칸방에 갇혀 살다 언어를 잊고 26년을 이방인처럼 살며 삼대 가족을 이룬다.외국인 비중이 5% 이상이면 ‘다문화사회’로 불린다. 안산은 이 비중을 2008년 넘겼다. 2008년 한국에서 다문화 지역은 12곳뿐이었다. 이제는 70곳에 가깝다. 제 2, 제 3의 안산이 생겨나고 있다. 2020년, 코로나19 확산에 국내 외국인이 사상 처음 줄었다. 중소기업 10곳 중 6곳은 생산에 차질이 생겼다. 농가 일손 부족에 농산물 값이 치솟았다. 이주민과의 공존은 피할 수 없는 미래다. 과연 한국은 공존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취재팀은 지난해 8~12월 ‘안산인’ 100여 명을 만났다.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부터 지속적으로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 ‘공존’은 동아일보가 지켜온 저널리즘의 가치와, 경계를 허무는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기존에 경험할 수 없었던 디지털 플랫폼 특화 보도는 히어로콘텐츠 전용 사이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히어로콘텐츠팀▽기사 취재 : 이새샘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기자▽사진·동영상 취재 : 송은석 양회성 남건우 기자▽동영상 편집 : 남건우 기자 박세진 디지털콜라팀장 안채원 CD▽그래픽 : 김충민 기자▽프로젝트 기획 : 위은지 기자▽사이트 제작 : 임상아 고민경 뉴스룸 디벨로퍼신희철 기자 hcshin@donga.com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남건우 기자 woo@donga.com}

《“토, 일, 월. 사흘 연속 오전 10시에 출근도장을 찍고 있네요.”대체 공휴일이던 16일 오후 2시 김정옥 씨(61·여)는 친구 김영민 씨와 함께 서울 종로구 서울극장 1층에서 30분 뒤 시작하는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오전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를 본 그는 한 편만 보고 집에 가기는 아쉬워 두 시간 더 극장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평소 보고 싶은 영화가 생기면 집 근처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찾는 김 씨가 집에서 30분 넘게 걸리는 서울극장을 방문한 건 이달 31일을 끝으로 이 극장이 문을 닫아서다. 그는 “젊었을 때 친구들과 자주 왔다. 그때는 서울극장과 피카디리, 단성사 세 극장 중 마음에 드는 영화가 걸린 곳 앞에 줄을 서서 티켓을 샀다. 영화 시작 전 극장 입구에서 파는 고구마와 오징어, 군밤을 사서 영화를 기다리곤 했다”고 회상했다. “이번이 서울극장에서 보내는 마지막 휴일이네요”라고 말하는 그의 눈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이날 서울극장 곳곳에선 마지막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눈에 띄었다. 폐관을 앞두고 선착순으로 공짜 티켓을 배포하는 ‘고맙습니다 상영회’ 행사가 끝났는데도 한 할머니는 “마지막인데 그냥 돈 내고 보자”며 남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서울극장을 운영한 합동영화주식회사(합동영화사)가 제작한 주요 영화 포스터들이 걸린 벽 앞에서 사진을 찍는 젊은 커플도 있었다. 친구인 최은미 씨(41·여)와 김숙현 씨(41·여)는 광화문에서 일을 마치고 함께 영화를 보려고 서울극장을 자주 찾았다고 했다. 최 씨는 “단성사가 문을 닫고, 피카디리는 CGV에 인수됐는데 서울극장마저 문을 닫는다는 뉴스를 보고 아쉬운 마음에 찾아왔다”고 했다.○ 종로3가 ‘골든트라이앵글’ 시대 이끌다 서울극장이 개관 42년 만에 문을 닫는다는 소식은 많은 이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영화 제작과 수입 배급을 겸한 합동영화사의 고 곽정환 회장은 재개봉관(개봉관에서 상영이 끝난 필름을 받아 상영하는 영화관)이던 세기극장을 1979년 인수해 서울극장을 열었다. 1980, 90년대 한국영화 부흥기를 이끈 서울극장은 2000년대 초반 멀티플렉스의 등장 이후 지속된 수익성 악화로 고전했다. 여기에 설상가상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까지 겹쳐 폐관을 결정했다. 합동영화주식회사는 서울극장을 1000억여 원에 매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합동영화사에서 제작총괄을 맡아 ‘편지’ ‘그놈은 멋있었다’ 등을 제작한 김진문 아트시네마 대표는 “재벌기업이 운영하는 멀티플렉스가 들어오면서 전통 극장들은 전멸하다시피 했지만 서울극장은 역사와 특색으로 버텨 왔다. 코로나가 터진 뒤 한 달에 1억 원씩 적자를 봤다. 고 곽정환 회장이 일궈놓은 걸 어떻게든 지켜내려고 아내인 고은아 회장이 애썼지만 결국 적자가 누적돼 사업을 지속하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1907년 세워진 국내 최초의 상설 영화관 단성사와 서울극장, 피카디리 극장은 서울 지하철 1호선 종로3가역을 중심으로 몰려 있어 ‘골든트라이앵글’로 불리며 한국영화 호황기를 이끌었다. 특히 서울극장은 당시 영화계를 주름잡던 곽 회장의 경영하에 급속도로 성장했다. 곽 회장은 서울극장에 더해 부산 대영극장, 아카데미극장(전 왕자극장), 대구 중앙극장 등 지방 유력 극장들을 인수하며 전국 배급망을 갖췄다. 김진문 대표는 “외화 제작사들은 국내에 극장체인이 없어 한국에서 극장을 많이 갖고 있던 합동영화사에 독점 배급권을 줬다”며 “당시 수입할 수 있는 외화가 한 해 30편으로 제한돼 있었다. 해외에서 매년 제작되는 500∼600편의 외화 중 가장 잘 만들어진 것들만 선별해 30편을 가져오는데 흥행이 안 될 수가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종로3가 빅3 극장 줄이 흥행의 척도 세 극장이 경쟁적으로 영화를 제작·수입 배급하면서 종로3가는 자연스럽게 한국영화 흥행의 중심지가 됐다. 신작이 개봉하는 날이면 티켓을 사기 위한 사람들로 극장 앞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웃돈을 얹어 티켓을 되파는 암표상들도 극장 앞에 진을 쳤다. 김정옥 씨는 “줄을 늦게 서서 티켓을 못 사면 어쩌나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슬쩍 다가와 ‘티켓 사실래요?’라고 말을 건네던 암표상들, 이들을 단속하려고 어슬렁거리던 경찰들을 피해 암표를 샀던 때가 아직도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영화인들 사이에선 종로3가 극장들에 얼마나 관객들이 모였느냐가 흥행의 척도가 된 시절이었다. 서울극장 기획팀에서 영화 일을 시작한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1990년대 중반까지 영화 개봉은 지역별로 한 곳만 했기에 서울극장과 단성사, 피카디리 극장의 흥행 경쟁이 치열했다. 당시에는 예매 수치를 확인할 시스템도 없었기 때문에 개봉일 아침 일찍 종로3가역에 제작사와 수입배급사 관계자들이 모두 모였다. 서울극장 2층 팡세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극장 앞에 얼마나 줄을 섰는지를 보고 흥행 여부를 판단했다. 영화인들이 오전에 줄을 선 상황을 체크하고 근처 설렁탕집이나 중국집에 가서 함께 밥을 먹고 헤어지는 게 일상이었다”고 전했다.○ 멀티플렉스에 자리 내준 전통 극장들 1998년 CGV강변을 시작으로 서울 강남 일대에 대기업 자본의 멀티플렉스가 들어서면서 전통 극장들을 찾는 관객은 점차 줄었다. 단일 극장들도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재개관하며 시대의 변화를 쫓았지만 판세를 뒤집기는 역부족이었다. 1개 스크린으로 시작한 서울극장은 1989년 베니스, 아카데미, 깐느 등 3개 관으로 증축해 한국 최초로 멀티플렉스화를 시도했다. 이후 상영관을 11개관까지 늘려 2019년까지는 흑자를 봤지만 코로나19로 적자가 쌓였다. 단성사는 2001년 옛 건물을 철거하고 2005년 지하 4층, 지상 9층의 7개 관 규모를 갖춘 뒤 2006년 3개 관을 추가했으나 멀티플렉스 체인의 공세를 이기지 못했다. 결국 2015년 3월 영안모자 계열인 자일오토마트에 575억 원에 팔려 귀금속 매장이 됐다. 피카디리는 2015년 CGV에 운영권을 넘겨 현재 ‘CGV 피카디리 1958’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서울극장을 끝으로 종로3가를 지키던 옛 극장들이 모두 사라지면서 이들과 함께한 영화인들은 아쉬움과 더불어 불가피한 흐름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김진문 대표는 “서울극장의 역사를 함께한 사람으로서 한국영화의 한 시대가 저무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은 크지만 세상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심재명 대표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관인 단성사도 외관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서울극장도 이후에 어떻게 거듭날지 모르지만 외형은 사라지는 거다.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우리 사회가 보존이나 기록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 같아 아쉽다. 멀티플렉스 시대, 디지털 시대가 됐어도 원형 보존과 아카이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재희 문화부 기자 jetti@donga.com}

한식당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해외에서 먹는 컵라면, 급하게 끼니를 때우기 위해 편의점에서 부랴부랴 먹는 컵라면, 등산 후 정상에서 먹는 컵라면. 이들 상황 중 언제 먹는 컵라면이 가장 맛있을까. ‘비 오는 밤은 노포에서 파전에 막걸리’, ‘해 질 녘엔 한강에서 치맥’처럼 음식도 상황에 맞는 TPO(Time Place Occasion·때와 장소, 경우)가 있지만 컵라면만은 예외다. 컵라면은 언제 어디서 먹든 그 상황과 특유의 ‘케미’를 발산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컵라면이 특히 맛있는 순간을 꼽자면 한식을 구할 수 없는 타지에서 먹을 때가 아닐까. 지난달 28일 개봉한 영화 ‘모가디슈’에 잠깐 등장하는 육개장 사발면의 잔상이 오래 남는 이유도 이역만리에서 먹는 컵라면의 소중함 때문이다. 때는 1991년, 장소는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 내전이 발생한 소말리아에서 남북한 대사와 직원, 가족들은 대한민국 대사관으로 함께 피신한다. 본국과 교신이 끊긴 채 언제 탈출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숨을 죽이고 촛불만 켠 채 비상식량을 나눈다. 밥과 깻잎, 김치, 소시지, 빵 등 있는 대로 끌어모은 음식들 중 각자 앞에 하나씩 놓인 사발면은 밥상에서 오가는 남북의 정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퍼즐이다. 밥술을 뜰 때마다 국물을 들이켜야 하는 한국인에게 뜨겁고 얼큰한 컵라면 국물은 헛헛하고 불안한 속을 달래주는 솔푸드(soul food) 아닐까. 모가디슈 제작사인 외유내강의 강혜정 대표는 “당시 소말리아에선 한국 음식이 귀해 대사관이 컵라면을 한식 대용으로 많이 비치해 뒀다고 한다”고 전했다. 수업 시작 10분 전 학원 건물 1층 편의점에서 부랴부랴 먹던, 혹은 밀린 업무로 점심을 거르다 급히 회사 휴게실에서 먹던 컵라면은 어떤가. 영화 ‘황해’(2010년)는 허겁지겁 먹는 컵라면의 맛을 제대로 포착했다. 청부 살인을 의뢰받고 서울로 밀항한 옌볜(延邊) 조선족 택시운전사 김구남(하정우). 그는 살인 대상의 집 주변에서 하루 종일 삐대다 추위와 허기를 참지 못하고 편의점으로 뛰어간다. 타깃을 놓칠세라 편의점 벽시계와 바깥을 번갈아 보며 급하게 컵라면을 흡입하는 구남의 먹방은 황해의 ‘김 먹방’보다 침샘을 더 자극하는 신(scene)이다. 겨울이 완전히 물러가지 않고 찬 공기를 붙들고 있는 낮, 산에서 먹는 컵라면도 맛있다. 홍상수 감독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3년)에서는 3월 남한산성에서 컵라면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함께 남한산성에 오른 불륜 관계의 해원(정은채)과 대학교수 성준(이선균)은 컵라면을 먹는 남녀 등산객을 보며 입맛만 다신다. 이후 지인들과 다시 남한산성에 오른 해원은 컵라면을 먹으며 성준과 남한산성을 올랐을 때를 회상하듯 이렇게 말한다. “아, 정말 맛있다!” 해원의 감탄사처럼 추운 날 등산 후 산에서 먹는 컵라면도 기가 막히다. 분명한 건 컵라면 TPO에는 정답이 없다는 거다. 소개한 3편의 영화 중 하나를 보며 오늘 저녁 컵라면으로 속을 달래보는 건 어떨까.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압도적 1위의 넷플릭스는 그 자리를 내어줄 것인가.’ 올해 상반기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판도 변화가 두드러졌다. 국내 OTT 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던 넷플릭스의 기세가 꺾인 데 반해 그 반사이익을 국내 OTT들이 누렸다. 넷플릭스의 경우 지난해에는 ‘킹덤2’ ‘스위트홈’ 등 대작들이 성장을 견인했으나 올해는 오리지널 콘텐츠가 힘을 쓰지 못해 상승세가 시들해졌다. 반면 웨이브는 ‘펜트하우스2’를 필두로 한 지상파 콘텐츠의 인기, 티빙은 ‘환승연애’ 등 오리지널 예능의 물량 공세로 넷플릭스가 주춤한 부분을 파고들었다. 닐슨코리안클릭에 따르면 넷플릭스의 월간 순방문자(MAU)는 지난해 7월 651만 명에서 꾸준히 상승해 올해 1월 895만 명에 달했다. 하지만 이를 정점으로 6월 790만 명까지 감소했다. 상반기에 100만 명 이상의 MAU가 증발한 셈이다. 넷플릭스가 고전한 요인은 오리지널 콘텐츠들의 인기 하락이다. 상반기에 선보인 오리지널 콘텐츠들은 물론이고 하반기 최대 기대작이었던 ‘킹덤: 아신전’마저 전개가 늘어진다는 비판과 함께 공개 3주도 되지 않아 한국의 톱10 콘텐츠 8위(11일 기준)로 내려앉았다. 넷플릭스의 톱 콘텐츠 상위권에는 타 방송사의 드라마들이 포진해 있다. 콘텐츠 업계 관계자는 “넷플릭스는 상반기 실적 부진으로 인해 하반기에 ‘D.P’ ‘오징어 게임’ ‘고요의 바다’ 등 오리지널 콘텐츠 중 하나라도 터져 주길 바라고 있다”고 전했다. MAU 2, 3위인 웨이브와 티빙은 상대적으로 사정이 좋아졌다. 지난해 7월 MAU가 321만 명이었던 웨이브는 올해 6월 388만 명으로 늘었다. SBS ‘펜트하우스2’ 같은 킬러 콘텐츠가 이용자를 늘린 것으로 분석됐다. 다만 웨이브는 지상파 프로그램의 인기에 따라 MAU가 좌지우지되는 한계가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해 웨이브는 2025년까지 콘텐츠에 총 1조 원을 투자하기로 하는 등 오리지널 영화와 드라마 제작에 시동을 걸었다. 오리지널 영화 확보를 위해 400억 원의 사모펀드를 조성했고, 첫 투자작인 영화 ‘젠틀맨’ 촬영을 시작했다. 임시완, 손현주 주연의 드라마 ‘트레이서’도 연내 선보인다. 티빙은 지난해 10월 출범 당시 279만 명이던 MAU가 올해 6월 334만 명으로 늘었다. 티빙의 상승세는 오리지널 예능의 인기 덕을 봤다. 기존에 tvN에서 히트를 쳤던 예능 지식재산권(IP)을 적극 활용하는 전략이 효과를 내고 있는 것. 나영석 PD의 ‘신서유기’ 출연진이 등장하는 ‘신서유기 스프링 캠프’, ‘놀라운 토요일’의 스핀오프 ‘아이돌 받아쓰기 대회’가 그 예다. 티빙이 처음 선보인 연애 리얼리티 ‘환승연애’도 헤어진 연인과 한집에 산다는 참신한 콘셉트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화제를 모으며 구독자 확대로 이어졌다. 티빙 관계자는 “신서유기 스프링 캠프나 아이돌 받아쓰기 대회는 기존 멤버와 포맷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재미를 부여해 기존 팬덤이 티빙으로 신규 유입되는 효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4∼7위권 OTT의 MAU는 150만∼170만 명으로 비슷비슷한 수준. 그중 4위인 쿠팡플레이의 상승세가 가장 가파르다. 쿠팡플레이는 지난해 12월 출범 시 MAU 47만 명에서 올해 6월 173만 명으로 급증했다. 기존 쿠팡 가입자에 기댄 측면이 있지만 물량 공세보다는 완성도 높은 콘텐츠를 통해 가입자를 유치하겠다는 전략도 펼치고 있다. 11월 공개를 앞둔 김수현 차승원 주연의 드라마 ‘어느 날’이 기대작으로 꼽힌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11일 개봉하는 영화 ‘프리 가이’에서 주인공 가이(라이언 레이놀즈·45)는 비디오게임 ‘프리 시티’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비플레이어 캐릭터(Non-Player Character·NPC)다. 가이는 모든 게 미리 설정된 비디오게임 속에서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산다. 그는 같은 하늘색 셔츠를 입고 시리얼로 아침을 해결한 뒤 커피 한 잔을 들고 은행으로 출근한다. 하지만 자신이 NPC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몰로토프걸(조디 코머)은 그가 게임 속 캐릭터이며, 곧 세상이 파괴될 거라고 경고한다. 이에 가이는 주변부에 머물며 수동적으로 행동하는 NPC가 아닌, 프리 시티를 구하는 히어로가 되기로 결심한다. 6일 가이 역을 연기한 레이놀즈와 연출을 맡은 숀 레비 감독(53)을 화상으로 만났다. 레비 감독은 프리 가이가 게임 속 NPC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기존의 게임 원작 영화들과 차별화했다고 강조했다. ‘모탈 컴뱃’ ‘툼 레이더’ 등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많지만 게임에서 ‘병풍’ 같은 존재인 NPC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는 프리 가이가 처음이라는 것. 레비 감독은 “기존 영화나 게임은 한 명의 히어로에 집중해 그가 이야기를 끌고 간다. 가이는 게임 배경에 있던 인물이다. 주인공 뒤의 인물에게 목소리를 부여하고 주변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주변의 평범한 이가 히어로가 되는 영화”라고 설명했다. 레비 감독의 말처럼 프리 가이는 히어로를 재정의한 영화다. 초능력을 타고난 천하무적의 캐릭터가 아니라, 유일한 낙이 친구와 맥주를 마시는 게 전부인 평범한 은행원이 히어로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레이놀즈는 “히어로는 굉장히 특별한 사람이고 타고난 능력으로 모두를 구할 거라고 상상하는데 실제 일상에선 평범한 사람들이 영웅적인 행동을 한다. 두려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용기를 낼 수 있고, 평범함이 있어야 영웅이 될 수 있다”며 “평범하지만 자신의 안락한 환경을 깨고 나와 남을 돕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히어로다. 이 점에서 가이처럼 기대하지 않은 이가 영웅이 될 때 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영화는 실제 게임 속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게임 요소를 스크린에 충실히 옮겼다. 영화에선 프리 시티에 접속한 플레이어들이 거리에서 총격전을 벌이고, 전투기와 헬기가 공중에서 폭파되는 게 일상이다. 하늘까지 점프할 수 있는 신발이나 몸에 닿으면 에너지가 충전되는 의료박스 등 각종 게임 아이템도 재미를 더한다. 레비 감독은 “게이머들의 문화나 게임 배경 등을 진정성 있게 표현하고 싶었다. 게임 디자이너와 개발사의 조언을 받아 최대한 정확하게 스크린에 표현하고자 했다”며 “동시에 ‘어쨌든 영화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만들었다. 게임을 모르는 관객들도 즐길 수 있는 작품”이라고 강조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월급에서 떼어낸 티끌만 한 돈과 은행 대출금까지 ‘영끌’해 상경 11년 만에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회사원 동원(김성균). 그는 11일 개봉하는 영화 ‘싱크홀’의 어떤 캐릭터보다 현실적이다. 아파트 매물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부동산 애플리케이션을 매일 확인하고 집을 산 지인들에게 정보를 얻으려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요즘이라 특히 그렇다. 그런데 어렵사리 장만한 내 집이 땅속으로 꺼진다면? 싱크홀은 이런 상상에서 시작했다. 초고층 빌딩의 화재를 다룬 ‘타워’의 김지훈 감독이 이번에는 싱크홀이라는 도심형 재난을 다뤘다. 동원과 함께 싱크홀에 빠진 이들은 빌라 주민 만수(차승원)와 동원의 집들이에 왔다가 뻗어버린 회사동료 김 대리(이광수), 인턴 은주(김혜준)다. 만수는 헬스장과 사진관 아르바이트로도 부족해 대리기사까지 ‘스리 잡’을 뛰는 싱글대디. 김 대리는 “집은커녕 차도 없다”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다. 원룸에서 자취하는 은주의 바람은 회사에서 명절 선물을 받아보는 것. 평범한 네 사람은 자신 안의 가장 영웅적인 기질을 발휘해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는다. 싱크홀에서 평범한 회사원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를 연기한 주연배우 김성균(41)을 4일 화상으로 만났다. 김성균도 동원처럼 어렵게 서울에 집을 마련했기에 집을 잃은 동원의 상실감에 공감했단다. 그는 “영화 중 ‘상경한 지 11년 만에 집을 샀네. 방이 세 개야!’라는 동원의 대사가 있다. 반지하에 살다 처음 서울에 보금자리를 마련했을 때의 내 기분도 동원과 같았다. 장판, 벽지공사도 안 끝난 집에 이불과 베개를 들고 매일 혼자 찾아가 맥주 한잔을 하고 잤다. 바라만 봐도 좋았다”고 말했다. 동원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그래서 그와도 닮은 구석이 있는 인물이기에 “평범한 회사원,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소시민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집들이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얼큰하게 취해가는 이들의 모습과 함께 관객들의 긴장도 슬슬 풀릴 무렵 기울어진 바닥, 금이 간 기둥으로 불길한 전조를 보이던 빌라는 캄캄한 구멍 아래로 갑자기 추락한다. 긴장감을 증폭시키는 데는 현실감 넘치는 세트가 한몫했다. 제작진은 500m 깊이의 싱크홀을 표현하고자 암벽세트를 제작했고, 장마로 물이 차오르는 장면을 담기 위해 스튜디오에 빌라 옥상이 포함된 수조 세트를 만들었다. 김성균은 “수조 안은 찬물로 차 있었고 밖으로 나와도 옷이 젖어있었다. 겨울에 촬영해서 정말 추웠다”며 “촬영 기간 내내 국밥만 먹었다. 갈비탕처럼 기름지고 뜨거운 걸 먹어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싱크홀은 육체적으로 제일 힘들었던 영화다. ‘이걸 버텼다’는 성취감이 있기에 제겐 훈장 같은 영화”라고 했다. 싱크홀은 여느 재난영화처럼 심각하고 급박하게만 흘러가진 않는다. 생사를 오가는 순간 배우들은 코믹스러운 모습으로 반전의 폭소를 안긴다. 사선을 넘나드는 와중에도 눈이 맞은 김 대리와 인턴사원 은주는 배터리가 2% 남은 휴대전화로 음악을 들을지 셀카를 찍을지 고민한다. 티격태격하던 동원과 만수는 벽이 무너져 내린 방에 앉아 소주를 병째 마시며 흉금을 터놓는다. 김성균은 “현장에서 흙 먹고 물 맞으며 자연스레 동지가 됐다”고 했다. “차승원 선배님이 매일 촬영이 끝나고 맥주 한잔 하는 자리를 마련하셨어요. 흙구덩이에서 구른 몸을 숙소에서 따뜻한 물로 씻고 가게에 모였죠. (촬영지였던) 인천 근방 호프집에서 국물 떡볶이와 튀김 안주에 맥주를 기울이던 그 시간이 그립네요.”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월급에서 떼어낸 티끌만한 돈과 은행 대출금까지 ‘영끌’해 상경 11년 만에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회사원 동원(김성균). 그는 11일 개봉하는 영화 ‘싱크홀’의 어떤 캐릭터보다 현실적이다. 아파트 매물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부동산 애플리케이션을 매일 확인하고 집을 산 지인들에게 정보를 얻으려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요즘이라 특히 그렇다. 그런데 어렵사리 장만한 내 집이 땅속으로 꺼진다면? 싱크홀은 이런 상상에서 시작했다. 초고층 빌딩의 화재를 다룬 ‘타워’의 김지훈 감독이 이번에는 싱크홀이라는 도심형 재난을 다뤘다. 동원과 함께 싱크홀에 빠진 이들은 빌라 주민 만수(차승원)와 동원의 집들이에 왔다가 뻗어버린 회사동료 김 대리(이광수), 인턴 은주(김혜준)다. 만수는 헬스장과 사진관 아르바이트로도 부족해 대리기사까지 ‘쓰리 잡’을 뛰는 싱글대디. 김 대리는 “집은커녕 차도 없다”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다. 원룸에서 자취하는 은주의 바람은 회사에서 명절 선물을 받아보는 것. 평범한 네 사람은 자신 안의 가장 영웅적인 기질을 발휘해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는다. 싱크홀에서 평범한 회사원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를 연기한 주연배우 김성균(41)을 4일 화상으로 만났다. 김성균도 동원처럼 어렵게 서울에 집을 마련했기에 집을 잃은 동원의 상실감에 공감했단다. 그는 “영화 중 ‘상경한 지 11년 만에 집을 샀네. 방이 세 개야!’라는 동원의 대사가 있다. 반지하에 살다 처음 서울에 보금자리를 마련했을 때의 내 기분도 동원과 같았다. 장판, 벽지공사도 안 끝난 집에 이불과 베개를 들고 매일 혼자 찾아가 맥주 한 잔을 하고 잤다. 바라만 봐도 좋았다”고 말했다. 동원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그래서 그와도 닮은 구석이 있는 인물이기에 “평범한 회사원,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소시민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집들이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얼큰하게 취해가는 이들의 모습과 함께 관객들의 긴장도 슬슬 풀릴 무렵 기울어진 바닥, 금이 간 기둥으로 불길한 전조를 보이던 빌라는 캄캄한 구멍 아래로 갑자기 추락한다. 긴장감을 증폭시키는 데는 현실감 넘치는 세트가 한 몫 했다. 제작진은 500m 깊이의 싱크홀을 표현하고자 암벽세트를 제작했고, 장마로 물이 차오르는 장면을 담기 위해 스튜디오에 빌라 옥상이 포함된 수조 세트를 만들었다. 김성균은 “수조 안은 찬 물로 차 있었고 밖으로 나와도 옷이 젖어있었다. 겨울에 촬영해서 정말 추웠다”며 “촬영 기간 내내 국밥만 먹었다. 갈비탕처럼 기름지고 뜨거운 걸 먹어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싱크홀은 육체적으로 제일 힘들었던 영화다. ‘이걸 버텼다’는 성취감이 있기에 제겐 훈장 같은 영화”라고 했다. 싱크홀은 여느 재난영화처럼 심각하고 급박하게만 흘러가진 않는다. 생사를 오가는 순간 배우들은 코믹스러운 모습으로 반전의 폭소를 안긴다. 사선을 넘나드는 와중에도 눈이 맞은 김 대리와 인턴사원 은주는 배터리가 2% 남은 휴대전화로 음악을 들을지 셀카를 찍을지 고민한다. 티격태격하던 동원과 만수는 벽이 무너져 내린 방에 앉아 소주를 병째 마시며 흉금을 터놓는다. 김성균은 “현장에서 흙 먹고 물 맞으며 자연스레 동지가 됐다”고 했다. “차승원 선배님이 매일 촬영이 끝나고 맥주 한 잔 하는 자리를 마련하셨어요. 흙구덩이에서 구른 몸을 숙소에서 따뜻한 물로 씻고 가게에 모였죠. (촬영지였던) 인천 근방 호프집에서 국물 떡볶이와 튀김 안주에 맥주를 기울이던 그 시간이 그립네요.”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서울극장이 영업 종료를 앞두고 3주간 ‘고맙습니다 상영회’를 개최한다. 서울극장은 개관 42년 만에 수익성 악화로 이달 31일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서울극장은 “감사의 마음을 담은 마지막 인사로 상영회를 개최한다”며 “라인업은 일반 개봉 영화와 하반기 개봉 예정인 프리미어 상영작, 그리고 그간 서울극장의 다양한 기획전에서 아쉽게 누락된 명작 영화를 포함한다”고 2일 밝혔다. 서울극장은 1979년 서울 종로구에 문을 연 뒤 단성사, 피카디리와 함께 종로를 대표하는 영화관으로 사랑받았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으로 인한 경영난 끝에 폐관하기로 지난달 결정했다. 고맙습니다 상영회는 11일부터 영업 마지막 날인 31일까지 3주간 진행된다. 평일 하루 100명, 주말 하루 200명에게 선착순으로 매표소에서 무료 티켓을 제공한다. 상영작은 최근 개봉한 ‘모가디슈’ ‘인질’을 비롯해 개봉 예정작인 틸다 스윈턴 주연의 ‘휴먼 보이스’, 지난해 칸 영화제 공식 선정작 ‘러브 어페어: 우리가 말하는 것, 우리가 하는 것’까지 4편이다. 서울극장 기획전에서 누락된 명작 영화들도 재상영된다.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폭스캐처’를 비롯해 ‘프란시스 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가족영화 ‘걸어도 걸어도’, ‘플로리다 프로젝트’, ‘서칭 포 슈가맨’, ‘흐르는 강물처럼’이 관객을 만난다. 서울극장 설립자인 고 곽정환 회장이 연출하고, 부인이자 현 회장인 고은아 배우가 주연으로 출연한 ‘쥐띠 부인’도 고별 상영회에서 특별 상영한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2017년 2월 13일 오전 9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이 사람들로 북적이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 한복판에서 피살됐다. 용의자로 지목된 이는 인도네시아 국적의 시티 아이샤와 베트남 국적의 도안 티 흐엉. 공항 폐쇄회로(CC)TV에 담긴 장면은 황당했다. 항공 스케줄을 체크하는 김정남에게 태연하게 다가선 두 여성은 그의 눈에 무언가를 묻힌 뒤 도망친다. 몇 분 후 김정남은 공항 직원에게 고통을 호소하지만 병원으로 이송되기 전 사망한다. 두 여성이 김정남의 눈에 문지른 물질은 맹독성 화학물질인 VX 신경작용제로 드러났다. 멀건 대낮 국제공항에서 벌어진, 너무도 대담했던 김정남 암살사건은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북한이 짠 장기판 위 말이었나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김정남 암살사건에 관한 정보는 여기까지다. 동남아시아 국적의 두 여성이 공항에서 김정남을 암살했다는 것. 그들이 어떻게 김정남의 암살에 가담하게 됐는지, 이후 두 여성은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8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암살자들’은 사건의 전후를 치밀하게 추적해 가십처럼 소비된 암살사건의 전모를 밝힌다. 다큐를 연출한 라이언 화이트 감독(40)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배우를 꿈꿨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길 바랐던 두 여성이 어떻게 암살에 가담하게 됐는지, 몰래카메라를 촬영한다는 북한 용의자들에게 속아 배우로 고용된 것뿐이라는 이들의 주장이 신빙성이 있는지를 추적한다. 화이트 감독은 “우리는 북한이 짜 놓은 장기판 위의 말이었다”는 주장의 진위를 밝히고자 다큐 제작을 결심했다. 지난달 28일 화상간담회에서 화이트 감독은 “암살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첫 달이었던 때라 모든 기사의 헤드라인이 트럼프에 관한 것이었다. 김정남 암살사건은 미국 미디어에서 금세 자취를 감췄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사건으로 남았다”고 했다. 이어 “시티와 도안이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를 추적하는 것만으로도 매력적인 다큐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사건 발생 2017년부터 재판 종결 2019년까지 2년 간 매달 한 번씩 말레이시아를 방문해 재판과정을 따라갔고 두 여성의 변호사, 친인척 등을 만나며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제작진은 ‘밝힐 수 없는 취재원’으로부터 사건 당시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의 CCTV 영상을 확보해 이를 다큐에서 최초로 공개했다. 자신들을 영화제작자라고 속인 북한 측과, 두 여성이 공항에서 만나는 장면부터 두 여성이 김정남에게 다가가는 모습, 이후 김정남이 공항 직원에게 몸의 이상을 호소한 뒤 링겔을 꽂고 몸이 쳐져 있다 사망에 이르는 모습, 두 여성이 화학물질을 씻기 위해 화장실로 향하는 모습까지 모든 과정이 다큐에 담겼다. 두 여성을 고용한 북한 대사관, 고려항공 직원 등 북한인 4명이 암살 당일 유유히 공항을 떠나는 장면도 확보했다. CCTV를 비롯해 변호인단으로부터 넘겨받은 두 여성과 북한 관계자의 문자메시지, 시티와 도안의 SNS 활동기록도 공개한다. 화이트 감독은 “영화의 진정한 성과 중 하나는 실제 증거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법정이나 언론에서 전혀 공개된 적 없는 증거”라며 “휴대폰 메시지, 페이스북 게시글, CCTV 화면 등 수많은 정보를 확보해 이를 다 봤는데도 두 여성은 자신들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해를 가하기 위함임을 몰랐다는 게 확실해보였다. 그들의 암살에 대한 인지를 입증할 증거가 부재했다”고 주장했다.● “범죄 희생양 된 두 여성의 삶에 주목”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독립을 해야 했던 시티, 배우를 꿈꿨던 도안. 친인척 인터뷰를 통해 두 사람의 유년시절, 성인이 된 이후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했던 과정들도 담은 다큐는 취약계층 여성이 얼마나 쉽게 범죄의 희생양이 될 수 있는지로 이야기를 확장한다. “많은 돈을 벌고 유명해 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지인, 택시기사의 제안으로 몰래카메라 제작에 동참하게 된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 유명세, 경제적 안정과 같은 제안 앞에 취약계층이 너무도 쉽게 흔들릴 수 있음을 지적한다. 화이트 감독은 “정치적인 부분도 있지만 두 여성의 삶이라는, 좀 더 예민한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단순히 용의자로 여겼던 두 여성이 누구인지, 암살 전 어떤 이들이었는지, 어떻게 이 사건에 연루됐는지에 주목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같은 주인공들이 수년, 길게는 수십 년에 걸쳐 등장하는 시리즈 영화의 장점은 관객들이 영화와 함께 늙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18년에 걸쳐 제시(이선 호크)와 셀린(쥘리 델피)의 만남과 이별, 재회를 다룬 ‘비포’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시리즈만큼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더 트립’ 시리즈 역시 미식을 즐기는 이라면 한 번쯤 봤을 영화다. 영국의 배우 겸 코미디언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던이 2010년 영국 북부 최고의 레스토랑을 돌아다닌 ‘트립 투 잉글랜드’를 시작으로 2014년 이탈리아, 2017년 스페인을 여행했다. ‘트립 투 그리스’를 마지막으로 10년의 여정을 마무리한다는 소식이 지난해 들려왔을 때 이들과 여행을 함께한 팬들은 적잖이 아쉬워했다. 영화는 이달 8일 개봉했다. 이들의 마지막 여행은 고대 그리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여정을 따라간다. 오디세이아는 트로이전쟁 영웅 오디세우스의 10년에 걸친 귀향 모험담. 오디세우스의 여정이 그랬던 것처럼 스티브와 롭의 6일짜리 여행도 트로이가 있었던 터키에서 시작해 그리스 이타카에서 끝난다. 마이클 윈터보텀 감독은 “두 사람이 먼 길을 여행하다 집으로 돌아온다는 점이 오디세이아와 비슷해 마지막 여행지로 그리스를 택했다”고 말했다. ‘미식 여행’이라는 수식어가 말해주듯 이들의 끝없는 성대모사와 예술·역사·철학을 넘나드는 지적인 수다는 4, 5개의 코스요리가 나오는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과 호텔 레스토랑에서 이뤄진다. 블랙베리 소스를 얹은 퀴네페, 훈제 솔잎을 넣은 홍합, 아몬드 크럼블을 얹은 블러드 오렌지 등 파인 다이닝의 실험적 요리들이 쏟아진다. 아쉬운 건 그리스인들이 일상에서 먹는 수블라키, 무사카와 같은 ‘그리스다운’ 음식은 없다는 점이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음식에 있어 그들은 집(home)을 떠나지 않았다”고 평했다. 트립 투 그리스에서 음식 이상으로 눈길을 끄는 건 화이트 와인이다. 화이트 와인은 이들의 식사에서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와인 병 라벨은 나오지 않지만 이들이 그리스산 와인을 마셨을 거라는 추론은 가능하다. 그리스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 와인의 발상지다. 와인을 물 대신 마신다는 프랑스보다 와인이 더 일상화돼 있다. 그리스 와인은 카베르네 소비뇽, 샤르도네와 같은 국제 품종이 아닌 각 지역의 고유 품종 포도로 와인을 만드는 만큼 식당에서도 자부심을 갖고 해당 지역 와인을 권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에서 그리스 와인이 대중적이지는 않다. 그리스는 와인 생산량의 97%를 자국에서 소비하기 때문. 한국에서 그리스산 와인을 접할 수 있는 곳은 그리스 전통음식을 파는 식당들이다. 서울 서초구의 그리스 가정식 레스토랑 ‘노스티모’도 이 중 하나다. 이곳 와인의 80%는 그리스산이다. 처음 보는 그리스 와인들의 이름에 머리가 어지럽다면 ‘크티마 게로바실리우 화이트’를 마셔볼 것을 추천한다. 상큼하고 가벼우며 단맛이 덜해 치즈, 고기 등 느끼하거나 기름진 음식과 잘 어울린다. 그리스 형제가 운영하는 그리스 와인 수입사 ‘헬레닉 와인’에서는 식당보다 싼값에 그리스 와인을 살 수 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집 나간 남편이 자식의 신장을 이식받기 위해 자상한 남편으로 둔갑하고 다시 가정으로 돌아온 사연, 20년 절친의 남편을 꼬셔 아이를 갖고 친구에게 이혼을 종용한 여성….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이 이야기들은 실화다. 채널A와 SKY가 공동 제작한 월요 예능 ‘애로부부’(오후 10시 반 방송)에 나오는 재연드라마 ‘애로드라마’를 통해 소개된 사연이다. 실제 부부들이 출연해 부부 간 갈등을 진솔하게 터놓는 ‘속터뷰’에서는 독박 육아, 시댁과의 갈등, 잠자리에 대한 고민까지 이어진다. 지난해 7월 처음 방송한 애로부부는 ‘19금 예능’으로, ‘매운 맛’ 사연들을 소개하면서 큰 관심을 받았다. 충격적인 사연들이 소개되면서 선정적이라는 비판적인 시선도 있었다. 그럼에도 메인 MC 최화정을 주축으로 안선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양재진, 이용진 홍진경까지 5명의 출연진이 주인공의 사연에 진심으로 분노하고, 때론 속 깊은 조언을 나누며 ‘야하기만 하다’는 선입견을 서서히 지워나갔다. 방송 1주년을 맞은 애로부부의 출연진, 프로그램을 연출한 김진 채널A PD, 정은하 스카이 TV PD를 29일 서울 마포구 동아디지털미디어센터(DDMC)에서 만났다. 이들이 꼽은 애로부부의 인기 비결은 재미다. 최화정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사람이라고 하지 않나. 사람의 무섭고 리얼한 이야기를 다룬다. 저희도 스튜디오에서 모니터를 보면서 잠시도 한눈팔 수 없게 몰입된다. 막장드라마보다 더한 현실을 다루기에 1년간 장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너무 심각해 실제 사연이 맞냐고 의심하기도 했다”는 안선영은 “제작진이 미리 대본을 주지 않는다. 녹화 현장에서 처음 사연을 접하기 때문에 방송인이 아니라 정말 한 인간, 엄마, 아내의 입장에서 진솔한 리액션을 하게 된다”고 했다. 애로부부는 ‘비혼 권장 프로그램’이라는 수식어도 붙는다. 결혼 후 돌변한 배우자들의 사례를 보면서 결혼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는 시청자들도 있기 때문. 출연진은 “오히려 애로부부가 결혼을 현명하게 선택하도록 돕는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이용진은 “한순간의 감정으로 결혼을 선택해서 영상 속 주인공이 되지 않도록, 결혼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고 했다. 시청자로부터 인스타그램 메시지를 받았다는 안선영은 “‘애로부부를 본 뒤 결혼을 안 했으면 안 했지, 적어도 하고 나서 이혼은 안 할 것 같다’고 하시더라. 결혼하기 전 어떤 것을 조심해야 하는지 예방접종 차원에서 미리 알아가도록 돕는다”고 했다. 기혼자들은 애로부부를 함께 시청하면서 그간 쌓였던 갈등을 대화로 풀기도 한다. 김 PD는 “애로부부의 사연을 보고 ‘당신도 혹시 그래?’라며 대화의 물꼬를 텄다는 분들도 있다”며 “인터넷의 익명에 기대지 않고 솔직하게 부부가 얼굴을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문화를 만들자는 게 프로그램 취지였다. 그 의도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다”고 했다. 홍진경은 “예전엔 남편의 작은 실수에도 예민하게 반응했지만 애로부부 속 사연을 보면서 이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프로그램을 시작한 후 남편과 사이가 정말 좋아졌다”고 말했다. 이들은 애로부부를 통해 금기시됐던 결혼과 이혼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양지로 나와 소통의 대상이 되고, 통념이 바뀌어 가길 바란다. 양재진 전문의는 “이혼을 극단적인 해결책이라고 여기는 시선이 바뀌어야 한다. 사연을 보낸 분에게 가장 도움이 되고, 그분이 가장 편안해질 수 있는 방법이 이혼이라면 이를 제안한다. 선택은 그분의 몫이다”라고 했다. 홍진경은 “애로부부는 제 딸이 결혼할 나이가 되면 꼭 보라고 권하고 싶다. 사람과 관계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공부가 되는 콘텐츠다. 앞으로도 그런 가치를 담는 프로그램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생존. 이보다 더 중요하고 절박한 목표가 있을까. 28일 개봉한 류승완 감독의 ‘모가디슈’는 살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1991년 독재정권에 반기를 든 군부의 쿠데타로 내전이 발생한 소말리아. 이곳의 수도 모가디슈에 갇힌 남한 한신성 대사(김윤석)와 국가안전기획부 출신 강대진 참사관(조인성), 북한 림용수 대사(허준호)와 태준기 참사관(구교환)은 자국과의 교신도 끊긴 상황에서 총 한 자루 없이 살아남고자 몸부림친다. 유엔 가입을 위해 소말리아 정부에 로비 총력전을 벌이며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던 남북은 총알이 빗발치는 생지옥에서 생존이라는 목표 앞에 하나가 된다. 남북의 모가디슈 탈출기는 소설 같지만 실화다. ‘베를린’ ‘베테랑’을 연출한 류 감독이 우리나라 외교사의 가장 극적인 순간을 영화로 만들었다. 탈출기의 중심에는 한신성 대사와 강대진 참사관이 있다. 두 사람은 사사건건 부딪치지만 각자의 장점으로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며 위기를 극복한다. 26일 화상으로 만난 김윤석(54)은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순간을 담은 이야기”라고 운을 뗐다. 그는 “한신성은 경박스럽기도 하고 실수도 하고 때론 능구렁이 같다. 대사관 직원들도 책상에서 일만 했지 체력은 평균 이하다. 그렇지만 생사의 기로에 놓인 극한 상황에서 누구 하나 혼자 살려 하지 않고, 부족한 능력을 모아 힘을 합치는 것이 이 영화가 주는 공감대”라고 했다. 소말리아는 정부가 여행 금지국으로 지정했기에 영화는 모로코의 에사우이라에서 4개월간 촬영됐다. 모로코는 소말리아 내전을 다룬 영화 ‘블랙 호크 다운’(2001년)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제작진은 모가디슈에서 유럽, 아프리카 출신 배우들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실시해 수백 명의 흑인 배우들을 캐스팅했다. 이들의 언어 역시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로 다양해 2중, 3중 통역을 거쳐 소통했다. 27일 화상으로 만난 조인성(40)은 “시나리오를 읽었을 땐 ‘이걸 어떻게 찍으려고 하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며 “류승완 감독이라 가능했다. 류 감독의 열린 귀, 경험에 의한 판단, 스태프를 아우르는 힘, 결단력이 아니었다면 영화를 만들어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얼마나 중압감이 컸겠나. 촬영 중 슬쩍 저한테 와서 ‘순댓국 남은 거 있니’라고 물으실 땐 짠하기도 했다”고 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구조 헬기를 타기 위해 남과 북의 대사관 직원들이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이동하는 자동차 신이다. 총알을 막기 위해 테이프로 책과 모래주머니를 안팎에 누덕누덕 붙인 세 대의 차량이 ‘총알비’를 뚫고 모래사막을 내달리고, 후진하고, 서로 충돌하고, 다시 줄지어 질주하는 장면은 숨이 막힌다. 김윤석은 “차가 책과 모래주머니로 무거워져서 시동이 꺼지는 게 다반사였다. 1991년식 벤츠라 창문이 안 올라가고 시트 밑 용수철도 튀어나왔다. 나중엔 차에 붙인 모래주머니가 터져서 차 안이 엉망진창이 됐다. 컴퓨터그래픽(CG)이 아니라 다 실제 상황이다”라고 했다. 조인성은 “배우들이 직접 운전을 했다. 앞 유리에도 책을 붙여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기에 운전도 굉장히 어려웠다”고 했다. 남북 협력의 결말은 신파로 흐르지 않는다. 이들의 목표는 순수하게 생존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헤어지는 순간에도 서로 악수만 한 번 하고 눈도 맞추지 않는다. 그 장면에서 배우들이 자꾸 눈물을 흘려서 NG가 났는데 류 감독이 ‘눈물을 흘리는 건 관객의 몫이지, 당신들이 울어서는 안 된다’고 하더라. 원초적 목표를 향해 달렸기에 영화가 담백하다. 나를 온전히 집중시킬 영화 한 편이 필요하신 분들은 극장에 오시라.”(김윤석)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정의감 넘치는 기자 임진희(엄지원)와 특정 대상의 사진, 한자 이름, 소지품으로 살(煞·사람 물건 등을 해치는 귀신의 기운)을 날릴 수 있는 방법사 소진(정지소)이 손잡고 거대 악에 맞서는 이야기를 다룬 tvN 드라마 ‘방법’(2020년)은 소진이 사라지는 것으로 끝난다. 악귀에 씌어 의식을 잃었던 소진이 홀연히 자취를 감추자 그의 행방이 궁금하다며 시즌2 제작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드라마 방법의 이후 이야기는 28일 개봉하는 영화 ‘방법: 재차의’에 담겼다. 드라마 방법의 각본을 쓴 연상호 감독(43·사진)이 이번에는 영화 시나리오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21일 화상으로 만난 연 감독은 “소진의 귀환에 대해 생각했다. ‘멋있는 소진이 돌아오면 어떨까’ 싶었고, 그걸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고 여겼다”고 했다. 연출은 김용완 감독이 맡았다. 영화는 소진이 돌아오고, 진희가 독립 언론사를 차린 상황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현장에서 피해자와 함께 시체로 발견된 살인자는 3개월 전 숨진 사람이었다. 이후 라디오에 출연한 진희에게 누군가 전화를 걸어 “내가 시체를 시켜 살인을 저질렀다. 앞으로 제약회사 이사, 전무, 대표를 차례로 죽이겠다”고 경고한다. 진희는 누군가의 주문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재차의, 그리고 살인의 단초를 제공한 제약회사의 불법과 탐욕을 동시에 추적한다.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재차의(在此矣)다. 재차의는 조선 중기 문신 성현이 쓴 ‘용재총화’에 등장하는 한국 전통 설화 속 요괴다. 이들은 누군가의 조종으로 움직이는 ‘되살아난 시체’다. 주술사의 조종을 받는 이들은 총에 맞아도 다시 일어나며 수백 명의 경찰 병력을 뚫고 살인 임무를 완수한다. 연 감독은 “드라마 방법을 만들면서 한국의 요괴를 조사하던 중 재밌는 초자연적 존재가 많다는 걸 알게 됐고, 그중 재차의에 관심이 생겼다. 주술사에게 조종당하는 시체라는 점이 매력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영화 ‘부산행’의 좀비는 예상할 수 없이 움직였다면 재차의는 칼 군무처럼 움직이는 게 특징이다”라고 설명했다. 23일 화상으로 만난 배우 엄지원(44)은 “재차의 군단이 저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장면을 촬영할 때는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움직임이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무용 같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좀비들도 우르르 몰려다니긴 하지만 공통의 미션을 갖고 행동하진 않는다. 재차의는 주술에 의해 조종되기에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드는 군인 같은 존재”라고 했다. 애니메이션 ‘서울역’의 이후 이야기를 실사 영화 ‘부산행’으로, 부산행의 4년 뒤 상황을 영화 ‘반도’로 각각 만들면서 장르를 넘나든 연 감독. 그는 방법 역시 이번 영화를 비롯해 드라마, 애니메이션으로 확장해 나갈 계획이다. 연 감독은 “드라마 방법을 몰랐던 사람들도 영화 재차의를 본 후 관심이 생겨 드라마를 찾아볼 수도 있고, 두 작품을 모르던 사람이 앞으로 나올 시리즈를 보고 이전 작품들을 찾아볼 수도 있다. 한 매체 안에서 완벽한 마무리를 하는 게 미덕이었던 시대는 지났다”고 했다. 그는 “하나의 세계관을 여러 매체에서 즐기는 관람 방식이 늘고 있다. 앞으로 나올 방법의 스핀오프 드라마 ‘괴이’, 드라마 방법의 시즌2도 시즌1 및 영화와 유기성을 갖는다. 이 세계관 안의 모든 이야기를 많은 분이 즐기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함대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서는 배들 한가운데로 화살을 날리니 그의 은 활이 무시무시한 굉음을 내며 진동했다.’ 호메로스의 책 ‘일리아스’에서는 트로이 전쟁 중 아폴론이 그리스인들에게 화살을 퍼부어 역병을 안기는 장면이 나온다. 저자는 팬데믹으로 세계가 공포에 떨고 있는 현 상황이 트로이 전쟁이 벌어진 3000년 전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이 책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어떻게 인류의 재앙이 됐는지에 대한 분석으로 시작한다. 저자가 주목한 바이러스 확산의 주된 원인은 지도자들의 무능력. 우한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나오기 시작할 때 중국 당국이 관련 사실을 숨기고, 미국 정부가 바이러스 확산 후 한발 늦게 대처한 게 대표적이다. 인간의 책임 회피와 무능력이 팬데믹 확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단시간 내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는 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인류 앞에는 포스트 코로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느냐는 과제가 남았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팬데믹 이후의 변화가 가져올 사회구조적 문제들을 고민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비대면의 일상화에 따른 소통의 부재나 실직사태 등이 그 예다. ‘우리가 되찾으려는 일상이 오히려 누군가에게 비극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