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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沖繩) 중부 요미탄(讀谷) 촌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지바나 쇼이치(知花昌一·64) 씨. 그는 미군기지 철폐를 주장하며 각종 집회에 참석해왔다. 일장기인 히노마루(日の丸)를 불태워 경찰에 체포된 적도 있다. 하지만 ‘오키나와 독립’을 주장한 적은 없었다. 피를 흘려 투쟁해야 독립을 얻을 수 있을 텐데 그건 무리라고 봤기 때문이다. 비가 오던 21일 지바나 씨의 집을 방문한 기자에게 그는 “올해부터 스스로 ‘독립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오키나와 주민이 어떤 주장을 해도 중앙정부는 거들떠보지 않는다. 정부에 항의하는 최후 수단이 바로 독립”이라고 말했다. 최근 오키나와에서 독립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부쩍 늘었다.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 모임과 단체도 생겼다. 왜 지바나 씨 같은 사람이 늘고 있을까.○ 잊을 수 없는 분노 22일 오키나와 기노완(宜野灣) 시의 사키마(佐喜眞)미술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그림 앞에 관람객들의 발길이 멈췄다. 가로 8.5m, 세로 4m 크기의 오키나와전도(戰圖).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땅에서는 유일하게 지상 전투가 벌어졌던 오키나와 전쟁을 그린 것이다. 가장 섬뜩한 장면은 언니와 여동생이 상대방 목에 매단 줄을 당겨 서로 죽이는 것이다. 바로 옆에는 형이 동생의 가슴에 죽창을 찌르는 장면도 있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집단 자살을 묘사한 것이다. 오키나와에서 출판된 ‘고등학교 류큐·오키나와사’를 보면 1000명 가까운 주민이 “집단 자결하라”는 군부의 명령을 받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일본군은 수류탄을 나눠줬다. 가족끼리 원을 그리고 모여 수류탄을 터뜨렸다. 간혹 불발도 있었다. 그 경우 사랑하는 형제자매를 죽이고 자신도 자결했다. 당시 미군에 붙잡히면 잔혹 행위를 당한다는 유언비어가 만연했다. 가족의 목숨을 자신의 손으로 끊는 게 마지막 애정 표현이었다. 섬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약 12만 명이 오키나와 전쟁에서 사망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일본 군부가 미군의 본토 공격을 막기 위해 오키나와에서 총력전을 벌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또 민간인에게 집단 자결을 명령한 일본군은 미군에 투항해 살아있는 모습을 봤다. 그때부터 오키나와 주민들은 본토에 대해 지울 수 없는 적개심을 가지게 됐다. 오키나와 제1의 도시인 나하(那覇) 시내의 해군사령부 지하 터널에는 오키나와 전쟁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옛 류큐 왕국의 왕이 살던 슈리 성 아래에는 군부가 피신했던 터널이 아직도 있다. 그런 것들을 볼 때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과거 일본군의 만행을 떠올린다. ○ 차별과 무시는 아직 현재진행형 “지금 헬기 한 대가 학교 위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소음 속에 우리 아이들이 편히 공부할 수 있겠습니까.” 21일 오후 기노완 시 후텐마(普天間) 미군기지 출입문. 햇볕에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의 아카미네 가즈노부(赤嶺和伸·59) 씨는 “오스프리(미군 수직이착륙기) 배치 반대, 미군 철수”를 외쳤다. 그는 기자에게 “미군이 주둔하면서 오키나와 주민의 인권은 사라졌다. 범죄를 저지른 미군이 부대로 도망가면 경찰이 제대로 처벌할 수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일본 전체의 미군기지 중 74%(면적 기준)가 오키나와에 몰려 있다 보니 각종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오키나와 현에 따르면 1972년부터 2010년까지 미군의 범죄 건수는 5705건으로 월평균 약 13건이다. 성폭행도 수시로 일어난다. 이 때문에 대형마트에서는 어린이용 ‘방범 부저(벨)’를 판매하고 있다. 주된 구매자는 어린이가 아니라 성인 여성이다. 미군기지 문제에 대해서 일본 정부는 ‘귀머거리’다. 오키나와 주민 약 10만 명이 지난해 말 ‘오스프리 결사반대’를 외치며 데모를 벌였지만 결국 후텐마 기지에 오스프리가 배치됐다. 기노완 시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후텐마 기지를 현 밖으로 이전해 달라는 요청도 수년째 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현 북부 나고(名護) 시 헤노코(邊野古)로 이전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오타 마사히데(大田昌秀·88) 전 오키나와 지사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오키나와 주민들 중에 ‘독립하자’는 목소리가 간헐적으로 있었지만 지금처럼 강하지는 않았다”며 “만약 일본 정부가 후텐마 기지를 헤노코로 이전한다면 사상 최악의 충돌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높아지는 ‘독립 쟁취’ 목소리 최근 오키나와 주민들은 본토로부터 이중, 삼중으로 배신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달 28일 오키나와가 미군 지배 아래 들어간 굴욕의 날에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은 정부 행사로 ‘주권회복의 날’ 기념식을 열었다. 당시 일왕에 대해 만세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상당수 오키나와 주민은 전쟁 당시의 아픔을 떠올렸다고 한다. 오키나와 미군기지를 방문해 “풍속업(매춘업)을 더 활용하라”고 말했던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大阪) 시장의 발언도 자존심을 건드렸다. ‘오키나와 여성들은 매춘업에 종사해도 괜찮다’는 뜻으로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하 시내에서 ‘쓰치(土)’라는 상호의 바를 운영하는 고모 씨(64)는 “차별당하며 살 바에야 독립하는 게 낫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오사카에서 11년 전에 이주해 온 본토인인데도 오키나와 원주민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는 것이다. 이달 15일 ‘류큐 민족독립종합연구학회’라는 단체도 만들어졌다. 학계가 처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창립 멤버인 도모치 마사키(友知政樹) 류큐국제대 교수는 “독립을 주장하는 이들은 아직 소수지만 본토로부터의 차별을 느끼는 주민은 늘고 있다”며 “앞으로 다른 단체와 연계해 독립 후 문제들을 논의하면 반드시 새로운 미래가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오키나와=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극우 정치인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일본유신회 공동대표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행적과 관련해 “침략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일본 정치인들의 과거사 부정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시하라 대표는 18일자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침략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자학일 뿐이다. 역사에 관해서 무지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맥아더도 (미국) 의회에서 ‘(일본의) 자위를 위한 전쟁이었다’고 증언했다. 자원(수입 경로)을 봉쇄당했기 때문에 결국 동남아시아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며 “(식민지 지배) 그런 것은 근세에 유럽의 백인은 모두 한 것이지 않느냐. 근대는 먹느냐, 먹히느냐의 시대였다”고 주장했다. 최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사과한 무라야마 담화와 관련해 “침략의 정의가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했고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 시장 겸 일본유신회 공동대표는 “패전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침략이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이시하라 대표는 침략 자체를 부정하고 나섰다. 한편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는 19일자 니혼게이자이신문 인터뷰에서 “무력으로 적국에 들어가면 그게 바로 침략이지 그 외의 다른 표현은 없다”고 지적했다. 아베 총리가 무라야마 담화 계승 여부를 놓고 애매한 자세를 보이는 것을 두고는 “아베 총리의 발언 의도를 잘 모르겠다. 만약 (무라야마) 담화를 부정한다면 중국 한국은 물론이고 아시아 전체와 미국으로부터 비판받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내각이 한국과 미국의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북한과의 양자 대화를 이어갈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아베 총리가 납치 문제에서 성과를 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18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최근 방북했던 일본의 이지마 이사오(飯島勳) 내각관방 참여(자문역)는 북한 측에 △모든 납치 피해자의 즉시 귀국 △납치에 대한 진상 규명 △납치범 인도를 요구했다. 또 납치, 핵개발, 미사일 발사 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하자는 방침도 전했다. 철저히 비밀리에 추진된 이지마 참여의 방북은 아베 총리의 작품이었다. 대북 강경파였던 아베 총리가 자신의 임기 안에 납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화’로 돌아선 것이다. 문제는 일본의 대북 독자노선은 한미일 공조를 해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이지마 참여의 방북에 대해 한국과 미국 측은 외교통로를 통해 일본 측에 불쾌감을 전달했다.}

6월 어느 날 아침 초등학교 5학년 딸이 갑자기 “오늘 하루만 학교를 쉬겠다”고 말했다. 엄마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눈물까지 흘리는 딸을 매몰차게 몰아붙일 수 없었다. 엄마는 ‘하루 정도야 괜찮겠지’ 하며 허락했다. 그 하루가 198일이나 이어졌다. 딸이 학교 가기를 완강하게 거부한 것이다. 노하라 히로코(野原廣子) 씨는 올해 1월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만화책 ‘딸이 학교에 가지 않습니다’를 냈다. 노하라 씨는 서문에서 “한 반에 여러 명이 등교를 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그런 사례는 갑자기 자신에게 찾아올 수도 있다. 그 경우 부모와 아이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다”고 설명했다. 책에서 엄마는 ‘곧 나아지겠지’ 하고 기다렸다. 하지만 일주일이 되어도 상황은 마찬가지. 엄마가 강제로 학교에 보내려 했더니 갑자기 딸은 두통과 복통을 호소했다. 사람 만나는 게 무섭고 밖에 나가는 것도 무섭다고 했다. 엄마는 상담에 나섰다. 주위 눈이 무서워 인터넷을 찾아보고 멀리 있는 친구에게 물어봤다. 그리고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엄마는 우선 딸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도록 놔뒀다. 딸은 만화책을 읽고, TV를 보고 집에서 빈둥거렸다. 엄마는 ‘여름방학을 남들보다 한 달 먼저 맞이했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독였다. 도통 집 밖에 나가지 않는 딸을 일단 밖으로 유인해야 했다. 엄마는 시골에 있는 친정에 갔다. 딸은 사촌들과 수영을 하고 함께 뛰어다녔다. 표정도 밝아지고 몸도 건강해진 느낌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나면 문제없이 학교에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딸은 여름방학 후에도 등교를 거부했다. 담임선생님이 매일 집으로 와 설득해도 소용없었다. 당시 등교 거부 60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극적 반전은 양호선생님과의 만남에서 일어났다. 두 달이 지나도록 등교를 거부하자 화가 잔뜩 난 엄마는 딸을 강제로 학교로 데려갔다. 학교 교정에서 엄마와 옥신각신하는 딸의 모습을 양호선생님이 봤다. 등교 거부 사실을 알고 있었던 양호선생님은 “괜찮아. 억지로 공부하지 않아도 돼. 뭔가 재미있는 걸 나랑 할까”라고 말했다. 그 후 딸은 교실엔 가지 않았지만 양호실엔 매일 갔다. 처음엔 양호실에 30분만 머물렀다. 그것도 커튼으로 가리고 병상에 누워 혼자 놀았다. 하지만 1시간, 2시간 양호실에 머무르는 시간이 계속 늘었다. 양호선생님뿐 아니라 담임선생님, 교장선생님과의 대화도 늘었다. 친구들도 하나둘 찾아왔다. 조금씩 딸은 쾌활해졌다. 딸이 제 발로 교실에 들어갈 때까지 198일이 걸렸다. 그동안 엄마의 가슴은 새까맣게 탔다. 하지만 딸이 “실은 나도 학교 가고 싶은데…. 친구들하고도 놀고 싶은데…”라고 중얼거린 것을 들었을 때 마음을 고쳐먹었다. 딸이 다시 등교하고 난 뒤 엄마는 지난 일을 떠올려봤다. 양호선생님을 포함한 선생님, 소아과 의사, 양호실로 찾아와 딸과 함께 놀아준 친구들, 그리고 딸이 두려움과 싸우는 것을 곁에서 봐 준 자신…. 그런 조력자들이 있었기에 딸은 다시 등교할 수 있었다.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일본의 이지마 이사오(飯島勳) 내각관방참여의 14일 북한 방문에 대해 한국과 미국이 불만을 나타냈다. 중국과 한국을 거쳐 16일 일본을 방문한 글린 데이비스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는 공항에서 기자들에게 “일본 측으로부터 이지마 참여의 방북에 대해 설명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사전 협의 없이 방북한 것에 대한 불신감을 직설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날 오후 스기야마 신스케(杉山晋輔)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은 데이비스 대표와 만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 시절 이지마 당시 비서관은 두 차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났고 그 인맥을 살려 이번에 방북해 납치문제 해결에 나서고 있다”고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태영 외교부 대변인도 17일 정례 브리핑에서 “정부는 한미일은 물론이고 국제사회가 긴밀한 대북공조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그런 차원에서 이지마 참여의 방북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일본 인사의 비밀 방북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선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도쿄=박형준 특파원·윤완준 기자 lovesong@donga.com}

역사를 부정해 놓고 비판이 커지면 애매하게 수습하는 일본 정치인의 고질병이 또 도졌다. 위안부 및 성매매 정당화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大阪) 시장 겸 일본유신회 공동대표는 16일 “반성해야 할 점이 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발언을 철회하지는 않는다”고 말해 자신의 기존 주장을 꺾지 않았다. 하시모토 시장은 이날 한 민영방송에서 “미국 풍속(매춘) 문화와 가치관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일본과 미국의 차이에 대해 신중히 생각했어야 했다. 국제감각이 부족했다”며 자신의 발언을 사과했다. 이에 앞서 13일 그는 “(미군 병사들의 성욕 해소를 위해) 풍속업을 더 활용하라고 오키나와(沖繩) 주둔 미군 사령관에게 제안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시모토 시장은 16일 “여러 대책 중 하나로 이야기했으면 좋았는데 갑자기 풍속업을 하나의 사례로 들어 큰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며 “하지만 이야기의 취지를 철회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의 잘못을 상대방 문화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점에 국한시킨 것이다. 그는 위안부제도에 대해 13일 “총탄이 폭우처럼 퍼붓는 속에서 생명을 걸고 싸울 때 (군인들에게) 어딘가 쉴 수 있도록 해주려 한다면 위안부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었다. 하시모토 시장이 애매하게나마 한발 물러선 것은 국내외에서 강한 비판이 쏟아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같은 극우 성향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조차 15일 “(하시모토의 주장은) 나와 자민당의 입장과는 완전히 다르다”며 선을 그었다. 같은 날 야당인 다함께당의 와타나베 요시미(渡邊喜美) 대표는 “일본유신회와의 선거 공조를 재검토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88) 길원옥(86) 할머니는 24일 오사카 시청에서 하시모토 시장과 만날 예정이라고 교도통신이 16일 보도했다. 김 할머니는 지난해 8월 오사카 시청을 방문했지만 하시모토 시장이 휴가여서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최근 하시모토 시장 측이 만나겠다는 의사를 밝혀 면담이 이뤄지게 됐다.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아베 신조(安倍晋三·사진) 일본 총리는 15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와의 정상회담에 나설 수 있다는 뜻을 밝혔다. 일본이 대북 독자 노선 행보를 보이면서 동북아시아 안보 협력의 기본 틀이었던 한미일 삼각협력이 흔들리고 있다. 아베 총리는 이날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김정은과의 회담 가능성에 대해 “납치, 핵, 미사일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판단에서 정상회담이 중요한 수단이라면 당연히 (정상회담을) 생각해가며 협상을 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정상회담을 열었을 때 관방 부(副)장관 자격으로 배석한 적이 있다. 이와 관련해 북한 김영일 노동당 국제비서는 15일 방북 중인 이지마 이사오(飯島勳) 내각관방참여를 면담했다고 조선중앙방송 등 북한 매체가 보도했다. 그러나 면담 내용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면담에는 이영철 노동당 국제부 부부장 등이 참석했다. 아베 총리의 자문역인 이지마 참여가 북한의 최고위급 외교 담당자인 김영일 비서를 만남에 따라 북-일 정상회담을 위한 총리의 메신저 또는 사실상의 특사 역할을 맡았을지가 주목된다. 북한 처지에서 보면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후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강화되고 있기 때문에 ‘아군’이 필요한 시점이다.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 규슈대 특임교수는 “북한의 ‘벼랑 끝 외교’가 실패로 돌아간 후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 한국 미국 중국보다 상대적으로 접근이 쉬운 일본과 손을 잡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본의 독자적인 움직임에 정부는 불쾌한 기색이다. 북한이 위협 수위를 유례없이 고조시키며 개성공단 운영까지 중단시킨 상황에서 이지마 참여의 방북은 대북정책 공조에 애쓰던 한반도 주변국들의 뒤통수를 친 셈이기 때문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대북 제재가 효과를 보기 위한 한미일의 공조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고 중국과 러시아 등 주변국까지 한목소리를 내도록 애를 쓰고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일본이 뒷문을 확 열어 주는 것 아니냐”며 “한미일 협력에 영향이 없을 수 없다”고 말했다.이정은 기자·도쿄=박형준 특파원 lightee@donga.com}

15일 일본 도쿄(東京) 나가타(永田) 정 국회 참의원 제1위원회실. 예산위원회 질의응답 과정에서 의원들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에게 외교, 역사인식,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등을 날카롭게 질문했다. 하지만 아베 총리는 남 탓, 발뺌, 말 바꾸기, 애매모호한 대응으로 일관해 의원들의 빈축을 샀다. 오가와 도시오(小川敏夫) 민주당 의원이 한일관계 악화 원인에 대해 묻자 아베 총리는 “지난해 8월 이명박 대통령의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명칭) 상륙 때문이다. 민주당 정권 때 그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답했다. 오가와 의원이 한일관계 악화 원인이 총리의 발언과 행동 때문이라고 지적하자 아베 총리는 “한국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공유하는 중요한 인접국이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과 전화 회담도 했다. 나는 양국 관계가 진전되도록 노력해 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오가와 의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고 말았다. 야당 의원석에서 야유도 나왔다. 오가와 의원은 “총리는 뭐든 부인하고 있다. 지금 총리 발언은 계속 해외에 발신되고 있다.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는 것은 총리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총리는 질문의 핵심을 피하고 모호한 답변을 이어갔다. “고노 담화의 본래 의미를 받아들이지 않고 ‘군의 강제 동원 증거는 없다’는 협의의 내용만 강조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아베 총리는 “고노 담화는 관방장관 담화다. 아베 내각에서도 관방장관 담화로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총리가 구체적인 답을 피하자 의원 2명이 사회자인 이시이 하지메(石井一) 예산위원회 위원장에게 항의를 했다. 그러자 이시이 위원장은 “아베 총리는 가능한 한 스트레이트하게 답하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야스쿠니신사에 총리 자격으로 참배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아베 총리는 “일반 국민은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면 전쟁 때 죽은 가족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게 중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시이 위원장의 경고에도 아베 총리는 동문서답을 한 것이다.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사과한 무라야마 담화의 ‘침략’을 부정한 데 대해 아베 총리는 “일본이 침략하지 않았다고 말한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아베 정권으로서는 전체로 계승해 나간다”며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과거 중-일 관계와 관련해 일본의 침략을 인정한다는 것이냐”는 질문에는 “국회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면 정치, 외교 문제로 발전한다. 역사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하며 의견을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전쟁 때 (군인들에게) 쉴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위안부제도가 필요하다’ ‘주일 미군이 병사들의 욕구 해소를 위해 풍속업(매춘업)을 활용하면 좋겠다’ 등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大阪) 시장 겸 일본유신회 공동대표의 13일 발언으로 일본이 발칵 뒤집혔다. 정부와 시민단체뿐 아니라 미국 측도 반발하고 나섰다. 하시모토 시장은 차기 총리감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 문부과학상은 14일 “당을 대표하는 사람의 발언이라고 볼 수 없다”고 비난했다. 여성인 이나다 도모미(稻田朋美) 행정개혁상도 “위안부제도는 여성의 인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고 비판했다.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자민당 간사장은 “확실히 군인들에게 신경쓸 필요는 있지만 (위안부) 시설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라며 “정당의 대표로서 발언에 배려를 하지 않으면 국익을 해친다”라고 비판했다. 연립 여당인 공명당의 야마구치 나쓰오(山口那津男) 대표는 “여성의 인격, 인권을 경시하는 발언으로 우려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하시모토 시장의 발언이 한국 미국 등과의 외교에 영향을 줄 가능성에 대해 “정부의 입장을 외교 루트를 통해 열심히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헌법 개정을 위해 공공연히 하시모토 시장에게 협력을 요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와 집권 여당이 ‘선 긋기’에 나서고 있다. 과거사 문제는 아베 정권의 아킬레스건이기 때문에 하시모토 시장의 발언을 계기로 과거사 문제가 다시 불거지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일본 시민단체도 발끈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관서네트워크’의 방청자 공동대표는 언론 인터뷰에서 “여성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있다. 이런 발언이 통용된다고 생각하는 그의 사고가 무섭다”고 말했다. 미 국방부의 보도 담당자는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의 방침과 가치관, 법률에 반한다. 매춘에 따른 욕구 해소는 고려한 바 없다. 바보 같은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하시모토 시장은 14일 트위터를 통해 “인간, 특히 남자에게 성적 욕구 해소가 필요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라고 말해 자신의 소신을 꺾지 않았다. 또 “대체로 미국은 교활하다. 미국은 일관되게 공창(公娼)제도를 부정한다”고 밝혔다.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일본유신회 공동대표도 “군에 매춘은 따르기 마련이며 이는 역사의 원리와 비슷한 것”이라며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하시모토는 기본적으로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다”라고 옹호했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훈련기에 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사진이 뒤늦게 국제사회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비행기에 적힌 731이라는 숫자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인체실험을 실시한 일본의 731부대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는 12일 동일본 대지진 피해 지역인 미야기(宮城) 현 히가시마쓰시마(東松島) 시의 항공자위대 기지를 방문해 곡예비행단을 시찰하면서 ‘731’이라는 편명이 적힌 훈련기 조종석에 앉아 사진을 촬영했다. 14일 워싱턴의 정치외교 정보지 넬슨리포트는 “(731이라는 숫자가 전면에 쓰인) 아베의 이 사진은 독일 총리가 재미로 나치 친위대 유니폼을 입고 나타나는 것과 같은 수준”이라며 “독일에서는 (나치 유니폼 착용이) 불법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도 도덕적 반감 때문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보도했다. 제니퍼 린드(행정학) 다트머스대 교수는 “(아베 총리가) 731부대를 연상시키는 것은 우연이 아니며,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의 눈을 불타는 꼬챙이로 찔러버리는 셈”이라며 “지독히 도발적이고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에 어떤 이익이 있을지 의문이 들게 한다”고 비판했다. 한국 정치권은 여야 모두가 이를 또 다른 형태의 역사부정 행위로 규정하고 강력 비난했다. 새누리당 정몽준 의원은 보도자료에서 “우리나라와 중국 등 피해국에 대한 명백한 도발행위”라며 “아베 총리와 그 주변 인사들의 침략역사 부정은 한국 중국 등 피해국에 대한 모욕 차원을 넘어 동아시아 지역의 새로운 불안 요인이 되고 있다”고 비난했다. 국회 ‘올바른 역사교육을 위한 의원모임’ 소속 민주당 김성주 의원은 “일본 정부가 자국에서의 정치적 이득을 꾀하고자 역사를 왜곡해 주변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국 훙레이(洪磊) 외교부 대변인도 이날 브리핑에서 “일본 731부대의 범죄행위는 여전히 아시아 이웃 나라에 현실적인 위해를 조성하고 있다. 침략 역사를 철저히 반성하기를 바란다”고 비판했다. 731부대는 만주를 점령한 일본 관동군의 세균전 부대인 ‘방역급수부’를 뜻한다. 731은 부대번호다. 1933년에 설립돼 한국 중국 등의 전쟁포로들에게 페스트균을 비롯한 세균병기나 독가스를 투입하는 인체실험을 자행했다. 감염 실험 뒤에도 희생자가 숨을 거둘 때까지 동상(凍傷)실험, 총탄 관통 실험을 계속했으며 관련 희생자가 3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아베 총리는 이날 국회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로 한국 중국이 반발했다. 다른 신사에 참배하는 방법도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한국 중국의 반발은 오해에 따른 것”이라며 “야스쿠니 참배는 군국주의 회귀가 아니라 호국 영령에 대한 예를 표하는 것”이라고 답변했다. 도쿄=박형준·베이징=고기정 특파원·김기용 기자 lovesong@donga.com}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大阪) 시장이 13일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총탄이 폭우처럼 퍼붓는 속에서 생명을 걸고 싸울 때 (군인들에게) 어딘가 쉴 수 있도록 해주려 한다면 위안부 제도가 필요하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왜 일본의 종군위안부 제도만 문제가 되느냐. 당시는 세계 각국이 (위안부 제도를) 갖고 있었다. 폭행, 협박을 해서 위안부를 납치한 사실은 입증되지 않았다”며 위안부 강제동원을 부정했다.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국제 사회의 반발에 주춤하다가 며칠 지나면 되풀이한다. 소위 ‘치고 빠지기’를 하는 것이다. 식민지 지배 및 주변국에 대한 침략을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와 관련한 말 바꾸기가 대표적인 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지난달 23일 참의원에서 “(무라야마 담화의) 침략 정의는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후 한국과 중국이 강력히 반발하자 그는 이달 8일 “학문적으로 여러 논의가 있어 절대적인 정의는 정해지지 않았다는 점을 말했던 것으로 정치가로서 (이 문제에) 관여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한발 물러섰다. 미국 정부도 각종 외교 경로를 통해 불편한 심기를 알리고 미국 언론이 일제히 아베 정권의 역사관을 비판하고 나서자 일본 정부는 완전히 두 손을 들었다.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10일 “침략을 포함해 역대 내각과 마찬가지로 무라야마 담화 전체를 계승한다”며 꼬리를 내렸다. 하지만 ‘침략 정의’ 망언은 최근 다시 불붙었다. 자민당의 3대 핵심 간부 중 한 명인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정무조사회장이 12일 “당시는 일본의 생존이 위험해 많은 이가 나라를 지키려 전쟁에 나갔다. ‘침략’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무라야마 담화가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13일에는 하시모토 시장이 “침략에 학술적인 정의는 없다는 것은 총리가 이야기한 그대로다”라고 주장했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일본 최고지도자인 총리가 침략을 부정한 이후 보수 세력들이 거리낌 없이 속내를 밝히고 있다”며 “아베 총리가 있는 한 앞으로도 계속 정치인들의 망언이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편 요미우리신문이 10∼12일 전국 유권자 1030명을 상대로 전화 여론조사를 벌인 결과 아베 내각을 지지한다는 응답이 72%에 이르렀다. 지난해 12월 출범 당시 60%대에서 꾸준히 오르고 있다.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지지할 정당으로 자민당을 꼽은 이들이 47%로 가장 많았고 이어 일본유신회(8%) 민주당(7%) 순이었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일본 집권 자민당의 3대 핵심 간부 중 한 명인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정무조사회장이 12일 식민지 지배와 주변국에 대한 침략을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와 관련해 “당시는 일본의 생존이 위험해져 많은 이가 나라를 지키려 전쟁에 나갔다. ‘침략’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무라야마 담화가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아베 신조 총리의 “침략에 대한 정의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발언으로 논란이 일자 10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무라야마 담화를) 역대 내각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로 답습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다카이치 정조회장은 “아베 내각이 계속되면 전후 70년(2015년)에 ‘아베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며 “전쟁에서 고통을 받은 국가에 대해 죄송하다는 생각은 표현하겠지만 무라야마 담화와는 약간 표현이 달라지리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무라야마 담화 중 ‘침략’이라는 표현을 바꿀 것임을 시사한 것이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관방장관은 10일 과거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와 관련해 “담화 전체를 역대 내각과 마찬가지로 승계한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관방장관은 일본 정부 대변인이다. 이는 최근까지도 “침략의 정의는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발언을 180도 수정하는 것이다. 스가 관방장관은 이날 정례 기자회견에서 ‘무라야마 담화에 대한 견해를 말해 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한다. 침략의 정의에 대해 학문적 논쟁이 있을지 모르지만 아베 내각은 침략 사실을 부정한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고 답했다. 스가 장관의 언급은 “아베 총리의 최근 과거사 발언으로 역내 외교관계가 불편해지면 미국의 국익도 훼손될 것”이라는 미국 의회조사국(CRS)의 미일관계 보고서가 9일 알려진 뒤 일본 정부가 두 손을 들었음을 시사한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지금까지 밝혀진 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 연행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계속 부정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본보가 9일 입수한 가미 도모코(紙智子) 참의원 의원의 질의서와 내각 답변서에서 드러났다. 질의서는 A4용지 3장(1825자), 답변서는 1장(585자) 분량이었다. 답변서는 각의 결정을 거쳐 아베 총리가 서명한 정부의 공식 입장이다. ‘군과 관헌(官憲·관청의 의미)에 의한 위안부 강제 연행에 대해 정부 견해를 분명히 밝혀 달라’는 가미 의원의 질의에 아베 정부는 “1993년 8월 조사 결과(고노 담화)를 발표할 때까지 정부가 발견한 자료 중에는 군과 관헌이 (위안부) 강제 연행을 직접 지시하는 기술은 없었다”고 밝혔다. 강제 연행을 사실상 부정한 것이다. 가미 의원은 일본군 병사들이 중국 구이린(桂林)과 인도네시아에서 중국과 네덜란드 여성을 성폭행한 뒤 위안부로 삼았다는 진술을 담은 도쿄전범재판 증거 자료를 거론하며 “정부는 고노 담화 발표 전후에 이 같은 문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느냐”고 물었다. 이 문서는 일본 법무성이 보관하다가 1999년 국립공문서관에 넘겨졌다. 이에 대해 아베 정부는 답변서에서 “이 문서들은 법무성에 보관돼 있었지만 내각관방에는 없었다”고 말했다. 1993년 8월 고노 담화를 발표할 당시 내각관방에 도쿄전범재판 자료가 없었다는 이유로 이후 제시된 강제동원 증거를 외면해 왔다는 점을 스스로 털어놓은 셈이다. 가미 의원은 질의서에 ‘문서나 강제성을 입증할 만한 물적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위안부 16명의 의견을 청취한 결과 본인 의사에 반대해 위안부가 됐다는 것은 틀림없었다. 그래서 고노 담화를 발표하게 됐다’는 이시하라 노부오(石原信雄) 전 관방부(副)장관의 발언도 적시했다. 하지만 아베 정부는 ‘강제성을 입증할 만한 물적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앞부분만 강조하면서 고노 담화의 실제 의미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가미 의원실 측은 “아베 총리가 고노 담화 계승 여부에 대해 애매하게 답해 왔지만 결국 계승을 부정하고 있다. 올해 7월 참의원 선거 이후 본격적으로 고노 담화 수정 작업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아베 총리는 1월 말 “(고노 담화) 문제를 정치, 외교 쟁점으로 만들어선 안 된다. 당시 관방장관이 담화를 발표했기 때문에 (현재) 관방장관이 대응하는 게 적절하다”며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고 모호하게 말했다. 반면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전 총리는 지난해 7월 참의원 특별위원회에서 “(일본 정부가 관여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지만 부정할 수는 없다”며 고노 담화를 인정했다. 한편 일본 정부는 8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침략의 정의와 관련해 ‘정부 차원에서 침략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의 답변안을 준비했지만 아베 총리는 이를 읽지 않았다고 아사히신문이 9일 보도했다.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8일 침략 정의를 둘러싼 자신의 발언에 대해 “학문적으로 여러 논의가 있어 절대적인 정의는 정해지지 않았다는 점을 말했던 것으로 정치가로서 (이 문제에) 관여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이날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일본의 과거 전쟁에 대해 “(아베 내각은) 아시아 제국 사람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과거 내각과 같은 인식을 갖고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하루 전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이 “고노 담화 수정을 포함한 검토를 거론한 적이 없다”고 말한 데 이은 아베 총리의 해명성 발언이다. 이에 앞서 그는 지난달 23일 참의원 답변에서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사죄한 1995년 무라야마 담화와 관련해 “침략의 정의는 국제적으로도 정해지지 않았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침략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고 말한 바 있다. 이에 대해 한국과 중국이 강하게 반발하고 미국조차도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자 아베 총리가 8일 직접 사태 진정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침략의 정의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자신의 발언을 고수해 진정성이 없다는 비판도 나온다. 아베 총리의 이날 발언은 올해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속도 조절’을 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현재 아베 내각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무리하게 인접국이 반발하는 외교 문제를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다. 연립 여당인 공명당조차 외교 관계에서 ‘아시아 중시’를 외치고 있는 상태다. 무제한 돈을 풀어 경기를 살린다는 ‘아베노믹스’로 경제가 되살아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7월까지는 안전 운행을 해야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스가 관방장관은 8일 기자회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일본은 올바른 역사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밝힌 데 대해 “역사인식에 대해서는 일본의 입장을 각각의 외교 루트를 통해 계속 이해를 구해나가겠다”고 말했다.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현행법으로도 배외(排外)주의자들을 처벌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놔두면 더 큰 인권 침해가 생깁니다.”(우쓰노미야 겐지·宇都宮健兒·변호사) “배외주의자들은 자유롭게 말할 권리를 내세워 ‘한국인들을 죽여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도 목소리를 냅시다.”(스즈키 구니오·鈴木邦男·잇스이카이 최고고문) 7일 오후 도쿄(東京) 나가타(永田) 정에 있는 참의원 의원회관 1층 강당. 200석 좌석이 꽉 들어차 구석구석 임시 의자까지 보였다. 강당 정면에는 ‘차별주의자·배외주의자의 시위에 항의하는 국회 집회’라고 쓴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한국 여성을 강간하라” “한국으로 꺼져라” 등의 극단적 주장을 펼치는 배외주의자들을 막기 위해 일본 지식인들이 나선 것이다. 논의의 초점은 배외주의자들을 법으로 규제할 수 있는지에 모아졌다. 모로오카 야스코(師岡康子) 오사카경제법과대 객원연구원은 “배외주의자들은 표현의 자유라고 말하며 과격한 주장을 하고 있지만 국제 기준상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발언은 보호될 수 없다”며 “정부와 국회는 하루빨리 제재방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12명의 국회의원이 배외주의자를 규제하는 법안을 만들고 있다. 이번 국회집회를 주도한 아리타 요시후(有田芳生) 의원은 “배외주의자들이 하루빨리 없어지도록 국회의원들이 동참하겠다”고 말했다. 도쿠나가 에리(德永エリ) 의원도 “배외주의자 주장을 비판했더니 업무를 볼 수 없을 정도로 항의 전화가 많이 왔다”며 “하지만 가장 나쁜 것은 침묵하는 것이다. 배외주의자들이 사라질 때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대표적인 배외주의 단체인 재특회(재일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의 전 회원인 한 일반인 참석자는 “과거 시위를 경험하고 싶어 재특회 집회에 참석했지만 그들의 주장이 도를 넘어서 탈퇴했다”며 “재특회 회원 중 의문을 가진 사람도 많다. 그들에게 ‘지금 바로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감정에 북받쳐 몇 번이나 울먹거리기도 했다. 한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역시 배외주의자에 대해선 반대 목소리를 냈다. 그는 같은 날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배외주의자들에 대해 “일부 국가, 민족을 배제하려고 하는 언동이 있는 것은 매우 유감”이라고 말했다. 스즈키 간(鈴木寬) 의원은 “총리의 페이스북에도 극단적인 주장을 담은 글이 자주 눈에 띄며 내 페이스북에도 증오를 담은 글(댓글)이 올라온다”고 말했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1500여 년 역사 동안 중국과 일본의 관계가 부드럽게 나아간 적은 없었다.” 아소 다로(麻生太郞)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이 4일 인도 뉴델리에서 경제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중국에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냈다. 중국과 일본은 숙명적 갈등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아소 부총리는 “중국은 해군력을 확장하고 있다. 그것은 동중국해와 일본해(동해의 일본식 명칭)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하고 “자신의 영토는 스스로 지킨다는 개념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2005년 외상 시절 역사 교과서 문제로 중-일 관계가 나빠졌을 때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이 우려의 뜻을 전달하자 “최근 1500년간 계속 사이가 나빴으니 별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아소 부총리의 머릿속에는 중-일은 ‘화해’보다는 ‘충돌’의 이미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셈이다. 과거 중국과 일본이 힘의 역학관계에 따라 서로 공격하고 공격당한 점에서 일본 국민도 중국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갖고 있는 것. 양국의 공식 관계는 일본이 서기 600년에 견수사(遣隋使)를 중국에 보냈을 때 시작됐다. 아소 부총리가 언급한 ‘1500여 년’은 바로 이 시점인 것으로 추정된다. 견수사는 수나라에 파견된 조공 사절로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워 오는 역할을 했다. 초창기엔 일본이 중국에 한 수 배우고자 한 것. 중국 원나라는 1274년과 1281년 대규모 병력으로 일본 침공에 나선다. 화약을 사용한 새로운 병기로 일본 측이 수세에 몰렸지만 두 차례 모두 폭풍우 덕에 원나라 병력이 큰 타격을 입고 퇴각하게 된다. 당시 막부는 일본을 구한 이 폭풍우를 ‘가미카제(神風)’라고 불렀다. 일본의 반격도 시작된다. 14세기 원이 쇠퇴하고 명이 들어서는 혼란기에 일본 해적(왜구)들이 수시로 중국 연안을 약탈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중국 정벌을 명목으로 조선에 길을 빌려 달라고 했다.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일본이 중국보다 우월한 힘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는 1868년 메이지 유신이다. 근대화를 시작한 일본은 1894년 6월부터 약 1년간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뒀다. 당시 청나라 주력 북양함대는 일본에 대패했다. 문화 중심지이자 아시아의 대국인 중국에 승리한 일본인들의 감격은 대단했다. 전후 처리를 위해 1895년 4월 청일 강화조약(일명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은 일본은 그 감격을 기념하기 위해 야마구치(山口) 현 시모노세키(下關)의 조약 체결 현장을 지금까지도 보존하고 있다. 20세기 들어 일본이 아시아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중-일 관계는 더욱 나빠졌다. 일본군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전역을 거의 점령한 뒤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웠다. 1937년에는 중국 난징(南京) 시민 30만 명을 학살한 ‘난징대학살’을 벌였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중국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면서 중-일 간 힘의 관계가 다시 역전되는 모습이다. 중국은 국방비 지출을 지속적으로 늘리며 해양 세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아울러 매년 만주사변 관련 행사를 열고 ‘과거의 치욕’에 대한 설욕을 다짐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인민해방군 기관지 제팡(解放)군보는 1면에 “오늘의 중국은 ‘9·18사변(만주사변)’ 또는 갑오전쟁(청일전쟁) 때의 중국이 아니다”라고 경고하며 댜오위다오(釣魚島·일본명 센카쿠·尖閣 열도) 영유권 분쟁에서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중국이 힘이 커지자 일본은 ‘순방 외교’로 우군을 모으고 있다. 일본의 황금 연휴인 ‘골든위크’(4월 27일∼5월 6일)를 맞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아소 부총리는 해외를 순방했다. 아베 총리는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를, 아소 부총리는 인도와 스리랑카를 다녀왔다. 순방국 대부분이 중국의 위아래에 있어 사실상 중국을 포위했다. 아소 부총리가 인도 방문 때 “동중국해로 해군력을 확장하는 중국에 맞서 영토를 지키자”고 말할 정도로 일본은 노골적으로 중국 포위를 위한 국가적 연대를 주장하고 있다. 중-일 관계 개선의 여지가 단기간에 만들어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토머스 시퍼 전 주일 미국대사는 “일본 정부가 고노 담화를 수정하면 미국에서의 일본 국익을 크게 해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시퍼 전 대사는 3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미일관계 심포지엄에서 “위안부 문제는 어떻게 해도 정당화될 수 없다”며 이같이 말했다. 고노 담화는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 연행을 인정한 담화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지난해 9월 자민당 총재 경선 과정에서 “일본이 고노 담화 때문에 불명예를 떠안게 됐다”며 담화 수정 의사를 밝혔지만 지난해 12월 총리가 된 뒤에는 “관방장관이 전문가 의견을 들어 결정할 것”이라며 한발 물러섰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4일 시퍼 전 대사의 발언과 관련해 “위안부 문제를 인권문제로 보는 미국과 역사인식 문제로 보는 일본의 시각 차는 선명하다”며 “고노 담화 수정 노력이 순풍에 돛을 단 듯한 미일관계에 파문을 일으킬 수 있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일본 정부는 아베 총리의 ‘침략 정의’ 발언을 수습하는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요미우리신문은 4일 “총리의 표현 부족으로 오해를 살 우려가 있다고 보고 앞으로 국회 답변에선 내각의 견해를 사전 조율한 뒤 대응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1997년 일본 마쓰시타전기(현 파나소닉) 노사는 정년 연장 문제를 놓고 머리를 맞댔다. 일본 정부가 1994년 ‘고령자 고용안정법’을 개정해 ‘60세 정년’을 법제화하면서 규정한 4년의 유예기간이 1년 뒤면 끝나 어떤 방식으로든 합의를 도출해야 했다. 노사 대표 7명씩으로 ‘고용시스템검토위원회’를 만들어 협의를 진행해 왔지만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정년을 55세에서 5년 늘리면 근로자의 근속기간이 늘고 승급으로 급여가 올라 기업의 퇴직금 부담이 커지는 것이 쟁점이었다. 결국 노사는 퇴직금을 줄이는 대신 급여를 소폭 인상하는 안에 합의했다. 당시 일본의 기업들은 정년 연장 문제를 놓고 골머리를 앓았다. 법 개정 이전까지 55세였던 정년이 1998년 6월부터 60세로 연장돼 기업들은 이에 맞는 임금체계를 노사 합의로 만들어 내야 했다. 닛코증권은 50, 55, 60, 65세 등 4단계 정년제도를 만들었다. 사원이 정년 시점을 고르면 회사는 각 시점에 맞춰 임금 및 퇴직금 체계를 설계했다. 종업원 100명 규모인 한 해운회사는 정년을 늘리면서 55세부터는 연간 임금을 매년 10%씩 줄이기로 했다. 일본 기업의 적극적인 노사 합의로 새 법이 시행된 1998년 6월에는 93.3%의 일본 기업이 정년을 60세로 연장한 상태였다. 종업원 5000명 이상 기업은 100%, 1000∼4999명 기업은 99.5%가 노사 합의를 봤다. 정년 연장을 놓고 노사가 심각하게 대립한 기업이 많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일본의 60세 정년 연장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정년을 연장하면서도 기업의 인건비 인상분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임금 체계를 짠 것이 연착륙의 핵심이었다. 대부분의 기업은 50세 전후 직원들의 정기승급과 기본급 인상을 중단했다. 55세 때 퇴직금을 정산하도록 하는 기업도 많았다. 일본 기업들은 그런 방식으로 ‘인건비 폭탄’을 피해갈 수 있었다. 직원들도 정년 연장을 반겼다. ‘평생직장’ 개념이 강한 일본의 기업문화에서 직원들은 55세 이후에도 계속 일할 수 있다는 데 만족했다. 그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년 60세 제도가 ‘60세까지 안정된 직장’을 보장하지는 못했다. 일본의 중앙노동위원회가 1995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기업의 69.2%는 조기퇴직자 우대제도를 도입하고 있었다. 60세가 되기 전에 명예퇴직을 유도한 것이다. 한직으로 발령 내 퇴사를 유도하기도 했다. 대기업들은 인력개발, 프로젝트 지원, 커리어 지원 등과 같은 이름을 붙인 부서를 만들어 경쟁력 없는 직원들을 그곳으로 모아 놓고 일거리를 주지 않았다. 일본은 이후 관련법을 다시 개정해 이달부터 정년을 65세까지로 연장했다.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일본 성인에게 “우익단체를 말해보라”고 하면 열에 아홉은 잇스이카이(一水會)를 첫 번째로 꼽는다. 1972년 설립 당시 주류인 좌익 사상에서 벗어나 우익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했다. 이 단체는 매월 첫 번째 수요일 강사를 초빙해 강의를 듣는 학습 모임으로 출발했다. 우익 대부분이 반공노선에 친미를 표방하지만 잇스이카이는 ‘대미 자주’ ‘전후체제 타파’를 기치로 내걸었다. 신(新)우익인 것이다. 잇스이카이 멤버들은 초창기에는 정부 건물에 난입하거나 폭력을 휘둘러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하지만 점차 정치적 과격 행동과 거리를 뒀다. 잇스이카이를 만들어 초대 회장에 취임했고 1999년부터는 최고고문으로 지내는 스즈키 구니오(鈴木邦男) 씨를 지난달 30일 만났다. 우익이 바라보는 현재 일본의 모습이 궁금했다. 스즈키 고문은 “일본의 정치권과 사회가 너무나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어 생태계가 파괴될 지경”이라며 “매국노라고 비판을 받더라도 ‘한국과 대화하자’고 말하는 용감한 정치인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은 우익이지만 “건전한 좌익의 이념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현재 일본 정치권을 평가하면…. “퍼포먼스 정치가만 가득 들어차 있다. 그들은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하면서 ‘우리는 멋진 정치가다’고 생각한다. 한국, 중국과 신사 참배 문제를 논의하는 게 아니라 일본 국민들에게 자신의 참배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들은 ‘한국, 중국에 굴복하지 말자’고 주장한다. 외교가 완전히 사라졌다.” ―일반인들도 점차 과격해지는 것 같다. “일본 국민 한 명 한 명은 모두 고독하고 약한 존재다. 하지만 그들 모두 ‘일본이 강해지면 우리도 윤택해진다’고 믿고 있다. 또 인터넷 공간에서 어느새 ‘강한 일본인’이 돼 버린다.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명칭)를 수호하고 군대를 보유하라고 주장한다. 한국, 중국과 전쟁을 하라는 사람들도 많다. 신오쿠보(新大久保) 등지에서 ‘한국인을 죽여라’고 주장하는 단체도 있다. 그들은 그게 애국이라고 믿고 있다. 과거 같으면 경찰이 잡았다. 하지만 요즘은 경찰이 그들의 주장을 그냥 듣고만 있다. 문제다.” ―일본 전체가 우경화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고 본다. 40여 년 전 내가 대학생일 때는 좌익이 훨씬 많았다. 그들은 평화헌법 개정을 반대했고 일본의 과거사를 반성했다. 그들은 공공연히 ‘나는 애국심 따위는 없다. 애국심을 강조하면 배외(排外)주의로 흐르고 전쟁에 이를 수 있다’고 말했다. 높은 이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일본인을 찾아보기 힘들다.” ―근본 이유가 뭔가. “소련이 무너지면서 좌익들이 힘을 잃기 시작했고 반면 내셔널리즘이 생겨났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인들은 한국과 북한에 대해 ‘가해자로서 미안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 시절 북한이 일본인 납치를 인정했을 때부터 분위기가 바뀌었다. 일본은 피해자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북한을 용서할 수 없다는 의견이 분출하면서 점차 사회가 우경화됐다. ‘지금까지 일본은 너무 약했다. 제대로 된 헌법이 없어 그랬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됐다.” ―정치권과 국민이 서로 ‘우경화 시너지’를 일으키는 것 같다. “동감이다. 과거 한일 간 문제가 생기면 의원 채널을 동원해 대화로 해결했다. 하지만 지금은 대화가 사라졌다. 대화를 하자고 주장하면 선거에서 떨어진다. ‘한국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외치는 게 선거에 유리하다. 국민과 정치가 모두 오른쪽으로 가 있다.” ―우익의 대표가 우경화 현상을 비판하니 이상하다. “(하하 웃으며) 사회가 너무 좌익에 경도돼 있다는 생각에 나는 우익단체 잇스이카이를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태계의 축이 크게 오른쪽으로 가 있다. 우익은 소수일 때 존재가치가 있다. 지금처럼 전반적으로 우경화된 상황은 위험하다. 그러다보니 나는 좌익 같은 우익이 돼 버렸다.” ―다른 우익으로부터 공격당하지 않나. “여러 번 구타를 당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 누군가 방화를 한 적도 있다. 휴대전화가 없기 때문에 전화 테러는 다행히 당하지 않았다. 하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를 어떻게 평가하나. “신념이 있는 정치인이다. 한 번 실패했기 때문에 반성을 했고 새롭게 각오를 다졌다. 덕분에 지난해 12월 중의원 선거에서 압승했다. 하지만 우리는 좌익과 엄청 싸우면서 좌익을 이해했지만 그는 치열하게 싸워본 적이 없다. 현재 우익 목소리를 국민의 뜻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헌법 개정, 과거의 각종 담화를 고친다고 말했다. 한국과 중국이 반발해도 ‘강한 일본’을 외치며 밀어붙이고 있다. 잘못됐다. 그리고 위험하다.” ―우익은 모두 헌법 개정에 찬성하지 않나. “‘핵무기 보유 불가’ 등과 같은 분명한 원칙을 먼저 정해야 한다. 그 후 헌법을 어떻게 고칠지 의논해야 한다. 지금은 그런 원칙이 없다. ‘한국에 군대가 있으니 우리도 가져야 한다’ ‘북한이 핵을 갖고 위협하니 일본도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 이런 수준이다.” ―향후 일본의 모습을 어떻게 보나. “자민당이 헌법 개정을 시도할 텐데 실제로 개정되면 위험하다. 한국, 중국에서도 요즘 내셔널리즘이 만연하기 때문에 일본 정치인들의 행동을 계속 공격할 것 같다. 그렇게 해선 안 된다. 그럼 오히려 아베 정권을 도와주는 것이다. 아베 씨가 총리가 될 때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해 오히려 그를 도와준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당시 북한과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의 입지가 매우 좁아졌다.” ―일본의 우경화를 막을 방법은…. “매국노라고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한국과 대화하자’고 말하는 용감한 정치인이 나와야 한다. 한때 ‘다케시마 문제로 한일 관계가 나빠질 것 같으면 다이너마이트로 섬을 폭파시키는 게 낫다’고 주장하는 정치인도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 언론의 역할도 중요하다. 일본의 강경 매파 목소리, 잘못된 점만 지나치게 부각시켜 보도하는 것은 양국 국민의 감정의 골만 더 깊어지게 만든다. 동아일보는 한일 학자나 지식인들이 서로 이야기하고 이해하는 장을 만들어주는 신문이 돼 주길 바란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