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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브라질 월드컵 H조 첫 경기가 열린 18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과 영동대로 등지는 국가대표팀을 응원하는 붉은 물결로 가득 찼다. 1만5000여 명(경찰 추산)의 응원 인파가 모인 광화문광장은 새벽부터 명당자리를 먼저 차지하기 위해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이곳의 명당은 옛 동아일보 사옥인 일민미술관 위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 근처. 이날 광화문광장 근처에서 경기를 볼 수 있는 4대의 스크린 중 이곳의 스크린이 가장 크고(가로 19m, 세로 9m) 보기 좋은 곳에 설치돼 있어 응원 인파의 약 4분의 3이 이 스크린을 통해 경기를 지켜봤다. 경기가 아침 일찍 열리는 바람에 정장을 입고 광장을 찾거나 스마트폰으로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을 시청하며 회사로 출근하는 진풍경도 펼쳐졌다. 응원 인파가 먹는 간식도 맥주와 치킨이 아닌 김밥 및 샌드위치. 이날 광장을 찾은 미국인 관광객 앤드루 러셀 씨(48)는 “미국은 축구 열기가 한국같이 뜨겁지 않아 시민들이 아침부터 나와 응원하는 모습은 태어나서 처음 본다”며 신기해했다. 강남구 영동대로에도 환호와 탄식이 뒤섞였다. 이날 영동대로는 삼성역 사거리부터 코엑스 사거리 방향 7차선 도로가 통제됐다. 일부 시민들은 전날 밤부터 응원을 위해 꼬박 자리를 지켰다. 거리응원 입장선 가장 앞줄에 자리 잡은 송명준 씨(32)는 “동료 두 명과 휴가를 내고 맘 놓고 응원하러 왔다”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오전 6시를 넘어서자 1만8500여 명(경찰 추산)까지 응원하는 시민들이 늘어났다. 가수 싸이가 주 무대에 등장하자 넥타이를 맨 인근 직장인들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스크린을 쳐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4년 전 남아공 월드컵에 비하면 훨씬 줄어든 인원이 영동대로를 찾았다. 경찰 관계자는 “4년 전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통제를 했지만 인원이 너무 많아 왕복 차선을 전면 통제했었다”고 밝혔다. 남아공 월드컵 아르헨티나전에는 20만 명이 몰리기도 했다. 당시 편의점마다 맥주 등의 음료는 동이 났으며 화장실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에는 그런 월드컵 특수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치킨을 파는 한 상인은 “남아공 월드컵에 비해 장사가 너무 안 된다”며 울상을 지었다. 후반 23분 대표팀 이근호 선수의 선제골이 터지자 광화문 일대는 떠나갈 듯한 함성으로 뒤덮였다. 붉은 티셔츠를 입은 연인들과 가족들은 모두 기쁜 마음에 서로 얼싸안았고 세종대로를 지나던 일부 오토바이는 대한민국 응원 구호에 맞춰 경적을 울리기도 했다. 이날 주요 도로는 평소보다 교통 흐름이 원활했다. 직장인들이 경기를 보기 위해 일찍 출근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했기 때문. 서울시 교통정책과 이성엽 주무관은 “사람들이 출근 시간대이고 차량이 밀릴 것을 예상해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광화문광장에서는 ‘세월호를 잊지 말자’는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펼치는 시민들도 눈에 띄었다. 일부 시민들은 붉은색 응원 티셔츠 위에 노란 리본을 달았다.백연상 baek@donga.com·김성모·이건혁 기자}

《 힐끔힐끔 보는 것도 안 된다. 주행 중 흥분해서 골 장면을 쳐다보다가는 사고의 날벼락을 맞을 수 있다. 브라질 월드컵을 맞아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으로 축구 경기를 시청하는 운전자가 늘면서 사고 위험이 커지고 있다. 특히 이번 월드컵에서는 주로 새벽이나 오전 시간에 경기가 열려 화물차를 비롯한 상업용 차량 운전자, 출퇴근길에 자가용을 이용하는 운전자들은 주의해야 한다. 한국대표팀 경기는 6월 18일 오전 7시, 23일 오전 4시, 27일 오전 5시 등 새벽 시간에 몰려 있어 더 위험하다. 》 경찰은 월드컵 기간에 주행 중 DMB 시청 단속을 강화한다. 경찰에 적발되면 범칙금 6만 원과 면허 벌점 15점이 부과된다. 정상적으로 운전할 때의 전방 주시율은 78.1%인데 운전 중 DMB를 시청할 때에는 58.1%로 크게 낮아진다. 심지어 음주운전(혈중알코올농도 0.1%일 경우)을 할 때의 전방 주시율(71.1%)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장애물을 피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DMB를 시청할 때 1.12초로 음주운전(1.40초) 때와 비슷해 사고 위험성이 높다. 기자는 최근 경북 상주시 교통안전교육센터에서 DMB를 시청하며 운전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직접 실험해봤다. 급제동 코스, 위험회피 코스, 고속주행 코스 등 세 가지 코스에서 일반 주행과 DMB를 시청하며 주행했을 때를 비교했다. 세 가지 실험 모두 DMB를 시청하며 주행했을 때 안전도가 현저히 낮았다. 심지어 실험 도중 가드레일을 들이받는 사고까지 날 뻔했다. 급제동 코스(물기둥 20m 앞에서 갑자기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뀔 때 물기둥에 부딪치지 않게 제동하는 코스)에서는 시속 40km로 차를 직접 몰았을 때 물기둥 5m 앞에서 차를 멈췄지만 DMB를 보며 같은 속도로 달렸을 때는 2m 앞에서 멈췄다. 시속 50km로 차를 몰았을 때는 물기둥과 충돌 후 6m를 지나서 차량이 멈췄다. DMB를 보며 같은 속도로 달렸을 땐 충돌 후 16m나 지나서야 차량이 멈췄다. 물기둥이 사람이었다면 큰 사고로 이어졌을 만한 상황이었다. 위험 상황(물기둥과의 충돌)을 예상하고 있었는데도 DMB를 시청하며 운전했을 땐 반응 속도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빨간색 고깔 80개로 차 한 대가 빠져나갈 만한 길을 꼬불꼬불하게 만들어 놓은 180m S자 코스. 기자가 이 위험회피 코스를 정상 주행했을 땐 고깔을 하나도 쓰러뜨리지 않았다. 하지만 DMB를 시청하며 주행했을 땐 10m 나아갔을 뿐인데 고깔 3개를 쓰러뜨리고 코스를 이탈했다. 고속주행 실험에서는 더 아찔한 상황이 나왔다. 둥글게 이어진 서킷에서 시속 70km로 코스를 주행했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주변 사물이 ‘물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DMB를 조작하며 주행을 시작하자 ‘야간주행’ ‘횡단보도’ ‘에코주행’ 팻말을 전부 놓쳐버렸다. 게다가 300여 m를 달리다가 코너에서 DMB를 만지다 가드레일을 들이받을 뻔했다. 실험을 함께한 교통안전공단 김준년 교육개발처 교수는 “조심해도 사고 위험성이 곳곳에 있는데 DMB를 보거나 휴대전화를 만지는 건 자살행위”라고 지적했다.김성모 기자 mo@donga.com}

6월 9일 ‘구강보건의 날(치아의 날)’을 맞아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에서 대한치과의사협회 회원들이 무료 구강검진을 실시했다. 1946년 조선치과의사회(현 대한치과의사협회)는 어금니가 나는 시기인 6세와 한자로 어금니 ‘구’자를 숫자화해 6월 9일을 치아의 날로 정했다. 협회 회원이 시민을 대상으로 올바른 이 닦이법과 치실 사용법 등을 교육하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2일 천안함 46용사 중 한 명인 고 이상준 중사의 추모비 제막식이 모교인 부산 사하구 건국고에서 열렸다. 제막식에는 유가족, 재학생, 유주봉 부산지방보훈청장, 이정모 해군 9잠수함전단장, 해군 부사관 221기 동기생 14명 등이 참석했다. 이 중사의 해군 동기생들이 추모비에 경례를 하고 있다. 부산=서영수 기자 kuki@donga.com}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사건 당시 행동대장으로 잘 알려진 ‘용팔이’ 김용남 씨(63·사진)가 목사가 됐다. 그는 24일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기하성) 소속 서울 강동구 천호동 성도순복음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사건과 1998년 호텔 운영권을 놓고 벌인 폭력으로 두 차례 실형을 살았던 김 씨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건 2002년부터였다. 그는 “호텔 운영권을 잃고 복수를 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는데 어떤 사람이 ‘돈을 빌려줄 테니 일주일만 교회에 나가 보자’고 권유해 나가기 시작했다”며 “돈을 빌리지 못했지만 교회에 계속 나가게 됐고 어느 순간 ‘내가 그동안 죄를 많이 졌구나’라고 회개하게 됐다”고 밝혔다. 김 씨는 서울 강남구에서 개척교회를 열고 청소년 폭력 예방에 힘쓰겠다고 했다.김성모 mo@donga.com·강은지 기자 }

김영택 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사진)이 20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8세. 고인은 1959년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1965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광주 주재기자와 편집국 기획위원 등을 지낸 뒤 1995년 정년퇴임했다. 광주 주재기자 시절 5·18민주화운동 현장을 취재했으며 2004년 국민대에서 ‘5·18 광주민중항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아 ‘5·18 박사’로 불렸다. 1980년 당시 생생한 취재 내용이 담긴 수첩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가운데 하나로 등재됐다. 유족은 부인 최숙자 여사와 1남 2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발인은 22일 오전 8시, 장지는 경기 용인 천주교추모공원. 02-2258-5940}

‘아들아, 딸아!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니?’ 지난달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아직도 10여 명은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20일 오전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서 실종자, 희생자 가족들이 바다를 향해 실종된 가족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있다. 진도=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우리나라의 운전자는 갑자기 튀어나온 보행자를 욕한다. 하지만 선진국의 보행자는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차량의 운전자를 욕한다. 선진국은 보행자 중심의 교통체계가 마련돼 있기 때문이다. 서울 인사동과 신촌 연세로는 대중교통전용지구로 선정돼 보행자 중심의 거리가 됐다. 연세로에는 자동차 소음 대신 젊은이들의 음악과 환호가 섞인 공연이 계속 열리고 있다. 차가 사라진 거리에는 사람들이 몰려 젊음이 숨쉬고 있다. 스트라스부르의 로난 골리아스 교통국장(44)은 “원래 거리는 ‘사람’의 것이지 ‘차’의 것이 아니다”라며 “선진국의 추세는 도심 속에 차를 줄여 교통사고의 원인을 줄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골리아스 국장은 과거 한국에 왔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스트라스부르는 도로 폭이 좁은 반면 한국은 도로 폭이 넓다. 그만큼 보행자에게 돌려줘야 할 부분이 많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교통 도시정비네트워크 과학기술연구소(IFSTTAR)의 실방 라사르 선임연구원(64·사진)은 “차를 불편하게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선진국은 ‘운전하기 어려운 도시’를 일부러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프랑스 역시 한국처럼 4차로 도로가 많은데 2차로로 줄이고 주차장을 없애고 있다”고 말했다. 라사르 선임연구원은 “4차로 도로가 많으면 차량의 속도가 높을 수밖에 없고 그럼 ‘차’ 중심으로 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차가 중심이 되면 보행자는 그만큼 위축되고 안전 역시 위태롭다”고 지적했다. 결국 차가 불편하고 보행자가 편해야 사고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스트라스부르=김성모 기자 mo@donga.com}

프랑스 동부 도시 스트라스부르는 유럽에서 ‘춤추는 도시’로 알려져 있다. 차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대신 보행자들이 거리를 활보할 수 있게 했다는 의미다. 스트라스부르는 보행자의 ‘안전 확보’에 성공한 대표적 케이스로 꼽히고 있다.○ 보행자의 천국 지난달 3일 오후 7시 스트라스부르의 클레베르 광장. 퇴근시간인데도 자동차를 찾아볼 수 없는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느릿느릿 걷는 노인과 유모차를 미는 여성이 눈에 띄었다. 깔깔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거리 어느 곳에서도 조급함이나 긴장감은 보이지 않았다. 고딕식 노트르담 성당과 빨간 벽돌로 지어진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전차만 조심스럽게 느린 속도로 지나갔다. 이곳은 차량 통행이 금지된 보행자 전용도로였다. 스트라스부르는 1994년 노면전차를 도입했다. 그 대신 도심 중심부에서 자동차를 추방했다. 시내 중심가를 잇는 12.6km의 전차 철로를 개설한 뒤 도심 3km 안을 보행자 전용도로로 지정했다. 당시 스트라스부르에선 하루 25만 대 이상의 차량이 운행하고 있었다. 스트라스부르는 차를 없애기 위해 도심 중심부로 들어오는 차량을 되돌려 보내는 U턴 방식을 사용했다. 차량이 중심부로 들어오기 전 중간 지점에 주차하고 전차를 이용하게 한 것이다. 시는 보행자 전용도로를 차츰 확대해 1990년대 후반 도심지역(총 123만 m²)의 25%에서 현재 36%까지 늘었다.○ 스트라스부르 시가 잡은 ‘세 마리 토끼’ 시내에 있는 상인과 주민들은 오전 6시부터 5시간 동안 차량 통행이 가능하다. 상인들은 이 시간을 이용해 짐을 실어나른다. 이 시간이 지나면 시내 길목마다 설치된 지름 30cm의 철봉(볼라드)이 무릎 높이까지 올라온다. 응급 상황에는 볼라드 앞에 있는 기계의 호출 버튼을 눌러 허가를 받아야 한다. 시 당국은 위반 차량을 감시하고 볼라드를 원격조종한다. 처음 시 당국이 차량 통행을 금지시켰을 때 도심권 상인들은 격렬히 반대했다. 불편과 함께 소득 감소에 대한 불안감이 높았기 때문이다. 시는 상인들에게 15년 동안 수입 손실을 보전해 주면서 교통안전 문화를 정착시켰다. 지금은 보행자가 늘면서 상인들의 수입이 증가했다. 클레베르 광장에서 빵집을 14년 동안 운영해온 도나텔리 조세프 씨(41)는 “처음에는 모두가 반대했는데 지금은 교통사고 걱정도 없을 뿐만 아니라 관광객이 늘었다”며 “경제가 불황이라는데 수입이 줄지 않았다”고 말했다. 2009년에는 스트라스부르의 상인조합장이 ‘정책에 반대한 것을 후회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결국 시의 정책을 주민들이 믿고 따르면서 교통안전뿐만 아니라 상권 활성화까지 얻은 셈이다. 스트라스부르에선 차량 통행을 금지시킨 뒤 거리와 공기가 깨끗해졌다. 차량 통행 금지 전에는 스트라스부르의 자랑인 노트르담 성당의 외벽이 매연으로 검게 변해 수시로 닦아야 했다. 주민 안카트린 소라뤼 씨(42·여)는 “하늘이 맑아지고 거리와 공기가 깨끗해졌다. 전차가 있고 자전거를 많이 타서 이동에 불편함을 못 느낀다”고 말했다.○ ‘차 사고’ 줄어들자 ‘자전거 사고’가 뉴스로 세바스티앵 보프 스트라스부르 교통안전 부서 담당자는 “‘차를 없앤다’는 생각은 편의보다는 안전에서 비롯됐지만 이젠 전차와 자전거 이용이 익숙해지면서 불편하지도 않다”고 말했다. 현재 스트라스부르에는 전차 7개 노선이 하루 40만 명을 수송하고 있다. 시민의 14%는 자전거를 이용한다. 시는 2025년 자전거 이용자를 2배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자동차가 사라지면서 당연히 사고도 감소했다. 1992년 스트라스부르에선 1003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해 16명이 목숨을 잃고 1240명이 다쳤다. 노면전차를 도입한 1994년에는 914건으로 감소했다. 지난해 스트라스부르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건수는 398건에 불과하다. 게다가 대부분이 자전거 때문에 발생한 가벼운 접촉사고다. 시 당국은 교통사고 건수를 ‘0’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스트라스부르 지역 일간지인 ‘DNA’에 최근 게재된 한 교통기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어제 오후 1시 반경 스트라스부르의 라자레길에서, 스쿠터를 몰던 한 청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집에서 나오던 한 여성과 부딪쳤다. 15세 청소년과 38세 여성은 찰과상을 치료하기 위해 오트피에르의 병원으로 옮겨졌다.’ 스트라스부르 취재에 동행한 삼성교통안전연구소 장택영 박사는 “스트라스부르는 시가 선제적이면서도 과감한 정책을 시도해 시민들의 안전을 확보했다”며 “우리나라도 안전을 최우선에 놓고 보행자 중심으로 거리를 재편해야 한다”고 조언했다.스트라스부르=김성모 기자 mo@donga.com}

▼ 친구 위해 학년대표 포기한 ‘양반장’ ▼구조 직전 선실 달려간 양온유양양온유 양은 4남매 중 맏이였다. 아버지는 “첫째는 참고 양보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양 양은 피자를 먹을 때 부모 것부터 덜어놓고 남은 조각을 동생들에게 나눠준 뒤 자기 걸 집어 들었다. 그는 친구들이 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을 오후 7시부터 11시까지 학교 앞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월급을 타면 동생들에게 간식을 사주곤 했다. “난 왜 참아야 돼? 왜 난 만날 손해만 봐야 되냐고!” 양 양이 열다섯 살 때 이렇게 한 번 반항한 것으로 사춘기를 넘겼다고 아버지 양봉진 씨(48)는 전했다. 어머니는 “불만이 있으면 편지를 써서 바른 소리를 곧잘 하는 당찬 딸이었다”고 했다. 학교에서 양 양의 별명은 ‘양반장’이었다. 지난해 1학년 대표에 이어 올해는 학급 반장을 맡았다. 단원고 2학년 A 양은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온유가 살갑게 대해준 덕분에 친구들도 사귀고 그렇게 싫어하던 사진도 같이 잘 찍게 됐다”고 말했다. 양 양은 원래 올해도 학년대표를 하고 싶었다. 어머니는 “온유가 ‘친한 친구가 학년대표를 하고 싶어 한다’고 고민하기에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더니 결국 포기했다”고 말했다. 양 양은 어릴 때부터 처음 듣는 소리도 건반으로 음을 짚어낼 정도로 음감이 좋은 편이었다. “레슨비를 받지 않아도 좋으니 가르쳐보고 싶다”고 하는 피아노 선생님도 있었다. 마음을 다친 사람을 돌보는 음악심리치료사가 되는 게 양 양의 장래희망이었다. 수학여행 며칠 전 그는 아버지에게 사회복지 관련 경험을 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단원노인복지회관과 군자사회복지관 등에 “우리 딸을 자원봉사자로 써 달라”고 요청해놓은 상태였다. 아버지는 “온유가 일찍 하늘나라로 떠난 것보다 더 안타까운 게 있다”고 했다. “이 아이가 살았더라면 남을 위해 헌신하며 살았을 텐데 그 마음을 펼쳐보기도 전에 이렇게 차가워져서….”안산=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 덩치 커도 살뜰히 남 챙긴 딸같은 아들 ▼친구 구한 정차웅군키 177cm, 몸무게 102kg인 거구의 아들을 아버지 정윤창 씨(47)는 ‘딸 같은 아들’이라고 불렀다. 정차웅 군은 웬만한 성인 남자보다 덩치가 컸다. 눈썹이 진하고 이목구비도 커서 처음 보면 잊혀지지 않는 강한 인상이다. 하지만 생긴 것과 다르게 검도장에 가면 관장님과 “오늘은 집에 있는 컴퓨터를 바꿨어요” “학교에서는 친구들이랑 ○○ 하고 놀았고요” 하면서 미주알고주알 자기 이야기를 했다. 검도장에서 초등학생 꼬마들에게 유독 인기가 많았다. 처음 들어와 낯설어하는 아이들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고 돌봐 주는 자상한 ‘형아’였다. “남이 좋아하는 걸 해주려고 하기보다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게 진짜 배려하는 거라고 형이 가르쳐줬어요.”(석모 군·11) 수련회를 가면 저녁 때 삼겹살을 구워 아이들 접시에 하나하나 놓아주고 본인은 마지막에 남은 걸 집어 먹었다. 덩치에 비해 유난히 사근사근한 성격 때문에 한 번 봤던 학부모들도 정 군을 기억했다. 수학여행 가기 전엔 기념품 사가지고 돌아오겠다며 검도장 동생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지난달 23일 시신이 발견된 러시아 출신 학생 슬라바(본명 세르코프 빌라체슬라브·17) 군은 정 군의 단짝이었다. 정 군은 사고 당일(지난달 16일) 가장 처음 사망자로 확인됐다. 친구 둘을 구하고 나서 배 안에 남은 친구들을 찾으러 다시 들어갔다가 구명조끼도 입지 않은 채 발견됐다. 친구를 구하다 희생된 정 군에게 가족들은 “국민 세금을 낭비할 수 없다”며 가장 싼 수의를 입혔다. 정 군을 10년 전부터 봐온 이양호 해동검도 관장은 정 군을 ‘된장 같은 아이’였다고 표현했다. “검도장 아이들에게 시간이 갈수록 남을 더 배려하고 인내하는 ‘된장 같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요. 차웅이는 위급한 상황에서 자기가 먼저 살려고 하지 않고 친구들을 끝까지 배려한 거잖아요. 된장 중의 된장, 진국 중의 진국인 거죠.”안산=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엄마, 가스 잠갔어?” 확인하던 꼼꼼이 ▼최초 신고 최덕하군“엄마, 가스 불 제대로 잠갔어? 끄고 나온 것 맞지?” 최덕하 군은 초등학생 때 외출한 엄마에게 전화해 가스 불 점검을 하곤 했다. 가스 불 위에 올려놓은 냄비를 깜빡해 불이 날 뻔했던 기억을 최 군은 자주 떠올렸다. 어머니 김상희 씨(45)는 “어릴 때부터 어른보다 주변을 잘 챙겼다. 위기 상황이 닥치면 차분하게 자기가 뭘 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 아이였다”고 말했다. 최 군은 시사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신문과 뉴스를 열심히 챙겨봤다. 가족들은 뉴스를 보다가 모르는 게 나오면 최 군에게 물었다. 한때 장래희망으로 아나운서를 꿈꾸기도 했다. 아버지 최성웅 씨(52)는 “주변 일에 관심이 많고 어딜 가면 자기 의견 말하는 걸 주저하지 않는 적극적인 아이였다”고 말했다. 최 군은 중학교 2학년 때 반장과 학년회장을 맡았다. 장래희망은 여러 번 바뀌었다. 검도를 시작한 중학생 무렵엔 경호원이 되겠다고 했다가, PC방에 드나들면서는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다고 했다. “아기 때 꿈은 ‘아파트 사장님’이었어요. 엄마 아빠한테 집 지어주겠다고….” 어머니는 최 군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최 군에게 검도를 가르쳤던 차이성 관장(31·여)은 “남자 관장님에게 ‘아버지, 배고파요. 맛있는 거 사주세요’ 하면서 곰살궂게 굴었다. 엉덩이를 툭 치면 ‘어허 아버지, 왜 이러십니까’라면서 생긋 웃었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엄마 손이 필요하지 않고 뭐든 스스로 한 아이”라고 했다. 수학여행 짐도 혼자 쌌다. 집에서 나설 땐 “잘 다녀올게. 엄마 사랑해” 하며 꼭 껴안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때 온기가 아직도 느껴진다. 그 온기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덕하가 최초 신고자라고 들었을 때 ‘전화하는 시간에 살아 나와 주지’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엄마 아빠한테 끝내 전화 한 통 못한 게 마음 아프지만 자랑스럽고 감사해요.”안산=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고교때 암투병 친구어머니 보살펴 ▼민간 잠수사 이광욱씨학창 시절 아들은 한강에서 시신을 건지는 아버지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수영과 잠수를 배운 아들은 나이가 들며 어느새 아버지를 닮아갔다. 민간 잠수사 이광욱 씨의 아버지 고 이진호 씨는 해군 특수전전단(UDT) 5기 출신이다. 아버지는 1974년 팔당댐 공사 때 잠수사 일을 하다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에 눌러앉았다. 이 씨는 수해나 사고가 났을 때 아버지가 시신을 건져 올리는 것을 종종 목격했다. 이 씨의 가족은 봉사하는 삶을 살기로 동네에서 유명했다. 이 씨의 아버지는 10년 동안 이장을 했고 어머니는 부녀회장을 하며 봉사활동을 했다. 동생은 자율방범대원이다. 지명관 조안면 면장(54)은 “이 잠수사 부모님은 없는 형편에 사재 털어서 남들 돕고 그랬다. 아들도 봉사활동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 씨는 남양주시 소년소녀가장 돕기에도 앞장섰다고 한다. 이 씨는 정도 많았다. 이 씨의 빈소를 찾은 친구 윤명규 씨(53)는 기자에게 ‘38년 전 자라사건’을 털어놨다. 당시 두 사람은 고교 1학년생이었다. “우리 어머니가 위암 수술 받은 걸 어떻게 알았는지 꼭두새벽부터 집에 찾아와 자라를 내밀더라고요.” 이 씨는 몇 달 동안 밤마다 강에서 자라와 붕어를 잡아 이튿날 아침 윤 씨 집을 찾았다. 키 180cm의 거구인 이 씨가 ‘오늘 몇 마리 못 잡았어’ 하며 머쓱해하던 표정을 윤 씨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이 씨는 세월호 실종자 구조를 위해 급하게 진도로 내려갔다. 어머니 장춘자 씨(71)는 “밥상 차려놨는데 어디를 빨리 가야 한다며 밥 한술 못 뜨고 나갔다”고 말했다. 둘째 아들 이모 군(18)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진도에 가신 걸 알았다”고 했다. 앳된 소년의 얼굴로 검은 상복을 입은 둘째 아들은 단원고 학생 희생자들과 동갑이다.김성모 기자 mo@donga.com}

▼ 생일날 제자들과 케이크 장난친 ‘남쌤’ ▼학생들 대피시킨 남윤철 교사점심 직후 나른한 5교시, 영어담당 남윤철 선생님이 칠판에 ‘while’이라고 쓰며 물었다. “이 단어 무슨 뜻이지?” “∼하는 동안요.” “딱 선생님 단어네. 선생님도 동안(童顔)인데.” 남 선생님은 졸고 있는 제자를 깨울 때도 웃기려 공을 들였다. 출석을 부를 땐 이름 석 자만 읊고 넘어가진 않았다. ‘애들이 말장난을 만들어와 평가를 받고 간다. 그중 최우수작. 예수님이 제자와 쇼핑하다 맘에 드는 옷이 있어 하는 말… 예루살렘(얘로 살 거야라는 뜻).’(2011년 10월 페이스북 게시글) 남 선생님이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맡는 날 학생들은 평소보다 많이 남았다. 어느 땐 느닷없이 들어와 ‘1’을 외쳤다. 눈치 빠른 아이들이 ‘2’ ‘3’ 이어가면 주머니에서 떡을 꺼내줬다. 그의 생일날 학생들은 교단으로 몰려가 케이크 생크림을 그의 얼굴에 문질렀다. 그는 생크림 범벅인 채로 다시 제자들 얼굴을 비비는 스승이었다. 그는 수업시간 학생들 질문에 길게 답하는 편이었다. 단원고 2학년 A 양은 “남쌤은 항상 기본부터 설명해주셨다. 다른 선생님은 ‘다 알겠지’ 하고 건너뛰는 부분을 쌤은 지나치지 않았다”고 했다. 제자들 성적이 50점에서 55점으로 오르든, 80점에서 100점으로 오르든 그는 똑같이 말했다. “많이 올랐네.” 교실에서 그의 별명은 ‘송일국’이었다. 한 여학생은 그가 ‘○○아, 생일 축하한다. 요즘 영어공부 열심히 하던데 계속 열심히 하고 오늘 맛있는 거 많이 먹어’라고 써준 메모를 1년 넘게 지갑에 넣고 다녔다. 미혼의 아들을 떠나보내던 날 남 선생님의 어머니는 “의롭게 갔으니 됐다. 아이들 놔두고 살아나왔어도 못 견뎠을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학생들이 많이 희생돼) 아들 장례 치르는 것조차 미안하다”며 인터뷰를 사양했다. 남 선생님의 발인 직전 그의 아버지는 “사랑한다. 내 아들. 잘 가거라. 장하고 훌륭한 내 자식”이라고 다 들리게 말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엄하지만 맞장구 잘 쳐주던 ‘왕언니’ ▼아이들 먼저 내보낸 최혜정 교사지난해 단원고에서 교사로 첫발을 내디딘 최혜정 선생님은 올해 담임을 맡은 2학년 9반 학생들과 일곱 살 차였다. 아이들이 다른 선생님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으면 “네 입장에선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다”고 공감해주는 ‘왕언니’ 같은 교사였다. 최 선생님의 교무일지에는 제자들의 가정형편이나 말할 때 특징 같은 것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부임하자마자 카메라를 장만해 틈나는 대로 제자들의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의 카카오스토리에는 학생들 사진이 많이 올라와 있다. 최 선생님은 야간 자율학습 때 휴대전화를 만지는 아이들을 보면 불쑥 다가가 ‘핸드폰!’ 하고 인상을 쓰며 엄하게 보이려 했다. 하지만 친구들한테는 “내가 어린 걸 알면 무시할까 봐 나이는 비밀로 하는 중”이라고 털어놓았다. 강한 척해도 속이 여리다며 친구들은 그를 ‘외강내유(外剛內柔)형’이라고 놀렸다. 생일이었던 지난해 11월 26일 한 제자가 그에게 편지를 건넸다. ‘제 생일 때 주신 핸드크림 잘 쓰고 있어요. 나이 차가 별로 안 나 편한 것 같아요. 선생님, 학기 마지막 날엔 나이 알려주세요!’ 최 선생님은 맞벌이하는 부모 대신에 두 동생 아침밥을 챙겨주는 맏이였다. 동생들 진학 상담도 전담했다. 사촌동생들에게도 대입 자기소개서를 보내라고 해 일일이 첨삭했다. 고모에게는 뱃살을 만지며 ‘언제 뺄 거냐’고 농담을 하고, 삼촌이 담배를 피우면 엉덩이를 툭 차며 ‘내가 끊으라고 했지’ 하고 너스레를 떨던 조카였다. 아버지 최재규 씨(53)는 “학교 다닐 때 용돈 30만 원을 주면 5만 원은 저축하고 돈을 남겨서 나한테 등산 장비를 사주곤 했다”고 말했다. 최 선생님은 집에서 부모와 복분자주 마시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아버지 최 씨는 지난달 전북 고창에 놀러갔다가 딸이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면 함께 마시려 특산품인 복분자주를 여러 병 사왔다. 이 복분자주는 지난달 19일 고인의 빈소 영정 옆에 놓여 있었다.임현석 기자 ihs@donga.com ▼ 학교에선 ‘딸바보’… 집에선 ‘제자바보’ ▼선실 다시 내려간 박육근 교사8일 밤 12시 박육근 선생님의 빈소에 20대 청년이 한쪽 다리를 절며 들어왔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박 선생님의 제자였다. 장애가 있었던 이 제자는 영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생님 돼 찾아오면 웃으며 맞아준다고 하셨잖아요. 저한테 ‘선생님이 되라’고 먼저 말씀하셔 놓고 약속을 깨면 어떡해요.” 몸집이 큰 한 제자도 영정 앞에서 입을 열었다. 용인대 태권도 선수였다. “선생님 저 경기 있어서 공항 가는 길이에요. 선생님 아니었으면 제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을까요.” 학교에서 싸움을 자주 했던 이 제자는 박 선생님의 조언으로 태권도를 시작했다고 했다. 제자들은 토요일 오후 운동장에서 박 선생님과 축구 했던 추억을 많이 떠올렸다. 말썽부린 아이들에게 박 선생님이 내건 벌칙은 ‘토요일에 나랑 공차기’였다. 학생부장을 오래 맡아 사달이 나면 경찰서에 달려가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한 학부모는 “선생님이 학교폭력 대책 회의 건으로 저한테 전화할 때마다 ‘죄송하다’며 몸을 낮추셨던 게 기억난다”고 했다. 박 선생님의 친형 박춘근 씨(61)는 “육근이가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시골에서 어렵게 성장해 넉넉지 않은 집 아이들을 많이 챙겼다. 사고 친 애들 직접 합의해 준 적이 몇 번 있었다”고 했다. 한 단원고 학생은 “선생님이 형편이 어려운 친구에게 ‘돈 안 내도 수학여행 갈 수 있으니 걱정마라’고 여러 번 말했다”고 전했다. 집에서 박 선생님은 두 딸에게 ‘서운하다’는 불평을 듣는 아버지였다. 아내는 “학생들한테 하는 만큼만 애들한테 해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박 선생님은 ‘딸 바보’로 통했다. 학생들 앞에서 “우리 둘째딸이 너희들과 동갑인데…”란 말을 습관처럼 했다. 단원고 2학년 A 양은 “처음에는 공부 열심히 하라는 취지로 딸 얘기를 꺼냈다가 결국 매번 딸 자랑으로 끝났다”고 말했다.김성모 기자 mo@donga.com}

스승의 날을 하루 앞둔 1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숙명여대에서 학생들이 멘토 교수님에게 편지와 선물을 전달했다. 밝게 웃는 교수님 앞에는 학생들이 감사의 마음을 적은 메모들로 꾸민 나무 모양의 종이가 놓여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자유청년연합 회원들이 손석희 JTBC 앵커와 이상호 고발뉴스 기자,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를 검찰에 고발하기 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회원들은 이 3명이 다이빙벨의 성능을 과대 포장해 결국 정부의 구조작업을 방해했다며 공무집행 방해 및 사기죄로 고발한다고 밝혔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7일 오후 인천 서구 연희동 인천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인천 아시아경기대회 주경기장 준공식이 열렸다. 아시아경기의 개최 연도를 상징하는 2014명의 시민과 행사 참석자들이 준공식에 참석해 테이프커팅을 하고 있다. 인천시는 한국기록원에 ‘최다 인원 동시 테이프커팅’ 기록 등재를 요청했다. 인천=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2일 오후 3시 30분 서울지하철 2호선 상왕십리역에서 발생한 전동차 추돌 사고는 여러 가지 의문이 남는다. 서울메트로의 종합관제소에서는 두 열차가 가까워지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사고를 미리 막지 못했다. 또 서울메트로 측은 “안내방송을 했다”고 했지만, 승객들은 “상황을 정확하게 알리는 방송이 아니었고 그냥 기다리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추돌 위험 왜 몰랐나… 브레이크 밟았는데 사고 사고 당시 상왕십리역에 있던 2258 전동차는 여러 번 문을 열고 닫은 뒤 막 출발하는 순간이었다고 승객들은 전했다. 그때 뒤에 오던 2260 전동차와 추돌한 것이다. 전동차의 운행 안전을 실시간으로 살펴보는 종합관제소는 사고를 왜 막지 못했을까. 정달오 서울메트로 운전팀장은 “열차와 열차 사이는 비상 장치에 의해 200m 거리가 확보된다. 종합관제소는 전반전인 운행만 관리한다. 두 열차가 가까워진 것은 확인했다”고 밝혔지만 정작 사고는 막지 못했다. 서울메트로 사고대책본부의 한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열차가 역에 들어오거나 나오면 역에 설치돼 있는 감지시스템을 통해 해당 역 관제실과 종합관제소에 위치가 파악된다. 하지만 역과 역 사이에는 이 감지시스템이 촘촘히 배치돼 있지 않아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뒤쪽 전동차를 운행하다 사고를 낸 기관사는 조성근 서울메트로 운전처장에게 사고 당시를 이렇게 밝혔다. “상왕십리역으로 진입하면서 커브 구간을 도는 순간 적색 신호등과 앞 열차가 보였다. 최선을 다해서 비상 제동을 했다”는 것이다. 서울메트로 측은 “제동 거리가 모자라 열차가 추돌한 것 같다”고 했다. 전동차는 쇠바퀴여서 시속 60km로 달려도 최소 제동 거리가 154m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피 방송 논란… 시민들 침착한 대응 이번 사고는 지난달 16일 세월호 참사 때와는 달랐다. 지하철 지하 역사에서 앞뒤 전동차가 부딪치면서 그 안에 타고 있던 승객들은 큰 충격을 받았음에도 침착하게 전동차에서 나왔다. 앞쪽 전동차에 탑승했던 김유미 씨(20)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상왕십리역 전동차 내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충격으로 넘어지면서 손을 다쳤다. 하지만 승객들은 전동차 내에서 서로 먼저 나가려고 밀치는 등의 혼란이 빚어지진 않았다. 어디선가 ‘침착해’라는 소리가 들렸고, 사람들이 지하철 칸에 있는 문을 열어 선로를 통해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번 전동차 추돌 사고에서 가장 먼저 신고한 건 ‘시민’이었다. 광진경찰서는 이날 “최초 119 신고는 사고 전동차에서 내린 여자 승객이었다”고 밝혔다. 지난달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해 사망자 228명, 실종자 74명(2일 오후 11시 30분 현재)의 사상자를 낸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에도 최초 신고자는 여객선에 타고 있던 단원고 2학년 최덕하 군이었다. 사고 직후 대피 안내방송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서울메트로 측은 사고 직후 안내방송을 했고 승무원들이 사고 현장에서 승객들을 대피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승객은 안내방송이나 직원을 보지 못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역내방송은 들렸을 수 있지만 정전이 된 사고 전동차에서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안내방송을 들었던 승객들은 “앞차와의 간격 때문에 잠시 정차 중이라는 방송이 나왔고 대피하라는 얘기는 없었다”고 말했다. 서울메트로가 대응 매뉴얼을 제대로 지켰는지도 확인돼야 할 대목이다. 이날 본보가 입수한 ‘비상대응 운영절차―지하부 본선구간 열차추돌사고’라는 제목의 사고 매뉴얼에 따르면 사고 발생 즉시 전동차 승무원은 종합관제소에 추돌 사고 발생을 신고하고 열차 내에 추돌 사고 발생 및 안내방송을 실시해야 한다. 이어 사고 발생 10분 이내에 승무원과 역사 직원은 승강장에서 부상 승객을 이송하고, 다른 승객들을 대피시켜야 한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날 서울시청 집무실에 있다가 사고 소식을 보고받고 서울시 행정 1부시장과 서울메트로 사장에게 연락해 신속한 현장 복구를 지시했다. 오후 5시 30분에 상왕십리역에 도착한 뒤 늦은 밤까지 상황실에 머물며 복구 상황을 점검했다. ‘서울시민의 발’인 서울 지하철은 그동안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3월 30일 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에서 하행선 열차가 모터 이상으로 멈췄고, 이틀 뒤인 4월 1일에는 역시 지하철 1호선 서울역∼구로역 구간에서 전기 공급 중단으로 하행선 열차 10대가 최대 21분 지연 운행되기도 했다.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이번 추돌 사고를 계기로 서울 지하철에 대한 전반적인 재점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황인찬 hic@donga.com·김성모 기자}

슬픔에 잠긴 어머니는 아들에게 가장 값싼 수의를 입혔다. ‘장례비용도 세금’이라며 빈소는 차리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지난달 23일 세월호 침몰 사고로 실종됐던 안산 단원고 2학년 박모 군(17)을 찾았다. 금쪽같은 아들은 바다 깊이 가라앉은 세월호 안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박 군의 부모는 절망에 빠진 순간에도 ‘나랏돈을 함부로 쓸 수 없다’는 소신을 지켰다. 빈소를 차리지 않은 것이다. 장례비용이 모두 세금에서 나간다는 것을 알고 박 군의 가족은 직계가족만 모여 화장을 했다. 기자에게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박 군의 어머니는 “국가 세금이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쓰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다 간소하게…”라고 말하며 “장례를 성대하게 치른다고 아들이 돌아오는 게 아니잖아요”라고 울먹였다. 부모 속 한 번 썩인 적 없는 아들. 어머니는 “속 한 번 안 썩이고 잘 커줬다”고 했다. 교육계에 종사하는 박 군의 부모는 맞벌이를 해 경제적으로 그리 어려운 편이 아니지만 ‘한 번 입고 가는 옷’이라며 아들에게 20만 원대의 수의를 입혔다. 박 군의 어머니는 “우리 아이가 그거 하루 잠깐 걸치는 게 400만 원짜리인 게 너무 현실적으로 이해가 안 돼서…”라고 말했다. 나라는 소중한 아들을 지켜주지 못했지만 박 군의 부모는 차마 나랏돈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앞서 친구를 구하려다 희생된 단원고 정차웅 군 부모도 세금으로 장례를 치르는 점을 감안해 가장 저렴한 장례용품을 이용했다.안산=채널A 서환한 bright86@donga.com김성모 기자}

가슴 철렁한 사고가 또 발생했다. 이번에는 서울 도심의 지하철에서 일어났다. 세월호 참사에 이어 대중교통의 안전사고가 잇따르면서 시민들의 불안감은 고조되고 있다. 2일 오후 3시 30분경 서울 성동구 지하철 2호선 상왕십리역에서 잠실 방향으로 가던 서울메트로 2260 전동차가 승강장에 멈춰 있던 2258 전동차를 들이받았다. 사고가 나면서 2260 전동차 3개 칸이 탈선했고 두 전동차의 차량연결기(열차 칸을 잇는 고리) 7, 8개가 파손됐다. 사고 충격으로 두 전동차에 탔던 승객 238명이 다쳤으나 다행히 대부분 경상에 그쳤다. 병원에 입원한 50여 명 가운데 추돌한 전동차를 운전했던 기관사 엄모 씨(45) 등 3명은 어깨탈골 골절 등 중상을 입었다. 엄 씨는 서울메트로 조사에서 “상왕십리역에 진입하는 커브 구간을 도는 순간 앞에 적색 신호등과 전동차가 보였다. 급히 비상제동을 했지만 거리가 짧아 추돌했다”고 말했다. 당시 두 전동차에는 1000여 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다. 대부분의 승객은 수동으로 문을 연 뒤 선로 위를 걸어서 탈출했다. 사고 여파로 2호선 잠실 방향 9개 역(을지로입구역∼성수역)의 지하철 운행이 9시간 가까이 중단됐다가 3일 0시 17분경 정상화됐다. 정달오 서울메트로 운전팀장은 “자동정지장치(ATS) 등 기기 결함과 인적 결함(과실) 가능성에 대해서 조사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ATS는 앞뒤 전동차의 거리가 200m 이내로 가까워질 경우 추돌에 대비해 자동으로 작동된다. 대피 방송 유무에 대해 정수영 서울메트로 운영본부장은 “앞 전동차에서는 대피 안내 등 방송을 전혀 하지 못했다”며 “뒤 전동차에서는 사고 직후 ‘객실에서 기다려 달라’ ‘정확히 상황을 파악해 다시 알리겠다’는 내용을 각각 한 차례씩 방송했으며 사고 7분 뒤인 3시 37분경 대피를 알리는 방송을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승객 상당수는 대피 방송 전에 문을 열고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사고가 난 지 3시간여가 지난 오후 7시 8분경에는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에서 의정부 방향으로 가던 전동차에서 타는 냄새가 나 운행이 잠시 중단됐다.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측은 “승객을 내리게 한 뒤 다음 전동차를 이용하도록 했다. 제동장치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날은 선박 사고도 잇따랐다. 오후 2시 40분경 경북 울릉군 사동항을 출발해 독도로 운항하던 ‘돌핀호’(310t급)가 엔진 고장으로 회항했다. 승객과 승무원 396명이 탄 돌핀호는 독도 도착 20여 분을 남기고 갑자기 엔진 2개 중 1개가 고장이 나면서 되돌아왔다. 오후 6시 28분경에는 경남 거제시 일운면 외도 북쪽 0.1마일 해상에서 141명이 탄 38t급 유람선이 갑자기 기관 고장을 일으켰다. 승객들은 다른 유람선 2척에 옮겨 탄 뒤 장승포항으로 이동했다.김성모 mo@donga.com / 포항=장영훈거제=강정훈 기자}
검푸른 바다에서 아들은 너무 늦게 돌아왔다.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 아들은 부패가 진행돼 시신 기증조차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다시 한 번 가슴을 쳤다. 29일 오전 경기 안산 단원고 2학년 A 군(17)은 침몰한 세월호 선체 객실에서 발견됐다. 차디찬 바닷속에서 벌써 2주일이나 지난 뒤였다. 가족은 더딘 수색작업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하지만 아버지 B 씨는 고심 끝에 시신을 기증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평소 남을 돕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아들의 뜻을 기리고 싶었던 것이다. B 씨는 가장 먼저 가족들에게 시신 기증을 제안했다. 그는 “그렇게 보내야 세상을 밝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시신 기증의 뜻을 강하게 내비쳤다. A 군의 가족은 결국 빈소를 예약한 뒤 시신 기증을 할 수 있는지 알아봤다. 하지만 아버지의 큰 뜻은 이뤄지지 못했다.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은 전화로 기증 의사를 밝힌 유족에게 “훼손된 시신은 기증받을 수 없다”는 의사를 전했다. 사망하고 일정 기간이 지나 시신의 부패가 진행됐기 때문이다. B 씨의 지인은 “시신 기증은 숨진 지 몇 시간 안에 가능하다더라.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되니 얼마나 한스럽겠느냐”고 말했다. A 군 가족의 결정이 좌절됐다는 소식을 듣고 주변 사람들은 더욱더 안타까워했다. 가족의 한 지인은 “빨리 구했으면 기증이라도 할 수 있지 않았느냐”며 “늦어도 너무 늦었다. 가족들은 더 큰 상처를 입은 것”이라며 씁쓸해했다. 진도=박가영 채널A기자 bbacga@donga.com}
제 기능도 못하고 세월호와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던 구명벌(텐트 모양으로 펴지는 구명보트)이 뒤늦게 떠올랐다. 28일 오전 3시경 사고 현장에 있던 구조팀은 빨간색 구명벌을 발견했다. 3시간 반 동안 총 5개를 발견했다. 발견 당시 구명벌은 모두 펼쳐진 상태였다. 침몰 사고 12일 만이다. 사고 당시 구명벌은 목포해경 소속 이형래 경사가 내린 2개 중 1개만이 펼쳐졌다. 이 경사는 쇠줄에 묶인 구명벌을 힘겹게 떼어 냈다. 안전핀이 이미 녹이 슬어 잘 뽑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로 차고 던진 끝에 간신히 선체에서 떼어내 바다로 떨어뜨렸다. 구명벌은 배가 침몰하면 수압에 의해 자동으로 팽창하게 돼 있다. 상자의 잠금장치를 풀면 수동으로도 펼 수 있다. 구조팀은 구명벌의 수압분리계가 뒤늦게 작동해 자동으로 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구명벌은 물속으로 3∼5m만 내려가도 터지도록 돼 있다. 사고 12일 만에 떠오른 것은 이 구명벌이 불량품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세월호에 달려 있던 46개의 구명벌은 세월호가 일본에서 처음 취항한 1994년에 제작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선박 검사기관인 한국선급은 올해 2월 안전점검에서 세월호의 구명벌에 대해 ‘정상’ 판정을 내렸다. 김성모 기자 mo@donga.com}

모두가 ‘상주(喪主)’처럼 슬퍼했다. 조문객 누구도 세월호 침몰사고 희생자 영정 앞에서 울음을 참지 못했다. 분향소가 처음 열리던 날 22명이었던 영정은 닷새 만에 143명으로 늘었다. 27일에만 24명의 희생자 영정이 합동분향소에 더해졌다. 이제는 희생자의 친구들도 자원봉사자의 안내를 받고서야 친구의 사진을 찾을 수 있을 정도가 됐다. 한 위패에는 아직 아이의 죽음을 모르는 할머니를 위해 이름을 적지 않았다. 늘 붙어 다녔던 친구의 시신을 찾을 때까지 몇몇 영정은 옆자리를 비워뒀다. 각 영정마다 담긴 사연은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27일 오전 경기 안산시 올림픽기념관에 마련된 임시 합동분향소 입구부터 2km 남짓 긴 줄이 생겼다. 1시간을 꼬박 기다려야 먼발치로 합동분향소가 보였다. 전날에는 햇볕이 뜨거웠고 27일은 봄비가 내렸지만 늘어선 줄은 점점 길어졌다. 해가 진 뒤에도 조문객은 줄어들지 않았고 누구도 불평 없이 차분히 자리를 지켰다. 조문객 옆으로는 수시로 운구차가 지나갔다. 분향소 주변은 건물이 낮고 도로가 좁아 운구차가 유독 커 보였다. 몇몇은 운구차를 향해 목례를 했다. 경기도 합동대책본부는 지금까지 총 16만 명이 넘는 조문객이 임시 합동분향소를 찾았다고 밝혔다. 조문 행렬이 계속되면서 준비된 10만여 송이의 국화가 동났다. 그 대신 검은색 근조 리본이 제단에 올려졌다. ‘어른으로서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것이 이렇게 죄스러웠던 적이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그 추운 곳에서 당장이라도 구해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조문을 마치고 나온 이들은 포스트잇에 각자의 생각을 적어 벽에 붙였다. 내용은 달라도 희생자에 대한 미안함은 같았다. 검은 옷을 입고 홀로 분향소를 찾은 한 60대 여성은 “봉오리도 제대로 여물지 않은 싹을 어른들이 짓밟았다. 우리 모두가 머리 숙여 사과해야 한다”며 울먹였다. 전국 곳곳에 마련된 합동분향소마다 희생자 추모의 발길이 이어졌다.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도 슬픈 발길이 이어졌다. 비가 내렸지만 분향소가 차려지기 1시간 전부터 100여 명의 시민이 광장에 모여 분향소가 마련될 때까지 기다렸다. 많은 시민은 우산도 쓰지 않고 줄을 선 채 차분하게 차례를 기다렸다. 분향소 한편에 희생자들과 실종자들에게 메시지를 남기는 공간에 한 초등학생은 ‘형아 누나 지금 살아있어? 춥지 않아? 하늘나라 가서 행복해’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오후 3시 반 분향소를 찾아 노란 리본에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박원순’이라고 적었다.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크고 작은 촛불기도회도 전국에서 열렸다. 주말 동안 안산 화랑유원지에서는 단원고 총동문회와 안산시민이 함께 실종자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촛불기도회가 마련됐다. 안산=홍정수 hong@donga.com·김성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