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코로나19 종식은 불가능한 목표다.” 21일 신종감염병 중앙임상위원회 오명돈 위원장의 기자회견 발언은 섬뜩할 정도로 명쾌했다. 그는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돼 집단면역이 형성되지 않는 이상…방역 목표는 코로나 종식이 아닌 인명 피해의 최소화”라고 잘라 말했다. 마음은 오히려 가벼워졌다.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될 때까지’ 코로나와 동거할 수밖에 없다는 건 어렴풋이나마 각오하고 있던 터였다. ▷문제는 백신이나 치료제에 대한 기대에도 불안감을 안겨주는 최신 연구 결과들이다. 최근 중국에서 재확산 중인 바이러스는 우한에서 시작된 1차 유행 바이러스의 변종(‘D614G’)으로 코로나 완치 환자도 면역이 안 되고 항체 치료와 백신 개발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초기 바이러스보다 침투 능력은 2.4배, 전염성은 10배 강해졌다. 우한 바이러스를 기반으로 한 현재의 백신 개발 경쟁은 쓸모없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인류가 20세기 초에야 바이러스의 존재를 발견했을 정도로 바이러스의 세계는 미지의 영역이 많다. 1918∼19년 5000만 명을 희생시킨 스페인독감의 원흉이 조류인플루엔자A(H1N1) 바이러스였음은 2005년에야 밝혀졌다. 인류에게 치명적 상흔을 남긴 세균·바이러스들은 대부분 어느 지역의 풍토병이 다른 대륙으로 확산된 것들이다. 가령 콜레라는 인도 갠지스강 유역, 에볼라 출혈열이나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은 아프리카 일부 지역의 오랜 풍토병이었다. ▷코로나19도 감기나 인플루엔자(독감)처럼 계절성 풍토병으로 정착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그러기엔 높은 치사율이 마음에 걸린다. 21일 현재 치사율은 한국 2.3%, 미국 5.3%지만 프랑스는 18.5%에 이른다. 메르스는 치사율이 30%지만 전염력이 코로나에 비교도 안 된다. 스페인독감 2.5%(2차 유행 시), 인플루엔자는 1% 미만이다. 사스와 스페인독감은 흔적을 감췄지만 인플루엔자는 변종이 많아 매년 새 백신을 개발해야 하는 풍토병으로 정착됐다. ▷코로나와 함께 사는 세상은 앞으로도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세계는 언택트와 4차 산업혁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방역과 경제가 조화된 ‘뉴 노멀(New Normal·과거와 다른 새로운 일상)’이 부상했고 코로나가 사라지더라도 이전 세상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빌 게이츠는 최근 팬데믹 극복의 힘을 인류의 ‘혁신 능력’에서 찾자고 했다. 다만 전염병이 몰고 온 ‘단절’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남는다. 국경이 닫히고 교류가 줄며 사람 간 만남과 접촉이 회피되는 세상에서, 인류는 또 어떤 ‘즐거운 일’을 찾아낼까.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2000년대를 풍미한 문장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는 2002년 국내 출간된 스페인 교육자 프란시스코 페레(1859∼1909)의 평전 제목이다. 저자 박홍규 영남대 교수가 붙였다. 아이들에게 권위에 의한 억압이 이뤄져서는 안 된다는 페레의 생전 교육철학이 담겼다. ▷페레는 세계 최초로 아이들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존중하는 자유학교를 세우고 교육의 국가화에 반대했지만 군사반란 배후 조종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 그래서 ‘세계 유일한 교육 순교자’라 불린다고 한다. 2004년에는 배우 김혜자 씨가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주제로 쓴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가 나왔다. ▷페레로부터 무려 1세기가 넘게 지난 요즘, 꽃은 고사하고 달군 프라이팬에 쇠사슬, 여행가방까지 동원된 아동학대 사건들을 보면 참담하기 그지없다. 한국에서 아동학대 사건은 집계된 것만 해도 2014년 1만27건에서 2018년 2만4604건으로 2배 이상으로 늘었고 사망 아동은 5년간 130여 명에 달한다. ▷아동학대 가해자의 근 80%가 부모였고 피해 아동 10명 중 1명은 다시 학대를 당했다. 이를 막기 위해 법무부가 민법(제915조)의 ‘자녀 징계권’ 조항을 삭제하고 체벌 금지를 법제화하겠다고 한다. 징계권 조항이 자녀 체벌에 ‘면죄부’를 주는 근거가 된다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국가가 부모의 훈육 방식에까지 일일이 간섭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시각도 있지만, 잇달아 터져 나오는 경악스러운 사건들을 보면 할 말이 없어진다. ▷문제는 부모의 체벌을 법으로 막는다고 아이들에 대한 학대나 방임이 사라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2013년 칠곡 아동학대 사망 사건을 계기로 처벌 수위가 대폭 강화된 ‘아동학대 처벌법’이 제정됐지만 학대로 인한 치사 사건은 잦아들지 않았다. 자신의 아이를 그르친 피고인 상당수가 지적장애와 심신미약, 생활고를 겪는 사례가 많았고, 원치 않은 임신으로 아기를 유기하는 등 사회적으로 취약한 처지였다. 부모 세대부터 생명을 낳고 키운다는 것에 대한 자각과 책임의식을 갖게 해주고 부모와 자녀 모두 사회의 촘촘한 안전망이 지켜줄 수 있어야 한다. 적극적인 심리치료도 필요하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구호가 유행하던 어느 어버이날, 거리에 걸린 작은 현수막 사진은 요즘도 세간에 회자된다. ‘어버이날―꽃으로 퉁칠 생각 말라.’ 자녀 세대가 보면 스트레스를 받다가도 ‘피식’ 웃음이 나오지 않을까. 이제는 자녀 훈육이라는 미명하에 이뤄지는 아동학대를 근절할 때가 됐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 한국식 독음으로 ‘류종열’이라고도 불리는 그는 흔히 민예연구가로 알려졌지만, 철학 과학 종교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학자였다. 일본의 인물사전에는 ‘민예운동을 일으킨 사상가, 미학자, 종교철학자’라고 돼 있다. 20대이던 1916년 조선을 처음 방문해 그 문화에 매료됐다. 백성들이 집에서 쓰던 오래된 밥상이나 막그릇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탄성을 질렀고, 평생 조선의 공예품과 고미술품을 수집했다. 1919년 3·1운동을 일본이 탄압하자 “반항하는 그들보다 한층 어리석은 건 압박하는 우리들”이라고 공개 비판하는 등 식민지 조선의 아픔을 함께하고 대변했다. ▷1920년 4월 창간 때부터 ‘문화주의’를 주창한 동아일보와도 인연이 깊다. 동아일보는 첫 문화사업으로 5월 4일 지금의 YMCA회관에서 경성(서울) 최초의 서양음악회를 열었다. 야나기의 부인이자 성악가(알토)인 가네코(柳兼子·1892∼1984)의 독창회였다. 장안의 화제를 모은 음악회에는 1300여 명이 몰렸고 이듬해에도 여러 차례 열렸다. 2005년에는 이 부부의 장남 무네미치(柳宗理) 일본민예관장이 어머니의 기록을 모은 다큐멘터리 영화 ‘가네코’를 동아일보에 보내와 이듬해 일민미술관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야나기가 1922년 8월 동아일보에 5회에 걸쳐 게재한 광화문 철거 반대 기고문 ‘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의 육필 원고가 발굴됐다. 여기에는 사전 검열로 신문에 실리지 못한 부분이 포함돼 있다. 당시 일제는 조선총독부 신청사를 지으면서 앞을 가리는 광화문을 철거하려 했다. 그는 “일본이 조선에 합병돼 에도(江戶)성이 헐린다면 일본인들은 이 무모한 일에 대해 분노를 느낄 것”이라며 “이와 똑같은 일이 지금 경성에서, 강요받는 침묵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고발했다. 양국에서 발표된 이 기고문은 큰 반향을 일으켜 광화문은 1926년 경복궁 동쪽으로 옮겨져 보존됐다. ▷도쿄 메구로의 고급 주택가에 있는 일본민예관에는 그가 일본과 한반도, 대만 중국 유럽 등지에서 수집한 민예품 1만7000여 점이 소장돼 있다. 이 중 한반도 관련은 1600점 정도인데, 오래된 도자기나 목공예품이 최고의 상태로 보존돼 있다. 자칫하면 고물상에 가 있거나 버려졌을지도 모를 이 작품들의 운명을 생각하다 보면 심경이 복잡해진다. 야나기에 대해서는 조선 문화와 예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보전해준 점에 대한 감사와 호평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그가 조선에 대해 제국주의적 시선을 버리지 못했다는 비판적 시각도 없지 않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지난해 임금피크제 돌입을 앞두고 개인형퇴직연금(IRP)으로 옮긴 A 씨. 최근 계좌를 열어보고는 얼어붙었다. 연금 총액은 3월 말 최저를 찍은 뒤 회복 중이었지만 ‘피 같은 나의 노후’가 코스피 등락에 따라 흔들린다는 사실이 엄청난 공포로 다가왔다. 집 한 채에 국민연금과 퇴직연금을 노후 준비의 중심축으로 삼은 자신의 처지가 참담했고, 연금운용사에 대한 배신감도 컸다. 유명 금융기관에 퇴직금을 맡길 때는 ‘이 계좌가 내 노후에 도움을 줄 것’이란 기대가 있었지만, 돌아온 것은 ‘투자 책임은 가입자에게 있다’는 차가운 현실이었다. ▷직장인들의 노후안전판인 퇴직연금에 빨간불이 켜졌다. 2005년 제도가 도입된 이래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은 218조 원 규모로 불어났지만, 42개 퇴직연금 사업자의 1년 수익률은 평균 0.43∼1.72%에 그치고 있다(3월 말 현재). 코로나 사태로 증시가 급락했고 세계적인 저금리 현상으로 금융상품 수익률이 떨어진 탓. 적립금의 90% 이상이 저위험·저수익 상품에 쏠리는 등 가입자도 운용사도 기업도 퇴직연금 운용에 무관심한 현실이 한몫했다. 은행과 증권사 등 내로라하는 간판을 내건 운용사들은 고객 유치에만 힘쓰고 수익률은 방치하면서도 퇴직연금 수수료로 매년 0.45%, 근 1조 원을 걷어갔다. 1% 안팎의 쥐꼬리 수익에서 0.45%를 떼어가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최근 5년간 퇴직연금 수익률은 연평균 2.3%(금융투자협회)로 정기적금 이자율 정도에 그친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사실상 ‘마이너스’ 수준. 퇴직금을 굳이 퇴직연금에 묻어둘 이유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많은 퇴직연금 가입자가 “그 어렵고 복잡한 투자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면서 손실이 나도 수수료는 꼬박꼬박 떼먹는다”고 분개하는 이유다. 퇴직금을 적립하느니 은행에 적금을 꼬박꼬박 붓는 게 나았던 것 아니냐고 되묻는 사람이 많다. ▷전문가들은 퇴직연금이 은퇴 후 소득대체율 70%를 맞추려면 적어도 연 4% 정도의 수익률을 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려면 연 5.2%의 수익률을 올리는 국민연금처럼 규모를 키워 기금형으로 만들거나 자동으로 투자 포트폴리오를 구성해주는 디폴트 옵션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8.6%) 호주(9.2%) 등 연금 선진국들의 연간수익률이 이렇게 만들어졌다는 것. 20대 국회에서 두 제도의 도입을 위한 법안이 발의됐지만 자동 폐기됐다. 국민 대부분의 은퇴 후 금융자산은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으로 구성된다. 방치된 퇴직연금은 방치된 노후 준비와 같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그런 시절도 있었군요….’ 인터넷 맘카페에서 누군가가 코로나19 사태 이전 KF마스크 가격을 묻자 깨알 같은 답변들이 줄줄이 달렸다. 홈쇼핑에서 묶음으로 사면 개당 300∼700원꼴, 약국 낱개 판매로는 1000∼1500원 선이 많단다. 일회용 부직포 마스크는 100개에 5000원대가 흔했다고 한다. 마스크에 관한 한 코로나 이전과 이후는 다른 세상인 것이다. ▷코로나19가 길어지면서 ‘생필품’이 돼 버린 마스크가 너무 비싸다는 원성이 자자하다. 정부가 통제하는 공적 마스크 제도가 도입될 당시는 개당 5000원을 호가하며 ‘마스크 대란’을 빚던 상황이었다. 코로나 전까지 KF94 가격은 800원대(통계청 집계)였지만 공급 대란 상황이니 ‘1500원’이란 가격은 뒷전에 놓였다. 하지만 수급이 나아진 뒤에도 공적 마스크는 코로나 이전에 비해 두 배나 비싼 데다 KF94와 KF80 가격이 같다는 점도 불합리하다는 지적이다. 불만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등장했다. 청원인은 “주 3장씩 4식구면 월 7만2000원이다. 가계에 부담이 크다”며 가격 인하를 요청했다. ▷이미 시장은 움직이고 있다. 공적 마스크보다 싼 마스크들이 속속 유통되고 있는 것. 제조업체들은 자체 홈페이지를 통해 1000원대 초반 가격에 KF마스크를 팔고 있다. 이마트가 오프라인에서 판매 중인 KF80 마스크는 7개 한 묶음에 4600원대다. 한국의 주간 마스크 공급량(4월 마지막 주 기준)은 국내 생산량과 수입량을 합쳐 8652만 장으로, 이 중 절반이 소비되고 절반은 재고로 쌓인다고 한다. ▷마스크 대란 시절 만든 해외 발송 규제도 완화할 때가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가족에게 마스크를 보내려 우체국에 간 사람들은 1인당 월 8개 제한 등 깐깐한 절차와 비싼 배송요금, 작은 메모쪽지 하나 함께 넣지 못하게 하는 빡빡함에,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KF 마스크 대신 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필터교체형 면 마스크를 보내려 해도 필터를 보낼 수 없게 막혀 있다. ▷마스크 가격에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 재료 가격, 각국의 법 규제 등 여러 요인이 작동한다. 정부는 6·25 참전용사들에게 마스크 100만 장을 보내고 인도적 해외 지원도 확대하겠다고 한다. 공급이 안정됐고 더 값싼 마스크가 시장에 유통 중인데도 공적 마스크가 정해진 가격을 고수해야 하는 이유를 시민은 납득하기 어렵다. 당장 13일부터 등교개학이 순차적으로 시작되면 마스크 수요는 늘어날 것이다. 수요 폭증 상황에 신중히 대비하되 공적 마스크 가격 통제와 해외 친지에게 보내는 마스크에 대한 규제는 유연하게 업그레이드할 때가 됐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과거 웬만한 대졸 신입사원 채용공고에는 나이 제한이 있었다. 대부분 대학 기간 4년에 더해 남성은 군대 기간을 감안해 3∼4년, 여성은 1∼2년 정도 말미가 주어졌다. 그렇다 보니 ‘20대 중반 전후’ 연령대가 남자 대졸 신입사원의 전형적 모습이었다. 요즘은 ‘블라인드 채용’이라 하여 나이 학력 성별 등을 묻지 않는 세상이 됐다. ▷그래서일까, 신입사원도 고령화 시대다. 취업포털 인크루트 조사에 따르면 2018년 대졸 신입사원 평균 나이는 외환위기 직전보다 6세가량 높아진 30.9세라고 한다. 1998년 평균 25.1세였던 것이 2008년 27.3세, 2016년 31.2세를 기록한 뒤 고공행진 중이다. 외환위기 이후 취업난에 학생들이 졸업을 미루는 건 기본이고 구직 준비 기간도 길어진 탓이다. 여기에 더해 다른 곳에 취업했다가 다시 신입으로 입사하는 ‘중고 신입’도 상당수 있다. ▷경쟁이 치열해지고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직장의 문턱이 높아진 만큼 학생들은 스펙을 갖추기 위해 돈과 시간을 더 투자한다. 취업포털 잡코리아의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4년제 대학생 10명 중 6명이 휴학을 했고 2명은 졸업 유예를 했다. 휴학 이유를 묻자 △취업 준비 △진로 고민 △등록금 마련 △해외 연수 순으로 답했고, 졸업 유예도 ‘취업 스펙을 높이기 위해’가 가장 많았다. 그래도 취업이 안 돼 아우성들이다. ▷어느 사회나 유달리 취업운이 나쁜 세대가 있다. 일본에서는 거품경제의 버블이 터진 뒤 닥친 ‘취직빙하기’(1993∼2005년)에 대학문을 나선 1970년대생들이 ‘잃어버린 세대’가 됐다. 제대로 된 직업을 얻지 못한 이들은 혼자 살거나 부모에게 얹혀사는 캥거루 세대가 됐다. 연애, 결혼, 출산은 사치일 뿐이다. ▷‘코로나 세대’란 말이 나올 정도로 특이한 경험을 하고 있는 우리 젊은이들도 걱정이다. 고용 절벽에 신입사원 모집 자체가 반 토막 나면서 가뜩이나 바늘구멍이던 청년 취업난이 한층 깊어지고 있다. 이들이 제때 고용시장에 진입하지 못할 경우 일본의 잃어버린 세대처럼 아르바이트나 계약직을 전전하다가 늙어가는 세대가 될 수 있다. ▷정부가 어제 일자리 50만 개를 만드는 ‘한국판 뉴딜’을 선언하며 청년 일자리 마련을 강조하고 나섰다. 지난주 통계청이 발표한 3월 고용동향에서 20대의 취업자 감소 폭이 가장 크고 20대 백수가 폭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궁극적으로는 민간의 일자리 창출력이 회복돼야 한다. 여기 더해 성큼 다가온 4차 산업혁명 시대, 인공지능(AI)과 로봇이 주류가 되는 세상을 전제로 한 미래 사회를 그려내야 할 상황이기도 하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휴가도 가고 야구도 보는 ‘전형적 여름’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나?” 미국 CBS방송이 출연자인 앤서니 파우치 미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에게 질문했다. 답변은 “우리가 재발 방지를 위해 필요한 일을 한다면 ‘그렇다(Yes)’”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연일 ‘경제 정상화’를 염원하는 발언을 내놓고 있지만 경신되는 세계 최대 사망 기록 앞에 속수무책이고, 미국인들의 ‘잠시 멈춤’의 시간은 연장되고 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전 인류가 바이러스에게 봄을 빼앗겼다. 누군가의 신학기나 일자리, 평온한 일상이 모두 코로나라는 물결에 휩쓸려 사라지고 있다. ‘전형적 여름’을 묻는 질문에선 잃어버린 평온한 일상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마저 느껴진다. ▷코로나의 매를 먼저 맞은 한국 전문가들은 이미 아무 일 없다는 듯 과거로 돌아가기는 어렵다고 잘라 말하고 있다. 질병관리본부는 “코로나 이전 세상은 이제 다시 오지 않는다”며 “생활 속 방역활동이 우리 일상”이라고 강조한다. 정세균 국무총리도 어제 “생활방역은 코로나 이전 삶으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예전 같은 일상으로는 상당 기간, 어쩌면 영원히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세상이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갈릴 것이라는 얘기다. ▷코로나 사태 이후 우리 일상의 반경은 좁아졌고 생활 패턴도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비정상으로 봤던 현상이 표준이 되는 ‘뉴 노멀’의 세상이다.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고 건강을 중시하는 경향이 많은 분야에서 지각 변동을 예고한다. 스마트 근무, 스마트 교육, 원격의료가 성큼 다가왔다. 우버, 에어B&B 등 일껏 꽃을 피우던 공유경제는 ‘타인과 엮이기 싫다’는 소비자들에게 외면당한다. TV 시청이 늘고 집은 더 소중한 곳이 될 것 같다. 아쉬운 점은 그렇잖아도 각박한 세상에서 더욱 타인을 의심하고 멀리하게 된다는 점이다. ▷인류는 교역과 이동을 통해 세계화를 이뤄냈다. 자본과 산업이 거대화될수록 자연을 착취하고 부의 불평등이나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 능력을 잃어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바이러스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고 서로 도울 수 있는 운명공동체라는 점도 깨달아 가고 있다. 21세기 들어 신종 바이러스가 더 빈번히 등장하고 있다. 다음 바이러스 때 좀 더 나은 대처가 가능하려면, 코로나가 가져다준 변화에 대해 ‘피할 수 없다면 즐기겠다’는 자세로 임하는 것도 방법 아닐까. 그러려면 팬데믹이 바꿔낼 변화를 미리 알고 능동적으로 극복해내는 능력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뉴 노멀’이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1960, 70년대에는 교실에서 예방주사를 맞는 일이 흔했다. 뇌염, 콜레라, 장티푸스…. 아이들은 왼팔을 걷고 한 줄로 서서 순서를 기다리며 주사 맞는 친구들의 표정을 안절부절 살폈다. ▷그중에 속칭 ‘불주사’도 있었다. 주삿바늘을 알코올 불에 달궈 어깨에 놓는 유독 아픈 주사. 불룩 튀어나온 흉터가 확실하게 남았다. 사전에 팔 안쪽에 투베르쿨린 검사를 하는 등 취급도 특별했다. 결핵 예방접종인 BCG다. 주삿바늘을 불에 달군 이유가 재활용을 위한 소독이었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지금 BCG는 한국에서 생후 4주 이내 신생아에게 반드시 맞혀야 하는 필수 예방접종이다. 19세기 ‘백색 페스트’라 불리며 많은 생명을 앗아간 결핵은 근래 ‘잊혀진 질병’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결핵 발병 1위국이다. ▷BCG는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가 개발했다. 1908년부터 13년간 결핵균을 230대에 걸쳐 연속 배양하는 동안 균이 변이를 일으켜 변종이 만들어졌다. 변종균은 사람 몸에서 결핵을 발병시킬 힘은 없지만 결핵에 대한 면역반응을 유도할 수 있다. 결핵 예방률은 60% 정도지만 결핵성 뇌막염 같은 심각한 합병증을 막는 효능이 있다. ▷이런 BCG가 코로나19 사망률을 줄였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주목받고 있다. 뉴욕공대 연구진이 28일 BCG를 정책적으로 접종하는 나라의 100만 명당 사망자 수가 그렇지 않은 국가보다 훨씬 적다고 지적한 것. BCG 백신이 항바이러스 면역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터류킨-1베타(IL-1β) 생성에 영향을 미쳐 결핵뿐 아니라 다른 호흡기 질환 퇴치에도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실제 코로나19 사망자는 BCG 접종 55개 국가 평균이 100만 명당 0.78명인 데 반해 BCG 접종 정책이 없는 5개 국가는 16.39명으로 약 21배에 가까운 차이를 보였다(21일 기준). 이 5개 국가는 이탈리아, 미국, 레바논, 네덜란드, 벨기에 등이다. ▷비접종국 중 하나인 네덜란드는 의사와 간호사, 노인 1000여 명에게 BCG 백신을 접종하는 임상시험을 시작했다. 연구진은 BCG가 사람의 면역체계를 향상시켜 코로나19와 더 잘 싸울 수 있게 하는지, 감염을 완전히 방지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겠다고 한다. 세계보건기구(WHO)도 에볼라, 말라리아, 에이즈 치료제들을 가지고 국제 임상시험을 한다. 하루빨리 코로나19도 예방주사 한 방이면 안심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그래서 오늘 우리가 겪는 이 사태가 우리 몸에 남은 ‘불주사’ 흉터처럼 면역을 남기고 아물어 주기를 빌어본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한국 7979명 vs 일본 675명. 어제 0시 기준 코로나19 확진자 수다. 일본 숫자에 요코하마항에 정박했던 크루즈선 확진자 706명을 더해도 1381명이다. 숫자에는 함정이 있다. 누적 진단 건수가 9일 기준으로 한국 20만7776건, 일본 8286건으로 한국이 25배가량 많다. 한국이 하루 1만7000여 건씩 진단검사를 진행하는 사이 일본은 하루 수백 건만 검사해 왔다. 검사 대비 양성 확진율은 한국이 3.7%, 일본이 6.6%다. ▷코로나19를 놓고 양국의 대응은 180도 달랐다. 한국이 적극적으로 검사하고 결과를 투명하게 공표한 데 비해 일본은 검사 자체를 자제했다. 한국이 확진자를 음압병상에 넣고 동선을 샅샅이 공개하며 시민들의 자가 격리를 유도할 때, 일본 정부는 ‘의심 증상이 있으면 집에서 요양하고 3일 이상 열이 난 경우에만 병원에 가라’고 했다. 코로나19를 감기처럼 여겨 중증인 경우 치료하지만 굳이 찾아다닐 필요는 없다고 본 것이다. 말 잘 듣는 일본인들은 불안해하면서도 정부 시책에 고분고분 따랐다. 급기야 ‘검사 억제는 일본 정부의 영단(英斷)’이라며 한국과 이탈리아가 철저한 검사 탓에 의료 시스템이 붕괴되고 있다고 진단한 기사조차 등장했다(11일 ‘비즈니스 저널’). ▷손 마사요시(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의 선의도 바로 이 ‘의료 붕괴’ 논리에 밀려났다. 그는 11일 트위터를 통해 “불안을 느끼는 분들에게 우선 100만 명분 진단검사를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밝혔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2시간 만에 철회했다. 비난은 ‘의료기관에 과잉 부담이 된다’거나 ‘한국 같은 의료 붕괴를 원하는가’에 쏠렸다. 역설적이지만 한국의 신속검사 시스템은 세계의 찬사를 듣는 한편으로 한동안 ‘중국에 이은 확진자 2위 국가’ 오명을 안겨준 것도 사실이다. ▷지금은 맹위를 떨치는 코로나19 사태도 언젠가는 끝난다. 그때쯤이면 한국과 일본의 대처 방식 중 어느 쪽이 현명했는지 가려질 것이다. 당장 한국의 선진 진단검사 기술에는 각국으로부터 협조 요청이 오고 있다. 일본은 인구의 28.4%가 65세 이상 고령자여서 코로나19에 매우 취약할 수도 있다. 그래도 7월로 예정된 도쿄 올림픽을 어떻게든 무사히 치르고 싶은 염원이 강하다. ▷다시 손정의 회장. 그는 한 팔로어가 “진단검사보다는 마스크를 나눠주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올리자 만 하루 반 뒤 “합시다. 마스크 100만 장 기부합니다. 간병시설과 개업의에게. 해외 공장에 주문 완료”라고 화답했다. 공동체를 도울 의사와 능력 모두를 갖춘 그는, 망설임도 기죽는 일도 없어 보인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아무것도 만지지 마라, 누구도 만나지 마라!’ 이런 홍보 문구를 내세운 2011년 영화 ‘컨테이젼’(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세계가 현실이 돼버렸다. 무려 9년 전에 오늘날의 코로나19 사태를 미리 본 듯 그려냈다. 박쥐에서 시작된 최초 감염자로부터 일상 ‘접촉’만으로 3개월 만에 전 세계 10억 명에게 감염이 확산됐고, 아무도 집 밖에 나서지 않게 돼 텅 빈 거리 풍경이 오늘 감염 공포에 빠진 도시들과 유사하다. ▷이쪽은 현실세계. 작은 꾸러미를 길 중앙에 두고 마스크로 무장한 두 사람이 멀찌감치 떨어져 마주 선 장면이 신문에 실렸다. 중국 베이징의 KFC, 피자헛 등이 2월 초부터 시작한 ‘비접촉 배달 서비스’란다. 배달 직원이 고객이 원하는 곳에 피자를 놓고 안전거리인 2m 뒤로 물러서면 고객이 다가와 챙겨가는 식이다. 사람 간 감염이 일어날 수 있는 2m 내 접촉을 피한다는 취지다. 런민왕에 따르면 이 밖에도 다양한 ‘비접촉’ 판매 방식이 등장했다고 한다. 고객과의 사이에 2m 나무판을 놓고 이를 미끄럼틀 삼아 만두를 건네고 잔돈은 국자에 담아주는 만두가게가 있는가 하면, 고객이 온라인 주문 뒤 지정된 무인공간에서 제품을 찾아가게 하는 서비스도 있다. ▷전문가들은 감염병의 지역사회 확산을 줄이기 위한 두 가지 전략을 권한다. 즉, 모든 유증상자와 잠재적 감염자들을 이동 없이 그 자리에 있게 하는 ‘움직이지 않기’, 그리고 2m 이내 비말 접촉에 의해 전염되는 코로나19의 특성을 감안해 사람 간에 거리를 두는 ‘거리 두기’ 전략이다. ▷‘거리 두기’가 강조되면서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총선 풍속도도 크게 바뀔 듯하다. 정치인들로서는 선거철에 유권자들의 눈도장을 찍는 데 악수만큼 유용한 도구도 없었지만, 이제는 언감생심이 돼버렸다. 대안 인사법으로 소개되는 ‘주먹 인사’니 ‘팔꿈치 인사’도 ‘2m 안전거리’를 지켜야 한다면 힘들어진다. 신인의 경우 마스크를 쓰고 시민들에게 얼굴을 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떤 기발한 ‘비접촉 선거운동’ 방법이 생겨날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전쟁이건 재난이건 일이 터지면 그 사회의 취약한 계층이 가장 힘들어진다. 신천지 대구교회를 제외하면 취약계층 돌봄 시설에서 집단 발병이 많다고 한다. 사람 간에 물리적으로는 거리를 둘 수밖에 없어도 약자들에 대한 마음은 가까워질수록 좋은 것 아닐까. 바이러스라는 작은 존재가 사람들 간의 직접 접촉을 막고 서로를 고립시키는 이유가 되고 있다. 타인을 바이러스 덩어리로 여기고 경계해야 하는 현실은 코로나19 확산이 던져주는 새 풍속도 중 참으로 씁쓸한 대목이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손정의(孫正義·손 마사요시) 소프트뱅크 회장은 1990년 일본 국적을 얻을 때 ‘손(孫)’이라는 성을 그대로 사용하길 원했다. 하지만 법무당국은 “‘손’은 일본에 없는 성”이라며 퇴짜를 놓았다. 포기를 모르는 그는 묘안을 짜냈다. 먼저 일본인 아내의 성을 ‘孫’으로 바꾼 것. 전과 같은 서류를 다시 들이미는 그에게 창구 직원이 손을 내젓자 그는 “잘 살펴보라”며 명부를 가리켰다. 딱 한 명, 아내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전례 없이는 되는 일 없는’ 일본식 장벽을 뛰어넘은 장면이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터지자 일본은 우왕좌왕했다. 세계 각국에서 구호물자가 도착했지만 ‘처리 지침이 없다’는 이유로 시급한 주민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외국에서 달려온 의료진 역시 일본 면허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주민을 돌보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원전 반경 20∼30km에 외출금지령을 내리고 ‘노출됐던 옷은 비닐봉지에 밀봉해 폐기하고 몸을 물로 씻으라’고 했지만 시민들은 “갈아입을 옷조차 없다”며 어이없어했다. ‘매뉴얼 사회’ ‘빈틈없는 정확성’을 신화처럼 간직했던 일본에 대해 ‘일본의 재발견’이란 비아냥거림도 나왔다. ▷설명서나 안내서, 지침을 뜻하는 매뉴얼은 여러 경험과 선례들 중 최선의 경우를 뽑아내 따라 할 수 있도록 객관화한 것이다. 매사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일본은 상세한 부분까지 매뉴얼로 짜놓고 초심자라도 이를 따르면 일이 되게끔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지진 태풍 등 재해가 많은 탓에 톱다운식 의사결정 구조도 고착화됐다. 상당수 일본인이 “한번 만든 법, 규칙, 매뉴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다만 ‘매뉴얼 만능주의’는 예상 범위를 넘는 문제에 부닥치면 기능 부전에 빠진다. 멀리 크게 보지 못하고 지엽말단에 매달리면서 상상력이나 창의성, 용기는 뒷전으로 밀린다. 관료주의로 변질될 위험도 적지 않다. ▷3일부터 요코하마항에 정박 중인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 집단감염 사태는 다시금 매뉴얼에 갇힌 일본의 기억을 일깨워준다. 3700여 명이 탄 배를 놓고 일본 정부가 ‘국내 유입 원천 봉쇄’라는 단 한 가지 매뉴얼에만 매달리는 사이 크루즈선은 날마다 수십 명씩, 17일 현재까지 454명의 확진자를 양산하며 ‘제2의 우한’, ‘떠 있는 세균배양접시’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일본 정부가 7월 도쿄 올림픽을 의식해 확진자들을 국내 통계에 포함시키지 않으려 안간힘 쓴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런 관리 능력이라면 올림픽을 제대로 치를 수 있겠느냐는 비판이 나와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자막이라는 1인치 정도 되는 장벽을 넘는다면, 여러분은 전 세계 수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을 겁니다.” 지난달 5일 봉준호 감독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말한 수상소감에 할리우드 영화인들은 갈채로 응했다. 지난해 미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봉 감독은 한국 영화가 한 번도 오스카 후보에 오르지 못한 이유에 대해 ‘오스카는 지역(local) 축제’라고 답하기도 했다. 세계 영화산업의 심장부라는 할리우드가 언어와 지역, 인종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현실을 꼬집은 것이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으로 확장되는 데는 언어의 전달, 즉 통역과 번역의 힘이 크게 작동한다. 영화 ‘기생충’의 거침없는 세계화에는 대사의 정확한 의미를 포착하고 이를 외국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담아낸 영어자막이 있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영화평론가 달시 파켓의 솜씨다. 그의 손끝에서 서울대가 ‘옥스퍼드대’로, 카카오톡은 ‘와츠앱’으로, ‘반(半)지하’는 ‘세미 베이스먼트’로 재창조됐다. 짜파구리는 라면과 우동을 합친 ‘람동’이란 신조어로 태어났는데, 2시간 넘게 고민해 만들었다고 한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에 맨부커상을 안겨준 영국 번역가 데버러 스미스가 말한 대로 ‘번역은 작품을 창조적으로 다시 쓰는 작업’임이 분명하다. ▷“1인치 장벽은 이미 허물어져 있었다.” 봉 감독은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끝난 뒤 한국 기자들과 가진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카데미상은 올해 처음 영어가 아닌 영화에 작품상을 줬고 외국어영화상을 ‘국제’영화상으로 바꿔 다양성을 강조했다. 언론은 ‘92년 오스카 역사가 기생충의 작품상 수상으로 전기를 맞았다’거나 ‘비영어권 영화에 대한 미국인의 마음의 장벽이 무너지고 있다’는 평가를 쏟아냈다. 아카데미상은 2016년부터 백인 남성 위주 영화제를 바꿔야 한다는 비난에 시달려왔고 조금씩 그 한계를 넓히는 실험을 해왔다. 변화를 갈망하던 아카데미의 혁명을 한국의 영화 기생충이 혜성처럼 나타나 도운 셈이다. ▷기생충이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번역의 힘만은 아닐 게다. 지구촌 모든 사회의 공통된 고민인 빈부격차를 다루면서도 획일적 선악 형상화에 매몰되지 않고, 강자든 약자든 ‘적당히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다면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낸 데 대해 많은 이들이 문화와 인종의 차이를 넘어 공감하고 있는 것 같다. 대립과 분열 속에 계급과 성별, 민족, 인종 등 다양한 장벽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시대다. 할리우드에서 1인치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그래서 더욱 즐거움을 주나 보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이대로 14일간 이 방에 계셔야 합니다.” 지난달 20일 일본 요코하마를 출발하는 ‘초봄 동남아 크루즈 여행’에 나선 일본인 A 씨. 홍콩 베트남 대만 등을 거쳐 다시 요코하마로 돌아오는 일정은 본래 4일 끝났어야 했다. 하지만 5일 오전 8시경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10명 확진’이라는 선내 방송이 나온 뒤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마실 물을 구하려 무심결에 객실 문을 열자 다급히 달려온 승무원이 막아섰다. 모든 식사는 룸서비스로 바뀌었다. 그는 “2주는 너무 길다”며 곤혹스러워하고 있다고 아사히신문이 전한다. ▷이렇게 승객과 승무원 3700여 명이 초대형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에 갇혔다. 20일 함께 출발해 25일 홍콩에서 내린 80대 남성이 그 뒤 현지에서 확진 판정을 받은 탓이다. 발열 등 증세를 보이는 273명 중 어제까지 102명의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이 중 20명이 양성이다. 선내 집단 감염이다. ▷졸지에 감금 신세가 된 일부 승객은 트위터로 선내 소식을 전하고 있다. 당초 패닉에 빠져 동요했던 승객들도, 선박 내 관리 운영도 안정돼 가는 듯하다. 첫날인 5일 식사는 두세 시간씩 늦게 도착했지만 6일 아침 식사는 제시간에 왔고, 점심부터는 메뉴를 고를 수도 있게 됐단다. 다만 ‘가까운 방에서 노인이 기침하는 소리가 들린다’며 감염 공포가 엄습한다고 털어놓는 이들도 있다. ▷홍콩에서도 3600여 명을 태운 크루즈선이 승무원 30여 명의 의심 증세 탓에 해상 격리됐다. 크루즈는 한정된 공간에서 오랜 기간 공동 생활을 하다 보니 전염병에 취약할 수 있다. CNN은 크루즈를 ‘떠다니는 페트리 접시(Petri dish·세균배양접시)’라고까지 표현했다. ▷크루즈 여행은 뭇사람들이 동경하는 ‘버킷리스트’다. 해상 격리된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의 여행 요금은 1인당 25만 엔(약 269만 원)에서 138만2000엔(약 1486만 원). 3등석에 해당하는 25만 엔 승객의 경우 객실은 겨우 잠만 잘 수 있는 정도의 크기다. 식사는 다양한 식당에서 즐기고 낮에는 정박지에 내려 관광하거나 배 안에서 사우나 등 다양한 시설을 즐길 수 있으니 방은 작아도 된다고 여긴 승객들이 많았다. ▷격리 수용은 첫 1주일이 가장 힘들다고 한다. 밖에 나갈 수도, 사람을 만날 수도 없이 오롯이 혼자 보내야 하는 여건은 시간감각을 잃게 하고 우울증까지 낳는다. 우리 사회도 자가 격리든 코호트 격리(집단 격리) 등 격리를 견디고 있는 이들이 많다. 다들 남은 시간을 무사히 넘기고 건강히 자유를 찾기를 응원해 본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이번에는 ‘정보전염병’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우한 폐렴) 공포에 시달리는 대중의 불안을 비집고 허위정보가 전염병보다 빨리 확산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신종 코로나 관련 정보가 과도하게 넘쳐 괴담을 낳고 있다”며 이를 ‘인포데믹(infodemic)’ 즉, 정보전염병이라 했다. ▷정보(information)와 전염병(epidemic)을 합친 인포데믹은 본래 금융용어다. 각종 공식 비공식 미디어를 타고 잘못된 정보가 삽시간에 전염병처럼 퍼져나가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현상을 말한다. 미국의 전략분석기관 ‘인텔리브리지’사 데이비드 로스코프 회장이 2003년 5월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처음 사용했다. 그는 “인포데믹은 한번 발생하면 즉시 대륙을 건너 전염된다”며 당시 사스 공포로 아시아 경제가 추락한 일, 9·11 이후 미국 전역에 테러 공포가 기승을 부린 일이 인포데믹의 위력 탓이라고 했다. ▷잘못된 정보가 집단행동을 야기하거나 경제위기, 금융시장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는 얘기다. 훗날 진실이 밝혀져도 경제적·사회적 파장이 수습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가령 조류인플루엔자가 유행할 때는 닭이나 달걀을 먹으면 감염된다는 잘못된 정보가 퍼져 양계 농가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우한 괴담’이 무성하다. ‘제주에서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내용을 유포한 회사원(35)은 경찰 조사에서 “사실인 줄 알았다”고 정색했고, 경남 창원에서 감염 우려자가 발생했다는 가짜뉴스를 발생 일시 및 장소, 인적 사항, 발생 경위, 조치 사항까지 실제 문서처럼 적어 카카오톡을 통해 유포한 27세 남자는 경찰에서 “장난삼아 했다”고 했다. 중국 정부가 사망자 통계를 축소하고 있으며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람이 부지기수라는 주장도 떠돈다. 압권은 중국 정부의 생화학무기 개발의 산물이란 음모론이다. 중국 연구소가 HIV 유전자를 조작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만들었다는 과학자 논문도 돌아다닌다고 하니, “생마늘이 코로나 폐렴 퇴치에 좋다”는 정보 정도는 애교로 들린다. ▷인포데믹 탓일까. “집 밖은 위험하다”며 스스로 격리를 택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기침이나 인후통만으로도 과잉공포를 느끼며 위축돼 사회생활을 단절한다. 누군가 가벼운 기침만 해도 의심한다. 아파야 할 것은 몸인데 질환은 정신세계로 번지는 양상이다. 타인과의 불필요한 접촉을 줄이는 일은 감염 예방에 도움이 되지만 스스로를 좀먹는 강박은 피해야 한다. 최선의 대응은 면역력을 높여 바이러스를 퇴치해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 전에 확산을 차단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많은 곳이라 걱정인데, 자유학년제라고 그냥 두면 안 되겠죠?” 아들의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이른바 ‘교육특구’로 이사했다는 한 엄마가 맘카페에 이런 걱정 글을 올렸다. 다른 엄마들의 이구동성 조언은 자유학년은 선행학습에 절호의 기회라는 것. “좀 세게 돌리면 고2 수학까지 뗄 수 있다”는 의견도 올라왔다. ▷자유학년제의 원조는 2016년부터 전면 실시된 자유학기제다. 자유학기제는 학생들의 미래 진로 결정에 도움을 주기 위해 중학교 과정 한 학기를 시험의 압박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잠재력과 자기주도적 학습능력을 키우게 한다는 취지의 제도. 오전만 교과수업을 하고, 오후엔 진로탐색 활동, 동아리 활동 등 체험학습에 나선다. 일제고사 형태의 중간·기말고사를 보지 않는다. 올해 전국 중학교의 96.2%가 이 자유학기제를 1년으로 늘린 자유학년제를 실시한다고 한다. ▷자유학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학교들은 기업과 지역사회의 도움을 받아 진로체험 활동 프로그램을 짠다. 학생들은 직업체험을 위해 관공서나 시장을 찾아가기도 하고 베이커리나 바리스타 실습을 하러 다닌다. 영화에서나 보던 헬기 조종석에 직접 앉아보고는 ‘조종사’라는 새 꿈을 얻어가기도 한다. 하지만 학교별 준비 상황은 들쭉날쭉하다. 교실에서 비디오나 틀어주고 구색만 맞춘다거나 아이들이 시간만 낭비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학부모들은 무엇보다 학력 저하를 걱정한다. 1년간 시험이 없다 보니 학생들이 자기 실력을 객관적으로 알기 어렵고 해이해지기 쉽다는 것. 시범 실시된 자유학년제를 거친 중3 학생 엄마는 “(아들이) 2학년 올라가서 중학교 첫 시험을 보고는 지난 1년을 후회하더라”며 “학습 리듬을 아예 놓쳐 상위권과 격차가 심해졌다”고 말했다. 한 대형 학원 원장은 “중1 수학이 중요한데 이걸 놓치고 중2가 돼 버린 학생들 사이에 ‘수포자’(수학포기자)가 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교육열 높은 지역에서는 고등학교 진도까지 선행학습으로 끝내는 경우도 있다고 덧붙인다. ▷불안한 엄마들은 사교육 시장에 눈을 돌린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갑작스레 주어진 ‘자유’가 막막한 학생들도 다르지 않다. 요즘 학원들은 자유학년제에 대비해 선행학습은 물론이고 학교 대신 시험을 보고 등수를 알려준단다. 한 학원장은 “자유학년제가 전면 실시된다니 등록 학생이 20% 정도 늘었다”고 했다. 사교육에 유리한 환경의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 간 학력 격차가 더 벌어질 수 있다. 결국 공교육의 빈자리를 사교육 시장이 메우는 것일까. 이래저래 학원밀집지역 집값만 더 올리는 것 아닌지도 걱정된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2004년 4월 고속철도(KTX)가 개통한 뒤 ‘KTX 빨대효과’란 말이 나왔다. 지방 도시들이 1, 2시간 남짓에 오갈 만큼 가까워진 서울의 흡인력에 빨려들 것이란 얘기였다. 실제로 교육 의료 문화 등에서 절대 우위에 있는 서울은 지방의 인력과 자원을 쭉쭉 빨아들였다. 서울 부동산만 독보적으로 가격이 오르더니 급기야 ‘평당 1억 원’ 아파트마저 등장한 데는 지방 부호들이 서울에 투입한 자금도 상당히 기여한 것으로 알려진다. ▷서울 경기 인천 등 수도권 인구가 사상 처음 전체 인구의 50%를 돌파했다(지난해 12월 기준). 대한민국 전체 인구 5184만9861명 중 50.002%가 수도권에 모여 산다. 수도권 인구 비중은 1960년 20.8%에서 1980년대 35.5%, 2000년 46.3% 등으로 꾸준히 늘었다. 정부부처 세종시 이전이나 혁신도시, 공공기관 지방 이전 등을 추진하면서 2011∼2015년 잠시 주춤했지만 2016년부터 다시 상승 곡선을 그렸다. 지역 균형발전 정책 효과가 크지 않고 후속대책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살기 좋은 곳으로 인구가 쏠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식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도 있다. 일자리나 문화·교육·의료 인프라가 수도권에 집중된 게 현실이다. 문제는 대도시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정부와 시장에 자신의 생존을 맡길 수밖에 없는 불안한 젊은이들은 아이 낳기를 꺼린다는 점이다. 도시 집중과 인구 감소, 서로 원인과 결과가 얽힌 악순환의 고리를 어디에서 끊을 수 있을까. ▷도쿄 등 수도권에 인구 3700만여 명이 집중된 일본에서는 2013년 한 보고서가 화제를 모았다. 민간 연구단체가 ‘지방소멸-도쿄일극(一極)집중이 부른 인구 급감’이란 제하에 낸 보고서는 도쿄가 ‘인구의 블랙홀’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도쿄가 진학과 취직으로 젊은이들을 빨아들여 지방 인구 감소를 심화시킨다는 것이다. 이들은 국가적 대응책으로 지방 산업 융성과 인구 유치를 위한 방안들을 제안했고 일본 정부는 이를 담당할 ‘지방창생’ 부처를 신설했다. 지방소멸 가능성을 가늠할 때 젊은 가임여성(20∼39세)의 인구동향을 주목했고 지역마다 출산 육아가 가능한 젊은이들을 유치하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국가비상사태’라며 정부가 균형발전을 추진할 강력한 방안을 내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뾰족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걱정스러운 대목은 인구 정책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생색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지역을 살리겠다는 공약들이 쏟아져 나올 텐데, 옥석이 가려질지 의문이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 21일 조용한 시위가 벌어졌다. 서울맹학교 학부모들이 청와대 인근의 잦은 집회로 아이들의 학습권이 침해받고 있다고 항의하는 침묵시위다. 경찰과 지자체에 공문을 보낸 지 한 달이 지났지만 변화가 없자 직접 행동에 나섰다. 하지만 이날 이들의 20m 옆에서는 민노총의 결의대회가 열렸고 ‘박근혜 대통령 무죄석방’을 요구하는 보수단체의 행진도 있었다. ▷청와대 주변이 노숙 농성과 시위의 현장이 되면서 인근 주민들은 물론이고 근처 맹학교 학생들이 받는 피해가 크다. 서울맹학교는 주된 집회 장소인 청와대 사랑채에서 불과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데 청각에 예민한 학생들은 소음에 더욱 민감하기 때문. 시각장애인들이 청각, 후각 등을 이용해 거리 환경을 익히는 보행수업도 집회 소음 때문에 몇 달째 못하고 있다고 한다. 안 그래도 노심초사가 많을 학부모들이 나선 이유다.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일대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살기 좋은 동네였다. 각종 제약은 있지만 치안이 최고였고, 무엇보다 조용했다. 농성 천막이 들어선 것은 2014년 8월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76일간 농성했을 때가 유일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집권 한 달 만인 2017년 6월 “청와대 앞길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며 50년 만에 종일 전면 개방했다. 이후 1인 시위와 기자회견이 이곳에서 봇물 터지듯 열렸고, 전국금속노조 노조원들이 기습 천막 농성을 시작했지만 경찰은 제지하지 않았다. ▷민폐란 개인 또는 다수에게 피해를 주지만 법으로 처벌하기 어려운 행동을 말한다. 청와대가 민폐를 부르는 상황을 만든 책임은 없을까. 대응은 공정하고 중립적으로 하고 있는가. 경찰이 청와대 인근에서 약 3개월째 농성 중인 ‘문재인 하야 범국민투쟁본부’ 집회를 내년 1월 초부터 금지하겠다고 어제 밝혔다. 종로구청은 천막과 적재물 행정대집행에 나서겠다고 한다. 하지만 집시법을 고쳐 소음 피해를 줄이는 데는 그다지 열의가 없다. 현행 집시법은 주거지·학교의 경우 주간 65dB 이하로만 집회 소음을 허용하지만 10분간의 평균 소음을 측정하기 때문에 소음을 조절하며 평균치 아래로 유지하는 꼼수로 빠져나가기 일쑤다. ▷굼뜨고 면피만 도모하는 공권력도 문제지만, 법을 논하기에 앞서 타인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와 관계된 문제라는 생각도 든다. 사실 보수건 진보건 청와대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의 정치적 주장은 타인을 설득해야 의미가 있다. 학부모들의 “약자 배려 없는 주장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호소가 설득력 있는 이유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존엄사를 택했다고 한다. 평소부터 가족에게 “어차피 가야 할 인생, 의식 없이 연명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며 연명치료는 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1년여간 노환을 앓던 그의 상태가 악화했을 때 인공호흡기를 부착하지도, 마지막 순간에 심폐소생술을 하지도 않았다. 임종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사들이 확인하고 가족 합의를 통해 연명치료를 유보했다. 그는 자연 그대로 눈을 감았다. ▷지난해 2월 ‘웰다잉법’, ‘존엄사법’이라 불리는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됐다. 존엄사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가치를 지키면서 생을 마감하도록 하는 일이다. 나을 가망이 없는 환자에게 죽음의 과정을 연장하는 불필요한 행위를 하지 말자는 것이다. 임종 단계 환자는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인공호흡기 착용 등 연명치료를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할 수 있다. 그 대신 적극적으로 고통을 줄이고 가족과 따뜻한 작별을 나누며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도움 받는다. ▷1997년 12월 서울 보라매병원 의사들이 인공호흡기를 단 환자를 가족의 요구로 퇴원시켰다가 살인방조죄로 처벌받았다. 이후 병원들은 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의 퇴원을 거절했고, 몇 년이고 누워 연명하는 식물인간 환자들이 적잖게 생겨났다. 2008년 ‘김 할머니 사건’이 이런 흐름을 뒤집었다. 식물인간 상태가 된 당시 76세 김 할머니에 대해 가족이 인공호흡기를 떼어 달라며 소송에 들어가 이듬해 대법원에서 승소했다. 법원이 환자와 가족들이 품위 있는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인정한 것이다. ▷한국에서 죽음의 문화는 급속도로 바뀌고 있다. 존엄사법 시행 이래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존엄사를 택한 사람은 지난달 현재 7만5000여 명에 달했다. 연명의료를 거절한다는 의향서를 본인의 손으로 미리 작성해 놓은 사람이 약 48만 명, 의사가 작성한 계획서에 서명해 등록한 사람은 3만3000명에 달한다. ▷어제 김 전 회장 영결식에는 2000여 명의 전직 대우맨 등이 몰려와 고인의 못다 한 뜻을 기렸다. 한창 해외를 누비던 시절 김 전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모신 한 인사는 “고인은 비행기가 난기류로 흔들리거나 회항해도 ‘하늘이 정해준 대로 가는 거니까’라며 의연했다”고 전한다. 일찍이 한국인들의 시선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국내에 머물 때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갈파했던 그였다. 죽음도 혜안을 갖고 맞아들인 걸까. 영욕이 엇갈리는 삶이었지만 도처에 남은 그의 흔적들을 보며 “연명이 아니라 족적을 남겨야 한다”던 그의 말대로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세계에서 가장 젊은 총리. 어제 취임한 34세 산나 마린 핀란드 총리에게 맨 먼저 붙은 타이틀이다. 대학 졸업 후 시의회를 거쳐 2015년 중앙정치 무대에 입성한 그는 6월 ‘젊은 피’로서 교통·커뮤니케이션 장관에 발탁된 터였다. 막상 본인은 “나이와 성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며 자신이 정치에 입문한 동기, 그리고 유권자의 신뢰만 의식한다고 말한다. ▷사실 핀란드, 나아가 유럽의 정치는 여성들이 접수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린 총리는 행정부 수반으로서 5개 정당으로 구성된 연립정부를 이끌게 되는데 당수 5명이 모두 여성이고 이 중 1명이 50대, 나머지는 30대다. 유럽연합(EU)도 ‘여인천하’다. 28개 회원국 중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독일을 비롯해 5개국을 여성 총리가 이끈다. 세계로 눈을 돌리면 젊은 리더들도 속속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올렉시 곤차루크 총리는 8월 35세의 나이로 취임했고 뉴질랜드 저신다 아던 총리는 2017년 37세에 총리가 됐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지금은 40대지만 취임 당시인 2017년에는 39세였다. ▷왜일까. 일각에서는 ‘유리천장이 깨졌다’는 해석을 내렸지만 “지금 체제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 세대·성별 교체를 가속화시키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남성 기득권 체제와 기성세대가 고수해온 정통주의에서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환경 복지 이민 문제 등의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는 자각이 싹텄다는 것이다. 독일 디벨트지는 여성 리더 열풍을 “남성 지도자들이 저지른 정치적 잿더미를 치우는 새로운 ‘여성 민주주의’”라는 개념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핀란드에서 벌어진 일들이 한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을까. 시대 흐름에 빠른 기업계에서는 최근 만 34세 여성 상무가 탄생한 LG 같은 기업도 나타났다. 정치권에서도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세대교체 대망론이 커져가고 있다. 하지만 국회의원 중 여성 비율은 세계 120위권이고, 40세 미만은 3명(비례 2명 포함)에 불과한 게 현실이다. ▷한반도의 1.5배가량 면적에 인구 550만 명이 흩어져 사는 핀란드는 ‘재미없는 천국’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체제가 정비된 선진국이다. 인맥, 편법이 경쟁을 좌우하고, 권력이 일극으로 집중된 체제일수록 청년과 여성이 두각을 나타내기 힘들다는 비관론도 나온다. 난마처럼 얽힌 이해관계와 갈등을 조정해야 하는 복잡다기한 사회에서는 경륜도 리더십의 중요한 요소라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세대교체 열망의 바탕에는 586세대를 비롯한 기득권 세력에 대한 실망과 불신이 깔려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80년 전통의 서울 마포구 창천초등학교가 내년 9월 창천중학교와 통합된다고 한다. 학생 수가 줄어든 탓이다. 기존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합치는 것은 서울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한때는 학년마다 수백 명, 그것도 모자라 2부제 수업을 했다는 창천초의 현재 전교생은 129명. 6학년생은 24명인데 내년 신입생은 그 절반에 불과하다. 인근 재개발로 세입자들이 동네를 떠나면서 학생 수가 급격히 줄었다. 내년 2월이면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지만 예상되는 학령인구는 교육부 기준 적정 인원인 360명에 못 미친다고 한다. ▷초·중, 또는 중·고를 합치는 통합학교는 1998년 도입돼 지금까지 전국 100여 곳으로 확산됐다. 서울에서는 올봄 송파구 재건축단지에 해누리초·중이음학교가 애초부터 통합 형태로 신설됐다. 9개 학년을 합쳐 49학급 규모니 학생이 아주 적은 건 아니지만, 앞으로 줄어들 것을 처음부터 감안했다. 시설과 행정인력, 교사들을 공유하고 방과후활동도 연계해 운영할 수 있어 효율적이라고 한다. 인구 감소 시대, 학교 현장의 콤팩트화를 위한 구조조정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에 불어닥친 저출산 바람은 올 3분기 합계출산율 0.69라는 수치로 나타나 충격을 던졌다. 지난해 0.76명이었는데 그보다 더 떨어졌고, 매달 역대 최저기록을 갈아 치우고 있다. 여성 1명이 평생 낳는 아기의 수를 뜻하는 합계출산율이 0.69라는 것은 6명의 남녀가 2명 남짓밖에 낳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 세대가 지나면 인구는 3분의 1로 줄어든다는 계산이 된다. 지난해 0명대(0.98명)로 내려간 전국 평균 출산율은 올해 0.88명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1983년 2.06명 이래 이어져온 출산율 추락 추세는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다. “한국인이 멸절 단계에 들어섰다”는 탄식이 쏟아져 나올 정도다. ▷너도나도 아이를 낳지 않는 추세에 대해 취업난과 집값, 양육 여건 악화 등이 흔히 이유로 꼽힌다. ‘아이가 사라지는 세상’이란 책으로 정리된 전문가들의 논의에서는 ‘치열한 경쟁’을 지목했다. 인구학자 맬서스는 인간의 두 가지 본능(생존과 재생산) 중에서 생존 본능이 앞선다고 했는데 나부터 살아야 하니 아이를 안 낳는다는 것이다. 다윈의 ‘자연선택설’ 관점에서 가임세대가 출산 대신 자신의 성장에 자원을 투자해 경쟁력을 높이는 전략을 선택했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정부는 저출산 대책에 수조 원을 쏟아붓고 있지만 청년들이 마음 놓고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는 사회는 요원하다. 뾰족한 대책이란 게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지만, 손놓고 있을 수만도 없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