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아

서영아 본부장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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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100세 시대를 생각합니다.

sya@donga.com

취재분야

2024-03-28~2024-04-27
복지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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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3%
외교3%
문화 일반3%
인사일반3%
기타3%
  • 서울의 초중교 통합[횡설수설/서영아]

    80년 전통의 서울 마포구 창천초등학교가 내년 9월 창천중학교와 통합된다고 한다. 학생 수가 줄어든 탓이다. 기존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합치는 것은 서울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한때는 학년마다 수백 명, 그것도 모자라 2부제 수업을 했다는 창천초의 현재 전교생은 129명. 6학년생은 24명인데 내년 신입생은 그 절반에 불과하다. 인근 재개발로 세입자들이 동네를 떠나면서 학생 수가 급격히 줄었다. 내년 2월이면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지만 예상되는 학령인구는 교육부 기준 적정 인원인 360명에 못 미친다고 한다. ▷초·중, 또는 중·고를 합치는 통합학교는 1998년 도입돼 지금까지 전국 100여 곳으로 확산됐다. 서울에서는 올봄 송파구 재건축단지에 해누리초·중이음학교가 애초부터 통합 형태로 신설됐다. 9개 학년을 합쳐 49학급 규모니 학생이 아주 적은 건 아니지만, 앞으로 줄어들 것을 처음부터 감안했다. 시설과 행정인력, 교사들을 공유하고 방과후활동도 연계해 운영할 수 있어 효율적이라고 한다. 인구 감소 시대, 학교 현장의 콤팩트화를 위한 구조조정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에 불어닥친 저출산 바람은 올 3분기 합계출산율 0.69라는 수치로 나타나 충격을 던졌다. 지난해 0.76명이었는데 그보다 더 떨어졌고, 매달 역대 최저기록을 갈아 치우고 있다. 여성 1명이 평생 낳는 아기의 수를 뜻하는 합계출산율이 0.69라는 것은 6명의 남녀가 2명 남짓밖에 낳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 세대가 지나면 인구는 3분의 1로 줄어든다는 계산이 된다. 지난해 0명대(0.98명)로 내려간 전국 평균 출산율은 올해 0.88명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1983년 2.06명 이래 이어져온 출산율 추락 추세는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다. “한국인이 멸절 단계에 들어섰다”는 탄식이 쏟아져 나올 정도다. ▷너도나도 아이를 낳지 않는 추세에 대해 취업난과 집값, 양육 여건 악화 등이 흔히 이유로 꼽힌다. ‘아이가 사라지는 세상’이란 책으로 정리된 전문가들의 논의에서는 ‘치열한 경쟁’을 지목했다. 인구학자 맬서스는 인간의 두 가지 본능(생존과 재생산) 중에서 생존 본능이 앞선다고 했는데 나부터 살아야 하니 아이를 안 낳는다는 것이다. 다윈의 ‘자연선택설’ 관점에서 가임세대가 출산 대신 자신의 성장에 자원을 투자해 경쟁력을 높이는 전략을 선택했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정부는 저출산 대책에 수조 원을 쏟아붓고 있지만 청년들이 마음 놓고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는 사회는 요원하다. 뾰족한 대책이란 게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지만, 손놓고 있을 수만도 없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2019-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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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카소네 야스히로[횡설수설/서영아]

    178cm의 큰 키에 반듯한 자세. 항상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정치인. 1947년 고향 군마에서 처음 당선된 그를 정가에서는 ‘청년장교’라고 불렀다. 29일 향년 101세로 세상을 떠난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일본 총리 얘기다. ▷그는 1982년 11월 총리가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전후(戰後) 정치의 총결산”을 내걸고 뛰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한국은 전두환, 미국은 로널드 레이건 정권으로 보수 지도자들의 시대. 우선 이듬해 1월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한국을 공식 방문했다. 1982년 터진 교과서 문제에 안보 경협을 둘러싼 망언 파동 등으로 양국 관계가 흔들리던 상황. “오른손엔 미국, 왼손엔 한국의 손을 쥐고 세 나라가 태평양 국가로 돌진하자는 것이 나의 외교 전략이었다”고 훗날 소개했다. ▷당시 청와대에서 공식 만찬 연설의 3분의 1을 한국어로 했고 ‘2차’에서는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한국어로 불렀다. 전 대통령도 일본 노래를 답례로 불렀다. 방한 직후엔 미국으로 날아갔다. “미일이 가치관을 일체화해 방위에 나선다”는 미일공동선언을 발표하고 두 정상이 서로를 애칭으로 부르는 ‘개인적인 친밀관계’(이른바 론-야스 관계)를 쌓는 데 성공했다. ▷1947년 정치에 입문해 56년간 국회의원, 이 중 5년간은 총리로 재직했다. 젊은 시절 도쿄 도심의 의원 숙사로 이사한 뒤 한 정치부 기자에게 이런 자랑을 했다. “월세가 공짜인데 방 두 개에 부엌까지 있다. 아이들이 너무 좋아한다.” 이 숙사는 다른 의원들 사이에서는 “냉난방 시설이 없고 바퀴벌레가 튀어나오는 좁은 아파트” “가족과 함께 살 수 없어 기러기 생활을 해야 했다”는 등의 회고담이 나오는 집이다. ▷현직 총리로는 처음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고 대표적인 개헌론자이지만 ‘보수 원류’답게 주변국을 배려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2013년 아베 신조 총리가 역사 수정주의 논란을 일으키자 언론 기고를 통해 “주변국의 신뢰를 얻으려면 역사의 부정적인 부분을 직시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 “과거에 대한 솔직한 반성과 함께 행동은 엄격히 삼가야 한다”며 “민족이 입은 상처는 3세대, 100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충고했다. ▷2006년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한일관계에 대해 “외교의 중심점은 양국 수뇌가 정말로 우정을 느끼고 굳게 악수하는 것”이라며 “그러려면 상대 입장을 존중하고 이쪽 입장도 존중받는 방식이 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오늘날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현실인 것 같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2019-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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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천龍’과 대물림[횡설수설/서영아]

    열악한 환경에서도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을 가리켜 “개천에서 용 났다”고 한다. 당대에 계층 상승을 이뤄내고 예전의 자신과는 다른 인생을 구가하게 되며 가족에게도 좀 더 좋은 생활환경과 미래를 제공하는 이들이다. 이런 개천용은 정치경제적 변화가 극심한 시기, 고도성장기 등 역사가 역동적으로 움직일 때 태어날 틈새가 생긴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우리 땅에서는 그런 기회가 많지는 않았던 듯하다. 조선 후기까지는 신분제에 묶여 계층 이동의 기회가 제한적이었다. 과거시험에 급제해 금의환향하는 스토리가 전해지지만, 사실 과거도 신분에 따라 응시 조건부터 급제 이후의 대우가 모두 달랐다고 한다. ▷1950∼1980년대 한국의 고도성장기는 가장 역동적인 시기였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양반 평민 천민 등 신분이 사라지자 한국인들은 교육의 힘에 주목했다. 없는 집이라 해도 자식을 도시로 보내 논 팔고 소 팔아 교육에 보탰다. 부모들은 “내 자식은 나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안고 지원했고, 자식들은 그 기대에 보답하려 노력했다. 그 덕에 대한민국의 정관계와 재계를 이끄는 개천용들이 양산됐다. 고졸 출신의 노무현 전 대통령을 필두로 빈농 아들의 주경야독, 고시생의 성공 스토리 등 지난 수십 년간 우리가 마주해온 사회 지도자들의 상당수가 이런 예가 되겠다. ▷고도성장기가 끝나면서 개천용의 신화도 막을 내리는 걸까. 우리 사회에서 계층 이동의 꿈을 꾸는 사람이 줄고 있다는 소식이다. 25일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자녀 세대의 계층 이동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국민은 28.9%로 10년 전의 48.3%보다 19.4%포인트 줄었다. 자신의 현재 계층이 낮다고 인식할수록 계층 상승에 비관적이었다. 원인으로는 교육 등의 채널이 더 이상 계층 상승 사다리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 꼽혔다. 가령 의사나 법관이 되려면 ‘의학전문대학원’ ‘법학전문대학원’ 등 비용이 많이 드는 단계를 더 밟아야 한다. ▷개천용 신화가 사라진 자리엔 부모에 따라 자녀의 경제·사회적 지위가 결정된다는 이른바 ‘수저계급론’이 자리 잡아가고 있다. 2016년 한국노동연구원 보고에 따르면 부모가 고위공무원, 전문직인 자녀가 같은 직군에 취업하는 비율은 32.3%로 단순노무 종사자 자녀(16.6%)에 비해 훨씬 높았다. 사람은 미래에 가능성이 있다고 느껴야 꿈을 부려놓고 노력할 수 있다. 노력해서 성공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는 사회를 만들려면, 청년들이 도전할 수 있는 틈새를 자꾸 열어주고 기회의 사다리를 놓아주는 작업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2019-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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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소미아 종료는 위험한 도박… 일단 연장 후 정보교환 안 할 수도”[논설위원 파워 인터뷰]

    《23일 0시 자동종료를 앞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에 시선이 쏠리고 있다. 시한이 임박해오면서 가장 절박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미국 정부다. 군 수뇌부가 연달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협정을 살려내려 압박을 가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지소미아에 대해서는 전문가 그룹의 의견도 엇갈린다. 한미일 3각 공조를 중시하는 전문가들 대부분은 지소미아 종료가 한반도에 가져올 후폭풍을 크게 우려한다. 반면 여권에서는 지소미아의 효용이 크지 않다며 별문제 없다는 주장도 들린다. 이대로 지소미아 종료는 기정사실이 돼 가는 걸까. 한미일 관계 전문가인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에게서 지소미아와 한미동맹, 한일관계에 대해 들어봤다.》 ○ 일본에 내민 지소미아 종료 카드, 전략적 실책 ―지소미아 종료 시한이 임박했다. “애초에 문재인 정부의 전략적 실책이었다. 정부는 지금도 일본이 먼저 수출규제 철회 조치를 하면 지소미아 연장 선언을 하겠다고 한다. 반면 일본은 수출규제와 지소미아는 등가 교환할 대상이 아니라며 꿈쩍도 않는다. 정부가 진퇴양난에 빠졌다. 이제 와서 돌아가고 싶어도 명분이 마땅치 않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연장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부담이 크다.” ―미국의 반발이 지나치다는 느낌은 없나. “충분히 예상됐던 일이다. 일본의 수출규제는 한일 간 경제 문제인 반면 지소미아 종료는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에 직접적인 균열을 가져오는 문제다. 인도·태평양 전략하에 미국은 동맹 및 우방과 힘을 합쳐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에 공동대처하려 하는데 한국은 정보 공유마저 거부하는 양상이다.” ―지소미아와 관련해 정부 여권에서는 다른 주장들이 나온다. 2016년 시행 이래 효용이 크지 않았다거나 한미일 정보공유협정(TISA)으로 대체하면 된다는 주장이 그런 것들이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지소미아와 한미동맹은 별개”라고 공언했다. “지소미아는 그 효용성보다는 정치적 상징성이 더 강하다. 지소미아 파기는 한국이 한일 협력, 한미일 안보협력을 거부한다는 제스처로 보일 것이다.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노출된 주한미군이나 주일미군, 나아가 미국 본토를 함께 사수할 의지가 없다는 뜻이 되니 한미동맹을 훼손하는 행위로도 받아들여질 것이다. ‘한국은 북한 편을 들더니 우리와 북한에 대한 정보교환을 할 의사가 없구나. 주한미군이나 주일미군을 적극 보호하겠다는 의사도 없구나. 혹 한미동맹이 없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인가….’ 한반도 중심주의에 빠져 북한엔 구애를 계속하면서, 미국과 일본에는 등을 돌리는 양상이다. 마치 한국이 나서서 신애치슨라인을 그으려고 하는 것으로 비칠 것이다.” ―지소미아 종료 이후를 전망해 본다면…. “미국은 수출규제를 한 일본에도, 지소미아를 거부하는 한국에도 불만을 표했지만 종료 이후로는 한국을 외통수 고집불통이라고 여길 것이다. 결국 한미일 협력 거부의 책임을 한국이 모두 끌어안게 되고, 미국과의 협상에서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될 것이다. 방위비 분담 문제에서도, 주한미군 및 동맹 조정 문제에서도 한국은 방어적일 수밖에 없다. 돈은 더 내고, 신뢰는 잃고, 미래는 불안한 상태를 자초하게 된다.”○ 지소미아 파기, 한일·한미일 안보협력 거부로 비쳐 ―마침 지난해의 5배나 되는 방위비 분담금 인상 요구와 겹치면서 미국에 대한 국민 여론이 악화하고 있다. “5배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식 협상술이다. 한국의 부담이 더 늘겠지만 5배까지는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1년 전 협상에 아쉬움이 있다. 한미는 그간 5년마다 맺던 방위비 분담금 협정을 지난해 1년으로 끊어 맺었는데, 당시 분담금을 조금 더 올려주더라도 3년 정도 기한을 잡는 게 현명했다는 생각이다. 내년에는 미 대선이 있고 일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순으로 분담금 협상이 기다리고 있다. 트럼프로서는 첫 협상국인 한국에서 성과를 얻고 싶을 것이다. 5년을 절반 잘라 2년 혹은 3년 기한으로 했다면 우리가 시험대에 오르는 상황은 아니었을 수 있는데….” ―주한미군 감축을 우려할 상황인가. “지소미아가 종료되고 방위비 분담금 협상마저 실패라 여겨진다면 일부 감축도 가능하지 않을까. 현재 주한미군이 2만8500여 명인데, 지난해 미 의회에서 통과된 국방수권법 수정안에 ‘주한미군은 2만2000명 이하로는 줄이지 않는다’고 돼 있다. 결국 6500여 명이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차제에 우리도 핵무장하자는 주장까지 나온다. “주한미군이 감축되는 사태가 온다면 플랜B로서 핵무장을 검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한국도 북한처럼 해나가겠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경제제재, 외교 고립, 국제사회에서의 평판 저하 등을 감수해야 한다. 그보다는 동맹을 잘 관리하고 한반도 안보와 평화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현명한 길 아닌가. 흔히 ‘우리는 예전의 우리가 아니다’란 말을 많이 듣는데 그 성장을 뒷받침한 힘이 뭐였나. 한미동맹이 초석이 됐다.” ―당초부터 지소미아를 깨고 싶어 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미국 일본 중심의 안보질서 밑에 들어가기 싫고 중국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현 정권이 원하건 아니건 간에 한국은 한미일 3각 공조보다는 북한과 중국 쪽으로 돌아서고 있다는 인상을 최종적으로 주게 됐다. 현 정권의 외교안보 노선은 북한과의 평화체제 구축에만 올인한다는 점에서 ‘단선적’이고, 위협에 대한 현실적 대처를 게을리한다는 점에서 ‘이상론적’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북한과의 평화협력과 동시에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는 한미일 안보협력이 공고해야 한다. 현 정부는 전자만 우선시하고 후자는 뒷전으로 밀어내고 있다. 국민의 안보 불안이 가중되는 이유다.”○ 북한과의 평화 구축에 실패할 경우에도 대비해야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건가. “북한에 속을 수도 배신당할 수도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만약 북한과의 평화 구축에 실패할 경우 우리는 반전 평화도 비핵 평화도 실패한 외톨이로 남을 수 있다. 미국 및 일본과의 안보협력의 끈을 이완시키는 것은 결국 북한에는 이롭지만 한국에는 위험한 도박이다. 북한에 배신당하고 미일에 버림받으면 한국은 고립무원의 상태가 될 것이다. ‘설마’ 하는 일이 벌어졌을 땐 이미 늦은 것이다.” ―지소미아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현실적으로 가능한 선택지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지소미아를 일단 연장하되 실질적인 정보교환은 유보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소미아를 시한부로 연장하면서 일본이 수출규제를 철회하는 순간 자동 회복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빅딜’을 통해 지소미아를 조건부 연장하면서 수출규제의 조기 철회 약속을 받아내고 그사이에 징용 판결에 대한 공동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마지막 선택지는 이미 실기한 듯하다. 두 번째는 마지막 담판이 가능하지만 일본이 동의해야 한다. 가장 쉬운 것은 첫 번째 선택이다.” ―한일 간 극적인 타협이 가능할까. “양국 정권이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불가능한 일이 어디 있겠나. 다만 이런 일은 비공개 채널로 해야 한다. 일본 측은 아베 신조 총리, 한국 측은 문재인 대통령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외교안보 라인의 최측근이 나서면 가능하다.” ―정부 사이드에서 국민 여론도 그렇고 일단 지소미아는 종료하되, 필요하면 다시 협정을 맺으면 된다고도 한다. “글쎄. 있는 것도 이렇게 난리를 치며 종료를 하는데 무슨 과정을 거쳐 복원을 할까. 안보는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해야지 국민 여론에 흔들리면 곤란하다. 그는 그간 지켜봐온 문재인 정권의 특징을 △희망적 사고 △남 탓 △‘우리가 남이가’의 세 가지로 요약했다. 플랜B가 없으며,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지적이자 감상적 민족주의가 강하다는 얘기다. “문 대통령이 토론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제 임기 반환점을 지나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혼자 생각에 빠질 게 아니라 모든 해법을 끄집어내놓고 토론하고 결단해야 한다.”  ?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국가 간에 군사 기밀을 공유할 수 있도록 맺는 협정. 정보 제공 방법, 정보의 보호와 이용 방법, 보호의무와 파기 등의 내용을 규정한다. 협정을 체결해도 모든 정보가 상대국에 무제한 제공되는 것은 아니며, 상호주의에 따라 사안별로 선별적인 정보 교환이 이뤄진다. 한국은 34개국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지소미아를 맺은 상태다. 협정을 맺은 나라에는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서방세계뿐 아니라 러시아와 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 우크라이나 등 옛 공산권 국가도 포함돼 있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201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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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츠하이머와 윤정희[횡설수설/서영아]

    ‘나를 잃는 질환’ 알츠하이머. 10여 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면서 평생 쌓아온 기억과 관계와 공감들이 최근 순서부터 사라져간다. 대개 첫 3년은 시간 개념을, 다음 3년은 공간 개념을 잃고, 그 다음 3년은 사람을 못 알아보게 된다. 더 두려운 것은 종국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된다는 점. 타인의 평판을 중시했던 사람, 자존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상상도 하기 싫은 공포의 질환이다. ▷유명인 중에 이 병에 걸렸다고 고백한 사람이 적지 않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 대통령은 1994년 담화문을 통해 발병 사실을 알렸다. “나는 인생의 황혼을 향한 여행을 시작하지만 이 나라의 미래는 언제나 찬란한 여명일 것”이란 축복을 곁들였다. 말년에는 자신이 대통령이었다는 것도 잊고, 부인 낸시 여사도 몰라봤다고 한다. ‘벤허’의 배우 찰턴 헤스턴은 2002년 작별 기자회견을 열고 “포기하지 않겠다”고 투병 의지를 밝혔으나 2008년 사망했다. ▷흔히 ‘치매’로 불리는 알츠하이머는 노인성과 혈관성, 알코올성 등으로 나뉘고 증상에 따라 더 세세하게 분류되기도 한다. 이 중 가장 많은 노인성은 뇌의 노화 현상인지라 인간 누구에게나 온다고 한다. 발병 전에 육체적 죽음이 찾아오느냐, 아니냐에서 차이가 날 뿐이란 것. 100세 시대를 부르짖는 ‘장수’가 최근 알츠하이머 증가의 가장 큰 원인인 셈이다. ▷지난해 알츠하이머 환자가 된 89세 의사를 만난 적이 있다. 일본의 알츠하이머 분야 최고 권위자였던 그는 자신의 병을 공개하면서 환자와 가족들을 위로했다. “병에 걸렸다고 세상 끝난 게 아니더라”, “나는 여전히 나이고, 마음은 살아 있다”고 강조했다. 환자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해온 생활이 어려워진다는 점이 가장 괴롭고 슬픈 경험이 된다며 주변의 이해와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960, 70년대를 풍미한 여배우 윤정희(75)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고 가족이 밝혔다. 결혼 이후 43년간 남편 백건우(73)와 잉꼬처럼 함께였던 그녀가 올봄부터 따라나서지 못했다. 파리 근교 딸의 집에서 요양 중인데, 가끔 딸도 못 알아본다고 한다. 10년 전부터 병세가 보였다니 그녀의 우아한 모습에 익숙한 대중으로서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하기 어렵다. 2010년 개봉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詩)’에서 기억을 잃어가는 할머니 미자 역할을 맡았던 건 우연이었을까. 그토록 지적이고 아름답던 여배우도, 세월 앞에선 어쩔 수 없음에 인생무상을 느낀다는 탄식이 들린다. 투병 사실을 용기 내어 밝힌 가족의 뜻은 “부디 엄마를, 아내를 응원해 달라”는 호소였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2019-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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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타버린 슈리성[횡설수설/서영아]

    지난달 31일 일본 오키나와(沖繩)의 세계문화유산 슈리(首里)성이 원인 모를 화재로 불타올랐다. 건물 대부분과 유물 수백 점이 사실상 전소됐다.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슈리성은 수백 년간 이곳을 지배하던 류큐(琉球)왕국의 심장부와도 같은 곳이다. ▷오키나와는 지금은 일본의 47개 도도부현(광역자치단체) 중 하나지만 불과 150년 전만 해도 독자적인 국체를 가진 류큐왕국이었다. 조선과도 교류가 많아 조선왕조실록 태조 1년(1392년)에 “유구국 중산왕이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을 비롯해 많은 실록에 조공과 사신이 오간 기록이 있다. 신숙주는 ‘해동제국기’에 류큐국기를 남겼다. 류큐왕국은 1609년 일본의 침략 뒤에도 중국 일본 양쪽에 조공을 바치는 관계를 유지했지만 메이지 유신 뒤인 1879년 일본 정부에 의해 왕조가 폐지되면서 오키나와현이 됐다. ▷일본 정부는 복속 뒤에도 오키나와를 차별했던 것 같다. 1945년 4월부터 미군의 본토 진격을 막기 위해 시작된 혈전 ‘오키나와 전투’에서 주민들은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일본군은 주민들을 방패막이 삼았고 앳된 소년 소녀들도 군대와 간호대 등으로 동원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주민들에게 ‘옥쇄’를 명령해 자살을 강요했다. 이 전쟁으로 민간인만 12만여 명, 섬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희생됐다. 당시 육군 총사령부가 지하벙커를 설치한 곳이 슈리성이었다. 격렬한 전투에 건물이 부서졌고 사령부가 퇴각을 결정하자 부상을 입어 따라나설 수 없던 약 5000명이 이 벙커에서 집단 자결하는 참극도 벌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오키나와는 미군정 치하에 들어갔다가 1972년에야 일본에 반환됐다. 지금도 주일미군의 70% 이상이 이곳에 주둔한다. 동아시아 전략에서 오키나와의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일 것이다. 미군이 많다 보니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고 주민 반발도 크다. 오늘날 오키나와는 일본 집권세력에 대해 가장 ‘야당성’을 갖고 싸우는 지역이다. ▷슈리성 화재에 대해 잠시 “한국인, 중국인의 방화”에 의한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고 한다. 재난이 닥치면 공통의 적을 찾으려는 뒤틀린 집단심리다. 그러나 이성의 힘으로 진실을 밝혀내는 것도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다. 4월 노트르담 대성당, 지난해 브라질 박물관 등 인류의 노력과 지혜가 축적된 문화유산들이 순식간에 화마에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몇 년이 걸리더라도 성을 복원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단다. 오키나와의 대표적 관광명소이기도 했던 슈리성을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길 빈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2019-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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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 왕실의 삼종신기[횡설수설/서영아]

    나루히토(德仁) 일왕의 레이와(令和) 시대는 5월 1일 ‘삼종신기(三種神器)’ 계승식과 함께 시작됐지만, 정작 즉위식은 내일 거행된다. 80여 개국 정상급 인사, 16개국 국왕이 직접 참석한다. 일본 빼고 군주제 유지 국가가 27개국이라니, 세계 왕이 절반 넘게 도쿄에 집결하는 게 된다. ▷‘덴노(天皇)’ 즉위의식은 서기 800년경부터 지금의 형태를 갖췄다고 한다. 관료와 국내외 사절들이 정렬한 가운데 새 왕이 다카미쿠라(高御座)라는 단상에 올라 즉위를 선포한다. 나루히토 일왕은 내일 오후 1시에 이 행사를 하게 된다. 태풍 ‘하기비스’ 피해로 카 퍼레이드가 다음 달 10일로 미뤄졌고, 이어 14∼15일 ‘다이조사이(大嘗祭)’라는 추수감사 의식을 거치면 즉위 관련 의식은 모두 끝난다. 새 연호를 발표한 4월 1일부터 7개월 넘게 즉위 행사가 이어지는 셈이다. ▷일본 왕위의 상징인 삼종신기(거울 검 굽은구슬)는 천손강림했다는 아마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로부터 대대손손 왕에게 계승됐다는 왕실 보물이다. 일왕이 ‘신의 자손’이라는 설화에 기초한다. 사실 삼종신기는 실물을 보았다는 사람이 없고, 역사서 중에는 유실됐다는 기록도 적지 않지만 아무도 진위를 확인할 수 없다. 시중에 떠도는 삼종신기의 사진은 ‘상상도’이고 즉위 행사에서 사용되는 것조차 복제품이라고 한다(이 또한 아무도 본 적이 없다). ▷일왕의 위상은 부침을 거듭했다. 12세기부터 이어진 막부 시대에 명맥만 존속되던 왕은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운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최고권력자로 부상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인들은 ‘덴노를 위해’ 기꺼이 죽어갔다. 그러나 2차 대전 패전 이후 왕은 모든 권력을 내놓은, 국민 통합의 상징적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일본 왕실은 어느 때보다 위기에 봉착해 있다. 딸이 많은 가계라 나루히토 일왕의 후계자는 동생인 후미히토 왕세제와 그 아들 히사히토 왕자 2명만 남았다. 여론조사에서는 ‘여성 일왕’에 대해 60∼70%의 찬성 응답이 나오지만 보수파들의 반대도 끈질기다.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가 여성 왕도 인정하도록 왕실전범을 개정하려 했지만 마침 왕세제 부부가 임신 사실을 공표하면서 무산된 일도 있다. ▷한반도에 대한 친근감을 늘 거론했던 아키히토 상왕에 이어 나루히토 일왕도 8월 15일 과거사에 대해 “깊은 반성”을 표현했다. 그가 삼종신기만이 아니라 부친의 평화에 대한 신념도 계승해주는 걸까. 즉위식 축하를 위한 이낙연 국무총리의 방일이 한일 간 얼음을 녹이는 첫걸음이 되기를 기대해본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2019-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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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회 맞는 전국체전[횡설수설/서영아]

    개화기, 조선인에게 근대 스포츠는 낯설었다. 어느 양반이 땀 흘리며 정구를 하는 서양인을 보고 “그런 일은 하인이나 시킬 것이지”라며 혀를 찼다던가. 하지만 스포츠는 학교 체육을 중심으로 속속 도입됐고, 점차 나라 잃은 조선인들의 한을 분출하는 장으로 정착해간 것 같다. ▷1920년 11월 배재고보 운동장.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야구모를 쓴 월남 이상재 선생이 시구를 하는 장면이 전해진다.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주도로 열린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다. 올해 100회를 맞는 전국체전의 효시가 됐다. 이듬해에는 정구와 축구를 더해 ‘조선체육대회’로 이름을 바꿨다. 당시 조선 민중은 스포츠에 열광했다. 대회 입장권이 대인 10전, 소인 5전이었고 입장권 판매로만 200원의 수입을 얻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관중 2000명 이상이 들어찼다는 계산이다. ▷조선체육회는 일제가 만든 ‘조선체육협회’에 대항해 1920년 7월 민족진영이 결성했다. 그해 4월 1일 창간된 동아일보의 변봉현 기자는 창간 열흘 뒤인 10일부터 3회에 걸쳐 ‘체육기관의 필요를 논함’이란 제하의 칼럼을 써서 분위기를 띄웠다. “8월 만국의 운동경기대회인 올림픽이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열리는데, 국제 올림픽 대회에 왜 우리가 참가할 수 없는가. 권리가 없는 게 아니고 사용치 않음이다”라는 내용이다. 조선의 이름으로 조선의 청년들이 나가 실력을 겨루자는, ‘독립하자’는 말을 우회적으로 한 것이다. ▷현대사의 굴곡 속에서 우여곡절도 많았다. 전국체전은 1938년 조선체육회가 강제 해산되면서 중단됐다. 1945년 다시 열린 26회 대회에는 손기정 선수가 기수로 나섰다. 1955년 시작된 성화 봉송 첫 주자도 물론 선생이었다. 6·25전쟁 발발로 1950년 대회는 열리지 못했지만 1951년엔 광주에서 약식이나마 개최됐다. 1980년에는 5·18민주화운동으로 광주에서 열릴 예정이던 대회가 전북(이리 전주 군산)에서 분산 개최됐고, 1983년 대회 중에 아웅산 폭탄테러 사고가 나자 폐회식은 ‘북괴 만행 규탄 체육인 궐기대회’로 포장됐다. 메이저리그나 유럽축구 등 볼거리가 많아지면서 체전에 쏠리는 관심은 예전 같지 않지만, 여전히 전국 유망 선수들을 키워내는 터전이다. ▷4일 서울 잠실경기장에서 제100회 전국체전이 개막한다. 일주일간 2만5000여 선수가 47개 종목을 놓고 경합한다. 불꽃축제 등 대형 공연도 진행될 예정이라는데, 화려한 행사 이전에 ‘건민(健民)과 저항’을 창립이념으로 했던 100년 전 선조들의 뜻을 한 번씩 되새겨 보는 건 어떨까.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2019-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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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네마루 신[횡설수설/서영아]

    “조상께서 이 땅에서 건너가셨다고 들었습네다.” 1990년 9월 26일 묘향산. 당시 ‘일본 정계의 우두머리’라 불렸던 가네마루 신(金丸信·1914∼1996)을 환대하는 김일성의 첫인사는 이랬다고 한다. 초당파 방북단을 이끌고 간 가네마루는 이 회담 뒤 일본 자민당과 사회당, 조선노동당 3당의 이름으로 ‘북-일 수교 공동선언’을 발표하며 눈물을 흘렸다. 북한에 나포돼 7년간 억류돼 있던 후지산마루호 선장과 기관장을 귀국시키는 등 가시적 성과도 거뒀다. 하지만 선언은 귀국 뒤 ‘굴욕 외교’, ‘매국 외교’라고 지탄받았다. ▷당시 김일성-가네마루 회담은 밀실에서 진행됐다. 국교 정상화와 관련된 보상 문제가 논의됐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내용은 문서화되지 않았고 내내 논란의 씨앗이 됐다. 이후 북한이 시도 때도 없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비난할 때마다 일본 측은 이것이 밀실 협상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이라 추측할 뿐이었다. 당시 북-일 국교 정상화와 식민지 시대 및 전후 보상을 북한에 약속했던 가네마루는 ‘전후 보상’이 문제가 되자 “국교 정상화가 늦어진 데 따른 이자분”을 주장하기도 했다. 1994년 김일성, 1996년 가네마루의 죽음으로 공동선언은 빛이 바랬지만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방북과 북-일 평양선언의 기초가 됐다. ▷그로부터 다시 17년. 오랜 교착 상태를 깨기 위해 일본이 움직이는 걸까. 비서로서 이 방북단을 수행했던 가네마루 신의 차남 가네마루 신고(金丸信吾·74) 씨가 14일 60여 명을 이끌고 평양에 갔다. 부친의 탄생 105주년 기념식을 17일 현지에서 치를 예정이라고 한다. 그는 출발 직전 “아베 총리의 ‘조건 없는 북-일 정상회담’론을 저쪽(북한)에서 받아들일 생각인지 듣고 싶다”며 기대를 다지기도 했다. 이달 말부터는 일본의사회가 북한에 의료지원대표단을 파견할 예정이라고 하니 북-일 간 교류의 물꼬가 트이는 분위기는 확실한 것 같다. ▷가네마루 신은 ‘의리와 인정’의 정치를 내세웠다. 대놓고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를 싫어했지만 나카소네는 가네마루의 ‘그릇의 크기’를 인정해 자민당 부총재로 모셨다고 하니, 누구의 그릇이 더 큰지는 좀 따져봐야 할 듯하다. 총리가 될 수 있었지만 고사한 인물로도 꼽힌다. “총리가 돼 고생하는 것보다 총리를 뒤에서 조종하는 게 재미있다”는 이유에서다. 1992년 터진 ‘사가와 규빈’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건 및 탈세로 말년은 체포와 재판으로 얼룩졌다. 자택을 압수수색하니 금괴가 잔뜩 나와 “김일성에게서 받은 것 아니냐”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2019-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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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빨리 늙어가는 한국[횡설수설/서영아]

    현재 세계 최고의 노인대국은 일본이다. 65세 이상 고령자가 인구의 28%를 차지한다고 하니 한국의 14.9%에 비하면 근 2배다. 인구 구성이 달라지면 사회 분위기도 변한다. 지난해 10여 년 만에 일본서 살게 된 지인은 “어딜 가나 유니클로 패션이라 놀랐다”고 했다. ‘유니클로 패션’이란 수수하고 실용적인 옷차림을 말한다. 과거 여기저기서 눈에 띄던 호사스러운 멋쟁이들이 사라졌다는 얘기였다. 패션도 노인이 주류가 된 사회에 맞춰 변한다는 것이다. ▷저출산과 고령화, 인구 감소는 2000년대 이후 일본에서 ‘국난’이라 표현할 정도로 화두로 떠올랐다. 군사안보 전문가가 “일본의 가장 큰 안보과제는 고령화와 인구 감소”라고 잘라 말할 정도다. 노인들은 일손 부족으로 정년이 연장된 데다 장수가 가져다준 끝을 알 수 없는 ‘노후(老後)’ 탓에 쉴 새 없이 일하며 사회에 짐이 될 시간을 늦추려 애쓴다. ▷이런 풍경들을 ‘강 건너 불’처럼 바라보던 한국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2045년 한국은 일본을 추월해 세계에서 가장 늙은 나라(고령화율 37%)가 된다고 통계청이 예측을 내놓았다. 세계적으로도 유례없이 낮은 출산율 탓이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이 0.98명이라 하니 일본의 1.43명(2017년 기준)과 비교해도 한참 낮다. 생산가능인구도 줄어 2067년이면 인구 절반이 일해 나머지 절반(생산가능인구 100명당 102.4명)을 부양해야 한다고 한다. 같은 기간 세계 평균은 100명당 14명에서 30여 명으로 늘어나는 정도다. ▷부양과 복지 부담은 고스란히 미래 세대의 어깨에 올려진다. 이런 나라에 경쟁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노동생산성이 저하되고 복지 등 지출은 늘어 소비와 투자의 활력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생겨난다. 말 그대로 ‘인류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세상’이다. ‘아이 한 명 키우는 데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한 아이의 성장에 가족은 물론이고 이웃과 사회의 수많은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웃끼리 유대를 갖고 돕는 문화가 남아있는 섬 지역에서는 출산율이 훨씬 높다는 보고가 많다. 각박하고 치열한 경쟁을 겪고 있는 우리 청년들이 아이를 낳아 기를 엄두를 못 내는 것도 이해가 간다. ▷곧 추석이다. 피라미드 구조처럼 할아버지 할머니를 정점으로 아랫세대로 갈수록 바글바글대는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게 우리네 명절 풍경이었다. 이러다간 집안 구석구석 뛰어다니는 손주들로 정신없으면서도 함박웃음이 떠나지 않는 그런 북적댐이 추억처럼 그리운 사라진 풍경이 될까 걱정이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2019-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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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럼프의 ‘도럴 스캔들’[횡설수설/서영아]

    2016년 10월 25일,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도널드 트럼프는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 있는 골프 리조트 ‘트럼프 내셔널 도럴’을 찾았다. 선거일이 2주 앞으로 다가온 시점. 일각이라도 아껴 유권자를 찾아다녀야 했지만 그는 기자들 앞에서 생뚱맞게도 골프장 홍보를 했다. 다음 날에는 워싱턴에 새로 문을 연 트럼프 인터내셔널 호텔 개장식에 참석했다. 항간에서는 ‘대선에서 패색이 짙어진 그가 자기 사업이라도 홍보해 보려는 것’이란 지적이 나왔다. 하지만 정작 트럼프는 45대 대통령으로 당선돼 세상을 놀라게 했다. ▷부동산 재벌이던 그의 ‘비즈니스혼(魂)’은 전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미국 대통령이 된 뒤에도 심심찮게 발현됐다. 플로리다의 마러라고 리조트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불러 정상회담을 가졌다. 비용은 모두 미 정부 예산으로 처리됐다. 본인 소유 리조트가 세계 16곳에서 영업 중이다 보니 미국민의 혈세를 꽂아주는 일도 ‘글로벌’하게 이어졌다. 6월 아일랜드 총리와의 정상회담 때도, 지난해 7월 영국 방문 때도 본인 소유 리조트에서 골프 여행을 즐기고 미 정부에 비용을 청구했다.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가 이런 식으로 번 돈만 최소 160만 달러(약 19억 원)라고 추산한다. ▷“마이애미 공항에서 5분 거리, 아름다운 방갈로를 국가별로 한 채씩 쓸 수 있어요.” 26일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폐막 기자회견에서 나온 트럼프의 발언은 호텔 영업맨을 방불케 했다. 내년 미국에서 주최하는 G7 회의를 자신의 도럴 골프 리조트에서 열자며 수많은 장점을 열거했다. 이에 대해 “대통령직을 이용해 사적 이윤을 추구하는 행위”라는 비판이 미국은 물론이고 G7 회원국에서도 거세지고 있다. 이번 G7의 다른 의제들을 잡아먹은 리조트 파문은 ‘도럴 스캔들’이라 명명됐다. 미 민주당은 이 제안이 헌법의 ‘보수 조항(Emoluments Clause)’에 저촉된다며 자체 조사에 들어갔다. 보수 조항은 정부 관리가 의회의 승인 없이 외국 정부로부터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는 것을 금지한다. ▷아무리 선진국이라도 권력자의 공사(公私) 혼동, 모럴해저드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을 오가며 끊임없이 생겨난다. 일반인의 상식으로 볼 때 말도 안 되거나 부끄러워 숨고 싶어질 일들을 벌인 장본인이 막상 선거에서 가공할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재선이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것이 부이건 권력이건 명예이건, 너무 많은 것을 가진 자일수록 탐욕은 끝없이 커지더라는 점이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2019-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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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ANG’의 퇴조[횡설수설/서영아]

    아이폰이 세상에 나온 때는 2007년. 그로부터 불과 수년 만에 스마트폰은 세상을 지배하는 도구가 됐다. 많은 이가 알람 소리에 일어나 다시 잠들 때까지 한시도 스마트폰을 놓지 못한다. 통신과 검색, 쇼핑, 게임 등 가히 현대인의 모든 생활이 스마트폰에 신세 지고 있다. 그 덕에 급성장한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애플 등 선도적 정보기술(IT) 기업들은 머리글자를 따 ‘GAFA’라 불렸다. 요즘은 후발주자인 넷플릭스를 더해 ‘FAANG’이라고도 한다. ▷세상을 바꾸는 변화는 지나간 뒤에야 ‘그랬구나’라고 깨닫는 경우가 많다. 토머스 프리드먼은 저서 ‘늦게 와줘서 고마워(Thank you for being late)’에서 2007년을 세계 ‘기술의 변곡점’이라 정의했다. 그해에 아이폰과 안드로이드가 나왔고 페이스북과 유튜브는 본격 서비스를 시작했다. IBM은 그해 인공지능 컴퓨터 왓슨을 만들기 시작했다. 빅데이터 분석의 틀이 시장에 등장한 것도 2007년이다. 이후 소셜미디어와 클라우드 컴퓨팅 기술은 빛의 속도로 발전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FAANG의 주가는 2014년부터 2017년까지 180% 올랐고 시가총액 톱5를 단골로 차지했다. 다만 일자리 창출 기업은 아니었다. ‘보상은 소수 일자리에만 집중되고 나머지는 그 부스러기 같은 일자리를 놓고 싸우게 된다.’(스콧 갤러웨이 ‘플랫폼 제국의 미래’) ▷미국 증시를 맹렬히 떠받쳐온 FAANG의 기세가 예전 같지 않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들의 시가총액이 지난해 8월 고점(3조7000억 달러·약 4494조 원)을 찍은 뒤 급락해 1년간 504조 원이 줄었다고 최근 전했다. 미 증시 10년 호황이 끝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페이스북은 개인정보 유출 파문 탓에, 넷플릭스는 경쟁사 등장 등으로 이유는 제각각이다. 유럽연합(EU)은 디지털세 도입을 추진 중이다. ▷어느 시대건 최첨단을 달리는 ‘총아’는 있다. 1990년대에 ‘4대 기업’이라면 마이크로소프트와 인텔, 시스코, 오라클이 꼽혔다. 1970년대에는 코카콜라, 질레트 등이 시장을 주도했다. 달이 차면 이지러지듯, 시대를 풍미한 그들은 차세대에게 자리를 내주고 뒷방으로 물러난다. FAANG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일 터. 이번에는 그 바탕에 혁신에 대한 피로감이 깔려 있는 건 아닐까. 전술한 프리드먼 저서의 제목은 ‘(약속 상대가) 늦게 와준 덕분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생겨 고맙다’는 뜻이다. 과속의 시대일수록 멈춰 서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2019-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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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일 떨어질수 없는 관계…서로 성의있게 설명하는 자세부터”[논설위원 파워 인터뷰]

    일본 지식인을 부를 때 ‘양심적’이란 수식어가 자동으로 붙는 사람들이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항일독립운동을 도왔다거나, 유신독재 시절 한국 내 반독재 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거나…. 진보학자이자 친한파로 널리 알려진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는 그 ‘양심적 지식인’의 대명사 격인 인물이다. 만해 평화상 수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그를 만났다. 와다 교수는 지난달 25일 일본 사회지도층 78명과 함께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한국은 적(敵)인가’ 제하에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 규제 철회와 양국관계 정상화를 촉구하는 내용이다. 수교 이래 최악이라는 한일 관계가 7월 초 일본 정부의 3개 첨단 소재 수출 규제로 더욱 나락에 빠졌고, 한국에 대한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 제외가 예고된 폭풍전야 같은 상황이었다. 이들은 “이번 조치는 한국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적대적인 행위”라 지적하고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과거사 문제가 모두 해결됐다는 아베 정부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일본과 한국은 중요한 이웃 국가로, 서로 떨어질 수 없다”며 “아베 총리는 일본 국민과 한국 국민의 사이를 갈라놓는 것을 그만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인만을 대상으로 한 서명운동은 15일 1차마감까지 8404명이 참여했다. 인터넷 사이트 단순방문자는 23만 명을 넘었다. 서명과 함께 ‘수천년 이웃국가를 감정에 따라 대하면 안 된다’거나 ‘한일관계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는 댓글이 3600여 건 올라왔다. 재미있는 것은 서명운동 홍보를 한국 매체들이 자연스레 해줬다는 점이다. “기자회견도 없이 인터넷 사이트만 띄웠다. 일본에서는 어떤 매체도 다뤄주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뒤부터 하루 몇백 명씩 서명이 들어와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한국뉴스를 통해 소식을 안 사람들이 몰려든 거였다. 2010년 ‘한일병합 무효’ 서명을 양국에서 모을 때는 각기 500명씩 모으는 게 목표였으니, 8000여 명이면 상당한 반향이다.” 이들은 31일까지 서명운동 기한을 늘리고 이날 도쿄 YMCA에서 ‘긴급집회’를 열 예정이다.○ “한국 수출 규제 철회”에 20일 만에 일본인 8000여 명 찬동 서명 한국에서는 12일 원로지식인 67명이 ‘한일은 김대중-오부치 선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성명을 냈다. 일본 지식인들의 서명운동에 대한 화답이라는 설명도 붙었다. “성명에서 우리를 특별히 언급해주셔서 감사했다. 4개항 제안에는 모두 찬성이다. 김대중- 오부치 선언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주장도 널리 보이는 적극적 주장이다. 다만 그 선언은 위안부 문제와 아시아여성기금을 빼놓은 불충분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 선언으로 돌아가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8·15경축사에서 일본 비판을 자제하고 협력의 자세를 내보였다. 한일관계를 걱정하는 층에서는 안도하는 분위기다(이 질문에 대한 답은 와다 교수 귀국 후 이메일로 받았다). “긍정적 내용이다. 특히 ‘우리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일본과 안보 경제협력을 계속해왔다. 일본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있어 피해자 고통을 실질적 치유하기 위한 노력, 역사를 거울 삼아 굳은 손을 잡으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는 대목이 좋았다. 이를 ‘그런 입장에 서서 노력해나가겠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몇 달 전엔가, 한일관계 관계자로부터 다소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오랜 세월 한국의 민주화를 도운 양심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한국 민주화를 열심히 도우면 한일관계가 더 좋아질 거라 기대했는데, 한국이 발전할수록 반일(反日) 성향이 강해진다”며 탄식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였다. 와다 교수는 생각이 달랐다. “한국에서 민주화가 진행되면 일본에 대한 비판이 더 확연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에 실망해서는 안 된다. 물론 나 자신도 한국 운동단체의 비판 내용에 대해 불만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활동이 늘 일본에 보다 깊은 반성을 하도록 촉구한 효과도 있다. 서로 발전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위안부 재단을 보는 한일의 시각차 ―오랜 관찰자로서 지금의 한일관계 악화의 가장 큰 원인은 뭐라고 보는가. “(일본군 강제 동원) 위안부 문제부터 너무 꼬였다. 아베 총리 입장에서는 2015년 위안부 합의는 ‘굴복’이란 표현을 써도 좋을 정도로 희생을 감수한 거였다. 지지자들의 강한 반발을 무릅쓰고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고 보상금을 정부 재원에서 출연했다. 이는 1965년 청구권협정을 무시한 것이기도 했다. 1990년대에 무라야마 담화를 내놓은 일본이 당시 민간 주도의 아시아여성기금을 만든 이유는 정부 돈을 직접 줄 경우 청구권 협정에 위배되기 때문이었다. 아베 총리는 그 원칙조차 깼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반발이 심하다니 분한 마음이 들었을 거다. 2015년부터 외교청서에서 한국에 대해 ‘기본적 가치와 이익을 공유하는 국가’라는 문구를 제외한 것은 그런 맥락이다. 반면 한국 정부의 대응은 일본인들 눈에는 무성의해 보였다. 한국 정부는 ‘위안부 합의 파기는 안 한다’고 했고 일본 정부 출연금 10억 엔도 한국 정부가 내겠다고 했는데 뭘 하겠다는 건지 모호하다. 재단을 해산했다는데 그 재단은 해산 전에 뭘 했는지, 일본 정부가 낸 10억 엔은 어떻게 됐는지 한마디 설명이 없다. 일본인들이 문 정권에 대한 불신감을 갖는 이유다. 물론 이 밖에도 대북정책을 둘러싼 아베 정권과 문 정권의 갈등도 있었다. 한미일이 3인 4각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일본은 평창 올림픽을 전후해 ‘모기장 밖’으로 밀려났다. 징용공(강제징용 피해자)은 더욱 간단치 않은 문제다. 한일관계는 전체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 ―분위기를 어디부터 어떻게 바꿀 수 있나. “위안부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 가령 한국 정부가 재단 해산에 대해 ‘전 정권이 정한 것을 바꿀 수는 없지만 국민 불만이 많아 실행하기도 어렵다. 우리로서는 이 상태에서 정리하고 다음 정책을 취하겠다’고 설명하고 돈은 어떻게 하겠다고 밝혀야 한다. 생존자 48명 중 36명에게 1억 원씩, 유족 일부에도 위로금을 지급했다는데 이런 소식은 언론을 통해 소문처럼 흘러나올 뿐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대화하겠다는 자세가 아닌 걸로 보인다.”○ “국민끼리는 소통하고 힘 합쳐야” ―한국에서는 아베 총리의 역사수정주의적 자세 등이 문제라는 목소리도 큰데…. “지금의 일본 국민 대부분은 전후에 태어난 세대다. 그들에게 ‘식민지배 피해를 책임지라’고 말해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른다. 일본의 사죄에 대해 ‘진정성이 없으니 다시 하라’는 요구도 이해하기 어려울 거다. 이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지적대로 일본 정부도 문제다. 2015년 아베 담화 앞부분에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해 아시아인들이 기뻐했다’는 말이 나온다. 이는 사실상 무라야마 담화의 전쟁 반성을 부정한 것이다. 아베 사관은 1931년 만주사변 이후는 반성하지만 한반도 병합을 위한 청일전쟁, 러일전쟁은 반성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일본 정부가 태도를 바꿔야 한다. 아베 총리는 올해 시정연설에서도 ‘중국 러시아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겠다’고 하면서 한국은 빼놓았다. 이런 자세를 바꿔야 한다.” ―한국 정부는….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인들의 마음을 전혀 잡지 못했다. 징용공 문제로 문 대통령은 ‘일본은 겸허해야 한다’며 화만 낸다는 인상이다. 한국 대법원 판결 이후 일본 정부가 숱하게 대화를 요청했지만 8개월간 아무 대답이 없다가 올해 6월 G20 직전에야 한국안을 내놓았다. 최근 한 월간지 광고를 봤는데 문 대통령에 대한 일본인들의 시선이 잘 드러났다. 그의 얼굴을 배경으로 ‘남북한 vs 미일동맹’ 간 전쟁을 다뤘다. 한국은 저런 구도라도 상관없을까. 일본은 무척 곤란해할 거다.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서도 한국과 일본은 협력해야 한다. 정부가 잘 못한다면 양국 국민이 나서서 협력하라고 요구하고 힘을 합쳐야 한다. 우리 성명에도 썼듯이 한국과 일본은 중요한 이웃국가로, 서로 떨어질 수 없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2019-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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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래방의 쇠퇴[횡설수설/서영아]

    ‘인간이 타인에 대한 인내심을 갖는 완전히 새로운 길을 제시함으로써 평화공존을 이룩한 공로.’ 노래방의 원류인 가라오케 개발자 이노우에 다이스케 씨에게 2004년 이그노벨 평화상이 주어진 이유다. 1971년 일본의 밴드 멤버였던 그는 사전에 녹음해둔 테이프를 배경으로 노래할 수 있게 한 반주음악 기계를 내놓았다. 이그노벨상은 발상의 전환을 돕는 이색 연구나 업적에 미국 하버드대 계열 과학유머잡지사가 주는 상이다. ▷가라오케는 비었다는 뜻의 일본어 ‘가라(空)’와 오케스트라(orchestra)를 결합한 일본식 영어다. 영어권 국가로 수출돼 영영사전에도 ‘karaoke’로 등재됐다. 국내 첫 노래방은 1991년 부산 동아대 앞 로얄전자오락실 안에 생겼는데, 200원을 넣으면 반주가 나오는 코인노래방 형태였다고 한다. 노래방은 전국에 빠르게 확산됐지만 껄끄러운 시선도 적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가라오케’는 노래할 수 있는 술집, 노래방은 ‘명목상’ 주류를 팔지 않는 곳으로 구분됐다. 노래방은 1999년 영업시간 제한이 사라진 뒤 직장인들의 회식 2차를 책임지는 대표적인 장소이자 남녀노소가 즐기는 여가문화로 자리 잡았다. 자본과 기술이 부족한 자영업자들이 상대적으로 쉽게 창업하는 업종이기도 했다. ▷이런 노래방 문화가 급속히 기울고 있다고 한다. 2011년 3만5000여 개로 정점을 찍은 전국의 노래방 수는 코인노래방 창업 열풍이 일던 2015년과 2016년을 제외하곤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급기야 지난해에는 새로 생긴 노래방(766개소)보다 문을 닫은 곳(1413개소)이 두 배 가까이 많았다고 한다. 대한민국 자영업자들의 눈물겨운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단면이다. ▷노래방의 쇠퇴는 주 52시간제가 도입돼 직장 회식문화가 줄어든 탓이 크다. 각자 일터에서 업무강도가 세졌고 ‘칼퇴근’ 뒤 직장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도 줄었다. 커피전문점, 당구장, 스크린 골프 등 2차로 갈 곳도 다양해졌다. 다들 취한 상태에서 노래와 춤을 추다 성추행 등 불미스러운 상황이 생길 가능성을 미연에 차단하려는 심리도 커졌다. ▷1인 문화의 유행으로 혼자 노래방에 가는 ‘혼코족(혼자 코인노래방 족)’이 늘면서 대형 룸 위주의 노래방 사업이 쇠퇴하게 됐다는 분석도 따라온다. 이 대목에서 이그노벨 평화상의 수상 사유를 뒤집어보게 된다. 노래방은 서로의 노래를 들어주고 형식적으로 박수를 쳐줘야 하는 ‘적극적’ 사교의 공간이다. 개인주의가 커진 요즈음, 혹 노래방의 쇠퇴는 우리의 타인에 대한 인내심이 줄어든 것과 관련이 없을까.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2019-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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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日갈등 이상적인 해법은 ‘외교적 해결’, 현실은… [논설위원 이슈 칼럼]

    한일관계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다. 일본은 4일부터 반도체 등의 핵심 소재 3가지에 대해 수출 규제를 강화한 데 이어 다음 달 추가 조치에 나설 것을 예고해 외교분쟁에 무역을 끌어들였다는 비판을 사고 있다. 한일청구권협정, 강제징용 배상 문제를 중심으로 한일 분쟁의 뿌리와 해법을 모색해본다.○ 불완전했으나 불가피했던 한일협정 먼저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 건설을 위해 자금이 필요했다. 5·16에서 한일기본협약 조인까지의 과정을 외교문서와 증언으로 엮은 ‘실록 박정희와 한일회담’(이도성 편저·1995년)에서는 당시 박 정권이 어떤 자세로 회담에 임했는지 잘 드러난다. “우리가 언제까지 미국놈들에게서 밀가루나 얻어먹고 사는 게 자존심을 지키는 거냐? 나라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이 길밖에 없다는 게 내 신념이다. 설사 굴욕적인 측면이 있더라도 우리가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두고두고 왜놈들에게 더 큰 굴욕을 받아가며 살아야 할 것이다.”(1964년 박 전 대통령이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에게 한일협상 막후교섭을 맡기면서 한 말, 박태준 회고) 박정희 정부는 1965년 일본 정부와 한일기본조약과 한일청구권협정 등 1개 조약과 4개 협정을 체결해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청구권협정 제1조에는 “일본이 한국에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의 경제협력을 제공한다”는 내용이, 제2조에는 “청구권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 과정에서 식민지배의 불법성이 명시되지 않고 모호하게 처리됐다. 조약 제2조에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문안만이 실렸다. 한국 정부는 이를 1910년 강제병합 등 과거의 조약이 체결 당시부터 불법이고 무효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일본은 과거 조약은 합법적이고 유효했으나 1948년 한국 정부 수립으로 무효가 됐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동상이몽(同床異夢)은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한국은 패전국인 일본과 승전국 자격으로 강화조약을 맺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참가하지 못했고,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은 당시 국제질서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후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5억 달러의 경제협력자금(일본 내에서는 ‘독립축하금’이라 했다)을 제공한 것으로 청구권 문제가 모두 해결됐다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 이 같은 한일협정의 불완전성은 이후 논란의 불씨로 남았다. ○ “일제 불법 식민지배 피해의 위자료” 2018년 10월 30일 한국 대법원 판결은 이 같은 한일관계의 구조적 모순을 정조준했다. 원고들이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대법원은 피해배상의 성격을 일제의 불법적인 식민지배에서 생긴 피해에 대한 위자료 개념으로 봤다. 배상금도 1억 원이란 구체적인 액수를 제시했다. 일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묻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셈이다. 한국의 사법부 판단과 외교협정 사이에 모순이 생겼다. 일본 정부는 판결 이후 한국 정부의 입장을 계속 물었다. 우리 정부는 “삼권 분립 원칙에 따라 사법부 판결에 대해 행정부가 왈가왈부할 수 없다”며 ‘사법부 판단 존중’ 자세를 고수했다. 그러나 원고들이 위자료를 받기 위해 기업의 국내 자산에 대한 압류와 현금화 조치 등에 들어가면 일본 정부는 자국 기업이 받을 재산권 침해에 대응했다. 결국 외교 문제로 번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흔히 한국인 징용 피해자들의 소송을 논할 때 ‘개인 청구권’이 인정되느냐 여부를 따진다. 일본 정부의 일관된 입장은 “개인 청구권은 있다. 그러나 외교적 보호권은 없다”이다. 소송할 자유는 있지만 소송에서 이겨도 그 권리를 정부가 외교적으로 보호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군 공습 피해를 입은 일본인들이 피해배상 소송을 낼 때 일본 정부가 내세워온 논리였다.○ 한국은 1+1기금, 일본은 중재위 주장 어떻게 풀어야 할까. 원론적인 대응책은 “외교적 해결”이다. 하지만 어떤 방향으로 풀어야 할지 명확하지 않다. 현실에서 양국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마주 앉을 기회조차 없었다. 일본 정부는 1월부터 청구권협정에 명시된 중재위 절차를 시작했으나 한국은 반응이 없었다. 한국 정부는 판결이 난 지 8개월 만인 지난달 19일 양국 기업이 기금을 만드는 ‘1+1’ 안을 일본에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판결 직후부터 공로명 전 외교부 장관, 신각수 전 주일대사 등 전문가 상당수가 한일 기업들의 출연으로 기금을 조성하고 한국 정부가 역할을 하는 ‘2+1’ 안을 제시해왔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기금 조성을 위해서는 특별법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기금 구제의 인원 규모와 법적 시효를 확정하고 형평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가령 2007년 우리 정부가 특별법 입법을 통해 강제징용 피해자 7만2000여 명에 대해 총 6800여억 원을 지급했는데. 이들과의 균형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지난 20년간 일본의 식민지배 피해와 관련된 배상 소송을 도맡다시피 해온 최봉태 대한변협 일제피해자인권특별위원장은 뜻밖에도 “외교적 협의를 통한 해결 외에 방법이 없다”며 ‘2+2’의 그림을 말했다. 한국 법원이 판결을 통한 해결만 고집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삼권 분립을 방패삼아 이 문제를 방치해온 한국 정부의 잘못이 적지 않다”며 일본이 요구하는 외교적 협의에 당당히 응할 것을 요청했다.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부교수는 한 걸음 나아가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보상해줘야 하는 이유를 특유의 논리로 주장했다. “대법원 판결은 대한민국이 1948년 신생국가로 건국됐다는 ‘단절론’이 아니라 1920년 이후 정부를 가졌고 조선인들은 대한민국 국민이었다는 입장에 기반한다. 그렇다면 임시정부하에서 발생한 국민 손해를 배상할 책임의 일부는 우리 정부가 갖게 된다.” 이원덕 교수는 또 다른 선택지로 국제사법재판소(ICJ)를 들고 있다. 한일 양국 최고사법기관이 정반대 판결을 내렸으니 “전쟁을 하지 않는 한 평화적 해결은 제3자에게 가져가는 것”이라는 얘기다. 그는 ICJ에 갈 경우 한국 일본 모두 부분승소, 부분패소가 될 가능성이 커 재판 과정에서 타협이 이뤄질 가능성도 작지 않다고 본다. 익명을 요구한 한 현직 판사는 역설적으로 우리 대법원 판결을 존중하기 위해서라도 ICJ에 가져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대법원 판결이 국제적 조롱거리가 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강제징용은 국제적 강행규범을 위반한 사안이므로 ICJ에서 그 타당성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국가가 개인 청구권을 대신 소멸시킬 수는 없다.” 국제적 강행규범은 노예제 금지, 고문 금지처럼 모든 나라를 구속하는 국제법상 최상위 규범을 말한다. 그는 나아가 현재 ICJ 판사들의 판결 성향이나 인적 구성을 볼 때도 한국에 불리하지 않은 싸움이라고 강조했다. ICJ는 지금까지 상당수 외교전문가가 기피해온 선택지다. 무엇보다 ‘패소 리스크’ 탓이 크다. 큰 소송에서 혹시라도 패소하면 국내로 돌아와 입게 될 후폭풍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이는 독도 영유권에 대한 분쟁이 커질 경우에 대한 우려로 이어진다. 한번 ICJ로 가게 되면 일본 측이 독도 문제를 놓고 ICJ로 가자는 카드를 들고 나올 경우 피하기 어렵지 않으냐는 얘기다. 그러나 ICJ는 양국이 재판에 응하겠다고 해야 재판이 시작된다. 사안에 따라 응하느냐 마느냐는 우리가 정할 수 있다. 중재위나 ICJ를 옹호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시간 벌기’를 의식하는 입장도 적지 않다. 지금의 한일 간 정면충돌을 불사하는 대립을 멈추고 냉각기를 가진 뒤 화해의 길을 찾자는 의도가 깔려 있다. 한일 간의 1965년 체제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주장도 등장한다. 한일 관계는 제대로 된 과거사 정리, 화해 없이 출발했고 냉전구조 아래 안보와 경제 두 측면에서 묶여 있었으나 더 이상 이 같은 구조가 유지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우린 어디까지 준비가 돼 있는 걸까.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2019-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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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생 감소 시대의 교사[횡설수설/서영아]

    올 3월, 서울 송파구의 재건축단지 헬리오시티에 초·중 통합학교를 표방한 해누리초·중이음학교가 문을 열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육과정을 연계한 학교로는 서울 최초다. 5층 건물을 초·중 9개 학년이 함께 사용하고 교장도 1명이다. 지난달 20일 뒤늦게 열린 개교 기념식에서는 중학생들이 연주하고 초등학생들이 교가를 불렀다. 아직 코흘리개인 초등 1학년생부터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낼 중학교 3학년생까지가 같은 울타리 안에서 생활한다니,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심히 궁금해지기도 한다. ▷서울을 제외한 지방에선 이미 99개의 통합운영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초-중, 중-고, 초-중-고처럼 급이 다른 학교를 통합해 학교 시설과 행정 인력 및 교사 등을 공유한다. 대부분 학생 수가 적어 초중고를 따로 짓기 힘든 농어촌이나 지방 구도심 지역에 자리 잡았다. 저출산에 따른 구조조정 결과다. 서울의 해누리초중학교는 초등학교 25학급과 중학교 22학급, 특수학급 2학급 등 49학급 규모니 다른 지역처럼 학생이 아주 적은 건 아니다. 다만 서울시는 재건축이나 재개발로 새 학교가 필요한 지역이라 해도 앞으로 학령인구가 줄어들 것을 감안해 가급적 통합학교 형태로 짓기로 했다. 실제로 해누리초중학교의 경우 학교 부지 비용을 각 100억 원 정도 절약했고 조리종사원, 시설관리직 등 행정인력을 공유하면서 연간 최소 10억 원의 인건비를 절약할 수 있다. ▷아이들이 줄어든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한국의 미래다. 3월 통계청이 발표한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2017년 272만 명이던 초등학생은 2030년이면 180만 명으로 약 33.8% 줄어든다. 같은 기간 22.3명인 초등학교 학급당 학생 수는 12.9명까지 떨어진다는 예측도 있다. 교사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인구구조 변화에 따라 교원 운영 방식에도 지각변동이 불가피할 것이다. ▷교육부는 올 하반기부터 이에 대한 본격 연구에 들어간다. 초등학교 교사와 중고교 교사가 서로 바꿔가며 수업을 담당하거나 교사들이 여러 과목을 가르칠 수 있게 하는 등 교사 간의 ‘벽’을 허무는 데 주안점이 주어진다. 이를 위해 교육대학과 사범대학을 통합하고, 현재 4년 학제인 교원 양성 체제를 5∼6년으로 개편해 초중등교사 자격증을 모두 따게 하는 방안 등이 검토된다고 한다. 교사와 임용 준비생들의 반발도 예상되지만 교사와 학생, 사회 모두가 윈윈하는 방안을 기대해 본다. 지난해 신규 임용된 서울 초등학교 교사 344명 중 285명이 발령 대기 중인 현실이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2019-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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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금안 보완해 정치적 타결을” “ICJ 사법적 해결도 대비”[논설위원 파워 인터뷰]

    《일본의 대한(對韓) 수출 규제 발동으로 한일관계는 최악으로 곤두박질쳤다. 현재 한일 간 최대 쟁점은 지난해 10월 30일 우리 대법원이 내린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에 따른 갈등이다. 판결은 일본 측의 거센 반발을 샀고 이후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 같은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외교가에서 논의되는 해법은 크게 3가지다. 첫째 (전략적) 방치, 둘째 기금조성안, 셋째 사법적 해결이다. 지난 8개월간 우리 정부는 ‘방치’ 전략을 썼지만 그 결과 한일관계는 최악의 나락으로 빠졌다. 기금조성안은 지난달 19일 우리 정부가 일본에 제시한 안이다. 양국의 유관기업이 참여하는 것으로 돼 있다. 사법적 해결은 중재위, 나아가 국제사법재판소(ICJ)를 통한 분쟁 해결 방법을 가리킨다. 당장 우리 정부는 일본 정부가 제안한 제3국을 통한 중재위 설치 요청에 18일까지 답변해야 한다. 기금안과 사법적 해결에 각기 무게중심을 둔 지일파 학자들에게 해법을 들어봤다. 두 사람 모두 가능하다면 기금을 중심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입장이 같았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2012년과 2016년 대선 때 문재인 캠프에 힘을 보탠 지일파 학자. 그는 우리 정부가 6월 19일 제시한 ‘한일 유관기업에 의한 징용기금’안을 보완하는 게 최우선이라고 주장한다. ―기금 조성안은 정치적 타협을 우선하는 것인가. “우리 정부의 이번 제안은 삼권분립을 전제로 사법부 판결을 존중하되 ‘일본기업의 자발적 기금 참가’라는 언질을 둬 일본 측이 타협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에게 위자료 해당액을 지급하고 당사자 간 화해를 추진하자는 것이다.” ―일본은 즉각 거부했다. “일본 정부가 거부한 이유는 일본 기업이 한국 징용 피해자에게 위자료를 지급한 전례가 만들어지면 향후 북-일 수교 때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한국 정부가 8개월 만에 처음 내놓은 안이 피해 당사자와 대화가 충분하재판 기간 피해자에 너무 길어지 않았던 점도 진정성을 의심케 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합의하에 어렵사리 설치된 화해치유재단은 피해자와 합의가 없었다는 등의 이유로 해산에 이르지 않았나. 일본 정부로서는 그 전철을 되밟을 이유는 없다고 봤을 거다.” ―일본이 추진 중인 중재위안은 어찌 보나. “정치적 타협이 불발로 끝날 경우 중재위는 물론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져가는 것도 배제할 수 없다. 중재위는 우선 제3국 위원 임명, 중재대상과 시기, 방법 등에 대해 한일 양국이 합의해양국 정상 만나 돌파구 마련을야 하는데 첫걸음부터 장벽에 부닥칠 거다. 가령 1965년 청구권 협정에서 한일 양국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의 불법 여부에 대해 합의를 보지 못했다. 지난해 10월 대법원 판결은 강제병합을 불법으로 인정한 반면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 일관되게 국제법상 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재위는 상호 간 의견 차를 해소하지 못해 시작부터 결렬될 가능성이 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어떤가. “우선 피해자들에게 너무 잔인하다. 최소 3년 이상 걸리는데 대부분 90대인 생존자에게 시간이 남아 있을까(생존자는 지난해 2월 기준 약 5200명). 재판 과정에 한일 간 신경전이 증폭돼 외교적 소모전이 될 공산도 크다. 여기에 만에 하나 패소할 경우 치명적이다. 국내에서 정치적 역풍을 피하기 어렵다. 어떤 결과가 나오건 양국 국민에게 큰 후유증을 남길 것이다.” ―기금조성은 해법이 될 수 있나. “화해치유재단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도 6·19 제안을 보완하고 구체화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한국 정부는 포스코 등 청구권 자금의 수혜기업인 16개사와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전체 모금 금액과 배분방식, 재단 운영체제 등에 대해 정부와 기업 간 소통이 필요하다. 피해자와 지원단체, 전문가들과 만나고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도 설득해야 한다. 이 밖에 피해자의 범위와 시효를 정하고 개인보상은 이번으로 최종 종료된다는 것, 노무현 정부 당시 보상을 받은 사람들과의 형평성 문제 등을 국내 입법을 통해 한국 측이 종결시킨다는 점 등도 약속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일본 측이 받아들일까. “한국 측의 적극적인 해법을 일본 측에 설명하고 이를 승인하는 절차로 한일 정상회담을 개최해야 한다. 무엇보다 청와대가 적극적으로 양국관계 개선 의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 한중일 정상회담이나 별도 한미일 정상회담, 한일 셔틀회담 형태도 좋다. 강제동원 해법을 바탕으로 양국관계를 개선하고 한반도 비핵화 등에서 한일협력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내야 한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 지금까지 한국에서 중재위나 국제사법재판소 안은 아예 논외로 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이 추진하는 안이라는 경계심이 강했고 패소의 리스크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원덕 교수는 소수의견이지만 꾸준히 검토할 필요성을 말해왔다. 양국이 정면 충돌을 피할 수 있는 데다 상반된 양국의 입장에 대해 객관적 시선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금안이 해법이 안 되는 이유는…. “기금 조성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지금 상태로는 일본이 받양국 최고법원 판결 엇갈려아들일 가능성이 거의 없다. 인원 규모와 법적 시효를 확정하고 형평성을 담보할 수 있을까가 관건이다. 우선 배상받을 수 있는 대상이 어디까지인지 명확하지 않다. 현재 법원에서 14건, 900여 명의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2007년 노무현 정권에서는 7만2000여 명이 피해자지원법에 따라 금전적 보상을 받았다. 행정안전부 통계로는 약 21만 명의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가 존재한다. 어디까지를 범위로 할 것인가. 기금이 마련돼 소송에 의한 보상이 시작되면 자칫 소송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 가령 지난해 10월 대법원 판결을 받은 이춘식 할아버지의 경우 2012년부터의 지연금까지 더해 2억 원이 넘는 액수를 받게 돼 있다. 반면 2007년 피해자들은 최고 2000만 원씩 받았다. 후손들이 ‘왜 우리 할아버지는 2000만 원이고 저 할아버지는 2억 원인가. 부당하다’며 소송을 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변호사들까지 중간에 껴 엄청난 소송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현실을 뻔히 아는 일본 정부나 기업이 기금 출연에 협력할 가능성은 없다.” ―일본이 한일 청구권협정 제3조에 의거한 중재위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양국이 3인의 중재위원 구성에 합의할 수 있을까. 혹 중재위원회가 최종 결론을 낸다 해도 한일 양국민이 승복할까도 문제다. 그보다는 국제사법재판소 공동제소에 의한 해결이 가장 현실적이다. 최종 판결까지 3∼4년간 시간을 버니 그동안 양국 간 마찰을 유보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양국이 합의제3자의 판단이 평화적 방법하면 법적 강제집행을 보류하거나 정부의 배상금 대집행도 가능해진다. 한국과 일본 최고법원의 판결이 정반대이니 제3자의 판단을 받아보는 것은 평화적 분쟁해결 방식이 된다. 재판 과정에서 화해에 의해 해결책을 도출할 수도 있다.” ―한국이 국제사법재판소를 피하려는 이유는 혹시 모를 ‘패소’ 가능성 때문인데…. “결과를 봐야 하겠지만 한국 일본 모두 부분승소, 부분패소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더욱 재판 과정에서 양국 간 타협이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세계사에 남는 재판이 될 수도 있다. 논점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국가와 개인의 문제, 즉 한일 협정에 의해 개인 청구권이 소멸됐는가 여부다. 이건 한국이 이긴다. 둘째, 식민지배는 불법인가. 배상의무가 있는가. 이건 한국이 질 수도 있다. 국제사회의 규범은 신생국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선언적으로 식민지배의 불법성은 인정하더라도 배상은 하지 않는다. 셋째, 1인당 1억 원대 배상금은 적절한가. 독일이 폴란드에 배상할 때도, 일본 기업들이 중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할 때도 대개 2000만 원 안쪽이다. 2007년 강제징용 피해 사망자도 2000만 원, 5·18 사망자 배상금이 4000만 원 선이었다. 이 문제가 어떻게 결론 날지는 잘 모르겠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2019-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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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쿠르트 아줌마’의 추억[횡설수설/서영아]

    4월 영국 BBC 아시아판은 방문판매 중에 혼자 사는 할머니를 찾아가 유제품을 건네주고 잠시 말벗도 해드리는 16년 차 야쿠르트 아줌마 한영희 씨의 활동을 소개했다. 방송에서 81세 차미자 할머니는 “하루 종일 말 한마디 못하는데, 이분이 오면 말동무도 해주고…”라며 고마움을 감추지 못했다. 야쿠르트 아줌마들의 홀몸노인 돌봄 활동은 1994년 서울 광진구에서 시작해 지금은 전국 617개 지자체와 연계해 3만여 명을 돌보는 규모로 커졌다. 주 5회, 노인들의 안부를 살피고 뭔가 걱정스러우면 행정기관에 연락해 고독사 예방에도 힘을 보탠다. 홀로 쓰러져 있던 홀몸노인의 생명을 구한 일도 비일비재하다. ▷노란 옷에 챙 모자, 가방을 메고 이 집 저 집을 오가는 야쿠르트 아줌마는 대한민국 주부 일자리의 원조였다. 1971년 47명으로 시작해 1998년엔 1만 명으로 불어났다. 지금도 1만1000여 명이 일한다. 개인사업자 형태지만 수입이 안정적이고 근무시간이 짧아 예나 지금이나 주부들에게 인기다. 그동안 가방은 카트로, 다시 냉장설비가 갖춰진 전동카트로 진화했다. 아줌마들의 역할도 시대 변천에 따라 달라졌다. 바야흐로 고령사회, 홀몸노인의 안부를 살피고 돕는 일은 동네 구석구석을 누비며 ‘정보통’ 노릇을 하는 이들에게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다. ▷이 든든한 조직을 만들고 키워온 윤덕병 한국야쿠르트 회장이 26일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90세를 넘기고도 매일 출근했다고 하니 1969년 창업 이래 만 50년간 현역으로 뛴 셈이다. 요즘이야 유산균 식품을 건강과 장수를 부르는 슈퍼 푸드라고 알아주지만, 창업 당시만 해도 “균을 돈 주고 사서 먹느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불모지였다. 창업이념 자체가 ‘건강사회 건설’이었던 만큼, 고인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데 평생 힘을 쏟았다. 1975년부터 사내에 불우이웃돕기 조직을 만들었고, 전국학생과학발명품경진대회, 전국어린이건강글짓기대회 등을 뚝심 있게 지원했다. ▷첨단 정보기술(IT) 자동화 시대에 사람이 유제품 한 병 한 병을 집집이 배달하는 조직이 건재하다는 사실 자체가 어찌 보면 놀랍기도 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사람 사이 따스함을 확인하고 정을 나누는 일은 사람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 아닐까. 한국야쿠르트는 3월 창립 50주년을 맞아 ‘야쿠르트 아줌마’란 호칭을 ‘프레시 매니저(fresh manager)’로 바꾸었다. 현장, 특히 노인들 사이에선 여전히 ‘야쿠르트 아줌마’가 우세하겠지만, 이 호칭도 언젠가는 추억이 될 것이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2019-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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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문과 놀자!/주니어를 위한 칼럼 따라잡기]탈(脫)플라스틱

    캐나다 정부가 2021년부터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을 금지한다고 발표한 12일, 온라인에서는 특이한 비닐봉지가 화제를 모았다. 캐나다 토론토의 한 마트가 도입한 일회용 봉투 겉면에는 ㉠‘대장(大腸) 청소회사’ ‘사마귀 연고 도매상’ ‘성인 비디오 천국’ 같은 문구가 대문짝만하게 찍혔다. 창피를 면하고 싶으면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라는 권고다. ‘20세기 인류 최고의 발명품’으로 불리던 플라스틱이 요즘 천덕꾸러기 신세다. 포장지를 사용하지 않는 매장이 늘면서 소비자들은 집에서 가져온 빈 병이나 빈 통에 물건을 담아 계산대로 가져간다. 매장 한쪽에는 ‘포장지는 쓰레기’라는 문구가 붙었다. 석유에서 뽑아내 대량 사용한 지 70여 년. 편하고 가성비 좋은 소재로 주목받던 플라스틱은 이제 생태계 파괴의 주범으로 떠올랐다. ‘생산에 5초, 쓰는 데 5분, 분해되는 데 500년 걸리는’ 특성 탓이다. 북태평양에서 발견된 폐플라스틱 더미로 이뤄진 섬, 인간이 버린 비닐봉지나 빨대 탓에 생명을 잃는 바다 생물의 모습이 충격을 던져줬다. 세계자연기금(WWF)은 한 사람이 일주일간 신용카드 한 장(5g) 분량의 미세 플라스틱을 섭취하고 있다는 무서운 지적을 내놓았다. 플라스틱 퇴출의 직접적인 ㉡방아쇠는 지난해 초 중국이 당겼다. 전 세계 폐플라스틱 산출량의 절반을 흡수해온 중국이 돌연 쓰레기 수입 중단을 선언한 것이다. 눈앞의 편리함만을 누리며 무심하게 쓰레기를 배출하던 세계인들이 풍요로운 소비와 그 대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 1초의 편리함을 위해 자원을 낭비하기보다는 불편함을 택하겠다는 사람이 늘었다. 글로벌리즘(세계화)에 지쳐 보호주의 색채가 강해지는 세계에서 쓰레기의 생산과 소비, 처리와 재활용은 가장 먼저 로컬시대(지역 중심 시대)로 돌아가고 있다. 싸고 편리하면서 환경 부작용을 걱정할 필요 없는 대체재 개발에 대한 기대도 커져 간다. 그런 신물질이 나오기 전까지는 플라스틱으로부터 지구를 구할 유일한 길은 사용량을 줄이는 것이다. 지속 가능한 지구를 위해 소비의 속도를 줄여야 하는 시대다.동아일보 6월 17일자 서영아 논설위원 칼럼 정리칼럼을 읽고 다음 문제를 풀어 보세요.1. 밑줄 친 ㉠은 행동경제학 이론인 ‘넛지(nudge·부드러운 개입으로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가 적용된 사례입니다. 다음 중 넛지의 예로 적절한 것으로 고르세요.① 길거리 휴지통을 골대 모양으로 디자인해 사람들이 휴지통에 쓰레기를 넣는 것에 흥미를 느끼게 만든다.② 장애인 주차 구역에 주차하는 비장애인에게 높은 벌금을 내게 한다.③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골목마다 2인 1조의 방범대가 주기적으로 순찰한다.2. 밑줄 친 ㉡에서 활용된 ‘방아쇠를 당기다’는 표현의 의미로 적절한 것을 고르세요. ① 강한 충격을 주다.② 무언가를 시작하다.③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다. 김재성 동아이지에듀 기자 kimjs6@donga.com}

    • 2019-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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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서영아]심수관의 恨

    “고향이, 고향이 그립소이다….” 1598년 정유재란으로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도공들은 살기 좋은 성내로 옮길 것이 허락되자 이런 말로 거절했다. 이들이 정착한 규슈 나에시로가와(현 미야마)는 언덕 너머로 한반도를 향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70여 명이 대대손손 한복을 입고 모국어를 사용하며 살았다. 당대의 지식인이자 작가인 시바 료타로가 소설 ‘고향을 어찌 잊으리’(1969년)에서 이런 모습을 그려냈다. 16일 향년 93세로 별세한 심수관 옹은 이때 정착한 심당길의 14대손이다. ▷2년 전 찾아본 그는 가업을 15대에게 물려주고 애견과 함께 한가롭게 집과 요(窯)를 오갔다. 명문대를 나온 그도, 아버지 13대도, 또 그 아버지인 12대도 궁극의 목표는 가업 계승이었다. 혈기왕성한 소년 시절 14대가 “사관학교에 가겠다”고 하자 13대는 마당의 나무들을 가리켰다. “저들은 스스로 원해 여기 심겨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심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노력한다. 우리도 저 나무와 같다.” 14대는 1998년 동아일보 일민미술관에서 심수관가(家) ‘400년 만의 귀향전’을 열었고 고향인 전북 남원에서 불씨를 채취해 미야마에 옮겼다. 아버지 13대의 유언을 34년 만에 이뤄낸 거였다. ▷조선의 도예가 일본에서 꽃핀 이유로 14대는 ‘다도(茶道)’의 존재를 들었다. 조선의 다완은 일본의 성(城) 하나와 바꿀 정도로 귀하게 여겨졌다. 임진왜란이 ‘도자기 전쟁’이라 불린 이유다. 조선이 천시했던 도공들을 일본은 사족(사무라이)으로 대우했고 이 장인들이 빚어낸 도예품은 서구사회에 일본 문화를 알리며 팔려나갔다. 이렇게 이뤄진 일본 근대화와 부의 축적이 제국주의로 이어진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가 1965년 첫 방한 때 서울대에서 한 강연 얘기가 새롭다. 당시 대학은 한일 수교 반대운동으로 들끓었다. 계란 맞을 각오로 말했다. “당신들이 36년의 한을 말한다면 나는 360년의 한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는 것 아닌가.” 강연장은 일순 고요해졌고 곧이어 눈물바다가 됐다고 한다. 그로부터 다시 50여 년, 과거사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더 쿨해져 있을까. ▷2년 전, 그는 말끝마다 “다시 한국에 가보고 싶다”며 눈을 가늘게 뜨다가도 “나이 때문에 어려울 것”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특히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청명한 날씨를 그리워했다. 지금쯤 ‘천 개의 바람’처럼 자유로워진 그의 혼백이 바다 건너 고향땅을 돌아보고 있기를 빌어본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2019-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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