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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 뒤면 국가대표 선수촌에 들어갑니다. 입촌 날짜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려요.” 휠체어에 앉은 장애인 양궁 국가대표 김범철 씨(53)가 컴파운드(양궁에 쓰이는 활의 종류)를 매만지며 웃었다. 그의 소속은 서울 금천구청이다. 하지만 운동을 전업으로 하는 실업팀 선수가 아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구청 민원여권과에서 민원인을 상대하는 현직 공무원이다. 그는 취미로 양궁을 시작한 지 13년 만인 지난해 말 국가대표가 됐다. 주중엔 일하고 주말에 활을 쏘며 실력을 키운 끝에 실업팀 선수들을 제치고 3위로 태극 마크를 달았다. 그는 다음 달 13일 선수촌에 입촌해 9월 베이징에서 열리는 장애인 양궁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한다. 컴파운드 활시위의 장력은 약 20kg. 훈련이 안 된 일반인은 쉽게 당길 수도 없다. 하지만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만 겨우 움직이는 그는 활 쏘는 자세를 보여 달라는 기자에게 익숙한 듯 ‘뿌드득’ 활시위를 당겨 보였다. “국가대표 선발전을 준비할 땐 하루에 12시간씩 활시위를 당겼어요. 운동 마치면 팔을 들기 어려울 정도로 어깨가 뻐근하죠.” 활시위 자국이 선명한 오른손 손가락을 역시 굳어 있는 왼손으로 매만지며 그가 말했다. 그는 가슴 아래가 마비된 중증 장애인이다. 움직일 수 있는 건 얼굴과 팔, 그리고 두 개의 손가락뿐이다. 날 때부터 몸이 불편하진 않았다. 운동을 즐길 만큼 건강했던 그는 17세이던 1981년의 여름, 몸의 자유를 잃었다. 뺑소니 교통사고였다. 동네를 걷다가 눈을 한 번 깜빡였는데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 1주일 만에 눈을 떴다고 했다.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몸을 살피니 별 상처도 없어 보였다. 그저 가슴 아래가 뻐근할 뿐이었다. “목 신경을 다쳤어요. 처음엔 아무렇지도 않았죠. 한 달 지나면 다시 걷고 뛸 수 있겠다 싶었거든요. 하지만 몸이 좀처럼 낫질 않고 설상가상 뺑소니 범인을 못 잡으며 병원비로 재산을 모두 썼죠. 사고 당하고 5년 뒤 화병으로 부모님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상상조차 못했던 비극이 연달아 덮쳐 오자 그는 집에 스스로를 가뒀다. 9년간 단 한 차례도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 서른이 가까워오고 나서야 ‘먹고살 길을 찾아야겠다’ 싶었다. 1993년 그는 장애인 특채로 서울시 공무원이 됐다. 직업을 갖고 사람을 만나며 그는 조금씩 활기를 찾아 갔다. 어릴 때 좋아하던 운동도 계속 해 보기로 했다. 적은 움직임으로 개인 기록에 도전할 수 있는 스포츠, 양궁을 만났다. 수원양궁장에서 취미 삼아 활을 쏘던 그는 점점 실력이 붙는 걸 느끼자 대회에 도전했다. 2014년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땄다. 올해엔 국가대표가 돼 양궁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코치, 감독의 지도를 받게 됐다. 그는 “체계적인 훈련이 처음이라 실력이 더 좋아질 것으로 기대한다”며 “더 연습해 비장애인 선수보다 더 훌륭한 기록을 세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장애인이 집 밖으로 나와 ‘나와의 싸움’에 도전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몸이 불편한 장애인은 하루를 살아 내는 자체가 힘겨운 과제라 그 이상의 도전엔 소극적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장애인들은 딱히 꿈이라고 부를 만한 게 없어요. 그냥 집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집 밖으로 나와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찾아 매일 조금씩 해야 합니다. 그러면 꿈이 생기고, 그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기쁨이 생기거든요. 전 지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매일이 기쁩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또 이나영이야?” 지난해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촉발된 남혐여혐(남성혐오, 여성혐오) 논쟁 이후 여성 문제를 다룬 기사에 종종 달리는 댓글이다. 배우 ‘이나영’이 아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49·사진)다. 그는 강남역 살인사건부터 이어진 수많은 여성 관련 이슈에서 여성을 사회적 피해자로 규정해 남성들 사이에서 역차별 논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논란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 같은 남혐·여혐 논란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여성학자로서 그의 주 연구 과제는 ‘일본군 위안부’다. 최근 미국에서 출간된 ‘세컨드웨이브 페미니즘’에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글을 실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가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미국 메릴랜드대에서 여성학 석·박사 과정을 밟던 2003년. 당시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한국의 성매매 산업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며 한국으로 현장 조사를 나왔다. 그때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당시 사무처장)를 만났다. “윤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한국의 위안부 활동가들이 얼마나 힘든 길을 가고 있는지 알게 됐죠. 당시만 해도 답이 나올지 말지 모르는 싸움이었거든요. 대낮에 사무실에서 둘이 이야기 나누다 울었죠.” 사실 그는 1980년대 운동권과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 그를 열혈 여성운동가의 길로 접어들게 만든 건 뜻밖에도 이른 나이에 한 결혼이었다. “공부를 곧잘 해 여중, 여고, 대학까지 여성으로서 차별받은 적도, 불편한 적도 없었어요. 그런데 24세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니 정체성이 사라지더라고요. 누구 엄마, 몇 호 아줌마로 불렸죠. 이나영이란 사람은 사라지고 이름 없는 여성만 남더라고요.” 그때 그는 지인으로부터 ‘여성학’의 존재를 들었다. 이미 많은 여성이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고 답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두 아이의 엄마로 부산여대에서 여성학 석사를, 메릴랜드대에서 여성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지금까지 위안부와 관련한 연구와 강의를 지속해왔다. “현재의 성매매 문화는 식민지 시기 공창제도가 시작이었고, 군사독재 시대를 거치며 여성을 값싼 노동력으로 여기는 시각이 일반화됐어요. 임금 격차, 유리천장, 성폭력 등 대부분의 여성 문제가 근현대사를 거치며 쌓여온 적폐죠. 역사의 매듭을 풀지 않고선 성평등 논의 자체가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건강한 페미니즘은 남성 해방운동으로 이어진다는 점도 강조했다. “세상은 절대적 강자 몇몇을 제외하곤 모두 약자입니다. 남성과 여성이 함께 손잡고 싸워 나가야 할 분야가 많은데 여성을 상대적 약자로 만들면 그만큼 남자가 힘든 거예요. 남자가 진 짐을 같이 나누고 함께 살아가자는 것, 그게 제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입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사장님 장사 잘되시죠?” “지난주까진 좋았는데 요즘 광어 가격이 많이 올라서 영 별로야.” 서울 노량진수산시장을 누비며 상인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김용완 씨(36)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머리를 박박 밀고 티셔츠엔 자신의 얼굴을 큼지막하게 새겨 놓았다. 외모와 달리(?) 그의 말투는 순박하고 구수했다. 상인들은 그가 익숙한 듯 스스럼없이 매출 전표를 보여 주며 시장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노량진 수산시장과 가락시장 등 주요 수산물 시장의 당일 시세 정보를 알려주는 ‘인어교주해적단’의 창업자다. 정찰제를 시행하지 않는 전통시장의 가격을 블로그와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공개하는 사이트다. 독특한 회사 이름은 바다를 연상케 하는 단어들을 무작위로 붙여 지었다. 전국 70여 개 전통시장 300여 점포와 제휴하고 있으며 하루 약 2만 명의 소비자가 인어교주해적단을 이용한다. 그가 인어교주해적단을 연 건 2013년. 서강대 중국어과를 졸업한 뒤 증권 트레이더와 학원 강사로 일하던 그는 ‘내 일’을 해보잔 생각에 친구인 윤기홍 씨와 함께 창업에 나섰다. 아이템은 수산물이었다. 하지만 막상 사업에 뛰어드니 무엇을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막막했다. 매일 노량진 수산시장을 몇 바퀴씩 돌며 분위기를 익히는 게 일과였다. 그때 그의 눈에 수산시장 특유의 ‘깜깜이 영업’이 눈에 띄었다. “수산시장은 상인과 고객 사이에 정보 격차가 굉장히 큽니다. 생선의 종류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는데 이 생선의 가격이 적정한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바가지요금이어도 상인들의 말만 믿고 살 수밖에 없는 거죠.” 당시 노량진수산시장은 지나친 호객행위와 바가지요금으로 젊은 소비자의 발길이 뚝 끊겨 영업에 어려움을 겪던 때였다. 그는 매일 발로 뛰며 정확한 시세를 확인해 공개하면 소비자와 상인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시작은 쉽지 않았다. 상인들은 정확한 시세를 알려주면 인터넷에 매장을 홍보해 주겠다는 그를 사기꾼 보듯 했다. 시세보다 부풀린 가격을 일러 주는 상인도 있었다. 공부하지 않고선 상인들을 제압할 수 없었다. 그는 전국의 수산시장과 양식장을 돌며 수산업 관계자들과 친분을 쌓았다. 새벽 경매에도 꼬박꼬박 참여해 시세에 대한 감을 익혔다. 초기 1년은 무료로 매장을 홍보했다. 2년 전부턴 상인들이 “덕분에 매출이 2, 3배 늘었다”며 자발적으로 수고비를 챙겨 주기 시작하며 얼떨결에 유료화가 됐다. 제휴를 원하는 업체가 노량진에만 10여 곳이 더 있어 매장을 늘리면 수익이 늘어나지만 그는 당분간 제휴 매장을 늘릴 계획이 없다고 했다. 직원들이 오전마다 일일이 매장별 시세와 품질을 확인하는 방식이라 자칫 규모를 키웠다가 소비자와 상인들의 신뢰를 잃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인어교주해적단을 이용하지 않는 소비자들이 수산시장에서 좋은 수산물을 합리적인 가격에 구입하려면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할까. “다른 집보다 유달리 가격을 싸게 부르는 집은 경계하셔야 해요. 싸게 부른 다음 저울 장난으로 1∼2kg 무게를 더해 비싸게 파는 집이 아직 있습니다. 자연산이라며 수조에서 꺼내 보여 주는 것도 사지 마세요. 자연산은 수조 밖에서 금방 죽기 때문에 물 밖으로 꺼내 보여주는 상인들은 없거든요. 바구니에 양식 생선 담아 보여 줄 때 뻐끔거리는 거 불쌍하다고 억지로 안 사셔도 돼요. 숭어 같은 애들은 맨바닥에 둬도 한 시간씩 살아 있습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심판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탄핵 태풍이 몰아치면서 국정 운영 곳곳에서 비상등이 켜지고 있는 요즘이다. 동아일보 독자위원회는 20일 ‘대통령 탄핵 심판과 언론보도’를 주제로 토론했다.》 ―헌재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일이 임박하면서 탄핵 찬성 세력과 반대 세력 간에 첨예한 갈등이 불거지고 있습니다. 정치권에서 갈등을 부추기는 모습도 보입니다. 헌재가 어떤 결론을 내리더라도 후유증이 클 것이란 우려가 나옵니다. 탄핵과 관련해 동아일보가 언론 고유의 본분을 다했는지, 경쟁지와 비교해서 보도 내용은 어땠는지 짚어 보겠습니다. 이진강 위원장=국회의 탄핵 의결 이전에는 동아일보가 주도적으로 나서 나라를 정상화하기 위해선 탄핵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탄핵 절차가 진행되면서 어떤 보도가 나왔는지 살펴보고, 앞으로 바람직한 보도는 어떠해야 하는지 논의해 보겠습니다. 편집국의 보도 방향은 어떠했습니까. 김광현 위원=탄핵과 관련해 본보는 ‘법치’를 견지했습니다. 최근 게재한 ‘촛불 이후의 한국 사회를 말한다’ 시리즈도 처음부터 법치주의를 따라야 한다고 제시했습니다. 집회 관련 보도에 불만의 목소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현장 기자의 시각에서 있는 그대로 보도하는 게 원칙이었습니다. 초기엔 촛불집회 참가자가 많았기 때문에 그대로 보도했고, 최근 보수집회 참가자가 느는 현상에 대해서도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 위원장=당초에 헌법 질서에 따라 ‘탄핵이 길이다’라고 했던 동아일보가 탄핵 의결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독자와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고 객관적으로 보도했는지를 살펴 볼 때 약간 소극적이었고 뭔가 맥을 잘못 잡았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조화순 위원=탄핵 관련 기사를 경쟁지와 비교해 볼 때, 동아는 인용구를 헤드라인으로 잡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 특징입니다. 대통령 변호인이 한 말이라든가, 집회를 주관하는 측에서 나온 얘기를 키워드로 잡아 그날그날의 현상을 전했다고 봅니다. 촛불 이후의 한국 사회를 어떻게 이끌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기획기사는 법치주의에 기반을 둔 정치질서를 조망한 것으로 봅니다. 아쉬웠던 점은, 탄핵 관련 내용을 독자가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칼럼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신용묵 위원=생활 정치가 화두가 된 상황에서 탄핵과 관련해 국민 생활에 밀접한, 탄핵 선고일이라든지 대선일 정보를 소개한 건 돋보였습니다. 하지만 질서 있는 탄핵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밀 취재는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시작할 때 헌법과 법 원칙에 따라 했듯이, 탄핵도 질서 있게 진행되는 게 좋았을 텐데 탄핵 과정의 단점이 지나치게 부각된 느낌입니다. 기사도 가급적이면 원칙과 개념에 충실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재용 구속과 관련해 2월 18일자 1면에서 ‘뇌물죄 한발 더 간 특검’이라고 제목을 뽑았는데, 꼭 뇌물공여죄 혐의를 인정해서 구속한 것이 아닐 수도 있을 텐데, 더 객관적인 용어와 기사 작성이 아쉬웠습니다. 안민호 위원=최근 탄핵 과정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기획 기사 중 2월 7일자 ‘촛불에 반대하는 노년층 불만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는 인터뷰 내용은 언론이 놓치고 있는 문제를 조목조목 지적했습니다.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 간의 간극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단순히 탄핵 문제를 넘어서 한국 사회가 해결하고 관심 둬야 할 문제로 적절히 다뤘다고 생각합니다. 아쉬운 건 시리즈를 담아내는 형식이 각기 달랐다는 것입니다. 분량도 일정치 않았습니다. 상품 가치를 높이려면 규격과 분량을 맞추고 관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획 기사에 나온 외부 필진 견해를 이후 지면 제작에 반영하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 강무성 위원=헌재에서 탄핵이 인용되면 조기 대선이 치러지는데, 차기 대통령이 누구냐에 관심이 쏠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최근 동아에 실린 칼럼과 사설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선주자에 따라 호불호에서 다소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조 위원=전에는 보수신문, 진보신문의 구분이 잘 됐는데 요즘은 뚜렷하지 않아 헷갈리는 독자들도 있을 겁니다. 언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게 결과적으로 확고한 독자층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촛불 이후 한국 사회를 말한다’ 시리즈에서 아쉬웠던 것은 뭉뚱그려서 이런 방향으로 가자고 제시한 점입니다. 독자들은 그 다음 단계의 구체적인 대안을 원합니다. 이 위원장=탄핵 절차는 의회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뿌리 내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정치인, 국민, 언론이 이런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탄핵이 의결된 후, 국회는 한국 정치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방향 제시를 했어야 합니다. 언론도 짚어줬어야 했습니다. 국회가 탄핵을 던져 놓고 사실상 아무것도 안 한 것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다른 나라는 의회에서 한번 의결하면 끝나지만, 왜 우리는 정치적 색채와 법률적 의미를 가진 두 가지 탄핵 절차를 활용하고 있는지 언론에서 잘 다루지 않았습니다. 정치 상황에 매몰됐기 때문입니다. 국회에서 탄핵소추 의결은 됐지만 탄핵 재판 결과는 해봐야 한다고 절차와 의미를 제대로 알려주고, 국민이 판단하게끔 해줬어야 합니다. 김 위원=특검과 탄핵 절차가 같이 진행되니까 헌재에서 진행되는 법리적 논쟁보다 특검에서 나오는 여러 혐의점이 독자의 시선과 흥미를 끄는 측면도 있습니다. 탄핵 절차, 청구인과 피청구인의 논리 등을 분석해 줘야 하는데, 특검에서 나오는 피의 사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건의 본질보다는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식의 보도가 있었다는 점을 반성합니다. 신 위원=정론지의 표현은 나라와 국민을 위한 것이 되어야지 흥미 위주로 흘러서는 안 됩니다. 헌재, 특검, 형사재판의 비중이 다른데 한꺼번에 섞여서 재미있는 것 위주로 기사가 나가는 현상이 아쉬웠습니다. 일부 방송과 인터넷 신문 등이 흥미 위주로 가는 건 이해가 되지만, 정론지만큼은 표현기관으로서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충실한 보도로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강 위원=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게 해야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동아의 최근 지면에서 헌재 심판을 여론 갖고 할 순 없지 않나 하는 내용이 가끔 나오는데, 맥락상에선 맞을 수 있겠지만 여론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순 없지 않습니까. 국민의 70∼80%가 탄핵 찬성이라는 여론조사도 있는데, 탄핵 관련 편집을 기계적 중립으로 대등하게 하면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이 위원장=선고가 얼마 남지 않은 헌재의 탄핵 심판과 관련해 동아가 앞으로 어디에 중점을 두어야 할까요. 안 위원=광장의 갈등을 정치권이나 제도권에서 해소하지 못해 나오는 문제가 적지 않은데, 언론도 책임이 있습니다. 광장의 목소리를 언론에서 녹여내고 조정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 위원=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법치에 기반을 둔 재판이 이뤄지도록 하는 데 보도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촛불이나 태극기 집회 참가자가 많기는 하지만 침묵하는 다수도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 위원=제목은 흥미 있게 뽑아놨는데 내용과 매치가 안 되고, 내용 자체도 부실한 기사가 종종 눈에 띕니다. 애매모호한 헤드라인도 적지 않습니다. 2월 13일자 ‘바른정당 끝장토론 국정농단 세력과 연대는 없다’도 그런 경우입니다. 독자로부터 외면받지 않도록 기사의 품질과 전문성, 경쟁지와의 차별성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 위원장=탄핵 재판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최종적인 준비서면, 최종 변론 등 당사자의 입장이 다 나올 것입니다. 이를 객관적으로 잘 분석해서 독자에게 전달하고 판단할 수 있게끔 해 주길 바랍니다. 탄핵 절차가 의회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을 해 한 단계 발전하는 나라로 갈 수 있도록 동아가 역할을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정리=김동원 daviskim@donga.com·송충현 기자}

10년간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보내온 작은 상자. 그 상자 안에는 각자 잘라 보내온 머리카락 한 줌씩이 들어있었다. 이 머리카락들이 소아암 환자를 위한 가발로 다시 태어났다. 독한 항암 치료로 머리카락이 모두 빠진 아이들은 가발을 쓰고 거울 앞에서 미소를 되찾았다. 가발 제작업체 ‘하이모’가 시민들의 머리카락을 기증받아 백혈병과 소아암 어린이를 위해 무료 가발을 만들어준 모발나눔 기증 캠페인이 올해로 10년째를 맞았다. 모발나눔 캠페인을 기획한 이는 창업주인 홍인표 회장의 차녀 홍정은 부사장(40). 2007년 기획팀 차장으로 일하며 “회사는 성장할수록 사회 환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이 아이디어를 냈다고 한다. 10년간 2만800여 명이 머리카락을 기증했고, 소아암 환자들을 위한 1173개의 가발이 만들어졌다. 하이모 고객 중 30%는 항암 치료 환자들이다. 어느 날 회사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우리 고모가 암에 걸렸는데 내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줄 수 있나요?” 당시 전화를 받았던 회사 직원은 정중히 “가발은 한 명의 머리카락으로 만들 수 없어 힘들다”고 말했지만 이후로도 암에 걸린 딸을 위해, 아버지를 위해 머리를 기부하고 싶다는 전화가 꾸준히 왔다. 홍 부사장은 이를 제대로 된 기부 캠페인으로 발전시키자고 직원들에게 제안했다. “가발은 엄청 특이한 아이템이에요. 사람에게 나는 재료로 만드는 유일한 물건이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기 신체의 일부를 잘라 기부하겠다는 마음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머리카락만 기증받고 제작비용은 우리가 지원해 무료 가발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가발을 받을 대상은 항암 환자 중에서도 특히 소아암 환자로 정했다. 그는 “아직 어려 자존감이 완성되지 않은 아이들은 항암 치료로 머리카락이 빠질 때 어른보다 더 충격을 받는다”며 “놀림을 받으면 성격마저 비뚤어질 수도 있어 조금이라도 빨리 가발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0년간 모발 기증 캠페인을 하다 보니 한국뿐 아니라 해외 어린이로 수혜 대상이 확대되고 있다. 2012년엔 전신 화상을 입고 한국으로 원정 치료를 하러 온 베트남 어린이에게 가발을 지원했다. 2013년엔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함께 요르단 여성들에게서 기증받은 모발로 2명의 요르단 소아암 환자를 위한 가발을 만들었다. 머리카락을 기증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머리를 자른 뒤 상자에 담아 우편을 통해 하이모 본사 ‘사랑의 모발나누기 담당자 앞’으로 보내면 된다. 하지만 기부로 들어오는 머리카락 전부가 가발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우선 길이가 25cm 이상이어야 한다. 그리고 자른 부분이 파마나 염색 상태가 아니어야 한다. 하지만 ‘좋은 마음’으로 보내다 보니 마음이 앞서 조건이 맞지 않더라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머리카락 한 줌을 보내는 이들이 상당수다. “6주의 제작 기간 동안 많은 머리카락이 그냥 버려지죠. 그래도 주시는 분들의 정성을 받는 거예요. 작은 기념이 될까 해서 기증서를 드리고 있습니다.” 홍 부사장은 이달부턴 본사와 지점이 함께하는 다른 기부 캠페인도 계획 중이다. 직원들이 특정 금액을 사랑의 열매에 기부하도록 하고 그 금액을 본사에서 지원하기로 했다. “한 번에 많은 돈을 모아 기부하는 게 능사는 아닌 것 같아요. 일상적으로 버는 돈의 일부를 꾸준히 기부하는 문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한국에서 ‘스노폴’ ‘파이어스톰’을 만든다고?” 지난해 2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인터랙티브 기획취재 지원 모집공고가 떴을 때 처음 든 생각이었다. ‘2013년 퓰리처상 기획보도’ 부문을 차지해 전 세계 언론에 엄청난 충격을 던진 뉴욕타임스(NYT)의 스노폴의 여파가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놀라움을 선사한 가디언의 ‘파이어스톰’ 속 화려한 영상들이 스쳤다. 각종 동영상과 인포그래픽이 넘실대며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줬던 그 기사, ‘읽지 않고 시청하는’ 기사의 신기원을 만들어낸 그 기사를 과연 한국 언론이 구현할 수 있을까. 게다가 우리가 그 일에 도전해야 한다고? 오 마이 갓! 그냥 지나치기에는 ‘최대 6000만 원’이라는 지원금의 유혹이 너무 컸다. 또 디지털 부서에서 일하는 이상 무슨 일이라도 시도해봐야 했다. 인터랙티브나 웹 언어를 모르고 개발자와 디자이너와의 협업 경험도 전혀 없는 평범한 신문기자들의 ‘삽질’은 이렇게 시작됐다. ○‘드론’을 선택한 이유 기획취재 주제는 ‘드론’으로 잡았다. 팀원 중 드론을 아는 기자는 아무도 없었다. 드론이 무엇이냐고 묻는 기자도 있었다. 그냥 정보기술(IT)과 관련이 많고 디지털 느낌이 물씬 난다는 막연한 이유에서 ‘드론’을 택했다. 누군가 말했다. “있어 보이잖아.” 서점으로 달려가 드론 관련 책들을 샀다. 책 몇 권 분량에 달하는 드론 관련 기사들도 찾았다. 책 몇 권과 기존 기사를 읽어보니 살짝 감이 오는 듯도 했지만 여전히 막막했다. 그냥 세계 유명 드론업체를 방문해 신문 기사를 쓰는 게 아니라 신문 기사도 쓰고 동시에 인터랙티브 웹페이지도 만들어야 한다니 두통이 몰려왔다. 취재 지원작으로 뽑힐 지 알 수 없으니 기획안이나 써보자는 심정으로 드론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중후장대’를 좋아하는 데스크의 성향을 반영해 프로젝트 제목도 ‘드론이 바꾸는 세상’이라고 거창하게 뽑았다. 10장에 달하는 기획안을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썼다. 고3 때 논술 시험을 이렇게 했으면 지금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론진흥재단에 지원서를 접수했다. 약 3주 후 “축하합니다”라는 회신이 왔다. 회사 통장에는 연봉에 맞먹는 거금까지 들어왔다. 이제 물러설 곳이 없었다. ‘스노폴’은 못 만들어도 화면에 눈송이 하나는 날려줘야 했다. ○섭외하는 데만 6개 월 공들여 2016년 3월부터 중국 DJI와 이항, 프랑스 패럿, 이스라엘 엘빗시스템과 IAI 등 세계 유명 드론업체에 취재 요청 메일을 보냈다. 이중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한 곳은 패럿. 세계에서 가장 먼저 가상현실(VR) 드론을 만든 패럿의 문을 여는 데 무려 6개월이 걸렸다. 한국 언론에 한 번도 프랑스 파리 본사를 공개하지 않았던 패럿은 이메일을 계속 무시했다. 본사 홍보 담당자 ‘바네사’에게만 20통이 넘는 이메일을 보냈다. 3개월 후에야 첫 답변이 왔다. “여름 휴가 때문에 힘들 것 같아.” 온갖 험한 욕이 튀어나오려 했다. 굴하지 않고 계속 메일을 보냈지만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같은 해 8월이 되니 중국, 미국, 이스라엘, 일본을 방문한 기자들이 속속 취재를 마쳤다. 유럽만 남은 상황에서 패럿만 기다릴 수 없었기에 ‘포기 아닌 포기’를 했다. 독일과 스위스의 VR 비행 및 드론 전문가와 취재 약속을 잡고 9월 말 유럽으로 떠났다. 열심히 취재를 마치고 귀국을 하루 앞둔 날. 독일 본의 아름다운 라인 강변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바네사가 메일을 보내왔다. “우리 지금 만나.” “진짜?” “응.” 즉시 서울행 비행기를 파리행으로 바꾸고 숙소와 통역을 구한답시고 난리를 쳤다.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바쁘다’는 말을 실감했다. 이런 소동을 겪은 끝에 2016년 10월 3일 파리 10구에 있는 패럿 본사에 당도했다. 본사 2층에서 VR드론 ‘디스코’를 직접 조종해본 경험은 기자 인생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이었다. 고글 하나를 쓰고 아이들 장난감 같은 드론을 잠시 조종했을 뿐인데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신’이 된 기분이었다. 이 외 ‘세계 최초의 드론 택시’를 발명한 슝이팡 이항 창업자(28), 한 대에 100억 원을 호가하는 고가 군사용 드론을 생산하는 이스라엘 업체들을 한국 언론 최초로 직접 취재한 것은 정말 값진 경험이었다. 각종 규제 등으로 중저가 드론 시장은 중국에, 고가 드론 시장은 미국과 이스라엘에 내주고 있는 한국의 현실이 안타까웠다. ○“우리 한국어로 대화하고 있죠?” 취재를 완료하고 인터랙티브 웹페이지 제작에 돌입했다. 기획자, 개발자, 디자이너 등 다양한 직군과 협업해야 했지만 제작 쪽 인력도 기자들도 같이 일해 본 경험이 전무했다. 약 10명의 인원이 모인 첫 회의 날. “저희도 인터랙티브는 잘 모르지만 NYT 스노폴 아시죠? 대충 그런 느낌 나게…” “페이지 넘어갈 때 스크롤 다운과 슬라이드 중 어떤 걸로 할까요? 인덱스 기능은? API 코드는?” “네? 뭐라고요?” 서로가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국어로 얘기하는데 이렇게 외계어처럼 들릴 수 있구나 싶었다. 개발자와 디자이너는 “어떻게 구현해 달라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고 가슴을 쳤고, 기자는 “태어나서 처음 이런 일을 해보는데 어쩌란 말이냐”고 한숨을 쉬었다. 원시 부족이 벽화 속 그림으로 대화하듯 떠듬떠듬 그림을 그려 “이렇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면서 어느 정도 서로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촉박한 일정, 부족한 인력과 자원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도 대충 감이 왔다. 기본 플랫폼은 집으로 말하면 일종의 ‘모듈 주택’인 제로보드를 택했다. 쉽고 빨리 각종 동영상과 콘텐츠를 얹을 수 있는데다 개발자나 디자이너의 손길이 많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취재 기자들이 세계 각국 드론업체에서 찍어온 사진과 동영상, 국내 드론 전문가들이 촬영한 드론 이미지와 동영상, 각종 드론 전문가들이 제작한 드론 관련 콘텐츠가 하나둘씩 쌓이며 서서히 인터랙티브 웹페이지의 위용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스노폴’과 ‘파이어스톰’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어디 내놓기 크게 부끄럽지 않은 수준은 된다는 확신이 섰다. 천신만고 끝에 역작(?)을 완성했지만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기사 게재 시작 및 인터랙티브 웹페이지 오픈이 한 달 넘게 미뤄졌다. 기다림 끝에 2016년 11월 25일 ‘드론이 바꾸는 세상()’을 세상으로 내보냈다. ○1년 간의 ‘삽질’이 준 교훈 부끄럽지만 디지털 부서에 오기 전에는 디지털 혁신에 관해 “기사를 빨리 써서 온라인으로 송고하고 사진과 표를 좀 많이 붙이면 되는 거 아니냐” “편집과 사진 촬영까지 취재 기자가 곧 하게 되겠네” 정도의 생각만 가지고 있었다. 업무를 시작한 후에는 “그래봐야 젊은 친구들이나 보는 스낵 컬처(snac culture) 아니냐. 깊이가 없다.” “디지털로 돈을 벌 수 있느냐”는 시선이 생각보다 널리 퍼져있음을 알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이처럼 디지털 콘텐츠 생산과 이를 통한 미디어 혁신에 대한 기자들의 생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 듯 하다. 권력 감시라는 저널리즘의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는 쪽, ‘종이’가 아니라 ‘모바일과 소셜미디어’라는 신생 플랫폼에 특화된 콘텐츠를 생산해야 한다는 쪽, 둘 다 맞지만 한 쪽으로만 치중하긴 어려우니 둘 다 잘해야 한다는 쪽. 세 가지 주장 모두 옳다. 또 일선 기자에게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결정권도 없다. 분명한 점은 세상이 변했고 사회와 독자는 언론인에게 점점 더 많은 역량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널리즘의 본질에 충실한 묵직한 기사도, 톡톡 튀는 감각으로 무장한 다양하고 차별화한 콘텐츠 모두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언론사도, 언론인 개개인도 살아남을 수 없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어디에 우선점을 두느냐는 논쟁은 이미 의미가 없어진 것 같다.‘드론이 바꾸는 세상’ 특별취재팀하종대·하정민·이영혜·송충현·권기범 기자}

사진관 스튜디오의 천장은 유리로 만들어져 고개를 들면 파란 하늘이 보였다. 겨울 오후의 자연광이 천장에서 커튼처럼 쏟아져 내렸다. 스튜디오엔 카메라 두 대와 조명, 앰프, 몇 개의 의자 그리고 거울이 햇볕을 맞고 있었다. 사진사는 말했다. “목요일엔 이곳에서 제가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사진사가 아니라면 사진관에서 누가 사진을 찍는다는 말일까. “손님이 직접 자신의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으로 자화상을 그립니다.” 사진 찍지 않는다는 사진사의 이름은 김현식(47). 서울 종로구 계동에 있는 물나무 사진관의 대표다. 그는 2015년부터 고객이 자신의 모습을 흑백사진으로 담는 ‘자화상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2년간 약 80명이 카메라 앞에 서서 홀로 셔터를 눌렀다. 사진사는 카메라를 남에게 쉽게 내주지 않는다. 그가 선뜻 카메라를 고객에게 내준 이유가 궁금했다. 김 대표는 2011년 양은냄비 공장 터였던 낡은 건물에 사진관을 차렸다. 흑백 인물사진만 찍는 사진관이다. 고객이 오면 아무런 장식도 없는 벽에 세워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는 보정 없이 인화해 줬다. 사진의 원형을 찾겠다는 고집에서였다. “서울예술대에서 사진을 전공한 뒤 패션지와 여성지에서 사진기자로 일했어요. 사진만 30년 가까이 찍었죠. 사진을 찍을수록 사진의 본질에 대해 고민이 들었습니다. 고민 끝에 지금을 있는 그대로 찍은 뒤 인화해 찍은 사람과 함께 나이 먹어가도록 만든 ‘물질’이 사진이라는 결론을 내렸죠.” 디지털로 변환돼 컴퓨터에 저장된 사진은 5년, 10년이 지나도 색이 바래지 않는다. 물질이 아니니 시간의 켜가 쌓이지 않는다. 시간이 지난 뒤 사진에 담긴 ‘현재’를 떠올리기 위해 그는 시간의 손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수작업으로 인화하는 흑백 은염사진(감광재료로 은을 사용한 사진)만을 찍는 이유다. 자화상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도 사진의 고유성을 살리려는 고민의 결과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진짜 모습을 사진으로 갖고 있지 않아요. 사진 찍어주는 사람 앞에서 억지로 웃거나 포즈를 취하며 부자연스러워집니다. 게다가 찍은 사진은 예쁘게 만들기 위해 보정하죠. 당장은 세련되고 예뻐 보일 수 있지만 10년 뒤 그 사진을 보며 당시의 진짜 내 모습을 떠올리긴 쉽지 않죠. 정제되지 않은 인물 사진을 찍고 싶었습니다.” 우선 사진사인 자신부터 스튜디오에서 빠지기로 했다. 그는 고객에게 누구의 아들과 딸, 어떤 직업인이 아닌 스스로를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모든 관계를 벗어던진 나 자신을 알고 있는지 질문한 뒤 카메라를 세팅하고 스튜디오를 떠난다. 이후의 시간은 고객의 몫이다. 스튜디오에 놓인 거울을 보며 10분이든 15분이든 혼자 사진사의 질문에 대한 답을 떠올려야 한다. 스튜디오의 앰프로 본인이 원하는 음악을 들어도 된다. 내가 누구인지 확신이 생기면 스스로 원격 셔터를 눌러 자신의 사진을 찍는다. 자화상이다. 물론 고객 대부분은 자화상을 촬영하는 과정을 생소해했다. 3분도 못 견디고 그에게 도움을 청한 사람도, 채 셔터를 누르지 못하고 카메라 앞에 앉아 펑펑 운 사람도 있었다. 그는 그 자체로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진은 기록입니다. 겉모습뿐 아니라 사진을 찍었던 환경, 분위기, 기억이 모두 담기죠. 이 스튜디오에서 찍은 자화상엔 진짜 나에 대해 홀로 고민한 기억이 담겨 있습니다. 꼭 사진관이 아니더라도 한 번 도전해 보세요. 조금 안 예쁘게 나와도 괜찮아요. 몇 년 뒤 진짜 내 모습이 담긴 사진은 이 한 장뿐일 테니까요.”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한옥은 밖에서 외관만 봐서는 진짜 매력을 알기 어렵습니다. 한옥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놀았는지 알아야 숨은 멋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서울지하철 충무로역 3, 4번 출구 샛길을 따라 조금 걸어 올라가면 한옥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공원이 나온다. 1998년 문을 연 남산골 한옥마을이다. 지역 주민들에겐 공원, 외국인 관광객들에겐 한옥 체험 공간으로 이용되는 이곳을 거대한 국악 공연장으로 꾸민 이가 있다. 천재현 남산골 한옥마을 예술감독(44)이다. 국악인이 한옥마을의 예술감독을 맡게 된 배경을 물었다. “관광객들은 보통 한옥마을에 가면 한옥을 배경으로 사진만 찍고 오잖아요. 한옥을 반만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조선시대만 해도 한옥은 친한 이들이 모여 시 읊고 악기 연주하던 장소예요. 특별한 공연장이 없으니 한옥의 방이 공연장이었죠. 이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는 우연히 국악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중3 때 아버지와 국립극장에 놀러간 것이 계기였다. 그의 아버지는 국립극장 옆 국립국악고를 가리키며 “저 학교 갈래?”라고 물었다. 역사와 국사를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던 그는 ‘국사나 국악이나 어차피 우리 것이니 적성에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덜컥 입학을 결정했다. 국악고에서 그가 택한 전공은 거문고. 고난의 학창시절이 시작됐다. 거문고는커녕 음악 자체를 배운 적 없던 그는 수업 진도를 따라가기조차 버거웠다. 부족한 실력에 대한 열등감은 제일 일찍 등교하고 제일 늦게 하교하는 걸로 달랬다. 학창시절 흘린 눈물과 땀은 서울대 국악과 합격이라는 결실로 돌아왔다. 그는 국악인들 사이에서도 국악의 전통성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인물로 알려져 있다. 2000년대 초반 국악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지며 퓨전 국악이 대안으로 떠오를 때에도 전통 국악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전통 국악의 명맥을 잇고자 하는 이들과 의기투합해 ‘정가악회’를 꾸려 대표를 맡았다. 2014년 남산골 한옥마을과 서울남산국악당을 위탁 운영할 곳을 찾던 서울시는 전통 국악에 대한 그의 애정을 높이 평가해 정가악회를 위탁 사업자로, 그를 예술감독으로 선정했다. 예술감독으로서 첫 번째 과제는 한옥마을을 찾는 이들이 한옥을 사진의 배경이 아닌 전통 문화 공간으로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전공을 살려 국악과 한옥을 접목했다. “서양 악기는 무대가 집, 전문 공연장으로 확장되며 그 모양이 점점 변했습니다. 반면 국악기는 예전에 한옥 방이 무대일 때랑 달라진 게 없어요. 그러니 큰 현대식 극장에서 국악기를 연주하면 어색하고 소리가 왜곡되죠. 국악을 100% 느끼려면 연주자와 관객 모두 조선시대처럼 한옥의 방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바람은 조금 더 많은 이가 한옥에서 듣는 국악의 즐거움을 아는 것이다. 연주자의 섬세한 손놀림과 숨결, 방에 앉은 관객들의 체온까지 고스란히 느껴지는 한옥 방에서 듣는 한국 전통음악의 맛과 멋을 전파하고 싶다고 강조했다.송충현기자 balgun@donga.com}

밤낮 없이 일했다. 회사가 주는 일을 완수하기 위해 젊음을 바쳤다. 반원익 중견기업연합회(중견련) 부회장(64)에게 회사는 ‘종교’이자 ‘모든 것’이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청년들에게 “회사에 몸 바치지 말라”고 말한다. 중년들에겐 “후배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말라”며 꼰대 경계론을 편다. 다음 달 취임 2주년을 맞는 그는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야근과 휴일 근무를 철저히 금지시키는 ‘칼퇴(칼 퇴근)’ 전도사다. 그는 “젊을 때 퇴근과 휴일 없이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지만 남는 건 달라지는 직함뿐이었다”며 “시대가 달라졌으니 일하는 문화도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 직장에서 최연소 임원에 오른 뒤 40대에 계열사 사장까지 지냈던 그는 왜 ‘돌변’했을까.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그는 당시 경영대학장 추천으로 국내 도급 순위 10위권인 삼익건설에 1980년 입사했다. 일자리가 차고 넘치던 시절이라 교수 추천이 있으면 원하는 직장에 웬만하면 들어갈 수 있었다. 당시 그는 선경(SK)과 한국은행에도 입사 추천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고민하던 그를 붙잡은 건 교수의 한마디였다. “너 마흔다섯 살에 과장 할래, 사장 할래.” 그는 삼익건설에 미래를 걸기로 했다. 입사 후 그는 삼익건설에서 승승장구했다. 입사 13년 만인 40세에 최연소 임원이 됐고, 15년 만에 계열사 사장이 됐다. 15년간 온전히 쉬어본 날이 손에 꼽을 정도. 주말에 출근하는 것은 물론이고 휴가도 거의 가지 않았다. 인생을 일과 회사에 모두 걸었지만 그는 “당시 그랬던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상사들로부터 “대단한 놈” 소리를 듣고 일했지만 돌이켜보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는 것. 특히 가족과 멀어진 게 가장 안타까웠다고 했다. “아직도 아이들과 서먹해요. 애들은 내가 옆에 있는데도 부엌에 있는 엄마에게 내 일정이나 안부를 물어요. ‘엄마, 아빠 저녁에 어디 간대?’ 이런 식이죠. 아직까지 회복이 안 되더라고요. 뼈아픕니다.” 그는 청년들이 개인 시간을 회사에 모두 쏟지 않도록 상사들이 잘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충 일하게 놔두라는 의미가 아니다. 일은 업무 시간에 시키고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덜어주는 게 성과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나 자신과 가족이 회사보다 중요한 직원들에게 휴일에 업무 지시를 내려 스트레스를 준다면 회사에 어떤 도움이 되겠냐는 것. “관리자급은 주말에도 회사 고민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고민을 혼자 풀어야지, 후배들에게 넘기면 안 됩니다. 몸으로 하는 일 아니라며 후배들에게 퇴근 뒤나 저녁에 카카오톡 등으로 ‘뭐 고민해 봐라’ 하면 당연히 업무 지시라고 느낄 수밖에 없죠.” 그는 중견련 부회장으로 취임한 뒤 자신의 생각을 실천하기로 했다. 야근과 휴일 근무를 금지한 것. 일손이 달린다는 간부들의 걱정은 인력 확대로 해소했다. 당초 조직 확대 과정에서 30여 명을 채용할 예정이었지만 10여 명을 더 뽑은 것. 추가 인력 충원으로 늘어난 비용은 회원사를 400여 곳에서 540곳으로 늘려 보충했다. 중견련은 회원사인 중견기업의 회비로 운영된다. 반 부회장은 “피로와 스트레스에 찌들고, 가족 간에 관계도 좋지 않은 직원들이 회사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겠느냐”며 “회사가 성과를 원한다면 먼저 직원들이 웃으며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어린이들은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신문지를 돌돌 말고는 그것을 ‘나뭇가지’라고 불렀다. 가위로 신문 나뭇가지 위를 듬성듬성 자르니 가지에 나뭇잎이 피었다. 아이들은 이 나뭇가지를 들고 무대로 향해 무대에 서 있던 커다란 신문지 나무에 하나씩 꽂았다. 단순한 어린이 체험 교육이 아니었다. 신문으로 나뭇가지를 만든 것도, 무대에 나가 신문지 나무를 세우는 것도 모두 연극의 일부였다. 이 연극의 이름은 ‘신문지 나무’. 도로를 넓히기 위해 길 한복판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베었다가 다시 세우는 과정을 그린 어린이 연극이다. 어린이가 배우, 스태프, 관객 등 1인 3역이 돼 자연보호의 필요성을 깨닫는 독특한 구성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지난해 9월 시작해 연말에 공연을 마무리할 예정이었지만 이달부터 오픈 런(끝나는 날을 정하지 않고 진행하는 공연)으로 공연을 다시 시작했다. 이 연극을 기획한 김대환 킴스컴퍼니 대표(57)를 12일 서울 종로구 낙산길 그의 연극 연습장에서 만났다. 가장 먼저 “객석과 무대의 구분 없이, 관객이 무대 소품을 만들고 배우로 참여하는 이 공연의 형태를 ‘연극’으로 부를 수 있는지” 물었다. 김 대표는 웃으며 “당연히 연극”이라고 답했다. “한국은 연극에 대해 매우 엄격합니다. 하지만 연극의 뿌리는 결국 사람이 사람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었어요. 애초에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었고 중요한 건 메시지였죠. 어린이 연극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연극의 원형에서 아이디어를 구한 것입니다.” 그는 한국 어린이 연극 기획의 1세대다. 서울예술대에서 영화를 전공한 그는 배우, 무용수로 일하다 1991년부터 극단 ‘손가락’에서 어린이 연극을 연출했다. 김 대표는 “학생 때도, 성인이 돼서도 미래에 어떤 일을 하며 살지 별 고민 없이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라며 “그런데 이상하게 연극 연출은 처음 접하는 분야였는데도 재미가 있어 밤을 새워 가며 일했다”라고 말했다. 이후 그는 50여 편의 어린이 연극을 만들었다. 다양한 작품을 거치며 관객인 어린이를 무대의 한 요소로 활용해 보기로 했다. 창작자와 관객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주고받는 수단이 예술이라면 어린이 연극도 아이들에게 삶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6년 ‘피터팬과 함께 하늘을 날자’, 2009년 이솝우화 ‘여우와 두루미’를 각색한 ‘누가 옳은지 말해 봐’ 등에서 그는 어린이 관객을 배우로 무대에 올리는 실험을 했다. “아이들은 스스로 행동하고 느껴야 무언가를 배웁니다. 가만히 앉혀 놓고 교육해 봤자 그 정보는 머리에만 머물다 사라져요. 왜 자연을 보호해야 하는지, 왜 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지 연극으로 체험해야 그 정보가 가슴까지 내려갑니다.” 신문지 나무도 이런 의도로 만들었다. 아이들은 직접 만든 나무가 베어 쓰러질 때 울었고 이를 다시 일으키며 웃었다. 김 대표는 소품으로 쓰인 나무는 비록 신문지로 만든 가짜라 해도 아이들의 가슴엔 자연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의 씨앗이 자리 잡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앞으로도 계속 어린이 연극을 만들 겁니다. 어린이들이 제 공연을 통해 느리지만 스스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머리보다 가슴이, 입보다 귀가 뜨인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랍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1'52전 49패'그래도 바둑은 내 운명#.2*11일 본보 지면에 실린 국내 유일의 우크라이나 출신 프로 바둑기사 마리야 자하르첸코 씨(22) 인터뷰를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4년간 52전 3승 49패. 프로 바둑기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형편없는 성적.그래도 바둑이 좋은 저는자하르첸코입니다. #.3어릴 때부터 체스를 뒀는데아홉 살 때 우연히 삼촌이 '본 적 없는 신기한 보드게임'이라며 바둑을 알려줬어요. 규칙은 굉장히 쉬운데 게임 운영은 무궁무진하게 복잡해그 매력에 푹 빠졌죠.그후 저는 바둑 학원을 찾아 본격적으로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42007년은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던 해였어요.원정경기를 떠난 러시아의 한 바둑 대국장에서한국 바둑을 전파하러 온 천풍조 9단을 만난 것이죠.그는 한국의 여자 바둑기사들과 경쟁하고 배우면 실력이 크게 늘 것이라며 한국 유학을 권했습니다. #.5'바둑 유학'은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천 9단의 제안에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바둑 강국인 한국에 가면 매일 강자들과 겨뤄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죠. #.6한국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긴 했지만우크라이나에도 여자 바둑기사가 있다는 사실을 한국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결국 학업을 포기하고 엄마와 함께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죠.#.7한국 유학 초기에는 바둑학원에서 바둑을 배웠고이후에는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가 바둑에 빠져살았습니다.연구생들은 모두 프로를 꿈꾸는 유망주들로 서로 실력을 겨루죠.제일 잘하는 순서대로 1조부터 4조까지 그룹을 나누는데프로 데뷔 전 저는 1조 5위까지도 올랐습니다.#.82012년 저는 드디어 프로 바둑기사로 특별 입단했습니다. 특별 입단은 일정 수준을 갖춘 외국인을 입단대회 없이 프로로 데뷔시켜주는 제도인데요.바둑 문화를 세계에 보급한다는 취지죠. 현재 국내 프로 바둑기사 354명 중 저를 포함한 외국인은 4명입니다. #.9아직 경험과 나이 부족으로 성적은 형편없습니다. 프로 데뷔 후 첫 승의 기쁨은 2014년 7월무려 28연패를 견디고 나서야 이뤄졌죠. #.10바둑대회 상금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경기가 없을 땐 외국인 청취자를 위한 라디오방송 DJ, 바둑 강사 등으로 일합니다. 함께 한국에 온 어머니도 학생들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치며 조금씩 돈을 벌고 있어요. 녹록치 않은 생활이지만 바둑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11바둑은 저의 미래이자 꿈입니다.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 한국 바둑을 전파하고 싶어요. 그 날까지 바둑을 열심히 두겠습니다!원본: 송충현 기자기획·제작: 김재형 기자 · 이고은 인턴}

“성적은 형편없지만 언젠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한국 바둑을 전파하는 날을 꿈꾸며 열심히 두겠습니다.” 4년간 52전 3승 49패. 프로 바둑기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형편없는 성적. 하지만 국내 유일의 우크라이나 출신 프로 바둑기사 마리야 자하르첸코(22)의 얼굴에는 늘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지난해 12월 29일 만났을 때에도 그는 바둑 이야기를 하는 내내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어릴 때부터 체스를 뒀는데 아홉 살 때 우연히 삼촌이 ‘본 적 없는 신기한 보드게임’이라며 바둑을 알려줬어요. 규칙은 굉장히 쉬운데 게임 운영은 무궁무진하게 복잡한 매력에 푹 빠졌죠.” 이후 그는 체스와 바둑을 함께 알려주는 학원에서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7년 원정경기를 떠난 러시아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한 바둑 대국장에서 한국 바둑을 전파하러 온 천풍조 9단을 만난 것. 천 9단은 여자 바둑기사가 많은 한국에서 경쟁하고 배우면 실력이 크게 늘 것이라며 한국 유학을 권했다. 그 전까지 다른 나라로 바둑 유학을 떠난다는 걸 생각한 적이 없던 자하르첸코였지만 천 9단의 제안은 마음을 흔들었다. 실력이 늘수록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마땅한 경기 상대를 찾기 어렵던 때였다. 바둑 강국인 한국에서는 매일 강자들과 겨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지만 바둑 강국인 한국에 우크라이나에도 여자 바둑기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유학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학업을 포기하고 엄마와 함께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유학 초기 바둑학원에서 배우던 자하르첸코는 이후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갔다. “프로를 꿈꾸는 유망주들은 한국기원에서 연구생으로 공부합니다. 연구생들끼리 겨뤄 실력을 가리고 결과에 따라 1∼4조로 나눠요. 1조가 제일 잘하는 그룹이죠. 프로 데뷔 전 1조 5위까지 올랐어요.” 자하르첸코는 2012년 프로 바둑기사로 특별 입단했다. 특별 입단은 일정 수준을 갖춘 외국인을 입단대회 없이 프로로 데뷔시켜 주는 제도다. 한국기원은 바둑 문화를 세계에 보급한다는 취지로 이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국내 프로 바둑기사는 354명이고 자하르첸코를 포함해 4명이 외국인이다. 경험과 나이 부족으로 아직은 승이 적은 상황. 프로 데뷔 후 첫 승의 기쁨은 2014년 7월 무려 28연패를 견디고 나서야 주어졌다. 바둑대회 상금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경기가 없을 땐 외국인 청취자를 위한 라디오방송 DJ, 바둑 강사 등으로 일한다. 함께 한국에 온 엄마도 학생들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치며 돈을 벌지만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 녹록지 않은 생활이지만 바둑은 그의 미래이자 꿈이다. “한국 기사들이 워낙 잘 두니 성적은 형편없죠. 그래도 바둑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를 무대로 한국 바둑을 전파하는 게 꿈입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당신이 욕실만 11개인 집에 산다면? 방이 아니다. 욕실이다. 정원 관리비만 연 1억 원을 쓴다면? 러시아 화가에게 집 천장 벽화를 그리게 하고, 거실은 젊은 음악가들이 연주하는 음악으로 가득찬다면? 당신은 행복한가? 그는 “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호화로운 생활을 버리고 지금 한국에서 사회활동가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사회복지법인 ‘꿈희망미래재단’을 운영하고 있는 김윤종 씨(68). 그는 미국에서 창업한 컴퓨터 네트워크 회사 ‘자일랜’을 1999년 프랑스 기업에 20억 달러(약 2조4000억 원)에 팔아 벼락부자가 됐다. 당시 그가 번 돈은 약 6억 달러(7200억 원)로 알려졌고, 국내 언론에도 그가 이룬 아메리칸 드림이 크게 보도됐다. 하지만 그는 미국에서의 호화로운 생활을 뒤로하고 지금 한국에서 사회복지법인을 운영하며 봉사의 삶을 살고 있다. 청소년과 교육이 그가 주로 활동하는 분야다. “회사를 팔고 나니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돈과 시간이 생겼습니다. 많은 사람이 저를 부러워했고 저 역시 흥분돼 그간 누리지 못했던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죠. 그런데 행복하지 않더라고요.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살아야겠다 싶었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그는 ‘사람을 키우는 일만큼 보람 있는 일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2007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뒤 한국 청년들의 삶을 보며 느꼈던 안타까움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당시에는 성공한 기업가로 알려지며 여기저기 강의를 많이 다녔죠. 그때 한 고등학교에서 강의를 했는데 강당에 들어서니 애들이 세상을 다 산 사람들처럼 널브러져 있더라고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도 엿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과연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싶었죠.” 그는 “교육은 부모와 학교가 아이를 인성 갖춘 사람으로 키워내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의 교육은 이와는 많이 달랐다. 인성보다 입시가 우선이었고, 부모와 학교가 정해놓은 길을 아이들은 따라가야만 했다. ‘행복이 성적순’이다 보니 아이들은 성취감보다 열등감을 먼저 배우고 있었다. 김 씨는 “억지로 따라가는 공부를 하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알기 어렵다”며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시기에 하기 싫은 공부를 하다 지쳐 사고도 멈추고 미래에 대한 고민도 하지 않는 게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2009년 청소년 교육을 위한 ‘꿈희망미래 리더십센터’를 세운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한국의 교육 방식에 지친 학생들에게 필요한 건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전담할 교육 커리큘럼을 꾸렸다. 학교가 리더십센터에 교육을 요청하면 3명의 교사를 학교에 파견해 하루 8시간씩 이틀간 학생들과 시간을 보내는 교육 캠프를 만들었다. 학생이 의자 2개를 마주 놓고 앉아 맞은편 의자에 앉은 가상의 자신에게 고민을 털어놓거나 격려해주는 ‘셀프토크’ 등 12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그는 학생들과 만날 때마다 “놀고 연애하라”고 조언한다. 마음대로 살라는 뜻이 아니다. 그런 과정을 충분히 거쳐야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는 인재로 성장한다는 믿음에서다. 김 씨는 “이성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자유롭게 놀아야 세상에 호기심이 생긴다”며 “피가 끓는 청년기에 서로 어울리면서 상대를 알고 배우게 되면, 자신감과 함께 인생의 든든한 자산을 갖게 된다. 이걸 알려주는 게 내 남은 인생의 과제”라고 말했다.송충현기자 balgun@donga.com}

“충무공께서도 이 쌀이 어려운 후손들을 돕는 데 사용된다는 것을 아시면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지난해 12월 23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소외계층을 돕기 위한 쌀 전달식이 열렸다. 문화재청 산하 현충사관리소가 종로구청과 중구청에 전달한 쌀의 이름은 ‘현충사표 이순신쌀’. 충남 아산시에 있는 충무공 묘의 위토(位土·묘소 관리 비용을 조달하기 위한 토지)에서 생산된 쌀이다. 충무공 묘에 위토가 있다는 사실도, 그 위토에서 벼를 경작한다는 사실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일. 하지만 충무공 묘 위토엔 일제강점기 민족혼을 지키려 했던 역사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역사의 명맥을 지금은 원성규 현충사관리소장(55·사진)이 잇고 있다. 1992년 공직에 입문한 원 소장은 문화관광부와 문화재청을 거쳐 2015년부터 충무공 묘와 현충사를 관리하고 있다. 충무공 묘 인근에 있는 현충사는 이순신 장군의 넋을 기리는 사당이다. 그는 5일 “동아일보 기사가 없었다면 충무공 묘와 위토가 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본보는 위토의 소유주인 충무공의 13대 종손이 동일은행에 빚을 지고 갚지 않아 땅이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또 당시 편집국장을 보내 위토가 경매에 부쳐진 사실을 기행문 형식으로 싣기도 했다. 본보는 1931년 5월 13일자 사설을 통해 ‘우리들의 역사의 기록 면에서 그 인격으로나 사적으로나 충무공 이순신의 위를 갈 사람이 얼마 없으리라. 그의 위토와 묘소가 경매를 당하게 된다니 이런 변이 또 있으랴. 이런 민족적 치욕이 더 있으랴’라고 보도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기사가 나간 뒤 전국에서 2만여 명이 1만6021원30전(현재 가치로 약 3억7000만 원)을 기부했다. 빚 2400원을 갚고도 남는 금액이었다. 모인 성금을 관리하기 위해 ‘이충무공유적보존회’가 생겼고, 빚을 갚고 남은 돈은 현충사를 짓는 데 쓰였다. 현충사는 숙종 32년(1706년) 처음 건립됐지만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폐쇄됐다. 이후 64년 만에 국민의 힘으로 다시 지어진 것이다. 국내 최초의 내셔널트러스트운동(시민의 기부로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활동)이었던 셈이다. 원 소장은 국민이 지켜낸 충무공 묘의 위토를 양분 삼아 제2의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을 기획하고 있다. 충무공 묘 위토는 약 1만3000m². 이 중 현충사관리소가 관리하는 면적은 3960m²다. 나머지는 덕수이씨충무공파종회가 소유하고 있다. 원 소장은 위토에서 생산된 쌀을 팔아 과거 충무공 묘의 위토처럼 보존에 어려움을 겪는 다른 문화유산을 관리하는 데 사용할 계획이다. 지금까지 위토는 시민들의 모내기, 벼 베기 체험장으로 사용돼 왔다. 여기서 생산한 쌀은 불우이웃을 돕거나 현충사관리소 기념품으로 활용됐다. 지난해 생산된 1000kg의 쌀 중 400kg은 소외계층 기부에, 400kg은 모내기 행사 기념품 등으로 쓰였다. 나머지 200kg은 문화유산보존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시범사업으로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김종규) 회원에게 판매했다. “동아일보 기사로 위토가 살아났던 의미를 되살려 보기로 했습니다. 위토로 보존되는 문화유산을 더 넓혀 보자는 취지죠. 기업과 연계해 쌀이 팔린 금액만큼 기업 기부를 받아 이를 다른 문화유산 보존에 사용하는 것이죠. 기부금도, 대상도 지금보다 훨씬 넓어질 것입니다.” 원 소장은 “올해는 420년 전 정유재란이 일어났던 해”라며 “충무공이 나라를 살린 마음으로 전국의 문화유산을 지켜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그 쇼핑백은 노방(얇은 비단의 한 종류)으로 만든 거예요. 여자 한복 안감으로 쓰이는 비단이죠. 반투명하지만 면들이 겹칠수록 은근한 색과 멋을 냅니다. 우리에겐 익숙하지만 외국인들에게 낯선 한국의 전통 소재를 장인들의 손기술로 재탄생시킨 것이죠.” 지난해 12월 26∼29일 서울 종로구 북촌로 재단법인 예올에서는 한국의 전통 소재로 만든 포장 용품을 선보인 ‘격, 례’ 전시가 열렸다. 이 전시를 기획한 조기상 페노메노 대표(37)는 “우리에겐 흔한 전통 소재와 문양이지만 조금만 변화를 주면 외국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예술로 비친다”며 “우리 장인들의 작품을 세계적인 예술품으로 승화시키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재청 산하 국립무형유산원 등과 함께 전통 공예를 육성하고 현대화하는 작업을 총괄하는 브랜드컨설팅 전문가다. 장인들과 생산 단계부터 함께하며 디자인, 제작, 마케팅, 전시, 브랜딩 작업을 이끌고 있다. 노방으로 만든 쇼핑백 외에도 갓을 변형해 만든 손가방, 참죽나무로 만든 상자 등 전시장 내 많은 작품이 그의 아이디어로 탄생했다. 그의 전직은 전통 공예 육성과는 거리가 먼 요트 디자이너였다. 국내 대학에서 공업디자인을 전공했고, 영화 ‘아일랜드’에 등장한 호화 요트를 보고 반해 이탈리아로 건너가 IED(Istituto Europeo di Design)에서 요트디자인을 공부했다. 이후 트리마린, 치카렐리 요트디자인스튜디오, 월리 등 유명 요트회사에서 일했고, 1200억 원대 최고급 요트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2010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요트 시장이 침체되면서 귀국했다. 그리고 전공을 살려 디자인 및 브랜드 컨설팅 회사를 창업해 경북 봉화군, 강원 철원군 등의 도시 브랜드 이미지를 제작했다. 이때 전통 공예의 세계와 접했다. “지방마다 훌륭한 전통 공예 장인이 많았습니다. 조금만 현대화하면 충분히 세계 시장에서 통할 수 있겠다 생각했죠.” 그는 “전통 공예와 요트 제작은 서로 다른 분야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만 작업한다는 공통점이 있다”며 “재료와 작품이 다를 뿐 만들어가는 원리는 비슷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유기(놋그릇)를 현대화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농경시대 식습관에 맞춰진 밥그릇 유기의 크기를 현대에 맞게 캔 음료의 절반 정도(190mL)로 줄이고 보름달, 난초 등 한국의 자연환경이 떠오르는 모양을 입혔다. 밥그릇, 국그릇, 3개의 반찬그릇으로 구성된 반상기 세트를 유기 텀블러, 포크, 나이프 등과 함께 프랑스 파리 국립장식미술관과 영국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등에 전시했다. 2015년 서울에서 열린 한중일 정상회의에서도 그가 장인들과 함께 만든 유기가 사용됐다. 지금은 전통 공예를 실생활에 더욱 깊숙이 끌어들여 한지, 비단, 한국의 원목을 이용한 포장 상품을 개발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조 대표는 “장인들이 ‘내가 지금까지 만든 물건 중 가장 예쁘다’고 칭찬해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며 “전통은 정체된 게 아니라 시대의 문화와 삶이 반영돼 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장인의 기술을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세계에 알리고 소비시키는 일도 중요하다”며 “우리 전통 공예와 세계인들의 관심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23일 경기 수원 광교신도시 카페 골목에 120명의 솔로 남녀가 모였다. 수원시청과 관내 공공기관, 삼성전자에서 근무하는 미혼 남녀가 참여하는 단체 미팅이 열려서다. 짝을 찾기 위해 수백 명의 솔로가 몰려나온다고 해 붙여진 별칭은 ‘솔로대첩’. 남자 2명, 여자 2명이 한 팀을 이뤄 지정된 4곳의 식당을 옮겨 다니며 서로의 짝을 찾는 방식이었다. 많게는 1200명이 참여하는 이 단체 미팅은 한곳에서 수백 명의 이성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입소문을 타며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이 솔로대첩을 4년째 이끌어 온 주인공은 손승우 새미프 대표(30·사진). 지금까지 손 대표가 연 솔로대첩은 총 40회. 참여한 누적 인원은 1만8000명에 이른다. 솔로대첩의 원조는 2012년 크리스마스 전날 서울 여의도에서 열렸던 단체 미팅이다. 한 누리꾼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제안해 즉흥적으로 이뤄졌다. 그런데 당시 솔로대첩은 남자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아 ‘남탕’ ‘남자 반 비둘기 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솔로대첩이라는 콘셉트를 체계화했죠. 남녀 신청을 미리 받으면 성비를 조절할 수 있죠. 일본의 마치콘(거리미팅)도 벤치마킹했습니다.” 지역 상권 침체, 저출산 등 사회적 문제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면서도 솔로들이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미팅을 콘셉트로 삼았다. 2013년 지역 상권을 활성화한다는 의미로 ‘새마을운동’에 착안한 ‘새마을미팅프로젝트(새미프)’를 회사 이름으로 정하고 본격적인 미팅 주선에 들어갔다. 손 대표는 내년에 전국 지방자치단체를 순회하며 지자체 공무원들이 참여하는 솔로대첩을 기획 중이다. 지금까지 지자체들은 공무원과 관내 공공기관 직원의 단체 미팅을 주로 호텔에서 해왔는데 이런 문화를 바꾸겠다는 것이다. “공무원들이 워낙 일이 바빠 인연을 만날 기회가 적으니 지자체가 공무원과 지역 기업 직원들을 이어주는 행사를 많이 하죠. 남녀가 그냥 마음 편히 한 장소에서 이야기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맺어집니다. 전국의 공무원, 직장인들 기다려주세요. 솔로대첩이 갑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농업용 드론은 고령화 시대의 필수품입니다.” 일본 드론업체 테드(TEAD)의 요코야마 쓰토무(橫山勉·51) 사장이 도쿄 근교 군마(群馬) 현 다카사키(高崎) 시에 위치한 테드 본사를 찾은 기자에게 건넨 첫마디였다. 한국보다 먼저 고령화 시대를 맞이한 일본에서 항공촬영, 측량 등 다른 산업용 드론에 비해 작고 가벼우며 값이 싼 농약 살포 전문 드론이 각광받고 있다면서 한 말이다. 이런 농업용 드론의 가격은 대부분 100만 엔(약 1015만 원) 내외. 농업용 드론이 등장하기 전 주로 쓰였던 농약 살포 헬리콥터 가격은 이보다 10배 비싼 1000만 엔(약 1억150만 원)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비용 절감 효과가 매우 큰 셈이다. 게다가 농약 살포 시간의 단축도 가능하다. 농업용 드론으로 1만 m²의 농장에 10L의 농약을 뿌리는 데 필요한 시간은 불과 8분. 반면 사람이 같은 일을 하면 무려 2시간이 걸린다. 요코야마 사장은 “처음에는 쌀의 주산지인 니가타(新潟) 현, 이와테(巖手) 현 등에서만 농업용 드론을 주로 썼지만 이제 일본 전역에서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며 “드론의 여러 분야 중 농업용 드론의 성장성이 가장 밝다”고 자신했다.○ 개인용 농업 드론의 강자 테드 초여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6월 16일 테드를 찾았다. 다카사키는 한국의 경기 남양주나 의정부처럼 도시와 농촌이 혼재된 곳이었다. 거리에서 젊은이들의 모습을 찾아보긴 어려웠고 노인들만 가득했다. ‘이런 곳에 드론처럼 혁신 정보기술(IT)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가 있겠나’ 싶었다. 어렵게 당도한 테드 본사 건물도 흡사 허름한 농기계 창고 같았다. 테드의 모기업인 요코야마 코퍼레이션은 요코야마 사장의 부친이 1963년 설립한 유통업체로 편의점과 소매점에 식품과 잡화를 공급해 왔다. 2010년 주요 거래처였던 한 가전제품 판매점이 요코야마 측에 ‘요즘 어린이들이 장난감으로 취미용 드론을 선호한다. 드론을 싸게 공급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요코야마 사장의 운명도 달라졌다. 그는 “드론을 본 순간 ‘이거다’ 싶었다. 대형 유통업체의 등장과 계속된 경기 불황으로 회사 사정이 예전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바로 회사 안에 드론 담당 부서를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초기에는 중국산 취미용 드론을 일본 소매점에 싸게 납품하는 데 주력하다 노하우가 쌓이자 외부 전문가를 영입해 농업용 드론 제작으로 방향을 틀었고 올해 초 드론 사업부를 테드(TEAD)로 분사시켰다. 직원이 10명에 불과하지만 테드가 생산하는 멀산 닥스, 아폴로 등의 제품은 일본 정부가 보증할 정도로 뛰어난 기술력을 자랑한다. 올해 3월 일본 정부는 여러 드론업체 중 테드, 엔루트, 마루야마 제작소 등 3곳에만 ‘농약 살포 멀티로터’ 인증을 부여했다. 이 인증은 정해진 양의 농약을 균일하게 분사하는 기술이 뛰어난 드론업체에만 부여된다. 멀티로터는 회전날개(로터)가 두 개 이상인 비행체를 말한다. 요코야마 사장은 “직원 10명인 우리 회사가 정부 인증을 받을 만한 기술력을 갖추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인증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는 작업도 만만치 않게 힘들었다”며 “책 한 권보다 많은 서류를 준비해야 했다”고 말했다. 실제 그가 보여준 관련 문서들은 얼핏 봐도 두께가 어지간한 백과사전보다 더 두꺼웠다.○ 기술력으로 중국 업체 넘는다 테드 본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회의실이다. 요코야마 사장이 ‘1급 기밀’이라며 사진 촬영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공개한 이곳에는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대형 중국 지도가 있었다. 지도 위에는 각종 스티커와 언뜻 낙서처럼 보이는 빽빽한 손 글씨가 가득했다. 그는 “수십 개 중국 드론 회사의 이름, 위치, 특징, 장단점 등이 적혀 있다”며 “나와 직원들이 중국을 오가며 공들여 수집한 1급 정보들이 많다”고도 설명했다. 정리와 분석에 강한 일본인의 면모를 새삼 엿볼 수 있었다. 사진을 찍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요코야마 사장은 “세계 드론 산업을 선도하는 나라는 중국”이라며 “중국 드론이 일본 시장을 잠식하지 않도록 기술력과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테드를 포함한 일본 드론업체의 공통 과제”라고 말했다. 액수를 정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드론 엔진 및 제어 기술을 개발하는 데 우리 돈 수십억 원을 썼다고도 털어놨다. 테드는 현재 ‘일본 드론산업의 대부’ 노나미 겐조(野波健藏) 지바대 교수가 이끄는 지바대 드론연구소와 함께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없이도 제어할 수 있는 드론을 개발하고 있다. 레이저를 이용해 주변 지형지물을 파악하면 굳이 복잡한 GPS가 필요치 않고, 터널 등 GPS가 잘 작동하지 않는 곳에서도 드론을 잘 날릴 수 있다고 요코야마 사장은 설명했다. 그는 “올해 말부터 신제품을 판매할 예정”이라며 “최근 한 한국 업체가 우리 제품을 구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덧붙였다.○ 고급형 농업 드론의 강자 엔루트 테드 방문 3일 전인 6월 13일 도쿄 북부 사이타마(埼玉) 현 후지미노(ふじみ野) 시에 있는 또 다른 농업용 드론업체 엔루트를 찾았다. 테드와 마찬가지로 일본 정부의 인증을 받은 회사로 주력 제품은 자이언 시리즈, 베르그, 쿼드플레인 등이다. 2006년 설립된 엔루트는 원래 무선조종 자동차 및 비행기를 만드는 회사였다. 드론 시장의 성장성을 보고 2013년부터 드론 생산에 뛰어들었다. 같은 농업용 드론이라 해도 요코야마가 수백만∼수천만 원대의 드론 생산에 주력하는 반면 엔루트는 수천만∼수억 원에 이르는 고급형 드론을 주로 생산한다. 기자를 맞은 기술부장 사이토 노보루(齊藤昇·53) 씨는 “수백만 원대 제품으로는 중국 업체의 저가 공세를 이길 수 없어 처음부터 프리미엄 시장을 겨냥했다”며 “값이 비싼 만큼 우리 제품은 대부분 고객이 주문한 후 생산에 돌입하는 방식을 택한다”고 말했다. 이어 “올해에만 약 400대의 드론을 판매할 것”이라며 “농업용 드론과 측량용 드론의 비중이 각각 절반 정도”라고 덧붙였다. 엔루트는 회사 부지 내에 자체 드론 비행장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드론 비행이 가능한 먼 곳에 가야만 제품 성능을 실험할 수 있는 다른 업체와 달리 생산 직후 바로바로 성능을 평가할 수 있다. 사이토 씨도 농업용 드론 시장 전망을 매우 낙관했다. 단순히 농약을 살포하는 수준이 아니라 파종, 수확 등 농작물 재배 전반에 드론이 쓰이는 날이 머지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통신회사 NTT도코모가 니가타 시와 함께 드론을 활용해 벼를 재배하는 사업을 시작했다”며 “고령화로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서는 드론이 스마트폰보다 더 중요한 생활기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다카사키·후지미노=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왼쪽 QR코드를 스캔하면 동아일보 디지털통합뉴스센터가 만든 드론 인터랙티브 사이트(interactive.donga.com/drone)로 이동합니다. 드론으로 촬영한 생생한 동영상과 사진, 드론 관련 기사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다음카카오 스토리펀딩의 ‘드론이 바꾸는 세상’ 코너(storyfunding.daum.net/project/11769)에서도 각종 드론 관련 기사, 동영상, 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

군복 두 어깨에 별을 달고서야 무엇을 잃어버리고 살았는지 알게 됐다. 직업군인으로서 더할 나위 없는 명예를 얻었지만 군 생활을 돌이켜볼 때 스스로에게 소홀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이호연 전 해병대 사령관(58·해사 34기)은 2013년 전역을 앞둔 어느 날 사무실 책상에 홀로 앉았다. 전역한 뒤 군인 시절 못 이뤄 본 것들을 모아 버킷리스트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한참 빈 종이를 쳐다보던 그는 가장 위쪽에 ‘사막마라톤’을 적어 넣었다. 이 전 사령관은 ‘철의 중년’으로 불린다. 군인일 때부터 강한 체력을 다져 놓았다. 현역 때인 2002년과 2011년 국제철인경기(수영 3.8km, 사이클 180.2km, 마라톤 42.195km)를 13시간대에 완주했다. 그는 지난달 말 제7회 남극마라톤대회를 완주하며 다시 한 번 주목받았다. 전역 후 1년간 사하라, 고비, 칠레 아타카마 사막마라톤을 완주한 그는 남극마라톤을 정복하며 세계 4대 사막마라톤 그랜드슬램을 이뤘다. 한국에서는 11번째 완주자다. 그가 달린 모래와 자갈밭, 설원의 거리는 총 1000km에 이른다. 그는 해군사관학교 34기로 임관한 뒤 해병대 6여단장, 해병대 2사단장을 거쳐 해병대사령관을 지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오랫동안 유지한 그의 별명은 ‘강철체력’이었다. 사관학교에서 럭비 선수로 활약했던 그는 군 생활 내내 오전 일과 한 시간 전부터 운동으로 신체를 예열했다. 그래도 현역 시절에는 체력에 자신 있었지만 퇴역 후 사막마라톤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남극마라톤은 사하라, 고비, 아타카마 사막을 마라톤으로 완주해야 출전 자격이 주어집니다. 식량, 의류, 비상약품이 담긴 10kg짜리 배낭을 메고 250km를 달리는 사막마라톤을 세 번 끝내야 남극을 밟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남극에 가기 전 매일 20km씩 뛰며 체력을 단련했는데도 극한 지역을 달린다는 건 만만치 않았습니다.” 남극은 접근부터 만만치 않았다. 한국에서 세계의 땅끝 마을로 불리는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까지 항공기로 약 30시간을 이동한 뒤 3일간 배로 약 1200km를 더 들어간 곳에서 마라톤이 열렸다. 마라톤 일정 자체도 난도가 높았다. 설원에서 하루 8시간을 뛰고 밤새 배로 장소를 이동해 다시 8시간을 뛰는 일정이 6일간 반복됐다. “남극은 봄에도 기온이 영하 25도입니다. 날씨가 너무 추워 발에 동상을 입어 고생했습니다. 눈밭이다 보니 사방이 온통 흰색으로 보이는 ‘화이트 아웃’ 현상도 겪어 방향표지판을 못 볼 때도 많았습니다. 달리는 내내 ‘내가 왜 사서 이 고생을 하나. 두 번 다시는 안 해야지. 여기서 포기할까’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의 도전 의식을 자극한 건 청년들의 롤모델이 되어야겠다는 일종의 책임감이었다. 세계 4대 사막마라톤 정복에 나섰던 2014년부터 그에게 ‘도전, 열정’을 주제로 한 강의 요청도 줄을 잇고 있지만 강의료를 모두 청년을 위해 기부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는 24개국 61명의 사막 전문 마라톤선수가 참여한 남극 대회에서 23등을 했다. 출전자들의 연령이 대부분 30대였던 것을 감안하면 결코 나쁜 성적이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남극의 설원을 달릴 땐 그렇게 포기하고 싶었지만 목에 완주 메달을 건 순간부터 새로운 극지 마라톤에 참가하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었다. “군에선 장병들에게 전투 체력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열심히 운동했습니다. 군의 전투력은 결국 군인 개개인의 체력과 정신력에 달려 있습니다. 젊은 군인들이 저를 보고 체력을 키우길 바랐죠. 사회에 나온 뒤에는 청년들이 저의 모습에서 도전정신과 열정을 찾길 원했습니다. 직접 행동해 그들에게 자극을 주고 싶어요.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계속 달릴 겁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쉰 살 배우 김보성이 격투기 무대에 오른 뒤 이 대회를 주최한 격투기 단체도 덩달아 화제를 불러 모으고 있다. 김보성이 격투기 선수로 데뷔한 10일 각종 포털 사이트 검색어 최상위권에 그의 이름이 들어갔다. 이와 함께 이 경기를 주최한 격투기 단체 ‘로드FC’도 검색어 상위권을 오르내렸다. 대전료 전액을 소아암 환자를 위해 기부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청자의 관심이 부쩍 늘었지만 비주류 스포츠로 분류되는 격투기가 관심을 끄는 건 드문 일이다. 일각에선 연예인의 단발 이벤트성 경기를 격투 대회의 메인이벤트로 배치한 것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기도 했다. 스포츠의 본질을 훼손한다는 지적이었다. 최근 로드FC 압구정짐에서 만난 정문홍 로드FC 대표(42)는 격투기가 널리 알려지고 대중의 사랑을 받을 때까진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경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수백 명의 젊은 선수가 뛸 무대를 지켜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연예인을 이용해 돈 번다는 지적이 있는 것 잘 압니다. 하지만 야구, 축구와 달리 격투기를 스포츠로 보는 인식이 약한 상황에서 국민의 관심을 모을 만한 경기를 꾸리는 게 쉽지 않습니다. 프로스포츠는 대중의 관심을 받아야 살아남을 수 있어요.” 한국 격투기 시장엔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선수들이 몸담고 있다. 로드FC에 등록된 프로 선수는 197명. 두 달에 한 번씩 열리는 하부리그에도 매회 약 240명의 아마추어 선수들이 참여한다. 10일 열린 대회에도 김보성 외에 29명의 선수가 경기를 치렀다. 정 대표는 김 씨의 대전료 외에도 입장 수익 전액을 소아암 환자를 위해 기부했다. 그가 이처럼 한국 격투계에 애정을 갖는 이유는 국내 격투기 선수의 1세대라는 책임감 때문이다. 그는 강원 원주에서 종합격투기 체육관을 운영하던 관장이었다. 2000년대 초반 격투 선진국인 일본으로 유학을 가 운동을 배워 제자들에게 알려주곤 했다. 그러던 중 일본의 대형 격투 단체인 ‘프라이드’가 문을 닫으며 아시아의 격투기 시장 전체가 무너졌다. “국내에 선수들이 뛸 무대가 없었어요. 젊고 열정이 넘칠 때라 제가 직접 대회를 만들자고 생각했습니다. 19세 때부터 승합차 끌고 다니며 옷 팔고 양말 팔아 모아둔 돈이 있었거든요. 2010년 당시로선 국내 유일의 격투기 단체인 로드FC를 만든 이유입니다.” 그는 대회를 열겠다며 제안서 하나 없이 무작정 방송국의 문을 두드리고 다녔다. 이후 로드FC는 1회당 수천만 원의 판권료를 받는 국내 대표 격투기 대회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 중국의 샤오미와 스폰서 계약을 맺고 중국 공영방송인 CCTV에서 경기를 중계할 만큼 성장에도 탄력이 붙었다. 그의 꿈은 로드FC를 세계의 메이저 대회로 키우는 것이다.송충현기자 balgun@donga.com}

“맞아. 서울역 앞에 말 달구지가 있던 때도 있었어.” 지난달 23일 서울역 1, 4호선 환승통로에 선 어르신 둘이 벽에 걸린 그림을 보며 추억에 젖었다. 1960년대 서울역 화물 집하장 풍경을 그린 작품이었다. 방한모와 목도리를 걸친 남자가 말의 고삐를 잡아끄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림의 작가는 만화가 김광성 씨(62)다. 그는 올 10월부터 ‘그리다, 옛 서울전’을 열고 있다. 당초 11월 11일에 끝날 예정이던 이 전시회는 관람객들의 연장 요청이 쇄도해 연말까지 연장했다. 김 화백의 작품은 서울 토박이들의 향수를 자극했고 관람객들은 전시회를 연장해 달라는 요청을 방명록에 남겼다. 김 화백은 35세의 나이에 데뷔한 늦깎이 만화가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하긴 했지만 교과서 귀퉁이에 낙서를 끼적이는 수준이었다. 김 화백이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건 국방부 조병창에서 군무원으로 일하던 20대 때부터였다. 그는 약 10년간의 직장생활 내내 서양화 동아리에서 그림을 익혔다. 1988년 그는 서른넷의 나이에 만화가로 데뷔했다. 조병창을 나와 광고회사에서 일하다 사무실에서 우연히 만화 잡지 ‘만화광장’을 보고 만화가 갖는 힘을 처음 느꼈다. “고 이상무 화백의 ‘포장마차’라는 작품이 있었어요. 포장마차를 소재로 시국 이야기 등 온갖 사회 문제를 다 다뤘습니다. 그걸 보며 ‘만화가 대단하구나’라고 느꼈어요.” 그는 16쪽짜리 단편만화 ‘자갈치 아지매’를 만화광장에 투고했다. 이후 2005년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 비행병으로 징집된 청년을 그린 ‘순간에 지다’로 대한민국만화대상 우수상을 타며 만화가로서 입지를 다졌다. 주로 역사물을 다루다 보니 한국의 옛 모습을 만화의 배경으로 사용할 때가 많았다. “제가 기억하고 있는 옛 서울 풍경과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제가 자신 있는 방법으로 계속 다룰 예정이에요. 사람의 정을 느끼고 감동이 있는 이야기를 다루려면 결국 역사를 파고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송충현기자 balg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