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마이크들이 마치 경쟁하듯 머리를 곧추세우고 있군요. 누군가의 목소리를 정확히, 생생히 담아내기 위해. ―경기 성남시 분당구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앙상한 나무 아래 흐르는 개울물개울가에서 빨래를 마친 아낙네가 머리에 빨래 바구니를 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사진으로 찍혀 있습니다. 아직 마무리를 못한 한 사람은 흐르는 물에 여전히 옷을 헹구고 있습니다. 수도가 보편화되고 세탁기가 빨래를 하는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진 풍경입니다. 성큼 다가온 겨울 날씨 탓에 꽤 차가운 물이었을 텐데 손에 동상을 입지는 않았을지 모르겠습니다. 당시에는 따듯한 온수를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추운 날씨에도 개울가에서 빨래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지금은 농촌 풍경을 찾아볼 수 없지만 100년 전 청량리는 계절의 변화를 그대로 드러내는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진기자들은 계절이 변하는 시기가 되면 청량리로 가서 풍경 사진을 찍어 신문을 통해 보도했습니다. 따스한 봄볕도, 추운 겨울을 알리는 서리도 시내에서 가까운 농촌인 청량리에서 촬영되었습니다. 이 사진도 마찬가지구요. 서울에 첫 얼음과 첫 서리가 내렸다는 기사입니다. 기사를 보시겠습니다. 첫 번째 문단은 기사라기 보다는 한 편의 시같은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당시 기자들은 사실 전달뿐만 아니라 문학적인 표현도 자주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경성에 첫 얼음과 첫 서리첫 얼음 4일, 첫 서리 9일 늦어어제 이른 아침 최저 온도 영하 1.5도◇앉아 있는 사람이나 길가는 사람이나 내려 쪼이는 여름 더위에 쫓기고 부대끼어 하루를 열흘 같이 성화로 보내며 이마 위에서 구슬 같은 땀방울이 쉴 새 없이 뚝뚝 떨어지던 여름철도 어느덧 자취 없이 가버리고 또다시 그 뒤를 이어 가을조차 몇 날이 못되어 마지막을 고하고 이제야말로 아침저녁 으로도 방안에서 손발이 선듯선듯한 겨울철을 확실히 당한 모양 같다. 더욱이 그저께 아침부터 불어오는 경성 시내의 초겨울 쌀쌀한 바람은 마친매 어제 아침에 이르러 금년에 이르러서는 첫번째 되는 서리(霜)가 오고 물이 얼었다는데 얼음(氷)의 부피는 팔분(八分)이나 되며 작년의 첫 번째 얼음보다는 매우 두터웠으며 금년의 첫 서리와 첫 얼음을 작년에 비하면 얼음은 나흘 동안이 이르고(빠르고)서리는 아흐레 동안이나 늦었다는데 어제 아침의 최저 온도는 영하 일도반이었으며 갑자기 이렇게 추워진 것은 중국 북부에 고기압이 일어나서 조선 안으로 발전된 까닭이더라.〈1924년 10월 21일 동아일보〉● 1953년까지도 농촌이었던 청량리기사에 따르면 이틀 전 아침부터 서울 시내에 찬바람이 불더니 어제 아침에는 겨울 들어 첫 서리가 내리고 얼음도 발견되었다는 군요. 한 해 전이었던 1923년에 비하면 얼음은 4일 빠르고 서리는 9일 늦었습니다. 중국에서 발달한 고기압이 한반도로 들어왔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싣고 있습니다. 지금도 기상청에서는 이와 비슷한 분석을 하고 있는데, 100년이 지났지만 날씨를 분석해 시민들에게 전달하는 기본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청량리는 언제까지 농촌이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동아일보 DB를 검색해보니 1970년대 말에는 청량리역을 통해 외곽으로 나가려는 많은 여행객들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대학생이던 1990년대 초에도 청량리역에서 강원도쪽으로 엠티를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의 청량리역 주변은 대형 상가들과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어 당시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불과 30년 전만 해도 서울의 중심은 아니고 동쪽으로 나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변두리 지역이었습니다. 청량리는 언제쯤 농촌에서 도시로 변모한 것일까요? 해방 직후부터 1980년대까지 서울 도시계획을 담당하는 공무원이었던 손정목 선생의 “서울도시계획이야기” (도서출판 한울) 제 1권 131쪽에서 청량리 개발의 흔적을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의 휴전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던 당시의 서울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던가. 우선 서울 시내, 또는 서울 시가지라는 것은 어디에서 어디까지였을까. 사대문 안은 일단 시가였다. 동대문을 나가면 신설동까지 큰길가에는 집이 들어차 있었지만 그 밖은 논과 밭이었다. 신설동 남쪽에는 경마장이 있었으니 인가는 별로 없었다. 신당동에는 집이 들어서 있었지만 지금의 금호동·옥수동 일대는 산이었다. 왕십리에도 큰길을 따라 양쪽에 는 집이 연이어 있었지만 지금 한양대학교가 있는 일대에는 주택보다는 미나리팡이 더 많았다. 성동교도 나무다리였고 그 동쪽에는 논과 밭뿐이었다.”1950년대에 서울 신설동도 논과 밭이었으니 그보다 더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청량리 역시 농촌 마을이었던 것입니다. ● 도시가 시작되던 중 수해로 물에 잠긴 청량리그러다가 1960년대부터 집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청량리의 60년 남짓 전 모습을 볼 수 있는 사진이 한 장 있어 소개합니다. 1966년 수해를 입은 청량리와 이문동 일대 항공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당시 동아일보가 보유하고 있던 경비행기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농촌 지역과 산비탈을 개간하고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록 사진을 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청량리는 홍수에 취약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100년 전 겨울을 알리는 기사와 함께 청량리 개울가의 풍경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한 장의 사진이 담고 있는 시대상과 도시의 변화, 그리고 자연과 사람의 관계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셨나요? 댓글로 남겨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 백년사진에서 소개한 ‘소년군’은 지금의 ‘보이스카우트’라는 댓글이 있었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넘쳐나는 오늘을 살면서,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한 장씩 살펴봅니다. 독자들의 댓글을 통해 우리 이미지의 원형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합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주인 대신 주인과 닮은 여행자 인형을 카메라 앞에 세워두고 찰칵∼. 기념사진 이렇게 찍으면 외모 신경 쓸 필요 없어 편하겠어요. ―서울 종로구 광화문 앞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요새 보기 힘든 반듯한 붓글씨에 괜히 옷매무시를 고치게 되네요. 법원 직원이 직접 쓰신 거라고 합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북한이 경의선과 동해선까지 한국과 연결되는 도로를 끊고 있다. 남북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상징적인 의식으로 폭파 세리모니까지 하며 국제 사회의 주목을 끌고 있다. 미국 선거를 앞두고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위한 행보라는 해석이 많다. 그러면서도 김정은은 북한 내부에서 꾸준히 인민들을 만나고 군사 시설과 군인들을 접촉하며 일련의 활동을 북한 내부 매체를 통해 북한 인민들에게도 알리고 있다. 23일에는 전략 미사일 기지를 시찰하면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초음속 미사일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노출시켰다. 최근 김정은 사진에서는 그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몇 가지 장치를 활용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예전과는 다른 요소들이 등장함으로써 그가 ‘안전’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수도 있다는 추론을 하게 한다. 첫째, 여기저기 국방위원장 엠블럼을 만들어 붙이고 있다. 김정은의 전용 승용차 뿐만 아니라 마이크 앞에도 붙이고 이제는 옷에도 붙이고 나타나고 있다. 김일성 김정일 시대 뿐만 아니라 김정은 집권 초기에는 없던 현상이다. 전 세계 지도자 중 자신의 집무실이 아닌 야외 현장에서 탁자와 마이크에 신분을 표시하는 엠블럼을 단 경우가 있는지 궁금하다. 둘째, 영상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다. 김정은의 일거수일투족을 옆에서 기록하는 ‘1호 사진가’의 카메라에는 일반 사진 뿐만 아니라 동영상을 동시에 촬영할 수 있는 미니 카메라가 추가로 장착되어 있어 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또한 흔히 유튜브 방송에서 활용되는, 스마트폰 촬영을 하는 실무자의 모습도 포착된다. 세 번째 특징은 강화된 경호 체계이다. 경호팀의 강화다. 무장 경호원들이 방아쇠에 손을 넣고 있는 장면은 인간병기라고 할만한 특수부대원들의 훈련 참관 현장이라고 하더라도 평범한 모습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재밍 카도 등장해 행사장 주변에 대한 전파를 통제하겠다는 의지가 보인다.김정은 행사장 주변에 전파 차단을 목적으로 하는, 재밍 카가 등장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북한 내부의 잠재적 위협으로부터의 방어인지 국제 사회의 감시에 대한 두려움인지 알 수 없지만 행사장에 등장했다는 것은 과거와는 다른 징후로 볼 수 있다. 행사장에는 김정은의 전용차를 알아볼 수 없도록 엘블럼을 장착한 2대의 차량이 등장하고 있다. 넷째, 모자이크도 많고 등장인물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노동신문을 통해 나오는 신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 북한에서 기념사진은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소원’처럼 김정은과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최근 김정은이 찍는 단체사진에는 한 장에 너무 많은 사람이 포함됨으로써 신문이나 액자 상태로 보더라도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 행사 참가자들에게는 사진이 더 이상 중요한 증명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아쉬운 점이지만 북한 정권입장에서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외부 세계에 넘기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도 읽힌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 지역으로 파견된 북한 미사일부대 기술자의 모습을 확인한, 국정원이 자체적으로 만들어 활용하고 있다는 AI 안면인식기술에 대한 두려움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자신을 과도하게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는 보안에 신경을 쓰는 장치들이 현재 북한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작은 힌트가 아닐까.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색색의 꽃들이 정원을 가득 메우고 있네요. 여기 가면 어딜 걸어도 꽃길만 걸을 수 있겠어요. ―강원 인제군 용대관광지에서 스마트폰 카메라로 QR코드를 찍으면 포토에세이 동영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0일 주말을 맞아 단풍을 즐기려는 등산객들이 전국의 단풍 명소를 찾았다. 강원 평창군 대관령 일대가 울긋불긋 단풍으로 곱게 물든 모습. 수도권 기준으로 낮 최고기온이 20도에 육박했지만 아침저녁에는 기온이 뚝 떨어지며 19일 밤∼20일 오전 강원 북부 산지에는 올가을 들어 첫 한파주의보가 내려졌다. 설악산국립공원 대청봉 인근에는 첫눈도 내렸다. 평창=변영욱 기자 cut@donga.com뉴스1}

망망대해에 뜬 작은 배 뒤에서 물이 짓쳐 들어와요. 이러다 곧 가라앉고 말겠어요! ―서울 종로구의 어느 건물 외벽 배전함 자리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사진 퀴즈 - 100년 전 독자의 시선을 끌려는 노력 1924년 10월 13일 자 동아일보 지면에는 파인(巴人) 김동환의 시 “북청 물장수”가 발표됩니다. 교과서에도 실렸던 만큼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시가 신문 지면을 통해 세상에 발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묵직한 코너 옆에 신문에 실리기에는 좀 가벼운 사진 하나가 실려 있습니다. 군복을 입은 소년이 두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진 옆에 설명에는 “상 타는 사진 풀이” 시리즈가 이날부터 지면을 통해 시작된다고 써 있습니다. 그 옆에는 강아지와 고양이가 서로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입니다. 1924년 10월 13일 (월요일) 자 동아일보 지면입니다. 신문사는 이 두 사진이 어떤 건지 독자들에게 정답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먼저 신문사에서 원했던 정답을 말씀드리자면 눈을 가리고 있는 사진의 정답은 ‘소년군’이라고 합니다. 100년 전 신문에서 있었던, 독자 참여 이벤트를 소개합니다. ◇ 상타는 사진 풀이첫째 여기에 얼굴을 가리고 있는 어른을 세상에서 무엇이라 부르며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아주 간단하게 아는 대로 적어서 알려주십시오.둘째여기에 서로 마주 앉아 있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간단하게 적어 보내주십시오.쓰기는 엽서로 주소 성명과 동아일보 소년소녀계라고 분명하게기한은 오는 토요일 안으로 도착되여야 합니다.상품은 ‘사진풀이’ 두 가지를 다 맞힌 이로 20명을 추첨함.● 독자의 시선을 뺏기 위한 신문의 노력독자들의 시선과 시간을 빼앗아 신문사의 콘텐츠에 몰입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신문사 구성원들의 오래된 숙제입니다. 그래서 미국 유력지 뉴욕타임즈는 구독자를 유치하기 위해 음식 레서피를 제공하거나 가로세로낱말퍼즐을 싣습니다. 그리고 꽤나 많은 독자들이 그 코너를 기다립니다. 깊이 있는 기사와 중요한 기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습니다.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1920년대의 노력은 조선일보에서도 발견됩니다. 비슷한 시기 조선일보는, 기자가 변장을 하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겠다면서, 기자의 평소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주면서 거리에서 사진 속 기자를 제일 먼저 알아채고 ‘당신이 변장한 기자다’라고 말하는 첫 사람에게 상품을 주겠다는 기획을 시작했습니다. 그게 1924년 10월입니다. 조선일보 기자는 인력거꾼이 되어보기도 하고 고학생이 되어보기도 하고 아이를 엎은 채 누추한 행랑어멈 차림으로도 변장합니다. 그렇게 서민들의 실생활을 들여다보고 경험한 애환을 지면에 털어놓습니다. ● 사진 퀴즈의 정답은 소년꾼… 독자의 오답(誤答)은?동아일보 지면에 사진 퀴즈가 나간 1주일 후인 1924년 10월 20일(월요일)자에 다시 ‘상타는 사진 풀이’ 다음 차례 사진이 나갑니다. 세 번째 사진은 “어여쁜 아가씨 한 분이 서 있고 그 옆에 아름다운 꽃이 있습니다. 아가씨는 무엇을 하려고 하고 있는 걸까요“라는 질문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진 퀴즈에 대한 답이 공개됩니다. 아울러 독자들의 창의적인 오답도 함께 소개되고 있습니다. 당시 기사를 보시죠.요전 사진풀이는 이러합니다.◊첫째는 소년군입니다. 소년군은 지금부터 열일곱해 전에 영국 어느 늙은 군인이 시작한 것인데 지금은 전 세계에 없는 곳이 없고 수효가 사오백만이나 됩니다. 소년군의 목적은 남을 위하여 사회를 위하여 활동할 훌륭한 인물을 양성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답안 중에 맞지 않은 것이 적지 않습니다. 몇 가지 전례를 들어 보오리다.중국 동란에 불간섭 주의를 주장하는 일본정치의 곤경을 당한 조선 총독등이 있는데 이런 것은 아마 어른의훈수를 받아서 쓴것이요 단순한 소년소녀의 답안이 아닌가 합니다. 재미있는 것으로는눈가리고 아옹엄청스럽게 틀린 것은은행 나무 잎사귀라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우는 사람이라거나 학교 운동꾼이라거나 장님이라 한 것은 여간 많지 않습니다.◊둘째는 강아지와 고양이가 마주 앉아 있는 것입니다. 마주 앉아 무엇하느냐 우리는 소년소녀 여러분이 두 짐승이 서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시고 대답하시려니 생각하였더니 생각 20의 7,8 분은 맞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개와 고양이는 앙숙이라 만나면 싸우는 것으로 생각하셔서 싸울려고 하는 것이다, 노리고 있는 것이다, 으르렁거리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해석하신 답안이 4백 여장이나 됩니다. 그리하고 연칭부린 대답으로일본과 미국봉천과 직예라는 것이 많은 중에 일본 아이가 ‘일본과 미국’이라고 답안을 써 보내 것이 있습니다. 잘못 본 대답으로 호랑이 새끼라는 것 갈가지라는 것이 가장 많고 시퉁그러진 대답으로 천하 개자식이라는 뜻이라고 한 것도 있고 또 이야기꾼 대답으로 주인 보배를 차지하려고 개와 고양이가 공론하는 것이라는 것이 있습니다.우리 생각대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모두가 오십 여자 밖에 아니 되니 오십여장을 가지고 사백여장을 없이하면 우리의 잘잘못은 고사하고 여러분께 미안하여 이야기한다는 것과 싸우려고 한다는 것을 반반씩 뽑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야기 한다고 보신 것을 좋은 줄로 생각합니다. ● 어떤 사람들이 퀴즈에 응모했을까신문사가 낸 사진 퀴즈에 응모한 사람은 826명이었습니다. 그 중 20명을 선정해 상품으로 책을 한권 주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응모했는지 궁금합니다. 기사를 보겠습니다. 소년소녀들을 대상으로 퀴즈를 낸 것인데 부모가 답안 작성에 도움을 준 것 같다는 아쉬움과 경제난이라는 시대 상황도 반영된 답도 있어 가슴이 아프다는 신문사의 입장도 함께 기사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상품과 상 탈 여러분상품은 ‘사랑의 선물’이란 이야기 책 한권씩을 드리기로 하였는데 상 탈 여러분은 826분 중에서 20분을 공평하게 추리였습니다.경성 필운동 90 이정희평양 상유리 75 김동석경성 관훈동 141 김정희경성 평동 27 이해록(?)경성 숭인동 61의 5 정학모포천 소흘면 송우공보 이복순개성 송도면 정화여교 김정순안악군 안악면 신장리 506 이용혜신천공보 홍보표경성 종로 4정목 28 김순옥진남포 신흥리 43 박춘명개성북본정 492 박일찬괴산군 괴산면 제동리 유?익수원공보 이희찬평양 리문리 79 황명복경성 원정 713 심대식경성 관훈동 197의ㅣ 4 이경자경성수은동 88 석린균논산군 강경공보 방은주노량진 흑석리 176 이해영◇답안을 보고◇이번 사진풀이는 단순한 소년 소녀를 위하여 생각해 낸 것이라 어른의 눈으로 보면 싱겁기가 짝이 없을 터인데 어른의 필적이 분명한 것이 답안 중에 많으니 우리는 의외로 여기는 동시에 여간 섭섭히 생각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또 금년이 흉악한 흉년인 것을 알 수가 있었으니 시골서 온 답안 중에 소년군을 먹을 것 없어서 우는 사람이라고 한 것이 일백장이 넘습니다. 먹을 것 없어 굶주리는 것이 어린 머리에 얼마나 깊이 인상이 되었기에 이러한 결과가 생기겠습니까? 또 답안의 글씨와 의사로 그 소년 소녀의 가정을 대개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의 감독이 어떠한 저도까지 미치는 것을 보지 않고도 알 수가 있는 것 같이 생각하였습니다. ● 오늘 ‘백년사진’에서는 사진풀이라는 이벤트를 살펴보았습니다. 100년 전 신문사가 진행했던 독자와의 소통 이벤트 어떠셨나요? 요즘 세대에게 다가가려면 어떤 이벤트가 좋을까요?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주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8일 서울 마포구 월드컵공원 내 하늘공원에서 우산을 쓴 시민들이 억새밭을 산책하고 있다. 기상청에 따르면 19일까지 전국에 최대 120mm의 비가 내릴 것으로 전망된다. 비가 그친 후에는 20일 서울 최저기온 9도, 강원 산간 지역 3도 등 기온이 뚝 떨어지며 쌀쌀한 날씨를 보이겠다. 기상청은 “20일 강원 지역에선 올가을 첫눈이 내릴 가능성도 있다”고 예보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외벽 철판에 희미한 흔적이 보여서 사진을 찍어 보정해 보니 꽃나무가 드러났어요. 옛 장식이 이렇게 남아 건물의 과거를 전하고 있군요.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025년을 앞두고 14일 한국조폐공사가 2025년 을사년 ‘뱀의 해’ 기념 메달을 선보였다. 금·은 메달 2종 세트는 399만 원, 색채 은메달 22만 원, 캘린더 동메달 33만 원으로 선착순 예약 접수는 25일까지 진행된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백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하나 골라 의미를 찾아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골동품 거래의 대표적인 거리 중 한 곳인 서울 인사동과 관련된 기사입니다. 자기가 모아 둔 조선의 보물들을 아무 조건 없이 사회에 내놓겠다고 하는 시민의 이야기입니다. 조선의 미술품이 사라지고 외세에 빼앗기는 것이 안타까워 10년 동안 많은 골동품을 모아왔는데 어느덧 마땅히 보관할 곳도 없고 더 이상 물건을 사 모을 여력도 안 되었던 모양입니다. 기자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해서 도움을 줄 사람을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서울 인사동에 살던 고미술품과 골동품 수집가의 이야기를 한번 살펴보시죠. 기사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924년 10월 6일 동아일보 기사입니다.◇적년수집 고미술품 무상 제공(積年收集古美術品 無償提供)을 언명(言明)10 여년 모아둔 조선의 보배를 보수없이 사회에 내놓겠다고글씨로 그림으로 건축으로 조각으로 옛날의 조선을 꽃밭같이 꾸미던 조선의 모든 미술품은 사라져 없어지고 재변(災變)으로 없어지고 알지 못하여 찾지 못하고 찾았으나 빼앗기고 하여◇옛날의 광명이나마 차차 사라지려 하는 때에 영남출생(嶺南出生)으로 방금 시내 인사동(仁寺洞)에 사는 림상종(林尙鍾)씨는 어려서부터 사라져가는 민족의 자랑거리를 남달리 아까워하여 자기의 일생을 고조선 미술품 수집 보존에 바치기로 하고 10여 년 이래로 자기의 거대한 전 재산을 이에 탕비하여 대표적 미술품이라 할만한 그림(畵) 이천 폭과 글 시(書)삼천폭과 신라(新羅) 고려(高麗) 리조(李朝)때의 그릇 도자기(陶磁器) 수백종과 기타 골동품 수십종을 모았는데 이 가운데는 삼한시대의 불상(佛像)도 있고 구하지 못할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호렵도(虎獵圖)도 있고 근세의 신화라하는 장승업(張承業)의 그림도 있고 김종서(金宗瑞)의 글씨도 있고◇고구려의 유물로 집안현(輯安縣)에 잇는 영락대왕(永樂大王)비의 탑본(搭本)도 있고 그밖에 신라 고려 때의 조각(彫刻) 도기(陶器) 동기(銅器) 등 우리나라의 고귀한 미술품은 거의 갖추어 있는데 이 같은 거대하고 어려운 사업에 일 개인의 힘은 한이 있어 지금의 림씨는 살림을 이어가는 여러장의 전당포와 이 같은 보배를 굶어 죽어도 영원히 보존하겠다는 정상만 남았을 뿐인데 만 가지 일에 돈의 힘이 드는 지금에 있어서 정성만 가지고 있다 무슨 변을 당하여 한 폭의 그림이나 한 개의 그릇이라도 잃거나 하면 어찌할까 하는 걱정으로 림씨는◇단연히 결심하고 어떤 개인이나 어떤 민간 단체에서 이것을 영구히 맡아 사회의 공유물로 완전히 보존하는 기관이 생기면 조금도 아끼지 않고 서화 그릇 등 전부를 내여놓기로 하였다더라.◇분로촌공(分勞寸功) - “땅 팔아 그림 한 폭”/임상종씨 담(林尙鍾氏談. 인터뷰)이 소식을 듣고 왕방한 기자에게 림씨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말하되『참말 인제는 내 힘만으로는 더 어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시는 이는 아실터이고 모르시는 이는 모르실터이지요마는 나는 실상 땅 한 마지기를 팔아서 그림 한 폭을 얻어오고 세간을 팔아서 글씨 한 쪽을 모은 것이 『분로촌공』으로 그래도 지금에는 저만콤 모으게 되엿습니다. 저것을 모은다고 밥이 생기거나 옷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도로혀 내 자신의 구복은 줄어드는 세움이지마는 그런 생각을 하고야 모아질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정성 뿐이고 힘이 없습니다.◇저렇게 모은 물건이 일조일석에 없어질지도 모를 일이고 없어질지도 모를 일이고 한폭 두쪽 잃어질지도 모를 일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칩니다. 어쨌든 이 물건을 한 곳에 모아 미술관을 지으시겠다는 개인이나 단체가 있으면 아무 보수도 없이 그대로 내여주겠습니다. 이것을 하나하나 떼여혔치자면 쉬운 일 이지요마는 나는 죽어도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한데 뭉치여 영구히 보존되기를 바랍니다』는 말끝에는 무한한 결심과 보배에 대한정성이 넘치었다.●이 기사를 쉽게 정리하면백년 전 신문에 실린 기사는 인사동에 거주하는 임상종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라져가는 조선의 문화유산을 아끼며, 10여 년 동안 고미술품을 수집해 왔습니다. 임 씨는 자신의 전 재산을 들여 그림 2000폭, 서예 3000폭, 도자기 수백 종, 기타 골동품 수십 종을 모았습니다. 표로 만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정말 귀중한 유물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복잡하니 임상종 씨가 수집한 유물들을 본문에서 언급된 종류와 수량을 바탕으로 표로 정리했습니다. 유물 종류수량설명그림(畵)약 2,000 폭조선 시대와 근세의 대표적인 그림 포함서예 작품(書)약 3,000 폭김종서 등의 유명한 서예가의 작품 포함도자기(陶磁器)수백 종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도자기불상(佛像)삼한 시대 불상삼한 시대의 귀중한 불상탑본(塔本)영락대왕비 탑본고구려 영락대왕비의 탑본조각(彫刻)수집된 다양한 조각신라와 고려 시대의 조각품들동기(銅器)수집된 동기류신라와 고려 시대의 동으로 만든 기물들호렵도(虎獵圖)1점고려 공민왕 시대의 호렵도장승업의 그림1점근세의 대표적인 화가 장승업의 작품● 임상종씨와 기자의 인터뷰 내용임상종 씨는 이러한 유물을 보존하는 것이 개인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현재 그는 여러 장의 전당포를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지만, 유물들이 훼손되거나 잃어버릴까봐 걱정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보물들을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기관이나 단체가 있다면, 보수를 받지 않고 모든 유물을 기증하겠다고 결심했고 신문사 기자와 인터뷰를 하게 됩니다.임 씨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땅을 팔아 그림 한 폭을 사고, 세간을 팔아 글씨 한 쪽을 모았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는 밥이 생기거나 옷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고서도 유물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정성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정성만으로는 부족하고, 힘이 없음을 토로합니다. 그는 유물들이 일조일석에 없어질 수도 있고, 한 폭 두 폭 잃어질 수도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고 하면서 그는 유물들을 한 곳에 모아 미술관을 지을 수 있는 개인이나 단체가 있다면, 보수를 받지 않고 기증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유물들이 하나하나 흩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영구히 보존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습니다.● 임상종 수집가는 파산의 위험에서 벗어났을까임상종씨의 이야기는 동아일보 데이터베이스에서 한번 더 검색이 됩니다. 1925년 7월 19일자 호외에 “水災 同情金” 기탁자 명단이 실리는데 여기에 ‘인사동 199번지 림상종 10원’이라는 한 줄까지 동정이 실립니다. 경성 시내를 강타한 수해 상황을 보도하면서 수재 의연금을 낸 수백 명의 독지가 중 한 명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제대로 추적이 되지 않습니다. 독지가나 기업 문화재단 등이 나타나 그의 수집품을 보관할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만들어주었다는 해피엔딩의 기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신문사 기자와의 인터뷰가 별로 도움이 안되었던 것 같습니다.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인터뷰 기사가 나간 후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고제희의 풍수칼럼 (21fengshui.com)이라는 곳에서 임상종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http://www.21fengshui.com/content5/view.html?id=4-1-1-1-3의 포스팅에 따르면 “여기저기서 빌린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임상종은 급기야는 고리대금업을 하는 최상규(崔尙奎)에게 군선도를 비롯한 고서화를 맡기고는 계속해서 돈을 빌려 썼다. 당시에 남에게 돈을 빌려쓰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이자가 월 2할에 가까워 5달만 지나면 원금의 곱이 되었던 시절이다. 마치 밑빠진 항아리에 물 붓기 식으로 늪에 빠진 임상종은 더 이상 빚을 갚을 길이 없자, 파산선고를 했다. 그러자 개인으로써는 유래가 드물게 수집했던 3백여 폭의 고서화가 이자와 원금 대신으로 고스란히 최상규에게로 넘어갔다. 욕심이 부른 파멸이었다. 죽음이 가까웠을 때에 임상종의 손아귀에는 손바닥만한 고서화 조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천추의 한을 품은 채 1940년 눈을 감았다. 고리대금업자 최상규는 그림을 볼 줄 모르는 사람으로 곧 임자를 찾아 나섰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오늘 백년 전 신문사진이 고른 사진은 1924년 10월 6일자 신문에 실린 인사동 큰손이었던 임상종의 인물사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진과 기사에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언론이 세상에 사실을 알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 시대였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마찬가지일수도 있구요. 지금처럼 대기업이 문화재단을 운영하거나, 일반 시민들이 십시일반 투자하는 클라우드 펀딩이 대중화되었다면 좀 더 행복한 결말이 나올 수도 있었을까요?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다음 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재개발 예정인 건물에 담쟁이넝쿨이 입주했군요. 이제 막 가지를 뻗치고 있는 것 같은데 곧 허물어질 건물인 걸 알까요? ―인천 중구 유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서울 양천구 ‘찾아가는 이미용 봉사단’ 회원들이 지난달 25일 양천구 신월시영아파트 경로당에서 어르신들의 머리를 다듬고 있다. 봉사단은 주로 거동이 불편해 미용실이나 이발소를 방문하기 힘든 어르신들을 위해 11명의 자원봉사자들이 3월부터 매달 1회씩 봉사하고 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라면 먹고 갈래?’에 이은 신종 유혹법인가요. 고양이가 없을 때도 있다니, 나타날 순간을 더 기대하게 만드네요. ―경북 의성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 한 장을 골라 오늘의 시각에서 의미를 찾아보는 백년 사진입니다. 오늘은 흰 수염에 갓을 쓴 노인의 얼굴 사진을 골라봤습니다. 원래 계획은 아래 군밤 파는 소년의 사진(1924년 9월 30일자)과 그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간식과 군것질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살피려 했는데 이 노인의 이야기가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주제를 바꾸었습니다. 1924년 10월 2일자에 실린 사진입니다. 입을 꼭 다문 채 정면을 응시하는 노인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흑백의 흐릿한 사진이지만 짙은 눈썹과 매서운 눈매가 보입니다. 고집이 세다고 할까요 아니면 결의에 찬 모습이라고 할까요?기사를 살펴보겠습니다. 교육계 독지(篤志) 전봉현 노인수만원 토지를 정주 오산학교에평북 선천읍내 사는 전봉현(田鳳顯)씨는 현재 85세의 노령으로 젊어서부터 근검저축으로 전전푼푼이 모아 지금은 유복한 생활을 하는 노인인데 다른 일에는 비상히 검소한 노인이나 오직 장래 청년 자제 교육에는 큰 뜻을 두고 정주 오산학교(定州 五山學校)에 1만7천여원 어치 토지와 선천군 남면 삼성동에 있는 밭을 전부 기부하였으므로 일반의 칭송이 많다더라 (사진은 전봉현씨)-1924년 10월 2일자 동아일보● 전봉현, 오산학교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다전봉현 선생에 대한 기록은 그 이전에도 신문에 등장합니다. 1924년 5월 20일자 기사에는 그가 오산학교에 1만 5천여 원 상당의 토지와 재산을 기부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는 오산학교와 같은 민족 학교의 재정적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한 고귀한 행위로 당시 사회에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1만 5천원이면 어느 정도의 돈이 될까요? 당시 냉면 한 그릇에 20전이었다고 하니 냉면 7만5천 그릇의 가격으로 계산하면 약 8억원 정도의 돈입니다. 그에 대한 기록은 그 이후에도 신문에서 등장합니다. 전봉현 선생의 이름은 1929년 5월 2일 기사에 등장하는데 오산학교의 교사 신축 및 학교 확대를 위해 1천 5백 원을 추가로 기부한다는 기록입니다. 기부를 한 이사들의 명단 제일 앞에 그의 이름이 있습니다. 五山高普擴充崔昌學氏五萬圓寄附리사측에서도 근 만원 기부평븍정주(平北定州) 오산고등보통학교(五山高普)는 지금으로부터 23년 전 리승훈(李昇薰)씨의 노력으로 설립되어 조선사회에 많은 일꾼을 내보냈고 연 전에 30만원의 재단이 성립되며 고등보통학교로 승격되어 금년까지 제 2회 졸업생까지 내었는데 저간 교사 신축 등 학교 확대비로 결국 오만원의 부채를 보게 되어 그사이 만흔 곤난을 격거 오든바 이번 평븍 귀성에 잇는 삼성광업소(三成鑛業所) 주인 최창학(崔昌學)씨가 오만원을 기부하여 채무를 청장하는 동시에 동학교 이사들도 아래와 같이 기부금을 다시금 지출하여 경상비(經常費)에도 유감이 없게 되어 (校運)은 더욱 륭륭하게 되엇다더라.◇理事寄附▲田鳳現一千五百圓▲吳熙源一千五百圓▲李鏡麟一千五百圓▲吳致殷一千五百圓▲全起鴻一千五百圓▲趙始淵五百圓▲承啓漣三百圓-1929년 5월 2일자 동아일보● 민족을 위한 헌신의 발자취그러나 그 역시 어려움을 당한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26년 4월 30일에 전봉현 선생의 집에 강도가 침입하여 십여 원을 강탈해 도망친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선천군 선천면 천남동(宣川郡 宣川面 川南洞)에 사는 부호 전봉현(田鳳賢)씨 집에 지난28일 새벽 한시경 에 돌연히 강도 2명이 담을 넘어 들어와서 돈을 내라고 강청하다가 아침 집에 있는 돈이 십여 원에 불과함으로 있는 데로 모두 빼앗어 가지고 어데로 도방하여 버리었다는데 이 사실을 안 선천 경찰서에서는 사방으로 비상을 늘리고 범인 체포 (선천)-1926년 4월 30일자 동아일보●사진에 담긴 노블레스 오블리주강도를 당한 전봉현 씨의 한자는 어질 현(賢)을 쓰고, 기탁을 했던 전봉현 씨의 한자는 나타날 현(顯)을 쓰고 있습니다. 혹시 다른 인물일 가능성도 있지만, 당시 식자공들이 일일이 한자를 넣던 시절이라 오타가 많았고, 사건 직후 신문에 실릴 만큼 유명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동일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또 하나 주목할 만한 기사가 하나 더 있습니다. 남편의 뜻을 아내가 이어 기부를 계속 하였다고 합니다. 고인이 되신 전봉현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아내인 이용상 여사가 안악고보 설립을 위해 1만원을 기부했다는 뉴스입니다. 1936년도 2월 12일자 동아일보에 실렸습니다.부군(夫君)의 유지(遺志) 이어만원 기부고 전봉현씨 부인 이용상 여사이번 안악고보 설립 기성에 있어서 특히 일반 인사를 감격시킨 것은 이용상(李龍祥) 여사의 1만원과 유형내 여사의 50원 히사라고 한다. 이용상 여사는 일직 그 남편되는 전봉현(全鳳賢)씨가 재세(在世)중에 황해도 각처에 신교육 운동을 일으키어 발분망식하든 유지(遺志)를 받드러 이번에 안악고보 설립 운동을 보고 돌아간 남편의 펴다 못 편 뜻을 이으려 힘자라는데까지 재산을 제공한 것이며 유형내 여사는 어린아들을 데리고 홀로 지내는 터로 가세도 넉넉지 못하여 50원의 부담도 그 형편으로는 적지 않은 짐이건만 ‘과부의 한 푼’을 보탠다는 그 성심에 일반 인사를 감격케 한 것이라 한다.-1936년 2월 12일자 동아일보1920년대 신문에는 전봉현 선생 이외에도 많은 기부자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인창의숙(현 인창고) 설립자 성암 손창원은 30만원을 기부했고(1924년 3월 5일자 매일신보),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 강택진은 자기가 갖고 있던 땅을 소작인에게 기부하고 아이스크림 장사를 시작(1923년 6월 26일자 동아일보)했습니다. 큰 돈을 내놓지 못하는 서민들도 민족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십시일반 돈을 내는 캠페인에 동참하기도 했습니다. 1924년 6월에서 8월까지만 예를 들면, 간도 용정촌 동흥중학교 설립을 위한 기부금 모집을 위해 모집원들이 충남 당진과 예산에서 황윤수 김창학 1원부터 유진영 안덕수 100원까지 돈을 모금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모집원들은 충남 뿐만 아니라 경북 영주 등에도 내려가 기부를 받았고 신문은 그들의 이름을 지면에 실었습니다. 어떤 날에는 150명의 기부자 이름을 일일이 한자와 함께 지면에 남겨 놓았습니다. 그 명단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우리가 큰 역사와 큰 인물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이분들에 대한 기록도 온전히 복원시켜 후손들이 자랑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가능하면 그들의 얼굴 사진도 한 장씩 다 넣어서 말입니다. 오늘은 100년 전 자신의 재산을 민족 학교 운영을 위해 기부한 전봉현 선생의 사진을 통해,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습니다. 비록 해상도 낮은 흑백 사진이지만, 사진이 남아있어 그의 고결한 뜻과 헌신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다음주에 뵙겠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3일 서울 용산구 이마트의 종가집 포기김치 매대가 텅 비어 있다. 오랜 기간 지속된 무더위로 배추 수급이 어려워지면서 대상, CJ제일제당 등 주요사 김치 제품들이 온·오프라인 유통시장에서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마트 용산점에서 모델들이 ‘10월 가격 파격 선언’ 행사 상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마트는 3일부터 31일까지 국내산 돼지 앞다리 100g을 990원에 판매하는 등 필수 먹거리를 할인 판매한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북유럽에서 육아에 적극 동참하는 아빠를 ‘라테 파파’라 하죠. 커피 대신 책을 든 아빠, 여유를 보니 보통 고수가 아닙니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