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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부국 사우디아라비아가 감당하기에도 너무 원대한 꿈이었을까요. ‘비전 2030’의 핵심인 미래도시 ‘네옴(Neom)’ 프로젝트 공사가 상당 부분 중단됐습니다. 막대한 건설비를 쏟아부은 공사 현장이 거대한 공터로 남게 됐죠.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의 야심찬 꿈이 재정적 현실에 가로막혔는데요. 사우디는 이제 공상과학 영화 같은 미래 도시 대신 좀 더 현실적인 프로젝트에 집중하기로 전략을 바꿨습니다. 꿈에서 현실로 내려온 사우디 ‘비전 2030’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4월 17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사막에 남겨진 거대한 공터2022년 11월 사우디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의 방한으로 경제계가 들썩거렸던 것 기억하시나요. 당시 국내 기업과 290억 달러 규모의 MOU가 체결됐고요. ‘제2 중동 붐’에 대한 기대가 한바탕 일었는데요.지난달 이런 소식이 나왔습니다. 현대건설·삼성물산 컨소시엄의 ‘더 라인’ 지하터널 공사 계약 해지. 170㎞의 선형 도시 ‘더 라인’을 관통하는 고속철도용 터널 공사가 발주처 요청으로 중단된 겁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고속철도를 위해 조성된 도랑엔 바람에 날린 모래가 쌓이고, 한때 활기 넘쳤던 노동자 캠프는 유령 도시처럼 변했다’는 전직 직원의 말을 전했죠.계약이 해지된 네옴 사업은 더 라인만이 아닙니다. 중동 최초의 야외 산악 스키 리조트 ‘트로예나’의 상징인 거대한 인공호수와 다목적댐 건설 계약도 지난달 말 해지됐죠. 이 공사는 이탈리아 건설사 위빌드가 진행해 왔는데요. 메인 댐 건설을 위해 지난해 말까지 투입된 롤러 다짐 콘크리트(CRC) 양만 무려 100만㎥에 달하는 엄청난 대공사였어요(공정률 30%). 이제 계약 해지로 인해 거대한 미완성 콘크리트 구조물만 덩그러니 남겨지게 됐죠. 역시 트로예나에서 스키 빌리지 철골 공사를 진행해 온 말레이시아 건설사 에버센다이도 얼마 전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고요.네옴 프로젝트의 첫 가시적 성과물이었던 ‘신달라’ 아일랜드도 언제 완공될지 기약이 없습니다. 신달라는 2024년 10월 화려한 개장 파티를 열고 부분 개장했지만, 보수 공사를 위해 시설이 폐쇄됐고요. 월스트리트저널은 ‘고급 레스토랑에선 바카라 크리스털 잔과 악어가죽 의자를 창고에 실었고, 수만 달러에 달하는 23㎏ 어치의 벨루가 캐비어를 버렸다’고 최근 분위기를 전합니다.그렇다고 해서 네옴 프로젝트가 폐기된 건 아닙니다. 야시르 알-루마얀 사우디 국부펀드(PIF) 총재는 15일 5개년 투자 계획(2026~2030년)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네옴 프로젝트를 “상업적 타당성”에 따라 재조정하고 있다고 설명했죠. 당장 수익 내기 어려운 더 라인이나 트로예나 대신 부유식 첨단 산업도시 ‘옥사곤’ 완공에 우선 집중한다는 겁니다. 항만과 그린수소 플랜트가 들어서는 옥사곤은 네옴 프로젝트에서도 가장 돈이 될 만한 사업이기 때문이죠. SF 영화 같은 화려함 대신 실용주의를 택한 겁니다.한계에 부닥친 오일머니 ‘포스트 석유 시대’를 대비한다며 빈 살만 왕세자가 2016년부터 야심 차게 추진해 온 ‘비전 2030’. 그중에서도 핵심인 네옴 프로젝트가 전면적으로 재조정된 이유는 한마디로 돈이 부족해서죠. 사우디는 석유 부국이긴 하지만 오일머니에도 한계가 있으니까요.사우디는 지난해 재정적자가 2766억 리얄(약 111조원)로 2020년 팬데믹 이후 최대였습니다. 지난해 국제유가가 배럴당 60~70달러에 머물면서 재정을 떠받친 석유판매 수입이 급감했기 때문인데요. IMF에 따르면 사우디는 유가가 배럴당 96~105달러여야만 재정 균형을 맞출 수 있습니다. 그 차액만큼이 고스란히 재정적자가 되는 거죠. 이를 메우기 위해 정부가 국채를 찍어내면서 국가 부채는 GDP 대비 32%로 높아졌어요. 다른 나라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지만 10년 전 12%와 비교하면 급증한 거죠. 사우디는 열심히 해외 투자 유치에 나섰지만, 기대만큼의 성과는 내지 못했습니다. 외국인 직접 투자(FDI) 유치의 목표치는 높았는데(2030년 연 1000억 달러), 현실은 한참 못 미친 거죠(2025년 355억 달러). 그래서 사우디 국부펀드는 국영 석유공사 아람코 지분을 일부 더 팔았고요. 이제 국내 부유한 자산가와 펀드매니저, 민간 기업에 ‘애국 투자’를 독려 내지 압박하고 나섰는데요. 그런 와중에 이란전쟁까지 터졌으니, 골치가 아플 겁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석유 수출량이 평소의 절반으로 뚝 떨어지면서,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거든요.빠듯해진 자금 여건은 사우디를 현실주의로 돌아서게 만들었어요. 월스트리트저널이 입수한 내부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네옴은 최종 완공(2080년)까지 무려 8.8조 달러(1경3000조원)가 들어갈 거라고 하죠. 말도 안 되는 규모의 사업인 건데요. 사우디 국부펀드가 1조 달러 넘는 운용자산을 보유했다지만, 현실적으로 감당이 불가능합니다.사우디는 네옴 프로젝트를 대폭 축소·재조정하는 동시에, 좀 더 현실적인 프로젝트에 힘을 쏟기로 했어요. 2030년 세계 엑스포와 2034년 월드컵 개최처럼 당장 코앞에 닥친 이벤트들이 먼저인 거죠. ‘미래의 꿈’ 같은 네옴과 달리 엑스포나 월드컵은 국가 신인도가 달린 현실의 약속이니까요. 이미 네옴 공사 현장에 있던 중장비들은 리야드의 공항과 경기장 건설 현장으로 대거 이동했습니다.일상이 된 ‘비전 2030’아마 여기까지 읽고 ‘현실성 떨어지는 망상 같은 계획이 애초에 문제’라고 생각하실 거예요. 실제로 계획이 너무 거창한데, 누구도 감히 왕세자를 말리지 못했던 게 큰 문제였던 게 맞습니다. 특히 더 라인의 경우, 빈 살만 왕세자의 SF 영화 취향에 맞추다 보니 고층 건물 두 개가 일직선으로 길게 뻗어있는 희한한 구조로 설계됐다고 하죠.하지만 아주 최악은 아닙니다. 이제라도 틀린 걸 깨닫고 계획을 전면 수정했단 점에선 말이죠. 이에 대해 사우디 칼럼니스트 압둘라흐만 알 라시드는 이렇게 설명해요. “왕세자는 쫓기듯 서두르지 않고, 업적이나 언론의 시선에 크게 신경 쓰지도 않습니다. 틀에 갇혀있는 많은 지도자와는 다르죠. 2030년이 2040년이 된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요.”사실 10년 전 서른 살의 빈 살만 왕세자가 경제개혁 청사진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다들 그게 되겠냐며 코웃음 쳤어요. 당시 왕세자를 인터뷰했던 이코노미스트지가 “급진적인 경제 개혁은 위험한 도박”이라고 지적했을 정도였죠. 사우디 정부 관료가 그걸 해낼 역량이 없고, 국민도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라 봤기 때문인데요.돌아보면 그때만 해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것 중 일부는 이미 실현됐습니다. 여성 운전이 허용되면서(2018년) 여성 노동 참여율이 대폭 상승한 게(2017년 18%→2025년 34%) 가장 눈에 띄는 변화이죠. 이미 2030년 목표치(30%)를 조기 달성했을 정도입니다. 논란이 많았지만, 이전에 없던 부가가치세를 도입하는 데도 성공했고요(2018년). 심지어 초기 5%였던 부가가치세율은 이제 15%로 높아졌어요.무엇보다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경제를 다변화하는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비석유 부문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17년 35%에서 2024년 55%로 껑충 뛰었죠. 특히 관광과 엔터테인먼트 분야가 이제 사우디 경제의 성장을 이끄는 원동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2025년 1월 6개 노선 전 구간이 개통된 리야드 메트로는 사우디의 변화상을 실감 수 있는 현장인데요. 개통 직후부터 폭발적으로 이용객이 늘어난 이 무인 도시철도는 출퇴근 시간이면 늘 만원을 이룹니다. ‘비전 2030’이 실제로 시민의 일상을 바꾸고 있는 거죠.관광지로 개발 중인 리야드 외곽 디리야 지구의 모습도 놀랍습니다. 이곳의 ‘부자이리 테라스’엔 세련된 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한데요. 이곳에선 탁 트인 야외 테라스에 젊은 남녀가 앉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10년 전만 해도 이건 종교경찰에 잡혀갈 일이었는데 말이죠.리야드 근교에 조성 중인 엔터테인먼트 도시 ‘키디야’엔 세계에서 가장 크고 빠른 롤러코스터가 있는 식스 플래그 테마파크가 지난해 말 문을 열었고요. 이달 말엔 중동 최대이자 사우디 최초의 야외 워터파크 ‘아쿠아라비아’도 개장합니다.홍해의 섬과 내륙 사막 지역을 묶어 개발한 리조트 단지 ‘더 레드 씨’는 2024년부터 이미 리조트가 운영되고 있죠. 식스센스 서던 듄스, 세인트 레지스 레드 씨 리조트 같은 초호화 리조트는 전 세계 유명 인사들이 찾는 곳이 됐습니다.물론 네옴과 비교하면 저비용의 소박한 프로젝트라 하겠는데요. 적어도 ‘진짜 변화가 시작됐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핫스폿들입니다. 이제 비전 2030을 발표한 지도 만 10년. 화려한 조감도, 야심 찬 슬로건만이 아닌 눈에 보이는 성과가 필요한 시점이니까요.이란전쟁으로 불확실성이 극에 달했던 3월, 사우디의 건설 계약 규모는 전달보다 450% 급증했습니다. 신기루 같은 네옴은 멈췄지만, 수도 리야드 중심으로 현실적인 건설사업은 늘어나고 있어서죠. 이 새로운 흐름이 부디 한국 기업에 또 다른 기회를 열어주길 기대해 봅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4월 17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민족주의 포퓰리즘’의 원조가 결국 무너졌습니다. 12일 헝가리 총선에서 야당인 티서당이 압승하면서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16년 만에 물러나게 됐죠. 유럽 극우 정당과 미국 마가(MAGA) 세력에 영감을 줬던 선구자의 극적인 몰락입니다.입법·사법·언론은 물론 재계까지 장악하며 장기집권의 공고한 성을 쌓았던 오르반 정권. 하지만 반시장적 포퓰리즘 정책이 한계에 다다르며 민심은 돌아섰고요. 시대가 바뀌면서 더 이상 구식 프로파간다도 통하지 않게 됐는데요. 오르반의 참패가 남긴 교훈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4월 15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무너진 오르반노믹스138석(티서당) 대 55석(피데스당). 4월 12일 치러진 헝가리 총선은 야당 티서(Tisza)당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16년 만의 정권 교체이자, 티서당이 단독 개헌이 가능한 의석수(3분의 2 이상)까지 차지한 거죠. 앞서 네 차례 선거에서 모두 압승했던 여당 피데스(Fidesz)당의 참패입니다.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르반 정부는 이번에도 총선을 앞두고 필살기를 발휘했습니다. 달콤한 선심성 정책을 마구 쏟아냈죠. 공공요금 인하, 연 3% 고정금리의 주택담보대출 출시, 공무원에 연 100만 포린트의 주택 보조금(480만원) 제공, 세 자녀를 둔 어머니에 대한 평생 개인소득세 면제, 휘발유·경유 가격 상한제까지. 서민을 위하는 정부라는 이미지로 어필하려 했는데요.하지만 이번엔 통하지 않았습니다. 국민들이 그간의 경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죠. 당장 달콤한 그 혜택들이 사실은 미래 성장을 갉아먹는 부담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걸요.2020년대 초까지 헝가리는 유럽에서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는 모범사례로 통했습니다. EU에서 가장 낮은 법인세(9%)를 무기로 외국 제조업체의 생산기지(독일 자동차, 한국과 중국 배터리)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고요. 대대적인 공공 근로 프로그램을 통해 실업률을 3%대로 끌어내렸죠. 또 외국 자본이 보유한 통신·금융·교통·유통기업엔 ‘특별세’를 부과해 국가 재정을 강화했습니다. 이를 못 견딘 외국기업들이 떠나면서 전략산업이 속속 헝가리 기업으로 넘어갔고요. 무엇보다 파격적인 출산 장려 정책(세 자녀는 주택담보대출 원금 전액 탕감)으로 그 어렵다는 출산율 반등에까지 성공했어요. ‘외세(EU)를 배격하고 경제 주권을 되찾겠다’던 오르반 총리의 독창적 전략이 통하는 듯했죠.하지만 2022년을 기점으로 분위기는 반전됩니다. 그해 4월 총선을 앞두고 야당 지지율이 들썩거리자 오르반 정부는 대대적인 현금 살포 정책을 펼쳤어요. 자녀가 있는 부모들에게 2021년 낸 소득세를 전액 환급해줬고, 연금 수급자에겐 월 지급액의 100%를 추가로 얹어줬죠(이른바 ‘13개월차 연금’ 지급). 청년들엔 소득세를 면제해주고, 군인·경찰엔 특별 보너스를 제공했어요. 이렇게 수조 원을 뿌린 덕분에 오르반 정권은 총선에선 압승할 수 있었습니다. 대신 재정적자는 한층 불어나고 말았죠. 팬데믹이 끝나고 재정을 재정비해야 할 시기에 거꾸로 간 겁니다.이 총선 직후 EU 집행위원회는 헝가리에 대한 지원금 지급을 동결했습니다. “공공 조달 절차의 심각한 체계적 부정행위”가 이유였죠. EU 기금 중 상당 부분이 오르반 총리 가족과 측근이 운영하는 기업으로 줄줄 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골적인 정경유착은 오르반 정권의 장기집권을 지탱해주는 중요한 시스템이었으니까요. 선거 승리를 위해 돈은 잔뜩 풀어놨는데, EU에서 들어올 외화는 막혔으니. 외환시장은 뒤집어졌죠. 포린트화 통화가치는 채 1년도 안 돼 30% 넘게 급락합니다.설상가상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 가격이 폭등했죠. 그 여파로 유럽 전역에 인플레이션이 닥쳐왔는데요. 통화가치가 폭락한 헝가리는 최악의 물가고에 처합니다. 2023년 초 헝가리의 연간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무려 25%. 계란·빵·버터·치즈 같은 식품 가격은 1년 만에 50~60%씩 뛰었어요. 임금보다 물가가 훨씬 더 빠르게 오르면서 중산층과 서민들은 실질임금이 깎이며 급속히 가난해집니다.헝가리의 미친 물가는 학교와 병원까지 덮쳤어요. 고물가와 낮은 처우에 항의해 교사들이 전국적인 시위를 벌이다 해고되는 사태가 벌어졌고요. 생활고에 처한 의사들이 다른 나라로 떠나면서 지방병원 응급실과 분만실이 속속 폐쇄됩니다. 민생의 기본 인프라까지 무너진 거죠.냉장고가 텅 비었다 2025년 헝가리 경제성장률은 0.4%. 인근의 폴란드(3.6%)는 물론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와 비교해도 한참 뒤집니다. 특히 가난한 이웃나라로 여겼던 루마니아마저 1인당 GDP에서 헝가리를 추월하면서 헝가리인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죠.다른 경제 성적표도 처참합니다. 2025년 재정적자는 5.7조 포린트(약 27조원)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고요. 국가부채는 2년 연속 늘어서 GDP 대비 74.6%로 불어났죠. 한동안 자랑했던 ‘완전 고용’은 이제 옛말이 됐고, 2026년 2월 공식 실업률은 4.8%로 10년래 최고를 찍었습니다.지금의 경제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장은 병원인데요. 예산 고갈로 병원엔 기본 의료 소모품마저 동나서 거즈, 소독약, 화장지까지 환자가 준비해야 할 지경이고요. 수술을 하려면 1~3년, 외래진료도 6개월이나 대기해야 할 정도로 의료 시스템이 붕괴됐습니다. 이렇게 쪼들리는데 출산율이 오를 리가 없겠죠. 2021년 1.61명까지 높아졌던 출산율은 이후 해마다 낮아져 2025년 1.31명으로 추정됩니다. 오르반 정권이 대대적인 출산장려정책을 내놓기 전인 2009년 수준으로 다시 돌아간 거죠. 정부가 GDP의 5.5%라는 막대한 예산을 가족정책에 투입한 것을 생각하면 허무한 결말입니다.그렇습니다. 결국 문제는 경제였던 거죠. 어느 정부든 경제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아무리 인기 영합적인 정책을 펼치고, 언론을 장악하고 있다 한들 말이죠.‘TV와 냉장고의 싸움’. 과거 러시아에서 선거판을 설명하며 나온 표현이죠. 정치적 선전(TV)과 국민의 경제적 현실(냉장고) 중 어느 게 승리하느냐에 선거 결과가 좌우된다는 뜻인데요. 전 주헝가리 미국 대사인 데이비드 프레스먼은 이번 헝가리 총선 결과를 두고 뉴욕타임스에 이렇게 말합니다. “(오르반 정권이) TV와 냉장고 사이의 간극을 메울 수 없게 됐습니다. 시민이 병원에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면서 총리가 호화로운 시골 저택에서 희귀동물(얼룩말)을 키운다면 선전 활동이 할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죠.”TV를 무력화한 스마트폰헝가리는 언론 산업 대부분을 정부가 사실상 장악한 나라입니다. 오르반 총리는 취임 직후부터 친정부 언론사엔 정부 광고비를 몰아주고, 독립 언론엔 벌금을 물리는 식으로 입맛에 맞게 시장을 재편했죠. 이 과정에서 많은 언론사가 오르반 총리 측근 기업 소유로 넘어갔고요. 아예 친정부 성향 매체 500개를 묶어 관리하는 ‘중부유럽 언론 미디어 재단’이란 재단이 생겨났을 정도인데요. 인쇄 매체와 라디오 시장의 80% 이상, TV 시장의 57%가 정부의 관리 아래 있는 겁니다.그래서 헝가리 언론매체는 사실상 정부 기관지 노릇을 해요. 일간지들의 헤드라인 제목과 사진이 모두 똑같을 정도죠. 편파보도는 당연합니다. 2025년 국영방송 MTVA 뉴스 방송의 약 4분의 3을 집권여당이 차지했다고 하죠. 애초에 공정한 게임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헝가리 친정부 매체들은 선거전 초반부터 야당 티서당 대표인 페테르 머저르를 ‘가정폭력범’, ‘배신자’, ‘자기애적 인격장애(나르시시스트)’로 몰아갔어요. 머저르는 브뤼셀(EU)의 꼭두각시일 뿐이며, 정권이 바뀌면 헝가리 청년들이 우크라이나 전쟁터에 끌려갈 거란 흑색선전이 난무했죠.예전 같으면 이런 대대적인 언론 공세에 야당은 속절없이 당했을지 몰라요. 하지만 2026년의 선거판은 달랐죠. 이제는 TV(정부의 일방적 선전)와 냉장고(국민의 실제 삶)의 일대일 싸움이 아니거든요. 스마트폰(디지털 미디어)이란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으니까요.디지털 미디어는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고요. 45세의 페테르 머저르는 디지털 콘텐츠의 문법을 아는 사람이었죠. 그는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를 직접 관리하며 민첩하게 소통했는데요. 예컨대 자신을 겨냥한 가짜뉴스나 딥페이크 영상이 나오면 바로 페이스북 라이브를 켜고 실시간으로 반박했고요. 하루 5~6곳을 돌며 강행군하는 유세 현장도 SNS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중계했어요.특히 머저르와 그 지지자들은 흑색선전까지 밈(meme)으로 유머러스하게 역이용했는데요. 머저르가 작은 보트 위에서 춤추는 틱톡 영상이 그 예이죠. 친정부 매체가 자신을 춤추고 술 마시며 놀기 좋아하는 인간이라며 깎아내리자 ‘그래, 나도 춤추고 놀 줄 아는 보통 사람이다’라며 받아치는 듯한 영상을 찍어 올렸어요. 오히려 젊고 열정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는 결과가 됐죠.머저르와 티서당은 단순히 SNS만 잘한 것이 아니라, ‘티서 월드’ 라는 독자적인 플랫폼을 운영했습니다. 머저르에 대한 가짜뉴스가 나오면 바로 앱이 푸시알람을 띄우고 반박용 카드뉴스를 즉시 공유할 수 있는 기능을 탑재했죠. 실시간 팩트체크로 언론매체의 흑색선전을 무력화한 겁니다. 젊은 인플루언서들도 영향력을 발휘했어요. 21세 틱톡커 오시카 칼라이가 대표적인 인물인데요. 개인 일상을 공유하며 인기를 끌었던 그는 선거를 앞두고 “우리의 한 표가 중요하다. 우리 세대가 헝가리를 바꿔야 한다”면서 젊은 층의 투표를 독려했고요. Z세대의 적극적인 투표 참여는 이번 총선의 높은 투표율(79.5%)과 야당의 압승을 이끈 원동력이 됐죠.결국 이번 선거는 일방적인 프로파간다(TV)와 참여형 쌍방향 소통(스마트폰)의 대결이었고요. 당연히 스마트폰의 완승이었습니다. 역대급 홍보 예산을 쏟아부어 TV와 라디오, 신문, 옥외 광고판을 도배하고도 오르반 정권이 패배한 이유죠.전 세계가 주목한 헝가리 총선은 화려하게 막을 내렸지만, 이 나라의 실질적 변화까지 갈 길은 멉니다. 경제 권력은 여전히 오르반 총리의 측근들이 쥐고 있고, 약속한 공약(교사 임금 인상, 의료 시스템 복구 등)을 이행하기엔 정부 곳간이 텅 비었죠. ‘연료비가 3배로 치솟고, 연금이 깎이고, 세금이 뛸 것’이라며 불안해하는 국민들도 많고요. 16년 만의 정권교체가 헝가리의 새로운 탄생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어쩌면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이제부터일지 모릅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4월 15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인공지능(AI) 기술 경쟁은 곧 데이터센터 구축 경쟁이기도 하죠. 빅테크 기업들이 천문학적인 금액을 데이터센터 건설에 쏟아붓고 있는 이유입니다. 국내 메모리 반도체 업계의 초호황을 이끄는 원동력이기도 하고요.그런데 AI 데이터센터가 늘어갈수록 데이터센터에 대한 혐오도 커져 갑니다. 세계 곳곳에서 지역주민과 정치인이 뭉쳐서 ‘우리 지역엔 안 된다’며 데이터센터 건설을 막아 세우고 있죠. AI 산업의 ‘물리적 병목지점’으로 자리 잡은 데이터센터 님비(NIMBY) 현상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4월 10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미국: 전기료 올리는 주범은? 4월 6일 아침,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시의회 의원인 론 깁슨 집에 12발의 총알이 날아들었습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식탁 바로 앞까지 총알이 박혔죠. 범인이 문 앞에 남긴 쪽지엔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어요. ‘데이터센터 반대’. 며칠 전 시의회가 데이터센터 개발을 승인한 것에 항의하는 누군가가 총격을 가한 거죠. 미국에서 데이터센터 반대 여론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 사건인데요.이런 여론에 맞춰 데이터센터 건설을 막아 세우려는 정치권 움직임도 커집니다. 메인주 하원은 얼마 전 2027년 11월까지 대규모(20MW 이상) 데이터센터 건설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어요. ‘전기 먹는 하마’인 데이터센터가 전력망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한다는 명분이죠. 이 법안은 민주당이 장악한 주의회 상원을 무난히 통과 예정이고요. 아마 메인주는 미국에서 최초로 ‘데이터센터 모라토리엄(건설 일시 중단)’을 선언한 주가 될 겁니다.그리고 이건 시작일 뿐입니다. 이미 뉴욕, 오클라호마, 사우스캐롤라이나, 미시간, 조지아 등 10개 주에서 데이터센터 일시 금지 법안이 제출됐거나 추진 중이거든요. 특히 미국 데이터센터 최고 중심지인 버지니아주 의회엔 데이터센터 건설에 반대하는 법안이 60건 넘게 제출됐어요. 모두가 ‘우리 지역은 안 돼’라며 빗장을 걸어 잠글 기세인 거죠.전국적인 움직임도 본격화했어요. 지난달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과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 하원의원이 공동 발의한 ‘AI 데이터센터 모라토리엄’ 법안인데요. 미국 전역에서 신규 AI 데이터센터 건설과 확장을 일시적으로 전면 중단하자는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입니다.사실 데이터센터라는 건 1990년대 인터넷 혁명 이후 있었고요. 창문도 없는 상자갑 같은 거대한 건물이 보기 싫다며 건설에 반대하는 여론도 이전부터 적지 않았는데요. 이런 반감이 미국에서 최근 들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배경엔 이게 있죠. 전기료 인상.미국 에너지부에 따르면 2025년 주택용 전기요금은 전국적으로 평균 4.9% 올랐습니다. 전체 소비자 물가상승률(2.7%)을 크게 웃돌았죠. 또 올해도 4%가량 오를 거란 전망이 나와요. 전력 회사들이 송전망 인프라 투자를 크게 늘린 것과 관련 있는데요. 전력망 업그레이드는 항상 필요한 일이지만, 유독 지금 투자가 활발한 데는 AI 데이터센터 영향이 큰 게 사실입니다.AI 데이터센터는 전력 소비량에서 일반 데이터센터와 차원이 달라요. 기존의 일반 기업용 데이터센터는 랙당 5~15kW 수준이었지만, 고성능 GPU를 탑재한 AI 전용 40~100kW를 쓰죠. 말 그대로 ‘전기 먹는 하마’인데요.이런 AI 데이터센터 건설 붐은 전력망에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클린뷰 집계에 따르면 현재 미국에서 개발이 진행 중인 데이터센터는 883개로, 총 276.6GW 용량이 추가될 예정인데요. 이는 현재 운영 중인 602개 데이터센터 용량(16.9GW)의 무려 16배에 달하는 거죠. 열심히 송전망을 깔고 변전소를 지어도 이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그리고 여기서 질문. 그 많은 AI 데이터센터 건설, 도대체 누구한테 이익이 되는 거죠? 일단 AI 기술과 관련된 모든 기업, 특히 앞서나가는 빅테크 기업엔 이익이죠. 데이터센터는 AI 기술 경쟁의 승리자로 도약하기 위한 필수요소니까요. 또 지역 정부 입장에서도 상당한 돈이 됩니다. 그 지역에 데이터센터가 설립되면, 거둬들일 수 있는 재산세가 짭짤하니까요.국가 경제에 대한 기여도는 상당하죠. 배런스에 따르면 2025년 1~9월 미국의 실질 GDP 성장 기여도에서 데이터센터 건설이 차지하는 비중이 14%나 돼요. 건물을 짓고 장비를 사고 전력망을 까는 모든 활동이 경제 호황에 톡톡히 기여하고 있죠. 무엇보다 미국이 세계 AI 기술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선 지금 꼭 필요한 투자입니다. 그럼 ‘이렇게 모두에게 이익이 되니까 전기요금은 좀 감수합시다’라고 하면 주민들에게 먹힐까요? 그럴 리가요. 국가와 기업이 잘 되기 위해 내 지갑을 희생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도 거대하고 못생긴 건물을 매일 마주치고, 24시간 돌아가는 냉각팬의 저주파 소음에 시달리면서 말이죠. 마치 빅테크를 위해 소비자가 일종의 보조금을 제공해야 한다는 허무맹랑한 얘기처럼 들릴 뿐이죠.게다가 AI 기술자라면 모를까, 대부분 주민들은 아직 데이터센터나 AI 기술의 사회적 가치를 실감하지 못합니다. 기술 저널리스트 재스민 선은 이렇게 전하죠. “이곳(데이터센터 인근)에 사는 대부분 사람은 프로그래머가 아닙니다. 그들은 AI를 기껏해야 ‘구글 검색보다 나은 것’ 정도로 여기죠. 제가 만난 사람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습니다. ‘이 모든 소동이 고작 내 아이들이 부정행위를 하는 걸 돕기 위한 것인가요?’”말레이시아: 먹을 물이 부족하다 사실 데이터센터는 화력발전소처럼 매연을 뿜는 것도 아니고, 물류창고처럼 새벽에 대형 트럭이 오가는 것도 아닙니다. 직접적으로 해를 끼치는 시설이라고 하긴 좀 어렵죠. 특히 AI 시대에 중요한 게 ‘데이터 주권’이잖아요. AI 산업을 키우고 데이터 자산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국 내에 데이터센터를 둬야 하는 건 맞습니다.바로 이런 이유로 데이터센터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선 신흥국들이 많은데요.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인도네시아, 브라질 등은 법인세와 장비 수입 관세를 파격적으로 감면·면제해주면서 데이터센터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경쟁에서 현재 가장 앞서간 나라를 꼽으라면 여깁니다. 말레이시아.2022년 말레이시아는 해외 디지털 기업 투자유치를 위해 파격적인 혜택을 내놨어요. 데이터센터 구축에 투입된 자금의 60~100%를 세액 공제해주고, 관련한 장비 수입 관세를 면제해 주기로 했죠. 싱가포르의 빈자리를 과감하게 치고 들어온 겁니다. 동남아시아 데이터센터 허브였던 싱가포르는 당시 국토와 전력 부족 탓에 규제를 대폭 강화했거든요.싱가포르와 비교하면 땅과 건설비용은 반값인데, 파격적인 세제 혜택에 싱가포르 바로 옆이란 최적의 입지까지. 글로벌 기술 기업들이 돈을 싸 들고 말레이시아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오라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 엔비디아 같은 미국 빅테크가 각각 수십억 달러의 투자를 약속하며 진출했고요. 바이트댄스와 알리바바, 텐센트 같은 중국 기업도 말레이시아를 택했죠.유례없는 데이터센터 건설 붐이 도래했습니다. 특히 싱가포르와 다리 하나 사이인 조호르 지역은 북적거렸죠. 야자수와 고무나무 농장을 밀고 데이터센터가 들어섰고요. 2021년 고작 10MW에 불과했던 이 지역 데이터센터 용량은 지난해 1025MW로 불어났습니다. 지금도 건설 공사가 한창이어서, 2027년이면 조호르 지역 용량만 2.7GW가 될 전망이죠. 싱가포르(1.4GW)를 뛰어넘는 동남아시아 최대 데이터센터 허브로 도약할 날이 머지않았는데요.하지만 ‘AI 열풍의 최대 수혜국’이라던 열광은 가라앉고 있습니다. 자원이 너무나 빠르게 고갈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력과 물, 둘 다요.송전망이 포화상태에 이르면서 전력공사는 대대적인 전력망 확장에 나서야 했고요. 이를 메우기 위해 지난해 기본 전기요금을 14%나 올렸습니다. 그래도 전기료 인상은 경제성장을 위해 필요하다며 이해해 주는 분위기이긴 했는데요.진짜 큰 문제는 식수 부족이죠. 지난해 조호르 주민들은 여러 차례 단수를 경험했습니다. 원래도 가뭄에 취약한 지역인데, 엄청난 양의 냉각수를 소비하는 데이터센터가 속속 들어섰으니 그럴 수밖에요. 정부 추산에 따르면 이 지역 데이터센터 47곳(건설 중인 곳 포함)이 필요로 하는 냉각수량은 하루 6억7500만 리터. 올림픽 규격 수영장 270개를 채울 양입니다.참다못한 조호르 주민들이 행동에 나섰습니다. 2월 초 한 데이터센터 건설 현장 앞에 50여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죠. 말레이시아에서 데이터센터 건설에 반대해 벌어진 첫 번째 시위였어요.분위기는 급격히 반전됐고요. 결국 말레이시아 정부도 속도 조절에 나섰습니다. 안와르 총리는 2월 말 국회 답변에서 “에너지와 물 사용량이 급증해서 주시하고 있다”면서 “AI나 첨단기술과 관련 없는 데이터센터 신청은 이미 모두 중단했다”고 밝혔죠. 앞으론 말레이시아 경제 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전보다 더 깐깐하게 따져서 데이터센터 건설을 승인하겠단 뜻입니다. 아일랜드: 4년 만에 모라토리엄 해제데이터센터 님비(NIMBY: Not In My Back Yard)현상과 모라토리엄(건설 중단)의 원조 격인 나라로는 아일랜드가 있습니다. 빅테크의 유럽 데이터센터 허브로 통하는 아일랜드는 2021년 규제당국이 수도 더블린 인근의 신규 프로젝트를 사실상 금지했어요.당시 아일랜드는 이미 데이터센터가 전체 전력의 14%를 차지했고요(2024년엔 약 22%). 쓸 전기가 부족해서 주택과 공장 건설이 지연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환경단체와 지역 주민들이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났고요. 결국 이게 정부의 데이터센터 모라토리엄 결정으로 이어졌던 거죠.그리고 4년이 지난 지난해 12월, 아일랜드가 다시 신규 데이터센터 건설을 허용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데이터센터는 혁신적인 경제를 가능케 하는 핵심 인프라”라면서 말이죠. 그런데 무작정 허용은 아니고요. 이전에 없던 엄격한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앞으로 새로 짓는 데이터센터는 가동 후 6년 안에 전력 사용량의 80% 이상을 재생에너지로 채워야 한다는 거죠. 언뜻 보면 너무 무리한 요구 아닌가 싶습니다. 아일랜드의 재생에너지 발전이 늘고는 있다지만, 아직은 그 비중이 40% 정도밖에 되지 않거든요.하지만 실험은 해볼만 합니다. 실제 더블린 북쪽 드로게다에선 재생에너지 발전소와 AI 데이터센터를 결합한 첫 번째 프로젝트가 지난달 발표됐어요. 데이터센터가 쓸 전기는 스스로 알아서 공급하는(그것도 친환경적으로) ‘자급자족형’으로 바뀌는 거죠. 만약 아일랜드의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새로운 표준이 될지도 모릅니다.IMF에 따르면 2030년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는 2023년보다 4배로 늘어난 1500TWh로, 인도(세계 3위)에 맞먹을 거라고 하죠. 몇 년 만에 거대한 국가 하나가 생겨나는 셈인데요. 이거 정말 감당할 수 있는 거 맞을까요. AI 기술 경쟁은 결국 송전망과 상수도라는 물리적인 자원의 싸움일 수밖에 없겠습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4월 10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되고 LNG 운반선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치솟는 LNG 가격과 바닥난 재고로 각국이 비상상황인 지금, 조용히 승리를 자축하는 나라들이 있죠. 지난 몇 년 동안 극적인 재생에너지 전환을 이룬 파키스탄과 스페인 이야기입니다.호르무즈 해협이 막힌다고 해서 햇빛과 바람이 막히는 건 아니잖아요. 기후변화가 아닌 에너지 안보 면에서 재생에너지가 갖는 효용을 새삼 깨닫게 되는데요. 트럼프 대통령의 전쟁으로 태양이 승리하게 된 아이러니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4월 8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태양이 만든 파키스탄의 반전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되면서 아시아 국가의 중동산 원유·LNG 수입이 뚝 끊겼죠. LNG 수입 물량을 전부 카타르와 아랍에미리트에서 들여왔던 파키스탄도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매달 9척씩 들어오던 LNG 운반선이 3월엔 고작 2척만 입항했으니까요. 예전 같으면 아주 난리가 났을 거예요.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 그랬거든요. 당시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이 끊기면서 LNG 가격이 급등했고요. 파키스탄으로 향하던 LNG 운반선들이 3배 더 높은 가격을 부른 유럽 국가로 유턴해서 가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파키스탄은 유럽보다 더한 최악의 에너지난에 처하게 됐죠.무더위 속에서 전국적으로 심각한 정전 사태가 일어났고, 가정 전기요금이 150% 넘게 치솟았고, 급기야 비싼 LNG 물량을 확보하느라 외환보유고가 바닥나 버렸습니다. 결국 국가부도(디폴트) 위기에 몰린 파키스탄은 IMF 구제금융을 받는 신세로 전락했죠. 에너지 대란의 최대 피해자는 구매력에서 밀리는 개발도상국이라는 씁쓸한 현실을 확인시켜주는 사건이었습니다.그런데 지금 파키스탄은? 물론 파키스탄 정부도 이란전쟁 이후 에너지 절약을 위해 재택근무와 주 4일제를 권장하고 있긴 한데요. 아직 대혼란의 기미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4년 전과 달리, 지금은 LNG 수입이 막힌다고 해서 전기 공급이 당장 끊길 위기에 처하진 않기 때문입니다. 집집마다 건물 위에 펼쳐진 파란색 패널, 즉 옥상 태양광 발전의 힘이죠.2022년 LNG 위기 이후 파키스탄에선 유례없이 폭발적인 태양광 발전 붐이 일었습니다. 특이한 건 이게 정부가 보조금을 주며 장려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거죠.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친환경적 움직임과도 거리가 멀고요. 이건 어디까지나 시장 논리에 따른 선택이었어요. 비싼 전기요금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개개인이 자기 지갑을 열어 태양광 패널 설치에 나선 겁니다. 초기 투자비를 감당할 수 있는 중산층 가정과 자영업자, 기업들이 앞다퉈 옥상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했어요. 때마침 공급 과잉에 시달리던 중국산 태양광 패널이 싼값에 수입되던 시기였고요.그 결과 지난해 기준 파키스탄에 설치된 태양광 발전 용량은 무려 40GW(추산치). 파키스탄 전체 국가 전력망의 설비용량(46.2GW)에 맞먹는 규모입니다. 태양광 발전이 빠르게 급증하면서 이 나라의 LNG 발전량은 과거의 절반 수준으로 확 줄었고요. 한동안은 남아도는 LNG 수입 물량이 골칫거리가 됐을 정도였어요. 10~15년 장기 계약을 맺은 중동산 LNG 수입 물량을 다른 나라에 전매해야 했죠. 그리고 불과 4년 만에 다시 찾아온 에너지 대란. 이번엔 태양광 발전이 파키스탄 에너지 안보의 든든한 방어막이 되고 있습니다. 아와이스 레가리 전력부 장관은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국민 주도의 태양광 혁명이 파키스탄의 에너지 자립도를 높였다”고 강조했죠.카타르 알자지라, 영국 가디언, 일본 니케이 등, 전 세계 언론이 이런 파키스탄을 주목합니다. “태양광 붐이 파키스탄을 호르무즈 위기에서 보호했다”면서 말이죠. 글로벌 에너지 위기의 최약체로 꼽혔던 파키스탄의 놀라운 반전입니다.나홀로 여유만만 스페인 파키스탄과 함께 선견지명을 인정받게 된 또 다른 나라가 있죠. 바로 유럽의 재생에너지 강자, 스페인입니다.스페인은 2018년 사회당 정부 집권 뒤 재생에너지 친화적 정책을 줄곧 펼쳐왔어요. 태양광 발전에 대한 규제를 허물고, 기업이 태양광 발전사와 직접 장기계약을 맺을 수 있게 시장을 열어줬죠. 유럽에서도 유난히 풍부한 햇빛과 강한 바람 덕분에 태양광과 풍력 발전단가는 급격히 낮아졌고요. 지난 5년 사이 스페인의 재생에너지 설비용량은 2배로 급증했습니다. 다른 어느 유럽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성장세였죠. 이제 스페인 전력의 약 60%는 재생에너지로 생산됩니다. 원자력까지 합친 ‘무탄소’ 발전 비중은 80%에 달하고요.하지만 급속한 재생에너지 확대에 대한 반대 여론도 적지 않았습니다. 가정용 옥상 태양광 위주인 파키스탄과 달리 스페인은 대규모 풍력·태양광 발전단지가 시골에 들어섰는데요. 태양광 패널의 ‘거울 바다’가 경관을 해치고 풍력 터빈이 소음을 유발한다는 불만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고요. 결정적으로 지난해 4월 이베리아반도 역사상 최대 규모 정전 사태로 전국이 마비됐습니다. 이게 다 과도한 태양광 의존 탓이란 비판이 쏟아졌고요. 스페인의 에너지 정책은 국제적인 조롱거리가 됐죠. 실제론 태양광 자체보다는 이를 받쳐주지 못한 낙후한 전력망이 진짜 원인이긴 했지만요.하지만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지난 3월 19일, 브뤼셀 EU 정상회의에 참석한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밝혔습니다. “지난 토요일 스페인의 메가와트시당 전기 가격은 14유로였지만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에서는 100유로를 넘었습니다. 이건 우연이 아닙니다. 스페인 정부가 지난 8년간 재생에너지 보급의 선두에 서기 위해 노력해 온 결과입니다.” 호르무즈 봉쇄로 LNG 값이 급등하면서 온 유럽이 전전긍긍하던 그때, 스페인만은 달랐던 거죠.이를 두고 폴리티코는 이렇게 전합니다. “유럽의 다른 국가들이 치솟는 에너지 가격에 대한 신속한 해결책을 찾느라 분주한 가운데 , 스페인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동남아도 LNG 대신 태양광이 대세 심각한 에너지 충격은 에너지 정책의 큰 전환점이 되곤 합니다. 이는 1970년대의 미국을 보면 알 수 있죠. 1973년 1차 오일쇼크로 국제유가는 순식간에 4배로 치솟았고요. 이때부터 미국 운전자들이 더 작고 연비 좋은 차를 사면서 일본차의 전성시대가 열렸어요. 1979년 2차 오일쇼크 땐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이 백악관 지붕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기도 했죠. 미국 엑손 연구소에서 세계 최초의 리튬이온전지가 발명된 것 역시 1970년대였습니다. 절실함은 변화를 가져오는 법이니까요.그럼 이번 에너지 위기는 어떨까요. 벌써부터 여러 나라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LNG=저탄소 화석연료’라는 공식이 통했고요. 많은 나라들이 석탄을 LNG로 대체하는데 열을 올렸는데요. 이번 전쟁으로 깨닫게 된 거죠. 석유든 LNG든 자기 나라에서 생산할 수 없는 연료에 의존하는 건 매우 위험할 수 있단 걸요. 특히 중동산 화석연료 의존도가 유독 높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바빠졌는데요. 베트남 최대 민간 기업 빈그룹은 얼마 전 하이퐁에 추진해 온 대규모 LNG 발전 프로젝트의 변경을 정부에 요청했습니다. LNG 발전 대신 태양광·풍력 발전과 배터리 저장장치(ESS)를 결합한 발전 방식으로 전환하게 해달라고요. 빈그룹은 서한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비용 요인 외에도 수입 연료에 대한 의존은 에너지 안보, 공급 자율성, 베트남의 전력 생산비용 통제능력에 상당한 어려움을 초래합니다.” 자기네 땅에서 스스로 생산할 수 있는 건 결국 재생에너지라는 결론인 거죠.마르코스 대통령이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한 필리핀은 파키스탄식 분산형 태양광 발전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3월 말 국영 공무원 연금이 가정용 태양광 패널 설치를 위한 대출 신상품을 내놨어요. 200만 전현직 공무원을 대상으로 최대 50만 페소(1246만원)까지 연 5% 금리로 대출해 주는데요. 출시 하루 만에 1200건 넘게 신청이 들어올 정도로 관심이 뜨겁다고 합니다. 인도네시아 프라보워 대통령도 3월 말 야심 찬 태양광 확보 계획을 발표했어요. 무려 100GW에 달하는 태양광 발전 설비용량을 3년 안에 달성하겠다는 계획이죠. 현재 누적 용량은 고작 1GW에 불과한데 말이죠. 전문가들은 인도네시아의 전력망 인프라나 인허가 기간을 고려했을 때 아무리 빨라도 5년 안엔 불가능하다며 다소 회의적인 반응인데요. 추진력 강하기로 유명한 인도네시아 정부가 밀어붙이고 있으니 두고 볼 일입니다.결국 이란전쟁으로 재생에너지 전환이 기후변화 문제만이 아닌 에너지 안보 문제라는 교훈을 모두가 얻기 시작했습니다. 왜 4년 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겪고도 그걸 모른 채 지나쳤을까라는 한탄이 뒤늦게 나오는데요. 동시에 이 상황이 에너지저장장치(ESS) 호황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국내 배터리 업계에도 봄이 찾아오기를 기대해봅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4월 8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쓰레기 종량제 봉투 사태로 전 국민이 나프타(naphtha)가 뭔지 알게 됐죠. 이란전쟁의 끝이 보이지 않으면서 ‘나프타 쇼크’가 배달용기부터 페인트까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는데요. 이를 보며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플라스틱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걸요.연료용 기름이 없으면 휘발유차 대신 전기차를 타는 방법이 있죠. 하지만 생활 속 플라스틱을 대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불과 70~80년 전만 해도 우리가 플라스틱 없이 살았다는 걸 생각하면 놀라운 점이죠. 이란전쟁으로 흔들리는 플라스틱 세상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4월 3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전쟁이 키운 플라스틱 산업 가볍고 저렴한데 튼튼하고 위생적이기까지 한 소재. 현대 문명은 플라스틱의 등장을 반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19세기 중반 처음 등장한 이 혁신적 소재는 코끼리 상아(당구공)와 거북이 등껍질(머리빗), 깍지벌레 분비물(도료·절연재·레코드) 같은 천연소재 자리를 대체했죠. 1940년 5월 ‘실크처럼 윤기 난다’고 광고한 듀폰의 나일론 스타킹은 미국 뉴욕에 출시된 첫날에만 무려 80만 켤레가 팔려나갔어요.1920~30년대 초기 플라스틱 산업은 원유와 천연가스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쓸모없는 폐기물을 활용하려는 석유기업의 열망에서 탄생했습니다. 이걸 획기적으로 키운 건 제2차 세계대전이었죠. 낙하산, 항공기 부품, 로프, 헬멧 내피 등 수많은 군수품에 플라스틱이 필요했고요. 미국 정부가 석유화학 공장에 대대적인 투자를 하면서, 전쟁 기간 플라스틱 생산량은 4배로 급증했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플라스틱의 전성기는 본격적으로 열립니다. 석유화학 공장을 헐값에 인수한 민간 기업들이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정용 소비재를 쏟아냈기 때문이죠.미국 해병대 구명정에 쓰였던 폴리스티렌은 일회용컵과 아이스박스가 됐고, 영국군이 레이더용 고주파 케이블에 썼던 폴리에틸렌은 마트 비닐봉지와 음식 보관용기로 탈바꿈합니다. 손가락 하나로 들 수 있는 여행 가방, 강철처럼 튼튼한 낚싯줄, 내용물을 확인할 수 있는 투명 포장재, 유리로 조각한 듯한 인공 꽃. 플라스틱 신제품이 열어준 새로운 풍요의 시대에 소비자는 열광했죠. “다양한 시장에서 플라스틱은 전통적인 소재에 도전해 승리했습니다. 자동차에서는 강철을, 포장재에서는 종이와 유리를, 가구에서는 목재를 대체했죠.” (‘플라스틱: 독성 사랑 이야기’ 저자 수잔 프라인켈)플라스틱이 연 풍요의 시대1960년대, 플라스틱은 한국인의 일상에서도 흔해집니다. 덕분에 이전엔 없는 생활상이 나타났죠. 대나무 살의 일회용 비닐우산은 ‘비 오는 날의 새로운 풍물’로 자리 잡았고, 아이들은 학교 앞 구멍가게에서 파는 비닐봉지에 들어있는 불량식품 주스를 사 먹었어요. 두부를 담는 목판은 위생을 이유로 플라스틱판으로 바뀌었고, 질기고 저렴한 화학섬유 옷감이 농촌 아낙네의 일상복이 됩니다. 종이장판 대신 집집마다 비닐 장판이 깔렸고요.하지만 신소재 플라스틱에 대한 열광은 1970년대부터 의심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일부 플라스틱 제품에서 유해물질이 검출됐다는 소식이 국내외에서 터져 나왔기 때문이죠. 이어 1980년대 들어서는 전 세계적으로 환경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넘쳐나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사회문제화됐고요. 1990년대 말엔 환경호르몬에 대한 공포(생식기능을 저하시킨다)가 극에 달했죠.플라스틱의 이미지는 추락했지만, 플라스틱 산업의 성장은 결코 꺾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폭발적인 생산량 증가세를 이어갔죠. 1950년대 200만t이던 전 세계 플라스틱 생산량은 2000년대 초반 2억t을 넘어섰고, 2024년엔 4억6000만t으로 늘었습니다. 이제 플라스틱은 거의 모든 생활 영역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플라스틱 마루가 깔린 집에서 플라스틱 베개를 베고 자고, 플라스틱 통에 담긴 물을 마시고, 플라스틱 칫솔로 이를 닦고, 플라스틱 키보드 치고 있죠.사실상 우리는 플라스틱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플라스틱은 현대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해 주는 필수 요소가 되어버렸어요. 생각해 보세요. 만약 플라스틱 없이 면과 모, 종이와 목재, 금속 같은 천연소재에만 의존한다면? 건축이나 제품 생산 기간은 더 길어질 거고요. 천연재료는 공급을 마음대로 늘릴 수 없어서 제품 생산량에도 한계가 있겠죠. 대부분 제품 가격은 지금보다 비쌀 수밖에 없고요. 아마도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많은 생필품들이 소수 부유층만 누리는 귀한 물건으로 남아있을 겁니다. 결국 값싸고 풍부한 플라스틱이 있기에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생산과 소비의 끊임없는 확장이 가능했어요. ‘탈 플라스틱’이 생각처럼 쉽지 않고 어쩌면 불가능한 이유이죠.이란전쟁으로 강제 ‘탈 플라스틱’?이란전쟁은 평화롭던 플라스틱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놨습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중동산 나프타 수입이 꽉 막혔기 때문이죠. 나프타는 석유를 증류해서 나오는 액체입니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의 석유화학 산업은 NCC(나프타분해시설)를 통해 이 나프타를 분해해서 에틸렌과 프로필렌을 생산하고요. 이 기초유분으로 폴리에틸렌이나 폴리프로필렌 같은 플라스틱을 만드는데요.해상을 통해 들여오던 중동산 나프타 수입 물량 자체가 사라져 버렸어요. 한국은 국내 나프타 수요의 45%를 수입하고, 그중에서도 중동산 의존도가 높았기에(77%) 큰일이 아닐 수 없죠.부랴부랴 비상 대책이 가동됐습니다. 정부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나프타의 해외 수출을 막았어요. 물론 그것만으론 턱없이 모자라지만 일단 있는 거라도 지키려는 거죠. 아울러 4년 만에 처음으로 러시아산 나프타를 수입했어요. 미국이 한 달간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풀어줬기에 가능했는데요. 고작 반나절치 물량(2만7000t)만 들여올 수 있었습니다. 현재 남은 나프타 재고량은 2~3주 치 물량. 이대로 가면 줄줄이 셧다운(가동 중단)이 불가피하단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나프타 가격은 이미 전쟁 전과 비교해 두배로 올랐습니다(미터톤 당 633달러→1241달러). 하지만 물량 자체가 없기 때문에, 웃돈을 주고서라도 구할 수 있으면 다행인 판국이죠. 충격파는 곳곳에 미치고 있습니다. 페인트 업체들은 제품 가격을 줄줄이 15~40% 올렸고요. 식품 포장용 비닐 가격은 일주일 만에 1000장에 6만원에서 11만7000원으로 뛰었습니다. 포장 용기 가격이 40% 오르면서 음식점은 배달 장사를 못하겠다며 울상이고요. 화장품 업계는 용기 생산이 중단될까봐, 제약 업계는 약과 수액제 포장재가 떨어질까봐 전전긍긍입니다. 파종을 앞둔 농가는 농업용 비닐이 부족하고, 의류업계엔 합성섬유 가격 급등이 현실화됐죠.갑자기 모든 업계가 강제적인 ‘탈 플라스틱’ 상황에 처했습니다. 라면 봉지, 화장품 용기만 따로 살 일이 없는 소비자들은 당장은 잘 실감하지 못할 수 있는데요. 공급 불안이 초래한 부담은 결국 소비자 가격에 전가되기 마련이죠. 먹을 것과 입을 것, 소비재와 내구재 할 것 없이 가격이 뛰는 결과로 이어질 겁니다.전쟁으로 기름값을 그렇게 걱정했는데, 더 큰 복병이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3차 오일쇼크보다 더 무서운 첫 번째 나프타 쇼크인 거죠. 사실상 전에 겪어본 적 없는 새로운 위기입니다.한편 한국뿐 아니라 일본·싱가포르·태국·인도네시아 등 온 아시아가 나프타 쇼크로 난리인 가운데, 정작 전쟁 당사자 미국의 석유화학 업계는 평온합니다. 단순히 지리적으로 멀어서가 아니라, 원료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죠.천연가스가 풍부한 미국은 나프타(석유에서 나오는 액체) 대신 에탄(천연가스에서 나오는 기체)으로 에틸렌을 생산해요.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든, 나프타 가격이 널뛰든, 원료 공급엔 아무 지장이 없죠. 오히려 전 세계 플라스틱 가격이 뛰었으니 마진만 폭증합니다. 미국 석유화학기업 다우(Dow) 주가가 한 달 새 35% 넘게 뛴 건 다 이유가 있죠.혹시 그래서 이 전쟁이 길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요. 에너지 순수입국 신세가 처량합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4월 3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구글이 지난주 공개한 ‘터보퀀트’가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흔들고 있죠. 인공지능(AI) 모델의 메모리 사용량을 6분의 1로 확 줄일 수 있는 기술인데요. 한편에선 ‘AI 서비스에 필요한 메모리 용량이 줄어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끝날 것’이란 반응이고요. 다른 편에선 ‘비용 효율성이 높아져서 AI 서비스가 대중화할 테니, 반도체 수요는 오히려 늘어날 것’이란 논리를 펼칩니다.뭐가 맞는 얘기일까요? 지금으로선 그 답을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둘 다 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1990년대 후반 시장을 뒤흔들었던 광통신망 구축 붐이 남긴 교훈에 따르면 말이죠. 그리고 이건 기술경제학자 카를로타 페레스가 명저 ‘기술혁명과 금융자본’에서 설명한 기술혁명의 일반적인 패턴이기도 합니다. 그게 무슨 얘기냐고요?*이 기사는 4월 1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유리 섬유가 곳곳에 깔리던 시절흔히 AI 기술을 둘러싼 거품을 1990년대 ‘닷컴버블’에 비유하곤 하죠. 특히 지금의 AI 데이터센터 건설 붐은 닷컴 시절 기억을 소환합니다. 그 시절엔 데이터센터 대신 이게 가장 핫한 첨단 인프라였죠. 광통신망.굳이 비유하자면 지금 AI 데이터센터 건설에 돈을 쏟아붓는 빅테크(아마존·MS·구글·메타 등)는 당시 광통신망을 깔던 통신사(월드컴·글로벌크로싱·퀘스트)와 비슷하고요. GPU를 공급하는 엔비디아는 그 당시의 통신장비업체(시스코·시에나·루슨트), 메모리 반도체 제조사는 광섬유 케이블을 생산하는 코닝 정도의 위치에 있죠.1990년대 후반, 인터넷 혁명으로 세상은 기하급수적인 발전을 이어가는 듯했습니다. 그 시절, 애널리스트 보고서와 스타트업 사업계획서, 각종 컨퍼런스를 통해 반복되는 주장은 이거였죠. “인터넷 트래픽이 100일마다 두 배로 증가한다.”데이터 사용량이 100일에 2배, 1년이면 1500%씩 폭증할 거란 통계는 업계를 열광케 했고요. 1998년 4월엔 미국 상무부까지 이를 보고서에 인용하면서 기정사실화했습니다.‘앞으로 트래픽이 넘쳐난다. 통신망을 아무리 많이 깔아도 부족하다’고 다들 믿었습니다. 기업들이 앞다퉈 광통신망 구축에 뛰어들었죠. 주요 열차노선과 고속도로,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옆으로 땅을 파서 유리로 만든 광섬유케이블을 매립하는 경쟁이 시작됩니다. 대서양과 태평양 해저에까지 광케이블이 깔렸죠.이른바 ‘정보 고속도로’ 구축에 투입된 자금은 엄청났습니다. 1996~2001년 미국 통신회사의 신규 채권 발행 규모가 5000억 달러를 넘었을 정도였는데요. 당시 금융시장이 통신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줬죠. 일단 통신망을 깔기만 하면 곧 몇 배의 수익으로 돌아올 거라 기대했으니까요. 통신기업의 높은 주가는 부채비율 상승을 정당화했습니다.그리고 2000년, 파티가 갑자기 끝납니다. 미국 연준의 금리인상으로 돈줄이 막히면서 기업들은 부채를 갚지 못하게 됐고요. 급증하는 것처럼 보였던 매출은 사실 회계 기법으로 부풀려진 허상이었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사실 인터넷 트래픽은 100일이 아니라 1년에 2배씩만 늘고 있었거든요. ‘100일마다 2배’라는 수치는 월드컴이 퍼뜨린 허구의 수치였던 겁니다.시장은 빠르게 무너집니다. 2002년 통신업계 거물이었던 글로벌 크로싱과 월드컴이 차례로 파산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죠. 당시 세계 최대 광섬유 제조업체 코닝의 주가는 2000년 최고 113달러에서 2002년 약 1달러로 폭락합니다.다크 파이버와 유튜브의 탄생사실 당시의 공급 과잉엔 당시 광통신 기술의 기하급수적인 진화도 한몫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 상용화된 고밀도 파장 분할 다중화(DWDM) 기술은 처음엔 광케이블 한 가닥에 8개 신호를 보낼 수 있었는데요. 2000년쯤엔 128개 신호를 동시에 전송할 수 있게 됐죠. 갑자기 이미 깔아놓은 광케이블만으로도 공급이 충분하다 못해 남아돌게 된 겁니다.그럼, 거품이 꺼진 뒤 그 많은 광케이블은 어떻게 됐을까요? 2002년 미국 광섬유 회선의 사용률은 고작 2.7%, 2005년 말까지도 15% 정도에 그쳤습니다. 이로 인해 대역폭 비용은 90%나 폭락했죠. 신호(빛)가 흐르지 않아 어둡게 방치된 광섬유를 일컫는 ‘다크 파이버(dark fiber)’라는 말이 생겨났고요. 업계에선 “100년 치 용량이 확보됐다”는 비아냥이 나왔죠. 여기까진 참담한 실패 스토리인데요. 이제부터 반전이 있습니다. 광통신망이 흔하디흔해지면서 드디어 인터넷 혁명의 전성기가 열리기 시작했어요. 가장 대표적인 게 유튜브(2005년)와 넷플릭스(2007년)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의 등장입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비용 때문에 동영상 서비스는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만, 이젠 가능해진 거죠.또 2006년 아마존의 AWS(아마존 웹 서비스) 출범과 클라우드 컴퓨팅 서비스 등장의 배경에도 다크 파이버가 있습니다. 이미 저렴한 광통신망이 전국적으로 깔려 있었기에, 큰 추가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먼 곳의 데이터센터와 기업을 연결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2004년 탄생한 페이스북이 전 세계 수십억 명을 연결하는 소셜미디어로 성장할 수 있게 된 것도 대륙을 연결하는 광통신망 고속도로가 이미 깔려있었기 때문입니다.결과적으로 1990년대의 엄청난 과잉 개발은 현대 디지털 경제의 발판이 됐습니다. 다크 파이버는 100년은커녕, 약 15년 만에 소진됐어요. 이후 빅테크들은 직접 나서서 해저케이블을 추가로 깔고 있죠. 결국 인터넷은 세상을 바꿀 혁명이었고요. 이를 실현하기 위해선 대륙과 바다를 가로지르는 광통신망 인프라가 촘촘하게 깔려야만 하는 것도 맞았습니다. 1990년대 투자자들이 내놨던 전망 중 상당 부분은 사실이었던 거죠. 다만 당시의 기대와 달리 기술혁명이 구석구석까지 스며드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고요. 과잉 투자와 수요 폭발 사이엔 시차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중간엔 닷컴버블 붕괴라는 큰 전환점을 겪어야 했죠.그런데 그거 아세요? 1700년대 후반 산업혁명 이후 지난 약 250년 동안의 모든 기술혁명이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는 걸요. 기술혁명과 버블을 논할 때 항상 등장하는 책 ‘기술혁명과 금융자본’(카를로타 페레스, 2002년 작)을 통해 이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AI 혁명, 전환점 다가오는 이유18세기 후반 영국 산업혁명 이래로 경제와 사회를 재편한 기술혁명은 5차례 있었습니다. 40~60년에 한 번꼴로 기술혁명이 찾아온 거죠. 그리고 그 기술혁명의 전반기엔 특히 새로운 인프라에 대한 폭발적인 투자가 일어났죠. 그리고 이는 거품 붕괴 또는 공황으로 이어지는 게 공식이죠. 여기까지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①산업혁명(핵심국가: 영국)-시작: 1771년 영국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 공장 가동-주요 인프라는 운하. 1790년대 초 운하 주식에 대한 광적인 투자 발생-1793년부터 운하 프로젝트의 거품 붕괴하며 은행 파산. 1797년 금융 공황②증기와 철도의 시대(영국)-시작: 1829년 리버풀-맨체스터 철도용 ‘로켓’ 증기기관차 시험 주행 성공-주요 인프라는 철도. 1840년대 중반, 철도 건설 붐이 일면서 주식 투기 극에 달해-1845년 철도 주식 거품 붕괴. 1847년 철도 공황③강철과 전기의 시대(미국)-시작: 1875년 미국 피츠버그에 카네기 베세머 강철공장이 설립-주요 인프라는 강철레일. 과도한 철도 건설로 버블 발생-1893년 주가 급락과 은행 뱅크런을 시작으로 수백개 은행과 기업 파산④석유와 자동차, 대량생산의 시대(미국)-시작: 1908년 미국 포드의 모델T 출시-주요 인프라는 자동차와 도로. 1920년대 내내 극단적인 주식 열풍이 일어남-1929년 대공황⑤인터넷 혁명(미국)-시작: 1971년 인텔 마이크로프로세서 발표-주요 인프라는 디지털 통신. 1990년대 닷컴 버블-2000년 3월 나스닥 거품 붕괴그런데 저자 카를로타 페레스가 진짜 말하려는 기술혁명의 공통점은 따로 있습니다. 광란의 투기가 거품 붕괴와 경기침체라는 대폭락을 불러오지만, 그 혼돈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본격적인 호황기가 찾아오더라는 게 핵심이죠. 그리고 이때 기술혁명은 진정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고 사람들의 삶에 뿌리내리게 됩니다. 참고로 이 책이 쓰인 2002년은 아직 닷컴버블 붕괴의 한복판이었던 시기인데요. 이미 그는 이후에 인터넷 기술혁명의 정점이 찾아올 것이라 예견했습니다.그럼, 왜 이렇게 역사가 반복될까요. 새로운 기술을 수용하는 데 있어 금융자본과 생산자본의 속도가 확연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금융자본은 움직임이 매우 기민하죠. 높은 이익을 좇아서 빠르게 새로운 기술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신기술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쏟아내며 인프라 투자 붐을 일으켜서 막대한 이익을 거둡니다.이와 달리 생산자본(산업계)은 느리고 보수적일 수밖에 없어요. 이미 구체제에서 갖춰진 기술과 설비가 있는데, 단번에 이걸 버리고 옮겨갈 순 없으니까요.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새로운 패러다임이 사회적 상식 수준으로 자리 잡으면 그제야 움직이게 됩니다. 이때부터가 기술혁명에 있어선 진짜 ‘황금기’라 할 수 있죠.바로 이런 속도 차이로 인해 기술혁명은 크게 두단계로 나뉘어 진행됩니다. 1단계 구축기는 금융자본이, 2단계 배치기는 생산자본이 주도하죠. 그리고 1단계의 막바지, 즉 금융자본의 기술혁명에 대한 투기가 극에 달한 직후엔 시장이 붕괴하는 ‘전환점’이 찾아오고요. 이를 그래픽으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아요.아니, 그럼 고통스러운 버블 붕괴가 없게 좀 천천히 신중하게 금융자본의 투자가 진행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저자의 생각은 다릅니다. 이렇게 기술혁명 초반에 금융자본이 집중되는 게 “기본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막대한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효과적 방법”이라고 평가하죠. 투자자들을 열광케 하는 금융시장의 거품이 있었기에 기술혁명을 위한 기반 인프라가 마련될 수 있었단 겁니다. 금융은 그저 자기 역할을 했을 뿐이죠.그럼 2026년 현재 진행 중인 AI 기술혁명은 어디쯤 와있을까요. 주식시장의 분위기나 데이터센터에 대한 엄청난 투자 열풍을 감안하면 1단계의 후반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자가 ‘광란’의 시기라고 부르는 기간이죠. 카를로타 페레스의 논리대로라면 언젠간 한번 큰 전환점이 찾아올 거란 뜻입니다. 페레스는 이 광란의 시기에 나타나는 특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광란은 모든 면에서 극도로 불균형한 번영과 양극화가 심화하는 시기이다. 번영의 편에 서 있는 이들은, 끊임없는 성장이 도래했다고 ‘뉴 이코노미’를 찬양한다. 반면, 현대화의 길을 걷지 않았거나 걸을 수 없는 산업, 국가, 지역, 기업들은 명백히 쇠퇴하고 저성장과 자금 부족이라는 악순환에 빠져든다. 그들에게 지금은 끔찍한 시기다. 따라서 ‘광란의 시기’란 부자는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는 시기이다. 금융자본은 이러한 양극화된 단계의 원심력을 가속하는 역할을 한다. 돈에 대한 사랑은 그 어느 때보다 번성한다. 개인적 이익은 찬양받고, 사회적 이익은 경멸받는다. 부자라는 것은 ‘선한’ 것이며, 그 외의 모든 것은 실패다.“어떤가요. 현실과 비교했을 때 설명이 들어맞나요? 만약 지금 시기가 끔찍하다고 여긴다면, 그나마 다행인 건 이게 영원하진 않고 끝이 있다는 점이겠죠. 하지만 반대로 지금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쪽이라면 조심해야 할 겁니다. 언제 어떻게 낭떠러지가 나타날지 모르니까요. By.딥다이브*이 기사는 4월 1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위기에 강한 안전자산이라던 금. 하지만 이란전쟁 발발 이후 금값은 되레 급락했죠. 이를 두고 시장에선 희한한 일이라며, 각종 분석이 쏟아집니다. 동시에 ‘지금이 금을 살 때인가, 팔 때인가’를 두고 고민도 커지죠.그런데 말이죠. 전쟁 나면 금값이 오른다, 그런 얘기 누가 했던 거죠? 역사적으로 볼 때 미국이 중동 산유국에 미사일을 쏘면 금값은 오히려 떨어졌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전쟁과 금값의 상관관계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이 기사는 3월 27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안전자산 금값이 왜 이래?-16.2%.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전쟁을 일으킨 2월 28일 이후 금값의 변화입니다(2월 27일 온스당 5247달러→3월 26일 4407달러). 같은 기간 코스피(-12.5%)나 S&P500 지수(-5.8%)보다 더 많이 떨어졌죠. 특히 지난주(16~20일)엔 일주일 만에 금값이 11%나 빠지면서, 주간 하락폭으론 1983년 이후 43년 만에 최대를 기록했어요.금값이 급락하자, 그동안 금 투기를 주도했던 중국 개인투자자들은 패닉에 빠졌습니다. 귀금속 매장엔 금값이 오를까, 내릴까를 묻는 문의가 쏟아졌고요. 중국 주요 6개 은행은 잇달아 “귀금속 가격 변동성과 시장 불확실성에 주의하라”는 경고를 발표했죠. 하지만 동시에 ‘지금이 금을 싸게 살 기회’라고 본 이들이 몰리면서 베이징 백화점의 금괴 판매 매장은 북적거렸습니다. 여전히 ‘위기엔 역시 금’이란 믿음이 남아있는 거죠.그럼, 이란전쟁이란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왜 안전자산인 금 가격이 떨어진 걸까요? 이를 두고 매우 다양한 분석이 쏟아져 나오는데요. 가장 많이 거론되는 건 크게 두가지입니다.①그동안 워낙 많이 올랐다= 금값은 거의 2년 가까이 쉬지 않고 180% 넘게 올랐죠. 특히 지난해 9월을 기점으로 순식간에 온스당 4000달러, 5000달러, 그리고 5500달러 선까지 돌파했는데요. 그만큼 금 투자로 수익을 낸 사람들, 그중에서도 개인 투자자가 많아졌고요. 이들이 전쟁으로 불안해지자 수익 실현에 나섰습니다.②금리 인하가 멀어졌다= 이란전쟁은 보통의 지정학적 위기와 달리 유가를 직접적으로 건드렸죠. 치솟은 유가가 물가를 밀어 올리게 될 거고요. 이러다 각국 중앙은행의 금리인하가 물 건너갈 수 있다, 심지어 금리가 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커집니다. ‘금리=돈값’이고, 금리가 오른다는 건 돈의 값어치가 커진다는 뜻이잖아요. 금 같은 실물보단 현금, 특히 미국 달러화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투자자들이 금을 팔고 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면 금값은 떨어진다 이런 분석에 공감하시나요? 논리적이긴 하지만 그리 명쾌하진 않은데요. 그래서 찾아봤습니다. 과거 미국이 중동 산유국과 상대로 전쟁을 벌였을 때 금값은 어떻게 움직였는지를요. 크게 두 차례가 있었죠. 1991년 걸프전, 그리고 2003년 이라크전쟁.그리고 공통적인 패턴을 찾았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즉, 위기가 고조되던 시점엔 금값이 단기간 급등했는데요. 막상 미국이 전쟁에 돌입하자 금값은 급락했어요. 마치 지금의 이란전쟁처럼 말이죠.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1991년 걸프전쟁>1991년 미국의 걸프전 참전은 1990년 8월 일어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한 대응이었죠. 1990년 국제 금값은 이라크를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면서 7월 말 이미 온스당 365달러까지 올랐고요. 그해 8월 2일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기습 침공했단 소식과 함께 순식간에 400달러선을 넘었어요. 특히 그해 10월 초엔 온스당 416달러까지 치솟았죠.이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주요 산유국인 쿠웨이트가 위기에 처했고, 사담 후세인이 여기서 멈출지 아니면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진격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요. 시장에선 ‘이라크가 화학무기라도 써서 전쟁이 장기화한다면 금값이 500달러를 넘길 것’이란 공포스러운 전망까지 나왔습니다.그리고 1991년 1월 17일, 마침내 미국 주도의 연합군이 ‘사막 폭풍 작전’을 개시합니다. 미 해군 함정이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로 토마호크 미사일을 날리며 전쟁이 시작됐죠. 그리고 금값은? 전쟁 발발 소식과 함께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어요.약 5주간의 공중전에서 연합군은 압도적인 화력을 보여줬고요. 1991년 2월 24일 지상공격을 시작한 지 불과 100시간 만에 연합군은 쿠웨이트를 해방시켰습니다. 그해 2월 말 금값은 온스당 363달러.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올랐던 상승분을 모두 반납했죠.<2003년 이라크전쟁>2002년 9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유엔 총회에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비난하며 “행동이 불가피하다”고 연설했습니다. 미국이 이라크 공격의 명분을 쌓으며 위기가 고조되자 금값이 요동쳤고요. 불과 4개월 만에 20% 넘게 폭등했죠(2002년 10월 온스당 320달러→2003년 2월 388달러).이후 유엔의 외교적 협상이 결렬되면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기정사실화했던 2003년 2월. 금값은 고점을 찍고 내려오기 시작합니다. 아직 전쟁 발발 이전이었는데도 시장은 이미 ‘전쟁은 일어난다’는 걸 가격에 반영해 버린 거죠. 2003년 3월 20일 미국 지상군이 이라크 국경을 넘었을 때 금값은 이미 온스당 340달러로 떨어져 있었고요. 바그다드가 함락되고 미국의 승리가 확실해졌을 땐 전쟁 이전 수준인 320달러 선으로 돌아갔습니다.소문에 사서 뉴스에 팔라 두 역사적 사례로 알 수 있는 건? “소문에 사서 뉴스에 파는” 금 시장의 역학이 작용한다는 점이죠. 안전자산인 금값을 끌어올리는 건 불확실성입니다. 전쟁이 일어날지, 얼마나 심각할지를 알 수 없다는 그 공포가 금값 상승의 가장 큰 동력이죠.하지만 첫 번째 미사일이 발사되면? 최악의 시나리오는 현실이 되고 불확실성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가격을 끌어올릴 새로운 공포가 생겨나지 않죠. 이미 오를 대로 오른 가격이 부담스러운 스마트 머니는 수익 실현에 나서고요. 그렇게 금값은 하락세로 돌아섭니다.지금의 이란전쟁도 이런 공식에 대입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미국이 ‘에픽 퓨리 작전’을 개시한 건 올해 2월 28일이지만, 이란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지는 상당히 오래됐죠.따져 보면 2024년 4월 13~14일 이란이 드론과 탄도 미사일을 동원해 이스라엘 영토를 사상 처음 직접 공격한 게 중요한 전환점이었는데요. 한동안 잠잠했던 금값이 이즈음부터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했고요. 이후 거의 2년 가까이 놀라운 상승세를 이어갔습니다. 물론 상승분이 모두 이란 때문인 건 아니지만, 이란에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이 금값 상승에 어느 정도 일조한 셈이죠.이후 올해 1월 초 이란에서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고, 이란 정부는 무자비한 무력 탄압을 벌였는데요. 이를 계기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의 군사 개입을 강하게 경고하고 나섰습니다. 미국이 이란에 대해 군사행동에 나설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급격히 고조됐고요. 1월 초 온스당 4400달러에 머물던 금값이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5600달러로 치솟았어요. 불확실성과 공포가 극에 달했던 시점이죠.그리고 미국이 진짜로 테헤란에 미사일을 날린 지 4주가 되어가는 지금의 금값은? 다시 온스당 4400달러대로 돌아왔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매우 강력한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이란에 처음 경고했던 시점(1월 9일)과 비슷한 수준입니다.그래서 전쟁 끝나면 다시 오를까?여기까지 봤을 때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이겁니다.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기 직전에 금을 사서, 전쟁이 터지면 얼른 금을 팔아야 한다는 거요.아니, 이미 그럴 기회를 놓쳤다고요? 그렇다면 우리가 알아봐야 할 건 이거겠죠.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 그땐 금값이 오를까요 떨어질까요.이 역시 앞서 미국이 이라크와 벌였던 전쟁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과거 두 전쟁 이후 금값 흐름이 정반대였거든요. 1991년 걸프전 이후 금값은 안정세를 보이며 장기 약세장에 진입했지만,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엔 금값이 무섭게 뛰며 대세 상승장이 펼쳐졌습니다. 왜 이렇게 달랐을까요? 두 전쟁이 미국 경제에 끼친 영향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1991년 걸프전은 미국이 연합군 지원을 받아 벌인 단기 전쟁이었죠. 그래서 전쟁 비용 중 80%가량을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일본·독일 등 동맹국들이 나눠 냈습니다. 국제 유가도 금세 안정을 되찾았고요. 전쟁 이후 회복이 빨랐고, 미국 경제에 그리 큰 부담으로 남지 않았죠.반면 2003년 이라크 전쟁에 들어간 비용은 거의 다 미국의 몫이었는데요. 미국이 투입한 직접 전투 비용만 7500억 달러, 장기적 총비용은 무려 2조~3조 달러로 추정됩니다. 이걸 메우기 위해 미국은 엄청나게 국채를 찍어내야 했고요. 이는 미국의 막대한 재정적자와 통화가치 하락으로 이어졌죠. 게다가 이라크의 원유 생산능력 회복이 예상보다 늦어지면서, 국제 유가까지 무섭게 뛰었습니다. 당시 금값이 2004년 400달러에서 2008년 1000달러까지 급등한 배경엔 이런 이라크 전쟁의 후폭풍이 있었던 거죠.이번 전쟁 이후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이 전쟁이 얼마나 길어지느냐, 미국 경제와 중동 원유생산 능력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기느냐가 결국 관건이 될 겁니다. 아직 그 답을 알긴 어렵지만, 한번 지켜보시죠. By.딥다이브*이 기사는 3월 27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전기차 시대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던 일본 혼다가 급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올해 양산 예정이던 전기차 3종을 포함한 거의 모든 전기차 개발 프로그램을 중단했죠.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되자, 전기차 전략을 전면 수정한 건데요.역시 막대한 투자비가 드는 ‘전기차 올인’은 기업에 너무 위험한 전략인 걸까요. 글쎄요. 혼다가 왜 위기에 빠졌는지를 살펴보면 진짜 원인은 전기차가 아닙니다. 기술적 자만에 빠져 자동차 산업의 패러다임 변화를 외면한 결과이죠. 레거시 기업의 혁신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새로운 사례, 혼다의 위기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3월 25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물거품 된 전기차 전환 계획혼다 0 살룬(세단), 혼다 0 SUV, 아큐라 RSX. 혼다의 신형 전기차 3종은 출시를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미국 오하이오 공장은 생산설비를 이미 갖췄고, 딜러 교육과 브로셔 인쇄까지 마친 상황이었죠. 2021년 ‘탈엔진’을 선언하며 전기차에 올인해 온 혼다의 미래차 전략이 빛을 보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그리고 3월 12일, 이 계획이 물거품이 됐죠. 미베 토시히로 사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적자 전환을 공식화하면서 신형 전기차 3종의 개발 중단을 발표했습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마음으로 결단을 내렸다”면서 말이죠. 아울러 그는 향후 2년간 최대 2조5000억 엔(약 23조5000억원)의 기록적인 손실이 발생할 거라고도 예고했어요. 1950년대 상장 이후 혼다가 연간 적자를 기록한 건 처음입니다.미베 사장은 이런 결정의 이유로 미국 전기차 수요 급감을 거론합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전기차 보조금은 중단되고, 환경 규제도 사실상 무효화되면서 전기차의 성장세가 꺾였다는 거죠. 어차피 생산해봤자 안 팔릴 게 생겼으니, 지금 접는 게 그나마 손실을 줄이는 방법이란 판단입니다.하지만 이게 전부 트럼프 행정부 탓이기만 할까요. 보조금 없이 겨루기엔 전기차의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뜻은 아닐까요. 또 혼다가 돈 잘 벌고 있다면, 굳이 막대한 매몰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신형 전기차 개발을 포기할 필요까진 없을 텐데요. 문제는 혼다 승용차 판매량이 급감하고 있단 점이죠. 2019년 정점(532만대)을 찍은 혼다의 전 세계 승용차 판매량은 지난해 352만대로 쪼그라들었어요.이런 상황에 대해 혼다는 보도자료를 통해 놀랍도록 솔직히 털어놨습니다. “중국에선 소비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가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 기반 기능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치열한 경쟁 환경 속에서 혼다는 신규 전기차 제조업체들에 비해 가격 대비 가치를 더 잘 제공하는 제품을 내놓지 못했고, 결국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졌습니다.”‘엔진의 혼다’라는 함정 차체 가볍고, 연비 좋고, 핸들링 정교하고, ‘운전의 재미’를 주는 차. 혼다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이죠. 특히 엔진 기술에 진심인 회사라서 ‘엔진의 혼다’라는 별명까지 붙었습니다.혼다의 신화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미국은 배기가스를 10분의 1로 줄이는 초강력 규제를 시행했는데요. GM, 포드 같은 큰 기업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로비를 벌일 때, 혼다는 엔진 연소 기술을 업그레이드한 CVCC 엔진으로 이 규제를 세계 최초로 통과합니다. 오토바이 회사로 통하던 혼다가 세계적인 자동차 제조사로 도약하게 된 계기였죠.역시 기술에서 앞서면 규제를 뚫고 성공할 수 있구나. 본래도 기술을 강조해온 혼다엔 ‘기술이 최고’라는 성공 공식이 자리잡았고요. 지금까지 고집스러울 정도로 하드웨어적 완성도를 중시하는 엔지니어 중심의 문화를 지키고 있습니다.특히 혼다는 ‘세계 최초’의 기술을 유독 강조하는데요. 그래서 수소차나 전고체 전지 같은 혁신 기술에 대한 투자를 오랫동안 이어가고 있죠.그런데 이상합니다. 자동차 역사상 가장 큰 혁신이라 할 만한 전기차 분야에서 혼다는 왜 이렇게 뒤처지게 됐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전기차를 너무 가볍게 봤고, 전기차에 진심이 아니었어요.혼다는 과거에도 피트EV(2012년), 클래리티 일렉트릭(2017년), 혼다e(2019년) 같은 전기차를 미국과 유럽에서 출시한 적 있습니다. 이 전기차들은 주행거리가 다른 전기차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도심형 소형 시티카 컨셉이었고요. 가성비가 워낙 떨어지다 보니 모두 저조한 판매량을 보이다가 얼마 못 가 단종되고 말았다는 공통점이 있죠. 간보기식으로 전기차를 출시했다가 단종하길 여러차례 반복해온 건데요. ‘전기차=도심 출퇴근용 차량’쯤으로 여겼기에, 그리 진지하지 않았던 겁니다. 당연히 전기차와 관련한 기술을 축적할 수가 없었죠.그런데도 혼다는 전기차 기술을 만만하게 봤어요. 복잡한 열역학과 기계 공학의 정점인 내연기관 자동차에 비하면 전기차는 배터리와 모터를 연결하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구조이니까요. 세계 최고 기술력의 혼다라면 전기차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방심했던 건데요.혼다의 이런 착각이 드러나는 대목이 있습니다. 2022년 혼다 경영진이 언론 인터뷰를 했어요. 2021년 강화된 환경 규제에 맞춰 혼다가 ‘탈 엔진’, 즉 2040년까지 100% 전동화 달성이란 거창한 목표를 내건 지 막 1년이 지난 무렵이었는데요. 혼다는 당시 업계 선도주자였던 미국 GM과 파트너십을 맺었죠.왜 GM을 파트너로 선택했는지를 기자가 묻자 미베 CEO는 이렇게 답합니다. “(전기차) 기술적 측면에서 GM와 혼다는 비슷한 수준이거든요.” 도대체 뭐가 비슷하단 건지, 기자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고요.이어 혼다의 전동화 총괄 임원은 GM의 뛰어난 점은 기술력이 아닌 마케팅 능력이라고 말했어요. 어차피 배터리 기술에선 별 차이가 없다면서 말이죠. “GM이 부럽습니다. 얼티엄(Ultium)처럼 브랜딩을 아주 잘하거든요. 마치 궁극의 리튬 이온 배터리처럼 들리잖아요.” 전기차에 무슨 대단한 기술이 있겠느냐는 식의 자신감 내지 자만심이 드러나는 발언이었죠.지난 5년간 혼다는 대대적인 투자에 나서며 전기차 개발에 올인했고요. 업계는 그 거창한 계획을 믿었습니다. 일본 기업 특유의 집중력을 발휘할 거라 본 거죠. 2025년 1월 CES에서 혼다가 공개한 ‘0 시리즈’ 프로토타입은 독특한 디자인으로 나름 호평을 받기도 했어요. 혼다가 약속한 레벨3 수준 자율주행 기능, 혼다의 과거 휴머노이드 로봇 이름을 딴 ‘아시모 OS’에 대한 기대도 있었고요.하지만 이번에 혼다는 이 모든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었습니다. 신형 전기차를 판매하는 것보다 이를 취소하고 손실처리하는 게 낫다는 결론에 이른 거죠. 이로써 결국 확인된 셈입니다. 역시나 혼다는 경쟁력 있는 전기차를 만들어낼 역량도, 의지도 부족했단 걸요. 영국 자동차 매체 탑기어는 이를 “역대 가장 충격적인 자동차 뉴스”라고 평했더군요.미국 전기차 매체 인사이드EV는 칼럼을 통해 혼다에 이렇게 쓴소리를 남겼습니다. “기술은 저절로 발전하지 않습니다. 기술 발전에는 투자와 시행착오, 그리고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직 남이 하는 것만 보고 배운다면, 당신은 항상 그들 뒤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혼다는 0 시리즈를 완전히 폐기하기 전에 뼈아픈 교훈을 얻었기를 바랍니다.”닛산과의 엇갈린 운명 혼다 스스로 밝혔듯이, 중국시장의 실패는 혼다를 적자 수렁에 빠지게 만든 주요 요인입니다. 2025년 혼다의 중국 내 신차 판매량은 64만대. 정점(2019년 155만대)과 비교하면 40% 수준으로 확 쪼그라들었죠.요즘 중국 자동차 시장은 하드웨어보단 자율주행이나 인포테인먼트 같은 소프트웨어 기술이 너무나 중요한데요. 혼다는 이 트렌드를 도통 따라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 소비자들 사이에선 음성 조작 반응속도가 너무 느리다, 현지 앱 생태계와 연동이 매끄럽지 못하다라는 비판이 쏟아지는데요.과거 혼다는 ‘H’로고가 주는 신뢰도 덕분에 중국에서 꽤 오랫동안 프리미엄을 누렸죠. 하지만 이젠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중국 젊은이들이 보기엔 그저 올드하고 가성비 떨어지는 내연기관차 브랜드일 뿐이죠. 같은 가격이면 혼다 대신 화웨이나 샤오미 전기차를 선택합니다.혼다의 추락은 동남아시아와 인도 시장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인데요. 왜 인도에서 혼다가 인기를 잃었느냐는 레딧 질문엔 이런 답변들이 올라왔어요. “시장은 변했지만 혼다 제품 전략은 그대로입니다. 구식 인테리어, 밋밋한 화면, 눈길 끄는 기능 없음. CVT(무단변속기)는 부드럽지만 ‘즉각적 만족’을 추구하는 오늘날 구매자들에겐 재미를 주지 못하죠.” “혼다는 고객이 원하는 걸 주지 않고, 자기들이 만들고 싶은 것만 만들면서 판매량이 적다고 불평합니다.”혼다는 뒤늦게 중국 시장을 겨냥한 전기차 개발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상황입니다. “중국 시장의 특성을 감안해 상품력과 비용 경쟁력을 근본적으로 강화하겠다”(카이하라 노리야 부사장)고 밝혔죠. 하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중국 전기차 시장의 속도를 혼다가 따라잡을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한편 바로 이 부분에서 불과 1년 만에 혼다와 닛산, 두 일본차 브랜드의 뒤바뀐 신세가 눈에 띕니다. 지난해 2월 두 기업의 합병이 무산됐을 때만 해도, 닛산은 절체절명의 위기였고 혼다는 우위에 있는 듯했죠. () 하지만 이제 혼다의 연간 예상 적자(최대 6900억엔)가 지난해 닛산의 사상 최대 적자 기록(6708억엔)을 깰 판입니다. 재무적으로 어렵기로는 도긴개긴인 거죠. 그런데 닛산은 지난해 출시한 ‘중국형 전기차’ N7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중국시장에서 반전에 성공했습니다. 대폭 단축된 개발 기간(기존 4~5년→19개월), 파격적인 가성비(약 2600만원), 철저한 현지화(딥시크의 AI 기술 적용 인포테인먼트)로 이뤄낸 성과이죠. 자존심 따윈 버리고 현지 업체로부터 배운 덕분입니다.닛산이 이렇게 빨리 따라잡을 수 있었던 건 기본기가 있기 때문이죠. 닛산은 2010년 전기차 리프(Leaf)로 시장을 휩쓸었던 전기차 업계의 개척자였고요. 지난 15년간 전기차 생산 경험과 기술을 꾸준히 축적해왔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적어도 전기차엔 진심이었던 기업인 거죠. 최근 닛산은 2026년 하반기 도쿄에서 로보택시 시험 운행을 시작한다는 계획도 발표했어요.이게 닛산과 혼다의 다른 점입니다. 두 회사 모두 위기에 처했지만, 적어도 닛산은 미래로 나아가고 있고요. 혼다는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채 전기차 계획을 접고 다시 과거로 후진 중이죠. 이 차이가 과연 어떤 결과로 이어질까요. By.딥다이브*이 기사는 3월 25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1973년 11월, 일본 도쿄 긴자거리는 네온사인이 꺼져 암흑에 잠겼고, 서독에선 일요일 차량 운행이 금지돼 아우토반이 텅 비었습니다. ‘1차 오일쇼크’의 충격을 보여주는 역사 속 상징적인 장면들인데요.그럼, 이란전쟁으로 인한 에너지난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까요. 전쟁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각국, 특히 중동 석유와 가스 의존도가 큰 아시아 국가들은 비상 상황인데요. 공장부터 식탁까지 뒤흔드는 이란발 에너지 위기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3월 20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이란전쟁이 덮친 인도 식탁LPG 가스통과 함께 충전소 앞에 긴 줄을 늘어선 사람들. 이란 테헤란에서 약 3000㎞ 떨어진 인도에서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LPG 운반선 운항이 중단되면서, 인도 전역이 패닉에 빠졌습니다. LPG 가스 재고량이 급감하고 있기 때문이죠. 인도엔 LPG를 취사용으로 쓰는 집이 무려 3억 가구가 넘거든요.가스를 구하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선 사람들 사이엔 몸싸움이 벌어졌고요. LPG 가스통을 실은 트럭은 도둑들의 표적이 됐습니다. 이를 틈 타 사기꾼까지 판치죠. “가스를 예약하라”며 악성코드가 심어진 앱을 휴대폰에 설치하게 하는 겁니다.인도 정부는 가정용 LPG 공급을 위해 산업용 LPG 공급을 확 줄였는데요. 그 결과 지금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은 건 식당입니다. 불이 없으니, 메뉴를 줄이거나 점심 장사를 포기한 식당이 늘어만 가죠. “많은 식당이 문을 닫았습니다. 주방을 유지하기 위해 (가스레인지를) 석탄, 나무, 전기밥솥으로 바꾸고 있죠.”(인도 전국레스토랑협회 만프리트 싱 이사 BBC 인터뷰)아마존 인도에선 인덕션 판매량이 30배 넘게 폭증했어요. 문제는 인도 음식이 인덕션과는 궁합이 썩 맞지 않는단 점인데요. 인기 레스토랑 ‘안나푸르나’는 메인 메뉴인 도사(남인도식 팬케이크) 판매를 중단해야 했습니다. 가스 불이 아니면, 도사의 바삭한 맛을 낼 수 없기 때문이죠. “정말 잔인한 일입니다. 저희는 58년 사업을 했는데, 이런 건 처음이에요.”(제간 다모다라사미 CEO 블룸버그 인터뷰) 에너지 비상 상황에서 쓸 수 있는 최후의 카드가 바로 배급제이죠. 인구 1억 7000만명의 방글라데시는 지난 6일부터 ‘연료 배급제’를 시행했어요. 휘발유 사재기와 패닉 구매를 막기 위해서였죠.주유소마다 긴 줄이 늘어서면서 민심은 들끓었습니다. “한 시간 넘게 기다려서 2L를 주유했다”는 오토바이 운전자, “어제는 기다리다 못 넣었는데, 오늘도 10L밖에 못 샀다”는 승용차 운전자의 한탄이 이어졌는데요.급기야 지난 14일 밤엔 사망사건까지 벌어졌습니다. 한 20대 남성이 대기줄 문제로 주유소 직원과 말싸움하다가, 직원이 휘두른 둔기에 맞아 사망했어요. 이에 분노한 군중들이 주유소를 부수고, 버스 3대에 불을 지르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요. 결국 정부는 민심을 달래기 위해 이튿날인 15일 배급제를 전격 해제했습니다. 에너지난이 치안 불안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죠.미얀마는 홀짝제, 필리핀은 주 4일제 에너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당장 쓸 수 있는 효과적인 카드는 수요 억제, 즉 에너지 절약입니다. 이란전쟁 이후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앞다퉈 짠내 나는 비상대책을 발표했는데요. 그중 눈에 띄는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태국: 공무원들에게 재택근무를 지시했습니다. 원격 근무 전환이 가능한 약 30%의 인원이 대상이죠. 공무원의 해외 출장도 중단했고, 더운 정장 대신 반팔셔츠를 입으라고 했어요. 사무실 에어컨 온도는 26~27도로 유지해야 하고요. 특히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라”는 아누틴 찬위라꾼 총리의 지시 내용이 화제가 됐죠.필리핀: 중앙 정부 부처와 공기업, 지방정부, 국립대학 등이 9일부터 주 4일 근무제에 들어갔습니다. 경찰·소방·병원 같은 필수 기관을 빼고 말이죠. 주 5일 근무 대신 하루 10시간씩 4일만 근무하는 식인데요. 또 불필요한 대면 회의를 금지하고, 에어컨 온도를 24도로 제한하는 조치도 함께 시행됩니다.미얀마: 군사정권이 7일 ‘차량 번호판 홀짝제’를 시행했습니다. 이틀에 한 번만 차량 운행을 허용하는 초강력 조치죠. 위반하면 차량을 압수한다며 강한 처벌도 예고했는데요. 다만 이 홀짝제에서 전기차는 예외입니다. 그 결과 전기차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전기차 가격이 순식간에 몇천만원씩 뛰었는데요. 덕분에 전기차 수입업체를 운영 중인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군사정권 수장)의 두 자녀는 대박이 나게 생겼습니다.대만의 ‘11일 치 LNG’ 사투 동북아시아의 한국, 일본, 대만은 모두 ‘에너지 섬’ 같은 비산유국이죠. 석유와 LNG 공급 모두 해상을 통한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요. 그래서 위기에 대비해 다른 나라보다 비축유를 더 많이 쌓아두고 있는 편입니다. 한국 208일분, 일본 254일분, 대만은 146일분의 비축유를 보유하고 있죠.액화천연가스(LNG) 비축량은 석유보단 적습니다. LNG는 원래 보관하기가 까다롭거든요. 그냥 탱크에 담아두면 되는 석유와 달리 LNG는 초저온(영하 162도) 저장탱크가 필요한데, 이게 만들기 비싸고 어렵습니다. 우리나라가 법으로 정한 LNG 의무 비축량은 9일 치이지만, 실제 확보해 둔 물량은 훨씬 더 많다는데요. 정부는 구체적인 수치를 밝히지 않지만, 에너지경제금융분석연구소(IEEFA)의 2023년 분석에 따르면 한국의 LNG 저장용량은 총 52일 치에 달합니다. 현재 일본은 21일 치의 LNG 재고를 보유 중이고요. 대만의 고작 11일 치를 탱크에 저장 중이죠.그래서 이란이 카타르의 LNG 생산시설 라스라판을 공격하자, 가장 불안해 하는 나라가 바로 대만입니다. 만약 LNG 부족으로 대만의 전력 공급이 불안해진다면, 그건 이만저만 큰일이 아니죠. TSMC의 반도체 공장 가동에까지 영향을 줄지 모르니까요.급해진 대만 국영 석유기업 CPC는 최근 현물시장에서 천연가스를 대량 구매했어요. 현물로 사면 가격이 비싸고 이미 지상 저장공간도 꽉 찼지만, 그래도 사들여서 선박에 실은 채로 두기로 한 거죠. 쿵밍신 대만 경제부 장관은 4월 말까지 천연가스 공급엔 차질이 없다면서 “천연가스 부족으로 인한 전력 배급제는 어떤 경우에도 시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하지만 이 전쟁이 4월에도 끝나지 않는다면 어쩌죠? 4월 말부턴 대만의 에어컨 사용량이 급증할 거라 더 걱정인데요. 대만에선 여러 대책이 논의 중입니다. 그 중 하나가 폐쇄하거나 출력을 낮췄던 석탄 화력발전소를 풀가동하는 거고요. 지난해 폐쇄된 마안산 원전의 재가동도 거론되죠. 한편, 이런 기회를 중국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18일 중국 대만사무판공실의 대변인은 기자회견에서 ‘에너지 통일론’을 주장하며 이렇게 대만을 압박했어요. “평화로운 통일로 양안 연결망이 구축되면 대만의 전력, 천연가스, 원유 부족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이란 전쟁이 길어지면서 한국 정부도 차량 5부제 또는 10부제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죠. 만약 전국적으로 민간까지 10부제를 시행한다면 1991년 걸프전 이후 35년 만의 일이 될 겁니다.또 중동산 나프타 수입이 막히면서 요즘 국내 석유화학 업계는 완전히 비상입니다. 국내 석유화학 기업이 줄줄이 ‘불가항력(Force Majeure)’, 즉 어쩔 수 없는 이유(이번엔 전쟁)로 계약을 이행하지 못한다고 선언했을 정도인데요. 이로 인한 연쇄적 생산 차질이 걱정스럽죠. 비닐 포장지와 플라스틱 용기가 동나게 된다면, 라면·과자 같은 식품 업계까지 타격이 불가피합니다.결국 에너지 수입국이라면 이 전쟁이 촉발한 에너지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어 보이는데요. 부디 더 이상의 확전은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3월 20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21일 BTS 컴백 공연이 열리는 서울 광화문에 무려 26만명이 집결한다죠. 덕분에 서울 호텔들이 특수를 누립니다. 광화문 주변 호텔은 일찌감치 방이 동났고, 강남·잠실권 호텔까지 예약률이 치솟았죠.이런 서울 호텔의 대호황이 앞으로 5년 이상 이어질 트렌드라는 걸 아시나요. 요즘 ‘호텔을 개발하고 싶다’는 문의가 이곳으로 밀려들고 있다는데요.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에서 호텔 개발과 매각에 관한 컨설팅을 담당하는 호스피탈리티 자문서비스팀을 16일 만났습니다. 민병은 팀장의 인터뷰 답변을 중심으로 뜨거워진 호텔 시장을 들여다봅니다. *이 기사는 3월 1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방이 모자라다, 호텔을 짓자!-지난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이 역대 최대(1870만명)를 찍었고, 점점 더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반면 서울은 코로나 이후 지난 수년간 새로 문 연 호텔이 별로 없어서 방이 모자라다고요?“저희가 2024년부터 공급 부족을 얘기했어요. 일단 서울에 (호텔을 개발할) 땅이 없고요. 원래 호텔은 부동산 중에서도 개발하기에 가장 비싼 자산인데, 코로나 이후 자재 원가가 확 올라서 공사비가 너무 비싸졌죠.또 숙박 수요라는 게 일정치가 않거든요. 과거 사드(THAAD) 여파가 있었고, 갑자기 코로나도 왔고요. 호텔 시장은 수급 불균형이 아니었던 때가 없긴 한데, 그게 호텔 개발의 큰 허들로 작용했어요.”-그럼, 향후 몇 년이나 공급 부족이 이어질까요?“5년, 길게 보면 한 7년까지요. 지난해부터 서울 호텔의 매입·매각이 활발했는데, 올해 안에 우량자산은 손바뀜이 다 이뤄질 거고요. 요즘엔 호텔 개발 검토에 대한 문의가 드라마틱하게 많아졌어요. 살 만한 좋은 호텔 물건을 찾기 어려워지자, 아예 새로 지어야겠다고 나서는 거죠.”-말씀하신 대로 서울에 땅이 없는데 어디에 개발하나요?“기존에 보유한 자산을 부수고 새로 짓거나, 원래는 오피스를 지으려던 개발부지를 호텔로 바꾸는 거죠. 요즘엔 투자자들이 오피스 쪽은 투자를 주저하고, 호텔이어야 투자나 대출이 잘 이뤄지거든요. 하지만 리스크가 큽니다. 개발 기간이 5년은 걸리니까요.”-검토에서 준공까지 5년이나 걸려요?“호텔은 원래 설계 기간이 오피스보다 훨씬 길어요. 오피스는 일단 표준대로 지어놓고 임차하면 되는데요. 호텔은 운영사(호텔 브랜드)별로 원하는 방향성이 다르거든요. 그래서 설계 단계부터 운영사가 관여하죠. 안전 시스템과 동선, 인테리어는 물론 가구 하나 놓는 것까지요.”영화관을 호텔로 바꿀 수 있나요? NO!-그에 비하면 원래 있던 건물을 호텔로 바꾸는 건 시간이 훨씬 단축되지 않을까요?“그 건물 상태에 따라 굉장히 다릅니다. 만약 사무실이었다면 물탱크 용량이 매우 작을 텐데, 숙박시설로 쓰려면 용량을 대폭 늘려야 하죠. 화장실도 층마다 하나만 있는데, 호텔은 방마다 있어야 하고요. 엘리베이터 대수도 늘려야 해요.”-사무실 공간에 벽을 세워서 방을 만들면 호텔이 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네요. 기본 설비 용량 자체가 달라져야 하는군요.“저희 팀이 작년에 12건을 검토했어요. ‘이 건물을 매입한 다음 호텔로 전환하고 싶은데, 할 수 있냐’는 식의 문의였죠. 물론 안 되는 자산이야 없어요. 부수고 지으면 되니까요. 다만 저희는 평면도를 딱 보면 나오죠. 이게 사이즈가 나올지, 안 나올지.” -부수지 않는 한 호텔 전환이 어렵겠다는 평면도가 있는 건가요?“많아요. 검토했던 건 중 건물 상층부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객실로 바꾸고 싶다는 게 있었어요. 영화관이 크니까, 그걸 여러 층으로 나누고 객실로 만들면 될 것 같다고 본 건데요. 저희가 물어봤죠. ‘거기 창문이 있습니까?’”-아…, 창문이 없네요.“그러면 결론이 이렇게 되죠. ‘다 부수고 다시 지어야 합니다.’ 저희는 건축적으로 (호텔 전환을) 받아줄 수 있느냐, 소방 같은 안전규정에 부합하느냐를 따진 다음, 지하실에 가봐요. 소방펌프, 부스터 펌프, 보일러, 물탱크 같은 모든 설비를 전부 바꿔야 하거든요. 그대로 둘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호텔로 전환하면 괜찮습니다’라고 답한 게 12건 중 딱 한 건뿐이었어요.”해외 호텔 브랜드를 유치하는 방법-얼마 전 명동 눈스퀘어에 일본 캡슐호텔 브랜드 ‘퍼스트 캐빈’을 유치하셨죠. 여긴 왜 캡슐호텔로 했을까요? “눈스퀘어 7층은 2년 반 정도 공실이었어요. 임대인이 이걸 뭘로 쓸지 고민하다가 저희랑 얘기하면서 숙박시설이 좋겠다고 봤고요. 빠른 실행을 위해 일반 관광호텔이 아닌 캡슐호텔을 권해드렸죠. 다만 눈스퀘어는 명동을 상징하는 곳이잖아요. 안전과 소방 규정은 맥시멈 레벨로 지켜야 한다고 봤어요. ”-얼마 전 소공동 캡슐호텔에서 화재가 났더라고요.“한국 캡슐호텔 시장은 아직 개인 사업자의 영역이에요. 하지만 개인 사업자는 눈스퀘어의 격에 맞는 임차인이 되긴 어렵다고 봤고요. 시스템이 잘 구축된 글로벌 브랜드를 유치하기 위해 일본으로 겁 없이 나갔죠.” -그냥 ‘똑똑, 저희 한국에서 왔는데요. 혹시 눈스퀘어 아시나요?’ 이런 식으로 한 건가요?“사전 시뮬레이션 자료를 가지고 먼저 일본 브랜드와 비디오콜을 했는데요. 마침 도쿄나 오사카 캡슐호텔 시장이 포화상태가 되면서 해외 진출을 모색 중인 상황이라 기류가 좋았어요. 하와이에 이어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진출을 검토 중이었는데, 저희가 ‘서울로 먼저 들어오시라’고 얘기했죠.이후 제가 직접 일본에 가서 퍼스트 캐빈의 모회사 회장님을 만났는데요. 여기 두 분(정다정 차장, 이수민 과장)은 그 회의 시간에 맞춰 명동 눈스퀘어에서 핸드폰으로 라이브스트리밍을 했어요. ‘여기가 명동 거리, 눈스퀘어 앞입니다. 1층에서 지금 올라갑니다’라면서요. 그게 회장님의 마음을 건드렸죠.”서울도 ‘1박 200만원’ 시대 온다 -명동 타임워크 빌딩을 3성급(이비스 앰배서더 명동)에서 4성급으로 전환하는 프로젝트도 최근 하셨죠. 이렇게 호텔 브랜드 등급을 높이면 임대인 입장에선 그만큼 건물의 자산가치도 올라가나요.“그렇죠. 더 나은 객실가격을 받게 되면 그만큼 임대료도 올려받거든요. 저희가 예측하기로 명동 4성급 시장의 ADR(연간 1박 객실 평균가)과 3성급 시장은 약 5만원 정도 항상 차이가 나요.”-그 갭이 좁아지진 않고요?“주택시장에서 입지에 따른 가격 차이가 유지되는 것과 비슷해요. 명동 안에서도 3성급과 4성급의 위계는 늘 유지되고요. 또 같은 등급이어도 명동과 홍대 사이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한 4~5만원 차이가 나죠.”-서울의 톱은 항상 명동인가요?“명동을 이기는 동네는 없어요.”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서울 호텔 숙박료가 싼 편이고, 그래서 앞으로 오를 가능성이 있다고도 하던데요. 그게 맞는 얘기인가요?“많이 저평가돼 있죠. 도쿄 긴자에서 하룻밤 묵는 것과 명동에서 자는 것, 얼마나 차이 날 거 같나요?”-왠지 긴자가 훨씬 비쌀 것 같네요.“긴자가 한 1.5~1.8배 정도 됩니다. 그만큼 서울이 저평가 돼있으니, 수요와 공급 논리에 따라 (객실료가) 올라갈 거고요. 또 호텔은 ‘브랜드가 곧 가격’이거든요. 한국에선 포시즌스가 마지막으로 들어온(2015년 오픈) 최고 등급의 호텔 브랜드이고, 지난해 ADR이 80만원 정도인데요. 이제 포시즌스에 준하는 새로운 브랜드가 들어오면서 가격을 들어올릴 거예요.”-어떤 최고급 브랜드가 서울에 들어오나요?“예정된 건 아만, 만다린 오리엔탈이 있고, 리츠칼튼도 다시 들어오죠. 그리고 이들은 포시즌스보다 더 비싸게 받을 거예요. 그동안 호텔 자산을 개발하는 데 드는 원가가 올랐으니까요.”-마치 신축 아파트 분양가가 계속 오를 수밖에 없는 것과 비슷하네요.“아만(AMAN) 서울(청담동 옛 프리마호텔을 재개발)이 오픈하면 우리나라도 ADR(1박 평균 객실단가) 200만원 시대를 보지 않을까 싶어요. 도쿄의 포시즌스나 불가리가 이미 다 200만원이 넘거든요.”-한국엔 지금 100만원 넘는 호텔도 없는데, 200만원대가 열릴 잠재력이 있는 거네요.“다만 그들이 예측한 오픈 시점은 2030년 즈음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의 ‘초럭셔리 호텔 전성시대’는 우리가 5년 이내에 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니고요. 또 현재는 서류로만 존재하는 이 사업장들이 과연 얼마나 살아남을지는 두고 봐야 하죠. 사실 한두 개만 완공돼도 성공이에요.”2~3년 뒤엔 제주가 다시 뜬다? -서울 호텔은 대호황이지만, 지방 호텔은 텅텅 비어서 울상이라는데요.“코로나가 끝나고 해외 여행을 많이 가면서 직격탄 맞은 게 제주였죠. 그런데 저는 2~3년 내엔 제주 시장이 돌아올 거라고 확신해요. 일단 지난해 시작된 중국 단체 관광객 비자면제 프로그램으로 중국인 관광객이 늘어났고요. 국내 관광객도 다시 올 겁니다.”-그동안 해외 여행 많이 다녔으니까요? “관광은 항상 사이클이 있는 법이거든요. 해외 여행할 건 거의 다 했으니까, 다시 ‘제주도 가서 노는 게 편하다’며 돌아오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그래서 제주에 호텔이나 리조트를 소유한 법인들은 지금이 수선 타이밍이라고 보고 있어요. 2~3년 뒤에 손님맞이를 제대로 할 준비를 하는 거죠.사실 저희 팀의 꿈은 지방의 호텔 건립 사업을 지원하는 거예요. 지금은 서울과 지방의 양극화가 너무 심하잖아요. 지방자치단체는 다들 호텔을 유치하고 싶어하는데, 민간 시장이 반응하지 않아서 어렵죠. 그 중간 연결고리를 만드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만약 지방사업을 성공궤도에 올릴 수 있다면, 그게 서울 호텔 10개를 한 것보다 더 큰 가치가 있을 겁니다. 진짜 호스피탈리티 실력자라는 걸 보여줄 수 있죠.” By.딥다이브*이 기사는 3월 1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최근 중국을 들썩이게 만든 ‘랍스터 키우기’를 아시나요. 랍스터란 별명으로 불리는 인공지능(AI) 에이전트 오픈클로(OpenClaw) 붐이 중국을 휩쓸고 있습니다.하지만 무료 분양이라던 이 랍스터, 키워보니 하루 먹이값만 몇만 원씩 나간다죠. 게다가 주인 은행 계좌까지 털 수 있는 위험천만한 존재입니다. 한편에선 오픈클로 설치 열풍이 한창이지만, 다른 편에선 이걸 다시 지워주는 ‘제거 서비스’까지 등장했는데요. 중국의 ‘오픈클로 현상’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3월 13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집게발 가진 디지털 비서3월 6일 금요일, 중국 선전의 텐센트 본사 앞에 1000명 넘는 사람이 몰려 줄을 섰죠. 텐센트 엔지니어들이 무료로 오픈클로를 설치해 준다는 소식에 몰려든 인파였습니다. 9살 초등학생, 70세 무형문화재 전문가, 가정주부 등 IT 업계와 거리가 먼 일반인이 많았죠. 중국에서 오픈클로가 얼마나 인기를 끌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는데요.요즘 중국은 베이징·선전·항저우 등 전역에서 연일 ‘오픈클로 배우기’에 대한 강연과 행사가 이어집니다. 9일 푸셩 치타모바일 CEO가 진행한 ‘오픈클로 활용법’ 라이브 스트리밍 방송엔 55만명의 동시 시청자가 몰렸어요. 온통 ‘랍스터(오픈클로의 별명)’ 이야기로 가득합니다.이 광풍의 실체를 들여다보기 전에 오픈클로가 뭔지부터 정리해 볼까요.오픈클로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설치할 수 있는 AI 에이전트입니다. 오스트리아 개발자 피터 슈타인베르거가 2025년 11월 처음 선보였죠. 미국과 한국에서도 기술 좀 안다는 사람들 사이에선 상당히 인기를 끌었는데요.오픈클로는 챗GPT 같은 AI 챗봇과는 여러모로 다릅니다. 챗봇은 말만 잘하지만, 오픈클로는 손이 있거든요. 이름에 ‘집게발(Claw)’이 들어간 이유이죠. 집게발처럼 컴퓨터의 키보드와 마우스를 제어해서 업무를 실제로 실행할 수 있는데요.예를 들어 “OO에게 이메일 답장을 써줘”라고 하면 챗봇은 그 초안만 작성해 주잖아요. 오픈클로는 실제로 메일 앱을 열어 수신인을 지정하고 내용을 쓴 뒤 전송 버튼까지 누릅니다. 진짜 비서처럼 부릴 수 있는 거죠.오픈클로는 로컬, 즉 내 PC나 스마트폰에서 작동한다는 것도 다른 점입니다. 챗GPT 같은 다른 AI 서비스는 클라우드 기반이에요. 그래서 내가 챗GPT에 한 질문, 공유한 자료는 오픈AI의 클라우드 서버로 전송되죠. 그게 왠지 찜찜할 수 있는데요. 오픈클로는 내 컴퓨터 안에서만 데이터가 돕니다. 외부 서버를 통하지 않고도 그 안에 있는 자료를 AI가 읽고 분석하죠. ‘내 책상에 앉아서 내 컴퓨터를 직접 만질 수 있는 비서’인 셈입니다.또 오픈클로는 일반 메신저를 통해 이용해요. 예컨대 챗GPT를 쓰려면 보통 챗GPT 전용 앱을 다운받아 사용해야 하는데요. 이와 달리 오픈클로는 텔레그램, 왓츠앱, 시그널, 아이메시지 같은 일반 개인용 메신저에서 대화하듯 사용합니다. 특히 중국에선 국민메신저인 위챗(WeChat)과 연동되면서 붐이 일었죠. 참고로 오픈클로는 오픈소스 기반이고, 누구나 공짜로 설치할 수 있습니다.AI 벼락부자가 될 기회?어떤가요. 분명 혁신적인 서비스이긴 한데, 그렇게까지 열풍이 불 정도인가 싶기도 합니다. 중국엔 유독 AI 기술에 관심이 큰 얼리어답터가 많은 걸까요?그런 건 아니고요. 지금 중국에서 오픈클로 광풍이 일어나고 있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잘만 하면 그걸로 대박 날 수 있다는 (섣부른) 희망, 그리고 남이 다 하는데 트렌드에 뒤처질 수 없다는 FOMO(Fear Of Missing Out)이죠.이메일 정리, 주간 보고서 작성, 경비 정산, 회의실 예약, 엑셀 시트 업데이트. 이런 정도의 작업이라면 오픈클로에 맡긴다고 해서 그리 큰돈이 되진 않겠죠. 하지만 이런 건 어떨까요? 주식 자동 매매.‘오픈클로에 50달러의 투자금을 줬더니 48시간 만에 2980달러로 불려 무려 5860% 수익률을 달성했다.’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이런 글이 지난달 온라인에서 퍼져나갔습니다. 오픈클로로 미국의 예측 사이트 ‘폴리마켓’에서 투자해 대박을 냈다는 내용이었는데요.누가 썼는지 모를 이 영문글이 중국어로 번역돼 소개됐고요. 2월 설날 연휴를 기점으로 중국 투자자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됐습니다. ‘나도 한번 랍스터(오픈클로)에 주식 투자를 맡겨볼까’라는 사람들이 급속히 늘었고요.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랍스터 주식투자법’을 알려준다는 동영상 강의가 마구 생겨났죠. 심지어 여러 증권사까지 이에 가세해, 오픈클로를 이용해 투자하는 방법을 안내하는 특별 보고서를 앞다퉈 내놨습니다.일단 오픈클로가 뜨자, 돈벌이에 이걸 유용하게 사용했다는 각종 성공 사례가 속속 쏟아져 나옵니다. 대표적인 게 소셜미디어 계정 관리이죠. 오픈클로는 소셜미디어에 글과 사진, 동영상을 올리고 댓글까지 달 수 있어요. 사람처럼 메시지를 보내거나 그룹 채팅도 할 수 있고요. 수십, 수백개의 소셜미디어 계정을 아주 손쉽게 관리하게 됩니다.또 온라인 쇼핑몰 운영도 일부 맡길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이런 걸 오픈클로에 시키는 거예요. ‘매일 아침 6시에 경쟁업체 가격을 검색해서 그 최저가보다 50위안 저렴하게 내 판매가격을 조정해 줘.’ 예전 같으면 사람이 시간을 들여 일일이 찾아보거나, 엔지니어를 고용해 프로그램을 짜야만 가능했던 일을 이젠 오픈클로로 쉽게 할 수 있게 된 거죠.‘그렇게 쉽고 편하다고? 그러면 나도 이걸로 부업이나 해볼까?’ AI 기술과 별 상관없던 가정주부나 은퇴자들까지 오픈클로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오픈클로가 ‘24시간 지치지 않고 일하는 슈퍼 직원’ 역할을 할 테니, 1인 창업도 충분히 가능할 거란 기대가 커지죠.중국 지방정부들은 오픈클로 열풍을 더욱 부추기고 나섰습니다. 벌써 20개 이상 도시가 ‘오픈클로 기반 프로젝트를 우리 도시에 유치하겠다’며 각종 지원책을 발표했어요. 임대료 면제, 컴퓨팅 파워 제공은 물론이고요. 최대 600만 위안(약 12억원)의 보조금 지원을 발표한 도시(쑤저우 창수시)도 나왔죠.이로 인해 웃게 된 건 중국 기술기업들입니다. 자체 AI 모델을 보유한 알리바바, 텐센트, 바이두, 즈푸, 키미, 미니맥스 같은 AI 기업들이죠. 오픈클로 이용자 중 자기네 AI 모델을 선택한 사람이 많아지면 매출이 급상승하게 되니까요.랍스터 양식엔 돈이 든다 3월 들어 중국 내 오픈클로 열풍은 극에 달했고요. 아직도 그 열풍이 이어지고는 있는데요.하지만 미묘한 변화가 감지됩니다. 실제 오픈클로를 이용해 본 사람이 늘어나면서 두 가지 사실을 깨우치게 됐기 때문이죠. ①랍스터를 키우려면 꽤 비싼 먹이를 줘야 합니다. ②랍스터는 자칫 위험할 수 있습니다. 대단히 조심해야 합니다.앞에서 오픈클로는 오픈소스라서 무료라고 얘기했는데요. 하지만 오픈클로에 일을 시키는 데는 돈이 듭니다. 왜? 오픈클로는 프레임워크(뼈대)일 뿐이라서, 실제 일을 할 땐 외부의 거대언어모델(LLM), 예를 들어 GPT-4나 제미나이를 매번 호출하는데요. 그 이용료는 사용자가 내야 하죠. 랍스터를 공짜로 분양받더라도, 키우려면 먹이를 줘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랄까요.그리고 그 비용이 생각보다 훨씬 클 수 있습니다. 오픈클로에 맡기는 복잡한 작업은 단순 챗봇 대화보다 수백, 수천 배 더 많은 토큰을 소모할 수 있기 때문이죠. 만약 자동화된 작업을 24시간 내내 하면 하루 400위안(8만6000원)쯤 든다고 해요. 랍스터 먹이값이 장난이 아닙니다.이보다 더 큰 문제는 랍스터에 내재한 위험성입니다. 앞에서 오픈클로가 내 컴퓨터를 조작하는 비서와 같다고 설명했는데요. 만약 그 비서가 내 이름으로 이상한 이메일을 보내거나, 은행 계좌에서 돈을 빼돌리거나, 아니면 컴퓨터를 초기화시켜서 데이터를 몽땅 날려버리면 어쩌죠?생성형 AI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환각(Hallucination)이고요. 이로 인한 오작동 가능성은 언제나 있는 법입니다. 실제 오픈클로가 명령을 오해하고 15년 치 가족사진을 날리거나, 받은 편지함 전체를 일괄 삭제해 버린 사례가 이미 있는데요. 그래서 일론 머스크는 오픈클로 사용을 두고 이렇게 경고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삶 전체에 대한 루트 액세스(관리자) 권한을 넘겨주고 있다.”오픈클로는 너무 높은 수준의 시스템 권한을 부여받은 탓에 보안 면에서도 대단히 취약합니다. 해킹에 일단 뚫리면 사용자의 모든 정보가 탈탈 털리게 될 테니까요. 실제 오픈클로를 이용하다 신용카드 정보가 도용된 사례가 보고되기도 했습니다. 최근 중국 국가인터넷응급센터(CNCERT)는 오픈클로의 심각한 보안 위험이 발견됐다며 이렇게 당부했어요. “오픈클로에 과도한 권한을 부여하지 마세요. 신뢰할 수 있는 채널에서 검증된 프로그램만 설치하고, 보안 패치를 설치하세요.”금을 캐느냐 삽을 파느냐 결론적으로 오픈클로는 아직까진 ‘만능 도구’라기엔 부족한 실험단계 제품에 가깝습니다. 효용에 비해 비용이 많이 들고, 보안이 너무 취약하죠.게다가 프로그래밍 경험이 없는 일반인 입장에선 초기 설치 작업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선 신종 사업이 생겨났죠. 오픈클로 원격 또는 방문 설치 서비스. 한 번에 300~500위안(약 6만~10만원)을 받고 오픈클로를 설치해 주는 사업자들이 수도 없이 생겼고, 대활황입니다. 며칠 만에 이 사업으로 26만 위안(약 5500만원)이나 벌었다고 인증한 이가 있을 정도인데요.그런데 놀라운 게 뭔지 아세요? 오픈클로 무료 설치를 위해 텐센트 본사 앞에 긴 줄이 늘어섰던 게 불과 지난주 금요일인데요.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11일 중국 언론엔 이런 기사가 나왔습니다. ‘가정 방문 오픈클로 제거 서비스가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299위안의 가격으로 조용히 등장했다.’ 랍스터를 분양했던 업자들이 이제 ‘랍스터 죽이기’까지 발 빠르게 사업화했다는 소식입니다. 비용과 보안 등의 문제로 오픈클로 제거를 원하는 이용자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뜻이겠죠. 한쪽에선 여전히 열풍인데, 다른 쪽에선 벌써 열기가 식어가고 있군요.참, 시장의 순환이 빠르기도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교훈은? 골드러시 시대에 돈을 버는 건 금을 직접 캐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에게 ‘삽과 곡괭이’를 파는 사람이란 점이죠. 사용법도 잘 모르는 AI 에이전트 설치를 위해 다들 서두르는 동안, 누군가는 그들을 상대로 양쪽(설치와 제거)으로 돈을 벌고 있습니다. 역시 기술 혁명은 항상 새로운 사업 기회를 동반하는 법이로군요. By.딥다이브*이 기사는 3월 13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이란전쟁은 언제나 끝날까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9일(현지시간) 전쟁이 “매우 빨리(pretty quickly)”, “곧(very soon)” 끝날 거라며 시장을 안심시켰죠. 그 ‘곧’이 언제쯤인진 아무도 모르는 것 같지만요.그런데 미국이 이대로 ‘승리’를 선언하고 이란과의 전쟁을 끝내면, 세계 경제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걸까요. 그러면 좋겠지만, 그리 간단하진 않을 거란 비관론이 우세한데요. 우리가 염두에 둬야 할 이란전쟁의 여파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3월 1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이번에도 TACO 하나요?전 세계 금융시장이 간절히 원하던 신호가 포착됐습니다. 바로 ‘TACO(Trump Always Chickens Out, 트럼프는 항상 겁먹고 물러선다)’이죠. 9일 트럼프 대통령이 조기 종전 가능성을 언급했습니다.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서며 분위기가 심상찮아지자, 입장을 바꾼 거죠. 그 덕분에 배럴당 110달러를 뚫었던 원유 선물 가격은 90달러 아래로 급락했고, 주요국 증시는 상승 반전했어요.하지만 10일에도 여전히 이란은 물론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등 여러 나라에 미사일 또는 자폭 드론이 떨어졌고요. 호르무즈 해협은 여전히 사실상 봉쇄된 상태입니다. 이날 이란혁명수비대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격이 계속된다면 이 지역에서 단 1리터의 원유 수출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란 대변인 성명을 발표했죠. 프랑스·러시아·중국·튀르키예 등이 중재에 나섰지만, 아직까진 양측이 협상테이블에서 마주하게 될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는데요.그래도 최악의 시나리오는 상상하고 싶지 않습니다. 전쟁과 호르무즈 봉쇄의 장기화라는 시나리오에선 어떻게 해도 ‘세계 경제 공멸’이란 매우 우울한 결론에 이를 테니까요. 그보단 트럼프 대통령이 애초에 공언했던 대로 몇 주 안에 이 전쟁이 어떤 식으로든 끝나고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풀린다고 한번 가정해 봅시다. 현재로선 금융시장이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시나리오이죠. 자, 그럼 그 이후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평온했던 저유가 시대는 안녕이란의 정권 교체는 현재로선 물 건너간 것처럼 보이죠. 전쟁이 끝나더라도 아마 이란 정권은 건재한 채 남아있을 겁니다. 게다가 강경파인 모즈타바 하메네이가 새로운 최고지도자가 됐으니, 이란의 대외정책은 전보다 더 예측 불가능해졌죠. 미사일 굉음이 사라져도,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긴장은 가라앉지 않을 겁니다.“이란 정권이 계속 집권한다면 경제적 여파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전 세계 석유·가스 가격엔 지속적인 위험 프리미엄이 반영될 겁니다.”(무디스 애널리틱스의 마크 잔디 이코노미스트) 이 지역에 일종의 ‘모즈타바 프리미엄’이 추가될 거란 전망인데요.고위험 지역으로 낙인찍힌 이 지역의 각종 보험료와 인건비가 상승할 거고요. 이런 고비용 구조가 ‘뉴노멀’로 자리 잡으면서 국제유가를 끌어올릴 겁니다. 1970년대 오일쇼크처럼 국제유가가 4배씩 폭등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 이전 같은 60달러대 저유가 시대로 다시 돌아갈 순 없는 거죠. “설령 오늘 전쟁이 끝난다고 해도, 앞으로도 불확실성이 지속되면서 유가가 상승할 것”(하버드대 경제학과 제이슨 퍼먼 교수)이란 분석입니다.전쟁으로 타격을 입은 유전과 가스전이 얼마나 빨리 복구되느냐도 유가엔 관건입니다. 일단 가동을 중단한 유전과 가스전은 스위치 켜듯 바로 생산을 재개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이건 수도꼭지가 아니라, 거대한 지질학적 압력이 작용하는 매우 정밀한 시스템이기 때문인데요.유전은 가동을 중단하면 내부 압력 평형이 깨지면서 원유층으로 물이 섞여 들어갑니다. 그래서 가동을 재개하면 처음엔 기름 대신 물이 섞인 진흙탕 같은 액체가 나오죠. 이걸 다 걷어내고 다시 순수한 원유가 나오게 만드는 데 보통 몇 주가 걸리고요. 최악의 경우엔 생산량이 100% 회복되지 못할 위험도 있어요.이렇게 원유 공급은 차질이 불가피하지만, 수요는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주요 7개국(G7)은 역사상 최대 규모인 3억~4억 배럴의 공동 비축유 방출을 준비 중인데요. 이 비상 상황이 끝나면 그 비축유를 다시 채워둬야 하는 건 당연하고요. 에너지 안보에 각성한 여러 나라들이 석유 비축 늘리기에 나설 테니까요. 2023년부터 이어져 온 석유 시장의 ‘구조적 과잉 공급’ 기조는 깨지게 됩니다.이미지 공든 탑 무너지나 상처 입긴 했지만 한층 강경해진 이란 정권의 생존. 주변 걸프 국가 입장에선 최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제 또 이란이 두바이나 도하로 미사일을 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하니까요. 게다가 이번 전쟁으로 미국의 보호망이 그리 완벽하진 않다는 게 확인된 상황. 결국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며 중동 국가는 군비 확장에 나서게 될 겁니다.“걸프협력회의(GCC) 회원국은 안보에 대한 기존 가정을 재평가함에 따라 군사비 지출이 급증할 겁니다. 이번 전쟁으로 미국 안보 역량의 한계와 첨단 기반 시설이 저렴한 무기에 얼마나 취약한지가 드러났으니까요. 국방비 증가는 자원 다변화 프로그램에 대한 투자를 잠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프레드릭 슈나이더 중동국제문제협의회 연구원) 중동 국가에 무기를 판매할 한국 방산기업엔 호재가 될 겁니다. 반면 스마트시티 같은 첨단산업의 수혜를 기대해 온 기술기업엔 달갑지 않은 전망이죠.이보다 더 큰 문제는 공들여 구축해 온 ‘매력적인 글로벌 투자처’라는 이미지에 금이 갔다는 겁니다. 부유층이 몰리는 ‘중동의 스위스’ 두바이, ‘글로벌 AI 허브’를 자처한 아부다비, 관광과 국제행사의 중심지 카타르 도하,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거점’을 노리던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그 화려한 도시들 뒤편에 알고 보니 이란이란 거대한 화약고가 있더라는 게 이번 전쟁으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특히 아마존웹서비스(AWS)의 중동지역 데이터센터 3곳이 이란 드론의 공격을 받기도 했는데요.그렇다고 당장 투자자들이 짐 싸서 떠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추가 투자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합니다. “중동전쟁으로 기존 투자가 더 이상 경제성이 없다는 걸 깨달은 기업이 많습니다. 그 기업들은 투자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투자를 미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후회하죠. 다음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겁니다.” (미시간대 경제학과 저스틴 울퍼스 교수)에너지 패러다임 바꿀 수 있을까일상을 뒤흔드는 충격적인 에너지 위기는 에너지 시장의 판도를 바꾸곤 합니다. 1970년대 오일쇼크를 계기로 석유를 쓰는 화력발전소는 자취를 감췄죠. 비싼 석유 대신 저렴한 석탄과 천연가스가 발전원의 주류로 자리 잡았고요. 또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한 이후엔 유럽에선 원자력 발전이 부활했어요.그럼, 이번엔 어떨까요? 휘발유 가격 급등을 확인한 미국에선 다시 이런 주장이 힘을 얻습니다. “미국은 중국처럼 전기차에 투자해야 합니다.”(로드메리 켈라닉 디펜스프라이어리티 연구원)흔히 미국은 세계 최대 산유국이라 국제유가가 올라도 별 타격이 없을 거라 생각하는데요. 일반 소비자 입장에선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석유는 세계시장에서 거래되기 때문에 가격이 어디나 비슷한 법이니까요. 켈라닉 연구원 표현을 빌리자면 “석유시장은 여러 개의 수도꼭지와 배수구가 있는 거대한 욕조”나 마찬가지이거든요. (참고로 석유와 달리 천연가스는 지역마다 가격 차이가 큰 편입니다.)따라서 미국이든 한국이든 이란전쟁으로 인한 휘발유 가격 급등으로 고통받는 건 똑같고요. 오히려 미국 소비자가 가장 취약할 수도 있습니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미국 가정이 유럽이나 일본보다 더 크고 연비가 낮은 차를 운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죠.바로 여기서 트럼프 대통령은 외쳐온 ‘드릴 베이비 드릴(Drill, Baby, Drill)’ 구호의 공허함이 확인됩니다. 미국이 석유를 더 많이 캐면 석유기업엔 좋겠지만, 일반 미국인도 살기 좋아지느냐? 그건 아닌 거죠. ‘석유 체제’ 안에 있는 한은 모즈타바 하메네이 같은 예측 불가능한 인물에 미국인의 삶이 휘둘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막을 방법은 결국 ‘탈석유’와 ‘전기화’이죠. 이란전쟁이 보여준 중요한 교훈인데요.과연 이런 깨우침이 의미있는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에너지 전환 속도가 유독 느린 한국도 되새길 만한 대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3월 1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이란과의 전쟁에서 압도적 화력을 보여준 미국. 하지만 세계 최강 군사 대국 미국을 두고 이런 의문이 자꾸 제기됩니다. 아무래도 무기가 부족할 수 있겠는데?왜 미국의 미사일 재고가 고갈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 걸까요. 자폭드론 수백 대가 날아다니는 현대 전쟁터에서 가장 필요한 무기는 무엇일까요. 오늘은 경제적 소모전이 되어버린 현대 전쟁의 아이러니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3월 6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누구 미사일이 먼저 바닥날까“미군의 중급과 고급 무기 비축량은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하고 질적으로 매우 우수합니다. 우리는 사실상 무제한의 무기를 보유하고 있죠. 이러한 무기만으로도 전쟁은 ‘영원히’, 그리고 매우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3일(현지시간)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SNS 글을 통해 이렇게 밝혔죠. 이어 댄 케인 합참의장도 이렇게 장담했어요. “우리는 공격과 수비 모두에서 주어진 임무에 필요한 정밀 무기를 충분히 보유하고 있습니다.”다른 나라도 아니고 미국이 무기가 충분한 건 당연하지 않냐고요? 미국의 재래식 무기 비축량이 단연 세계 1위인 건 틀림없는데요. 지금 문제는 공격용 무기가 아닌 공중 방어용 시스템입니다. 이란이 날리는 미사일과 드론을 격추하는 데 필요한 요격 미사일이 빠르게 소진되고 있기 때문이죠.미국 육군의 지상 방공망은 대표적으로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와 패트리엇(PAC-3)이 있죠. 해군 이지스함에 탑재된 SM-3(Standard Missile-3)도 있고요.미군의 무기별 재고량은 기밀이라 공개되진 않는데요. 전략국제연구센터(CSIS)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사드 미사일 약 380발, SM-3 미사일은 414발 남아있을 걸로 추정됩니다. 패트리엇 미사일의 경우 재고량은 알 수 없지만, 2025년 한 해 동안 록히드마틴이 새로 납품한 물량이 620대였다고 하죠. 그나마 역대 최대로 생산량을 늘려서 이 정도입니다.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 이후 이란은 주변국 미군 기지와 에너지 생산 시설을 타격했어요. 개전 후 나흘 동안 이란이 날린 탄도미사일이 약 500기, 자폭드론은 약 2000대에 달하는데요.이를 방어하기 위해 중동 국가들은 패트리엇 같은 요격 미사일 수천 발을 발사해야 했죠. 미사일이나 드론 하나를 격추하려면 요격용 미사일도 하나 이상 필요한 법이니까요. 이런 물량 공세 덕분에 이란의 공격을 상당 부분 막아낼 수 있었는데요.하지만 미국과 이스라엘, 걸프 국가 모두 요격용 미사일 재고량엔 한계가 있습니다. 무한정 이런 수준의 방어를 계속할 순 없는 노릇이죠. 스팀스센터의 켈리 그리코 연구원은 이 전쟁이 공중전에 막대한 물자를 쏟아붓는 “소모전”이 되어버렸다며 이렇게 설명합니다. “문제는 누가 먼저 미사일이 바닥나느냐는 겁니다. 방어 측(미국과 동맹국) 요격 미사일이 부족해질까요? 아니면 이란의 미사일 또는 미사일 발사 능력이 부족해질까요?”‘미사일 수학’을 해보자결국 이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변수는 ‘미사일 수학’입니다. 그리고 장기전이 될수록 상황은 미국에 불리하게 돌아갈 수 있습니다. 미국은 강력한 성능의 요격용 미사일을 보유했지만, 이걸 빨리 제때 생산할 수가 없거든요.이는 마크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도 인정한 사실입니다. “일부 추산에 따르면 이란은 한 달에 100발 이상의 미사일을 생산합니다. 반면 미국이 생산할 수 있는 요격 미사일은 6~7발에 불과합니다.”이란은 전국 산악 지대 수십 곳에 있는 지하 기지에서 무기를 마구 찍어내고 있어요. 월 100대의 미사일만이 아니라, 샤헤드(Shahed) 드론을 하루에도 수백 대씩 대량생산한다는데요.미국은? 일단 사드(THAAD)는 수년 전에 미국 정부가 주문한 걸 2027년 4월에나 받을 수 있고요. 지난해 620발에 그친 패트리엇 생산량은 2030년에나 연 2000발로 늘어날 계획입니다. SM-3 미사일 납품량은 올해 대폭 늘려서 고작 66대가 될 거고요. 미사일 보충 속도가 턱없이 느립니다.이란 전쟁 이전부터 트럼프 대통령은 무기 납품 속도를 높이라고 재촉했어요. 올 1월엔 납기가 지연된 방산기업엔 배당금 지급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리기도 했죠. 괜히 주주 환원 같은 데 돈 쓰지 말고, 공장 증설해서 무기를 더 많이 만들라고 기업을 압박한 건데요.하지만 원래 이런 정밀한 첨단 무기는 매우 복잡해서 만드는 데 오래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쥐어짠다고 해서 갑자기 생산량을 몇 배로 늘릴 순 없죠. 또 돈도 큰 문제입니다. 무기 구입을 위한 국방 예산을 대폭 늘려야 하니까요.바로 이 지점에서 또 다른 수학이 작용합니다. 아무리 따져봐도 비용 차이가 너무하거든요. 이란의 자폭드론 샤헤드 제조 비용은 대당 2만~5만 달러(2900만~7300만원). 알리익스프레스에서도 구할 수 있는 저렴한 중국산 전자 부품으로 만들기 때문에 단가가 상당히 낮은데요.이에 비해 미국의 패트리엇 미사일은 한 발에 300만 달러(약 44억원), 사드는 1500만 달러(219억원), SM-3는 2400만 달러(350억원)에 달합니다(최근 납품 단가 기준). 비용 교환비, 즉 공격무기 대비 방어무기 가격의 비율을 따지면 최소 60대 1 이상인 거죠.3000만원짜리 드론 잡자고 수십억원 짜리 미사일을 쏜다? 이런 비효율적인 상황을 가리켜, 영국 더 타임스는 이렇게 표현했어요. “플라스틱 표적에 금으로 만든 총알을 발사하는 셈.”미국이 값비싼 무기를 이렇게 허비하는 건 경제적 낭비일 뿐 아니라, 군사 전략 면에서도 치명적입니다. 중동에서 미사일을 소모하는 만큼 미래에 다른 지역, 특히 중국의 대만 침공 같은 충돌이 발생했을 때 쓸 수 있는 자원이 줄어들기 때문이죠. 미국이 고가의 첨단 무기를 이란에 많이 퍼부어댈수록 중국이 웃게 되는 겁니다.우크라이나의 아이러니그래서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제 이란 지상에 있는 미사일 발사대를 파괴하는 데 집중합니다. 날아오는 미사일을 요격하기보다는 아예 미사일을 날리지 못하도록 선제 타격하는 거죠. 그럼 요격용 미사일도 아끼고, 이란의 공격 능력도 약화할 수 있으니까요. 댄 케인 합참의장은 실제 이란의 탄도 미사일 발사 빈도가 개전 초기보다 86%나 줄어드는 효과를 거뒀다고 밝혔어요. “이란은 미사일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발사대가 부족한 것”(오슬로대 파비안 호프만 연구원)이란 해석이 나오죠.하지만 미사일과 달리 자폭 드론은 거대한 발사대 없이 어디서나 띄울 수 있거든요. 크기도 작아서 평범한 창고나 민간 가옥, 트럭 같은 데 숨길 수도 있고요. 선제적으로 타격할 곳이 보이지 않으니, 결국 날아오는 걸 맞춰 떨어뜨리는 방법밖에 없는데요.이 골칫거리를 막기 위해선 새로운 접근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란제 자폭 드론을 막는 기술에 통달한 전 세계 유일한 나라가 있으니, 바로 우크라이나입니다.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드론전쟁 시대가 열렸다는 이야기는 이미 전해드린 적 있는데요. 이 전쟁 초기부터 러시아의 주력 공격용 무기 중 하나가 이란제 샤헤드-136 자폭드론이었습니다.2022년 개전 이후 샤헤드 드론은 우크라이나를 아주 지긋지긋하게 괴롭혔는데요. 하지만 전쟁이 만 4년 넘게 이어지면서 우크라이나의 방산 기술력은 놀랍도록 향상됐고요. 이제 샤헤드를 잡는 요격용 드론을 생산하는 기업만 열 곳이 넘습니다.우크라이나가 개발한 고속 요격기로는 ‘스팅(Sting)’이 대표적인데요. 스팅은 샤헤드보다 더 빠른 속도(최고 시속 280㎞)로 날아가 적 드론에 충돌합니다. 조종사가 표적을 지정만 하면 AI 자율주행으로 끝까지 추격할 수 있죠. 요격 성공률은 70~80%에 달하고요. 가격은 단돈 2000달러(294만원)로 샤헤드의 10분의 1 수준이죠. “요격기 가격이 목표물보다 비싸다면 드론을 100% 격추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우크라이나 제25공수여단 소속 파블로 베르호보드 중령).적의 자폭 드론을 가장 싼 값에 막을 수 있는 똑똑한 요격 드론의 탄생. 이 혁신은 유럽 국가들을 고무시켰고요. 지난 2월 19일 유럽 5개국(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폴란드)이 우크라이나와 손잡고 ‘저비용 타격체 및 자율 플랫폼(LEAP)’ 프로젝트를 공식 출범했죠. 우크라이나 같은 가성비 방공망을 유럽도 구축하려고 나선 겁니다.유럽도 탐내는 고효율의 방어체계라면, 이란과 싸우는 미국에도 유용하지 않을까요. 3일 기자회견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이렇게 제안했어요. “그들(미국과 중동 국가)이 패트리엇 미사일을 준다면, 우리는 드론 요격기를 제공하겠습니다. 공평한 교환이죠.”당장 이란의 드론 공세를 막아내야만 하는 미국이나 걸프만 국가 입장에선 상당히 솔깃한 제안입니다. 실제 파이낸셜타임스는 5일 “미국 국방부와 최소 한 곳의 걸프만 국가 정부가 우크라이나산 요격용 드론 구매를 논의 중”이라고 보도했죠.참 아이러니합니다. 그동안 우크라이나는 미국에 무기 지원을 간절히 요청하는 입장이었어요. 지난해 2월 젤렌스키 대통령은 백악관 회담 중 트럼프 대통령과 언쟁을 벌이다가 쫓겨나는 굴욕을 당했고요.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없으면 당신은 아무런 카드도 없다”고 젤렌스키를 쏘아붙였는데요. 불과 1년 만에 이렇게 바뀔 줄이야.이것이 바로 새로운 전쟁의 시대입니다. 값싼 드론 앞에선 전통적인 무기체계가 힘을 잃고, 모두 평등해지는 거죠. 과연 우크라이나산 요격용 드론이 이란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을지는 좀더 두고봐야 겠지만요. 적어도 젤렌스키 대통령이 이제 카드 한 장을 쥐게 된 건 분명해 보입니다. By.딥다이브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쏟아지는 뉴스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입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과 하메네이 제거로 시작된 전쟁. 이란이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의 초강경 반격에 나서면서 점점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데요. 이거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걸까요.워낙 상황이 급변해서 예측이 쉽진 않은데요. 하지만 금융시장이 요동치는 지금 알아두어야 할 팩트 위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이 기사는 3월 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2~3일이면 된다더니, 5주 이상?최고 지도자 하메네이를 포함한 이란 핵심 수뇌부를 한꺼번에 제거하는 데 성공한 미국과 이스라엘의 ‘에픽 퓨리(Epic Fury)’ 군사작전. 전례 없이 신속하고 성공적인 지도부 제거였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초기엔 이 사태를 “이틀이나 사흘 안에 끝낼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였는데요.어라, 이후 점점 말이 바뀝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요일(3월 1일) 데일리메일과의 인터뷰에선 작전 기간을 “4주”로 수정했고요. 이어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선 이 작전이 “4~5주를 예상한다”고 언급했죠. 그리고 월요일(2일)엔 군대가 4~5주보다 “훨씬 오래 버틸 능력이 있다”고 말했어요.공습 목적에 대한 설명도 달라졌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공습 직후에 이란 국민을 향해 “정부를 장악하십시오”라고 촉구했어요. 민중 봉기를 통한 정권 교체를 기대한 건데요. 하지만 즉각적인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요. 그러자 이후 애틀랜틱 인터뷰에서 그는 “생존한 이란 지도부와 대화하고 싶다”고 말을 바꿨죠. 지도자만 제거하고 정권 체제는 유지하는 ‘베네수엘라 모델’로 방향을 튼 겁니다. JD 밴스 부통령도 이번 작전의 목표를 이란 정권의 “사고방식(mindset)”을 바꿔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죠.이렇게 메시지가 혼선을 빚는 건 트럼프 행정부의 초기 전략에 오판이 있었다는 의미이겠죠. 예상보다 이란의 반격은 강력하고, 미국 내 지지율은 약한 상황인데요.로이터통신이 1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중 27%만이 이번 이란 공습을 지지했어요(반대 43%, 잘 모름 29%). 군사행동 개시 직후의 지지율로는 전례없이 낮은 수준입니다(9.11 테러 후 아프가니스탄 보복 공격에 대한 지지율은 90% 이상).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던 트럼프 대통령의 계획이 빗나가고 있습니다. 이란의 물귀신 작전과 그 파장 사우디아라비아 정유시설과 카타르 LNG 생산 시설, 쿠웨이트 공항과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항구와 두바이 호텔, 협상을 중재해 온 오만과 카타르까지. 이란은 지금 주변 걸프국가에 무차별 미사일·드론 공격을 퍼붓고 있습니다.폭력과 혼란을 주변국으로까지 퍼뜨리는, 일종의 물귀신 작전인데요. 어차피 미국과 군사적으로 맞서서 이길 순 없으니, 미국과 가까운 주변 나라를 인질로 삼은 겁니다. 특히 경제적 거점을 타깃으로 하고 있죠.파이낸셜타임스는 이 모든 게 하메네이가 미리 짜뒀던 계획에 따른 것이라는 이란 정권 관계자 말을 전합니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사태를 확대하고 큰불을 지르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모든 국제법을 위반해 우리의 레드라인이 넘어가자, 우리는 더 이상 게임의 규칙을 따를 수 없게 됐죠.”실제 그 파장은 즉각 전 세계에 미치고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핵심 석유 시설인 라스 타누라 정유공장, 카타르 라스라판 LNG 시설이 이란 드론 공격 때문에 가동을 중단했는데요. 이 소식에 유럽 천연가스 가격은 단숨에 약 50%, 아시아도 40%가량 급등했죠.물론 걸프국가들은 패트리엇과 사드(THAAD), 천궁2 같은 방공망을 이용해 이란의 미사일과 드론 대부분을 격추시켜 막아냈습니다. 다만 이란의 3000만원짜리 ‘샤헤드-136’ 자폭 드론을 격추하느라 한 발에 15억원(천궁2 기준)짜리 요격 미사일을 쓴다는 게 문제이죠. 워싱턴 스팀슨센터의 켈리 그리코 연구원은 “이란이 드론에 1달러를 쓸 때마다 아랍에미리트는 드론 격추에 약 20~28달러를 지출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막대한 방어 비용을 계속 감수할 수만은 없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특히 중동 국가는 전력망과 해수 담수화시설이 파괴된다면 재앙적 상황에 처할 수 있거든요. “에어컨과 해수 담수화 시설이 없다면 걸프국가는 사실상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진정한 악몽 같은 시나리오이죠.” (뉴욕대학교 아부다비 캠퍼스의 중동정치학 교수 모니카 마크스의 알자지라 인터뷰)그래서 이란의 도발이 계속되면 인내심이 바닥날 거고요. 전직 아랍에미리트 관료인 타렉 알로타이바는 아부다비가 반격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테헤란 공군은 아부다비 공군에 비해 몇 세대나 뒤처져 있습니다. UAE는 전투력뿐만 아니라 실전에서 검증된 공중 급유 능력을 갖췄죠. 아부다비는 반격은 물론 장기간 전투를 지속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사태가 ‘중동 전면전’으로 번진다면 그건 진짜 재앙이 될 겁니다.유가는 얼마나 더 오를까3월 2일 이란 혁명수비대(IRGC)가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발표했습니다. 알자지라가 입수한 에브라힘 자바리 혁명수비대 사령관 고문의 발언은 다음과 같았죠.“원유 가격이 81달러에 달했고 세계는 최소 200달러까지 오를 것을 기다리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은 폐쇄됐다. 이슬람 혁명수비대 해군과 육군 영웅들은 이 해협을 통과하려는 모든 선박에 불을 지를 것이다. 미국은 이 지역의 석유에 목말라 있지만, 그들은 단 한 방울도 얻지 못할 것이다.”아울러 국제 조난 주파수를 통해 모든 선박에 “통항 불허”를 통보했습니다.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폐쇄할 거라고 협박한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나선 건 처음이죠.물론 법적으로 따졌을 때, 호르무즈 해협은 아직 폐쇄된 건 아닙니다. 미국 중부사령부는 “이란의 순찰 활동도, 기뢰 부설도 없다”며 여전히 폐쇄되지 않았다고 반박하죠. 하지만 이란은 실제로 민간 상선 최소 4척을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항해할 선주도, 보험사도 없을 수밖에요. 사실상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인 겁니다.세계 원유 물동량의 약 20%가 지나는 ‘에너지 동맥’ 호르무즈 해협을 폐쇄한다는 건? 한마디로 이란이 ‘다 같이 죽자’고 달려들었단 뜻입니다. 걸프산 원유의 하루 수출량 약 2200만 배럴 중 다른 우회로를 택할 수 있는 건 최대 700만 배럴 정도(모건스탠리 추정). 크플러(Kpler)에 따르면 이 지역 원유 수출량은 이미 하루 280만 배럴로 8분의 1토막 났습니다.3일 브렌트유 가격은 배럴당 82달러를 기록했는데요. 이러다 마느냐, 더 오르느냐는 어디까지나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언제 풀리느냐에 달려있습니다. OPEC이 아무리 생산량을 늘린다 한들 유조선이 운항을 못 하면 아무 소용 없으니까요.봉쇄가 신속히 풀리지 않으면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설 수 있다는 전망이 속속 나옵니다. JP모건은 장기 분쟁이란 최악의 시나리오에서 유가가 배럴당 120달러, 번스타인은 120~150달러까지 갈 수 있다고 경고했죠. 우드매켄지 앨런 겔더 부사장 역시 “최근의 비교 사례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에 유가가 배럴당 125달러를 넘어섰던 때”라며 세자릿수 유가가 현실이 될 수 있다고 내다봅니다. 유례없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 원유 수입의 70%를 중동지역에 의존하는 한국 경제엔 이만저만 큰일이 아닙니다. 약 7개월 치 원유를 비축하고 있긴 하지만, 국제 유가 상승이 물가를 자극하는 건 피할 수 없기 때문인데요.씨티그룹은 브렌트유 가격이 배럴당 82달러를 유지하면,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60%포인트 오르고 한국 GDP 성장률은 0.45%포인트 떨어질 거란 예측을 내놨습니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주요국 중에서도 유독 큰 타격을 받게 될 텐데요.만약 여기 그치지 않고 유가가 100달러를 넘어선다면, 그때부턴 유가만이 문제가 아니게 될 겁니다. “호르무즈 해협의 장기적인 폐쇄는 세계적인 경기 침체를 필연적으로 초래할 겁니다.”(밥 맥널리 래피던에너지그룹 설립자) 경기침체 속 물가 상승, 즉 스태그플레이션이란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둬야 하는 거죠.시장 불안감이 고조되자, 트럼프 대통령이 달래기에 나섰습니다. 3일(현지시간) “필요할 경우, 미국 해군은 가능한 한 신속히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유조선에 대한 호위 작전을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죠. 또 미국 국제금융개발공사(DFC)에 이 해역 통과 선박의 보험료를 보증하도록 지시했다는데요. 부디 이런 조치가 큰 효과가 있기를 바라며. 앞으로 추이를 지켜보시죠. By.딥다이브*이 기사는 3월 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https://www.donga.com/news/Newsletter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미국에선 위스키 재고가 넘쳐나고, 프랑스에선 남아도는 와인이 대거 폐기 처분됩니다. 중국 바이주, 유럽 맥주, 멕시코 테킬라까지 모두 판매가 급감하며 전 세계 술 시장이 동시에 침체하고 있는데요.이게 다 술을 멀리하는 Z세대 때문이라고요? 글쎄요. 솔직히 정확한 원인은 아무도 모릅니다. 워낙 여러 요인이 겹쳐있기 때문이죠. 그럼, 이대로 주류 산업은 담배처럼 사양산업이 되어가는 걸까요. 역사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는데요. 오늘은 글로벌 술 시장의 침체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2월 2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위스키도, 맥주도 남아돈다 갑자기 다들 금주라도 하는 건가요. 지난해부터 술이 안 팔려서 난리라는 뉴스가 전 세계적으로 쏟아져나옵니다. 그중 눈에 띄는 몇 가지 소개하자면.-미국 버번위스키의 상징인 짐빔이 2026년 한 해 동안 켄터키주에 있는 주력 증류소 가동을 중단합니다. 미국 금주법 폐지로 1933년 증류소를 재가동한 이후, 90여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죠. 위스키 재고는 쌓였는데, 소비는 줄었기 때문입니다.-세계 2위 맥주 기업인 네덜란드 하이네켄이 얼마 전 2027년까지 최대 6000명을 해고한다고 발표했어요. 전체 직원의 7%를 감원하는 거죠. 2025년 이 회사의 맥주 판매량은 전년보다 1.2% 감소했는데, 특히 미국과 유럽 시장 판매가 급감했다는군요.-중국에선 마오타이 가격이 지난해에만 30% 넘게 폭락했습니다. 소매시장 판매가격이 공식 출고가를 밑도는 기현상이 벌어졌죠. 마오타이를 수십 상자씩 사재기해 뒀던 상인들은 큰 손실을 보게 됐습니다. ‘마오타이=확실한 투자 상품’이란 공식은 깨지고 말았죠.-한때 뜨거웠던 ‘데킬라 붐’은 2025년 급격히 식었습니다. 데킬라 원료인 아가베 가격은 3년 전 ㎏당 30페소(약 2500원)까지 치솟았지만, 지난해엔 2페소(약 170원)로 폭락했죠. 뒤늦게 아가베 재배에 나선 멕시코 농부들은 직격탄을 맞았고요. 돈 훌리오, 카사미고스 같은 고급 데킬라 브랜드를 보유한 디아지오 역시 경영 위기에 처했습니다.이렇게 술이 안 팔리고 재고가 넘치면서 전 세계 주류업체 주가도 급락했는데요. 블룸버그에 따르면 세계 50대 주류 기업의 시가총액은 정점이었던 2021년 6월과 비교해 46% 하락했다고 하죠. 약 8300억 달러(1185조원)의 시장가치가 사라졌습니다. 모건 스탠리 애널리스트인 사라 사이먼은 이렇게 말합니다. “구조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요. 사람들이 술을 덜 마셔요.”이건 단순한 사이클이 아닐지도? 팬데믹 때 ‘홈술’로 반짝 늘어났던 술 소비의 정상화 과정이다, 물가가 급등하면서 주머니 사정이 나빠진 탓이다…. 2022년 정점을 찍은 미국 술 소비가 2023년 꺾였을 때, 업계에선 이런 분석이 나왔습니다. 술을 덜 마시는 건 어디까지나 경기 사이클 탓이고, 좀 지나면 다시 소비가 살아날 거라고 봤던 거죠.그런데 웬걸. 추세가 반전될 기미는 없고, 점점 늪에 빠지는 분위기입니다. 특히 지난해 미국 갤럽의 여론조사 결과가 놀라웠죠. 미국 성인의 음주율은 54%로, 1939년 조사 이래 역대 최저를 기록했습니다. 금주법 시대 이후 미국인이 가장 술을 적게 마신단 뜻인데요. 미국은 세계 2위 주류 시장(1위는 중국)이기에 업계엔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이거 그냥 지나가는 사이클이 아닐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점점 고조됩니다. 이제 투자자들은 주류업계에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죠. ‘술은 제2의 담배가 될 것인가?’ 마치 담배회사처럼 주류기업도 성장을 멈춘 채 사양산업으로 전락하는 게 아니냐는 걱정이죠.만약 이게 구조적 변화라면, 주류 산업을 위기로 몰아넣은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일까요. 많은 분석이 쏟아지는데, 그중 다수의 지지를 받는 건 다음과 같습니다.①Z세대의 웰빙과 절제 트렌드Z세대(1997~2012년생)가 술을 덜 마시는 건 한국뿐 아니라 미국, 일본, 중국 등의 공통 현상이죠. 특히 한 번에 많이 마시는 폭음이 크게 줄었다는 게 특징인데요. 질병관리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20대 고위험 음주율은 9.9%로 40대(20.9%)의 절반에도 못 미칩니다. 특히 2018년 17%였던 20대 남성의 고위험 음주율은 가파르게 줄어서 9.7%에 그쳤어요. 지난해 처음으로 20대 여성(10.2%)에 역전됐죠. (다만 남성은 1회 7잔, 여성은 5잔 이상으로 ‘고위험’의 기준 자체가 다릅니다.)왜 Z세대 남성은 폭음을 덜 하게 됐을까요. 이를 두고 소셜미디어 영향이란 분석이 나오는데요. 괜히 술 취해서 실수라도 하면 자칫 SNS에 평생 ‘박제’될 수 있단 공포가 작용한다는 겁니다. 또 몸매나 건강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도 이유로 꼽히고요. 한마디로 술 취하는 건 더 이상 힙하지 않아요. 술 잘 마시는 게 남자답다고 여겨지던 시절은 끝났죠.②술 마실 시간에 넷플릭스 본다퇴근 후 자기 전까지 3~4시간, 뭘 하며 노는 게 가장 즐거울까요. 친구들과의 술자리? 아니면 집에서 혼자 넷플릭스 정주행? 술과 OTT 서비스는 인간의 자유시간을 두고 경쟁하는 관계입니다.일본 아사히의 아츠시 카츠키 CEO는 지난해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술 소비 감소 이유를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과거엔 술이 사람들의 오락과 즐거움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어요. 지난 10년 동안 게임을 포함한 오락거리가 늘어나면서 술이 주는 재미와 즐거움, 행복이 줄어들었죠.” 그는 건강에 대한 관심보다는 디지털 미디어가 술 소비 감소의 직접적인 요인이라고 확신했는데요.물론 넷플릭스를 보면서도 한잔할 순 있지만, 캔맥주나 하이볼 같은 가벼운 술이 주를 이루죠. 부어라 마셔라 식의 폭음은 덜 하게 되기 마련입니다.③위고비 맞으면 술 생각이 사라진다위고비·마운자로 같은 비만치료제를 맞으면 술 마시고 싶은 욕구 자체가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가 있죠. 물론 이게 진짜로 술 소비량을 줄이고 있는지는 아직 확인되진 않았는데요.하지만 그럴 거란 예측은 파다합니다. 지난 1월 영국의 유명 펀드매니저 테리 스미스는 15년간 보유한 디아지오 지분을 전량 매각하면서, 그 이유 중 하나로 비만치료제를 꼽았죠. 비만치료제가 주류시장의 성장을 위협한다고 본 겁니다.어디서 본 듯한 이야기인데…주류 시장이 구조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데는 업계 관계자들도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제프리스의 에드 먼디 애널리스트는 지난해 8.3L로 추정되는 미국의 1인당 연간 주류 소비량이 앞으로 추가 감소해 7L까지 줄어들 거란 비관적 전망을 내놨죠.미래를 알 순 없지만, 이쯤 되면 궁금해집니다. 술은 이대로 우리 삶과 점점 멀어지게 되는 걸까요. 일단 이 그래프를 한번 보시죠.1935년 이후 미국의 1인당 주류 소비량을 나타낸 그래프입니다. 오른쪽 부분에 골짜기가 패어있는 게 보일 거예요. 1980년부터 1995년까지 이어진 미국 주류 시장의 대침체기입니다.1980년대 미국 주류 업계는 여러모로 궁지에 몰렸습니다. 1982년 배우 제인 폰다가 출시한 에어로빅 비디오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미국엔 에어로빅 열풍이 불었고요. 나이키가 이끈 조깅 붐까지 겹치면서 건강과 운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습니다. 칼로리와 건강 관리에 민감해진 소비자들이 술, 특히 독주를 멀리하기 시작했죠.사회적으론 음주 운전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어요. 1980년 ‘음주 운전 반대 어머니회’가 조직돼 워싱턴을 움직였고요. 1984년 레이건 행정부는 주마다 달랐던(18~21세) 음주 연령을 21세로 상향, 통일했죠.비디오와 케이블TV의 보급으로 집에서 즐길 거리가 늘어난 것도 1980년대입니다. 집안 엔터테인먼트가 바깥의 술자리를 대체하기 시작한 거죠.술에 각종 규제와 부정적인 이미지가 씌워지면서 ‘사회적 쿨함’이 줄어들었고요. 이 15년 동안 미국의 1인당 술 소비량은 23%나 줄었습니다. 특히 위스키 같은 증류주 소비는 35~40% 급감해 ‘독주는 끝났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죠. 그나마 맥주는 약 10% 감소에 그쳐, 상대적으로 선방했는데요. 일반 맥주 대신 칼로리를 낮춘 라이트 맥주로 시장이 재편됐습니다.어쩐지 요즘 상황과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은데요. 당시 주류업계는 그 긴 침체기를 어떻게 끝내고 되살아날 수 있었을까요. 한마디로 ‘이미지 세탁’에 성공한 덕분입니다. 다시 술을 힙하게 만든 건데요.1990년대 후반, ‘섹스 앤드 더 시티’ 같은 드라마 속 주인공이 마시는 칵테일이 인기를 끌면서 독주가 세련된 음료로 탈바꿈했고요. ‘프랑스인이 심장병이 적은 이유는 레드 와인 덕분’이라는 보도가 나오면서 ‘와인 한 잔은 건강에 좋다’는 (지금 보면 잘못된) 인식을 심어줬습니다. 또 고급 샴페인이나 테킬라 등이 성공한 사람이 마시는 럭셔리의 상징으로 통하게 됐죠. 결국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낸 마케팅의 승리였습니다.지금 주류 업계도 비슷한 돌파구를 찾고 있습니다. 도수 0%의 무알코올 맥주, 캔에 든 하이볼 같은 저도주에 대한 투자를 빠르게 늘리고 있죠. 취하게 만드는 술이 아닌 ‘맛있는 성인용 음료’로 정체성을 바꾸려는 건데요. 술을 못 마시거나 건강을 생각해 멀리하던 사람까지 끌어 들일 수만 있다면, 업계엔 희망이 있습니다.하지만 지금은 마운자로와 넷플릭스가 버티고 있어서 쉽지 않을 거라고요? 단기에 분위기를 반전하긴 어려울 거예요.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인류는 무려 8000년 전부터 술을 만들어 마셨다고요. 인류의 유구한 ‘술 사랑’이 그렇게 쉽게 사라질 리는 없어 보이는데요. ‘부어라 마셔라’ 시대는 저물었지만, 대신 좀더 맛있고 멋있는 술의 시대가 열리기를 기대해봅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2월 2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서울 강남 3구(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집값이 2년 만에 하락세로 돌아섰다. 정부의 전방위적인 다주택자 압박과 대출 규제가 실효를 거두는 모양새다. 이제 이재명 대통령은 비거주 1주택자로 규제 전선을 넓히며 고삐를 더 바짝 죄고 있다. 하지만 투기 수요를 틀어막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존재한다. 현재 집값 불안 배경엔 ‘똘똘한 한 채’를 향한 열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 핵심지 주택을 무한정 늘릴 순 없는데, 다수가 그걸 열망하니 문제다. 어떻게 하면 서울로 집중된 수요를 전국으로 분산해 부동산 시장을 안정시킬 수 있을까. 정부가 해결책 중 하나로 제시한 것이 ‘5극 3특’ 국가 균형성장 전략이다. 수도권 일극 체제를 탈피해 전국을 5개의 메가시티와 3개의 특별자치도로 재편하겠다는 구상이다. 기업을 유치하고 인프라를 깔아 지방을 살기 좋게 만들겠다는 취지다.수요 분산의 해법, 재택근무 방향은 맞다. 문제는 시간이다. 대규모 인프라 구축과 산업 생태계 조성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더라도, 그 효과를 체감하려면 최소 10년은 지나야 한다. 당장의 집값 불길을 잡기엔 너무 먼 이야기다. 그보다 더 빨리, 단기간에 수요를 분산할 방법은 없을까. 한 가지 해결책이 있긴 하다. 바로 재택근무 확대다. 재택근무가 대도시 도심 집값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팬데믹 기간 미국에서 확인됐다.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같은 주요 대도시에서 직주근접 필요성이 약해지자, 값비싼 도심 대신 저렴한 외곽 지역으로 주택 수요가 분산됐다. 이른바 ‘도넛 효과(Donut Effect)’다. 공실이 늘어난 도심에서는 사무실을 주거용으로 개조하는 사업이 활발해졌다. 도심의 주택 수요는 줄이고 공급은 늘렸으니 일석이조다. 모든 노동자가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제조업 공장이나 대면 창구에서 일하는 직군이라면 현장을 떠나기란 불가능하다. 사무직이라고 해도 재택근무에 적합한 근로자는 따로 있다. 재택근무가 생산성을 떨어뜨린다는 고정관념이 있지만, 여러 연구에 따르면 자기 주도적으로 일하는 전문성 높은 고숙련 근로자는 재택근무로 오히려 성과를 높일 수 있다. 불필요한 대면 접촉과 출퇴근의 피로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다. 업무 특성에 따라 잘 활용하면 재택근무만 한 효율적 수단도 드물다. 서울은 제조업 기반이 약한 대신 사무·전문직 근로자 비중이 유독 높은 도시다. 통계에 따르면 서울 취업자 3명 중 1명 이상이 관리자나 전문가, 사무 종사자다. 여의도와 강남·서초구 같은 핵심 업무지구는 이 비중이 절반을 훌쩍 웃돈다. 금융회사와 대기업 본사, 민간 연구소 등이 서울에 몰려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재택근무에 적합한 고숙련 사무직군에 해당한다. 재택근무 전면 도입이 서울에 특히 효과적인 이유다. 출산율 제고 위한 저비용 해법 재택근무 효능은 집값 안정에만 그치지 않는다. 스탠퍼드대 니컬러스 블룸 교수팀의 최신 연구에 따르면 재택근무는 출산율을 끌어올리는 효과가 상당하다. 부부가 모두 주 1일 이상 재택근무를 하는 경우 여성 1인당 기대 출산율을 무려 0.32명이나 높일 수 있다고 한다. 0.80명에 그친 지난해 출산율을 생각하면 재택근무 도입이 시급하다. 연간 수십조 원의 예산을 쏟아붓는 현금 지원책보다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 훨씬 더 저비용 고효율의 해법이다. 재택근무를 위한 디지털 기술은 이미 성숙해 있다. 사무실 출근을 고집하며 효율화를 꾀하지 않는 기업의 낡은 관습이 걸림돌이다. 서울은 비우고 가정을 채우는 재택근무는 집값 불안과 저출산의 복합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빠른 정책적 우회로다.한애란 경제부 기자·부장급 haru@donga.com}

투썸플레이스, bhc, 남양유업, 롯데카드, 오스템임플란트, 락앤락, 하나투어, 잡코리아…. 여러분이 알 만한 이 브랜드의 공통점은? 모두 주인이 사모펀드라는 점이죠. MBK파트너스가 대주주인 홈플러스처럼 말이죠. 시내버스와 쓰레기 소각장처럼 우리 생활과 관련이 큰 산업에도 사모펀드가 속속 진출하는데요.사모펀드의 탄생지인 미국에선 최근 사모펀드가 어린이집과 병원, 요양원과 장례식장까지 뻗어나갔다고 하죠. 그리고 이렇게까지 사모펀드가 삶에 깊숙이 침투하면서 미국에선 점점 이런 반응이 늘어갑니다. ‘(제품 또는 서비스가) 점점 나빠지고 있잖아. 이건 아무래도 사모펀드 탓인 것 같은데?’ 물론 구체적인 증거가 있는 건 아니고 다 그런 것도 아니겠지만, 그런 의심을 품을 만한 배경이 있는 건 사실이죠. 사모펀드 비판론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2월 2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이게 다 사모펀드 소유? “당신은 사모펀드 소유 아파트에서 일어나, 사모펀드 소유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고, 사모펀드 소유 병원에서 진료받고, 사모펀드 소유 식당에서 저녁을 사서 집에 돌아와 사모펀드 운영 TV 방송국에서 지역 뉴스를 시청하며 하루를 보낼 수 있습니다.”최근 미국의 한 금융전문가가 “모든 게 사모펀드”라며 지적한 글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더군요. 미국에서 사모펀드는 치과부터 세차장까지, 아주 광범위한 분야에 진출했습니다. 2025년 말 기준 사모펀드가 소유한 미국 기업 수는 약 1만3000개. 15년 전(2010년 6000여 개)의 두배가 넘는다고 하죠. 그럼, 사모펀드는 왜 이런 산업에 투자할까요. 거기서 어떻게 돈을 벌까요. 이를 설명하기 전에 일단 사모펀드(Private Equity Fund, PEF)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하는데요. 개념은 어렵지 않습니다.-일단 공모(Public)가 아닌 사모(Private), 즉 돈 많은 소수정예 투자자만 조용히 받아 운영하는 펀드입니다. 국민연금 같은 연기금이나 국부펀드, 고액 자산가가 보통 투자자가 되죠.-이 자금을 바탕으로 기업을 인수해서 경영권을 확보합니다. 인수 과정에서 상당한 대출을 일으키곤 하죠.-이른바 ‘오퍼레이션 개선’을 통해 기업 가치를 높입니다. 구조조정을 하고, 여러 기업을 통합하고, 원자재 구매 단가를 낮추는 식으로 ‘효율화’하는 거죠. 일반적으로 3~7년 뒤 인수한 기업을 매각하고 그 이익을 투자자들에게 나눠줍니다.미국의 사모펀드 운용사로는 미국 블랙스톤, KKR, 칼라일그룹, 아폴로 글로벌 매니지먼트, 베인캐피털이 유명하고요. 한국 토종 사모펀드 운용사는 MBK파트너스, 한앤컴퍼니, IMM프라이빗에쿼티가 대표적이죠. 이런 사모펀드 운용사의 목표는 단 하나, 투자자 수익 극대화입니다. 펀드 수익률이 높아질수록, 운용사가 받는 성과보수(초과수익의 20%)도 불어나는 구조이니까요. 그들은 오로지 자기네 펀드에 돈을 댄 투자자에 충성할 뿐입니다. 그게 맡은 역할인 거죠.문제는 사모펀드의 이익이 해당 기업의 이익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단 겁니다. 때론 사모펀드엔 좋은 전략이 기업엔 해가 되는 경우도 있죠. 일반적인 상장사 투자자, 또는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털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인데요. 이를 잘 보여주는 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사모펀드 업계의 인수 방식 ‘차입매수(Leveraged Buyout, LBO)’입니다.기업에 빚 떠넘기는 ‘금융의 마법’1979년 미국 사모펀드 운용사 KKR이 자동차 부품업체 후다일 인더스트리를 3억9000만 달러에 인수합니다. 금융계는 화들짝 놀랐죠. 거래 규모가 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자금조달 방식이었는데요.KKR은 인수 대금 3억9000만 달러 중 무려 3억 달러를 대출로 조달했습니다. KKR이 투자한 자체 자금은 단 100만 달러였죠. 극단적인 레버리지의 차입매수(LBO)로 무엇이 가능한지, 현대 사모펀드의 힘을 처음 보여준 사례라 하겠는데요.여기서 중요한 건 차입매수로 진 막대한 빚을 갚아야 하는 건 사모펀드가 아니라 인수된 기업이라는 점이죠. 사모펀드나 그 운용사는 대출에 대해선 책임이 없어요. 아니, 그게 말이 되냐고요? 놀라운 ‘금융의 마법’이죠. 사모펀드가 세운 페이퍼컴퍼니(특수목적회사, SPC)가 먼저 은행에서 거액을 빌려요. 담보는 ‘앞으로 인수할 기업의 자산과 미래 벌어들일 돈’이죠. 그럼 사모펀드는 자기 돈은 조금(약 20%), 대출은 많이(약 80%) 섞어서 기업을 인수해요. 인수가 끝나면 SPC와 인수 기업을 합병하죠. 그렇게 거대한 빚이 고스란히 인수한 기업으로 넘어갑니다.차입매수(LBO)는 사모펀드 수익률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입니다. 200억원짜리 사모펀드가 빚을 내서 1000억원짜리 기업을 산다면, 나중에 1200억원에만 팔아도 투자 수익률은 100%가 될 테니까요. 5배 레버리지 투자인 셈이죠.그럼, 차입매수 방식은 인수된 기업엔 어떤 영향을 줄까요. 이와 관련한 아주 유명한 미국 사례가 있죠. 2018년 청산된 미국 장난감 전문점 ‘토이저러스’입니다. 토이저러스는 누가 죽였나 2005년, 58년 역사의 장난감 전문 소매점 토이저러스가 사모펀드 KKR과 베인캐피털 컨소시엄에 팔립니다. 매각가는 66억 달러. 그중 사모펀드 자금은 13억 달러뿐이었고, 나머지 53억 달러는 빚(대출)이었죠. 전형적인 차입매수(LBO)였습니다. 이 빚을 떠안으면서 토이저러스 부채비율은 순식간에 30%에서 78%로 불어났죠.은행 이자로만 매년 4억~5억 달러를 갚아나가야 하는 상황. 장난감 팔아 번 영업이익의 80% 이상이 이자로 나갔습니다. 대출 원금은 당연히 갚지 못했고요. 장사가 잘돼도 손에 남는 게 없었습니다.경영진은 이른바 ‘린(Lean) 운영’이라며 비용 절감을 위해 직원을 줄였습니다. 동시에 사모펀드 업계에서 ‘자산 효율화’라고 부르는 전략도 썼죠. ‘매각 후 임대(Sale-Leaseback)’입니다. 토이저러스는 미국 전역에 수백개 매장을 직접 소유했는데요. 인수 후 몇 달 만에 이를 부동산 회사에 매각했고요(사모펀드 투자자들은 이 돈으로 배당금을 챙김). 대신 토이저러스는 계속 장사를 하기 위해 부동산 회사와 장기 임대 계약을 맺습니다. 참고로 그 부동산을 매입해 임대한 건 토이저러스를 인수한 사모펀드 컨소시엄에 속한 보네이도였어요. 애초에 토이저러스가 보유한 부동산을 노리고 컨소시엄에 들어왔다고 봐야겠죠.막대한 이자 비용에 매월 임대료 부담까지. 순이익이 거의 제로 수준으로 쪼그라들었고요. 당연히 매장 리모델링이나, 온라인 플랫폼에 투자할 여력이 없으니 점점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그렇게 서서히 가라앉으며 체력이 고갈된 토이저러스는 결국 2018년 청산되고 말았죠. 토이저러스가 사모펀드에 인수된 이후 십수 년 동안 금융회사에 낸 이자 비용만 총 50억 달러에 달했다고 합니다.미국인의 사랑을 받던 브랜드 토이저러스의 청산. 이 엄청난 실패로 토이저러스 투자를 주도한 사모펀드 운용사 KKR와 베인캐피털도 손해가 막심했을까요?아니요. 미국 사모펀드 문제를 파헤친 책 ‘배드 컴퍼니(Bad Company)’의 저자 메간 그린웰에 따르면 두 회사 모두 손실을 보지 않았습니다. 펀드 투자금의 2%를 매년 꼬박꼬박 기본 수수료로 챙기고, 각종 경영·컨설팅 수수료까지 챙겼으니까요. “토이저러스의 경우, 대부분 차입매수와 마찬가지로 회사의 최종 운명은 가장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사모펀드 운용사는 어쨌든 돈을 벌기 때문이죠. 유일한 위험이라면 수백억 달러가 아닌 수백만 달러만 벌게 될 수 있단 겁니다.”토이저러스의 3만3000명 직원은 퇴직금을 한 푼도 챙기지 못한 채 직장을 잃게 됐습니다. 청산 과정에서 돈을 가장 먼저 돌려받는 건 담보가 있는 은행 대출이기 때문이었죠. 결국 5배 레버리지 차입매수의 고위험을 감수한 건 사모펀드 투자자나 운용사, 은행이 아니었습니다. 기업과 직원들이었죠.고수익 전성기 지나가나이건 뭔가 잘못된 것 아닌가. 토이저러스 청산 이후 미국에선 대대적인 사모펀드 비판론이 일었습니다. 의회에선 사모펀드의 차입매수를 규제하는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죠. 물론 통과되진 않았습니다. 사모펀드 업계는 정치 기부금의 큰손이니까요.쏟아지는 비판 여론에 대응해 사모펀드 업계가 내세우는 방어막은 연금 수급자입니다. 미국의 대부분 공공연금이 사모펀드 투자에 참여하고 있으니까요. 2023년 인터뷰에서 피트 스타브로스 KKR 글로벌 사모펀드 공동대표는 인수한 기업 직원의 급여를 인상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죠. “교사 연금을 관리하면서 (인수한 기업) 직원의 급여를 올리는 건 교사를 희생시키는 겁니다. 윤리적이지 않고 우리 돈도 아니죠.” 어때요? 설득력이 있나요. ‘배드 컴퍼니’ 저자 메간 그린웰은 시니컬합니다. “그들(사모펀드 업계)은 한쪽에서 노동자 임금을 삭감하는 게 다른 쪽에서 노동자 은퇴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일종의 제로섬 게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아메리칸 컴패스의 이코노미스트인 오렌 캐스는 더 신랄하게 비판하죠. 그는 최근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금융화(Financialization)는 사기”라며 사모펀드 업계에 맹공격을 쏟아냈습니다. “사모펀드에 인수된 기업은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파산할 확률이 5~10배 높습니다. 사모펀드에는 (기업 파산이) 그저 사업상의 비용일 뿐이지만, 노동자와 지역 사회에는 재앙입니다. (…) 금융화는 노동자와 소비자, 경제, 사회 전체에 순수익을 창출하지 못합니다. 아무런 투자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경제학자와 언론은 ‘투자’라는 용어 사용을 중단해야 합니다. ‘투기’나 ‘도박’이 훨씬 적절한 표현이죠.”물론 사모펀드가 높은 수익률을 제시한다면 투자자 입장에선 솔깃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랬었고요. 고수익이 곧 사모펀드의 존재 이유였는데요.하지만 그 시대도 이제 끝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MSCI에 따르면 2022년부터 2025년 3분기까지 사모펀드 지수의 연평균 수익률은 5.8%로, S&P500 지수(11.6%)의 절반에 그쳤어요. 고금리와 기업공개(IPO) 시장 침체의 직격탄을 맞은 거죠. 높은 수익률이란 면죄부가 사라진다면, 사모펀드를 지탱할 힘은 무엇일까요. 사모펀드의 본고장 미국에서 먼저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2월 2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한 발로 연속 공중제비를 돌고, 물구나무선 채 7바퀴 반을 회전합니다. 쌍절곤을 능수능란하게 휘두르고 취권도 그럴듯하게 선보이죠. 2월 16일 중국 CCTV가 방송한 ‘춘절 갈라쇼’의 하이라이트는 올해도 휴머노이드 로봇들의 군무였는데요.중국 휴머노이드 로봇의 발전상을 두고 전 세계에서 놀랍다, 무섭다는 반응이 쏟아져 나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의문도 제기되죠. ‘그래서 이걸로 뭘 할 건데?’ 중국 휴머노이드 로봇 산업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2월 20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휴머노이드 로봇 톱4는 중국두 발로 걷고 두 손으로 물건을 집는, 인간처럼 생긴 로봇. 휴머노이드 로봇(Humanoid Robot)이 이제 실험실을 벗어나 현장에 발을 딛기 시작했습니다. 지난해 전 세계 설치 대수는 1만6000대(카운터포인트리서치 기준). 전년보다 5배 이상 늘었죠. 2025년을 기점으로 휴머노이드 로봇의 대량생산 시대가 열린 건데요.아직 새싹 단계인 이 산업의 선두 주자는 누구일까요. 연간 설치 대수를 기준으로 할 때 1위 애지봇(AGIBOT)과 2위 유니트리(Unitree)가 전체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이어 유비테크(UBTECH), 러쥐(Leju), 테슬라 순이죠.눈치채셨겠지만, 이 톱5 로봇 기업 중 테슬라를 제외한 상위 4곳은 모두 중국 기업입니다. 지난해 전 세계에 설치된 로봇 5대 중 4대가 중국산일 정도로, 중국이 휴머노이드 로봇 시장을 휩쓸고 있죠. 그리고 이런 추세는 당분간 계속될 겁니다. 모건스탠리는 올해 중국 휴머노이드 로봇 판매량이 지난해보다 2배 이상인 2만8000대로 늘어날 거라 전망했죠. 아울러 2030년 26만2000대, 2035년 260만대의 기하급수적 성장세를 보일 거란 예측을 함께 내놨습니다.물론 너무 낙관적인 거 아닌가 싶긴 하지만, 그만큼 중국 휴머노이드 로봇 시장이 가능성을 보여줬단 뜻이겠죠. 그럼 중국에서 이 시장을 이끄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춤추는 로봇을 빌려줍니다특별한 결혼식을 원하세요? 휴머노이드 로봇이 걸어 나와 신랑 신부에게 반지를 전달해 주면 어떨까요. 가게 개업식을 연다고요? 춤추는 풍선 인형 대신 춤추는 로봇이 시선을 끌 수 있지 않을까요.모두 중국에선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생일파티, 명절 모임, 기업행사, 전시회, 라이브 스트리밍 방송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로봇을 불러 쇼를 펼치곤 하죠. 휴머노이드 로봇의 대량생산 시대와 함께 ‘로봇 렌탈’이란 신종 사업이 탄생한 겁니다.휴머노이드 로봇은 아무리 보급형이라고 해도 한 대에 천만원이 훌쩍 넘거든요. 선뜻 구입하기엔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게 로봇을 몇시간, 또는 며칠 대여해주는 서비스 사업인 거죠. 마치 렌터카처럼 말이에요. 소프트웨어 시장의 SaaS(Software-as-a-Service)에 비견해, 로봇 렌탈 사업을 가리키는 RaaS(Robotics-as-a-Service)라는 용어까지 생겨났죠.이런 로봇 대여 사업, 중국에선 상당히 활황입니다. 소비자는 수천만 원짜리 로봇을 하루 수십~수백만 원에 빌려 체험할 수 있으니 좋고, 업체는 잘하면 몇 달 안에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으니 남는 장사이죠. 일단 이렇게 돈이 된다고 알려지자, 수많은 중소사업자가 생겨났고요. 최근엔 유명 기업까지 이 시장에 본격 진출했습니다. 애지봇과 즈푸AI(Zhipu AI)가 지난해 12월 공동 설립한 세계 최초 로봇 렌탈 플랫폼 ‘칭톈렌탈(영문명 Botshare)’이 대표적이죠. 소비자와 로봇 렌탈 업체를 연결시켜주는 서비스로, ‘로봇판 우버’를 추구합니다.칭톈렌탈을 통하면 애지봇의 최고급형 휴머노이드 로봇 ‘위안정 A2’(판매가 약 4200만원)를 하루 210만원(9999위안), 유니트리의 인기 보급형 로봇 G1(판매가 약 2100만원)을 하루 105만원(4999위안)에 빌릴 수 있습니다. 최근엔 명절 연휴를 앞두고 ‘999위안(21만원) 로봇 체험 프로그램’도 선보였어요. 999위안을 내면 엔지니어가 로봇을 데려와 맞춤 공연을 펼쳐준다는군요. 칭톈렌탈 공식 발표에 따르면 출시 초기 기준 하루 200대 이상이 대여될 정도로 서비스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어떤가요? 그 정도 가격이면 이용할 만해 보이나요? 아니면 궁금하니까 한번은 빌려봐도, 두 번은 안 할 것 같다 싶으신가요?중국 내에서도 로봇 렌탈 사업에 대한 회의론은 나옵니다. 결국 신기함을 파는 사업일 뿐이고, 그 인기가 오래 가지 않을 수 있다고 보는 건데요. 하지만 중요한 건 이런 ‘쇼’가 있기에 중국 휴머노이드 로봇 산업이 파티를 이어갈 수 있다는 점이죠.생각해 보세요. 고급형 로봇은 웬만한 자동차 한 대 값이잖아요. 비싸서 안 팔리니까 대량 생산이 어렵고, 많이 만들지 않으니까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죠. 그 결과 로봇 스타트업은 초기 투자비를 회수하지 못한 채 망하기 십상입니다. 이른바 ‘죽음의 계곡’에 떨어지는 거죠.그런데 중국에선 로봇 렌탈 산업의 성황 덕분에 비싼 휴머노이드 로봇들이 척척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로봇 제조사는 아직 초기인데도 현금흐름을 창출하며 로봇 생산과 개발을 이어갈 수 있고요. 점점 더 많은 물량을 생산하면서 주요 부품 단가를 떨어뜨릴 수 있게 됐죠.무엇보다 중요한 건 로봇이 학습을 통해 점점 똑똑해질 수 있단 점인데요. 이제 휴머노이드 로봇은 연구실이 아닌 결혼식장, 식당, 쇼핑몰, 공장, 가정 등 실제 현장을 경험하고 있고요. 이를 통해 수집한 시각·촉각·행동 데이터가 로봇의 AI 학습에 활용됩니다. 춤추는 렌탈 로봇이 조금 우습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들은 현장 데이터를 빨아들이며 AI 모델을 진화시키는 중입니다.진짜 소비자 시장 열리려면기술적으로 어설픈데도 제품을 사주는 고객이 있기에, 스타트업은 성장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로봇청소기나 전기차 같은 중국 기술 제조업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한 건 거대한 내수시장이 일종의 테스트베드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죠. 이제 중국 휴머노이드 로봇도 그 길에 막 들어섰는데요.그럼 궁금합니다. 휴머노이드 로봇은 언제쯤 진짜 삶의 일부로 들어오게 될까요. 엔터테인먼트를 넘어서 진짜 ‘1가구 1로봇’ 시대로 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일단 굳건했던 가격 장벽은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노에틱스는 지난해 ‘부미(Bumi)’라는 9998위안(210만원)짜리 아담한 체구의 가정용 로봇을 출시했어요. 휴머노이드 로봇 가격이 아이폰 한 대 수준으로 떨어진 거죠. 휴머노이드 로봇은 감속기(로봇 관절의 인대 역할)와 서보모터(로봇의 근육 역할) 같은 핵심부품이 생산비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데요. 일본이 장악했던 이런 부품을 중국도 직접 생산하게 되면서 가격을 확 낮출 수 있게 됐습니다.문제는 부품의 신뢰성이죠. 가정에서 냉장고나 세탁기 사듯이 로봇 한 대를 들이려면 ‘최소 5~10년은 큰 고장 없이 쓸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요. 산업현장에서 이미 충분히 검증된 일본·유럽산 부품과 달리, 값싼 중국산 액추에이터(감속기+서보모터)의 내구성은 아직 확인할 만한 장기 데이터가 부족합니다. 만약 중국산 휴머노이드 로봇을 사서 10년 동안 매일 사용할 수 있느냐 묻는다면, 현재로선 ‘잘 모르겠다’가 답일 거예요. 시간이 더 필요하죠.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소비자 눈높이를 충족할 만한 성능까진 갈 길이 매우 멉니다. 소비자가 진짜 바라는 건 만능 로봇이죠. 빨래, 청소, 물건 나르기, 요리까지 척척 다 해주는. 하지만 규격화되지 않은 물체를 다뤄야 하는 집안일은 로봇에겐 너무나 어렵습니다. 구겨진 빨래를 보고 뒤집힌 소매를 바로잡는 것, 두부와 당근의 단단함 차이를 인지하고 칼질하는 건 현재 AI 지능엔 너무 어려운 과제니까요. 휴머노이드 로봇이 이를 익히기 위해선 현실 세계와 직접 몸으로 부대끼며 물리적 감각에 대한 학습을 엄청나게 추가해야 한다는 뜻이죠. 몸을 통해 배우는 ‘체화된(Embodied) AI’ 가 필요한데요.체화된 AI 모델 전문가인 왕중위안 베이징 즈위안 AI연구원(BAAI) 원장은 기술 발전이 생각보다 더 오래 걸릴 수 있다며 이렇게 경고합니다. “저는 여러 자리에서 강조하고 호소해 왔어요. 체화된 AI는 5~10년의 주기, 심지어 더 긴 시간이 필요한 분야예요. 우린 더 많은 인내심과 관용이 필요하죠. 역사적 법칙에 따르면 거품이 너무 빨리 생기고 열기가 너무 뜨거워서, 앞으로 2년 내엔 이 분야(휴머노이드 로봇)가 침체기에 빠질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스마트폰 가격에 세탁기만큼 튼튼하고 사람 손처럼 섬세한, 그런 휴머노이드 로봇이 우리 집에 찾아올 날. 왕 원장 말대로 10년은 더 기다려야 할지 모릅니다. 이미 시작된 이 장거리 레이스에서 한국 로봇 업계가 인내심과 집중력을 발휘해 역전극을 펼칠 수 있기를 응원해 봅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2월 20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전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시장 중 하나는 아마 여기일 겁니다. 중국 자동차 시장. 잔혹한 가격전쟁이 잦아드나 싶더니, 이제 본격적으로 기술과 자본으로 승부하는 최후의 생존게임에 접어들었는데요. 중국 자동차 시장은 왜 전 세계의 관심사일까요. 내수에서 활로를 찾기 어려워진 중국 차가 밀려 나올 곳은 해외 시장뿐이기 때문이죠. 글로벌 자동차 업계를 떨게 만드는 중국 자동차 시장의 최종 대결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2월 13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진짜 경쟁이 시작되다2026년 새해를 맞이한 중국 자동차 시장은 잔뜩 얼어붙었습니다. 1월 내수 판매량은 1년 전보다 15%나 줄어든 166만5000대. 2014년부터 10년 넘게 이어진 ‘신에너지차량 구매세 전액 면제’ 혜택이 지난해 말 사라졌기 때문이죠. 올해부턴 전기차를 살 때도 5% 구매세가 붙습니다. 표준세율(10%)에서 절반 깎아준 거지만, 소비자 입장에선 갑자기 거액의 세금이 추가되니 부담스럽죠. 지난해 말 ‘막차 수요’로 전기차 판매가 급증했고, 1월이 되자 판매량이 급락하는 ‘수요 절벽’에 처한 겁니다.중국 정부가 전기차 세제 혜택을 거둬들인 데는 이런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전기차, 그동안 정부가 많이 키워줬지? 이제 휘발유차와 동등한 조건에서 겨뤄봐. 지원 없이도 할 수 있잖아?’ 그럴 만도 한 게, 2014년 중국 신차 판매에서 신에너지차(순수 전기차+플러그인 하이브리드)가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0.32%로 미미했는데요. 정부 지원과 민간 투자에 힘입어 중국 전기차 시장은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2025년 중국 승용차 신차 판매에서 신에너지차 비중은 무려 54%. 내연기관차(1093만대)보다 전기차(플러그인 하이브리드 포함 1281만대)가 훨씬 많이 팔린 거죠. 연간 판매량이 역전된 건 처음입니다. 중국 자동차 시장의 대세가 전기차로 완전히 넘어갔단 뜻인데요. 정부로선 연간 수조 원에 달하는 세제 혜택을 거둬들일 때가 된 겁니다.이를 보면 알 수 있는 건? 중국 전기차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기가 끝났다는 거죠. 중국자동차공업협회는 올해 신에너지차 판매량이 15.2% 성장할 걸로 내다봤어요. 지난해 성장률(28.2%)의 절반밖에 되지 않죠.성장률이 이렇게 뚝 떨어지면 게임의 양상이 달라집니다. 그동안은 전기차 시장 전체 파이를 빠르게 키워가면서 제조사들이 각자의 몫을 늘려왔는데요. 이제 파이가 그렇게 커지지 못한다면, 생존을 위해선 어쩔 수 없죠. 남의 걸 빼앗아 오는 수밖에요. 점유율 뺏기 경쟁이 한층 치열해질 겁니다.그래서 중국 전기차 업체 샤오펑의 창립자 허샤오펑 CEO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자동차 기업이 극도로 신중하게 움직입니다. 1년 전만 해도 이런 변화를 상상하기 어려웠죠. 많은 변화가 있을 텐데, 한 가지 확실한 건 2026년 자동차 시장 경쟁은 더욱 잔혹하고 치열해질 거란 점입니다.”그럼 또다시 무자비한 가격 할인 레이스가 펼쳐질까요? 지난해 초 중국 자동차 시장의 제 살 깎아먹기식 가격 할인 경쟁을 전해 드린 적 있죠. 2022년 시작된 이 가혹한 가격전쟁은 2025년 상반기 절정에 다다랐는데요. 그 이후엔 자취를 감췄습니다. 보다 못한 중국 정부가 자동차 업계를 불러 모아 그만하라고 강하게 경고했기 때문이죠.그래서 이제부턴 기술과 자본의 진검승부를 펼쳐야 합니다. 기술에서 밀리거나 수익성을 확보하지 못한 제조사는 살아남지 못할 거예요. 컨설팅 업체 알릭스파트너스의 전망대로 100개 넘는 중국 전기차 브랜드 중 2030년까지 살아남는 건 단 15개에 불과할 테니까요.EV부스터스 분석에 따르면 중국에선 2018년 이후 지난해까지 무려 400개가량의 전기차 스타트업이 사라졌다는데요. 그동안은 일종의 예선전이었고, 100개 정도 남은 지금부터가 결선이라 하겠습니다.웨이샤오리 지고 화미링 뜨다웨이샤오리(蔚小理). 중국 전기차 스타트업 3대장으로 꼽히는 브랜드 니오(웨이라이), 샤오펑, 리오토(리샹)을 묶어 이렇게 불렀죠. 시장 트렌드를 선도하는 중국 전기차 1세대 스타트업이라 할 수 있는데요.그런데 이 웨이샤오리 시대가 저물고 있습니다. 비수기인 올 1월의 전기차 내수 판매량 순위를 들여다보면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데요. 전통의 강자(BYD, 지리, 테슬라) 뒤를 잇는 중국의 신흥 브랜드 3강은 바로 ‘화미링(华米零)’, 즉 화웨이, 샤오미, 리프모터 순이었습니다. 웨이샤오리는 그 아래로 밀려났죠. 화미링을 각각 설명하자면.① ‘똑똑한 럭셔리’ 화웨이중국 대표 기술기업 화웨이는 직접 차량을 제조하진 않습니다. 대신 자동차 제조사에 ‘지능형 자동차의 뇌와 신경망’을 공급하죠. 여러 차량 제조사에 화웨이의 ‘하모니 운영체제(OS)’와 ‘첸쿤(乾坤) 지능형 솔루션’을 탑재하는 플랫폼 역할을 하는 겁니다. 화웨이의 첸쿤은 중국에선 가장 진보한 자율주행 소프트웨어로 통해요. 그리고 요즘 중국 소비자들은 차를 살 때 소프트웨어 기술력을 매우 중요하게 따지죠. 화웨이가 자동차 제조사 세레스와 선보인 대형 SUV ‘아이토 M9’는 가격이 약 50만 위안(1억원)이나 되는데요. 그럼에도 출시 직후부터 흥행 돌풍을 일으켰고, 럭셔리 SUV 세그먼트에서 BMW X5를 제치고 20개월 연속 1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럭셔리카의 정의가 ‘브랜드’에서 ‘기술’로 바뀌었단 걸 알 수 있죠. ② ‘반값 포르셰’ 샤오미화웨이가 지능형 기술의 편의성에 집중한다면 샤오미 전기차는 달리기 성능으로 승부합니다. 특히 샤오미 SU7 울트라가 뉘르부르크링 서킷에서 포르셰 타이칸 터보 GT의 기록을 깼다는 걸 마케팅 포인트로 삼는데요. 유선형 디자인까지 어딘가 포르셰와 닮아있어서 “가성비 포르셰”로 통합니다.또 스마트폰-가전-전기차가 샤오미의 ‘하이퍼 OS’를 통해 연결되도록 생태계를 통합시켰어요. 운전 중 음성으로 집 안 로봇 청소기를 돌리거나 에어컨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거죠. 자동차가 ‘바퀴 달린 스마트폰’이 되었습니다.샤오미의 레이쥔 회장이 제시한 올해 판매 목표치는 55만대. 이런 추세라면 샤오미는 ‘세계에서 가장 빨리 100만 대를 판매한 자동차 제조사’로 기록될 겁니다. ③ ‘전기차계의 유니클로’ 리프모터화웨이처럼 똑똑하거나 샤오미처럼 화려하진 않아요. 대신 ‘압도적인 제조 효율’이 리프모터의 특장점이죠. 부품의 60% 이상을 자체 설계·생산하는 수직 계열화로 중간마진을 확 줄여서 가격 경쟁력을 극대화했는데요.얼마나 싸냐고요? 리프모터의 중형 SUV C10 가격은 12만2800위안(2567만원). 비슷한 크기의 테슬라 모델Y나 현대 아이오닉5와 비교하면 반값이죠. 또 소형 전기차 T03은 5만9900위안(1205만원). 이 가격대에선 드물게 레벨2 주행보조시스템까지 갖춘 가성비 끝판왕입니다.리프모터는 지난해 60만대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전기차 시장 신흥 강자로 우뚝 섰는데요. 올해는 판매목표를 100만대로 더 끌어올리며 공격적으로 나설 계획입니다.내수 경쟁 밀리는 BYD의 살길은?정리하자면, 소프트웨어가 점점 중요해지면서 IT 기술에서 앞서는 빅테크(화웨이·샤오미)가 급부상 중이고요. 그게 아니면 아예 저렴한 극가성비 브랜드(리프모터)로 선택이 쏠리는 분위기입니다. 트렌드가 달라지면서 중국 전기차 제조사 순위가 요동치는데요.그래서 중국 전기차 시장 1위 BYD는 고민이 깊어집니다. BYD는 수년간 주행거리를 늘린 고효율 배터리와 하이브리드 기술을 앞세워 중국 전기차 시장을 장악해 왔는데요. 하지만 이제 다른 경쟁사도 비슷한 배터리 기술을 이미 갖췄거든요. BYD의 수직통합 전략을 모방한 리프모터는 가성비 면에서 한발 앞서 나가고요. 하드웨어 제조 역량만으론 이제 차별화가 어렵게 됐습니다.무엇보다 요즘 중국 소비자는 인포테인먼트나 자율주행 같은 소프트웨어 기술력에 상당히 민감한데요. 이게 바로 IT 기반이 약한 BYD의 결정적인 약점이죠. ‘BYD=소프트웨어가 구식인 아저씨 차’ 이미지가 강해지면서, 젊은 층의 외면을 받는 겁니다.지난해 BYD의 내수 판매량은 13% 넘게 감소했어요(405만→350만대). 할인 프로모션이 막히자 약점이 드러나면서 판매량이 뚝 떨어진 거죠. “기술적 리더십이 약해지고 업계 내 동질화가 심해졌습니다.” 결국 왕촨푸 BYD 회장도 지난해 말 주주총회에서 이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는데요.그럼, BYD의 성공 신화도 이대로 빛이 바래는 걸까요. 그건 아닙니다. BYD는 이미 더 넓은 시장, 해외로 나아가고 있으니까요. BYD 지난해 수출량은 105만대로, 전년보다 150% 급증했고요. 올 1월에도 총판매량 21만대 중 절반 가까운 10만대를 수출했습니다. 1년 전보다 수출이 43% 급증한 거죠. 줄어든 내수 수요를 수출로 대체하면서 ‘세계 1위 전기차 제조사’로서의 위상은 오히려 더 공고해졌죠.특히 BYD는 유럽과 남미,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기록적인 성장세를 기록 중인데요. 브라질에선 지난 1월 전체 자동차 시장에서 점유율 5위(7.8%)로 급상승하며 토요타를 제쳤고요. 태국에서도 압도적인 전기차 1위 브랜드로 자리 잡으며, 일본 차 일변도였던 시장 판도를 뒤흔들었습니다.올해 2분기엔 BYD 헝가리 공장이 가동에 들어가죠. 현재 유럽에서 팔리는 중국산 BYD 차량엔 27% 관세가 붙거든요. 그런데도 지난해 유럽 판매량이 270% 급증하면서 테슬라를 무섭게 추격 중인데요(BYD 18만8000대, 테슬라 23만8000대). 헝가리산 BYD가 팔린다면 관세는 제로가 될 테니, 유럽 시장 공략은 한층 수월해질 겁니다. 어쩌면 테슬라를 따라잡는 ‘골든 크로스’를 보게 될지도 모르죠. BYD만이 아닙니다. 지리그룹이 소유한 ‘볼보의 후광’에 힘입어 유럽 시장에 안착한 지커, 스텔란티스와의 합작을 통해 폴란드 생산 거점을 마련한 리프모터, ‘2026년 해외 판매 2배’를 외치며 해외 시장에 열을 올리는 샤오펑 등등. 중국 전기차 브랜드들이 앞다퉈 중국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데요.올해는 비야디에 이어 지커와 샤오펑까지 한국 시장 공습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내수 시장에서 단련된 중국 전기차들의 진검승부, 아마 우리가 조만간 안방에서 목격하게 될 얘기일 겁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2월 13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요즘 글로벌 금융시장의 ‘문제아’로 떠오른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인도네시아. 경제는 견조하게 성장 중인데도, 증시와 외환시장은 심하게 요동치는데요. 해외 투자자들이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을 신뢰하지 못하는 게 근본 원인이라 할 수 있죠. 국가 주도 성장을 통해 ‘강한 인도네시아’를 이루겠다는 프라보워 대통령의 약속. 국민들은 지지하지만, 글로벌 투자자들은 시대착오적이라며 고개를 젓는데요. 경고음이 울린 인도네시아 경제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이 기사는 2월 1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금융시장에서 날아든 옐로카드인도네시아 경제엔 최근 옐로카드 두 장이 연이어 날아들었습니다. 먼저 포문을 연 건 세계 최대 주가지수 산출기관인 MSCI. 1월 27일 성명에서 인도네시아를 신흥시장(Emerging Market)에서 프런티어 시장(Frontier Market)으로 강등할 수 있다고 경고했어요. 인도네시아 상장사의 “불투명한 주주 구성과 담합 가능성”을 지적하며, 5월까지 해결책을 마련하라고 못 박으면서 말이죠.만약 신흥시장에서 탈락한다면? MSCI 신흥시장 지수를 추종해온 글로벌 펀드 자금이 줄줄이 빠져나가며 증시가 주저앉을 게 뻔합니다. 전 세계 투자자들이 화들짝 놀랐고, 대형 기관들은 미리부터 발을 뺐죠. MSCI 성명이 나온 지 불과 이틀 만에 시가총액 800억 달러(116조원) 증발해버렸는데요. 올해 초 사상 처음 9000선을 돌파했던 자카르타 종합지수는 순식간에 8000선으로 밀려납니다.그리고 MSCI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2월 5일. 이번엔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가 나섭니다. 인도네시아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한 건데요. 이날 인도네시아 통계청이 ‘2025년 5.11%’라는 경제성장률을 발표하며 좋았던 분위기에 무디스가 찬물을 끼얹은 셈이 됐죠. 무디스는 “정책 결정의 예측 가능성 저하”를 이유로 들었습니다.가뜩이나 MSCI 강등 공포가 퍼진 상황에서 무디스까지 일격을 날렸으니, 외환시장이 요동칠 수밖에요. 이날 환율은 장중 달러당 1만6900루피아에 육박했어요. 환율이 1만7000루피아를 찍었던 1998년 외환위기 수준에 다시 근접한 거죠. 인도네시아에선 ‘환율 1만7000루피아=외환위기 악몽’으로 통하기에 시장의 불안감은 커집니다.그런데 인도네시아 경제 자체는 꽤 잘나가고 있거든요. 4년 연속 5%대 경제성장을 기록했고요. 올해도 정부가 5.4% 성장률 달성을 자신합니다. 실물 경제가 이렇게나 좋은데, 왜 금융시장에선 자꾸 시끄럽게 경고음을 울려대며 제동을 거는 걸까요.호주국립대 코럴벨 아태연구소의 이브 워버튼 연구원은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전반적으로 프라보워 정권에선 국가 권력이 더욱 중앙집권화되고 약탈적인 양상을 보입니다. 민간 부문이 불안해하고 외국 투자자들이 겁을 먹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스위스 면적 땅을 국유화하다인도네시아의 독재자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사위였던 프라보워 대통령. 1998년 외환위기로 수하르토 정권은 무너졌고, 그는 군에서 불명예 전역한 뒤 해외로 망명하는 굴욕을 겪어야 했어요. IMF를 포함한 외세를 향한 그의 반감은 뿌리가 깊은데요.그래서일까요. 프라보워 대통령은 외국 자본에 대한 거부감이 강합니다. 2024년 12월 취임 후 그가 ‘강한 인도네시아’를 주창하며 줄곧 강조해온 건 해외투자 유치가 아닌 ‘자급자족’이죠. 외국 자본에 소중한 천연자원을 뺏길 수 없다,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자는 식의 논리인데요.그가 자급 경제라는 목표를 위해 내놓은 파격적인 정책들이 여러가지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①쌀과 설탕 수입 중단“2026년엔 소비용 쌀과 설탕, 사료용 옥수수 수입이 한톨도 없을 겁니다.” 인도네시아 농업부 장관이 얼마 전 한 말이죠. 프라보워 대통령이 취임 직후 내린 ‘식량자급’ 명령에 따라 지난해 생산을 늘려 재고를 충분히 쌓아놨고, 그 결과 올해부턴 주요 전략 식량 수입 물량이 제로가 될 거라 선언한 건데요.아니, 식량 자립은 좋은데 그렇다고 굳이 “수입 제로” 선언까지 하는 건 너무 오버 아닐까요. 날씨에 따라 수확량은 들쑥날쑥하기 마련인데 말이죠. 이러다 자칫 식량 인플레이션 오는 거 아니냐는 걱정도 벌써부터 나옵니다.하지만 인도네시아 정부 관계자는 “우리가 쌀을 구매하지 않아서, 세계 쌀값이 하락했다”며 성공적 정책이라 자화자찬 중인데요. 팩트체크를 하자면, 세계 쌀값이 떨어진 건 인도네시아 때문이 아니라 인도의 쌀 수출 재개 덕분이었습니다.②경유에 팜유 50% 혼합 의무화식량 자급 못지 않게 중요한 게 에너지 자립이죠. 이를 위해 프라보워 대통령은 B50, 즉 경유와 팜유를 50%씩 섞어 사용하는 걸 의무화한다는 계획을 지난해 밝혔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전 세계 팜유 생산의 60%가량 차지하는 1위 생산국이자 수출국이잖아요. 그러니 팜유의 연료 사용량을 대폭 늘려서 경유 수입을 제로로 만들겠다는 발상이었죠.당연히 이런 질문이 나오겠죠. 그럼 식용유는 어쩌지? 에너지 자립하려다 먹을 식용유가 모자라는 상황이 닥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이어졌고요. 또 팜유 생산 늘린다고 숲을 베어 팜 농장을 만들면, 그게 과연 친환경적이라 할 수 있느냐는 논란도 일었는데요.다만 애초 프라보워 대통령이 2026년 시행한다고 밝혔던 B50 의무화 정책은 최근 내년 이후로 보류됐습니다. 국제 팜유 가격이 아직은 너무 비싸기 때문이라는군요. ③불법 농장·광산 대대적인 국유화식량이든 에너지든 자립하려면 무엇보다 필요한 게 땅이죠. 쌀농사, 사탕수수농사, 팜농사 등을 더 많이 지어야 할 테니까요. 그래서 프라보워 정부는 대대적인 땅 확보에 나섰습니다. 어떻게? 압류해서 국유화하는 겁니다. 환경 규제를 어겼거나 부패 혐의에 연루된 불법 자산이란 딱지를 붙여서 말이죠.이런 식으로 지난해 이후 인도네시아 정부 소유가 된 땅이 얼마나 되느냐. 놀라지 마세요. 자그마치 400만 헥타르. 서울 면적의 67배, 남한 전체 영토의 약 40%에 달합니다. 경기도와 강원도, 충청북도를 합친 것보다 더 넓고요. 스위스 국가 전체 면적과 맞먹죠. 외국 자본이나 재벌기업이 보유했던 돈 되는 알짜 농장과 광산이 속속 정부에 넘어갔습니다.이런 땅과 지분, 광산채굴권은 누가 관리할까요. 다난타라(Danantara), 지난해 2월 설립된 인도네시아 국부펀드로 대통령 직속기관인데요. 인도네시아의 핵심 7대 국영기업과 민간에서 압류된 자산을 모두 관리하는 거대한 지주회사 형태입니다. 그 운영은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이뤄지죠.다난타라가 프라보워 정부 핵심 사업(무상급식, 군 현대화)의 돈줄 역할을 하게 될 거란 전망은 파다합니다. 인도네시아는 재정적자를 엄격히 제한하는데(GDP의 3% 이내), 다난타라를 통하면 규제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죠. 다난타라는 정부 예산안에선 빠져 있는 일종의 ‘장부 외(Off-balance sheet)’ 지갑이니까요.다난타라에 몰아주기 위한 대대적인 자산 국유화 물결. 투자자들은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데요. 인도네시아 최대 금광인 마르타베 광산 사례를 볼까요. 지난해 12월 환경규제를 위반해 홍수를 야기했단 이유로 정부는 마르타베 금광을 포함한 28개 기업의 허가를 취소했고요. 최근엔 국부펀드 다난타라가 마르타베 금광을 인수해 운영하는 걸 검토 중이란 보도가 나왔어요. 금광의 소유주인 홍콩 기업 자딘 매티슨엔 투자자들의 문의가 쏟아졌고요. 자딘 매티슨 측은 “공식 통보 받은 바 없다”며 당혹스러워했죠.총칼 들고 협박해서 강탈한 건 아니지만, 이건 사실상 정부가 인허가권을 무기로 기업 자산을 빼앗는 것 아닌가요? 갑자기 이렇게 계약이 휴짓조각이 되어버리면 어쩌란 걸까요. 이거 어디 불안해서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할 수 있을까요. 이게 바로 무디스가 지적한 “예측 가능성 저하”의 대표 사례인데요.하지만 프라보워 대통령은 불법 농장·광산의 압류가 법치주의 수호를 위한 노력이라고 주장합니다. 지난달 다보스 포럼 특별연설에서 그는 대대적인 국유화가 “탐욕 경제”에 맞서 “부패와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일”이라고 강조했죠. 자신은 “가난하고 약한 인도네시아 사람”을 위해 “부패, 조작, 부정행위와 맞서 싸우고 있다”는 주장입니다.79.9%의 압도적 지지율프라보워 대통령이 추구하는 ‘국가 주도의 자급자족 민족주의’ 노선. 왜 전 세계 투자자들이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지 아시겠나요. 인도네시아 경제가 잘 나가고 있긴 하지만, 이렇게 룰이 깨지면 곤란하다는 경고음이 나오는 상황인데요.그럼 흔들리는 주가와 환율 탓에 민심도 흔들리고 있을까요. 그건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이를 통쾌하게 여기고 있죠. 그동안 법을 어기며 숲을 파괴하고 이익을 챙겨온 부도덕한 기업에 철퇴를 내렸다고 보기 때문인데요. 특히 마르타베 금광 사례처럼 외국자본 소유 자산을 건드릴수록, 민족적 자부심은 고취됩니다. ‘프라보워는 자본의 눈치 보지 않고 진짜 부패와 싸우는 리더’라며 열광하죠.최근 여론조사(2월 8일 발표)에서 프라보워 대통령 지지율은 무려 79.9%. 취임 1년이 지났는데도 이례적으로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는데요. 특히 젊은층과 농촌지역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물론 이런 높은 인기엔 프라보워 대통령의 대표 정책인 무상급식도 한몫했죠. 지난해 프라보워 정부가 무상급식 공약 이행에 나서면서, 인도네시아에서 재정부담을 둘러싼 논쟁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던 건 있는데요.프라보워 정부가 속도전을 펼치면서 무상급식은 예상보다 빠르게 확대됐고요. 현재 수혜자가 총 6000만명(학생, 영유아, 임신부가 대상)에 달합니다. 올해 말이면 최종 목표인 8290만명 전원에게 급식을 제공할 거라는군요.‘서민 자녀에게 밥을 먹이는 대통령’이라니. 국민들은 열광합니다. 낮은 급식단가(1끼에 874원) 때문에 식단이 부실하단 지적이 나오지만, 그것조차 아쉬운 가난한 국민이 워낙 많으니까요. 또 다난타라가 국유화한 농장들은 앞으로 무상급식 재료를 안정적으로 공급해주는 역할을 할 예정입니다. 국유화 역시 애들 밥 먹이는 데 도움이 되니, 환영할 만한 일인 거죠.해외 투자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든 프라보워의 정책들이 국내 여론 공략엔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입니다. 금융시장에서 뭐라고 하든 프라보워 대통령이 ‘마이 웨이’를 고집하는 이유인데요. 과연 프라보워 대통령은 이 경고음을 무시한 채 ‘자립의 기적’을 쓸 수 있을까요. 아니면 1998년의 악몽을 연상시키는 환율 1만7000루피아 파도에 휩쓸리고 말까요. By.딥다이브*이 기사는 2월 1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