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애란

한애란 기자

동아일보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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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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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28~2025-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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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자 1800명에 33조원 부유세?…佛, 세금 논쟁에 빠지다[딥다이브]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거둬라!”이런 주장, 어떤가요. ‘그래, 돈 많은 사람들이 세금 더 내야지’라고 찬성할 사람도, ‘부자는 이미 세금 많이 내는데 뭘 더 내라는 거야’라고 반대할 사람도 모두 있겠죠. 하지만 그냥 부자가 아닌 상위 0.01% 극소수 ‘슈퍼 리치’만 대상이라면? 상당수가 슬그머니 찬성 쪽으로 돌아서지 않을까요.바로 이런 논의가 프랑스에서 한창입니다. 이른바 ‘주크만세(Zucman tax)’라고 부르는 슈퍼리치 부유세를 도입하잔 논쟁이죠. 재정적자를 위한 해결책이라며 반기는 국민이 대부분이라는데요. 왠지 프랑스에만 머물진 않을 듯한 이슈, 슈퍼리치 부유세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9월 26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슈퍼리치 부유세에 여론은 대동단결국가부채 비율 113.9%. 재정위기에 시달리는 프랑스는 9월 내내 시끄러웠죠. 복지·의료 같은 공공예산 삭감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와 파업으로 총리가 물러나고 사회 곳곳이 마비됐는데요.국민 반발로 긴축은 사실상 물 건너갔는데, 그렇다고 빚을 마냥 늘릴 순 없는 노릇. 이거, 무슨 뾰족한 수가 없을까요.이와 관련해 프랑스 좌파 정당이 제안한 ‘주크만세(Zucman tax)’가 지금 프랑스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경제학자 가브리엘 주크만 UC버클리대 교수의 아이디어에서 따온 것으로, 극소수 초부유층에만 ‘부유세(순자산세)’를 물리자는 겁니다.내용은 간단합니다. 순자산(자산-부채)이 1억 유로(약 1645억원)가 넘는 부유층에 한해 순자산에 최소 2%를 세금으로 부과합니다. 즉, 해당 납세자가 그해 낸 각종 세금(소득세+사회기여금 등)이 적어도 순자산의 2%는 돼야 하고, 만약 그에 못 미치면 추가로 세금을 물려서 2% 기준선에 맞추겠다는 거죠.이 조건(순자산 1억 유로 이상)에 해당하는 프랑스 납세자는 고작 1800가구. 전체(약 3400만 가구)의 0.005%밖에 되지 않는 극상류층인 셈인데요. 주크만 교수는 이 세금 도입으로 연간 최대 200억 유로(약 33조원) 세수가 추가될 거라 내다보죠. 물론 그건 과장이고 기껏해야 50억 유로(약 8조2000억원)에 그칠 거란 일부 경제학자 주장도 있지만요.어찌 됐든 프랑스는 당장 내년에 440억 유로(약 72조원)의 예산 감축이 필요한 절박한 상황. 최근 여론조사에서 프랑스 국민 중 86%가 주크만세에 찬성했죠. 좌파 유권자는 물론이고, 우파인 르네상스당 지지자의 92%, 공화당 지지자의 89%도 찬성했습니다. 정치커뮤니케이션 전문가가 “여론조사에서 드물게 나타나는 만장일치”라며 놀라워할 정도죠.당연히 1800명 안에 들어가는 슈퍼리치 당사자는 기겁합니다. 주크만세에서 ‘순자산’이란 주식, 부동산, 은행 예금 등을 모두 포함한 개념인데요. 이게 1억 유로 넘는 건 주로 기업 오너들이거든요.기업인, 특히 아직 적자 상태인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이렇게 반발하죠. “(세금을 내려고) 회사 일부를 팔아야 하는 상황에 빠뜨리는 건 터무니없고 위험합니다.”(프랑스 IT 스타트업 미라클 창업자 필립 코로)급기야 프랑스 최고 부자 베르나르 아르노 루이뷔통모에헤네시 그룹 회장도 나섰는데요. 영국 선데이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크만세는) 자유주의 경제를 파괴하려는 목적입니다. 우리 경제에 치명적일 수 있는 공격적인 행위에요.” 그의 순자산은 현재 1690억 달러(약 235조원). 그 2%가 세금이라면, 그는 연간 4조7000억원을 세금으로 내야 하는 셈입니다. 아르노 회장이 부유세 논쟁의 근원인 주크만 교수를 “자유주의 경제 파괴를 목표로 하는 극좌 활동가”라고 공격한 게 이해도 되네요.소득세의 실패, 초부유층의 승리어떤가요. 슈퍼리치 부유세는 획기적인 해결책일까요? 아니면 부작용을 초래할 극단적 발상일까요? 결론 내리기 전에, 좀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왜 하필 0.01% 슈퍼리치가 타깃일까요.대부분 나라에서 소득세는 누진적이죠. 돈을 잘 벌수록 더 높은 세율을 적용받는 게 공정하다고 여겨집니다. 우리나라도 과세표준이 10억원을 넘으면 소득세율 45%를 적용하고요.그런데 최상위 슈퍼리치는 이 소득세 누진세의 영향권 밖에 있습니다. 왜? 그들의 부의 원천이 소득(급여)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들은 주로 지분을 보유한 기업으로 부자가 됩니다.오랫동안 무급으로 일해온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 기본급이 1달러인 메타의 마크 저커버그를 보세요. 아마존 제프 베저스는 수년 동안 현금 급여는 연 8만 달러(약 1억1000만원)만 받았고요. 오픈AI의 샘 올트먼 CEO도 2023년 연봉이 7만6000달러(약 1억원)라서 화제가 됐죠. 근로소득세만 보면 그 회사 개발자보다도 훨씬 적게 내는 셈입니다.다른 소득은 어떨까요? 일단 글로벌 빅테크 중엔 배당을 아예 하지 않거나(아마존·테슬라 등), 배당수익률이 매우 낮은(애플·메타·구글 등) 경우가 대부분이고요. 워런 버핏의 버크셔 해서웨이 역시 1967년만 빼고는 한 번도 배당금을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배당소득세도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거죠.결국 슈퍼리치 기업인이 내는 실질적인 세금 중 상당 부분은 소득세가 아니라 그 기업이 내는 법인세라 할 수 있는데요. 법인세는 세율이 소득세보다 낮죠. 또 법인세는 각종 공제와 조세회피처 이용 등으로 줄일 수도 있고요.그래서 사업이 번창해서 기업이 돈을 엄청나게 벌고, 주가가 뛰어서 사주가 세계적인 갑부가 되어도, 상대적으로 그들이 내는 세금(소득세+법인세+재산세+증여세 등등)은 보잘것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그들이 지분을 내다 팔면 그 차익에 대한 양도소득세를 물겠지만, 그런 일은 드무니까요. 미실현 이익엔 소득세를 물리지 않습니다.만약 급여도, 배당도 안 받으면 그들은 무슨 돈으로 그렇게 잘 사냐고요? 대출받으면 됩니다. 주식담보대출을 받으면 기업 지분을 팔지 않고, 소득세도 내지 않으면서 소비도 하고 투자도 할 수 있죠. 당연히 이자가 세금보다 쌉니다.중산층보다 낮은 억만장자 세율‘초부유층 회장님들이 너무 세금을 적게 내고 있다.’이런 문제 제기는 늘 있었지만, 2021년 미국 비영리 언론사 프로퍼블리카의 보도가 불을 붙였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한때 세계 1위 부자였던 제프 베저스는 2007년과 2011년 연방소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았어요. 심지어 그는 4000달러의 자녀 세액공제까지 받았다고 하죠. 일론 머스크와 칼 아이컨도 합법적으로 소득세를 피한 적 있다고 하는데요.이와 함께 경제학계에선 슈퍼리치가 도대체 얼마나 세금을 내고 있는지를 추정하는 각종 연구가 쏟아져나옵니다. 각국 연구자들 결론은 하나로 모입니다. 슈퍼리치는 일반적인 고소득자보다도 훨씬 낮은 세율을 적용받고 있다는 거였죠.2024년 G20 의장이던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의 요청으로 가브리엘 주크만 교수가 작성한 ‘초고액 부자에 대한 최저한세율 청사진’ 보고서를 볼까요. 아래 그래프는 4개국(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의 소득별로 실제 부담하는 실효세율을 추정한 건데요. 기업인의 경우엔 그 기업의 이익을 소득에 반영하고, 기업이 낸 법인세를 세금에 포함해서 실효세율을 계산했습니다.그 결과, 부자일수록(그래프에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세율이 높아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일정 수준보다 더 큰 부자이면 세율이 급격히 떨어집니다. 결과적으로 자산이 10억 달러가 넘는 억만장자(맨 오른쪽 끝)들의 실효세율은 웬만한 중산층보다도 낮죠. 프랑스(파란색 선)는 전 국민 평균 실효세율이 52%인데, 억만장자(10억 달러 이상 초부유층)는 27%입니다.억만장자들은 일반인보다 더 빠르게 부자가 되고 있다고 하죠. 통계에 따르면 1987~2024년 세계인의 평균 자산은 연평균 3.2% 증가했지만, 글로벌 억만장자 자산은 7.1%씩 늘었는데요. 혹시 너무 낮은 세율 덕분에 부자가 더 빠르게 부자가 되는 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를 수정하기 위한 새로운 세금이 필요하다는 것, 그게 바로 주크만세의 기본 논리입니다.아마 이런 논리, 예전 같으면 급진 좌파의 주장으로 치부되고 말았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세상이 어떤가요. 미국도, 유럽도 모두 심각한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고요. 특히 유럽은 고령화로 복지지출은 무섭게 불어나는데, 인구 감소로 세금 낼 사람은 줄어만 가서 고민이 큽니다.그렇다고 이제 와서 복지 줄이고 세금 더 올리자니, 프랑스 시위에서 보듯이 모든 국민이 들고일어날 상황. 루이 14세 시절 재무장관인 장 바티스트 콜베르는 유명한 ‘세금 징수는 거위 깃털 뽑기’라는 말을 남겼지만, 요즘 세상엔 깃털에 손도 대기 어렵습니다. 거위를 잘못 건드렸다간 정권이 뒤집힐 거예요.그래서 이 좌파적인 부유세 도입론이 힘을 얻습니다. 99.99%의 국민엔 전혀 영향이 없는, 따라서 정치적 지지를 얻기 매우 쉬운 세금이니까요.동시에 이 점에서 일부 우파 인사도 슈퍼리치 부유세를 지지합니다. 미국 마가(MAGA) 진영 대표 논객인 스티브 배넌은 지난해 말 미국 재정적자 문제를 지적하며 이렇게 말했죠. “소뿔에 들이받혀야 한다면(증세를 한다면), 그건 부자들, 억만장자 계층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중산층과 노동 계층에게선 나올 수 없습니다. 안 돼요. 요즘은 먹고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다고요.”부자 대탈출 막을 방법은?하지만 부유세엔 모두가 다 아는 맹점이 있습니다. 부자들이 세금을 피해 다른 나라로 달아나 버릴 수 있단 점이죠. 2013년 프랑스 국민배우 제라드 드빠르디유는 당시 잠시 도입됐던 부유세를 피해 러시아 시민권을 취득했고요.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 역시 벨기에 시민권 취득을 시도했다가 접은 적 있죠.노르웨이엔 미실현 이익에도 세금을 물리는 부유세가 있는 나라인데요(순자산 2억4000만원 이상은 1%, 29억원 이상은 1.1%). 이를 피해 지난 수년간 약 200명이 스위스로 이주하는 ‘부자 탈출 러시’가 벌어졌습니다. 얼마 전 총선에선 ‘부유세 폐지’가 가장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기도 했죠.(다만 결과는 부유세를 지지하는 좌파 여당의 승리)유럽 국가는 상대적으로 낮은 세율을 적용하는 스위스·이탈리아가 지척이고, 아예 개인소득세가 없는 모나코도 있습니다. 좀 멀긴 하지만, 세금 천국인 아랍에미리트(소득세, 자본이득세 모두 0) 같은 나라도 요즘 부자 탈출구로 떠오르고요. 초부유층은 세금을 피해서 국적을 바꿀 의지와 실행력이 있습니다. OECD 전 조세정책국장인 파스칼 생타망은 FT에 이렇게 말하죠. “억만장자들에게 ‘당신의 충성심은 국가에 대한 것입니까, 아니면 돈에 대한 것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은 ‘저는 제 돈에 충성합니다’라고 답할 겁니다.”그래서 슈퍼리치 부유세 도입을 주장하는 모든 보고서(주크만 교수팀, 조세정의네트워크, UN 보고서 등)가 공통으로 강조하는 건 이겁니다. 국제 협력. 이주를 통한 세금 회피를 막으려면 여러 나라가 함께 부유세를 도입해야 효과가 있다는 건데요. 물론 나라별 사정이 제각각인 상황이라 쉽진 않습니다. 일단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부터 동의할 리 없죠.그게 어렵다면 출국세(Exit tax, 국외전출세), 즉 해외로 이주할 때 내야 하는 세금을 더 강화하는 게 그나마 방법입니다. 주식을 팔지 않았어도 출국 직전에 판 것과 똑같이 세금을 매기는 거죠. 이미 미국·일본·프랑스·독일·캐나다·호주, 그리고 한국도 출국세를 적용 중입니다(한국은 대주주에만 부과).누진적 소득세는 도입될 때부터 가장 진보적인 세금으로 여겨졌죠. 지난 100년 동안 소득세는 재분배의 강력한 수단이었고요. 하지만 이제 그 한계가 드러나면서 부유세 논의가 불붙고 있는데요. 프랑스에서 시작된 이 논쟁이 어디로까지 번질지 한번 지켜보시죠. By.딥다이브프랑스 시민들의 과격한 ‘국민마비 운동’도 놀라웠는데, 주크만세를 둘러싼 논쟁은 더 흥미롭습니다. 이 급진적 아이디어는 일부라도 현실화할까요. 만약 그렇다면 부자들은 어떻게 대응할지가 궁금하군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정부의 긴축 예산안이 대대적인 시위에 가로막힌 프랑스. 복지를 줄이기도, 증세를 하기도 어려운 가운데 ‘주크만세’ 도입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습니다. 1억 유로 이상 순자산을 가진 1800명에게 순자산의 2%를 세금으로 매기자는 겁니다. 프랑스 국민 86%가 찬성합니다.-최상위 슈퍼리치들은 누진적 소득세의 영향권 밖에 있습니다. 부의 원천이 소득보다는 그들이 소유한 기업이기 때문이죠. 연구자들에 따르면 억만장자들은 웬만한 중산층보다도 낮은 실질 세율을 적용받고 있습니다.-이를 바로잡기 위해 슈퍼리치에 한해 소득이 아닌 순자산에 세금을 물리자는 주장이 힘을 얻습니다. 타깃이 된 기업인들은 “세금 내려고 기업을 팔아야 하느냐”며 발끈하죠.-부유세의 부작용은 뻔합니다. 부자들이 세금을 피해 다른 나라로 떠나겠죠. ‘국제협력’이 필요하단 얘기가 나오지만 쉽지 않은데요. 이제 막 불붙기 시작한 슈퍼리치 부유세 논쟁이 얼마나 더 번지게 될까요.*이 기사는 9월 26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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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 증오에 불을 붙이나…75년 전 매카시즘 다시보기[딥다이브]

    찰리 커크. 2025년 미국 사회는 아마 이 이름과 함께 역사에 기록될 겁니다. 9월 10일 우익 청년 활동가 찰리 커크가 피살 당한 사건은 큰 충격을 줬죠.그의 죽음은 비극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정치폭력이란 점에서 비극이고요. 동시에 그의 죽음을 이용해 또 다른 갈등과 증오를 조장하는 세력이 득세한다는 점에서도 비극이죠.최근 미국에선 사망한 커크의 과거 행적을 비판하는 SNS 게시물을 올렸다는 이유로 언론사, 학교, 기업 직원들이 줄줄이 해고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진보성향 단체를 근거 없이 ‘극좌 테러단체’로 낙인찍는 정부 인사들의 발언도 이어지고요. 디즈니는 진행자 지미 키멜의 발언이 문제가 되자 ABC 심야쇼를 무기한 방영 정지했죠. 이거 어쩐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요.일부에선 이를 두고 75년 전 ‘매카시즘(McCarthyism)’을 떠올립니다. 무고한 이들에까지 공산주의자 낙인을 붙여 대대적으로 숙청했던 시절이죠.에이, 지금이 어느 시절인데 매카시즘 같은 광풍을 걱정하냐고요?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카시즘의 1950년대와 지금의 미국 사회는 닮은 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매카시즘을 보면 미국 내 강경 우파의 사고방식을 좀더 이해할 수 있죠. 커크 피살사건의 끝이 매카시즘의 부활은 아니기를 바라면서, 75년 전 매카시즘을 다시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9월 1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반공주의의 시작과 강경 우파의 부상1945년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인들은 자신감 넘치고 희망에 차 있어야 마땅했죠.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끔찍한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군인들은 일상으로의 복귀를 원했지만, 그들을 위한 자리는 없었죠. 주택도, 일자리도 모두 부족했습니다. 귀환한 흑인 군인들이 전쟁터에서와 같은 평등을 요구하면서 인종 갈등은 극심해졌고요. 오대호 지역과 서부 해안에선 1년 내내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사회는 불안했고, 다들 대공황 같은 불황이 닥쳐올 거라 예상했죠. 새 대통령 해리 트루먼의 지지율은 폭락했고, 1946년 11월 중간 선거에서 야당인 공화당이 압승을 거둡니다.해외에선 소련의 확장세가 심상찮았습니다. 1946년 말, 소련 공산주의자들이 그리스 아테네를 집어삼킬 기세였죠. 미국이 이를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상황. 하지만 전쟁이라면 지긋지긋한 미국인들에게 ‘자유세계를 위해 다시 싸우자’는 설득이 먹힐 리 없었습니다. 외교정책에 대한 지지를 얻고 추락한 지지율을 끌어올리려면 일종의 공포 마케팅이 필요했죠. 트루먼 정부는 1947년 ‘연방 직원 충성 프로그램’이란 반공산주의 정책을 고안합니다. 연방 정부 공무원의 과거 경력을 대대적으로 조사해 좌익 급진세력과 연관된 ‘반체제 인사’를 색출해 내기 시작한 거죠.트루먼 대통령은 반공주의를 가볍게 이용할 정치적 수단쯤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1948년 엘리트 외교관 앨저 히스가 소련의 간첩이었다는 폭로가 하원 청문회에서 터져 나오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죠. 설마 했는데, 정말 워싱턴에 소련의 스파이가 있었던 겁니다! 그것도 전임 루스벨트 대통령의 총애를 받은 유명 외교관이 말이죠.안 그래도 미국 보수주의자들 사이엔 루스벨트부터 이어진 민주당 정권에 대한 반감이 컸습니다. 정부를 키우고 복지를 늘리는 1930년대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이 그들 기준으론 지극히 사회주의적이기 때문이었죠.당시 미국 보수주의자, 특히 강경 우파에게 ‘진정한 미국’이란 연방정부가 그저 우편함 관리자에 머무는 나라였습니다. 지역 성직자 외에는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는 백인 남성 엘리트가 이끄는 작은 농촌 마을. 그게 바로 미국 본연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죠. 증세와 공공사업, 반독점 규제, 여성의 사회진출 같은 건 그들에게 미국적 가치를 훼손하는 외국의 불순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양성·평등을 외치는 민주당과 좌파 엘리트를 ‘반미주의자’라 불렀죠.일부에선 루스벨트가 소련 공산주의자들과 내통했다는 식의 음모론까지 제기했는데요. 히스 사건이 터지면서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공세를 강화합니다.“205명의 명단이 있다”1949년 세계 정세는 심상찮게 돌아갔습니다. 그해 4월 중국 공산당 인민해방군이 난징에 입성해 국민당 총통부를 차지했고요. 같은 해 8월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죠. 공산주의자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를 장악하고 원자폭탄까지 손에 쥐게 됐습니다. 막연했던 공산 세력의 위협이 갑자기 현실로 다가옵니다.미국인의 불안감은 고조됐고, 공화당 의원들은 “공산주의자가 민주당 정부에 침투해 있다”며 연일 때렸습니다. 1950년 2월. 위스콘신 출신의 초선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가 ‘국무부에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주제로 연설합니다. AP통신 기자는 연설문 원고 뒷부분에 있던 이 내용을 기사 리드문으로 뽑았죠. “여기 205명의 명단을 가지고 있다.”205명이란 숫자가 부각되자, 주장은 한층 그럴듯해졌습니다. 언론은 미끼를 물었고, 무명의 정치인 매카시가 신문 1면을 장식했죠. 물론 명단 따윈 있을 리 없었습니다. 민주당은 매카시에게 이름을 대라며 압박했고요. 수세에 몰린 매카시는 역공에 나섭니다. 공산주의자 대신 정보기관에서 일하는 동성애자 이름을 폭로한 거죠.그 시절 동성애자는 사회에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사실상 공산주의자와 같은 부류인 셈이었죠. 매카시의 폭로는 대대적인 정부 내 동성애자 직원 색출로 이어졌고요. 대중은 이제 그가 숨겨진 진실을 알고 있다고 믿게 됩니다.그의 다음 타깃은 국무부 내 중국 전문가. 이들이 ‘소련의 음모에 따라 중국을 공산당 손아귀에 넘겨줬다’고 주장한 건데요. 증거는 전혀 없었지만, 매카시의 공격을 받은 전문가들은 줄줄이 해고됩니다.‘매카시는 부패한 정부와 맞서 싸우는 투사다.’ 재향군인회, 해외 참전용사 협회를 포함한 대중의 지지 물결이 일어납니다. 매카시즘 불길이 막 타오르기 시작하던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했고요.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란 미국인의 공포는 극에 달했죠.기회를 잡은 매카시는 공격 강도를 높입니다. “국무부 집단이 중국 국민당 지원을 방해해서(중국을 공산화해서) 미국 청년들이 한국에서 죽어가고 있다!”반공주의는 극에 달합니다. 영화와 책, 장난감 상자와 풍선껌 종이에까지 반공 메시지가 등장했죠. 미국 의회는 1950년 9월 공산주의 활동을 억압하는 내용의 ‘내부 보안법’을 통과시킵니다. 트루먼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소용없었죠. 매카시를 막을 자는 없어 보였습니다.이제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면 경력은 끝이었습니다. 정부뿐 아니라 민간도 마찬가지였죠. 그중 표적이 된 건 할리우드. 미국 하원의 반미활동위원회(HUAC)는 배우들을 줄줄이 청문회장에 세웠는데요. 업계의 다른 공산주의자 이름을 대라는 요구를 거부한 이들은 즉시 할리우드에서 추방됐고요. 순순히 증언하며 “과거 공산주의 활동은 제 무지의 소치”라고 고개 숙인 이들은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할리우드엔 여러 버전의 ‘블랙리스트’가 나돌았고, 영화 제작자는 작가나 배우를 고용하기 전에 재향군인회에 전화해 의견을 물어볼 지경이었죠.진보적 엘리트들의 산실로 여겨졌던 대학들도 표적이 됐습니다. 12개 이상 주는 공산주의자의 공립대학 강의를 금지했고요. 하버드대를 포함한 여러 대학이 공산주의자를 교수진에서 배제한다는 성명을 발표합니다.1952년 대선. 전쟁 영웅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공화당 후보가 당선됩니다. 무려 20년 만에 공화당이 백악관을 차지하게 된 거죠. 유권자들은 공산주의와 맞서 싸울 수 있을 만한 인물을 원했습니다.공화당의 분열과 매카시의 자멸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3년 취임 뒤 반공과 안보를 외쳤습니다. 하지만 다른 정책에 있어서는 매카시로 대표되는 공화당 강경 우파와 차이가 컸죠. 아이젠하워는 ‘큰 연방정부’라는 뉴딜정책의 원칙을 이어갔습니다. 사회보장 제도를 확대하고, 국가 고속도로 시스템을 구축하고, 공화당의 예산 삭감 시도를 막는 정책을 펼쳤죠.그는 진보 정책에 대한 강경 우파의 뿌리 깊은 반감엔 별 관심 없었습니다. 오히려 근거 없는 음모론만 늘어놓는 매카시 같은 부류를 혐오했죠. 공화당의 분열이 시작됐습니다.무엇보다 2~3년 사이에 세상은 크게 안정됐습니다. 스탈린은 1953년 3월 사망했고, 한국전쟁은 그해 7월 휴전협정을 체결했죠. 미국 경제는 전후 호황을 누리고 있었습니다.그러나 정권이 바뀐 뒤에도 매카시와 그 일파는 정부 내 공산주의자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국무부 도서관, 정부 인쇄국 등을 들쑤신 그는 급기야 육군에까지 손을 댑니다. 서류상의 실수를 꼬투리잡아 “공산주의자 승진에 책임 있는 장군들의 지휘권을 박탈하라”고 군을 공격했죠.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격분합니다. 다른 기관은 몰라도 군대를 공격하는 건 참을 수 없었죠. 아이젠하워는 언론 성명에서 군의 실수를 인정하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면서 미국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방법을 사용한다면 스스로 패배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마지막 경고였습니다.1950년 무명의 매카시를 영웅으로 띄운 건 신문이었습니다. 1954년 그를 바닥으로 끌어내린 건 TV 방송이었죠.1954년 3월, CBS 기자 에드워드 머로는 자신의 저녁쇼 ‘See It Now’를 매카시에 대한 폭로로 채웁니다. 매카시가 화내고, 협박하고, 무례하게 구는 모습을 생생히 담아 보여줬죠. 당시 TV는 뉴미디어였고, 이전까지 대부분 사람들은 신문 기사와 연출된 사진으로만 매카시를 접해왔습니다. 하지만 TV에서 본 그의 이미지는 완전히 달랐죠. 헝클어진 차림새로 안절부절못하며 횡설수설하는 진짜 매카시가 보였습니다.이후 8주간 이어진 육군-매카시의 청문회는 187시간 넘게 TV로 생중계됐습니다. 이제 미국인들은 매카시의 실체를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50%였던 매카시에 대한 지지율은 이 청문회 뒤 34%로 떨어졌죠. 그의 인기는 급격히 식었고, 이제 공화당 내부에서도 공격이 이어집니다. 매카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까지 비판하며 발버둥 쳤지만, 그럴수록 공화당 의원들은 그를 외면합니다. 그는 워싱턴에서 영향력을 잃었고요. 1957년 급성 간부전으로 사망합니다.1955년 6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백악관 회의에서 이런 유명한 농담을 남깁니다. “매카시즘은 이제 매카시워즘이다(McCarthyism is now McCarthywasm).”1956년 대선에선 더 이상 ‘국내 공산주의’가 쟁점이 아니었습니다. 1957년 6월 대법원은 일련의 공산주의자에 대한 유죄판결을 뒤집고 ‘행동이 아닌 단순한 신념만으로 처벌할 수 없다’고 판결했죠. 매카시즘의 책임은 매카시라는 선동가에 돌려야 할까요. 매카시에게 일격을 날렸던 그 역사적 방송에서 에드워드 머로는 “매카시의 주요 업적은 대중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죠. “그것은 누구의 잘못일까요? 사실 그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는 이러한 공포 상황을 만든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이용했을 뿐입니다. 카시우스가 옳았습니다. ‘친애하는 브루투스, 잘못은 우리의 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머로가 인용한 셰익스피어의 문장대로, 매카시즘은 미국인 마음에 스며든 두려움과 퇴행적인 향수의 결합으로 탄생했습니다. 매카시는 이를 이용하려던 많은 정치인 중 가장 성공적인 인물이었죠. 언론은 그의 보조 역할을 했고요. 75년이 지난 지금, 미국 사회는 그때와 정말 다를 수 있을까요. By.딥다이브(매카시즘 관련 기록과 해석은 뉴욕타임스 기자 클레이 라이슨이 올해 출간한 책 ‘적색 공포: 블랙리스트, 매카시즘, 그리고 현대 미국 건설(Red Scare: Blacklists, McCarthyism, and the Making of Modern America)’을 주로 참조했습니다.)*이 기사는 9월 1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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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호사 사회 미국 vs 엔지니어 국가 중국, 누가 이길까? [딥다이브]

    미국·중국의 패권 경쟁. 아마 2025년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일 겁니다. 최근 이를 주제로 하는 책 한 권이 출간돼 미국에서 관심을 끌고 있는데요. 제목은 ‘브레이크넥: 미래를 설계하려는 중국의 도전(Breakneck: China‘s Quest to Engineer the Future)’. 저자는 중국계 캐나다인인 단 왕(Dan Wang) 스탠퍼드대 후버역사연구소 연구원이죠.그가 말하는 ‘변호사 사회’ 미국과 ‘엔지니어링 국가’ 중국의 극적인 대비는 꽤 흥미진진합니다. 변호사와 엔지니어가 맞붙으면 과연 누가 이길까요? 단 왕은 그 답까지 설득력 있게 제시합니다. 책 내용을 제 나름대로 요약해 봤습니다(구체적 문장 표현과 순서는 책과 다르다는 점 이해해 주세요). 그럼 ‘브레이크넥(위험할 정도로 빠르다는 뜻)’의 속도로 가보시죠.*이 기사는 9월 1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요약 1: 변호사 사회 vs. 엔지니어 국가현대 중국은 엔지니어가 통치합니다. 중국 공산당 최고위층은 공학 전공자들로 채워졌죠. 후진타오 전 주석은 수력공학을, 시진핑 현 주석은 화학공학을 전공했습니다. 2022년 시작된 세 번째 임기에서 시진핑은 정치국을 항공우주·방위산업 출신 공학자들로 채웠습니다. 엔지니어들은 무엇을 좋아할까요? 바로 건설이죠. 미국의 두배에 달하는 고속도로, 일본의 20배인 고속철도망, 전 세계 다른 나라를 모두 합친 것과 같은 규모의 태양광·풍력 발전. 지난 40년간 중국은 끊임없이 건설을 이어왔습니다.반면 미국은 변호사의, 변호사에 의한, 변호사를 위한 정부입니다. 지난 10명의 대통령 중 5명이 로스쿨에 다녔고요. 미국 하원의원의 31%, 상원의 47%가 법학 학위를 가지고 있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경제학을 전공했다고요? 네, 하지만 JD 밴스 부통령은 로스쿨 출신이죠.미국 자체가 변호사 사회입니다. 미국엔 인구 10만 명당 400명의 변호사가 있죠(참고로 한국은 77명). 그리고 변호사들(특히 미국의 변호사들)은 모든 것을 막는 게 특기입니다. 절차에 집착하고, 규칙과 심사를 강화하고, 소송을 걸죠.엔지니어링 국가와 변호사 사회의 차이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게 고속철도 건설입니다. 2008년 캘리포니아 유권자들은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를 잇는 고속철도 건설안을 승인했습니다. 같은 해 중국은 베이징-상하이 고속철도 노선 건설을 시작했습니다.3년 뒤인 2011년, 중국은 360억 달러 공사비를 들여 베이징-상하이 노선(1318㎞)을 개통했습니다. 캘리포니아는? 17년이 지난 현재까지 중간 구간 275㎞만 건설됐을 뿐입니다. 총공사비 추산액은 1270억 달러로 불어났죠. 왜? 정치인들 요구로 정차역을 추가하면서, 산맥을 통과하는 구불구불한 노선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미국 다른 곳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하철역, 버스 정류장, 공중화장실 등. 모든 게 완공까지 너무 오래 걸리고 예산을 초과합니다. 미국인들은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에 대한 관심을 잃었고, 웬만해선 물리적 풍경이 크게 바뀌는 일이 없죠. 이와 대조적으로 중국은 구이저우성처럼 가난한 외딴 지역조차 최신식 인프라로 가득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상당한 예산 낭비와 부채를 초래했지만요.중국은 너무 많이 건설해서 문제이고, 미국은 너무 안 지어서 문제입니다. 왜 미국에도 건설이 필요할까요. 풍부한 ‘물리적 역동성’이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고속도로, 편리한 대중교통, 풍부한 주택은 그 자체로 사회 불평등을 줄일 뿐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주민들에게 ‘점점 살기가 좋아지고 있어’라는 희망을 심어주죠. 1960년대 이후 미국이 건설을 멈추면서 잃어버린 게 바로 그 낙관주의입니다.중국 공산당 선전기관은 2023년 “미래에 중국 경제가 어떻게 발전하든 중국은 항상 개발도상국(developing country)일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미국도 현상 유지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개발도상국’으로 자랑스럽게 선언할 수 있을까요. 요약 2: 과학자와 제조 기술자의 차이‘중국은 남의 기술을 모방하고 훔칠 뿐이다. 거기엔 혁신이 없다.’중국의 부상을 두고 한때 미국에선 이런 평가가 파다했습니다. 하지만 ‘하드웨어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선전에 가본다면 얘기가 달라질 겁니다. 창의적인 하드웨어 엔지니어들과 전자제품 조립에 능한 수백만 명 노동력이 조합돼 혁신적인 전자 제품을 쏟아내죠.선전을 세계적인 전자제품 생산 허브로 탈바꿈시킨 주인공은 사실 애플입니다. 미국 기업은 1990년대부터 제조시설을 중국으로 이전시키기 바빴고, 그 대표주자가 애플이니까요. 1993년 조지 부시의 수석 경제고문이던 마이클 보스킨(스탠퍼드대 경제학 교수)은 “컴퓨터 칩과 감자칩, 뭐가 다르지?”라고 농담했습니다. 당시 미국 엘리트들은 제조업을 잃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죠. 경제학자, 경영자, 월가는 노조의 해외 이전 반대를 합리성 없는 감상론으로 치부했습니다.미국인들은 NASA나 대학연구실 과학자들에게 혁신을 기대합니다. 세계 최초의 태양전지, 세계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같은 게 혁신이라고 보죠. 하지만 중국에선 기술혁신이 공장 현장에서 시작됩니다. 연구실이 아닌 ‘엔지니어링 기술 생태계’가 혁신을 만들어내고 또 대량생산까지 해내죠.그 대표 사례가 태양광 산업입니다. 미국 벨 연구소는 세계 최초의 태양전지를 발명했고, 독일 기업이 태양광 발전 장비를 생산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은 2010년대 중반쯤 태양광 가치사슬 전체를 제조하는 방법을 모두 터득했고, 이후 10년 동안 이 산업에 엄청난 효율 향상과 가격 하락을 이끌어왔죠. 인텔의 전설적인 전 CEO 앤디 그로브 말대로 미국이 “신화적인 창조의 순간”보다 제품의 “확장”에 집중했다면, 스토리는 달라졌을지 모릅니다.미국 제조업체의 해외 이전은 제조 기술과 지식의 영구적인 손실을 의미합니다. 미국 국가핵안보국은 1980년대에 제조됐던 핵탄두용 기밀 물질 ‘포그뱅크(Fogbank)’의 생산방법을 몰라서(생산시설 폐쇄, 직원 모두 은퇴), 2008년 6900만 달러를 들여 다시 만들어야 했습니다. 실리콘 밸리는 기술의 ‘발명’에 집착하지만, 실제로는 기술은 ‘사람’과 ‘공정 지식’에 가깝습니다.그래도 미국엔 소프트웨어, 특히 인공지능(AI) 기술이 있다고요? 미국이 AI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점은 오히려 우려됩니다. 알고리즘만으로는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으니까요. 실제로 싸우려면 드론이나 군수품이 필요하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전투용으로 사용되는 중국 DJI 드론을 보세요. 드론·스마트폰·배터리 생산에서의 중국의 장악력은 미국이 갖지 못한 것입니다.이제 미국은 자신들의 기술 역량에 대해 좀 더 겸손해야 합니다. 중국을 배척할 게 아니라 중국을 연구할 가치 있는 경쟁자로 대해야만 새로운 전략을 더 빨리 개발할 수 있습니다. 미시간 같은 주에 중국 전기차·배터리 기업이 공장을 짓도록 허용하면서 기술을 전수하게 하면 어떨까요? 마치 중국 정부가 2018년 테슬라에 상하이 기가팩토리 설립을 허용하면서 중국 전기차 시장의 경쟁을 촉진하는 ‘메기 효과’를 거둔 것처럼 말이죠.요약 3: 그래도 중국이 앞지를 수 없는 이유변호사 대 엔지니어, 연구실 과학자 대 공장 기술자, 소프트웨어 대 하드웨어. 요약하자면 미국과 중국의 대결 구도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여기까지만 보고 ‘그럼 결국 중국이 승리한다는 이야기인가’라고 하실 수 있는데요. 아닙니다. 저자는 “중국이 강대국으로서 미국을 의미 있게 앞지를 수 없다”고 강조하죠.왜냐고요? ‘엔지니어링 국가’이기에 가지는 한계와 부작용이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엔지니어들이 통치하는 나라는 국민을 욕망을 가진 개개인이 아닌 조종할 수 있는 하나의 집단으로 봅니다.-한번 숫자로 목표를 정하면 그 숫자에 종속된 채 고집스럽게 밀어붙입니다.-정치적 논쟁 따윈 없이 과학(또는 과학이라 믿는 것)을 따릅니다. (하지만 그 근거가 되는 데이터는 엉망입니다.)무려 35년간(1980~2015년) 이어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한 자녀 정책이 그 극단적 부작용을 보여주죠. 덩샤오핑의 한 자녀 정책 도입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건 미사일 과학자 쑹젠의 보고서였습니다. 이대로 가면 당시 10억명에 육박한 중국 인구가 2050년엔 30억명을 넘을 텐데, 중국이 감당할 만한 최적 인구는 7억명에 불과하단 연구 결과였는데요. 인구를 마치 미사일 궤적처럼 통제할 수 있다는 기계적 사고는 중국 지도부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제 와서 보면 허튼소리에 불과했지만요. 그리고 이 무식한 정책은 중국에 돌이킬 수 없는 해를 끼친 뒤에야 사라졌습니다.2020~2022년 이어진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도 대표적인 엔지니어적 정책의 실패 사례이죠. ‘제로’라는 숫자에 집착하느라, 이동 통제는 점점 극단적으로 변해갔고요. 결국 상하이시를 8주간 봉쇄하는 말도 안 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결국 “공산당 타도, 시진핑 퇴진!”이라는 구호가 시위대에서 터져 나왔죠.헝다 사태로 시작된 중국의 부동산 거품 붕괴, 앤트그룹 IPO 무산을 포함한 빅테크에 대한 규제 폭풍 등. 중국 정부가 이상하게 스스로를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짓을 하는 것 역시 이런 경직된 엔지니어적 사고방식의 영향입니다. 일단 목표를 잡으면, 토론 따윈 없이 앞뒤 재지 않고 돌진하곤 하죠. 그게 완전히 틀렸다는 게 증명될 때까지.무엇보다 중국의 가장 큰 약점은 중국 공산당이 국민을 불신하고 두려워한다는 겁니다. 창의적인 에너지가 분출하는 것, 다원주의가 꽃피우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죠.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미국은 훨씬 더 희망이 있습니다. 중국 지도부는 미국의 다원주의를 끝끝내 수용하지 않겠지만, 미국은 (어렵긴 하지만) 중국의 건설과 제조 역량을 어느 정도는 배울 수도 있으니까요. 만약 미국이 건설을 위해 기꺼이 어려운 선택도 하겠다는 ‘절박감’을 가질 수만 있다면 말이죠.여기까지가 ‘브레이크넥: 미래를 설계하려는 중국의 도전’의 주요 내용입니다. 어떻게 보셨나요? 해외 언론은 ‘변호사 대 엔지니어’라는 명쾌하고 참신한 설명 자체에 열광하는 분위기입니다. 마침 중국 기술의 부상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던 시점이라 반응이 더 큰데요.‘역시 중국은 위협적이야. 미국이 이제라도 달라져야 해!’라는 이런 식의 반응. 왠지 기시감이 듭니다. 1985년 뉴욕타임스엔 아시아 전문기자 시어도어 화이트가 쓴 ‘일본으로부터의 위험(The Danger from Japan)’이란 장문의 기사가 실렸죠. 이제 미국은 중국을 마치 40년 전 일본처럼 다루고 있습니다.이 책에 한국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문화적 영향력이 취약한 중국과 달리 K팝과 오징어게임을 만들 수 있는 나라라는 언급 정도이죠.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생각하게 됩니다. 한국은 과연 어떤 나라로 규정할 수 있을까요.한국은 제조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산업구조라는 점에선 엔지니어적 성격이 있긴 한데요. 정치권엔 법조인 비중이 갈수록 높아지고, 최근 6명의 대통령 중 4명이 법조인 출신이죠. 미국처럼 활력을 잃은 ‘변호사 국가’의 수렁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경계심을 가져야 하겠는데요. 결국 성장에 대한 절박감을 놓지 않는 것, 그게 우리에게도 지금 필요해보입니다. By. 딥다이브*이 기사는 9월 1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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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틱톡 영상이 전국 시위로…왜 인도네시아는 분노했나[딥다이브]

    건물 방화, 정치인 자택 약탈, 경찰의 강경 진압과 시위 참여자 10명 사망까지. 거세게 일었던 인도네시아 시위 사태가 이번 주엔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습니다. 수습책이 논의되는 가운데 이대로 진정될지, 다시 점화할진 두고 봐야 하는데요.국회의원 특혜에 대한 분노가 촉발한 시위 사태. 그 밑바탕엔 청년 실업과 중산층 붕괴로 먹고살기 팍팍해진 경제적 배경이 자리 잡고 있죠. 인도네시아 반정부 시위 사태가 일어난 진짜 이유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9월 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의원 일당이 근로자 평균 월급“대박! 국회의원 급여 하루 300만 루피아(25만원)로 인상”지난 8월 14일, 틱톡에 이런 자막이 붙은 영상이 올라온 게 시작이었습니다. SNS를 통해 이 소문은 빠르게 퍼졌고요. 이어 8월 15일 연례회의 직후 흥겹게 춤을 춘 국회의원들 모습과 이 내용이 결합됩니다. ‘급여 인상에 신이 나서 춤까지 춘 무개념 의원들’ 영상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는데요.누가 봐도 열받을 만한 이 영상 내용에 대해 의회 측은 해명에 나섭니다. 일단 연례회의가 끝나면 음악공연과 함께 의원들이 춤을 추는 게 일종의 관례(?)라고 하고요. 국회의원 기본급을 올린 건 아니고 2024년 10월부터 1년간 주택수당으로 월 5000만 루피아(422만원)를 주는 거란 설명이었죠. 기존 쓰던 의원 관저가 너무 낡아서, 관저를 대신할 집을 구할 수당을 줬다는 건데요. 이건 지난해 이미 언론보도가 나온 적 있는 사안입니다.해명은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어찌 됐든 의원들이 월간 총 1억 루피아(850만원) 수준의 엄청난 돈을 받는 건 사실이니까요. 중앙통계청에 따르면 이 나라 근로자 평균 월급은 284만 루피아(24만원). 국회의원 하루 일당이 근로자 평균 월급보다도 많습니다.사회 전반에 빈부격차로 인한 좌절감이 마른 장작더미처럼 쌓여있던 상황. 여기에 국회의원 일당 300만 루피아 영상이 불을 붙였고요. 일부 국회의원의 부적절한 주택수당 옹호 발언(‘자카르타는 교통난이 심해서 의사당 근처에 집을 구해야만 한다’)까지 기름을 끼얹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분노가 들끓으면서 자카르타를 포함한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죠.경찰은 물대포와 최루탄을 쏘며 강하게 대응했고요. 8월 28일 시위 진압 도중 경찰 장갑차에 오토바이 배달 기사가 깔려 숨지는 사건까지 벌어지고 말았는데요. 분노한 시위대가 정치인과 장관 집을 약탈하고 건물과 차량에 불을 지르는 폭력 사태로 번지면서, 8월 마지막주 인도네시아가 극심한 혼란에 빠졌습니다.결국 8월 31일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열고 논란이 된 주택수당을 폐지한다고 발표했고요. 시민단체와 학생연합, 각계 원로들이 나서서 사태를 수습할 방안에 대한 논의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청년 실업과 중산층 붕괴살기 좋은 태평성대라면 이런 시위가 벌어질 리 없죠. 아무리 자극적인 틱톡 영상이 불씨가 됐다지만, 이 정도로 분노가 폭발했다는 건 그만큼 경제적으로 어려움으로 인한 불만이 쌓여왔단 뜻인데요.지표상으로 인도네시아 경제는 잘 나갑니다. 프라보워 대통령은 8월 15일 국정연설에서 집권 10개월 차 경제 성과를 자랑스럽게 과시했죠. 경제성장률 높아졌고(2025년 1분기 4.87%→2분기 5.12%), 실업률 하락했고(2024년 2월 4.82%→2025년 2월 4.76%), 빈곤율이 역대 최저이며(8.47%) 물가상승률은 낮은 수준이라고요(7월 연 2.37%).하지만 그가 언급하지 않은 중요한 통계가 있죠. 16% 넘는 청년 실업률, 5년 연속 줄어든 중산층 인구(2019년 5733만명→2024년 4785만명)입니다. GDP는 수년간 꾸준히 연 5%대 양호한 성장률을 기록했는데요. 그런데도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고, 무려 948만명이나 중산층에서 탈락한 겁니다.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전문가들은 인도네시아가 너무 일찍 ‘탈공업화의 함정’에 빠졌다고 지적합니다. 선진국 문턱에 가보기도 전에 제조업이 이미 쇠퇴해 버린 거죠. 일자리를 대량 제공해서 중산층을 키워줄 만한 노동 집약적 제조업이 베트남·말레이시아·태국 같은 이웃 나라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GDP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2년 최고치인 32%에서 이제 19%로 떨어졌죠.이런 탈공업화는 지난 10년간 전임자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펼쳐온 성장전략과 맞물려 있습니다. 자원 부국인 인도네시아는 마진이 박하고 경쟁이 치열한 제조업 대신 돈 되는 원자재 채굴 사업에 집중해 왔죠. 대표적인 게 니켈 광산인데요. 전기차 시대가 열리면서 배터리 핵심 소재인 니켈 가격이 한때 급등했고요. 인도네시아 니켈 광산에 투자하려는 해외 투자자들이 줄을 섰었죠. 조코 위도도 전 대통령은 규제를 풀어 해외 투자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했고요. 덕분에 니켈 채굴과 가공 산업은 지난 몇 년간 경제 호황을 이끄는 원동력이었습니다.하지만 니켈 산업이 아무리 성장해도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게 있으니. 바로 일자리입니다. 자본 집약적인 원자재 산업 특성상 제조업 공장처럼 한꺼번에 많은 인력을 채용하진 않거든요. 매년 실업계 고등학교 졸업자만 160만명씩 쏟아져 나오는데, 이들이 갈만한 일자리가 너무 부족합니다.제조업이 활성화됐던 과거엔 섬유공장 같은 노동집약적 산업이 노동자를 대거 채용했는데요. 이젠 섬유공장마저 줄줄이 문을 닫으면서, 신규 채용이 없는 건 물론이고 기존 중년 직원들마저 해고되는 실정입니다. 이렇게 해고된 이들은 생계를 위해 농사를 짓거나 노점상·일용직 일을 하게 됩니다. 여전히 일을 하니까 실업률 통계엔 영향이 없지만, 대신 소득이 줄면서 중산층에선 탈락하게 되죠. 이 나라 중산층 인구가 갈수록 줄어드는 이유입니다.게다가 전기차 붐을 타고 계속 오를 것만 같았던 니켈 가격마저 2022년 정점을 찍고 추락합니다. 공급 과잉으로 생존을 걱정할 지경이 된 니켈 제련소들이 올해 들어 줄줄이 가동을 중단 중인데요. ‘니켈의 꿈’마저 깨지면서 탈공업화의 늪에서 빠져나가긴 더욱 어려워지고 말았습니다.모순 가득한 긴축재정의 부작용어찌 보면 지난해 10월 집권한 프라보워 대통령은 좀 운이 없습니다. 니켈 중심 성장 정책을 펼친 건 전임자인데, 그로 인해 누적된 부작용은 이제야 터져 나오니까요. 하지만 전임자 탓만 할 건 아닙니다. 수많은 전문가의 우려 속에서도 무리한 포퓰리즘 정책을 강행한 장본인이니까요.8000만명 넘는 학생을 대상으로 한 세계 최대 규모의 무상급식 정책은 소개해 드린 적 있죠().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 이 사업을 위해 다른 예산이 뭉텅이로 깎여나갔다는 이야기도 전해드렸고요(). 한편으론 전례 없는 예산(약 40조원)이 투입되는 무상급식 정책을 펼치면서, 다른 한편으론 무지막지한 긴축 재정(약 27조원 예산 감축)으로 허리띠를 졸라매는 모순적인 상황인데요.그래도 한동안은 여론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6월까지도 대통령 지지율 81%를 기록했을 정도로 분위기는 좋았죠.분위기가 반전된 건 지난 7월 재산세 고지서가 발송되면서부터입니다. 지역에 따라 토지와 건물에 붙는 재산세가 5배, 많게는 10배까지도 불어난 겁니다. 납세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는데요.이게 무슨 일인가 알아보니, 긴축재정의 나비효과였습니다. 중앙정부가 예산 삭감을 하면서 지방자치단체에 주던 예산을 확 깎았고요. 갑자기 돈이 모자라게 된 지자체가 이를 메우려고 재산세율을 줄줄이 올린 겁니다. 재산세율은 각 지자체가 알아서 정할 수 있으니까요. 일부 지방 정부는 세율을 10배 넘게도 올렸습니다.동시에 세금을 매기는 기준이 되는 공시지가 현실화에도 나섭니다. 만약 세율이 배로 뛰었는데 공시지가까지 2배가 되면, 납세자가 내야 할 세금은 4배로 불어나게 되죠. 바로 이런 상황이 곳곳에서 펼쳐집니다.안 그래도 먹고 살기 팍팍한 데, 세금을 갑자기 4~5배나 더 뜯어간다고? 8월 초부터 곳곳에서 분노한 납세자들의 시위가 벌어집니다. 시위는 지역주민의 호응을 받으며 갈수록 세를 키웠고요. 일부 지자체가 항복(세금 인상 보류)을 선언한 뒤에도 ‘지자체장 퇴진’으로 구호를 바뀐 채 이어졌죠.그리고 이렇게 저항의 물결이 커져가던 시점에 국회의원 특혜 논란이 터져 나왔습니다. 지방에서 산발적으로 일렁이던 분노의 파도가 SNS를 통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요. 단숨에 쓰나미급이 되어 자카르타를 덮쳤죠.결국 국민에겐 허리띠를 졸라매는 긴축을 강요하면서 국회의원 수당 같은 예산 낭비는 멈추지 않은 모순적인 재정 정책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인도네시아 국제전략연구소(CSIC) 데니 프라이완 연구원은 이번 시위 사태 원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재정적 정당성의 위기로 인해 (정부에 대한) 신뢰 기반이 근본적으로 무너졌습니다. 국가 지출 방향은 불공평하고 불투명합니다. 예산은 군인과 경찰을 위한 적절한 장비를 사는 데 쓰일까요, 아니면 국민을 공격하는 도구로 쓰이나요?”이번 시위 사태로 취임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프라보워 대통령은 정치적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까지 시위대의 타깃은 국회의원과 경찰에 머물러 있단 거죠. 이제 대통령이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관심이 쏠리는데요.연평균 8%라는 꿈의 경제성장률을 약속하며 집권한 프라보워 대통령. 이제라도 일자리 창출과 경제성장으로 경제정책의 대전환을 이룰 수 있을까요. 최근 인도네시아 SNS에서 퍼지는 중인 해시태그, ‘리셋 인도네시아’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By.딥다이브프라보워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춤추는 틱톡 영상 덕을 톡톡히 봤죠. 틱톡 덕분에 엘리트 장군 출신인 그가 ‘친근한 옆집 아저씨’로 이미지 세탁에 성공할 수 있었는데요. 이젠 그 틱톡 영상이 반정부 여론 확산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여론 형성에서 SNS가 갖는 힘을 느낄 수 있군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8월 말 이어진 폭력 시위와 강경 진압, 사망사고로 혼란에 빠졌던 인도네시아. 국회의원 급여가 인상됐다는 루머가 SNS를 통해 퍼진 게 시작이었습니다.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한 좌절감에 불이 붙으면서 분노가 폭발했죠.-정부는 경제가 잘 나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 이면엔 높은 청년 실업률과 중산층 붕괴라는 현실이 있죠. 제조업에서 원자재 산업으로 포트폴리오를 바꾸면서 일자리 기반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여기에 프라보워표 무상급식 정책의 여파가 더해졌습니다. 예산이 확 깎이는 긴축재정 탓에 각 지방정부가 일제히 재산세를 올리면서 납세자들이 충격을 받았죠. 8월 초 시작된 재산세 항의 시위에 국회의원 특혜론까지 겹치면서 걷잡을 수 없게 됐습니다. 재정정책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게 진짜 원인입니다.*이 기사는 9월 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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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한애란]‘중국판 엔비디아’의 질주가 심상찮다

    의외의 소식이었다. 8월 12일 중국 정부가 자국 기업에 엔비디아 인공지능(AI) 반도체 ‘H20’ 사용 금지를 통보했다. 4월 H20의 중국 수출을 막았던 미국 정부가 규제를 풀어준 지 한 달 된 시점이었다. AI 훈련을 위해선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 확보가 필수인 상황. 수출 재개를 반겨야 할 중국 정부가 오히려 이를 막고 나선 게 이상했다. 중국 정부의 의도는 이거였다. 엔비디아 대신 중국산 AI 반도체를 써라. 8월 말 중국 기업의 깜짝 발표가 줄줄이 나왔다. 세계를 놀라게 했던 AI 스타트업 딥시크가 화웨이 칩 사용을 결정했다. 알리바바는 AI 추론 작업에 특화된 신형 칩을 자체 개발했다. AI 반도체 제조사 캠브리콘 테크놀로지스는 1년 전보다 4300% 증가한 상반기 매출과 함께 설립 뒤 첫 흑자 전환을 발표했다.미국 수출 통제의 예기치 못한 효과 중국이 AI 전용 반도체 제조에 나선 지는 오래됐다. 중국 국영기업 투자를 받은 캠브리콘이 세계 첫 상업용 AI 칩을 선보인 게 2017년이었다. 하지만 좀처럼 존재감을 발휘하진 못했다. 엔비디아라는 탁월한 기업이 시장을 독식했기 때문이다. 중국 기술기업도 성능 면에서 가장 뛰어난 엔비디아 칩만 쓰려고 했다. 중국산 칩을 쓰려면 그에 맞춰 소프트웨어를 새로 개발해야 하는 점도 부담이었다. 엔비디아의 공고한 성은 웬만해선 깨지지 않을 것 같았다. ‘중국판 엔비디아’로 불린 캠브리콘을 포함한 중국 AI 반도체 제조사들이 막대한 연구개발비를 쏟아부었지만 소용없었다. 이대로 적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사라질 운명처럼 보였다. 그런데 동아줄이 내려왔다. 미국의 AI 반도체 수출 규제였다. 엔비디아 A100, H100 같은 첨단 AI 칩의 중국 수출이 2023년 9월 완전히 막혔다. 중국 기술기업의 각성이 시작됐다. 언제 어디로 번질지 모르는 미국의 반도체 수출 통제. 이대로 계속 엔비디아에만 의존하면 위험할 수 있었다. 2024년 틱톡 모회사 바이트댄스가 캠브리콘의 최신 AI 칩을 선택했다. 엔비디아 GPU만 고집하던 바이트댄스가 중국산 칩을 병행해서 쓰기로 전략을 바꾼 것이다. 이어 화웨이·알리바바 같은 대기업도 잇달아 첨단 AI 칩을 내놓았다. 미국의 수출 규제로 생긴 공백 덕분에 중국산 AI 반도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겼다. ‘중국이 중국을 산다’ 전략 이제 중국 정부까지 노골적으로 중국산 AI 칩 밀어주기에 나섰다. 주식시장은 환호했다. 8월 들어 캠브리콘 주가가 수직 상승하며 시가총액이 115조 원(5878억 위안)으로 불어났다. 상반기 매출이 SK하이닉스의 1.4%밖에 안 되는 기업인데 시총은 58%나 된다. 물론 중국의 AI 반도체 성능은 엔비디아 첨단 칩엔 여전히 못 미친다. 런정페이(任正非) 화웨이 회장도 “우리 반도체는 여전히 미국보다 한 세대 뒤처져 있다”고 말한다. 가격은 더 저렴하지만, 치열한 AI 기술 경쟁을 벌이는 기술기업으로선 그리 매력적인 제품은 아니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미중 갈등이 중국 기업의 선택지를 줄인다. 중국 정부의 의도대로 ‘중국이 중국을 사는’ 전략이 AI 반도체 시장에서도 작동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다른 제조업-가전과 로봇청소기, 드론, 전기차도 그렇게 컸다. 기술이 좀 부족해도, 세계 수준에 못 미쳐도 제품을 사줄 내수시장이 초기부터 확보돼 있었다. 일단 제품이 팔리면 기업은 그 돈을 연구개발에 쏟아부어 기술력을 한층 끌어올렸다. 중국 특유의 자급자족 선순환 사이클이 갖는 힘이다. 무어 스레드, 비렌 테크놀로지, 메타 엑스, 엔플레임 등 중국엔 아직 상장도 되지 않은 AI 제조 스타트업이 여럿이다. 진짜 ‘중국판 엔비디아’로 올라서기 위한 중국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질 것이다. 누가 승리자가 될진 알 수 없지만 벌써부터 조금 두렵다. 한애란 경제부 기자 haru@donga.com}

    • 2025-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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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판 엔비디아? 망해가던 캠브리콘의 반전 드라마 [딥다이브]

    요즘 중국 주식시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종목이 있죠. 바로 캠브리콘 테크놀로지스. ‘중국판 엔비디아’로 불리는 이 기업 주가가 17일 만에 130%나 뛰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데요.불과 2년 전만 해도 캠브리콘은 ‘적자왕’이란 조롱과 함께 망해가는 기업 취급을 받았거든요. 이런 극적인 반전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오늘은 ‘딥시크 쇼크’의 하드웨어 버전을 꿈꾸는 캠브리콘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8월 2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이 정도 매출에 시총 129조원?한 달 주가 상승률 133%, 1년 전과 비교하면 521% 뛰었습니다(8월 28일 종가 기준). 중국명 ‘한우지(寒武纪)’인 캠브리콘 테크놀로지스. 설립한 지 9년 된 AI 반도체 전문 설계 기업(팹리스) 시가총액이 무려 129조원(6643억 위안)으로 불어났는데요.하지만 반도체 좀 아시는 분도 캠브리콘 이름은 생소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올해 상반기 매출이 5594억원(28억8000만 위안), 그러니까 SK하이닉스(약 40조원)와 비교하면 1.4%에 불과한 작은 기업이거든요.매출은 SK하이닉스의 1.4%인데, 시가총액은 68%나 된다? 누가 봐도 엄청난 고평가 상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골드만삭스는 최근 캠브리콘 목표주가를 1223위안에서 1835위안으로 대폭 올려잡았죠. 얼마든지 더 갈 수 있다고 보는 건데요.‘도대체 왜?’라는 질문에 답하기 전에 캠브리콘의 과거를 먼저 보겠습니다.화려한 출발, 초라했던 성적표알파고와 이세돌의 세기의 대결이 펼쳐졌던 2016년 3월. 중국과학원(CAS) 교수였던 1985년생 첸톈스(陈天石)는 AI 전용 반도체 칩을 설계하는 팹리스 기업 캠브리콘을 설립합니다. 자신과 형(첸윈지(陈雲基) 현 중국과학원 교수)이 공동으로 논문을 냈던 딥러닝 프로세서를 상용화하기 위해서였죠. 물론 중국 국영기업의 투자가 뒷받침됐기에 가능했습니다. 참고로 캠브리콘이란 이름은 5억4200만년 전 다양한 동물이 갑자기 급증했던 ‘캄브리아기 대폭발’에서 따왔죠.이어 캠브리콘은 세계 최초의 상업용 AI 칩 ‘캠브리콘-1A’를 출시하며 주목받습니다. 당시에도 이미 엔비디아 GPU가 AI 훈련에 많이 쓰이곤 있었지만, 아직 엔비디아가 본격적으로 AI 전용 GPU를 선보이기(2017년 12월) 전이었죠.16세에 중국과학기술대에 입학한 ‘천재’ 과학자가 이끌고, 중국 정부가 밀어주는 AI 반도체 분야 선도 기업. 캠브리콘은 스토리텔링 면에서 완벽한 스타트업이었습니다. 알리바바·화웨이 같은 대기업이 고객사가 됐고, 캠브리콘에 투자하겠다는 투자사가 줄을 서면서 기업가치가 급등했고요. 2020년 7월엔 ‘중국판 나스닥’인 상하이거래소의 과창판(科創板, 커촹반·스타 마켓)에 화려하게 데뷔합니다. 상장하자마자 주가는 공모가(64위안)의 4배인 250위안을 찍었죠.미국 수출통제의 예기치 못한 효과그러나 환호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기본적으로 캠브리콘이 엄청난 연구개발비를 잡아먹는 적자투성이 기업이기 때문이었죠. 이 기업은 설립 이후 지난해까지 내내 막대한 적자를 기록했는데요. 지난해 말 기준 누적 적자만 약 50억 위안(9700억원)에 달했습니다.게다가 2022년 말 미국의 상무부의 ‘거래제한기업 명단(Entity List)’에 캠브리콘이 들어가면서 위기를 맞습니다. 이로 인해 자율주행 칩 개발 프로젝트는 중단됐고, 직원 수백 명을 해고해야 했죠. 전 세계가 ‘챗GPT 열풍’에 휩싸이기 시작한 2023년 초, 캠브리콘 주가는 54위안으로 바닥을 기었습니다. 공모가에도 한참 못 미친 거죠.상장 전에 투자했던 벤처캐피털들은 2023년 내내 캠브리콘 주식을 전량 팔아치우고 떠나기 바빴습니다. 캠브리콘 주식에 물렸던 개인투자자들은 기관의 먹튀 행렬에 분노했고요. ‘캠브리콘 IPO는 사기다’, ‘스토리텔링에 속았다’라며 여론이 들끓습니다.언론도 싸늘한 시선을 보냈습니다. 캠브리콘이 과연 경쟁력 있는 AI 반도체를 개발할 능력이 있긴 한 건지 의심한 거죠. 계속되는 적자 행진에 시장의 인내심은 바닥나고 있었습니다. 캠브리콘(寒武纪)엔 수익성 없음을 조롱하는 ‘추위의 제왕(寒王)’이란 굴욕적인 별칭이 붙었죠. 당시 첸톈스 CEO는 “나는 2024년 말까지 지분을 하나도 팔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주주 달래기에 나섰지만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그런데 이 암흑기에 캠브리콘을 구할 동아줄이 내려왔으니. 바로 미국 정부의 반도체 수출 규제였습니다. 엔비디아 A100, H100 같은 첨단 AI 칩의 중국 수출이 2023년 9월 완전히 막혔죠. 드디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긴 건데요. 그해 말 캠브리콘은 보란 듯이 한층 업그레이드된 AI 칩 쓰위안(思元) 590을 출시합니다. 총연산성능(TPP, Total Processing Performance) 기준으로 엔비디아 A100 성능의 90% 정도 되는 제품이죠(엔비디아 A100은 TPP 4992, 캠브리콘 쓰위안590은 TPP 4493). 물론 소프트웨어 적응 문제로 인해 실제 성능은 그보다 더 떨어지는 경우가 많지만요.저렴한 가격으로 가성비까지 갖춘 캠브리콘의 고성능 AI 칩은 중국 IT 기업의 관심을 끌기 시작합니다. 어디로 번질지 모르는 미국의 반도체 수출 규제. 그 충격을 최소화하려면 엔비디아에만 마냥 의존할 순 없다는 각성이 시작된 거죠. 특히 대대적인 AI 인프라 투자에 나선 틱톡의 모회사 바이트댄스의 선택을 받았는데요. 업계 추정에 따르면 바이트댄스는 2024년 쓰위안 590을 2만 개 넘게 구입하며 캠브리콘의 최대 고객사로 등극했습니다. 2024년 4분기, 캠브리콘 분기 순이익이 설립 이후 처음으로 흑자로 돌아서며, 새로운 시대를 예고합니다.2025년, 캠브리콘의 잠재력이 폭발하기 시작합니다. 상반기 매출 성장률 무려 4348%(2024년 상반기 126억원→2025년 상반기 5594억원), 순이익은 1000억원 적자에서 2000억원 흑자로 뒤바뀌었습니다. 이제 만년 적자 기업은 간데없고, 매출액 총이익률 36%의 건실한 기업으로 환골탈태했죠.갈수록 태산인 미국의 AI 칩 수출 규제의 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렸습니다. 미국 정부는 올해 4월엔 엔비디아의 저사양 AI 칩인 H20의 중국 수출까지 일시 중단했는데요(7월에 다시 허용). 캠브리콘은 잽싸게 H20보다 가격이 40% 저렴한 쓰위안(思元) 670 칩을 내놓으며 공백을 채웁니다. 지정학적 긴장이 높아질수록 ‘중국산 대체품’의 경쟁력은 커지는 거죠.게다가 최근엔 중국 정부까지 노골적으로 거들고 나섰습니다. 얼마 전 엔비디아의 중국 수출용 칩 H20에 보안 문제가 있다며, 기업들에 구매 중단을 요구한 건데요. ‘엔비디아 대신 중국산 AI 칩을 사라’는 정부 차원의 지시나 다름없죠.이 소식과 함께 캠브리콘 주가가 저세상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합니다. 8월 12일 상한가(20% 상승)를 쳤고요. 이어 딥시크가 중국산 칩에 맞춰 주력 AI 모델 V3를 업그레이드했다고 밝히면서 8월 22일 또 상한가를 기록합니다. 딥시크가 어느 중국 기업 칩을 쓸지 밝히진 않았지만, 캠브리콘이 유력 후보 중 하나라고 알려졌기 때문이었죠. 블룸버그 표현을 빌리자면 “중국이 중국을 사들이는 새로운 전략(A new China-buys-China narrative)”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과열이지만 몰리는 이유그런데 잠깐.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과열된 거 아닌가요. 번스타인 분석에 따르면 2024년 엔비디아의 중국 AI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66%에 달했고요. 캠브리콘은 고작 1%에 그쳤습니다. 화웨이(23%)와 미국 AMD(5%)에 한참 못 미친 건데요. 올해 매출이 급증하곤 있다지만, 그래도 점유율은 잘해야 4% 정도 될 걸로 예상됩니다.캠브리콘이 집중하는 데이터센터 분야로 좁혀보면 중국 시장 점유율은 23% 정도 되는데요. 다만 이 분야는 내로라하는 경쟁자들(화웨이·바이두·알리바바 같은 중국 대기업 포함)이 겨루는 시장입니다. 그렇게 만만하진 않아요. 그럼에도 주식시장이 지금 캠브리콘에 열광할 수밖에 없는 건 ‘유일하게 중국 증시에 상장된 AI 칩 전문기업’이란 희소성 때문이죠. 경쟁 팹리스 기업 하이곤(Hygon, 중국명 하이광) 역시 상장사이지만, CPU(중앙처리장치)를 비롯한 다양한 반도체에 사업이 걸쳐 있고요. 다른 AI 칩 스타트업(쑤이위안(燧原, 엔플레임), 비런(壁仞), 무어 스레드, 무씨(沐曦, 메타X) 등)은 아직 IPO를 준비하는 단계입니다. 참고로 이들 스타트업은 모두 적자상태이기도 하고요.어찌 보면 캠브리콘은 처음부터 AI 칩 설계라는 외길 전략을 택했고요. 다른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AI 칩에만 올인하다 보니, 미국의 수출 통제라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운 좋게 기회를 잡았습니다. 캠브리콘 지분의 28.6%를 가진 창업자 첸톈스 CEO는 이젠 순자산 37조원의 엄청난 부자가 됐는데요. 5년 전 인터뷰에서 그는 “포레스트 검프처럼 계속 달리는 것”이 자신의 사업 방식이라고 설명한 적 있습니다. 우여곡절 많은 이 마라톤 같은 여정의 끝엔 뭐가 있을지 궁금합니다. By.딥다이브요즘 중국 주식시장에서 캠브리콘은 정말 뜨거운 이슈입니다. 특히 캠브리콘 주가가 중국 시가총액 1위인 구이저우마오타이를 뛰어넘었다며(8월 28일 종가 기준 캠브리콘 주당 1587위안, 마오타이 1446위안) 중국 언론이 호들갑인데요. 아시다시피 1주당 가격은 그렇게까지 큰 의미가 없고요. 시가총액 기준으론 여전히 마오타이가 캠브리콘의 3배에 달할 정도로 차이가 크다는 점을 덧붙입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지금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 기술주 중 가장 핫한 종목은 캠브리콘 테크놀로지스입니다. 17일 만에 주가는 133% 급등했고, 시총은 129조원으로 불어났습니다.-2016년 31살의 과학자 첸톈스가 설립한 AI 칩 전문 팹리스 캠브리콘. 그럴듯한 스토리텔링 덕분에 초반부터 주목받았고, 2020년 증시 데뷔까지 성공합니다. 하지만 막대한 연구개발비와 계속된 적자행렬로 시장은 점점 지쳐갔고요. 초기 투자자들까지 떠나면서 시장의 외면을 받았습니다.-암흑기였던 2023년, 미국의 중국에 대한 AI 칩 수출 제한이 시작됩니다. 2023년 말 캠브리콘은 엔비디아 A100의 대체품이 될 만한 새로운 고성능 칩을 출시했고요. 마침 엔비디아 의존도를 줄여야 했던 바이트댄스가 이를 선택하면서 대반전이 시작됩니다.-상반기 매출 증가율 4300%. 캠브리콘은 더 이상 적자기업이 아닙니다. 중국산 AI 칩을 노골적으로 밀어주기 시작한 중국 정부 정책의 가장 큰 수혜기업으로 꼽히고 있죠. 물론 지금의 주가 수준은 너무 과열됐단 지적이 나오지만, 그래도 투자자들은 열광합니다.*이 기사는 8월 2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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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극우 포퓰리즘의 원조 헝가리 오르반, 왕조의 균열이 시작됐다[딥다이브]

    ‘반이민’을 외치는 민족주의적 포퓰리스트. 요즘 유럽에서 급부상 중인 정치세력이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도 맥이 닿아있고요. 그 원조이자 가장 성공한 모델은 바로 이 사람일 겁니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선거 독재. 2010년 집권 후 입법·사법·언론을 모두 장악하며 승승장구해 온 오르반 정권을 일컫는 용어이죠. 지난 네 차례 선거에서 연속으로 압승한 그를 막을 자는 없어 보였는데요. 하지만 그 공고한 성에 금이 가고 있습니다. 2026년 총선이 오르반 시대를 끝낼지 모른다는 관측까지 나오죠. 흔들리는 헝가리 오르반 정권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8월 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망가진 경제를 구하다한때 오르반 총리는 헝가리 경제를 구한 영웅이었습니다. 빅토르 오르반의 피데스당(Fidesz)이 압도적 총선 승리로 집권한 2010년, 헝가리 경제는 금융위기 수렁에 빠져있었죠. 헝가리 민족주의를 앞세운 오르반은 ‘경제 주권론’을 주창합니다. 구제금융을 제공한 IMF의 가혹한 구조조정 요구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비정통적인 경제정책을 펼쳐나갔죠.은행·통신·에너지 등 외국자본이 장악한 기업에 막대한 ‘특별세’를 물려 구멍 난 재정을 채웠고요. 사적연금을 강제로 국유화해 국가 기금을 늘립니다. 동시에 성장을 촉진한다며 소득세 누진세를 없애고 단일세율(현 15%)로 바꾸는가 하면, 대대적인 공공사업을 벌여 일자리를 확충했죠.이런 이단적인 경제정책이라니. 다들 회의적으로 바라봤는데요. 웬걸, 이 ‘오르반노믹스’가 들어맞았습니다. 헝가리 경제는 성장을 회복했고 실업률이 하락했고, 2013년 IMF 체제 조기졸업에 성공했죠. 전 세계의 찬사가 쏟아집니다.그리고 이 초기 시기, 오르반은 제도 개혁에 나섭니다. 장기 집권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 둔 건데요.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는 거대 여당의 힘과 높은 국민 지지율 덕분에 이 과정은 합법적이고 평화롭게 이뤄졌죠.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①사법부 장악= 판·검사 정년을 70세에서 62세로 낮춰 대거 물갈이합니다. 법원행정처장은 의회가 임명하게 바꿔, 의회 영향력을 키웠고요. 헌법재판관 정원은 11명에서 15명으로 늘려, 친정부 성향으로 채웠죠.②선거법 개정=국회의원 정원을 386명에서 199명으로 줄이고, 결선투표가 따로 없는 ‘단일 투표제’를 도입합니다. 거대 정당엔 유리하고 분열된 소수 야당엔 불리하게 제도를 바꾼 거죠. 선거구 역시 여당에 유리하게 조정됩니다.③언론 장악=미디어법을 개정해 증오 조장을 이유로 언론에 거액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듭니다. 언론 규제기관은 친여 성향 인사로 채웠고요. 공영방송사는 통폐합됐고, 직원은 대거 해고 후 물갈이됩니다.힘을 잃은 오르반의 마법왜 헝가리가 ‘선거 독재 국가’로 분류되는지 아시겠나요. 물론 헝가리는 러시아 같은 경찰국가는 아닙니다. 반대파를 가두거나 구타하는 그런 일은 없죠. 그런데도 독재자로 불리는 오르반 총리가 선거에서 계속 승리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국민이 그를 지지했기 때문입니다. 그 원동력이 되어온 건 경제성장, 그리고 복지정책이었죠.오르반은 경제성장을 위해선 제조업을 유치해서 고용을 늘리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헝가리는 2017년 법인세를 무려 절반 이하로 깎아주는(19→9%) 파격적인 정책을 내놨고요. 동시에 각종 보조금까지 퍼주면서 해외 기업, 특히 자동차 산업을 유치에 열을 올립니다. 한국과 중국 배터리 기업들도 헝가리에 공장을 지었죠. 헝가리는 단숨에 유럽 전기차 제조의 허브로 떠올랐고요. 덕분에 고용시장은 노동력 부족을 걱정해야 할 정도가 됩니다(실업률 2010년 11.4%→현재 4.3%).헝가리는 세계에서 가장 관대한 출산장려정책을 펼치는 나라입니다. 이민을 막으면서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해선 출산율을 높이는 게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죠. 신혼부부에 초저금리 주택자금 대출을 해주고, 첫 아이를 낳으면 이자, 둘째를 낳으면 원금 일부, 셋째는 원금 전액을 탕감해 주는 정책. 한때 한국에서도 따라 하잔 얘기가 나왔는데요. 이뿐 아니라, 애가 넷인 여성에겐 아예 평생 소득세(15%)를 면제해 주기도 합니다. 2011년 1.23명으로 떨어졌던 헝가리 출산율은 2020년엔 1.59명까지 올랐습니다.그럼 대단히 성공적인 것 아니냐고요? 한동안은 그런 줄로 알았습니다. 헝가리를 해외기업 유치와 출산율 반등의 모범사례로 많이 꼽았었죠. 그런데 2022년 말, 잘나가던 헝가리 경제가 역성장을 기록하며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고금리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 경제 기류가 달라졌기 때문이죠. 정부가 기업과 가계에 지원금을 쏟아붓는 성장 방식이 한계에 부딪힌 겁니다.늘어난 재정적자, 높아진 국가부채 비율은 통화가치(포린트화)를 끌어내렸고요. 여기에 유가 급등까지 겹치면서 식품 물가가 미친 듯이 뜁니다(2023년 초 무려 연 45% 상승). 오르반 정부는 물가를 잡겠다며 ‘가격 상한제’를 실시했지만, 마트 매대에서 계란과 우유가 사라지는 초유의 상황이 펼쳐졌죠.물가가 이제야 조금 잡히나 싶던 2024년. 이번엔 ‘전기차 캐즘’이 닥칩니다. 헝가리 수출을 떠받치는 자동차 산업이 직격탄을 맞게 됐죠.그리고 놀라운 사실. 그렇게 돈을 쏟아부었건만, 반짝 오르는 듯했던 출산율이 다시 고꾸라집니다. 2024년 출산율은 1.38명(추산). 출산 장려 정책이 애를 더 많이 낳게 만든 게 아니라, 출산 시기를 앞당기게 했을 뿐이었던 겁니다.돌아선 내부자가 들춰낸 비밀2025년, 헝가리 경제는 성장을 거의 멈췄습니다(성장률 1% 전망). 재정적자는 점점 더 불어나고 있고요(GDP의 4.9%). 그런데도 물가가 여전히 불안하기 때문에(6월 물가상승률 4.6%)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매우 높게 유지 중입니다(6.50%). 먹고 살기 힘들다는 유권자들의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데요.약 10개월 뒤인 2026년 6월 총선을 앞둔 오르반 정권을 더욱 초조하게 만드는 게 있습니다. 이전엔 본 적 없는 강력한 야당 세력의 등장이죠.그동안 헝가리 야당은 분열됐고 무능했습니다. 지난 십수 년 동안 오르반에 맞설 만한 야당 리더는 보이지 않았죠. 그런데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있으니. 티서(Tisza)당 대표 페테르 머저르입니다.머저르는 오르반 정권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피데스당의 핵심 내부자였죠. 오르반의 정치적 후계자로 꼽혔던 전 법무부 장관의 전 남편(2023년 이혼)이기도 하고요. 2024년 2월 헝가리 전 국민을 경악케 한 ‘소아성애자 사면 스캔들’이 터졌습니다. 당시 헝가리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머저르의 전 부인)이 사임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는데요. 이를 계기로 머저르는 반정부 운동가로 180도 변신합니다. 오르반 정권을 잘 아는 그는 정권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폭로하기 시작했죠. 바로 측근의 부패입니다.수만개의 ‘좋아요’를 받은 머저르의 SNS 글을 하나 볼까요.“친애하는 이슈트반, 당신은 정말 재능 있는 사람입니다. 37세 나이에 1000억 포린트(약 4000억원), 여러 호텔, 은행, 펀드, 과거 가치 있던 국유 부동산, 바베러스(헝가리 운송회사), 베오그라드 오피스 시장의 절반, 아직 건설되지 않은 부다페스트 오피스 빌딩(이미 국유기업이 임대계약을 맺은)까지 소유하고 있습니다.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국가 대출과 보조금을 받았나요? 비결이 뭐예요? 당신의 목표는 뭔가요? 10년 후 긴 숫자선 끝에 0이 하나 더 생긴다면, 그걸로 충분할까요?”여기서 언급된 이슈트반 티보르츠는 오르반 총리의 사위입니다. 정부 대출과 보조금이 오르반 일가의 막대한 부를 형성하는 데 쓰이고 있다는 폭로였죠.아는 사람은 다 알았던, 하지만 쉽게 건드릴 순 없었던 오르반 측근의 부패상에 대한 비판이 봇물 터진 듯 쏟아져 나옵니다. 오르반의 고향 친구인 뢰린츠 메사로시의 사례는 가장 극적이죠. 고향에서 작은 가스설비 회사를 운영했던 메사로시는 2010년 오르반 정권 출범 이후 헝가리 최고 재벌로 급성장합니다. 그의 건설회사가 국가가 발주한 대규모 인프라 사업(원자력 발전소, 철도 건설 등) 입찰을 줄줄이 따냈기 때문이죠. 그는 자신의 성공이 “신과 행운, 그리고 빅토르 오르반” 덕분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르반 총리의 아버지, 두 동생, 기숙사 룸메이트, 사위의 친구, 친구의 친구 등등. 지난 15년 동안 막대한 부를 축적한 권력자 측근들 사례가 연일 폭로됩니다. ‘반부패’를 내세운 페테르 머저르는 단숨에 열광적인 지지층을 끌어모읍니다. 그가 이끈 티서당은 202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제2당(21석 중 7석 확보)으로 올라서는 돌풍을 일으켰죠. 지지율은 갈수록 높아지는 상황. 최근 여론조사에선 티서당 지지율이 집권여당 피데스당보다 5~10% 포인트 앞섭니다.불안한 여당은 이미 지난해 말 또다시 선거구를 개편해 유리한 판을 짜두긴 했는데요. 이런 강력한 도전자의 등장은 처음이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합니다.이래도 안 뽑아줄래급해진 오르반 정부. 선거 승리를 위해 ‘필살기’를 마구 쏟아내고 있습니다.①어머니를 위한 세금 감면=헝가리는 2020년부터 네 자녀 이상인 여성에게 소득세를 평생 면제해 주는데요. 2025년 10월부턴 세 자녀, 2026년 1월부터는 두 자녀를 둔 여성도 소득세가 면제됩니다. 약 100만명이 추가로 혜택을 받게 되죠.②가족을 위한 세금 감면 확대=헝가리는 자녀 수에 따라 매달 내는 개인 소득세에서 일정 금액을 깎아주는데요. 7월 1일부터 이 혜택을 50% 늘렸습니다. 자녀 1명이면 월 약 6만원, 2명이면 24만원, 3명이면 60만원 세금을 깎아주는 거죠. 이 감면 금액은 내년엔 더 늘어납니다.③은퇴자를 위한 부가가치세 환급=올해 10월부터 연금 수급자를 위한 부가가치세 환급 제도가 새롭게 도입됩니다. 은퇴자가 유제품·채소·과일을 구매할 때 환급용 카드를 내면, 부가가치세(27%)를 계산해 계좌로 환급해 준다는데요. 1인당 월 6만원까지 환급받을 수 있게 될 겁니다.④식료품 가격 상한제=올해 초 식료품 가격이 다시 들썩이자, 헝가리 정부가 또 도입한 제도입니다. 계란·요구르트·식용유 등 30가지 식품군에 대해선 유통업체 마진을 원가의 10%로 제한했죠. 유통업체는 10% 마진율로는 팔면 팔수록 손해라며 울상입니다. 올해 8월 말까지인 가격 상한제가 연장될지는 두고 봐야 합니다.포퓰리즘이란 이런 거로구나, 실감할 수 있으시죠. 사실 지금 헝가리 경제 상황이 이럴 때가 아닙니다. 이러다 재정적자가 더 늘어나면 자칫 높지도 않은 국가 신용등급(S&P 기준 BBB-)이 더 떨어질 수 있거든요. 그럼 국가 경제엔 진짜 큰일입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정권엔 내년 총선 승리가 발등의 불이죠. 만약 정권이 교체되기라도 하면 줄줄이 부패 혐의로 감옥에 갈 판이니까요. 최근 피데스당은 ‘머저르는 우크라이나의 꼭두각시’라는 식의 비방전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민족주의적 선동에 능한 EU 최장기 집권 지도자의 노련함이냐, ‘부패척결’ 과 ‘헝가리 재건’을 외치는 젊은 야당 리더의 패기냐. 내년 선거 결과는 아직 예측불가인데요. 모처럼 헝가리 선거판이 재미있어지는 중입니다. By.딥다이브오르반 총리에 대한 인물평을 모아보면 “똑똑하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 보는” 재주가 있다는 평도 있고요. 다만 문제는 그 뛰어난 능력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측근의 부를 증식하는 데 주로 이용한 것 같다는 점이죠.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유럽 극우 포퓰리즘 세력의 롤모델, 헝가리 오르반 총리. 2010년부터 집권한 그는 한동안 헝가리 경제 성장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선거 독재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하지만 막대한 국가 보조금과 대출을 동원하는 성장 방식은 몇년 전부터 한계에 부딪힙니다. 늘어나는 재정적자, 추락하는 통화가치, 급등하는 인플레이션. 경제 성장세가 꺾이면서 오르반의 지지기반이 흔들립니다.-총선을 10개월 앞둔 지금, 강력한 도전자 머저르 티서당 대표의 급부상이 오르반 정권을 위협합니다. 친정부 기업인의 부패상이 줄줄이 폭로되면서 민심이 요동칩니다.-오르반 정권은 ‘두자녀 어머니 소득세 평생 면제’ 같은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며 방어에 나섰습니다.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역대급 선거가 다가옵니다.*이 기사는 8월 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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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4세 모리스 창이 들려주는 좌절을 투지로 바꾼 TSMC 이야기[딥다이브]

    깨진 아메리칸드림에 좌절한 동양인. 5년 동안 세 번 사직서를 내야 했던 실패한 관리자. “그는 이제 끝났다”는 얘기를 듣던 50대 후반.반도체 산업의 거물 모리스 창. 그는 대만 TSMC 설립 초기 자신이 처했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이대로 기술업계를 떠나야 하나, 좌절에 휩싸였던 그 시절. 그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지점에 다다랐다”며 오히려 투지를 다집니다. 그리고 업계의 수많은 거절과 비웃음, 주기적으로 닥치는 경제 위기를 헤쳐가며 TSMC의 놀라운 성공 신화를 써갔죠.실패와 좌절의 경험이 어떻게 훗날 성공의 자산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인물. 모리스 창이 93세 나이에 직접 쓴 자서전을 들여다봅니다.(모리스 창이 1963년 이후 삶에 대해 쓴 자서전 ‘하편’은 2024년 12월 대만에서 중국어(번체자) 판으로 발간됐습니다.)*이 기사는 8월 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세 번의 실패중국 본토 출신의 미국 이민 1.5세대인 모리스 창. 그가 25년 몸담은 텍사스 인스트루먼츠(TI)에서 전성기를 구가한 건 1960년대~70년대 초였습니다. 그의 활약으로 TI는 세계 최고 반도체 기업으로 성장했고, 그는 업계에서 전문성을 인정받았죠.하지만 1970년대 후반, TI 경영진이 바뀌고 회사가 점점 대기업화되면서 모리스 창의 사내 입지는 급격히 좁아집니다. 연구개발 투자를 대폭 늘리자고 강하게 주장한 그는 단기 실적에 매몰된 상사들과 번번이 갈등을 빚었죠. 인텔이라는 막강한 경쟁자가 부상하면서, 모리스 창은 기술개발에서도 무능하다는 낙인까지 찍힙니다.반도체 총괄에서 소비재 총괄로, 다시 ‘품질 책임자’란 낯선 직책으로 떠밀렸던 1982년. 그는 여전히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지만, 인사팀으로부터 한 통의 이메일을 받습니다. ‘직급이 현재의 42단계(수석 부사장, 넘버3)에서 38단계(초급 부사장 수준)로 하향조정됐다’는 통보였죠.납을 아무리 윤이 나게 닦는다고 금으로 만들 순 없구나. 모리스 창은 자신의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 TI를 1983년 떠납니다. 25년간 자신의 전부처럼 여겼던 회사와의 작별이었죠.이어서 구한 직업은 제너럴 인스트루먼트의 사장 겸 COO. 여기선 기존 멤버인 부사장들과 갈등만 빚다 1년 만에 사실상 쫓겨납니다. CEO는 그에게 사임을 요구하며 이렇게 말했죠. “부하 중 아무도 당신을 원하지 않아요.”뉴욕 5번가 트럼프타워 53층 집에서 홀로 지내던 53세 이혼남 실업자. 그에게 대만 ITRI(산업기술연구소) 원장직 제안이 들어옵니다. 대만은 출장으로 몇 번 가본 게 전부인 생소한 나라였지만, 그 점이 오히려 도전정신을 자극합니다. “이름을 날릴 마지막 기회”라며 대만으로 날아갔죠.하지만 대만 ITRI 원장을 맡았던 3년(1985~1988년)은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개혁가’라고 칭하며 미국식의 과감한 조직 개혁을 외쳤는데요. 개혁은 벽에 부딪혔고, 핵심 인력은 줄줄이 떠나갔고, 그의 평판은 추락합니다. 1988년 그는 스스로 원장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죠.무엇보다 중요한 건 투지세 번의 사직, 세 번의 실패. 그 시절 모리스 창은 ‘피터의 법칙(모든 직원은 무능할 때까지 승진한다, 즉 승진할수록 무능해진다)’의 대표 사례처럼 보였습니다.이제 그에게 남은 건 딱 하나. 바로 ITRI 원장직과 겸임해 온 TSMC 회장 겸 CEO라는 직책이었습니다. 그는 대만에 온 직후인 1985년 정부 요청으로 세계 최초의 ‘전문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TSMC 설립계획을 마련했었죠.당시 모리스 창은 모든 인맥을 동원해 세계 주요 반도체 기업들(인텔, 텍사스 인스트루먼츠, 모토로라, 파나소닉, 소니 등)에 접촉해 투자를 요청했고요(답변은 하나같이 “관심 없음”). 간신히 네덜란드 기업 필립스의 투자를 받아내는 데 성공해 TSMC를 설립했는데요.1987년 제1공장 가동을 시작한 TSMC. 하지만 고객이 없었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첫해 매출은 고작 400만 달러로, 그가 세웠던 사업계획의 3분의 1에도 못 미쳤죠.대만 경제계 인사들조차 TSMC의 야심 찬 계획에 회의적이었습니다. 세계 시장에서 “좋은 서비스”로 승부하겠다는 모리스 창 말에 당시 대만 중앙은행 총재는 비웃듯 말합니다. “대만 기업이 선의로 경쟁한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군요.”그러나 모리스 창은 인생 어느 때보다 열의에 불탔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TSMC를 경영했는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지식, 경험, 판단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 투지입니다. 60세가 되기 전 10년 동안 저는 TI, 제너럴 인스트루먼트, ITRI, 이렇게 세 곳에서 사직했습니다. 사직은 곧 패배를 인정하는 거였죠! 세 번이나 사직한 후, 저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지점에 다다랐다고 느꼈고 투지를 더욱 다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수많은 어려움과 난관에 부딪혔지만, 저는 패배를 인정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실패했지만 다시 일어날 용기와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투지. 그가 2018년 87살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입니다. 그는 이전의 부정적인 경험이 TSMC에선 오히려 자산이 됐다고 말합니다. “제가 겪은 사업 경험 중 많은 부분은 부정적이지만, 부정적인 교훈이 긍정적인 교훈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아는 건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것만큼 중요합니다.”실패가 영감을 준 TSMC 설립모리스 창의 TSMC 설립 스토리 중 가장 극적인 건 1985년 대만 정부의 요청(반도체 기업 설립 계획을 짜달라)을 받은 지 겨우 3주 만에 전문 파운드리 기업 설립계획을 세워서 대만 행정원장에게 발표했단 겁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TI에서 무시당했던 자신의 보고서가 TSMC 설립의 기반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1981년 모리스 창이 TI에서 ‘품질 책임자’로 사실상 강등됐던 시절. TI CEO는 일본 공장의 수율(정상제품 비율)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일본 공장 수율이 40~50%로 미국 휴스턴 공장의 20%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이죠. CEO 요청으로 두 공장을 들여다본 모리스 창. 결국 사람이 문제라는 걸 알게 됩니다.일본 공장은 이직률이 대단히 낮았고(연 2%), 생산라인에 공대를 졸업한 우수한 인력이 많았죠. 이에 비해 미국은 이직률이 너무 높은 데다(25%), 생산현장에서 일하려는 공대 졸업생을 찾기란 불가능했습니다.그러나 이 분석 결과를 CEO에 보고했을 때 돌아온 답은 차가웠습니다 “난 수율을 즉시 끌어올릴 해결책이 필요해. 그 분석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TI에서 그가 쓴 마지막 보고서는 이렇게 그냥 묻히고 맙니다.그리고 1985년 대만 ITRI 원장으로 부임한 모리스 창. ITRI가 시범 운영 중인 웨이퍼 생산 ‘데모 라인’이 상당히 뛰어난 수율을 기록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수율의 중요성을 잘 아는 그는 이게 대만의 독보적인 강점이 될 수도 있다고 봤죠. 정부가 그에게 반도체 사업 계획을 요청했을 때, 그는 확신을 가지고 전문 파운드리 사업 모델을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해고는 없다사람이 중요하다는 건 모리스 창의 중요한 경영철학입니다. 그래서 그가 TSMC에서 세운 원칙 중 하나가 ‘해고는 없다’는 거죠.경기침체가 닥쳤던 1970년. 텍사스 인스트루먼츠(TI)는 직원의 약 10%를 해고하기로 했습니다. 대다수 경영진은 당연히 실적이 가장 낮은 직원을 해고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그런데 당시 집적회로 사업부를 이끌었던 모리스 창은 이에 강력히 반대합니다. 그는 실적이 아닌 근속연수를 기준으로, 즉 가장 최근에 채용된 직원부터 직급에 상관없이 해고해야 한다고 주장했죠.왜? 어느 기업이나 직원 실적은 사실은 상사의 실적입니다. 그런데 실적을 기준으로 상사가 아닌 직원을 해고한다? 그건 공정하지 않고, 직원들이 받아들이기 어렵죠. 차라리 근속연수가 훨씬 더 납득할 만한 객관적 기준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TI는 모리스 창의 이 주장을 받아들였는데요.닷컴 버블이 꺼지고 경기침체가 시작된 2001년. TSMC를 이끌던 모리스 창은 이런 TI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경기 침체기 해고 금지’라는 원칙을 세웁니다. “저는 일본 기업의 종신고용 전통이 직원 충성도를 높인다고 믿습니다. 또 만약 해고 뒤 1년 안에 신규 채용이 필요하다면, 해고는 경제적으로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퇴직금은 1년 치 급여의 약 절반이고, 신입사원 교육 비용도 1년 치 급여의 절반이니까요.”하지만 이후 TSMC에서 이 원칙은 와장창 깨지고 맙니다. 모리스 창이 CEO 자리에서 물러나 있던 2009년 1월의 일이었죠. 금융위기 폭풍이 몰아치며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자, 차이리싱 당시 TSMC CEO(현 미디어텍 CEO)는 성과평가가 가장 낮은 840명을 해고해 버립니다.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칩니다. 해고자들은 강하게 반발하며, 모리스 창 회장의 집 앞까지 찾아와 시위를 벌입니다. 부정적인 여론이 들끓었고요. 결국 보다 못한 모리스 창이 직접 나서서 해고자 복귀를 결정합니다. 직원들에겐 “성과평가를 해고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고요. 이 해고 사건을 계기로 모리스 창은 4년 만에 다시 CEO직으로 복귀했죠.“해고는 모든 직원이 좌절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해고되지 않은 직원들도 이렇게 생각합니다. ‘회사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건가?’ ‘최고 경영진은 직원을 마치 비용처럼 취급하나?’ 그리고 ‘이런 회사에 계속 남아야 할까’라고 의구심을 가집니다. 저는 TSMC가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둘 거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직원을 해고해야 하죠?”애플과 엔비디아, 그리고 젠슨 황모리스 창은 TSMC가 ‘제조 서비스 사업’을 하는 기업이라고 강조합니다. 단순히 제조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라, 고객인 팹리스 기업(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의 요구에 맞춰 서비스하는 게 핵심인 거죠. 그가 꼽는 가장 중요한 경영철학이 바로 “고객은 파트너”라는 건데요.그래서 그가 직원들에게 강조하는 건 고객과의 소통입니다. 고객사와 TSMC 양측의 엔지니어가 제 3자를 통할 필요 없이 직접 소통해서, 신뢰를 강화하라는 거죠. 모리스 창 본인 역시 2018년 은퇴할 때까지 상위 15~20개 고객사 CEO를 최소 1년에 한두 번 방문하곤 했습니다. 주요 고객사 순위가 수시로 바뀌고 CEO도 계속 교체되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야 했죠. 그는 고객사 CEO와의 관계에서 필요한 ‘친밀함’의 기준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든 서로에게 전화할 수 있고, 상대방이 꼭 전화를 받을 거라는 것”.TSMC의 여러 주요 고객사와 인연 중 애플과 엔비디아에 대한 내용은 특히 눈에 띕니다. TSMC는 2007년 아이폰 첫 출시 때부터 애플을 눈여겨봤지만, 당시 애플은 자체 설계한 칩의 생산을 삼성전자에 맡겼죠. 이후 2010년 삼성전자가 스마트폰에 진출한 걸 본 모리스 창은 기회를 포착합니다. 그는 “스티브 잡스라면 이건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분명히 느꼈을 것”이라고 회고했죠. 그해 11월, 재혼한 아내의 사촌인 폭스콘 창업자 궈타이밍이 제프 윌리엄스 애플 부사장(COO)을 데리고 그의 집을 찾아옵니다. 드디어 애플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겁니다.하지만 애플과의 협상은 인텔의 참전으로 일시 중단됩니다. 팀 쿡 애플 CEO가 인텔과의 협상에 나섰기 때문이었죠.모리스 창은 실리콘밸리로 찾아가 직접 팀 쿡을 만납니다. 이 자리에서 팀 쿡 CEO는 이런 묘한 말을 합니다. “그들(인텔)은 파운드리에 서툴러요.” 역시나 얼마 뒤 애플과 인텔의 협상을 깨졌고, 애플은 TSMC를 선택했죠.이때 애플을 놓친 건 인텔의 몰락을 부추긴 큰 패착이었습니다. 반대로 TSMC는 애플을 잡으면서 파운드리의 절대 강자 지위를 확고히 하게 됐고요. 이후 인텔의 당시 경영진은 애플이 너무 낮은 가격을 제시했다고 여겨서 협상을 깼다고 밝혔는데요.모리스 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팀 쿡이 제게 한 말, ‘인텔은 파운드리에 서투르다’와 같은 맥락입니다. 고객이 수용할 가격을 받아들이지 않는 건 파운드리에 서투른 것과 마찬가지죠. TSMC는 고객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가격으로 적정한 수익을 낼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모리스 창 자서전에서 상당히 비중 있게 언급됩니다. 1997년 젠슨 황은 모리스 창에게 ‘파운드리를 찾고 있는데, 직접 만나 뵙고 싶다’고 불쑥 편지를 보냈고요. 며칠 뒤 캘리포니아에 간 모리스 창이 그에게 전화를 겁니다. 전화를 받은 젠슨 황은 발신자가 누구인지 알고 이렇게 소리쳤죠. “조용히! 조용히! 모리스 창이 전화했어!”1998년 TSMC는 인력 부족에 시달리던 엔비디아(당시 직원 수 약 80명)에 직원 두 명을 한 달 동안 파견해 돕는 이례적인 고객 서비스를 제공했고요. 이런 협력을 기반으로 엔비디아는 눈부신 도약을 시작합니다. 모리스 창은 젠슨 황을 ‘절친’이라고 칭하죠.그는 한때 젠슨 황을 자신의 후계자 후보로 생각했었다는 점도 자서전에서 공개했는데요. 2013년 젠슨 황을 직접 만나 의사를 타진해 봤다고 합니다. 모리스 창은 약 10분에 걸쳐 TSMC의 눈부신 성장 전망을 설명했고요. 이어 TSMC CEO가 되면 받을 수 있는 보상이 젠슨 황의 지금 소득보다 훨씬 많을 거라고 얘기했죠.그때만 해도 엔비디아 시가총액이 TSMC의 10분의 1에 그쳤던 시절입니다. 그러니 젠슨 황이 이런 제안에 관심 있을 거라고 기대한 게 그리 무리도 아니었는데요.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자 젠슨 황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 이미 일이 있어요.”이제 엔비디아는 세계 시가총액 1등의 어마어마한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점에 모리스 창은 그때 그 장면을 회고하며 이렇게 감탄하죠. “젠슨은 내게 솔직하게 답했습니다. 그는 ‘이미 일이 있어요’라고 답했죠! 그가 말한 ‘일’이란 엔비디아를 11년 후인 오늘날 모습으로 성장시키는 거였습니다!” By.딥다이브<부록>모리스 창은 자서전에서 삼성전자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삼성전자 관련 챕터는 딱 하나뿐인데요. 삼성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강자로 급부상하던 1989년, 이건희 회장과의 만남입니다.모리스 창은 타이베이를 방문한 이 회장 초대로 아침 식사를 함께하게 됐는데요. 이 자리에서 이 회장은 ‘메모리 반도체 산업엔 너무 많은 자본과 인재가 필요한 데, 대만은 이를 감당할 수 없다. 그러니 포기하는 게 낫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아울러 대만이 정말 메모리 산업에 진출하고 싶다면 삼성과 협력하는 게 가장 좋을 거라고도 덧붙였죠.당시 대만 기업들은 메모리 시장 진출을 노리던 중이었거든요. 이를 눈치챈 이 회장이 괜히 나설 생각 말라고 경고하기 위해 그를 만났던 겁니다.몇 달 뒤, 모리스 창은 이건희 회장 초청으로 방한해 삼성전자 공장을 둘러봅니다. 일행 중엔 당시 메모리 시장 진출을 모색했던 에이서의 스탠 시 회장도 포함됐죠. 모리스 창은 미국이나 일본 경쟁사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삼성전자 공장과 엔지니어 모습을 보고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고 합니다. “메모리 산업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다시 한국으로 옮겨가고 있구나”라는 걸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죠.하지만 이후 에이서는 포기하지 않고 메모리 사업에 진출했는데요. 결국 삼성과의 경쟁에서 처절하게 패배하고 1999년 사업 철수를 결정합니다. 모리스 창은 당시 이 회장의 조언이 맞았다고 회상합니다. 동시에 메모리 반도체 산업에서 삼성이 이기고 대만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요인이 있다고 분석하죠. 그건 바로 ‘학습 곡선’. 반도체 산업은 생산 경험이 쌓일수록 비용경쟁력이 높아지는 ‘학습 곡선 효과’가 뚜렷한 산업인데요. 1990년대 삼성전자는 이미 학습 곡선에서 한참 앞서나가고 있었던 겁니다.*이 기사는 8월 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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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0억짜리 인재가 기업을 구할까? 스타를 영입하면 생기는 일[딥다이브]

    최근 인공지능(AI) 업계를 가장 들썩이게 만든 뉴스는 이거죠. 메타플랫폼스의 AI 인재 습격. 마크 저커버그 CEO가 1명당 최대 연간 1억 달러(1380억원) 넘는 보상을 제시하며 경쟁사의 핵심 AI 인력을 줄줄이 스카우트 중인데요.솔직히 그 정도 거액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겁니다. 오픈AI, 구글 딥마인드, 애플의 AI 핵심 인력들이 줄줄이 메타로 자리를 옮겨가는데요. 그럼, 인재 전쟁에서 승리한 메타는 AI 전쟁에서도 승기를 잡게 될까요.글쎄요. 스타 영입 효과를 측정해 온 여러 경영학 연구의 결론은 좀 다릅니다. 왜? 기업이란 일종의 팀 스포츠이기 때문이죠. 메타를 계기로 본 기업의 스타 채용 효과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7월 25일 발행한 딥다이브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당신을 영입하려면 뭐가 필요하죠?연말까지 130만개 넘는 GPU 확보, 2GW 넘는 데이터센터 건설. 메타는 AI 인프라에 어마어마한 투자를 쏟아붓는 기업입니다. 올해 초 밝힌 인프라 투자비만 650억 달러(93조원)에 달할 정도죠. 그리고 올봄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는 오픈AI의 최고연구책임자(CRO) 마크 첸을 만납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저커버그는 메타의 AI 조직을 어떻게 개선하면 좋을지 조언을 구했고요. 마크 첸은 인재에 더 많은 투자를 해보라고 답했죠.그러자 저커버그가 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을 메타로 영입하려면 뭐가 필요한가요? 1억 달러? 10억 달러?”마크 첸은 오픈AI에서 일하는 게 만족스럽다며 그 자리에서 제안을 거절했는데요. 이때부터 저커버그 CEO는 세계 최고 AI 연구자들 리스트를 작성합니다. 그 후보자들에게 이메일과 메시지를 보내고, 집으로 초대하기 시작했죠.이 사실은 지난 6월 팟캐스트에 출연한 샘 올트먼 오픈AI CEO가 이렇게 말하면서 세상에 알려집니다. “메타가 우리 팀원들에게 거액의 제안을 하기 시작했어요. 1억 달러짜리 계약금 같은 거요. 우리 회사 최고 인재 중 누구도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죠.”하지만 곧 메타에 대한 올트먼의 빈정거림은 분노로 바뀝니다. 그 1억 달러 제안에 오픈AI 인재들이 넘어가기 시작했으니까요. 당한(?) 경쟁사는 오픈AI만이 아니었죠. 애플과 구글 딥마인드, X AI, 앤트로픽에서도 AI 핵심 인재들이 메타로 환승이직했습니다.얼마 전 레딧엔 메타가 새로 만든 ‘초지능(Superintelligence)’ 연구실 소속 44명의 명단에 공개돼 화제였는데요. 대부분이 이직한 지 한달 안팎인 외부 영입 인력으로 꾸려졌고요. 이 중 16명이 오픈AI, 9명이 구글 딥마인드 출신이었죠.“두려움의 문화가 암처럼 퍼져있다”이런 무지막지한 돈 폭탄을 쏟아부은 공격적인 인재 영입. 어떻게 봐야 할까요. 당연히 인재를 빼앗긴 경쟁업체는 격분하죠. 마크 첸 오픈AI CRO는 회사 직원들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누군가 우리 집에 침입해서 뭔가를 훔쳐 간 것 같다”고 얘기했고요. 올트먼 CEO는 “용병은 항상 있지만, (꿈과 의미를 좇는) 선교사가 (돈만 추구하는) 용병을 이길 것”이라는 메시지로 내부 직원들을 다독였죠.하지만 AI 열풍에 휩싸인 투자 업계는 메타의 움직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편입니다. 저커버그가 AI 기술 전쟁에 정말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신호로 여기기 때문이죠. GPU 칩이나 데이터센터 못지않게 인재가 중요한 건 틀림 없으니까요. 이를 지켜보던 한국 AI 업계에선 우리도 AI 인재 영입에 더 열을 올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고요.그런데 이 소식도 혹시 들으셨나요. 메타의 AI 연구원인 티즈멘 블랑케부르크가 퇴사를 앞두고 7월 7일 AI 조직 내부 채팅방에 올린 글 하나가 메타 전체에 큰 화제가 됐습니다. 제목은 ‘메타 문화를 두려워하라(Fear the Meta culture)’. 무려 9페이지에 달하는 이 글은 IT 미디어 더인포메이션에 일부 소개됐는데요.그는 메타가 과거 영입한 AI 인재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다른 회사의 훌륭한 많은 인재가 왔다 가는 걸 봤습니다. 대부분 우리 회사 문화 때문입니다. 떠난 사람 중 상당수가 (메타 AI 조직을) 맹렬히 싫어합니다.”그는 문제 원인을 끊임없는 줄세우기식 성과 평가와 해고 행렬이 만든 “두려움의 문화”에서 찾았죠. “사람들은 우리 사명이나 위대한 걸 만들겠단 열망이 아닌 해고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동기 부여를 받습니다. 이런 태도는 마치 전이성 암처럼 회사 전체에 퍼져있습니다.”또 “대부분 사람에겐 우리 AI 사명이 무엇인지조차 명확하지 않다”면서 “메타에 오랫동안 머물고 싶어 하는 사람을 아직 만나본 적 없다”고도 지적했는데요.이후 블랑케부르크는 서브스택에 추가로 글을 올렸죠. 그는 언론이 너무 선정적으로 보도했다고 불평하면서도, 메타 조직 문화의 문제점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평가와 해고에 대한 두려움(사기 저하), 대형 프로젝트에 필요한 프로세스의 부재, 동료애와 소속감 부족(각자도생 문화), 팀 배정의 불안정성, 흔들리는 비전.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이겁니다. 메타는 이전부터 외부에서 AI 인재를 영입해 왔지만, 그들을 얼마 못 가 떠납니다. 회사가 AI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지 못한 데다, 조직문화 적응도 어려웠기 때문이죠. 당연히 이로 인해 메타는 AI 기술 개발에서 크게 치고 나가지 못했고요.그래서 이를 반전시키기 위해 저커버그가 찾는 해결책은 그저 그런 인재가 아니라 ‘슈퍼스타’급 AI 인재를 끌어오는 인재를 영입하는 겁니다. 자고로 기술 세계에선 1명의 슈퍼 히어로가 1000명의 평범한 인재보다 나으니까요?여러분도 이런 아이디어에 동의하시나요? 야심 차고 총명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A급 스타를 영입하면 회사를 폭발적으로 키울 수 있을까요. 돈만 주면 곧바로 외부의 A급 인재를 투입할 수 있는데, 왜 시간을 들여서 내부 B급 인재들을 키워야 할까요. 마치 프로스포츠나 월가 투자은행, 할리우드처럼 AI 기술 업계에서도 천문학적 몸값을 받는 스타 영입이 성공을 위한 핵심 열쇠 아닐까요.하지만 이런 아이디어에 대해 경영학자들은 회의적입니다. 지난 20여년 동안의 여러 연구 결과가 보여주는 결론은 한결같기 때문이죠. 외부 스타 인재 영입은 득보다 실이 더 클 수 있단 겁니다.외부 스타를 영입하면 생기는 일한때 월가에선 스타 주식 애널리스트들을 영입하기 위한 투자은행들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습니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보리스 그로이스버그 교수는 1988~1996년 미국 78개 투자은행에서 근무한 1052명 스타 주식 애널리스트 성과를 비교한 연구(2004년 발표)로 유명한데요. 공신력 있는 애널리스트 평가에서 자기 분야 1위를 차지한 적 있는 업계 최고의 스타 분석가들. 회사를 옮긴 뒤 그 성과(평가 순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논문에 따르면 이직과 함께 성과는 즉시 하락했고요(평균 -20%).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이 지나도 다시 최고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니, 회사만 바뀐 거지 하는 일(주식 리서치 업무)은 똑같은데 왜 이렇게 성과가 저조할까요. 그로이스버그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대부분 기업이 간과하지만, 직원의 성과는 개인 역량뿐 아니라 시스템·프로세스 같은 조직 역량에 달려있습니다. 스타들은 새로운 회사의 시스템을 익히는 데 몇 년이 걸릴 수 있죠.”주식 분석 업무의 성과는 애널리스트 개인 역량이 전적으로 좌우할 것 같지만요. 실제론 리서치 센터장의 리더십, 그 회사의 영업팀이 전해주는 정보(요즘 고객들을 이런 데 관심 있다더라), 그리고 대형 투자은행 간판의 후광효과 등이 모두 결합해 성과로 이어지는 법입니다. 애널리스트 홀로 낯선 조직에 뚝 떨어져서는 이전과 똑같은 성과를 내기가 쉽지 않은 거죠.스타 영입이 조직에 일으키는 또 다른 문제가 있는데요. 바로 내부 직원의 사기 저하입니다. 높은 연봉을 받고 이직한 외부 인재를 본 기존 직원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 회사는 내부 인력 활용에 관심이 없구나’, ‘이 조직에서 성장 또는 승진하기가 어려워지겠구나’라며 씁쓸해합니다. 의욕은 떨어지고, 내부 갈등은 고조되고, 조직 내 소통은 단절되기 일쑤죠. 한 투자은행 리서치 부서장은 연구팀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타를 채용하는 건 장기이식과 비슷합니다. 다른 몸에서 잘 기능했던 장기도 새로운 몸은 거부할 수 있습니다.”미국 와튼 경영대학원의 매튜 비드웰 교수가 2003~2009년 미국 투자은행 인사자료 분석으로 얻은 결과도 비슷합니다(2012년 발표). 외부 영입 인재는 내부 직원보다 평균 18% 더 많은 연봉을 받고, 승진도 더 빨리하지만 성과는 오히려 떨어지고 퇴사율(해고 포함)도 훨씬 높았다고 하죠. 외부인이 새 조직에서 효과적으로 일할 만한 관계를 구축하는 데 약 2년이 걸리기 때문이란 분석인데요. 특히 영입과 승진이 동시에 일어난(=고위직에 외부인이 영입된) 경우에 가장 성과가 나빴다고 합니다. 그래서 비드웰 교수의 결론은 이겁니다. “내부 인재는 급여가 더 적지만 성과는 더 좋고 안정성도 높습니다.”금융이라는 특수한 업종만의 얘기 아니냐고요? 그럼 이건 어떨까요. 그로이스버그 교수 연구팀은 2008년 미국프로풋볼(NFL) 팀의 38년 데이터를 분석했는데요. 팀을 옮긴 미식축구 스타선수들의 성적이 유지되느냐 하락하느냐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변수가 있습니다. 바로 포지션. 공을 멀리 차는 역할의 펀터는 이적 뒤에도 성적 변화가 없었는데요. 와일드리시버는 팀을 옮긴 직후 성적이 떨어졌습니다. 개인기가 아닌 팀원들과의 상호작용이 중요한 포지션이기 때문이죠. 떨어진 성적이 다시 회복되는 덴 1년쯤 걸렸고요. 이는 조직 내 상호연결성이 높은 직책일수록(예; 고위직) 이직한 스타가 적응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걸 보여줍니다.스타 이직과 관련한 최근 논문으로는 영국 요크대학교 클라우디아 가비오네타 교수의 영국 대형 로펌 사례연구(2023년)가 있는데요. 경쟁사의 뛰어난 스타 변호사를 영입한 로펌의 1년 뒤 고객 평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스타 영입을 하지 않은 경쟁사보다 평균 10% 점수가 뒤졌다고 합니다. 영입된 스타 자체 때문이라기보다는 나머지 기존 멤버들의 성과가 떨어진 탓이 컸는데요.이 연구에선 외부 스타 변호사를 영입한 뒤에도 점수가 많이 떨어지지 않은 예외적인 사례에 주목했습니다. 크게 두 가지 경우였죠. 해당 로펌에 이미 또 다른 최고의 스타 변호사가 있던 경우 또는 원래부터 최고 평점을 받아온 우수한 로펌인 경우. 즉, 스타 영입은 실패할 위험이 크지만, 만약 이에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내부 스타급 인재를 이미 보유한 잘나가는 조직이라면 괜찮을 수 있는 겁니다. 반대로 회사 실적이 하락하고 분위기가 엉망이다? 그래서 외부 스타를 거액을 주고 모셔 온다? 그러면 성과가 추락할 위험이 오히려 더 커질 수 있고요.결국 이 모든 연구 결과가 말하는 건 이겁니다. 기업 운명을 한방에 반전시키는 스타의 힘? 그건 망상입니다. 빛나 보이는 저 별(스타)은 어쩌면 스쳐 지나가는 혜성일지 모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부 인재를 스타로 키우는 게 실제론 가장 효율적인 인재 경영 방법입니다. 인재를 키우고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죠.있는 인재도 떠나는 회사가 거액을 들여 외부 스타를 영입한다? 이건 실패 확률이 너무 높은 도박입니다. 과연 저커버그 CEO의 과감한 인재 베팅은 이 통념을 깨뜨리는 결과를 보여줄 수 있을까요. 그 최종 결과가 어느 쪽이든, 언젠가 경영학자들이 연구할 만한 주제일 겁니다. By.딥다이브혹시 당신은 업계가 주목하는 스타인재(또는 예비 스타인재)인가요? 그렇다면 알아둘 점이 있습니다. 그 성과는 조직의 시스템 또는 주변 동료의 도움이 뒷받침됐기에 이룰 수 있었다는 점이죠. 혼자 잘나서 된 게 아니라요. 훗날 이직하더라도 그걸 이해하는 게 롱런할 수 있는 비결일 겁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메타가 경쟁사의 AI 핵심 인재를 거액에 스카우트하는 ‘인재 습격’을 벌이고 있습니다. ‘첫해 1억 달러’라는 엄청난 보상안에 업계가 뒤집어졌습니다.-하지만 동시에 메타의 기존 AI 연구원 이탈도 이어집니다. 한 퇴사자는 직원 사기를 저하시키는 ‘두려움의 문화’와 불명확한 비전 등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글을 남겼죠.-외부의 반짝이는 스타급 인재를 영입하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애널리스트, 투자은행 직원, NFL 프로선수, 대형로펌 변호사를 주제로 한 경영학 연구들이 여럿 있는데요. 결론은 하나로 모입니다. 스타 영입은 실패할 리스크가 꽤 크다는 것.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효과가 큰 건 결국 내부인재 육성입니다. *이 기사는 7월 25일 발행한 딥다이브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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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한애란]전세대출이 만든 거품을 꺼뜨리려면

    전세의 월세화. 요즘 부동산 시장의 큰 화두다. 6·27 대출 규제로 신축 아파트는 사실상 세입자의 전세대출이 거의 막혔다. 전세퇴거대출 한도가 1억 원으로 묶인 것도 세입자에겐 부담이다. 전세 물량은 점점 줄고, 반전세 또는 월세가 늘어간다.사실 전세의 월세화는 1990년대부터 나왔던 얘기다. 금리가 장기적으로 하락하는 추세에서는 집주인들이 전세보단 월세를 선호할 수밖에 없어서다. 10여 년 전부턴 아예 ‘전세 소멸론’까지 나돌았다. 2016년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전세 시대는 하나의 추억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하지만 웬걸, 전세시장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건재했다. 꺼져가는 듯했던 전세의 생명력을 되살린 건 바로 전세대출이었다.은행에 이자 내고 전세 사는 시대정부가 ‘서민 주거안정’을 명목으로 전세대출 보증 한도를 1억 원에서 2억 원으로 올린 게 2008년. 이후 2015년엔 전세대출 한도가 최대 5억 원으로 더 늘었다. 목돈 없이 은행에 대출 이자만 내고 전세 사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이자가 월세보다 더 저렴한 데다, 소득도 따지지 않고 빌려줬으니 세입자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집주인도 반겼다. 이자율 낮은 전세대출 덕에 전세 수요가 넘치면서 집주인은 전셋값 올려받기가 한결 수월해졌다.전세대출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지난 7년 동안 주택담보대출은 50% 정도 늘었지만, 전세대출은 100% 넘게 증가했다. 가계부채 증가의 주범이다.전세의 본질은 사금융이다. 집주인이 세입자로부터 목돈을 빌리면서 월세와 이자를 퉁친 게 전세다. 이런 사금융 성격의 시장에 공적보증 받은 저렴한 전세대출 자금까지 대거 유입됐으니, 불붙은 부동산 시장에 부채질하는 꼴이 됐다. 고삐 풀린 전세대출은 서울 전셋값을 끌어올렸고, 전셋값 상승은 높은 집값을 정당화했다. 전세 끼고 집 사려는 갭투자가 활개를 쳤다.만약 갭투자를 근절해서 서울 아파트값 상승세를 잡는 게 목적이라면 방법은 하나, 전세대출부터 잡아야 한다. 그리고 이건 이미 오래전, 부동산 광풍이 휩쓸었던 문재인 정부 시절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다.하지만 누구도 감히 손대지 못했다. ‘전세 세입자=서민’ ‘전세대출=서민대출’이란 통념이 규제를 주저하게 했다. 금융위원회는 전세대출에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를 적용하는 방안을 몇 년째 만지작거리고만 있다.지금 정부는 부동산 시장 안정화를 위해 이 전세대출 규제 칼을 드디어 꺼내 들 기세다. 분명 정책의 효과는 있겠지만, 대출 절벽에 처할 세입자 반발은 피할 수 없다. 그래도 지금처럼 지지율 높은 정권 초기라면 돌파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월세시대 맞이할 준비 돼 있는가진짜 문제는 그 이후다. 우리 사회는 아직 본격적인 월세시대를 맞이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전세가 월세로 바뀌면 세입자의 임차료 부담이 늘고 가처분소득은 줄어들 게 뻔하다. 갑작스러운 실직·질병으로 월세를 내지 못해 살던 집에서 쫓겨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도 커진다.그래서 저렴한 공공임대주택 공급이 반드시 뒤따라줘야 한다. 하지만 시간과 돈이 너무 많이 든다. 국가 재정 측면에서 보면 가계부채(전세대출)를 잡는 대신 공공부채(한국토지주택공사 부채)를 대폭 늘리는 방향이다. 이 역시 장기적으론 국가 경제에 또 다른 부담으로 작용한다.전세보다 월세, 가계부채보다 공공부채. 이런 낯선 방향 전환을 국민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떻게 여론을 설득해 공감을 끌어내느냐에 정책 성패가 달려 있다.한애란 경제부 기자 haru@donga.com}

    • 2025-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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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나는 데이터센터, 바다에 빠뜨리자…美·中 이어 한국도 나선다[딥다이브]

    인공지능(AI) 기술엔 데이터센터가 꼭 필요하고, 데이터센터는 ‘열 식히기’가 매우 중요하다는 건 이제 많이 아시죠. AI시대가 열리면서 냉각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는데요. 그럼 이건 어떨까요. 데이터센터를 아예 차가운 바닷속으로 빠뜨려버리는 겁니다. 무슨 공상과학 같은 발상이냐고요? ‘수중 데이터센터’는 현실에서 작동 중입니다. 미국과 중국에선 이미 선보였고, 한국에서도 곧 등장할 예정이죠. 기발하면서도 실용적인 기술, 수중 데이터센터를 들여다봅니다.*이 기사는 7월 1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미친 아이디어, 현실이 되다천재적인가 아니면 미친 짓인가(Brilliant or Crazy)?2014년 마이크로소프트가 ‘네이틱(Natick)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 나온 반응입니다. 데이터센터를 통째로 바닷속에 잠수시키는 전례 없는 실험이었죠.MS의 직원 아이디어 공유 행사인 ‘씽크위크(ThinkWeek)’에서 수중 데이터센터를 제안한 건 엔지니어인 션 제임스(현 MS 에너지·데이터센터 연구 부문 부사장). 해군 잠수함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그는 수중 데이터센터가 얘기된다고 확신했다는데요.일단 수중 데이터센터는 열을 식히는 데 차가운 바닷물을 이용합니다. 그럼 데이터센터 전체 운영비용의 40% 가까이 차지하는 냉각 비용을 대폭 절감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고요. 또 이건 토목공사 필요 없이, 공장에서 만들어서 바다에 가라앉히면 설치할 수 있거든요. 건설 기간을 획기적으로, 아마도 90일 정도로 단축할 수 있을 거라고 내다봤죠.MS는 이 놀라운 아이디어를 채택했습니다. 2018년 봄, 스코틀랜드 오크니섬의 35m 깊이 해저에 컨테이너 크기의 밀폐된 데이터센터가 설치됩니다. 이후 2년간의 시험가동을 마친 이 세계 최초의 수중 데이터센터는 2020년 여름 따개비와 해조류로 뒤덮인 모습으로 건져 올려졌죠.당시 MS가 분석한 결과는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2년간 가동된 855대 서버 중 고장 난 건 6대뿐. 고장률이 육지 데이터센터의 8분의 1밖에 되지 않았죠. 바닷속이 육지보다 훨씬 나은 환경이었던 셈입니다.왜 그럴까요? MS는 두 가지 이유를 꼽습니다. ①내부를 산소와 달리 부식성이 낮은 질소로 채웠기 때문이고요. ②무인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사람이 들락날락하면서 건드려서 고장 낼 일이 일절 없었죠. MS는 수중 데이터센터가 “신뢰성이고 실용적이며 지속 가능하다”고 성과를 공개했는데요.그래서 이후 MS는 바다 곳곳에 데이터센터를 심어뒀을까요? 아니요.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지난해 MS 측은 “세계 어디에도 수중 데이터센터를 짓지 않을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혔죠. 대신 MS는 수중 데이터센터와 관련된 특허를 오픈소스로 공개했습니다.가능성만 확인한 채 허무하게 끝난 MS의 도전. 하지만 MS가 불을 지핀 수중 데이터센터에 대한 열정은 이제 엉뚱한 곳에서 피어나고 있습니다. 바로 중국이죠.중국에선 ‘전략 산업’118%. 중국 선전거래소에 상장된 기술기업 하이랜더(중국명 ‘海兰信’)의 올해 주가 상승률입니다. 시가총액 2조5000억원의 중소형주 하이랜더는 주가가 치솟으면서, 이제 PER(주가수익비율)이 300배가 넘습니다. 중국 정부가 ‘2025년 정부업무보고서’에서 전략적 신흥 사업으로 선정한 ‘심해기술’ 분야의 대표 수혜주로 꼽히면서 중국 개인투자자 매수세에 불이 붙었기 때문인데요.이 하이랜더의 주력사업이 바로 수중 데이터센터입니다. 하이랜더는 2023년 중국 하이난 앞바다에 세계 최초로 ‘상업용’ 수중 데이터센터를 구축해 운영 중이죠. 규모가 매우 작은 시범사업이긴 하지만(올해 수중 데이터센터 관련 매출 96억원 전망), 차이나텔레콤과 알리바바 클라우드 같은 고객사가 계약을 맺고 이용 중이라는군요.하이랜더는 현재 1단계인 하이난 수중 데이터센터를 3단계까지 확장해 나갈 계획(총 40MW)이고요. 올해 6월부터는 상하이 앞바다에 새로운 수중 데이터센터 설치를 진행 중입니다. 이건 올해 9월 가동될 거라는데요. 원자력 발전소 전력을 이용하는 하이난과 달리, 상하이 수중 데이터센터는 전력 대부분(97%)을 인근 해상풍력발전 단지에서 공급받을 거라고 하죠. 해상풍력과 수중 데이터센터, 두 해양 기술의 결합입니다.하이랜더 수중 데이터센터는 MS와 방식은 거의 같습니다. 내부는 질소로 채우고, 파이프를 통해 차가운 바닷물을 순환시켜 서버에서 발생하는 열을 식히죠. 무동력의 자연 냉각 방식 덕분에 육상 데이터센터보다 전력 사용량을 30% 이상 줄일 수 있고요. 냉각탑이 필요 없으니 공간도 절약하고, 물(담수)도 아낄 수 있습니다. 또 공장에서 데이터센터를 만든 뒤 잠수시키면 되기 때문에 90일이면 설계·생산·구축이 모두 가능하고요. 필요하다면 바닷속에서 무한정 확장도 가능합니다. 참고로 하이랜더가 밝힌 설계 수명은 25년이죠.아직은 워낙 초기 단계라서 이런 설명을 다 믿어도 되나 싶긴 한데요. MS도 접은 프로젝트를 중국 기업이 과감하고 빠르게 치고 나가고 있다는 점은 인상적입니다. 물론 중국 정부의 지원이 뒷받침되기 때문이죠.한국도 2027년에 생긴다여기까지 보시고 이런 생각 들지 않으세요. 수중 데이터센터, 그거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 딱인데?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도 이와 비슷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2027년 울산 앞바다 수심 30m 지점에 들어설 ‘해저기지’의 한 부분인 ‘수중 데이터센터 모듈’이 그것이죠. 이 계획대로라면 미국,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수중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는 나라가 될 겁니다.현재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은 이 해저기지뿐 아니라 별도의 수중 데이터센터 단지를 구축하는 새로운 사업도 기획 중인데요. “우리의 수중 데이터센터 냉각 방식이 (MS나 중국보다) 좀 더 개선된 방식일 것”이라고 자부하는 한국해양과학기술원 한택희 책임연구원과의 일문일답을 소개합니다.-‘수중 데이터센터 모듈’이 포함된 해저기지, 이미 설계는 마치신 거죠?“설계는 다 해놨고, 최종 조정만 한 다음에 아마 내년부터 제작에 들어갈 겁니다. 바다에 설치하는 건 2027년쯤이 될 거고요.”-수중 데이터센터는 미국 마이크로소프트가 선도적으로 개척한 기술인데요. 왜 MS는 이걸 상용화하지 않았을까요?“바다에 들어가면 따개비가 달라붙어서 냉각 파이프가 막히게 되거든요. 그러다 보니 냉각 효율이 자꾸 떨어진 거죠. 결국 테스트만 해보고 그다음엔 하지 않고 있죠.”-따개비가 붙고 냉각 효율이 떨어지는 문제는 기술로 해결 가능한가요?“MS나 중국 하이랜더는 바닷물을 직접 빨아들여서, 해수가 서버 쪽 열을 식힌 뒤 나가는 방식이에요. 그러다 보니 MS는 그 파이프 안이 자꾸 막혔는데요. 하이랜더 경우엔 바닷물이 한번은 오른쪽으로, 또 한번은 왼쪽으로, 이렇게 방향을 바꿔가며 흐르게 해서 파이프 속을 청소해 주는 식입니다. 바닷물의 입구와 출구가 서로 바뀌는 거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하진 않겠지만요.”-그러게요. 완전히 해결되진 않겠네요.“이와 달리 저희는 자동차 냉각수와 비슷한 방식입니다. 자동차는 냉각수가 엔진 주위를 순환하다 뜨거워지면, 차량 앞의 라디에이터를 통해 차가운 공기를 쐬면서 식잖아요. 그와 똑같이 저희는 청수(깨끗한 물) 냉각 시스템을 씁니다. 바닷물을 직접 쓰지 않고요. 뜨거워진 청수가 바깥으로 나온 파이프를 타고 지나가면서 외부 바닷물에 의해 식혀지면, 그 찬물이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거죠. 폐쇄형 시스템이라 파이프 속이 막힐 일이 없습니다.”-냉각수가 따로 있는 거군요. 바닷물이 냉각 시스템 안으로 직접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따개비 같은 불순물이 섞일 염려가 없고요.“맞습니다. 마치 자동차가 달리면서 냉각수를 찬 빗물로 식히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중국이 상하이에 새로 설치하는 수중 데이터센터는 전력 대부분을 해상풍력으로 연결한다더라고요. 우리나라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해저케이블 공사비가 만만찮거든요. 육상이든 해상이든 가장 가까운 발전소의 전기를 쓰는 게 가장 효율적이죠. 결국 데이터센터 단지 근처에 어느 발전소가 있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겁니다. 만약 근처에 해상풍력 단지가 있다면 어차피 거기 해저케이블이 들어가니까, 그 케이블이 지나가는 중간 지점에 만들면 효율적이겠죠.”-우리나라는 땅이 좁다 보니, 바닷속에 데이터센터를 짓는다는 아이디어가 솔깃하긴 한데요. 아무래도 투자비가 더 많이 들지 않을까요?“투자비 더 들지 않습니다.”-그래요?“육상은 일단 부지 비용이 들고요. 그게 아니라도 건물을 보기 좋게 잘 지어야 하잖아요. 조경도 신경 써야 하고. 그런데 수중 데이터센터는 그냥 통 안에 서버만 넣으면 되니까 훨씬 간단합니다. 저희가 공사비를 뽑아보니 더 들지 않고, 오히려 약 20% 공사비를 줄일 수 있습니다.”-육상보다 훨씬 실용적으로 지을 수 있군요. 수중 데이터센터는 사람의 접근이 매우 어려운데요. 고장이 큰 문제 아닐까요.“일단 MS 발표에 따르면 고장률은 육지의 8분의 1 수준으로 낮고요. 저희가 기획 중인 대단지 수중 데이터센터의 경우, 설계 수명은 30년인데요. 고장이 나면 여러 세트의 팟(Pod) 중 고장 난 부분만 살짝 들어 올려서 수리한 뒤 다시 가라앉히는 식이 될 겁니다. 어차피 설치를 위해선 그걸 들고 내릴 수 있는 장비가 필요한데, 그 장비를 관리에도 쓰는 거죠.”-박사님, 근본적인 궁금증이 생겼는데요. 처음에 왜 이 연구를 하게 되셨어요?“지금 진행 중인 해저기지 사업이 시작된 건 2022년인데요. 사실 기획은 제가 2012년도에 했어요.”-2012년이요? 그땐 MS도 이런 연구를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없었을 때인데요?“당시엔 심사위원이 볼펜 집어던지면서 이런 걸 왜 하느냐고, 공상과학 소설 쓰지 말라고 그랬었죠.”-그저 황당한 계획으로 생각했군요.“2019~2020년쯤 다시 얘기하니까, 그때는 통하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해저기지가 경제성이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수중 데이터센터를 모듈 중 하나로 넣었고요. 그러고 나서 찾아보니까 MS도 이걸 하고 있더라고요. 그땐 아직 중국엔 하는 곳이 없었고요.”-요즘 AI와 데이터센터가 워낙 큰 화두라서요. 우리나라도 수중 데이터센터나 해저기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지 않을까요?“이 바닥(해양 기술 분야)이 좁다 보니까 외국 기업이나 관련 기관에선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에 관심이 매우 많아요. 자꾸 어떻게 진행되는지 물어보죠. 우리나라도 앞으로 좀 그래야(관심이 높아져야) 할 텐데요.” By.딥다이브유럽에선 우주에 데이터센터를 설치하는 계획이 검토되고 있다고 하죠. AI 시대에 필수적인 초거대 데이터센터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늘려갈지에 대한 고민이 커지는데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AI엔 데이터센터가 필요하고, 데이터센터는 냉각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수심 30m의 차가운 바닷속에 수중 데이터센터를 설치하는 이유입니다.-미국 마이크로소프트는 이미 2018~2020년 시험가동을 마쳤습니다. 육지보다 고장률이 8분의 1로 줄어들었다는 성과도 공개했죠. 하지만 추가적인 설치는 없을 거라고 합니다.-‘심해 기술’에 열을 올리는 중국에선 2023년 하이난 앞바다에 이어 올해 9월 상하이 앞바다에도 수중 데이터센터가 설치됩니다. 아직은 초기단계이지만 정부 지원에 힘입어 빠르게 확장 중이죠.-한국도 이 분야에선 존재감이 있습니다. 수중 데이터센터 모듈이 포함된 해저기지가 2027년 울산 앞바다에 설치될 예정입니다. 한층 규모를 키운 수중 데이터센터 단지도 구상 중이고요. 공상과학 같은 이 아이디어가 현실이 되길 기대합니다.*이 기사는 7월 1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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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대했던 기업은 어떻게 평범해지나…알리바바와 대기업병[딥다이브]

    한때 위대했던 기업은 어떻게 평범한 기업으로 변해갈까요. 한번 불꽃이 사그라든 기업은 어떻게 해야 그 불씨를 다시 살려낼 수 있을까요.이 거창한 질문에 대해 조금이나마 답을 주지 않을까 싶은 내용을 소개하려 합니다. 지난 5월 중국 IT기업 알리바바의 15년 근속 직원이 퇴사하면서 인트라넷에 남긴 장문의 글인데요. 단기 성과주의, 관료주의, 내부 경쟁, 불분명한 전략, 지나친 마케팅 의존, 외부인력 맹신 등. 이른바 ‘대기업병’에 대한 적나라한 지적으로 가득합니다. 이 글이 특히 화제가 된 건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이 이례적으로 감사하다는 답글을 남겼기 때문이었죠. “다시 초심으로”를 외치고 있는 거대 IT 기업 알리바바 이야기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7월 1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알리바바의 롤러코스터와 대전환먼저 알리바바가 어떤 기업인지부터 간단히 볼까요. 영어교사 출신인 마윈이 고작 50만 위안(9500만원) 자본금으로 B2B 전자상거래 기업 ‘알리바바’를 설립한 게 1999년. 알리바바는 중국 전자상거래 시장을 개척한 기업이자, 여전히 중국 최대(+아시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이죠. 아울러 중국 최대(+아시아 최대)의 클라우드컴퓨팅 기업이기도 합니다. 또 알리바바의 자체 AI 모델 ‘큐원(Qwen)’은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딥시크 같은 중국기업은 물론 오픈AI GPT나 구글 제미나이와도 경쟁하는 중이죠.주식시장에서 알리바바의 정점은 2020년 10월. 시가총액 8300억 달러를 돌파하며 ‘아시아에서 가장 가치 있는 기업’에 올라섰던 그때, 갑자기 파티가 끝납니다. 인류 역사상 최대 IPO가 될 거라던 금융 자회사 앤트파이낸셜 상장을 중국 정부가 취소시켜 버렸죠. 마윈 창업자의 은행 시스템 비판(“혁신 추세에 뒤떨어진다”)이 당국의 심기를 건드렸단 분석이 나왔는데요. 이후 주가는 수직낙하해, 2년 만에 -80%를 기록합니다(317달러→63달러). 당시 알리바바는 ‘세계 최대 규모의 시총 증발’ 기록을 썼죠.최근 2년간 알리바바엔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요. 2019년 9월 마윈의 은퇴 이후 그룹을 이끌었던 장융 회장 겸 CEO가 2023년 6월 갑자기 회사를 떠났습니다. 장융은 재무 출신(타오바오 CFO로 2007년 입사)으로 2009년 중국 최대 쇼핑 축제로 통하는 ‘쌍십일절’(11월 11일, ‘광군제’라고도 칭함)을 만들어내 중국 마케팅 역사의 획을 그은 인물이죠. 2016년부터 알리바바가 내세운 온라인·오프라인을 융합한 ‘신유통(New Retail)’ 전략 중심엔 그가 있었는데요. 그의 사임과 함께 알리바바 전략은 완전히 바뀝니다. 새로운 CEO인 우용밍은 이제 “사용자 우선, AI 중심”을 외치죠.이런 전환이 호응을 얻으면서 주가는 지난 1년 동안 40% 뛰었고요. 무엇보다 수년 동안 은둔하다시피 했던 창업자 마윈이 지난 2월 간담회에서 시진핑 주석과 만나 악수하는 모습이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그 직후 알리바바는 앞으로 3년 동안 72조원(3800억 위안)을 AI에 투자한다는 공격적인 투자계획도 밝혔죠. 동시에 과거 인수했던 오프라인 소매업체들은 줄줄이 매각 중입니다. 지난해 말~올해 초엔 중국 최대 마트인 ‘썬아트’, 백화점 체인 ‘인타임리테일’을 모두 인수가에도 못 미치는 가격으로 내다 팔았습니다.이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알리바바 내부 게시판에 글 하나가 올라옵니다. 15년 일한 관리직 직원 ‘위안안’이 퇴사하면서 올린 글이었죠(참고로 위안안은 본명이 아니라, 사내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별명입니다). 1만자 가까이 되는 글은 뜨거운 반응을 얻었고요. 온라인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죠. 특히 ‘이건 우리 회사 얘기’라며 공감하는 이들이 많았다는데요. 도대체 어떤 내용일까요. 주요 부분만 발췌, 번역, 요약해서 소개합니다.알리바바 퇴직자가 남긴 글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사원증을 착용하는 게 불편해졌습니다. 객관적으로 말해, 지난 15년 동안 외부 평가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변했습니다. 사회에 더 나은 변화를 가져오겠단 꿈을 잃었습니다. 우린 이제 KPI, 급여, 주식, 부동산에 대해 얘기합니다.언제부터 우리가 약해지기 시작했을까요. 개인적으론 2017년부터라고 여깁니다. 10년 넘는 고속 성장 뒤 2017년부터 국내 인터넷·모바일 사용자 성장은 거의 멈췄습니다. 그룹의 각 사업 부문은 전략적 투자에 나섰지만 대부분 인수합병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내부 혁신 사업도 거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음식 배달: 2018년 인수한 어러머(Ele.me) 1위, 2년 만에 메이투안에 역전당함-음악 스트리밍: 2013년 샤미와 티엔티엔동팅 인수로 1위, 2021년 폐쇄-비디오 플랫폼: 2016년 투도우 인수로 점유율 1위, 현재는 3위-전자상거래: 2016년 동남아시아 최대 전자상거래기업 라자다 인수, 현재는 쇼피에 뒤짐회사 내 문제는 점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외부 인력에 대한 맹신: 과거 알리바바가 위챗을 극찬하며 젊은 고위직을 대거 영입했을 때 그들은 무분별한 지시로 장기적 발전을 저해했습니다. 우리는 농담으로 ‘이 사람들은 상대편 스파이 아닐까’라고 말했죠. 그들은 대부분 스톡옵션 기간을 버티는 걸 목표로 한 채 단기적 업무에 집중했습니다.들개가 승리한다: 황소(높은 가치관을 가진 고성과자), 들개(가치는 무시하고 성과만 내는 직원), 토끼(회사 가치는 구현하지만 성과는 못 내는 직원). 과거엔 황소를 발굴하고 들개를 퇴치하고, 토끼를 개량하는 걸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엔 적은 투자로, 더 빠르게, 더 큰 성과를 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런 문화는 들개를 승리하게 만듭니다. 신뢰가 감소하고 협력 비용이 커집니다.불투명한 분배시스템: 성과 평가점수가 급여와 연결돼 있지만, 성과는 공개되지 않아서 관리자가 큰 재량권을 행사합니다. 이런 투명성 결여는 상사에 대한 충성을 중시하는 분위기를 조성합니다.전략의 불명확성: 최근 몇 년간 미래에 대한 전략이 명확하지 않았고 점차 사용자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위에서 아래로의 전달은 너무 추상적이었습니다.모든 것을 하려고 함: 과거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더 많은 것을 하는 것’이 능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당시의 ‘대세’가 이런 많은 ‘해야 할 일’을 지탱하는 기반이었습니다. 대세가 사라지자 이런 ‘해야 할 일’ 뒤에 숨은 비합리성이 비합리적인 업무 방식을 키웠습니다. 성장이 둔화되고 경쟁이 치열해지고 직원이 비대해진 상황에서 우린 여전히 적은 투자, 짧은 주기, 높은 목표를 추구합니다.마케팅: 단기간에 적은 투자로 어떻게 성과를 낼까요. 정답은 마케팅입니다. 마케팅으로 이벤트를 진행하면 지표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타겟 데이터 분석으로 ROI(광고지출 대비 수익률) 최적화. 성장이 멈췄다면? 새로운 지표 정의. 온갖 수단이 동원됐고, 장기적 제품 구축은 오랫동안 외면당해 왔습니다. 마케팅이 가져다주는 허황한 번영은 제품의 공허함을 가리곤 합니다.관료주의: 많은 고위직은 현장에 내려가지 않고 산업을 깊이 이해하지 않습니다. 관료주의는 판단의 전문성 결여, 현실과 동떨어진 성과 요구를 초래합니다. 실제론 A를 원하지만 B를 하는 척하며 시간을 낭비합니다. 여러 단계 보고로 시간을 허비하고, 결정 단계에선 망설이고 흐지부지됩니다.우리는 여전히 큰 회사이지만 평범해졌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건 가치관을 포기했단 점입니다. 제가 좋아했던 옛날의 여섯 가지 가치관은 고객 우선, 팀워크, 변화수용, 신뢰, 열정, 헌신입니다. 이는 모두 변질됐습니다.고객 우선주의는 상사 우선주의에 밀립니다. 상사가 성과, 보너스, 스톡옵션, 승진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이익 메커니즘이 왜곡된 상황에서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상사에 대한 충성심으로 변질됩니다.팀워크는 승자독식 체제로 변모합니다. 사업이 번영할 땐 팀워크가 상호이익을 가져왔지만, 외부 성장 공간이 제한되자 경쟁 방향이 외부에서 내부로 전환됐습니다. ‘들개’가 가장 이익을 얻게 됩니다.변화 수용은 불명확한 전략을 은폐하는 수단이 됐습니다. 잦은 인사, 변화하는 정책, 단기적이고 연속성 없는 KPI. 고위 관리자들은 자신의 전략 실패로 인한 처벌을 피하기 위해 자리를 옮겨 계속 같은 문제를 반복합니다. 한명의 무능한 장군이 모든 군대를 지치게 합니다.신뢰는 희귀해졌습니다. 결과만 중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약탈, 도둑질, 실적 조작, 허위보고가 일상화됩니다. 이런 기술을 가진 사람이 우위를 점합니다. 사전에 허세를 부려 자원을 차지하고, 중간에 데이터를 조작하며, 사후에 책임을 전가하는 세 가지 기술을 숙달한 사람들이 활개 칩니다.열정은 좋은 인센티브 제도 하에서 발휘됩니다. 996(하루 12시간 주 6일 근무)은 실질적인 가치가 없습니다. 우린 육체노동자가 아닙니다. 창의성은 압박이 아닌 동기부여로 발휘됩니다. 큰 보상 아래에는 분명 용감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일이 가치 있다면 자연스럽게 초과근무를 할 것입니다.성실함이란 농사 짓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현재는 유목 문명이 지배적이어서 가치 있는 업무엔 많은 사람이 몰리고, 가치가 사라지면 버려집니다.이 글이 많은 사람을 화나게 할 수도 있지만, 용기가 필요합니다.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회사가 문제를 직시하고 점차 나아지길 바랍니다. AI가 왔습니다. 이 시대를 받아들이세요. 회사가 푸른 하늘, 튼튼한 땅, 맑은 공기를 되찾기를 바랍니다.“스타트업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참고로 이 글을 쓴 위안안은 퇴사 뒤 뉴질랜드로 가족과 함께 이민을 갔습니다. 그는 2~3년 전부터 이민을 생각했다는군요. 이 글이 화제가 된 뒤에 한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어떤 기업이 새로운 성장을 포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알리바바는 과거에 너무 많은 기회를 놓쳤습니다. 대기업병이 기업을 성장하지 못하게 만듭니다.”그럼, 이 글에 대한 회사 측 반응은 어땠을까요. 이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마윈 창업자가 내부 게시판에 “긴 글 감사하다. 정말 잘 썼다”라는 답글을 남겼단 점인데요. 마윈은 이어 이렇게 덧붙입니다. “사람의 성장과 마찬가지로 알리바바의 발전에도 필연적인 여러 경로와 과정이 있습니다. 알리바바는 변화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라며, 종종 다시 찾아와주세요.”그리고 지난달 말 알리바바의 차이충신 회장과 우용밍 CEO가 공동명의로 발송한 주주서한 말미엔 이런 내용이 담깁니다. “글로벌 AI 기술 혁명이 가져올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알리바바는 제로부터 시작하는 마음가짐으로, 스타트업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만 기회를 포착하고 창조할 수 있습니다. 알리바바의 DNA에는 현상유지란 없으며 오직 창조만이 있습니다. 오늘의 알리바바는 창업자의 자세로 AI 시대를 향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합니다.”스타트업 사고방식, 창조의 DNA, 창업자의 자세. 의례적인 표현일지 모르지만, 많은 이들은 이를 위안안 글에 대한 답변처럼 여겼습니다. 적어도 AI 시대로의 전환을 가로막는 내부 병폐를 해결해 나가겠다는 의지는 보인 거죠.물론 최고위층이 선언한다고 해서 직원 수 12.4만명의 거대한 기업이 한 번에 바뀔 리는 없습니다. (참고로 2024년 말 직원 수 19.4만명이었지만 유통 자회사 매각으로 7만명 감소) 기업문화를 바꾼다는 건 상당히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일이죠. 알리바바가 더 많은 인재가 떠나기 전에 진짜 변화를 이룰 수 있을지, 이제부터 지켜봐야겠습니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7월 1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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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미 좌파 대부’ 룰라의 추락…브라질 투자자는 웃는다?[딥다이브]

    한때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통령’으로 불렸던 남미 좌파의 아이콘. 누구인지 아시겠나요.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인데요. 2023년 재집권에 성공한 룰라 대통령의 인기가 최근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지지율은 고작 23%. 예상치 못한 룰라의 추락. 역시 가장 큰 원인은 경제에 있는데요. 흥미로운 점은 투자자들이 지금의 지지율 추락을 반기면서 브라질 증시가 회복세를 보인다는 점이죠. 오늘은 룰라와 브라질 경제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7월 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좌파 전설의 쇠락찢어지게 가난한 이민자 아들, 초등학교 중퇴의 구두닦이, 프레스 기기에 왼쪽 새끼손가락을 잃은 공장 노동자, 전국 금속노조 위원장, 그리고 브라질 최초의 3선 대통령까지. 79세의 브라질 현직 대통령 룰라의 삶은 드라마가 따로 없죠. 2010년 말 그가 두 번째 임기를 마쳤을 때 지지율은 무려 83%. 당시 브라질 경제는 사상 최대 호황을 누리며 곧 초강대국으로 도약할 기세였습니다.그런 룰라 대통령이 요즘 수세에 몰렸습니다. 6월 27일 발표된 여론조사에서 그의 국정 수행에 대한 긍정 평가는 고작 23.9%. 역대 최저로 떨어졌고요. 6월 25일, 브라질 의회는 룰라 대통령의 세금 인상안을 부결시켜 굴욕을 안겼습니다. 의회가 행정명령을 뒤집은 건 33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게다가 6월 18일 브라질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15%로 올려 시장을 놀라게 했는데요. 무려 7차례 연속 인상이자, 2006년 이래 가장 높은 금리입니다.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 인하를 원했던 룰라 행정부엔 악재가 아닐 수 없죠. 이제 브라질은 실질금리(물가상승률을 반영한 금리) 기준으론 튀르키예에 이어 세계 2번째로 금리가 높은 나라가 됐습니다. 덕분에 요즘 국내 자산가들 사이에선 브라질 국채 투자가 다시 인기라고도 하죠(연 14%대 이자율+통화가치 상승 시 수익 기대).브라질은 2026년 10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4선 도전을 앞둔 룰라 대통령과 여당(노동자당)은 상당히 초조합니다. 가상 대결에서 룰라 대통령은 ‘남미의 트럼프’로 불리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2019~2022년 재임)에 37.4%대 50%로 크게 밀리고 있거든요.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은 이미 지난해 선거법원 판결로 2030년까지 출마가 금지됐는데도 말이죠. 최근 지지율 조사를 보면 룰라의 오랜 지지층이었던 가톨릭계와 서민층조차 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모두가 ‘룰라의 몰락’을 얘기하기 시작했죠.그럼, 브라질 경제가 그렇게나 엉망인 걸까요. 그건 아닙니다. 2024년 브라질 GDP 성장률은 3.4%로 팬데믹 직후를 제외하면 2011년 이후 가장 높았고요. 최근까지도 15분기 연속 경제성장을 이어가고 있죠. 5월 실업률은 6.2%. 역대 최저 수준입니다.그런데도 브라질 국민은 ‘경제가 나쁘다’(60.3%)고 비판합니다. 동시에 ‘이게 다 룰라의 잘못된 정책 탓’이라고 손가락질하고요. 도대체 뭐가 진짜 문제일까요.재정 지출 확대의 부메랑지난 10년 동안 브라질 경제는 재정 적자의 늪에 빠졌습니다. 경제 성장세는 꺾였는데, 좌파(지우마 호세프 전 대통령, 2011~2016년 재임)든 우파(보우소나루 전 대통령)든 집권만 하면 각각 퍼주기식 정책을 펼친 탓이었죠(정권마다 퍼준 대상은 좀 다름). 룰라 대통령이 재집권한 2023년, 경제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재정적자 탈출이었는데요.하지만 분배에 방점을 둔 룰라 대통령은 재정건전성 문제는 뒷전으로 미뤄뒀죠. 대신 이런 정책을 펼칩니다.①최저임금 대폭 인상2024년 6.97%, 2025년 7.5%. 브라질 최저임금 인상률은 물가상승률을 크게 웃돌게 책정됐습니다. 근로자들의 실질소득이 늘어나야 한다는 룰라 대통령의 신념을 반영한 거죠. 그는 일종의 ‘소득주도 성장’을 주창했는데요. “(최저임금 인상으로) 통화량이 증가하면, 소매판매가 늘고 산업생산량이 증가해서, 경제가 활성화되고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된다”는 논리였습니다.취지야 좋습니다. 문제는 브라질에선 최저임금을 올리면 그걸 따라서 올라가는 항목이 한둘이 아니란 점이죠. 최저임금 인상률만큼 국가가 노인과 장애인에 주는 수당은 자동으로 늘어나고요. 은퇴자 연금 수급액도 최저임금에 직접적으로 연동됩니다. 소득세 면제 기준 역시 최저임금을 따라 해마다 높아지게 되죠. 모두 재정 적자를 더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집니다.②연방 공무원 임금 대폭 인상브라질은 공무원 처우가 상당히 좋은 나라입니다. 연방 공무원, 특히 세무·사법·외교 공무원은 대졸 신입직원 월급이 2만 헤알(약 500만원)을 훌쩍 넘죠. 브라질 평균 임금 수준(3500헤알, 약 88만원)을 생각하면 상당한 고소득인 건데요. 그래서 이전 보우소나루 정부는 “(공무원들이 많은) 브라질리아는 베르사유 궁전 같다”면서 공무원 특권 해체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하지만 룰라가 집권하면서 공무원 급여와 복지수준은 다시 대폭 향상됩니다. 2023년엔 9% 임금을 올려줬고요. 2024년엔 복리후생의 대대적 조정으로 각종 수당이 크게 오릅니다(식량 수당 118%↑, 미취학 아동 지원금 51%↑, 의료 지원금 평균 50%↑). 얼마 전엔 2025년과 2026년 각각 9% 임금 인상을 발표했고요. 그만큼 재정 부담은 늘어만 갑니다. 소고기 대신 간헐적 단식이 왔다경제가 가파르게 성장하는 시기라면 이런 식의 분배 정책이 성장을 더 가속할지 모릅니다. 실제 룰라 대통령의 1기, 2기 임기(2003~2010년) 땐 그랬죠. 그 시절 브라질은 중국의 눈부신 제조업 성장에 연료(원자재)를 대면서 큰 호황을 누렸고요. 국영 석유회사 페트로브라스는 잇달아 거대 유전을 발견했습니다. 당시 룰라 대통령은 복지 확대와 재정건전성 두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었죠.하지만 그의 운이 이제 다한 걸까요. 그 사이 원자재 가격은 폭락했고, 믿을 구석이던 중국 경제는 예전 같지 않게 됐습니다. 환경은 뒤바뀌었는데 룰라 대통령 경제정책은 15년 전과 그대로이니. 통할 리가 없습니다.연이은 공공지출 확대 정책과 재정적자의 늪에서 벗어날 의지가 보이지 않는 정부. ‘역시 룰라 정부는 못 믿겠다’며 불안해진 해외투자자들이 지난해 말 썰물처럼 빠져나갔습니다. 지난해 12월 브라질 환율은 역대 최고(1달러=6.2679헤알)를 찍었죠(통화가치는 최저). 가뜩이나 재정으로 시중에 풀린 돈이 많은데, 환율까지 치솟으니 물가는 뛰었고요. 물가 중에서도 특히 소비자들이 가장 민감해하는 식품 물가가 주로 오르면서(2024년 8% 상승) 국민 불만이 터져 나옵니다. ‘룰라는 피카냐(브라질에서 인기 있는 소의 엉덩위 윗부분 고기)를 약속했지만 간헐적 단식을 제공했다’는 조롱 섞인 밈이 유행했죠.브라질 중앙은행은 물가와 환율을 모두 잡기 위해 급격한 기준금리 인상에 나섰는데요(2024년 10월 10.5%→현재 15%). 그 결과 정부의 재정 부담은 한층 커졌습니다. 가뜩이나 세입보다 세출이 많은데, 국채 투자자들에게 지불할 이자율까지 치솟았으니까요.디지털에서 패배했다물가가 뛰고 대출이자율이 높아지는 걸 반길 국민이 없는 건 당연합니다. 먹고사는 문제는 늘 가장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룰라 대통령 지지율이 반토막 난 데는 또 다른 원인이 있습니다. 바로 소통의 실패이죠.올해 초 룰라 정부는 가짜뉴스로 큰 홍역을 치렀습니다. 브라질 국민은 ‘PIX’라고 부르는 중앙은행이 만든 수수료 무료의 실시간 결제 시스템을 애용하는데요. 지난 1월, 브라질 국세청이 PIX에 대한 감시를 강화한다는 정책을 발표합니다. 탈세 방지를 위해 거액의 현금거래를 들여다보겠다는 거였죠. 딱히 특별할 게 없는 정책이었는데요.그런데 28세의 우파 정치인 니콜라스 페레이라가 인스타그램에 이를 주제로 한 숏폼 영상을 올리면서 갑자기 상황이 심각해집니다. 그는 영상에서 이렇게 주장했죠. “이 조치의 진짜 목적이 뭘까요? 세금을 더 많이 거두고 주머니에서 돈을 빼내는 겁니다!” 정부가 PIX 거래에 세금을 부과할 거라는 일종의 가짜뉴스였습니다. 이 영상은 3억회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급속히 퍼져갔죠. 여론이 들불처럼 일어납니다.정부가 성난 민심을 진정시키려 해명에 나섰지만 아무 소용 없었습니다. 결국 국세청은 계획을 전면 철회하며 항복해야만 했죠. 파울루 펠트만 상파울루대 교수는 “그것(PIX 사태)이 룰라의 이미지를 실제로 손상시킨 첫 번째 사건”이라고 말합니다.디지털 시대에 맞는 소셜미디어를 이용한 정책 홍보. 79세의 나이 든 대통령이 이끄는 좌파 정부는 이걸 할 줄 몰라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합니다. 야당은 교묘한 가짜뉴스로 여론을 자극해서 번번이 정부 정책의 발목을 잡죠. 아날로그 정부는 디지털 포퓰리즘에 어떻게 맞설지 몰라 허둥대기만 하고요. 결국 디지털 소통에 실패한 룰라 대통령이 선택한 대응책은 소셜미디어 규제. 가짜뉴스를 포함한 불법 콘텐츠에 대해 플랫폼이 책임지게 만들겠다는 건데요. ‘사실상 검열’이란 반발이 일면서, 이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이 커집니다. 브라질 보베스파 지수는 올해 들어 15.75%나 올랐습니다. 지난해 바닥을 쳤던 헤알화 통화가치(달러화 기준)는 16% 넘게 뛰었고요. 한동안 떠났던 해외 투자자들이 올해 초부터 다시 브라질로 돌아옵니다.투자자들이 다시 룰라 정부를 믿어보기로 한 걸까요? 그건 아니고요. 최근 투자자를 환호하게 하는 건 룰라의 지지율 급락입니다. 2026년 대선에서 그가 당선될 가능성이 사라지고 있단 의미니까요. 모건스탠리는 5월 보고서에서 브라질 시장을 낙관적으로 평가했는데요. “앞으로의 선거 일정이 필요한 정책변화의 기회를 열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밝혔죠. 오를 대로 오른 기준금리가 앞으로 떨어질 일만 남았다는 전망 역시 투자자들이 브라질 증시를 낙관적으로 보는 이유입니다.현재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은 출마가 금지된 데다, 쿠데타 모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상황이고요. 누가 야당 대선후보로 나설진 아직 알 수 없습니다(현재로선 타르치시오 드 프레이타스 상파울루 주지사가 가장 많이 거론됨). 그런데도 시장에선 임기가 18개월이나 남은 ‘남미 좌파의 대부’ 룰라의 퇴장을 기정사실로 보고 있죠. 한 시대를 풍미한 정치인의 마지막이라기엔 좀 초라한데요. 역시 시대를 초월한다는 건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By.딥다이브미국 언론은 룰라에게서 바이든 전 대통령을 보더군요. 마땅한 차기 주자를 키우지 않은 채 나이 든 리더에 의존한 좌파 정당이 몰락을 자초한다는 해석인데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룰라 브라질 대통령 지지율이 역대 최저로 떨어졌습니다. 국민들은 경제난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브라질의 거시 경제 지표는 비교적 탄탄하지만, 소비자들이 민감한 식품 가격이 뛰었고, 기준금리가 15%까지 올랐습니다.     -재정 적자 감축이 시급한 브라질이지만, 룰라 대통령은 취임 뒤 공공지출 확대 정책을 지속해 왔습니다. 이에 투자자들이 불안해하면서 지난해 말 헤알화 가치는 폭락했죠. -가짜뉴스 확산은 룰라 정부의 발목을 잡습니다. 디지털 여론전에서 좌파 정부는 번번이 패배합니다. 실제보다 국민들이 경제가 더 좋지 않다고 느끼는 이유이죠. 벌써부터 투자자들은 룰라의 4선 당선은 어렵다는 데 베팅하기 시작했습니다. 브라질 증시와 통화가치는 살아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7월 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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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 창작자가 졌다? AI기업 손 들어준 저작권 판결 의미[딥다이브]

    창작자 허락 없이 소설·음악·영상을 통째로 인공지능(AI) 학습에 사용한다면? 저작권 침해일까요, 아닐까요. 이 치열한 논쟁과 관련한 역사적인 판결이 미국에서 나왔죠. 결론은 ‘저작권 침해가 아니다’. 연이은 판결에서 미국 법원이 AI 기업 손을 들어줬는데요.아, 이렇게 인간 창작자들은 무너지는 걸까요. AI 기업은 이제 아무 콘텐츠나 마음대로 가져다 써도 되는 걸까요? 글쎄요. 판결문을 좀 더 살펴보면 꼭 그렇진 않습니다. 오히려 AI 기업 방어논리의 약점이 드러나기 시작했죠. ‘AI 대 인간’ 저작권 분쟁을 들여다봅니다.*이 기사는 7월 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허락 따윈 필요 없다생성형 AI가 자기 작품을 무단으로 학습한 걸 알게 된 작가들이 미국에서 소송을 냈습니다. AI 챗봇은 그들의 책 내용을 요약할 수 있었고, 일부 구절은 그대로 복제해 내기도 했죠. ‘내 작품을 AI 학습에 이용해도 된다’고 허락한 적 없는데 말이죠.소송 과정에서 밝혀진 사실은 다소 충격적이었습니다. 기술 기업 메타와 앤트로픽은 각각 수백만권의 책을 P2P 불법복제 사이트를 통해 입수해 AI 학습 데이터로 썼습니다. 그게 가장 빠르고 간편하다는 이유였죠. 출판사·저자와 일일이 라이선스 계약을 맺기란 꽤 번거로우니까요. 이는 회사의 최고위층(메타의 저커버그 CEO 포함)에게도 보고된 일이었습니다.그래서 법원은 저자 허락 없이 책을 함부로 AI 학습에 사용하면 안 된다고 AI 기업에 철퇴를 내렸을까요? 아니, 그 반대였습니다. 책을 무단으로 AI 학습에 이용한 것 자체는 저작권 침해가 아니고 문제없다고 판결했죠. 다만 책을 정상적으로 사지 않고 어둠의 경로로 입수한 부분은 문제이니, 그건 별도 사건으로 다루겠다고 했습니다.즉, 기업이 어떤 책을 서점에서 사서, 한 장씩 전부 스캔한 뒤 그 PDF 파일을 AI 훈련에 썼다면? (실제 앤트로픽은 이렇게도 했습니다.) 그건 저작권법에 어긋나지 않는 합법이라는 겁니다. 별도의 저자 허락이나 라이선스 계약이 없더라도 말이죠.이게 바로 6월 23일 ‘앤트로픽 대 작가 3인’의 저작권 소송에 대한 판결, 6월 25일 ‘메타 대 13명 작가’의 비슷한 소송에 대한 판결의 공통된 결론입니다. 생성형 AI 모델의 저작권 침해 소송과 관련해 1심 판결이 미국에서 내려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죠. 전 세계가 이에 주목했습니다.‘공정이용’이란 방패미국 법원은 왜 저자가 아닌 AI 기업 손을 들어줬을까요. LLM(대규모 언어모델) 훈련을 위해 책을 이용하는 건 ‘공정 이용(fair use)’에 해당한다는 기업 측 논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딥다이브 기사를 쓸 때 저는 종종 책을 인용합니다. ‘기사에 책 내용을 인용해도 되나요?’라고 저자나 출판사에 일일이 허락을 구할 필요 없죠. ①그 책과 딥다이브 기사는 누가 봐도 목적과 성격이 다르고요(변형적), ②기사에 인용되는 부분은 극히 일부인 데다, ③무엇보다 기사로 인해 그 책이 덜 팔릴 가능성(시장 피해)이 없기 때문이죠.바로 이런 게 ‘공정이용’에 해당합니다. 이번 소송에서 판사들이 ‘저작권 침해가 아니다’라며 AI 기업 손을 들어준 논리이죠.앤트로픽의 AI 모델 ‘클로드’나 메타 ‘라마’는 분명히 작가들의 책을 통째로 학습했습니다. 아마 100% 암기하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클로드나 라마는 그 책의 내용을 그대로 줄줄 읊기 위해 그걸 학습한 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문맥에 맞는 새로운 텍스트를 생성해 내는 게 AI 학습의 목적이었죠.간혹 책의 내용이 AI 답변에 등장하더라도 극히 일부일 겁니다. 예컨대 소송 과정에서 여러 시도를 했지만, 메타의 ‘라마’는 학습한 특정 책을 50단어 넘게 복제해 내진 못했다고 하죠(메타가 책을 그대로 출력하지 않도록 AI를 훈련시켰기 때문입니다).“작품을 LLM 훈련에 사용하는 목적과 성격은 놀랍도록 변형적이다.” (앤트로픽 사건을 담당한 윌리엄 알섭 판사)“메타가 책을 사용한 건 책과는 ‘다른 목적’과 ‘다른 성격’을 가졌다는 점, 즉 매우 변형적이란 점엔 의문이 없다.” (메타 사건 담당한 빈스 차브리아 판사)‘공정이용이니까 저작권 침해가 아니’라는 AI 기업의 논리가 통했습니다.피해 보는 건 미래의 창작자그런데 공정이용 조건 중 ③번, 시장 피해 부분은 어떨까요. 특정 작가 작품을 모조리 학습한 AI로 인해 비슷한 스타일의 작품이 수천, 수만개씩 쏟아져 나온다면? 그땐 AI 출력물이 원본의 시장까지 잡아먹게 되지 않을까요.이 부분에선 판사들 의견이 갈립니다. 앤트로픽 사건을 담당한 알섭 판사는 이 한마디로 일축했죠. “저자들의 주장은 어린이에게 글쓰기를 훈련시키는 게 경쟁작품의 폭발적 증가를 초래할 거라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혹시 AI 출력물이 내 작품을 대체할지 모르니까 내 작품을 AI 학습에 쓰지 마’라는 주장은 너무 나간 거라고 보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반면 메타 사건을 판결한 차브리아 판사는 이런 시장 잠식의 위험성이 상당하다고 봅니다. 그는 판결문에서 “알섭 판사의 비유(AI를 어린이에 비유한 것)가 부적절하다”고 대놓고 비판했는데요. 그는 이렇게 강조합니다. “이 사건은 과거 사례와 달리 원본 작품에 사용된 것보다 극히 적은 시간과 창의성만으로 수백 만개의 2차 작품을 생성할 수 있는 기술을 포함한다. 따라서 시장 희석 개념이 매우 중요하다.” 상대가 인간이 아닌 AI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봐야 한다는 거죠.아울러 판결문에서 이렇게 지적합니다. “AI로 생성된 책은 아가사 크리스트 작품 시장엔 큰 영향을 미치지 않겠지만, 차세대 아가사 크리스티가 주목받거나 충분한 책을 팔아서 계속 글을 쓰는 걸 방해할 수 있다. 특정 논픽션 시장, 예를 들어 정원관리 방법에 관한 책은 LLM으로 인해 크게 위축될 수 있다.”심리 과정에선 이런 얘기도 했습니다. “(메타의 라마) 모델이 테일러 스위프트 노래 스타일로 100만 곡을 제작해도 테일러 스위프트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차세대 테일러 스위프트는 어떨까요? 알려지지 않은 신진 아티스트가 노래를 쓰고 있다면요?”이미 공고한 팬덤을 구축해 놓은 유명 작가라면, AI 시대에도 이름값이 유지될 겁니다. 하지만 이제 막 꽃피려는 신진 창작가들은 AI 발 콘텐츠 홍수 속에서 설 자리를 찾기 어려워지겠죠. 작가 이름 석 자보다는 그 내용과 주제로 독자 선택을 받는 논픽션 서적이나 뉴스, 잡지 시장은 타격이 훨씬 클 겁니다. 어쩌면 공짜로 풀릴 수많은 AI 제작 콘텐츠에 파묻혀 질식하게 될지 모르죠.여기서 생각할 점. 저작권법은 왜 있는 걸까요. 인간이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창작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주기 위한 법입니다. 만약 AI 학습이 그 인센티브를 앗아가는 결과로 이어진다면? 그건 공정이용이라 할 수 없죠.그런데도 차브리아 판사는 마지못해 메타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원고(작가) 측이 잠재적으로 승소할 가능성이 있는 주장-메타가 원고들과 비슷한 작품으로 시장을 침범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죠. 만약 AI 때문에 작가들의 출판 시장이 직접적 또는 잠재적으로 피해를 보게 된다는 걸 입증하는 구체적인 증거가 있었다면 판결이 뒤바뀌었을 거란 뜻입니다.소비자 가로채는 AI겉으론 이번 두 저작권 소송에서 AI 기업이 이긴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절반의 승리일 뿐입니다. ①불법적 경로로 수집한 데이터로 AI를 학습시키는 건 불법이라는 게 확실해졌고요. (불법 복제로 얻은 책을 나중에 직접 구입하더라도, 이전 불법행위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판결) ②AI 출력물이 기존 창작자 시장을 잠식하느냐 아니냐를 둘러싼 논란은 더 커질 테니까요.결국 AI와 인간 창작자 간 법정 싸움에서 중요한 건 ‘입력’이 아닌 ‘출력’입니다. ‘내 허락 없이 AI 학습(입력)에 쓰지 마!’라는 주장만으론 AI 기업의 ‘공정 이용’ 논리를 깨는 데 한계가 있고요. ‘내 작품으로 학습한 AI 출력물이 내 시장을 망가뜨리고 있다’면서 증거를 들이밀어야 하는 거죠.사실 AI 출력물이 인간 창작물과 얼마나 비슷한지는 쉽게 드러납니다. 예컨대 최근 디즈니와 NBC유니버설이 생성형 AI 플랫폼 미드저니를 상대로 저작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는데요. 그 소장에서 제시한 미드저니의 저작권 침해 사례들을 한번 보시죠.물론 이런 AI 생성 이미지가 실제로 기업에 어떤 피해를 얼마나 끼쳤느냐에 대해선 다툴 여지가 크지만요. 작품을 베껴도 너무 베꼈다는 것만은 한눈에 바로 알 수 있죠. 두 제작사는 소장에서 “미드저니는 전형적인 저작권 무임승차자이자 끝없는 표절의 온상”이라고 비판합니다.다양한 분야에서 AI 출력물과 관련한 비슷한 소송이 진행 중입니다. 뉴욕타임스가 2023년 오픈AI와 마이크로소프트를 상대로 제기한 저작권 침해 소송은 여전히 진행 중인데요. 뉴욕타임스 변호인은 지난 1월 심리에서 챗GPT가 뉴욕타임스에서 다룬 주제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기사 내용을 그대로 따라 했다는 점을 강조했죠. 그 결과 챗봇이 뉴스 사이트로 와야 할 소비자를 가로채는 ‘시장 대체(market substitution)’가 나타난다는 주장입니다.AI 챗봇은 이미 뉴스 사이트 트래픽을 붕괴시켰습니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 보도에 따르면 워싱턴포스트, 허프포스트, 비즈니스인사이더 같은 미국 언론사는 검색을 통한 사이트 유입량이 3년 전보다 50% 이상 줄었다죠. AI 챗봇이 구글 검색을 대체하면서 더 이상 링크를 클릭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물론 시장 침해를 입증한다고 해서 ‘AI 훈련 일시 중단’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질 것 같진 않고요. 현실적인 해결책은 창작자와 AI 기업, 양측이 합의하는 거겠죠. 기업이 적정한 수준의 사용료를 내며 저작물을 이용하는 라이선스 계약을 맺는 식이 될 겁니다.바로 이런 일이 음반 업계에서 진행 중입니다. AI 스타트업 수노(Suno)와 유디오(Udio)는 간단한 입력어(예- 팝 느낌의 생일 축하 노래)만으로 노래를 뚝딱 만들어주는데요. 당연히 방대한 음악을 AI 학습 데이터로 사용했죠. 결국 지난해 주요 음반사가 속한 미국음반산업협회가 두 기업에 수십억 달러짜리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한판 제대로 붙는 듯했는데요. 최근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주요 음반사들(유니버설뮤직·워너뮤직·소니뮤직)이 두 AI 기업과 라이선스 계약을 맺으면서 일부 지분을 인수하는 협상을 진행 중이라고 하죠. 싸움을 멈추고 손을 잡으려는 겁니다. 어차피 AI라는 기술 흐름을 거스를 순 없다는 걸 인정한 거죠. 놀라운 협상력으로 스트리밍이란 디지털 신기술에 올라탔던 음반 업계는 AI 시대에도 주도권을 지킬 수 있을까요. 결말은 아직 알 수 없지만 왠지 인간 창작자 집단을 응원하게 됩니다. By.딥다이브 AI로 인해 인간 창작자가 더 이상 창작활동으로 먹고 살 수 없게 된다면, 그래서 인간의 창작물이 자취를 감춘다면, 그때 AI는 무엇을 가지고 학습하게 될까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창작자의 허락 없이 작품을 AI 학습에 이용하는 건 저작권 침해일까요. 최근 미국에서 나온 두 판결은 ‘저작권 침해가 아니다’라는 결론입니다. 기존 작품과 전혀 다른 목적과 성격을 가지는 ‘공정이용’에 해당한다고 봤기 때문이죠. -하지만 AI가 쏟아낼 수많은 출력물이 원본 작품의 시장을 잡아먹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미래 창작자들이 활동할 잠재적 시장이 사라지는 게 아닐까요. 앞으로 이어질 AI 저작권 소송에선 바로 이 부분이 쟁점이 될 겁니다. -영화 제작사, 언론사들이 줄줄이 AI 기업을 상대로 저작권 소송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인간 대 AI의 치열한 분쟁은 당분간 이어질 텐데요. 이 가운데 음악 생성 AI 스타트업과 싸움을 멈추고 손잡으려 하는 주요 음반 제작사의 행보가 눈에 띕니다. *이 기사는 7월 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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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셀가 3분의 1토막…화폐가 된 장난감, 팝마트의 운명은[딥다이브]

    미국 로스앤젤레스 매장 앞엔 밤새 긴 줄이 늘어섰고, 영국 런던 매장에선 싸움이 벌어졌고, 서울 명동 매장엔 경찰이 출동했습니다. 급기야 6월 10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경매에선 ‘라부부’ 인형 하나가 2억원에 낙찰돼 전 세계적 화제가 됐죠. 중국 장난감 기업 ‘팝마트(Pop Mart)’ 이야기인데요.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요. 겨우 보름 남짓 지난 지금, 중국 SNS에선 ‘라부부 가격 폭락’이 큰 이슈입니다. 천정부지로 치솟던 중고 판매가격이 갑자기 반토막 이하로 뚝 떨어졌기 때문이죠. 롤러코스터가 따로 없는 장난감 세계, 팝마트 현상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6월 2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중국의 디즈니? 산리오?아마 장난감에 관심 없던 분들도 팝마트 또는 라부부라는 이름을 최근 한 번쯤 들어봤을 겁니다. 팝마트는 1987년생 왕닝이 2010년 창업한 장난감 기업이고요. 30여개국에 521개 매장을 운영 중입니다. 라부부는 뾰족한 귀와 아홉 개의 톱니 이빨을 가진 요정인데요. 홍콩 아티스트 카싱 룽의 그림책 속 캐릭터로, 2019년부터 팝마트와 협업을 통해 인형으로 팔리고 있죠.그리고 이 라부부가 블랙핑크 리사, 리한나 같은 슈퍼스타들의 사랑을 받으며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고요. 덕분에 팝마트 주가는 1년 만에 580% 급등합니다. 시가총액은 현재 약 58조원. ‘헬로 키티’의 일본 산리오(16.5조원)와 ‘바비’의 미국 마텔(8.4조원) 시총을 합친 것의 두배가 넘죠.중국산 털북숭이 인형이 전 세계를 이렇게까지 열광시키는 이유가 뭘까. 각종 분석이 쏟아져 나왔죠. 리사 같은 유명인 영향이다, ‘명품’처럼 포지셔닝한 효과다, 틱톡을 통한 바이럴 덕분이다 등등.중국 신화통신은 이달 초 해외의 라부부 현상을 조명하는 기사를 냈습니다. “감성적 매력이 팝마트를 기존 장난감 업체와 차별화한다. 팝마트는 단순히 피규어를 판매하는 게 아니라 감정, 의식, 공유된 경험을 판매한다. 20대 소비자들에게 팝마트는 일종의 라이프스타일이 됐다.” 팝마트가 중국 ‘소프트 파워’의 부상을 보여준다는 뿌듯함이 담긴 해석이었죠.그럼, 팝마트는 많이들 비유하듯이 ‘중국판 디즈니’ 또는 ‘중국판 산리오’라 할 수 있을까요. 장난감 기업이란 점은 서로 비슷하지만, 추구하는 전략은 다릅니다.일단 디즈니는 애니메이션이 먼저, 장난감이 나중이죠. 디즈니 캐릭터는 각각 풍부한 서사가 있고, 소비자들은 그 스토리에 끌리게 되는데요. 이와 달리 팝마트의 캐릭터들은 별다른 스토리가 없어요. 그저 막연한 표정과 이미지(몰리-우울한 눈빛, 라부부-장난기 있는 표정)만 있죠. 그렇게 빈 공간이 많은 만큼 소비자는 각자 좋을 대로 캐릭터에 의미를 부여합니다.그런 점에선 팝마트 전략은 산리오와 비슷한 점이 있는데요. 산리오의 헬로키티는 1974년 탄생한 캐릭터이지만 최초의 애니메이션은 1990년대에나 나왔고요. 2014년엔 산리오가 ‘헬로키티는 고양이가 아니라 여자아이’라고 공식입장을 밝히면서 뒤늦게 팬들을 술렁이게 했죠(2족 보행을 하고 고양이를 애완동물로 기른다는 게 그 근거).다만 산리오는 여러 캐릭터 중에도 여전히 50살 넘은 헬로키티 인기가 단연 톱인데요(매출 중 헬로키티 비중 약 30%). 반면 팝마트에선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가 몰리-디무-라부부 순으로 바뀌면서, 세대교체가 빠르게 이뤄지는 중입니다.그리고 무엇보다 팝마트를 차별화하는 가장 큰 인기 포인트는 따로 있는데요. 바로 ‘블라인드 박스’라는 판매 방식입니다.블라인드 박스 전략2022년 대한민국을 휩쓸었던 포켓몬빵 열풍을 기억하시나요. 빵과 함께 들어있는 캐릭터 스티커(띠부띠부씰)를 모으려는 수요가 폭발하면서 품귀현상까지 벌어졌는데요. 뜯을 때까진 뭐가 나올지 모른다는 점이 소비자들의 충동을 강렬하게 자극했죠.팝마트의 ‘블라인드 박스’가 바로 이런 방식입니다. 팝마트 피규어 1상자 가격은 한국에서 1만5000원 정도인데요. 이걸 1상자만 사면 보통 12가지 디자인 중 하나가 무작위로 나옵니다. 만약 12개 중 꼭 갖고 싶은 디자인이 있다면? 아예 18만원짜리 12개 세트 박스를 사버리는 게 방법이죠.그리고 12가지 디자인에 플러스 하나가 더 있는데요. 이 13번째 디자인은 ‘시크릿 에디션’이라서 모든 세트에 들어있는 게 아닌 희귀 아이템입니다. 이게 나올 확률은 144분의 1이죠. 상당히 운이 좋아야 얻을 수 있는 겁니다.무엇이 나올지 모른다는 설렘과 어쩌면 내가 정말 원하는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 팝마트 제품 박스를 열 때면 마치 스크래치 복권을 긁는 것과 비슷한 희열을 느끼게 됩니다. 여기에 자신만의 컬렉션을 완성하는 만족감과 희귀한 아이템을 발견하는 짜릿함까지. 어린이뿐 아니라 30~40대 성인들까지 팝마트에 열광합니다. 명품처럼 대단히 비싸지 않고, 큰 에너지를 들이지 않으면서도 상당한 만족감을 안겨주는 거죠.이런 블라인드 박스에 대한 열광과 집착을 좀 더 들여다보기 위해 경영학과 심리학 연구를 가져와 봤습니다.① 불확실한 동기화 효과(motivating-uncertainty effect)뭐가 걸릴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은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법입니다. 경험을 게임화하기 때문이죠. 인간은 보상이 불확실할 때 오히려 그 일을 하려는 동기부여가 되는 경향이 있는데요.2015년 미국 시카고대 경영대학원 연구팀이 했던 유명한 실험 결과를 볼까요. 연구팀은 참가자들에게 2분 동안 빨대로 1.4L 물을 마시는 일을 수행하게 했습니다. 이 중 A그룹엔 다 마시면 2달러를 주기로 약속했고요(100%의 확률로 2달러 보상). B그룹엔 다 마신 다음 동전 던지기를 해서 앞면이 나오면 2달러, 뒷면에 나오면 1달러를 주겠다고 합니다(50%의 확률). 그리고 결과는? A그룹은 미션을 완성한 사람이 43%에 그쳤지만, B그룹은 70%나 물을 다 마셨죠.이런 결과는 비슷한 다른 실험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요. 돈을 더 줘서가 아니라, 보상이 불확실한 경우에 사람들은 과제를 더 열심히 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게 흥미를 자아내고, 그게 동기 부여로 이어지죠. 불확실한 보상이 일종의 ‘도파민 스위치’가 되는 겁니다. 라부부 블라인드 박스를 사서 여는 것 역시 단순한 구매행위가 아니라 일종의 엔터테인먼트가 됐습니다.②제이가르니크 효과(미완성 효과)사람들은 성공적으로 완수한 일보단 미완성이거나 실수가 있었던 일을 더 잘 기억합니다. 이걸 미완성 효과, 또는 러시아 심리학자 블루마 제이가르니크 이름을 따서 제이가르니크 효과라고 부르는데요.제이가르니크는 한 레스토랑에서 웨이터가 복잡한 주문을 빠짐없이 기억해서 음식을 척척 내왔지만, 막상 서빙한 직후엔 메뉴가 뭐였는지 잊어버리는 걸 보고 이 현상을 연구했죠. 1927년 나온 그의 논문에 따르면 과제를 중간에 중단한 실험 참가자들은 끝까지 마친 집단보다 기억력이 1.9배 더 뛰어났습니다. 끝내지 못해서 찝찝한 일에 대한 기억은 상당히 오래, 강렬하게 남는 거죠.극적인 순간에 ‘다음 편에 계속…’이라며 끊어버리는 드라마나 웹툰이 이런 제이가르니크 효과의 사례이고요. 게임 퀘스트를 깨기 위해 계속 게임에 빠져드는 것도 비슷합니다. ‘조금만 더하면 될 것 같은데’, ‘거의 성공할 뻔했는데’라는 생각이 시간과 돈을 더 투자하게 만들죠.팝마트 블라인드 박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시크릿 에디션’을 뽑을 확률은 144분의 1(0.69%). 왠지 한 번만 더 사면 이걸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구매 욕구를 자극합니다. 일종의 집착이죠.지난해 말 배니티페어와의 인터뷰에서 블랙핑크 리사는 팝마트 라부부에 대한 집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돈을 다 써버렸어요! 뉴욕, 마이애미, 파리. 어디를 가도 팝마트를 찾아다녀요. 마치 보물찾기 같다니까요.”장난감이 화폐가 됐다여기까지 보면 팝마트의 성공은 똑똑한 마케팅의 성과입니다. 일부에선 블라인드 박스를 두고 ‘소소한 도박’ 같다고도 지적하는데요. 긁어서 꽝이 나오면 얻는 게 하나도 없는 복권과 비교하면, 그래도 이게 낫긴 하죠. 블라인드 박스 안엔 귀여운 장난감이 하나 들어있으니까요.하지만 라부부 인기가 ‘광풍’ 수준으로 바뀌면서 이를 불편하게 보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팝마트 자체보다는 라부부를 사서 비싼 값에 되파는 리셀러들 때문이죠.팝마트는 현재 공장을 풀 가동해도 전 세계적으로 급증하는 라부부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리셀러가 늘고 2차 시장에서 비싼 가격에 팔리는 것 자체는 자연스러운데요. 문제는 돈이 된다는 소문에 너무 많은 투기꾼이 이 시장에 몰린 겁니다.그 결과 정상적인 방법으로 웹사이트나 매장에서 제품을 구매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 되어버립니다. 예컨대 중국의 한 자동판매기의 경우엔 전날 밤부터 앞에서 기다렸던 리셀러가 오전 10시 입고된 라부부 신제품을 몽땅 다 쓸어갔고요. 일부 매장에선 매장 직원과 짠 듯한 리셀러가 제품 여러 개를 집어서 뒷문으로 나가는 모습이 목격됐죠. 온라인몰에선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사재기하는 리셀러들 때문에 항상 품절이었고요.구매가 점점 어려워지면서 중국에서 라부부 재판매 가격은 정가의 4~5배 수준으로 뛰었습니다. 희귀한 시크릿 에디션의 경우엔 정가(99위안, 약 1만8000원)의 40배인 4000위안(약 75만원)을 호가했고요. 간신히 정가에 제품을 구한 운 좋은 사람들도 이 정도 되면 ‘프리미엄 붙여서 팔까?’라는 생각이 들 법합니다. 모두가 ‘되팔이’가 되어가는 거죠.더 이상 라부부는 그냥 장난감이 아니라 한몫 크게 잡을 투기 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럴수록 라부부는 더욱 미친 듯이 팔려나갔고, 팝마트 주가는 치솟았죠. 그 결과 얼마 전 민트색 1세대 라부부 한정판 피규어가 108만 위안(2억원)에 팔리는 기록까지 쓴 겁니다.버블 터뜨린 공급 확대이런 중고 판매가와 경매 낙찰가 급등.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으세요. 몇년 전 한국에서도 한정판 스니커즈 붐이 불면서 ‘슈테크(슈즈+재테크)’라는 말이 나왔고요. 또 코로나 때는 몬스테라 알보 잎 한장에 수백만 원에 거래되는 ‘식테크(식물+재테크)’가 유행했죠. 전 세계적인 리셀 열풍을 일으킨 유명 장난감으로는 베어브릭이 있습니다. 일본 기업 메디콤 토이의 곰 장난감 베어브릭은 2008년 최고 15만7000달러의 경매 낙찰가를 기록하기도 했죠. 1990년대 미국 이베이 중고시장을 휩쓸며 수천 달러에 낙찰됐던 곰인형 비니베이비즈 사례도 있고요.제한된 공급과 문화적 매력, 거기에 단순한 즐거움 이상의 가치(지위의 상징+투자 수익)까지. 사람들을 매혹시켜 광풍을 일으키는 것엔 공통점이 있는데요. 이와 비슷한 사례를 취합하다 보면 우리 모두 잘 아는 역사적 사건으로 이어지곤 하죠. 1637년 네덜란드 튤립 버블. 희귀한 튤립 구근 하나 가격이 암스테르담 주택 한 채 가격까지 치솟았다가 불과 넉 달 만에 99% 폭락한 사건인데요.이런 버블을 터뜨리는 가장 큰 요인은 공급 확대입니다. 네덜란드 튤립 버블은 희귀한 구근의 공급량이 늘어날 거란 우려가 1637년 2월 갑자기 퍼지면서 순식간에 붕괴됐죠. 공급이 늘어나고 희소성이 깨지면 거품은 사라지고 시장은 재편됩니다.바로 이런 현상이 팝마트에서도 나타납니다. 6월 18일 밤, 팝마트는 갑자기 라부부 신제품을 3개 판매채널에 재입고한다는 공지를 띄웠죠. 품절돼 도무지 구할 수 없었던 신제품에 처음으로 온라인 예약 판매를 도입한 겁니다. 드디어 밤새 줄 서지 않고도 라부부를 정가에 살 수 있게 된 거죠. 이 제품은 중국 쇼핑몰 티몰에서만 100만개 넘게 팔려나갑니다.화들짝 놀란 건 리셀러들. 갖고 있는 물량을 털어내기 위해 판매가를 쭉쭉 내리기 시작합니다. 한때 2400위안(45만원) 넘게 팔렸던 6개 들이 세트(정가 594위안, 11만원) 판매가격이 650위안(12만원)까지 내려왔고요. 최고 4600위안을 찍었던 시크릿 에디션 상품 판매가도 1900위안으로 곤두박질쳤죠.618 팝마트 사건. 중국 네티즌들은 이렇게 부르며 리셀러들이 된통 당한 걸 고소해하는 분위기입니다. 이를 두고 아마 중국 정부의 입김이 있었을 거란 해석도 나오죠. 6월 20일 중국 인민일보가 블라인드 박스의 폐해를 엄중하게 지적한 기사를 내보낸 게 그 신호인데요. 내막이야 알 수 없지만, 이 리셀 가격 붕괴 영향으로 팝마트 주가도 약간 꺾이긴 했습니다. 최고점(16일 275홍콩달러)과 비교하면 8% 정도 하락했으니까요.이토록 빠른 방향 전환이라니. 이대로 팝마트의 기세도 꺾이는 걸까요. 글쎄요. 사실 리셀가 버블은 언젠간 꺼질 수밖에 없는 거긴 했고요. 주가가 좀 빠졌다곤 하지만, 팝마트의 선행 PER(주가수익비율, 연간 예상 순이익 기준)은 44배에 달합니다. 여전히 산리오(31배)나 마텔(11.5배)보다 고평가됐죠. 아직 그 성장성에 대한 기대는 여전한 건데요.결국 현재 매출의 60%를 차지하는 털북숭이 인형(라부부) 판매, 그걸 뛰어넘는 무언가를 팝마트를 보여줄 수 있느냐가 앞으로의 관건입니다. 얼마 전 팝마트는 자체 스튜디오(베이징 팝마트 문화창의유한회사)를 설립했죠. 애니메이션 시리즈 ‘라부부와 친구들’ 제작에 나섰고, 추후 영화도 만들 거라고 합니다. 핵심 팬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고급 트렌디 제품’에서 디즈니처럼 모든 이의 사랑을 받는 ‘대중 소비재’로 나아가려는 시도인데요. 이 새로운 도전이 성공할 수 있을지, 한번 지켜보시죠. By.딥다이브정신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라부부 열풍도 빠르게 끓어올랐다가 또 빠르게 거품이 가라앉는 듯한데요. 몇년 뒤 라부부는 어떻게 돼있을까요. 추억 속 한때의 유행 상품으로 잊혀질까요, 아니면 헬로 키티처럼 무한의 생명력을 가진 캐릭터로 성장할까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털복숭이 요정 ‘라부부’가 전 세계적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중국판 산리오’ 팝마트 주가는 폭발적으로 성장했죠. -성장의 중심엔 블라인드 박스 판매전략이 있습니다. 뭐가 나올지 모르는 불확실성이 구매욕구를 더 자극하고, 다음 번엔 희귀템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단 느낌이 집착으로 이어지죠. -라부부가 한몫 잡을 투기수단으로 변질되면서 리셀러들이 시장을 혼란하게 만듭니다. 얼마 전 팝마트는 중국에서 신제품 물량을 대거 풀어 리셀 시장을 초토화시켰습니다. 마치 튤립버블을 연상케 하는데요. 팝마트는 투기수단이 아닌 장난감으로서의 본연의 가치를 어디까지 확장시킬 수 있을까요.*이 기사는 6월 2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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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물간 줄 알았는데 대반전…유럽 시총 1위 SAP가 잘나가는 이유[딥다이브]

    유럽에서 가장 가치 있는 기업은 어디일까요. 명품 패션그룹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 프랑스)? 비만 주사제 위고비의 노보 노디스크(덴마크)? 아니, 이제 이 기업입니다. SAP. 독일의 IT 기업이죠. (‘에스에이피’라고 읽습니다.) SAP는 ERP(전사적 자원관리)라고 부르는 업무용 소프트웨어로 유명한 기업입니다. 느리고 시대에 뒤처진 줄 알았던 거대기업 SAP는 어떻게 유럽을 대표하는 AI 선두 주자로 떠올랐을까요. 오래된 IT 기업의 혁신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오늘은 SAP의 변신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6월 2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SAP가 강했던 이유는SAP, 아마 그 이름조차 낯선 분들이 많을 겁니다. 소프트웨어 중에서도 주로 대기업에서 쓰는 업무용 제품을 만들고 파는 기업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일상에서 SAP 프로그램을 접할 일은 없습니다. 대신 웬만한 글로벌 대기업(엔비디아, 삼성전자 포함)은 모두 SAP 제품을 쓰죠. 세계 100대 기업 중 98곳이 SAP 고객이라는데요. 전 세계 고객사 수는 40만 개에 달합니다.SAP의 대표상품은 ERP(전사적 자원관리)이죠. ERP는 또 뭐냐고요? 30~40년 전만 해도 기업의 각 부서는 각자의 영역에서 따로 일했습니다. 그 시절엔 영업팀이 고객 주문을 접수하면 그걸 일일이 전화나 서류작업으로 넘겨줘야만 구매팀이 그 주문을 파악할 수 있었죠. ERP는 이 모든 걸(영업·생산·구매·회계·물류 등) 하나의 시스템으로 합친 겁니다. 영업팀으로 주문이 들어오면 그게 바로 구매팀 화면에도 뜨고요. 모든 거래가 발생하는 즉시 장부에 기록되기 때문에 재무팀은 바로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죠. 수백 군데에서 주문받고, 전 세계 10여 개 공장에서 제조하는 대기업이라면 ERP 없인 일이 돌아가질 않습니다.IBM 출신 엔지니어 5명이 1972년 설립한 SAP는 ERP를 사실상 발명한 기업입니다. 글로벌 ERP 시장에서 SAP는 오라클, 마이크로소프트 등과 경쟁 중인데요. 큰 기업일수록 가격이 비싸더라도(수십~수백억 원) 보안성 높고 안정적이고 신뢰할 만한 제품을 주로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또 ERP는 워낙 방대하고 복잡한 시스템이라, 일단 한번 들여놓으면 웬만해선 바꾸기가 불가능합니다. 오죽하면 “CIO(최고정보책임자)가 해고당할 가장 확실한 방법은 보안 사고 아니면 ERP 교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죠.바로 그 두 가지 점-①다른 큰 기업들도 SAP를 쓰니까 따라서 SAP를 선택한다(“SAP를 선택했다고 해서 해고된 사람은 없다”) ②중간에 바꾸면 매우 골치 아프기 때문에 그냥 계속 쓸 수밖에 없다(전환비용 큼=강력한 해자=록인 효과)-이 SAP가 수십 년 동안 ERP 시장에서 세계 1위 자리를 지켜온 큰 이유로 꼽혔습니다. SAP 제품을 실제로 썼던 IT 담당자들 사이에선 사용성 면에서 악명 높았었는데도 말이죠(UX가 끔찍하다, 1970년대 제품 같다 등등). 혁신기업의 딜레마2010년대, SAP는 실적과 주가 모두 꽤 잘나갔습니다. 하지만 뭔가 시대에 뒤처지고 있단 느낌은 안팎에서 모두 받았죠. 당시 SAP 주요 제품은 클라우드 기반이 아니라 구축형(온프레미스, on-premise). 고객이 큰 비용을 들여 한꺼번에 구입한 뒤, 이를 자기네 서버에 직접 설치해서 사용하는 오래된 방식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은 일단 한번 설치하면 업그레이드가 쉽지 않죠. 돈도 많이 들고 너무 복잡하니까요. 업그레이드는 5~7년에 한 번쯤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온갖 훌륭한 신기술이 쏟아져 나왔고, SAP의 주요 제품은 점점 낡고 구닥다리처럼 보였습니다.이대로 계속 가면 고객을 붙잡을 수 없게 된다, 미래를 위해선 클라우드로 가야만 한다. 나아갈 방향은 빤히 보였습니다. 전임 CEO인 빌 맥더모트는 카리스마 넘치는 미국인이었는데요. 그는 위기 돌파를 위해 과감한 M&A를 거듭했습니다. 2011년부터 유명 소프트웨어 기업 인수에 총 310억 달러(약 43조원)를 썼고요. 덕분에 새로운 클라우드 기반 제품을 잇달아 추가했죠. 이 시절 SAP는 분명 진취적으로 미래를 모색하는 기업처럼 보였습니다.그래서 회사가 달라졌을까요? 아니요. 겉보기엔 많은 신규 클라우드형 제품을 쏟아냈지만, 정작 핵심 사업은 그대로였습니다. 왜? 여전히 기존 사업 모델(구축형 ERP)로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있었거든요. 굳이 돈 잘 버는 사업의 방향을 틀어야 할 필요를 못 느낀 거죠. 고객들 역시 일하는 방식을 바꾸거나 추가 비용을 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고요(대기업 IT 담당 부서는 원래 보수적입니다). 무엇보다 당장 돈이 된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사실 클라우드로 바뀌면 일시적으로는 수익이 줄어들 수 있죠. 기존엔 고객이 거액의 라이선스 비용을 한꺼번에 냈지만, 클라우드 기반에선 그걸 여러 해에 걸쳐 구독료로 나눠 내게 되니까요.말로는 ‘과감한 혁신’을 외쳤지만, 실제론 치고 나가지 못했습니다. SAP는 전형적인 ‘혁신가의 딜레마’에 빠져있었죠. 혁신을 위한 모든 자원(인력·자금·기술)은 충분히 갖고 있었지만, 진짜 파괴적 혁신을 하려면 스스로에게 칼을 겨눠야 했습니다. 당연히 주저했고, 그만큼 혁신은 지체됐죠.주가 -22% 폭탄선언2019년 SAP는 신임 CEO로 크리스티안 클라인 COO를 발탁합니다. 1980년생인 클라인은 1999년 대학생 인턴으로 입사해 CEO까지 오른 완전한 ‘SAP 맨’이었죠. SAP를 속속들이 누구보다 잘 아는 부드러운 말투의 독일인이 개혁의 키를 쥐게 됐는데요.2020년 10월, 클라인 CEO가 초대형 폭탄을 터뜨립니다. 핵심제품인 ERP 고객 기반을 클라우드로 빠르게 전환한다는 계획과 함께, 이를 위한 투자로 인해 향후 영업이익률이 기존 전망보다 4~5%포인트나 감소할 거라고 선언했죠. 장밋빛이었던 이전의 중기 계획은 무효화하고, 수년간 약 40억 유로의 이익이 날아갈 거라고 예고한 겁니다. 클라인 CEO는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투자자들은 완전히 패닉에 빠졌습니다. 독일 시총 1위였던 SAP 주가는 이날 하루 만에 22% 넘게 폭락합니다. 24년 만의 최대 낙폭. 약 300억 유로(약 47조원)의 기업 가치가 증발합니다. 당시 블룸버그는 기사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주가 폭락은 투자자들이 인내심을 잃었음을 보여줍니다. 그가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제한적입니다. 클라인 CEO는 오르기 힘든 가파른 산 앞에 서 있습니다.”클라우드+AI 다 잡았다그리고 2025년. SAP는 노보 노디스크(덴마크 제약사), ASML(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에르메스, LVMH(프랑스 명품업체)를 모두 제치고 유럽 상장사 시총 1위(약 490조원)에 올랐습니다(세계 순위는 27위). 이제 폭스바겐과 메르세데스 벤츠를 포함한 독일의 모든 자동차 부문을 합친 것보다 SAP 시총이 더 크죠. 지난 3년 주가 상승률은 170%에 달합니다.주가 급등의 원동력은 역시 클라우드. SAP는 올해 1분기 매출 중 55%(49.9억 유로)를 클라우드에서 올렸습니다. 소프트웨어 라이선스로 벌어들인 매출(29.5억 유로)은 1년 전보다 4% 줄었지만, 클라우드 매출은 26%나 늘었죠. 이런 추세대로 가면 올해 연간 216억~219억 유로의 매출을 클라우드 부문이 거뜬히 거둘 걸로 기대됩니다. 영업이익(연간 106억 달러 추정) 역시 30% 급증할 전망이고요. “지난 2~3년간의 공격적인 클라우드 전환이 성숙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걸 보여준다”는 분석(블룸버그 인텔리전스 애널리스트 아누락 라나)이 나옵니다. 구독모델로 바꾸면서 고객 1인당 평균 지출액은 늘어나는 추세이죠. SAP가 AI(인공지능) 서비스 기업으로 나아간 점도 주가엔 호재입니다. 클라우드로 전환했기에 그 위에 AI 서비스를 얹을 수 있게 된 건데요.예를 들어 SAP가 모든 클라우드 구독 고객에게 제공하는 ‘쥴(Joule)’이란 이름의 AI 에이전트가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ERP 사용을 위해 복잡한 키보드 단축기를 외울 필요 없이, 이런 식으로 쥴에게 명령하면 필요한 데이터를 뽑아낼 수 있습니다. ‘쥴. 이 재료의 공급업체를 찾고 싶어. 비용과 납품 가능 여부를 기준으로 공급업체를 선택하게 해줘.’클라인 CEO는 이렇게 말합니다. “쥴이 새로운 우리의 UI가 될 겁니다. SAP를 인간의 언어로 사용하는 것과 거의 같지만, 더 이상 데이터를 입력하고 데이터를 내보내고 문서를 화면으로 볼 필요가 없죠.”SAP는 대규모언어모델(LLM)을 자체 개발하지도 않고, 초대형 데이터센터를 추가로 짓는데 열 올리지도 않습니다. 대신 여러 LLM과 협업하고, AWS·애저·구글을 포함한 다양한 클라우드서비스를 통해 제품을 제공하는 AI 기업이죠. “고객은 선택권을 좋아합니다. 저는 ‘보세요. 우린 이런 파트너십에 열려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승리의 공식이라고 생각합니다.”구식 소프트웨어로 여겨졌던 ERP에 클라우드 컴퓨팅과 AI가 결합되자 새로운 스토리가 펼쳐집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줄 알았던 레거시 IT 기업이 갑자기 성장주로 변모했죠. 53년 역사의 기술 기업이 파괴적인 기술 변혁 시대의 선두 주자로 꼽힐 줄이야. 괄목상대할 만한 일입니다.물론 이런 전환 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닙니다. SAP는 2023년과 2024년에 각각 3000명의 직원을 해고했죠. “AI를 비롯한 전략적 성장 분야로의 전환을 위한 것”이라고 회사 측은 밝혔는데요. 독일에선 수천 개 일자리가 사라졌지만, 인도에선 오히려 채용을 크게 늘렸습니다. 다소 씁쓸한 AI 발 비용 절감이죠.또 지난해 클라인 CEO가 받은 연봉(1900만 유로, 약 302억원)이 전년보다 165%나 급증해서 화제였는데요. 같은 기간 독일 직원 2만4000명의 연봉인상률(2.4%)과의 대조가 극적이어서 내부 불만이 쌓여갑니다.하지만 클라인 CEO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라며 변화가 계속될 거라고 말합니다. “겸손을 잃지 마세요. 성공을 자축하며 ‘좋아, 앞으로 10년은 지금처럼만 하면 돼’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안 돼요, 안 돼요. 세상은 변하고 있어요.” By.딥다이브SAP의 변신은 어쩐지 마이크로소프트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돈 잘 벌지만 정체된 거대 IT 기업, 완전히 내부 출신인 CEO, 클라우드와 AI로의 급격한 방향 전환.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대기업 ERP 분야의 강자, 독일 소프트웨어 기업 SAP. 강력한 해자를 가진 탄탄한 IT 기업이었지만 시대에 뒤처진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민첩한 변화를 위해 필요한 건 클라우드로의 전환. 2010년대 SAP는 연이은 M&A에 나섭니다. 하지만 아무리 거액을 들여 M&A를 하고 신제품을 추가해도 회사는 실제론 바뀌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돈 잘 버는 핵심 사업을 흔들고 싶진 않았으니까요. 혁신기업의 딜레마였습니다.-2020년 클라인 CEO는 클라우드로의 과감한 전환과 함께 이로 인해 당분간 이익이 급감할 거라고 선언합니다. 투자자들은 패닉에 빠졌고, 한동안 주가는 바닥을 쳤죠. 추진력 있게 밀어붙인 효과는 이제 나타납니다. 클라우드 컴퓨팅에 AI까지 결합하면서 SAP는 새로운 성장 스토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사는 6월 2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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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넷플릭스는 왜 점점 TV가 되어갈까[딥다이브]

    혹시 넷플릭스 구독하시나요? 전 세계 구독자 수 3억명을 이미 돌파했건만 넷플릭스는 여전히 성장을 멈출 줄 모르는데요. 요즘엔 집에 TV가 있어도 방송 채널이 아니라 넷플릭스나 유튜브만 본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죠.혹시 이러다가 언젠가는 MBC나 SBS 같은 지상파 방송도 넷플릭스로 아예 들어가 버리는 게 아닐까요? 설마라고 하기엔 이미 시작된 흐름입니다. 최근 프랑스 최대 민간 방송사 TF1이 모든 채널의 실시간 방송을 넷플릭스에 제공하는 계약을 맺었습니다. TV 방송의 시대가 이렇게 저무는 건가 싶은 역사적인 계약인데요. TV가 된 넷플릭스를 딥다이브 해보겠습니다.*이 기사는 6월 20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실시간 방송을 넷플릭스에서?“TV 방송은 아마 2030년까지만 지속될 겁니다. TV 방송은 말과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말은 자동차가 등장하기 전까진 훌륭했죠.”2014년 넷플릭스 공동 창업자 리드 헤이스팅스가 했던 말입니다. 왜 2030년인지에 대한 근거는 딱히 없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조금 과장된 미래 예측처럼 보였는데요.그리고 2025년. 헤이스팅스가 얘기했던 말과 자동차의 순간인가 싶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6월 18일 넷플릭스가 프랑스 최대 민간 방송사 TF1 그룹의 5개 실시간 채널을 2026년 여름부터 넷플릭스를 통해 서비스하는 계약을 맺은 겁니다. 드라마, 예능은 물론 스포츠 생중계와 뉴스까지. TF1 그룹의 모든 방송(광고 포함)을 실시간으로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게 되는 거죠. 다시보기도 함께요.사실상 방송국이 통째로 넷플릭스에 입점하는 셈인데요. 이런 형태의 계약은 세계 최초라고 합니다. TF1의 로돌프 벨머 최고경영자는 이를 두고 “진정으로 보완적인” 파트너십이라고 강조합니다. 넷플릭스는 새로운 라이브 콘텐츠를 얻고, TF1은 더 많은 시청자를 얻게 되니 윈윈이란 주장이죠.양측은 구체적인 계약 조건에 대해선 밝히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넷플릭스를 통해 TF1 방송을 보는 사람이 얼마냐에 따라 방송 광고 수익을 나눌 걸로 추정되는데요. TF1 측은 이번 계약으로 자사 프로그램을 실시간으로 보는 시청자 수가 크게 늘어날 거고, 그럼 그만큼 더 많은 광고가 붙어서 수익이 늘어날 거라고 기대합니다. 프랑스에서 넷플릭스 구독자 수는 이미 1200만명이 넘으니까요. “이 거래가 시청률 측면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긍정적일 겁니다.”(로돌프 벨머 TF1 CEO)하지만 궁금합니다. TF1의 실시간 방송이 전부 넷플릭스에 들어간다면, TF1의 본래 채널은 더욱 황폐해지는 건 아닐까요? 만약 자체 채널이 확 쪼그라들고 넷플릭스 의존도가 커진다면, 그래도 여전히 윈윈인 걸까요? 이 거래는 넷플릭스가 방송사를 삼킨 걸까요, 아니면 방송사가 넷플릭스에 깃발을 꽂은 걸까요. 스포츠 생중계를 탐내는 이유비디오 대여 서비스로 출발해 스트리밍 시대를 연 넷플릭스. 2011년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에 뛰어들어 업계를 놀라게 했죠. 당시 다들 “넷플릭스 역사상 가장 큰 도박”이라고 평가했는데요. 2013년 공개된 정치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 시리즈는 기대를 뛰어넘는 대성공을 거뒀고요. 이를 계기로 넷플릭스는 위상이 달라집니다. 이후 거액의 제작비를 들인, 다양한 문화권에서 제작된 오리지널 콘텐츠는 넷플릭스 확장 전략의 핵심 축이었는데요.여전히 ‘오징어게임 시즌3’ 같은 대작 드라마 제작은 이어집니다. 새로운 기대작이 공개될 때마다 구독자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나는 것도 여전하죠. 하지만 이전엔 없던 게 새로운 흐름이 눈에 띕니다. 넷플릭스가 기존 방송사의 오랜 영역을 넘보기 시작했죠. 대표적인 게 스포츠 중계입니다.지난해 11월 넷플릭스가 마이크 타이슨과 제이크 폴이 맞붙은 초대형 복싱 이벤트를 생중계했죠. 비록 중계는 잦은 버퍼링으로 팬들을 짜증 나게 만들긴 했지만, 전 세계 최대 6500만명 동시 시청(총 라이브 시청자 수 1억800만명)이란 놀라운 기록을 썼습니다. 넷플릭스 브랜든 리그 부사장은 “시청자 수는 우리가 상상한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고 감탄했죠.이어진 넷플릭스의 NFL 크리스마스 경기 독점 생중계 역시 최대 동시 시청자 수 2700만명을 찍었죠. 참고로 넷플릭스는 NFL 한 경기당 중계료로 7500만 달러(약 1032억원)를 지불했다는데요. 엄청난 금액이지만 ‘기묘한이야기 시즌4’(총 9부작) 편당 제작비가 3000만 달러(413억원)였다는 걸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놀랍진 않죠. 경기 중간에 들어가는 광고가 완판됐으니, 넷플릭스가 얻은 광고 수익도 상당했을 거고요.올해 넷플릭스는 스포츠 중계 부문에서 큰 도약을 이뤘습니다. 1월부터 넷플릭스에서 WWE 프로레슬링 경기 ‘Raw’를 생중계하고 있죠. 독점 중계권의 10년 계약 금액은 50억 달러(약 6조9000억원). 넷플릭스 측은 “그동안 제작한 대형 영화 투자 예산과 비슷한 수준”이라며 합리적인 투자라고 설명합니다. 무엇보다 광고를 붙일 만한 라이브 방송을 늘리려는 넷플릭스와 새로운 시청자를 끌어들여야 하는 WWE의 니즈가 맞아 떨어졌죠.아시다시피 넷플릭스는 2022년 11월 광고 기반 요금제를 도입했습니다. 매출에서 광고 수익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작지만(3% 수준 추정), 광고 수익 자체는 연간 100%씩 빠르게 성장 중입니다. 광고를 더 끌어들이려면 정해진 시간에 시청자를 붙잡아놓을 콘텐츠가 더 많이 필요하고요. 그중 핵심이 라이브 스포츠 중계이죠.넷플릭스의 공동 CEO인 테드 사란도스는 지난해 WWE 계약 직후 “이것이 우리의 새롭고 성장하는 광고 사업에 활력을 불어넣을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광고 수익이 예상대로 빠르게 증가한다면, 10년 50억 달러라는 중계권료를 메우고도 남을지도 모르긴 하죠.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구독료를 올리려 들지도 모르고요.) 넷플릭스는 이미 2027, 2031년 FIFA 여자 월드컵 독점 중계권을 확보했고요. 올해 말 ESPN과 계약이 끝나는 미국의 포뮬러1 중계권 입찰도 검토 중이란 보도도 있습니다.세서미 스트리트는 왜?세서미 스트리트. 56년 역사를 가진 미국의 대표 어린이 프로그램이죠. 지난 5월 넷플릭스가 이 ‘세서미 스트리트’의 배급 계약을 맺었습니다. 새 프로그램은 올해 말부터 공개될 예정인데요. 여기서 주목할 건 왜 세서미 스트리트가 TV 방송사가 아닌 넷플릭스로 넘어갔느냐는 점입니다.일단 넷플릭스가 어린이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추세이긴 합니다. 어린이, 특히 미취학 아동 콘텐츠는 넷플릭스에서 성과가 상당히 좋거든요. 유튜브보단 넷플릭스가 아이들에겐 훨씬 안전한 시청 공간으로 여겨지기 때문이죠.하지만 미국을 대표하는 케이블TV 방송사 HBO가 지난해 말 세서미 스트리트와의 계약을 종료해 버리지 않았다면 기회는 오지 않았겠죠. HBO는 왜 10년 동안 이어온 계약을 끝냈을까요. 바로 HBO 모회사 워너 브러더스의 심각한 경영난(막대한 부채, 줄어드는 광고 수익) 때문입니다. 교육적이지만 썩 돈이 안 되는 어린이 프로그램부터 버린 거죠.이로 인해 세서미 스트리트를 제작하는 비영리 재단 세서미 워크숍은 문을 닫아야 할 위기에 처했는데요. 넷플릭스가 이를 구원해 준 셈입니다. 그것도 넷플릭스에 공개한 당일 미국 공영방송 PBS에서 방영할 수 있다는 이례적으로 관대한 조건과 함께요. 다만 넷플릭스가 세서미 워크숍에 주는 제작비는 기존 HBO 계약(연간 3000만~3500만 달러)보다는 적다고 하죠.달리 보면 미국의 TV 방송 산업의 침몰로 인해 가장 먼저 어린이 프로그램이 밖으로 던져지기 시작했고요. 덕분에 넷플릭스는 이를 비교적 싼 값에 주워 담을 수 있게 된 겁니다. TV의 쇠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인 동시에, 좋은 콘텐츠와 기업 홍보 효과를 한꺼번에 얻은 넷플릭스의 성공 사례로 기록됩니다.현실이 된 코드 커팅코드 커팅(cord-cutting). 유료 방송 시청자가 가입을 해지하는 현상을 일컫는 용어죠. TV 방송 없이 넷플릭스나 유튜브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만 이용해도 충분하다는 시청자들이 그만큼 늘어난단 뜻인데요.케이블TV 이용 요금이 비싼 미국에선 일찍부터 나타난 현상입니다. 미국의 유료 TV 가입자 수는 15년 전인 2010년 정점을 찍고 이후 꾸준히 감소해 왔죠. 미국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 가구의 46%는 기존 유료 방송을 해지한 ‘코드 커터(cord cutters)’, 12%는 그동안 한 번도 유료 방송에 가입한 적 없는 ‘코드 네버(cord nevers)’입니다.한국에서도 코드 커팅은 현실화했습니다. 2024년 처음으로 유료 방송(IPTV, 종합유선방송, 위성방송 등 포함) 가입자 수가 감소하기 시작했죠(약 2만6000가구 감소). 인터넷만 연결하면 스마트TV로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볼 수 있으니, 굳이 케이블TV 같은 유료 방송에 따로 가입할 필요를 못 느끼는 건데요. 아직 유료방송 중에서도 IPTV는 가입자 수가 굳건하지만, 그건 저렴한 결합상품(인터넷+IPTV+휴대폰) 가입이 많기 때문이죠. 비용 부담이 얼마 안 돼 굳이 해지까지 하진 않지만, 실제론 거의 보지 않는 ‘사실상 코드 커팅’이 상당할 겁니다. 역시 시대의 변화는 어쩔 수 없는 일인데요. 그런데 여기서 포인트는 리드 헤이스팅스 전망대로 자동차가 말을 대체하곤 있는데, 그 자동차 모양이 어째 말과 닮아간단 점입니다. 넷플릭스가 점점 기존 TV 방송처럼 되어가고 있죠.유료 구독에서 광고 수익으로 넷플릭스 성장의 중심축이 옮겨간 결과입니다. 광고를 늘리려면 무조건 시청자가 많은 게 중요한데요. ‘힘을 줘서 만든 넷플릭스만의 고급 오리지널 콘텐츠’만으론 확장엔 한계가 있습니다. 제작비도 많이 들고 자칫 실패할 확률도 있는 데다, 시리즈 하나가 끝나면 구독자들이 우르르 빠져나갈 수도 있으니까요. 그보다는 ‘다른 데서 볼 수 있더라도 좀 더 대중적이고 비용 효율적인 일반 방송 콘텐츠’를 늘리는 게 더 효과적이죠. 넷플릭스의 이런 방향 전환이 얼마나 성공적일지는 두고 봐야 합니다. 이미 민첩한 경쟁사들이 한발 앞서 이 영역을 개척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죠. 특히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인도의 ‘지오핫스타(JioHotstar)’. 인도 대표 재벌그룹 릴라이언스가 디즈니와의 플랫폼 합병으로 올해 2월 탄생시킨 이 플랫폼은 불과 6주 만에 구독자 수 1억명을 돌파해 업계를 놀라게 했는데요.지오핫스타 인기의 핵심 비결은 인도의 국민 스포츠인 크리켓 중계. 올해 3월 인도 크리켓 대표팀이 뉴질랜드팀을 꺾고 우승한 ‘2025 ICC 챔피언스 트로피’ 결승전은 동시접속자 수가 무려 6120만명(!)에 달했을 정도입니다.지오핫스타의 기본 구독료는 고작 3개월에 149루피(약 2366원). 한 달 800원꼴이니, 소득이 적은 인도인들도 기꺼이 낼 만한 경쟁력 있는 가격입니다. 게다가 릴라이언스의 이동통신 서비스(지오) 가입자라면 90일 동안 무료로 체험할 수 있고요. 상당히 영리한 마케팅 전략인데요. 지오핫스타 역시 구독료보다는 광고가 중심인 플랫폼입니다. 어찌 보면 지오핫스타는 넷플릭스와 유튜브, TV 라이브 방송의 성격이 절묘하게 혼합된 새로운 스트리밍 서비스라 할 수 있는데요. 오리지널 콘텐츠에 돈을 쏟아붓고도 넷플릭스와의 경쟁에서 고전 중인 전 세계 여러 OTT 플랫폼과는 다른 방향입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지오핫스타는 넷플릭스·유튜브와의 경쟁에서도 살아남을지도 모르겠네요. By.딥다이브넷플릭스는 한국 방송사와도 TF1과 같은 계약을 맺게 될까요?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그런 날이 언젠간 올 수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넷플릭스가 프랑스 방송사 TF1과 획기적인 계약을 맺었습니다. TF1의 실시간 방송을 2026년 여름부터 넷플릭스에서 그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전통적인 TV 방송이 넷플릭스에 통째로 들어오는 첫 사례입니다.-광고요금제 도입 이후, 넷플릭스는 시청자를 정해진 시간에 끌어모을 수 있는 라이브 방송을 늘리는 추세입니다. 타이슨과 폴의 복싱경기 중계를 포함한 스포츠 생중계에 힘을 쏟는 이유입니다. -기존 방송사는 코드 커팅과 광고 수익 악화에 시달리는 상황. 넷플릭스가 이들의 기존 영역을 흡수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넷플릭스는 점점 TV처럼 되어갑니다. 이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성공 사례, 한 달에 고작 800원 구독료로 인도를 휩쓴 지오핫스타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 기사는 6월 20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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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자나라 아일랜드, 그 풍요의 비밀[딥다이브]

    기네스의 나라, 역사 속 대기근의 나라. 어디인지 아시겠죠. 바로 유럽의 아일랜드입니다. 그런데 영국 옆 섬나라 아일랜드가 지금은 1인당 GDP 10만 달러가 넘는 세계 두 번째 부자나라인 건 아시나요? 요즘 침체에 빠진 유럽 경제를 떠받치는 가장 잘나가는 부국인데요.1990년대 초까지 서유럽에선 가난한 축에 속했던 나라, 금융위기 직후 그리스와 함께 굴욕적인 구제금융을 받았던 나라는 어쩌다 돈이 넘쳐서 고민이라는 배부른 소리를 하게 됐을까요. 오늘은 아일랜드 경제의 마법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6월 1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석달 만에 9.7% 성장9.7%. 얼마 전 6월 5일 아일랜드 중앙통계청이 발표한 1분기 GDP 성장률(전 분기 대비)입니다. 석 달 만에 한 나라 경제가 10% 가까이 커지다니. 누구도 예상 못 했던 일이죠. 중앙통계청 관계자조차 “GDP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다”며 깜짝 놀랐을 정도인데요.기록적 성장의 원동력은 제약 수출. 아일랜드에 공장을 둔 글로벌 제약사들이 관세 인상에 앞서 3월 미국 수출을 243%나 늘렸습니다. 화이자·로슈·머크·애브비·바이엘·존슨앤드존슨 등. 유명 제약사들이 모두 아일랜드에 사업장을 두고 있죠. 예를 들어 화이자의 대표상품 비아그라는 미국 연구소에서 개발됐지만, 그 생산은 대부분 아일랜드 코크주의 작은 마을에서 이뤄집니다. (한때 그 공장에서 나오는 연기를 흡입하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죠.)그럼, 아일랜드 경제가 잘 나가는 게 다 제약 공장 덕분이냐. 아니, 그 못지않게 큰 산업이 있습니다. 바로 IT 대기업이죠. 바로 마이크로소프트(MS), 애플, 메타, 구글 같은 기업입니다.왜 미국 빅테크 이름이 나오냐고요? 이들 기업이 아일랜드에 세운 자회사는 해마다 엄청난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빅테크의 막대한 지식재산권 소유권을 쥐고 있는 자회사들이기 때문이죠. 미국 본사가 무형자산인 지식재산권 중 상당 부분을 아일랜드 자회사로 넘긴 겁니다.한국 또는 중국에서 아이폰이 한 대 팔릴 때마다 지식재산권(애플 로고, ‘아이폰’이란 이름과 로고 등) 사용료가 아일랜드 자회사로 흘러간다고 보면 됩니다. 이게 다 아일랜드 국내총생산(GDP)으로 잡힙니다. 아일랜드 전체 법인세 수입의 약 43%를 단 3개의 미국 기업-애플, 마이크로소프트, 화이자가 차지할 정도입니다.아일랜드가 왜 세계적인 부국인지 아시겠죠. 국제통화기금(IMF)의 2025년 통계에 따르면 아일랜드의 1인당 GDP(10만8919달러)는 룩셈부르크에 이어 세계 2위입니다. 스위스·싱가포르·아이슬란드·노르웨이 같은 부자 나라를 제친 거죠.살 길은 투자 유치뿐1980년대 아일랜드 경제는 암울했습니다. 실업률은 치솟아 18%에 달했고, 연간 4만명 넘는 인구가 일자리를 찾아 나라를 떠났죠. 1인당 GDP는 남유럽 국가들(스페인, 그리스 등)과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자원도 없고, 돈도 부족하고, 인구도 적은 이 나라가 믿을 건 해외기업 유치뿐. 오래전부터 아일랜드는 이를 위해 발버둥 쳤습니다. 1960~70년대에 이 나라는 수출이 주력인 다국적 기업에 대한 법인세율을 0%로 확 깎아줬고요. 1980년대에도 제조업체엔 표준 세율보다 훨씬 낮은 10%의 특별세율을 적용했죠. 이 시절 새로 유치한 외국 제조기업엔 10년간 세금 전액 감면이란 파격 혜택을 제공해 줬는데, 1980년 아일랜드에 진출한 애플이 이 혜택을 받았습니다.아일랜드 경제의 전환점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1년 소련 해체. 냉전이 끝나고 동유럽 시장이 열리자, 미국 기업들이 유럽 공략을 위해 앞다퉈 유럽에 법인을 세웠는데요. 다들 폴란드나 체코, 동독이 유럽 진출의 거점으로 떠오를 걸로 예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미국 기업들은 유럽 끄트머리 아일랜드로 몰려들었죠.왜 지리적 이점이 없어 보이는 대서양 섬나라 아일랜드였을까요. ①낮은 법인세율 ②높은 교육 수준 ③영국보다 낮은 임금 등이 매력 포인트였고요. 무엇보다 가장 큰 장점은 미국과 문화적으로 가까운 영어 사용 국가란 점이었습니다.1845년 아일랜드 대기근 아시죠. 그때 굶주림에서 벗어나려 미국으로 떠난 아일랜드인만 200만명에 달합니다. 미국인의 9.5%(약 3150만명)가 아일랜드계 혈통(독일 다음 2위)이란 조사 결과가 있는데요.미국 기업의 미국인 관리자들은 유럽 중에서도 자신들이 편안하게 여긴 아일랜드를 근거지로 선택하게 됩니다. 영어를 쓰는 나라라 의사소통도 편하고요. 동유럽 국가처럼 정부가 기업활동에 개입하지 않는 기업 친화적 나라이죠. 아일랜드는 단숨에 다국적 기업 투자의 중심지로 떠오릅니다.아일랜드 경제의 기적1990년대 중반, 아일랜드 경제의 눈부신 질주가 시작됩니다. 1995~2000년 연평균 경제성장률 9.4%. 전 세계가 ‘경제 기적’이라며 찬탄합니다. 불과 몇 년 만에 유럽의 가난했던 나라가 부유한 나라로 신세가 뒤바뀌었죠. 이전엔 서방 국가에선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일랜드엔 ‘켈트 호랑이(Celtic Tiger)’라는 멋진 별명이 붙었습니다. 당시 주목받던 ‘아시아의 네마리 용’(홍콩·싱가포르·한국·대만)과 성장세가 맞먹는단 의미였죠.아일랜드의 고속질주는 1999년 유로화에 가입하면서 더 탄력을 받았습니다. 아일랜드는 이전보다 한층 싼 금리로 금융시장에서 돈을 조달할 수 있게 됐죠. 1990년대 초 10%가 넘었던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5% 아래로 뚝 떨어집니다.그리고 2000년대, 거품이 끓어오릅니다. 당시 아일랜드는 은행에 대한 규제가 매우 느슨했던 상황. 생애 첫 주택 구매자는 집값의 100%까지 대출받을 수 있었죠. 집값은 자고 나면 뛰었고, 모두가 빚내서 집을 사려고 달려들었습니다. 전 국민이 빚에 중독된 것만 같은 부동산 광풍이 일어났죠. 1996~2006년 아일랜드 평균 주택 가격은 무려 330% 상승합니다(중고 주택 기준). 건설업은 대호황. 짓는 족족 팔리니 건설사는 주택을 마구 지어댑니다. 2005년 아일랜드에선 연간 8만채의 신규 주택이 지어졌는데요. 인구수로 10배가 훨씬 넘는 영국의 공급량이 16만채였으니 분명 과잉 공급이었습니다. 하지만 빚으로 떠받친 수요 덕분에 주택 가격은 계속 오르기만 했죠. 건설업 호황 덕분에 아일랜드 실업률은 뚝 떨어집니다. 모든 것이 절정에 달했던 그 순간. 우리 모두 아는 그 일이 일어납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부풀 대로 부풀어 오른 아일랜드 부동산 거품이 펑 터집니다.부동산 시장은 순식간에 무너졌고요(2007~2012년 평균 주택가격 53% 하락). 주택담보대출이 줄줄이 연체됩니다. 대출을 받아낼 길 없게 된 은행들이 휘청거렸고요. 뱅크런을 막기 위해 아일랜드 정부가 개입해 은행 예금과 부채에 대한 전면 보증을 선언했죠. 그리고 그게 결정적인 실책이었습니다. 보증으로 엮인 정부까지 결국 금융위기 소용돌이에 휘말린 거죠.호황기 아일랜드는 재정적으로 매우 건전한 국가 신용등급 AAA의 모범 국가였습니다. 그 재정의 큰 축은 부동산 양도소득세였고요. 부동산 관련 세수가 급증했던 시절, 아일랜드 정부는 다른 소득세율을 내리고 공공지출을 대폭 늘려놨습니다. 그런데 금융위기로 모든 게 무너졌고 재정마저 흔들리게 됩니다. 국가 신용등급이 뚝뚝 떨어졌죠.2010년 말, 결국 아일랜드는 IMF·EU와 850억 유로 규모의 구제금융에 합의합니다. 그리스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였죠. ‘켈트 호랑이가 도도새의 길을 가고 있다’는 평이 나왔습니다. 조세피난처가 됐다?그리고 2015년, 아일랜드가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그해 GDP 성장률은 무려 26.3%.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놀라서 들여다본 전문가들의 결론은 이거였습니다. 아일랜드가 일종의 조세 피난처가 됐잖아?아일랜드는 1990년대 EU의 압력으로 일부 기업에 대한 10% 특별세율 제도를 없애야 했는데요. 그 대신 모든 기업에 적용하는 표준 법인세율 자체를 2003년 12.5%로 확 끌어내렸죠. 동시에 다국적 기업엔 세금을 더 줄일 수 있는 통로도 열어줬습니다. 아일랜드에 2개의 자회사를 등록한 뒤(A와 B), 그중 하나(B)를 버뮤다 같은 조세피난처 두면 A에서 B로 이전하는 소득엔 세금을 물리지 않는 식이었죠. ‘더블 아이리시(Double Irish)’ 제도였습니다.구제금융 체제로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던 2010년 말~2014년 초, 아일랜드 정부는 온갖 세금을 인상했습니다. 담뱃세, 주류세, 자동차 등록세, 탄소세, 그리고 출산휴가 수당 세금까지. 2013년 한 해에만 가구당 세금이 1000유로 늘었을 정도였죠. 하지만 이 고난의 행군 기간에도 법인세율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아일랜드가 구제금융을 졸업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해외 기업 투자가 몰려왔죠.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세계 최대 항공기 임대기업 에어캡(AerCap)은 2014년 모든 항공기 소재지를 아일랜드로 이전했습니다. 그 항공기들은 실제론 세계 각지에 임대됐기 때문에, 아일랜드에 한 번도 오지 못할 가능성이 크지만요.2015년의 그 엄청난 GDP 성장률은 애플 덕분이었습니다. 애플은 2015년 아일랜드 자회사와 계약을 맺고 애플의 특허·상표·브랜드 등 지적재산을 미주 이외 지역에서 이용할 권리를 통째로 넘겼죠.이런 식으로 임대 항공기에 대한 권리, 각종 지식 재산권 같은 다국적 기업의 무형자산이 아일랜드로 몰립니다. 통계상으론 분명 GDP(국내총생산)에 크게 기여하지만 실제 아일랜드에서 눈에 보이는 활동은 거의 이뤄지지 않습니다. 돈이 회계적으로 아일랜드를 스쳐 지나갈 뿐, 실제 아일랜드의 고용 창출과 소비 증대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요. ‘레프러콘 경제학(Leprechaun economics)’.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교수는 이렇게 꼬집었습니다. 무지개 끝에 금항아리를 둔 아일랜드 신화 속 심술궂은 요정 레프러콘 이름을 따왔죠.불안한 횡재2024년 9월 유럽사법재판소의 판결이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애플이 과거(1991~2007년) 아일랜드의 불법적 세금 감면 특혜로 인해 체납한 세금 130억 유로(이자 포함 141억 유로)를 아일랜드 정부에 내야 한다는 최종 판결이었죠.2016년 유럽위원회가 내렸던 결정이 옳았다고 재판소가 손 들어준 건데요. 불법 아니었다고, 체납세금 안 받겠다고 애플과 같은 편에 섰던 아일랜드가 8년의 소송 끝에 패소하게 됐죠. 패소로 141억 유로(약 22조원)를 일시금으로 받은 아일랜드는 울어야 할까요, 웃어야 할까요. 정부가 원치 않았던 이 횡재를 두고, 한동안 아일랜드 사람들은 ‘그 돈을 축구협회에 달라’며 아우성이었죠.EU의 압박으로 그동안 아일랜드 세금제도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대기업 법인세율은 2024년부터 15%로 상향됐고요. 조세회피 수단이던 ‘더블 아이리쉬’ 제도는 완전히 사라졌죠.그래도 여전히 아일랜드는 세제 혜택 많고 기업하기에 좋은 나라로 꼽힙니다. 법인세율은 낮지만 다국적 기업이 거두는 이익이 워낙 많다 보니 세수는 늘 풍족합니다. 정부 재정은 3년 연속 흑자. 지난해엔 애플 사건까지 겹치면서 무려 250억 유로(35조원) 재정 흑자를 기록했죠. 다시 풍요의 시대가 열렸습니다.하지만 안심할 순 없습니다. 아일랜드를 질투하는 다른 나라의 견제가 만만찮기 때문이죠. 가장 큰 변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아일랜드가 미국 제약산업을 장악했다”고 불평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거대 제약사에 공장 이전을 직접적으로 압박한다면? 미국이 이미 관세 부과를 예고한 상황에서 일부 공장은 아일랜드를 떠날지도 모릅니다. 또는 만약 트럼프 대선공약대로 미국이 법인세율을 21%에서 15%로 인하한다면? 아일랜드는 투자처로서의 가장 큰 장점을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지난 30년간 요란한 롤러코스터를 탔던 아일랜드 경제는 지금의 상승궤도를 좀 더 이어갈 수 있을까요. 아니면 설화 속 레프러콘 요정처럼 GDP 대박의 행운도 어느 한순간 자취를 감춰버리게 될까요. 인구 530만명의 섬나라, 아일랜드 이야기가 관심 끄는 이유입니다. By.딥다이브너무 길지 않게 쓰고 싶었는데, 워낙 방대한 얘기라서 도무지 줄일 수가 없네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1인당 GDP 세계 2위인 나라, 유럽의 아일랜드. 올해 1분기 GDP가 무려 9.7%나 증가했습니다. 아일랜드는 글로벌 제약사의 생산거점이자 주요 빅테크 기업의 지적재산권이 머무는 나라입니다.-수십년 전부터 해외투자 유치에 안간힘 썼던 아일랜드에 대박 기회가 찾아온 건 냉전이 끝난 1990년대. 한땐 ‘켈트 호랑이’로 불리며 경제 기적을 썼습니다. 하지만 이어진 부동산 거품 붕괴와 은행 부실로 경제는 극적으로 추락했었죠. -낮은 법인세율이란 매력 덕분에 다시 아일랜드로 다국적 기업 자산이 몰립니다. 사실상 조세피난처라는 손가락질도 있죠. 실제론 아일랜드 소득 증대엔 그다지 기여하지 못하는 ‘회계의 마법’일 뿐이란 지적이 나오지만 아일랜드 경제엔 소중한 기회입니다. 이 풍요의 시대는 얼마나 이어질 수 있을까요.*이 기사는 6월 1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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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양원 숲이 된 학원가…28년 된 서점은 문을 닫는다[딥다이브]

    천사·명지·연세·노블케어…. 8층 상가 외벽에 간판이 빼곡하다. 모두 이 건물에 입주한 요양원이다. 바로 옆 건물도, 그 건너편 상가에도 요양원 간판이 보인다. “이 동네 상가 중에 요양원 없는 건물이 없어요.” 인근 교회 직원에 동네 분위기를 물으니 돌아온 대답이다.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중산1동. 1기 신도시 일산의 끝자락인 이곳 상가들 곳곳엔 오래전 떠난 점포의 흔적이 남아있다. 왕수학·청운학원·올림피아드수학…. 상가 입구 유리문엔 ‘윤선생영어교실’이란 빛바랜 스티커가 여전히 붙어있지만 그 안은 요양원이다. 그 대비가 묘하다.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있던 학원 관계자를 붙잡고 여기가 혹시 예전엔 학원가였냐고 물어봤다. “한때는 꽤 학원이 많았던 학원가였다고 이 동네 오래 사신 분이 얘기하더라고요.” 그 영어학원은 신축 아파트가 있는 옆 동네로 이사 간다고 했다.6.9%. 중산1동 주민 중 15세 미만 유소년 비율이다(일산 전체는 10.2%). 일산 23개 동 중에서도 최하위권(20등)이다. 대신 65세 이상 고령층 비중은 23.3%로 높고(일산 전체 17.4%), 일산에서 요양원이 가장 많은(2024년 기준 31개, 일산 전체는 118개) 곳이기도 하다.30년 전엔 정 딴판이었다. 1994~1995년 고층아파트가 대단지로 들어선 이곳은 일산에서도 가장 젊은 축에 속했다. 초·중·고등학교가 모여있는 지역이라 집집마다 어린아이들이 있었다. 중산초등학교에 학생이 넘쳐서 나중에 초등학교가 하나 더 들어서기도 했다.중산1동은 1기 신도시인 일산에서도 지난 30년 동안 인구 구조가 가장 극적으로 바뀐 동네다. 일산에 속한 모든 동 중에서 이 지역 유소년 인구 비율은 1997년 4위(총 17개 동)→2008년 8위(총 20개 동)→2017년 12위(총 20개 동)→2025년 20위(총 23개 동)로 떨어졌다.초등학생·중학생 아이 둘과 함께 1995년 입주한 김모(70)씨는 중산마을의 젊었던 시절을 기억한다. “학원이 상당히 많았지. 이 근방에선 중산 학원가가 제일 커서, 저쪽 탄현에서도 애들이 여기로 왔을 정도였어요. 좋은 학원, 시험 봐가지고 학원생을 모집하는 그런 학원들도 많았다니까.”하지만 아이가 줄고 학원도 떠나면서 10년쯤 전부터 요양원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학원이 많이 줄었죠. 후곡 학원가에서 여기까지 학원 셔틀이 다니거든요. 셔틀로 15분이면 가니까, 큰 학원은 거기로 다니죠. 최근 한 달 새 아파트 매매가 2건 있었는데, (매수인이) 모두 60대셨어요. 아무래도 여기가 조용하고 공기 좋고 집값도 저렴하니까.”(일신부동산 공인중개사)“어젠 안내문자 보고 90대 단골 손님이 찾아오셨더라고요. 중산동에 서점 이거 하나인데 없어지면 어쩌냐고요.”1997년부터 중산1동에서 일산문고를 운영해 온 이희주(68) 씨는 지난 9일 ‘경영난으로 7월 20일까지만 영업한다’는 문자를 일부 회원들에게 보냈다. 온라인 시대, 동네서점이 문 닫는 게 그리 새로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늘 같은 자리를 붙박이처럼 지켜온 100평짜리 서점의 영업 중단 소식은 충격인가보다. 문제집을 계산하던 세 모녀 손님이 이 씨로부터 폐업 소식을 듣고 놀란 듯 몇초간 입을 벌린 채 말을 못했다. 엄마는 “이제 어떡하지?”라며 당황했고, 아이는 “나 이제 문제집 안 사도 돼?”라며 장난쳤다.“처음 오픈했을 땐 막 사람들이 구경 왔죠. 줄을 서서 계산하고 그랬고. 일산에 이런 큰 서점 자체가 거의 없었으니까. 그 뒤로 한동안은 대형서점이 막 늘어났어요. 정글북, 초원서점. 이젠 다 문 닫았지.”그 시절 일산문고 주 고객은 학생과 학부모였다. 문제집이 매출의 70~80%를 차지했다. 엄마들은 큰 애를 등교시킨 뒤 작은 애를 유모차에 태운 채 서점에 와서 문제집을 고르곤 했다. 학생들은 오후 하굣길에 들러 소설책을 뒤적거렸다.“그땐 매출이 괜찮았어요. 지금보다 배 이상 됐죠. 그때 작성한 노트를 보니까, 당시에도 장사가 이렇게나 됐는데 지금은….”1997년 노트엔 매일의 매출이 빼곡히 기록돼 있었다. 어떤 날은 68만원, 다른 날은 74만원, 많은 날은 100만원도 찍었다. 지금은 매출로 가게 월세 내기도 빠듯한 수준이다. “단골손님한테는 좀 미안하긴 한데, 인건비도 안 나오는 걸 붙잡고 있으면 괜히 시간 낭비만 하는 것 같아서요.”“문 닫자고 결정하셨을 때, 그땐 하루에 손님이 몇 명 정도 왔나요?” 이 질문에 이씨의 표정이 순간 흐려진다. “말하기도 창피할 정도라….”옛날의 꼬마 단골손님들은 어른이 되면서 일자리를 찾아 다른 동네로 떠났다. 대신 친정에 왔다가 한 번씩 아이 손을 잡고 서점에 들르곤 한다. “아직도 있나 보러 왔어요”라며 반갑게 찾아왔던 그 옛 단골들과도 이젠 이별이다.“그땐 점심 때 애들이 어찌나 몰려드는지 막 밀어냈을 정도야. 100원짜리 불량식품, 그거 사 먹으려고 한꺼번에 몰려드니까. 한 5년 정도는 장사가 참 잘 됐어요.”임모(65)씨는 1998년 중산1동 대로변 상가 한켠에 작은 슈퍼마켓을 열었다. IMF 외환위기로 실직한 남편과 새로운 동네에서 새롭게 시작했다. 외환위기로 한국 경제가 최악이었던 1998년이지만, 그의 슈퍼마켓엔 손님이 끊이지 않는 풍족했던 시절이었다.여전히 가게 문은 매일 아침 연다. 하지만 선반은 휑하다. “반품 때문에 물건을 잘 갖다 놓지 않아요. 반품 많으면 눈치 보이니까. 빵은 결국 뺐어요. 요새는 빵집에서 사지 이런 구멍가게에서 안 사. 어떨 땐 반품 안 생기게 하려고 우리가 막 먹는다니까.”그나마 꾸준한 건 담배 손님이다. 종종 새로운 담배 손님이 찾아오기도 한다. 보통은 새로 이사 온 어르신이다. “여기가 일산의 거의 끝쪽이거든요. 젊은 사람들은 일자리 찾아서 떠났고, 대신 서울에서 집을 팔고 여기로 이사 오는 어르신들이 몇 년 전부터 갑자기 많이 보여요. 집값이 차이 나니까, 집 팔아서 남은 돈 가지고 생활하려는 거지.”임씨 슈퍼마켓 옆 가게는 공실이다. 언제부턴가 대로변 상가도 군데군데 비어갔다. “옛날엔 1층이 빈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는데. 요즘 여기는 생겼다 하면 요양원밖에 없고…. 요양원이 늘면 장사하는 사람들은 안 좋아요. 어르신들은 소비할 게 없거든.”그래도 임씨가 장사를 계속 이어가는 건 자기 소유 가게라 임대료 부담이 없어서다. “지금은 뭐 가게 운영이라고도 할 수가 없어요. 그냥 가게 세를 안 내니까, 붙들고 있는 거죠. 30년 가까이 맨날 아침에 눈 뜨면 나온 그 자리를 없앨 수가 없더라고요.”30년 전 중산마을에 고층아파트가 들어설 때 입주했던 30~40대 학부모들이 이제 60~70대가 됐다. 부부는 살던 집에 그대로 남았지만 30대가 된 그 자식들은 대부분 떠났다. 지하철역이 없어 대중교통이 불편한 마을, 산 가깝고 공기 좋은 마을엔 점점 노인 부부만 남게 됐다.중산1동은 고층아파트로 가득 들어찬 동네다. 어르신 대부분은 아파트를 자가로 소유하고 있다. 임대아파트가 많은 근처 다른 동네보다 형편은 오히려 나은 편이다. 동네가 지저분해지거나 슬럼화할 일도 없다. 중산1동 행정복지센터 이영재 동장은 “유해환경도 없고, 유동 인구도 많지 않아서 아주 깨끗하고 쾌적한 살기 좋은 환경”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말대로 거리는 정말 깨끗했다. 다만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고 너무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다.동네에 노령층이 갈수록 늘면서 가장 걱정되는 문제는 빈곤보다는 치매 같은 건강 문제, 그리고 고독이다. 행정복지센터의 김현주 사회복지사는 이렇게 말한다. “혼자 남겨지실 경우에 돈이 있는 것과 별개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크거든요. 그냥 방치해둘 순 없는 문제인 거죠.”낡은 상가 건물들이 죽 늘어선 대로변에 공사가 한창인 새 건물이 하나 있다. 큰 창문이 있는 주황 벽돌색 5층 건물은 오래된 거리에서 홀로 2020년대 감성을 풍겼다. 언뜻 보면 카페와 음식점이 들어올 것만 같은 외관이지만 아니었다. 중산1동의 유일한 새 건물은 큰 요양원이 될 거라고 했다.“아직은 괜찮은데 10년 뒤, 20년 뒤엔 이 동네는 어떻게 될까요?” 이틀에 걸친 취재를 마칠 무렵 떠오른 이 질문을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에게 던졌다. “저도 그게 걱정이에요. 지금도 온통 어르신밖에 없는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By.딥다이브*이 기사는 6월 13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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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자아이 입학 1년 늦추자”…노르웨이 정부 제안 의미는?[딥다이브]

    ‘20대 남성의 보수화’가 전 세계적 화두입니다. 지난해 미국 트럼프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 주요 지지층은 20대 남성이었고요. 얼마 전 치러진 폴란드 대선에서도 20대 남성 유권자들이 1차 투표에서 극우파 후보에 몰표를 주면서 선거 판세를 뒤흔들었습니다. 물론 성별에 따른 젊은 층 정치 성향 차이가 극명한 사례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나라는 한국이지만요.이와 관련해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 주목받는 주장이 있습니다. 남성의 불안은 20대만이 아니라 예전부터 늘 있었던 문제이고, 그건 심각한 사회 구조적 문제의 결과라는 거죠. 진정한 ‘양성평등’을 위해선 어려움을 겪는 소년과 남성의 문제에 이제라도 주목해야 한단 주장인데요.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고요? 반페미니즘과는 결이 전혀 다른 새로운 남성 문제 해결법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이 기사는 6월 10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100년 넘게 이어진 학력 격차학교 교육에서 남학생은 여학생에 크게 뒤처져 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의 학업성취도평가 결과가 이를 보여주죠. 2003~2023년 학업성취도평가에서 기초학력 미달 비율은 항상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많았습니다. 수학을 포함한 모든 과목, 모든 학년에서 늘 그랬습니다.한국만 그런 게 아닙니다. 전 세계가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부터? 적어도 110여년 전부터요. 미국심리학협회 학술지에 2014년 발표된 연구 결과인데요. 1914년부터 2011년까지 30개국의 학교 성적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지난 1세기 동안 여학생은 모든 과목에서 남학생보다 학교 성적이 더 높았습니다.수학·과학은 남학생이 더 잘하지 않냐고요? 특정 시험에선 어떨지 모르겠지만 학교 성적, 즉 내신 점수를 비교한 이 연구논문에선 그렇지 않았습니다. 남녀 학생 간 성적 차이는 언어 과목이 가장 크고 수학·과학 과목이 가장 작긴 했지만, 그래도 여학생 우위는 한결같았습니다.이게 의미하는 바는 뭘까요.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학업성취도가 뒤처지는 게 최근에야 나타난 일이 아니란 겁니다. 의무교육이 도입됐을 때부터 줄곧, 그것도 전 세계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인 거죠. 인터넷·게임·스마트폰이 생겨나기 전부터요.오랫동안 이런 성별 학력 격차는 무시돼왔습니다. 과거 여학생의 대학 진학률이 낮았을 땐 이런 격차가 눈에 띄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여성의 대학 진학률은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상승했고, 이제 대부분 선진국에선 남성보다 높습니다. 한국에서도 2005년 남녀 대학 진학률이 역전된 뒤, 격차가 유지되고 있죠.그래서 이젠 더 이상 비밀을 숨길 수 없게 됐습니다. 이렇게까지 일관되게 남학생의 학업성취도가 떨어지다니. 이건 학교 교육 자체에 뭔가 문제가 있단 뜻 아닐까요?교육만 문제가 아닙니다. 전 세계적으로 남성은 여성보다 자살률이 훨씬 높고, 알코올이나 약물을 과다복용하거나 노숙자가 되거나 산업재해로 사망할 위험이 더 크죠. 심지어 기대 수명도 여성보다 훨씬 짧고요. 기대수명 차이는 단순히 생물학적 것 아니냐고요? 하지만 남녀 기대수명 차이는 저소득층일수록 더 크게 벌어집니다. 이건 평등의 문제이기도 한 거죠.가족과의 단절 역시 남성이 겪는 문제입니다. 사회적으로 아버지는 아이에게 덜 중요한 ‘2등 부모’로 취급되기 일쑤죠. ‘라테 파파’로 유명한 북유럽에서도 남성의 육아휴직 사용률은 여성보다 낮습니다. 많은 아빠들이 자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너무 적다고 말합니다. 그동안은 이를 여성의 문제(과도한 육아 부담)로 봤지만, 이건 동시에 남성의 문제이기도 합니다.1년 입학유예가 해법?위 내용은 제 의견이 아니고요. 저명한 사회과학자이자 미국 소년·남성연구소 소장인 리처드 리브스의 저서 ‘소년과 남성(Of Boys and Men, 2022년 출간)’과 노르웨이 정부 남성평등위원회의 방대한 최종 보고서 ‘평등의 다음 단계(2024년 발간)’에 공통으로 담긴 주장입니다. 미국과 유럽에서 상당히 큰 관심을 끌면서 논쟁을 유발한 주장이기도 하죠.요약하자면 남성은 다양한 문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최근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요. 이건 사회 구조를 바꿔 해결해야 할 큰 문제입니다. 마치 페미니스트들이 수십 년에 걸쳐 시스템을 개선해 온 것처럼 말이죠.하지만 남성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뭘 해야 할지에 대한 공감대는 아직 형성돼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남성들은 인플루언서나 극우 정치인, 커뮤니티의 논리에 쉽게 빠져들곤 하죠. 거기선 사회 구조는 보지 않고 대신 ‘적’을 찾습니다. 페미니즘 또는 엘리트가 공격 대상이 되곤 하죠. 적에게 분노를 터뜨리고, 싸우고, 전통적인 남성성을 되찾자는 구호만 난무합니다.그런데 분노만 한다고 뭐가 바뀌나요. 좀 더 실질적이고 구조적인 해결 방법을 찾아야죠. 그동안 제시된 여러 정책 대안 중 눈에 띄는 몇 가지를 꼽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①남학생 초등학교 1년 입학 유예모든 나라에서 남학생의 학업 성취도는 떨어져 있습니다. 그건 지능 차이가 아닙니다. 전문가들은 성별에 따른 IQ 차이는 없다고 보고 있죠. 차이 나는 건 전두엽의 발달 속도와 이에 따른 학교 적응 기술입니다. 유치원을 졸업할 즈음에 남자아이들은 주의력, 지시 따르기, 정리정돈 같은 능력에서 여자아이들보다 1년 가까이 뒤처져있죠.이런 기술은 학교생활에 매우 중요합니다. 남학생은 초등학교 입학 시점부터 이미 뒤처져있고, 그 차이는 대학교까지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그 격차를 줄이기 위해 남자아이들을 아예 초등학교에 1년 늦게 입학시키면 어떨까요? 많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요?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요? 리처드 리브스 박사의 이 주장은 가장 주목받는 해결책인 동시에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대놓고 특정 성별을 낙인찍는 것 같아 기분 나쁘단 반응도 있었죠. 하지만 미국 부유층에선 실제 남학생들에게 이미 많이 쓰고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노르웨이 남성평등위원회 역시 초등학교 입학 유예가 효과적인 해결책이라고 봅니다. 남자아이들에게 초등학교를 1년 늦게 입학할 수 있는 기회를 지금보다 확 늘리자고 정부에 제안했죠. 지금은 입학 유예를 극소수만 택하지만, 부모들이 더 쉽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단 겁니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일단 유치원을 1년 더 다니는 남자아이들이 대거 늘어날 거고요. 그럼 유치원 교사 수와 교육 예산도 모두 늘려야 하니까요. ②더 활동적·실용적인 교육과정낮은 학업성취도와 낮은 대학 진학률은 더 많은 실업과 건강·중독문제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남학생의 학교 성적을 끌어올리는 게 매우 중요한 이유인데요.고쳐야 하는 건 남학생이 아니라 교육과정입니다. 100년 전부터 줄곧 여학생 성적이 높게 나왔다는 건 학교 교육이 절대적으로 남학생엔 불리하단 뜻이니까요. 이게 바로 노르웨이 남성평등위원회가 강조하는 점인데요. 초등학교 교육은 오랫동안 한자리에 앉아있지 않는 수업이 중심이 돼야 합니다. 놀이 기반 학습을 도입하고 체육·미술·공예·음악·요리 같은 수업을 늘리는 거죠. 중·고등학교는 선택과목 비중을 확대하는 게 방법입니다. 남학생은 흥미 없는 과목 수업에 대한 집중력이 유독 더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죠. 그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선택과목을 늘린다면 남학생들이 수업을 집중해서 듣게 될지도 모릅니다.③남성의 더 많은 돌봄 일자리 진출성별 때문에 특정 직업에서 배제돼선 안 된다는 데는 누구나 동의할 겁니다. 과거 남성 일색이었던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분야에 더 많은 여성이 진출하는 건 우리 사회가 장려해 온 일이죠. 그럼, 그 반대도 더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더 많은 남성 간호사, 더 많은 남성 유치원 또는 초등학교 교사 말이죠. 리처드 리브스 박사가 ‘HEAL(의료·교육·행정·문해)’이라고 부르는 직종인데요.남학생들이 그런 쪽에 흥미와 적성이 없어서 선택하지 않을 뿐이라고요? 지금은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흥미와 적성은 키우기 마련 아닐까요. 과거엔 엔지니어링엔 별 관심 없다고 여겼던 여학생들의 공대 진학이 늘어나고 있는 것처럼요. 남학생들에게 필요한 건 롤모델과 맞춤형 교육 프로그램일 겁니다. 장학금 지원도 도움이 될 거고요. 노르웨이에선 공공부문 일자리(교사, 공무원, 공중보건 간호사 등)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높은데요. 이는 여성 임금 수준이 낮은 이유이지만, 대신 실업 위험이 낮고 치명적 사고 발생 가능성도 작다는 장점이 있죠. 육아를 위한 지원도 더 잘 돼 있고요. 남성들이 이런 일자리로 더 많이 진출한다면 지금의 많은 문제들(정신·신체적 건강과 가정에서의 소외)도 줄어들 겁니다.참고로 노르웨이 남성평등위원회 정책 제안 중엔 한국에서라면 여론이 뒤집어질 만한 내용도 담겼습니다. 여학생 비중이 매우 높은 분야의 전공을 지망하는 남학생에겐 대학입시에서 가산점을 주거나 성별 쿼터제(할당제)를 실시하자는 거죠.논쟁은 시작됐다20대 남성의 보수화가 전 세계 정치의 화두가 된 지금. 남성 문제의 원인과 해법을 다루는 이런 주장에 귀 기울이는 이는 점점 많아집니다. 당연히 비판은 거세고 논쟁은 뜨겁습니다. ‘남성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기본 전제에 대한 반감도 상당하죠. 임금도 남성 근로자가 훨씬 높고, 고위직에도 온통 남성뿐이라는 명백한 통계를 두고 ‘남성 불평등’이 웬 말이냐는 반응인데요.여기서 생각할 점. 양성평등은 ‘제로섬’ 게임이 아닙니다. 남학생의 학업 성취도를 끌어올리는 것과 여성의 임금 수준을 높이는 건 함께 추구할 일이지, 어느 한쪽을 위해 반대편을 희생할 필요는 없습니다. 노르웨이 남성평등위원회 설명대로 “소년과 남성의 평등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 평등 정책이 약화하는 게 아니라 강화되는 겁니다.”리처드 리브스는 그의 책에서 페미니즘이 너무 멀리 나아가서가 아니라, 오히려 충분히 멀리 나아가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페미니즘으로 “여성의 삶은 재구성됐지만 남성은 그렇지 못했다”는 거죠. 이젠 남성의 문제까지 품고 한발 더 나아가자는 주장입니다.양극화된 시대, 공격은 양쪽에서 쏟아집니다. 보수 우파는 리브스의 해법(예-남성의 돌봄 직종 진출)이 전통적 성역할과 거리가 멀다며 싫어하죠. 반대로 좌파는 이런 논의가 반페미니즘 분위기와 젠더 분열을 부추길 거라며 경계하고요.논란 속에서도 진전은 있습니다. 지난해 영국 의회는 남학생의 낮은 성취도 문제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죠. 미국 민주당의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로 꼽히는 여성 정치인 그레첸 휘트머 미시간주 주지사는 젊은 남성의 고등교육·기술교육 진학률을 높이기 위한 행정명령을 약속했습니다. 소녀와 여성을 지원해 온 자선가 멜린다 게이츠(빌 게이츠 전 부인)는 미국 소년·남성연구소에 2000만 달러를 기부했고요.다음번 미국 대선에선 아마 남성 평등 정책이 중요한 이슈로 떠오를 겁니다. 한국에선 20대 남성의 정치 성향을 놓고 몇 년째 각자 입맛에 맞게 해석하기 바쁜데요. 이제 좀 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By.딥다이브측은지심과 인류애. 기사를 쓰면서 이 두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다른 이의 어려움을 서로 측은히 여기는 마음만 있다면, 지금과 같은 젠더 갈등도 없을 텐데 말이죠.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전 세계적으로 ‘20대 남성의 보수화’가 화두입니다. 이를 두고 남성의 어려움은 예전부터 있어왔고, 이는 해결해야 할 사회구조적 문제라는 시각이 대두합니다. 노르웨이 정부의 ‘남성평등위원회’는 이에 대한 정책 제안을 담은 보고서를 발간했습니다. -남학생은 늘 학교 교육에서 뒤처져왔습니다. 이는 어른이 된 뒤 실업, 중독, 건강 문제와 연결되죠. 고쳐야 할 건 남학생이 아니라 학교 교육입니다. 남학생에 불리한 교육 시스템이 바뀌어야 합니다. 1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시키잔 주장도 나오죠. -양극화된 시대, 우파와 좌파 모두에서 비판이 쏟아집니다. 하지만 논쟁이 시작됐으니 그것만으로 큰 진전입니다. 한국 정치권도 남성 평등 정책에 관심을 기울일 때입니다. *이 기사는 6월 10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2025-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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