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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41주년을 하루 앞둔 17일 국립5·18민주묘지는 새 희망을 상징하는 연둣빛으로 물들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는 올해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문구가 새겨진 연두색 스카프를 묘비 901기에 둘렀다. 스카프는 미래 세대에게 5월 정신을 전달하자는 뜻과 행방불명자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말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5·18민중항쟁 제41주년 추모제가 17일 오전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렸다. 5·18유족회 주관으로 열린 추모제는 유가족들이 올리는 전통 제례와 추모사, 추모시 낭송,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헌화 및 분향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추모제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에 따른 사회적 거리 두기 지침에 따라 99명만 참석했다. 광주시낭송협회 회원 19명은 ‘80년 5월! 광주의 그날을 기억합니다’라는 시 낭송공연을 17분간 진행하며 추모열기를 고조시켰다. 이용섭 광주시장은 추모사에서 “5·18민주화운동은 세계사에 빛나는 위대한 역사”라며 “오월 영령들의 고귀한 희생과 광주 시민들의 나눔, 연대의 힘은 민주주의의 굳건한 뿌리가 됐다”고 말했다. 김영훈 5·18유족회장은 “41년 세월이 1980년 5월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자리를 넘어서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걸음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국립5·18민주묘지에는 전국 각지에서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 발길이 이어졌다. 경북 경주의 위덕대 학생 15명과 교직원 2명은 이날 오후 ‘위덕대 총학의 진정한 용서와 화해의 순례길’이라는 현수막을 들고 참배했다. 학생들은 이 대학 박훈탁 교수가 비대면 강의에서 5·18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주장을 하자 사과 의미에서 5·18민주묘지를 찾았다. 이다영 위덕대 총학생회장(25)은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책으로만 읽다가 직접 현장에 와서 보고 느끼니 가슴이 뭉글하며 그 아픔을 공감하게 됐다”고 말했다. 제41주년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는 이날 오후 7시 반부터 10시까지 광주 동구 5·18민주광장 등 금남로 일대에서 지난해 코로나19 여파로 취소됐던 전야제를 개최했다. 전야제는 ‘오월 시대와 눈 맞추다, 세대와 발맞추다’라는 41주년 슬로건처럼 불평등과 양극화 시대를 오월 정신으로 타개하고 다양한 세대와 조화를 추구하는 행사로 치러졌다. 전야제도 코로나19 확산 방지 차원에서 미리 초청받은 99명만 참석했다. 시민 참여형 주요 행사인 민주평화대행진과 시민 난장은 취소됐다. 대신 인원 제한을 둔 음악, 연극 공연 행사가 열렸다. 초청받지 못한 시민들은 금남로에 설치된 3개의 전광판과 유튜브를 통해 전야제를 관람했다. 올해 전야제는 1980년 5월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무대로 꾸며졌다. 전야제는 연대의 장, 항쟁의 장, 계승의 장 등 총 3부로 구성됐다. 합창, 연극, 미디어아트, 노래패, 랩, 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통해 미얀마 민중에 대한 연대의 마음과 무명열사에 대한 감사의 마음, 5월의 희망 메시지를 전했다.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유일한 혈육인 내가 죽으면 제사는 누가 지낼까 걱정입니다.” 하루종일 궂은 비가 주룩주룩 내린 17일,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은 장하연 할아버지(77·사진)가 고개를 숙인 채 꺼이꺼이 목놓아 울었다. 그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유일한 혈육인 형 하일 씨(당시 38세)를 잃었다. 형제의 고향은 황해도 옹진군이다. 1949년 남으로 내려와 가족은 서울에 삶의 터전을 근근이 잡았다. 하지만 1년 후 6·25전쟁이 나고 전남 곡성으로 피난왔다. 힘든 피난살이에 부모와 여동생을 잃고 할아버지 형제만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두 살 터울의 형제는 서로를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버텨왔다. 1980년 5월 1일, 광주에서 양화점을 하던 할아버지를 형이 찾아왔다. 서울에서 페인트 공으로 일하던 형은 평소 종교에 관심이 많았다. “형은 평생 독신으로 살며 종교인으로 봉사하고 싶어 했다”고 추억했다. 며칠을 함께 보낸 형제는 19일 계엄군이 시민들을 잔혹하게 진압하는 것을 본 뒤 시위대에 합류했다. 21일도 형제는 금남로에서 시위대와 함께 있었다. 그날따라 몸이 좋지 않던 할아버지는 형만 남겨두고 먼저 백운동 집으로 돌아왔다. 서너 시간 후 처 할머니가 달려와 “자네가 죽었다고 전화가 왔는데. 어찌 된 일인가”라고 물었다. 순간 할아버지는 형이 숨졌다고 직감했다. 형이 있다는 전남대병원으로 달려갔다. 형은 허리 관통상을 입고 병원에 있었다. 의식을 잃기 전 할아버지의 연락처를 의료진에 말한 것이다. 할아버지는 계엄군이 청년들을 닥치는데로 잡아가 병원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이틀 뒤 병원에 왔을때 형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형은 망월동 시립묘지에 안장됐다가 1997년 5·18민주묘지로 이장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죽으면 형의 묘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묘를 선산으로 옮길까도 고민했다”며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만큼 형의 묘를 국가에서 관리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에 따르면 5·18민주화운동 10일간의 항쟁기간 동안 희생된 165명 중 115명이 미혼이었다. 박현옥 사무총장은 “유족회 회원 300명 중 80여 명도 직계자손이 없어 형제자매가 활동하고 있다”며 “가족들이 사실상 없는 오월 희생자들을 국가에서 보살펴야 한다”고 말했다.광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치매 질환을 앓고 있는 80대 노인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을 하루에 2차례 맞은 것으로 드러났다. 17일 광주시 등에 따르면 서구에 사는 주민 A 씨(85)는 지난달 28일 오전 9시55분경 지역접종예방센터인 염주종합체육관에서 화이자 백신을 접종했다. A 씨는 접종이 끝난 뒤 15분 간 이상 반응 관찰까지 마치고 접종센터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A 씨는 다시 예방접종센터에 들어와 직원에게 “백신을 맞지 않았다”며 두 번째 백신을 맞았다. 이 때가 1차 접종을 한 뒤 28분이 지난 오전 10시 23분경이었다. 보건당국은 전산등록 과정에서 뒤늦게 A 씨가 두 번 접종한 사실을 확인했다. 직원이 전산으로 접종대상자 이름만 확인하고 접종 여부는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던 것이다. 1차 접종 뒤 접종부위에 붙이고 있던 밴드까지 떨어져 있었다. A 씨는 30분 더 건강 상태를 확인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보건당국은 질병관리청에 A 씨를 ‘과용량 접종자’로 보고하고 매뉴얼에 따라 7일간 이상 징후 등을 관찰했지만 이상 증세는 없었다. 다만 A 씨는 13일부터 폐렴 등의 증상으로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다. 보건당국은 “A 씨가 입원한 것이 백신 과용량 접종과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다. 광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5·18민주화운동 41주년을 이틀 앞둔 16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는 굵은 빗줄기로 흠뻑 젖었다. 묘지에는 우산을 받쳐 든 추모객들의 발길이 하루 종일 이어졌다.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901명이 잠들어 있는 묘지 한쪽에는 ‘잊혀진 사람들’이 있다. 1묘역 4구역에 있는 5기의 ‘무명열사의 묘’다. 5·18 당시 숨졌으나 신원이 확인되지 않아 가족을 찾지 못한 이들이다. 4구역 97번은 5·18 희생자 가운데 가장 어린 남자아이의 묘다. 당시 검시 자료는 이 아이를 4세로 추정했다. 김영훈 5·18민주유공자유족회장은 “41년이 흘렀지만 오월의 막내인 4세 아이 등 희생자가 가족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5·18민주묘지에 묻힌 ‘오월 막내’ 1980년 광주시 사회복지과에 근무했던 조성갑 씨(81)는 5월 26일부터 6월 중순까지 유족들이 전남도청 앞 상무관에 안치된 시신 69구의 신원을 확인하는 것을 돕고 광주에 흩어져 있던 희생자 50명의 시신을 수습했다. 조 씨는 6월 7일 오전 광주 남구 효덕동 주민들에게 “30대 여성이 지프차를 타고 와 남자아이 시신을 야산에 묻고 갔다”는 제보를 들었다. 곧바로 효덕동 민둥산으로 가 남자아이 시신을 수습했다. 조 씨는 같은 날 오전 11시 조선대병원으로 아이의 시신을 옮겼고 의사가 사인을 밝히는 검시를 했다. 숨진 아이는 4세 정도이며 사인은 총상으로 인한 과다 출혈, 사망 날짜는 5월 23∼28일로 추정됐다. 광주의 한 5·18 연구가는 “이 아이의 검시 서류는 10개가 있는데 1개 서류에 ‘5월 27일 사망 추정’이라고 적혀 있다”며 “27일 숨진 것이 유력하다”고 말했다. 이 아이는 이후 광주 북구 망월동 시립묘역 113번에 안장됐다. 2002년 국립5·18민주묘지로 이장되면서 신원을 밝히기 위해 유전자를 채취했다. 전남대 의대에서 채취한 행방불명자 가족 366명과 유전자 대조 작업을 했으나 일치하는 가족은 없었다.● “오월 막내 이름 찾아주고 싶다” 41년이 흘렀지만 이 아이에게 이름과 가족을 찾아주려는 노력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5월 진실 규명을 위한 또 하나의 퍼즐이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1980년 5월 27일 시민군이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전남도청에서 계엄군 버스를 함께 탔던 남자아이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미국 기자인 노먼 소프는 최근 한 아이가 계엄군 버스를 타고 이송되는 장면을 촬영한 사진을 공개했다. 이 아이는 당시 계엄군 버스를 탄 모습을 촬영한 방송사 영상에서도 확인됐다. 5·18 당시 계엄군에게 붙잡힌 염동유 씨(65)는 1990년 출판된 ‘광주 5월 민중항쟁사료전집’에 “27일 전남도청에서 5세 정도 되는 아이가 울고 있었는데 가슴이 아팠다. 아이니까 (계엄군도)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적었다. 염 씨는 “계엄군에게 시민군 15명이 사살된 뒤 (나는) 체포돼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엎드린 상태에서 전남도청 민원실에서 남자아이가 울고 있는 걸 봤는데 살아있다면 만나고 싶다”고 증언했다. 이동춘 목포과학대 교수(62)는 “27일 전남도청에서 붙잡혀 도청 마당으로 끌려갔는데 먼저 체포된 고교생 두 명이 4, 5세 정도 되는 남자아이를 맡겼다. 버스를 타고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가면서 헌병에게 아이를 인계했다”고 말했다. 그는 2002년 5·18을 왜곡하는 지만원 씨를 고소해 첫 형사 처벌을 받게 한 5·18 시민군이다. 이 교수는 “10여 년 전 5·18 당시 상무대에 근무한 헌병이 ‘아이가 없어져 부대가 난리가 났었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며 “그 아이가 상무대에서 사고사를 당해 매장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조 씨는 이와 다른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오월 막내 이야기가 많아 나와 기억을 더듬어 봤는데 1980년 5월 20일경 광주역에서 시민군이 (계엄군에 의해) 숨진 어린아이 시신을 리어카에 싣고 가는 것을 봤다고 했다”면서 “리어카에 실려 간 아이와 효덕동 야산에서 수습한 아이가 같은 옷을 입었던 것 같다”며 사진 속 아이가 아닐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 씨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목격자가 나와야 한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행방불명자 가족 2명을 상대로 민주묘지에 묻혀 있는 아이와의 연관성을 확인하는 2차 유전자 검사를 하기로 했다. 또 진상규명조사위는 최근 한 40대 회사원이 “당시 7세였는데 전남도청 버스 사진 속 아이가 나인 것 같다”고 주장해 진위를 확인하고 있다.● 행불자 찾으려면 군인 증언 절실 진상규명조사위는 올 2월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됐던 11공수여단 군인 3명의 증언을 들었다. 이들은 “5월 24일 광주 남구 송암동에서 육군보병학교 병사들과 오인 사격을 벌인 직후 시민군을 찾기 위해 수색을 하다 보리밭에 사격을 했다. 이후 살펴보니 보리밭에 어린애가 숨져 있어 매장했다”고 진술했다. 진상규명조사위는 군인들이 매장을 한 아이가 오월 막내일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다. 효덕동 야산에서 수습한 아이의 검시 서류를 쓴 경찰이 “30대 여자가 매장을 했고 옷에 노잣돈 1000원을 넣었다”고 적었다는 점을 확인하고 해당 경찰을 찾아 당시 상황을 청취하기로 했다. 진상규명조사위는 또 오월 막내 외에 또 다른 아동 희생자가 있었는지도 살펴보고 있다. 진상규명조사위와 5·18기념재단 등은 당시 행불자들의 암매장 장소를 찾기 위해 제보를 받고 있다. 차종수 5·18기념재단 고백과증언센터 팀장은 “신군부가 5월 진실을 은폐 축소하면서 진상 규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그날의 진상이 밝혀지도록 당시 광주에 투입됐던 군인들의 양심적 증언이 절실하다”고 말했다.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5·18민주화운동 41주년을 이틀 앞둔 16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는 굵은 빗줄기로 흠뻑 젖었다. 묘지에는 우산을 받쳐 든 추모객들의 발길이 하루 종일 이어졌다.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901명이 잠들어있는 묘지 한쪽에는 ‘잊혀진 사람들’이 있다. 1묘역 4구역에 있는 5기의 ‘무명열사의 묘’다. 5·18 당시 숨졌으나 신원이 확인되지 않아 가족을 찾지 못한 이들이다. 4구역 97번은 5·18 희생자 가운데 가장 어린 남자아이의 묘다. 당시 검시 자료는 이 아이를 4살로 추정했다. 김영훈 5·18민주유공자유족회장은 “41년이 흘렸지만 오월의 막내인 4살 아이 등 희생자가 가족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5·18민주묘지에 묻힌 ‘오월 막내’ 1980년 광주시 사회복지과에 근무했던 조성갑 씨(81)는 5월 26일부터 6월 중순까지 유족들이 전남도청 앞 상무관에 안치된 시신 69구의 신원을 확인하는 것을 돕고 광주에 흩어져 있던 희생자 50명의 시신을 수습했다. 조 씨는 6월 7일 오전 광주 남구 효덕동 주민들에게 “30대 여성이 지프차를 타고 와 남자아이 시신을 야산에 묻고 갔다”는 제보를 들었다. 곧바로 효덕동 민둥산으로 가 남자아이 시신을 수습했다. 조 씨는 같은 날 오전 11시 조선대병원으로 아이의 시신을 옮겼고 의사가 사인을 밝히는 검시를 했다. 숨진 아이는 4살 정도이며 사인은 총상으로 인한 과다출혈, 사망 날짜는 5월 23~28일로 추정됐다. 광주의 한 5·18연구가는 “이 아이의 검시 서류는 10개가 있는데 1개 서류에 ‘5월 27일 사망 추정’이라고 적혀 있다”며 “27일 숨진 것이 유력하다”고 말했다. 이 아이는 이후 광주 북구 망월동 시립묘역 113번에 안장됐다. 2002년 국립5·18민주묘지로 이장되면서 신원을 밝히기 위해 유전자를 채취했다. 전남대 의대에서 채취한 행방불명자 가족 366명과 유전자 대조 작업을 했으나 일치하는 가족은 없었다.● “오월 막내 이름 찾아주고 싶다” 41년이 흘렀지만 이 아이에게 이름과 가족을 찾아주려는 노력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5월 진실 규명을 위한 또 하나의 퍼즐이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1980년 5월 27일 시민군들이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전남도청에서 계엄군 버스를 함께 탔던 남자아이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미국 기자인 노먼 소프는 최근 한 아이가 계엄군 버스를 타고 이송되는 장면을 촬영한 사진을 공개했다. 이 아이는 당시 계엄군 버스를 탄 모습을 촬영한 방송사 영상에서도 확인됐다. 5·18 당시 계엄군에게 붙잡힌 염동유 씨(65)는 1990년 출판된 ‘광주 5월 민중항쟁사료전집’에 “27일 전남도청에서 5살 정도 되는 아이가 울고 있었는데 가슴이 아팠다. 아이니까 (계엄군도)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적었다. 염 씨는 “계엄군에게 시민군 15명이 사살된 뒤 (나는) 체포돼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엎드린 상태에서 전남도청 민원실에서 남자아이가 울고 있는 걸 봤는데 살아있다면 만나고 싶다”고 증언했다. 이동춘 목포과학대 교수(62)는 “27일 전남도청에서 붙잡혀 도청 마당으로 끌려갔는데 먼저 체포된 고교생 두 명이 4, 5살 정도 되는 남자아이를 맡겼다. 버스를 타고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가면서 헌병에게 아이를 인계했다”고 말했다. 그는 2002년 5·18을 왜곡하는 지만원 씨를 고소해 첫 형사 처벌을 받게 한 5·18 시민군이다. 이 교수는 “10여 년 전 5·18 당시 상무대에 근무하는 헌병이 ‘아이가 없어져 부대가 난리가 났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며 “그 아이가 상무대에서 사고사를 당해 매장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최근 40대 회사원이 “당시 7살이었는데 전남도청 버스 사진 속이 아이가 자신인 것 같다”고 주장해 진위를 확인하고 있다. 조 씨는 이와 다른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오월 막내 이야기가 많아 나와 기억을 더듬어봤는데 1980년 5월 20일경 광주역에서 시민군이 (계엄군에 의해) 숨진 어린아이 시신을 리어카에 싣고 가는 것을 봤다고 했다”면서 “리어카에 실려 간 아이와 효덕동 야산에서 수습한 아이가 같은 옷을 입었던 같다”며 사진 속 아이가 아닐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 씨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목격자가 나와야 한다.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행방불명자 가족 2명을 상대로 민주묘지에 묻혀 있는 아이와의 연관성을 확인하는 2차 유전자 검사를 하기로 했다.●행불자 찾으려면 군인 증언 절실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올 2월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됐던 11공수여단 군인 3명의 증언을 들었다. 이들은 “5월 24일 광주 남구 송암동에서 육군보병학교 병사들과 오인사격을 벌인 직후 시민군을 찾기 위해 수색을 하다 보리밭에 사격을 했다. 이후 살펴보니 보리밭에 어린애가 숨져 있어 매장했다”고 진술했다.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군인들이 매장을 한 아이가 오월 막내일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다. 효덕동 야산에서 수습한 아이의 검시서류를 쓴 경찰이 “30대 여자가 매장을 했고 옷에 노잣돈 1000원을 넣었다”고 적었다는 점을 확인하고 해당 경찰을 찾아 당시 상황을 청취하기로 했다.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또 오월 막내 외에 또 다른 아동 희생자가 있었는지도 살펴보고 있다. 진상규명조사위원회와 5·18기념재단 등은 당시 행불자들의 암매장 장소를 찾기 위해 제보를 받고 있다. 차종수 5·18기념재단 고백과 증언센터 팀장은 “신군부가 5월 진실을 은폐 축소하면서 진상 규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며 ”그날의 진상이 밝혀지도록 당시 광주에 투입됐던 군인들의 양심적 증언이 절실하다“고 말했다.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11일 전남 담양군의 한 시골집에서 만난 차초강 할머니(82)는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할머니는 “5월만 되면 가슴이 미어진다”며 울먹였다. 할머니의 가슴앓이는 5남매 중 큰아들인 이재몽 씨(당시 20세)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실종되면서 시작됐다.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는 5·18 희생자의 묘 901기가 있다. 정부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행방불명됐다고 공식 인정한 사람은 78명이다. 5·18민주묘지에 있는 5기의 묘는 시신은 있지만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무명열사 묘’다. 69기는 5·18 당시 사라져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은 행방불명자 묘다. 나머지 4명은 가족들이 5·18민주묘지에 가묘를 쓰지 않아 묘가 없다. 행불자 묘는 5·18민주묘지 1묘역 10구역에 있다. 이 씨의 묘지 번호는 66번이다. 차 할머니는 “유골도 없는 가묘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생때같은 아들을 영영 찾지 못할까 봐 가슴이 타들어 간다”고 했다. “1980년 5월 17일인가 19일인가 모르겠는데 담양에서 광주로 가는 버스가 끊겼어요. 재몽이가 용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시어머니(이 씨 할머니)와 마늘을 팔러 광주로 갔어요.” 이 씨는 마늘을 지게에 지고 담양에서 광주역 인근 농산물공판장까지 할머니와 걸어갔다. 마늘을 팔고 인근 시외버스공용터미널(현 광주은행 자리)에서 기다리던 차가 오지 않자 1km 떨어진 대인시장으로 가던 중 이 씨는 시장 입구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끌려갔다. “혼이 반쯤 나간 시어머니가 집에 와서 시퍼런 옷을 입은 사람들이 손자를 차에 싣고 갔다고 했어요. 아들을 찾으려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수소문했지만 허사였어요.” 가족들은 광주에서 5·18이 일어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사정이 어두웠다. 할머니는 “재몽이가 사라진 뒤에야 광주에서 그 난리가 난 것을 알았다”고 했다. 5·18기념재단 관계자는 “계엄군이 무자비하게 시민들을 진압한 19일부터 광주가 고립되기 시작했다. 이 씨가 붙잡혀 간 것은 교통편이 모두 끊긴 20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이 씨가 계엄군에 맞선 시민군도 아니고 시골에서 올라온 평범한 청년이었기에 잡혀갔어도 곧 풀려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곧 절망으로 바뀌었다. 대문 밖에서 서성이며 손자를 기다리던 이 씨의 할머니는 끝내 한을 풀지 못하고 숨졌다. 차 할머니는 ‘아들이 군대를 가지 않으려고 행방을 감춘 것 아니냐’는 말을 듣고 1985년 사망신고를 했다고 했다. 그리고 2009년 5·18 행불자로 인정받았다. 차 할머니에게 지난 41년은 참으로 모진 세월이었다. “아직까지 재몽이가 돌아오지 않은 것을 보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유골이라도 찾아 묻어주고 넋이라도 달래줘야 할 텐데 생전에 그날이 올지 모르겠어요.”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41년이 흘렸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기간 동안에 숨진 사람은 165명이다. 5·18 당시 사라져 행방을 알 수 없다고 가족들이 신고한 사람은 448명. 하지만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행방불명자는 84명뿐이다. 광주 북구 망월동 묘역에는 5·18 당시 희생자 가운데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11명이 묻혔다. 2001년 국립5·18민주묘지가 조성돼 이들의 유골을 이장하며 유전자 검사를 통해 6명의 신원이 확인됐다. 공식 인정 행방불명자 가운데 78명은 지금껏 시신이 없거나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것이다. 5·18 때 사라진 사람들을 찾기 위해 가족들은 41년째 흔적을 쫓고 있다. 그들의 한과 아픔,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한 법의학자 등을 3회에 걸쳐 전한다. 박종태 전남대 의대 법의학교실 교수(61)에게 ‘광주 5·18’은 꼭 맞춰야 할 ‘역사 퍼즐’이다.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4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집단발포 명령자와 암매장에 대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박 교수가 24년째 5·18 희생자 암매장 추정 장소를 발굴하고 행방불명자 신원 확인 작업을 돕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박 교수는 12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5·18 희생자를 찾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5월 단체가 요청하면 언제든 현장으로 달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5·18과 인연은…. “1997년 5월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가 완공될 때부터다. 인근 망월동 묘역에 안장됐던 당시 희생자들의 유골을 이장하면서 유족들이 40여 명의 사망 원인을 밝혀달라고 요청해 법의학 감정을 했다. 유골을 보고 사인을 확인했던 인연이 24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5·18 유가족의 한과 아픔을 느끼고 공감하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몇 군데를 발굴했나. “5·18 희생자 암매장 장소로 추정되는 광주 광산구 삼도·소촌동, 서구 상록회관 맨홀은 물론이고 광주 북구 문예회관 주변, 효령동, 서구 화정동 광주국군통합병원 인근 등 10곳에서 발굴 작업을 했다. 가장 최근에는 5년 전 충남 천안과 아산의 공동묘지를 파보았다. 하지만 5·18 암매장으로 확인된 곳은 없었다.” ―자원봉사로 발굴 작업을 한다고 들었다. “정부나 광주시에서 5·18 암매장 장소 발굴을 의뢰할 때는 예산이 집행된다. 하지만 5·18 단체 회원들이 요청하면 대가 없이 발굴을 돕는다. 굳이 자원봉사라는 말을 쓰지 않았으면 한다. 광주 시민이자 학자로서 당연해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행방불명자 신원을 확인하려면 유전자 확보가 중요할 텐데…. “2000년부터 5·18 행방불명자 가족 유전자(혈액)를 확보하는 일을 시작해 현재 366명의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 20년 전보다 분자생물학이 많이 발전해 기술 차가 현저하게 난다. 기술이 발전한 만큼 5·18 행방불명자 가족들이 유전자 확보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면 한다.” ―유전자 검사 기법이 어떻게 달라졌나. “2000년 당시에는 유전자를 비교분석하는 에스티아르(STR) 기법이 쓰였다. 최근에는 염기 1개로 부모와 형제뿐 아니라 방계(삼촌, 조카 등)까지도 확인할 수 에스엔피(SNP) 기법이 활용되고 있다. 각종 자료가 부족한 상황을 보완하기 위해 SNP를 이용하지만 STR로 최종 검증을 거쳐야 한다.” ―발굴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희생자가 있나. “2001년 망월동 묘역에 있던 11명의 유골을 5·18민주묘지로 이장하면서 6명의 신원을 확인했지만 나머지 5명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들 중 어린 남자아이가 있었다. 유골이 비닐 양곡부대에 싸여 있었는데 아주 작았다. 5·18 당시 검시조서에는 시신이 많이 부패돼 있었고 체격은 4세 정도라고 적혀 있었다. 희생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데 아직까지 가족들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무명열사 3명의 유전자를 다시 채취한 이유는…. “5·18민주묘지에 있는 무명열사 묘는 5기다. 법의학교실에서 이들의 뼛조각을 보관하고 있는데 그동안 유전자 분석을 할 때마다 3명의 유골이 조금씩 닳아 지난해 11월 다리뼈 5cm 정도에서 유전자를 추가로 확보했다. 40년 넘게 쓸쓸히 잠들어있던 5·18민주화운동 무명열사의 가족을 찾으려는 시도를 다시 시작한 것이다.” ―학자로서 가장 큰 보람은…. “1993년부터 전남대 의대에서 병리학, 법의학을 가르치고 있다. 전공은 유전자 분석, 심혈관 연구, 부검이다. 전국에 법의학자 60명이 있는데 6명이 제자다. 법의학자 10%를 가르친 셈이다. 의술을 익힌 제자들이 사회에서 나름대로 역할을 해주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자 보람이다.”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41년이 흘렸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기간 동안에 숨진 사람은 165명이다. 5·18 당시 사라져 행방을 알 수 없다고 가족들이 신고한 사람은 448명. 하지만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행방불명자는 84명뿐이다. 광주 북구 망월동 묘역에는 5·18 당시 희생자 가운데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11명이 묻혔다. 2001년 국립 5·18민주묘지가 조성돼 이들의 유골이 이장하며 유전자 검사를 통해 6명의 신원이 확인됐다. 공식 인정 행방불명자 가운데 78명은 지금껏 시신이 없거나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것이다. 5·18 때 사라진 사람들을 찾기 위해 가족들은 41년째 흔적을 쫒고 있다. 그들의 한과 아픔,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한 법의학자 등을 3회에 걸쳐 전한다. 박종태 전남대 의대 법의학교실 교수(61)에게 ‘광주 5·18’은 꼭 맞춰야 할 ‘역사 퍼즐’이다.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4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집단발포 명령자와 암매장에 대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박 교수가 24년째 5·18 희생자 암매장 추정 장소를 발굴하고 행방불명자 신원 확인작업을 돕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박 교수는 12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5·18 희생자를 찾는데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5월 단체가 요청하면 언제든 현장으로 달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5·18과 인연은. “1997년 5월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가 완공될 때부터다. 인근 망월동 묘역에 안장됐던 당시 희생자들의 유골을 이장하면서 유족들이 40여 명의 사망 원인을 밝혀달라고 요청해 법의학 감정을 했다. 유골을 보고 사인을 확인했던 인연이 24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5·18 유가족의 한과 아픔을 느끼고 공감하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몇 군데를 발굴했나. “5·18 희생자 암매장 장소로 추정되는 광주 광산구 삼도·소촌동, 서구 상록회관 맨홀은 물론 광주 북구 문예회관 주변, 효령동, 서구 화정동 광주국군통합병원 인근 등 10곳에서 발굴 작업을 했다. 가장 최근에는 5년 전 충남 천안과 아산의 공동묘지를 파보았다. 하지만 5·18 암매장으로 확인된 곳은 없었다.” ―자원봉자로 발굴 작업을 한다고 들었다. “정부나 광주시에서 5·18 암매장 장소 발굴을 의뢰할 때는 예산이 집행된다. 하지만 5·18 단체 회원들이 요청하면 대가없이 발굴을 돕는다. 굳이 자원봉사라는 말을 쓰지 않았으면 한다. 광주 시민이자 학자로서 당연해 해야 야 할 일을 한 것이다.” ―행방불명자 신원을 확인하려면 유전자 확보가 중요할 텐데…. “2000년부터 5·18 행방불명자 가족 유전자(혈액)을 확보하는 일을 시작해 현재 366명의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 20년 전보다 분자생물학이 많이 발전해 기술차가 현저하게 난다. 기술이 발전한 만큼 5·18 행방불명자 가족들이 유전자 확보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면 한다.” ―유전자 검사기법이 어떻게 달라졌나. “2000년 당시에는 유전자를 비교분석하는 에스티아르(SRT) 기법이 쓰였다. 최근에는 염기 1개로 부모와 형제뿐 아니라 방계(삼촌, 조카 등)까지도 확인할 수 에스엔피(SNP) 기법이 활용되고 있다. 각종 자료가 부족한 상황을 보완하기 위해 SNP를 이용하지만 SRT로 최종 검증을 거쳐야 한다.” ―발굴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희생자가 있나. “2001년 망월동 묘역에 있던 11명의 유골을 5·18민주묘지로 이장하면서 6명의 신원을 확인했지만 나머지 5명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들 중 어린 남자아이가 있었다. 유골이 비닐 양곡부대에 싸여 있었는데 아주 작았다. 5·18 당시 검시조서에는 시신이 많이 부패돼 있었고 체격은 4살 정도라고 적혀 있었다. 희생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데 아직까지 가족들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무명열사 3명의 유전자를 다시 채취한 이유는. “5·18민주묘지에 있는 무명열사 묘는 5기다. 법의학교실에서 이들의 뼛조각을 보관하고 있는데 그동안 유전자 분석을 할 때마다 3명이 유골이 조금씩 닳아져 지난해 11월 다리뼈 5㎝ 정도에서 유전자를 추가로 확보했다. 40년 넘게 쓸쓸히 잠들어있던 5·18민주화운동 무명열사의 가족을 찾으려는 시도를 다시 시작한 것이다.” ―학자로서 가장 큰 보람은. “1993년부터 전남대 의대에서 병리학, 법의학을 가르치고 있다. 전공은 유전자 분석, 심혈관 연구. 부검이다. 전국에 법의학자 60명이 있는데 6명이 제자다. 법의학자 10%를 가르친 셈이다. 의술을 익힌 제자들이 사회에서 나름대로 역할을 해주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자 보람이다.”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광주시가 공동 브랜드 ‘지엘(GIEL)’을 통해 지역 중소기업에서 생산한 우수 가전제품 판로 확보에 나섰다. 지엘은 광주시가 보증하는 지역 가전 공동 브랜드다. 광주시는 2016년부터 대기업 해외 이전 등으로 지역 가전 중소기업의 어려움이 커지자 공동 브랜드 개발에 힘썼다. 2017년 ‘CITY OF PEACE’를 개발했지만 홍보가 안 돼 사용이 제한적이었다. 광주시는 지난해 12월 시민 의견 수렴과 선호도 조사를 통해 지엘을 공동 브랜드로 선정했다. 지엘은 광주(Gwangju), 지능(Intelligent), 전자(Electronics)를 합쳐 만든 이름이다. 현재 지엘 브랜드를 ㈜인아, 디케이㈜ 등 24개 중소기업이 쓰고 있다. 이들 기업은 공기청정기, 제습기, 의류건조기 등 39개 전자제품을 생산한다. 지난해 국내외 각종 전시회에 참가해 164억 원어치를 판매했고, 28만 달러어치의 수출 실적을 올렸다. 지엘 브랜드 사용을 희망하는 기업은 광주테크노파크에 신청서를 제출하면 된다. 기술평가위원회의 기술·시장성 평가 등을 거쳐 선정한다. 사용 기간은 2년이며 기간 만료 전 운영위원회 심의를 거쳐 연장할 수 있다. 광주시는 지엘 브랜드를 사용하는 기업에 국외 인증, 맞춤형 마케팅, 전시·박람회 참가 등을 지원하고 있다. 박준열 광주시 자동차산업과장은 “지엘 브랜드는 함께하는 기업들의 우수한 기술력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며 “지역 가전업체가 성장할 수 있도록 적극 돕겠다”고 말했다.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10대 고교생에게 돈을 받고 렌터카를 빌려준 일당 4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전남경찰청은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위반 혐의로 유모 씨(23) 등 4명을 입건했다고 10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유 씨 등은 지난해 10월 1일 오전 1시경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알게 된 고교생 김모 군(18) 등에게 18만 원을 받고 렌터카를 빌려줬다. 김 군 등은 이날 오후 11시40분경 전남 화순군의 왕복 4차로의 도로에서 시속 100㎞로 달리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직장인 A 씨(21·여)를 들이받고 달아났다. 사고 지점의 제한 속도는 30㎞였다. 이 사고로 A 양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경찰 조사 결과 유 씨는 경찰의 렌터카 불법대여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이모 군(14), 박모 씨(32) 등 다른 사람의 은행계좌를 거쳐 송금 받았다. 또 렌터카를 빌리는 카셰어링 애플리케이션(앱) 등록은 김모 씨(35) 명의로 했다. 유 씨는 이들에게 명의를 빌려준 대가로 1만~3만 원 씩을 떼주고 3만 원 정도를 챙겼다. 유 씨는 인터넷 물품사기, 보이스피싱 현금 인출책 등으로 전국 5개 경찰서에서 지명수배를 받고 있었다. 수시로 SNS 아이디와 휴대전화, 차량을 바꾸며 경찰 추적을 피했다. 전남경찰청은 유 씨를 검거하기 위해 법원으로부터 은행계좌·통신내역 압수수색 영장 30개를 발부받아 6개월 동안 추적했다. 유 씨는 지난달 보이스피싱 인출책으로 인천에서 검거됐다. 경찰 관계자는 “각종 사기극을 벌이다 불법 렌터카 대여까지 관여하며 철저하게 신분세탁을 했다”고 말했다.무안=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5·18민주화운동 당사자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전두환 전 대통령(90)이 항소심 첫 재판에 불출석했다. 항소심 출석을 놓고 검찰과 변호인은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으나 법원은 다음 재판에도 참석하지 않으면 재판을 강행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광주지법 형사합의1부(부장판사 김재근)는 10일 오후 2시 법정동 201호 형사대법정에서 전 전 대통령의 첫 공판기일을 진행했다. 피고인의 변호인인 정주교 변호사는 “전 전 대통령이 건강이 좋지 않아 서울에서 광주까지 장거리 이동이 어렵다”며 “2심에서는 출석 요건이 완화돼 신원을 확인하는 인정심문을 하지 않아도 되는 만큼 불출석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검찰은 “피고인은 광주 시민들에게 사과조차 하지 않고 회고록을 통해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한 것 등을 감안해 출석해 재판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재판부는 “형사소송법에 따라 2심에서는 피고인이 2회 불출석할 경우 재판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 전국 모든 항소법원이 마찬가지”라며 “변호인이 인정심문 불출석을 요청했으나 허가하지 않는다”고 했다. 재판부는 다음 재판을 24일 오후 2시로 정했다. 2심 첫 재판이 5분 만에 끝난 뒤 법정 밖에서 기자들을 만난 고 조비오 신부 변호인들은 “전 전 대통령이 사실과 양형부당을 이유로 항소해놓고 2심 재판에 불출석한 것은 유죄를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전 전 대통령이 불성실하게 재판에 참여하는 만큼 2심 재판부가 조속하게 선고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조계 일부에서는 전 전 대통령이 2심 재판에 불출석할 경우 피고인 방어권, 형량 등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고 있다. 전 전 대통령은 2017년 펴낸 회고록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 목격 증언을 한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해 “신부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고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돼 지난해 11월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제41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행사가 ‘오월, 시대와 눈 맞추다. 세대와 발맞추다’를 주제로 경건하고 내실 있게 진행된다. 광주시와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수칙에 따라 각종 행사 참여 인원을 100명 이하로 축소한다”고 9일 밝혔다. 그 대신 소셜미디어 생중계와 체험학습 등 온라인 참여를 늘리기로 했다. 행사는 “코로나19와 미얀마 민주화운동, 아시아계에 대한 혐오와 폭력 등의 위기 상황을 오월 정신으로 극복하고 다양한 세대와의 조화를 통해 민주·인권·평화의 시대를 열어가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세부행사 100여 개는 31일까지 집중 개최되며 주요 행사의 참석 인원도 100명 이하로 제한된다.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17일 오전 열리는 ‘5·18민중항쟁기념 추모제’는 사회적 거리 두기를 지키며 추모식, 추모공연, 헌화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지난해 코로나19 여파로 취소됐던 5·18 전야제는 17일 오후 광주 동구 금남로 등지서 펼쳐진다. 올해 전야제는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 민주평화대행진 등의 거리 행진 없이 풍물굿 등 공연과 전시 위주로 구성되며 소셜미디어에서 생중계한다. 국가보훈처가 주관하는 41주년 5·18민주화운동 국가기념식도 18일 오전 국립5·18민주묘지에서 100명 이하가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다. 유공자, 유족, 각계 대표 등이 참석해 헌화 및 분향,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등 순으로 진행한다. 올해 5·18 기념행사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 15개 시도에서도 열린다. 서울에서는 18일 기념식을 비롯해 영화제, 차량시위 경적 이벤트, 국제학술대회가 열린다. 충북에서는 청남대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동상 앞에서 민주화운동 희생자 기억식 및 문화제를 개최한다. 대구에서는 5·18을 알리는 사진전과 공예품 만들기 등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16일에는 ‘5·18은 옳다’를 주제로 대구시민들이 광주 역사문화 기행을 한다. 행사를 준비한 동네책방 협동조합 관계자는 “대구의 주부, 청년 등 25명이 참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5·18정신을 되새기는 문화행사도 풍성하다. 금남로 전일빌딩245 시민갤러리에서 14일 ‘다시 꺼내놓은 1991사진전시회’가 열린다. 1991년 5월 분신 사망한 전남대 학생 박승희 열사 등 민주화운동 관련 사진을 전시하고 학술대회도 개최한다. 광주 서구 양동시장에서는 16일 5·18 당시 주먹밥을 싸 시민들에게 나눠 줬던 노점상인 등 8명이 대동주먹밥 행사를 연다. 이들은 1980년 5월 최초로 주먹밥을 쌌던 자리인 현재 양동행정복지센터에서 당시 주먹밥 만들기를 재현한다. 광주 망월묘역에서는 18, 19일 ‘내 인생의 오월, 그 봄날에’라는 제목의 연극이 공연된다. 오월 희생자를 추모하며 당시 광주와 전남을 잇기 위해 5·18 가두방송을 이끌었던 전옥주 씨의 고향인 전남 보성에서도 연극이 무대에 올려진다. 윤목현 광주시 민주인권평화국장은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지키면서 올해 5·18 기념행사를 내실 있게 진행해 숭고한 오월 가치를 널리 알리겠다”고 말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4일 오후 8시 전남 목포시내 한 상가 3층 유흥업소. 베트남 출신 선원과 이주여성들이 1, 2명씩 모여들었다. 이 유흥업소에는 20~30대 베트남인 34명이 술자리를 즐기고 있었다. 주변에 잠복하고 있던 해경 정보외사과 직원 12명과 특공대원 12명은 5일 오전 1시경 유흥업소를 급습했다. 경찰관들이 유흥업소로 올라가자 내부에서는 “단속 나왔다”라는 고함이 울려퍼졌다. 1층 입구에 단속에 대비해 폐쇄회로(CC)TV가 설치돼 있었다. 경찰관들이 출입문을 강제로 개방하고 유흥업소 내부로 들어가자 큰 방 1개, 작은방 4개에 남성 24명, 여성 10명이 흩어져 숨어있었다. 경찰이 3월부터 내사해온 마약 판매책 A 씨(29)는 마약을 흡입해 환각상태로 눈동자가 풀려 있었다. 경찰의 단속에도 A 씨는 웃는 표정을 짓는 등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머지 33명 중 상당수도 약에 취해 있었다. 경찰은 A 씨에게 엑스터시 727정, 헤로인 추정물질 118g, 대마가루 664g을 압수했다. 경찰은 A 씨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 광란의 마약파티를 한 것을 확인했다. 전남 목포해양경찰서는 7일 A 씨와 A 씨의 여자친구(24) 등 8명에 대해 마약류관리법 위반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해경은 B 씨(26) 등 26명을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해경은 A 씨 등 14명이 간이 마약검사에서 양성반응을 보였다. 나머지 20명은 마약을 투약했는지 확인하기 모발 등의 분석을 국립과학수사원에 의뢰했다. 해경 관계자는 “A 씨 등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수칙을 위반한 것으로 보고 있다”며 “외국인 마약투약이 확산되면서 내국인까지 영향을 줄 것을 우려돼 수사했다”고 말했다.목포=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명장(名匠)’은 보통 한 분야에서 기술이 뛰어난 1인자에게 나라에서 내려주는 칭호다. ‘명인(名人)’은 기예가 뛰어나 이름을 알린 전문가에게 붙고 ‘장인(匠人)’은 오랫동안 한 직업을 가진 최고 예술가를 일컫는다. 2019년 명장·명인·장인 25명이 모여 광주 동구명장명인장인협회를 만들었다. 회원들은 양복 한복 장신구 음식 사진 미용 등 다양한 분야에서 35∼55년 정도 일한 베테랑들이다. 이런 회원들이 어린 학생들에게 체험학습을 통해 나눔과 상생을 실천하고 있다. 협회 회원들은 6일 서석초등학교 1∼6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공예품 만들기 체험학습’을 했다. 체험학습은 올해로 3년째 이어지고 있다. 올해 주제는 ‘꿈나무와 꿈을 나눔 진로교육’. 아이들에게 공예품 만들기를 통해 직업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마련됐다. 조각보 명인인 이 단체 이남희 총무(52·여)는 “2학년 학생들에게 가죽과 천으로 가방을 만드는 것을 가르쳤는데 학생들의 반응이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회원들은 지난달 3일 충장로 복합문화공간인 충장22 3층에 70m² 규모의 상설전시관을 열었다. 자신들이 직접 만든 작품을 통해 시민들에게 좀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게 됐다. 전병원 회장(65)은 “재능기부를 통한 나눔활동과 함께 다른 지역과의 교류전시회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1980년 5월 18일 민주화운동의 최후 결전이 벌어진 옛 전남도청의 참혹했던 내부 모습이 담긴 사진이 처음 공개된다. 그동안 계엄군 진압 직후 도청 안 모습에 대해 여러 증언이 있었지만 사진이 공개된 적은 없었다. 사진은 5·18 당시 아시아월스트리트저널 기자였던 노먼 소프 씨(74)가 지난해 12월 옛 전남도청복원추진단에 기증한 자료 200여 점 중 일부다. 소프 씨는 당시 찍었던 사진과 함께 출입증, 사용했던 카메라 등도 기증했다. 추진단이 ‘도청 복원에 필요하다’며 먼저 소프 씨에게 기증을 요청했다. 소프 씨는 “민주주의를 꽃피우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었는지 알아주기 바란다”며 흔쾌히 자료를 내놨다. 공개되는 사진에는 1980년 5월 27일 오전 7시 반 계엄군이 도청을 진압한 직후의 모습이 담겼다. 시민군의 시신을 수습하기 전 소프 씨가 언론인 중 가장 먼저 도청에 들어가 찍은 사진이다. 당시 도청에서 숨진 15명 중 윤상원 시민군 대변인 등 9명의 마지막 모습도 있다. △도청 안팎 풍경(23일) △전남 목포역 광장 시위(24일)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 뒤 시가행진(26일) 등을 담은 사진도 볼 수 있다. 사진은 5·18 41주년을 맞아 7일부터 7월 31일까지 옛 도청 별관 2층에서 열리는 ‘노먼 소프 5·18 기증 자료 특별전’에서 일반인에게 선보인다. 광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최후 저항지인 옛 전남도청에 계엄군이 진입한 직후 참담했던 도청 내부 상황을 생생하게 담은 사진들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문화체육관광부 옛 전남도청복원추진단은 5·18민주화운동 41주년을 맞아 7일부터 31일까지 옛 전남도청 별관 2층에서 특별전을 연다. 특별전에서는 노먼 소프 전 아시아월스트리트저널 기자(74)가 기증한 5·18 관련 자료가 최초로 공개된다. 미국 워싱턴에 사는 노먼 씨는 1977년부터 1982년까지 아시아월스트리트저널 도쿄, 서울 담당 기자였다. 공개되는 자료는 노먼 씨가 1980년 5월 23일부터 27일까지 5일 동안 5·18 현장을 취재하고 촬영한 사진과 카메라 등 200여 점이다. 사진은 5월 23일 당시 옛 전남도청 안팎 풍경, 24일 전남 목포역 광장 시위, 26일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 뒤 시가행진 등이다. 특히 계엄군이 옛 전남도청에 진입한 직후인 27일 신군부가 외신을 대상으로 취재를 허용하자 노먼 씨는 오전 7시 반애 가장 먼저 도청에 들어가 사진을 촬영했다. 사진에는 당시 옛 전남도청에서 숨진 시민군 15명 가운데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 열사 등 9명의 모습이 담겼다. 당시 희생자 위치와 성명, 시신 이동 장면 등을 영상으로 제작해 이번에 공개했다. 그동안 항쟁의 마지막 날인 27일 당시 옛 전남도청 외부 사진은 많이 공개됐지만 도청 내부 사진은 거의 없었다. 노먼 씨는 5·18 당시에 수집한 전단지, 성명서도 정부에 기증했다. 그는 “5·18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민주화를 향한 길고 긴 투쟁의 일부분”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꽃피우려고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를 알아주기 바란다”며 기증 취지를 밝혔다.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90대 노모와 50대 아들이 서울 중구 대한항공 빌딩 일우스페이스 전시장에서 30일까지 모자(母子)의 따뜻한 동행을 전하는 작품전을 연다. 주제는 ‘우리 생애의 첫 봄’. 전시된 작품 150점 가운데 100점은 어머니가, 50점은 아들이 그렸다. 아들 이현영 씨(51)는 서울 추계예술대 서양학과를 졸업했다. 서울 홍익대 앞에서 미술학원을 하다 2011년 고향인 전남 광양에 정착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입선했고 20여 차례 작품전을 가진 중견 화가다. 어머니 김두엽 씨(93)는 2010년 82세 때 입문한 늦깎이 화가다. 달력 뒤에 몽당연필로 사과를 그린 것을 본 현영 씨의 추천으로 뒤늦게 화가가 됐다. 초등학교 교육도 받지 못했고 그림은 배운 적도 없다. 평생 농사를 짓고 생선 장사, 세탁소 등을 하며 자식을 키웠다. 적지 않은 나이지만 어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붓을 놓지 않을 정도로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400여 점의 작품을 그렸는데 대부분 꽃, 어릴 적 집 등 동화 같은 풍경이다. 두 사람은 그림을 그릴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작품전은 현영 씨가 생계를 위해 택배기사로 일하며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을 알게 된 한진택배가 지원했다. 어머니는 작품전에 맞춰 자신의 인생과 그림 이야기를 적은 ‘그림 그리는 할머니 김두엽입니다’라는 수필집을 냈다. 현영 씨는 지난해 5월 결혼해 지금은 행복한 봄을 보내고 있다.광양=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가운데 세 번째로 나이가 어린 고 전재수 군(당시 12세)이 41년 만에 얼굴을 되찾았다. 5·18민주화운동유족회는 어린이날인 5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2-22묘역에서 ‘고 전재수 열사 41주년 사진묘비 제막식 및 추모식’을 개최했다. 전재수 군의 형 전재룡 씨(60)는 “동생 사진을 묘비에 새겨 향불을 켜고 넋을 위로했다. 계엄군에 의해 피를 흘린 동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말했다. 재룡 씨는 사진이 없어 무궁화가 새겨진 묘비 대신 동생 얼굴 사진이 찍힌 묘비를 어루만지며 “재수야, 형이 이제 왔어”라며 눈물을 흘렸다. 여동생 영애 씨(49)도 절을 하며 오열했다. 영애 씨는 “재수 오빠와 웃으며 놀았던 기억이 있었지만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41년 만에 찾은 사진을 보니 기억이 뚜렷해졌다”고 말했다. 재수 군은 3남 2녀 중 넷째다. 재수 군은 1980년 5월 24일 오후 1시 광주 남구 진월동 마을 동산에서 친구들과 놀다 참변을 당했다. 당시 11공수여단은 광주 외곽에 있다가 재진압 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이때 계엄군은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시민들에게 사격을 했다. 효덕초등학교 4학년이던 재수 군은 총소리에 놀라 친구들과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다 며칠 전 아버지가 생일선물로 준 고무신이 벗겨져 주우러 돌아섰다가 총에 맞아 숨졌다. 재수 군은 사진이 없어 묘비에 영정사진 대신 무궁화를 새겨 넣은 ‘얼굴 없는 희생자’로 남았다. 재룡 씨는 올 1월 부친의 기일을 맞아 사진 앨범을 정리했다. 그는 20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유품을 보자기로 싸놓고 열어보지 않다가 아버지 사진을 찾기 위해 보자기를 풀어봤다고 한다. 그는 앨범 속 겹쳐 있는 사진들 가운데 재수 군이 아버지, 고모들과 함께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재수 군이 새 옷을 입고 찍은 사진이었다. 김영훈 5·18민주화운동유족회장은 “어린이날을 맞아 ‘5월의 막내’ 전재수 열사 영정사진을 찾아 편하게 보내드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재수 군의 모교인 효덕초등학교 학생들은 해마다 추모 편지와 시를 쓰고 있는데 학교 측은 이날 그동안 모은 추모 글을 재수 군 묘에 가져다 놓기도 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20대가 설거지 문제 시비로 동료 재소자를 폭행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광주지법 형사11단독 정의정 부장판사는 상해혐의로 기소된 A 씨(24)에게 징역 8개월을, 폭행혐의로 기소된 B 씨(28)에게 벌금 300만 원을 선고했다고 5일 밝혔다. A 씨는 올 1월 3일 오후 5시 40분경 광주교도소 미결수 수용동에서 B 씨와 설거지 문제로 시비가 붙어 말다툼을 했다. B 씨가 멱살을 잡은 뒤 주먹으로 자신의 얼굴을 한 차례 때리자 화가 났다. 이에 주먹으로 B 씨의 얼굴을 여러차례 가격했다. 또 B 씨가 바닥에 쓰러뜨린 뒤에도 발로 얼굴을 2~3차례 폭행했고 B 씨도 이 과정에서 A 씨의 얼굴을 2~3차례 때렸다. B 씨는 왼쪽 위턱뼈가 부러지는 등 전치 4주의 상처를 입었다. 재판부는 “A 씨는 다른 형사재판을 받는 중이지만 자숙하지 않고 같은 재소자를 무자비하게 폭행해 골절상을 입혔다. A 씨는 동종 폭력전과가 많아 실형에 처한다”고 했다. 또 “B 씨의 경우 몸싸움을 벌였지만 A 씨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 기존 범죄의 형기가 얼마 남지 않은데다 두 개 범죄를 함께 재판받았을 경우와 형평을 고려해 벌금형을 선고 한다”고 덧붙였다.광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가운데 세 번째로 나이가 어린 고 전재수 군(당시 12세)이 41년 만에 얼굴을 되찾았다. 5·18민주화운동유족회는 어린이날인 5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2-22묘역에서 ‘고 전재수 열사 41주년 사진묘비 제막식 및 추모식’을 개최했다. 전재수 군의 형 재룡 씨(60)는 “동생 사진을 묘비에 새겨 향불을 키고 넋을 위로했다. 계엄군에 의해 피를 흘린 동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말했다. 재룡 씨는 사진이 없어 무궁화가 새겨진 묘비 대신 동생 얼굴 사진이 찍힌 묘비를 어루만지며 “재수야. 형이 이제 왔어”라며 눈물을 흘렸다. 여동생 영애 씨(49)도 절을 하며 오열했다. 영애 씨는 “재수 오빠와 웃으며 놀았던 기억이 있었지만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41년 만에 찾은 사진을 보니 기억이 뚜렷해졌다”고 말했다. 재수 군은 3남 2녀 형제 중 넷째다. 재수 군은 1980년 5월 24일 오후 1시 광주 남구 진월동 마을 동산에서 친구들과 놀다 참변을 당했다. 당시 11공수여단은 광주 외곽에 있다가 재 진압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이때 계엄군은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시민들에게 사격을 했다. 효덕초등학교 4학년이던 재수 군은 총소리에 놀라 친구들과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다 며칠 전 아버지가 생일선물로 준 고무신이 벗겨져 주우러 돌아섰다가 총에 맞아 숨졌다. 재수 군은 사진이 없어 묘비에 영정사진 대신 무궁화를 새겨 넣은 ‘얼굴 없는 희생자’로 남았다. 재룡 씨는 올 1월 부친의 기일을 맞아 사진 앨범을 정리했다. 그는 20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유품을 보자기로 싸놓고 열어보지 않다가 아버지 사진을 찾기 위해 보자기를 풀어봤다고 한다. 그는 앨범 속 겹쳐진 사진들 가운데 재수 군이 아버지, 고모들과 함께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재수 군이 새 옷을 입고 찍은 사진이었다. 김영훈 5·18민주화운동유족회장은 “어린이날을 맞아 ‘5월의 막내’ 전재수 열사 영정사진을 찾아 편하게 보내드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재수 군의 모교인 효덕초등학교 학생들은 해마다 추모편지와 시를 쓰고 있는데 학교 측은 이날 그동안 모은 추모 글을 재수 군 묘에 가져다 놓기도 했다.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