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아

서영아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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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100세 시대를 생각합니다.

sya@donga.com

취재분야

2025-07-14~2025-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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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을 곳 못 찾는 47만 명 임종난민, 내가 누울 자리는?[서영아의 100세 카페]

    시간의 흐름 속에 결과가 정해진 미래가 있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섭리가 그러하다. 인구 구조도 10년 뒤, 20년 뒤의 사회 모습을 예측할 수 있게 해준다. 지난해 고령화율(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비율) 28.7%를 기록한 일본은 세계 최초이자 최고의 초고령 국가다. 사망이 부쩍 늘어난 ‘다사(多死) 사회’를 맞이했다는 얘기다. 죽음은 개인에게는 한 우주가 사라지는 경험이자 삶의 마침표를 찍는 큰일이다. 하지만 전쟁도 아닌데 죽음이 몰려 닥쳐온다면 어떻게 될까.○다사(多死) 사회, 노인이 많으면 죽음도 많다일본 인구에서 고령자 비중이 20%를 넘겨 ‘초고령 사회’가 된 해는 2005년이다. 그 이듬해 일본 후생노동성은 ‘2030년이면 연 47만 명이 죽을 장소를 찾지 못하는 임종(臨終) 난민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때가 되면 연간 사망자가 160~170만 명이 돼 의료와 간병 시스템이 따라갈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암울한 전망이었다. 의료비와 사회보장비가 팽창하고, 병원에서도 집에서도 사망 전에 간호를 받거나 임종할 수 없는 사람이 대폭 늘어난다고 내다봤다. 현재는 연간 사망자 130여 만 명 중 76%가 병원에서 임종을 맞고 있다.○시사용어가 된 ‘2025년 쇼크’이 같은 경고에 놀란 아사히신문 요코하마(橫濱)총국은 이 문제를 지역 사회의 과제로 설정하고 특별취재반을 만들었다. 타겟 연도를 5년 당겨 ‘2025년 쇼크’라는 제목을 붙인 기사 시리즈가 2013년부터 3년간 매주 현지 가나가와(神奈川)판에 연재됐다. 이 지역 고령화율이 전국 평균보다 5년 정도 높고 2025년이 되면 약 700만 명인 ‘단카이(團塊)세대(1947¤1949년생 베이비붐 세대)’가 모두 75세 이상이 되기 때문이다. ‘2025년 쇼크’는 시사용어로 굳어졌다. 일본 정부의 대응 방침은 더 이상 병상수를 늘리지 않는 대신 고령자의 의료와 간병을 지역사회로 돌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익숙한 지역에서 최후까지’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지역포괄케어시스템’ 구축을 서두르고 있다. 이밖에도 환자의 요양 병상에 일상의 기능을 더한 ‘재택형 의료병상’이나 홈 호스피스 체제도 확대되고 있다. ○노인 절반 이상의 소망은 “최후는 정든 집에서”…현실은?이 같은 정부 방침은 노인들의 소망과도 맞아떨어진다. 여론조사에서 일본인의 50% 이상이 자택에서 임종하기를 원하지만 현실은 76%가 병원에서 마지막을 맞는다(표 참조). 병원에서 임종을 원한다는 사람 중에는 ‘가족에게 폐 끼치기 미안해서’ 병원을 택하는 노인들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3년간 ‘2025년 쇼크’팀의 취재반장을 맡았던 사토 유(佐藤陽) 기자는 2025년 쇼크에 대응하기 위해 가장 빨리 움직인 곳으로 인구 40만의 도시 요코스카(橫須賀)를 꼽았다. 2011년부터 지자체와 의사회, 병원이 중심이 돼 ‘재택요양연대회의’를 세우고 재택의료를 뿌리내리려고 노력한 결과, 당시 재택임종 비율 22.9%로 전국 1위를 기록했다. 그는 이 움직임을 이끈 중심인물로 지바 준(千場純) 원장을 소개해줬다. ○“이 병은 낫지 않습니다. 남은 시간을 소중히 누리세요”2017년 1월 하루 시간을 내 지바 원장의 방문 진료를 동행했다. 오전엔 자신의 병원에서 진료를 본 뒤 오후에 간호사 1명을 대동하고 일곱 집을 도는 강행군이다. 지바 원장이 경차를 직접 운전하며 환자 가정을 찾아다녔다. 모두가 치료 불가능한 질병 탓에 의사가 자택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재택의료를 받는 환자들이다.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일본인들이지만 가는 집마다 한국에서 왔다는 기자를 스스럼없이 받아줬다. 지바 원장에 대한 신뢰가 두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첫 집은 알츠하이머와 류머티즘으로 10년째 누워 지내는 80대 어머니를 40대 초반 딸이 혼자 돌보고 있었다. 간호사가 바이탈 점검하고 혈액을 채취하며 움직이는 동안 원장은 딸을 격려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녀가 밤에 응급 상황이 벌어질 것을 걱정하자 그는 “비상 전화로 연락하라”며 “혹시 일이 잘못되더라도 본인 탓이 아니라는 걸 잊지 말라”고 했다. “어머니는 나을 병이 아니니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에만 신경 쓰라”는 조언도 했다. ○재택의료 위한 지역 네트워크 시스템다음으로 찾아간 70대 췌장암 환자는 이날이 재택의료 첫날이다. 불과 반년 만에 체중이 절반으로 줄었고, 병원에서는 더 이상 치료가 어렵다고 했단다. 환자의 침대 바로 곁에서 부인과 아들 딸, 며느리, 방문간호사와 의료업체 직원, 케어플래너, 지바 원장이 둘러앉아 치료 방법을 상의했다. 재택의료를 위해 지역에 촘촘한 역할 분담 네트워크가 만들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바 원장은 환자 상태를 체크하고 상세한 치료 계획을 세워 나갔다. “의사 방문은 일단 월 2회로 시작하겠습니다. 방문간호사는 주 2회 오시고, 환자의 목욕도 맡아 주세요. 이를 위한 용구를 의료업체 직원이 준비해 주시고요. 약은 500엔(약 5100원) 정도 내면 배달에 투약 지도까지 해주는 시스템이 있으니 그걸 이용하시면 됩니다.” 가족이 “환자가 통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하소연하자, 지바 원장은 “먹는 일 자체가 힘들어서 그런 것”이라며 “본인이 원하는 대로 해드리라”고 조언했다. 병세의 진행 과정에 대해 가족에게 설명하고 마음의 준비를 도왔다. “어느 순간부터 엄청난 고통을 호소할 수 있는데 그때는 마약 성분의 진통제를 사용하게 된다”는 말에 가족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택임종을 결정한 가족의 표정은 의연하지만 밝았다환자가 집에서 임종하겠다는 뜻이 워낙 강해 가족들은 재택임종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일단 각오를 하고 나서인지 환자도 가족도 분위기가 밝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중 수십년 전 환자 부인이 시부모님의 임종을 집에서 치렀다는 얘기가 나오자 누워있던 환자의 표정이 유달리 환해졌다. 믿음직한 부인에게 최후의 나날을 맡길 수 있어 다행이라는 안도감이랄까, 자신감이 피어난다. 지바 원장은 느닷없이 가족에게 “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는 언제냐, 가족과의 좋은 추억은 뭐냐”고 묻고, “그 시절 얘기를 아버지와 많이 나누라. 생기가 돌아올 것”이라고 조언했다. “아버지와의 매일을 소중히 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신문에 싣기 위해 최소한의 ‘그림’이 필요했던 기자가 미안해하며 사진 한 장만 찍겠다고 양해를 구했는데, 모두가 즐거워하며 포즈를 취해 깜짝 놀랐다. 사진에도 드러나듯 병상에 누운 환자도 웃는 얼굴을 지어보였다.○“난 내년이면 여기 없을 거니까…”다음 집. 오늘 내일 죽음을 예약한 65세 여성의 일상도 여느 때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6개월 전 위암 수술을 받았지만 뼈에까지 전이됐고, 여명 6개월을 선고받았다. 막내딸과 강아지 두 마리와 지내는 환자는 “때가 왔는데도 별 변화 없이 잘 지내고 있다”며 “내년 이맘때면 난 여기 없을 테니까. 남편도 부모도 다 저 세상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외롭지 않다”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문득 혼자 남겨질 막내딸(24)을 쳐다보더니 “이 아이도 장래를 약속한 남자 친구가 있어 걱정할 게 없다”고도 했다. 딸도 덤덤하게 엄마의 말을 들었다. 지바 원장은 “그래도 자꾸 움직이시라. 종교에 기대는 것도 마음이 편안해지는데 도움이 된다”며 일상의 자잘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팽창하는 의료비 억제 위해 ‘병원에서 지역으로’ 내건 日 정부저녁 무렵 들른 60대 독신 여성은 좀 걱정되는 경우였다. 지바 원장과 현관문을 여니 문간에 여성이 누워 있었다. 한번 쓰러지면 자력으로 일어날 수가 없어 그냥 누워 있었다는 건데, 친척이 다음날 아침 들르기로 돼 있다고 했다. 일단 침대까지 옮기고 친척에게 밤에 들르도록 연락을 취하게 했다. 우리 방문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밤새 바닥에 누운 채 있어야 했던 상황이다. 이 여성은 병원에 입원한 지 이틀만인 그날 반 강제로 퇴원했다고 했다. 의료재정 감축을 위해 병상을 졸라매는 일본 의료의 차가운 현실을 느낄 수 있었다. 이날 일곱 곳 왕진을 마치기까지 오후 1시부터 7시간이 걸렸다. ○“사람은 언젠가는 떠나야 합니다”지바 원장의 재택의료는 일종의 방문 호스피스였다. 지바 원장은 노환이나 불치병 환자와 가족에게 “이 병은 낫지 않는 병”이라고 담담하게 말해준다. 질환을 다스리되 남은 기간 삶의 질을 유지하고 고통을 줄이는데 더 무게를 둔다. 그래서 집집이 돌며 환자와 가족에게 “무조건 낫게 해야 한다는 생각,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강조한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떠나야 하니 적절한 때에, 편안하게 가시게 하는 게 최선”이라는 얘기다. 떠나는 환자와 남겨질 가족에 대한 배려가 담긴 이런 말들이 모두에게 묘한 편안함을 주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일본 사회 전반에 죽음이 흔해지면서 사회 전체가 죽음에 대한 태도를 새롭게 하는 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재택의료 환자들 대부분이 연명치료의 문제점을 공유하고 ‘리빙윌’을 작성한다고 한다. 치료가 불가능하고 죽음이 임박할 경우에 대비해 연명치료에 대한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이에 따른 모든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고 서명해 두는 것이다. ○한국의 고령화, 일본보다 출발은 늦었지만 속도는 빨라지난해 한국의 출생아는 27만2400명, 사망자는 30만5100명으로 인구는 3만3000명 자연 감소했다. 일본의 경우 출생아는 2019년 86만5000여 명, 사망자는 130만 여 명이 넘어 연간 43만여 명이 줄었다(2019년 기준). 한국은 일본보다 출발은 늦었지만 고령화 속도는 더욱 빠르다. 인구 중 고령자가 7% 이상인 ‘고령화 사회’에서 20%인 ‘초고령 사회’로 들어가는 데 일본이 35년(2005년 도달) 걸렸는데 한국은 25년(2025년 예정)만에 도달할 전망이다. 세계에서 고령화 속도가 가장 빨랐다는 일본을 약 20년 늦게 맹추격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같은 과정에 독일은 77년(2007년 도달), 프랑스는 143년(2008년 도달), 미국은 88년(2033년 예정) 걸린다. 한국에서는 아직 임종 난민같은 고민은 생겨나지 않고 있지만 고령화율이 높아질수록 사망의 절대 숫자는 커지게 된다. 일본에서 초고령 사회 돌입 1년 뒤에 임종난민 경고가 나온 것을 떠올려보면 한국이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는 2025년 무렵에 비슷한 경고가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대비하지 않으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 ○죽음은 삶의 자연스런 과정 대가족 시절 집안에서 노인이 앓아누우면 가족이 간병하고 사망하면 집에서 장례를 치렀다. 사회와 삶 속에 죽음이 함께 있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죽음을 병원 안에 가둬 사람들의 일상에서 단절시켜버렸다. 환자가 병원에 옮겨지는 순간 죽음은 보이지 않게 된다. 병원에서는 사망 과정에 들어간 죽음도 무조건 ‘치료’의 대상이 될 뿐이다. 입으로 음식을 삼키지 못하면 위에 구멍을 뚫거나 코 줄로 영양을 공급하고 숨을 못 쉬면 목에 구멍을 뚫어 산소를 공급한다. 수십 개의 줄을 연결해 내일 죽을 사람을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몇 달이고 살려두는 일도 벌어진다. 대부분의 경우 삶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단계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많은 이의 도움이 필요하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고 2~3일 앓다가 저세상으로 간다는 뜻의 ‘구구팔팔이삼사’가 노인들의 로망이라고 한다. 그만큼 죽음으로 가는 과정은 힘들고 지난하다. 나와 내 가족은 이 과정을 어디서 어떻게 진행할지,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도 지금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듯하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행복 이야기를 나눕니다. 초고령사회의 최일선을 걷는 일본 사례를 많은 참고로 삼고자 합니다.}

    • 2021-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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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년 내 일본의 절반이 사라진다…열도 충격에 빠뜨린 ‘마스다보고서’[서영아의 100세 카페]

    2014년 5월 보고서 하나가 일본 열도를 충격에 빠뜨렸다. 마스다 히로야(增田寬也) 전 총무상이 이끄는 일본창성회의가 낸 일명 ‘마스다 보고서’다. 현재의 인구 감소 추세대로라면 2040년까지 일본의 절반, 896개 지방자치단체가 소멸한다는 경고를 담았다(이 내용을 정리한 책 ‘지방 소멸’은 한국에도 출간돼 있다). 인구 문제로 인한 쇠락과 소멸의 공포가 본격적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보고서의 분석 기법에 따라 소위 ‘지방소멸위험지수’가 개발됐다. 한 지역의 가임여성(20¤39세) 인구를 65세 이상 인구로 나눈 값으로 0.5 미만이면 소멸위험 지역으로 분류된다. 인구의 유출·유입 등 다른 변수가 작동하지 않는 한 30년 뒤에는 해당 지역이 없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도쿄 23구(도심)에도 빈집 50여 만호빈집이 늘면서 지방부터 ‘부(負)동산’화가 진행되는 일본이지만 인구가 쏠리는 대도시 집값은 상대적으로 견고해보였다. 하지만 지난해 총무성 발표는 놀라웠다. 전국의 빈집 846만 가구 중 81만 여 가구가 도쿄에 있었고, 이중 70%는 도심 23구내에 있었다(도쿄는 한국으로 치면 서울특별시와 비슷한 도심 23구와 경기도와 비슷한 ‘다마 지구’로 이뤄져 있다). 특히 23구중에서도 부촌(富村)으로 알려진 인구 92만 명인 세타가야(世田谷)구에서만 5만호가 빈집으로 밝혀져 충격을 더했다. 아사히신문은 그 이유로 고정자산세를 부담으로 느끼지 않는 가정이 많다는 점, 집값이 비싸니 젊은 세대는 살 엄두를 내지 못하고 부동산개발업자들은 고도 제한 때문에 매입을 꺼린다는 점을 꼽았다. 소유자가 고령인 경우 팔겠다는 판단을 하지 못하고 방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부촌은 부촌대로, 또 다른 이유로 빈집 위기를 겪는 셈이다.○유령 도시화하는 일본의 아파트 단지들보다 심각한 사회 문제는 유령 도시화하는 전국의 아파트 단지들이다. 아파트 단지는 1960년대부터 본격화된 고도 성장기에 주로 교외에 조성됐다. 마이카 마이홈 붐이 불면서 직장에서 좀 멀어도 녹지가 있고 쾌적하게 조성된 단지에 젊은 샐러리맨 가족이 몰려들었다. ‘살인적’이라는 일본의 출퇴근 전쟁도 이와 함께 시작됐다. 서구식 양변기를 사용하고 열쇠를 잠그고 출근하는 생활 스타일이 확산되며 ‘단지족(族)’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문제는 세월이다. 주민과 아파트가 함께 늙어가면서 슬럼화를 우려하는 상황이 됐다. 아파트 단지에서 젊은이들이 떠나고 상권도 사라지면서 ‘교통 약자’와 ‘쇼핑 난민’을 낳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쯤 되면 한국처럼 재건축을 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문이 들 텐데, 일본의 주택은 이미 용적률을 꽉 채워 지은 경우가 대부분이라 재건축 비용을 고스란히 부담해야 한다. 특히 주민이 고령이라면 몇 년에 걸친 재건축 과정을 견뎌낼 힘도, 건축비를 낼 경제력도 없다. 무엇보다 일본 전체 인구가 줄고 있다. 새로 건물을 지은들 받아줄 인구가 없는 것이다.○활기 넘치는 ‘요코하마의 티벳’ 인구는 줄어드는데 고령자 비중만 늘어난다면 삶의 터전은 어떻게 바뀔까.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2017년 경 이런 불안감에 정면에서 도전 중인 아파트 단지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1978년 조성된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 시 와카바다이(若葉臺) 단지가 그곳이다. 27만평 부지에 6300여 호, 1만 4000여 명이 살고 있는데 주민의 43.7%가 65세 이상이다. 아침 10시경 찾은 와카바다이 단지는 활기가 넘쳤다. 중심부에 자리한 상점가에는 복장을 갖추고 모인 하이킹 팀이 인사 중이었고, 벌써 아침 골프 연습을 마치고 귀가하는 어르신들이 오갔다. 주3회 아침마다 100여 명이 폐교 운동장에서 그라운드 골프(골프와 게이트볼의 장점을 딴 스포츠)를 즐기는 장관이 벌어진단다. 한창때 주민은 2만 명을 넘었지만 지금은 주로 은퇴 세대들이 남았다. 3개, 2개였던 단지 내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각각 1개씩으로 줄었다.○우리 삶의 터전은 우리가 가꾸고 지킨다이곳에서 주민과 행정이 힘을 합친 ‘단지 재생’ 실험이 벌어지고 있었다. 건물도 사람도 늙었지만, 주민들은 인구 감소와 고령화에 지지 않고 지속가능한 삶의 터전을 만들어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입주 초기인 1980년대 자치회를 만들어 주민교류 사업에 적극 관여했던 젊은 부모들이 이제 고령자가 돼 ‘늙은’ 단지의 과제 해결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자가(自家)를 보유하고 안정적인 연금을 받고 있다. “밖에서는 이곳을 ‘요코하마의 티벳’이라 부릅니다. 젊은 세대는 아이 키우기 좋고 노인들도 살기 편한 공동체라는 뜻이죠.” 10여 개의 자치회를 총괄하는 연합회 회장인 야마기시 히로키(70) 회장의 자랑이 이어졌다.○남을 위해 일할 때 내가 빛난다하나 둘 비게 된 상가에는 주민 편의시설이 들어섰다. 2년 전 문을 연 식당 ‘하루’는 단지에 사는 여성들이 자원봉사로 운영하며 ‘집 밥’을 제공한다. 식당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낸 스즈키 가즈코(72)씨와 니시타이 미사코(81) 씨는 “혼자 사는 분들을 밖으로 불러내자는 취지”라며 “밥은 같이 먹을 때 건강에도 좋다”고 말했다. 식당에는 생계가 아니라 보람을 위해 일하는 주민들로 북적인다. “매일 다른 메뉴를 600엔 정도에 제공합니다. 주부가 30여 명 모이다보니 각자 가진 특기가 있고, 그걸 살려 최대한 맛있는 식사를 만들죠.” 설명하는 두 사람에게서는 생기가 넘쳐났다. 사람은 나이와 무관하게 남을 위해 일할 때 빛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돌봄 받기 전에 돌봄 받을 일이 없도록 ‘예방’가장 눈길을 끈 것은 ‘간병 예방’ 시스템이다. 간병(介護·돌봄)을 잘할 시스템을 갖추기 이전에 남의 간병을 필요로 하는 상황까지 가지 않도록 ‘예방’하는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다. 핵심은 고령자의 외출과 활동을 촉진하는 것이다. 고령자들이 몸을 움직이고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도록 하는 각종 프로그램이 촘촘히 가동된다. 자치회가 운영하는 스포츠 문화클럽의 1700여 회원 중 60%를 고령자가 차지하고 있다. 이 클럽이 관리하는 야구장, 학교 교정, 테니스코트 이용자는 연인원 8만5000명에 달한다. 클럽은 운동회와 문화제, 연간 17회의 그라운드 골프대회 등을 열어 주민 교류의 장을 만든다. 요코하마 시가 운영하는 지역케어플라자는 간병 예방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런 노력의 결과 간병보험 적용을 인정받은 주민은 12%로 요코하마시 전체의 인정률 17.5%보다 크게 좋은 건강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독사 방지 ‘6호 담당제’?이 단지가 당초 젊고 일하는 세대 위주로 세워졌다는 점은 엘리베이터를 3층 단위로 서도록 설계한 데서도 드러난다. 12층 아파트의 1층·4층·7층·10층에만 엘리베이터 문이 설치돼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거동이 힘든 노인이 이곳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한 것이다. 주민들은 이런 단점을 ‘고독사 방지’시스템으로 둔갑시켰다. 같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한 층 두 가구씩, 세 개 층 6가구를 한 단위로 묶어 연락망을 구성했다. 혼자 사는 노인은 여행이나 장기 부재 시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알려야 한다.○고령사회에서는 주택공사 역할도 바뀐다단지 재생 사업에 한국으로 치면 토지주택공사(LH) 격인 ‘가나가와 현 주택공급공사’가 적극 참여한다는 점도 눈에 띄었다. 70년대에 구릉지 밭과 잡목림을 개발해 아파트 단지를 건축했던 주택공사는 지금은 하나 둘 비어가는 점포를 주민들에게 내줘 육아 시설이니 식당 등으로 개조하는 작업을 적극 지원하고 있었다. 주택공사가 상가에서 받아야 할 월세를 포기하면서까지 지역민들을 적극 돕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자체 연구 결과 이대로 가면 30년 뒤 단지 인구가 5000명이 된다는 추정치가 나왔는데, 자신들이 만든 아파트단지의 가치를 지키겠다는 얘기였다. 유령 도시가 되고 있는 다른 단지들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이자 자신들이 지어낸 아파트에 대한 궁극의 애프터서비스다. 재미있는 것은 고령 사회에서는 주택공급공사의 역할도 바뀌고 있었다는 점이다. 주택공급공사는 47개 도도부현(광역자치단체) 별로 각기 운영되는데, 가나가와 현 주택공급공사의 경우 지난해 창립 70주년을 맞았다. 저소득층을 위한 임대 사업 외에 아파트 단지 재생 사업을 지원하고 고령자용 실버타운주택, 간병까지 해주는 본격적인 요양원을 5군데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세대 공존, 아기 엄마들을 모셔라‘지속가능한 단지’를 위해 젊은 주민을 불러들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2014년 빈 점포를 이용해 육아세대를 위한 공간 ‘소라마메’가 문을 열었다. 이용자는 하루 100엔만 내면 이곳에서 아이를 놀게 하거나 점심을 먹거나 할 수 있다. 남편이 출장이 잦아 주로 3세 아들과 둘이 지낸다는 아키야마 시노(34)씨는 “지나가는 동네 어른들이 들러 아이들을 어르고 지나간다”며 “세대 간 교류가 되는 따뜻한 장소”라고 말한다. 최근 새로 이사 온 엄마들 중 3분의 1은 어린 시절 이곳에서 자란 사람들의 유턴이 많다고 한다.○인생 최후를 익숙한 터전에서 지낼 수 있도록소라마메 건너편에는 고령자 생활지원센터가 마련돼 있다. 월 500엔을 내면 정기적인 전화와 방문에 의한 안부 확인을 받을 수 있다. 단지 내 병원이 운영하는 방문간호 재택간병지원사업소가 병설됐다. 아직은 이용자가 거의 없지만 앞일을 생각해 시설을 갖췄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곳을 인생 최후의 집으로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스스로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고 말한다. ‘익숙한 곳에서 최후까지’는 일본 정부가 내건 슬로건이기도 하다.○한국의 지방 소멸, ‘발등의 불’마스다 보고서의 계산법을 사용해 한국고용정보원이 2019년 11월 내놓은 ‘한국의 지방소멸위험지수 2019’에 따르면 전국 228개 시군구 중 소멸위험 지역은 97곳으로 전체의 42.5%다. 특히 소멸위험이 높은 시군구는 경북 군위군과 의성군(각각 0.143)으로 나타났다. 전남은 지수 0.44로 17개 광역시도 가운데 유일하게 소멸위험 지역으로 분류됐다. 굳이 이런 통계가 아니어도 지방 소멸은 이미 발등의 불이다. 올해 대학입시에서는 정원 미달이 속출해 수능 성적 없이도 장학금을 주겠다는 학교마저 나타났다. ‘벚꽃 피는 순서로 지방대학들이 망할 것’이라는 속설이 현실화하고 있다. 앞으로가 더 큰 일인 것이 합계 출산율 1이 한 세대(30년)가 지나면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을 의미하는데, 2020년 한국은 0.84를 기록했다. 한국에서도 우후죽순으로 들어선 아파트단지들이 많다. 아직은 재건축을 통해 면적과 호수(戶數)를 늘린다는 기대감을 모으고 있지만 인구가 본격적으로 줄어들면 사정은 달라질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기운은 있는데 할 일이 없다”는 한국 고령자들의 하소연을 떠올려보면 우리도 지역에서 할 일이 무엇인지 조금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행복 이야기를 나눕니다. 초고령사회의 최일선을 걷는 일본 사례를 많은 참고로 삼고자 합니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1-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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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돈 드릴 테니 제발 집 좀 가져가세요.” [서영아의 100세 카페]

    “빈 집, 10만 엔(약 104만 원)에 사 봤습니다.” 일본 유튜브에는 이런 제목의 영상들이 적잖이 올라온다. 노인들이 살다가 떠났음직한 지방의 수십 년 된 구옥(舊屋)들이 10만 엔, 20만 엔에 거래된다. 가재도구가 그대로 남아있는 집들도 적지 않다. 집을 산 구매자가 유튜브에 맨 먼저 올리는 영상은 ‘보물찾기’다. 빈 집을 탐험하며 상태를 살피고, 혹시라도 남아 있을 골동품이나 귀중품도 찾아본다. 이를 테면 100년 된 집에서 강아지 밥그릇으로 사용하던 그릇이 진귀한 골동품이었다는 식의 ‘대박 스토리’에 기대를 거는 것이다.○고령화 인구 감소로 방치된 빈집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노인들은 현금을 선호하고 이를 자신만이 잘 아는 곳에 숨겨두는 일이 적지 않다. 은행에 맡겨도 금리가 0%대인 데다, 노인들의 특성상 자신의 손닿는 곳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다. 그러다가 치매라도 오면 자산의 존재 자체를 잊고 방치하게 된다. 노인이 살던 안방 바닥을 뜯었더니 현금다발이 나왔다거나 집을 철거하다가 벽에서 금붙이가 나왔다는 뉴스가 소개되곤 했다. 하지만 유튜브에서 보는 현실 세계의 보물찾기는 옛날 지폐 몇 장이나 쓰레기더미 속에 섞인 동전더미를 발견하는 선에서 끝나곤 한다. 일본 총무성 통계국이 발표한 ‘2018년 토지·주택 통계 조사’를 보면 일본 전국의 빈집은 846만 가구로 전체 주택의 13.6%를 차지한다. 직전 조사인 2013년보다 26만 가구 늘었다. 노무라총합연구소는 2033년에는 빈집이 전체의 30%를 넘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빈집이 늘면 집값 등 자산 가치만 떨어지는 게 아니다. 빈집 비율이 30%를 넘게 되면 치안이 악화되고 슬럼화가 진행돼 지역사회 붕괴로 이어진다. ’빈집=지방 폐가(廢家) 또는 별장지‘라는 공식도 깨지고 있다. 위 통계에 따르면 도쿄에만 81만여 채의 빈집이 있고, 그중 70%가 도심 23구내에 있었다고 한다. ○팔리지도 않고 버릴 수도 없고 그래서 일본에서 부동산은 이제 ‘재산이 아니라 부채’라는 평가를 받는다. 휴양지 맨션이나 별장지 등은 돈을 얹어주며 처분하는 경우가 늘었다. 주택 또는 토지는 “공짜로 준다 해도 싫다”고 손사래 치는 사람들에게 “돈 드릴 테니 가져가주세요”라고 매달리는 시장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제야 부담에서 벗어났습니다. 저 세상까지 들고 가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예요.” 2017년 8월 아사히신문이 시작한 ’부(負)동산 시대‘ 시리즈에는 도쿄 인근의 토지 100여 평을 10만 엔에 팔아버린 78세 A씨 부부의 얘기가 소개됐다. 부동산 버블 말기인 1991년 초 노후에 별장을 짓겠다며 1300만 엔에 사들인 토지였다. 중개수수료와 세금 등으로 21만 엔이 들어 최종적으로는 11만 엔 적자였지만 부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한다. 토지에는 매년 재산세와 관리비가 5만 엔 이상이 들어갔는데, 자녀들은 상속받지 않겠다고 하고 구청에 낸 기부 제안도 거절당한 터였다. 1년 전 사망한 형의 스키장 인근 맨션을 엉겁결에 상속받은 B씨(61)도 115만 엔의 비용을 들여 소유권을 털어냈다. 그 비용을 내면 물건을 사겠다는 부동산업자의 제안이 반가웠다는 그는 “돌아간 형이 남긴 숙제를 이제 다 해결했다”며 “어깨에서 짐을 내린 기분”이라고 했다. 맨션은 빈 채로 뒀지만 관리비와 재산세 등이 연 18만 엔씩 들어갔고, 팔려고 내놔도 문의 전화조차 없었다.○부동산(不動産)이 ‘부동산(負動産)’으로 시리즈는 “부동산은 이미 마이너스 가격의 ‘부동산(負動産)’이 됐고, 버리고 싶은 쓰레기가 되고 있다. 그러나 토지도 주택도 제도상 버릴 수 없다”며 너무 높은 고정 자산세나 복잡해지는 상속 제도도 부동산에 부담을 준다고 지적했다. 1985년 도쿄 고급 주택가에 5000만 엔짜리 맨션을 구입한 C씨. 2009년 이 집을 팔기 위해 부동산에 견적을 의뢰하자 5000~6000만 엔이라고 통보받았다. 도쿄 부동산이 버블 최고조에 이른 1991년에는 1억5000만 엔까지 올랐던 집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때부터 이 맨션이 팔리기까지는 4년이 걸렸다. 판매 가격은 4000만 엔에 불과했다. 일본에선 집을 내놓은 뒤 일정 기간 지나면 호가를 낮추는 방식을 쓰는데, 4000만 엔대까지 맨션을 원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이런 현상의 원인 중 하나는 우선은 고령화다. 고도 성장기 건설 붐 속에 지어진 주택들이 50여년이 지난 지금 노후화돼 재건축과 리모델링이 필요한데, 노인이 된 건물주들은 세상을 뜨거나 병원이나 양로원에 들어가면서 빈집이 크게 늘었다. 자녀 세대로서는 상속받은 부모의 집은 팔리지도 않고 세금과 관리비만 늘어나는 애물단지가 됐다. 일본 국토교통성 조사에서는 토지를 소유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는 국민이 40%가 넘는다. ○버블과 함께 꺼진 부동산 불패 신화 왜 이렇게까지 됐을까. 배경에는 1991년경 시작된 부동산 버블 붕괴가 있다. 이때 토지 불패(不敗) 신화가 무너졌다. 그 전까지 일본에서도 토지는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가격이 오르는 자산이었다. 고도성장과 함께 순조롭게 오르던 땅값은 1985년 플라자합의에 따른 엔고 현상으로 유동성이 폭증하면서 거품이 생겨났다. ’도쿄를 팔면 미국 전체를 살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은행들은 앞 다퉈 부동산 가격의 200%~300%까지 대출을 해줬다. 은행 빚을 안 쓰면 바보였다. 돈이 돈을 불렀고, 일본인들의 오만함도 자라났다. 서구사회를 배우고 따라가려 애쓰던 일본 사회에서 “이제 더 이상 미국이나 유럽에서 배울 게 없다”는 말이 유행했다. 하버드대 석학 에즈라 보겔의 ’재팬 애즈 넘버원(Japan as Number One : Lessons for America)‘이란 책 제목이 풍미되며 일본인들의 집단 우월감이 한껏 자라나는 시절이었다. ○거품 붕괴의 상처, 부동산에 등 돌린 일본인 금리 인상에 이은 일본 정부의 대출 규제는 흥청망청하던 시장에 찬물을 끼얹었다. 급격한 대출 규제와 회수는 개인과 기업의 연쇄 파산으로 이어졌다. 이후 자산으로서 토지의 가치는 180도 달라졌다.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집값에 도심에서 밀려나 은행 대출로 외곽에라도 내 집 마련을 했던 월급쟁이들은 하염없이 떨어지는 집값을 확인하며 그 몇 배 되는 원금을 갚아 나가거나 대출 상환을 못해 집을 빼앗기기도 했다. 요즘 일본인들의 상식은 집이란 사기만 하면 그때부터 가격이 하락하는 자산이라는 것이다. 중고주택 가격은 자동차처럼 연식(年式)에 따라 가격이 다운된다. 물론 올림픽을 앞둔 도쿄 도심 등 특별한 호재가 있다면 땅값이 오르기도 한다. 다만 도쿄조차 공시지가 기준으로 1983년을 100이라 했을 때 버블기에 341.3까지 치솟았다가 2005년에는 71.3(상업지 기준)이 돼 있는 상황이다. 이렇다보니 내 집 마련보다 월세를 선호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35년간 월세를 내든, 같은 기간 대출로 집을 장만해 원리금을 납입하고 세금을 내든, 비용은 비슷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내 집이라면 지진이나 화재 등 재해 부담도 떠맡아야 한다. 중고주택을 선호하지 않는 풍조도 한 몫 하는데 오래된 주택일수록 지진에 대한 대비가 제대로 돼 있지 않다.○한국 부동산은….일본과 닮은 점, 다른 점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한국 부동산 가격이 결국 일본처럼 폭락할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져 나온다. 유동성에 의한 가격 급등이 이어지는 점이나 불안에 빠진 사람들이 ‘영끌’해서 내 집 장만을 하고 있는 점, 도쿄에서 인기 지역의 오름세가 더 가팔랐듯 한국에서도 강남 등에 수요가 집중된다는 점, 급속한 고령화와 인구 감소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 부동산이 일본의 전철을 밟는 것 아니냐는 예측을 하게 만든다. 다만 크게 다른 점도 있다. 일본의 경우 부채로 만들어진 거대한 거품이 명백하게 존재했다. 이 상태에서 정부가 갑자기 정책을 바꿔 금리를 올리고 은행들에 주택대출 한도를 조이게 하자 연쇄도산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경우는 LTV(담보인정비율) DTI(총부채상환비율) 제한을 통해 이미 대출 비중을 제한하고 있다. 또 다주택자에 대한 각종 규제도 무리한 투자를 제한하는 효과가 있다. 여기에 더해 일본은 공급 과잉이 주택 가격 하락을 부채질했다는 지적이 있다. 버블이 꺼진 이후 주택 과잉 상태에서도 신규 주택이 계속 공급됐다. 아사히신문은 이를 ‘신축(新築)주의’라고 지적했다. 일본인들이 워낙 신축 주택을 선호하니 빈집이 늘어도 신규 주택 공급이 줄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의 주택거래량 중 중고 주택의 비중은 2018년 기준 14.5%에 불과할 정도로 구축은 시장에서 찬밥 신세다. ○한국도 빈 집 늘어 한국에서도 일본처럼 빈집이 늘고 있다. 2019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빈집은 151만7000호로 전체 주택의 8.4%를 차지한다. 30년 이상 노후화된 주택의 비중이 30% 이상이다. 새 집, 특히 새 아파트 선호 현상은 우리 부동산 시세에서도 일찌감치 나타났다. 한국에도 노후에 대비해 투자한 부동산이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일이 일어날까. 아예 집을 소유하지 않겠다는 젊은이가 늘어나는 시대도 올 수 있을까. 일본 사회를 뒤흔든 부동산 시장 붕괴의 충격과 피해를 참고삼을 필요가 있다. 일본의 사례를 거울삼아 한국 부동산 시장의 연착륙을 모색해야 할 때다. ※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1-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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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용식 “클라우드 통해 디지털 뉴딜 이끌겠다”

    지난해 3월 정부는 공적 마스크 5부제를 추진하면서 1인당 한 주에 2장씩 마스크를 사게 했다. 어느 약국에 재고가 있는지 모르는 국민은 약국에서 긴 줄을 서야 했다. 마스크 공급 상황을 알려주는 애플리케이션(앱)이 해결책으로 떠올랐지만 중앙부처에서 알아보니 시스템 개발에 3개월이 걸린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 문용식 원장(62)에게 SOS를 치자 문제가 3일 만에 해결됐다. 비결은 민관(民官) 협력이었다. NIA는 보건복지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행정안전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이 가진 관련 데이터를 ‘시빅 해커’(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해 사회와 도시 문제를 해결하는 시민 개발자들)들에게 개방해 마스크 판매 현황을 확인하는 서비스를 만들도록 지원했다.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 개발자들에게 우리가 어떤 정보를 어떤 형태로 줄 테니 이런 형태의 서비스를 준비해 놓으라고 미리 주문했습니다. 실데이터를 집어넣기만 하면 바로 되도록 한 거죠. 5000만 국민이 이용할 용량을 감당할 서버가 필요했는데, 네이버 카카오 등 주요 클라우드 기업들이 적극 도와줬습니다.” 뒤에 이 서비스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에 공유돼 유사한 서비스가 나라마다 속속 나왔다. ―최근에는 디지털 서비스 전문 계약 제도에 힘을 쏟고 있는 듯하다. “정부 조달시스템은 필요한 물자와 서비스를 발주, 입찰, 경쟁의 과정을 통해 구매하는 방식인데, 디지털 서비스의 경우 전기 가스처럼 요금을 내고 이용하는 것으로 바꾸는 것이죠. 관련 심사위원회에서 국가기관이 이용하기 적합한 서비스를 사전 심사해 선정하면 필요한 기관이 쇼핑하듯 수의 계약할 수 있습니다. 중앙정부로서는 서비스 하나 구매하려면 통상 80일 걸리던 것이 1∼2주 내로 가능해집니다.” 그는 정부가 민간 시장 진흥을 독려하고 경제 발전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자평한다. 정부의 역할은 효과적인 유효 시장을 만들어내고 민간은 경쟁을 통해 혁신하는 것인데, 제도적 틀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역시 클라우드 기반 전문계약제도(G클라우드 프레임워크)를 도입한 영국의 경우 클라우드 사업 전반의 성장은 물론 중소기업들이 대거 공공 시장에 진입하는 성과를 냈다. 2012년에서 2018년까지 연간 거래 규모는 167배 늘었고, 이 가운데 70%가 중소기업과의 거래였다고 한다. “지난해 10월 시행한 지 4개월여 만에 계약 건수는 71건, 계약액은 1000여억 원에 이르렀습니다(2월 26일 현재). 어느 작은 회사에서 개발한 전자도서관 시스템은 12월에 인증해 올렸는데 지금까지 30개 지자체가 계약했습니다. 성공 사례가 속속 생겨날 겁니다. 민간 기업들의 기대도 큽니다.” ―클라우드 산업의 경쟁력을 강조하는데. “디지털 뉴딜에서 일단은 클라우드의 경쟁력이 중요합니다. 현재 정부 정보시스템 대부분을 민간 클라우드로 옮기려 합니다. KT, 네이버, NHN 등 10여 개 기업이 의욕적으로 준비 중입니다. 이 사업에 정부는 1조 원, 민간은 더 막대한 투자를 계획하고 있어요. 간혹 보안 문제를 걱정하는데 금덩이를 집에 보관하는 것과 은행 금고에 보관하는 것, 어느 쪽이 안전할까요.” 그는 ‘디지털 뉴딜’ 사업을 최초로 제안한 주인공이다. “앞으로 1년이 더 중요합니다. 국가 디지털 전환 과정에서 중요한 시기죠. 디지털 뉴딜을 궤도에 올려 국민이 체감할 성과를 내야 합니다. 주요 어젠다로 데이터 경제 활성화와 디지털 정부 혁신, 디지털 디바이드를 해소하는 디지털 포용을 꼽고 있습니다.” 문 원장은 아프리카TV 창립자이고 김근태재단 부이사장, 노무현재단 운영위원을 역임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1-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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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0, 90대 독자의견 가득찬 일본 신문 투고란 [서영아의 100세 카페]

    일본 인구에서 65세 이상 고령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9월 기준 28.7%로 압도적인 세계 1위다. 1억2000만 인구의 28.7%면 3400만 명으로 웬만한 나라 인구보다도 많다. 4명중 1명이 노인‘인 나라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신문에 넘쳐나는 고령자 대상 광고 일본에서는 세상이 바뀌어도 과거 전통을 존중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다소 비효율적이더라도 노인들의 삶의 방식과 첨단 정보화 사회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가령 종이 신문의 경우 판매 부수가 줄었다고는 해도 아직 요미우리신문 800만, 아사히신문 550만의 구독자를 자랑한다.이 신문들을 펼치면 노년층을 겨냥한 전면 광고를 적잖이 만날 수 있다. 도심에 마련된 장묘시설, 지역별 노인홈(양로원), 노인용품(요실금용 팬티나 안티에이징 화장품, 노인에게 필요한 각종 아이디어 상품들), 다양한 메뉴로 구성된 배달도시락 세트. 흘러간 옛 노래 CD선집 등이 큼지막한 주문 전화번호와 함께 게재돼 있다. 신문들이 수백만 부씩 팔리다보니 광고 게재료도 비싸기로 유명하다. 이들 업체가 회당 수 천 만원의 전면광고를 낼 정도로 매출을 올린다는 얘기다. 광고뿐 아니라 일반 지면에도 노인을 위한 건강 및 생활정보가 가득하다. 독자투고란에는 80세, 90세 독자들 의견이 빼곡히 소개된다(신문 독자투고에는 대부분 투고자의 나이가 기재돼 있다). 인터넷 사용이 불편한 노년층은 생활 정보를 얻기 위해서도 종이 신문을 열심히 구독하고, 덕분에 일본 신문들은 수백만 구독자를 자랑하며 신문대국(大國)의 위엄을 지킨다. 일본의 노년층과 신문이 서로를 버리지 않고 공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모든 뉴스가 초고령사회를 반영한다 도쿄특파원으로 일하던 2018년 경 주일한국대사관에서 개최한 한일 저출산 고령화 관련 세미나에 참석한 일이 있다. 청중으로부터 기자로서 저출산 고령화와 관련해 어떤 활동을 하는지 질문을 받았는데 일본발 뉴스 대부분이 저출산 초고령 사회의 특징을 보도하는 것이 되더라고 개인적 감상을 말한 적이 있다. 가령 거리에 노인이 늘어나고, 노인들이 내는 교통사고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다. 일손이 부족하니 기업들은 구인난에 빠지고 정년은 연장된다. 일손 부족은 다른 한편으로 업무 효율화나 노동생산성 강화를 부르는데,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에서 젊은이들과 똑같이 일해야 하는 노인들 중 일부는 허덕대는 걸로 보였다. 100세 전후 할머니들이 쓴 책이 서점가에서 속속 베스트셀러가 됐다. 독자층은 롤 모델을 책에서 구하는 60대 여성들이다. 출판사들이 “80대는 너무 젊다”며 100세 전후의 신진작가를 찾아 헤매는 현상도 생겨났다. 과거 터부시되던 죽음에 대해 공공연하게 말하고 주체적인 태도로 삶의 마감을 준비하는 활동이 공론화하는가 하면 ’안락사‘ 합법화를 주장하는 유명작가도 나타났다. ○삶의 마무리 미리 준비, “최후는 집에서 맞자” 캠페인도2010년대 중후반에는 삶의 마지막을 미리미리 준비하는 슈카쓰(終活)가 새 유행어가 됐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기록을 남기고 장례식 방법을 미리 결정하는 것은 물론 개인 소장품을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가족에게 짐이 될 만한 것들은 미리 처분하는 일들이 유행했다. 유명 인사들이 자신의 슈카쓰 체험담을 미디어를 통해 알리기도 했다. ’이온‘이라는 대형 유통업체에서는 매년 전국을 순회하며 ’슈카쓰 페어‘를 개최했다. 현장에서는 장례식 준비 패키지부터 묘지, 납골당, 상속 증여 기부 등 세무 상담과 보험, 독거노인들의 법적 후견인 상담, 짐으로 가득 찬 노인의 집을 청소해주는 서비스까지 실로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가 소개됐다. 여기에 상혼이 끼어들면 보석이 박힌 유골함이나 우주에 쏘아 보내 산골(散骨)하는 우주 장례식 등 각종 아이디어들이 등장한다. 장례 비즈니스 관련 산업을 총망라한 ’라이프 엔딩 산업전‘이 매년 도쿄 빅사이트에서 열리는데 올 6월에도 행사가 예정돼 있다.여론조사 등에서는 상당수 노인이 익숙한 곳에서 최후를 맞고 싶다고 답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대도시를 중심으로 재택의료 시스템 점검이 한창이다. 사실 이는 인구 구조상 2025년 경 사망자가 급속히 늘어 죽을 곳을 찾지 못하는 ’임종 난민‘이 생겨날 것이라는 현실적 이유가 바탕에 깔려 있기도 하다(각 움직임은 다음 기회에 자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10대 청소년 320만 명이 치매 노인 돕는 교육받아 고령화로 치매 환자가 빠르게 늘어나는 것도 현실적인 과제다. 치매는 60대 후반에 3%, 80대 후반에서는 40%, 95세 이상에서는 80% 가량 나타날 정도로 나이가 들수록 발병 확률이 높다. 일본의 치매 환자는 2025년에는 약 73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 사회는 치매에 대한 자세를 공존과 포용으로 바꾸고 있다. 피할 수 없다면 제대로 대처하자는 것이다. 우선 2005년부터 호칭을 ’인지증(認知症)‘이라 바꿨다. ’미치고 어리석다‘는 뜻의 한자어인 치매(癡¤)는 차별적 단어인 데다 치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준다는 이유다. 또 이때를 계기로 ’인지증 서포터‘ 제도를 도입해 치매를 제대로 이해하고 어려움에 처한 환자를 돕자는 캠페인에 나섰다.인지증 서포터 자격증은 치매를 이해하고 환자에게 접근하는 자세를 배우는 90분짜리 강의를 들으면 받을 수 있다. 가령 ’(환자를) 놀라게 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으며 자존심에 상처주지 않는다‘는 등의 구체적인 대응책을 배운다. 자격증 소지자는 지난해 12월 말 기준 1300만 명을 넘어섰는데, 이중 10대가 325만 명에 이른다. 자격증과 함께 받은 오렌지색 팔찌(사진)는 치매 환자를 돕겠다는 의사 표시로 눈에 띄는 곳에 착용하고 다니는 것이 권장된다. 이런 노력들은 조기 대응이나 치료로 연결되기도 한다. 고령자가 32.6%에 달하는 후쿠이(福井) 현의 한 마을은 인구 1만5000명 중 1만2000명이 강좌를 수강한 뒤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고 한다. 서포터들이 모임을 만들고 상담 창구 역할을 하면서 “같은 물건을 몇 번이나 사가는 사람이 있다”거나 “길을 헤매는 할머니가 있다”는 정보들을 공유한다. 집안에 치매 환자가 생기면 쉬쉬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이웃들에게 “혹시라도 우리 아버지가 이상한 행동을 하면 좀 알려 달라”고 마음 편하게 부탁하게 됐다. ○“나도 치매” 공표한 일본 최고의 치매 전문의치매와 공존한다는 철학은 세상을 많이 바꿔놓았다. 2017년에는 일본 최고의 알츠하이머 전문의 하세가와 가즈오(長谷川和夫·당시 88세) 박사가 본인이 치매라고 공표했다. 그는 이후로도 병세의 진전 상태를 공개하고 언론 인터뷰에도 적극 응했다. 마치 환자와 그 가족에게 “괜찮아. 나도 있잖아”라고 위로하는 마음을 한 조각 나눠주려는 것 같았다. 이런 그에게 2018년 한국에도 고령화가 심각하다며 인터뷰를 청했다. 그는 약속 장소에 초로에 접어든 딸과 함께 나타났다. 옛날 얘기일수록 기억이 명료해지고 설명도 확실하지만, 한번 얘기가 새어나가면 무한 반복 궤도에 빠졌다. 그럴 때면 딸이 옆에서 흐름이 흐트러지는 것을 막아줬다. 그는 “인지증이라 해도 마음은 살아 있다”면서 치매를 껴안고 살아가는 사회, 치매라 해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 만들기를 강조했다. 기사가 나간 몇 달 뒤, 사무실로 새로 나온 어린이용 그림책이 배달됐다. 저자는 하세가와 박사다. 치매로 점차 가족도 못 알아보게 되고 일상이 힘들어져가는 할머니의 모습이 그려지고 그런 할머니에게 코흘리개 손자가 말하는 장면이 마지막 페이지에 담겼다. “할머니가 우릴 알아보지 못해도 괜찮아. 우리가 할머니를 알아보면 되지. 우리가 할머니를 지켜줄게.”○주문을 틀리는 요리점, 스타벅스에서 치매 카페2017년 6월 도쿄에 흥미로운 음식점이 문을 열었다.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이라는 간판을 건 임시 음식점인데 여섯 명의 치매 노인이 서빙을 담당했다. 햄버거를 주문하면 만두가 나오고 오렌지주스를 주문하면 콜라가 나오기도 했지만 손님들은 “주문과 달라도 맛만 있으면 된다”며 유쾌해 했다. 일본 전역에서 ’오렌지 살롱‘이라 불리는 치매 카페 수백 곳이 운영되고 있기도 하다. 치매 환자들이 한 달에 2번 직접 일하며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는 ’사랑방‘이다.한국에서는 세련되고 고급스런 이미지를 가진 스타벅스 커피점에서 치매 카페가 열리기도 한다. 도쿄 외곽 지역인 마치다(町田)시의 한 매장 점장이 3년 전 시작했다. 매달 하루 날짜를 정해 치매 당사자나 가족 등 관심을 가진 사람 누구라도 커피 한잔 값(290엔)에 모여 대화할 기회를 갖는다. 치매를 앓는 환자 본인도 가족도, 이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한다. 이들이 느끼는 고립감을 덜고 사회적인 연결망을 확인해주는 자리가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스스로 도우려는 노력과 이를 북돋는 사회의 지원이 맞물려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만들어나간다. ○한국의 고령화 속도, 세계 1위국제알츠하이머병협회의 추계에 따르면 인지증 진단을 받은 사람은 2015년 기준으로 세계에 4700만 명. 2050년에는 1억3000만 명 이상이 된다고 한다. 한국은 고령화율 7%(2000년)인 고령화 사회에서 14%(2017년)인 고령 사회에 이르는 데 불과 17년이 걸렸다. 1970년부터 1994년까지 24년 걸린 일본보다 빠르고 프랑스의 114년, 스웨덴의 82년, 미국의 69년에 비하면 엄청난 속도다. 앞으로 고령자만큼이나 치매 환자도 급증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1-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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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맛은 살리고 칼로리는 0 ‘칠성사이다 제로’ 출시

    다이어트에 목숨 거는 요즘 세상, 사이다에도 ‘제로’ 시대가 왔다. 롯데칠성음료가 대표적인 탄산음료 ‘칠성사이다’의 맛과 향은 유지하고 칼로리를 뺀 신제품 ‘칠성사이다 제로’를 출시했다. 롯데칠성음료는 코로나19 상황이 장기화하면서 집밥이 일상화되고 홈트레이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소비자들이 식사, 운동 등 일상생활에서 칼로리 부담 없이 맛있게 즐길 수 있는 탄산음료를 찾는 점에 주목했다. 칠성사이다 70년 제조의 노하우를 담아 기존 제품의 맛과 향을 그대로 유지하되 0칼로리로 깔끔한 뒷맛을 살렸다. 패키지는 기존 제품과 동일한 초록색 바탕과 로고 디자인을 적용했다. 제품의 특징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라벨에 ‘칠성사이다 제로’라는 문구를 넣어 가시성을 높였다. 페트병 제품의 경우 기존 제품과 가장 빨리 구별하는 방법은 검은색 뚜껑을 확인하는 것이다. 제품은 250mL, 355mL 캔, 500mL, 1.5L 페트병 제품 등 총 4종으로 출시된다. 전국 편의점과 대형마트, 슈퍼마켓 등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로써 롯데칠성음료는 칠성사이다 제로를 포함해 오리지널 제품인 ‘칠성사이다’, 더 세고 짜릿한 탄산을 느낄 수 있는 ‘칠성사이다 스트롱’, 새로운 맛의 사이다 ‘칠성사이다 복숭아, 청귤’ 등 요즘 소비자의 기호를 다양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브랜드 라인업을 갖추게 되었다고 자평했다. 롯데칠성음료 관계자는 “칠성사이다 제로는 일상생활 속에서 칼로리 걱정 없이 청량한 탄산음료의 깔끔한 단맛을 느끼고 싶어 하는 소비자들에게 인기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앞으로도 소비자의 다양한 니즈를 충족시키는 포트폴리오 다변화로 국내 탄산음료 시장 저변 확대에 앞장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롯데칠성음료는 1월 30일 신제품 출시와 함께 ‘세상 맛있는 제로’라는 콘셉트의 티징 광고 영상을 선보인 바 있다. 앞으로 광고 캠페인 등 다양한 프로모션 활동을 통해 신제품 알리기에 주력할 계획이라고 한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1-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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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칫하면 120살까지 산다” 日 노후불안에 근검절약 유행[서영아의 100세 카페]

    일본 인구에서 고령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2005년 20%를 넘겼다. 최신 통계(2020년 9월)에서는 28.7%로 압도적인 세계 1위를 기록했다. 그 뒤를 이탈리아(23.3%), 포르투갈(22.8%), 핀란드(22.6%), 그리스(22.3%) 등이 잇는다. 일본은 명실상부하게 ‘4명 중 1명은 노인’의 기준을 넘어선 유일한 나라인 셈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린이용 풀장이 노인들 걷기 훈련 장소로도쿄에서 연수중이던 2004년 여름방학, 동생네 가족이 한국에서 놀러왔다. 8살짜리 2명과 5살짜리 1명을 풀어놓을 곳을 찾다가 평소 헬스장으로 이용하던 구립(區立) 스포츠센터가 떠올랐다. 그곳 수영장에는 어린이용 얕은 풀도 있다. 어른 400엔(약 4175원), 초등생 이하는 100엔이면 이용할 수 있으니 예산도 가볍다. 하지만 꼬맹이들을 끌고 수영장에 들어선 순간 오산이었음을 깨달았다. 어린이용 풀에서는 노인들의 걷기 운동 수업이 한창이었다. 30명도 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줄 지어 강사의 구령에 맞춰 무릎 위로 찰랑거리는 물속을 걸어 다녔다. 관절이 아픈 노인들에게 수중 운동이 좋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결국 아이들을 어른용 풀 가장자리에서 잠깐 놀게 하다가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어린이용 풀장이 노인들에게 할애되고 어린이는 놀 곳이 없게 된 현실, ‘이게 바로 저출산 고령사회의 민낯이구나’고 실감했다. 그러고 보니 이 스포츠센터에서 어린이를 본 기억이 없었다. 그곳에 수영장이 있다는 것만 알고, 수업시간표 같은 걸 확인해볼 생각을 못한 내 잘못이 컸다. 통계를 찾아보니 2004년 당시 일본의 고령인구 비율은 약 19%였다. 참고로 한국은 2019년 기준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중은 15.7%였고 2025년에 20%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노약자석, 섣부른 자리 양보는 언감생심 노인이 많아지면 확실히 도시 풍경이나 편의시설 등이 바뀐다. 다만 일본의 경우 노인의 특권 같은 건 허용되지도, 바라지도 않는다. 전철이건 버스건 경로석 표시가 있긴 한데, 그 자리를 찾아 앉으려는 노인은 별로 본 적이 없다. 젊은이가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려해도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문화 자체가 없어 상대가 당황하기 쉽고, 섣불리 양보했다가는 ‘사람을 뭘로 보느냐’며 불쾌해하지 않을지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학교 교육부터 생활스포츠를 중시하는 편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필사적으로 운동을 한다. 도심과 외곽 곳곳에 자리한 스포츠센터(대개 헬스장과 휴게실, 사우나, 수영장이 일체화된 시설들)은 은퇴한 어르신들의 집결지가 됐다. 일부 이용객은 도시락을 싸와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설을 이용하기도 한다. 항간의 우스갯소리로 모 헬스장 게시판에 “난 피트니스클럽에 가입한 것이지 양로원에 온 게 아니다”라는 고객 항의문이 붙자 헬스장 측은 “우리는 모든 연령대 고객에게 이용되길 원한다”고 응수했다는 얘기가 들려온다. 동네 도서관과 대형 쇼핑몰, 카페, 문화센터도 노인들의 동선 권역이다. 지역에 자리한 대학들은 지역민들을 위한 청강 프로그램을 대거 운영한다. 도쿄 스가모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하라주쿠’라는 노인 상권이 형성돼 있다. 실버 세대에게 필요한 모든 상품과 서비스가 집중된 이곳은 거리 전체가 현대화하지 않아 인기가 높은 지역이다. 재미있는 것은 어디건 고령자들이 적은 액수나마 기분 좋게 지갑을 열고 돈을 쓴다는 점이다. ○정년 후 10년분이면 충분했던 노후자금, 이젠 40년분 준비해야몇 년 전 일본의 절약 풍조를 다룬 요미우리신문 기획기사에서 재미있는 대목이 눈에 띄었다. 고급 백화점 지하 반찬코너 점주의 말이었는데 “콩자반 5알만 팔 수 없겠느냐”는 노부인이 있더라는 얘기였다. 돈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불필요한 낭비를 하지 않고 맞춤형 소비를 한다’는 차원이었겠지만 조금씩 소분(小分)해 파는 데 익숙한 일본에서도 화제가 돼 버렸다. 평균수명의 급속한 연장과 저출산, 인구 감소까지 맞물리면서 일본 사회 전체가 당혹감에 빠져 있다. 과거 60세 무렵에 정년퇴직해 70세 정도면 사망하는 사이클에 맞춰 마련된 연금과 노후 재정 모델이 평균수명 90대를 바라보면서 뿌리부터 흔들렸다. 불과 40~50년 전만 해도 정년퇴직 후 10년분이면 충분했던 노후자금을 40년분까지 준비해야 하게 된 것이다. 노후 충분한 자산도 가족도 없이 장수만 하게 될 가능성을 상상하며 “재수 없으면 120살까지 살지 모른다”는 말도 나온다. 이 경우 노후자금은 60년분을 준비해야 한다는 얘기가 되니 말이다. 이렇게 일본 노인들의 최대 공포의 대상이 ‘지나친’ 장수와 노후 파산, 고독사가 되면서 이들은 좀처럼 은퇴를 하지 못한다. 2019년 기준 65세 이상 고령자의 취업률은 24.9%로 전체 취업자 중 13.3%였다. 사장이나 자영업을 제외한 고령 취업자 중 77.3%가 비정규직이었다. 인구 감소와 도시 집중은 전국의 집값 등 자산 가치 하락에도 영향을 미친다. 전국에 빈집이 늘어 전체 주택의 13.6%인 846만 가구에 달한다(일본 총무성 통계국 ‘2018년 토지·주택 통계 조사’). 빈집은 동네 황폐화를 가속화한다. 상속받은 부모의 집은 팔리지 않고 세금과 관리비만 들어가는 애물단지로 변했다.(일본의 부동산 사정은 다음 기회에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경로우대는 70세부터, 할인은 있어도 공짜는 없다최근 서울교통공사가 올해에만 1조6000억원의 자금 부족을 예고하면서 65세 이상 고령자의 무임승차가 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어르신들이 무료로 인천공항까지 가서 바캉스를 즐기고 수도권 전철을 이용해 온양온천까지 다닌다고 하니 승차 거리도 상당해 보인다. 교통비 비싸기로 악명 높은 일본의 경우는 어떨까. 일본에도 경로우대는 있다. 대개 만 70세 이상 노인에게 지자체나 교통회사들이 ‘외출 지원’이란 이름 아래 할인을 적용해준다. 어르신들의 건강과 활력을 위해서는 외출이 중요하고 이를 사회가 응원하다는 취지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무료’는 없다. 50엔, 100엔이라도 반드시 자기 돈을 쓰게 한다. 일본의 고령자 외출지원 제도는 각 지자체가 운영한다. 가령 도쿄도에서는 70세 이상 주민이 2만210엔을 내고 ‘실버패스’를 사면 도가 운영하는 지하철(전체 지하철과 전철 중 일부)과 버스에 한해 1년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오사카시의 경우도 70세 이상 주민이 경로우대패스를 발급받는데, 오사카시내 지하철과 노선버스에 한해 회당 50엔에 승차할 수 있다. 단 여기에는 깨알 같은 단서가 붙는다. 이용객들로 붐비기 일쑤인 이케아 매장, 유니버설스튜디오재팬, 공항으로 가는 버스는 적용에서 제외된다. 교토시나 나고야시처럼 노인들의 소득에 따라 경로패스 가격을 연간 1000~1만5000엔 사이에 차등 적용하는 지자체도 있다. 일본 전국 52개 시의 교통지원 제도를 모아놓은 사이트를 검색해보니 31개 시가 70세 이상부터, 10개 시가 65세 이상부터 교통비를 지원했다. 나머지 11개 시는 지원 제도 자체가 없거나 폐지됐다. 이런 지역은 버스회사들이 자체적으로 고령자 자유이용권을 판매하는데 월 이용권 6500엔 수준으로 가격이 꽤 높다. 이런 지원 제도들을 들여다보노라면 지자체별로 오랜 세월에 걸친 고심과 축적 끝에 깨알 같은 정책들이 만들어졌음을 느끼게 된다. 예산이 허투루 쓰이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돈 한 푼 쓰는데 벌벌 떠는 공무원들의 태도에서 일본이 부자 나라라는 실감은 전혀 들지 않을 정도다.○무임승차 도입 당시 한국의 평균 수명 67.38세, 2030년 기대 수명 85.2세한국의 노인 교통요금 우대제도는 1980년 70세 이상 노인 요금 50% 할인으로 시작해 1982년 대상 연령이 65세 이상으로 낮아졌고, 1984년 100% 무료로 확대됐다. 다만 제도가 도입된 1980년대 4%에 불과했던 고령자 인구는 날로 늘어 2025년이면 20%를 넘기게 된다. 사실 UN자료에 따르면 1980~1985년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67.38세로 65세는 명실상부한 노인이었다. 하지만 요즘 고령자들은 그 나이면 청년처럼 활동이 활발하다. 이렇다보니 서울지하철 재정에도 부담을 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점에서 고령자들의 사회활동을 지원한다는 큰 뜻은 살리되 서울 교통의 부담도 줄일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가령 경로우대 적용 연령대를 올리거나 소득에 따라 할인율을 달리 하는 방안, 무료승차의 거리 범위를 줄이는 방안, 일부 본인 부담 도입 등 방법은 여럿 있을 것이다. 고령자들 입장에서도 그래야 젊은이들 보기에 떳떳할 것 같다. ○한국의 고령화 속도, 세계 1위UN기준에 따르면 전체 인구에서 65세 이상 고령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7% 이상이면 고령화 사회, 14% 이상이면 고령 사회, 20%를 넘기면 초고령 사회라고 한다. 고령화 속도는 국가별로 편차가 크다. 프랑스나 독일, 미국이 7%에서 20%로 가기까지 각기 143년, 77년, 88년이 걸린 데 비해 일본은 35년이 걸렸다. 지난해 9월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한국은 2025년이면 고령자 20%를 넘길 것으로 예상된다. 고령화 사회에서 초고령 사회까지 가는데 25년 걸리는 셈이다. 한국의 현재 고령자 비중은 15.7%(2019년 기준)로 일본보다는 한참 젊다. 하지만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최저 수준의 낮은 출산율 탓에 늙어가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 2045년 이후엔 한국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 고령 국가가 될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을까. 서영아 기자 sya@donga.com※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 2021-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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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년퇴직은 ‘살아생전 장례식’?” [서영아의 100세 카페]

    베이비붐 세대의 대규모 은퇴를 앞둔 2000년대 일본에서는 ‘정년연구 붐’이라 할 정도로 퇴직과 정년을 화두로 한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꼽을 수 있는 베스트셀러만 해도 여럿이다. 제목만 소개하자면 ‘마음의 정년을 극복하라-직장인 40세, 부업(副業)을 권함(2015년)’ ‘(있을)장소가 없는 남자, (쓸)시간이 없는 여자(2015)’ ‘정년여성(2015)’ ‘정년후(後), 50세부터 삶의 방식, 끝내는 방식(2017)’ 등 정년을 위한 마음의 준비 방법을 알려주는 책들이 있는가 하면 ‘정년 고래(2001)’ ‘외로운 배(孤舟·2013)’ ‘끝난 사람(2015)’ 등 정년을 맞은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도 있다. 이런 책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지적하는 게 있다. 정년이라 하면 처음에는 자산관리 등 노후의 ‘돈’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지만, 실제 정년 후를 겪은 사람일수록 삶의 활력과 즐거움, 보람을 찾아 헤매는 수요가 많더라는 것이다. 그만큼 노후에 닥치는 고독과 무료함, 우울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얘기다. 각자 준비 태세에 따라 60세 이후 주어지는 8만 시간(90세까지 생존하는 것을 가정할 경우 실제 활동 시간)은 공포의 시간이 될 수도, 풍요로운 결실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솔직해질 수 없는 정년퇴직자의 속내 회사와 직장인 관련 책을 많이 쓴 구스노키 아라타(楠木新)는 일본 최고의 생명보험회사 경영관련 부서에서 일하며 50대부터 집필을 시작했다. 60세 정년 후에는 책 쓰고 강연 다니는 ‘비즈니스평론가’로 전업했다. 수많은 퇴직자와 예비 퇴직자를 만났지만 정년 퇴직자의 경우 속내를 제대로 털어놓는 사람이 없어 곤란을 겪었다고 한다.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다”느니 “백수가 과로사한다”며 별로 바쁠 것 없어 보이는 일상에 대해 큰소리로 떠벌이는 사람은 많아도 정년 퇴직자가 겪는 당혹감과 미묘한 심리 변화, 행동의 변화를 진솔하게 고백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자존심 때문이었다. 어쩌다 적나라한 속내를 털어놓는 사람은 한바탕 나락에 빠져 허우적대다 벗어난 경우였다. “지금은 극복했지만 전에는 이랬다”는 식이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어렵게 발굴했다는 사례 한 토막을 예로 들자면 “출근을 하지 않게 되니 밤낮이 바뀌고 요일 감각이 사라졌다. 무기력해지고 TV 앞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된다. 그렇게 6개월쯤 지나니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았다…”. “집안에 내가 머물 장소가 없다”거나 “할 일이 없는데 자꾸만 초조해진다”는 사람, “싫은 상사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더라”는 사람도 있었다.진솔한 육성 채록(採錄)이 힘들기 때문인지 소설의 픽션 스토리가 더욱 생생하게 퇴직자의 마음을 보여준다. 이런 책들은 베스트셀러가 됐을 뿐 아니라 소위 ‘정년소설’이라는 장르까지 형성되는 분위기다.○ “높이 올라갔을수록 추락의 고통은 크다.” 개인적으로는 일본 지방신문에 연재됐다는 소설 ‘끝난 사람’이 충격적이었다(한국에도 번역본이 나와 있다). 소설의 형식을 빌어 정년 퇴직자의 구체적인 속내가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소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건 완전 생전 장례식이구만.” 주인공이 만63세로 정년퇴직하는 날이다. 업무가 끝나는 시각은 재깍재깍 다가온다. 퇴근 시각에 맞춰 방을 나와 건물 입구에 나서면 사원들이 죽 늘어서 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다”며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여직원들이 내미는 꽃다발과 선물가방. 건물 앞에는 회사에서 그날 하루만 내주는 고급 세단차가 대기해 있다. 몸을 구부려 차에 타면 직원들이 차를 둘러싼다. 장례식에서 조문객들이 영구차를 둘러싸고 마지막 작별을 하듯. 세단이 미끄러지듯 출발하자 그는 고개를 돌려 회사 쪽을 물끄러미 본다. 이미 아무도 없다. 집에서도 가족들이 마련한 파티를 마친 뒤 잠자리에 드는 그는 내일 당장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난 ‘끝난 사람’이 된 거야…”. ○“자신의 과거 영광과 싸우지 말라.” 어디부터 잘못됐을까. 승승장구하던 회사 내 행로가 삐끗한 이래 이해할 수 없이 찾아오는 모멸의 순간들과 맞서며 그는 날마다 어디부터 잘못됐을까를 곱씹는다. 회사 생활은 49세를 기점으로 급전직하했다. 명문대 출신으로 일본 최고의 은행에서 임원 승진 유력 후보로 꼽혔다. 그런데 승진 최종 경쟁에서 고배를 마셨고, 사원 30명의 자회사로 파견 발령을 받았다. 그간 밤낮없이 뛰며 쌓아온 실적과 인맥이 모두 무용지물이 됐다. 처음에는 본사 복귀를 꿈꾸며 성과를 내보려 애쓰지만 아무도 그의 성과를 원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깨닫게 된 그는 마지막 자존심으로 2년간의 고문직 제안을 거절하고 자회사의 대표이사 전무로 정년을 맞았다. “흩날리는 벚꽃도, 남아있는 벚꽃도, 어차피 지는 벚꽃”이라면서. 하지만 불완전 연소로 끝난 회사 생활에 대한 미련은 정년 이후로도 꼬리를 물었다. 소설은 “난 저런 사람들과 다르다”거나 “난 죽지 않았다”며 좌충우돌하는 주인공의 행보를 그려낸다. 자신의 과거 영광과 싸우며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갈등에 겉돌던 그는 오랜만에 들렀던 고향에서 희망을 찾아낸다. ○“인생 후반전으로 갈수록 모두 비슷해진다” 66세인 그가 귀향을 준비한다. 이기적이기만 했던 자신을 무조건 따뜻하게 맞아주는 시골의 노모와 “평범한 아이들”이라며 멀리했던, 하지만 자신을 스스럼없이 받아주는 고향 친구들 품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어릴 적 친구들과 지역사회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늙은 노모를 모시며 지낼 생각에 설레는 그는, ‘끝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베이비붐 세대인 작가 우치다테 마키코(內館牧子)는 환갑을 넘기면서 정년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고 했다. 부쩍 늘어난 동창회에 나가보면 “뛰어난 수재도, 엄청난 미인도, 환갑과 정년을 지낸 뒤 만나면 다 비슷비슷해져있더라”는 것. 젊은 때 화려하게 활동한 사람이건, 불우한 회사 생활을 한 사람이건 정년 후에는 ‘그냥 보통사람’이 됐다. 인생 막바지에 가면 착지점은 다 거기서 거기였다. ○“늘 세상과 연결돼 있으라” 한국인의 수명은 1960년 51.23세(UN 통계)에서 2018년 82.7세(보건복지부 기대수명)로 불과 50년 사이 30여 년이나 늘었다. 어찌 보면 지금은 급격한 변화 속에서 몸은 오래 살게 됐지만 그 내용은 채우지 못하는 과도기라 할 수 있다. 100세 카페의 기사에 대한 독자 반응에서 실버세대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느껴질 때가 있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나와 처지가 다른 남에 대해서는 모진 태도를 취하고 세대 간의 갈등 구도를 가져다놓는데 익숙해져 버렸다. 하지만 나의 부모, 할아버지, 할머니가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행복해야 나도 그런 미래를 그릴 수 있는 게 아닐까. 오늘도 누군가가 오랜 세월 함께 했던 조직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세상 속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들의 마음을 잠시나마 헤아려보고 자신에게도 언젠가 닥쳐올 그 상황을 상상해보고 준비하는 자세를 갖는다면 이 또한 성장의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 2021-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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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7년간 분양보증 1034조… “요율인하 등 국민부담 경감 노력”

    2016년 6월 전북 군산시 개정면에 터를 잡은 수페리체 아파트를 분양받은 A 씨. 당시 2018년 6월 완공 예정으로 모두 492가구가 분양받았다. 하지만 내 집 마련의 꿈에 이르는 길은 험난했다. 시행사 측은 자금 부족을 이유로 공사 기한을 3차례나 연기하더니 입주 예정일을 훌쩍 넘긴 지난해 1월 결국 사업을 포기했다. A 씨 등 계약자들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이미 계약금과 중도금을 모두 납입한 상태였는데 그 돈은 어떻게 되는 건지 불안하기만 했다. 이처럼 아파트 분양 계약을 했는데 사업자의 부도나 사업 포기 등으로 분양이 어려워진다면 계약자에게 막대한 피해가 돌아갈 수밖에 없다. 갑작스러운 사고나 질병을 만나도 보험이 있다면 안심이 되듯 아파트 분양 계약에서 발생한 사고에는 주택분양보증이 존재감을 발휘한다. A 씨 등은 내 집 마련은 못 했지만 주택도시보증공사(HUG)를 통해 그동안 낸 계약금과 중도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주택분양보증은 아파트 준공을 책임지거나 분양계약자가 납부한 계약금과 중도금을 환급해주는 보증 업무다. 한국에는 1993년 도입됐으며 공공기관인 HUG가 업무를 전담한다. 30채 이상 공동주택을 선(先)분양하는 경우 주택사업자들은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예기치 못한 보증사고가 발생하면 분양계약자는 자신이 납입한 대금을 돌려받는 ‘환급 이행’이나 HUG가 사고 사업장의 준공과 입주까지를 책임져주는 ‘분양 이행’ 중 한쪽을 선택할 수 있다. 군산 수페리체 아파트 계약자들은 계약금과 중도금을 돌려받는 환급 이행을 택했다. A 씨는 “HUG 덕분에 원활하게 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HUG 측에 따르면 공사는 설립 이래 27년간 608만 채에 대해 1034조 원 규모의 주택분양을 보증했다. 이 중 보증 사고가 난 사업장 33만 채에 대해 공사 비용과 분양대금 환급 등으로 4조2684억 원을 지출했다. 이는 HUG가 벌어들인 분양보증료 수입 5조7193억 원의 75%에 해당한다. 분양 보증은 건설회사가 연쇄 도산하는 경제위기 때에 힘을 더욱 발휘한다. 가령 1997∼2000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와 2008∼2010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사용된 보증이행 금액은 각각 3036억 원과 2조3639억 원으로 지금까지 사용한 금액의 63%에 이른다. HUG 관계자는 “주택분양 보증이 경기 침체기에 주택시장을 안정화하고, 국민 재산권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분양 관련 사고는 한 사업장에서 발생하면 다른 사업장으로 위기가 도미노처럼 확산된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나아가 가구에서 차지하는 부동산 자산 비중이 72%(2020년 통계청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에 이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제때 제대로 된 분양보증의 중요성은 말할 나위가 없다. HUG는 2020년 말 현재 6조7546억 원의 자금을 확보해 만일의 위기에 대비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장기화하는 코로나19 상황이 서민 경제에 적지 않은 부담이 되고 있다고 판단해 주요 보증료율을 내리고 개인채무자 지연배상금을 40∼60% 감면해 주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 39만 가구가 1645억 원의 보증료를 할인받고 개인채무자 1241명이 14억 원의 지연배상금 감면 혜택을 받았다. 이 조치는 올 6월 말까지 연장된다. HUG 관계자는 “정부의 주택공급 확대 정책에 따라 주택시장과 서민 경제 보호를 위한 HUG의 공적 역할도 확대되고 있다”며 “앞으로도 주택업계와 협력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1-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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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번 사는 인생, 가장 빛나는 나이는 60~75세”[서영아의 100세 카페]

    일본에서 고령자 기준을 75세로 올린다거나 정년퇴직 연한을 70세로 상향하려 한다는 뉴스에 대한 한국 독자들의 반응을 보면 약간 걱정스럴 때가 있다. ‘정년을 없앤다’, 혹은 ‘정년을 연장한다’고 하면 나이 먹어서도 예전과 같은 일을 하고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을 막연하게 떠올리는 분들이 있어 보여서다. 일본에서는 2013년 4월부터 ‘고령자 고용안정법’이 시행돼 퇴직하는 직원이 원할 경우 기업이 65세까지 고용을 보장하도록 의무화했다. 한국 정부가 유사한 제도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고 하니 실제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준비없이 맞은 정년, ‘재고용’ 계약서에 사인했지만 2005년부터 고령자가 인구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돌입한 일본은 “고령사회의 고민을 기업에 떠넘긴다”는 비판 속에서도 고령자 고용안정법 시행에 들어갔다. 다만 고용연장 방식은 기업 측에 맡겼는데 △정년 연장 △계속고용(재고용) 제도 도입 △정년 폐지 가운데 하나를 택하도록 했다. 대부분의 기업이 계속고용제도를 택했다. 일단 정년퇴직을 한 직원을 촉탁 또는 계약직으로 재고용하는데, 매년 계약을 갱신하는 방식이 많다. 월급은 절반 이하로 줄어들고, 사회보험이 보장되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다. 많은 기업이 이들에게 합당한 일거리를 찾아주지 못해 고심에 빠졌다. 이렇다보니 정년 전에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경우는 드물고(회사, 개인별 차이는 있다), 직책 없이 보조적인 업무가 주어지는 게 대부분이다. 주 3~4일 근무 조건이거나 일정한 사무실이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노느니 일하는 게 낫다”며 재고용 계약서에 사인을 한 퇴직 당사자들도 별로 행복하지 않다. “그간 쌓아온 경험과 역량을 전혀 살릴 수 없다”거나 “이런 일 하려고 이 나이에 회사에 나오라는 거냐”는 불만이 터져나온다. 일부 회사의 경우 “(정년) 전과 하는 일이 똑같은데 급여가 절반 이상 깎였다”고 분개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그래서 5년간 일하려던 당초 계획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뭐야, 남은 날이 그렇게 짧아?” 선택지를 하나 더 갖게 된 예비퇴직자들은 어떨까. 2017년 발간된 ‘정년후(後)’ 란 책에 정년을 코앞에 둔 직장인 5명이 ‘한 잔’하며 나눈 대화가 소개됐다. A씨가 “일을 그만두면 갑자기 확 늙는다고 한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회사에 다니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하자 B씨는 “쉬고 싶은데 집사람 눈치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집에 있겠다고 하면 내쫓을 것같은 분위기”라며 회사에 남겠다고 했다. C는 “다른 계획이 없어서” 일하겠다고 했다. D도 “밖에 나가 새 일을 시작하는 것보다 익숙한 일을 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했다. 한참 얘기들이 무르익다가 A가 말했다. “잠깐…. 우리 아버지는 60대 후반에 돌아가셨다. 그렇다면 65세 정년 뒤 몇 년밖에 없다는 얘기가 되는데….” “뭐야, 남은 날이 그렇게 짧아?” 모두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연공 임금체계와 정년의 상관관계 정년(停年). 직장에서 물러나도록 정해져 있는 나이를 말한다. 한국도 일본도 법정 정년은 60세다. 정년은 당연한 제도처럼 보이지만 기묘한 제도이기도 하다. 자영업자나 농민 어민에게는 정년이 따로 없다. 선진국의 경우 일반적인 은퇴연령은 제시되지만 의무적인 정년 개념은 없다. 미국은 ‘고용에서의 연령차별금지법’을 시행해 나이로 인한 해고를 불법화했다. 2001년 ‘정년파괴’라는 책을 낸 일본의 노동경제학자 세이케 아쓰시(淸家篤)는 정년의 존재이유를 기업내 연공적인 임금체계에서 찾았다. 기업은 사원이 젊을 때는 공헌도보다 적은 임금을 주고 연조가 올라갈수록 급여를 늘려 부족분을 보상해주는데, 이를 일정 선에서 멈추기 위해 정년을 설정했다는 것이다. 일본이 1998년 고령화대책으로 정년을 60세까지로 연장할 때 도입한 ‘임금피크제’도 이런 논리에 따랐다. 다른 한편으로 정년은 노동자 입장에서는 고용을 보장해주는 보호막 기능을 한다. 정년제도가 있는 회사는 사원을 마음대로 자르기 어려워진다. ○“60~75세가 가장 빛나는 나이” 통계청이 지난해 말 발표한 2019년 생명표를 보면 2019년 출생아의 기대수명은 83.3년이다. 집계가 시작된 1970년 62.3세에서 20년 이상 늘었다. 이제는 각자 대략 90세까지는 산다고 생각하고 미래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다. 다만 유의해야 할 점은 건강수명이 따로 있다는 점이다. 건강수명은 질병치레 없이 건강하고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는 기간을 말한다. 보건복지부가 지난달 27일 발표한 ‘제5차 국민건강증진종합계획’에 따르면 한국인의 건강수명은 2018년 기준 70.4세다. 노후를 연구하는 일본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60~75세가 가장 빛나는 시기”라는 말이 많이 들려온다. 75세를 넘어서면 시름시름 아프기도 하고 사회 활동에서도 의욕과 능력이 떨어질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물론 개인차는 있다). 의료 및 복지학계에서 75세부터를 ‘후기고령자’로 분류해 돌봄이 필요하거나 의료비 부담이 늘어나는 시기로 상정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놀랍게도 102세에도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이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저서 ‘100년을 살아보니’에서 똑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 “100년을 살아보니 내 인생의 황금기는 60~75세 기간이었다”는 것. 이 무렵이 학문에서도 인간으로서도 가장 많이 성장하고 깊어지고 재미있었다는 것이다. 김형석 교수의 학문의 경우 60세부터 새로 시작한 게 아니라 그 전부터 쌓아온 것들을 심화하고 꽃피운 시기가 60세 이후라는 뜻이 될 것이다.○한국의 직장인, “승진보다 정년이 중요” 결국 인생 후반기에 뭔가 새로운 시도하고 터를 잡는 시기는 60세 정년 뒤의 15년, 그 중에서도 건강수명 기간 내에 이뤄져야 한다. 회사에 5년 더 남아 ‘좀비 회사원’의 삶을 산다면 그 기간을 갉아먹는 게 된다. 많은 인생 2막 경험자를 만나본 일본의 전문가들은 회사원이 우동가게를 차리건, 교사가 작가로 변신하건, 공무원이 농부가 되건 새로운 일이 궤도에 오르는 데 통상 3년은 걸린다고 전한다. 조금이라도 건강과 기운이 있을 때 최종 30년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어영부영하다가 70세를 넘겨버릴 수 있다. 한국의 법정 정년은 2016년부터(300인 이하 사업장은 2017년부터) 60세 이상이 됐다. 그 전에는 회사마다, 직급마다 정년 체계가 달랐는데 대략 55~58세가 많았다. 하지만 60세 정년을 제대로 채우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게 ‘불편한’ 현실이다. 누구보다 직장인들이 이런 현실을 잘 안다. 2일 인크루트가 20~50대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직장인 절반 이상이 정년(52%)이 승진(19.4%)보다 더 중요하다고 답했다. ‘승진’은 ‘창업준비(25.0%)’보다도 후순위였다. 화려한 승진보다 ‘가늘고 긴’ 직장 수명을 택할 정도로 직장인들이 체감하는 고용시장이 살벌하고 그들이 느끼는 미래는 불안하다는 말이 된다.○40~50대에 ‘마음의 정년’, 실질적 준비도 시작해야 여기서 다시 확인할 것은, 직장에서 정년까지 채울 가능성이 없다면 더더군다나 40~50대부터는 인생 2막을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점이다. 직장이라는 조직에서 떨어져나가는 외로움과 충격은 언젠가는 누구에게나 닥쳐온다. 그것을 제대로 예측하고 준비하는 사람이 노후 충격을 피하고 두 번 세 번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 일본의 인사 전문가가 직장인을 대상으로 쓴 책 중 “입사 20년이면 마음의 정년을 하라”고 권하는 책이 있다. 정년 이후를 준비하기 위해서도 40~50대에 회사와의 관계를 객관화하고 조직보다 자신의 인생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마음의 독립을 하는 게 좋다는 것. 이런 쿨한 관계는 사실 회사측도 원하는 것이다. 60세부터 주어지는 인생의 자유시간은 약 8만 시간에 이른다고 한다. 이는 20세부터 40년간 일한 총 노동시간보다 많다. 미리미리 이 시간을 잘 준비해 임한다면 행복하고 보람있는 노후가 조금은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을까. ※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 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1-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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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인 대접 받을 생각 없소” ‘젊은’ 일본 단카이 세대의 지혜[서영아의 100세 카페]

    어느 나라건 한 시대를 대표하는 세대가 있다. 대개 머릿수가 많고 활동적이며 운도 좋은 베이비붐 세대가 그 주인공이다. 일본에서는 1947~1949년 사이 탄생한 약 800만 명이 그런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이른바 단카이((團塊·덩어리) 세대다. 경제 각료이자 작가였던 사카이야 다이치(堺屋太一)의 1976년 소설 ‘단카이의 세대’에서 나온 이름이다. 이들은 성장과 전성기를 지나 퇴직하기까지 전후 일본사회를 들었다 놨다 하며 영향을 끼쳤다.● 입시지옥에서 버블경제까지, 현대일본을 주도한 세대2004년 일본 연수 중 모 신문사가 주최한 심포지움에 간 적이 있다. 사회복지 관련 주제였는데, 수백 명의 청중 대부분이 늙수그레한 중년과 노인이라는 점에 놀랐다. 강연 뒤 질의응답시간에도 주로 노인들이 손을 들었다. 사회자는 “시간이 많지 않으니 젊은이가 발언했으면 한다”며 가물에 콩나듯 끼어있는 청년들의 질문을 유도했다. 명실공히 노인을 공경하는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기자로서는 그런 분위기가 무척이나 생경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온갖 세미나와 문화행사를 찾아다니던 그들이 바로 단카이세대 혹은 그 윗세대였다.이들은 성장기에는 입시지옥의 주인공이 됐고 일부는 급진 사상에 빠져 좌파 시위를 주도했다. 그 유명한 전공투, 적군파 세대와 겹친다. 1960~70년대 산업현장에 뛰어들어 일본의 고도성장을 이끌었고 한두 시간의 통근시간을 감수하면서도 도심 외곽에 집과 주거단지를 지어 ‘마이홈’ ‘마이카’ 붐을 일으켰다. 1990년대 초 버블이 깨질 때까지 일본에 부동산 광풍이 몰아친 것도 이들의 수요 급증 탓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대접 받을 생각 없고 자존감 강한 노인 집단당시 30대 후반이던 내게 단카이세대는 가장 바람직하고 죽이 잘 맞는 아저씨 아줌마들이었다. 살짝 진보적이면서 정의감이 강한 이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자세가 강했는데, 가령 한국인을 만나면 “우선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사과한다”며 고개를 숙이는 식이다. 묘하게 반골적이고, ‘(진보적인) 아사히신문 구독자가 가장 많은 집단’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요즘도 일본 국내 여론조사 결과를 연령대별로 보면 60대를 넘어갈수록 평화헌법 개정이나 보수집권세력에 반대하는 비중이 높다.이들은 심포지움 진행자가 홀대를 하건 말건, 누가 부르건 부르지 않건, 필요한 곳은 알아서 찾아다녔다. 머리가 희끗한 아저씨들이 잠바에 가방 하나씩 둘러매고는 청년들처럼 돌아다녔다. 공공도서관이나 서점도 이들의 차지다. 전철에서는 자리에 앉지 않는 게 당연하고 웬만한 거리는 건강을 위해서도 걸어 다닌다. 젊은이에게 대접받아야 한다는 의식 자체가 없다.● 일본 전체를 뒤흔든 단카이 세대의 퇴장이들이 일본의 법정 정년 연령인 60세가 되는 2007~2009년을 앞두고 온 사회가 다시 한번 들썩였다. 각계에서 정점에 오른 숙련된 인력 수백 만 명이 불과 3년 만에 떼 지어 사라진다며 불안해했다. 솔직히 ‘뭘 이렇게까지 호들갑을 떠나’ 싶을 정도였다. 회사들은 몇 년 전부터 인수인계팀을 가동하는 한편, 이들이 퇴직한 뒤 가정과 지역사회에 소프트랜딩하는 것을 돕기 위해 사내교육 프로그램을 대거 도입했다.사회 전체적으로도 생산가능인력이 대거 피부양인력으로 변하는 부담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2006년 일본 정부는 아예 정년 뒤에도 이들을 회사에 붙잡아두기 위한 법 개정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결국 고령자 고용안정법이 개정돼 2013년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직원이 원할 경우 65세까지 고용이 의무화됐다. 다만 고용연장 방식은 기업에 맡겨 △정년 연장 △계속고용제도 도입 △정년 폐지 등 세 가지 가운데 하나를 택하도록 했다. 대부분의 기업이 계속고용제도를 도입했다. 요즘 한국 정부가 유사한 제도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일본의 정년제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일본노년학회, “고령자 정의를 75세로 올리자”2017년 일본노년학회는 고령자의 정의를 75세 이상으로 바꾸고 65~74세는 준고령자로 분류해 생산적 역할을 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노인들이 더 오래 일하고 세금을 내라는 뜻이어서 사회적 논쟁이 일기도 했다. 한편으로 이들은 가장 부유한 은퇴세대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한 몸에 받았다. 국민연금과 후생(직역)연금, 기업(회사)연금까지, 탄탄한 3중 연금 구조로 현역 월급쟁이 시절 못지않은 수입이 약속돼 있었다. 일본의 금융자산의 70%를 60대 이상 노인들이 가지고 있다는 통계도 있다. 다만 이런 준비가 미흡했거나 불운이 닥친 노인들을 중심으로 점차 ‘하류노인’ ‘장수의 재앙’ ‘노후파산’ 등이 유행어가 됐다. ● 배우려는 자세, 내게 부족함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어느덧 ‘세상에서 가장 늙은 나라’가 된 일본의 사회상은 한국의 미래를 예측하거나 비교할 때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개인적으로는 단카이 세대의 특징을 나이 들수록 배우려 하는 자세에서 찾고 싶다. 앞서 심포지움의 예도 있었지만 문화센터와 대학들도 연배의 수강생들로 붐빈다. 2018년 아쿠다가와상 수상자는 63세 주부였다. 남편을 일찍 여읜 뒤 55세에 문화센터에서 글쓰기 강좌를 들은 것을 계기로 일본 최고의 문학상을 거머쥐었다. 퇴직 뒤 평생의 연구주제를 정하고 자료를 발굴하고 필생의 과업으로 책을 써내는 사람들도 많이 봤다.무언가를 배우려는 자세는 자신에게 부족함이 있다는 걸 안다는 전제에서 생겨난다. 이들도 나이 들면서 조금은 고집불통이 되고 매너가 부족해지고 인색해지기도 하지만 자신을 낮춰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특히 인지증(치매)을 피하기 위한 노력에 필사적이다. 서점에서는 치매 예방을 위한 두뇌훈련용 연습장, 치매예방을 위한 음식과 운동법, 신문 칼럼이나 불경 등을 베껴쓰는 노트, 빈칸에 색칠을 하는 그림책 등이 불티나게 팔린다. ● 단카이 세대 닮은 386세대, ‘오랜 기회 독점’ 비난 새겨들어야일본에서 쏟아져 나오는 단카이 세대 관련 기사들을 보며 우리 386(1990년대에 30대, 1980년대 학번, 1960년대 생) 세대와 닮은 점이 많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무엇보다 시대정신과 주장을 몸소 구현하는 대목이 닮았다. 운동권이 많았지만 대부분은 큰 불이익 없이 사회에 진출했고 각자 자리에서 두각을 나타내 출세의 사다리에 올라탔다. 너무 오래 기회를 독점하는 것 아니냐는 원성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아마도) 괜찮았다.아사히신문의 현대용어사전인 ‘지에조(知惠藏)’에서는 단카이 세대에 대해 ‘전교생이 전람회장에 들어갔는데 앞에서 너무 오래 감상하는 바람에 뒷줄에 선 후배들이 폐장 시간에 쫓기게 한 세대’라는 표현으로 단카이 세대의 오랜 기회독점을 비판했다. 마침 4월 치러질 서울시장 선거 주요후보는 10년 전과 같은 얼굴들로, 대부분 386세대다. 이들이 가진 경륜과 지식, 사회적 인지도는 그런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뭔가 아쉬움도 남는다. 어찌됐건 386의 맏형격인 1960년생이 지난해 법적 정년을 맞았다. 앞으로 이어질 386세대의 퇴장을 우리 사회가 얼마나 아쉬워할지는 미지수다. 이들이 과거 노인들과 다른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기대해보면서, 올해 72~74세를 맞이한 일본 단카이세대의 모습을 살펴봤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차 한잔 타임“우리가 아는 ‘노인’이 아니다.”이런 제하에 새로 법적 ‘노인’에 편입된 베이비붐 세대에서 희망을 보자는 지난주 ‘100세 카페’ 글에 많은 독자가 댓글로 의견을 주셨습니다.‘요즘 65세는 10살은 아래로 봐야 한다’거나 ‘멋진 노인이 늘고 있다’며 공감을 표하는 독자 여러분이 적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부모님께 감사한다’는 분도 계셨지요. 반면 노인들의 매너 없음과 불통 등을 흉을 보는 분도 간혹 계셨습니다. ‘활기찬 노인이란 도시부의 얘기일 뿐, 지방에는 기운없는 노인들이 많아 우울해진다’고 토로하는 독자도 계셨고, 현재의 베이비붐 세대는 부모세대와 자식세대의 부양 부담에 치이는 마지막 ‘낀 세대’라며 애환을 토로하는 의견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정년을 늘려야 한다거나 노인들에게 더 많이 일할 기회를 줘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았는데, 앞으로 곰곰 따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나이듦과 은퇴, 생명의 쇠퇴에 대해 뾰족한 답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같은 시대, 같은 사회를 살아간다 해도 저마다 삶이 다르니 일률적으로 ‘노인은 이렇다’거나 ‘이 길로 가야만 한다’고 단언하기도 어렵습니다. 흘러가는 세월을 막을 도리도 없는 노릇이죠. 하지만 어떤 시대건 우리 사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게 만들려는 노력은 필요합니다.가령 노인이 되어도 사회와 소통하고 자신의 역할을 갖고 조그만 수입이라도 얻을 수 있는 세상, 어르신들이 편안한 표정으로 웃으며 살 수 있는 세상이라면 그 아이들도, 그 아이의 아이들도 살기 좋은 세상에 가까워질 확률이 커집니다. 주어진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되, 좀더 낫게 바꾸려는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100세 카페는 이어집니다.}

    • 2021-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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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아는 ‘노인’이 아니다”…베이비붐 세대에서 읽는 희망[서영아의 100세 카페]

    은퇴야 어느 시대나 있게 마련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거친 뒤 등장한 베이비붐 세대의 존재감은 좀 각별하다. 미국과 일본에서는 베이비붐 세대가 2006~2007년을 기점으로 만 60세를 맞으면서 대거 은퇴 대열에 합류했다. 앨런 그린스펀이 2007년 낸 자서전에서 “세계가 은퇴 중”이라고 언급했을 정도다. 전후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던 이 두터운 인구 층이 무리지어 일선에서 퇴장하다보니 이들의 움직임에 따라 세상도 들썩이지 않을 수 없다. 워낙 숫자가 많으니 세대갈등 양상도 나타나곤 했다. 가령 참견이나 가르침을 주려 하는 기성세대에 대해 한국에서는 “꼰대”, 영미권에서는 “오케이, 부머”라고 꼬집는 젊은 세대의 조롱이 회자(膾炙)되기도 했다.●“세계는 은퇴 중” 베이비붐 세대의 퇴장미국에서 베이비부머는 1946년부터 1964년까지 근 20년간 태어난 세대를 칭한다. 일본은 1947년~1949년생인 ‘단카이(團塊·덩어리) 세대’ 800여 만 명이 전후 일본 사회의 총아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경우는 6.25전쟁의 여파로 한참 늦어진 1955년생부터 1963년생까지 탄생한 700여 만 명을 베이비붐 세대로 분류한다. 일각에서는 1974년생까지를 합쳐 1700만 인구라 하기도 한다.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가 미국 일본보다 8~9세는 젊은 셈이다. 인구표를 펴놓으면 우리는 ‘정해진’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 지난해 한국 베이비붐 세대의 맏형 격인 1955년생이 만 65세로 법적 ‘노인’이 됐다. 앞으로 8년간 매년 80~90여 만 명이 이 대오에 합류하게 된다. 우리 주변에는 저출산과 고령화, 인구 감소가 맞물려 조만간 우리 사회가 겪어보지 못한 재앙에 빠져들 것이라는 경고가 가득하다. 지난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몰고 온 팬데믹도 세상의 변화를 더욱 재촉하고 있다. 늘어나는 노인은 정말 사회의 골칫거리일까.●“10년 내 세계의 중심은 노인과 여성으로 이동한다”앞서도 언급했지만 한국의 베이비부머는 미국이나 일본보다 젊다. 앞서나간 나라들을 참고하기 좋은 여건이다. 그런데 이런 나라들을 살펴보면 상당한 변화가 감지된다. 가령 요즘 마케팅과 산업, 미디어 등에서는 청년 세대를 떠받들고 탐구하느라 애쓰는 분위기지만, 팬데믹 이후를 예측하는 글로벌 석학들은 이 같은 논의가 잘못된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지적을 쏟아내고 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 와튼스쿨 마우로 F. 기옌 교수는 저서 ‘2030 축의 전환: 새로운 부와 힘을 탄생시킬 8가지 거대한 물결’(2020)에서 세계의 부와 힘의 중심은 향후 10년 내에 △대서양에서 아시아 아프리카로 △밀레니얼 세대에서 실버 세대로 △남성에서 여성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요즘 기업들이 떠받드는 밀레니얼 세대보다 실버 세대의 경제력이 몇 배 크고 소비도 확대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60대 이상이 전 세계 자산의 최소한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으며, 미국의 경우에는 80% 이상을 가졌다는 것이다. 나아가 10년 내에 남성보다 더 부유해진 여성이 늘고 이들의 기호와 선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기업가나 정치인은 설자리를 잃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고령사회를 위한 기술과 디자인을 연구하는 미국 MIT 에이지랩 창립자 조지프 F 코글린도 저서 ‘노인을 위한 시장은 없다(2019)’에서 “기업들이 전 세계 부의 절반 이상을 거머쥔 노년층을 무시하고 있다”며 “그런 기업에는 미래가 없다”고 단언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소비자 집단 실버 세대 ‘젊음’과 ‘나이 듦’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가 사라지면서 세대 간의 역학 관계가 바뀔 것이라는 전망은 차고 넘친다. 노인을 보는 시선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국제 저널리스트가 석학 8명과 한 인터뷰를 엮은 책 ‘초예측’(2020)에서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미래 사회에서 관건은 ‘쓸모없는(無用) 계급이 되느냐 아니냐’이지 나이가 아니라고 갈파했다. 같은 책에 소개된 ‘라이프 시프트(100세 시대)’의 저자 린다 그래튼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는 “100세 시대에는 60, 65세 은퇴란 있을 수 없다”며 일하는 방식의 설계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누구나 취업 뒤에도 새로 공부할 기회가 주어져 생애를 통해 배우고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는 먹었지만 건강하고, 능력 있고, 부유한 베이비부머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 사회의 틀도 이에 맞춰 변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로봇과 인공지능 등 4차 산업혁명 시장도 노년층이 가장 큰 소비자가 될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아는 ‘노인’이 아니다”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도 윗세대보다 학력이 높고 연금이나 자산 등 경제적 여유가 있으며 건강하고 활력이 넘친다. 이들은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정보화에 대한 이해가 깊으며 삶의 질과 행복에 관심이 많다. 얼마 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고 빈곤율(49.6%)을 기록한 기존 노인 세대와는 다르다. 스스로 노인이라 생각지 않는 이들은 ‘신중년’ ‘신연장자’ 등 다른 용어로 불려야 마땅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들이 펼치는 인생 2막 풍경에 따라 한국 사회의 미래가 달라진다. 나이 듦이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현실로 인정할 것은 인정하되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이런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할 때 암담한 미래가 찾아오게 된다. 가령 저출산으로 생산 인구가 줄어드는 마당에, 이들이 가급적 오래 부양 ‘받는’ 쪽이 아니라 부양 ‘하는’ 쪽에 서야 사회 전체의 부담이 줄어든다. 풀죽고 움츠린, ‘죽지 못해’ 사는 노년이 우리 청년들의 미래일 수는 없지 않은가.서영아 기자 sya@donga.com※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 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이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한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려 한다. 필자가 일본에서 취재한 세월이 긴 탓에 일본 사례가 상대적으로 많이 등장할 수 있다.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초고령 사회를 겪어내고 있는 나라라는 점에서 가급적 많은 참고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 2021-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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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치소 코로나[횡설수설/서영아]

    구치소발(發) 코로나19 집단 감염 소식에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다.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에서 200명 넘는 확진자가 나온 데 이어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도 확진자가 나와 어제 전수검사에 들어갔다. 두 구치소는 각기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이 수감돼 있어 더욱 주목을 받았다. ▷구치소는 수사나 재판이 진행 중인 미결수들이 주로 입감된 곳이다. 그렇다 보니 이들과 수시로 접촉해야 하는 법조계에도 비상이 걸렸다. 법원행정처는 전국 법원에 3주간 휴정을 권고하고 긴급을 요하는 사건 외에는 재판기일을 미루거나 바꾸도록 했다. 대검찰청도 구속 수사나 소환 등 대면조사를 자제하라고 지시했다. ▷바이러스는 만인에게 평등하다지만 이번에는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코로나 확산 이후 소득과 생활이 달라지지 않은 사람들과 치명적 타격을 입는 사람들의 격차가 벌어지는 ‘코로나 디바이드’가 생겨났다. 바이러스로 인해 그동안 숨어 있던 계급의 민낯이 드러났다며 이를 인도의 계급제도인 카스트에 빗댄 ‘코로나 카스트’라는 말도 등장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코로나 카스트는 재택근무를 하면서 감염 위험이 낮고 급여도 줄지 않은 원격 노동자층, 감염 위험은 있지만 실직 위험이 없는 의사 군인 경찰관 등 필수 노동자층, 실직자와 무급휴직자 등 임금이 없어진 계층 등으로 나뉜다. 그리고 가장 밑바닥에 교도소, 노숙인 시설, 이민자 수용시설 등에서 집단생활을 해야 하는 ‘잊혀진’ 계층이 있다. ▷하루 1000명대를 오르내리는 확산세에 오늘부터 수도권, 내일부터는 전국에서 5명 이상 사적 모임이 금지된다. 거리 두기 3단계에 적용되는 ‘10인 이상 집합금지’보다 더 강력한 조치다. 교도소나 구치소에는 독방도 있지만 6, 7명이 한 방에서 생활하는 혼거실이 적지 않다. 교정당국이 24시간 마스크 착용을 강조하지만 식사할 때나 세수할 때도 마스크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형을 사는 수인이라 해도 감염으로부터 안전할 권리는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또한 백신 접종 때까지는 조심하며 견뎌내야 할 현실인 걸까. ▷교정당국은 지난봄부터 발열측정 카메라를 구비하고 마스크 착용과 손 씻기 등 위생수칙을 강조해왔다. 신입이 들어오면 감염 예방을 위해 14일간 격리했고 수형자들의 면회도 제한했지만 그것으로는 역부족인 듯하다. 교정시설뿐 아니라 집단생활을 하는 요양원이나 요양병원, 군대도 감염이 확산되면 면회와 외출 등 외부와의 접촉부터 규제받는다. 백신은 멀고 방역은 강화되면서 당연하던 일상이 당연해지지 않게 된 이 겨울, 사람을 ‘바이러스 덩어리’인 것처럼 여기고 기피해야 하는 일상은 감옥 안이건 밖이건 다를 바 없는 것 같기도 하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2020-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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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속항원검사[횡설수설/서영아]

    ‘나도 혹시?’ 일상 속으로 파고든 코로나19는 언제 누가 감염되어도 놀랍지 않은 상황. 혹한에도 임시선별진료소마다 중무장을 하고 늘어선 행렬에서 나와 내 가족의 건강을 걱정하는 마음들이 전해져 온다. 14일부터 설치된 임시선별검사소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검사방법은 세 가지다. 기존 ‘비인두도말(콧속분비물) 유전자증폭(PCR) 검사법’과 타액 PCR, 신속항원검사가 그것들인데, 언급된 순서대로 검사 정확도가 낮아진다. ▷신속항원검사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들어올 때 면역반응으로 생기는 항체를 검사하는 방식이다. PCR 검사가 4, 5시간 기다려야 하는 데 비해 약 15분이면 결과를 알 수 있다. 그 대신 정확도가 낮아 여기서 양성이 나오면 다시 PCR 검사를 받아야 한다. 현재 국내 사용 허가를 받은 신속항원검사 진단키트는 한 가지인데 임신 진단키트처럼 생겼다. 면봉을 콧속 깊숙이 밀어 넣어 검체를 채취한 뒤 시약이 담긴 추출용액에 넣고 5회 이상 저은 뒤 진단키트에 세 방울 떨어뜨리면 몇 분 안에 결과창에 음성인지 양성인지 뜨게 된다. ▷더 많은 사람이 더 손쉽게 진단검사를 받게 하려는 취지에서 신속항원검사를 둘러싼 논쟁도 커지고 있다. 지난달 말 서정진 셀트리온 대표가 전 국민 자가진단 검사를 제안했지만 방역당국은 부정적이었다. 최근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국민 누구나 신속 진단키트로 1차 자가 검사를 하고 결과에 따라 추가 정밀 검사를 받게 하는 방안을 논의하자고 제안했지만 당국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자가 검사 도입은 안 하는 걸까, 못하는 걸까. 두 가지 모두인 듯하다. 우선 현재 국내에서 사용되는 검사 키트는 의료진만 사용하는 조건으로 허가를 받았다. 콧속 깊은 곳에 면봉을 찔러 넣어야 하기 때문에 일반인이 하기도 어렵고 정확도도 떨어진다. 검체 채취를 의료행위로 보는 의료법도 장애물이다. 국내 몇몇 제약사가 신속 진단검사를 위한 키트를 개발해 유럽 미국 등지에 수출하고 있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 ▷마침 미국식품의약국(FDA)이 15일 호주 제약사가 개발한 자가 진단키트에 사용 승인을 내줬다는 소식이다. 일반인이 코에 면봉을 넣어 검체를 채취한 뒤 스마트폰에 부착한 진단키트로 15분 만에 감염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이전에도 가정용 진단키트는 몇 가지가 사용돼 왔지만 처방전이 필요하거나 검체를 병원으로 보내 감염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백신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상황이다. 자가진단이 가능한 길이 열리고, 한계점을 인정하는 범위에서 적절한 활용방안을 찾는다면 감염 확산을 막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2020-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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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룸살롱 불기소 세트[횡설수설/서영아]

    검찰이 8일 라임자산운용(라임)의 핵심 인물인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으로부터 ‘술 접대’를 받은 검사 3명 중 1명만 청탁금지법(김영란법) 위반혐의로 기소했다. 모두 536만 원 상당의 향응이 제공됐다고 한다. ▷기소와 불기소를 가른 기준은 향응 수수금액이다. 검찰은 불기소 처분된 검사 2명이 오후 11시 이전에 귀가했으므로 이후 추가된 밴드 팁 등 55만 원을 제외하고 1인당 96만2000원 상당의 접대를 받았다고 계산했다. 처벌 기준금액 100만 원을 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적의 계산법’ ‘검사들을 위한 안전한 술 접대 받기 가이드’ 등의 조롱이 줄을 잇는다. ▷온라인에서는 ‘검사님들을 위한 99만 원짜리 불기소 세트’ 포스터가 만들어져 화제가 됐다. 흔히 알려진 김영란법의 ‘식사접대 3만 원 한도’는 뭐냐는 질문도 꼬리를 물었다. 김영란법에 따르면 1인당 접대 금액이 1회 100만 원 이상이면 형사 처벌 대상이고 접대 한도 3만 원은 소속 기관의 징계 기준이다. 두 검사도 검찰 징계를 받게 된다. ▷n분의 1 계산법은 전체 비용을 인원수대로 나누는 것이고 더치페이는 각자 주문, 각자 계산하는 방식이다. 검찰 계산은 이를 시간대별로 배합한, ‘신박한’ 것이기는 하다. 검찰로서는 두 검사를 기소할 경우 법정에서 당사자들의 항변이 이어질 것임을 의식했을 것이다. 어찌됐건 업자들이 호화 룸살롱에서 술을 살 때는 상대에게 공범의식을 심어주고 보험을 들려는 것임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쥐꼬리만 한 권력이라도 가진 애주가라면 이참에 술은 자비로 마셔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 ▷각자 진영논리에 갇혀버린 걸까. 이날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에 대한 반응은 양 갈래로 나뉘었다. 검찰은 술 접대 사실 외에도 김봉현이 10월 자필 입장문을 통해 주장한 ‘검사 술 접대 의혹 은폐’ ‘여권 정치인 표적 수사’ ‘야권 정치인 수사 무마’ 의혹은 모두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추미애 법무장관이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해 수사지휘권을 발동한 근거를 모두 부정한 것이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검사 불기소만 조롱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추 장관의 성급함만을 강조한다. ▷윤 총장은 10월 국감에서 “검사 접대가 사실이라면 사과하겠다”고 발언한 바 있다. 깔끔하게 사과하고 당사자들을 징계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정파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이 문제를 지나치게 과장하고 비약해서 해석하려는 시도 또한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법치주의와 정의’는 누구나 지켜야 할 가치이고 어느 한편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202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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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착지 없는 관광비행[횡설수설/서영아]

    마스크와 고글로 무장한 스튜어디스가 내민 쟁반을 승객이 받아드는 사진. 쟁반 위 별것 아닌 기내식이 왈칵 향수를 부른다. 지난달 24일 인천공항을 출발한 아시아나항공 ‘A380 한반도 일주비행’ 승객들이 기내식 서비스를 즐기는 장면이다. 이들은 동해 바다가 보이는 강릉, 제주도 한라산 백록담을 지나 두어 시간 만에 출발지로 돌아왔다. ‘비행기라도 타고 싶다’는 소비자들이 몰려 만석에 가까운 탑승률을 보였다. ▷코로나19 탓에 ‘집콕’이 대세라는 뉴노멀을 맞이한 여행객들은 호소할 곳도 마땅치 않은 금단 증세를 느끼고, 항공업계는 생존이 위협받는 위기에 빠졌다.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도착지 없는 비행 상품’이다. 비행기로 유람하듯 상공을 선회하고 회항해 ‘상공 여행’, ‘무착륙 여행’이라고도 불린다. 이미 대만과 호주, 일본에서 열풍을 불렀고 국내에서도 평균 80%에 이르는 탑승률을 기록했다. ▷정부가 그제 이 상품을 국제선에도 1년간 한시 허용하기로 했다. 관련 업계를 지원한다는 취지다. 대개 일본, 중국, 대만행 항로로 20만∼30만 원(일반석) 정도 운임이 될 것이라 한다. 인천공항을 출발해 일본 후지산이나 중국의 만리장성, 혹은 대만을 상공에서 구경하고 돌아오는 식이다. 철저한 검역·방역 관리를 전제로 입국 후 격리조치와 진단검사를 면제해주되 일반 여행자와 똑같은 면세 혜택도 준다. ▷아예 해외여행 상품 판매를 시작하는 여행사도 등장했다. 국내 3, 4위권 참좋은여행은 다음 주부터 동남아 유럽 미주 전 노선 상품을 판다. 상품명은 ‘희망을 예약하세요’. 코로나 이후 새로 개발한 방역 우수국가 여행과 기존 패키지여행에서 인원을 줄이고 안전요소를 강화한 상품들이 대상이다. 대만·태국 등 방역 우수국가들은 내년 3월, 유럽·미주는 내년 7월 15일 이후 출발하는 조건이다. ▷화이자, 모더나의 백신 개발 소식이 힘을 줬고 방역 우수국가끼리 자가 격리 의무를 면제해주는 ‘트래블버블’ 협약 체결에 대한 기대감도 있다. 재미있는 건 기사에 딸린 댓글들인데, 부정적 반응이 거의 없다. “건투를 빈다”거나 “아무리 지독한 바이러스도 결국 극복 가능하다”며 “모든 인류에게 파이팅”을 외치는 사람도 있다. 결국 모두가 똑같은 마음인 거다. ▷오늘 유럽 자유여행 패키지를 예약하는 우리에게 내년 여름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찌 알랴. 그래도 인간은 희망을 먹고사는 동물이다. ‘방콕’에 ‘확찐자’가 되어가는 무력감을 떨쳐내고 내일을 기약해 보는 것, 그게 희망이다. ‘사람이 여행을 하는 것은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행하기 위해서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2020-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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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발적 비혼모’[횡설수설/서영아]

    일본 출신 방송인 사유리(후지타 사유리·41) 씨의 출산 소식이 화제다. 무엇보다 결혼 없이 정자 기증을 받아 아들을 낳았다는 점이 관심을 끌었다. 아기를 가슴에 안은 그는 “너무 행복해 꿈일까 봐 두렵다”고 말한다. ▷사유리는 한국에 유학 중이던 2007년부터 많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한국인들에게 친숙해졌다. ‘언젠가는’ 아기를 갖기를 간절히 원해 방송 중에 “난자를 여러 개 얼려놓았다”고 고백했을 정도. 하지만 지난해 병원에서 시험관 시술조차 쉽지 않다는 진단을 받고는 더 늦기 전에 엄마가 되기로 했다. 아이를 낳기 위해 급히 배우자를 찾기보다는 혼자 엄마가 되는 ‘자발적 비혼모(Single Mother by Choice)’의 길을 택했다. 자발적 비혼모는 결혼은 하지 않고 애인 또는 정자은행을 통해 아이만 낳아 기르는 경우를 지칭한다. 미혼모에 비해 여성 본인의 선택과 의지가 강조된다. ▷한국인들의 반응은 ‘멋지다’거나 ‘용기 있다’는 축하와 격려가 많았다. 아빠 없이 자라날 아이의 처지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충분히 헤쳐 나갈 것이란 응원이 압도적이다. 정치권에서도 축하인사가 답지했다. ▷국내에도 ‘결혼은 싫지만 아이는 갖고 싶은’ 사람은 적지 않지만 실행에 옮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사유리가 굳이 활동무대인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출산한 이유는 한국에서는 이 모든 과정이 불법이기 때문이다. 우리 생명윤리법은 여성이 임신하기 위해 정자를 기증받으려면 법적 남편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시험관 시술 등 난임 지원도 받을 수 없다. 결혼이란 절차를 거쳐 제도 안으로 진입해야만 임신 출산에 대해 합법적 지원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진보정당인 정의당은 ‘비혼 출산 합법화’를 꺼내들었다. 경제학자 우석훈에 따르면 제도권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 대비 그렇지 않은 자녀의 비율인 혼외출산율은 한국이 1.9%로 세계 최저권인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은 40%라고 한다. 혼외출산율이 높은 나라일수록 전체 출산율도 높다. ‘정상적’이란 고정관념에 갇혀버린 결혼과 출산에 대한 강박이 아기들이 태어나고 성장할 기회를 막고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3일 새벽 서울 관악구에서 베이비박스 앞에 버려져 밤새 방치됐던 갓난아기가 숨이 끊어진 채 발견됐다는 가슴 아픈 뉴스가 있었다. 중고물품 거래사이트에 갓난아기를 올린 미혼모 뉴스도 기억에 새롭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2년째 0명대(지난해 0.92명)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현실은 여전하다. 어떤 처지와 조건이건 어려움 없이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202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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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투잡’ 영부인[횡설수설/서영아]

    미국 역대 대통령 부인들의 직업은 영부인이었다. 잘나가는 변호사였던 힐러리 클린턴 여사도, 미셸 오바마 여사도 백악관 입성과 함께 본업을 내려놨다. 하지만 이런 전통은 내년 1월 20일 취임하는 조 바이든 당선인의 부인 질 여사(69)에서 끝나게 된다. 평생 고교와 대학에서 가르쳐온 그는 영부인이 된 뒤에도 강의를 계속하겠다고 일찌감치 선언했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백악관에서 출퇴근하는 ‘투잡(two job)’ 영부인이다. ▷남의 아내를 높여 부르는 말에서 이제는 선출직 국가원수의 부인, 즉 퍼스트레이디를 일컫는 말이 된 영부인은 사실 직업이라 하기에는 좀 특별하다. 보수는 없지만 대통령을 보좌하고 여러 행사에 참석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사실상 사생활을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남편이 대통령에 선출되면 아내는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고 내조에 적극 나서는 게 당연시됐다.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영부인은 엘리너 루스벨트(1884∼1962)라는 데 별 이견이 없다. 그는 불행을 기회로 만드는 ‘행복의 연금술사’라고 불렸는데, 적극적인 내조로 장애인이 된 남편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는가 하면, 4번이나 연임에 성공시켰다. 1945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재임 중 사망할 때까지 남편의 손과 발, 눈이 되어 그림자처럼 도우며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남편 사망 후에도 유엔 등을 무대로 ‘인권의 대모’라 불리며 영부인의 새로운 영역을 구축했다. ▷미 언론들은 질 여사를 바이든 당선인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 ‘바이든의 최종 병기’라 표현한다. 질 여사는 카멀라 해리스를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로 선택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등 이번 선거 기간을 통해 ‘내조형’인 동시에 ‘참모형’ 아내의 면모를 두루 보여줬다. 이런 그가 “나만의 정체성과 직업을 갖길 원한다”고 했다. 26세 나이에 두 아들이 딸린 35세 바이든과 결혼해 세 아이를 키우며 석박사 학위 3개를 따낸 감투정신이라면 무엇이건 못하랴. 질 여사는 바이든이 부통령으로 일한 2009∼2017년 ‘에어포스투’ 안에서 시험지 채점을 한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미국의 한 연구자는 “과거 영부인들의 경우 일과 가정의 양립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질 여사는) 21세기에 맞는 영부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바이든 당선인은 평소 질을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이라고 말해왔고 지난해 4월 첫 유세에서 자신을 ‘질의 남편’이라고 소개했을 정도로 그녀를 밀어준다. 비록 78세, 69세 고령인 당선인 부부지만 사고방식은 그 누구보다 젊은 커플이 아닐까 싶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202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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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일관계, 낙관주의와 인내심 필요”[논설위원 파워 인터뷰]

    《2018년 10월 대법원 판결과 지난해 여름 수출규제 등을 거치며 증폭된 갈등 탓일까. 근래의 한일 관계에는 흔히 ‘해방 이래 최악’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지난해 12월 도미타 코지(冨田浩司) 주한 일본대사는 부임 일성으로 “양국 간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지만 양국 관계는 줄곧 어두운 터널 속에 머물러 왔다. 이런 가운데 9월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 취임을 계기로 양국 간에도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가 조금씩 감지된다. 한일 외교의 최전선에 선 도미타 대사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현직 외교관이기에 갖는 발언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긴 안목’과 ‘인내’를 강조하며 낙관적 미래를 내다봤다. 인터뷰는 지난달 30일 서울 성북구 일본대사관저에서 이뤄졌다. 부임 후 중앙일간지와 가진 첫 인터뷰다.》 “한일 관계, 긴 안목으로 보면…”“한일 관계가 나쁘다, 어렵다고들 하지만 긴 안목에서 보자면 1965년 국교 정상화로부터 ‘불과’ 50여 년 사이에 여기까지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낙관주의를 가질 만하죠. 반면 한일 간에는 역사적 경위가 있어 무언가를 진전시키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전후 국교 정상화에만 20년, 그로부터 김대중-오부치 파트너십 선언(1998년)까지 30여 년이 걸렸습니다. 인내심이 필요한 거죠. 물론 낙관주의는 낙천주의와 달라서, 눈앞의 과제를 해결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요구합니다.” ―한국에서는 스가 총리 취임을 계기로 양국 관계 개선의 기대가 있었다. “새 정권 출범을 계기로 관계 개선의 기운이 생겨나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 스가 총리는 스스로 외교에서 아베 신조 노선을 계승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한국과 일본이 서로 중요한 나라라는 점, 그리고 이 지역 안정을 위해 일한·일미한 연대가 중요하다는 기본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 한국 측이 정권 출범 직후 전화회담을 요청한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외교의 과제는 이런 긍정적 기운을 관계 개선을 향한 구체적인 움직임으로 바꿔 나가는 일이다.” ―올 연말경으로 예상되는 한중일 정상회담에서 한일 정상이 만난다면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일본 측이 스가 총리 방한 조건으로 징용 피해자 배상 소송과 관련한 한국 정부의 선조치를 요구하고 있다는 말이 흘러나온다. “일한중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일정이 나온 게 아니니 일반론만 말할 수 있다. 우선 스가 총리와 문재인 대통령이 개인적 관계를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동시에 정상들이 만났을 때 국민이 기대할 만한 성과를 낼 필요도 있다. 그에 어울리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외교적 대화를 계속하고 있다. 며칠 전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이 방한한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여러 가능성에 대해 다각도로 모색 중이다.”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는 실타래가 너무 꼬였다는 지적이 많다. “이런 상황을 풀기 위해 대화가 필요한 것이다. 낙관주의는 문제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자세다. 무엇보다 이 문제가 잘못될 경우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위기감, 그런 사태를 피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양국 정부가 공유한다고 생각한다.”한일 정상, 개인적 관계 만들어야 ―또 하나의 현안으로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처리수 문제가 있다. “후쿠시마 제1원전의 폐로 과정에서 언젠가는 피해갈 수 없는 문제인 것으로 안다. 다만 폐수 처리의 모든 과정은 국제적 기준을 준수하며 국제원자력기구(IAEA) 등의 승인과 협력하에 이뤄지게 된다.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와도 긴밀히 연락하고 투명성을 가지고 임한다는 각오다.” ―코로나19 문제와 관련해 그간 한일 간 협력이 몇 가지 성과로 나타났다. 제3국에서의 자국민 대피 과정에서의 협력, 일본계 기업인 도레이 구미 공장의 마스크 소재 생산 협력 등이 그런 예다. 좀 더 서로 도울 여지는 없을까. “방역은 국가마다 사정이 다르다는 점에서 국제협력에 제약이 있지만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내다본다면 여러 가능성이 생긴다. 가령 스가 총리는 포스트 코로나를 겨냥해 디지털 이노베이션에 투자하겠다고 하는데, 문 대통령이 내건 한국판 뉴딜 정책과 공통점이 많다.” ―3월 이래 멈췄던 한일 간 인적 교류가 최근 기업인부터 풀렸다. 코로나 확산 여하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우문이긴 하지만 일반인 왕래는 언제쯤 풀릴 것으로 예상하나. “비즈니스 트랙 외의 폭넓은 구조를 준비하고 있다. 특히 올림픽과 방역을 어떻게 양립시킬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아베 전 정권은 관광입국을 내걸고 민간 경제활동의 상당 부분을 관광업에 투여했다. 지금 국내 관광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외국인 관광도 하루빨리 정상화하길 염원하고 있다.” ―반일 혐한 등 민족주의 감성이 기승을 부리는 반면 젊은이들은 음식이나 문화 등 독자적 감성으로 상대국에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젊은이들은 공감을 비교적 순수하게 표현하니까. 사실 서로에 대한 친근감은 다른 세대들도 가졌다고 본다. 한국 드라마가 일본에서 인기 있는 이유도 공감이 되기 때문이다. 연애 감정, 가족의 소중함…. 느끼는 것이 비슷하다. 저도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시종 흥미진진하게 봤고 최종회에서는 울었다. 교류를 통해 이런 공감대를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처칠-대처 전기 저술 위기 리더십 연구 그는 현역 외교관으로서 윈스턴 처칠과 마거릿 대처에 대한 저서를 낸 작가이기도 하다. 이 중 대처 전기는 지난해 일본의 권위 있는 출판상인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상을 받았다. 미디어에 보도되지 않은 사실들을 일일이 찾아내 공들인 저술이다. ―왜 처칠과 대처인가. “정치 지도자의 역할은 크게 자원 배분과 국가 위기에 대한 대처, 이 두 가지라고 본다. 처칠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국가적 위기 앞에서 역사에 남을 궤적을 남겼다. 대처는 대처리즘으로 불리는 변혁을 통해 정치적 ‘자원 배분’을 새로이 해 영국병을 치유하고 영국 경제를 부활시켰다. 인간적인 그릇은 처칠이 더 크고 매력적이지만 영국 사회에 미친 업적은 대처가 더 컸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처칠이나 대처의 시대만 해도 리더의 역할이 크고 대중에게 리더십이 받아들여졌다. 요즘은 자국제일주의가 우선시되면서 포퓰리즘과 독재가 뒤섞인 리더십이 세계를 풍미한다. “리더는 국가를 이끌지만 국민에게 이끌려가기도 한다. 한 시대는 지도자와 국민의 상호 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리더를 고르는 것은 국민이므로 국민의 현명한 판단이 중요해진다.” 그는 “현직 외교관으로서 현실 정치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더 이상의 말을 아꼈다. 하지만 그의 저서를 펼쳐보면 어느 정도 답이 나와 있다. “민주주의하에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리더는 국민에 영합하게 된다. 세상이 복잡 다양해지면서 정당들은 모두 중도로 수렴돼 차별성이 없어졌다. 불만이 쌓인 국민에게 리더들은 극단적인 주장으로 대중의 공감을 얻고 정치의 권좌를 차지하는 수법을 쓰게 된다….” 한일축제한마당… “계속의 힘” 그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 이래 20번째 주한 일본대사다. 2004∼2006년 주한 일본대사관 참사관과 정무공사로 근무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는 가족이 함께 서울에서 지냈지만 이번에는 혼자다. 자녀들은 이미 장성했고 부인은 지난해 태어난 첫 손자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다고 한다. ―한국에서 내정 단계부터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1925∼1970)의 사위로 소개되면서 경계의 대상처럼 인식돼 버렸다. ‘금각사’의 작가로 한때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던 미시마는 점차 극우 사상에 경도돼 자위대의 궐기를 외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남겨진 딸은 11세에 불과했다. “장인은 아내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제 직업이나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밝혀둔다.” 10일에는 제16회 한일축제한마당이 온라인으로 개최된다. 주한 일본대사관은 코로나로 인해 거리 두기 단계가 높아지는 가운데서도 5월부터 축제 준비를 위한 실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수차례 회의를 거듭했다. 도미타 대사는 그때마다 “계속(繼續)은 힘(力)이 된다”는 일본의 격언을 강조하며 어떤 형식으로건 축제를 지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계속은 힘…’은 당장 화려하고 눈에 띄지 않더라도 해오던 것을 꾸준히 이어가는 정신을 말한다. “축제한마당은 제가 서울서 근무하던 2005년 ‘한일 우정의 해’ 기념사업으로 시작돼 15년간 이어온 행사다. 코로나 때문에 고민이 많았지만 계속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온라인이라 한계가 있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참가 못 하던 분들이 찾아줄지도 모른다. 되도록 많은 분이 관심 갖고 즐겨 주시길 기대한다.” 소소한 일이라도 꾸준히 계속해 나가다 보면 무언가를 이룰 힘을 얻는다. 향후 한일 관계 여러 장면에서 이런 정신은 꾸준히 지켜져야 할 것이다. 도미타 코지 주한 일본대사―1957년 후쿠오카 출신. 도쿄대 법학부 졸업. 1981년 외무성 입성, 주영 공사, 주미대사관 차석공사, 북미국장, 주이스라엘 대사를 거쳐 현직―저서: ‘마거릿 대처-정치를 바꾼 철의 여인’(2018년), ‘위기의 지도자 처칠’(2011년)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202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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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면 형제’ 동생 하늘로…[횡설수설/서영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05년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1988년 일본 사회에 충격을 던진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을 소재로 했다. 도쿄 도심, 부모가 모두 가출한 뒤 세상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었던 어린 4남매의 이야기다. 영화에서는 12세 장남이 가출한 엄마를 기다리며 가족을 꾸리는 과정의 막막함이 그려져 있다. 실화에서는 이웃의 신고로 경찰이 들이닥쳐 아이들은 복지시설로 보내졌고 엄마는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엄마(30)가 외출한 집에서 배가 고파 라면을 끓여 먹으려다 화재로 중상을 입은 인천의 ‘라면 형제’ 중 여덟 살 동생이 그제 하늘로 떠났다. 지난달 14일 화재가 난 뒤 37일간이나 병마와 싸웠고 한때 의식을 찾는 등 상태가 호전되기도 했다는데,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열 살과 여덟 살. 불이 나자 아이들은 다급하게 119를 눌렀지만 “살려주세요”만 외친 채 전화를 끊었다. 2분 뒤 이웃이 신고해 화재 위치 등을 알렸다고 한다. ▷형제는 오랫동안 돌봄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었던 듯하다. 다만 어른들이 부실하면 아이들은 일찍 철이 든다. 형제는 늘 함께 다니며 서로를 챙겼다. 야심한 시각에 편의점에서 먹을거리를 고르는 폐쇄회로(CC)TV 영상에서 아이들의 힘든 생활을 눈치챌 수 있다. 한창 개구쟁이 노릇을 할 아이들이 비쩍 마른 몸으로 컵라면이니 도시락을 챙기곤 했다. 서로가 유일한 친구였다는데, 이제 형 혼자 남겨졌다. 어른들이 너무 많은 빚을 졌다. ▷코로나19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감염된다는 점에서 공평하지만 돌봄 사각지대의 사람들에게 유난히 가혹하다. 형제도 학교가 비대면 수업을 시행하면서 급식 대신 직접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엄마는 수년 전부터 형제를 학대·방임한 혐의로 8월 검찰에 송치됐고 가정법원은 이 가족에게 상담을 받으라는 보호처분을 내렸지만 이 또한 코로나 사태로 방치돼 버렸다. ▷아이들에게 부모 혹은 가족은 자신에게 주어진 전 세계와 같다. 그곳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아이들이 ‘내게도 돌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이웃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이유다. 형제가 끔찍한 화상을 입고 병원에 누워 있는 사이, 쾌유를 비는 성금이 2억 원가량 모였다. 아이들로선 그저 ‘천문학적 숫자’일 뿐인 2억 원보다 당장 편의점에서 쓸 수 있는 2만 원이 좋았을 것이고, 2만 원보다는 따뜻한 어른의 보살핌이 자연스러웠을 터다. 이번 동생의 사망 소식에 맘카페 엄마들 사이에서 “가슴 아프다” “안타깝다”만큼이나 “미안하다”는 댓글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 2020-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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