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전혀 꽃처럼 아름답지 않은’ 대학생활이 등장하는 화제 드라마 ‘치즈 인더 트랩’(tvN)의 한 장면. 수업 중 손민수(윤지원)가 과제 발표를 하자 같은 과 홍설(김고은)은 “본인이 작성한 것 맞나. 내가 오타도 수정 안 하고 보고서 판매 사이트에 올린 것과 같다”며 교수와 학생들 앞에서 면박을 준다. 아동판 ‘레미제라블’에서 읽은 장발장과 은촛대의 감동을 간직하고 있는 기자는 ‘홍설이 수업이 끝난 뒤 민수를 찾아가 자복할 기회를 주면 어땠을까’ 하는 아름다운 생각이 들었다. 대학 때부터 표절을 장려하자는 뜻이 아니다. 청년들 사이의 관계가 그만큼 팍팍해졌다는 얘기다. 공부 안 한 친구를 위해 친구들이 합심해 시험 때 ‘커닝’을 돕는 1980년대 TV 드라마의 에피소드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드라마 가지고 너무 호들갑떨지 말라고? 15일 ‘사회적 웰빙의 새로운 모색’이라는 학술대회(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삼성의료원 사회정신건강연구소 주최)에서 나온 ‘한국 사회정신건강에 관한 조사’ 결과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한국인 1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이 조사에서 경제, 정서, 가사 지원을 누구에게 요청하느냐는 물음에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다’는 답이 2004년보다 대체로 늘었는데 특히 20대에서 급증했다. 가족보다 친구, 동료, 이웃의 지원이 더 약화됐다는 결과도 나왔다. 청년들이 취업에 전념하느라 친구 관계도 소홀해지고, 고시원 옥탑 반지하에서 혼자 사는 이들이 늘면서 고립이 심화됐다는 뜻이다. ‘연결돼야 건강하다’(구혜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교수 등)는 제목의 이 발표문은 사회적 지원이 부족한 사람은 풍부한 사람에 비해 긍정적인 정서, 고통에서 회복하는 탄력성 등 정신건강이 나빴다고 밝혔다. 다음 발표문 ‘비교할수록 괴롭다’(양준용 서울대 보건대학원 연구원)를 보면 더 우울해진다. 연령이 낮을수록 자신과 주변의 처지를 많이 비교했다. 그렇다고 꼭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구소득이 적으면 비교 스트레스가 컸다. 취업 못한 서민 청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판이다. 혼자 알바와 공부만 하며 지내자니 정신건강에 나쁘고, 동창회 등에 나가 가까운 사람을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비교를 하며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지난해 유엔 세계행복보고서에서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158개 국가 중 47위. 1인당 국내총생산(GDP)과 건강수명이 낮은 남미 국가들보다도 지수가 낮았던 것은 ‘사회적 지지’가 이처럼 취약한 탓이 컸다. 고독은 원할 때 즐겨야 달콤한 것. 불가항력적 고독은 처절할 뿐이다. 희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같은 연구에서 정당, 시민단체, 취미 문화 모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활동하는 일은 비교 스트레스를 늘리지 않고 공동체 의식을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년들이 ‘청년당’이라도 만들어 여의도에 진출하면 뭔가 달라질까. 조종엽 문화부 기자 jjj@donga.com}

‘옛 초나라 산천을 지나가면서/수나라 적 궁궐을 상상해본다/지난날 흥망을 뉘 탄식하리오/오늘날의 번화만 누리면 그뿐…’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로 시작하는 조선 태종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 같은 정서를 떠올리게 하지만 사실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1386년 중국 양주(揚州)에서 쓴 시다. 측근에 의해 살해된 수 양제의 사연을 떠올리며 망한 나라의 흥망을 따질 것 없다는 내용이다. 불과 6년 뒤 고려가 망하고 정몽주 자신이 이방원 부하의 철퇴에 맞아 비극적인 죽음을 맞을 것은 몰랐던 것이리라. 당대 최고 엘리트 관료였던 정몽주는 고려와 신흥 강국 명의 외교 갈등 시기 세 차례나 당시 명의 수도 남경(南京·현 중국 난징 시)에 사행(使行)을 다녀왔다. 육·해로로 왕복 8000리가 넘는 노정은 어땠을까. 정몽주가 사행 중 틈틈이 남긴 60여 수의 시에 착안해 여로를 복원한 연구가 나와 주목된다. 한양대 국문과 이승수 교수는 ‘민족문화’ 최근호에 게재한 ‘1386년 정몽주의 남경 사행, 노정과 시경’에서 시에 나오는 지명과 위치를 암시하는 단어를 바탕으로 그의 사행로가 1394년 명에서 편찬된 ‘환우통구(환宇通衢)’에 나온 역로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객사의 나그네를 뉘 찾아주리/나지막 읊조리는 밤은 깊어라…’ 정몽주가 사신의 내면을 드러낸 시 ‘객야재구서역(客夜在丘西驛)’이다. 구서역은 현 산둥(山東) 성 칭다오(靑島) 시 랴오란(蓼蘭) 진에 있어 그가 이곳을 지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교수는 “특별한 공간 체험을 계기로 남겨진 정몽주의 이들 시는 한국 문학사에서 희소할 뿐 아니라 높은 미적 수준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15일 서울 고려대 박물관 전시실 벽면에 종이가 물에 젖듯 서서히 나타났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조선 산수의 걸작. 일본 덴리대 중앙도서관에 있는 실물의 디지털 사본을 벽면에 투사한 것이다. 고려대 박물관과 경기 성남시 미누 현대미술관은 28일까지 ‘해외 우리 문화재, 디지털 귀향’전을 열고 있다. 전시 작품은 해외 소재 국보급 명화 7점의 디지털 사본으로 흥선대원군의 별서(別墅) 석파정을 절제된 필치로 그린 ‘석파정’(이한철 작), 한국에는 약 10점밖에 없는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 등이다. 이 전시회는 동아일보사가 후원한다. 이번 전시 작품들은 디지털 스토리텔링을 통해 전통 회화를 실물로 보는 것과 또 다른 경험을 준다. 단원 김홍도의 소림모정도(疏林茅亭圖) 속에서는 인적 드문 강에 비가 내리자 물결이 찰랑이고, 묵매화도(이유원 작) 속 매화가지에는 눈이 소복이 쌓여간다. 조선 후기 문신인 윤봉구 초상(변상벽 작) 속 노유(老儒)는 살아있는 듯 눈을 껌뻑인다. 8절지만 한 화첩 속 산수화는 벽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커져 마치 그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오래돼 어둡게 변질된 종이 색은 작가가 그릴 당시처럼 환해졌다. 주최 측은 해외 미술관 보유 작품의 초고해상도 디지털 사본을 입수한 뒤 그림 속 대상을 움직이게 만들거나 붓 터치를 보여주는 등의 변형을 가하고 배경음악을 입혔다. 해외에 있는 우리 전통 명화는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해외 미술관에서도 특별 전시 때가 아니면 보기 어렵다. 낡고 바랜 것들이 많아 보존을 위해 전시 자체를 꺼리는 경우도 적지 않고, 국내 전시가 성사된다고 해도 여유 있는 감상은 언감생심이다. 몽유도원도의 경우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당시 몰려든 인파 탓에 몇 시간씩 줄을 선 뒤에도 실제 볼 수 있는 시간은 1분도 안 됐다. 이번 전시를 총괄 연출한 다인 미디어아트 랩의 남상민 작가는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가 16만 점이 넘지만 돌려받을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높지 않다”며 “미술관 수장고 속 걸작을 이처럼 ‘디지털 명화’로 만들어 전시하면 우리와 후세가 평소에도 어렵지 않게 보고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외 소재 우리 명화의 디지털 제작을 위해 남 작가가 대표로 있는 ‘디지털 귀향 추진 시민모임’은 지난해부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번 전시도 디지털 사본의 구매 비용을 크라우드 펀딩으로 충당해 가능했다. 관람 문의는 고려대 박물관(02-3290-1807)과 미누 현대미술관(031-754-9696), 캠페인 후원 문의는 사랑의종신기부운동본부(1599-9840).조종엽 기자 jjj@donga.com}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와 2012년 유럽 재정위기 이후, 고삐 풀린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신자유주의로 인한 빈곤과 불평등의 확대가 개발도상국뿐 아니라 선진국의 민주주의마저 위협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책은 이 같은 비판으로부터 시장경제와 자유주의를 방어하려고 한다. 한신대 철학과 교수로 ‘합리적 보수주의자’로 평가받는 저자는 일단 세계화와 연동된 21세기 자본주의의 위기가 민주 질서에 큰 충격을 가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신자유주의는 상위계급이 기득권을 극대화하기 위해, 경제와 관련해서만 자유의 가치를 강조한다고 본다. 더구나 보수와 진보 정부를 불문하고 비슷하게 관철된 한국형 신자유주의 정책은 한 세대 동안 형성된 중산층의 두께를 얇게 만들었다. 국가 주도의 전면적 동원, 불균형 성장정책과 맞물린 정경유착과 관치금융, 노동을 배제하고 재벌을 중심에 두는 천민자본주의, 구조적 부정부패 등도 변화시키지 못했다. 저자는 “한국형 발전국가 모델이 위기를 맞은 오늘날 대대적 복지 확대야말로 대한민국이라는 정치 공동체 체제 유지의 비용이자 미래 성장을 위한 사회적 동력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 같은 전환의 시기 시장의 가치를 바로 보는 ‘시장 철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진보 세력은 시장과 민주 질서를 적대적인 관계로만 봤고, 보수 세력은 시장의 자유방임이 절대선이라고 믿는 잘못을 범했다는 것. 저자는 “시장의 생명력은 민주주의와 정치의 토대를 굳건히 한다. 경제적 자유와 풍요는 정치적 자유를 증대시킨다”고 말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942년, 미국 보스턴 지역 마피아의 자문역으로 일하는 조 커글린은 여러 분쟁을 조정하고 새로운 사업을 설계하며 조직에서 인정받는 위치에 있다. 어느 날 그는 살인청부업자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제보를 듣는다. 자신이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누구일까? 조는 탐문을 통해 점점 진실에 다가간다. ‘미스틱 리버’로 국내 독자에게도 친근한 저자의 하드보일드 범죄소설이다. 비정한 갱단의 이야기가 흥미롭고, 간결한 문체가 속도감 있다. 1만3000원.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국 최초의 과학사 연구서인 홍이섭의 ‘조선과학사’가 1946년 나온 지 올해로 70주년입니다. 최근 발간하기 시작한 ‘한국의 과학과 문명’ 총서는 천문학 기상학 농학 등 천지인(天地人)에 대한 전통 과학사부터 반도체 등 현대 산업기술사까지 망라할 생각입니다.”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는 최근 ‘동의보감과 동아시아 의학사’ ‘한국 전통지리학사’(오상학·제주대 교수) ‘한국 전근대 교통사’(고동환·KAIST 교수) 등 3권을 냈다. 30권짜리 ‘한국의 과학과 문명’ 총서의 첫 3권이다. 야심 찬 기획의 책임자이자 연구소장으로 ‘동의보감과…’를 쓴 신동원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56)를 최근 만났다. 총서 발간은 급성장한 한국의 과학사 연구 역량이 바탕이 됐다. 요즘 과학사 연구는 과거 과학 유산을 통해 민족적 긍지를 강조하던 데에서 과학적 성과가 등장한 구조적 맥락을 조명하는 방향으로 변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100년 이상 실증적 지리학을 추구했던 조선의 전통 속에서 조명된다. 세종 시기의 과학적 성과는 유교적 이념의 실천이라는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연구된다. 제목은 영국 학자 조지프 니덤이 1950년대부터 집필, 편찬한 동아시아 과학사의 고전 ‘중국의 과학과 문명’을 염두에 뒀다. 20여 권이 나온 이 시리즈에서 한국의 과학문명은 단편적으로 언급된다. 세종 때 발명된 측우기가 중국의 하사품이라는 중국 학자의 주장을 인용하는 등 오류도 없지 않다. 신 교수는 “수학이 쇠퇴하던 명나라 초기에 조선 수학의 눈부신 발전을 빼놓고는 동아시아 수학사를 쓸 수 없다”며 “총서는 니덤 시리즈의 공백을 채울 것”이라고 말했다. 30권 중 11권은 올해 나오고 2023년까지 완간할 예정이다. 뉴턴 러셀 호킹 등의 저서를 펴낸 영국 케임브리지대 출판사가 이번 총서를 10권으로 출간하겠다고 나섰다. 이 출판사가 비서구권 인문과학에 대한 총서를 내는 것은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 이어 두 번째다. 신 교수는 “중국, 일본에 가려진 우리 과학문명의 가치를 해외에서도 제대로 조명하게 될 것”이라며 “총서를 바탕으로 완전히 새로 집필해 한국보단 2년 뒤쯤 순차적으로 출간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최근 50여 년의 과학 연구와 유산을 체계적으로 축적하고 아카이브를 만들어 보존하고 연구, 전시하는 ‘한국과학유산원’의 설립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과학유산원이 만들어지면 우리 과학의 과거와 미래에 다리를 놓는 한편 미래 과학의 발전 방향도 제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국 최초의 과학사 연구서인 홍이섭의 ‘조선과학사’가 1946년 나온 지 올해로 70주년입니다. 최근 발간하기 시작한 ‘한국의 과학과 문명’ 총서는 천문학 기상학 농학 등 천지인(天地人)에 대한 전통 과학사부터 반도체 등 현대 산업기술사까지 망라할 생각입니다.”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는 최근 ‘동의보감과 동아시아 의학사’ ‘한국 전통지리학사’ ‘한국 전근대 교통사’ 3권을 최근 냈다. 30권짜리 ‘한국의 과학과 문명’ 총서의 첫 3권이다. 야심 찬 기획의 책임자이자 연구소장인 신동원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56)를 최근 만났다. 총서 발간은 급성장한 한국의 과학사 연구 역량이 바탕이 됐다. 요즘 과학사 연구는 과거 과학 유산을 통해 민족적 긍지를 강조하던 데에서 과학적 성과가 등장한 구조적 맥락을 조명하는 방향으로 변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100년 이상 실증적 지리학을 추구했던 조선의 전통 속에서 조명된다. 세종 시기의 과학적 성과는 유교적 이념의 실천이라는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연구된다. 제목은 영국 학자 조지프 니덤이 1950년대부터 집필, 편찬한 동아시아 과학사의 고전 ‘중국의 과학과 문명’을 염두에 뒀다. 20여권이 나온 이 시리즈에서 한국의 과학문명은 단편적으로 언급된다. 세종 때 발명된 측우기가 중국의 하사품이라는 중국 학자의 주장을 인용하는 등 오류도 없지 않다. 신 교수는 “수학이 쇠퇴하던 명나라 초기에 조선 수학의 눈부신 발전을 빼놓고는 동아시아 수학사를 쓸 수 없다”며 “총서는 니덤 시리즈의 공백을 채울 것”이라고 말했다. 30권 중 11권은 올해 나오고 2023년까지 완간할 예정이다. 만유인력 법칙이 담긴 뉴턴의 책 ‘프린키피아’를 출간했던 영국 케임브리지대 출판사가 이번 총서를 10권으로 출간하겠다고 나섰다. 이 출판사가 비서구권 인문과학에 대한 총서를 내는 것은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 이어 두 번째다. 신 교수는 “중국, 일본에 가려진 우리 과학문명의 가치를 해외에서도 제대로 조명하게 될 것”이라며 “총서를 바탕으로 완전히 새로 집필해 한국보단 2년 뒤 쯤 순차적으로 출간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최근 50여 년의 과학 연구와 유산을 체계적으로 축적하고 아카이브를 만들어 보존하고 연구, 전시하는 ‘한국과학유산원’의 설립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과학유산원이 만들어지면 우리 과학의 과거와 미래에 다리를 놓는 한편 미래 과학의 발전 방향도 제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국민들 누구나 자신이 희망하고 예측하는 미래의 모습을 올릴 수 있는 웹사이트가 있다면 어떨까요? 올 상반기에 만들 겁니다.” 미래학회장인 이광형 KAIST 교수(62)는 늘 새로운 일거리를 만드는 기획자다. 1999년 드라마 ‘카이스트’에 나온 괴짜 교수의 실제 모델로 유명한 그이지만 드라마 방영 이후 이력이 더 도전적이다. 전산학과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지만 2001년 당시 미래 학문 분야였던 바이오 및 뇌공학과를 만들더니, 2013년에는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설립을 이끌고 원장을 맡고 있다. 》5일 인터뷰에서도 이 교수는 새로운 놀이를 앞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위키피디아처럼 전문가뿐 아니라 모두가 미래 구상을 자유롭게 논의하는 ‘위키 미래전략’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 사이트 개설에는 미래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이려는 목적도 있다. “현재 20세 인구가 약 65만 명이라고 치죠. 10년 뒤에는 45만 명이 안 될 겁니다. 기계화를 하든 다른 병력 자원을 개발하든 국방력 유지를 위한 청사진을 지금 만들어야 합니다. 멍하게 있다 보면 미래는 금방 닥칩니다.” 2014년부터 미래창조과학부 미래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는 미래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사회복지 지출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의 절반가량이니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인구 구성비를 보면 지출 비율은 시간이 흐르면서 저절로 높아져요. 국가부채도 이자 부담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날 가능성이 있어요. 오늘만 생각해서 미래세대의 자원을 당겨 쓰면 나중에는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그는 지난달 ‘미래학회’의 초대 학회장으로 선출됐다. 불확실성이 증대된 요즘 기후나 인구구조처럼 구조적이고 거시적인 변화 예측과 대안 모색이 중요시되면서 미래학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 교수는 “중장기 미래 전망은 검증이 쉽지 않은 것을 빌미로 그럴듯한 얘기를 무책임하게 포장해 내놓는 경우가 없지 않다”며 “미래학회는 엄밀한 학술적 방법론을 세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KAIST가 2014년부터 매년 내고 있는 책 ‘국가미래전략’의 편찬을 책임지고 있다. 30여 개 분야를 다루는데 지난해 한국어, 해양수산 전략을 더했고 매년 새로운 분야를 추가할 예정이다. 이 교수는 “정권은 바뀌어도 국가 전략 수립에 바탕이 될 수 있는 보고서를 만들려 한다”고 말했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을 묻자 그는 뜻밖에 ‘죽음’을 거론했다.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는 법률이 통과됐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보다 적극적인 ‘안락사’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수십만 명이 산소호흡기에 의존하는 시대가 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죽음의 미래학’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화려해 보이는 이력에 좌중을 웃기는 농담도 곧잘 하는 이 교수지만 ‘예전에는 항상 뒤처져 살았다’고 털어놨다. “원래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도 아니고, 언변도 없어서 늘 그늘에 있었어요. 미생의 ‘장그래’와 성격이 비슷한 면이 있었죠.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여러모로 노력하다 보니 한 마흔 살쯤 성격이 변하더라고요.” 그는 최근 ‘질병이 인류를 멸종시킬 수 있을지, 만약 그럴 소지가 있다면 어떤 질병일지’에 관한 논문을 제자들과 준비 중이다. “제 머릿속에 괴상한 생각이 많은데 말을 가려서 ‘위장’할 뿐입니다.(웃음) 창의성에는 기존 틀과의 적절한 불화가 필요하지요.”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국민들 누구나 자신이 희망하고 예측하는 미래의 모습을 올릴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다면 어떨까요? 올 상반기에 만들 겁니다.” 이광형 KAIST 교수(62)는 늘 새로운 일거리를 만드는 기획자다. 1999년 드라마 ‘카이스트’에 나온 괴짜 교수의 실제 모델로 유명한 그이지만 드라마 방영 이후 이력이 더 도전적이다. 전산학과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지만 2001년 당시 미래 학문 분야였던 바이오 및 뇌공학과를 만들더니, 2013년에는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설립을 이끌고 원장을 맡고 있다. 5일 인터뷰에서도 이 교수는 새로운 놀이를 앞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위키피디아처럼 전문가 뿐 아니라 모두가 미래 구상을 자유롭게 논의하는 ‘위키 미래전략’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 사이트 개설에는 미래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이려는 목적도 있다. “현재 20세 인구가 약 65만 명이라고 치죠. 10년 뒤에는 45만 명이 안 될 겁니다. 기계화를 하든 다른 병력 자원을 개발하든 국방력 유지를 위한 청사진을 지금 만들어야 합니다. 멍하게 있다 보면 미래는 금방 닥칩니다.” 2014년부터 미래창조과학부 미래준비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는 미래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사회복지 지출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의 절반가량이니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인구 구성비를 보면 지출 비율은 시간이 흐르면서 저절로 높아져요. 국가부채도 이자 부담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날 가능성이 있어요. 오늘만 생각해서 미래세대의 자원을 당겨쓰면 나중에는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그는 지난달 ‘미래학회’의 초대 학회장으로 선출됐다. 불확실성이 증대된 요즘 기후나 인구구조처럼 구조적이고 거시적인 변화 예측과 대안 모색이 중요시되면서 미래학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 교수는 “중장기 미래 전망은 검증이 쉽지 않은 것을 빌미로 그럴듯한 얘기를 무책임하게 포장해 내놓는 경향이 없지 않다”며 “미래학회는 엄밀한 학술적 방법론을 세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KAIST가 2014년부터 매년 내고 있는 책 ‘국가미래전략’의 편찬을 책임지고 있다. 30여개 분야를 다루는데 지난해 한국어, 해양수산 전략을 더했고 매년 새로운 분야를 추가할 예정이다. 이 교수는 “정권은 바뀌어도 국가 전략 수립에 바탕이 될 수 있는 보고서를 만들려 한다”고 말했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을 묻자 그는 뜻밖에 그는 ‘죽음’을 거론했다.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는 법률이 통과됐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보다 적극적인 ‘안락사’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수만 명이 산소 호흡기에 의존하는 시대가 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죽음의 미래학’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화려해 보이는 이력에 좌중을 웃기는 농담도 곧잘 하는 이 교수이지만 ‘예전에는 항상 뒤처져 살았다’고 털어놨다. “원래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도 아니고, 언변도 없어서 늘 그늘에 있었어요. 미생의 ‘장그래’하고 성격이 비슷한 면이 있었죠.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여러모로 노력하다 보니 한 마흔 살쯤 성격이 변하더라고요.” 그는 최근 ‘질병이 인류를 멸종시킬 수 있을지, 만약 그럴 소지가 있다면 어떤 질병일지’에 관한 논문을 제자들과 준비 중이다. “제 머릿속에 괴상한 생각이 많은데 말을 가려서 ‘위장’할 뿐입니다. (웃음) 창의성에는 기존 틀과의 적절한 불화가 필요하지요.”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외투. 당대 이단적이었던 사유(思惟) 탓에 자객의 습격을 받아 찢어진 외투를 평생 입고 다녔다. ‘사람들이 언제나 사유를 사랑하는 것은 아님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전해진다. 안경. 유산 소송을 걸어온 누이에게 이겼지만 모든 유산을 넘겨준다. 책을 헌정하면 죽을 때까지 연금을 주겠다는 루이 14세의 제안도 거절한다. 그 대신 안경 렌즈를 세공하며 검소하게 살았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이런 일화에서 보이듯 ‘고독과 은둔’의 이미지가 강하다. 실제 그가 속했던 유대인 공동체에서 “낮에도 밤에도, 앉건 서건, 안에 있건 밖에 있건 저주가 있을 것이다”라는 무시무시한 판결과 함께 파문당했고, 저서 ‘신학정치론’이 금서로 지정돼 불살라지는 등의 고난을 겪었다. 그러나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 들뢰즈 알튀세르 발리바르 네그리 등 현대철학자들은 끊임없이 스피노자를 불러와 원용한다. 막상 스피노자에 관해 알기 쉽게 풀어 쓴 국내 저서는 드물다. 이 책은 그의 사상이 철학의 계보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분석하려 애쓰지 않는다. 연구공동체 ‘수유너머N’의 연구원인 저자는 다만 행복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자유와 풍요, 예속과 빈곤은 어디서 오는지에 관해 스피노자를 통해 설명하려 한다. 스피노자는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인 신을 향한 사랑이 참된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했다. 그 신은 기존 종교적 전통의 초월적 존재, 인간을 처벌하고 보상하는 신과 달리 자연만물이다. ‘지복(至福·더없는 행복)’은 덕(德)에 대한 사후의 보상이 아니라 덕 그 자체이고, 현재 삶의 일부다. 그것을 얻으려면 인간을 강한 존재에게 수동적으로 예속되게 만드는 정념에 사로잡히지 말고 자신의 능력과 욕망을 긍정해야 한다. 윤리학은 정치학으로 이어진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인간에게는 교제하며 (…) 유대를 결속하는 것, 우정의 강화에 도움이 되는 행위가 무엇보다도 유익하다”고 썼다. 저자는 “이상 사회는 저마다의 능력에 따라 자유롭게 살아가는 인간들의 자발적인 결사체라는 것”이라며 “이는 쉽게 이룰 순 없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국 추리소설 작가들이 쓴 ‘셜록 홈즈’ 시리즈의 패스티시(내용이나 표현 양식을 일부 빌려 만든 작품)다. 5편이 실렸는데 3편은 경기 파주출판단지나 서울 합정동 등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했다. 서울 중계동 ‘홈즈 수학’ 학원 위에 사무실을 차렸거나 인터넷 신상털이 전문가를 고용하고, 의뢰인이 기분 좋으라고 자신의 추리보다 나이를 일부러 적게 말하는 등 주인공 홈즈가 친근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홈즈뿐만 아니라 한국 최초의 추리소설 속 명탐정도 되살아난다. 김내성(1909∼1957)의 1939년 연재소설 ‘마인’ 속 명탐정 유불란이 광복을 맞은 뒤 영국으로 건너가 홈즈를 만난다면 어떤 정면승부를 벌일까. 1만3000원.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차례상에 올리고 손님에게 내갈 떡만둣국을 끓이느라 부엌의 가마솥에서 김이 무럭무럭 올랐다. 손님이 잇따라 대문을 열 때마다 검둥이 강아지는 꼬리를 흔들며 짖었지만 어린 이치억 씨(41·성균관대 초빙교수)는 반갑지 않았다. 또래 친구들은 벌써 설 차례를 지내고 얼어붙은 무논 위에서 썰매를 타거나 제기를 차러 나갔다. 산토끼를 잡으러 눈 쌓인 산에 간 아이들도 있었다. 할머니가 벽장에 넣어 두었다가 화로에 구워 주신 군밤도 빨리 먹고 싶었다. 하지만 퇴계 이황의 17대 직계 후손인 이 씨는 사랑방에서 일가친척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설을 맞아 종가를 찾은 집안 어른들은 “네가 장래 종손이지”라고 말하며 손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긴 당부의 말과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족보 이야기도 잊지 않았다. 전날 밤 늦게 사당에 ‘묵세배(묵은세배·섣달그믐날 저녁에 올리는 세배)’를 올린 터라 이 씨는 눈꺼풀이 감겨 왔다. “그게 어른들이 주신 사랑이었는데, 그때는 잘 몰랐던 거죠. 그래도 동네에서 세뱃돈은 제일 많이 받았어요.” 수십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경북 안동시 도산면 백운로 퇴계 이황 종택에서는 설 전날 밤이면 이 씨의 부친인 16대 종손 이근필 옹(84)이 사당의 문을 연다. 제사 때만 문이 열리는 사당 안에는 퇴계 선생과 종손의 고조부부터 부친까지 4대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종손은 오른쪽 곁문으로 들어가 조심스레 돌마루에 오른 뒤 사당을 향해 세배를 올린다. 17대 종손이 될 이 씨를 비롯한 다음 항렬 자손들이 뒤이어 절을 올린다. ‘조상님, 올 한 해도 큰 탈 없이 보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씨가 어릴 적에는 50명이 넘는 집안사람들이 종가의 설 차례에 참석했다. 멀게는 촌수가 30촌이 넘지만 모두 일가다. 요즘은 부모님을 서울 등으로 모셔간 이들이 많아 고향을 찾는 사람이 줄었지만 그래도 차례를 지내는 인원이 30여 명에 달하고 아이들까지 합치면 60여 명이 오간다. 설 당일에 오지 못하지만 며칠 안에 종가에 와 사당과 종손에게 세배를 올리는 친척도 많다. 근처에 있는 진성 이씨 종가는 퇴계 선생의 조부부터 내려오는 큰 종가, 퇴계 선생의 손자 대부터 내려오는 작은 종가 등 여러 곳이 있다. 차례는 오전 9시, 11시, 낮 12시 등 종가마다 시간을 달리해 지낸다. 제관(祭官)들이 여러 종가의 차례에 모두 참석하기 때문이다. 이 씨도 다른 종가를 찾아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올린다. 종가의 차례상에는 상다리가 부러질 듯 온갖 음식이 오를 것 같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간소하다. 과일 몇 가지, 포, 전 한두 가지, 떡국 등이다. 이 씨의 조부가 살아 계실 적부터 간소했었다. 이 씨는 “아버지도 ‘제사 음식은 남기면 안 된다. 참석한 사람들이 한 끼 먹을 만큼만 준비하면 된다’고 하신다”며 “옛날에도 간소했듯이 평소 음식이 부족하지 않은 요즘도 굳이 음식을 많이 차릴 필요가 없다고 본다”고 했다. 간소하게 차리다 보면 조율이시, 좌포우혜, 동두서미, 홍동백서 같은 차례상 차리는 예법에 어긋나는 것은 아닐까.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진설도(陳設圖·제사상의 제수를 배열한 그림)를 봐도 앞줄에 과일, 과일, 과일 이런 식이지 꼭 어떤 과일을 어느 자리에 놓아야 한다고 돼 있지 않아요. 포와 젓갈, 고기와 생선, 이런 식으로 밥상하고 같은 개념이지요. 차례와 제사 음식을 상에 올릴 때 하나하나 위치를 정하는 것에도 우리 전통문화가 담겨 있지만 그게 반드시 유학(儒學)적인 것은 아니에요.” 퇴계 이황의 학문을 연구하는 이 씨는 “더 많이 올리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지만 오히려 지나치지 않게 어느 정도 선을 긋는 것이 예(禮)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설에 종가를 찾은 손님들이 아버지와 말씀을 나누는 동안 이 씨는 차와 과일을 내가거나 청소하느라 바쁘다. 이른 새벽 세배를 앞두고 사당을 청소하려면 차가운 마루에 발이 꽁꽁 언다. 언 손을 불어가며 행주로 상을 닦으면 금세 상에 얼음이 내려앉는다. 성인이 된 뒤에도 차례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번거롭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지금은 보람이 훨씬 크다고 한다. “설은 시간의 마디입니다. 관혼상제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려는 의례인 것과 마찬가지로 설도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차례는 조상을 공유하는 구성원들이 모여서 의미를 부여하고 존재의 뿌리를 확인하는 것이지요.”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원로-한 가지 일에 오래 종사하여 경험과 공로가 많은 사람, 중견-어떤 단체나 사회에서 중심이 되는 사람. 사전적 정의와는 다르지만 이런 뜻을 추가해보면 어떨까요. ‘늘 새로운 도전을 계속하는 사람.’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동아일보가 학자, 문인을 비롯한 문화계 원로, 중견 인사들의 안부를 묻습니다. 》“내게 남은 시간이 있다면…, 대학용 한국 경제사 교과서를 쓰고 죽으려고 합니다.” 지난달 29일 경기 과천시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80)는 2시간 내내 정력적으로 말을 이어갔다. 양손을 펼쳐 제스처를 할 때면 팔순이 아니라 젊은 웅변가 같았다. 1970년대까지 사회주의 계열의 학자로 분류됐던 그는 1980년대 한국 경제가 선진국 진입을 앞두고 있다는 ‘중진 자본주의론’을 내놓았다. 근래에는 뉴라이트 운동을 대표하는 이론가로 활동했다. ‘시대정신’ 이사장직을 마지막으로 공식 활동은 하지 않고 있다. “초기 통계는 정확하지 않지만 한국 경제는 1876년 개항 이래 1985년까지 무역 흑자를 본 해가 1924, 1925년 2년에 불과합니다. 끊임없이 외자가 들어와야 하는 구조였던 것이죠. 그래서 수출에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요.” 안 교수는 요즘에도 매일 6∼8시간씩 논문을 컴퓨터로 확대해 읽으며 연구에 몰두한다고 했다. 그는 구상 중인 경제사 서술의 골간을 설명했다. 강력한 리더십이 있는 정부가 있었기 때문에 산업화와 재정자립이 가능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냉전 체제에서 저개발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실천할 역량이 없기 때문에 사회주의로 넘어가게 돼 있습니다. 강력한 리더십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했던 것이지요.” 그는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주의와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을 지키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기 경제 개발도 당시 형성된 70만 군대의 힘이 바탕이 됐다고 했다. 안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은 자본과 기술, 시장이 부족한 상황에서 수입 대체 공업화라는 ‘저항적 민족주의의 길’ 대신 현명하게 수출 지향 공업화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의 이 같은 주장은 종종 ‘독재를 미화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그러나 그는 민주화 역시 산업화가 바탕이 됐다는 반론을 펼쳤다. 그는 4·19혁명 당시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던 것도 이승만 대통령이 궁핍한 재정에도 불구하고 교육에 투자한 결과라는 것이다. “광복 이후 학교 수가 엄청나게 늘어납니다. 국민들이 자기 소질을 발휘할 수 있는 체제가 되자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아는 학생이 엄청나게 늘어나죠. 이승만은 자기가 양성한 학생들에 의해 물리침을 당한 겁니다.” 안 교수는 요즘 다산 정약용의 경세학에 관한 책 ‘경세유표에 관한 연구’를 집필하고 있다. 민족주의 사학에 대한 비판적 연구의 일환이다. 그는 “다산의 학문은 기본적으로 의리지학(義理之學·형이상학적 체계와 도덕적 실천의 원리에 대한 학문)에서 출발한다”며 “실학이 근대적 학문 발전의 증거로 다뤄지는 것은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민족주의라는 특정 가치 지향적 연구는 객관적이어야 할 학문의 본령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책은 올 6, 7월경 나올 예정이다. “한국 정치가 엄청난 지각변동 중입니다. 권위주의 세력을 계승한 새누리당이 오픈 프라이머리(완전참여국민경선제)라는 민주주의 실천 전략을 내놓은 것은 비록 관철된 것은 아니지만 큰 변화입니다. 반면 옛 운동권식의 야당에 국민들이 염증을 내면서 ‘국민의당’이 뜨고 있는데, 정치철학이 부족하지만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정당이므로 세가 더 커질 것으로 봅니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6년 전 오른쪽 고관절에서 암이 발견돼 인공관절 수술을 받은 탓이다. 다행히 재발은 되지 않았다. “그때부터 죽을 때가 됐다는 것을 받아들이니 마음이 깨끗해졌습니다. 언제 어떻게 죽든지 섭섭하지 않다고 생각해요.”과천=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본을 우습게 보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는 얘기가 있다.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한국인은 그 반작용으로 일본이라면 뭐든 폄하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는 얘기다. 일본이 한때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될 수 있었던 저력의 뿌리는 19세기 메이지 유신이다. 일본의 근대국가 건설 시기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 ‘조용한 혁명’(소명출판·사진)이 최근 나왔다. 일본 역사의 한 시대를 종합한 국내 연구서는 드물다. 동서대 초빙교수를 지낸 저자 성희엽 씨(국제학 박사)는 “서양의 침탈에 맞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면서 자립적으로 발전한 일본 근대사를 들여다봤다”고 말했다. 메이지 유신은 통상 ‘혁명’으로 불리지 않는다. 저자에 따르면 그 이유는 ‘천황가(家)’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일본의 전통, 메이지 유신이 전(前)근대적 절대주의 국가를 만들었다고 보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영향, 위로부터의 변화에 불과했다는 서구학자들의 편견 탓이다. 성 박사는 “침략적 팽창정책을 추진하면서 의미가 퇴색되기는 했지만 일본의 유신과 건국은 왕정복고 쿠데타일 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봉건적 껍데기를 벗고 근대적 전환에 성공한 사회경제적 혁명”이라고 말했다. 이 책은 일본이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던 큰 요인으로 덴포(天保·일본 연호·1830∼1844년) 시기에 태어나고 자란 ‘덴포기의 아이들’, 즉 청년 사무라이 혁명가들의 형성을 들었다. 이들은 지역과 신분으로 분열된 봉건 막번(幕藩) 체제(절대 지배자인 쇼군이 막부를 장악하고, 그 아래 여러 다이묘의 번이 자치권을 행사하는 정치 제도)에서는 군사력이 월등한 서구 열강의 위협을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강렬한 민족적 정체성과 근대적 국가의식을 갖게 된 이들이 혁명의 주력이 됐다는 것이다. 1부 ‘유신과 건국의 기원’에서는 국학 유학 난학(蘭學·네덜란드에서 전해진 지식을 연구한 학문) 등 메이지 유신의 바탕이 되는 사상적 변화를 조명했고, 2부 ‘유신 혁명’과 3부 ‘건국’에서는 혁명 과정과 경제 군사 법률 제도의 성립을 다뤘다. 800쪽에 가까운 이 책이 나오기까지 7년이 걸렸다. 부산시장 대외협력보좌관, 기획재정부 홍보전문관 등으로 6년간 일하던 저자는 연구와 집필에 집중하기 위해 2011년 말 직장을 그만뒀다. 언어적인 어려움이 가장 컸다. 국학을 공부하려면 한문과 고대 일본어도 알아야 했다. 책에는 저자가 메이지 유신과 관련된 도시 25개를 탐방하면서 찍은 사진이 실려 이해를 돕는다. 성 박사는 “식민 지배를 겪은 우리는 한일관계의 적대적 측면에만 주목해 일본 현대사를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며 “한국의 국력이 일본을 많이 따라잡은 오늘날에는 일본의 역사 발전을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미국에서 갑자기 대규모 정전이 일어난다. 사회 기반시설이 마비되고 열차가 충돌해 수백 명이 죽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사이버테러로 인터넷이 마비돼 벌어진 일이다. 혹한에 수도 가스 전기 등의 공급이 끊기자 사람들은 아파트를 떠나 구호소로 향한다. 조류독감이 유행한다는 소문이 돌자 병원은 아수라장이 되고, 치안도 엉망이 된다. 소설은 이 재난을 헤쳐 나가는 평범한 프로그래머 마이클의 가족 이야기다. 복잡한 시스템에 의존해 작동하는 도시의 기능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저자는 IT 분야에서 일하기도 했다. 스마트폰끼리 네트워크를 만들어 재난에 대처하는 내용 등에서 작가의 전문성을 확인할 수 있다. 1만5000원.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구글의 바둑 프로그램이 유럽에서 프로 기사를 상대로 이기고, 이세돌 9단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이 9단은 한 인터뷰에서 “수년 뒤에는 인간이 바둑에서조차 컴퓨터에 밀리는 것 아닌가” 우려했다. 걱정되는 것은 바둑뿐이 아니다. ‘제4차 산업혁명’을 주제로 한 다보스 포럼에서는 인공지능과 로봇, 생명과학 기술 등의 발전으로 2020년까지 51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다는 보고서가 공개됐다. 자율 주행차라고 하면 흔히 운전을 직접 안 해도 되는 자가용이 떠오른다. 하지만 자율 주행차가 화물 운송이나 공장 내에서 뭔가를 나르는 일을 비롯해 광범위한 운송 업무를 대체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세계적으로 이 분야 700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멋지게 하늘을 나는 드론을 보며 박수만 칠 때가 아닌 것이다. 화이트칼라 직업도 마찬가지다. 판사의 일 같은 법무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공지능이 해당 업무의 상당 부분을 가장 빨리 대체할 것으로 전망되는 직종에 속한다. 법 관련 실무의 상당 부분은 판례 등 자료를 조사하는 일이다. 사람보다 컴퓨터 프로그램이 더 잘할 수 있는 일이다. 의사는 어떨까. 미국에는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이 암을 진단하기 때문에 오진 확률이 더 적다’고 광고하는 병원도 있다. 기자? 일부 스포츠와 증시 보도 기사를 이미 ‘로봇’(프로그램)이 쓰고 있다. 이쯤 되면 정말 책 제목처럼 ‘인간은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스마트폰이 처음 나올 당시 메모리는 8GB(기가바이트)였다. 10년이 안 된 지금은 64GB가 나온다. 지금부터 10년 뒤에는 메모리가 2TB(테라바이트) 정도 될 것으로 예측된다. 약 2조 바이트로 숫자만 놓고 보면 우리 두뇌에 있는 뉴런 수(약 1000억 개)의 20배 정도 된다. 뉴런과 메모리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스마트폰이 언젠가 두뇌 이상의 정보처리 능력을 가질 가능성이 상당하다. 인공지능은 인간을 이미 대체하고 있고, 급속히 대체할 것이지만 그 위험을 지각하기는 쉽지 않다. 산업혁명에 반발했던 노동자들은 기계에 모래를 뿌리는 등 러다이트(기계 파괴) 운동을 벌였지만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과는 어떻게 싸워야 하는 것일까. 인공지능학자로 스탠퍼드대 법정보학센터 교수인 저자는 인공지능 확산에서 오는 다양한 문제를 검토하고 부작용을 줄이는 방안을 제시한다. 저자는 기술 발전으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 기업이 고용 약속을 하고 근로자가 미래의 수입을 빌려 직업에 필요한 기술을 익히는 데 쓰도록 하는 ‘직업 대출’ 제도 등을 제안한다. 근본적 대책이 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지만 인공지능과의 공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책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겨울, 눈이 무릎까지 빠지도록 쌓인 산길을 한복을 고이 차려입은 어머니와 함께 올라 다다른 산사. 절집 처마 위 두꺼웠던 눈이 ‘푹’ 하고 떨어지는 소리, 엉덩이가 익을 것 같은 온돌 바닥에서 먹은 구수하고 담백한 칼국수, 새벽의 정적을 가르는 목탁과 독경 소리…. 기자의 어린 시절 기억이다. 겨울 산사에 잠시 머무르면 속세로 돌아와서도 찬 바람이 이마를 에일 때마다 절 마당으로 돌아간 듯 ‘쨍’ 하고 정신이 맑아지는 듯하다. 한국불교문화사업단에 따르면 수행자의 일상을 체험할 수 있는 템플스테이가 전국 120여 개 사찰에서 연중무휴로 운영된다. 사찰마다 차이는 있지만 예불, 참선, 발우공양(식사 수행), 다도(茶道), 울력(함께 일하기), 108배 등 프로그램은 대개 진행한다. 하루 세 번 있는 예불 중 가장 이른 새벽 예불은 오전 4시 반에 시작되니 ‘몸의 휴양’만이 목적이라면 템플스테이가 아닌 다른 쉴 곳을 찾아보는 게 좋겠다. 템플스테이는 바쁜 일상에서 잃어버렸던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다. 사찰별 프로그램이 다채롭다. 화제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정봉(안재홍)이 촛불을 들고 탑돌이를 했던 강원 인제군 백담사에서는 스님과의 차담(茶啖), 단청에 만다라 문양 그리기, 맥놀이 명상(법고 목어 대종 등 불교의 법구 체험), 서원 탑돌이, 요가, 숲길 명상 등의 프로그램이 있다. 경남 양산시 통도사에서는 통도사 문화재 이야기, 보궁 걷기, 단주(알이 적은 염주) 만들기, 암자 순례, 십육만대장경에서 소원빌기 등을 진행한다. 겨울철 템플스테이에는 빠질 수 없는 것이 주전부리다. 절에서는 나무를 때는 화목 보일러를 사용하는 곳이 많아 종종 잔열로 고구마나 밤을 굽는다. 경남 문수암 스테이에는 참가자들이 장작을 패고 그 장작으로 구운 노릇한 군고구마와 함께 따뜻한 차를 마시며 담소하는 시간이 있다. 영동 반야사도 고구마 밤 가래떡을 구워 먹을 수 있도록 뜨끈한 아랫목이 있는 차실을 개방하고 있다. 예산 수덕사와 해남 미황사 등도 마찬가지다. 참가자들과 겨울 산행을 하는 사찰도 있다. 템플스테이는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참여할 수 있다. 종교적인 이유로 함께하기 어려운 프로그램이 있다면 미리 알리면 된다. 두꺼운 외투 양말 속옷 등산화 세면도구 등은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 수행 공간이기에 음주 흡연 고성방가 등은 금지다. 자세한 정보는 템플스테이 인터넷 홈페이지(www.templestay.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명상에 대한 수요가 커지면서 산사에 가지 않아도 일상에서 명상을 체험할 수 있는 도심 선원의 명상 수행이 활발하다. 서울 한복판에도 여러 선원이 명상 수행을 가르치고 있다. 참불선원은 강남구 대치동의 아파트단지 상가에서 2013년 개원했다. 영국 출신으로 명상을 가르치는 아잔브람 스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세워져 시민과 불자들에게 간화선과 호흡명상 등을 가르친다. 갤러리 못지않게 멋진 인테리어로 소문난 상도선원(동작구 상도로)은 ‘참선을 지향하는 선원’이 목표다. 지난해 티베트 고승 계세 체왕 스님을 초청해 수행법을 배우는 자리를 마련하는 등 명상 수행을 가르치고 있다. 토요일 저녁마다 참선 법회를 열기도 한다. 팔정도수행센터 제따와나선원(서초구 효령로)은 선원 2층에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열반당을 개원하기도 했다. 초보 명상을 비롯해 호흡명상과 걷기명상 등을 가르친다. 좀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시장통에도 선원이 있다. 태고종 법현 스님이 2005년 연 ‘열린선원’은 서울 은평구 역촌중앙시장 건물 2층에 있다. 명상문화아카데미를 정기적으로 연다. 부산 미타선원(중구 광복로)은 2005년부터 명상포교에 힘을 쏟았다. 불자 열 명 중 일곱 명이 참선을 배우고 싶어 한다는 여론조사를 보고 시민선방을 열었고, 2008년부터는 ‘행복 선 수행학교’를 열자 매년 500명의 불자가 입학했다. 이 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2011년에는 명상센터도 열었다. 수면장애를 겪고 있는 노인들을 위한 명상프로그램을 비롯해 부부, 어린이, 청소년 등에게 맞는 여러 프로그램을 연중 운영한다. 해운대의 보리선수 약사선원은 티베트 불교의 보리선 수행을 소개하고 있다. 대한불교 천태종이 지난해 경기 성남시 분당구 대광사에 선(禪) 수행과 명상, 다도 등을 체험할 수 있는 전통명상수련센터를 열기도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물방울 그림으로 유명한 김창열 화백(87)이 28일 오후 줄로 묶은 바이올린을 서울 종로구 삼청로 길바닥에서 질질 끌었다. 이윽고 갤러리현대 건물 안으로 들어간 그는 바이올린을 책상에 내리쳐 단숨에 박살냈다. 비디오아트를 창시한 백남준(1932∼2006)이 1962, 1963년 벌인 퍼포먼스 ‘걸음을 위한 선’ ‘바이올린 독주’를 재연한 것. 김 화백은 백남준이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할 당시부터 그와 가깝게 지냈다. 백남준이 세상을 뜬 지 29일로 10년이다. 갤러리현대는 4월 3일까지 추모 전시 ‘백남준, 서울에서’를 연다. 그의 대표작인 ‘TV로봇 시리즈’를 비롯해 비디오 조각 및 평면 작품 40여 점을 전시한다. 백남준이 1990년 7월 갤러리현대 뒷마당에서 벌인 진혼굿 퍼포먼스 ‘늑대 걸음으로’에서 사용했던 제기(祭器), 옷, 갓, 곰방대, 삽 등 소품들이 26년 만에 영상 기록과 함께 전시돼 주목된다. 그는 우연성을 중시한 플럭서스(Fluxus·전위예술운동)를 함께 전개했던 요제프 보이스를 추모하기 위한 퍼포먼스를 벌였다. 당시 퍼포먼스 영상을 촬영했던 프랑스인 장폴 파르지에 씨도 추모전을 보기 위해 한국에 왔다. 그는 “당시 백 작가가 ‘서울에서 엄청나게 재밌는 굿판을 차릴 테니 빨리 와서 촬영해’라고 팩스를 보내 왔다”며 “백 작가는 내가 강의하는 비디오 아트 장르를 개척한 마스터”라고 회고했다. 백남준의 예술적 스승이자 동지인 존 케이지, 샬럿 무어만을 TV 조형물로 형상화한 두 작품도 전시된다. 권영숙 갤러리현대 실장은 “다른 TV 조각들이 대체로 유머러스한 분위기인데 반해 두 작품은 매우 우아하고 정제돼 있다”며 “백 작가가 생전 가장 아끼던 작품들”이라고 설명했다. ‘잡동사니 벽’은 국내 처음으로 전시되는 작품이다. 1995년 독일 볼프스부르크 미술관에서 연 개인전에 선보였던 것으로 백남준의 작품 세계에서 흔치 않은 현장 설치 작품이다. 그가 즐겨 사용했던 자동차, 불상, 가마, 구형 전자기기 부품 등의 오브제들이 전시장 바닥에 쏟아질 듯 뒤엉켜 있다. 28일 추모전에는 가야금 명인 황병기,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등 백남준의 지인들이 여럿 참석했다. 백남준에 관한 저서 2권을 낸 이용우 히말라야미술관 관장은 “백 작가는 윤명로 화백이 1978년 ‘신동아’에 그에 관한 글을 쓰면서 국내에 처음 소개됐다”며 “당시 백 작가는 전위적인 퍼포먼스로 ‘동양에서 온 테러리스트’로 불렸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우리말이지만 알아듣는 사람이 휴전선 이남에 얼마나 될까. 북한 문화어(표준어)이며 “올케, 누룽지는?”이라는 뜻이다. 남북 언어의 차이는 아직 일부 어휘뿐이지만 분단이 오래 지속되면 의사소통마저 어려워질지 모른다. 남북 학자들이 통일에 대비해 ‘겨레말큰사전’을 함께 편찬하고 있어 다행이다. 여타 남북 학술문화 교류 사업은 어떨까. 남북역사학자협의회의 개성 만월대 공동 발굴을 제외하면 ‘올 스톱’ 상태다. 북한의 4차 핵실험 등에 따른 남북관계 경색 탓이다. 한국고전번역원은 2014년 10월 북한 사회과학원 산하 민족고전연구소에 1656년 유형원이 편찬한 지리지 ‘동국여지지’의 공동 번역을 제안했다. 지역의 정보와 특색을 다루는 책이기에 함경도지와 평안도지 부분은 북한 학자들이 하는 것이 좋겠다는 취지였다. 남북 공동의 유산인 고전 번역 관련 교류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느낌이 좋았다. 간접 접촉을 통해 고전번역원에서 펴낸 조선 선비의 원예서, 고전 속 동물 이야기책을 북측에 전하자 담당자는 “우리 어린이도 읽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긍정적인 답변도 왔고, 학술회의를 함께 열자는 데도 지난해 9월 동의를 받았다. 예산도 마련했다. “물 건너 간 거죠….” 25일 수화기 너머 이명학 한국고전번역원장의 한숨이 깊었다. “‘조만간 열자’는 답까지 왔다가 지금은 연락이 끊어졌어요. 북한 당국이 기존에 하던 문화 교류는 계속하지만 신규 사업은 곤란하다는 것 같더라고요.” ‘개성 한옥 보존 사업’도 마찬가지다. 경기문화재단이 2013년 북측에 이 사업을 제안하자 다음 해 북측도 흔쾌히 응했다. 수차례 논의 끝에 ‘공동 학술토론회를 열고, 조사단을 꾸려 현지 조사를 하고, 가치 있는 한옥의 보수 예산을 뽑아보자’는 구체적인 방안을 합의했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실제 사업 착수는 번번이 미뤄졌다.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로 인한 긴장이 해소됐던 지난해 9월 북측에 다시 연락을 했지만 아직 답을 받지 못했다. ‘5·24 대북 제재 조치 해제까지는 사업이 안 되는 게 아니냐’는 얘기만 전해졌다. 허물어져 벽돌만 남은 안중근 의사 생가(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공동 복원 사업도 북측에 제안만 했을 뿐 진척이 없다. 남북 학술문화 교류를 안보와 연계하는 것은 북한이나 우리 정부나 마찬가지다. 정부는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북측과의 민간 접촉을 전면 불허하고 있다. ‘잠정’이지만 해제될 기약은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22일 “문화 동질성 회복 차원에서 남북 교류는 하되, 북한 주민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대북 제재는 당연하지만 이로 인해 민족 동질성 회복을 위한 교류까지 중단되는 것은 지나치다. 누군가는 “지금이 어떤 시국인데 팔자 좋게 ‘적국’의 한옥이나 고치고, 공동 번역이나 하느냐”고 할 게다. 그러나 ‘팔자 좋은 일’이기 때문에 계속해도 되는 거다. 꾸준히 해야 성과가 나는 일이다. 상대에게 압박도 되지 않는데 가로막을 필요가 뭐가 있는지 남북한 당국자들에게 묻고 싶다. 조종엽 문화부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