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엽

조종엽 차장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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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종엽 차장입니다.

jjj@donga.com

취재분야

2025-11-25~2025-12-25
문학/출판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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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교수 “지속-체계적인 정무기록, 중국에서도 찾기 어려워”

    “중국에서도 승정원일기처럼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무를 기록한 형식의 자료는 찾기 어렵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국편)가 2억4250만 자에 이르는 승정원일기 원문 데이터베이스 구축 완료를 기념해 13일 연 국제학술회의 ‘동아시아 시각에서 본 승정원일기’에서 셰구이안(謝貴安) 중국 우한대 역사학원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국편은 2001년부터 승정원일기의 한자 원문을 디지털로 입력해 왔다. 셰 교수는 이날 발표문에서 “관원이 왕 또는 황제의 언행과 국정 통치를 기록한 일기류의 1차 사료라는 점에서 청대 기거주책(起居註冊) 정도가 승정원일기와 유사하지만 기거주책의 분량은 승정원일기의 절반 이하”라고 말했다. 오토모 가즈오(大友一雄) 일본 국문학연구자료원 교수는 “유럽이 문서의 보존과 관리를 중시한 데 비해 동아시아 국가들은 역사의 편찬(서술)을 중시했다”며 “에도 막부도 장군의 서기관이 기록한 ‘일기(日記)’를 기본적인 정보원으로 ‘도쿠가와 실기’(德川실紀)를 편찬했다”고 말했다. 이근호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는 “승정원일기가 초책(草冊·속기한 노트)에 작성됐다가 전교축(傳敎軸·일기에 등재할 문서를 묶은 문서철)을 거쳐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내용이 어떻게 변했는지에 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승정원일기는 1960년대 ‘탈초(脫草·초서를 정자로 바꿈)’됐고, 1994년부터 한국고전번역원이 우리말로 번역 중이지만 완역에는 40여 년이 더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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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루터의 종교개혁 사상도 ‘좋아요’ 덕분에 확산됐다

    로마 시대 브리타니아에서는 5주, 시리아에서는 7주면 로마의 소식을 알 수 있었다. 키케로와 같은 정치가는 다른 로마 지배층과 마찬가지로 거미줄 같은 연락망을 통해 정보를 입수했다. 이들은 서로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편집하고 유포했다. 로마 공화국의 심장부에서 생산된 편지, 연설, 관보의 발췌문들이 친구와 지인들을 통해 빠르게 공유됐다. 저자는 소셜미디어 시스템을 “사회적 연결망을 통해 정보가 전달돼 분산된 논의나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환경”이라고 정의한다. 이 기준에서는 키케로도 소셜미디어 시스템에 속했던 셈이다. 로마 시대의 파피루스 두루마리나 현대의 페이스북은 모두 쌍방향의 대화형 환경에서 정보가 중앙 통제부에서 수직 하달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를 따라 수평적으로 전달된다. ‘이코노미스트’의 부편집장이며 디지털 부문 책임자인 저자는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의 현대 소셜미디어가 역사 속 수많은 소통의 매개체와 본질적으로 같다고 본다. 활자 인쇄술을 활용해 소셜미디어 활동을 한 대표적 인물로는 마르틴 루터를 꼽는다.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은 소책자로 만들어져 독일과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는데 그 배경에는 중세인들의 공유, 추천, 복제가 있었다. 이는 오늘날 소셜미디어의 ‘좋아요’ ‘리트윗’ ‘담기’ 기능과 비슷하다. 책은 밀도 높은 분석을 했다기보다 소셜미디어의 유사한 특징을 가진 몇 가지 사례들을 역사 속에서 발견하고 소개한 것에 그쳤다. 그러나 소셜미디어가 형태가 달라질 뿐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당연한 만큼 힘이 실린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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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세기 말 한국, 세속 권력이 종교 권위보다 강했다”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조선을 건국하는 태조 이성계(천호진)는 ‘잔트가르’(몽골어로 최강의 사내)라고 불린다. 고려 말 들끓었던 왜구와 홍건적을 소탕한 불패의 무장에 걸맞은 칭호다. 조선이 유학을 숭상한 문치국가였기 때문에 태조의 이미지는 이후의 임금들과는 사뭇 이질적이다. 던 베이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아시아학부 교수는 논문 ‘수사적 제의적 정치적 적법성: 이성계 즉위의 정당화’에서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는 데 이 같은 태조의 이미지가 주요하게 활용됐다고 분석했다. 그는 “태조실록과 용비어천가 등에서 이성계의 이미지는 용맹과 카리스마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군사적 업적과 궁술과 마술(馬術) 등의 능력이 그에게 천명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근거로 많이 사용됐다”고 말했다. 베이커 교수는 조선의 건국 당시 종교의 영향력이 서유럽과는 매우 다르다고 봤다. 14세기 말 서유럽에서 교황은 권위가 약화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강한 세속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반면 조선은 근대 초반의 유럽보다 국가가 종교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베이커 교수는 “한국이 유럽보다 다원적인 종교문화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과 달리 어느 한 종교가 권력에 도전할 만큼 성장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태조는 권력을 신의 대리자로부터 건네받은 유럽의 군주들과 달리 자신의 힘으로 쟁취했다. 베이커 교수는 “태조의 후계자들은 서유럽과 달리 정치와 종교의 경계를 복잡하게 설정할 필요가 없었다”며 “이는 서유럽과 한국의 근대 진입 경로가 다르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베이커 교수의 이 논문은 지난달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코리아저널상’(인문학 분야)을 받았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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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베이커 교수 “조선 건국 정당화엔 태조의 용맹-카리스마 활용돼”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조선을 건국하는 태조 이성계(천호진)는 ‘잔트가르’(몽골어로 최강의 사내)라고 불린다. 고려 말 들끓었던 왜구와 홍건적을 소탕한 불패의 무장에 걸맞은 칭호다. 조선이 유학을 숭상한 문치국가였기 때문에 태조의 이미지는 이후의 임금들과는 사뭇 이질적이다. 던 베이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아시아학부 교수는 논문 ‘수사적 제의적 정치적 적법성: 이성계 즉위의 정당화’에서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는데 이 같은 태조의 이미지가 주요하게 활용됐다고 분석했다. 그는 “태조실록과 용비어천가 등에서 이성계의 이미지는 종교적 정당성이 아니라 용맹과 카리스마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군사적 업적과 궁술과 마술(馬術) 등의 능력이 그에게 천명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근거로 많이 사용됐다”고 말했다. 베이커 교수는 조선의 건국 당시 종교의 영향력이 서유럽과는 매우 다르다고 봤다. 14세기말 서유럽에서 교황은 권위가 약화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강한 세속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반면 조선은 근대 초반의 유럽보다 국가가 종교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베이커 교수는 “한국의 유럽보다 다원적인 종교문화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과 달리 어느 한 종교가 권력에 도전할 만큼 성장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태조는 권력을 신의 대리자로부터 건네받은 유럽의 군주들과 달리 자신의 힘으로 쟁취했다. 베이커 교수는 “태조의 후계자들은 서유럽과 달리 정치와 종교의 경계를 복잡하게 설정할 필요가 없었다”며 “이는 서유럽과 한국의 근대 진입 경로가 다르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조선 건국 단계에서 유학은 새 왕조에 정당성을 부여할 만큼 보편적인 사상이 아니었다. 베이커 교수는 “이에 따라 태조의 즉위를 정당화하는데 불교와 도교의 의례가 보강됐다”며 “성리학이 왕실 의례에서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베이커 교수의 이 논문은 지난달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코리아저널상’(인문학 분야)을 받았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1961년부터 한국학 국제 영문 학술지 코리아저널을 내고 있으며 지난해 우수한 논문을 시상하는 ‘코리아저널상’을 제정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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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어렵고 복잡한 양자의 세계… 그 속에 다채로운 과학이…

    세상에 수소 말고도 다양한 원소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원자핵 내에서 시멘트처럼 양성자들을 붙잡는 중성자 덕이다. 양성자들끼리는 전기적 반발력 탓에 원자핵을 형성할 수 없다. 전자들이 같은 상태일 수 없다는 ‘파울리의 배타 원리’가 있기에 다른 원자와 쉽게 교환될 수 있는 외각 전자가 생겨난다. 생명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놀라운 다채로움이 여기서 비롯됐다. 이 책은 현대 양자물리학의 핵심을 질문과 답변으로 요약했다. 양자물리학에 관한 뉴스가 어려운 것처럼 이 책도 자주 난해하다. “6개의 향기를 가진 6개의 쿼크는 3가지 경입자 세대와 마찬가지로 3가지 세대로 구분된다.…쿼크는 향기 이외에 색깔이라는 또 다른 양자적 성질을 갖고 있다.” 사실 양자(덩어리)에 대한 설명은 쉽게 하려야 할 수가 없는 것일 테다. 그것은 매끄럽고 연속적으로 보이는 거시 세계의 작동 원리와 너무나 다르다. 반도체 연구자가 아닌 다음에야 책을 읽어도 실생활에서도 써먹을 만한 데도 거의 없다. 물론 “맞닿은 너와 나의 손 사이에는 이 순간에도 수많은 입자가 명멸하고 있다”는 식으로, 연애할 때 ‘뻐꾸기를 날릴’ 수는 있겠다. 이 주제가 순수한 앎의 즐거움을 목적으로 한 독서의 ‘끝판왕’ 격이라는 데 동의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미국물리학협회 회장을 지낸 저자는 양자에 관해 “정말 동일하고, 비교적 적은 수의 성질에 의해서 완전하게 설명되는 대상을 찾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그 궁극적인 지식을 ‘바닥’이라고 표현한다. 이해가 어려운 부분을 건너뛰고 물리학자들의 위트에 가끔 웃음 짓다 보면 세계의 바닥에 닿으려는 그들의 탐구에 대한 경외가 남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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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 을미사변 직후 러에 궁궐수비 요청

    1895년 을미사변 직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에 궁궐 수비병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내용을 담은 러시아 자료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31일 서울대에서 열리는 전국역사학대회에서 발표할 예정인 논문 ‘주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 자료로 본 한러 관계와 을미사변’에서 1903년 카를 베베르 러시아 특명전권공사가 본국에 보고한 ‘1898년 전후 한국에 대한 보고서’를 분석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1895년 11월 19일 주한 러시아 공사였던 베베르는 러시아에 전문을 보내 고종이 궁궐 수비병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린다. 고종은 베베르에게 지원 요청이 담긴 친필 서신을 내렸다. 당시는 일본이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친일 내각을 구성한 직후로 고종도 신변을 위협받던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김 연구위원에 따르면 베베르는 조선주재 외교단 회의가 열린 1895년 10월 25일 고무라 일본공사의 면전에서 “내가 병력 50명을 이끌고 군부대신 조희연을 체포한 뒤 (일본군의 뒷받침을 받는) 훈련대의 무장을 해체하겠다”고 협박했다. 베베르는 이틀 뒤인 27일 러시아 외무부에서 ‘귀관의 판단 아래 음모자들의 위협으로부터 고종을 보호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승인한다’는 허가를 받았다. 이 자료에 따르면 고종의 처지는 말이 아니었다. 베베르 공사의 1903년 보고서는 아관파천 당시 ‘일본 보초가 궁궐에서도 국왕(고종)을 포로처럼 감시했다’고 전한다. 김 연구위원은 고종의 궁궐 수비병 지원 요청에 대해 “고종이 신변 불안을 러시아의 군사 지원을 통해 타개하려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가 바로 궁궐 수비병을 파견하지는 않았지만 이는 이듬해 2월 고종이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으로 이어진다. 베베르 보고서에는 아관파천 초기 민심을 알 수 있는 부분도 나온다. 보고서는 ‘아관파천 아침 대격변이 일어났다. 수많은 고관대작과 수천 명의 한국인이 러시아 공사관 구역 안으로 밀려들어왔다’고 전했다. 또 러시아 공사관이 있던 정동 길은 ‘군주에게 축하를 드리고자 찾아온 환호하는 백성, 군대, 경찰로 가득 찼다. 이것은 백성의 축제였다’고 묘사했다. 당황한 일본은 성난 군중으로부터 일본인들을 방어하기 위해 주둔군을 서울 남쪽으로 물렸다. 을미의병이 일어나던 당시 민중들의 반일 감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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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강점기 초반 정치적 불안 해소 위해 양반-상류층 자제를 부랑자로 잡아들여”

    “(경성·현재 서울) 남부경찰서장은 관내에 부랑자들을 불러 시대의 형편과 생활상 요지를 알아듣도록 훈유하며…부랑자 삼십여 명을 잡았다는데 전일에 소위 양반이라고 이름 하던 자로 지금은 모두 직업이 없이 부정한 행위가 적지 않은 중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1914년 11월 20일자 기사 ‘남부에도 부랑 취체(取締)’ 중 일부다. 요즘의 노숙인과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부랑자’에 양반이 포함돼 있어 눈길을 끈다. 예지숙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는 최근 발간된 사회사학회 학술지 ‘사회와 역사’ 가을호에 실은 논문 ‘일제시기 조선에서 부랑자의 출현과 행정당국의 대책’에서 “일제는 강점 초기 정치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양반과 상류층 자제를 부랑자로 잡아들였다”고 말했다. 구한말 양반은 항일 의병의 구심이었고, 1910년 강제병합 이후에도 향촌에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예 박사는 “1910년대 일제는 조선의 길거리나 공원이 아니라 기생집, 연극장, 여관 등 유흥가에서 부랑자를 단속해 무뢰배와 걸인뿐 아니라 옛 대한제국의 관료, 양반 청년 유생들을 붙잡았다”며 “일제는 총독정치에 비판적인 양반들을 압박하기 위한 차원에서 부랑자 단속을 활용했다”고 말했다. 일제의 부랑자 단속 근거는 1912년 발포된 ‘일정한 거주 또는 생업 없이 제방(諸方)을 배회하는 자’를 처벌한다는 경찰범 처벌규칙이었다. 당시 매일신보 지면에는 부랑자로 붙잡힌 이들이 유치장에서 노동교화를 받는 장면 등이 묘사됐다. 1927년경부터는 이농 현상이 본격화돼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는 농민들이 부랑자로 전락한다. 사회와 역사 가을호는 이 논문을 포함해 ‘식민지 조선의 사회적 배제와 소수자’ 특집을 실었다. 이종민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전문연구원은 ‘가벼운 범죄·무거운 처벌―1910년대의 즉결처분 대상을 중심으로’에서 “식민화 이후 원래 범죄와 비(非)범죄의 경계선에 있던 행위들이 대거 ‘경범죄’ 목록에 올라 처벌 대상이 됐고, 붙잡힌 이들은 방어권도 없었다”며 “3·1운동으로 태형이 폐지되기 전에는 태형을 받고 사망하거나 부상한 사람이 속출했다”고 말했다. 소현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는 ‘식민지 시기 불량소년 담론의 형성’에서 “일제는 경찰과 법으로 일상을 통제하면서 부랑, 구걸, 미성년 음주 등 광범위한 행위를 불량행위로 규정하고 ‘불량소년’을 단속했다”며 “그러나 감화원과 소년형무소에 수감됐던 소년들은 대부분 빈궁한 부랑아나 고아들이었다”고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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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고정관념을 버리는 순간, 진짜 삶이 시작된다

    노인에게 가장 후회하는 일을 물었더니 “좀 더 모험을 할걸” “쓸데없이 걱정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것” 등의 답이 많았다는 설문조사가 입길에 오르내린다. 우리는 무엇에 그렇게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라깡, 바디우, 일상의 윤리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서 저자는 그것이 ‘고정관념’이라고 말한다. 고정관념은 세계를 지배하는 지식의 체계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말한, 우리가 내면화한 타자(언어적 권력)의 욕망이다. 그것은 그럴싸한 삶의 논리로 포장된다. 김경주 시인 식으로 말한다면 “기껏해야 생은 자기 피를 어슬렁거리는 것”(‘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이 돼 버린다. 저자는 여러 소설과 명화를 통해 자크 라캉과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철학을 소개하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한다. 코넌 도일의 ‘셜록 홈스’에서는 도일과 도일이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홈스 모두가 타자의 시선에 갇혀 있다고 해석하며 주체의 소멸을 발견한다. 폴 오스터의 ‘유리의 도시’에서는 잘못 걸려온 전화를 기다리는 주인공을 통해 기존 질서가 비틀리는 순간 진리에 매혹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는 것을 부각시킨다. ‘설국열차’에서 뛰어내려 삶과 죽음이 명멸하는 설원으로 나아가는 일, 모피어스가 건넨 빨간 약을 먹고 ‘매트릭스’에서 탈출해 ‘실재의 세계’로 나아가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저자는 자신의 최종적인 환상, 나아가 ‘무(無)’와 대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길은 고독이다. 허무주의자만이 고정관념을 소멸시키고 사건에 접근할 특권을 갖는다. 책 전면 표지에는 발톱이 달리고 털이 숭숭 난 늑대(?)의 앞발 그림이 실렸다. “아버지는 인간 곁에 가기 위해 발이 두 개나 잘려나갔다”(김경주,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고독에는 용기가 필요하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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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로사학자 22명 국정화반대 성명

    전 국사편찬위원장인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를 비롯한 원로 사학자 22명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이들은 21일 서울 종로구 흥사단 강당에서 “국정 교과서는 한 가지 역사 해석을 획일적으로 주입하기 위한 것으로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며 “대통령이 나서서 국정화를 철회하라”고 주장했다. 이 성명에는 강만길 전 상지대 총장과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김정기 전 제주교육대 총장, 안병욱 가톨릭대 명예교수, 권태억 전 서울대 교수, 서중석 전 성균관대 교수 등이 참여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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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古下는 한국 자유민주주의 뿌리… 그의 좌우협력 정신 절실”

    《 ‘…경제적으로 근로 대중의 복리를 증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자본을 요하고 독점성을 띠운 중요 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해야만 할 것이오. 토지 정책도…일본인 소유 토지를 몰수해 농민에게 경작권을 나눠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조선인 소유 투지도 소유를 극도로 제한하는 동시에 매매겸병(賣買兼倂)을 금하여 경작권의 전국적 시설을 촉진하여….’ 》광복 뒤 발표된 이 정견은 언뜻 보면 ‘좌파’의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3·1운동을 계획했다가 옥고를 치렀고 동아일보 3, 6, 8대 사장을 지낸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1890∼1945) 선생이 1945년 12월 21일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자격으로 발표한 정견이다. 광복 뒤 좌우 협력을 통한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추진하다 1945년 12월 극우 청년들에게 암살된 고하의 서거 70주기를 맞아 추모 학술 세미나가 열린다. ‘고하 송진우 선생 기념사업회’(이사장 김창식)는 동아일보와 국가보훈처, 광복회 후원으로 20일 오후 1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고하 송진우 선생의 항일독립운동과 건국에 관한 이념과 사상’을 연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발제문에서 고하의 유연한 정치사상과 현실적인 노선에 주목했다. 강 교수는 “고하는 공산주의를 분명히 거부하면서도 정치, 경제적으로 특정 계급이나 개인에 힘이 집중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보고, 경제적으로 온건한 입장의 좌파들과도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며 “그가 암살되지만 않았다면 이후 한국 정치에서 좌우 극단주의 세력이 득세하는 이념의 양극화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 교수는 “이상주의에 지배됐던 일부 민족주의자와 달리 고하는 현실 감각을 갖추고 현실 권력이었던 미군정과 대화를 지속했다”고 평가했다. 박명림 연세대 지역학협동과정 교수는 “고하와 동아일보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가 기초를 세운 초기 자유주의는 건국 이후 한국의 가장 강력한 자유 민주주의 담론과 세력으로 자리 잡았고, 급진 공산주의와 우파 독재에 대한 가장 체계적인 대안이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자유권의 병적 발전, 곧 불합리 무절제한 자본주의를 저주할 뿐이다. …자유권은 정치적 생존권이며, 생존권은 경제적 자유권이다. …자유권이 없는 곳에 개성이 확충될 수 없으며, 생존권이 없는 곳에 평등적 문화를 완성할 수 없다.’ 고하가 1925년 동아일보에 게재한 논설 ‘자유권과 생존권’ 중 일부다. 이처럼 좌우를 포괄하는 고하의 사상은 일제강점기부터 일관된 것이었다. 윤덕영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일본 유학을 통해 영국의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고하는 자유경쟁의 불공평을 지적하고 민족운동을 수정해 사회운동을 내부로 포괄하려 했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고하는 합법적 민족 정치단체 건설 논의의 주도자 중 한 명이었지만 타협적 자치를 주장하는 친일 정치세력과는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그는 1924년 동아일보를 통해 친일 정치세력이 결성한 ‘각파유지연맹’을 비판했다 가 인촌 선생과 함께 친일파 박춘금 등으로부터 폭행을 당하고 권총으로 위협받는 이른바 ‘식도원 육혈포 협박사건’을 겪기도 했다. 이철순 부산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고하는 자치제를 관철해 대중의 정치적 자각과 민족주의 세력의 정치적 결집을 이루고 이를 통해 조선 독립을 쟁취해 나가려 했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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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중환의 ‘택리지’는 구비문학과 스토리텔링의 보고”

    《 “호수는 옛날 어느 부자가 살던 곳이라 했다. 하루는 탁발승이 쌀을 구걸하러 왔는데 부자가 똥을 퍼 주었더니 살던 곳이 갑자기 푹 꺼져서 호수가 되었고, 쌓아 둔 곡식은 모두 자그마한 조개로 변했다. 흉년이 들면 조개가 많이 나고, 풍년이 들면 적게 났다. 조개 맛이 달고 향긋해 요깃거리가 되므로 이 지역 사람들은 적곡합(積穀蛤)이라 한다. 봄·여름이면 사방 먼 데서부터 남자는 등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서 조개를 주우려고 사람들이 길에 줄지어 있다. 호수 밑바닥에는 아직도 기와 조각과 그릇 따위가 있어서 자맥질하는 이들이 가끔 줍는다.” 》 이 얘기는 강원 강릉시 경포호에 얽힌 전설로 조선 후기 이중환(1690∼1752)이 쓴 택리지(擇里志)에 나온다. 인색한 부자가 스님에게 똥을 시주했다가 벌을 받아 집이 연못이 됐다는 ‘장자못’ 전설은 전국 곳곳의 호수에도 전해 내려오지만 이 전설은 조개와 관련된 점이 특별하다. 1751년 저술된 최초의 인문지리서 택리지의 문학적 성격에 주목한 논문이 처음 나왔다. 16일 서울 성균관대에서 경기도 실학박물관과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이 공동 주최한 심포지엄 ‘사람과 땅, 택리지가 그리는 인문지리’에서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각 지역의 전설과 설화를 적극 기록한 택리지는 구비문학과 스토리텔링의 보고(寶庫)”라고 말했다. 안 교수의 발표문 ‘택리지의 구전 지식 반영과 지역전설 서술’에 따르면 택리지에 줄거리가 조리 있고 분량이 일정 수준 이상인 전설은 약 40개다. 개중에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얘기도 적지 않다. “강경에 채운산 한 개 봉우리가 들판 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봉우리 위에는 정기를 길러주는 영천(靈泉)이 있어서 백제 때 의자왕이 연회를 베풀며 놀던 곳이라 전해 온다.” 충남 논산시 강경읍 채운산에 관한 서술이다. 백마강 주변 명승들에 의자왕이 연회를 열었다고 전해지는 곳이 꽤 많지만 지금 채운산에는 관련 전설이 없다. 그는 “이 지역에는 우물이 없어 땅에 독을 묻어 빗물을 침전시켰다가 마시는데, 물맛이 좋고 병이 낫는다”는 얘기도 실었다. 안 교수는 “이중환이 강경에 상당 기간 머물렀던 적이 있다”며 “택리지에는 이중환이 현지에서 직접 채록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택리지에 은둔자에 관한 전설이 많다는 것도 주목된다. 그중에서도 통일신라 말기 학자 최치원과 관련된 얘기가 여섯 군데나 나온다. 택리지는 경남 남해군을 설명하며 “섬 안에는 금산(錦山)이 있고, 그 골짜기는 바로 최고운(孤雲은 최치원의 자)이 노닐던 곳이며, 고운이 쓴 큰 글씨가 아직도 석벽에 남아 있다”고 적었다. 안 교수는 “최치원은 정치·경제적 지위를 상실한 사대부가 서울을 벗어나 살 만한 곳(士大夫可居處)을 찾을 때 참고한 가장 오래되고 전형적인 모델”이라며 “남인 간관(諫官)으로 투옥을 거듭하다 평생 금고(禁錮·벼슬에 나아가지 못하는 벌) 된 이중환 자신의 처지도 택리지 서술에 투영됐다”고 말했다. 최근 산책로로 사랑받는 서울 성곽에 얽힌 얘기도 흥미롭다. 택리지에는 “외성을 쌓으려고 했으나 둘레를 미처 못 정했다. 어느 밤 큰눈이 내렸는데 바깥쪽은 눈이 쌓이고 안쪽은 녹았다. 태조가 기이하게 여겨 눈을 따라 성터를 정하도록 명했다”고 나온다. 안 교수는 “이중환은 신이성(神異性)과 허구성을 경계하는 사대부 의식, 유가적 합리성에서 벗어나 사라질 뻔한 이야기들을 적극적으로 채록한 구비문학의 기여자”라고 강조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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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 6세기엔 요서 동부 대릉하까지 진출”

    고구려의 강역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더 넓었다는 사료 연구 결과가 나왔다. 고구려발해학회(회장 공석구 한밭대 교수)가 ‘고구려와 발해의 경계’를 주제로 16일 동북아역사재단(서울 서대문구 통일로)에서 연 국제학술회의에서 이성제 동북아역사재단 박사는 “고구려는 520년대부터 611년까지 요서 동부지역을 석권해 북위(北魏) 동위(東魏) 등 북조(北朝) 국가와 요서를 분점했다”고 주장했다. 기존 정설은 고구려가 5세기 초 요동을 차지한 이래 요하 서쪽으로의 진출을 자제했다는 것이다. 요서는 대릉하 하류와 의무려산을 기준으로 다시 동서로 나눌 수 있다. 이 박사는 ‘고구려와 북조의 경계’라는 발표문에서 “고구려는 북위에 내란이 발생한 틈을 타 요서 동부에 진출했다”라고 말했다. 수나라 사람인 한기(韓기)의 묘지(墓誌)에는 북위 내란 중에 한상(韓詳)이라는 인물이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요동으로 끌려갔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비슷한 시기 강과(江果)라는 인물이 영주(營州·현재의 차오양 시) 서쪽의 안주성민(安州城民)을 이끌고 고구려로 들어왔다는 기록도 있다. 이 박사는 “이는 고구려가 대릉하 하류까지 진출했고, 영주 일대까지 영토로 삼을 기회가 있었지만 더 이상의 세력 확대를 자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고구려가 요서 동부를 잃은 것은 수 양제의 침공 직전이다. 수서(隋書)에는 611년 수의 장수 이경(李景)이 “고구려 무려성을 공격해 깨뜨렸다(攻高麗武(려,여)城破之)”는 기록이 나온다. 이 박사는 “무려성은 현재 베이전(北鎭) 시 남쪽 다량자춘(大亮甲村)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며 “이 역시 고구려의 서쪽 경계가 요하가 아니라 서쪽으로 한참 나아가 의무려산 동쪽 기슭까지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반론도 나왔다. 이노우에 나오키 교토부립대 교수는 “수나라 장수 이경의 무려성 공격에 관한 기록이 적은 것, 고구려가 수 양제의 침공을 요하에서 막으려고 한 것은 당시 요하 서쪽 지역은 고구려 영토라는 인식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정호섭 한성대 교수도 “요서 동부는 일종의 완충지대와 같은 곳이어서 고구려가 일시적으로 군사적 교두보를 뒀다고 해서 고구려의 영토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말갈 유적 발굴 성과를 재검토한 결과 전성기 발해의 영역이 아무르 강 너머까지 이르렀다는 정석배 한국전통문화대 교수의 발표도 나왔다. 공석구 교수는 “고구려 발해의 영역에 관해 기존의 연구 결과보다 사료를 적극적으로 해석한 학설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첫 학술대회”라고 평가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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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교과서 국정화]반으로 쪼개진 여론… 보혁 이념공방으로 확산

    12일 정부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방침을 발표한 이후 일주일이 지나도록 대한민국은 역사전쟁을 치르고 있다. 정부와 일부 보수층이 국정화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가운데 대다수 역사학계 교수들과 진보 성향 단체 등에서는 국정화 자체를 부정하고 나섰다. 여기에 국정화 논쟁이 정치권으로까지 번져 갑론을박하고 있는 상황이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전국 주요 대학 역사학 전공 교수들은 국정화 반대 성명은 물론이고 정부의 역사 교과서 집필 과정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또 한국근현대사학회와 한국역사연구회 등 역사 연구단체들도 잇따라 집필 거부를 선언하고 나섰다. 여기에 서울대 고려대 교원대 등 각 대학 총학생회와 역사학과 학생들도 대자보 등을 통해 국정화에 반대하고 나섰다. 반면 나승일 서울대 교수(전 교육부 차관) 등 102명으로 구성된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지지하는 교수 모임’은 16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국정화 방침에 찬성하는 기자회견을 가지며 대립각을 세웠다. 역사학계, 교수 사회를 중심으로 시작된 대립은 지난 주말을 지나면서 시민사회로 확대됐다. 17일 시민단체인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는 서울 종로구 세종로공원에서 중고교생과 대학생 등 8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정화 반대 집회를 가졌다. 13일 서울 여의도에서는 대한민국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서명운동을 벌이던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에게 욕설을 하며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정치권도 역사전쟁에서 비켜가지 않았다. 특히 내년 총선을 앞두고 이 문제가 이념 투쟁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는 데는 정치권이 한몫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새누리당은 ‘김일성 주체사상을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다’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내걸었고, 야당은 “그게 사실이라면 (그런 교과서를 통과시킨)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18일 새정치연합 문 대표는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친일 교과서 반대 강남·서초 엄마들과의 대화’ 행사를 가졌고,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이른바 ‘올바른 교과서’ 홍보 동영상을 촬영하는 등 각각 여론전에 나섰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상당 기간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정부가 내달 5일 국정화 확정고시를 하고, 집필진 구성이 이뤄지면 집필진 성향과 집필 기준 전망을 둘러싼 공방은 더욱 가열될 수밖에 없다. 매년 열리는 역사학계 최대 행사인 전국역사학대회에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과 관련해 교과서 집필 기준을 논의할 예정이다. 30, 31일 서울대에서 열리는 이번 대회는 ‘역사학과 역사교육의 소통’을 큰 주제로 ‘한국사 교육의 현재와 미래’를 다룬다. ‘한국사 교과서 집필 기준과 근현대사 서술’을 발제할 예정인 장규식 중앙대 교수는 “정치적, 사회적 변화에 따른 근현대사 교과서 집필 기준의 변화를 살펴 이번 교과서 국정화 시도가 역사 발전에 퇴행하는 것임을 조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토론자로 나설 김태웅 서울대 교수는 “현행 집필 기준은 충분히 세밀하게 돼 있는 만큼 더 자세한 집필 기준은 필요하지 않다”며 “다만 정치논리에서 벗어나 기존 집필 기준을 보완, 개선, 안정화해야 할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임현석 lhs@donga.com·이재명·조종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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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필거부 줄잇는 학계, 좌우로 갈려 4년간 토론 한번 안해

    《 정부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강행에 대학교수 등 역사학자들의 집필 불참 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역사학자 500여 명을 회원으로 둔 한국근현대사학회도 15일 국정 교과서 집필 불참을 결의했다. 하지만 국정 교과서에 대한 찬반을 떠나 역사학계가 학술 논쟁을 적극적으로 벌여 근현대사에서 합의된 영역을 넓혀가기보다 의견이 다른 측에 대해 무시로 일관하는 데 그쳤다는 비판도 나온다. 또 정부가 ‘좌편향’이라며 바로잡아야 한다고 지적한 현행 교과서를 검정한 것 역시 현 정부라는 점에서 부실 검증에 대한 비판과 함께 제 할 일을 못했다는 지적도 일고 있다. 》○ 자기 세계에 갇힌 역사학계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편향 논란이 번진 데에는 진보-보수 역사학자들 사이에 제대로 된 논쟁이나 대화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현재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역사학계는 여러 시대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대규모 학회를 비롯해 지역 학회까지 수십 개가 있다. 이 중 한국역사연구회, 역사문제연구소, 역사학연구소 등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전후해 설립된 학회 및 연구단체는 진보 성향으로 분류된다. 반면에 뚜렷한 보수 성향의 역사학회는 2011년 만들어진 한국현대사학회 하나뿐이다. ‘우파 역사학회’를 표방한 한국현대사학회는 기존 역사학계가 민족·민중사관에 갇혀 있어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화를 강조하는 ‘건국사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성향이 다른 양측 역사학자들이 만나 한자리에서 토론한 것은 2011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당시 교육부가 역사 교육 과정에 ‘자유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삽입하자 학회 단위는 아니지만 진보 측의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와 한국현대사학회가 공동 토론회를 개최했다. ‘보수와 진보가 보는 민주주의-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이론, 헌법, 역사’를 주제로 4·19혁명기념도서관 강당에서 양측의 학자들이 발제를 했는데 300명이 넘는 청중이 몰리는 등 큰 관심이 쏠렸다. 한국근현대사학회 회장인 박걸순 충북대 교수는 “대한민국을 긍정적으로 보자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며 “그러나 그분들(우파 역사학자) 주장은 사실에서 너무 벗어나 있어 함께 논쟁할 학술적 가치를 못 느낀다”고 말했다. 반면 한국현대사학회장을 지낸 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2011년 같은 토론회가 많아야 하는데 기존 역사학계는 자신들과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연구자들을 학술대회 등에 부르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현대사학회 역시 학술대회에 진보 진영 학자를 초청한 적이 없다. 본격적인 논쟁이 활성화되기에는 우파적 입장을 가진 연구진의 수가 적고 연구 성과가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럴수록 자주 만나 토론해 근현대사에서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진보적 역사학자 사이에서도 정부가 ‘좌편향’이라고 지적한 한국사 교과서의 일부 대목에 민주화 운동이 벌어지던 1980년대 인식이 관성적으로 반영됐다는 의견이 있다. 한 연구자는 광복 이후 미국을 점령군, 소련을 해방군이라는 뉘앙스로 대비해 보여주는 교과서를 사례로 들며 “국정화는 반대하지만 최근의 새로운 연구 성과를 반영하고 시야를 세계사적 맥락으로 넓힌 서술이 교과서에 보완돼야 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 ‘부실 검정’ 교육부-국사편찬위 ▼최근 벌어지고 있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결국 교육부와 국사편찬위원회(국편)의 부실 검정이다. 교육부와 국편이 현재 고교에서 쓰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에 대해 2013년 검정을 실시하면서 오류와 편향을 바로잡지 못해 문제가 촉발됐기 때문이다. 교육부는 지난해 1월 약 1년간의 검정 과정을 거쳐 한국사 교과서 8종의 수정 및 보완 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교육부는 “수정 보완한 사항은 모두 2250건이며 맞춤법 등의 단순한 오류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체성, 6·25전쟁, 일제강점기 미화, 북한 문제 등의 서술도 수정했다”고 밝혔다. 이 검정 결과에 대해 교육부는 “우리 학생들의 올바른 역사인식 형성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자화자찬했다. 이후 1월 10일부터 발행사별로 인쇄에 들어갔고 학생들에게 배포됐다. 하지만 약 1년 9개월이 지난 지금 정부와 새누리당, 그리고 당시 검정을 진행한 교육부조차 이때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들이 “지나치게 좌편향이며 주체사상을 여과 없이 학생들에게 가르친다”고 자가당착적 비판을 하고 있다. 스스로 “올바른 역사관 형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자화자찬했던 내용이 지금에 와서는 좌편향 교과서가 된 셈이기 때문이다. 사실 교육부와 국편의 부실 검정 문제는 2013년부터 제기됐다. 국편 검정심의위원 구성이 다양하지 못하고, 과거보다 위원 수도 줄어 부실 검정이 우려된다는 것. 또 전문 분야 전공자는 물론이고 검정 시간이 부족한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 새정치민주연합 유기홍 의원실이 2013년 11월 교육부와 국편에서 제출받아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13년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검정심의위원은 위원장 1명, 연구위원 8명, 검정위원 6명으로 총 15명이었다. 이 중 과거에 고교 한국사 교과서 검정 경험이 있던 사람은 1명뿐이었다. 위원 수도 문제다. 2012년 진행된 중학교 역사 교과서 검정심의 위원이 총 32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훨씬 민감하고 예민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검정위원은 중학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것.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객관적 사실 오류와 이념편향 서술을 제대로 잡아낼 리 없다. 학부모와 시민단체로부터 외부 인사를 추천받아 검정심의위원으로 위촉할 수 있는 제도도 있었지만 국편은 이를 전혀 활용하지 않았다. 이런 부실 검정 우려가 꾸준히 불거지던 와중에도 2013년 9월 서남수 당시 교육부 장관은 기자회견에서 “국사편찬위원회는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며 “소홀한 부분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그 문제는 그때 가서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2년 전 교육부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검정체계 전반을 전면적으로 개선했으면 지금의 ‘국정화 폭풍’은 막을 수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 2015-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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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교과서 국정화]진보-보수학자가 본 국정화

    《 정부가 2017년부터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는 방침을 확정했지만, 이를 둘러싼 현장의 찬반 격론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국정화에 반대하는 이들은 정부가 불필요한 이념몰이를 통해 시대에 역행하는 반민주적 결정을 내렸다고 비판한다. 반면 국정화 찬성론자들은 검정 역사교과서의 오류를 바로잡고 국가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하려면 국정 교과서가 필요하다고 반박한다. 역사학을 전공한 진보와 보수 진영 두 학자로부터 현재 상황에 대한 평가와 전망을 들어봤다.》 “국정화는 역사학과 역사교육을 정치의 도구, 권력의 시녀로 만드는 것에 불과합니다.” 최근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역사·역사교육 연구자 성명’을 이끈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55·한국역사연구회 회장·사진)는 13일 이렇게 말했다. 정 교수는 서울대 자신의 연구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역사교육에 관한 유엔 인권이사회 보고서 기준에서 봐도 국정 교과서는 반인권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유엔 보고서는 국가가 단일한 교과서 사용을 강제하면 교육받을 권리, 문화적 권리, 알 권리와 학문의 자유가 침해된다고 명기하고 있다”며 “국정화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해석과 비판적 사고를 가르쳐야 할 역사교육의 본령에도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또 “현행 검정 교과서도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 최근의 경제적 문화적 성취에 대해 충분히 자긍심을 갖도록 서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현행 검정 교과서가 이념적으로 좌편향돼 있다는 정부 여당의 주장에 대해 “맥락을 제거한 채 일부 표현만 문제 삼는 것은 억지”라며 “더구나 현 정권이 검정한 교과서들”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학자들이 친일을 친일로, 독재를 독재로 쓰는 것은 그것이 객관적 연구 성과이기 때문”이라며 “편향된 것은 오히려 국정화를 추진하는 세력”이라고 말했다. 그는 “언제부터 우리가 정권이 역사에 대한 정파적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 역사학계 전부를 좌파로 매도하는 비상식적인 사회가 됐느냐”고 덧붙였다. 학계의 절대다수가 국정화에 반대하고 있어 집필진 구성이 어려울 것이란 전망에 대해 정 교수는 “역사교육의 발전과 무관하게 정치적 의도로 추진되는 국정 교과서의 집필에는 평소 정치 성향과 관계없이 역량 있는 집필진이 참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국정 교과서 편찬을 국사편찬위원회가 맡게 된 것에 대해선 “교과서 편찬은 정부로부터 독립된 기구에서 이뤄져야 한다”며 “국편은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않아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그는 “검인정 시행 뒤 경쟁을 통해 교과서에 창의적 편집이 도입되는 등 발전이 있었는데 국정 체제는 근본적으로 경쟁이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정 교수는 “거의 모든 대학에서 국정화 반대 의견이 나오고 있다”며 “끝내 국정 교과서가 만들어진다면 역사학계는 대안 교과서를 포함한 대안적 역사 교재를 개발해 교육 현장에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사학계 자정능력 잃어… 現시점선 불가피한 선택” ▼보수진영 강규형 명지대 교수“국정 교과서가 최선은 아니지만, 국사학계가 자정 능력을 잃은 현시점에선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봅니다.” 강규형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51·사진)는 “현 한국사교과서가 검정제 취지와는 달리 다양성을 담아 내지 못했고 획일적으로 쓰여졌다”며 “기존 검정제에 문제가 많았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기존 한국사교과서가 반사회적 정체성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재 대부분의 검정제 한국사교과서를 보면 대한민국이 바른 사회가 아니라는 인식으로 서술됐다”며 “교과서만 보면 대한민국이 왜 발전했는지 알 수 없고, 오히려 망했어야 하는 국가라는 생각까지 든다”라고 말했다. 또 최근 한국사교과서도 1970, 80년대 국사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식민지 반봉건사회론’ 기조로 서술되면서, 다른 의견이 흡수될 여지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강 교수는 검정제 교과서의 이념 편향 사례로, 일부 고교 한국사교과서에서 광복 이후 북한의 토지 분배 방식을 긍정적으로 표현한 점을 꼽았다. 북한의 주체사상을 다루면서 실패한 사상이라는 가치판단을 앞세우지 않고,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국사학계가 군사 정권 시절의 투쟁적 역사관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로 인해 오늘날 한국 사회를 꿰뚫는 새로운 역사관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 강 교수는 “근현대사의 쟁점이 되는 부분에 대한 서술을 경직된 국사학계에만 맡겨 놓을 수 없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는 국정화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국정 교과서 논란 속에 집필진 구성이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에 대해 “집필진 구성을 다양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쟁점이 되는 근현대사를 정치학, 사회학, 국문학 등 다양한 학문의 관점으로 시각을 넓혀 바라보면서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한시적으로나마 국정제를 통해 컨센서스를 이뤄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립한 이후에 다양성을 논의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국정 교과서가 정권이 원하는 내용으로 채워질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선 “친정권, 반정권을 떠나 우리가 어떻게 국력 성장을 이룰 수 있었는지 ‘대한민국 정체성’이라는 키워드로 접근해 집필 기준을 마련하면 큰 논란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임현석 기자 lhs@donga.com}

    • 201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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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내와 자식들 가슴에 묻은 ‘장수 王’

    최근 관객 600만 명을 넘어선 영화 ‘사도’를 비롯한 대중문화 속에서 조선 영조(1694∼1776)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하는 모습이 주로 부각된다. 내면의 갈등이 묘사돼도 그는 비정한 아버지다. 그러나 영조는 아내와 자식을 비롯해 가족의 죽음을 가장 많이 지켜봐야 했던 비운의 왕이었다. 정비(正妃) 2명 중 1명, 후궁 4명 중 2명이 영조보다 먼저 사망했다. 모두 14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생전에 아들 2명을 모두 잃었고, 12명의 딸 중 9명을 앞세웠다. 이는 영조가 82세까지 조선 왕 중 가장 오래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꼭 태어난 순서대로 떠나는 것이 아닌 게 세상의 이치라지만 육친을 잃은 슬픔을 그는 어떻게 달랬을까. 영조가 죽은 이들을 기리기 위해 손수 지은,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이배용) 소장의 제문과 묘지문(墓誌文)을 살펴봤다. “아침에는 나를 대하여 말하더니 저녁에는 깊이 숨어서는 말을 않으니, 그날 광경의 비참하고 처절함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따뜻한 말과 낭랑한 음성을 어느 날에 다시 들으며, 온화한 모습과 부드러운 얼굴을 어느 때에 다시 본단 말인가.” 영조가 왕세제 시절인 27세 때(1721년) 후궁 소훈 이씨(정빈으로 추증)를 잃고 쓴 제문이다. 소훈 이씨는 영조의 첫 자식인 향염(화억옹주로 추증) 등 두 딸과 장남인 효장세자를 낳은 인물이다. 영조와 동갑내기로 8세에 궁에 들어온 그는 요즘 말로 하면 영조의 ‘솔 메이트’였다. 이 제문은 “혼령이여 지각이 있는가? 혼령이여 지각이 있는가? …오호통재라, 오호통재라”라는 절절한 외침으로 끝맺는다. 이에 앞서 영조는 3년 전인 1718년 돌이 안 된 향염을 잃었다. 영조가 쓴 광지(壙誌·무덤에 넣는 글)에는 “딸은 성품이 영민하고 용모가 청수하였다. 아아! 안타깝구나. 사무치는 아픔을 어이 견딜까. 무술년 8월 아비 연잉군이 눈물을 뿌리며 기록한다”고 쓰여 있다. 영조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영조는 34세 때(1728년) 장남 효장세자를, 57세 되던 해(1751년)에는 며느리 효순현빈 조씨(효장세자의 아내)를, 58세에는 첫 손자였던 세 살배기 세손(사도세자의 장남)을 잃는다. 특히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고 23년을 궁에서 지낸 며느리 조 씨와 영조는 사이가 각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묘지문에서 “나를 먹이려고 직접 스스로 밤을 삶고는 했는데 영영 가던 날에도 삶아놓은 것이 여전히 쟁반에 남아 있었으니…억장만 무너질 뿐이다”라고 했다. 영조는 말년에도 계속 가족을 잃고 제문과 비문을 썼다. 63세 때(1757년)는 정비 정성왕후를 잃었고, 68세에는 기대가 컸던 사도세자를 죽게 만들고 자책과 회한이 담긴 묘지문을 남겼다. “13일의 일(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일)은 내가 어찌 좋아서 했겠는가, 내가 어찌 좋아서 했겠는가. 이 글은 사신(詞臣·글 짓는 일을 담당하는 신하)이 대신 지은 것이 아니다. 사도세자여, 이 글을 가지고서 나에게 유감이 없을지어다.” 칠순이 넘어서는 40년 가까이 해로했던 후궁 영빈 이씨(사도세자의 어머니)마저 떠나보낸다. “오호라! 여든 살을 바라보는 나이에 친히 빈의 묘표, 명정, 신주를 모두 썼으니 정말 뜻밖이다.” 영조의 제문, 묘지문 등을 조사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윤진영 책임연구원은 “영조가 쓴 묘지문은 지석을 무덤에 묻기 전 탁본해 지금도 볼 수 있다”며 “왕이 제문 등을 직접 지은 일이나 문장에 슬픔과 애절함이 그대로 노출되는 것은 드문 일”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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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정한 아버지’ 영조…생전 제문 보니 “오호통재라, 오호통재라”

    최근 관객 600만 명을 넘어선 영화 ‘사도’를 비롯한 대중문화 속에서 조선 영조(1694~1776)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하는 모습이 주로 부각된다. 내면의 갈등이 묘사돼도 그는 비정한 아버지다. 그러나 영조는 아내와 자식을 비롯해 가족의 죽음을 가장 많이 지켜봐야 했던 비운의 왕이었다. 정비(正妃) 2명 중 1명, 후궁 4명 중 2명이 영조보다 먼저 사망했다. 모두 14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생전에 아들 2명을 모두 잃었고, 12명의 딸 중 9명을 앞세웠다. 이는 영조가 82세까지 조선 왕 중 가장 오래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꼭 태어난 순서대로 떠나는 것이 아닌 게 세상의 이치라지만 육친을 잃은 슬픔을 그는 어떻게 달랬을까. 영조가 죽은 이들을 기리기 위해 손수 지은,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이배용) 소장의 제문과 묘지문(墓誌文)을 살펴봤다. “아침에는 나를 대하여 말하더니 저녁에는 깊이 숨어서는 말을 않으니, 그날 광경의 비참하고 처절함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 따뜻한 말과 낭랑한 음성을 어느 날에 다시 들으며, 온화한 모습과 부드러운 얼굴을 어느 때에 다시 본단 말인가.” 영조가 왕세제 시절인 27세 때(1721년) 후궁 소훈 이씨(정빈으로 추증)를 잃고 쓴 제문이다. 소훈 이씨는 영조의 첫 자식인 향염(화억옹주로 추증) 등 두 딸과 장남인 효장세자를 낳은 인물이다. 영조와 동갑나기로 8세에 궁에 들어온 그는 요즘 말로 하면 영조의 ‘소울 메이트’였다. 이 제문은 “혼령이여 지각이 있는가? 혼령이여 지각이 있는가? … 오호통재라, 오호통재라”는 절절한 외침으로 끝맺는다. 이에 앞서 영조는 3년 전인 1718년 돌이 안 된 향염을 잃었다. 영조가 쓴 광지(壙誌·무덤에 넣는 글)에는 “딸은 성품이 영민하고 용모가 청수하였다. 아아! 안타깝구나. 사무치는 아픔을 어이 견딜까. 무술년 8월 아비 연잉군이 눈물을 뿌리며 기록한다”고 쓰여 있다. 영조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영조는 34세 때(1728년) 장남 효장세자를, 57세(1751년) 되던 해에는 며느리 효순현빈 조 씨(효장 세자의 아내)를, 58세에는 첫 손자였던 세 살배기 세손(사도세자의 장남)을 잃는다. 특히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고 23년을 궁에서 지낸 며느리 조 씨와 영조는 사이가 각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묘지문에서 “나를 먹이려고 직접 스스로 밤을 삶고는 했는데 영영 가던 날에도 삶아놓은 것이 여전히 쟁반에 남아 있었으니 … 억장만 무너질 뿐이다”라고 했다. 영조는 말년에도 계속 가족을 잃고 제문과 비문을 썼다. 63세(1757년) 때는 정비 정성왕후를, 68세에는 기대가 컸던 사도세자를 죽게 만들고 자책과 회한이 담긴 묘지문을 남겼다. “13일의 일(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일)은 내가 어찌 좋아서 했겠는가, 내가 어찌 좋아서 했겠는가. 이글은 사신(詞臣·글 짓는 일을 담당하는 신하)이 대신 지은 것이 아니다. 사도세자여, 이글을 가지고서 나에게 유감이 없을지어다.” 칠순이 넘어서는 40년 가까이 해로했던 후궁 영빈 이씨(사도세자의 어머니)마저 떠나보낸다. “오호라! 여든 살을 바라보는 나이에 친히 빈의 묘표, 명정, 신주를 모두 썼으니 정말 뜻밖이다.” 영조의 제문·묘지문 등을 조사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윤진영 책임연구원은 “영조가 쓴 묘지문은 지석을 무덤에 묻기 전 탁본해 지금도 볼 수 있다”며 “왕이 제문 등을 직접 지은 일이나 문장에 슬픔과 애절함이 그대로 노출되는 것은 드문 일”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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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소뼈 먹인 소를 먹는 것은 食人이 아닌가?

    “문자가 없는 일부 종족은 육식이 식인 풍습을 약화시킨 형태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사냥꾼(혹은 어부)과 사냥감 간의 관계를 친척 관계에 근거해서 생각함으로써 그 관계를 인격화한다. (…) 따라서 사냥과 고기잡이는 같은 종족 내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식인 풍습으로 여겨진다.” 1996년 구조주의의 아버지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가 쓴 글 ‘미친 소 파동의 교훈’ 중 일부다. 그는 소에게 소의 뼛가루를 먹여 키우는 것은 넓은 범위의 식인 풍습에 속한다고 본다. 또 초식 동물을 동종의 동물을 먹는 동물로 변환시켜 생겨난 위험(인간 광우병)과 가축 사육의 비효율성 탓에 언젠가 육식은 식인 풍습만큼이나 혐오스럽게 여겨질 것이라고 예견한다. 책은 저자가 1989년부터 2000년까지 이탈리아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에 기고한 글 16편 등을 모았다. 저자는 ‘발전에는 하나의 유형만이 존재하는 것일까?’라는 글에서 수렵과 채집을 했던 종족들이 과연 농업을 할 줄 몰라 그런 삶에 만족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그저 생산성을 앞세운 삶 자체를 멀리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종교 갈등, 광우병 파동, 여성의 지위, 인종차별주의 등 민감한 문제를 다루면서도 주제의 심층으로 파고들어가는 필봉에서 대가의 풍모가 전해온다. 저자는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여기는 문명사회와 그들이 원시적으로 보는 사회가 별다른 차이가 없고 심지어 심층에서는 동일한 원리, 즉 ‘구조’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일간지 기고글인 만큼 저자의 본격 연구서보다 이해가 쉽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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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회 인촌상 시상식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의 유지를 기리기 위해 제정된 제29회 인촌상 시상식이 8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 롯데호텔 크리스털볼룸에서 열렸다. 이 상은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대에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경성방직과 고려대를 설립한 민족 지도자 인촌 선생의 뜻을 잇기 위해 1987년 제정됐다. 인촌상은 재단법인 인촌기념회(이사장 이용훈)와 동아일보사가 제정해 운영하고, 해마다 인촌 선생의 탄생일(10월 11일)에 맞춰 시상식을 열고 있다. 이 이사장은 이날 시상식에서 △광주 살레시오여고(교육) △성곡언론문화재단(언론·문화) △김학주 서울대 명예교수(인문·사회) △서영준 서울대 교수(과학·기술) 등 부문별 수상자에게 상패와 기념메달, 상금 1억 원을 각각 수여했다. 이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광복 70주년을 맞아 엄혹한 일제강점기에 언론과 교육, 산업 부문에 걸쳐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데 앞장섰던 인촌 선생의 발자취를 새삼 돌아보게 된다”며 “수상자들은 공익을 최우선 가치로 삼았던 인촌 선생의 정신을 실천한 분들”이라고 말했다. 성낙인 서울대 총장은 축사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적 지식인의 전범을 보여주셨던 인촌 선생을 따라 수상자들의 지혜와 경험을 우리 사회에 더욱 확산시키고 정진하시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앞서 인촌상운영위원회(위원장 이돈희)는 외부 심사위원 16명을 위촉해 4개 부문에 걸쳐 6월부터 2∼4차례 회의를 열어 최종 후보를 선정한 뒤 수상자를 확정했다. 교육 부문에서 수상한 살레시오여고의 류경희 교장수녀는 “60년 가까운 역사 동안 인성 교육을 위해 애써온 것에 대한 격려라고 생각한다”며 “학생들이 이 사회의 역군이 될 수 있도록 젊은이들과의 소통에 더욱 힘쓰겠다”고 말했다. 언론·문화 부문 수상 단체인 성곡언론문화재단의 한종우 이사장은 “보성전문학교 교장이셨던 인촌 선생이 당시 제자였던 (재단 설립자) 성곡 김성곤 회장께 직접 상을 주시는 듯하다”며 “하늘의 성곡 선생이 ‘필요한 일을 제대로 하라고 수상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실 듯하다”고 했다. 인문·사회 부문에서 상을 받은 김학주 서울대 명예교수는 “지금까지 중문학 연구에 함께 노력해 온 동료와 선후배 연구자들 덕에 오늘의 성취가 있었다”며 “이번 수상은 여생을 다 바쳐서 정진하라는 당부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화학적 암 예방(ChemoPrevention)’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과학·기술 분야에서 수상한 서영준 서울대 교수는 “유행에 편승하지 않고 20년 동안 한 분야에 매달려 상을 받게 된 것 같다”며 “언젠가 이 분야에서 정점(頂點)을 찍으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날 시상식에는 수상자와 가족, 역대 수상자를 비롯해 각계 인사 300여 명이 참석했으며 현악 앙상블 ‘조이 오브 스트링스’와 바리톤 박흥우 씨, 바이올리니스트 서유민 양이 축하 공연을 펼쳤다.■ 주요 참석자 명단▽정·관·법조계=김수한 박희태 전 국회의장, 이현재 정원식 이홍구 전 국무총리,(이하 가나다순) 강인섭 전 국회의원, 김종하 전 국회부의장, 박경석 전 국회의원, 안병영 전 교육부 장관,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 이경재 전 방송통신위원장, 이종식 전 국회의원, 이진강 대법원 양형위원회 위원장, 정성진 전 법무부 장관, 조강환 전 방송위원회 부위원장, 조완규 전 교육부 장관,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현인택 전 통일부 장관 ▽학계 교육계=고형진 고려대 사범대학장, 국양 서울대 교수, 권대봉 고려대 교수, 권숙일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권순달 수원대 교수, 권영직 살레시오여중 교감, 권오상 고려사이버대 학생처장, 김규원 서울대 교수, 김규태 고려대정보전산처장, 김낙두 서울대 명예교수, 김동원 고려대 경영대학장, 김무진 살레시오여고 교감, 김병기 고려대 교수, 김병완 고려대사범대부속고 교감, 김병윤 KAIST 부총장, 김병철 전 고려대 총장, 김수원 고려대 연구부총장, 김영석 연세대 교수, 김영준 서울대 명예교수,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 김우석 인하대 교수, 김의진 가톨릭대 교수, 김인숙 국민대 명예교수, 김종필 중앙고 교장, 김준연 고려대 교수, 김중순 고려사이버대 총장, 김채겸 국민대 이사장, 김흔 전 중앙고 행정실장, 나홍석 고려사이버대 교무처장, 남시욱 세종대 석좌교수, 노공순 살레시오수녀회 원장, 노정혜 서울대 교수, 류동춘 서강대 교수, 류시혁 고려사이버대 총괄행정실장, 류종목 서울대 교수, 마동훈 고려대 미래전략실장, 민병욱 백석대 초빙교수, 박동원 고려중앙학원 사무국장, 박명식 고려중앙학원 본부장, 박진우 고려대 공과대학장, 박찬욱 서울대 교수, 성기옥 세계화교육문화재단 회장, 송용준 서울대 교수, 송진원 고려대 연구교학처장, 송태진 고려대 연구처장, 심재철 고려대 언론대학원장, 어윤대 전 고려대 총장, 엄규백 양정의숙재단 이사장, 염재호 고려대 총장, 오수경 한양대 교수, 위성홍 고려사이버대 연구개발처장, 위행복 한양대 교수, 유병현 고려대 대외협력처장, 유종호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육정수 배재대 초빙교수, 윤병길 고려대사범대부속고 교장, 이기성 고려대 총무처장, 이동관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총장, 이상섭 서울대 명예교수, 이승기 서울대 명예교수, 이용균 중앙고 교감, 이은방 서울대 명예교수, 이재돈 이화여대 교수, 이재열 고려사이버대 대외협력처장, 이재훈 고려대 문과대학장, 이주현 고려대사범대부속중 교장, 이창숙 서울대 교수, 이필상 유한재단 이사장, 이홍우 상명대 석좌교수, 이후근 전 고려중앙학원 상담역, 임상원 고려대 명예교수, 장승문 중앙중 교장, 전인초 연세대 명예교수, 정구종 동서대 석좌교수,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 정종욱 고려사이버대 기획예산처장,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조광 고려대 명예교수, 조성관 고려사이버대 기획행정실장, 조현진 국민대 교수, 진덕규 이화여대 명예교수, 최동훈 고려대 기획예산처장, 최용석 중앙중 교감, 최희조 세종대 석좌교수, 한금선 고려대 간호대학장, 한상복 서울대 교수, 한정호 연세대 사회과학대학 학장, 허도영 고려대사범대부속중 교감,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 ▽경제계=권영민 전 태영건설 상무, 권이상 전 경방 감사, 김도균 삼성전자 전문연구원, 김명하 김앤에이엘 회장, 김병휘 삼양염업 회장, 김석준 쌍용건설 회장, 김선휘 삼양염업 고문,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 김재억 삼양홀딩스 고문, 김정식 대덕전자 회장, 김준 경방 사장, 김진우 LIG건설 재무팀장, 안병모 비오엠 건축사사무소 대표, 양재룡 한국은행 자문역, 오윤택 회계법인 바른 대표, 유진녕 LG화학 기술연구원장, 이인용 삼성전자 커뮤니케이션팀장 사장, 이중홍 경방고문, 조해형 나라홀딩스 회장, 홍성훈 삼양홀딩스 감사 ▽언론·출판·문화·체육계=고승철 나남출판 대표, 김광희 전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김기경 한국오리엔티어링연맹 명예회장, 김달수 울산김씨대종회 회장, 김동철 한국전통문화전당 원장, 김두곤 전 동아일보 총무국장, 김병건 동아꿈나무재단 이사장, 김복수 동우회 임원, 김상준 울산김씨대종회 부회장, 김영나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용범 성곡언론문화재단 이사, 김용해 전 동아일보 출판국 편집위원, 김은 인촌기념회 이사, 김의정 명원문화재단 이사장, 김인호 전 동아일보 광고국장, 김정일 전 동아애드넷 대표, 김종길 시인, 김종완 전 국민체육진흥공단 상무이사, 김종태 평화의 마을 대표, 김준하 전 강원일보 사장, 김지용 성곡언론문화재단 이사, 김천주 한국여성소비자연합회 회장, 김학준 전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김현제 동우회 임원, 김희숙 아욱실륨장학회 이사장, 문명호 대한언론인회 주필, 문영복 전 한국방송광고공사 이사, 박기정 이북5도위원회 함경북도지사, 박문두 동우회 총무이사, 박오학 전 동아일보 전무, 박용윤 한국박물관회 이사, 박진오 동아일보 감사, 박창래 전 문화일보 논설주간, 박충서 동아꿈나무재단 이사, 박태근 전 동아일보 건설팀장, 배권호 전 동아일보 부국장, 배인준 동아일보 고문, 서병기 한국정보통신산업연구원 원장, 성낙오 전 영남일보 사장, 송군호 고려대 교우회 운영국장, 송상현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회장, 신동호 전 조선일보 부사장, 신상민 전 한국경제신문 사장, 신우식 전 서울신문 사장, 양철화 동우회 임원, 어경택 화정평화재단 감사, 여영무 뉴스앤피플 대표, 오정소 한국정보기술연구원 이사장, 유준상 한국정보기술연구원 원장, 윤상철 성곡언론문화재단 이사, 이경숙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 이규민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대훈 전 동아일보 이사, 이도형 전 한국논단 발행인, 이두환 전 동아일보 출판영업국장, 이명득 전 동아일보 시설본부 국장, 이문호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 이병훈 한국영상자료원장, 이연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이영근 전 동아일보 국장, 이완승 동우회 임원, 이종석 위암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 회장, 이종세 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 이진숙 대전MBC 사장, 이치백 한국향토사연구전국연합회 이사장, 임연철 전 국립극장장, 전만길 전 대한매일신보 사장, 전용호 한국어문언론인협회 부회장, 전창규 동우회 임원, 정출도 전 전국문화원연합회 사무총장,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조용중 문우언론재단 이사장, 천병주 동우회 임원, 최규철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최맹호 동아일보 고문, 최명우 안전신문 주필, 현재천 인촌기념회 이사, 홍재철 목사조종엽 jjj@donga.com·김상운 기자}

    • 2015-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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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글 최초 민간 서체는 동아일보 공모 당선작

    “본사에서 언문(諺文)의 자체(字體)를 이상적으로 개선코자 천하에 구하오니 만대에 필적을 서물(書物)마다에 인(印)코자 하는 인사는 천재일우의 차기(此機)를 일(逸)치 마시고 일필을 휘(揮)하소서.” 1929년 1∼8월 다섯 차례에 걸쳐 동아일보 사고(社告)로 실린 활자체 모집 공고다. 류현국 일본 쓰쿠바기술대 종합디자인과 교수는 광복 70주년 한글날을 맞아 근대 한글의 활자화 과정을 집대성해 펴낸 ‘한글 활자의 탄생(1820∼1945)’에서 “동아일보의 이 공모는 이후 한국의 민간 서체 공모를 이끈 효시”라고 말했다. 공모 결과 구약성경 개역에도 참여했던 이원모(1875∼?)의 서체가 당선됐고, 동아일보는 이를 4년 동안 4만여 종의 활자로 개발해 1933년 4월 1일자 신문부터 6·25전쟁 전까지 사용했다. 류 교수는 “이는 한국 신문사 최초로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진 명조체 활자 세트이고, 동아일보는 이를 바탕으로 국내 최초로 고딕체 활자도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 서체는 1958년까지 국내 출판물뿐 아니라 북한 노동신문, 일본 민단과 미국의 발간물에서까지 사용됐다”고 덧붙였다. 류 교수는 지난 12년 동안 40여 개국을 방문하며 한글 활자의 원형과 계보를 찾아다녔다. 그는 “1880∼1945년 일본어 활자가 약 30종류인 데 비해 한글 활자는 무려 42종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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