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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돌연 취소한 것은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내려는 자신만의 협상 기술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미 의회 전문매체 ‘더힐’은 24일(현지 시간) ‘트럼프의 정상회담 취소 결정에 나타난 5가지 함의’라는 기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다음 달 12일로 예정됐던 북-미 정상회담을 취소하면서도 “김정은이 건설적 행동을 취한다면 난 기다릴 것”이라고 여지를 남겨둔 데 주목하며 이같이 밝혔다. 더힐은 미 공화당 상원의원들의 분석을 인용해 “트럼프는 ‘거래의 기술(The Art of the Deal)’이란 저서에서 밝힌 ‘(협상) 테이블에서 기꺼이 퇴장하기’라는 협상 기술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짐 인호프 미 공화당 상원의원은 성명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취소했어도) 힘든 협상을 계속하고 있다고 본다. 확실히 북한에 대해 기대를 하고 있다. (나는) 북한 정권이 경제적,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한 북한은 다시 테이블로 나올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반면 민주당은 대북 정책은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거래 기술’로는 해결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밥 메넨데스 민주당 상원의원은 “‘외교의 기술’은 ‘거래의 기술’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지적했다. 한편 북-미 정상회담이 취소되자 백악관이 정상회담 기념주화(사진) 가격을 인하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24일(현지 시간) 보도했다. 백악관 기념품 매장 온라인 사이트에 따르면 이 기념주화는 이날 ‘오늘의 상품’으로 지정돼 19.95달러(약 2만1500원)에 판매됐다. 기존 24.95달러(약 2만7000원)에서 떨어진 가격이다. 가디언은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되는 주화는 기존 가격에 판매된 주화와 똑같지는 않다”라고 설명했다. 사이트의 상품 설명에는 ‘이 기념주화는 정상회담 결과와 무관하게 제작된다’고 적혀 있다. 또 ‘정상회담이 개최되지 않으면 환불이 가능하다’는 내용이 추가됐다. 백악관 방문객 센터의 한 직원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많은 사람이 환불받을 방법을 전화로 문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돌연 취소한 것은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내려는 자신만의 협상 기술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미 의회 전문매체 ‘더힐’은 24일(현지 시간) ‘트럼프의 정상회담 취소 결정에 나타난 5가지 함의’라는 기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다음달 12일로 예정됐던 북-미 정상회담을 취소하면서도 “김정은이 건설적 행동을 취한다면 난 기다릴 것”이라고 여지를 남겨둔 데 주목하며 이 같이 밝혔다. 더힐은 미 공화당 상원의원들의 분석을 인용해 “트럼프는 ‘거래의 기술(The Art of the Deal)’이란 저서에서 밝힌 ‘(협상) 테이블에서 기꺼이 퇴장하기’라는 협상 기술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짐 인호프 미 공화당 상원의원은 성명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취소했어도) 힘든 협상을 계속하고 있다고 본다. 확실히 북한에 대해 기대를 하고 있다. (나는) 북한 정권이 경제적,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한 북한은 다시 테이블로 나올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반면 민주당은 대북 정책은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거래 기술’로는 해결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봅 메넨데스 민주당 상원의원은 “‘외교의 기술’은 ‘거래의 기술’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지적했다.북-미 회담 취소되기 까지●북한 담화△5월 16일/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비난하며 북-미 정상회담을 재고려하겠다고 발표△5월 24일/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 “북-미 정상회담 재고 최고지도부에 건의하겠다” 담화 발표△5월 24일(현지 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정상회담 취소 발표●다롄 회동△5월 7~8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2차 중국 방문. 다롄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과 회동.△5월 17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시 주석이 김정은에게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며 중국 배후설 제기△5월 22일/ 트럼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두 번째 중국을 방문 이후 북한 태도에 변화가 있었다”며 재차 중국 배후설 제기●비핵화 조건△5월 8일/ 김정은, 시 주석과 회동 후 “단계적이고 동시적인 조치를 통해 궁극적으로 한반도 비핵화를 바란다”고 발표△5월 13일/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북 핵무기 미국 테네시로 가져갈 것, 대량살상무기와 핵능력 폐기” 등 ‘리비아식 핵 폐기’ 공식화조은아 기자achim@donga.com}

“우리의 투쟁을 살아나게 해준 당신과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당신 친구들에게 정말 감사드립니다.” 미국에 사는 한 50대 남성은 최근 트위터에 감사의 글을 남겼다. 중년 남성의 진심 어린 응원을 받은 상대는 아직 10대인 에마 곤살레스 양. 1999년생인 그는 2월 플로리다주 파크랜드 ‘마저리 스톤맨 더글러스’ 고교에서 일어난 총기 참사의 생존자다. 그는 3월 총기 규제 강화를 요구하는 ‘우리 생명을 위한 행진’ 워싱턴 집회에서 삭발한 채 결의에 찬 표정으로 연단에 올라 주목받았다. 그는 총기 사고로 희생된 친구 이름을 하나씩 부른 뒤 잠시 침묵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그는 “내가 이곳에 올라온 지 6분 20초가 지났다. (총기 참사 당시) 이 정도의 시간에 17명의 친구가 사라졌고 15명은 다쳤다”고 말해 어른들의 마음을 울렸다. 그는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온라인에서 총기규제 운동을 이끌고 있다. 곤살레스의 트위터 팔로어는 162만 명. 총기 소유를 옹호하는 전미총기협회(NRA) 트위터 회원 수(67만5000명)를 훌쩍 뛰어넘었다. 이 같은 ‘앵그리 10대’의 부상은 미국만의 얘기가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10대들이 광장으로 나오고 있다. 어른들이 뭉그적거리는 바람에 사회 문제가 끊이지 않자 아이들은 답답함을 참지 못해 나선다. 영국 ‘옵서버’가 최근 소개한 런던의 18세 고교생 아미카 조지 양도 마찬가지다. ‘여성평등 운동가’인 조지 양의 고교 앞에서는 방송국 차량 기사가 종종 대기한다. 학교 수업을 듣던 그를 빨리 태워 출연 시간에 늦지 않게 방송사로 모시기 위해서다. 조지 양은 지난해 자기 또래 소녀들이 가난 탓에 생리대조차 사지 못한다는 뉴스를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를 더욱 분노하게 한 건 문제를 알고도 대책을 내놓지 못한 정부였다. 그는 ‘어른들이 해결 못하니 내가 하겠다’며 온라인에서 이들을 돕는 국민청원을 시작해 한순간에 여성운동가가 됐다. 10대들에겐 소셜미디어가 캠페인의 동반자다. 인도 동부 비하르주에서는 1월 여학생들이 조혼에 항의하는 뜻으로, 어른들과 함께 인간 띠를 만들고 이를 소셜미디어에 공유해 화제가 됐다. 방글라데시에서도 10대 소녀 수천 명이 최근 아동 결혼을 막자는 ‘결혼을 막는 사람들’ 운동을 이끌었다. 이들은 온라인으로 접한 ‘소녀는 신부가 아니다’ 캠페인을 벤치마킹했다. ‘앵그리 10대’는 벌써 정치 지형을 바꿀 조짐을 보인다. 미국의소리(VOA) 방송은 “10대들이 수도 워싱턴에서 18세부터 보장되는 선거권을 16세로 낮추라고 요구하고 있고 시의회 의원 절반 이상이 이미 16세부터 선거권을 보장하는 개정안에 찬성했다”고 20일(현지 시간) 보도했다. 뉴욕타임스(NYT)도 같은 날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역에서 젊은이들의 신규 유권자 등록이 급증하고 있다. 10대와 20대 등록이 예년보다 늘면 이번 11월 중간선거에서 애리조나주, 플로리다주 등 경합 지역이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선거권 연령 낮추기에 대한 찬반 논란도 뜨겁다. 찬성하는 이들은 많은 10대가 민주주의를 일찍 배우고 자신이 누구인지, 사회를 바꾸기 위해 미래에 어떤 직업을 택할지를 고민하는 좋은 기회라고 말한다. 반면 10대의 정치 활동을 여전히 회의적으로 보는 어른도 많다. 곤살레스 양을 비롯한 10대 활동가들의 트위터에는 ‘네가 뭘 알기는 하냐’는 뉘앙스의 댓글이 붙는다. 워싱턴 지역 라디오 방송 ‘WMAL’의 프로그램 진행자 크리스 코어 씨는 VOA와의 인터뷰에서 “16세는 신용카드를 소유할 수 없는 나이인데, 이 나이 아이들은 아직 성숙하지 못해서다. 18세가 돼야만 사고가 잘 형성돼 투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분명한 점은 요즘 10대가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소셜미디어로 더 많이 경험하고 사고한다. 최근 유럽에서 부쩍 늘어난 30대 정치인들이 기성 정치인보다 생활 밀착형 정책을 더 잘 내놓고 혁신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앵그리 10대’들도 이들처럼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이들이 일찍이 터득한 민주주의를 숙성시켜 우리 사회의 정치인, 또는 자기 일상의 정치인으로 크길 기대해 본다. 조은아 국제부 기자 achim@donga.com}
세계 최대 증권거래소인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 226년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수장이 나왔다. 남성 중심적이라는 비판을 받던 월가가 변화에 나섰다는 해석이 나온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NYSE의 모기업인 인터콘티넨털익스체인지(ICE)가 스테이시 커닝햄 NYSE 최고운용책임자(COO·43)를 NYSE의 최고경영자(CEO)로 임명했다고 21일(현지 시간) 보도했다. 여성이 NYSE 수장을 맡은 것은 1792년 NYSE 출범 이후 처음이다. WSJ는 “이로써 세계적인 증권거래소 2곳을 모두 여성이 이끌게 됐다”고 밝혔다. 나스닥은 지난해 1월 어디나 프리드먼을 여성 수장으로 임명했다. 미 펜실베이니아주 리하이대에서 산업공학을 공부한 커닝햄은 19세였던 1994년 여름 인턴으로 NYSE에 첫발을 들였다. 그는 지난해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NYSE에 들어선 순간 이게 내가 원하는 일이라는 느낌이 왔고 객장과 사랑에 빠져버렸다”고 회고했다. 그는 인턴으로 2년을 일한 뒤 1996년 객장 운용팀 등을 거쳤다. 당시 NYSE에서 일하는 남자 직원은 1000명을 넘었는데 여성은 고작 20여 명이었다. 남성 화장실은 고급 소파와 각종 편의시설에 전담 직원을 둘 정도로 화려했지만 여성 화장실은 오래된 전화 부스를 활용해 만들었을 정도였다. 그는 올해 초 한 연설에서 1967년 NYSE 객장 업무에 여성으로선 처음 진출해 NYSE에 제대로 된 여성 화장실을 마련하는 데 기여한 뮤리얼 시버트가 영감을 줬다고 밝힌 바 있다. NYSE에서 고군분투하며 커리어를 쌓던 그는 10년 차를 넘어선 2005년경 업무에 회의를 느끼고 돌연 휴직을 했다. 맨해튼의 한 요리학교에 등록했고 실제 레스토랑 주방에서도 일했다. 그는 FT에 “주방에서 여러 동료들과 긴장감과 스트레스 속에 열심히 일하고 일이 다 끝나면 맥주 한잔하러 가는 분위기가 객장과 비슷했다”고 전했다. 커닝햄 신임 CEO는 2년의 공백 뒤 2007년 나스닥으로 직장을 옮겼다. 그는 경력 단절 경험에 대해 “경력은 직선처럼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난 휴직 기간에도 많이 배웠고, 능력은 (잠시 쉰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나스닥에서 일하던 그는 2012년 다시 친정인 NYSE로 돌아왔고 2015년 COO로 승진했다. 그는 토머스 팔리 CEO의 뒤를 이어 25일 임기를 시작한다. 그는 WSJ와의 인터뷰에서 “한 조직을 운영하는 일은 매우 흥미롭고 개인적으로 많은 의미가 있다”고 소감을 말했다.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미국과 중국이 정점으로 치닫던 무역전쟁을 멈추며 ‘협상 타결’을 선언했지만 미국이 중국에 밀렸다는 비판이 미국 내에서 나오고 있다. 두 국가 간에 다시 무역전쟁이 촉발되면 중국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나온다. 뉴욕타임스(NYT)는 17, 18일(현지 시간) 워싱턴에서 열린 미중 2차 무역협상에 대해 “중국 협상팀이 의미심장한 승리를 안고 떠났다”고 21일 보도했다. NYT는 이렇게 판단한 근거에 대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 부과를 보류하기로 했지만, 중국은 미국의 대중 무역적자 축소와 관련된 구체적 수치 합의는 거부했다. 미국이 지원 중단을 압박한 중국의 최첨단 산업진흥책 ‘중국제조 2025’와 관련해서도 성과가 없다”고 설명했다. 미국 참모들의 내분도 지적됐다. NYT는 “종종 일치되지 않는 요구를 내놓는 분열된 미국 관리들은 확신에 찬 중국 협상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미국 협상팀은 요구사항이 자꾸 바뀌고 일관된 메시지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미중 2차 협상이 종료된 뒤인 20일에도 협상팀 내에서 분열이 노출됐다”고 덧붙였다. 협상단장인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과 협상팀원인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20일 각기 다른 톤으로 협상 결과를 설명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두 사람의 발언을 비교하며 “무역 전문가들은 두 사람의 발언 톤과 실체가 다르다고 평가한다”고 지적했다. WSJ에 따르면 ‘현상 캠프(status quo camp)’에 속하는 므누신 장관과 래리 커들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은 무역전쟁에 따른 시장 반응을 우려하고 있다. 강경파인 라이트하이저 대표와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정책국장은 ‘중국을 약탈자로 보는 캠프(China-as-predator camp)’로 대중 제재에 적극적인 편이다. 마크 잔디 무디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CNBC와의 인터뷰에서 미중 무역합의에 대해 “체면치레(face-saving)일 뿐이고 양쪽 모두 패했다(lose-lose)”며 “투자자의 지식재산권 보호를 논의했어야 했다”고 꼬집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중국 협상팀을 이끈 류허(劉鶴) 중국 국무원 부총리의 활약에 주목했다. FT는 “류 부총리는 미국과의 무역 담판에서 우위를 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북-미 정상회담을 취소할 듯 위협하는 것에 시진핑 주석의 영향이 있다고 봤는데, 그가 그렇게 믿는다면 시 주석과 류 부총리는 미 행정부의 공포를 무역 협상에서 이용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길고 시원한 물잔 같다.” 해리 왕손의 신부 메건 마클이 19일 윈저성 세인트조지 성당에 깔끔하고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자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렇게 평가했다. 다른 해외 언론들도 마클의 드레스가 보석과 레이스로 화려함을 뽐내던 다른 왕실 드레스와 달리 단순함으로 ‘파격’을 선보였다고 호평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이 드레스의 아름다움은 ‘자신감에서 나오는 절제(confident restraint)’ 속에 있다”며 “현실 속 로맨스는 동화 같은 일이 아님을 드레스가 알려준다”고 설명했다. 단순해 보이는 마클의 드레스에는 깊은 의미들이 담겨 있다. 왕실의 드레스를 누가 디자인하게 될지에 관한 소문이 무성했는데 그동안 후보로 꼽히지도 않던 클레어 웨이트 켈러가 디자인을 맡았다는 사실이 공개됐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 ‘지방시’가 지난해 최초의 여성 디렉터로 발탁한 영국인 디자이너다. 마클이 페미니스트로서 독립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부각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켈러는 마클의 주문에 따라 영국 왕실이 대표하는 영연방 국가들을 베일 속 꽃들로 표현했다. 탄자니아의 아프리칸 바이올렛, 솔로몬제도의 히비스커스와 함께 마클의 고향인 미국 캘리포니아주 양귀비꽃 등 55종의 식물이 베일에 담겼다. 마클이 쓴 작은 왕관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할머니 메리 왕비(조지 5세 왕비)가 생전에 썼던 것이다. 가디언은 “메리 왕비의 왕관이 (할리우드 여걸로 꼽히는) 원더우먼의 느낌을 풍겨 왕자비임을 잘 표현하면서도 페미니스트의 아이콘다운 느낌을 줬다”고 설명했다. 마클이 손에 든 부케는 해리 왕손이 결혼식 하루 전날 커플이 머물던 집 정원에서 직접 선택한 흰 꽃들과 은방울꽃으로 만들었다. 해리 왕손도 면도를 하지 않고 평소의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채 결혼식을 올리는 파격을 보였다. 가디언은 “군복을 입을 땐 면도를 깨끗하게 하는 게 관례이지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수염을 기른 채 결혼하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날 결혼식에는 다른 국가 정상이나 정치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와 제러미 코빈 영국 노동당 대표도 초청되지 않았다. 그 대신 커플과 친분이 있는 인사들 중심으로 약 600명이 결혼식장을 찾았다. 잉글랜드 축구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스타 데이비드 베컴 부부와 미국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 할리우드 배우 조지 클루니 부부, 테니스 스타 세리나 윌리엄스, 배우 이드리스 엘바 등이 결혼식에 함께했다. 해리 왕손의 옛 연인인 첼시 데이비와 크레시다 보너스도 결혼식을 찾아 눈길을 끌었다.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인처럼 자랐지만 미등록(불법 체류) 상태로 살고 있는 한 청년에 대한 추방 취소 판결이 나왔다. 미등록 청소년의 인권을 고려해 추방을 취소한 첫 판결이 나오면서 앞으로 추방 불안 속에 살아가는 ‘그림자 아이들’(본보 2017년 5월 17일자 A1·8면) 구제에 더욱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 청주지방법원 행정부(부장판사 신우정)는 17일 미등록 청년인 페버 씨(19)가 법무부 산하 청주출입국관리사무소장(현 청주출입국·외국인사무소장)을 상대로 낸 강제퇴거 명령 및 보호 명령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원고와 같이 대한민국에서 적법하게 출생했다가 부모가 체류 자격을 상실함으로써 체류 자격을 잃게 된 사람에 대해 인권적·인도적·경제적 관점에서 전향적 접근이 필요하다”며 이같이 결정했다. 또 “원고처럼 대한민국에서 출생해 사실상 오직 대한민국만을 지역적·사회적 터전으로 삼아 살아온 사람을 무작정 다른 나라로 내쫓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고 생존권을 보장해야 할 문명국가의 헌법정신에 어긋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강제퇴거 명령의 주된 취지가 ‘반사회성을 지닌 외국인으로부터 우리나라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공익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인데, 원고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볼 여지가 크다”고 판단했다. 페버 씨는 자신이 아닌 부모의 잘못으로 불법 체류자가 된 것이고, 불법 체류 중 취업한 사실이 있으나 동기나 기간 등을 고려할 때 반사회성이 있다고 보기 힘들다는 설명이다. 이번 판결은 ‘불법’이란 꼬리표 탓에 언제든지 가족과 떨어져 추방될 공포 속에 사는 미등록 아동을 구제한 첫 판결이다. 이탁건 재단법인 동천 변호사는 “한국 청년으로 성장한 미등록 아이들을 위해 사회적 대책을 마련할 필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페버 씨는 1999년 한국에서 나이지리아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아버지가 체류 기간을 연장받지 못해 강제 출국당하자 남은 가족이 모두 불법 체류자 신세가 됐다. 모국으로 돌아가면 배 속 막내까지 다섯 남매를 먹여 살릴 길이 막막했던 어머니는 출입국관리사무소로부터 일시 체류 허가를 받아 아이들을 키웠다. 페버 씨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성실히 공부해 초중고교를 마쳤고, 지난해 4월 동생들을 먹여 살리려 취업했다가 당국에 붙잡혔다. 그가 추방 명령을 받고 구금돼 천식 고통과 자살 충동에 시달린다는 사연이 본보 보도로 알려지자 시민들은 “구금을 풀어달라”는 탄원서를 보냈고, 마침내 석방됐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그는 법무부에 “추방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지만, “불법은 불법이다”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시민단체들도 그에 대한 특별 체류 허가를 요청했으나 명확한 답변을 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근본적인 추방 위협에서 벗어나려 소송을 진행했다. 페버 씨는 추방은 면했지만 여전히 미등록자라 취업할 수가 없다. 국내 ‘그림자 아이들’은 2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중국의 대형 통신장비업체 ZTE는 미국 기업들로부터 개별 부품을 많이 구매하고 있다. 이는 우리와 중국의 더 큰 무역협상은 물론이고 나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개인적인 관계를 반영한다.” 중국을 무역 적국(敵國)으로 삼아 연일 비판하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 같은 내용을 14일 트위터에 올리자 세계 2대 강국의 두 ‘스트롱맨’ 사이에 흐르는 ‘브로맨스’가 주목받고 있다. 두 나라 통상당국 실무자들이 치열한 기 싸움을 벌이고 있는 협상이 아직 끝을 보지 못한 상황에서 뜬금없이 트럼프 대통령이 시 주석과의 우정을 운운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점으로 치닫던 미중 무역냉전이 두 정상 간의 브로맨스로 녹을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브로맨스는 형제를 뜻하는 ‘브러더’와 ‘로맨스’를 엮어 만든 표현으로 남성 간의 우정이나 애정을 의미한다.○ 트럼프 행정부 곳곳에서 ‘브로맨스’ 언급 실제 래리 커들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은 15일 정치 전문매체 액시오스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 사이에 약간의 브로맨스가 있다. 이게 (협상을) 어디로 이끌지 모르지만 나를 매우 기쁘게 할 무역 딜(거래)로 이어질 수도 있다. 브로맨스는 항상 좋은 것이다”라고 밝혔다. 백악관 핵심 인사인 커들로 위원장의 이 발언은 시 주석의 경제 책사 류허(劉鶴) 부총리가 미국과 2차 무역협상을 하기 위해 15∼19일 미국을 찾은 가운데 나와 더욱 주목받았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두 정상의 브로맨스가 언급된 건 이뿐만이 아니다. 윌버 로스 상무장관 역시 전날인 14일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에서 미중 무역협상에 대해 “북한 문제 해결에서 보여줬듯이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은 강한 개인적 유대관계를 갖고 있고, 이 덕에 협의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로스 장관이 언급한 대로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이 성사되기까지 시 주석에게 ‘우리는 한 팀’이란 메시지를 보내며 북한을 압박했다. 두 정상이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자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달리며 일종의 유대감이 쌓였을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한반도 비핵화 실현을 위한 판문점 선언이 발표되자 트위터에 “한국전쟁은 끝날 것이다. 좋은 친구, 시 주석이 특히 북한과의 국경에서 미국에 도움을 준 것을 잊지 말자. 그가 없었다면 훨씬 더 길고 힘든 과정이었을 것이다”라며 시 주석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중국과 트럼프, 사업 커넥션 의혹도 트럼프 대통령은 한 달 전인 4월 중순만 해도 ZTE를 향해 “미국 기업과의 거래를 금지한다”는 엄포를 놨다. 당시 미 상무부는 ZTE가 북한과 이란에 대한 제재를 위반했다는 혐의를 씌웠지만 실은 중국이 핵심 경쟁력으로 삼는 첨단기술 기업을 공격한 것이다. 그랬던 트럼프 대통령이 13일 트위터에 “시 주석과 나는 중국의 거대 통신장비업체 ZTE가 조속히 사업을 다시 하기를 협력하고 있다. 중국에서 너무나 많은 일자리들이 사라졌다. 상무부에 일을 처리하라고 지시했다”고 발표해 미 정계와 기업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ZTE 구하기’로 인해 미국 내에선 역풍이 불기 시작했다. 여당인 공화당 내에서조차 반발이 일고 있다. 마코 루비오 공화당 상원의원은 14일 “ZTE 문제는 일자리와 무역이 아닌 국가안보와 간첩 관련 행위이기 때문에 엄격한 제한 없이 미국에서 ZTE 운영을 허락한 것은 잘못이다”라고 비판했다. 미 하원 정보위원회 민주당 간사 애덤 시프 의원은 15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조치는 결국 중국과 관련이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사업과 연관돼 있다. 이것은 분명히 헌법상 ‘보수조항’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수조항이란 미 정부 관리가 의회 승인 없이는 외국 정부로부터 선물을 받거나 이익을 취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내용이다. 현지 언론들은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 간의 뒷거래를 입증할 단서를 캐는 데 집중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15일 “MNC그룹이 인도네시아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이름을 딴 골프장과 6성급 호텔을 짓는 프로젝트와 관련해 중국 국영 건설사 중국야금과공(MCC)과 (투자) 협정을 맺었다”고 보도했다. NYT는 “이번 협정이 트럼프 행정부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의도라는 증거는 없다”고 밝히면서도 “미국과 중국이 무역 분쟁 중이고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산 상품에 수입세를 부과하고 있는 중이라 이번 협정은 타이밍으로 볼 때 어색하다”고 평가했다.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대한제국 시대 주미공사관 내부를 재현한 모습이 14일(이하 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공개됐다. 주미 대한제국공사관이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외교권을 강탈당한 지 113년 만인 22일 재개관한다. 1889년 개관 당시 주미공사 서기였던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1850∼1927)의 증손이 직접 113년 만의 국기 게양을 맡는다. 백악관에서 1.5km 거리에 있는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청사는 지하 1층∼지상 3층, 총면적은 578.83m² 규모의 빅토리아 양식 벽돌 건물이다. 현존하는 조선왕조 및 대한제국 해외 공관 중 유일하게 원형을 간직한 단독 건물로, 미국에서 우리 민족이 처음 소유한 건물로 알려져 있다. 고종 황제의 자강·자주외교의 상징으로 꼽혀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다. 이 건물은 1877년 건축 당시 미국 남북전쟁 참전 군인이자 외교관이던 세스 펠프스 씨의 저택이었다. 조선이 1882년 미국과 수교하고 1889년 2월 이곳에 주미공관을 마련했다. 처음엔 임차했지만 1891년 고종 황제의 특명으로 2만5000달러를 주고 사들였다. 당시 통화 가치 기준으로 궁궐 예산의 절반이 넘는 금액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 외교관들은 1893년 시카고박람회 준비 등 자주독립 외교를 펼치려 노력했다. 1897년 출범한 대한제국도 1905년 외교권을 잃을 때까지 이 공관을 사용했다. 하지만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직후 공사관은 단돈 5달러에 일제에 넘어가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1945년 광복 후 미군 휴양시설, 운수노조 사무실 등으로 쓰이던 이 건물은 1977년 미국인 젱킨스 부부의 가정집이 됐다. 한국 문화재청은 2012년 문화재보호기금법이 규정한 긴급매입비를 사용해 350만 달러(당시 환율 기준 약 39억5000만 원)에 건물을 매입하고 고증과 복원, 리모델링을 거쳐 약 6년 만에 재현 작업을 마쳤다. 공사관은 국내외에서 발견된 19세기 말, 20세기 초 각종 문헌과 사진을 바탕으로 재현됐다. 1층에는 접견실과 식당, 2층에는 공사 집무실, 부부 침실, 공관원 집무실, 서재 등이 복원됐다. 3층은 공관원 숙소였는데 이번 리모델링으로 한미관계사 전시실로 재탄생했다. 1943년 훼손됐던 천장과 계단은 물론 복원 과정에서 뒤늦게 발굴된 하인용 계단의 흔적이 특징적이다. 한국 문화재청은 22일 오전 10시 반 공사관이 있는 로건서클 역사지구 공원에서 개관식을 연다. 김종진 문화재청장, 조윤제 주미대사, 당시 공관원이던 박정양 이상재 장봉환의 후손 등이 참석한다. 공사관은 매주 월요일을 제외하고 연중무휴로 일반인을 무료로 받는다. 영어와 한국어로 안내하는 해설사가 배치된다. 관람을 위한 인터넷 사전예약()과 현장 접수가 가능하다.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인도네시아에서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 추종 세력으로 보이는 서로 다른 세 일가족의 ‘자폭 테러’가 하루 사이 잇따라 발생했다. 이들은 어린 자녀들을 자폭 테러에 동원해 충격을 주고 있다. AP통신은 14일 IS를 추종하는 한 가족이 오토바이를 몰고 인도네시아 수라바야의 경찰청을 향해 돌진하며 폭탄을 터뜨려 이 가족 4명이 사망하고 시민 6명과 경찰관 4명 등 최소 10명이 다쳤다고 보도했다. 숨진 4명은 오토바이 2대에 2명씩 나눠 타고 경찰청 보안 검색대를 향해 달리다가 폭탄을 터뜨렸다. 경찰에 따르면 숨진 4명은 부모와 두 아들이었다. 티토 카르나비안 인도네시아 경찰청장은 “다섯 명의 가족 중 8세 딸도 숨진 범인 2명과 한 오토바이에 타고 있었는데 딸은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전날인 13일에도 수라바야의 교회 3곳에서 일가족 6명이 연쇄 자살폭탄 테러를 저질러 테러범 가족 6명을 포함해 최소 14명이 숨지고 41명이 다쳤다. 테러범 가족에 9세와 12세 아동이 포함됐다. 테러범 가족의 숨진 아버지 디타 우프리아르토(46)는 IS 연계 조직 ‘제마 안샤룻 다울라(JAD)’의 수라바야 지역 담당자였다. 가족이 살던 동네 이웃들은 호주 ABC방송에 “이 가족들은 이웃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고 전했다. 이날 저녁에도 수라바야 근처 시도아르조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자폭 테러로 엄마와 17세 딸이 사망했다. 우프리아르토의 친구이자 IS 조직원으로 추정되는 아빠는 따로 폭탄을 들고 있다가 현장에서 경찰에 사살됐다. 이번에 연달아 일어난 테러는 2002년 한밤중에 발리섬에서 202명의 목숨을 앗아간 폭탄 테러 이후 최악의 사고로 꼽힌다. 당시 테러를 주도한 알카에다 인도네시아 지부 ‘제마 이슬라미야’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미국과 호주의 지원으로 반(反)테러 작전에 나서며 어느 정도 소탕됐다. 하지만 최근 몇 달 전부터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내몰린 IS 세력이 대거 인도네시아로 유입돼 득세하게 됐다. AP통신은 “시리아로 떠난 인도네시아인 1100명 중 일부가 시리아 내전에서 IS와 함께 싸우다가 본국으로 복귀하면서 IS 전투 조직 활동이 활발해졌다”고 보도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IS의 부상을 발리섬 테러를 자행한 2000년대 초반 알카에다 세력에 이은 ‘제2의 테러 흐름’이라고 규정했다. 글로벌 위기관리 컨설팅그룹 ‘베리스크 메이플크로프트’의 휴고 브레넌 선임분석가는 CNN에 “이번 테러 유형은 아이들을 동원할 정도로 악랄한 만큼 해결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분석했다.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한국 휴대전화가 방글라데시, 캄보디아의 농촌을 살리고 있습니다.” 유엔 내 전문기구 중 하나인 국제농업개발기금(IFAD)의 질베르 호웅보 총재(57)는 11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휴대전화를 비롯한 한국 정보통신기술(ICT)이 국제 원조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을 이렇게 소개했다.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는 농기계나 지원금을 제공하거나 농법을 전수하는 차원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ICT 강국 한국의 대표 상품인 휴대전화가 개도국 농촌에서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는 설명이다. 호웅보 총재는 이날 서울에서 열린 국제 공적개발원조(ODA) 포럼에 참석하고 IFAD의 주요 회원국인 한국 정부와의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서아프리카 국가 토고의 총리 출신인 그는 지난해 4월부터 IFAD 총재를 맡고 있다. 1978년 IFAD 회원국이 된 한국은 176개 회원국 중 기여금 기준으로 상위 20개국 안에 든다. 최근에는 ICT를 빈곤국 농업에 지원하는 사업에 지원금을 보내고 있다. 호웅보 총재는 “인도 농부들은 휴대전화로 날씨 정보를 미리 파악해 자연재해로 인한 농작물 피해를 줄이고, 캄보디아 농가들은 휴대전화로 토양, 날씨, 방제 조치 등을 알려주는 ‘농촌 지도’를 확인해 농업 생산성을 높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1970년대 한국에서 일어난 ‘새마을운동’도 ‘빈국 농촌 개발의 모델’로 높이 평가했다. 호웅보 총재는 “새마을운동은 측정 가능한 개발 성과를 낸 것은 물론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할 수 있다’는 정신을 심어주고 장기적으로 모두 잘살 수 있다는 비전을 공유했다”며 “세계 어디에서나 잘 적용될 수 있는 개념으로 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이 6·25전쟁 뒤 엄청난 경제 발전을 이룬 경험을 다른 국가들과 더 많이 나눌 수 있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호웅보 총재는 최근 지구촌을 떠들썩하게 만든 기후변화와 각종 내전으로 위협받는 식량안보에 대해선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식량안보가 무너져 고통 받는 인구가 2016년까지 줄다가 2017년부터 다시 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식량안보 문제를 해결하려면 인도주의적 지원도 필요하지만 사실 장기적 투자가 지속 가능한 해법”이라고 강조했다. 국제사회가 빈국에 단순히 돈과 식량을 주는 데 머물지 말고, 긴 안목으로 소규모 자작농들에게 농법을 가르쳐 자립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IFAD의 지원이 북한까지 닿을지에 대해 호웅보 총재는 “아직 대북제재가 유지되고 있고 우리는 국제기구로서 회원국의 이해관계를 고려해야 하니 지금 답하긴 너무 이르다”라고 말했다. 다만 “북한은 우리 회원국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협력을 요청하면 우리가 지원 여부를 검토해 볼 것”이라고 덧붙였다. IFAD는 1996년 북한에 농업 지원 사업을 시작한 뒤 농민을 대상으로 소액대출 사업 등을 벌이다 2009년 사업을 중단했다. 당시 IFAD는 “우리 직원이 북한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사업 이행 여부를 감시할 수 있어야 대북지원을 재개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일자리 대통령’을 자처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입에서도 ‘일자리’ 얘기가 쏙 들어가 버릴지 모른다. 미국이 실업 문제라는 난해한 숙제를 어느 정도 해결한 분위기다. 미 노동부는 4월 실업률이 3.9%로 집계됐다고 4일(현지 시간) 발표했다. 2000년 12월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 “실업률 3.9%. 4%가 깨졌다”고 자화자찬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잘난 척을 할 만도 하다. 미국에서 실업률이 4%를 밑돈 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 초반 6·25전쟁,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걸친 베트남전쟁, 2000년대 테크 붐 등 손에 꼽을 정도라고 한다. 차기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로 내정된 존 윌리엄스 샌프란시스코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이날 CNBC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미국은 거의 ‘골디락스’ 경제 국면이라고 할 수 있다”며 모처럼 희망적인 전망을 내놨다. 골디락스는 영국 동화 ‘골디락스와 세 마리의 곰’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다. 숲속에서 발견한 오두막에 들어가 적당한 온도의 수프를 먹고 편안한 잠에 빠진다. 골디락스 경제는 동화 속 주인공처럼 큰 변동 없이 오랫동안 편하게 성장한다는 뜻이다. 오랫동안 미국 경제의 발목을 잡았던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돼 구직자 수와 일자리 수가 거의 일치하는 ‘완전 고용’이 달성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이 수시로 비판하는 전임 대통령들과는 분명 다른 평가다. 미 언론들도 흥분해 긍정적인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8일 ‘왜 지금이 일자리를 구하기 좋은 시기인가’란 제목의 기사에서 새 직장을 구하기 위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미국인 비율이 올 3월 2.3%로 세계 금융위기 시작 전인 2007년 이후 최고치임을 강조했다. WSJ는 “이런 현상은 미국인들이 자신감을 갖고 임금을 더 많이 주는 직장을 알아 보려는 움직임인데, 결국 임금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제 미국 경제의 숙제는 ‘실업 해소’에서 ‘임금 상승’으로 한 단계 나아간 셈이다. 하지만 미국의 고용 호황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쇠락한 지역의 구직자들은 여전히 일자리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세인트루이스, 클리블랜드, 볼티모어 등 쇠락한 공업지역(러스트벨트)에선 실업률이 개선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래피얼 보스틱 애틀랜타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최근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고용을 최대한 늘릴 수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고통스러운 일이 많다”며 호전되지 못하는 러스트벨트의 실업자들을 우려했다. 미국의 실업 문제가 겉으로는 해결된 듯 보여도 속으로는 취약한 지역의 실업 문제가 곪고 있는 것이다. 실제 이번에 미 노동부가 발표한 경제지표를 보면 일자리가 증가한 업종은 실업난이 심각한 업종과는 거리가 있다. WSJ에 따르면 일자리가 많이 생겨난 5대 업종은 사업서비스업, 소매업, 헬스케어, 숙박 및 요식업, 교통 및 창고 서비스업 정도다. 일자리가 증가한 이 업종들마저 임금이 낮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얼마나 늘어날지도 의문이다. USA투데이는 “구직자들이 일자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기업들이 충분한 인재를 확보하지 못하면 상품이나 서비스를 충분히 공급하지 못해 미국 경제가 둔화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일자리 호황 속에 숨은 불편한 진실을 간파한 전문가들이 내놓은 해법이 눈길을 끈다. 지역 특성에 맞게 고용 정책을 세우는 ‘지역 기반’ 정책이다. 중앙정부가 아닌 각 지방정부가 지역 특성에 맞는 새로운 산업을 찾고 육성해야 한다는 뜻이다. 미국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 학자인 브루스 카츠와 제러미 노웍도 올해 1월 펴낸 저서 ‘뉴 로컬리즘’에서 지방정부가 지방의 특성을 반영한 정책을 효율적으로 집행하는 새로운 지방주의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지방이 중심이 돼 고용정책을 마련하고 현실에 적용할 때 지역산업이 부활할 수 있고, 결국 국가가 지역별로 균형 있게 성장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통찰이 한국에는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다. 미국보다 고용시장의 구조적 문제가 심각한 한국도 지방자치단체에 권한을 더 실어주고 스스로 산업과 일자리를 만들어 내도록 유도해야 한다. 조은아 국제부 기자 achim@donga.com}

“반(反)이민 정서는 막연한 공포에서 나옵니다.” 윌리엄 래시 스윙 유엔 국제이주기구(IOM) 사무총장(84)은 10일 서울 중구 IOM 한국대표부 사무실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는 ‘이민 혐오’ 현상을 우려했다. 그는 “우리는 우리와 다르게 생기고, 다른 언어를 쓰거나 종교가 다른 이주자를 두려워하는데 이런 두려움은 이주민들이 일자리를 빼앗고 범죄를 많이 저지르거나 테러리스트일 것이란 잘못된 편견에서 비롯된다”라고 말했다. 스윙 총장은 대학 강연과 이민 관련 부처를 방문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IOM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발생한 유럽 난민의 재정착을 돕기 위해 1951년 설립된 유엔 산하 기구로 한국을 포함한 169개 나라가 회원국으로 가입돼 있다. 회원국의 이주민 정책을 장려하고 긴급 구호현장에서 쉼터 등을 지원한다. 2001년 미 국무부에서 은퇴한 스윙 총장은 미 대사를 6번이나 맡은 ‘베테랑 외교관’ 출신이다. 2008년 10월부터 10년째 IOM을 이끌고 있다. 스윙 총장은 “반이민 운동과 정책을 내세우는 포퓰리스트에 대응하기 위해 이주민에 대한 편견이 잘못됐음을 입증하는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반이민정서와 함께 주목받고 있는 미등록(불법 체류) 청소년 추방 움직임에 대해 “출입국관리 정책은 각 국가가 주체적으로 결정할 일”이라면서도 “한 나라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그 나라 언어를 쓰는 아이를 부모의 나라로 보내는 논리는 무엇인가. 청년들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이 머지않아 아시아에서 대표적인 이민국가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스윙 총장은 “사실 이주 현상은 이 시대의 메가트렌드가 됐고, 한국도 저출산과 고령화로 이주자를 받아들이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한국에는 결혼이주자들이 늘며 다문화 가정이 많아졌고, 이주노동자들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의 젊은 학생들이 미국 일본을 중심으로 세계 곳곳에 많이 진출해 앞으로 ‘이주노동’이 한국 사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미국 캘리포니아주 팰로앨토의 로봇서비스기업 ‘코발트로보틱스’ 직원 윌 캐트런 씨(36)는 보안용 로봇을 사용하는 고객들의 민원을 처리하는 일을 맡고 있다. 그는 하루 종일 전화, 문자, e메일 등으로 쏟아지는 각종 문의와 수리 요청 등을 파악한다. 가끔 현장으로 출동해 로봇 부품에 기름칠을 해 오작동을 해결하고, 이사 가는 기업이 신속하게 로봇을 재사용하도록 돕는다. 캐트런 씨의 직업은 ‘고객-로봇 연락담당자’.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최근에 소개한 ‘인공지능(AI) 시대에 떠오르는 직업’ 중 하나다. WSJ에 따르면 글로벌 컨설팅 기업 맥킨지는 2030년까지 AI와 자동화 기술에 대한 투자로 인해 세계적으로 일자리가 2000만∼5000만 개 늘 것이라고 전망했다. 보통 사람들은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일자리가 는다는 것이다. WSJ는 “기업 대부분은 (AI와 자동화 환경에 맞게) 기존 직업을 변환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람들이 AI 시대에 맞게 새롭게 탐색해 볼 직업으로 ‘AI 조립자’도 소개됐다. 로봇이 늘어나면 로봇 하드웨어를 조립하는 기술에 대한 수요도 늘 수밖에 없다. 로봇이 사람의 지시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행하는지 면밀하게 체크하는 ‘로봇 매니저’도 유망한 직업이다. 로봇이 엉뚱하게 행동해서 로봇을 이용하는 사람들 사이에 혼선이 일어나는 순간 로봇 매니저가 위력을 발휘한다. 이 직업은 로봇을 활용하는 여러 분야 사람들의 불편을 해결하기 때문에 기술적 지식보단 사교성이나 행정처리 능력이 더 중시된다. AI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데이터만 골라 입력하는 ‘데이터 분류자’도 전망이 밝다. 맥킨지 관계자는 WSJ에 “정보를 분석하고 컴퓨터에 입력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자율주행차 개발기업 같은 곳에는 이런 데이터 분류자가 최소 수백 명은 있어야 한다”고 전했다. 의약산업에서 활용되는 AI에는 생명과학과 화학 지식이 정확히 입력돼야 한다. 이런 지식을 입력하는 직원은 ‘AI 연구실 과학자’로 불린다. 자율주행차와 같이 AI가 적용된 기계의 안전성과 성능을 시험해 보는 운전자, 드론을 고객의 요구에 맞게 각종 행사에 활용하는 ‘드론 예술가’도 AI 시대에 기대되는 직업이다.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7, 8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의 고급 휴양지 방추이(棒槌)섬(사진)에서 숙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방추이섬은 랴오둥(遼東)반도 끝 부분에 있는 다롄시 동쪽 외곽의 해변 휴양지다. ‘방망이 모양’이란 뜻의 이름이 붙은 이 섬은 언덕이 소나무로 빽빽이 뒤덮여 있다. 경관이 아름다워 ‘북방의 진주’라는 별칭을 얻은 다롄시 내에서도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해수욕장을 갖추고 있다. 방추이섬 해수욕장은 모래가 유독 깨끗하기로 유명하다. 이곳은 중국 공산당 고위 간부들과 해외 정상급 지도자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이름나 있다. 주위가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고, 이 섬과 대륙을 연결하는 다리를 통제하면 보안을 강화하기가 다른 지역보다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북한의 김씨 일가와도 대대로 인연이 깊다. 2010년 5월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곳을 방문해 리커창(李克强) 당시 부총리와 회동하고 만찬을 가졌다. 김정일은 평소 이곳을 방문하고 싶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고 전해진다. 김정은의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도 이곳에서 덩샤오핑(鄧小平) 등 중국 지도부와 비밀 회동을 했다. 김일성은 195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신병 치료를 위해 방추이섬에 장기간 머무른 것으로 알려졌다. 방추이섬의 영빈관인 ‘방추이섬 호텔’은 김씨 일가를 비롯해 세계 정상급 인사들이 자주 찾은 곳이다. 중국 국가인증 여행사 ‘비지트아워차이나’에 따르면 방추이섬 호텔은 1960년경 설립된 고급 호텔로, 다롄시에서 유일한 영빈관이다. 중국 전통식은 물론이고 유럽, 일본 양식의 빌라가 총 13채 들어서 있다. 호텔에는 골프장, 테니스장, 볼링장, 수영장 등 각종 스포츠 시설이 갖춰져 있다. 중국의 초대 총리인 저우언라이(周恩來) 시절부터 여러 중국 지도자와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 등 해외 정상들이 이 호텔에서 묵었다.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난 수십 년간 반(半)퇴직(semiretired) 상태였다.”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88)이 5일(현지 시간)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열린 버크셔해서웨이 연례 주주총회에서 농담 섞인 말투로 이렇게 밝혔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이날 보도했다. 그는 “사실 (반퇴직 상태였어도)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도 말했다. 회장에 최고경영자(CEO)까지 맡고 있는 그가 은퇴하면 기업이 예전만 못할 것이라는 투자자들의 우려를 불식시키려는 메시지였다. 투자자들은 ‘버핏 회장이 여전히 기업을 좌우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미 그의 후계 경영진이 주요 의사결정을 잘 처리하고 있다고 강조한 셈이다. 버핏 회장은 남다른 투자 혜안으로 버크셔해서웨이를 유통, 철도, 제조 등 다양한 사업을 아우르는 기업으로 키워냈다. 그는 2011년만 해도 “우리 회사에는 CEO가 될 만한 사람이 4명”이라고 말해 후계자에 대한 묘한 궁금증을 낳았다. 그러다 올해 1월 그레그 에이블 에너지부문 회장(56)을 그룹 전체의 비보험(non-insurance) 총괄부회장으로, 아지트 자인 재보험부문 부사장(67)을 보험 부회장으로 각각 승진시키며 “경영권 승계 작업의 일환”이라고 발표했다. 버핏 회장은 이렇게 긴 시간을 두고 후계 후보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시험해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아무리 후계자를 엄격히 선발하더라도 그가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면 ‘포스트 버핏’ 시대의 버크셔해서웨이는 예전만 못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버핏 회장은 이번 주총에서 투자자들의 우려를 의식한 듯 “현재의 명성은 (내가 아닌) 버크셔해서웨이의 것이다. 그 명성이 나와 찰리 멍거 부회장에게만 의존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WSJ에 따르면 이날 주총장에는 4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 주총장 입구에서부터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기 위해 긴 줄이 이어졌다. 버핏 회장이 등장하자 수많은 취재진과 투자자들이 그에게서 한마디라도 더 듣기 위해 카메라와 스마트폰을 들고 그를 에워쌌다. 사람들은 주식시장을 출렁이게 만들 수 있는 그의 투자 계획이나 기업 경영방침 등에 대해 여러 질문을 쏟아냈다. 하지만 후계 문제에 대한 질문이 핵심적인 내용이었다고 WSJ는 설명했다. 버핏 회장은 이날 “내가 (아마존 CEO인) 제프 베이조스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베이조스는 기적에 가까운 일을 해냈는데, 난 기적과 가까운 일이라 생각할 때마다 그 일에 투자하질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게 문제”라며 자신의 오판을 시인했다.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2014년 어느 날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내전이 3년째 접어든 이곳의 한 초등학교에 다니던 7세 소녀 마르와는 수업 중 ‘쿵’ 하는 굉음에 교실을 뛰쳐나왔다. 위층에선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마르와는 아래층에서 수업을 듣는 한 살 아래 남동생 파흐드가 걱정됐다. 같은 반 친구의 손을 잡고 펑펑 울며 동생의 교실로 함께 뛰었다. 달려가던 도중 마르와 손에서 친구의 손이 힘없이 빠져나갔다. 친구는 무너지는 건물 파편에 맞아 쓰러졌다. 마르와는 “친구 가슴에서 숨이 꺼졌다. 급히 선생님께 말했는데 선생님은 자기 걱정만 하며 달아나 실망했다”고 말하며 울먹였다. 마르와에게 전쟁은 소중한 것들을 앗아가 버린 괴물 같은 존재였다. 어느 날엔 할아버지와 아빠가 공들여 지은 4층 집이 폭격에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급히 안전한 곳으로 대피했다가 폐허가 된 집으로 돌아오니 마르와의 ‘보물 1호’ 고무 머리끈이 불에 녹아 거실 바닥에 눌어붙어 있었다. 마르와를 아끼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준 선물이었다. 마르와는 전쟁을 생각하면 이 장면이 가장 먼저 선명하게 떠오른다. 마르와는 불에 탄 집에서 아빠 사진이 담긴 묵직한 유리 액자만 꼭 껴안고 나와 피란길에 올랐다. 한국에서 일하느라 3년 넘게 보지 못한 아빠의 얼굴을 기억할 유일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전쟁은 무슨 색깔 같은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파흐드는 “빨간색”이라고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러면서도 그 이유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파흐드가 한국에 온 직후 심리 상담을 맡았던 대전 지역아동센터 관계자는 “아이가 시리아에서 참수 장면을 목격했다고 털어놨다”고 전했다. 시리아 내전을 온몸으로 겪어낸 소녀 마르와 양(11)과 남동생 파흐드(10) 유세프 군(7) 삼남매를 어린이날(5일)을 앞두고 2일 대전의 자택에서 만났다. 아이들은 어린이날 계획을 세우지 못했지만 “이런 날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또래 한국인 아이들에게 ‘평화’는 공기처럼 익숙하지만 이 삼남매에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소중하고 특별했다.○ 빈집 근처, 첫 둥지 ‘파흐드네 집’. 2일 대전의 한 주택 담벼락에는 한글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삐뚤빼뚤하지만 선명하고 또박또박한 글씨체였다. 가족의 둘째 파흐드가 이 집에 들어와 산 지 1년이 지나서야 적었다. 모국 시리아에선 전쟁을 피해 이 집 저 집을 옮겨 다녔던 파흐드가 마침내 ‘자필 문패’를 단 것이다. 파흐드는 “우리 집이 말이죠, 좀 넓어요”라며 수줍게 웃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느낌이 제일 좋다”고도 했다. 집에는 국경일도 아닌데 깨끗한 태극기가 걸려 있았다. 막내 유세프가 길가에서 주워온 태극기다. 가끔 친구들에게서 ‘넌 나라가 없는 애야’란 말을 들어서였을까. 유세프는 아빠에게 태극기를 꼭 달아 달라고 부탁했다. 3년 전 삼남매 가족은 대전에 있는 이 마을에 첫 둥지를 틀었다. 아빠는 시리아 내전 이전부터 시리아와 한국을 오가며 한국 폐차를 시리아로 수입해 판매하는 사업을 했다. 한국에 출장을 왔던 2011년의 어느 날 시리아 내전이 터지면서 아빠는 한국에 발이 묶였다. 전쟁이 부른 생이별이었다. 아빠는 가족들을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밤낮없이 돈을 벌었다. 그리고 인천행 항공권을 시리아의 가족에게 보냈다. 유세프는 “한 번도 못 봤던 아빠가 생겼다”며 좋아했다. 전쟁에 관한 기억이 별로 없는 유세프는 누나나 형보다 더 잘 웃고 더 잘 먹었다. 덩치는 세 살 위인 형보다 더 컸다. 10평이 조금 넘는 파흐드네 집은 매달 월세와 관리비 약 30만 원을 낸다. 집 안에는 식탁과 의자 외엔 별다른 가구가 없다. 방구석의 긴 의자에 옷들만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집 안에서 가장 화려한 물건은 거실 벽에 걸린 삼남매의 얼굴 그림. 엄마가 알록달록 밝은 색으로 손수 그려 가족사진 대신 걸었다.○ ‘전쟁 안 한다’는 말은 거짓말 피란 온 아이들은 남한과 북한이 최근 종전선언과 평화를 논의하는 모습을 TV로 지켜봤다. ‘시리아가 한국처럼 휴전을 하면 어떨까’란 기자의 질문에 파흐드는 “휴전만 한 상태에선 ‘전쟁을 안 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시리아에선 ‘전쟁 안 한다’는 말이 나온 바로 다음 날에도 전쟁이 다시 일어났다”고 답했다. 마르와는 고국의 친척들이 다칠까 봐 걱정돼 종전을 기대하면서도 전쟁이 끝날까 봐 두렵기도 하다. 시리아 난민들은 한국 정부로부터 임시비자(G1 비자)를 받아 전쟁 중에는 한국에 머물 수 있지만 전쟁이 끝나면 돌아가야 한다. 마르와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여성을 차별하는 고국으로 돌아가기가 싫다. 마르와는 “시리아에선 혼날까 봐 꿈을 갖지 못했는데 한국에서 아랍어-한국어 동시통역사란 꿈이 생겼다”고 말했다. 마르와는 한국어를 배운 지 약 3년 만에 대전지역 다문화 학생 한국어 대회에서 은상을 타기도 했다. 가끔 고국의 할머니는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조혼 풍습에 따라 벌써 결혼 이야기를 꺼낸다. 하지만 마르와는 “나는 꿈이 있는데 왜 일찍 결혼을 해야 하냐”라고 말한다. 전쟁의 아픔 속에서도 씩씩하고 밝게 컸지만 이웃들에게서 들은 아이들의 사정은 또 달랐다. 한국에 들어와 언어 장벽과 부족한 서류 탓에 한동안 학교에 나가지 못하다 보니 아이들은 초기에 방황했다. 요즘도 마르와는 자주 가위에 눌린다. 혼자서 화장실에 가는 것도 힘들어한다. 파흐드는 한국 정착 초기에 정서적인 변화가 심했다. 지역 아동센터 관계자는 “아이들은 적어도 2년간 꾸준히 심리상담을 해야 하는 상태인데, 상담비용을 지원받을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난민인권센터에 따르면 한국 정부에 난민 지위를 신청한 시리아인은 지난해 말까지 1326명. 이 중 4명만 공식 난민으로 인정받아 혜택을 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공식 난민 지위를 주지 않고 임시비자만 발급하는 시리아인들에게 인도적인 차원에서 초기 정착 비용을 지원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난민 지원 기관 피난처의 오은정 간사는 “정부가 마르와 가족처럼 임시비자로 국내에 거주하는 난민 아이들에게 건강보험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대전=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2011년부터 7년 넘게 이어지는 시리아 내전 속에서 10대를 보낸 청년들은 가족과 친구를 잃는 아픔 속에서 자신을 다잡으며 성장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4일 유니세프한국위원회를 통해 시리아 현지에서 내전의 고통을 겪어내고 있는 청년 3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이제 20대로 훌쩍 자란 청년들은 혼란을 ‘음악’, ‘사진’. ‘글’로 이겨냈다고 말했다. 처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생명의 존엄함을 깨닫고 서로를 돕는 가운데 ‘인류애’를 배웠다고 했다. 다음은 청년들이 시리아의 현실과 자신의 성장기를 담아 본보에 전해온 편지.■건축학도 라님 무함마드 씨(19)의 편지“전쟁은 저를 강하게 만들어 줬어요.” 안녕하세요. 저는 건축학을 전공하며 어린 시절의 꿈을 이뤄가던 대학교 1학년 학생이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살고 있는 복잡한 현실 대신 단순한 세상을 새롭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저는 이런 큰 꿈을 갖고 있었지만 삶은 제게 더 큰 시련을 줬습니다. 저는 대학 첫 학기에 학과 우등생이었습니다. 고향 알레포로 전쟁이 다가오기 시작했을 때 저는 매우 열정이 크고 결단력도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알레포로 전쟁이 다가오기 직전 제가 느낀 감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날은 다른 날과 다름없이 시작됐습니다. 저는 시험을 준비하느라 밤을 새웠죠. 오빠는 차로 저를 학교에 데려다 줬어요. 시험은 잘 봤답니다. 그리고 오후 1시, 제 삶에 큰 충격이 닥쳤습니다. 학교가 공격을 받은 것이죠. 저는 살기 위해 뛰어가던 사람들의 비명을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그날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제 안의 무언가는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늘 저와 함께 산다고 생각했던 제 가슴 속 불꽃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우리 시가 공개하는 긴 사상자 명단을 보며 ‘다음엔 내 이름이 명단에 오르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혼수상태에 빠진 것 같았습니다. 미래에 대한 꿈, 희망, 소중한 친구, 삶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18세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저에게 힘을 준 사람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제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어요. 이 말은 항상 제게 힘을 줬습니다. 음악도 힘이 됐어요. 저는 갇혀 있다고 느낄 때마다 기타를 손에 쥐었습니다. 기타는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고 제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어요. 하지만 이것조차 곧 놓아야 했답니다. 어느 날 밤, 아빠는 우리 모두를 깨우고 “지금 가야만 해”라고 소리쳤습니다. 제가 아빠 목소리에서 그런 깊은 공포를 느껴본 건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폭력적인 전쟁이 도시를 덮쳤고, 우리는 삶을 버리고 모든 걸 뒤로 한 채 떠나야 했습니다. 저는 악몽을 꾸는 것 같았지만 악몽이 아니라 현실이었어요. 떠날 때 저는 기타를 찾았는데 아버지는 ‘그 어떠한 것도 가져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인 기타를 뒤로한 채 등에 옷을 짊어지고 떠났습니다. 차에 올라타며 마지막으로 집을 뒤돌아 봤던 기억이 납니다. 2년간 우리는 집에서 집으로 옮겨 다녔고 저는 이런 삶을 잊지 않으려 모든 열쇠를 갖고 다녔습니다. 많은 친구들과 친척이 나라를 떠났습니다. 우리 가족은 도시 외곽에서 살았고 저는 배움을 이어가기 위해 친척들과 도시에서 지냈습니다. 저는 항상 ‘가족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내 기타를 다시 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저는 좀비가 된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머지않아 강해져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국엔 한 지붕 아래 가족과 함께 살 수 있게 됐어요. 삼촌은 고향집에서 기타를 찾아 갖다 줬습니다. 다른 가족에게 기타는 중요한 물건이 아니었지만 제겐 안전한 안식처였습니다. 기타를 다시 품에 안으니 눈물이 났어요. 기타에게 ‘보고 싶었어’라고 속삭였습니다. 저는 제가 강해져 있음을 느꼈습니다. 제가 3학년이 됐을 때 새로운 장이 열렸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새로운 목적이 생겼어요. 제가 겪었던 힘든 일을 겪는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이죠. 저는 봉사에 대한 열정을 충족시켜줄 일을 찾았습니다. 이웃 어린이에게 기타를 가르쳤어요. 레슨을 통해 아이들이 저처럼 다시 일어나고 꿈을 포기하지 않고 적응하도록 도왔습니다. 지금, 저는 이제 건축가가 됐습니다. 7년 전 제가 이런 자리에 있으리라 누가 생각했을까요? 제가 겪은 모든 것은 저를 더 강하고, 단단하게 만든 시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믿음이 ‘죽음을 거부하는 도시’라는 청소년 지원 활동을 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저는 분쟁, 희망, 꿈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모임을 열었습니다. 이 활동으로 제 경험을 공유했고 힘든 사람들이 시련 속에서도 성공하도록 도왔어요. 시리아인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강한 정신력을 갖게 됐어요.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슬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지만 제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도 깨닫게 해 줍니다. 저는 어느 때보다 강하고 어떤 미래가 다가오더라도 이제 준비가 돼 있습니다. 지금은 편지를 쓰기 가장 좋은 시기랍니다. 저희 가족이 곧 돌아갈 고향집을 보수하고 있거든요. 난민이 된 지 약 8년. 학생이자 피난민 신분이었던 저는 이제 건축가이자 생존자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자긍심과 힘을 갖고 돌아가 제 무너진 삶의 조각을 다시 맞춰보려 합니다. 그리고 제 집은 저를 승리자라며 환영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제 자녀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에게 들려줄 것입니다. 아주 특별하지는 않은 이야기일지 몰라요. 하지만 제게는 충분히 특별합니다. 존경과 평화의 마음을 담아, 생존자 라님 무함마드■기계공학도 가비 마쇼 씨(23)의 편지 “카메라 렌즈로 세상을 보며 진실을 기록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가비 마쇼입니다. 시리아 하마 출신으로 현재 기계공학을 공부하려 홈스란 곳에 살고 있습니다. 또 유니세프에서 마련한 프로그램 ‘보이스 오브 유스’에 참여하며 사진 촬영과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시리아 분쟁은 제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부터 시작됐어요. 분쟁이 일어난 지 7년이 넘었고 저는 다양한 일을 겪었습니다. 분쟁 초기에 저는 한 번도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어린 남자 청소년으로서 분쟁이 이상했지만 또 재미있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마치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까요. 하지만 굉장히 고통스러웠습니다. 스릴과 흥분이 혼재된 국면은 무력 분쟁 수위가 높아지며 끝났습니다. 우리는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집을 떠난 몇 주 뒤 감사하게도 고향 집으로 되돌아 왔는데 무장한 남자들이 도시를 온통 무기로 뒤덮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뒤 저는 기계공학부에 입학했어요. 운 좋게도 제 고향에 있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답니다. 물 만난 고기처럼 대학 생활을 즐겁게 시작했어요. 사람과 도전을 배우는 시기였습니다. 시리아 전역에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웠어요. 또 제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내 기술과 에너지를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를 고민했습니다. 저는 친구들이 처한 상황과 그들이 거주한 지역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기 시작했습니다. 유니세프가 블로그 운영 및 사진 촬영 강좌를 제공하기 전까지 저는 스스로 배워야 했습니다. 당시 저는 사람들을 돕겠다는 마음과 제 에너지를 발산하기 위해 카메라를 활용했습니다. 작은 렌즈를 통해 저는 좀 전까지 마주하지 못한 세계를 발견했어요. 학업과 동시에 사진을 향한 저의 여정이 시작됐습니다. 사진은 전쟁이 사랑으로, 눈물이 웃음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게 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세상과 연결하는 창문이고 진실의 세계입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제 주변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 게 매우 중요해요. 그래서 저는 블로거 활동을 시작했어요. 제 말이 얼마나 영향력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 힘은 말 자체가 아닌 진실성에서 비롯됐어요. 저는 계속해서 아동권리, 아동 노동, 남녀평등, 청소년 및 사회에 관해 블로그에 글을 쓸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모든 게 글의 토대가 됐습니다. 제 인생을 바꾸고 제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게 만들어 준 카메라와 알파벳을 발명한 사람에게 감사합니다. 시리아의 젊은 청년으로서 저는 제 이야기가 들리길 바랍니다. 전쟁과 파괴가 중단돼 벽돌 하나하나가 쌓아지듯 우리나라도 재건되길 바랍니다. 이 세월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사람은 누구든 한 국가뿐 아니라 세상을 재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약학도 알리 압드 알라티프(20) 씨의 편지“전쟁이 유일하게 준 긍정적 영향은 인도주의를 깨닫게 해 준 점.” 설명하기 참 어렵네요. 그리고 이런 상황을 스스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수년이 걸렸습니다. 처음 시리아 전쟁이 시작됐을 때 저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어요.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죽음의 그림자가 온 나라를 뒤덮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실감했습니다. 미디어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죽음과 살상의 장면, 어린이와 여성의 유해, 그리고 도망치는 사람들 모습이 너무 선명하게 머리 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런 기억은 전쟁 속에서 자라난 세대에게 큰 난제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쉽게 잊거나 극복할 수 없습니다. 저는 상대적으로 전쟁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던 해안 도시 타르투스에서 살고 있어서 전쟁 발발의 중심지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확실히 알지는 못해요. 하지만 어린이들이 집과 가족,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잃는 사람들을 보며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온라인에서도 누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언쟁을 벌이고 목숨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것을 보며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여러 번 졸랐던 때가 기억나요. 어린 시절 저는 항상 악기를 유난히 좋아했죠. 그럴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제게 긴 잔소리를 했습니다. 악화되는 국가 경제와 물가상승, 그리고 우리 국민들의 가난에 대한 얘기였어요. 제가 음악을 배우고 싶어 하는 동안 어디에선가는 끼니를 때울 빵 한 조각을 찾고 있는 어린이도 있다는 것이었지요. 그 땐 아버지가 참 야속했지만 요즘 저는 아버지가 어릴 적 말씀해주신 이 모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떤 곳에선 어린이가 총알을 맞아 죽어가고 있는데 제 이웃 6세 아이는 생일선물을 갖고 싶다고 부모님께 조르고 있으니 말이에요. 수년간 벌어진 전쟁으로 시리아 국민들에게 죽음은 너무도 익숙한 이미지가 돼버렸습니다. 죽음이 이렇게 일상이 돼 버렸다는 사실이 너무 참담합니다. 전쟁이 수많은 사람들의 집을 빼앗아가는 바람에 저희 동네에도 많은 보호소가 생겼어요. 13세 마람이란 아이도 집을 잃은 어린이 중 한 명이에요. 요즘 마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마람의 부모님이 언니를 부양하기 어려운 탓에 강제 결혼을 시켜버리는 일입니다. 9세 이브라힘이란 아이는 3년 전 가족과 함께 알레포에서 대피소를 찾아 타르투스로 도망쳤어요. 알레포에서 소년은 전쟁 탓에 학교에 갈 수 없었는데 타르투스에선 공부를 할 수 있게 됐고 성적이 뛰어나다고 합니다. 이브라힘은 “타르투스에 와서 아빠는 직업을 잃었고 가족은 텐트에서 살지만 전쟁 소리로 가득했던 알레포 보단 여기가 훨씬 좋아요”라고 말합니다. 이브라힘은 의사를 꿈꾸며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어요. 이 끔찍한 전쟁이 우리 국민들에게 미친 유일한 긍정적인 영향은 시민사회를 활성화시켰다는 점, 그리고 인도주의 활동의 중요성을 알렸다는 점입니다. 국가의 난관 속에서도 캠페인 수백 개가 전국에서 시행돼 사람들을 돕고 있어요. 청년들이 배우고 성장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시리아인들의 기질을 높이 사고 싶어요. 전쟁과 피난의 압력 속에서 발명과 창작에 기여하는 젊은 시리아인들이 진심으로 자랑스럽습니다. 이 능력과 투지로 우리는 꿈꾸는 모든 것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2014년 어느 날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내전이 3년째 접어든 이곳의 한 초등학교에 다니던 7세 소녀 마르와는 수업 중 ‘쿵’ 하는 굉음에 교실을 뛰쳐나왔다. 위층에선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마르와는 아래층에서 수업을 듣는 한 살 아래 남동생 파흐드가 걱정됐다. 같은 반 친구의 손을 잡고 펑펑 울며 동생의 교실로 함께 뛰었다. 달려가던 도중 마르와 손에서 친구의 손이 힘없이 빠져나갔다. 친구는 무너지는 건물 파편에 맞아 쓰러졌다. 마르와는 “친구 가슴에서 숨이 꺼졌다. 급히 선생님께 말했는데 선생님은 자기 걱정만 하며 달아나 실망했다”고 말하며 울먹였다.마르와에게 전쟁은 소중한 것들을 앗아가 버린 괴물 같은 존재였다. 어느 날엔 할아버지와 아빠가 공들여 지은 4층 집이 폭격에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급히 안전한 곳으로 대피했다가 폐허가 된 집으로 돌아오니 마르와의 ‘보물 1호’ 고무 머리끈이 불에 녹아 거실 바닥에 눌어붙어 있었다. 마르와를 아끼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준 선물이었다. 마르와는 전쟁을 생각하면 이 장면이 가장 먼저 선명하게 떠오른다. 마르와는 불에 탄 집에서 아빠 사진이 담긴 묵직한 유리 액자만 꼭 껴안고 나와 피란길에 올랐다. 한국에서 일하느라 3년 넘게 보지 못한 아빠의 얼굴을 기억할 유일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전쟁은 무슨 색깔 같은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파흐드는 “빨간색”이라고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러면서도 그 이유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파흐드가 한국에 온 직후 심리 상담을 맡았던 대전 지역아동센터 관계자는 “아이가 시리아에서 참수 장면을 목격했다고 털어놨다”고 전했다.시리아 내전을 온몸으로 겪어낸 소녀 마르와 양(11)과 남동생 파흐드(10) 유세프 군(7) 삼남매를 어린이날(5일)을 앞두고 2일 대전의 자택에서 만났다. 아이들은 어린이날 계획을 세우지 못했지만 “이런 날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또래 한국인 아이들에게 ‘평화’는 공기처럼 익숙하지만 이 삼남매에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소중하고 특별했다.○ 빈집 근처, 첫 둥지‘파흐드네 집’.2일 대전의 한 주택 담벼락에는 한글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삐뚤빼뚤하지만 선명하고 또박또박한 글씨체였다. 가족의 둘째 파흐드가 이 집에 들어와 산 지 1년이 지나서야 적었다. 모국 시리아에선 전쟁을 피해 이 집 저 집을 옮겨 다녔던 파흐드가 마침내 ‘자필 문패’를 단 것이다. 파흐드는 “우리 집이 말이죠, 좀 넓어요”라며 수줍게 웃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느낌이 제일 좋다”고도 했다. 집에는 국경일도 아닌데 깨끗한 태극기가 걸려 있았다. 막내 유세프가 길가에서 주워온 태극기다. 가끔 친구들에게서 ‘넌 나라가 없는 애야’란 말을 들어서였을까. 유세프는 아빠에게 태극기를 꼭 달아 달라고 부탁했다.3년 전 삼남매 가족은 대전에 있는 이 마을에 첫 둥지를 틀었다. 아빠는 시리아 내전 이전부터 시리아와 한국을 오가며 한국 폐차를 시리아로 수입해 판매하는 사업을 했다. 한국에 출장을 왔던 2011년의 어느 날 시리아 내전이 터지면서 아빠는 한국에 발이 묶였다. 전쟁이 부른 생이별이었다. 아빠는 가족들을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밤낮없이 돈을 벌었다. 그리고 인천행 항공권을 시리아의 가족에게 보냈다. 유세프는 “한 번도 못 봤던 아빠가 생겼다”며 좋아했다. 전쟁에 관한 기억이 별로 없는 유세프는 누나나 형보다 더 잘 웃고 더 잘 먹었다. 덩치는 세 살 위인 형보다 더 컸다.10평이 조금 넘는 파흐드네 집은 매달 월세와 관리비 약 30만 원을 낸다. 집 안에는 식탁과 의자 외엔 별다른 가구가 없다. 방구석의 긴 의자에 옷들만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집 안에서 가장 화려한 물건은 거실 벽에 걸린 삼남매의 얼굴 그림. 엄마가 알록달록 밝은 색으로 손수 그려 가족사진 대신 걸었다.○ ‘전쟁 안 한다’는 말은 거짓말피란 온 아이들은 남한과 북한이 최근 종전선언과 평화를 논의하는 모습을 TV로 지켜봤다. ‘시리아가 한국처럼 휴전을 하면 어떨까’란 기자의 질문에 파흐드는 “휴전만 한 상태에선 ‘전쟁을 안 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시리아에선 ‘전쟁 안 한다’는 말이 나온 바로 다음 날에도 전쟁이 다시 일어났다”고 답했다.마르와는 고국의 친척들이 다칠까 봐 걱정돼 종전을 기대하면서도 전쟁이 끝날까 봐 두렵기도 하다. 시리아 난민들은 한국 정부로부터 임시비자(G1 비자)를 받아 전쟁 중에는 한국에 머물 수 있지만 전쟁이 끝나면 돌아가야 한다. 마르와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여성을 차별하는 고국으로 돌아가기가 싫다. 마르와는 “시리아에선 혼날까 봐 꿈을 갖지 못했는데 한국에서 아랍어-한국어 동시통역사란 꿈이 생겼다”고 말했다. 마르와는 한국어를 배운 지 약 3년 만에 대전지역 다문화 학생 한국어 대회에서 은상을 타기도 했다.가끔 고국의 할머니는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조혼 풍습에 따라 벌써 결혼 이야기를 꺼낸다. 하지만 마르와는 “나는 꿈이 있는데 왜 일찍 결혼을 해야 하냐”라고 말한다.전쟁의 아픔 속에서도 씩씩하고 밝게 컸지만 이웃들에게서 들은 아이들의 사정은 또 달랐다. 한국에 들어와 언어 장벽과 부족한 서류 탓에 한동안 학교에 나가지 못하다 보니 아이들은 초기에 방황했다. 요즘도 마르와는 자주 가위에 눌린다. 혼자서 화장실에 가는 것도 힘들어한다. 파흐드는 한국 정착 초기에 정서적인 변화가 심했다. 지역 아동센터 관계자는 “아이들은 적어도 2년간 꾸준히 심리상담을 해야 하는 상태인데, 상담비용을 지원받을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고 털어놨다.난민인권센터에 따르면 한국 정부에 난민 지위를 신청한 시리아인은 지난해 말까지 1326명. 이 중 4명만 공식 난민으로 인정받아 혜택을 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공식 난민 지위를 주지 않고 임시비자만 발급하는 시리아인들에게 인도적인 차원에서 초기 정착 비용을 지원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난민 지원 기관 피난처의 오은정 간사는 “정부가 마르와 가족처럼 임시비자로 국내에 거주하는 난민 아이들에게 건강보험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대전=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북한에 억류 중인 한국계 미국인 3명이 오늘(한국 시간 4일) 풀려날 것”이라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법무팀 소속인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이 3일(현지 시간) 밝혔다. 줄리아니 전 시장은 이날 방영된 폭스뉴스의 ‘폭스&프렌즈’ 인터뷰에서 “우리는 김정은을 충분히 이해시켜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 3명이 오늘 풀려나도록 했다”며 시점을 ‘오늘’이라고 못 박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날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한국계 미국인 석방 가능성을 시사한 데 이어 줄리아니 전 시장이 ‘오늘 석방’이라고 날짜를 구체화한 것이다. 북한 노동교화소에 수감돼 있던 김동철 목사, 김상덕(미국명 토니 김) 전 연변과기대 교수, 김학송 씨가 북한 당국에 의해 노동교화소에서 평양 외곽의 호텔로 옮겨졌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 밤 트위터에 “지난 정부가 북한 노동교화소에 인질 3명을 석방하라고 오랫동안 요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채널 고정(stay tuned)!”이라고 예고했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과 물밑 접촉을 이어온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계 미국인 3명의 석방을 정상회담 의제로 논의하겠다고 여러 차례 밝혀왔다.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