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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학계에서 ‘공격적 현실주의’로 유명한 존 미어샤이머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특이한 경력을 가졌다. 웨스트포인트 육사를 졸업하고 공군 장교로 5년간 근무했다(미국에는 교차 임관 제도가 있다). 비록 군 생활은 만족스럽지 못했다지만 군사 문제에 대한 전문적 식견은 그의 이론적 토대가 됐다. 국가는 단순히 생존이 아닌 패권을 추구하게 마련이라는 그의 냉혹한 국제정치 현실론도 군 경력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미어샤이머는 국가의 힘이란 대체로 국가가 보유한 군사력이고, 지금 세계에서 가장 압도적인 형태의 군사력은 단연코 육군이라고 강조한다. 전쟁 승리의 가장 중요한 군사력이 무엇이냐를 둘러싼 오랜 논쟁 과정에서 앨프리드 머핸의 ‘독립해군론’, 줄리오 두에의 ‘전략공군론’도 나왔지만 미어샤이머는 둘 다 틀렸다고 단언한다. 국가의 힘은 공군과 해군의 보조를 받는 육군력에 근거한다는 것이다.(‘강대국 국제정치의 비극’) 8일 새 정부 첫 군 수뇌부 인사는 한국 육군엔 또 하나의 ‘육치일(陸恥日·육군 치욕의 날)’로 기록될지 모르겠다. 해군 출신 국방부 장관에 이어 군 서열 1위인 합참의장에 공군 대장이 지명됐다. 여기에 육군 야전사령관 2명은 육사 대신 3사와 학군 출신이 임명됐다. 콧대 높은 육사 출신은 접시 물에 코 박아야 하는 신세가 됐다. 사실 육사로 대표되는 육군의 추락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김영삼 정부 출범과 함께 전광석화처럼 단행된 하나회 숙군은 그 시작이었다. 대통령 왈 “니들도 많이 놀랐제?” 실제로 청와대 수석들조차 깜짝 놀랐다. 하나회 척결이 없었다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도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군의 중심은 대구경북(TK)에서 부산경남(PK)으로 넘어갔다. 충청도 출신 공군 대장을 합참의장, 국방부 장관에 기용하기도 했지만 여전한 육군 기세에 맥을 못 췄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은 호남 장교들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억눌린 지역의 한을 푼 것일 뿐이라지만 군의 정치권 줄 대기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뒤 이은 노무현 대통령의 육군, 특히 육사 불신은 컸다. 첫 국방부 장관으로 갑종장교 출신을, 두 번째 장관으로 해군 출신을 기용했다. 청와대의 인사 개입은 더욱 노골화했고 육군총장이 항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명박 정부 들어 육군은 패권을 되찾았다. 해·공군의 득세를 바로잡겠다고 나섰다. 영남 편중도 심해졌다. 육·해·공 3군 총장이 모두 영남 출신으로 채워지는 일도 벌어졌다. 이런 기조는 박근혜 정부로 이어졌다. 세간에서 ‘누나회’로 불린 하나회의 막내 기수이자 대통령 동생의 동기에서 중장 8명, 대장 3명이 나왔다. 바로 며칠 전 전면 퇴장당한 육사 37기다. 잠시 주춤했던 육군의 추락은 이제 다시 시작됐을 뿐이다. 수뇌부에 이은 후속 인사가 이어지면서 수모는 계속될 것이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30년간 폭압통치로 군림했다는 원죄(原罪) 딱지에다 태극기 집회에 등장한 육사 마크 깃발로 ‘적폐’ 이미지까지 덧씌워졌다. 이제 ‘닥치고 충성’만 있을 뿐이다. 육군에선 “전임 해·공군 출신 장관·의장 시절을 돌아보라. 앞으로 한국군 꼴이 어떨지 보면 안다”는 얘기가 나온다. 여전히 엘리트 패권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고지만 기우만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육군 출신 장관이 군 대비태세 같은 합참 업무까지 일일이 챙기며 타군 출신 의장을 ‘보좌’하는 일도 있었다. 한국군 전체 병력의 80%가 넘고 각 군 배분 예산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육군이다. 한국 군사력의 핵심 중추가 언제까지 날개 없는 추락만 계속할 수는 없다. 해·공군 출신 수뇌부가 불안하다면 더욱 잘 뒷받침해서 성공시키는 게 육군의 살길이자 한국군이 사는 길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좋게 말하면 천진난만하고 나쁘게 말하면 절망적이다.” 북한 태권도 시범단을 이끌고 방한했던 장웅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이달 초 돌아가면서 한 말이다. 키가 190cm에 가까운 팔순의 스포츠계 거물은 스포츠로 남북관계의 물꼬를 트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기대를 매몰차게 깎아내렸다. 말본새가 참 고약했다. 문 대통령의 ‘7·6 베를린 구상’ 발표 아흐레 만에 나온 북한 노동신문의 반응은 한술 더 떴다. “잠꼬대 같은 궤변” “철면피하고 누추하다”는 막말에 “맥도 모르고 침통 빼드는 얼치기 의생”에 비유했다.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온갖 상스러운 언사를 내뱉던 북한이다. 문 대통령에겐 ‘남조선의 집권자’라고 칭하니 이 정도면 양반이다.무늬만 같은 두 ‘伯林 연설’ 북한은 문 대통령의 대화 제의에 일언반구 대꾸도 없다. 시쳇말로 ‘개무시’다. 그러면서 미국엔 “핵미사일 선제타격” 운운하며 도발 카드를 만지작거린다. 이에 미국은 초강력 대북제재로 맞서고 있다. 문제는 이런 ‘도발 대 제재’의 대결 국면에서 태어난 베를린 구상의 운명, 즉 사주팔자가 기구하다는 점이다. 사실 베를린 구상은 그 원조 격인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과 비교하면 조산으로 태어난 미숙아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2000년 3월 9일 DJ가 베를린자유대에서 연설을 하던 바로 그 시각, 싱가포르에선 박지원-송호경 간 남북 비밀접촉이 이뤄지고 있었다. 베를린 선언은 남북 간 사전 정지작업과 교감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1998년 2월 취임 직후 남북 대화에 나섰다가 실패를 맛본 DJ 정부는 우선 햇볕정책에 대한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그해 6월 첫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제 한반도 문제는 김 대통령이 핸들을 잡아 운전하고 나는 옆자리로 옮겨 보조적 역할을 하겠다”며 DJ에게 운전석을 권유했다(임동원 ‘피스메이커’). 하지만 DJ가 실제로 운전석에 앉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당장 평안북도 금창리의 큰 지하땅굴이 비밀 핵시설이라는 의혹이 제기됐고, 대포동 1호 미사일까지 발사되면서 한반도는 위기에 휩싸였다. 그때 미국 대북정책조정관에 임명된 인물은 1994년 1차 북핵 위기 때 북폭(北爆)을 주장했던 강경파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이었다. 이후 과정은 문 대통령의 6·15 남북정상회담 기념식 축사에, 특히 사전 배포된 원고에 연설 직전 추가된 한 대목에 잘 요약돼 있다. “김 대통령은 이런 위기를 극복하고 미국 클린턴 행정부를 설득하면서 남북관계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주도적으로 닦았다.” 미국 동의나 양해 없이 남북관계는 한 치도 진전될 수 없음을 문 대통령도 알고 있는 셈이다.‘대화 vs 도발’ 다른 일정표 그런데 지금 문 대통령은 단 한 차례의 한미 정상회담으로 운전석을 확보했다고 믿는 것 같다. 당장 호응은 없어도 일관성을 보여주면 김정은 정권의 태도도 바뀔 것이라는 기대 아래 7·27 정전일, 8·15 광복절, 10·4 기념일로 이어지는 대북 제안 일정표를 고수할 생각인 듯하다. 하지만 북한이 ‘핵 무기화 일정표’를 양보할 가능성은 있을까. 이러다 미국마저 베를린 구상을 한낱 몽상으로 치부하는 건 아닌지, 그게 걱정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6일 한중 정상회담에서 “(우리는) 북한과 혈맹의 관계를 맺어왔고…”라고 말했다는 대목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발 직후에도 ‘혈맹’이라며 감싸다니…. 더욱이 최고지도자가? 전문가들은 “최근 북한 공식매체가 중국을 거명하며 비난해서 중국조차 경악하는 상황인데…”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10일 국회에서 “(시진핑이) 혈맹이란 단어를 썼지만 그것은 지금이 아닌 과거 북-중 관계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했다는 데서 의문이 다소 풀릴 것도 같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귀에 대고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라고 각인시킨 시진핑이니 그런 얘기도 할 법하겠다고 넘기려 했다. 한데, 그것도 아니란다. 혈맹, 폐기된 구시대 용어 정상회담 배석자에 따르면 ‘혈맹’이란 말은 아예 나오지 않았다. 시진핑이 과거 북-중 간 역사적 특수관계를 설명하며 그렇게 해석할 만한 언급은 했지만 혈맹이란 말은 없었다고 한다. 중국 측은 이미 비공식 경로로 ‘허위 보도’를 바로잡아줄 것을 요구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작년 여름 더불어민주당 초선 의원들이 방중해 벌인 중국 학자들과의 토론회에서 ‘혈맹’ 발언이 있었느니 없었느니 논란이 벌어졌던 것과 판박이인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중국에서 과거 북-중 관계를 표현했던 ‘혈맹’은 1990년대 초 한중 수교와 김일성 사망 이후 공식 폐기됐다. 2003년 방중한 조명록 북한군 차수가 북-중 관계를 ‘피와 탄환’으로 표현하자 후진타오 주석은 ‘전통적 우의관계’라고 정정하기도 했다. 과거 역사를 얘기할 때 ‘피를 나눈’ ‘피로 맺은’ 같은 표현을 쓰긴 한다. 중국 권력서열 5위 류윈산도 재작년 방북 때 “피를 뒤집어쓰며 싸운 역사”를 거론했지만 ‘혈맹’이라곤 하지 않았다. 혹자는 피로 맺은 역사가 혈맹과 뭐가 다르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중국이 그렇게도 그 말을 쓰기 싫어하는 것은 더는 북한과 엮이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중국 학자들도 “강대국과 약소국 간 비대칭 동맹이었던 중조(中朝) 관계에선 개 꼬리가 개의 몸통을 흔드는 ‘미파요구(尾巴搖狗)’ 현상까지 나타난 미성숙한 국가관계였다”며 정상적 국가관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촉구한다.(선즈화 ‘최후의 천조’) 사정이 이런데도 한국은 죽은 ‘혈맹’을 끄집어냈다. 북-중 관계를 벌려놔도 시원찮을 판에 국제사회가 두 나라를 더욱 끈끈한 관계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당장 동북아엔 ‘한미일 대 북중러’ 대결 구도가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해설이 뒤를 잇고 있다.‘미담’ 둔갑한 외교 事故 청와대는 며칠 전 ‘대통령 순방 뒷이야기’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냈다. 그중엔 이런 내용도 있다. ‘한중 정상회담이 끝났을 때 김현철 경제보좌관이 크게 박수를 침. 이에 시진핑 주석이 깜짝 놀라고 문재인 대통령도 놀라서 바라봄. 김 보좌관은 중국과의 관계가 풀려가는 것을 보고 경제문제도 풀리겠다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고 밝힘. 정상회담장에서 수행원이 박수를 친 건 처음.’ 정상외교의 현장에서 벌어진 이해하지 못할 해프닝도 자랑스럽게 홍보하는 모양새다. 자료가 배포된 건 문 대통령이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한반도 문제인데도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해결할 힘이 없다”며 극도의 무력감을 표시한 바로 그날이었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차 독일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어제 취임 후 처음으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어 독일 쾨르버재단 초청 연설에서 북한을 향해 6·15선언과 10·4선언으로의 복귀를 촉구하는 ‘베를린 구상’을 발표했다. 문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지금까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중국의 역할을 평가하지만 앞으로 중국이 더 많은 기여를 해줄 것을 요망한다”며 ‘중국 역할론’을 강조했으나 시 주석의 동의를 얻어내지는 못했다. 시 주석은 북한과 혈맹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라면서 “충분히 노력을 하고 있는데 국제사회가 중국의 노력 부족을 비난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특히 시 주석은 미국의 책임론을 강하게 주장했다. 시 주석은 “북핵 문제는 한국과 북한의 문제가 아니라 북한과 미국의 문제로 파악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북한의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발로 한반도 안보 패러다임이 바뀌었지만 중국의 주장은 예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다. 지난해 9월 북한의 5차 핵실험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2321호)로 대북 제재가 훨씬 강화됐지만 올해 1∼5월 북-중 무역은 지난해보다 되레 늘었다. 시 주석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에 대해선 “중국의 정당한 우려를 중시하고 적절히 처리하기 바란다”며 배치 철회를 압박하기도 했다. 5일(현지 시간) 열린 유엔 안보리에서 중국과 러시아는 “무력 사용은 옵션이 아니다”며 미국의 강경 대응책에 반발하기도 했다. 미국은 중국에 대북 원유 공급 중단을 비롯한 대북 교역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북한 무역의 90%를 차지하는 중국을 통한 경제 봉쇄를 요구하며 이를 어긴 중국 기업에 대한 제재(세컨더리 보이콧)도 불사하겠다는 자세다. 중국의 근본적 태도 변화 없이는 기고만장한 북한의 도발을 막기는 어렵다. 이런 가운데 문 대통령은 베를린 연설에서 북한의 ICBM 도발에 실망감을 표시했다. “북한이 핵 도발을 중단하지 않으면 더욱 강한 제재와 압박 외엔 다른 선택이 없다”며 북한의 안전도 보장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완수라는 목표 아래 다양한 남북 교류 제안을 내놓았다. 당장 7·27 정전협정 체결일에 적대행위 중단을 선언하고 8·15 광복절에 민간 공동행사를 재개하며, 10·4선언 10주년이자 추석 명절에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내년 2월 평창 겨울올림픽 참가를 제안했다. 북한의 도발로 연설문을 대폭 수정했다지만 크게 바뀐 것 같지 않다. “언제 어디서든 김정은을 만날 용의가 있다”며 3차 남북 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의지도 피력했다. 비슷한 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한의 나쁜 행동에는 반드시 결과가 있을 것”이라며 북한을 향해 ‘매우 혹독한 조치’를 경고했다. 앞서 니키 헤일리 주유엔 미국대사는 “필요하다면 군사수단도 동원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북한의 ICBM 도발 직후 나온 문 대통령의 ‘베를린 구상’이 자칫 동맹국인 미국과 국제사회에 잘못된 메시지를 던지는 것 아닌지 우려스럽다. 향후 대북 압박을 둘러싼 ‘한미일 대(對) 중러’ 간 대치전선이 형성된다면 북한은 이를 틈타 추가 도발을 감행할 가능성도 높다. ‘주도적 역할’을 자임한 문 대통령은 이런 고난도 외교전쟁의 조정자 역할을 제대로 해내야 한다. 그 시작은 동맹국과의 긴밀한 공조일 것이다. 문 대통령의 ‘베를린 구상’이 미국은 물론이고 북한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공허한 수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첫 만남의 의례적 악수 하나로 상대를 놀라게 하거나 민망하게 만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재주라면 참 별난 재주다.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이 “뭐 악수만 잘하면…”이라고 했다지만 그 농담 속엔 긴장감도 담겼으리라. 하긴 정상회담장에 큰 개를 풀어놓은 러시아 대통령도 있으니 그에 비하면 약과일 수도 있겠다. 트럼프보다 버거웠던 부시14년 전 노무현 대통령에겐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트럼프 못지않게 버거운 사람이었다. 40세 나이에 거듭 태어난(born again) 기독교 신자인 데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가진 네오콘(신보수주의) 세력에 둘러싸인 부시였다. 아무리 ‘Mr. 예측불가’라 해도 비즈니스맨 출신 트럼프와는 딜(거래)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북한을 극도로 혐오한다는 신념의 근본주의자 부시를 상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2003년 5월 노무현-부시 첫 만남은 다행히 나쁘지 않았다. 이미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부시와의 회담에서 크게 데었던 탓에 노무현은 북한의 학정을 비판하는 부시에게 “나도 김정일을 생각하면 짜증이 난다”고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부시도 친근감을 강조하기 위해 노무현을 ‘대화하기 쉬운 사람(easy man to talk with)’이라고 했다가 국내에선 “대체 얼마나 양보했기에 ‘만만한 사람’이란 소리를 듣느냐”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한승주 ‘외교의 길’)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마냥 순탄할 리 없었다. 노무현은 부시의 심사를 건드리는 말도 거침없이 쏟아놓았다. 정상회담을 앞두고 “핵무기 개발이 방어용이라는 북한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는 폭탄 발언을 했다가 부시를 만나 해명하는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부시를 끈질기게 채근해 앞으론 언론에 ‘Mr. 김정일’로 호칭하겠다는 마지못한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최악의 만남은 2005년 북핵 6자회담이 미국의 방코델타아시아(BDA) 금융제재로 벽에 부딪힌 이후 열린 회담이었다. 두 정상은 굳은 얼굴로 험한 논쟁을 벌였다. 노무현은 “각하는 북한에 대한 전략적 고려나 전술적 접근보다는 철학적으로 김정일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같다”고 던졌고, 부시는 “맞다. 나는 싫다면 싫다. 둘러대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응수했다. 이후 노무현은 부시와의 회담을 극도로 꺼렸다. “만나봐야 서로 말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거리만 더 멀어질 것이다”라며 거부했다. 송민순 당시 청와대 안보실장의 거듭된 건의에도 “왜 자꾸 대통령을 갋으려 하느냐”고 짜증을 냈다. 결국 “귀찮아서 안 되겠다”며 수락했고, 10개월 만에 이뤄진 재회동은 성공적이었다.(송민순 ‘빙하는 움직인다’) 노무현은 미국인을 만나면 자신의 성향에 대한 ‘오해’를 풀려고 애를 썼다. 임기 말엔 “나는 요구가 많은 친미주의자”라고 스스로를 규정했다. 이라크 파병, 주한미군 재배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같은 굵직한 친미적 정책이 모두 그의 재임 시절 이뤄졌으니 억울할 만도 했다. 미국 없이 北 못 움직인다하지만 “반미면 어떠냐”던 그가 친미를 자처한 진짜 이유는 미국을 통하지 않고서는 북한을 한 치도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6자회담에서 북한은 오직 미국만 상대하려 했다.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문재인표 대북정책도 미국 없이는 어렵다.}

노무현 정부 초기였나 보다. 한 미국인이 불쑥 물었다. “너희 대통령 이름이 ‘로’가 아니라 ‘노’라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영문 이름을 ‘Roh’로 표기하지만 ‘No’로 발음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일종의 관행이고 내 이름도 ‘이’지만 ‘리(Lee)’로 쓴다고 설명하자 “흥미롭다”면서도 다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우리 표기는 ‘로무현’ ‘리명박’ 등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는 북한식에 더 어울리긴 하다.“Roh라고? No가 맞지!” 이런 궁금증은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스피치라이터를 지낸 윌리엄 새파이어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의 글 주제가 되기도 했다. 새파이어는 노무현 대통령 이름을 놓고 ‘Roh냐, Noh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칼럼에서 호기심을 유감없이 쏟아냈다. 여기저기서 취재한 내용을 종횡무진 늘어놓으며 노태우 전 대통령이 초급장교 시절 자신의 인식표에 새겨진 ‘No’를 보고 “나는 긍정적인 사람”이라며 ‘Roh’로 바꿨다는 에피소드까지 찾아냈다. 그의 결론은?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라 했는데, 대다수 한국인에게 들리는 대로 쓰면 된다. ‘노’라고 부르면서 일관성을 위해 ‘No’로 쓰거나, 이국적 취향을 풍기게 ‘Noh’로 쓰면 될까? 난 ‘yes’다.” 미국인이야 한국식 표기가 이상할지 모르겠지만 남의 나라 대통령 이름을 가지고 가벼운 조롱을 늘어놓더니 결국 제멋대로 쓰겠다는 대목에선 할 말을 잃게 했다. 오래전 얘기가 새삼 떠오른 건 문재인 대통령 당선 직후 외신들이 새 정부의 대북정책으로 지칭한 ‘달빛정책(Moonshine Policy)’에서 묻어나는 꺼림칙한 뉘앙스 때문이다. 문 대통령의 이름 ‘Moon’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Sunshine Policy)’을 조합해 만든 말이지만, moonshine은 미국에서 금주법이 시행되던 시절 한밤중 달빛 아래 몰래 만드는 밀주(密酒) 위스키를 뜻한다. 사전에는 ‘터무니없는 말, 헛소리’라는 의미도 나와 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선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부터 북한의 은밀한 외화벌이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돼 왔다. 데이비드 애셔 전 국무부 자문관은 북한의 위조지폐, 위조담배, 마약거래, 무기밀매 같은 범죄활동을 ‘달빛경제(moonshine economy)’라고 이름 붙였다. 나아가 빅터 차 전 백악관 아시아담당 국장은 햇볕정책의 단물을 빼먹으면서도 개혁·개방은 철저히 차단하는 북한식 대응을 ‘달빛정책’으로 칭하고, 대표적 사례로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을 꼽았다.(‘불가사의한 국가’·2012년)‘햇볕’에 北 ‘달빛’ 재가동? 사정이 이럴진대 외신들이 문 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달빛정책’이란 이름을 붙였을 때 그 근저엔 새 정부에 대한 의구심 같은 게 깔려 있었던 건 아닐까 싶다. 적어도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행간에서 그런 뉘앙스를 읽었을 것이다. ‘Roh냐, No냐’라는 유별난 관심도 사실은 “반미(反美)면 어때?”라던 한국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에서 나왔던 것처럼 말이다. 문 대통령은 이달 말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과의 포괄적 협상 의지를 천명했다. 이런 햇볕정책 복원 의지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그 참모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결과적으로 북한판 달빛정책도 재가동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부터 내놓지 않을까 걱정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 있다. 우리는 공공행사의 국민의례 때나 이 맹세를 외지만 미국 공립학교 학생들은 매일 수업 시작 전에 “나는 미합중국 국기와 … 충성을 맹세합니다”라는 맹세를 암송한다. 위헌 논란 탓에 ‘자발적’이라곤 하지만 미국 대부분 학교에서 여전히 준수되는 의식이다. ▷지배자에 대한 충성맹세는 고대부터 관습법으로 대략 12세 이상 모든 사람에게 요구해 왔다고 한다. 배신자나 불충세력을 가려내기 위한 일종의 끊임없는 테스트였다. 중세 봉건시대에 가신이 주군 앞에 무릎을 꿇고 다짐하는 충성서약도, 야쿠자 같은 조직폭력배에서 한 잔의 술을 나눠 마시거나 심지어 손가락까지 자르는 광적인 의식도 결국 주군이나 보스에 대한 배신을 막는 데 목적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로 표현되는 충성의 대상은 국기가 상징하는 국가와 국민, 나아가 국가 이념이다. ▷“나는 충성(loyalty)을 원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직후 백악관에서 제임스 코미 당시 연방수사국(FBI) 국장에게 러시아 내통 의혹 사건의 수사를 중단하라며 사실상 충성맹세를 요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코미의 답은 이랬다. “대통령은 저로부터 항상 정직함(honesty)을 얻을 겁니다.” 트럼프 개인의 사복(私僕)이 아닌, 대통령에 대한 공복(公僕)으로서 나름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거듭 ‘정직한 충성’을 요구했다고 코미는 증언했다. ▷새로 집권한 통치자라면, 그것도 공직 경험이 없는 부동산 재벌 출신 대통령이라면 충성맹세를 요구하는 게 전혀 무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권력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정(司正)기관의 수장이라면 그 권력의 줄을 덥석 잡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코미는 국가가 아닌 권력자에 대한 ‘위험한 충성’을 거부했다. 물론 그 뒤엔 권력에 굴복하지 않는 FBI 독립의 오랜 역사가 든든한 버팀목으로 받쳐줬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문재인 대통령은 ‘매우 충격적’이라고 말했습니다.”(윤영찬 대통령국민소통수석비서관) 아마도 문 대통령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직접적 반응까지 소개한 청와대 브리핑은 취임 이래 처음이 아닐까 싶다. 청와대로선 문 대통령의 ‘격노’를 나름대로 절제된 표현이라며 발표한 것이리라. 이후는 일파만파다. 민정수석비서관실이 곧바로 진상조사에 나섰고, 하극상이니 국기문란이니 후속 반응도 거세다. 당장 집권여당도 국회 청문회를 추진하겠다고 나섰다.노무현 스타일의 부활? 충격은 국방부와 군을 더 큰 쇼크로 강타했다. 군인들은 멘붕 상태다. 여파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외교안보 부처는 물론이고 전체 관료사회로 번지고 있다. 둔감한 이들조차 “아, 정권 바뀌었지. 실감나네”라고 토로한다. 청와대가 노린 것은 이런 연쇄효과일지도 모른다. 관료들은 이제 서서히 과거 노무현 정부 스타일의 부활을 예감하는 분위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외교안보 정책에서도 투명성을 매우 강조했다. 정책 결정이 과거 제왕적 권력 시대처럼 밀실에서 비밀스럽게 이뤄져선 안 된다며 민감한 사안도 국민적 공론화를 거치도록 했다. 그리고 국민 여론과 부처 정책을 조정하는 기능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에 맡겼다. 당연히 청와대에 힘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문 대통령 인식의 근저에도 그 시절이 깔려 있다. 대선 공약집은 ‘국민외교’를 표방했다. 지난달 주요 국가에 특사를 보내면서도 정치적 정당성과 투명성을 역설했다. 특히 “새 정부는 피플파워를 통해 출범한 정부라는 의미를 강조해 달라”고 주문했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새 정부는 과거의 밀실 합의를 재검토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시켜 달라는 뜻이다. 하지만 투명한 정책 결정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비밀주의에 익숙한 부처의 자율성은 크게 제한당했고 커리어 외교관과 유니폼 군인들에 대한 불신은 커졌다. 그러다 보니 담당 부처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왕따’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여기에 자주파와 동맹파 간 갈등이 겹치면서 청와대마저 이념의 전쟁터가 됐다. 문 대통령은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으로 이 과정을 줄곧 지켜봤다. 특히 민정수석 시절 용산 미군기지 이전 협상을 둘러싸고 거센 갈등이 표출됐을 때 NSC와 국방부, 외교부에 대한 조사 책임을 맡았다. 당시 선혈 낭자한 싸움판 같은 분위기에서도 문 수석은 균형감을 보여줬다는 게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군사전문가 김종대(현 정의당 의원)의 ‘취재 결과’다. 문 수석은 공직기강비서관의 조사 보고를 받은 뒤 서로 상반된 입장을 다시 경청했고, 당초 한쪽 시각에 경도돼 있던 17쪽짜리 보고서를 균형 있게 6쪽으로 요약해 올렸다. 문 수석 보고서에 대한 노 대통령의 반응은 어땠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느 쪽 주장이 옳은지 모르겠다.”(‘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2010년)‘맹탕 文수석’의 변화? 흥분하지 않고 어디에 쏠리지 않는, 그래서 대통령마저 헷갈려하는 맹탕 보고서를 만든 게 ‘문재인의 성정(性情)’이었다. 그랬던 문 대통령이 노기를 드러냈다. 민정수석실 조사로 어느 쪽 거짓말인지, 아니면 의사소통의 혼선인지는 드러날 것이다. 한데 더 궁금한 게 있다. 과연 무엇이, 누가 문재인의 평정심을 깼는지…. 참모와 대통령은 다르기 때문만일까.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 문재인 정부 새 외교안보팀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청와대 국가안보실과 대통령특보 등 이른바 대북 대화파 중심의 인선이 진행되면서 미국의 제재 움직임과 엇박자를 내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소리가 나온다. 과거 노무현 정부가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사사건건 갈등을 빚었던 시절을 떠올리는 이도 많다. 김영삼 정부에서 초대 외무부 장관, 노무현 정부에서 초대 주미대사를 지낸 한승주 고려대 명예교수(77)가 회고록 ‘외교의 길’을 출간했다. 1994년 1차 북핵 위기, 2003년 2차 북핵 위기 때 최일선 외교 현장에 있던 북핵 외교의 산증인이다. 그는 책에서 장관 땐 북한에 강경책을 주장하는 김영삼 대통령과 온건책을 선호하는 빌 클린턴 정부 사이에서, 거꾸로 대사 땐 부시 행정부의 강경책과 노무현 정부의 온건책 틈새에서 고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문 대통령 균형 잡힌 외교해법을―지금까지의 외교안보팀 인선을 보면 노무현 정부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누가 어떤 포지션에 임명됐느냐는 것보다는 누가 무엇을 하느냐, 또 팀이 있다면 그 팀과 체제가 어떻게 운영되느냐, 누가 어떻게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지가 관건이다. 그런 면에서 아직 골격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본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대체로 이념에 편향되지는 않은 것 같다.” 한 전 장관은 회고록에서 “노무현 정부 초 청와대에서 외교안보를 담당하는 사람이 세 명(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 나종일 국가안보보좌관, 반기문 외교보좌관)이나 있어 노 대통령이 ‘골치 아파서 못 살겠다’고 토로했다”고 썼다. 대북정책도 외교부가 아닌 청와대가 주도하고 외교부는 소외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에겐 북핵 경험이 없다. “노 대통령은 초기 윤영관 외교부 장관을 기용했다. 누가 들어오든 소위 자주파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 생각했을지 모른다. 윤 장관이 자기주장을 안 할 걸로 봤는데 노 대통령도 나중엔 실수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워싱턴에서 ‘탈레반’이라고 불렸던 자주파와 갈등을 빚은 윤 장관은 1년이 채 안 돼 경질됐다.) ―통일외교안보 특보도 홍석현 전 중앙일보·JTBC 회장과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 2명이 임명됐다. 옥상옥(屋上屋)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그 두 사람도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다. 그 사람들이 컨트롤타워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뱃사공이 여럿이 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새 정부가 햇볕정책 계승을 천명하고 있고, 외교안보팀에도 대화파 일색이다. 개성공단·금강산관광 재개 얘기도 나온다. “햇볕정책은 이행 과정에서 북한에 어떤 혜택을 제공하느냐에 문제가 있었다. 서독도 동독에 차관도 주고 원조도 했지만 언제고 필요할 때 발을 뺄 수 있는 합의만 했다. 개성공단 같은 불가역적(irreversible) 약속을 해선 안 됐다. 최악의 경우 서독에선 돈을 좀 떼이면 되는 것이었지만 개성공단은 사람이 인질로 될 수밖에 없다.” ―새 정부의 정책 방향은 어때야 하나. “문 대통령도 그동안 얘기해 온 자신의 견해가 있겠지만 대통령이 된 만큼 그동안 믿었던 게 다 옳다고 속단하거나 고집할 일은 아니다. 좀더 넓은 시각에서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생각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을 폭넓게 만나 해법을 찾는 데 시간을 쓸 필요가 있다.”美, 北 ICBM저지로 끝낼지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새 대북정책 ‘최고의 압박과 개입(Maximum Pressure and Engagement)’을 어떻게 평가하나.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 선언이 완전한 검토·분석을 거친 결과물로서 하나의 연결된 전략으로 심사숙고해서 나온 전략은 아니지 않나 싶다. 특히 인게이지먼트(개입)의 뜻은 광범위하고 모호하다. 한편으로 협상도 하지만 어떤 것에 몰두해 관심을 집중시킨다는 뜻이다. 대화나 협상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관심을 갖고 매달린다는 뜻에서 썼다고 본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의 핵·미사일 동결에서 북과 대화를 시작하자는 인식으로 보인다. “미국에서도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지금 단계에서는 일단 동결로 시작하자는 것인데, ‘북핵 완전 폐기’를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을 두고 결국 제재를 풀어주든지 늦춰주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 미국도 국무장관 말이 다르고 유엔 대사 말이 다르다. 원래 트럼프 대통령이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미국과 우리의 이익이 엇나갈 수 있다.” ―우리 국익과 엇나갈 수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미국으로서는 가장 큰 위협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다. 버락 오바마 정부까지도 완전 폐기를 원칙으로 했는데, 이제 미국이 북한에서 ICBM을 안 하겠다고 확약 받는 대신 동결 수준에서 멈추고 제재를 풀어준다는 딜(deal)이 이뤄졌을 때 우리는 어떻게 되겠나. 우리로서는 북한이 가진 핵과 미사일 자체가 위협이다. 미국이 중국과의 레버리지를 ICBM 개발을 막는 데 소진하면 우리가 만족할 만한 해결이 안 될 가능성도 있다.” ―미국이 동결 수준에서 손 털고 나갈 수도 있다고 보는가. “트럼프 대통령 성향으로 봐서는 그럴 수도 있다.” ―협상의 출발은 동결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론도 나온다. “빵 10개 얻으려다 하나도 못 얻느냐, 다 잃는 것보다 반쪽이라도 얻는 게 나으냐는 문제일 수 있다. 동결을 전제조건으로 한다면 그것에 어떤 반대급부를 부여하느냐에 한미 간 철저하고 긴밀한 협의가 있어야 한다.”첫 韓美 정상회담 신뢰가 중요 ―당장 문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클린턴이나 부시 전 대통령도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점잖은 사람이었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다른 사람이다. 그가 생각하는 미국의 이해, 그의 성품이 어떤지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정상회담으로 여태 안 풀리던 문제를 푼다든지, 없던 약속을 받아내긴 어렵다. 서로의 됨됨이를 파악하고 인간적 관계, 가능하면 신뢰관계를 조성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특히 첫 회담에서는 귀국해서 이런 걸 얻어냈다고 자랑하는 데 급급하지 않아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장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 증액,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도 요구할 것이다. “이런 문제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처럼 배치하느냐 안 하느냐는 가부의 문제가 아니고 얼마나 올리느냐의 문제여서 협상의 여지가 있다. 정치적으로는 너무 많이 증액한다고 비판이 나올 수는 있겠지만 증액 자체를 반대한다는 얘기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어땠나. 지금과 비슷한 상황인데…. “노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과의 첫 정상회담 때 비록 외교 아마추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조언을 잘 가려서 듣고 소화해 꽤 생산적인 회담을 했다.”(노 전 대통령은 첫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이 김정일에 대해 부정적 언급을 하자 “나도 김정일을 생각하면 짜증이 납니다”라고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고 한다.) ―실제로 ‘반미(反美)면 좀 어떠냐’던 노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친미적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책에선 ‘대통령이 진보 진영 출신이어서 오히려 유리한 입장이었다’고 썼는데…. “만약 이명박 대통령 때 이라크 파병이 결정됐다면 어땠을지 상상해 보라. 반대세력이 거리에 드러눕고 자해하고 요란했을 것이다. 나는 당시 미국 쪽에 그런 점을 강조했다. ‘노 대통령의 언사가 과격하기 때문에 바로 이렇게 좋은 행동도 나올 수 있다’고 얘기했다.”실용주의 외교가 살길이다 ―한때 미중이 밀월관계였지만 미군이 남중국해에서 ‘항행의 자유’ 작전에 들어가고 중국은 대북제재에서 발을 빼려는 분위기도 보인다. “미국도 중국도 서로 상대방을 결정적으로 자극하지 않으면서 강하게 나오는 척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다. 각각 국내(정치)적 입장이 있고 군부가 있으니 양쪽을 어루만지며 만족시키는 조치를 취한다고 볼 수 있다. 미중 밀월 시기가 끝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드 문제 해결이 당장 현안이다. “중국이 이 문제로 계속 몽둥이를 휘두를 수는 없는 만큼 명분을 찾아 해결책을 찾으려 하겠지만 갑자기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사드 배치는 한국의 결정이기도 하지만 미국의 안보이익과 직결된 문제다. 우리도 중국을 납득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미중 간 양해가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다.” ―새 정부는 사드 배치의 국회 비준을 추진할 방침이다. “국회 비준은 한미 동맹을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텐데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영토를 넘겨주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미군을 증강한다든지 다른 무기가 들어올 때마다 국회 비준을 해야 한다면 정부가 어떻게 일을 할 수 있겠는가.” ―4월 ‘한반도 전쟁 위기설’이 나왔을 때 누구나 1994년 1차 북핵 위기를 떠올렸다. “1994년에는 북한의 핵폭탄 자체가 없었고 미국의 선제공격 성공 가능성은 지금보다 훨씬 컸다. 그런데 지금은 선제공격을 할 경우 북한이 죽자 사자 덤비면서 주일 미군기지와 남한을 공격하면 피해가 클 수밖에 있다. 4월 위기설은 결국 미국과 북한이 서로 근육을 과시하는 경쟁이었다.” 한 전 장관은 한때 외교 무대에서 직접 ‘선수’로 뛰기도 했지만 50여 년간 대학에서 국제정치와 외교를 연구한 학자다. 그는 우리가 갈 길은 ‘실용주의 외교’라고 강조한다. ―역대 대통령 중 실용의 리더십을 보인 ‘외교 대통령’을 꼽는다면…. “사실 6·25전쟁을 겪고 냉전체제 속에서 실용외교를 구사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냉전 종식과 더불어 노태우 대통령은 북방정책을 통해 이념을 초월한 실사구시 외교를 추진할 수 있었다. 소련 중국과의 수교, 유엔 가입 등은 실용외교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정치적인 쇼를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중요한 결정을 하는 게 바로 실용외교일 것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며칠 전 문재인 대통령이 매슈 포틴저 미국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선임보좌관과 청와대에서 7분간 대화를 나눴다. 정의용 청와대 외교안보 태스크포스(TF)팀 단장이 포틴저와 만나는 회의장에 문 대통령이 잠시 들러 짧은 인사를 나누는 형식이었지만, 포틴저는 정식 대통령 예방(courtesy call)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황송하게도 문 대통령을 뵐 수 있어 영광이었다”는 외교적 감사 표시도 잊지 않았다.백악관 젊은 실세에 ‘예우’ 포틴저 방한을 앞두고 청와대에선 문 대통령이 43세의 차관보급 인사를 직접 만나는 게 격(格)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도 나왔다. 그래서 이런 비공식 접견 방식을 택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그제 백악관 집무실에서 홍석현 대통령특사를 만났다. ‘러시아 스캔들’로 탄핵까지 거론되는 정치적 위기 속에서, 주의력 지속 시간이 5분도 안 된다는 트럼프 대통령이 15분이나 면담 시간을 할애했다. 여기엔 포틴저에 대한 우리의 예우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사실 포틴저는 그만큼 배려해줘도 될 만한 상대다. ‘최고의 압박과 개입’이라는 트럼프 행정부의 새 대북정책을 비롯한 아시아정책 총괄 업무를 사실상 혼자 도맡아 하는 핵심 실세이기 때문이다. 출범 4개월이 되도록 국무부와 국방부의 아시아정책 라인이 공석인 데다 백악관마저 국가안보보좌관이 마이클 플린에서 허버트 맥매스터로 바뀌면서 이전 NSC 멤버에 대한 물갈이로 어수선한 상황에 포틴저는 ‘플린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포틴저는 독특한 경력으로 임명 때부터 주목받았다. 로이터통신과 월스트리트저널의 중국 특파원으로 일하다 공안에 붙잡혀 흠씬 두들겨 맞기도 했고, 서른이 넘어 해병대에 장교로 입대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경험한 야심가다. 아프간에선 기자 시절의 취재력과 글솜씨로 탁월한 정보보고서를 작성해 당시 지휘관이던 플린 장군의 눈에 들었고, 백악관에 입성해선 트럼프 대통령의 신임까지 얻어냈다. 중국도 포틴저의 영향력을 모를 리 없다. 포틴저는 방한에 앞서 베이징에서 열린 ‘일대일로(一帶一路) 국제협력 정상포럼’에 참석했는데, 시진핑 국가주석도 잠시 시간을 내 포틴저를 만났다. 시 주석은 우리 대표단 단장 박병석 의원을 안부 접견이라는 뜻의 ‘한쉬안(寒暄) 회동’으로 5분가량 만난 것과 같은 수준에서 포틴저를 예우했을 것이다. 중국은 정상포럼에 정상급이 참석하지 않은 국가 중 일부 대표에게 이런 약식 접견 기회를 줬다. 시 주석은 어제 이해찬 대통령특사를 만나서도 40분 동안 대화를 나눴다. 과거 우리 특사가 방문했을 때 나란히 앉았던 것과 달리 시 주석이 상석에 앉아 회의를 주재하듯 좌석을 배치한 것을 두고 외교적 결례가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 한국 정부와는 상종도 않겠다던 중국의 태도에 비하면 확연히 달라진 것만은 분명하다.환대 후 날아올 청구서는? 의전은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다. 거기엔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주는 만큼 받겠다는 기대가 깔려 있다. 이제 특사들이 돌아오면 경쟁적으로 자신들이 받은 환대와 호의에 대해 자랑스레 얘기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외교에 공짜 의전은 없다. 이후 날아올 청구서가 걱정이다. 더욱이 그게 우리 지불능력을 벗어나는 것이라면.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한반도가 긴장에 휩싸일 때면 늘 회자되는 인물이 있다. ‘분쟁 해결사’를 자처하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다. 아니나 다를까. 최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고위관료가 조지아 주에 있는 카터의 자택을 찾아 새 대북 정책을 브리핑하고 ‘이번엔 나서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대북 특사로 나서길 희망하는 카터에게 자제를 당부한 것이다. 카터는 1994년 북핵 위기 때 평양을 방문해 북-미 협상의 계기를 마련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독선적인 행동을 두고 뒷말이 적지 않았다. 이후 2011년 방북 땐 한미 양쪽에서 ‘불청객’이란 눈총을 받았다. 북한에 편향된 그가 과연 공정한 중재자 자격이 있는지 의심도 받는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대통령 재임 시절만큼 한미 동맹관계를 최악으로 몰아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美관료들의 게릴라식 항명 카터는 1977년 취임 직후부터 대선 공약이었던 주한미군 철수를 완고하게 밀어붙였다. 그의 강력한 철군 의지는 많은 정부 관료를 윤리적 갈등에 시달리게 했고, 대통령과 관료들 간 이견은 실력 대결 양상까지 보였다. 관료들은 공적으론 발설하지 못했지만 사석에선 노골적으로 카터의 정책을 비판했다.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은 ‘대통령 명령엔 복종하되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한다’는 이중 대응 원칙을 세우기도 했다. 야전 군인들은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드러냈다. “미군이 철수하면 전쟁이 날 것”이라고 언론과 인터뷰한 주한미군 참모장은 항명으로 간주돼 즉각 본국으로 소환됐다. 급기야 북한이 탱크와 병력을 대대적으로 증강하면서 남북 간 군사적 균형이 무너졌다는 정보기관의 보고서가 언론에 유출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는 의회의 거센 반대에 부닥쳤다. 카터는 훗날까지 “정보기관이 보고서를 조작했다”며 괘씸해했다. 카터의 고집은 ‘퇴로’를 찾기 위해 마련된 한미 정상회담까지 이어졌다. 독불장군 카터와 철권통치자 박정희의 1979년 6월 대면은 “도저히 동맹국 정상 간 회담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고 한 배석자는 회상한다. 결국 한국의 인권 개선을 조건으로 철군을 재검토한다는 결론이 났지만, 카터의 무리한 철군 정책의 여파로 미국 내에서 주한미군 철수론은 한동안 실종되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돈 오버도퍼의 ‘두 개의 한국’)‘힘의 외교’ 앞에 설 새 대통령 트럼프 대통령은 얼마 전 한국에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비용 청구서를 불쑥 내밀어 양국 간 논란을 불렀다. 사흘 뒤 방송에 출연한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답변에 앞서 내뱉은 한마디에선 묘한 뉘앙스가 느껴진다. “내가 가장 하기 싫은 것이 대통령의 발언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발언, 여기에서 카터 행정부 시절 관료들의 딜레마가 엿보인다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중앙정치 무대에선 무명이나 다름없던 땅콩농장주 출신 카터처럼 부동산 재벌 출신 트럼프도 공직 경험이라곤 전혀 없는 ‘워싱턴 아웃사이더’다. 트럼프의 ‘힘의 외교’는 카터의 ‘인권 외교’ 못지않게 독단적일 것이다.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동맹이라고 해도 예외를 두지 않는다. 며칠 뒤 취임할 우리 대통령이 맞닥뜨려야 할 ‘현실’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요즘 부쩍 ‘적폐’라는 단어를 다시 입에 올린다. 특히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를 중심으로 한 ‘반문(반문재인) 연대’ 움직임을 “적폐 연대”라고 몰아붙이며 공세를 편다. 국민을 내 편, 네 편으로 가른다는 비판을 받자 공식 선거전 개시 이후 잠시 자제했던 ‘적폐 프레임’을 다시 꺼내든 것이다. 그냥 버리기에 아까울 만큼 적폐 프레임의 효과를 톡톡히 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선거는 프레임 전쟁이다. 규정한 틀(프레임)에 상대를 가두기 위해 전략적 핵심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파한다. 이를 위한 상대방 흠집 내기가 바로 네거티브다. 상대가 씌운 프레임에 한번 걸리면 헤어나기 쉽지 않다. 이번 대선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안철수 후보일 것이다. 한 여론조사 결과 네거티브 공격에 지지층이 이탈하는 정도가 안 후보에게서 훨씬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한다. 최근 지지율이 크게 빠진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안 후보의 대응도 서툴렀다. 최악의 실책은 TV토론에서 “제가 갑(甲)철수입니까. 제가 MB(이명박) 아바타입니까”라고 따져 물은 것이다. 프레임 이론가인 조지 레이코프가 일찍이 저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경고한 사례를 몰랐을까. “워터게이트 사건에 휘말린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TV연설에서 ‘저는 사기꾼(crook)이 아닙니다’라고 말한 순간 모두가 그를 사기꾼으로 생각하게 됐다.” 상대의 공격을 반박하려고 상대의 언어를 쓰면 결국 유권자 머릿속엔 더욱 강한 이미지로 남게 되는 ‘프레임의 덫’에 걸리고 만다는 얘기다. ▷프레임은 선명해야 한다. 레이코프도 중도층을 겨냥한답시고 자신의 진영 반대쪽으로 이동해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러니 안 후보 같은 중도파는 프레임 전쟁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따뜻한 보수’를 내세운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도 마찬가지다. “살인범은 용서해도 배신자는 용서 않는다”는 한마디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프레임 전쟁은 결국 정치를 양극단으로 치닫게 만든다. 그 해악은 그렇게 이긴 승자가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는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며칠 전 공개된 두 장의 사진은 북한 김일성 생일인 태양절(15일)을 전후해 휘몰아친 한반도 위기설의 기묘한 현실을 보여줬다. 하나는 태양절 당일 미국 항공모함 칼빈슨 모습이 담긴 해상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하루 뒤 함경북도 풍계리 핵실험장 주변을 찍은 위성사진이다. 미 해군이 인터넷에 올린 사진에서 항모 칼빈슨은 인도네시아 자바 섬과 수마트라 섬 사이의 순다 해협을 유유히 통과하고 있었다. 1주일 전 “무적함대를 보낸다”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말대로라면 한반도 근처에 와 있어야 할 항모가 5000km 떨어진 곳에, 그것도 정반대 방향으로 항해하고 있었던 것이다.핵실험장의 배구경기 풍계리 핵실험 갱도 인근을 찍은 위성사진에는 경비병 막사와 지휘센터 앞 공터 3곳에 나와 있는 북한 사람들이 잡혔다. 북한 전문 웹사이트 ‘38노스’는 6명씩 나뉘어 배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얼마 전까지 ‘장전·거총’ 상태였던 핵실험장인데, 마치 칼빈슨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는 듯 한가로운 모습이었다. 칼빈슨의 항로를 놓고 고도의 술책이었을 수 있다는 변론도 있지만 가뜩이나 빈말이 많았던 트럼프의 말은 허풍이 됐다. 미국 새 정부의 어설픈 행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위기의 한복판에 방한한 마이크 펜스 부통령 일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울로 오는 기내에서 백악관 관계자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와 관련해 “한국의 차기 대통령이 결정할 문제”라고 밝혀 논란을 불렀고, 방한 첫 일정으로 현충원을 방문한 펜스 부통령의 부인은 핑크색 원피스 차림으로 참배해 입방아에 올랐다. 과연 보좌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는지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는 출범 3개월이 되도록 사실상 과도정부 상태다. 특히 아시아 정책라인의 주요 자리는 대부분 공석이거나 대행 체제다. 국무부와 국방부 차관·차관보로 추천받은 인사들은 번번이 백악관 반대에 부딪혀 낙마했다. 지난 대선 때 ‘트럼프는 안 돼(Never Trump)’에 가담해 블랙리스트에 오른 전문가들이라는 이유에서다. 여기에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까지 전격 경질되면서 국가안보회의(NSC)마저 물갈이 인사가 진행되고 있다. 사정이 이러니 미국이 대북정책 재검토를 마무리하고 ‘최고의 압박과 개입’ 원칙을 세웠다는 소식에도 전문가들 사이에선 “누가 끝냈다는 소리냐”는 얘기가 나온다. ‘햄버거 협상’부터 ‘전투용 망치’까지 모든 가능성을 고려한다는 것은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에 불과하지 않으냐는 비아냥거림까지 들린다.칼빈슨 이번엔 진짜 온다 가장 신난 건 김정은일지 모른다. 북한의 벼랑 끝 도발은 늘 미국을 향한 관심 끌기 수단이었다. 더욱이 한국은 리더십 부재 상태이고 미국 초짜 행정부는 좌충우돌인 지금은 어느 때보다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동안 미국의 대외정책 순위에서 늘 뒷전이던 북핵은 일약 최우선 의제로 올랐으니 절반은 성공한 셈일까. 북한은 보란 듯 풍계리의 배구경기 모습을 위성에 노출시켰다(상업 위성은 궤도 이동 시간표가 인터넷에 공개된다). 북한은 앞으로 도발 수위를 계속 끌어올릴 것이다. 핵실험은 잠시 연기됐을 뿐이다. 당장 25일은 인민군 창건일이다. 그때쯤 칼빈슨은 한반도에 진짜 도착한다고 한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중국 베이징에 다녀왔다. 청명절 연휴기간이었는데도 항공편 좌석은 절반도 차지 않아 한산했다. 교민 사회는 활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코리아타운의 네온사인 간판 ‘왕징한궈청(望京韓國城)’에선 글자 ‘韓’이 보이지 않았다. 중국인들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에 타깃이 될까 봐 떼어낸 것이라고 했다. 식당에 한글 메뉴가 사라진 지도 꽤 됐다고 한다. 피해도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교민들이 겪은 심리적 압박은 깊은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다.새 대통령 지시 1호는 사드? 주중 한국대사관은 속수무책이다. 양국 간 외교채널은 사실상 끊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 정부는 온갖 핑계를 대며 과장급 이상 고위급 접촉을 거부하고 있다. 얼마 전에도 김장수 대사 명의로 롯데 영업제한을 풀어 달라는 서한을 중국 외교부와 상무부, 공안에 보냈지만 중국 측은 ‘영업제한 연장’ 통보로 응답했다. 그나마 서한 접수 자체를 거부당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는 푸념까지 나오는 판이다. 앞으로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드 한국 배치는 이미 진행되고 있다. 지난달 초 사드 발사대 2대가 전격 반입됐고, 레이더까지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국방부는 “사드 반대가 말로만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협박성 발언을 내놓았다. 성주 롯데골프장에 대한 환경영향평가가 이뤄지고 부지공사가 시작되면 한중 갈등은 최고조에 달할지도 모른다. 5·9대선 이튿날 아침 투표 결과가 확정되자마자 출범하는 새 정부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까.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대선은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양강(兩强) 구도로 굳어지는 분위기다. 누가 되든 정권 교체다. 문 후보와 민주당은 사드 배치의 재검토와 함께 국회 비준을 추진하겠다고 공약했다. 안 후보는 사드 배치 찬성으로 입장을 바꿨지만 그가 속한 국민의당 당론은 배치 반대다. 군 안팎에선 새 정부가 출범하면 사드 배치 절차에 차질이 빚어질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 외교안보 분야에서 내놓을 첫 조치가 사드 배치 중단까진 아니겠지만 배치 절차의 동결이나 최소한 속도 조절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걱정한다. “절차를 들여다보자”며 재점검 지시가 내려지면 배치 시기는 연기될 수밖에 없다. 더욱 큰 걱정은 대외적 파장이다. 당장 중국은 반색하겠지만 미국은 어떨까.두테르테식 ‘총명한 외교’? 남중국해에 스카버러라는 환초 섬이 있다. 필리핀의 배타적경제수역(EEZ) 안에 있고 필리핀 주둔 미군이 사격훈련을 했던 곳이다. 중국은 2012년 이 섬을 사실상 점령하고 실효지배에 들어갔다. 필리핀산 바나나 수입까지 막아버렸다. 이에 베니그노 아키노 대통령은 미국과 연합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동맹관계를 강화했다. 그런데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필리핀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두테르테는 미국 대통령을 향해 욕설까지 퍼붓더니 중국엔 유화 제스처를 보냈다. 중국은 “총명한 전환”이라며 치켜세웠다. 두테르테의 현란한 외교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엔 돌연 필리핀이 지배하는 남중국해 모든 섬에 군을 배치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미국에선 “국내 정치적 압박에 따른 빈말에 불과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는 얘기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등장 이후 새삼 주목받는 국제정치학자가 있다. 이른바 ‘공격적 현실주의’ 이론가로 유명한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다. 국가는 단지 생존하기 위해 세력 균형 차원의 파워를 추구하는 것(방어적)이 아니라 최대한 파워를 키워 다른 나라들을 압도하는 지위에 서려고 한다(공격적)고 보는 냉혹한 현실론자다.미어샤이머 교수의 변심? 미어샤이머는 지난해 초 대선에 나선 트럼프를 두고 “정말 무식한 데다 아무 말이나 해댄다”라고 일갈했다. 트럼프가 당선된 뒤에도 “나는 트럼프를 찍지 않았다. 그가 미국 대통령이라는 것은 재앙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기고문을 통해 트럼프에게 현실주의 정책을 채택하라고 제안하는가 하면 최근엔 “트럼프를 지나치게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간접 변론에 나서기도 했다. 미어샤이머는 오래전부터 중국을 ‘미국 패권에 도전하는 국가’로 규정하고 중국을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면서 동북아시아의 미군을 철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미군이 철수하면 일본과 한국이 스스로 군사력을 증강해 중국에 맞서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일의 핵무장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곰(중국)을 잡기 위해 먼저 사냥개(일본 한국)의 목줄을 풀어준 뒤 사냥꾼(미국)은 마지막에 나서면 된다는 논리다. 트럼프의 ‘주한·주일미군 철수, 한일 핵무장 용인’ 발언과 놀랄 만큼 똑같지 않은가. 미어샤이머로서는 ‘Mr. 예측불가’ 트럼프의 좌충우돌에 불안감을 떨칠 수 없지만 그의 본능적 대외정책에는 한번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고 판단한 게 아닐까 싶다. 요즘 트럼프는 버락 오바마 정부로부터 도청을 당했다는 발언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미어샤이머는 국제정치에선 국가지도자의 정직만이 능사가 아니고 국익을 위한 전략적 거짓말은 용인된다고 본다(‘왜 리더는 거짓말을 하는가?’·2011년). 트럼프의 과장과 왜곡, 공포 조장 같은 현란한 언변도 어떤 결과를 낼지 좀 지켜보자는 것 같다. 실제로 트럼프는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인다. 일본은 이미 사상 최대의 방위비 인상안을 통과시켰고 유럽 국가들도 트럼프의 5월 유럽 순방을 앞두고 앞다퉈 방위비 인상 계획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의 행로가 순탄하기만 할지는 의문이다. 장기적으로 동맹관계가 약화되면서 미국의 슈퍼파워 지위도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미국, ‘핵무장 한국’ 감싸줄까 아직까지 트럼프는 미어샤이머가 기대하는 장기적·전략적 판단을 하는 것 같진 않다. 사업가의 최우선 판단 기준은 돈이다. 트럼프의 미국은 머지않아 우리 정부에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요구할 것이다.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하며 핵무장 얘기도 흘릴 수 있다. 그렇다고 허용하고 인정하겠다는 수준은 아닐 것이다. 현재의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에선 핵보유국 완장을 찬 5개국을 빼곤 꼴사나운 문신을 새긴 ‘불량국가’일 뿐이다. 미국이 나서 한국의 핵무장을 감싸줄지 의문이다. 핵무장은 비용도 덜 들고 훨씬 효율적인 억제 수단이다. 하지만 쉬운 길은 아니다. 물론 미래는 알 수 없다. 또 다른 ‘Mr. 예측불가’인 북한 김정은이 그 길을 빠르게 만들 수도 있으니.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간첩을 잡아 그 입에서 북한이 저지른 짓이라는 자백을 받아내라.” 1983년 10월 버마(미얀마) 아웅산 테러에서 살아온 전두환 대통령이 내린 특명이다. 북한의 테러가 분명했지만 버마 당국에 체포된 테러리스트 강민철은 ‘성북초등학교를 졸업했고 서울대를 다닌다’는 어설픈 주장만 되풀이했다. 그러다 보니 버마 측에선 한국 내 반정부 세력의 소행이라는 얘기가 나왔고 국내에서조차 전두환의 자작극이라는 루머가 돌았다. 전 대통령으로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특명 1983 ‘北 자복하게 하라’ 가뜩이나 사전에 테러 첩보도 입수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서도 다급해진 상황이었다. 안기부는 관리하고 있던 전향간첩을 이용해 북한에 이런 내용을 타전하게 했다. ‘곧 주민등록 교체 예정. 신분증 위조 등 대처 위해 귀환 요망.’ 북한은 이 미끼를 바로 물었다. 접선 일자에 북한 공작선이 부산 다대포 해안에 도착했고, 공작원 2명은 매복해 있던 특수부대 체포조에 생포됐다. 이들은 안기부 심문 뒤 전향했고 아웅산 테러가 북한 소행이라는 기자회견을 했다. “지도원으로부터 공작원 2명이 잡혔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도원은 ‘이들의 공작이 서투르고 엉망이었다. 버마군에 생포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했다. 특히 ‘이들은 혁명성 없이 자폭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이런 북한 공작원들의 자복(自服)이 조금이나마 영향을 미쳤을까. 테러리스트 강민철은 버마 당국에 진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참극이 있은 지 한 달이 채 안 된 시점이었다.(라종일의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 국가정보원 차장과 대통령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저자가 당시 붙잡힌 북한 공작원들에게 들은 증언이라고 한다. 이미 30년도 지난 시절 얘기지만 당시 우리 정보기관의 공작은 신속하고 효과적이었다.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 암살 사건이 발생한 지 한 달이 넘었다. 모든 증거가 북한을 가리키는데도 북한은 여전히 오리발이다. 외려 평양의 말레이시아 외교관들을 볼모로 삼아 버티고 있다. 주말레이시아 북한대사관에 숨은 테러범 2명까지 빠져나가면 법의 심판에 넘겨진 것은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국적 여성 둘뿐이다. 북한을 단죄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답답한 상황에서 그나마 김정남의 아들 김한솔이 무사하다는 소식은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아버지가 며칠 전 살해됐다’라면서도 설핏 웃음기도 보인 40초짜리 동영상이 얼마 전 공개됐다. 북한의 다음 타깃이 될 게 뻔한 김한솔이 어딘가로 피신해 가족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김한솔은 지킬 수 있을까 이 동영상이 나온 직후 국정원은 “김한솔이 맞다”고 확인했다. 다만 동영상을 올린 주체인 ‘천리마민방위’의 실체가 무엇인지, 현재 체류지가 어딘지에 대해선 답변을 거부했다. 김한솔의 피신에 국정원의 역할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확인을 거부했다. 하지만 국정원이 모종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나는 믿고 싶다. 나아가 앞으로 김한솔의 안전도 국정원이 당연히 책임질 것이라고. 또 한 가지. 김한솔은 동영상에서 특별히 이름까지 거론하며 주한 네덜란드 대사에게 감사를 표했다. 김정은을 세워야 한다는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것은 우연일까.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이복형 김정남 피살 사건 이틀 뒤인 15일, 아버지 생일(광명성절) 행사에 참석한 김정은은 뭔가에 잔뜩 화가 나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표정이었다. 박수도 건성건성. 다른 사람이라면 총살감이겠지만 그는 ‘최고 존엄’ 아닌가. 김정은의 표정에선 당혹감도 느껴졌다. 아버지 생일상에 장남의 부고장을 올려놓은 셈인데, 아무리 패륜아라도 표정 관리는 해야 했을지 모른다. 한편으로 그 표정에서 일말의 불안감도 읽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스위스 보이’의 놀이동산 요즘 인기 있는 미드 중에 ‘웨스트월드’라는 SF 드라마가 있다. 인공지능(AI)이 발달한 미래, 하루 5만 달러면 19세기 서부 총잡이 시대를 재현한 테마파크에 갈 수 있다. 거기엔 사람과 똑같이 생기고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는 AI 주민들이 있다. 외부 손님은 그들을 상대로 마음껏 살인하고 학대하고 심지어 강간까지 한다. 노리갯감이 AI 로봇인 만큼 손님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김정은에게 북한은 이런 가상의 테마파크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는 ‘째포(재일교포)’ 출신 무용수 고용희가 낳은 혼외자다. 그래서 세상과는 동떨어져 살았다. 동화 속 그림 같은 나라 스위스에서 국제학교를 다녔다. 그 옆엔 항상 대신 싸우고 맞아주기까지 하는 소년이 있었다. 그러다 돌아온 북한. 그곳은 이미 문 닫은 지 오래돼 모든 게 녹슬고 으스스한 놀이동산 같았을 것이다. 권좌에 오르자마자 김정은은 놀이동산 재건에 들어갔다. 유원지, 스키장 같은 위락시설을 다시 꾸미고, 미녀 걸그룹도 만들었다. 괴짜 농구 스타를 불러와 경기도 열었다. 어린 시절 추억을 되살리려는 ‘피터팬 콤플렉스’였으리라. 굶주림에 허덕이는 인민들의 고통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아니, 이런 현실 대신 인민들에게 허상을 보여줌으로써 위안을 삼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김정은이 깨달은 것은 자신의 권력이 가진 크기였다. 처음엔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흉내 내는 ‘수령 놀이’ 역할극이었지만, 금세 거기에 어떤 한계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됐을 것이다. 제왕의 무치(無恥)를 넘어선 수령의 파렴치(破廉恥)를 너무 쉽게 배웠다. 최측근은 물론 고모부까지 고사총으로 쏘아 날려버려도 수령의 권력은 더욱 커갈 뿐이다. 그에 비례해 불어난 체중 탓에 다리를 절뚝거릴 지경이지만 브레이크는 없다. 이렇게 5년. 배다른 형을 처리하는 문제는 이미 오래전에 내린 명령이다. 헌데 하필 이때, 신형 미사일로 태평양 건너 새 미국 대통령의 심중을 떠보려는 참인데 일이 터졌다. 뒤처리도 깔끔하지 못했다. 모든 이들이 날 손가락질할 텐데, 혹시 누군가 날 골탕 먹이려고 이렇게 허술하게 일을 벌인 건 아닐까? 김정은이 의심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잔칫상 앞에서 성난 표정으로 초점도 없이 허공을 노려본 것은 이런 복잡한 속내 때문 아니었을까.부메랑이 된 ‘몽상’ 코드 테마파크 웨스트월드에서 문제가 생긴 것은 AI 로봇에게 시험 삼아 삽입한 몽상(reverie) 코드 때문이었다. 이 코드가 프로그램 오작동을 일으키면서 AI들은 자신의 삶이 거짓이었고 인간의 쾌락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인간은 절대 해치지 못하게 만들어진 안전장치도 허물어지고 만다. 김정은이 인민에게 심어준 허망한 꿈이 ‘자각’으로 바뀌고, 절대적이라던 권력의 안전장치가 풀리는 날도 그리 멀지만은 않을 것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이슬람권 7개국 입국 금지…. 멕시코 대통령에겐 “미군을 내려보내겠다”고 위협하고, 호주 총리와는 통화하다 전화를 뚝 끊어 버리고, 연방지법 판사에겐 “소위 판사라는 자가 가소롭다”고까지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언동에 세계가 어수선하다. 취임 3주 만에 벌써 탄핵 얘기까지 나오는 지경이다.‘94세 현자’ 총기 흐려졌나? 이런 트럼프를 두고 헨리 키신저는 지난해 말 “역사에 매우 주목할 만한 대통령(a very considerable president)으로 남을 수 있다”고 상찬했다. 1970년대 데탕트(긴장 완화)와 중국 개방, 중동 셔틀외교의 설계자로서 이제 구순을 훌쩍 넘어 ‘외교의 현자’로 불리는 키신저의 말이니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키신저가 잘못 짚었다는 생각이 든다. 전직 통일부 장관이 몇 년 전 “총기가 흐려진 키신저의 말을 이제라도 가려서 듣자”고 일갈해 논란이 일었는데, 그 말이 틀린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하긴 키신저에겐 늘 아첨꾼(flatterer) 따리꾼(courtier)이란 비판이 따라붙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꼭 칭찬이었을까. 키신저의 발언은 이렇다. “트럼프가 익숙하지 않은 질문을 많이 던지고 있다. 그런 질문들에서 놀랍고 새로운 게 많이 나올 것이다. 외국에는 충격이자 동시에 엄청난 기회다. 여태껏 본 적이 없는 하나의 현상이다.” 트럼프에 대한 평가를 가급적 유보하면서 그의 잠재적 가능성을 내다본 ‘현답(賢答)’ 아니었나 싶다. 키신저가 주목한 트럼프의 가능성은 무엇일까. 그 답은 키신저의 국제정치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키신저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로서 힘의 균형을 통해 지정학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세력균형론의 신봉자다. 세력균형론은 두 경쟁국이 있을 때 좀 더 약한 나라와 연합해 더 강한 나라를 굴복시키는 전략이다. 아울러 키신저는 강대국 지도자의 경세술(statecraft)을 중시한다. 국내 정치나 관료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창의적 외교를 해내는 지도력을 높이 샀다. 그래서 키신저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양면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랜 키신저 연구자는 이렇게 말한다. “놀라운 통찰력을 지닌 현실주의 경세술의 왕자 ‘키신저 박사’와 비도덕적이고 권력에 굶주려 자기과시에 열중하는 비밀스러운 모사꾼 ‘헨리 씨’의 이중성은 늘 그의 이력을 평가하는 데 구름을 드리운다.” 키신저로선 온갖 논란에 굴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승부사 트럼프에게서 미국 주도로 세계질서를 재편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본 것이 아닐까. 트럼프 내각엔 이미 키신저의 입김이 스며 있다.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과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각각 바이오벤처기업과 워싱턴 싱크탱크의 이사로 키신저와 함께 일한 이들이다.키신저의 책략 ‘트럼푸틴’ 머지않아 키신저의 책략은 ‘반중·친러’로 구체화될 수 있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을 성사시킨 키신저. 그때 벌써 그는 “언젠가 중국을 억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손잡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언했다. 거침없이 굴기하는 중국을 꺾기 위한 ‘트럼푸틴(트럼프+푸틴) 브로맨스’가 세계를 어디로 이끌지 자못 긴장된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대선 출마 생각 있으신가요? “…” -대선 출마 생각 있으신가요? “…” -매일매일 혹시 여론조사에서…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이 끝난 뒤 본회의장을 빠져나오는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몰려든 기자들의 계속된 질문에도 묵묵부답 발길을 재촉하고 경호원들이 막아서면서 아수라장으로 바뀐다. 황 대행이 본청을 빠져나와 차를 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총리님, 혹시 새누리당 인명진 (비상대책)위원장이나 지도부 만나신 적 있나요? “…” -보수를 위해서라도 빨리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의견도 있는데요. “…” -말할 기회 있을 거라고 했는데, 말할 기회 언제쯤 있을까요? “…” -뭐라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새누리당 지도부가 대선주자로 보는데 어떻게 보세요? “…” 경호원이 다시 “잠시만요. 차 올라옵니다”라며 기자들을 막아선다. -대선 관련해서 언제쯤 말씀하실 건가요? “예, 수고들 하세요.” -입장을 밝힐 계획은 있으신가요? 저희들 계속 총리님 입만 쳐다보고 있는데요. “허허, (기자의 팔을 가볍게 치며) 적당한 때가 있을 겁니다.”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황 대행은 이 한마디만 남긴 채 차에 올랐다. 요즘 연일 벌어지는 황 대행 주변에서 벌어지는 풍경이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대선판 퇴장 이후 새누리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정치권의 계속되는 러브콜에 황 대행은 소이부답(笑而不答)이다. 그의 미소가 새누리당이나 정통보수를 외치는 이들에겐 ‘살인미소’로 여겨지는 요즘, 보수층의 아이콘으로 부상한 황 대행의 높아진 위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황 대행의 요즘 행보는 많은 이들을 답답하게 만들고 있다. 그의 행보에서 행정수반이 아닌 노회한 정치인, 머릿속 계산이 복잡한 정객(政客)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특히 김종필(JP) 전 총리와 오버랩된다. 사실 ‘소이부답’은 JP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었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도 당시 김대중(DJ) 국민회의 총재와의 후보단일화 논의가 한창이던 시절 JP 자민련 총재는 묵묵부답이었다. 계속되는 기자들의 질문에도 한자로 ‘소이부답’이라 쓰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JP는 “답답하겠지만 기다려. 세상 일이 다 때가 있는 법이야. 때 되면 다 얘기할 거니까”라고 기자들을 다독이기도 했고, “옛날에는 말이야”라며 화제를 돌려 딴청을 피우기도 했다. 하지만 늘 뉴스는 언론에 먼저 나왔다. DJP 단일화를 두고 이미 합의 내용들이 흘러나오고 한편으론 합의 결렬설이 흘러나오는 와중에도 JP는 확인도 부인도 않았고, 분위기가 다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정치는 대개 밀실에서 이뤄지고 언론을 통해 기정사실화될 때까지 모호성과 가변성 속에 온갖 얘기가 춤을 추게 놔두던 시절이었다. 하긴 지금의 정치라고 딱히 달라진 것도 없긴 하다. 반기문 전 총장도 그랬다. 지난해 말 유엔 총장 임기를 끝낼 때까지 출마 여부를 묻는 질문에 “맡은 소임에 충실하겠다”고만 했다. 반 전 총장은 “한 몸 불사르겠다”고 했지만 사실 그는 귀국해서 대선 행보를 하면서도 명시적으로 대선 출마를 밝힌 적도 없다. 하차하면서도 “순수한 뜻을 접겠다”고 했을 뿐이다. 그러니 황 대행에게 왜 출마 여부를 명확히 안 하느냐 탓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최소한 황 대행만은 달라야 한다. 지금 황 대행은 조금이라도 대선 행보로 비쳐선 안 되는 위치에 있다. 국가적 리더십 공백 상태에서 국정농단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황 대행에게 대통령 직무를 대행할 책임을 부여했고, 그 책임은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됐을 경우 공정한 대선 관리 책임까지 져야 하는 게 지금 황 대행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심판으로 맡겼더니 선수로 나서고 ‘권한대행의 권한대행’까지 낳는다면 나라꼴은 더더욱 우습게 된다. 지금의 애매한 태도에 대해 황 대행 측에선 “잠재적 대선주자로서 가능성마저 없다면 공무원들에게조차 영(令)을 세우기 없다”는 얘기도 한다지만, 이 얼마나 궁색한가. 지금 공직사회가 얼마나 흐트러져 있는지 반문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런 얘기에 혹시라도 황 대행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딱할 따름이다. 누구라도 대통령 자리에 욕심이 없을 수 없고 지금의 황 대행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큰 꿈을 품었다 할지라도 이번 대선은 아니다. 국민이 바라는 것은 중대한 고비 때마다 강단 있게 대처하던 황 대행의 모습이다. 정치권과는 명확히 선을 긋고 술렁이는 공직사회를 틀어쥐고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가야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연설 시작과 함께 내리기 시작한 비 때문이었을까. 뭐가 급한지 길지도 않은 연설문을 빠르게 읽어 내린 도널드 트럼프의 취임사는 종말론적 디스토피아와 ‘오직 미국!’으로 가득했다. 트럼프 뒤에 앉아 난감한 듯 어색하게, 때론 얼굴도 찌푸리는 버락 오바마 부부의 표정은 “더는 기대할 게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 보였다.71세 재벌을 가르친다고? 선거 캠페인 때야 무슨 말을 못 하겠어. 당선돼선 달라질 거야. 트럼프 내각의 합리적 현실주의자들을 봐. 트럼프라고 별수 있어? 많은 이들이 이렇게 예상했다. 지난해 말 한국을 다녀간 공화당 인사들도 한결같이 “선거 땐 으레 말이 거칠어지는 법 아니냐”고 했다. 심지어 “트럼프를 잘 가르칠(educate) 테니 염려 마라”라고 한 공화당 의원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부질없는 희망이었다. 하긴 나이 70을 넘은 사람을 누가 가르치겠나. 미국 언론도 “후보 때와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뿌리 뽑아버렸다”(월스트리트저널)고 했다. 취임 직후 트럼프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 등 ‘미국 우선주의’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트럼프는 왜 이렇게 몰아치는 걸까. 타고난 승부사로서 ‘기습적 충격요법’의 효과를 익히 잘 아는 트럼프다. 자신의 책 ‘불구가 된 미국’에 “기습은 승리를 안긴다. 상대를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그에게 만능 외교정책은 없다. “언제나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절대 패를 보여주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러니 당분간 트럼프발 충격파는 계속될 것이다. 트럼프는 그동안 예측하기 힘든 싱크빅(think-big·통 큰 생각)으로 불확실성을 높인 뒤 지렛대(leverage)로 판을 흔들고 거친 파이트백(fight-back·반격)으로 후려쳤다. 일례로 중국을 상대로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렛대로 흔들며 중국의 항의에 거칠게 받아쳤다. 한 협상 전문가는 트럼프를 “땅 냄새를 정확히 맡는 사자”(안세영 ‘도널드 트럼프와 어떻게 협상할 것인가’)에 비유한다. 남들이 흑인과 히스패닉에 집중할 때 ‘백인 표밭’ 냄새를 정확히 맡은 것도 그의 동물적 후각 덕분이다. 당장은 멕시코나 중국이 사자의 ‘먹잇감’이지만 곧 한국 차례가 될 것이다. 이미 “일자리를 뺏는 최악의 협상”이라며 한미 FTA 재협상을 외쳤고,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하며 “왜 100%는 안 되느냐”며 분담금 인상을 요구했다. 이런 사자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미국 내 네트워크를 넓히고 꼼꼼한 대차대조표를 준비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당장은 좋은 인상부터 심어주는 ‘여우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일본은 벌써 발 빠르게 그런 전략을 펴고 있다. 사상 유례없는 국정 공백 속에서 한국의 차기 대통령은 트럼프를 상대할 준비가 돼 있을까.벌써부터 으르렁거려서야 현재 대선 주자 지지율 1위는 문재인이다. 최근 미국 외교전문지엔 ‘문재인이 당선되고 트럼프가 분담금 인상을 요구하면 한국은 미군 철수를 내버려둘 수 있다’는 기고문이 실렸다. 이에 문재인은 대담집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 “논점은 내가 당선되면 협상이 녹록지 않을 것이라는 데 방점이 있다”며 ‘당당한 협상’을 강조했다. 실제로 트럼프라면 한국에 가장 민감한 ‘주한미군 카드’를 협상의 지렛대로 이용할 가능성이 있다. 사자는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먼저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게 과연 협상에 유리할지 의문이다.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