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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인기를 다시 찾을 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몰락한 배우 노마 데스몬드의 이야기를 담은 1950년 할리우드 영화 ‘선셋대로’. 오리지널 포스터는 주연의 얼굴을 사진으로 강조하지만, 폴란드 작가 발데마르 시비에지가 그린 포스터는 짙푸른 아이섀도와 문어 다리 같은 머리칼로 데스몬드의 광기를 묘사한다. 경기 양평군 ‘이함캠퍼스’에서 6월 22일까지 열리는 ‘침묵, 그 고요한 외침_폴란드포스터’ 전시는 함축적이고 독창적인 폴란드 포스터 200점을 선보인다. 예지 플리삭이 디자인한 ‘로마의 휴일’ 포스터는 유럽을 순방 중인 호기심 많은 공주(오드리 헵번)의 탈출을 공주가 입은 새빨간 치마와 개선문 위에서 두리번거리며 공주를 찾는 수행원들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주최 측은 “폴란드 포스터는 ‘폴란드 포스터파’로 불릴 정도로 참신한 표현으로 주목 받으며 1950∼1960년대 세계 그래픽 디자인의 전환점이 됐다”고 설명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국 뉴욕에서 ‘애나 델비’라는 가짜 이름으로 독일 상속녀 행세를 하며 거액을 투자받았다가 결국 옥살이까지 했던 사기꾼 애나 소로킨(35). 실제 인물인 그를 모티프로 한 영국 웨스트엔드 초연작 ‘애나 엑스’가 국내에서 첫선을 보였다. 이 연극은 소로킨에서 영감을 얻은 주인공 ‘애나’와 가상의 스타트업 대표 ‘아리엘’의 이야기를 주축으로 한다. 아리엘은 유명인이나 화려한 외모를 가진 이들만 가입하는 프라이빗 데이트 매칭 앱을 만들어 거액의 투자를 받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사업을 “실현 가능하단 증거도 없는 허상”이라며 “그냥 인간 본성의 천박함뿐인 아이디어에 투자한 것”이라고 자조한다. 그러면서도 더 높은 곳을 향한 욕망은 가득하다. 그런 아리엘의 눈에 상류층 상속녀 애나는 완벽한 파트너. 애나는 자신을 사랑하는 아리엘을 보며 조금씩 가면을 벗으려는 듯 고민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만든 허상은 끝내 파국에 이른다.‘애나 엑스’에서 먼저 눈에 띄는 건 스마트폰 화면처럼 꾸민 무대다. 두 사람이 소셜미디어 등으로 주고받는 메시지가 영상으로 떠 연극 무대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가는 듯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다만 메시지를 영어 원문 그대로 사용한 건 상당수 관객들이 불편함을 느낄 대목이다. 애나라는 여주인공에 돈이 넘쳐나는 실리콘밸리의 ‘될 때까지 속여라(fake it till you make it)’ 정신을 상징하는 인물 아리엘을 결합한 점도 흥미롭다. 극 중에서 애나는 데이미언 허스트, 제프 쿤스 같은 현대 미술가들을 자주 언급한다. 이 작가들의 ‘실체 없는 아이디어’가 미술 시장에서 큰 거품을 만들어 내는 현상은 두 캐릭터의 실존을 반영하는 듯하다. 극에선 여러 주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모두 두 배우가 연기하는 2인극이다. 이야기 전개에 따라 역할이 수시로 바뀌어 두 배우는 애나와 아리엘일 땐 항상 같은 옷을 입는다. 스타트업 대표인 아리엘이야 스티브 잡스가 떠올라 그렇다 치지만, 거부 상속녀인 애나의 근사한 의상을 기대했다면 아쉬울 수 있다. 다만 설정상 사람들의 환상 속에선 화려하지만, 실체는 아무것도 없는 애나를 표현한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애나 역은 최연우 한지은 김도연, 아리엘 역은 이상엽 이현우 원태민이 맡았다. ‘클로저’, ‘올드 위키드 송’을 연출했던 김지호 연출 작품.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U+ 스테이지. 3월 16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도트 무늬 작품으로 세계적 사랑을 받는 구사마 야요이(96).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올해 10월 회고전을 가질 예정인 일본계 미국 작가 루스 아사와(1926∼2013).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외벽에 신작 조각을 설치한 이불(61)과 프랑스 파리 미술관 ‘부르스 드 코메르스’ 돔 공간에 설치 작품을 선보인 김수자(68)까지. 최근 세계 현대 미술계에선 아시아 여성 작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구순에 가까워서야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청받은 김윤신 작가처럼, 그간 남성 중심의 미술 현장에서 주목받지 못하다 뒤늦게 조명받는 작가들도 있다. 이런 분위기에 맞물려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여러 아시아 국가의 여성 작가들에게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접속하는 몸: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전을 계기로 여성 미술의 키워드를 살펴봤다.● ‘나의 몸’이 곧 미술 소재이번 전시는 1960년대 이후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 130여 점을 모았다. 대부분 한국에서 처음 소개된다. 제목처럼 이번 전시에 선보인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공통 키워드는 ‘몸’이다. 작가들은 자신의 몸을 본떠 조각을 만들거나, 임신·출산 등의 경험을 토대로 작업했다. 또 직접 자기의 몸을 재료로 퍼포먼스에 나서기도 했다. 이를테면 조각이나 회화로 친숙한 구사마도 초기에는 자기 몸에 직접 점을 붙이고 행위예술을 펼쳤다. 영상 ‘자기소멸’에서 구사마는 자신의 몸은 물론이고 나무, 바위, 고양이 몸에 동그라미 모양 스티커를 붙이거나, 타인의 몸에 원형을 그린다. 모든 걸 점으로 뒤덮으며 나와 타인의 ‘경계 허물기’를 시도했다.‘지옥의 문’으로 유명한 일본 작가 다나카 아쓰코는 실험미술그룹 ‘구타이 미술협회’의 1956년 그룹전에서 전구 90개와 진공관 100여 개를 연결한 ‘전기 드레스’를 직접 입었다. 이 전기 드레스를 회화로 옮긴 게 바로 ‘지옥의 문’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에서 최근 주목받는 차학경(1951∼1982)의 ‘눈먼 목소리’는 길거리에서 단어를 쓴 천을 이용해 구현한 행위예술이다. 이민자로서 겪는 언어·자아상실의 경험을 담았다.● 저항과 연대를 통한 공감필리핀의 선구적인 미술가로 평가받는 이멜다 카지페 엔다야도 주목할 작가다. 설치작 ‘돌봄을 이끄는 이들의 자매애를 복원하기’는 스페인의 식민 지배에 맞서 독립운동을 했던 비밀결사조직 ‘카티푸난’에 속한 여성 조직원들의 연대를 표현했다. 이처럼 아시아 여성 작가들은 식민주의에 맞서는 등 체제에 저항하며 서로 공감하는 점도 또 하나의 키워드라 할 수 있다.인도네시아 작가 멜라 야르스마 역시 20세기 초 네덜란드 식민 지배에 있던 인도네시아의 역사가 짙게 밴 작품을 선보였다. 서구 옷과 원주민 옷을 절충한 어떤 형태를 표방해 만든 작품을 관객이 직접 입어보도록 하며 인도네시아의 아픈 기억을 만나도록 유도한다. 신체를 우주의 축소판으로 보고 그 속에 흐르는 기운을 드로잉으로 표현한 중국 작가 궈펑이의 ‘자유의 여신상’, 인도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므리날리니 무케르지의 ‘바산티(봄)’도 드로잉이나 섬유 같은 재료를 이용해 공감의 영역을 넓히려는 시도로 읽힌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배명지 학예연구사는 “가부장제나 국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했던 ‘아시아’에서 그러한 체계를 몸으로 느끼고, 그 몸으로 저항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려고 했던 여성들의 작품에 주목했다”고 설명했다. 7일에는 한국과 중국, 일본, 대만, 필리핀 등 아시아 여성 미술 연구자와 문화 인류학자 등 8인이 참여한 심포지엄도 열린다. ‘아시아 여성 미술: 역사적 맥락’ ‘미술 너머: 해석과 담론’ ‘콜렉티비즘: 다공적, 집단적 신체’ 등의 연구가 발표된다. 전시는 다음 달 3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조선의 마지막 화원(畵員·궁중 화가)’으로 불리는 서화가 심전 안중식(1861∼1919)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디자인 제품을 선보이는 ‘양양화관(洋洋畵館)’전이 7일부터 열린다. 심전의 4대손이자 디자인하우스 ‘혜(HYE)’의 대표인 정성혜 인하대 패션디자인전공 명예교수는 서울 종로구 예올에서 개최하는 이번 전시를 통해 액자 형태의 작품과 스카프 등 60여 점을 소개한다. 안중식이 제자에게 써 준 글씨인 ‘양양화관’은 19세기 말∼20세기 초 동양과 서양, 옛것과 새것,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던 혼란스러운 시대에 동서양이 함께한다는 뜻이 담겼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선 안중식 서화에서 도상을 가져온 제품들은 물론이고 조선시대 민화와 규방 예술, 장식 조형예술 등에서 영향을 받은 작업의 결과물도 관객들을 만난다. 16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2012년 프랑스 리옹. 세 살 여자아이가 음식을 잘못 삼켜 기도가 막히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의료진은 뇌에 산소가 몇 분 동안 공급되지 못해 아이가 사실상 식물인간이 됐다며 연명 치료 중단을 권했다. 하지만 메일린은 뇌사 판정 약 40일 만에 깨어났다. 지금은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메일린의 기적’이 신앙의 힘으로 일어났다고 믿는 메일린의 아버지가 그 경험을 써 내려간 책이다. 메일린의 부모 에마뉘엘 트란과 나탈리 인실 트란은 아이가 식물인간이 된 막막한 상황에서도 기도를 이어가며 믿음을 잃지 않았다. 아버지 에마뉘엘은 가톨릭을 믿지 않았지만 사고 뒤 세례를 받고 시간이 날 때마다 기도했고, 꿈속에서 신의 음성을 듣는 경험도 했다고 말한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도 ‘살아있는 묵주 기도회’를 조직해 메일린을 위해 기도했다. 이 기도회는 19세기 리옹에서 교황청 전교회를 설립한 폴린 마리 자리코(1799∼1862)에게 전구(轉求·천주교 신자가 다른 이에게 자신의 기도를 하느님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는 것) 기도를 했다. “기도가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최후의 안식처였다”는 저자는 메일린이 회복하자 “기적이 일어난 것”이라고 확신했다. 메일린의 회복이 ‘기적’으로 바티칸의 공식 승인을 받는 과정도 기록했다. 교황청은 수년에 걸쳐 ‘메일린의 기적’을 조사했다. 먼저 메일린의 의료 기록을 살펴보고 당시 뇌 손상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는지 다른 의사들에게도 자문했다. 또 메일린 가족들을 평의회로 초청해 이야기를 들으며 신빙성을 검증했다. 교황청은 현대의학에서 치료법이 없는 환자가 완치되고 재발이나 후유증이 없으며 신학적으로도 합당하다고 판단하면 교황의 승인을 거쳐 기적으로 선포한다. 메일린의 회복은 2020년 5월 26일 교황청이 공식 인정한 ‘기적’이 됐다. 메일린의 부모가 기도했던 폴린 마리 자리코는 2022년 가톨릭의 성인 이전 단계인 복자(福者)로 선포됐다. 메일린의 엄마 인실은 한국에서 입양된 여성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가톨릭 신자인 박용만 전 두산그룹 회장이 기획하고 취재해 다큐멘터리로 만들었고, 지난해 성탄절 가톨릭평화방송에서 방영됐다. 기적에 대한 믿음과 별개로 삶에 대한 경외심이 느껴진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드라마 ‘수사반장’ ‘한지붕 세가족’, 영화 ‘그들도 우리처럼’ 등의 각본을 쓴 윤대성 전 서울예대 교수(사진)가 27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6세. 1939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고인은 보성고와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64년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유치진이 세운 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를 수료한 뒤 희곡 ‘출발’로 196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당선됐다. 방송사 전속 작가와 시나리오 작가 등으로 왕성하게 활동한 고인은 드라마 ‘수사반장’ ‘알뜰가족’ ‘한지붕 세가족’과 영화 ‘방황하는 별들’ ‘그들도 우리처럼’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등의 극본을 썼다. 사회성 짙은 연극 작품인 ‘미친 동물의 역사’와 ‘사의 찬미’ ‘남사당의 하늘’ 등도 고인의 대표작이다. 1980년부터 2004년까지 서울예대에서 극작을 가르쳤으며, 2011년 대한민국예술원 연극분과 회원이 됐다. 2015년 국내 희곡 작가로는 처음으로 ‘윤대성 극문학관’이 경남 밀양 연극촌에서 개관했다. 같은 해 창작 희곡 발굴 및 신진 작가 양성을 위한 ‘윤대성 희곡상’도 제정됐다. 저서로는 ‘윤대성 희곡집’, ‘극작의 실제’, 소설 ‘고백’ 등이 있다. 동아연극상과 한국연극영화예술상, 현대문학상, 대한민국연극제 희곡상, 동랑 유치진 연극상, 국민포장 대통령 표창 등을 받았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나무 프레임에서 캔버스 천이 떨어져 나올 것처럼 흘러내린다. 이 천을 뒤에서 누군가가 잡아당겨 팽팽한 긴장감이 생겨난다. 그런데 천을 당기는 사람은 천에 가려져 있고, 뒤에서 비치는 환한 조명 덕분에 실루엣만 보인다. 그림자만 드러날 뿐 이 사람의 모습은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이 그림에서 더 묘한 대목은 바로 나무 프레임이다. 현실에서라면 이 프레임을 받치는 이젤이 설치됐겠지만 그림 속에선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됐다. 인물이 등장하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아 초상화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모습인지라 초현실주의 추상화 같기도 하다. 17일부터 서울 용산구 갤러리바톤에서 열리고 있는 데이비드 오케인(40)의 개인전 ‘자아의 교향곡’에서 선보인 작품 ‘땅거미’다. 아일랜드 출신인 오케인은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는 젊은 작가다. 한국에서 세 번째로 갖는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캔버스 천을 둘러매고 씨름하는 성인 남성, 이 천을 갖고 노는 어린아이 모습을 담은 신작들을 공개했다. 때로는 기괴하고 때로는 유머러스한 이미지를 통해 작가는 관객을 상상의 내면 세계로 초대한다. 17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캔버스와 씨름하는 남성은 자기 모습을, 어린아이들은 조카를 모델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카메라를 설치한 다음 캔버스 뒤로 가서 내 모습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이리저리 움직여 수백 장의 컷을 기록한다”며 “마지막에는 10여 장의 장면을 추려서 고민하는데, 가족과 가까운 사람의 의견을 듣고 나에게 가장 끌리는 최종본을 골라 그림으로 만든다”고 했다. 예술 작품, 특히 회화의 의미나 개념을 고민하고 모호한 경계를 탐구하는 것은 현대미술의 중요한 주제다. 다만 과거에는 예술가들이 단순한 설치나 오브제로 표현했다면, 최근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 작가들은 이를 뛰어난 기교를 갖춘 회화로 표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주름진 캔버스, 사실적인 인체 표현, 여기에 빛과 그림자를 넣어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오케인의 작품은 이런 경향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2월 15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나무 프레임에서 캔버스 천이 떨어져 나올 것처럼 흘러내린다. 이 천을 뒤에서 누군가가 잡아당겨 팽팽한 긴장감이 생겨난다. 그런데 천을 당기는 사람은 천에 가려져 있고, 뒤에서 비치는 환한 조명 덕분에 실루엣만 보인다. 사람의 그림자만 드러날 뿐 이 사람의 모습은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이 그림에서 더 묘한 대목은 바로 나무 프레임이다. 현실에서라면 이 프레임을 받치는 이젤이 설치됐겠지만 그림 속에선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됐다. 인물이 등장하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아 초상화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또 현실에서 불가능한 모습을 그려 초현실주의 추상화 같기도 한. 17일부터 서울 용산구 갤러리바톤에서 열리고 있는 데이비드 오케인(40)의 개인전 ‘자아의 교향곡’에 선보인 작품 ‘땅거미’다.아일랜드 출신인 오케인은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는 젊은 작가다. 한국에서 세 번째로 갖는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캔버스 천을 둘러매고 씨름하는 성인 남성, 이 천을 갖고 노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신작들을 공개했다. 때로는 기괴하고 때로는 유머러스한 이미지를 통해 작가는 관객을 상상의 내면 세계로 초대한다.17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캔버스와 씨름하는 남성은 자기 모습을, 어린아이들은 조카를 모델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카메라를 설치한 다음 캔버스 뒤로 가서 내 모습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이리저리 움직여 수백 장의 컷을 기록한다”며 “마지막에는 10여 장의 장면을 추려서 고민하는데, 가족과 가까운 사람의 의견을 듣고 나에게 가장 끌리는 최종본을 골라 그림으로 만든다”고 했다.예술 작품, 특히 회화의 의미나 개념을 고민하고 모호한 경계를 탐구하는 것은 현대 미술의 중요한 주제다. 다만 과거에는 예술가들이 단순한 설치나 오브제로 표현했다면, 최근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 작가들은 이를 뛰어난 기교를 갖춘 회화로 표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주름진 캔버스, 사실적인 인체 표현, 여기에 빛과 그림자를 넣어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오케인의 작품은 이런 경향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2월 15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8년 전 구라파의 북쪽에서 거침없는 구라와 호구 짓을 남발하며 우리를 울고 웃게 만들었던 그가 이번에는 구라파 남쪽에 떴다.”(소설가 김호연)2016년 ‘베를린 일기’와 여행지에서의 경험을 픽션과 섞어 ‘기차와 생맥주’를 썼던 소설가 최민석이 이번엔 스페인 마드리드로 향했다. 2022년 교환 작가 프로그램에 선발돼 두 달여 동안 마드리드에 머물게 된 작가는 매일 일기를 썼다. 타국에서의 경험은 제때 쓰지 않으면 나중엔 잘 떠오르지 않는다는 이유였다.책을 펼치면 마드리드에 도착한 날부터 마지막까지 매일 보고 겪은 시시콜콜한 일상이 사진과 함께 나타난다. 자전거 대여 상점 직원과 대화를 나누다 소설가라는 이야기까지 하게 되고, 그다음 “사진을 찍자”는 제안을 거절하다 ‘도난 방지를 위해 기록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머쓱해한다. 자전거에 호기롭게 ‘로시난테’라고 별명을 붙였다가 불편한 승차감에 ‘거북선’으로 바꾼다. 유머러스한 문장으로 사랑받는 작가의 마드리드 일기는 현실에서 언어 장벽으로 미처 던지지 못한 재치 있는 말들을 저장해 놓았다 글로 한꺼번에 풀어 놓은 느낌이다. 좌충우돌의 순간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방인의 눈으로 더 깊게 본 도시의 잔상들도 만날 수 있다. ‘시에스타’(낮잠)와 ‘피에스타’(축제)가 공존하는 뜨거운 도시의 풍경, 그 속에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는 레스토랑 직원, 서른 살의 나이 차에도 상관없이 친구가 된 독일인, 고향에 대한 향수를 함께 나누었던 교포 등 다른 듯 같은 사람 사는 세상의 모습이 드러난다.마드리드에서 스페인어 학원에 다니며 ‘이걸 어디에 써먹을 것인가. 소설 집필을 못 해서 문학적 궤도에서 멀어질 뿐인데 왜 공부하려 하는가’라고 일기에서 스스로 묻던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돌이켜보면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든 건 언제나 금전적 보상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순수한 즐거움을 바라며 삶에 무용한 것을 꾸준히 하다 보면, 삶은 언젠가 보상을 준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여기 피리를 부는 소년이 서 있습니다.소년의 눈동자는 정면을 응시하고, 오므린 입술은 그가 연주에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피리를 따라 왼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소년의 손가락 하나가 올라와 있고, 수직으로 올라간 시선은 그 아래 금관 악기로 이어집니다. 이 흐름을 소년이 두르고 있는 흰 띠가 부드럽게 감아올리죠.이 그림에서 이렇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흐름을 만드는 요소는 더 있습니다.소년이 입고 있는 재킷의 나란히 달린 금장 단추, 모자의 장식이 만드는 V 모양, 바지의 옆단에 붙은 검은 천,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으로 살짝 내민 왼발이 있죠.이 왼발이 그림 모서리로 향하며 마치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생동감을 줍니다.공중에 떠 있는 사람이 작품은 인상파 화가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에두아르 마네가 1866년 그린 ‘피리 부는 소년’.1914년부터 1947년까지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다가 1986년 오르세 미술관의 소장품이 된 마네의 대표작 중 하나죠.이 그림에서 생동감을 만드는 여러 가지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을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소년을 감싸고 있는 텅 빈 배경입니다.다른 19세기 그림들이 전시된 곳에서 이 그림을 보면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습니다.다른 작품 대부분은 여러 인물이 등장하거나, 도시나 자연의 배경이 복잡하게 놓여 있는데 이 그림은 사람 1명만 강조해 그렸기 때문입니다.다른 작품들은 1명을 모델로 초상화를 그리더라도, 의뢰를 받아 그린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공간, 또는 그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넣고 싶은 오브제들이 그림의 배경을 채웁니다.마네의 다른 작품에서도 이런 구성은 흔히 드러납니다.그런데 이 작품에서 마네는 ‘배경을 채우고 싶은 욕심’을 과감하게 버리고 노란빛이 도는 회색으로 가득 채워버렸습니다.심지어 바닥과 벽의 경계마저 지워버려 소년이 어디에 서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죠. 사진과 그래픽 기술 활용이 손쉬워진 지금에는 이렇게 인물만 잘라서 단색 배경에 놓은 다음 강조하는 디자인을 사용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그런데 이 작품은 마네가 무언가를 선전하기 위한 디자인이 아니라, 살롱전에 출품해서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보여주기 위해 공들여 그린 것이라는 점이 다릅니다.마네는 여기서 무엇을 보여주려고 한 걸까. 이 그림을 그리기 3년 전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공개했고, 여기서 붓 터치가 거칠고 구도가 이상하다는 지금의 시각에서는 말이 되지 않는 비판을 받습니다.이에 상심해서 스페인 마드리드로 떠나는데요. 여기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벨라스케스를 만나다“벨라스케스가 그린 작품 옆에 전시되니 티치아노가 그린 초상화도 경직되고 생기가 없어 보이는군.”마네가 마드리드에서 프라도 미술관을 보고 난 뒤 친구 화가 팡탱 라투르에게 보낸 편지에 등장하는 내용입니다.마네는 이뿐 아니라 “벨라스케스를 본 것만으로도 여행한 보람이 있었다”, “벨라스케스는 화가들의 화가”라고 극찬하죠. 그러면서 ‘피리 부는 소년’처럼 배경을 삭제하고 그린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인물화에 감탄합니다.“(그림에서) 배경은 사라지고 강렬한 검은 옷의 사람의 주변엔 오로지 공기만이 둘러싸고 있었다.”사람의 주변에 공기밖에 없었다는 표현은 공중에 떠 있는 것 같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이렇게 인물을 극도로 강조할 수 있는 벨라스케스의 기법을 마네는 곧바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합니다.이뿐 아니라 벨라스케스가 초상의 대상으로 누구를 택했는가에 대해서도 그는 유심히 관찰하는데요. 마네는 벨라스케스가 그린 난쟁이 초상화 연작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고 쓰기도 했습니다.“난쟁이 초상화 연작들. 특히 정면을 바라보고 주먹을 양옆으로 내리고 있는 초상화 작품은 진짜 그림을 감상할 줄 아는 사람을 위해 만든 수작이야.”정리하면 마네는 배경을 삭제한 인물화, 또 난쟁이를 모델로 한 인물화에서 감명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이것이 마네의 눈에 왜 그렇게 신선하게 보였을까. 19세기 프랑스 미술은 원근법과 해부학을 토대로 한 이탈리아 하이 르네상스 회화를 추종하는 ‘신고전주의’가 주류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이와 달리 스페인 미술은 벨라스케스, 프란시스코 고야 같은 거장들이 등장해 ‘아카데미 미술’에서 다소 벗어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역사화나 종교화에 녹였고, 고야는 심지어 당시 스페인의 전쟁 같은 정치적 상황이나 인간의 내면까지 파고듭니다.따라서 배경을 삭제한 인물화는 ‘사람 그 자체’를, 게다가 난쟁이를 모델로 한 인물화는 ‘아웃사이더’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니 마네가 깜짝 놀란 것이었습니다.에밀 졸라의 옹호마네는 벨라스케스처럼 평범한 사람을 배경 없는 초상화로 그리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나폴레옹 3세 근위대 군악대에 소속된 10대 소년을 모델로 세웠고, 마네는 이 소년을 “스페인의 귀족처럼 대접”했습니다.이 소년의 얼굴과 자신이 자주 함께 일했던 모델들의 얼굴을 합해 마네는 익명의 인물을 만들어냅니다.그 결과 국가를 통치하는 왕도, 돈이 많은 귀족도 아닌, 역사 속에서 영웅으로 대접받는 인물도 아닌, 그저 피리를 부는 이름 모를 소년이 커다랗게 강조된 초상화가 탄생합니다.마네는 이 작품을 1866년 살롱전에 보냈지만, 역시나 아카데미 회원들은 이 그림을 거절했습니다. 역사화나 영웅 초상화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아카데미에겐 도발 같은 주제였으니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그러나 마네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거절 소식을 듣고 화가 난 마네의 친구이자 문학가, 에밀 졸라는 마네의 사실적인 그림 스타일, 그리고 권위가 아니라 인물에 집중하는 모던한 그림의 내용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 옹호하는 글을 신문 연재 기사로 내보냈죠.마네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자금을 모아 그 해 열린 만국박람회에 부스를 차리고 자기 작품을 전시했습니다.독특한 스타일의 회화는 곧바로 미디어의 주목을 받습니다. 대부분 부정적인 것이었지만 역시 눈 밝은 사람들은 이 그림에 바로 호기심을 가졌습니다.1872년 뒤랑 뤼엘이 이 그림을 사들였고, 마네의 친구인 장 바티스트 포르, 다시 뒤랑 뤼엘, 그리고 아이작 드 카몽도 공작이 이 그림을 소장했습니다. 그리고 카몽도 공작이 세상을 떠날 때 국가에 기증하며 이 작품은 루브르와 오르세에서 전 세계 관객에게 사랑받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6일(현지 시간) 타계한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속 세상을 살아 보는 느낌이라는 연극 ‘슬립 노 모어’, 인간 본성과 정체성을 심오하게 탐구한 걸작이란 평을 받은 ‘지킬 앤 하이드’, 2023년 미국 토니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여성 1인극 ‘프리마 파시(Prima Facie)’. 해외에서 호평 받으며 인기를 모았던 연극들이 올해 한국에서 잇따라 초연된다. 8월 한국 관객을 만나는 ‘슬립 노 모어’는 관객이 한자리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여러 방을 옮겨 다니며 보는 몰입형 연극이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기본 줄거리로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 ‘레베카’와 마녀재판을 연상케 하는 미스터리하고 충격적인 장면들로 구성돼 있다. 대사 없이 몸짓과 춤으로만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한 공간에서 차례대로 전개되지 않고 배우들이 각 공간에서 1시간 길이의 동일한 연기를 총 3번 반복한다. 가면을 쓴 관객들이 관심 있는 캐릭터를 따라다니며 관람하도록 구성돼, 보는 사람마다 같은 연극을 다른 이야기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 연극은 2003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된 뒤 2011년부터 미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10년 이상 장기 공연됐다. 한국 공연은 뉴욕 공연을 토대로 한다. 뉴욕에선 6층 건물 전체를 무대로 사용했는데, 한국은 지난해 문을 닫은 서울 중구 대한극장 건물을 리모델링해 공연장을 만든다. 제작사 미쓰잭슨 관계자는 “옛 대한극장 내부를 공연장으로 바꾸는 공사가 진행 중”이라며 설명했다. 지난해 영국 에든버러에서 처음 선보인 뒤 “고전의 충격적 아름다움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했다”는 평을 받은 연극 ‘지킬 앤 하이드’도 3월 4일부터 서울 종로구 대학로 TOM 2관에서 초연된다. 스코틀랜드 극작가인 게리 맥네어가 원작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지킬의 친구인 ‘어터슨’의 시점으로 재해석한 1인극이다. 이준우가 연출하고, 배우 최정원 고훈정 백성광 강기둥이 출연한다. 최정원은 2019년 이후 6년 만의 연극 출연이다. 글림컴퍼니 제작. 8월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에서 개막하는 ‘프리마 파시’는 여성 1인극이다. 성범죄 사건 변호를 전문으로 하는 유능한 변호사였던 테사가 성폭행 피해자가 되면서 겪는 2년의 세월을 그린다. 배우 한 명이 테사를 포함한 여러 인물을 연기하며 법정 드라마와 개인의 트라우마를 결합해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테사가 변호사에서 피해 당사자가 되면서 변화하는 법체계에 대한 시각, 법정 시스템의 모순과 피해자가 겪는 어려움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2019년 호주 시드니에서 초연됐으며 2022년 런던 웨스트엔드, 2023년 뉴욕에서 공연했다. 영국 올리비에상 ‘최우수 신작’ ‘최우수 여우주연상’ 등도 받았다. 영국 맨부커상을 받은 원작과 2013년 리안(李安) 감독이 연출한 영화로 잘 알려진 연극 ‘라이프 오브 파이’도 11월 국내 초연될 예정이다. 2023년 토니상 3관왕을 받은 작품이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여기 피리를 부는 소년이 서 있습니다. 소년의 눈동자는 정면을 응시하고, 오므린 입술은 그가 연주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피리를 따라 왼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소년의 손가락 하나가 올라와 있고, 수직으로 올라간 시선은 그 아래 금관 악기로 이어집니다. 이 흐름을 소년이 두르고 있는 흰 띠가 부드럽게 감아올리죠. 이 그림에서 이렇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흐름을 만드는 요소는 더 있습니다. 소년이 입고 있는 재킷의 나란히 달린 금장 단추, 모자의 장식이 만드는 V 모양, 바지의 옆단에 붙은 검은 천,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으로 살짝 내민 왼발이 있죠. 이 왼발이 그림 모서리로 향하며 마치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생동감을 줍니다.공중에 떠 있는 사람 이 작품은 인상파 화가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에두아르 마네가 1866년 그린 ‘피리 부는 소년’. 이 그림에서 생동감을 만드는 가장 큰 요소는 소년을 감싸고 있는 텅 빈 배경입니다. 이 작품에서 마네는 ‘배경을 채우고 싶은 욕심’을 과감하게 버리고 노란빛이 도는 회색으로 가득 채워버렸습니다. 심지어 바닥과 벽의 경계마저 지워버려 소년이 어디에 서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죠. 사진과 그래픽 기술의 활용이 손쉬워진 지금에는 이렇게 인물만 잘라서 단색 배경에 놓은 다음 강조하는 디자인을 사용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마네가 무언가를 선전하기 위한 디자인이 아니라, 살롱전에 출품해서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보여주기 위해 공들여 그린 것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마네는 여기서 무엇을 보여주려고 한 걸까요. 이 그림을 그리기 3년 전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공개했고, 여기서 붓 터치가 거칠고 구도가 이상하다는 지금의 시각에서는 말이 되지 않는 비판을 받습니다. 이에 상심해서 스페인 마드리드로 떠나는데요. 여기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벨라스케스를 만나다“벨라스케스가 그린 작품 옆에 전시되니 티치아노가 그린 초상화도 경직되고 생기가 없어 보이는군.” 마네가 마드리드에서 프라도 미술관을 보고 난 뒤 친구 화가 판탱라투르에게 보낸 편지에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마네는 이뿐 아니라 “벨라스케스를 본 것만으로도 여행한 보람이 있었다” “벨라스케스는 화가들의 화가”라고 극찬하죠. 그러면서 ‘피리 부는 소년’처럼 배경을 삭제하고 그린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인물화에 감탄합니다.“(그림에서) 배경은 사라지고 강렬한 검은 옷의 사람 주변엔 오로지 공기만이 둘러싸고 있었다.” 이렇게 인물을 극도로 강조할 수 있는 벨라스케스의 기법을 마네는 곧바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합니다. 또 벨라스케스가 초상의 대상으로 누구를 택했는가에 대해서도 그는 유심히 관찰하는데요. 마네는 벨라스케스가 그린 소인(小人) 초상화 연작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고 쓰기도 했습니다.“특히 정면을 바라보고 주먹을 양옆으로 내리고 있는 초상화 작품은 진짜 그림을 감상할 줄 아는 사람을 위해 만든 수작이야.” 이때 스페인 미술은 벨라스케스, 프란시스코 고야 같은 거장들이 등장해 ‘아카데미 미술’에서 다소 벗어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역사화나 종교화에 녹였고, 고야는 심지어 당시 스페인의 전쟁 같은 정치적 상황이나 인간의 내면까지 파고듭니다. 따라서 배경을 삭제한 인물화는 ‘사람 그 자체’를, 게다가 소인을 모델로 한 인물화는 ‘아웃사이더’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으니 마네가 깜짝 놀란 것이었습니다.에밀 졸라의 옹호 마네는 벨라스케스처럼 평범한 사람을 배경 없는 초상화로 그리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나폴레옹 3세 근위대 군악대에 소속된 10대 소년을 모델로 세웁니다. 그 결과 국가를 통치하는 왕도, 돈이 많은 귀족도 아닌, 역사 속에서 영웅으로 대접받는 인물도 아닌, 그저 피리를 부는 이름 모를 소년이 커다랗게 강조된 초상화가 탄생합니다. 마네는 이 작품을 1866년 살롱전에 보냈지만, 역시나 아카데미 회원들은 이 그림을 거절했습니다. 역사화나 영웅 초상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아카데미엔 도발 같은 주제였으니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마네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거절 소식을 듣고 화가 난 마네의 친구이자 문학가 에밀 졸라는 마네의 사실적인 그림 스타일, 그리고 권위가 아니라 인물에 집중하는 모던한 그림의 내용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 옹호하는 글을 신문 연재 기사로 내보냈죠. 마네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자금을 모아 그해 열린 만국박람회에 부스를 차리고 자기 작품을 전시했습니다. 독특한 스타일의 회화는 곧바로 미디어의 주목을 받습니다. 대부분 부정적인 것이었지만 역시 눈 밝은 사람들은 이 그림에 바로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1872년 뒤랑 뤼엘이 이 그림을 사들였고, 마네의 친구인 장 바티스트 포르, 다시 뒤랑 뤼엘, 그리고 아이작 드 카몽도 공작이 이 그림을 소장했습니다. 그리고 카몽도 공작이 세상을 떠날 때 국가에 기증하며 이 작품은 루브르와 오르세에서 세계 관객에게 사랑받는 작품이 됐습니다.※뉴스레터 ‘영감 한 스푼’은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발송됩니다. QR코드를 통해 구독 신청을 하시면 e메일로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개신교계 일부 단체들이 최근 서부지법 폭력 난입 사태와 관련해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를 비판하고 나섰다.한국기독교장로회는 19일 “법원 난동 배후 전광훈은 참회하라”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소위 목사라는 전광훈은 가짜 뉴스에 근거해 사람들을 선동하고, 사법부의 법 집행을 방해하고, 공개적으로 폭동을 주문하며, 소요와 난동의 배후 노릇을 함으로 한국 기독교를 부끄럽게 하고 있다”고 했다. 장로회는 “그는 ‘국민저항권은 헌법 위에 있다’ ‘국민저항권이 시작됐기 때문에 윤 대통령도 구치소에서 우리가 데리고 나올 수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며 “민주주의 법치를 무너트리는 내란 선전·선동의 핵심인물”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민주주의 근간인 법질서를 괴하는 전광훈은 국민과 한국 기독교 앞에 참회하고 사법 난동에 책임지라”고 했다.교회개혁실천연대도 20일 “한국교회는 초법적 폭력사태 주동하는 전광훈을 당장 출교 제명하라”는 제목의 입장문을 냈다. 교회개혁실천연대는 입장문에서 “전광훈은 폭력을 부추기며 근거도 없는 막말로 선동하여 윤석열 지지자들을 자극했다”며 “이는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 용납될 수 없는 반 신앙적 행태”라고 했다. 또 “폭력행위와 이를 조장하는 행위는 절대 용납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며 “한국교회는 재발 방지를 위해 정의와 평화의 원칙을 기반으로 폭력을 비판하고,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김민기 선생님과 학전에 함께 주셔서 더욱 뜻깊은 상입니다. 선생님이 지난해 7월 작고하셨는데, 상황이 좋았을 때 받았다면 더 기뻤겠다는 생각도 문득 들지만….” 서울 중구 국립정동극장 세실에서 20일 열린 ‘KT와 함께하는 제61회 동아연극상’ 시상식에서 김성민 학전 실장의 수상 소감은 담담하지만 울림이 적지 않았다. ‘김민기와 학전 소극장’이 특별상을 받아 대표로 무대에 오른 그는 “학전은 33년간 해온 작품과 활동의 기록을 꾸준히 정리하고 있다”며 “이러한 기록이 학전이 유지된 힘이었기에 잘 정리해서 결과물을 공유하겠다”고 밝혔다. 김옥란 심사위원장은 “학전은 극단 이름처럼 모를 심듯 젊은 연극인을 양성하고 한국 창작 뮤지컬의 토대를 닦았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날 동아연극상 시상식에서 심사위원단은 “2024년은 어느 해보다 다양하고 활기찬 시도가 많았던 해였다”고 전했다. 인공지능(AI)과 로봇 등 새로운 주제가 본격적으로 부상했고, 청소년과 어린이극에서도 과감한 시도가 잇따랐다. 기후 위기와 생태, 지속 가능성 등의 주제를 구체적이고 완성도 높은 결과물로 선보였다는 평가도 받는다. 심사위원단은 “동아연극상은 연극계의 새로운 도전과 과감한 실험을 항상 응원해 왔다”며 “수상자와 수상단체, 연극인 모두에게 깊은 존경과 감사 인사를 드리는 자리”라고 설명했다. 작품상은 ‘하얀 밤을 보내고 있을 너에게’와 ‘화성에서의 나날: 파트1’이 공동 수상했다. ‘하얀 밤을…’의 박해성 연출가는 “다양한 관점을 지닌 창작자들이 모여 서로 조율하며 만든 공연이 상을 받아 무척 뜻깊다”고 말했다. 해당 작품으로 연출상도 받은 그는 “동료들을 오랫동안 응원하고 동행하며 함께하는 사람이 되겠다”고도 밝혔다. ‘화성에서의…’의 윤성호 연출가는 “작가와 연출, 배우, 스태프 모두가 힘을 합쳐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하는 것이 연극이기에 작품상을 받아 매우 기쁘다”고 소감을 전했다. 연기상은 ‘간과 강’과 ‘진천 사는 추천석’에 각각 출연한 송인성, 조영규 배우가 수상했다. 송 배우는 “평생에 한 번 받아볼 수 있을까 꿈꿨던 동아연극상을 받아 헛살지 않았다고 인정을 받은 것 같다”며 기뻐했다. 희곡상은 ‘비명자들 3막: 나무가 있다’를 쓴 이해성 작가, 무대예술상은 ‘활화산’의 임일진 디자이너가 받았다. 새개념연극상에는 ‘이상한 어린이연극: 오감도’를 제작한 종로아이들극장과 공놀이클럽이 받았다. 이 연극에 출연한 어린이 배우 10명은 함께 무대에 올라 큰 박수를 받았다. 유인촌신인연기상은 배우 백종승과 최호영, 신인연출상은 ‘공동창작실패 다큐멘터리: 생존자프로젝트는 생존할 수 있을까’의 본주 연출가에게 돌아갔다. 이날 시상식엔 원로 연극인 김우옥 연출가와 정성숙 국립정동극장 대표, 김명화 작가 겸 연출가, 김옥란 평론가, 전인철 연출가, 김정호 배우 등이 참석했다. 전년도 신인연기상 수상자인 권은혜 배우가 사회를 봤다. 그 밖에 천광암 동아일보 논설주간을 포함한 200여 명이 자리를 빛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0일부터 서울 용산구 페이스갤러리에서 함께 열리고 있는 개인전의 주인공 샘 길리엄(1933∼2022)과 케네스 놀런드(1924∼2010). 작업 방식이나 내용은 무척 다르지만, 1960년대 미국 워싱턴에 거주하던 ‘워싱턴 색채파’ 추상화가들로 공통점이 적지 않다. 그런데 길리엄의 작품들은 놀런드보다 10배 가까이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길리엄이 흑인 작가라는 점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국내 미술관과 갤러리가 세계 미술계에 불고 있는 ‘블랙 신드롬’를 반영한 듯 최근 주목받는 흑인 미술가들을 잇달아 소개하고 있다. 갤러리 화이트큐브(서울 강남구)도 흑인 작가 툰지 아데니이존스를 올해 첫 전시로 소개했으며,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서울 용산구)은 8월 마크 브래드퍼드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 역시 거장 반열에 오른 장미셸 바스키아 같은 흑인 미술가에 대한 인기가 적은 건 아니지만, 이처럼 동시대 흑인 미술가들이 여럿 소개되는 건 상당히 이례적이다.● BLM이 불 지핀 ‘할렘 르네상스’ 구세대 추상화가로 분류되던 길리엄이 최근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건 백인 남성 중심의 미술사에서 벗어나려는 글로벌 트렌드와 맞닿아 있다. 김경미 페이스갤러리 PR 디렉터는 “2010년대 후반부터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흑인 예술가들을 적극 알리는 분위기를 만든 게 계기”라며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인 ‘비바 아르테 비바’의 메인 공간에 길리엄의 작품이 설치되며 (주요 작가로) 부상했다”고 설명했다. 2020년 흑인 청년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으로 촉발된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BLM)’ 운동도 이런 흐름에 한몫했다. 특히 시위 확산과 함께 1920∼40년대 뉴욕 할렘을 중심으로 일어난 문화·예술 부흥 운동인 ‘할렘 르네상스’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해졌다. 지난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개최한 대규모 기획전 ‘할렘 르네상스와 범대서양 모더니즘’이 대표적이다. 흑인 작가들의 회화, 조각 등 160점을 소개한 이 전시는 현지에서 “편견 속에서 다뤘던 흑인 문화를 이제야 바로잡았다”는 극찬을 받았다. 물론 흑인 미술에 대한 주목은 정치적 올바름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2004년 터너상을 받은 잉카 쇼니바레처럼, 특유의 감각적 색채와 조형 의식이 화려한 시각 언어를 선호하는 최근 시장의 흐름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국내 화랑가는 정치색 옅은 작품 선호 한국 미술계도 흑인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지만, 받아들이는 취향은 다소 다르다. 국내에선 인종차별 등 주제 의식보단 작품 자체의 조형성이 주로 선택의 기준이 된다. 길리엄 역시 당대 정치 흐름과 상관없는 추상화를 그렸고, 아데니이존스도 캔버스 전면의 꽃잎, 나뭇잎 등 추상적인 패턴이 도드라진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구상보다 대체로 가격이 저렴하며, 깔끔하고 예쁜 작품을 선호하는 국내 컬렉터의 취향과 잘 맞는 편”이라고 전했다.하지만 최근엔 흑인 작가들의 정치적 메시지에 더 끌린다는 국내 컬렉터들도 조금씩 늘고 있다. 개인 소장가인 류지혜 씨는 최근 해외 갤러리에서 흑인 여성의 정체성을 담은 섀넌 보노, 노예무역을 다룬 퍼비스 영의 작품을 구매했다. 류 씨는 “처음엔 도상이 좋아 끌렸지만, 점점 작품에 내재된 시대적 관점이 매력으로 다가왔다”며 “나의 오래된 가치관이나 편견을 돌아보게 해줘서 끌렸다”고 말했다. 강성은 전시 기획자는 “할렘 르네상스처럼 한국도 다양한 정치적 격동기를 보낸 만큼 국내 미술가들이 처했던 시대적 상황과 인권에 대해 다룬 작품을 연구하고 그 가치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할렘 르네상스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미국 남부에서 벗어나 대거 이주를 시작하며 1920∼40년대 뉴욕 할렘을 중심으로 일어난 문화 예술 운동. 랭스턴 휴스(시인)와 조라 닐 허스턴(소설가), 알랭 로크(철학자), 에런 더글러스(화가), 듀크 엘링턴(음악가), 루이 암스트롱(음악가)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인종 차별에 저항하며 흑인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낸 작품들을 창작해,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 등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국에서 한국계 큐레이터가 처음으로 주요 미술관 관장에 선임됐다. 미 샌프란시스코 아시안 미술관은 14일(현지 시간) “이소영 박사(사진)를 차기 관장 겸 최고경영자(CEO)로 임명한다”고 밝혔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안 미술관 재단 및 아시안 아트 위원회 이사회의 살레 유 의장은 “이 박사는 아시아 및 아시아계 미국 미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다양한 관객과 소통하며 창의적이고 열린 태도를 보여줬다”고 설명했다. 컬럼비아대에서 미술사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첫 한국계 미술 큐레이터로 15년간 일하며 ‘다이아몬드 산: 한국 미술의 여행과 노스탤지어’(2018년), ‘신라: 한국의 황금 왕국’(2013년), ‘리움 삼성미술관의 한국 분청사기’(2011년) 등의 전시를 기획했다. 2018년부터 하버드대 미술관 수석 큐레이터로 근무하며 소장품 확대 및 전시 기획, 교육 프로그램 등을 이끌기도 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티 소믈리에 50대 엄마와 20대 영상 감독 아들. 자연과 건강에 관심 많은 30대 식물 전문가(플랜티스트)와 요리사 부부, 그리고 40대 갤러리스트. ‘예술 작품은 어떤 사람들이 소장하고 있을까’란 질문에서 출발해 소장자의 생활 공간을 상상해 전시를 구성한 독특한 미술전이 열리고 있다. 서울 성동구 디뮤지엄이 개관 10주년을 맞아 기획한 ‘취향가옥: 아트 인 라이프, 라이프 인 아트’전이다. 이번 전시는 부부나 모자 같은 5명의 가상 인물을 먼저 창조했다. 그리고 이들의 취향과 정체성, 감각을 설정해 공간 디자인으로 표현했다. 첫 번째 공간은 상반된 두 개의 취향이 공존하는 ‘스플릿 하우스’다. 두 개의 입구로 분리된 집은 한쪽은 아들, 한쪽은 엄마의 공간이다. 20대 아들의 공간엔 애니메이션이나 그래픽 스타일이 두드러지는 일본과 한국 젊은 작가 작품들이 배치됐다. 반면 엄마의 자리엔 이승조, 박서보, 김환기 등 원로 작가 작품들이 걸렸다. 다음 전시장 ‘테라스 하우스’로 넘어가면 30대 부부의 공간이 펼쳐진다. 클로드 비알라, 이강소, 이은, 프랭크 스텔라 등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작품들이 배치됐다. 테라스엔 가구와 도예 작품을 제작하는 로마넬리 부부의 가구나 오브제가 눈길을 끈다. 특히 이 ‘집’ 입구엔 파블로 피카소의 석면 판화가 걸려 있다. 종이 작품인 데다 색감이 알록달록해 관객들 반응이 좋다고 한다. 마지막 ‘듀플렉스 하우스’도 독특하다. ‘맥시멀리스트’ 취향의 40대 남성 갤러리스트를 주인으로 상상하고 꾸몄다. 복층 구조의 넓은 공간에 알렉산더 칼더의 종이 작품부터 백남준의 미디어 아트 작품, 또 하비에르 카예하의 커다란 조각 작품 등 다양하게 배치했다. 장 프루베, 핀 율 같은 유명 디자이너의 가구도 배치됐다. 전시 관람이 누군가의 집을 방문해 취향을 엿보는 기분이 들도록 공간을 꾸민 건 무슨 연유일까. 대림문화재단 관계자는 “대림미술관 기획전에서 일부 공간에 가구를 배치해 집처럼 보이게 하는 디스플레이를 활용한 적이 있다”며 “이번 전시는 그런 아이디어를 최대로 끌어 올리는 실험”이라고 설명했다. 각 공간을 상징하는 인물로 여러 나이대를 설정한 것도 이유가 있다. 이 관계자는 “대림미술관 하면 2030세대가 찾는 곳으로 여겨졌는데, 팬데믹 시기 예술에 대한 관심이 커지며 다른 연령대의 방문도 늘어났다”며 “이런 흐름에 맞춰 30∼50대 관객의 취향에 맞춘 공간도 조성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전시 콘셉트가 인상적이지만, 그간 외부로 공개된 적이 거의 없던 대림문화재단 소장품이 다수 나온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70여 명의 국내외 예술가 작품 300여 점을 볼 수 있는데 모두 재단 소장품이다. 전시된 면면을 보면 트렌디한 디자인적 요소가 두드러지는 작품이 많다. 그런 가운데 ‘스플릿 하우스’에 김환기 작품 2점도 걸려 있어 “이 작품들이 여기에 있었느냐”고 신기해하는 관객 반응도 적지 않다. 5월 18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티 소믈리에 50대 엄마와 20대 영상 감독 아들. 자연과 건강에 관심 많은 30대 식물 전문가(플랜티스트)와 요리사 부부, 그리고 40대 갤러리스트. ‘예술 작품은 어떤 사람들이 소장하고 있을까’란 질문에서 출발해 소장자의 생활 공간을 상상해 전시를 구성한 독특한 미술전이 열리고 있다. 서울 성동구 디뮤지엄이 개관 10주년을 맞아 기획한 ‘취향가옥: 아트 인 라이프, 라이프 인 아트’전이다.이번 전시는 부부나 모자 같은 5명의 가상 인물을 먼저 창조했다. 그리고 이들의 취향과 정체성, 감각을 설정해 공간 디자인으로 표현했다. 첫 번째 공간은 상반된 두 개의 취향이 공존하는 ‘스플릿 하우스’다. 두 개의 입구로 분리된 집은 한쪽은 아들, 한쪽은 엄마의 공간이다. 20대 아들의 공간엔 애니메이션이나 그래픽 스타일이 두드러지는 일본과 한국 젊은 작가 작품들이 배치됐다. 반면 엄마의 자리엔 이승조, 박서보, 김환기 등 원로 작가 작품들이 걸렸다.다음 전시장 ‘테라스 하우스’로 넘어가면 30대 부부의 공간이 펼쳐진다. 클로드 비알라, 이강소, 이은, 프랭크 스텔라 등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작품들이 배치됐다. 테라스엔 가구와 도예 작품을 제작하는 로마넬리 부부의 가구나 오브제가 눈길을 끈다. 특히 이 ‘집’ 입구엔 파블로 피카소의 석면 판화가 걸려 있다. 종이 작품인데다 색감이 알록달록해 관객들 반응이 좋다고 한다.마지막 ‘듀플렉스 하우스’도 독특하다. ‘맥시멀리스트’ 취향의 40대 남성 갤러리스트를 주인으로 상상하고 꾸몄다. 복층 구조의 넓은 공간에 알렉산더 칼더의 종이 작품부터 백남준의 미디어 아트 작품, 또 하비에르 카예하의 커다란 조각 작품 등 다양하게 배치했다. 장 푸르베, 핀 율 같은 유명 디자이너의 가구도 배치됐다.전시 관람이 누군가의 집을 방문해 취향을 엿보는 기분이 들도록 공간을 꾸민 건 무슨 연유일까. 대림문화재단 관계자는 “대림미술관 기획전에서 일부 공간에 가구를 배치해 집처럼 보이게 하는 디스플레이를 활용한 적이 있다”며 “이번 전시는 그런 아이디어를 최대로 끌어 올리는 실험”이라고 설명했다.각 공간을 상징하는 인물로 여러 나이대를 설정한 것도 이유가 있다. 이 관계자는 “대림미술관하면 2030 세대가 찾는 곳으로 여겨졌는데, 팬데믹 시기 예술에 대한 관심이 커지며 다른 연령대의 방문도 늘어났다”며 “이런 흐름에 맞춰 30~50대 관객의 취향에 맞춘 공간도 조성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전시 컨셉트가 인상적이지만, 그간 외부로 공개된 적이 거의 없던 대림문화재단 소장품이 다수 나온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70여 명의 국내외 예술가 작품 300여 점을 볼 수 있는데 모두 재단 소장품이다. 전시된 면면을 보면 트렌디한 디자인적 요소가 두드러지는 작품이 많다. 그런 가운데 ‘스플릿 하우스’에 김환기 작품 2점도 걸려 있어 “이 작품들이 여기에 있었느냐”고 신기해하는 관객 반응도 적지 않다. 5월 18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항아리 모양으로 웅크린 한 남성. 그 앞엔 쩍 갈라진 항아리가 있다. 자신을 가뒀던 항아리가 깨졌는데도 그대로 웅크린 이 사람. 그림 위엔 ‘4인방이 사라진 뒤에야 나 자신, 그리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비웃으려 이 글을 쓴다’고 적혀 있다. 4인방이란 문화대혁명 때 권력을 장악했던 마오쩌둥(毛澤東) 전 중국 국가주석의 측근(장칭, 왕훙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들을 일컫는다.혁명이 끝났음에도 독 안에 갇혀 아무 말 못 하는 지식인을 비판한 이 작품은 랴오빙슝의 ‘자조’. 지난해 말부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리는 ‘수묵별미: 한·중 근현대회화’전에서 만날 수 있다. 배원정 학예연구사는 “중국미술관에 대여를 요청하면서도 ‘정말 올 수 있을까’ 궁금했던 작품”이라며 “그만큼 이번 전시는 중국 근현대 수묵화의 다양한 면모를 볼 수 있다”고 했다.국립현대미술관이 중국 국가미술관인 중국미술관과 공동 기획한 ‘수묵별미’전은 한국과 중국의 근현대 수묵채색화 148점을 소개한다. 중국에서도 자주 공개하지 않는 국가 지정 ‘1급’ 작품 5점도 포함됐다. 다음 달 중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봐두면 좋을 작품들을 배 학예사와 꼽아 봤다.① 우창숴 ‘구슬 빛’우창숴(1844∼1927)는 치바이스, 자오즈첸과 함께 20세기 한국 화단이 많은 영향을 받은 작가다. 해당 작품은 등나무 줄기가 어지럽게 얽힌 모습을 리드미컬한 선과 화면 구성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해 작가의 호쾌하고 자유로운 개성이 듬뿍 묻어난다. 배 학예사는 “이응노의 ‘생맥’ 같은 추상화적인 작품이 수묵화 고유의 전개 과정에서 나온 것임을 짐작하게 만드는 작품”이라고 했다. ② 쉬베이훙 ‘전마’수묵화를 그리던 중국 작가들은 서양 회화를 접하며 해부학과 원근법에 바탕을 둔 표현 방식에 눈을 뜬다. 쉬베이훙은 중국에서 이런 ‘사실주의 운동’에 앞장선 작가다. ‘전마’는 전투마가 달리다 갑자기 옆을 보는 모습인데, 수묵화 특유의 선 그리기 방식과 번짐 기법이 서양화 표현 방식과 결합돼 현대인에게도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③ 장다첸 ‘시구를 찾는 그림’장다첸은 한국에도 작품이 많고, 대만 타이베이 고궁박물관 옆에는 장다첸 기념관이 있을 정도로 사랑받는 작가다. 배 학예사는 “장다첸은 연꽃 그림으로 유명한데, 초기작은 중국 사람도 보기 힘들 만큼 귀하다”며 “중국 측이 내줘서 감동받았다”고 했다. ‘원나라 4대가(황공망, 예찬, 오진, 왕몽)’의 양식을 따라 소나무와 오동나무, 사람을 그린 작품. 장다첸이 자신의 화법을 다듬어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④ 판제쯔 ‘석굴 예술의 창조자’중국 대학생의 채색화 공부에 교과서 같은 작품이다. 한국이 채색화의 원류로 고구려 고분 벽화를 거론하는 것처럼 중국에선 돈황 석굴 벽화를 원류로 여긴다. 때문에 채색화 전통을 계승한다고 할 때 돈황 벽화를 따라 그리며 시작하는데, 이 작품은 그 장면 자체를 담고 있어 흥미롭다.⑤ 첸쑹옌 ‘금수강남 풍요로운 땅’중국에서 수묵화가들은 ‘문인’ 계급이었다. 때문에 문화대혁명 이후 한량 취급을 받았다. 그럼에도 치바이스가 작가로 살아남고 블루칩으로 선전되는 건, 그가 목수 출신이란 점이 크게 작용했다. 첸쑹옌은 “우리 산수화도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경작이 이뤄지고 전기가 들어오며 풍요로워진 중국 땅을 그렸다.배 학예사는 “중국 현대미술은 그간 갤러리를 중심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작가 위주로 국내에 소개됐다”며 “국가가 지정한 ‘문물급’ 작품 30여 점이 대거 한국에 선보이는 건 처음”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한국화 작품도 함께 소개된다. 한국 전시가 끝나면 함께 중국을 순회할 예정이다. 한국화와 중국 수묵화를 비교하며 우리만의 독창성이나 개성은 무엇인지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2월 16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세계 4대 보석 수집가’로 꼽히는 일본 아리카와 가즈미 앨비언아트 대표(사진)의 보석 컬렉션 200여 점이 한국을 찾았다. 3월 16일까지 서울 송파구 롯데뮤지엄에서 열리는 전시 ‘디 아트 오브 주얼리(The Art of Jewellery): 고혹의 보석, 매혹의 시간’은 프랑스 나폴레옹,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썼던 보석부터 세계에 단 3점만 있는 ‘조각계의 라파엘로’ 발레리오 벨리가 만든 십자가 등을 공개한다. 전시 공간 연출은 일본의 세계적 건축가 구마 겐고가 맡아 눈길을 끈다. 전시 개막을 맞아 지난해 12월 한국을 찾았던 아리카와 대표는 “나는 불교 신자여서 인연에 대해 생각해 봤다”며 1500년 전 일본과 한국의 인연을 언급했다. “6세기 백제 성왕께서 일본에 불상과 경전을 전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나도 이것을 믿습니다. 그때 일본이 한국에 큰 은혜를 입었다고 지금까지 생각해 왔어요. 아름다운 보석을 소개해 당시 받은 은혜의 1억분의 1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번 전시는 고대와 중세 르네상스 시대 작품부터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와 17∼18세기 유럽, 19세기 나폴레옹과 빅토리아 시대, 아르누보, 벨 에포크, 아르데코 등 광범위한 시대의 작품을 다룬다. 아리카와 대표도 “(내 컬렉션을) 영국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뮤지엄 등 세계 박물관에서 70회 정도 전시했지만, 이번처럼 메소포타미아 시대부터 1950년대까지 긴 역사를 소개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설명했다.아리카와 대표가 꼽은 주요 작품은 ‘벨리의 십자가’와 19세기 독일 뷔르템베르크 왕가의 보석 세트다. 벨리의 십자가는 16세기 만들어진 것으로 정교한 세공 기술이 돋보인다. 받침대는 1762년 프랑스 파리의 금세공인이 제작했다. 뷔르템베르크 왕가 보석 세트는 100개가 넘는 핑크 토파즈를 활용한 티아라와 목걸이, 귀걸이, 팔찌, 브로치로 구성됐다. 이 밖에 나폴레옹 1세가 바사노 공작에게 선물한 브로치, 알폰스 무하가 만든 코르사주 장식품, 빅토리아 여왕이 포르투갈 여왕에게 선물한 팔찌 등도 관객들과 만난다. 구마 건축가가 디자인한 전시 공간은 보석의 질감을 돋보이게 했다. 광택이 없는 투박하고 어두운 천을 배경에 깔아 ‘대비의 미’를 극대화했다. 각 전시 부문마다 배경 천을 다양하게 배치하고 관객 동선은 은은한 조명을 따르도록 만들었다. 보석의 형태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오브제 ‘빛의 격자’와 ‘그림자의 격자’도 전시장 입구 로비와 휴식 공간에 설치됐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