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때에도/ 그대(술병)가 상에 놓이지 않으면 어떻게 손님을 즐겁게 하랴!(花月令辰/ 非爾在牀/ 曷以娛賓) (…) 쓰기에는 아름답지만/ 모든 허물이 여기서 비롯된다.(用之斯美/ 百咎攸自)’표주박처럼 둥근 몸에 가늘고 긴 입을 가진 백자 위에 푸른색 글씨로 한시가 적혀 있다. 손님을 대접하는 상에 올랐을 이 백자는 술의 정취를 노래하면서도, 절제하지 않으면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옛 시절의 낭만이 가득한 이 술병부터 기울어진 달항아리, 깊은 검은색의 흑자(黑瓷)와 분청사기까지 조선시대 도자기와 한국 현대미술 작품을 함께 선보이는 기획전 ‘흙으로부터’가 20일 서울 종로구 학고재에서 개막했다.전시는 분청사기와 박영하의 회화 작품 ‘내일의 너’로 시작한다. 분청사기의 투박한 질감과 회화 작품 속 거친 천연 안료가 교차하는 가운데, 달항아리 도자기 옆에는 한국 어디에서나 보이던 항아리를 그린 송현숙의 연작이 전시됐다. 송현숙은 1970년대 파독 간호사로 독일에 건너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말뚝, 항아리, 명주실 등의 사물로 표현하고 있다.김환기가 백자를 그린 회화 ‘항아리’ 앞에는 칠흑처럼 까만 ‘흑자편호’가 자리한다. 흑자는 철분이 다량 함유된 유약을 칠해 만든 것으로, 고려 초기 등장해 조선 말까지 제작됐다.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흑자는 15~16세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전시장 맞은편에는 백자 술병인 ‘표형문자입주병’이 전시됐다. 이 병을 좌우로 김환기가 한글을 연상케 하는 문자를 그린 추상 ‘무제’(1960년대)와 작은 활자들을 모아서 제작한 이진용 작가의 ‘컨티뉴엄’ 연작이 벽면을 가득 채운다. 이렇게 전시는 흙으로 빚은 도자기에서 시작해 흙을 재료로 하거나 이것을 연상케 하는 회화, 설치 작품으로 확장된다.학고재 신관에서는 박광수, 로와정, 지근욱 등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이어진다. 박광수 작가는 ‘땅과 화살’을 비롯해 ‘땅의 표면에 닿는 느낌’에서 영감을 얻은 회화 연작을, 로와정은 못을 이용한 개념 설치 작품 ‘N’을 선보인다. 지근욱 작가는 우주의 형상을 상상하며 색연필로 규칙적인 선을 긋거나 프린트로 미세한 망점을 새겨 만든 회화 연작 ‘스페이스 엔진’을 공개했다.신리사 학고재 기획팀장은 “흙을 따라 전통과 현대, 물질과 정신, 기억과 감각 사이 연속성을 하나의 장에 펼쳐보고자 했다”며 “흙이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니듯 한국성 역시 시대와 맥락 속에서 유연하게 변주되는 개념임을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통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 달 13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다 한국에 갔다”, “두 명만 모이면 한국 이야기가 나온다”. 1990년대 이후 중국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은 한국으로의 대거 이주에 나섰다. 한국에서 번 돈으로 집을 장만한 가족을 일컫는 ‘만원호’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였다. ‘1만 위안의 집’이란 뜻인 만원호는 한국행으로 큰 부를 거둔 이들을 가리켰다. 이처럼 코리안 드림은 조선족 농민과 노동자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 책은 이러한 연변 출신 노동자들이 경험하게 되는 코리안 드림의 현실과 희로애락을 인류학 연구자의 시선으로 담았다. 2004년 서울에서 미등록 조선족 노동자를 만나고 관심을 갖게 된 저자는 2016년까지 한국과 중국, 연변에서 조선족 동포 및 가족 연구자와 활동가를 만나 이들의 실상을 관찰하고 이들의 꿈과 좌절, 생존을 위한 전략을 세밀하게 그린다. 이 책에서 주요하게 그려지는 장면 중 하나는 조선족 노동자들이 가족과 고향을 뒤로하고 국경을 넘는 과정이다. 조선족 노동자들은 소수민족으로 겪는 중국 내에서의 경제적 한계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또 한국에서 돈을 벌면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 속에 빚을 내거나 친지의 도움을 받아 한국행을 택한다. 하지만 한국에 도착하고 나면 기대와는 달리 현실의 벽을 마주하게 된다. 언어와 문화가 비슷한 동포로서 환대를 받음과 동시에 차별이 공존한다. 이들은 한국에서도 노동시장 주변부의 가장 고된 일자리로 내몰린다. 책에서 한 조선족 여성은 고향에 집을 장만한다는 꿈을 안고 하루 12시간 이상 식당 주방에서 고되게 일하지만, 자신을 향한 차가운 경계의 시선을 늘 느낀다. 가족을 한국에 보내고 연변에 남은 조선족 역시 삶은 쉽지 않다. 멀리 있는 파트너를 기다리며 혼자 자녀를 키우거나 가사를 돌보는 남편이나 부인들을 연변에서는 ‘보토리’라고 부른다. 보토리들이 가족의 송금을 기다리고, 사랑하는 가족의 귀환 혹은 한국에 갈 기회를 기다리는 것 역시 ‘기다림의 노동’이라고 저자는 표현한다. 2008년 이후 중국 경제가 부상하면서 수많은 조선족들이 ‘차이나 드림’으로 눈을 돌리게 된 상황도 소개한다. 이 무렵 연변 지역의 ‘한국 바람’은 재평가를 받는다. 친구들에게 한국에 간다고 하면 ‘아직도 한국에 가느냐’, ‘왜 가느냐’는 반응이 돌아왔다. 이에 ‘중국에서 사업을 한다’고 거짓말한다는 일화도 등장한다. 책은 코리안 드림이나 차이나 드림처럼 ‘국가의 이름’으로 단순화된 꿈을 넘어, 새로운 삶의 경로를 모색하는 세대의 부상을 전망한다. 연변은 조선족의 우선권과 한국어 사용이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지역이다. 그러나 조선족이 ‘중국의 소수민족이자 한국의 재외동포’라는 경계적 위치에 있듯, 연변도 서로 다른 꿈들이 경합을 벌이는 역동적인 공간임을 책은 인류학적인 렌즈로 분석한다. 미국 새크라멘토 캘리포니아주립대 아시아학과 교수인 저자가 2023년 미국에 먼저 출간한 책으로, 북미·유럽 중심의 이주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24년 미국동아시아인류학회(SEAA) 저술상을 수상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마크 브래드포드의 개인전 ‘킵 워킹(Keep Walking)’이 열리는 서울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 가면, 전시장 바닥에 넓게 펼쳐진 작품 ‘Float’가 관객을 맞이합니다.이 작품 옆으로는 골목길을 당당하게 걷는 사람의 모습이 담긴 영상 작품 ‘나이아가라’가 상영되고 있고요.두 조합은 ‘망설이지 말고 어서 들어와, 그리고 계속 걸어‘라는 메시지로 저에게 다가왔습니다.작가의 초청에 따라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파마지와 길거리 전단지를 갈고 닦아 만든 아름다운 추상화들이 관객을 맞이합니다.그리고 마지막 방 ‘폭풍이 밀려온다’로 들어서면 휘몰아치는 허리케인을 느낄 수 있습니다.이 모든 경험에 대해 작가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브래드포드는 재료를 사용하게 된 과정부터, 미국 추상표현주의와 모더니즘에 대한 의견, 그리고 한국 전시를 준비하며 느꼈던 걱정까지 진솔하게 들려주었습니다. 인터뷰 전문을 뉴스레터로 보내드립니다.— 먼저 작가님이 ‘파마지’를 사용하게 된 계기를 물어보고 싶어요. 언제 처음 그걸 쓰겠다고 생각했는지, 또 그 종이를 보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길래 그걸 사용하는지요.“제가 석사 과정을 할 때인데, 당시 ‘기억’과 ‘재료’에 관심이 많았어요.내가 유화 물감을 사용한다면, 내 작품이 속하는 역사란 ‘유화 그림의 역사’라고 생각했죠.물론 그 ‘유화 그림의 역사’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유럽 회화 중심의) 미술사죠.여기에 더해서 사람들은 (흑인이자 미용사의 아들이라는) 제 출신과 성장 스토리에 집착했거든요.그러니 (파마지라는) 재료의 기원을 생각하며 이걸 전략적으로 쓸 수 있겠다.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역사에 대해 대화를 여는 전략으로 재료를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파마지를 쓰게 된 거예요.”— 파마지에 담긴 사회적, 정치적 맥락이란 어떤 걸까요?간단해요. 파마지는 파마를 할 때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미용실에서 쓰는 종이죠. 한국 사람들도 파마를 많이 하니까 그 재료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죠.저는 흑인 여성들이 자주 드나드는 공간인 미용실에서 파마지를 사용하며 자랐습니다. 그러니 내가 속한 사회의 역사와 관련 있는 재료죠.동시에 저는 미술사, 특히 추상 미술의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유럽의 추상과 1950년대 미국 추상이 그것인데. 저에게 그런 추상과 ‘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의 자체가 텅 빈 것처럼 느껴졌어요.예술가의 고요한 작업실에서 만들어지는 추상화가 세상과는 동떨어진 ‘텅 빈 그릇’과 같다고 해야 할까요?저는 그런 모더니즘의 개념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죠. 전혀요.— 그러면 파마지를 보고 ‘아, 내가 이걸 재료로 쓸 수 있겠다’했던 정확한 순간은 기억이 나나요?네, 작업실에 있을 때였어요.교수님과 크리틱을 하고 있었고, 제가 플라스틱 위에 반투명한 흰색 파마지를 붙였어요.교수님이 들어와서 봤고, 저는 이렇게 말했어요.“저는 이게 회화라고 생각해요.”교수님이 아래로 훑어보더니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하고 걸어 나갔어요. 그 순간 생각했죠.“음, 이거 흥미로운데?”그때부터 파마지를 재료로 쓰기 시작한 거예요.그런데 제가 다녔던 학교(CalArts)는 9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의 이론을 중시하는 곳이었어요. 유럽 이론이 정점에 이르렀고, 자크 데리다는 신이었으며 할 포스터, 호미 바바, 로잘린드 크라우스… 그러니까 정체성과 이론의 시대였죠. 그런 가운데 제 작업을 보고 어떤 교수는 이렇게 말했어요.“너 이거 계속하면, 네 커리어는 끝날 거야.”— 왜 커리어가 끝난다고 했어요?너무 ‘재료적’(material)이었고, ‘모더니즘 회화’,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뉴욕 화파를 직접 건드렸기 때문이에요.모더니즘 회화는 잭슨 폴록 같은 커다란 백인 남자들이 그린 추상화이고, 그건 헤테로섹슈얼, 나쁜 남자, 카우보이들의 그림이었어요.페미니즘을 비롯한 이론의 시대에 폴록 같은 추상화가는 ‘악당’이었거든요.근데 저는 생각했어요.“왜 그리면 안 돼? 그 역사를 확장하면 안 돼? 거기로 직접 뛰어들어서 내가 차지하면 되는 거 아닌가?나도 카우보이가 될 수 있지. 게이도 카우보이 할 수 있잖아.”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죠.“아니, 회화는 죽었어.”그 사람들에게 저는 이렇게 답한 거예요.“그래? 회화가 죽었다면 나는 뱀파이어가 되지 뭐.”— 그러니까 뱀파이어가 될지언정 남들이 다 죽었다는 회화로 승부를 걸겠다. 다만 유럽 미술사의 상징인 유화 물감은 쓰지 않고 다른 재료를 쓰겠다는 거였네요. 맞아요. 회화만큼 ‘재료의 순수성’에 집착하는 매체는 없을 거예요.지금 작가들이 조각을 전부 대리석으로 만들지는 않잖아요? 그래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요.그런데 회화에서는 순수성, 위계적 순수성을 고집하죠.저는 물감을 쓰지 않으면서 내 이야기를 회화사로 집어넣으려고 하는 거예요. 조각가가 이탈리아 카라라 대리석을 쓰지 않아도 조각사에 들어가는 것처럼요.그러니까 사실 저에게 중요한 건 재료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권력’이에요.— 그 말은 당신이 ‘유화’를 의도적으로 피하려고 했다고 이해해도 될까요?맞아요. 그와 동시에 저는 회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그것도 추상. 특히 미국 추상.뉴욕 현대미술관(MoMA)과 초대 관장이었던 알프레드 바. 1950년대.세상과의 문을 닫아 버리고 캔버스와 아주 원초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그 개념.(모더니즘) 저는 그런 말을 믿지 않아요.생각해 보세요. 그 당시 작가들의 작업실 밖에서 마틴 루서 킹은 암살됐고 민권 운동이 일어났어요. 잭슨 폴록이 ‘타임’ 표지에 실릴 때와 같은 시기였죠.1950년대 미국 추상은 아주 글로벌하게 퍼져 나가서 한국에서까지 볼 수 있는 것이 되었지만.그건 미국 내부가 정치적으로 너무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형상이 없는 추상을 미국의 이미지로 바깥에 보낸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그런 추상들이 미국 국경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다 가려버린 거죠.”— 멀리서 보면 당신의 작업은 정말 화려하고 아름다워요.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찢어지고 긁히고 닳아 있는 흔적을 볼 수 있는데요. 혹시 여기에 ‘분노’가 담겨 있나요?그럴지도 모르죠. 흠, 내가 분노하고 있을까?사회적인 맥락에서 분노라면 맞아요. 저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특정 정치적 입장에 대해서는 화를 내고 있는 게 맞아요.그러나 예술적으로? 음, 예술적으로는 아니에요.제 표현이 강렬할 수는 있지만, 작품을 만들 때 분노에 사로잡혀 있진 않아요.내 작업은 굉장히 육체적이에요. 물리적인 측면이 강하고.그래서 공격적 에너지가 느껴질 수는 있죠.하지만 그게 단순히 화가 난 상태는 아니거든요. 이렇게 말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나는 재료를 내가 원하는 대로 굽히는 데 아주 능숙해요. 이 과정이 공격적으로 보일 수는 있어요.미용사라면 고객이 원하는 대로 머리를 반드시 만들어 줘야 하잖아요.때로는 고객이 원하는 걸 위해서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어요. 내가 미용사로 일할 때 그걸 배운 것 같아요.예를 들어 보죠. 흑인 손님이 와서 ‘나 백금발로 머리하고 싶어’라고 하면 저는 나무 조각을 주고 입에 물라고 해요.“백금발을 원한다고? 그래 그럼 이거 물고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원하는 색이 나올 때까지 안 멈출 테니까 아파도 참아야 해.” 이런 식이었죠. — 저도 곱슬머리라서 무슨 말인지 알아요. 찰랑이는 머리카락으로 만들기 위해 몇 시간이고 가만히 앉아서 참아야 하거든요.그러니까요.회화를 할 때도 내가 타고난 본성과 내가 원하는 욕망 사이의 긴장이 있어요. 저는 곱슬머리 흑인한테 하는 이런 말을 싫어해요.‘네 원래 머리가 얼마나 예쁜데 바꾸려고 해? 그대로 둬’아니? 저 여자는 생머리를 하고 싶다잖아. 그냥 닥쳐.그림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어떻게든 만드는 거예요.낑낑거리며 그림을 타고 올라가 밀어 넣고 잡아당기면서 애를 쓰죠.그렇게 하다 보면 결국 곱슬머리는 곧게 펴진 머리가 되어 있어요. — 이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이번에 공개한 신작 ‘폭풍이 몰려온다’가 있는 마지막 방이 생각나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끄집어낸 느낌? 작가님에게 직접 설명을 듣고 싶어요.그 작품은 아주 층위가 많아요.자연재해인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있고,카트리나라는 이름을 가진 트랜스젠더 여성이 있으며,필라델피아에서 볼룸 문화를 만든 최초의 드랙퀸 윌리엄 도시,그리고 나 자신이 있어요.우리가 공유하는 유일한 공통점은 모두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겁니다.저는… 모든 역사를 하나로 불러와, 방 안에서 소용돌이치듯 함께 회전하는 힘을 만들고 싶었어요. — ‘폭풍이 몰려온다’가 전시된 방에서 저는 윌리엄 도시라는 사람을 세상이 지우려 했지만, 그런 억압이 시간이 지나 더 큰 반작용으로 돌아와 태풍처럼 모든 것을 드러내고 집어삼키는 움직임이 느껴졌어요.맞습니다. 정확해요.사실 이 연작을 뉴욕이나 할렘에서 발표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너무 쉬운 길 같았어요.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허리케인은 예상 못 하는 것에서 불어오는 거니까. 그걸 서울에서 보여주고 싶었어요.어쩌면 그 허리케인이 바로 저일 수도 있고요.나, 마크 브래드포드가 서울로 온 허리케인 인거죠. — 흥미롭네요. 네 그런 허리케인 같은 휘몰아치는 바람이 느껴졌어요.그걸 느꼈다니 너무 좋네요.맞아요. 한국인이라고 이걸 이해할 수 있고, 저건 이해할 수 없다. 저는 그런 생각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나는 지역성(locality)을 믿지만 동시에 보편적인 진리도 있다고 믿어요. 한국에서도 사람들이 이 작업을 이해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당신은 언제 처음으로 ‘예술가가 되겠다’고 의식했나요?사람들이 저에게 항상 그 질문을 해요. 그런데 그런 결정적인 순간 같은 건 없었어요.‘꿈을 따라라’는 식의 말은 중산층이나 할 수 있는 사치스러운 생각이에요.내가 자란 건 그런 환경이 아니었거든요.나는 밤에 일을 마치고 야간 학교에 가서 미술 수업을 들었어요.아주 천천히 오랫동안 그러한 과정을 거쳤죠.— 그런데 물감 아닌 재료를 쓴 회화로 승부하려 마음먹었다는 이야기를 했잖아요. 꿈을 갖지 않았다기엔, 그 말은 세잔이 ‘사과로 파리를 정복하겠다’고 한 것처럼 야심에 가득한 예술가의 말로 들렸는데요.그런가요? 사람들이 저를 보고 자신감이 넘친다는 말은 하는데. 스스로 내가 그런 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보다 나는 ‘시도’를 하는 사람이었어요.난 늘 변두리에 밀려난 사람이었거든요.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는 바가 없으니, 역설적으로 나에겐 어떤 자유가 있었어요.나 역시 사람들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고. 그러니 자신감 보다는 그런 자유가 내 안에 늘 있었다고 해야 할 것 같아요.내가 예술가로 성공했다고 누군가는 말하겠지만 그게 때로는 족쇄가 될 수 있어요. 성공할수록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아지니까요. — 당신은 파마지뿐 아니라 길거리 전단지처럼 버려진 재료를 쓰잖아요. 네. 그 버려진 재료를 가져와 회화사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고 있죠. 버려진 것, 주변부로 밀려난 것을 붙잡아다가, 중심으로 가져오는 거예요. 그 버려진 것은 어쩌면 나 자신인지도 몰라요.가난하고, 동성애자이고, 흑인인.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나의 위치. 하지만 난 결코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절대로. 오히려 권력자들이 앉는 식탁(왕좌)에 비집고 들어가 걸리적거리는 걸 치우고 내 자리를 만들려고 했죠.나에게 추상 회화는 정치적인 행위였고 내가 그걸 하는 이유는 분명했어요. 중심에 앉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나는 왜 여기 앉으면 안 되는데? 반문하면서.어떤 사람들은 “네 얘길 듣고 싶지 않아”라고 했습니다.그럼 난 “그래?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난 여기 앉을 거야”라고 한 거고요. 전 여자들한테도 항상 ‘제발 먼저 나서서 사과 좀 하지마’라고 해요.여자들은 테이블에 놓인 생수병 하나를 가져가면서도, “미안한데 이거 마셔도 돼요?” 묻잖아요.제발 그러지 마. 백인 남자들은 묻지도 않고 그냥 가져가잖아.그러니까 우리도 마시고 싶으면 그냥 집어서 가져가자고요.나는 권력에 대해 아주 민감한 사람이고, 모든 사람이 왕좌에 앉아 버티며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 그 말을 듣고 있으니 당신이 ‘계속해서 걸어 나가고(keep walking)’ 그 뒤로 폭풍이 밀려오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네요.네. 맞습니다. 제 작품은 허리케인이 오는 것과 같아요. 사실 한국에서 ‘폭풍이 밀려온다’ 연작을 공개하는 건 저에게 불안감을 주는 경험이었어요. 한국의 문화에 대해 내가 완벽하게 알지 못하고, 이건 흑인 문화에 관한 이야기니까 다르게 읽힐 수가 있잖아요. 그렇지만 아냐, 하자. 그냥 하자. 여기서도 좋을 거야. 라고 생각했죠. — 전시를 보고 이야기를 듣고 나니 ‘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후련해요. 가만히 있지 말고 원하는 것을 싸워서 얻어 내라는 메시지가 느껴져서요.정말요? 그럼 됐어요. 그게 바로 제가 원하는 거였어요.다음 세대의 관객들이 내 작품을 보고 용기를 내는 거요.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가 좋아하건 싫어하건 반드시 몰려오게 되어 있으니, 그들이 제 작품을 보고 용감해질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마크 브래드포드: Keep Walking- 2025년 8월 1일 ~ 2026년 1월 25일- 서울 아모레퍼시픽미술관(APMA) ※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뭐든 도전하고 싶습니다.” 2년 동안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전국 투어에 나섰던 배우 박근형이 투어가 끝난 지 한 달여 만에 다시 무대에 선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전 ‘고도를 기다리며’를 오마주한 코미디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의 대역배우 에스터 역을 통해서다. 19일 서울 종로구 예스24스테이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박근형은 “배우는 수천 가지 역할에 도전하는 습성이 있다. 노년에도 어떤 역할이든 시간이 나면 도전하고 싶다”며 “시간을 오래 두지 않고 바로 에스터 역할을 자청했다”고 밝혔다. 미국 극작가 데이브 핸슨이 쓴 이 작품은 2013년 뉴욕 국제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첫선을 보였고 국내에서는 지난해 초연됐다. 무대 뒤 허름한 분장실에서 연출자를 기다리는 두 언더스터디(대역 배우) 에스터와 벨의 기다림을 유쾌하게 그려낸다. 이번 공연은 오경택이 연출을 맡았고 박근형과 김병철이 ‘에스터’역을, 이상윤과 최민호가 ‘벨’ 역을 맡았다. 박근형은 “한 번도 무대에 서 본 일 없이 일생 무대와 연출자를 기다리는 인물이 에스터”라며 “사회에서 소외되는 마지막 심정을 얘기하고 싶었다. 사라져 가는 노배우가 어쩌면 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저와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도전해 보고 싶었습니다. 배우는 어느 역할이든 단 한 번 연기할 수 있기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요. 기대해 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창작극 지원에 대한 의견도 밝혔다. 그는 “창작극에 배고파 있다. 희곡 문학이 많이 없어서 맨날 남의 나라 작품을 하고 있다. 배우들이 공연하기 좋은 환경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는 다음 달 16일 예스24스테이지 3관에서 개막한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꿀벌, 두루미, 희귀한 새들과 자생 넝쿨식물까지. 반세기 넘게 사람의 발길이 끊긴 비무장지대(DMZ)는 전쟁과 분단의 상흔이 가득하다. 하지만 생물들 입장에선 야생에서 다양성이 공존하는 땅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각에서 DMZ를 바라본 예술가들의 작품을 모은 현대미술 전시 ‘DMZ OPEN 전시: 언두 디엠지(UNDO DMZ)’가 11일 경기 파주시 DMZ 일대에서 개막했다.전시는 작가 10명의 작품 26점을 민통선 내 통일촌 마을과 미군 기지 내 볼링장을 전시장으로 바꾼 ‘갤러리 그리브스’,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서 선보인다. 통일촌 마을에선 쌀을 보관하는 수매창고도 전시장으로 탈바꿈했다. 강원 철원의 가상 세계를 배경으로 꿀벌 ‘봉희’가 겪는 사건을 담은 양혜규 작가의 영상 ‘황색 춤’과 그래픽 작업 ‘디엠지 비행’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디엠지 비행’에선 로봇 벌과 철조망, 망원경 같은 오브제가 등장한다. 이는 작가가 DMZ 이면에 흐르는 인간과 자연의 에너지 흐름을 상상해 조합했다고 한다. 수매창고 밖으로 나오면 DMZ 문화예술 공간 ‘통’에서 DMZ에서 수집한 소리를 이용한 김준의 설치 작품, 2019년부터 DMZ 파주 권역의 동식물 잔해를 수집하고 액침 표본으로 보존한 박준식의 ‘비옥한 땅에 핀 꽃’을 볼 수 있다. 갤러리 그리브스에서는 버려지는 텐트, 군복, 낙하산을 이용해 옷으로 재탄생시킨 래코드의 ‘전장에서 일상으로: 군용 소재’가 중앙에 설치됐다. 그 뒤편으로 방탄복에 사용되는 아라미드 원사를 재활용해서 버섯 형태로 만든 오상민 작가의 ‘쏘일 투 쏘울’이 보인다. ‘학의 눈밭’은 홍영인 작가가 DMZ의 두루미를 관찰하고 만든 작품으로 하얀 모래 위에 여덟 쌍의 두루미 신발을 만들어 올려놓았다. 두루미를 익명의 집단이 아닌 각기 다른 신발을 신는 개별적인 존재로 본다는 의미를 담았다.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서는 지장보살이 황금털을 가진 멧돼지로 환생해 원한의 고리를 끊어 냈다는 신라시대 설화를 담은 원성원 작가의 ‘황금털을 가진 멧돼지’, DMZ 자생 식물의 형태를 본떠 금속 실로 자수를 놓아서 표현한 오상민의 ‘빛: 자연과 선의 틈에서’ 등이 야외 공간에 큰 규모로 설치됐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은 “70여 년간 긴장과 전쟁의 잔재로 남아있던 비무장지대가 자연 스스로의 힘으로 회복되는 과정을 예술가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시도”라며 “DMZ의 미래를 바라보는 새로운 지형을 열어주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11월 5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꿀벌, 두루미, 희귀한 새들과 자생 넝쿨식물까지.반세기 넘게 사람의 발길이 끊진 비무장지대(DMZ)는 전쟁과 분단의 상흔이 가득하다. 하지만 생물들 입장에선 야생에서 다양성이 공존하는 땅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각에서 DMZ를 바라본 예술가들의 작품을 모은 현대미술 전시 ‘DMZ OPEN 전시: 언두 디엠지(UNDO DMZ)’가 11일 경기 파주시 DMZ 일대에서 개막했다.전시는 작가 10명의 작품 26점을 민통선 내 통일촌 마을과 미군 기지 내 볼링장을 전시장으로 바꾼 ‘갤러리 그리브스’,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서 선보인다. 통일촌 마을에선 쌀을 보관하는 수매창고도 전시장으로 탈바꿈했다. 강원도 철원의 가상 세계를 배경으로 꿀벌 ‘봉희’가 겪는 사건을 담은 양혜규 작가의 영상 ‘황색 춤’과 그래픽 작업 ‘디엠지 비행’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디엠지 비행’에선 로봇 벌과 철조망, 망원경 같은 오브제가 등장한다. 이는 작가가 DMZ 이면에 흐르는 인간과 자연의 에너지 흐름을 상상해 조합했다고 한다.수매창고 밖으로 나오면 DMZ 문화예술 공간 ‘통’에서 DMZ에서 수집한 소리를 이용한 김준의 설치 작품, 2019년부터 DMZ 파주권역의 동∙식물 잔해를 수집하고 액침 표본으로 보존한 박준식의 ‘비옥한 땅에 핀 꽃’을 볼 수 있다.갤러리 그리브스에서는 버려지는 텐트, 군복, 낙하산을 이용해 옷으로 재탄생시킨 래코드의 ‘전장에서 일상으로: 군용 소재’가 중앙에 설치됐다. 그 뒤편으로 방탄복에 사용되는 아라미드 원사를 재활용해서 버섯 형태로 만든 오상민 작가의 ‘쏘일 투 쏘울’이 보인다. ‘학의 눈밭’은 홍영인 작가가 DMZ의 두루미를 관찰하고 만든 작품으로 하얀 모래 위에 여덟 쌍의 두루미 신발을 만들어 올려놓았다. 두루미를 익명의 집단이 아닌 각기 다른 신발을 신는 개별적인 존재로 본다는 의미를 담았다.파주 임진각 평화누리에서는 지장보살이 황금털을 가진 멧돼지로 환생해 원한의 고리를 끊어 냈다는 신라시대 설화를 담은 원성원 작가의 ‘황금털을 가진 멧돼지’, DMZ 자생 식물의 형태를 본떠 금속 실로 자수를 놓아서 표현한 오상민의 ‘빛: 자연과 선의 틈에서’ 등이 야외 공간에 큰 규모로 설치됐다.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은 “70여 년간 긴장과 전쟁의 잔재로 남아있던 비무장지대가 자연 스스로의 힘으로 회복되는 과정을 예술가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시도”라며 “DMZ의 미래를 바라보는 새로운 지형을 열어주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11월 5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1년 전 배윤환 작가(42)는 서울 종로구 인사미술공간에서 연 개인전에서 폭 50m의 캔버스를 꽉 채운 그림의 ‘일부’를 공개한 적이 있다. 전시장이 50m 그림을 펼치기에 턱없이 작았던 탓이다. 전시장에서 관객은 절반인 25m만 볼 수 있고 나머지 절반은 말려 있는 상태였다. 이 무렵부터 배윤환은 거대한 스케일에 수많은 이야기가 ‘와글거리는’ 그림으로 기억되곤 했다. 그런 그가 서울 강서구 스페이스K 서울에서 14일 개막한 개인전 ‘딥 다이버(Deep Diver)’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그림을 공개했다. 12일 미술관에서 만난 배 작가는 “4, 5년 전부터 ‘와글거림’을 지워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엄두를 못 내다 이제서야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 그림을 한창 그릴 땐 단서를 숨겨 놓는 재미도 있었고, 새벽까지 몰두해서 그리면 그림 속 세상에 내가 살고 있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걸 못 벗어나면 내 그림자에 영원히 끌려다닐 것 같았습니다.”기존의 스타일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결과는 회화 ‘서커스’, ‘선크림’, ‘사이렌’, ‘두 번 내려쳐’ 연작으로 나왔다. ‘서커스’ 연작에선 인물이 달리거나 점프하는 듯한 모습을 통해 ‘역동성’을, ‘선크림’에선 얼굴에 크림을 바르는 행위를 담아 ‘촉감’을 내세웠다. ‘사이렌’은 시끄러운 확성기에서 들리는 ‘청각’이 중심이다. 줄줄이 이어지는 이야기 대신 한순간의 강렬한 느낌을 포착했다. 전시장 가장 안쪽에는 좌우로 격하게 흔들리는 배를 묘사한 작품 ‘요람’과 함께 대형 벽화가 있다. 선과 도형, 문자로 벽을 채운 것도 이전의 그림과 다른 점이다. 이번 전시 작품 대부분은 흑백 톤으로 색을 제한했다. 어두운 그림은 평범한 관객이나 컬렉터가 받아들이기에는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면에서 과감한 선택이다. 이장욱 스페이스K 수석큐레이터는 “배 작가가 초기 검은 색조의 힘 있는 그림으로 주목을 받았는데, 색채를 쓰면서 미술시장에서도 반응을 얻었다”며 “미술관에서는 전업 작가로 생존한 작가의 예술적 역량을 다시금 보여주는 기회를 만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전시의 제목 ‘딥 다이버’는 마음속의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 꺼내지 못한 것들을 풀어 놓는다는 의미를 담았다. 배 작가는 “목구멍에 걸려 있던 이야기를 가만히 맴돌며 관찰한다는 이미지를 상상하며 붙인 제목”이라고 했다. 배 작가가 과거 스타일로 그린 작품도 볼 수 있다. 폭이 10m인 작품 ‘우린 잘 지내고 있어’는 동굴 속 광부들이 무언가를 긁고 파내고 부수는 과정을 복잡한 구성으로 담았다. 광부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도 손에 트럼프 카드를 쥐고 있는데, ‘각자의 패를 쥐고 분투하는 사람들’이라고 작가는 표현했다. 그 옆 ‘두 번 내려쳐’ 연작은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한 광부들의 얼굴에서 금(金)이 나오는 모습을 묘사했다. 과거의 자신을 부숴야만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배 작가는 “유료 전시에서 작품을 보이는 건 처음”이라며 “입장료가 아깝지 않은 전시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11월 9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1년 전 배윤환 작가(42)는 서울 종로구 인사미술공간에서 연 개인전에서 폭 50m 캔버스를 꽉 채운 그림의 ‘일부’를 공개한 적이 있다. 전시장이 50m 그림을 펼치기에 턱없이 작았던 탓이다. 전시장에서 관객은 절반인 25m만 볼 수 있고 나머지 절반은 말려 있는 상태였다. 이 무렵부터 배윤환은 거대한 스케일에 수많은 이야기가 ‘와글거리는’ 그림으로 기억되곤 했다.그런 그가 서울 강서구 스페이스K 서울에서 14일 개막한 개인전 ‘딥 다이버(Deep Diver)’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그림을 공개했다. 12일 미술관에서 만난 배 작가는 “4, 5년 전부터 ‘와글거림’을 지워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엄두를 못 내다 이제서야 된 것 같다”고 말했다.“그런 그림을 한창 그릴 땐 단서를 숨겨 놓는 재미도 있었고, 새벽까지 몰두해서 그리면 그림 속 세상에 내가 살고 있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걸 못 벗어나면 내 그림자에 영원히 끌려다닐 것 같았습니다.”기존의 스타일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결과는 회화 ‘서커스’, ‘선크림’, ‘사이렌’, ‘두 번 내려쳐’ 연작으로 나왔다. ‘서커스’ 연작에선 인물이 달리거나 점프하는 듯한 모습을 통해 ‘역동성’을, ‘선크림’에선 얼굴에 크림을 바르는 행위를 담아 ‘촉감’을 내세웠다. ‘사이렌’은 시끄러운 확성기에서 들리는 ‘청각’이 중심이다. 줄줄이 이어지는 이야기 대신 한 순간의 강렬한 느낌을 포착했다. 전시장 가장 안쪽에는 좌우로 격하게 흔들리는 배를 묘사한 작품 ‘요람’과 함께 대형 벽화가 있다. 선과 도형, 문자로 벽을 채운 것도 이전의 그림과 다른 점이다.이번 전시 작품 대부분은 흑백 톤으로 색을 제한했다. 어두운 그림은 평범한 관객이나 컬렉터가 받아들이기에는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면에서 과감한 선택이다. 이장욱 스페이스K 수석큐레이터는 “배 작가가 초기 검은 색조의 힘 있는 그림으로 주목을 받았는데, 색채를 쓰면서 미술시장에서도 반응을 얻었다”며 “미술관에서는 전업 작가로 생존한 작가의 예술적 역량을 다시금 보여주는 기회를 만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전시의 제목 ‘딥 다이버’는 마음 속의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 꺼내지 못한 것들을 풀어 놓는다는 의미를 담았다. 배 작가는 “목구멍에 걸려 있던 이야기를 가만히 맴돌며 관찰한다는 이미지를 상상하며 붙인 제목”이라고 했다.배 작가가 과거 스타일로 그린 작품도 볼 수 있다. 폭이 10m인 작품 ‘우린 잘 지내고 있어’는 동굴 속 광부들이 무언가를 긁고 파내고 부수는 과정을 복잡한 구성으로 담았다. 광부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도 손에 트럼프 카드를 쥐고 있는데, ‘각자의 패를 쥐고 분투하는 사람들’이라고 작가는 표현했다. 그 옆 ‘두 번 내려쳐’ 연작은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한 광부들의 얼굴에서 금(金)이 나오는 모습을 묘사했다. 과거의 자신을 부숴야만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배 작가는 “유료 전시에서 작품을 보이는 건 처음”이라며 “입장료가 아깝지 않은 전시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11월 9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이듬해 조선에도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体·일본과 조선은 하나다)”를 외치며 ‘제3차 교육령’을 통해 일본어 교육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 교육령을 계기로 조선에 사는 일본인과 조선인 소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한 글짓기 경연대회가 열렸다. 당시 글짓기 대회는 1938년부터 1944년까지 총 7회에 걸쳐 열렸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사의 일본어 어린이 신문 ‘경일소학생신문’이 주최했다. 조선총독부와 경성제국대, 경성일보 관계자들이 심사를 거쳐 우수작을 선정했다. 1, 2회 수상작은 ‘총독상 모범 문집’이라는 단행본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이때 어린이들이 쓴 글 중 일부를 모아 엮은 책이다. 저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화와 연기를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가 한일 관계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배우로 활동했던 그는 여배우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1940년 개봉해 큰 반향을 일으킨 영화 ‘수업료’를 알게 된다. 이 영화의 원작이 제1회 조선총독상 글짓기 경연대회 수상작이다. 광주 북정공립심상소학교에 다니던 4학년 우수영 어린이가 쓴 글이었다. 이 ‘수업료’를 시작으로 책은 어린이들의 글을 소개하면서, 아이들 눈에 비친 군국주의와 제국 식민지 사회의 모습을 조명한다. 글 중엔 할머니와 둘이 사는 아이가 수업료를 부탁하러 먼 친척에게 가기 위해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걷는 얘기도 등장한다. 고양이를 기르고, 살림에 보탬이 될 돼지를 키우며, 방 정리를 안 했다가 혼나는 일상도 담겨 있다. 책은 이런 가운데서도 어떤 글이 수상작으로 선정됐으며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를 살핀다. 당시 초등교육 체계와 사회상에 대한 해설을 덧붙여 어린이들의 글에조차 전쟁과 제국주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음을 보여준다. 해설을 따라 아이들 글의 행간을 읽다 보면 ‘어린이에게 어른이 만든 왜곡된 도덕적 기준, 사회적 약속을 강요하는 것은 인류 전체의 손실이자 악덕에 가까운 일’이라는 메시지가 강렬하게 느껴진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이듬해 조선에도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体·일본과 조선은 하나다)”를 외치며 ‘제3차 교육령’을 통해 일본어 교육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 교육령을 계기로 조선에 사는 일본인과 조선인 소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한 글짓기 경연대회가 열렸다.당시 글짓기 대회는 1938년부터 1944년까지 총 7회에 걸쳐 열렸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사의 일본어 어린이 신문 ‘경일소학생신문’이 주최했다. 조선총독부와 경성제국대학, 경성일보 관계자들이 심사를 거쳐 우수작을 선정했다. 1∙2회 수상작은 ‘총독상 모범 문집’이라는 단행본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이때 어린이들이 쓴 글 중 일부를 모아 엮은 책이다.저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화와 연기를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가 한일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배우로 활동했던 그는 여배우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1940년 개봉해 큰 반향을 일으킨 영화 ‘수업료’를 알게 된다. 이 영화의 원작이 제1회 조선총독상 글짓기 경연대회 수상작이다. 전남 광주 북정공립심상소학교에 다니던 4학년 우수영 어린이가 쓴 글이었다.이 ‘수업료’를 시작으로 책은 어린이들의 글을 소개하면서, 아이들 눈에 비친 군국주의와 제국 식민지 사회의 모습을 조명한다. 글 중엔 할머니와 둘이 사는 아이가 수업료를 부탁하러 먼 친척에게 가기 위해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걷는 얘기도 등장한다. 고양이를 기르고, 살림에 보탬이 될 돼지를 키우며, 방 정리를 안 했다가 혼나는 일상도 담겨 있다.책은 이런 가운데서도 어떤 글이 수상작으로 선정되며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를 살핀다. 당시 초등교육 체계와 사회상에 대한 해설을 덧붙여 어린이들의 글에조차 전쟁과 제국주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보여준다. 해설을 따라 아이들 글의 행간을 읽다 보면 ‘어린이에게 어른이 만든 왜곡된 도덕적 기준, 사회적 약속을 강요하는 것은 인류 전체의 손실이자 악덕에 가까운 일’이라는 메시지가 강렬하게 느껴진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이진주 작가의 개인전 ‘불연속연속’이 13일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개막했다. 동양화를 전공한 이 작가는 일상 속 모습을 전통 채색 기법으로 표현한다. 이번 전시에선 ‘셰이프트 캔버스(Shaped Canvas)’ 연작, ‘블랙 페인팅(Black Painting)’ 연작 등 근작 54점을 선보인다. 셰이프트 캔버스 연작은 네모반듯한 모양의 캔버스를 벗어나 그림이 없는 여백 부분을 잘라낸 비정형의 캔버스 그림이다. 1층 전시장에 설치된 ‘슬픔과 돌’은 이번 전시 대표작이자 셰이프트 캔버스 연작 중 가장 큰 작품. 여섯 개 흰색 장막이 사선 방향으로 줄지어 놓인 가운데 바위와 인물, 식물, 사물이 그림 속에 뒤엉켜 있다. 이 밖에 섬세한 필치로 묘사한 얼굴, 손이 공중에 떠 있는 전시장 속 작품들이 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10월 9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양 갈래 머리를 한 흑인 소녀가 푸른색 티셔츠를 입고 오렌지를 들고 있다. 소녀의 셔츠는 물론 얼굴에도 조금씩 묻어 있는 푸른색은 보색 대비로 인해 오렌지의 노란빛과 소녀의 갈색빛 피부를 더 반짝이게 만든다. 그뿐만이 아니다. 푸른색은 역사적으로 종교화에서 성인이나 중요한 인물을 그릴 때 썼던 물감이다. 이 색을 평범한 흑인 소녀에게 입혔다는 점도 특별하다. 이 작품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가 사상 처음으로 소장한 흑인 작가 제라드 세코토(1913∼1993)가 그린 ‘오렌지를 든 소녀’다. 서울 세종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전은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JAG)의 소장품을 소개하는 전시. JAG 미술관은 영국계 귀족인 플로렌스 필립스(1863∼1940)가 수집한 작품을 토대로 지어졌다. 이 컬렉션은 인상파 등 유럽 미술계 작품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는데, 1940년 미술관은 처음으로 흑인 작가의 작품을 소장한다. 바로 세코토가 그린 ‘노란 집들’이었다. ‘노란 집들’은 남아공 소피아타운 주택가의 한적한 풍경을 담은 그림이다. 세코토는 이 밖에도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거나 곡괭이질을 하는 사람들 등 일상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았는는데, 주인공은 모두 흑인이었다. 1940년 JAG 미술관이 세코토의 작품을 소장할 때는 당시 관장이 그의 그림 실력에 반했기 때문이었지만, 이제 이 그림들은 아파르트헤이트(인종 차별 정책)로 일상이 파괴되기 전 남아공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기록이 됐다. 세코토는 교사로 활동하다 1938년 미술 대회에서 입상하며 요하네스버그로 이주해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했다. 갤러리 전시를 성공적으로 연 데 이어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는 영광도 얻었지만 그의 남아공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남아공에서 인종 차별의 분위기가 고조되자 1947년 세코토는 프랑스 파리로 망명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8년 백인 정권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법률로 정하면서 유색 인종의 거주지 분리를 합법화했다. ‘노란 집들’ 그림 속 평화로운 주택가도 지금은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JAG 미술관 역시 1940년 ‘노란 집들’을 소장한 뒤로 30여 년간 흑인 작가의 작품을 미술관에 들이지 않았다. ‘오렌지를 든 소녀’가 미술관 소장품이 된 건 적어도 1970년대 이후로 보인다. ‘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전의 마지막 전시장에 가면 세코토를 비롯해 이르마 스턴 등 20세기 남아공에서 활동했던 흑인 작가와 인종 차별 문제를 다룬 유명 현대 미술가 윌리엄 켄트리지의 드로잉도 만날 수 있다. 이 전시의 큐레이터 시모나 바르톨레나는 “인상파를 비롯한 유럽 작가들은 유명 미술관에서도 볼 수 있지만 남아공 작가들은 JAG 컬렉션에서만 볼 수 있기에 더욱 특별하다”며 “먼 남아공에서 온 작품들을 서울에서 감상한다는 의미를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게 바로 마지막 전시장일 것”이라고 했다. ‘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전은 31일까지 열린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제라드 세코토 ‘오렌지를 든 소녀’양갈래 머리를 한 흑인 소녀가 푸른색 티셔츠를 입고 오렌지를 들고 있다. 소녀의 셔츠는 물론 얼굴에도 조금씩 묻어 있는 푸른색은 보색 대비로 인해 오렌지의 노란빛과 소녀의 갈색빛 피부를 더 반짝이게 만든다. 그뿐만이 아니다. 푸른색은 역사적으로 종교화에서 성인이나 중요한 인물을 그릴 때 썼던 물감이다. 이 색을 평범한 흑인 소녀에게 입혔다는 점도 특별하다. 이 작품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가 사상 처음으로 소장한 흑인 작가 제라드 세코토(1913~1993)가 그린 ‘오렌지를 든 소녀’다.서울 세종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모네에서 앤디워홀까지’전은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JAG)의 소장품을 소개하는 전시. JAG 미술관은 영국계 귀족인 플로렌스 필립스(1863~1940)가 수집한 작품을 토대로 지어졌다. 이 컬렉션은 인상파 등 유럽 미술계 작품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는데, 1940년 미술관은 처음으로 흑인 작가의 작품을 소장한다. 바로 세코토가 그린 ‘노란 집들’이었다.‘노란 집들’은 남아공 소피아타운 주택가의 한적한 풍경을 담은 그림이다. 세코토는 이 밖에도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거나 곡괭이질을 하는 사람들 등 일상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았는는데, 주인공은 모두 흑인이었다. 1940년 JAG 미술관이 세코토의 작품을 소장할 때는 당시 관장이 그의 그림 실력에 반했기 때문이었지만, 이제 이 그림들은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정책)로 일상이 파괴되기 전 남아공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기록이 됐다.세코토는 교사로 활동하다 1938년 미술 대회에서 입상하며 요하네스버그로 이주해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했다. 갤러리 전시를 성공적으로 연 데 이어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는 영광도 얻었지만 그의 남아공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남아공에서 인종 차별의 분위기가 고조되자 1947년 세코토는 프랑스 파리로 망명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8년 백인 정권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법률로 정하면서 유색 인종의 거주지 분리를 합법화했다. ‘노란 집들’ 그림 속 평화로운 주택가도 지금은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JAG 미술관 역시 1940년 ‘노란 집들’을 소장한 뒤로 30여년간 흑인 작가의 작품을 미술관에 들이지 않았다. ‘오렌지를 든 소녀’가 미술관 소장품이 된 건 적어도 1970년대 이후로 보인다. ‘모네에서 앤디워홀까지’전의 마지막 전시장에 가면 세코토를 비롯해 이르마 스턴 등 20세기 남아공에서 활동했던 흑인 작가와 인종 차별 문제를 다룬 유명 현대 미술가 윌리엄 켄트리지의 드로잉도 만날 수 있다.이 전시의 큐레이터 시모나 바르톨레나는 “인상파를 비롯한 유럽 작가들은 유명 미술관에서도 볼 수 있지만 남아공 작가들은 JAG 컬렉션에서만 볼 수 있기에 더욱 특별하다”며 “먼 남아공에서 온 작품들을 서울에서 감상한다는 의미를 가장 살릴 수 있는 게 바로 마지막 전시장일 것”이라고 했다. ‘모네에서 앤디워홀까지’전은 31일까지 열린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거칠게 그어 내린 푸른 선들 사이로 빨간 선의 남성이 떠오른다. 화가인 그가 분주하게 움직인 팔의 잔상이 그림 속에 남아 있고, 얼굴에는 눈 하나가 더 그려져 있다. 눈으로 보는 건 물론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도 그린다는 듯, 화가의 얼굴 옆엔 거꾸로 매달린 얼굴 하나가 더 있다. 서울 종로구 피비갤러리에서 7일 개막한 ‘서용선: 도시의 사람들’에서 볼 수 있는 서용선 작가의 대형 자화상이다. 이 전시는 서 작가가 최근 2년간 미국 뉴욕을 방문해 보고 그린 근작을 모았다. 가운데 있는 폭 2m가 넘는 대형 자화상이 전시장 전체를 지배하는 가운데, 뉴욕의 지하철과 거리에서 본 풍경들이 펼쳐진다. 작가는 격자무늬로 가지런하게 구획된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몸’에 주목한다. 그림 속에서 직선으로 그려진 지하철 의자나 손잡이, 보도블록은 납작하고 차갑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안을 오고 가는 사람들은 표정은 없어도 따뜻한 색이나 부드러운 붓 터치로 체온이 전해진다. 빌딩 숲이 우거진 도시에서도 안으로 들어가 골목길에 들어서면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것처럼…. 이번 전시에서는 브루클린 지하철에서 본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지하철 대화’ ‘NY 지하철’과 그 풍경을 바라본 작가의 모습을 담은 자화상을 감상할 수 있다. 서 작가는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주로 개발과 변화의 중심지였던 서울의 모습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왔다. 이후 1992년 처음 뉴욕을 방문한 뒤로 뉴욕 도시 풍경 연작을 그리고 있다. 이 밖에 단종에 얽힌 이야기를 비롯해 한국사를 주제로 한 연작도 작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다음 달 13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실에 꿰어 주렁주렁 매단 곶감처럼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전시장 천장에 매달려 있다. 가까이서 보면 콘크리트를 매달고 있는 건 단단한 고리로 연결된 철근. 작품의 전체 무게는 1.6t에 이른다. 영국 미술가 모나 하툼이 2019년 처음 전시했던 ‘리메인즈 투 비 신(Remains to be Seen)’이다. 하툼은 낙후한 도시의 버려지거나 무너진 건물 잔해에서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건물을 떠받쳤던 무거운 콘크리트 덩어리가 가볍게 떠 있는 것처럼 구현한 작가는 우리가 견고하다고 믿었던 문명이 한없이 연약할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하툼의 작품을 포함해 국내외 작가 13인의 작품을 전시하는 기획전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이 제주 서귀포시 포도뮤지엄에서 9일 개막했다. 하툼의 설치 작품 뒤로는 가시가 뾰족한 철조망도 서 있다. 과거 인종 차별이 심각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흑인들이 백인 거주 지역으로 오지 못하도록 세워졌던 것이다. 미국 작가 라이자 루는 남아공 인종차별 피해자인 줄루족 여성들과 함께 이 철조망을 수백만 개의 반짝이는 비즈로 뒤덮었다. 포도뮤지엄 기획전은 이처럼 폭력이나 분열, 갈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문을 연다. 첫 전시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0∼2021년 트위터에 게시했던 글을 금속판에 새긴 제니 홀저의 설치 작품 ‘저주받은(Cursed)’ 등으로 이뤄졌다. 이어지는 두 번째 전시장은 ‘시간’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관객을 맞는다. 연필로 까맣게 칠한 신문 수백 장을 커튼처럼 이어 붙인 재일교포 3세 작가 수미 가나자와의 ‘신문지 위 드로잉’과 네덜란드 작가인 마르턴 바스가 손수 12시간 동안 시곗바늘을 지우고 그리는 모습을 촬영한 ‘리얼 타임 XL-아티스트 클락’, 이완 작가가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 전시했던 작품 ‘고유시’ 등이 펼쳐진다. 미국 작가 세라 제의 영상 설치 작품 ‘슬리퍼스’는 크고 작은 종이 조각들을 가느다란 실로 엮어 여러 크기의 스크린이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효과를 보여줬다. 종이 위엔 잠든 사람의 얼굴, 도시의 불빛, 나뭇잎 등 서정적인 영상이 나타난다. 가장자리가 찢긴 종이 조각 뒤로 비치는 잔상과 바닥에 비치는 영상마저도 작품의 일부가 된다. 이번 기획전은 ‘광활한 우주 속 미약한 존재인 우리는 왜 끊임없이 갈등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1, 2전시장에서 이어지는 테마 공간 2개는 이런 문제를 한 발짝 떨어져 봄으로써 치유의 실마리를 찾는다는 의미를 담았다. 테마 공간 ‘유리 코스모스’는 전시장에 설치된 센서에 관객이 숨을 불어넣으면 유리 전구 수백 개가 차례로 불이 밝혀진다. 또 다른 공간인 ‘우리는 별의 먼지다’는 거울로 둘러싸인 반원형 공간의 발광다이오드(LED) 스크린을 통해 자연과 우주에 관한 영상을 상영한다. 무한히 확장되는 우주 앞에 먼지처럼 작지만 연결된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내년 8월 8일까지.서귀포=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실에 꿰어 주렁주렁 매단 곶감처럼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전시장 천정에 매달려 있다. 가까이서 보면 콘크리트를 매달고 있는 건 단단한 고리로 연결된 철근. 작품의 전체 무게는 1.6t에 이른다. 영국 미술가 모나 하툼이 2019년 처음 전시했던 ‘리메인즈 투 비 신(Remains to be Seen)’이다.하툼은 낙후한 도시의 버려지거나 무너진 건물 잔해에서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을 만들었다. 건물을 떠받쳤던 무거운 콘크리트 덩어리가 가볍게 떠 있는 듯한 모습을 통해 작가는 견고할 것이라 믿었던 문명이 한없이 연약할 수도 있다는 이미지를 표현했다. 하툼을 비롯해 국내외 작가 13인의 작품을 전시하는 기획전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이 제주 서귀포시 포도뮤지엄에서 9일 개막했다.하툼의 설치 작품 뒤편으로는 가시가 뾰족한 철조망이 서 있다. 인종 차별 문제가 심각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흑인들이 백인 거주 지역으로 오지 못하도록 세워졌던 이 철조망을 미국 작가 라이자 루는 남아공 인종차별 피해자인 줄루족 여성들과 함께 수백만 개의 반짝이는 비즈로 뒤덮었다.전시는 이처럼 폭력, 분열, 갈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문을 연다. 첫 전시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0~2021년 트위터에 게시했던 글을 금속판에 새긴 제니 홀저의 설치 작품 ‘저주받은’(Cursed) 등으로 이뤄졌다.이어지는 두 번째 전시장에서는 ‘시간’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관객을 맞는다. 연필로 까맣게 칠한 신문 수백 장을 커튼처럼 이어 붙인 재일교포 3세 작가 수미 가나자와의 ‘신문지 위 드로잉’, 네덜란드 작가인 마르텐 바스가 손수 12시간 동안 시곗바늘을 지우고 그리는 모습을 촬영한 ‘리얼 타임 XL-아티스트 클락’, 이완 작가가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 전시했던 작품 ‘고유시’ 등이 펼쳐진다.미국 작가 사라 제의 영상 설치 작품 ‘슬리퍼스’는 크고 작은 종이 조각들을 가느다란 실로 엮어 여러 크기의 스크린이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효과를 만들었다. 종이 위엔 잠든 사람의 얼굴, 도시의 불빛, 나뭇잎 등 서정적인 영상이 보인다. 가장자리가 찢어진 종이 조각 뒤로 비치는 잔상과 바닥에 비치는 영상도 작품의 일부가 된다.이번 기획전 ‘광활한 우주 속 미약한 존재인 우리는 왜 끊임없이 갈등하는가?’라는 질문에서 비롯됐다. 1, 2전시장에서 이어지는 테마 공간 2개는 이런 문제를 한발짝 떨어져 봄으로써 치유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테마 공간 ‘유리 코스모스’는 전시장에 설치된 센서에 관객이 숨을 불어넣으면 유리 전구 수백 개에 차례로 불이 밝혀진다. 또다른 공간인 ‘우리는 별의 먼지다’는 거울로 둘러싸인 반원형 공간의 발광다이오드(LED) 스크린을 통해 자연과 우주에 관한 영상을 상영한다. 무한히 확장되는 우주 앞에 먼지처럼 작지만 연결된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내년 8월 8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6세기 이탈리아 우르비노 공국 공작의 아들은 베네치아 최고 화가였던 티치아노의 작업실을 방문합니다.티치아노에게 초상화를 의뢰했기 때문입니다. 초상화를 위해 모델을 서고 있던 공작 아들, 작업실에 놓인 그림 한 점이 그의 눈에 들어옵니다.모델을 마치고 작업실을 떠난 그는 어머니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그 ‘여자 누드(donna nuda)’를 꼭 갖고 싶은데, 티치아노가 다른 사람한테 팔아 버리면 어떡하죠?”노심초사하던 공작 아들은 수개월 뒤 공작의 지위를 물려받고 마침내 그 그림을 손에 넣게 됩니다.이 그림은 티치아노의 대표작이자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 하면 많은 사람이 떠올리는 작품, ‘우르비노의 비너스’입니다.직선 속 부드러움의 극치우르비노의 공작은 이 그림에서 무엇을 보고 반한 걸까요. 우선 진주 귀걸이를 하고 곱슬곱슬한 금발을 풀어 헤친 여인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그런데 단순히 여인의 외모가 예쁘다고 모든 그림이 아름다워 보일 수 있는 건 아니죠. 티치아노는 그림 속 몇 가지 장치를 통해 여인의 관능적인 모습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이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흰 시트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는 여인의 몸이 만들어내는 곡선입니다.이 곡선에 빼앗겼던 시선을 전체 그림의 구도로 옮겨 보면, 그림의 다른 곳은 똑바로 그은 직선이 지배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이를테면 침대 뒤로 펼쳐진 바닥에 그려진 격자무늬와 수납장, 벽지, 창문에 있는 기둥이 그러합니다.이런 여러 개의 직선 가운데 그려진 몸의 커다란 곡선은 혼자 굽이치고 있으니 더 눈에 띌 수밖에 없습니다.이 곡선과 맞닿은 직선 중 가장 강렬한 것은 뒤편 녹색 파티션이 만드는 선입니다. 이 파티션의 직선은 그림을 마치 절반으로 뚝 자른 듯 그려져, 여인의 얼굴과 상반신을 관객만 보는 것 같은 사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킵니다.게다가 커다란 곡선인 여인의 몸을 티치아노는 얇은 물감층을 겹겹이 쌓아 올려 반투명으로 티 없이 반짝이는 도자기처럼 그려내고 있습니다.꽃무늬가 그려진 푹신한 매트리스와 바삭거리는 흰색 시트, 그 위에 포근하게 꼬리를 말고 누워 있는 강아지와 매끈하게 묘사된 여성의 피부는 경직된 그림의 선들을 가로지르며 부드러운 느낌을 극대화합니다.수줍지 않은 비너스이 여인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몇 가지 단서를 통해 고대 신화 속 ‘비너스’를 표현했다는 해석이 제기되고, 그 덕분에 이 그림은 ‘우르비노의 비너스’라는 이름을 갖게 됐습니다. 그 단서 중 하나는 여인이 들고 있는 붉은 꽃, 장미입니다.장미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사랑의 여신 비너스’를 뜻하는 주요 상징입니다. 열정적인 사랑, 쾌락, 육체미를 뜻하죠. 또 창가에 놓여 있는 머틀(myrtle) 화분 역시 고대부터 비너스와 연결되는 식물로 불멸의 사랑을 의미합니다.또 다른 단서는 포즈입니다. 그림 속 여인은 왼손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자주 묘사된 자세로 ‘비너스 푸디카(Venus pudica)’라고 부릅니다.비너스 푸디카는 ‘수줍은 비너스’라는 의미인데, 여자가 자신의 몸을 가리는 모습을 표현해서 겸손, 순결, 부끄러움의 미덕을 상징했다고 합니다.그런데 이 그림 속 여인은 수줍기는커녕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앞으로 쏟아질 듯 과감한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수줍은 비너스’에서 모티프를 따왔지만 ‘수줍지 않은 비너스’인 것입니다.엘리트를 위한 핀업(pin-up)?이런 과감함 때문에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언제나 역사 속에서 주목받는 그림이었습니다.당대에는 아름다운 누드로 공작이 탐내는 그림이었고, 디에고 벨라스케스 같은 후대 화가들이 이 그림을 변형해 또 다른 과감한 시도를 해내기도 했죠.18세기까지만 해도 감각적인 아름다움으로 주목받던 이 그림은 현대로 오면서 점차 다른 해석이 더해지게 됩니다.그중 하나는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우르비노 공작 같은 소수 엘리트의 관음증적인 욕망을 위한 ‘핀업’(벽에 붙이는 매혹적인, 때로는 선정적인 여성의 이미지)이라는 해석입니다.영국의 미술사가이자 베네치아 화파 전문가인 찰스 호프는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고전 신화나 심오한 의미를 담은 것이 아니라 ‘상류층 남성의 사적 공간에 거는 세련된 나체 이미지’라는 견해를 밝힌 바 있습니다.19세기 유명 예술가도 이런 시각을 그림으로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모티프로 해서 ‘올랭피아’를 그린 에두아르 마네입니다.마네는 신화 속 여인을 가장한 비너스 대신 파리의 유명했던 고급 창부인 올랭피아의 누드를 그려 미술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죠.마네는 ‘올랭피아’를 통해 고전으로 여겨지는 르네상스 시대 비너스 그림이 사실은 관음증과 욕망에 관한 것이 아닌지 질문을 던졌습니다.그러나 최근에는 16세기 베네치아의 상황을 바탕으로, 티치아노의 표현이 오히려 여성의 주체적 시선을 표현했다는 해석도 나옵니다.‘비너스 푸디카’의 수동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관객을 똑바로 쳐다보는 ‘수줍지 않은 비너스’가 시대를 앞선 표현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노골적인 시선의 대상, 아니면 매력을 과감하게 뽐내는 사람. 독자 여러분의 눈에는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어떻게 보이나요?※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영국 작가 캐서린 안홀트(67)의 개인전 ‘러브 레터스(Love Letters)’가 서울 종로구 초이앤초이 갤러리에서 23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안홀트 작가가 딸을 갑작스럽게 떠나보낸 뒤,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며 그린 연작 ‘러브 레터’를 공개한다. 이 연작과 함께 ‘사랑하는 이들에게 보낸 편지들’, ‘사랑과 아픔’ 등의 작품 등도 선보였다. 작가가 딸에게 보내는 절절한 편지이자 예술적 헌사이며, 같은 상처를 지닌 이들에게 보내는 위로와 공감의 메시지다. 안홀트 작가는 30여 년간 남편과 함께 동화책 200여 권을 제작하며 삽화가로도 활동해 왔다. 모성애와 가족, 자연 등을 주제로 자신의 삶과 예술적 여정을 작품에 담아내고 있다. 2년 전 한국에서 사랑과 인생, 상실 등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조망한 ‘삶, 인생, 상실(Love, Life, Loss)’전을 개최한 바 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6세기 이탈리아 우르비노 공국 공작의 아들은 베네치아 최고 화가였던 티치아노의 작업실을 방문합니다. 티치아노에게 초상화를 의뢰했기 때문입니다. 초상화를 위해 모델을 서고 있던 공작 아들, 작업실에 놓인 그림 한 점이 그의 눈에 들어옵니다. 모델을 마치고 작업실을 떠난 그는 어머니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그 ‘여자 누드(donna nuda)’를 꼭 갖고 싶은데, 티치아노가 다른 사람한테 팔아 버리면 어떡하죠?” 노심초사하던 공작 아들은 수개월 뒤 공작의 지위를 물려받고 마침내 그 그림을 손에 넣게 됩니다. 이 그림은 티치아노의 대표작이자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 하면 많은 사람이 떠올리는 작품, ‘우르비노의 비너스’입니다.직선 속 부드러움의 극치 우르비노의 공작은 이 그림에서 무엇을 보고 반한 걸까요. 우선 진주 귀걸이를 하고 곱슬곱슬한 금발을 풀어 헤친 여인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여인의 외모가 예쁘다고 모든 그림이 아름다워 보일 수 있는 건 아니죠. 티치아노는 그림 속 몇 가지 장치를 통해 여인의 관능적인 모습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흰 시트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는 여인의 몸이 만들어내는 곡선입니다. 이 곡선에 빼앗겼던 시선을 전체 그림의 구도로 옮겨 보면, 그림의 다른 곳은 똑바로 그은 직선이 지배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를테면 침대 뒤로 펼쳐진 바닥에 그려진 격자무늬와 수납장, 벽지, 창문에 있는 기둥이 그러합니다. 이런 여러 개의 직선 가운데 그려진 몸의 커다란 곡선은 혼자 굽이치고 있으니 더 눈에 띌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곡선과 맞닿은 직선 중 가장 강렬한 것은 뒤편 녹색 파티션이 만드는 선입니다. 이 파티션의 직선은 그림을 마치 절반으로 뚝 자른 듯 그려져, 여인의 얼굴과 상반신을 관객만 보는 것 같은 사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킵니다. 게다가 커다란 곡선인 여인의 몸을 티치아노는 얇은 물감층을 겹겹이 쌓아 올려 반투명으로 티 없이 반짝이는 도자기처럼 그려내고 있습니다. 꽃무늬가 그려진 푹신한 매트리스와 바삭거리는 흰색 시트, 그 위에 포근하게 꼬리를 말고 누워 있는 강아지와 매끈하게 묘사된 여성의 피부는 경직된 그림의 선들을 가로지르며 부드러운 느낌을 극대화합니다.수줍지 않은 비너스 이 여인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몇 가지 단서를 통해 고대 신화 속 ‘비너스’를 표현했다는 해석이 제기되고, 그 덕분에 이 그림은 ‘우르비노의 비너스’라는 이름을 갖게 됐습니다. 그 단서 중 하나는 여인이 들고 있는 붉은 꽃, 장미입니다. 장미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사랑의 여신 비너스’를 뜻하는 주요 상징입니다. 열정적인 사랑, 쾌락, 육체미를 뜻하죠. 또 창가에 놓여 있는 머틀(myrtle) 화분 역시 고대부터 비너스와 연결되는 식물로 불멸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또 다른 단서는 포즈입니다. 그림 속 여인은 왼손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자주 묘사된 자세로 ‘비너스 푸디카(Venus pudica)’라고 부릅니다. 비너스 푸디카는 ‘수줍은 비너스’라는 의미인데, 여자가 자신의 몸을 가리는 모습을 표현해서 겸손, 순결, 부끄러움의 미덕을 상징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그림 속 여인은 수줍기는커녕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앞으로 쏟아질 듯 과감한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수줍은 비너스’에서 모티프를 따왔지만 ‘수줍지 않은 비너스’인 것입니다.엘리트를 위한 핀업(pin-up)? 이런 과감함 때문에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언제나 역사 속에서 주목받는 그림이었습니다. 당대에는 아름다운 누드로 공작이 탐내는 그림이었고, 디에고 벨라스케스 같은 후대 화가들이 이 그림을 변형해 또 다른 과감한 시도를 해내기도 했죠. 18세기까지만 해도 감각적인 아름다움으로 주목받던 이 그림은 현대로 오면서 점차 다른 해석이 더해지게 됩니다.그중 하나는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우르비노 공작 같은 소수 엘리트의 관음증적인 욕망을 위한 ‘핀업’(벽에 붙이는 매혹적인, 때로는 선정적인 여성의 이미지)이라는 해석입니다. 영국의 미술사가이자 베네치아 화파 전문가인 찰스 호프는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고전 신화나 심오한 의미를 담은 것이 아니라 ‘상류층 남성의 사적 공간에 거는 세련된 나체 이미지’라는 견해를 밝힌 바 있습니다. 19세기 유명 예술가도 이런 시각을 그림으로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모티프로 해서 ‘올랭피아’를 그린 에두아르 마네입니다. 마네는 신화 속 여인을 가장한 비너스 대신 파리의 유명했던 고급 창부인 올랭피아의 누드를 그려 미술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죠. 마네는 ‘올랭피아’를 통해 고전으로 여겨지는 르네상스 시대 비너스 그림이 사실은 관음증과 욕망에 관한 것이 아닌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16세기 베네치아의 상황을 바탕으로, 티치아노의 표현이 오히려 여성의 주체적 시선을 표현했다는 해석도 나옵니다. ‘비너스 푸디카’의 수동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관객을 똑바로 쳐다보는 ‘수줍지 않은 비너스’가 시대를 앞선 표현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노골적인 시선의 대상, 아니면 매력을 과감하게 뽐내는 사람. 독자 여러분의 눈에는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어떻게 보이나요?※뉴스레터 ‘영감 한 스푼’은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발송됩니다. QR코드를 통해 구독 신청을 하시면 e메일로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분홍색 배경에 그려진 남자의 얼굴은 주먹으로 한 대 얻어맞은 듯 일그러진 모습을 하고 있다. 남자의 얼굴 오른쪽 손처럼 보이는 형상의 한가운데엔 어두운 구멍이 동그랗게 그려져 있고, 그 손에 닿은 볼은 움푹 패어 있다. 또 남자의 입과 코는 멍이 든 것처럼 보라색, 분홍색, 오렌지색이 덩어리처럼 얽혀 칠해졌다. 영국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1909∼1992)이 1967년에 그린 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베이컨은 초상화를 그릴 때 친구나 연인, 또 자신이 자주 드나들던 런던 소호의 인물들을 자주 그렸다. 베이컨은 이들의 외형을 단순히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이 가진 감정이나 불안의 파동을 시각적으로 드러냈다. 베이컨은 이 그림에서도 보이듯 신체 일부를 흔들리듯 번지게 하거나, 때로는 비명을 지르듯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그려 넣어서 긴장감을 극대화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을 변형해서 그린 ‘비명을 지르는 교황’은 교황이 가진 권위와 내면의 절망이 교차하는 듯한 이미지를 통해 20세기의 시대적 불안과 갈등을 드러내 베이컨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림을 직접 보면 베이컨의 뛰어난 색채 감각이 그가 그리는 소재의 폭력성이 불러일으키는 거부감을 덜어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배경의 핑크와 어울리는 회색빛이 도는 검은색, 얼굴의 파스텔톤 보라색과 셔츠 깃에 칠한 파란색이 눈에 띈다. 베이컨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나 1929년부터 실내 장식과 가구 디자인으로 돈을 벌기 시작해 런던 생활을 시작했다. 상업적으로 성공할 만큼 세련된 감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감각을 넘어 베이컨의 회화에서는 인물의 얼굴 너머로 보이는 존재의 흔들림, 삶의 진실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려는 노력이 드러난다. 베이컨은 실제 인물뿐 아니라 신문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나 사진을 조합하고 자신만의 즉흥적인 붓질로 역동성을 그림에 부여했다. 자화상에도 몰두하며 노화와 고독, 상실의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했다. 베이컨을 비롯해 서양미술사 주요 명작들을 만날 수 있는 서울 세종미술관 전시 ‘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는 1일 전국 누적 관람객 30만 명을 돌파했다. 이 전시는 경주예술의전당에서 시작해 부산문화회관, 제주현대미술관을 거쳐 서울로 순회전을 열고 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 143점은 31일 전시가 종료되면 원래 소장처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로 돌아갈 예정이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