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윤

김예윤 기자

동아일보 정책사회부

구독 48

추천

정책사회부 노동팀 김예윤입니다. 먹고사는 일을 들여다봅니다. 2016년 입사해 사회부, 국제부를 거쳤습니다.

yeah@donga.com

취재분야

2026-05-24~2026-06-23
사회일반40%
교육20%
환경10%
기업7%
보건7%
건강7%
노동3%
국회3%
인사일반3%
  • ‘생명권’ 중요해 낙태 안 된다면서… 낳고나면 '아빠 없다' 눈초리

    ‘고귀하고 존엄한 생명권을 침해할 수 없다. 태아는 모(母)와 별개의 생명체로 독자적 생존능력이 있다. 임부의 자기결정권이 낙태죄로 인해 과도하게 제한되지 않는다.’헌법재판소가 2012년 “낙태죄 합헌” 결정을 하며 제시한 근거입니다. 헌재의 결정대로 낙태 대신 출산을 선택한 여성들은 당시 판단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동아일보 취재팀은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키우는 비혼모(非婚母) 3명을 만났습니다. 세 명 모두 “아이 낳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태아의 생명이 고귀한 만큼 태어난 이후의 생명도, 아이를 낳은 엄마의 인생도 중요한 것 아니냐”고 하소연합니다. 이들의 말처럼 아빠 없는 아이들과 비혼모의 척박한 삶을 외면한 채 생명의 고귀함만 강조하는 건 설득력이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내년 초 헌재는 6년 만에 낙태죄 위헌 여부를 다시 논의할 예정입니다. 비혼모 3명이 가상의 헌재 증언대에 섰습니다. 하루하루 맞닥뜨린 현실에서 우러난 이들의 증언을 함께 들어보시죠.○“고귀하고 존엄한 생명권을 침해할 수 없다.”존경하는 헌법재판관님. 5년 전 재판관님들께서는 ‘인간의 생명은 고귀하고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태아를 함부로 할 수 없어 낙태죄가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않으셨습니다. 3년 전 겨울까지,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2014년 12월, 눈에 보이지 않는 심장소리를 들었습니다. ‘쿵, 쿵.’ 제발 임신이 아니길 기도하며 병원에 들어갔던 저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생각했습니다. ‘무조건 낳아야겠다.’ 남자친구와는 아이는커녕 결혼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연애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귀하고 소중한 것’이 내 안에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2015년 8월 희찬(가명·3)이를 낳았습니다.그런데 태어난 희찬이는 ‘고귀하고 존엄한’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무시 받고 천대 받는 생명이 되었습니다. 희찬이를 또래 아기들과 놀게 하면서 자연스레 엄마들과 친해졌습니다. 그 중 저와 성격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한 엄마에게 제가 비혼모라는 사실을 털어놨습니다. 그 후 희찬이에게서 친구들이 사라졌습니다. 저를 빼고 다른 아기 엄마들끼리 시간을 맞춰 놀기 시작했습니다. 차마 화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저 죄 없는 희찬이가 제가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위축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고통스러웠습니다.비슷한 처지의 선배 비혼모들에게 넌지시 물어봤습니다. 한 아이 엄마는 서울살이가 버거워 고향에 내려가려다 “시집도 안 간 게 애 놓은 게 뭐 자랑이라고 여기까지 기어들어오려고 하노”라는 숙모의 말에 귀촌을 포기했답니다. “가족들도 저렇게 생각하는데 남들은 어떻겠어.” 그 엄마가 덧붙였습니다. “누구한테 먼저 미혼모라는 이야기 하지 마, 자기와 아이만 상처받아.”심지어 저희 엄마, 희찬이의 외할머니는 제 아이의 존재 자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결혼하지 않을 남자와의 사이에 생긴 아기를 낳겠다는 이야기에 엄마의 첫마디는 “미쳤구나”였습니다. 엄마는 지금껏 제 아이를 한 번도 본 적도, 물은 적도 없으십니다. 제 엄마에게 희찬이는 ‘없었으면’ 하는 생명입니다.33년 동안 부모님께, 연인에게, 친구들에게 사랑받고 존중받는 사람이었던 저 역시 ‘더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10년 지기 친구에게 임신을 털어놨습니다.“야 그건 좀…미혼모는 사회 최하층 사람들이잖아.” 아기를 낳은 뒤 연락이 끊겼습니다. 친구뿐이 아닙니다. 얼마 전 희찬이의 발달이 약간 늦어 병원에 검진을 갔을 때 받은 눈빛. “사실 제가 미혼모라, 애기가 아빠랑 놀아본 적이 없거든요…”고개를 한 번도 들지 않고 타이핑을 치던 레지던트가 그 순간 절 쳐다봤습니다. 그 눈빛은 제가 이 사회에서 어떤 존재인지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는 게 무서워지자 집에 처박혀있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자려고 누워 있으면 숨이 막히면서 땀이 뻘뻘 납니다. 사실 저는 저와 희찬이 모두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희찬이가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저희 모자는 어딘지 모르게 가깝게 하기 싫은, 불결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와 제 아이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집에 갇혔습니다. ○ “태아는 모(母)와 별개의 생명체로 독자적 생존능력이 있다”존경하는 재판관님. 2012년 낙태가 죄라고 결정 내려졌던 그 때 제 아이는 아홉 살이었습니다. 재판관께서는 “뱃속의 아기가 살기 위해서는 엄마에게 의존해야 하지만, 엄마와는 별개로 생존 능력이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낙태는 죄”라고 하셨죠. 하지만 제 아이는 태어났을 뿐, 태어난 뒤 9년 동안 아이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았습니다. 아이의 아빠도요.아이 아빠는 번듯한 직장에 집안도 좋았습니다. 그래서 할머니 손에 자란 시골 여자인 저와 결혼할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을 겁니다. 그는 만삭이 될 때까지 “낙태하면 너를 다시 만나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손 벌리지 않을게. 아이 데리고 앞에 나타나지도 않을게” 빌고 나서야 아이를 낳을 수 있었습니다. 출산하던 날에도 제 옆에 아이 아빠는 없었습니다.아이가 여섯 살이 될 때까지 비혼모 시설을 전전했습니다. 제가 받은 돈은 기초수급비 32만 원 뿐. 아이를 위한 지원은 하나도 받지 못했습니다. 분유와 기저귀 물티슈 같은 아기 용품을 사고 나면 손에는 한 푼도 남지 않는 날이 많았습니다. 서울에는 친척이나 친구도 없어서 아이를 봐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아이가 일곱 살 때는 일하던 공방에 돗자리와 이불을 깔아놓고 몰래 살았던 적도 있습니다. 불을 켜면 주인에게 들킬까 촛불을 켜고 책을 읽어줬습니다. 아이의 시력이 나쁜 게 그 탓인가 아직도 자책합니다. 아이는 태어나기만 했을 뿐, 열세 살이 된 지금까지 저와 떨어져서 한 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저를 도와줄 사람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이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번호가 바뀌어 있었습니다.재판관님, 저는 홀로 아이 낳은 걸 후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견딘 지난 세월을 생각하면 낙태를 결정하는 여성들에게 손가락질 할 수 없습니다. 12주 된 태아의 생명은 소중히 여기라고 하지만 세상에 나온 제 아들의 삶은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아빠가 없다는 사실에 이불 속에서 눈물지으며, 넉넉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묻고 싶습니다. 생명이 그렇게 소중하다면, 그렇게 태어난 제 아이의 삶은 왜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는 것인가요? 그리고 저는 왜 이 아픔을 엄마라는 이유로 혼자 겪어야 하나요?○“임부의 자기결정권이 낙태죄로 인해 과도하게 제한되지 않는다.”재판관께서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낙태죄로 인해 과도하게 제한되고 있지는 않다’면서 낙태를 허용해선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겨울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저는 그 어떤 것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철저히 ‘자기결정권’을 포기 당했습니다. 유진(가명·4개월)이를 낳은 건 절대 후회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눈을 찡긋하며 작은 손으로 제 손을 포갤 때가 숨통이 트이는 유일한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인생은요? 일에 대한 성공도 행복한 결혼생활에 대한 희망도 어그러졌습니다.의류회사에서 원단 고르는 일을 했습니다. 승진을 앞두고 ‘임신 3주차’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3년가량 만난 그 남자와는 결혼까지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임신한 저를 침대에서 밀어 떨어뜨리고 면전에서 담배를 피워댔습니다. 전부터 폭언은 있었는데 그게 폭력으로 이어진 겁니다. 오만 정이 다 떨어진 저는 “아이는 지울 테니 헤어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남자가 아이를 지우면 낙태죄로 고소하겠다고 협박하더군요. 그러더니 “앞으로 만나는 남자마다 찾아가서 알릴 거다. 가장 비싼 변호사를 사서 널 괴롭힐 거다”라고 했습니다. 배는 점점 불러왔습니다. 5개월이 지나자 아이에겐 팔, 다리가 자라있었습니다. 수술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그 남자와 살거나 혼자 키워야 합니다. 어느 쪽이나 지옥 같았습니다. 그럴 바엔 죽어야겠다고 생각해 뛰어내리거나 목을 매려고도 했습니다.회사에서는 민폐 끼치기 일쑤였습니다. 업무 집중도 안 되고 애꿎은 후배에게 화풀이도 했습니다. 임신 사실을 알려 출산 휴가를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사표를 냈습니다. 1년 넘게 입사를 준비했던 첫 직장이었습니다. 출산이 임박하자 남자는 태도를 바꿨습니다. “낳든지 죽이든지 네 맘대로 해라.” “애 핑계로 내 발목 잡을 셈이냐.” 저를 ‘꽃뱀’ 취급했습니다. 결국 비혼모 단체의 도움을 받아 홀로 유진이를 낳았습니다.출산 후 체중은 24kg이 늘고 부분 탈모까지 왔습니다. 젖 먹이느라 가슴은 처졌고 피부는 푸석해지고 기미가 올라옵니다. 열 달간 엄마가 될 몸과 마음의 준비를 못했기에 급격한 신체 변화에 우울증까지 왔습니다.재판관님, 아이를 낳고 4개월이 흘렀습니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저와 제 딸은 수급비 70만 원, 양육수당 15만 원으로 살아야 하는 극빈층입니다. 아이가 36개월이 넘으면 식비 지원이 끊긴다고 하더군요. 결혼도 안 하고 아이만 낳은 저를 받아주는 회사가 있을까요? 재판관님, 제가 꿈꾸던 인생은 이런 게 아니었습니다.이지훈기자 easyhoon@donga.com김예윤기자 yeah@donga.com최지선기자 aurinko@dona.com}

    • 2017-12-01
    • 좋아요
    • 코멘트
  • 낙태 수술대 위에서의 30분…남녀 모두에 ‘평생 트라우마’

    《낙태란 어떤 경험일까요. 막연히 어두운 기억일 뿐일까요. 동아일보 취재팀은 낙태를 경험한 ‘남녀’에게 조심스럽게 그 때의 기억을 물었습니다. 그들에게 낙태는 합법과 불법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수술대에 누운 여성과 이를 지켜보는 남성 모두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내부자들, 낙태를 말하다’ 제3회,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낙태 남녀’의 이야기입니다.》1. ‘굴욕의자’에 앉자 눈앞에 분홍 커튼이… 냄비에 담긴 물에 미역을 넣고 가스불을 켜는 것으로 은정 씨(가명·24·여)는 ‘수술 준비’를 시작했다. 생전 먹지 않던 고등어조림도 만들었다. 인터넷에 나온 ‘산후조리에 좋은 음식’이었다. 밥솥에 김이 피어날 무렵 그는 자취방을 나섰다. 병원은 버스로 30분 거리에 있었다. 상가 건물 3층의 허름한 산부인과 앞에서 ‘전 남친’이 서성이고 있었다. 의사는 60대 남성이었다. 여의사이길 바랐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전 남친’이 수소문해 겨우 찾아낸 ‘낙태 병원’이었다. “3주차여서 수술은 필요 없어. 주사나 서너 번 맞으면 돼.” 초음파 화면 속 ‘점’을 바라보던 20대 남녀에게 의사가 무심히 말했다. ‘점’이 태아였다. 비용은 45만 원. 반반씩 내기로 했다. 수술실 안은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은정 씨는 ‘굴욕의자’라고 불리는 수술대에 앉았다. 양쪽 지지대에 종아리를 올리니 다리가 120도 각도로 벌어졌다. 상체는 뒤로 젖혀졌다. 배꼽 아래로는 분홍색 커튼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커튼 뒤에서 의사가 수술용 고무장갑을 끼는 듯 했다. 간호사는 주사기와 수술 도구를 만지작거렸다. 철과 철이 맞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살짝 따끔합니다.” 예리하고 차가운 금속이 몸속을 파고들었다. 간호사가 쇠로 된 그릇에 뭔가를 떨어뜨리는지 ‘딸각’ ‘딸각’ 소리가 났다. 은정 씨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건 시술 일주일 전이었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지 보름쯤 된 날이었다. 할 때가 됐는데 며칠 째 생리를 하지 않았다. 불안했지만 확인할 용기가 없었다. 밤마다 꿈을 꾸기 시작했다. 화장실에서 생리를 하며 안심하는 순간 잠에서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지하철을 몇 번 갈아타고 시내 번화가에 있는 편의점에 갔다. 진열된 임신테스트기 중 가장 비싼 것을 골랐다. 그날 밤 은정 씨는 새벽을 기다리며 뒤척였다. 인터넷에서 ‘아침 첫 소변으로 테스트하는 게 가장 정확하다’는 산부인과 의사의 답변을 본 적이 있었다. 잠을 보채다 눈을 떠보니 오전 5시. 테스트기의 조그만 네모 속 ‘두 줄’은 더없이 선명했다. 수술대에 누운 은정 씨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오십 오십일 오십이….’ “다 됐습니다. 내려오세요.” “벌써요?” “아기집 떨어질 때까지는 몸살 난 것처럼 아플 수 있습니다.” 병원을 나서는데 ‘전 남친’이 말했다. “다음부턴 혼자 올 수 있지?” “….” 은정 씨는 버스에서 홀로 오한에 떨었다. 더위가 가시지 않은 9월 초에 한기가 밀려들었다. 엄마 생각이 간절했지만 연락하지 않았다. 교회 권사인 엄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은정 씨는 자취방에 오자마자 보일러를 틀었다. 오리털 점퍼를 꺼내 입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까 끓여놓은 미역국은 냄새가 역하게 풍겼다. 냉기가 가시자 고열이 왔다. 얼굴이 너무 뜨겁게 달아올라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았다. 은정 씨는 일주일 뒤 다시 병원을 찾았다. 속옷을 다 벗고 시술용 긴 치마를 입은 채 수술대에 올랐다. ‘점’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며 주사를 놓던 60대 남자 의사가 갑자기 표정을 찌푸렸다. “무슨 상한 냄새가 나네. 소독약 넣어야겠다. 걱정 마 학생, 추가비용은 안 받을게.” 의사의 말에 은정 씨는 수치심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주먹으로 아랫배를 마구 때렸다. 2주가 지나도 떨어지지 않는 ‘점’이 원망스러웠다. 은정 씨는 2년 전 그 일 이후 아직 ‘솔로’로 지낸다. 성관계는 물론 남자를 사귀는 것조차 꺼리게 됐다. ‘낙태 커밍아웃’도 얼마 전 친구 1명에게만 했다고 한다. 기자에게 털어놓은 이유에 대해 “다신 안 볼 사이니까요”라고 했다.2. 낙태한 연인, 우리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는 2년 사귄 27살 동갑내기 연인이었다. 같은 집에 살며 밥을 지어 먹었다. 밤새 농담을 주고받았다. 예전 연인 얘기도 스스럼없이 나눴다. 결혼을 한다면 이 사람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상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였다.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는….하루는 유난히 어지럽고 속이 울렁였다. 그 사람과 날짜를 손으로 꼽아보다 멈칫했다. “임신인가?”“아니야. 임신한다고 바로 입덧하고 그러진 않아.”“어떻게 알아?” 그에겐 낙태 경험이 있었다. 전에 사귀던 여자친구 2명이 낙태를 했다고 한다. “임신이 아닐 것”이라는 그의 위로에 안도감과 함께 마음이 복잡해졌다. ‘옛날 일이니까…’ 애써 머리에서 지웠다. 하지만 나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임신 했다”는 말에 그는 의외로 망설이지 않았다. “우리 낳자. 좋은 아빠가 될게.” 내가 운영하던 가게는 매달 적자였다. 그는 학생이었다. 출산은커녕 낙태 비용도 빌려서 내야할 판이었다. 낳을 자신도 없고 낳고 싶지도 않았다. 서둘러 수술을 받기로 했다. “피임을 잘 했어야죠.” 의사의 말이 화살처럼 날아왔다. 임신은 둘의 책임이지만 수술대에 오른 건 나뿐이었다. 둘이라고 생각했는데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았다. 수술 후 그와 함께 살던 집은 살얼음판이 됐다. 나만 피해를 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 사람만 낙태 사실을 알고 있어 다른 곳에 화풀이할 수도 없었다. 그는 낙태 이전으로 돌아가려 애썼다. 안 하던 밥을 짓기 시작했다. 한 달 동안 미역국을 끓였다. 그러면서도 내 눈치를 살폈다. 나를 집에 두고 학교에 갈 때면 그는 죄인이 됐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화를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매일 누워있어야 되는데 너는 왜 그리 늦게 다니는 거야?” “…” “지금은 내가 1순위여야 하는 거 아니야?” “…” 그는 예전 여자친구에 대해 “히스테리가 심해 견딜 수 없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나 역시 맞장구를 치며 함께 그 여자 흉을 봤다. 하지만 어느새 내가 그 여성처럼 되어있었다. ‘왜 나만 힘들지’ 하는 생각에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았다. 한 달 뒤 그에게 한계가 왔다. 그날도 그는 서툰 솜씨로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만들어 밥상을 차렸다. 하지만 매일 끓여오던 미역국이 빠져있었다. “미역국 한 끼만 더 먹고 싶어.” 그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그는 차갑게 말했다. “적당히 좀 해.” 가장 가깝다고 믿었던 우리가 서로 뒷걸음치며 멀어져왔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둘 다 돌아올 수 없는 곳에 와 있었다. 우리는 헤어졌다. 낙태하고 6개월 만이었다.3. 낙태를 지켜본 남자에게 벌어지는 일 “보호자시죠? 임신 7주차고요, 동의하시는 거죠?” “네….”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물었지만 회사원 김모 씨의 등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어떻게 나왔는지도 모르게 대기실에 앉았다. 소파에는 임산부로 보이는 여성이 여럿 있었다. 남성은 김 씨 뿐이었다. 수술실에 들어간 여성은 대전에서 올라와 자취를 하는 스물세 살 대학생이었다. 석 달 쯤 만난 뒤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사이였다. ‘자취방에서 혼자 몸조리는 잘 할 수 있을까.’ 김 씨는 예전에 엄마가 했던 “여자가 아이를 지우는 건 아이를 낳는 거나 똑같다”는 말을 떠올렸다. 수술실에서 나온 여성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차마 “고생했다”는 말도 건넬 수 없었다. “뭐라도 좀 먹을래?” “그냥 친구랑 먹고 싶어.” 그 말이 김 씨가 여성에게서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여성을 낙태 시킨 기억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김 씨는 반년 쯤 지나 새 연애를 시작했다. 사이가 무르익자 함께 모텔에 갔지만 그 방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일어나지 못했다. 특별히 아픈 곳도 없었지만 김 씨에겐 불가능했다. 김 씨는 비뇨기과와 신경정신과를 찾아다녔다. 의사의 조언대로 운동을 꾸준히 하고, 여자친구와 여행지로 떠나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한 여성의 인생을 바꿔놓은 그날 밤에서 그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아요.’ 10년 전 수술을 마치고 헤어졌던 그날, 여성으로부터 날아든 단 한 줄의 문자메시지를 김 씨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여성은 김 씨에게 화를 내지도, 욕을 하지도 않았다. 조용히 쉼 없이 김 씨를 밀어낼 뿐이었다. 여성의 문자는 김 씨의 죄책감을 수시로 소환해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라며 여성을 안심시켰던 그날 밤 자신을 향한 환멸도. 올해 37세인 김 씨는 그 날의 기억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김예윤 기자 yeah@donga.com}

    • 2017-11-30
    • 좋아요
    • 코멘트
  • “사연 없는 낙태 없어”…‘낙태 공범’ 의사들의 속사정

    동아일보 취재팀은 최근 5년간 낙태 관련 판결문 80건 전체를 입수했습니다. 분석 결과 법정에 선 피고인 10명 중 7명은 의사 등 의료진이었습니다.취재팀은 낙태수술 경험이 있는 산부인과 의사 3명을 만났습니다. 1980년대 정부 가족계획위원으로 합법적 ‘낙태의사’였다가 30대 여성 낙태수술 혐의로 처벌받은 이모 씨(78), 20년 넘게 한 낙태수술을 5년 전부터 중단한 김모 씨(57) 그리고 약물·알코올 중독 여성에게 낙태수술을 해준 혐의로 기소된 박모 씨(55·여)입니다.낙태에 관한 이들의 생각은 모두 달랐습니다. 그래서 세 의사가 자신의 상담실에서 환자들과 나눴던 대화를 재구성했습니다. 법과 윤리 사이에서 고민하는 의사들의 딜레마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산부인과 원장 이 씨가 쇳물에 누렇게 물든 산부인과 간판 옆 창문으로 바깥을 바라봤다. 허름한 유흥가 곳곳에 도박장과 당구장 포장마차가 줄지어 있었다. 그 사이로 한 여성이 서둘러 건물로 걸어 들어왔다. 쫓기는 듯 발걸음만 봐도 어떤 환자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이 씨는 차트와 여성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성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책상 모서리만 바라봤다. 차트에 적힌 여성의 주소지는 이 씨 병원에서 시외버스로 1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다. 보호자 칸은 비어있었다.“기혼이세요?” “…” “첫 임신인가요?”“…”“보호자 같이 왔어요?”“…”여성은 대답 없이 고개만 가로저었다. 이 씨는 더 묻지 않고 여성을 초음파실로 안내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사정이 있음을 직감했다. 낙태를 말려도 다른 병원을 전전할게 불 보듯 뻔했다.시선을 계속 피하며 초음파실 침대에 눕는 여성을 보자 옛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1980년대 정부 지정 가족계획위원이었다. 인구가 너무 빨리 늘어나자 국가에서 낙태를 하도록 지원까지 했다.그 때는 여성들이 진료실에 죄인처럼 들어오지 않았다. 12주 이전 임신부에게 “세포를 떼어내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며 수술했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인구가 줄자 낙태는 다시 범죄행위가 됐다.초음파 검사 결과 임신 8주였다. 여성은 까만 영상 속 아기집을 보고도 미동하지 않았다.“오늘 수술 할 건가요?”“…”여성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수술은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 후 문제가 없는지 봐야 되니 한 번 더 오세요.”회복실에 누운 여성은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몇 달 뒤 이 씨를 찾아온 건 고소장이었다. 여성의 낙태를 도운 죄였다. 고소한 사람은 여성의 남편이었다. 두 사람은 이혼 소송을 앞두고 있었다. 이 씨가 여성의 목소리를 처음 제대로 들은 건 법정에서다.“남편이 동성애자인 것 같아요. 곧 이혼할 예정이고 성관계도 거의 없었습니다.”여성은 울먹이며 말했다. 법정에는 적막이 흘렀다.억울한 건 이 씨도 마찬가지였다. 산부인과 경력 45년인 이 씨는 12주 미만의 태아는 생명체가 아니라고,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는’ 세포라고 생각했다. 이 씨는 낙태죄의 위헌 여부를 가릴 수 있게 해달라고 법원에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원은 그에게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했다.한 때 가족계획위원으로 국가의 부름을 받았던 그는 30년이 지나 범법자가 됐다.“그런 수술은 하지 않는다”는 의사의 말에 마주 앉은 여성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이달 초 서울의 한 산부인과 상담실에 잠시 적막이 흘렀다.“선생님, 여기 해주는 병원이라고 하던데요.” 28년차 산부인과 의사 김 씨가 바로 맞받았다. “안 한지 꽤 됐습니다.” “여기 버스타고 오는데 1시간 반이 걸렸어요. 그냥 해주시면 안 돼요?”여성은 중소기업에 다니는 24세 직장인이었다. 애인과 이별한 직후였다. “안 만나주면 죽이겠다”는 남자친구를 겨우 떼어놓았을 때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선생님, 수술 안 하면 제 인생 망해요. 돈도 없고 집도 없어요. 무조건 지워야겠다는 생각뿐이에요.”5년 전까지만 해도 김 씨는 낙태수술을 했다. 일명 ‘낙태의사’였다. 한 달에 20~30명이 왔다. 사연 없는 여성은 없었다. 이날 찾아온 환자도 다르지 않았다. 김 씨가 상담실 모니터 화면을 보며 말했다.“5주차네요. (화면 속 동그란 점을 가리키며) 이게 아기예요.” “부탁이에요. 선생님. 지워주세요.”이 순간이면 김 씨는 늘 고민에 빠진다. 낙태수술 비용은 임신기간이 1주일 길어질 때마다 보통 10만 원씩 늘어난다. 5주차면 최소 50만 원, 10주차면 100만 원 이상 받는다. 출산 환자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무시하기 어렵다. 김 씨는 마주 앉은 여성에게 건조한 말투로 말했다.“조금 더 생각해보세요. 엄마가 된 여성들은 후회하지 않아요.”5년 전, 양손에 오렌지 주스를 가득 든 채 김 씨를 찾아온 여성이 있었다. 오래 전 낙태를 해주지 않고 돌려보낸 환자였다. 이혼을 앞두고 임신했던 이 여성도 처음 상담실에 왔을 땐 낙태하겠다는 뜻이 확고했다.“이혼은 이혼이고 아이의 생명은 별개”라는 김 씨의 말에 여성은 발길을 돌렸다. 두 달쯤 뒤 그는 김 씨를 다시 찾았다.“선생님, 이혼서류 접수했어요. 제발 수술해주세요.”“임신 13주가 넘어 위험합니다. 못 해줘요.” 다른 병원에서 얼마든 낙태할 수 있을 텐데 두 달 가까이 아이를 뱃속에 간직했다면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이라고 김 씨는 생각했다.3년 후 김 씨를 다시 찾은 여성은 “그때 말려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여성은 이혼하지 않고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김 씨는 20년 넘게 낙태수술을 하면서 “감사하다”는 말을 들어본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그는 수술대에 누워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여성들을 보며 내가 정말 이 사람을 돕고 있는지 스스로 묻곤 했다. 김 씨가 수술을 거부하자 결국 출산한 뒤 아이를 입양 보낸 20대 초반의 한 산모는 “최소한 아이에게 살 기회를 줬다”며 위안 삼았다고 한다.이달 초 “생각해보라”며 돌려보냈던 24세 직장인은 2주 만에 김 씨의 상담실을 다시 찾았다. 여전히 단호했다. “더 커지기 전에 수술 받고 싶어요. 더 커지기 전에….”김 씨의 대답도 그대로였다.“아이 낳은 여성은 대부분 후회하지 않습니다. 지우면 두고두고 괴로울 거예요.”여성은 상담실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문을 열고 나가려다 고개를 돌려 물었다.“선생님은 따님이 있으세요?”“….” “따님이 저 같은 상황이면 어떻게 하시겠어요?”“피임 교육 잘 시킬 겁니다.”“저도 피임했는데 임신한 거예요. 선생님은 따님한테도 낳으라고 하실 건가요?”대답을 원하는 듯 잠시 기다리던 여성이 상담실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김 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문밖에서 간호사가 환자를 호명했다. 상담실로 향하는 발자국 소리가 문 앞에서 멈춘 뒤 몇 초가 흐르도록 문이 열리지 않았다. 지방에서 산부인과를 운영하는 28년 경력의 의사 박 씨는 상황을 직감했다. 상담실 문을 쉽게 열지 못하는 환자들은 대부분 비슷한 처지다.“어떻게 오셨어요?”앳돼 보이는 여학생 한 명이 상담실 의자에 앉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함께 들어온 중년 여성이 의자를 끌어와 옆에 앉았다.“저희 애가 일주일 집에 안 들어온 적이 있어요. 그래도 돌아와서 다행인줄 알았는데….”여학생은 헐렁한 맨투맨 티셔츠 차림이었다. 배 부분이 동그란 모습이었다. 열일곱 살의 임신부였다. 엄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얘가 가출해서 친구 집에서 지낼 때 남학생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어요.”박 씨는 모녀가 병원에 온 이유를 굳이 묻지 않았다.“이 수술 원래 불법인 건 아시죠? 근데 성폭행으로 확인되면 수술해도 법적으로 괜찮아요. 일단 경찰에 신고하시고….”“안 돼요, 선생님!”내내 울먹이던 엄마는 단호한 목소리로 막아섰다.“성폭행으로 확인 받으려면 수사 받고 뭐 하고 몇 달 걸리잖아요. 엊그제 갔던 병원에서 성폭행 판결문 없으면 수술 안 해준다고 해서 그냥 나왔어요.”여학생은 임신 18주차였다. 성폭행 피해를 알리기 두려워 임신 3개월이 지나서야 엄마에게 털어놨다. 수술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여러 산부인과를 전전하고 있었다. 여학생은 불안한 듯 쉬지 않고 왼손으로 오른손을 긁었다. 박 씨는 한숨이 나왔다.“올라가세요.”수술은 30분 만에 끝났다. 수술대에서 내려온 여학생은 몸을 휘청거리다 엄마에게 기댔다. 박 씨는 진료실을 나서는 모녀를 바라보며 대기실을 향해 말했다.“다음 분 들어오시라고 해요.”배가 볼록 나온 28세 여성이 상담실로 들어섰다. 한 눈에도 임신부였다.“6개월이 지났는데 이제와 중절수술을 받겠다고요? 지금까지 뭐 했어요?”“아이가 있으면 남친이 못 떠날 줄 알았는데 끝까지 저랑 헤어지겠대요.”“아가씨는 뱃속 아이가 어떤 존재에요? 남자친구 잡지 못한다고 버려도 되는 물건은 아니죠.”여성은 한동안 대답을 하지 못하다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아빠가 없는데 어떻게 해요. 두 시간 걸려서 왔는데, 다른 곳도 모두 안 된다고만 하고….”여성은 인사 없이 상담실을 나갔다. 박 씨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다른 병원을 가겠구나’라고 생각했다.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예윤 기자 yeah@donga.com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 2017-11-29
    • 좋아요
    • 코멘트
  • “너, 고소할 거야” 이별 여성 협박도구로 악용되는 낙태죄

    “신고만 해봐. 낙태죄로 고소할 거야.” 박모 씨(25)의 협박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겁에 질린 김모 씨(24·여)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은 한때 캠퍼스 커플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올해 초 두 사람 사이에 예상치 못한 아이가 생겼다. 김 씨는 “낙태하고 싶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절반씩 비용을 부담해 낙태 수술을 받았다. 이때만 해도 김 씨는 박 씨의 협박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이별했다. ‘전 남친’이 된 박 씨는 김 씨의 낙태 사실을 학교 친구들에게 말했다. 참다못한 김 씨는 지난달 박 씨를 찾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며 울먹였다. 그러자 박 씨는 “나야말로 낙태죄로 고소할 것”이라고 맞섰다. 결국 김 씨는 학기 중 휴학했다.○ 낙태 판결문에 담긴 천태만상 2012년 8월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합헌 결정을 내렸다. 본보는 헌재 결정 후 이달까지 5년간 전국 법원에서 이뤄진 낙태 관련 판결 80건을 모두 입수해 분석했다. 낙태죄는 낙태를 한 여성 본인(자기낙태죄), 수술 등의 방법으로 낙태를 도운 의료진(업무상 촉탁 낙태죄), 낙태에 대한 명시적 동의 의사를 밝힌 남성(낙태 방조) 등을 처벌한다. 낙태는 강간에 의한 임신인 것으로 수사기관에서 확인되거나 부모가 유전적 장애가 있는 때 등 예외적 경우에만 허용된다. 판결문에는 남자친구 또는 남편의 신고로 법의 심판대에 선 여성이 다수 등장했다. 이혼 소송이나 양육권 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거나 이별을 요구하는 여자친구를 붙잡으려는 남성들에게 낙태죄가 악용되고 있었다. 지난해 낙태죄로 40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은 최모 씨(29·여). 그는 남편(32)의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이혼을 결심한 뒤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 위자료 액수를 두고 최 씨와 갈등을 빚던 남편은 최 씨와 낙태 수술을 해준 산부인과 의사를 경찰에 고소했다. 법원 관계자는 “낙태 사실은 당사자인 여성과 수술한 의사, 상대 남성 등 극소수만 알고 있어 셋 중 한 명이 고소하지 않는 한 드러나기 힘들다. 그래서 고소인은 대부분 상대 남성 또는 남성 측 가족”이라고 말했다. 낙태 사실이 발각되면 여성과 의사는 처벌을 받지만 남성은 수술에 동의했다는 명시적 증거가 없으면 처벌을 면한다. 여성들 사이에선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남자에게 낙태 사실 알리지 말라’는 게 암묵적인 요령으로 통용된다. 하지만 상대 남성의 동의 여부가 확인되지 않으면 수술을 거부하는 산부인과 의사가 많다. 법원도 같은 낙태 여성이라도 남성 측 동의를 받으면 선고유예 처분을 하지만 동의 없이 한 경우 벌금형으로 더 무겁게 처벌한다. 남성 동의를 받지 않거나 병원 기록에 남지 않게 수술을 받으려는 여성들은 어쩔 수 없이 ‘고위험 고비용’의 수술대를 찾는다. ‘낙태 브로커’를 통해 음성적으로 병원을 소개받아야 한다. 수술비뿐 아니라 100만 원 안팎의 추가 비용이 든다. 낙태 브로커로 일했던 대학생 김모 씨(28)는 “인터넷에 ‘낙태 가능 병원 상담 문의’ 등의 글을 올리면 연락이 쏟아진다. 산부인과에 무작위로 전화를 돌려 예약해 주는 대가로 건당 10만∼30만 원씩 받았다”고 털어놨다.○ ‘식물형법’이 된 낙태죄 5년간 80건의 낙태 판결에서 실형이 선고된 사례는 단 1건이다. 낙태 시술을 받던 여성을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집행유예 형을 받은 조산사가 20대 여성을 또다시 낙태한 혐의로 2012년 부산고법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은 사례가 유일하다. 나머지 피고인은 선고유예(51.3%)와 집행유예(36.3%) 등의 처분을 받았다. 27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연간 약 17만 건의 낙태수술이 이뤄진다. 기소는 연간 10여 건에 불과하다. 사실상 낙태죄가 사문화돼 ‘식물형법’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피고인 80명 중 56명(70%)은 의사, 간호사 등 의료진이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서 하루 평균 낙태수술 건수는 3000여 건으로 추정된다. 판결문을 살펴보면 현실에 대한 판사의 고민이 엿보인다. 대전의 한 산부인과에서 일하는 의사 3명은 2008년부터 3년간 각각 60명, 120명, 140명의 여성에게 낙태수술을 해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법원은 이들 의사 모두에 대해 선고유예 처분을 내렸다. 재판부는 “낙태가 사실상 용인되는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할 때 의사들에게만 무거운 책임을 묻기 어렵고 낙태를 한 임부들에게 각자 납득할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29년 경력의 산부인과 의사 성모 씨(55)는 “낙태하러 온 여성들은 아는 사람 눈에 띄지 않으려고 대부분 거주지에서 1, 2시간 정도 떨어진 병원으로 찾아온다. 여성들이 애절하게 눈물을 흘리며 낙태를 부탁하면 불법이라고 그대로 돌려보내기 어려워 괴롭다”고 말했다. 정현미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금의 현실을 그대로 두고 낙태죄를 손보지 않는다면 여성과 산부인과 의사를 잠재적인 범죄자로 내모는 셈이다. 낙태죄는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입법 취지에서 벗어나 어른들이 서로의 약점을 공격하는 수단이 됐다”고 지적했다.이지훈 easyhoon@donga.com·김예윤·최지선 기자}

    • 2017-11-2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최면 호흡 5분만에 나른… “눈꺼풀에 본드” 말에 눈 안떠져

    “지금 눈꺼풀에 본드를 발라 눈을 뜰 수 없습니다. 눈을 한번 떠 보세요.” 기자는 경기 의정부시 경기북부경찰청 법최면실에 누운 지 얼마 안 돼 과학수사계 오인선 경위(55)의 나긋한 음성을 듣고 온몸이 나른해졌다. 눈을 뜨려고 애썼지만 눈꺼풀이 붙어 있는 느낌에 뜨지 못했다. 오 경위가 “머리를 비우고 호흡에 집중하라”고 말한 지 5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기자는 부산 여종업원 살인사건이 15년 만에 해결된 데에 최면수사가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소식에 ‘믿을 수 없다’며 최면수사 체험에 나섰다. 하지만 자신 있게 나선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기자는 결국 눈을 뜨지 못했다.○ 코흘리개 시절까지 생생 동아일보 취재팀은 15일 오 경위를 찾아 최면수사를 체험해봤다. 오 경위는 경기북부청의 유일한 법최면 담당자다. 최면수사 경력 12년 차 베테랑이다. 최면이라는 ‘신비의 영역’에 대한 반감과 의구심으로 가득한 김예윤 기자가 최면 받기를 자청했다. 다음은 김 기자와 그가 최면수사를 받는 장면을 지켜본 다른 기자의 시점을 오가는 체험기다. 나(김 기자)는 최면수사 동의서와 면담카드, 응답지 등을 작성한 뒤 의자에 누웠다. 방음 처리된 10m² 남짓한 법최면실은 곧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오 경위는 “머리를 비우고 호흡에 집중하라”고 말했다. 약 5분간 편안하게 호흡했다. ‘절대 최면에 걸리지 않으리라’ 호언장담한 나는 몸에 긴장이 풀리며 나른해졌다. 최면의 늪에 빠져드는 듯했다. 잠시 후 오 경위는 몇 가지 실험을 시작했다. “두 팔을 뻗어보면 풍선이 있으니 바람을 불어넣어 보세요” “두 손에 무거운 책이 들려 있으니 무게를 느껴 보세요” 등 특별한 행동을 번갈아 요구했다. 나는 두 손에 들린 책의 무게감을 느껴보라고 했을 때는 느낌이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손 안에 든 풍선을 부풀려 보라는 얘기에 숨길을 불어넣었다. 두 손이 무언가로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이때 김 기자는 허공에서 공기를 모아 부풀리듯 빈손으로 손동작을 했다. 나는 실제 풍선이 부풀어 오르며 내 손바닥에 닿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같이 특정한 행동을 반복하라고 20분 이상 지시한 뒤에야 오 경위는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친구들과 가장 즐거웠던 시간을 떠올려 보세요.”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교실에서 친구들과 과학실험으로 더덕 키우기 내기를 하며 행복해하던 17년 전 내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랐다. 옆에서 다른 기자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걸 알았지만 나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초등학교 3학년 그때 기억이 너무 생생해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가 없었다. 최면에 걸리지 않겠다고 스스로 굳게 각오했던 터라 오 경위의 주문대로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1시간에 걸친 최면수사에 나도 모르게 오 경위가 시키는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던 순간들이 너무나 신기했다. 오 경위는 “최면수사로 희미해진 기억을 극대화하면 잠깐 본 범인이라도 몽타주 그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법최면이 잡아낸 15년 전 살인범 김 기자가 체험한 법최면은 수사기법 중 하나로 실전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전생을 볼 수 있다’는 식의 허황된 내용이 아니다. 순간 이미지나 과거 기억 극대화에 초점을 둔다. 거짓말탐지기처럼 최면 상태의 진술은 법정에서 증거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다. 하지만 범인의 단서를 찾는 데 유용하다. 올해 부산지방경찰청이 15년 만에 해결한 2002년 다방 여종업원 살인사건에서 최면수사는 범인 양모 씨(46)를 특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유일한 목격자인 이모 씨(41·여)는 8월 부산청 법최면실에서 부산경찰청 과학수사계 전성일 경위(50)를 통해 15년 동안 묵혀둔 기억을 끌어냈다. 이 씨는 범인이 살해한 양모 씨(당시 22세) 계좌에서 현금을 인출할 때 지인 오모 씨를 따라 은행에 함께 갔었다. 15년 전에 딱 한 번 본지라 기억이 희미했다. “머리는 짧고 검은색 옷을 입고…. 덩치는 보통이었어요.” 전 경위가 “지금 그 남자를 보면 알 것 같나요?”라고 묻자 이 씨는 “일단 보면 알 것 같다”고 답했다. 잠시 후 최면에서 깨어난 이 씨는 한 장의 사진을 골랐다. 범인 양 씨가 2003년 찍은 운전면허증 사진이었다. 1시간 15분간 최면수사를 통해 15년 전 기억이 각성된 것이다. 경찰은 통신수사기록 등을 토대로 양 씨를 특정하고 8월 살인 혐의로 구속했다. 고영재 경찰청 현장지원계장은 “올해 1∼10월 최면수사를 이행한 사건 19건 중 10건이 살인사건이었다”며 “최면은 기억력을 극대화시켜 범인의 몽타주를 그려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오고 있다”고 말했다.의정부=조동주 djc@donga.com·김예윤 기자}

    • 2017-11-2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국어-수학, 새 유형-고난도 문제 늘어… 상위권 변별력 커져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은 변별력을 충분히 확보한 시험이었다. 국어, 수학, 영어 모두 어려웠던 지난해 수능과 비슷하게 출제됐다. 다만, 영어 절대평가 도입에 따라 인문은 국어와 수학, 자연은 수학과 과탐 영역이 대입에서 중요할 것으로 본다.”(김창묵 경신고 교사) 23일 치러진 2018학년도 수능은 지난해에 이어 ‘불수능’이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올해는 지난해와 달리 영어 절대평가로 인해 대학들의 영역별 반영 비율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에 전체 점수로 전략을 짜기보다 대학별로 상이한 영역별 반영 비율을 세심하게 고려해야 한다.○ 국어-어렵고 긴 지문 국어는 9월 실시된 모의평가(만점자 0.3%)보다 조금 어렵고, ‘매우 어려웠다’는 평가를 받았던 지난해 수능(만점자 0.23%)과 비슷한 난도였다는 평가가 나왔다. 김용진 동국대사범대부속여고 교사는 “올해도 새로운 경향의 문제가 2, 3개 출제됐고 독서영역에서도 고난도 변별력이 있는 문항이 두 개 출제됐다”며 “특히 지난해부터 독서에서 지문 길이가 시험지 한 장에 달하는, 매우 긴 지문이 나오고 있는데 올해도 그 경향이 유지됐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국어영역에서 가장 어려웠을 문항으로 41번을 꼽았다. 41번은 디지털 통신 시스템의 부호화에 관한 긴 기술지문을 읽고 해당 기술을 사례에 적용해야 했다. △중세국어 지문이 출제된 12번 △음운변동에 대한 국어 지식이 필요한 14번 △매우 긴 환율 관련 경제지문을 읽고 이를 그래프와 연결해 사고해야 하는 30번 등이 고난도 문제로 분류됐다. 대표적인 신유형 문항은 6월, 9월 모의평가에서 등장했던 4∼7번 문항이었다. 조영혜 서울과학고 교사는 “독서 토의 활동을 소재로 한 4∼7번은 교과서에 기초한 교수학습모형을 그대로 보여준 문제”라며 “수능에서는 처음 나온 유형이지만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15번과 42번도 수능에서는 처음 등장한 유형의 문제였다.○ 수학-난도 높은 신유형이 관건 수학도 어려웠다. 이과생이 주로 치르는 ‘가’형은 전년도 수능(만점자 0.07%)이나 9월 모의평가(만점자 0.37%) 난도와 비슷했다는 분석이, 문과생이 주로 보는 ‘나’형은 전년도 수능(만점자 0.15%)보다 약간 어렵고 9월 모의평가(만점자 0.13%)와는 비슷한 수준이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조만기 판곡고 교사는 “수학 나형의 21번 문항과 30번 문항은 신유형이면서도 고난도 문항이어서 이 두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느냐에 따라 상위권 학생들 간 변별력이 생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특히 예전에는 명확하게 떨어지는 함숫값을 구해야 했다면 올해는 주어진 함수의 조건들을 보고 이를 잘 해석해서 그래프의 모양 등을 ‘추론’하는 능력을 많이 물었다”며 “사고력을 보는 문항이 고난도의 신유형으로 출제됐다”고 전했다. 예컨대 30번 문항은 다양한 그래프를 추론하면서 정적분도 계산해야 하고 수열의 일반항도 이해해야 하는 등 3가지 개념을 완벽히 이해해야만 풀 수 있는 문제였다. 수학 가형은 20번, 21번, 30번이 신유형, 21번과 29번, 30번이 고난도 문항으로 꼽혔다. 손태진 풍문고 교사는 “작년에는 구체적으로 함수가 주어지지 않아 어떤 방법으로 문제를 풀지 접근 자체가 힘들었다면 올해는 함수가 구체적으로 주어지긴 했지만 큰 틀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면 풀기 힘들어서 학생의 성향에 따라 큰 차이를 느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영어-어려워진 독해 올해 처음으로 절대평가 방식이 도입된 영어는 지난해 수능과 비슷한 수준이고 굉장히 어려웠다는 평가를 받은 9월 모의평가보다는 쉬웠던 것으로 보인다. 유성호 숭덕여고 교사는 “전체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문제는 없었고 배점도 과거와 비슷했다”며 “다만, EBS 비연계 지문 가운데 독해가 어려운 지문들이 있어 32∼34번 문항은 해석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종한 양정고 교사는 “무난한 시험이라고 여겨지지만 나름대로 변별력을 갖추려는 의도가 보였다”며 “빈칸 추론 문항이 어려운데 4문항 중 3문항이 EBS 비연계로 출제됐고, 단어와 짧은 어구 대신 긴 어구와 절을 찾는 문제가 출제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교사들은 가장 어려운 문항으로 34번을 꼽았다. 수험생들은 생소한 개념이나 전문영역을 다룬 지문을 어려워하는데 34번 지문은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해 인간의 정체성을 재규정해야 하는 상황을 기술했다. 김창묵 경신고 교사는 “영어가 절대평가가 됐다고 해서 막연히 쉽게 출제될 것이라 믿고 소홀히 준비했던 학생들은 좋은 등급을 받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와 비슷한 난도였다고 평가되는 지난해 수능의 영어 90점 이상 비율은 7.8% 수준이었다. ○ 한국사·탐구-예상 밖 고난도 지난해부터 필수 영역으로 지정된 한국사의 출제 기조는 수험생들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데 맞춰졌다. 50점 만점 중 40점 이상만 받으면 1등급이다. 그러나 수험생 상당수는 “한국사가 생각보다 꽤 어려웠다”는 반응을 보였다. 수험생 심모 양은 “6월이나 9월 모의평가보다 훨씬 어려웠고 역사 속 시대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알아야 맞힐 수 있는 문제가 나와 의외였다”고 말했다. 사회탐구와 과학탐구도 전 과목이 지난해와 비슷하거나 더 어려웠던 걸로 분석됐다. 임성호 종로학원하늘교육 대표는 “사탐에선 세계사가 전년보다 크게 어렵게 출제됐고 윤리와 사상, 한국지리, 세계지리, 법과 정치도 지난해보다 조금 어렵게 나왔다”고 말했다. 또 “과탐에서는 지구과학2가 전년 대비 가장 많이 어려워진 걸로 분석됐다”며 “생명과학1은 전년 대비 조금 어려웠다”고 전했다. 수능 출제본부는 “과학계의 학문적 동향을 활용하면서도 실생활과 관련된 내용을 문항 소재로 활용했다”며 “대학에서 수학하는 데 필요한 과학 개념과 함께 과학적 탐구 사고력을 측정할 수 있도록 문제를 냈다”고 밝혔다.세종=임우선 imsun@donga.com / 김예윤·신규진 기자}

    • 2017-11-2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밤새워 줄서야 사는 ‘평창 롱패딩’… 온라인선 정가 2배까지 웃돈 거래

    21일 저녁 서울 송파구 롯데백화점 잠실점 에비뉴엘 지하 입구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1차 판매 당시 매진 사태를 빚은 ‘평창 롱패딩’을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추운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밤을 꼬박 새우기로 한 사람들이다. 잠실점이 준비한 패딩은 1000장. 22일 오전 1시 30분에 이미 대기 인원은 500명을 넘어섰고 오전 6시에는 이미 1000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오전 10시 30분 백화점이 문을 열기 전부터 매진이 된 셈이었다. 현장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이들에게 배부하는 대기표를 현금으로 거래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현장에 미리 가지 못한 구매 대기자들이 대기표 1장에 3만∼5만 원을 부르는 글들이 온라인상에 올라왔다. 아예 “줄을 서지 못할 것 같은데 (패딩을) 대신 구매해 달라”며 ‘수고비’를 얹은 20만∼25만 원에 구매대행이 이뤄지기도 했다. 매진된 후에는 줄을 섰다 패딩을 구입하지 못한 고객들이 백화점 측에 항의하는 일도 있었다. 다른 점포들의 사정도 비슷했다. 영등포점, 김포공항점도 백화점 문을 열기도 전에 물량보다 많은 인원이 줄을 서 번호표 배부를 마감했다. 평창 롱패딩 판매는 앞으로 두 번 더 이뤄진다. 24일 롯데백화점 부산본점, 대구점, 대전점과 롯데프리미엄아울렛 파주점 등 총 10개 점포에서 판매가 이뤄진다. 30일 롯데백화점 잠실점 에비뉴엘에서 마지막 물량을 판다. 오프라인 판매 열풍은 온라인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22일 중고제품 거래 사이트 ‘중고나라’에는 1, 2분 간격으로 평창 롱패딩을 사고파는 게시글이 올라왔다. 팔려는 사람보다 사려는 사람이 더 많은 만큼 부르는 게 값이다. 기본적으로 판매가(14만9000원)에 웃돈 5만 원가량이 붙은 20만 원에서 거래가 시작된다. 며칠 전만 해도 25만 원이 최대치였지만 오늘은 판매가의 2배에 가까운 30만 원까지 가격이 올라갔다. 한 구입자는 “구입한 뒤 몸에 잘 맞지 않아서 이베이에 경매 시작가 170달러(약 18만5000원)로 올렸다. 최소 180달러(약 19만6000원) 이상은 받을 것 같다”고 했다. 온라인 중고거래 사기를 조심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이날 게시된 “평창 롱패딩 전 사이즈, 전 색상을 남들보다 저렴한 18만 원에 판다”는 내용의 글 20여 개는 사기성 글인 것으로 밝혀져 모두 삭제됐다. 롱패딩 광풍이 일면서 유통업체들은 관련 마케팅에 주력하고 있다. 롯데홈쇼핑은 지난달부터 판매하기 시작한 롱패딩 누적 주문액이 100억 원을 돌파했다. 목표치의 2배 이상이다. 인기를 실감한 덕에 22일부터는 롱패딩 물량에 대한 방송을 늘리기로 했다. 송재희 롯데홈쇼핑 패션부문장은 “높은 호응에 힘입어 브랜드를 늘리고 기존보다 편성도 2배 확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국내 브랜드인 한세엠케이 버커루도 ‘롱마스터 다운점퍼 시리즈’의 초도 물량인 4만 장 중 60% 이상이 판매됐다. 시즌이 본격 시작되기도 전에 완판이 임박하면서 2차 주문까지 한 상태다.박은서 clue@donga.com·김예윤 기자}

    • 2017-11-23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ICT로 먹이 주고 양식장 관리… “바다가 미래” 6000명 발길

    “평소에 김 스낵을 맥주 안주로 즐겨 먹고 있습니다. 수출 상품으로도 유망하다고 봅니다.”(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김은 올해 수출 5억 달러 달성이 기대되는 ‘수산업의 반도체’입니다. 돌김, 초밥용 김 등 종류도 다양하고 맛도 좋아 세계 시장에서 호평이 자자합니다.”(김산업연합회 관계자) 17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개막한 ‘2017 Sea Farm Show―해양수산·양식·식품 박람회’를 찾은 김 부총리와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은 각종 양식 수산물과 최첨단 양식기술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첨단 기술로 무장한 한국의 스마트 양식 수산업에 내외빈과 관람객들의 눈과 귀가 집중됐다. ‘바다가 미래다’를 주제로 열린 이번 박람회는 차세대 미래 먹거리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며 한국 양식업이 나아갈 길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였다. ○ 양식기술, 해양관측기술 선보여 이번 박람회에는 국내 양식기술 발전을 이끌어온 국립수산과학원 등 정부기관과 지방자치단체, 양식 관련 업체 등이 일제히 참여했다. 해양환경 시스템을 구축·운영하는 지오시스템리서치는 수온, 염분 등 어장환경을 측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녹조, 기상 등 해양환경까지 관측할 수 있는 기술을 선보였다. 지오시스템리서치 관계자는 “최근 고수온 현상 때문에 양식장 피해가 5년간 10배 이상으로 늘었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에 30분마다 한 번씩 수온 정보가 전송되고 양식장에 설치된 기기가 그물 높이를 조정하면서 피해에 대비한다”고 설명했다. 수산양식산업과 첨단기술 융·복합을 목표로 지난해 결성된 미래양식투자포럼은 박람회에서 사료 자동공급 시스템과 물김 양식 자동화 시스템 등 각종 스마트 양식 기술을 소개했다. 미래양식투자포럼은 “첨단 시스템을 도입해 2020년부터 인공지능(AI)으로 최적의 데이터를 찾아낼 것”이라고 밝혔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 구본곤 씨(49)는 “최근 일본에서도 한국의 스마트 양식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다고 들었다”며 “기술 보유 업체와 연계해 일본 등에 첨단 양식기술을 소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고 전했다. ○ 다양한 어종, 먹거리도 관심 박람회장에는 자라, 철갑상어, 종어 등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이색 어종들이 전시돼 눈길을 끌었다. 한국자라생산자협회는 수조에 담긴 손바닥 크기의 자라를 선보였다. 협회 관계자는 “자라도 양식이 가능하다. 자라죽, 용봉탕 등 음식부터 고급 기능성 화장품 원료까지 다양한 분야에 사용된다”고 설명했다. 충남수산자원연구소는 20cm가량의 철갑상어 치어를 전시했다. 연구소 측은 “고급 횟감인 철갑상어를 어민들에게 종자로 보급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양한 먹거리도 빼놓을 수 없다. 수협중앙회는 따뜻한 국물과 함께 먹는 어묵과 명태 강정을 준비해 관람객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김 장관은 “우리 수산물로 만든 어묵이 특히 맛있었다. 전시장을 돌면서 먹거리를 즐기다 보니 점심을 못 먹을 것 같다”며 관람객들과 크게 웃었다. 전복유통협회가 준비한 전복찜 시식행사는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 안전 문제로 잠시 중단됐다가 재개될 정도로 대성황을 이뤘다. 박람회장을 찾은 배춘자 씨(74)는 “수산시장에서 산 전복보다 더 쫄깃한 전복을 맛볼 수 있었다”며 만족했다.고양=최혜령 herstory@donga.com·김예윤 기자}

    • 2017-11-1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채널A ‘도시어부’ 인기에 낚시 체험장 북적

    17일 오후 ‘2017 Sea Farm Show―해양수산·양식·식품 박람회’가 열린 경기 고양시 킨텍스의 전시장 한쪽은 낚시에 몰두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5m 너비의 풀장에 물고기 ‘거피’를 풀어놓자 머리가 희끗한 50대 남성부터 세 살배기 아이까지 많은 관람객이 손에 뜰채를 들고 물고기를 잡기 위해 모여 들었다. 한국관상어협회 소속 이희주 씨(54)는 “거피 500마리를 준비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동났다. 이렇게까지 사람이 많이 모일 줄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박람회장 분위기는 최근 낚시 예능 열풍을 이끌고 있는 채널A 프로그램 ‘나만 믿고 따라와, 도시어부’ 홍보차량이 등장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도시어부 관계자들은 행사장에서 ‘조기빵’을 구워 무료로 나눠줬고 관람객들은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다. 19일까지 개최되는 이번 박람회에서는 공식 전시 외에 관람객의 눈길을 끄는 다채로운 시식과 퀴즈쇼, 체험 등을 즐길 수 있다. 18일에는 ‘양영곤 프로의 낚시 특강’과 ‘다랑어 해체쇼’, 19일에는 ‘강레오와 함께하는 셰프 요리쇼’ 등이 준비돼 있다.}

    • 2017-11-1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일주일 족집게 특강 없나요” 학원마다 문의전화 빗발

    “책 챙겨 내려간 지 하루 만에 다시 올라왔어요.” 16일 오전 서울 강남구 한 재수학원 앞은 “일주일 더 공부해야 한다”며 캐리어를 끌고 재상경한 재수생들로 북적였다. 이날 대전에서 올라온 박모 군(19)은 “이틀 전 시험 직전에 책 몇 권만 챙겨 내려갔는데 일주일 동안 집에서 공부할 자신이 없었다. 오늘 아침 기차표 끊어 바로 올라왔다”고 말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 경북 포항 지진으로 일주일 연기되자 서울의 기숙학원에서 공부하다 귀향했던 지방 재수생들의 ‘서울 귀환’이 이어졌다. 대구 출신 현모 양(19)은 “이왕 미뤄진 거, 마음잡고 공부하려고 했는데 익숙한 곳이 나을 것 같아 아침 첫차로 올라왔다”고 말했다.○ 다시 ‘주차장’ 된 대치동 학원가 이날 오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한 유명 수학학원에서는 강사 2명이 걸려오는 전화에 응대하느라 쉴 새가 없었다. 강사들은 “없어요” “없습니다”를 반복했다. 연기된 수능일(23일)까지 “‘족집게’ 단기 특강이 열리느냐”는 수험생과 학부모의 질문이 쇄도했다. 강사 A 씨는 “1시간 동안 전화만 20통 넘게 받았다. 학생들도 계속 문자메시지를 보내 업무를 볼 수가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학부모 김모 씨(50·여)는 “남은 일주일은 막판 스퍼트를 다시 한 번 해야 하는 중대한 시기”라고 했다. 이 학원은 특강 요청에 못 이겨 수능 대비 자료집을 만들어 배포할 계획이다. 점심시간이 되자 대치동 학원가는 순식간에 ‘주차장’이 됐다. 부모들이 학원 앞에 차를 대고 자녀들을 위해 담요와 도시락을 한가득 챙겨왔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학원 밖으로 수험생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부모들은 차에서 나오며 “아들” “딸” 하고 제각기 소리를 질렀다. 학원 정문 앞에서 도시락을 들고 자녀를 기다리던 학부모는 “오늘 학원에서 점심을 안 준다고 했다. 아이가 편의점에서 대충 사먹을까 봐 서둘러 싸왔다”고 말했다. 한 학원 관계자는 “보통 학원에서 점심, 저녁을 챙겨주는데 수능 날에 맞춰 급식을 중단해 불가피하게 제공하지 못하게 됐다. 부모들에게 안내 문자를 돌렸더니 많이들 도시락을 준비해 오셨다”고 말했다. 오후 3시경 이날 휴교를 하지 않은 학교의 고3 수험생들이 몰리자 학원 측은 자습실 마련에 비상이 걸렸다. 수능 관련 강의가 모두 끝나 강의실 배치를 바꿔놨는데 수험생들이 다시 오면서 임시 공간을 마련해야 했다. 서울 신촌의 입시학원은 “일반 강의실을 자습실로 급히 바꾸기 위해 책상과 의자 배치를 다시 했다”고 말했다. 서울의 대형 서점도 북새통이었다. 당초 치러질 수능 전날 교과서와 참고서를 버린 학생들이 일주일 동안 공부할 새 교재를 사러 온 것이다. 서울 종로구 대형 서점 관계자는 “수능 문제집을 찾는 학생들이 갑자기 몰려 급하게 추가 주문을 넣었다”고 밝혔다.○ 특수 노린 성형외과 ‘울상’ 한의원·떡집 ‘반색’ 서울 강남 일대 성형외과들은 수능 직후로 잡혀 있던 수술 예약이 줄줄이 취소돼 당혹스러운 모습이었다. 한 유명 성형외과 관계자는 “수험생들의 사전 예약이 많아 수술방을 다 잡아놨는데 이달 남은 보름간 거의 수술을 못하게 됐다”며 “주말에 잡힌 상담 예약도 모두 취소됐다”고 말했다. 수술 예약을 취소한 수험생 이모 양(18)은 “이번 주 토요일 성형수술을 하려고 했는데 12월에나 할 수 있을 것 같다. 대입 면접 일정에 맞춰 얼굴 부기를 뺄 시간을 벌려고 수능 직후 예약한 건데…. 성형수술도 대학 가서나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떡집과 한의원은 “뜻밖으로 제2의 특수를 맞았다”며 반색했다. 서울 강남의 한 한의원은 “‘총명탕을 일주일 치만 더 타가겠다’는 부모들의 주문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한 떡집도 “이미 당초 예정된 수능날에 떡 주문이 많이 들어왔는데 일주일 뒤로 미뤄져 추가 주문이 계속 들어올 것”이라며 웃었다. 수능 고사장으로 지정된 학교는 이날 모두 휴교했다. 수능은 치러지지 않았지만 고사장 배치표 등 안내판은 그대로였다. 서울 송파구의 한 고교 관계자는 “내일 학생들이 정상 등교하는 대로 고사장 안내판이나 책상 배열을 원래 모습으로 바꿀 계획”이라고 말했다.김예윤 yeah@donga.com·김배중·최지선 기자}

    • 2017-11-17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男간부에 성추행 당할라… 여직원들 ‘회식포비아’

    회식(會食)은 여러 사람이 모여 식사를 하며 친목을 다지는 자리다. 하지만 숱한 사건과 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최근 한샘과 현대카드의 사내 성폭력 논란도 회식이 발단이었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9일 회식에서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당한 직장 여성 10명의 사연을 들어봤다. 회식 코스의 전형이라 할 ‘술자리→노래방→귀갓길’이 모두 성폭력 위험에 노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들은 회식 자리가 직장의 상하관계를 악용한 성폭력 무대로 전락했다며 ‘회식포비아(회식에 대한 공포)’를 호소했다. 건설업체에 갓 입사한 A 씨(26·여)는 4월 사내 체육대회를 앞두고 열린 회식 자리만 떠올리면 치가 떨린다. 남성 상사가 “A 씨가 팬티만 입고 춤추면 응원상이 확실한데 생각 없어?”라고 말했고 남성 동료들은 낄낄대며 웃었다. A 씨는 수치심에 혼자 밖으로 나가 눈물만 쏟았다. 지속적인 성희롱에 A 씨는 9월 퇴사했다. 한 대기업 계열사의 비정규직 B 씨(24·여)는 3월 인사팀장이 부른 회식 자리에 갔다가 강제로 키스를 당했다. 20대 여성 C 씨는 회식 자리마다 아내와의 잠자리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상사 때문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다. 원형탈모증에 걸렸고 최근 퇴사했다. 이 상사는 거래처 사람을 만나면 C 씨의 몸매 이야기를 하며 성희롱을 일삼았다. 항의를 하면 “여자에겐 칭찬”이라는 말만 돌아왔다. 회식 2차 장소로 자주 가는 노래방에서는 친목을 빙자한 성추행이 공공연히 벌어진다. 여직원에게 술을 따르라거나 춤을 춰보라고 하고, ‘디스코 타임’을 빙자해 허리를 감싸는 일은 예사다. 노래방 도우미나 접객여성 취급을 한다. 20대 여성 D 씨는 “상사가 노래를 마칠 때마다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면 분위기를 맞추느라 어쩔 수 없이 안기곤 했다”고 털어놓았다. 회식 후 귀갓길엔 성폭행 불안에 시달린다. 남성 상사가 “밤길이 위험하니까 집에 데려다주겠다”며 택시에 강제로 함께 탄다. “사실 예전부터 좋아하고 있었다”며 몸을 더듬는다. 성추행을 당한 여성들은 회사에서 불이익을 받을까봐 걱정하는 이중고에 시달린다. 직원이 5명인 작은 회사에 입사한 여성 E 씨는 귀갓길에 택시 안에서 성추행을 하려는 회사 대표를 제지했다. 이후 15분만 지각을 해도 급여가 깎이는 등 괴롭힘을 당했다. 최근에는 직장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애매한 말로 성희롱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내가 성희롱 발언을 하는 건 아니고”라면서 “△△ 씨는 옆에서 보면 몸매가 좋다”는 식이다. “듣는 사람이 수치심을 느끼면 성희롱”이라고 반발하면 “사람이 너무 삐뚤어졌다”며 힐난한다. 또 직장에서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면 ‘문제 사원’으로 찍혀 2차 피해를 겪는 경우가 많다. 회사가 문제를 덮으면서 합의하라고 종용하는 경우도 많다. 경찰청에 따르면 직장 내 성폭행 성추행 사건은 2012년 358건에서 지난해 721건으로 매년 늘고 있다. 고소를 해도 성희롱은 현행법상 모욕죄에 해당돼 처벌 수위가 수십만 원의 벌금 정도다. 고소를 당한 남성이 피해 여성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해 진흙탕 싸움으로 끌고 들어가기도 한다. 취재진이 만난 10명의 여성은 모두 “회식 자리에서 젊은 여직원을 남성 상사 옆에 억지로 앉히는 것부터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조동주 djc@donga.com·구특교·김예윤 기자}

    • 2017-11-10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나도 직장 성범죄 피해자”… 한국서도 ‘미투 캠페인’

    “한샘 사건을 보고 용기를 냈습니다.” 가구업체 한샘의 사내 성추문 논란이 불거진 직후 A 씨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린 글에서 이같이 밝혔다. 현대카드 계약직 직원인 A 씨는 한샘 피해자처럼 직장에서 자신이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입사 한 달 만인 5월 소속 부서 팀장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 그는 “회사에 피해 사실을 알렸지만 사적인 일로 치부해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다. 한샘 사건을 알게 된 뒤 어디라도 얘기하고 싶은 마음에 글을 적는다”고 밝혔다. 한샘 성추문 사건의 파문이 커지는 가운데 비슷한 사내 성폭력 피해를 봤다는 직장 여성들의 폭로가 이어지고 있다. 미국 할리우드의 성폭력 폭로 운동 ‘미투(me too·“나도 당했다”라는 뜻) 현상’이 국내에서도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미투는 피해를 당해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계약직이나 신입 직원 사이에서 주로 나타난다. A 씨에 따르면 5월 15일 팀 회식이 끝난 뒤 팀장은 “한잔 더하자”며 A 씨 집에 막무가내로 들어왔다. 이어 몸을 더듬으며 성폭행을 했다는 것이다. A 씨는 당시 만취 상태여서 몸을 가눌 수 없었다고 한다. 사건 직후 A 씨는 회사에 피해 사실을 신고했지만 아무 도움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A 씨는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며 자살 충동이 일었다. 너무 괴로워 사직서를 냈지만 부서장은 단순 실수에 불과한 일이라며 사직서를 찢어버렸다”고 밝혔다. 현대카드 측은 “자체 조사 결과 개인 간 애정 문제로 보였고 수사기관에서도 성폭행 혐의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한 것으로 안다. 회사가 개입할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했다”고 해명했다. 여성들이 주로 이용하는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6일 비슷한 사내 성폭력 경험담이 줄지어 올라왔다. 입사 5년 차라는 한 여성은 신입사원 시절 “남성 상사가 자기 엉덩이를 두드려 달라고 말하면서 귓불을 서슴없이 만졌다. 사회 초년병이라 참아야 되는 줄 알고 문제 제기를 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또 다른 여성은 “인턴 때 남성 대리가 술자리 후 나와 동료를 챙겨준다며 모텔로 데려가 침대에 누인 뒤 내 몸을 만졌다. 동료가 함께 있었기에 가까스로 피했지만 아니었다면 ‘한샘 사건’이 나에게 일어날 뻔했다”고 털어놨다. 해당 게시물에는 ‘나도 같은 경험을 했다’ ‘용기 내줘서 고맙다’는 등 격려성 댓글이 수십 개씩 달렸다. 한샘 성추문 사건과 관련해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1만6000여 명이 ‘재수사 요구’ 청원에 참여했다. 해당 사건 피해자 측은 “추가 증거를 수집해 재수사를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고용노동부는 7일부터 한샘을 대상으로 근로감독에 착수하기로 했다. 고용부 관계자는 “근로감독관 3명을 투입해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을 제대로 했는지, 사건 발생 이후 피해자에 대한 불이익 조치를 정말로 내렸는지 등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불매운동이 확산되는 가운데 한샘의 주가는 6일 2% 넘게 곤두박질쳤다. 이날 코스피 시장에서 한샘 주가는 전날보다 4500원(2.64%) 하락한 16만6000원으로 마감했다.김예윤 yeah@donga.com·김단비·유성열 기자}

    • 2017-11-07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靑 “손님 환대는 우리의 전통” 反트럼프 시위 자제 촉구 메시지

    청와대는 5일 이례적으로 ‘반(反)트럼프’ 시위 자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냈다. 25년 만의 미국 대통령 국빈 방문이 반미 시위로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길까 우려하면서 ‘진보진영’에 “정부를 믿어 달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손님을 환대하는 것은 대대로 이어져 온 우리의 전통이다. 국민 여러분께서 마음을 모아 따뜻하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환영해 달라”고 밝혔다. 박 대변인은 “우리 정부는 트럼프 대통령을 국빈으로 예우해 따뜻하게 맞음으로써 한미관계를 ‘포괄적 동맹’을 넘어 ‘위대한 동맹’으로 가는 결정적 계기로 만들고자 한다. 국민도 정부를 믿고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 ‘위대한 동맹’은 문재인 대통령이 6월 첫 방미 당시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연설에서 한미동맹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등 평화를 이끌어내는 토대로 삼겠다면서 사용한 용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평화체제 구상에 대한 미국의 동의를 이끌어내려는 것이 정부 목표라는 점을 강조하며 반대 시위 자제를 요청한 셈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정부가 열린 경호를 지향하고 있지만 외교적 문제를 만들어선 안 된다. 적어도 트럼프 대통령의 동선을 중심으로 모든 위해 요소를 없애도록 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주말 서울 도심에서는 트럼프 대통령 방한을 반대하는 집회가 잇달아 열렸다. 이날 종로구 세종로공원에서 벌어진 반미 집회(경찰 추산 2000명)는 트럼프 대통령 방한은 반대하지 않지만 전쟁을 우려한다고 주장했다. 시민단체연대회의, 참여연대 등이 주도한 이 집회에서는 “한반도 평화 위협하는 연합훈련 중단하라” 등 북한 주장과 비슷한 구호가 나왔다. 전날 종로구 광화문광장 일대에서는 방한 자체를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다. 민중당, 한국진보연대 등 ‘노(NO) 트럼프 공동행동’이 주최한 것으로 경찰 추산 700명(주최 측 추산 2000명)이 모였다. 당초 주최 측이 집회에 8000명이 참가할 것이라고 신고했던 것에 비해 대폭 줄어든 것이다. 이들은 집회가 끝날 무렵인 오후 6시경 트럼프 대통령 입을 틀어막은 합성사진과 현수막 조각을 말아 고무줄로 묶어 주한 미국대사관 담 너머로 던졌다. ‘NO TRUMP NO WAR’라고 적힌 붉은색 포스터를 명함 크기로 찢어 던지기도 했다. 방한 환영 집회도 열렸다. ‘박근혜 전 대통령 무죄석방 서명운동본부’는 전날 종로구 마로니에공원에서 3000명(경찰 추산)이 참가한 가운데 집회를 열었다. 주최 측은 당초 1만 명 참가 신고를 했었다. 경기 평택시 미군기지 앞에서는 트럼프 대통령 방한일인 7일 찬반 집회가 예정돼 있다. 경찰은 트럼프 대통령이 머무는 7, 8일 서울에 가장 높은 수위인 갑호 비상을 내리고 비상근무에 들어간다. 집회와 시위도 일부 제한되며 트럼프 대통령이 머무는 행사장과 숙소 인근 교통도 통제된다. 문병기 weappon@donga.com·김동혁·김예윤 기자}

    • 2017-11-0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촛불 1년’ 집회는 평화롭게 끝나… 광화문 6만-여의도 7000명 모여

    촛불집회 1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집회와 행진이 28일 서울에서 열렸다. 1년 전 첫 집회 때와 달리 다양한 요구가 봇물처럼 쏟아졌지만 그때처럼 폭력이나 물리적 충돌 없이 평화롭게 진행됐다. 집회는 광화문광장과 여의도 국회 일대 두 곳에 나뉘어 열렸다. 광화문에서는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 기록기념위원회(퇴진행동)가 주최한 ‘촛불은 계속된다’ 집회가 진행됐다. 현장에서는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개헌’ 등 정치개혁을 촉구하는 의견 사이로 ‘성폭행범 공소시효를 늘려 달라’ 같은 요구도 나왔다. 특히 이명박 전 대통령의 다스 실소유주 의혹 수사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광화문광장에는 약 6만 명(주최 측 추산)이 모였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단일 집회로는 가장 많은 숫자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경기 성남시장 등 정치인도 참석했다. 같은 시간, 여의도 국회 주변에서는 ‘촛불파티 2017’이 열렸다. 주최 측 추산 7000여 명이 모였다. 광화문광장과 마찬가지로 ‘적폐청산’을 촉구하는 구호가 이어졌다. 이들은 자유한국당 당사 방향으로 행진했다. 참가자들은 국민체조 리듬에 맞춘 ‘다스 체조’ 등 각종 패러디를 선보이며 이 전 대통령 수사를 요구했다. 촛불집회가 둘로 쪼개져 열린 이유는 퇴진행동의 ‘청와대 행진’ 계획 때문이다. 이를 두고 진보단체 내에서 찬반 의견이 엇갈렸다. 퇴진행동 측은 1년 전 모습을 재현하는 데 무게를 뒀다. 반대 측은 전 정부 인사들이 청와대에 없으니 행진은 과도하다고 주장했다. 논란이 일자 퇴진행동 측은 “공식 행진은 없다”며 논란을 진화했다. 하지만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회원 2500명은 광화문 집회가 끝난 뒤 청운효자동주민센터 방향으로 행진했다. 여의도에서 만난 한 참가자는 “청와대 행진과 반미 구호 등은 촛불 1주년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광화문광장 대신 이곳을 찾았다”고 말했다. 7만 명 가까운 인파가 몰렸지만 광화문과 여의도 모두 이렇다 할 불법 행위는 없었다. 같은 날 오후 서울 덕수궁 대한문과 서울역 등지에서 친박(친박근혜) 단체가 주최한 태극기 집회가 열렸지만 별다른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김예윤 yeah@donga.com·최지선·김배중 기자}

    • 2017-10-30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촛불이 바란건 공정한 사회… 앙갚음으로 흘러선 안돼”

    지난해 10월 2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촛불 3만 개가 켜졌다. 5주 뒤 촛불은 232만 개로 늘어났다. 23차에 걸친 촛불집회는 올 4월 말 마무리됐다. 한 건의 폭력 사태도 없었다. 광장에 모인 1684만8000명(연인원)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촛불 1년, 그들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촛불의 과거보다 미래가 중요 본보는 20∼60대 ‘촛불 시민’ 10명을 만났다. 이들은 지난겨울 평균 5, 6회 광화문광장을 찾았다. 이들은 촛불집회를 ‘일생일대의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최기원 알바노조 대변인(33)은 “세상이 바뀌었다는 생각은 들지만 아직 ‘최저임금을 준수하라’는 구호는 계속되고 있다”며 “힘없는 사람만 희생하지 않는 나라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프리랜서 디자이너 이민주 씨(25·여)는 “정치적 이슈보다 중요한 건 약자를 살리고 돕는 일”이라며 “장애인과 노인, 갑을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이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급격한 변화나 소통 없는 일방통행식 정치에 대한 거리감도 나타냈다. 영화감독 김재수 씨(59)는 경남 거창과 서울을 오가며 4차례 촛불집회에 참석했다. 그는 오랜 기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피해를 현장에서 느꼈다. 촛불이 제기한 문제에 누구보다 공감했다. 하지만 “(적폐 청산을) 자칫 지나치게 서두르거나 보복성으로 흘러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박헌수 시니어노조 위원장(67)도 “한꺼번에 많이 하려다 보면 실수하기 마련”이라며 “국민 전체가 이익을 보는 방향으로 신중히 생각하고, 상식적으로 추진돼야 한다”고 말했다.○ 촛불 통해 성숙해진 한국 사회 지난해 이맘때 최주영 씨(28·여·변호사)는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재학생이었다. 첫 촛불집회는 마침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그는 주말마다 거의 빠짐없이 집회에 참석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남다르게 다가왔던 이유다. 최 씨는 “법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탄핵안 인용’은 법조문에만 있는 줄 알았다”며 “현실이 되는 걸 보니 ‘민주주의란 이런 것이구나’라고 실감했다”고 말했다. 촛불시민들은 헌법재판소가 박 전 대통령 탄핵을 결정한 3월 10일을 가장 기억에 남는 날로 꼽았다. 대구에 사는 주부 신은자 씨(47)는 “대통령 탄핵을 보면서 우리나라에서도 바뀌지 않는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렇게 우리가 지적한 문제들이 앞으로 하나둘 고쳐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간호사 이보람 씨(26·여)는 “병원 내 비정규직 문제를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게 됐다”며 활발해진 ‘소통’을 강조했다. 학원 강사 도민익 씨(41)는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숙의 끝에 공사 재개 결정을 내리고, 이를 국민들이 수용한 것이 우리 사회가 지난해보다 소통한다는 가장 큰 근거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실제 촛불집회는 시민들의 관용, 신뢰, 참여의식, 공동체의식 증진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도묘연 영남대 통일문제연구소 연구원이 전국 20∼60대 남녀 151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도 연구원은 “집회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도 간접적으로 시민성이 증진됐다는 결과가 나왔다”며 “촛불집회가 ‘민주주의 실천교육 프로그램’ 역할을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김동혁 hack@donga.com·구특교·김예윤 기자}

    • 2017-10-2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이영학 사건직후 실종신고 3건 더 있었지만… “출동” 말만 하고 모두 묵살한 경찰

    ‘어금니 아빠’ 이영학 사건 피해자 김모 양(14)의 실종 신고를 접수한 서울 중랑경찰서는 당시 ‘출동하겠다’고 상부에 보고는 했지만 이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긴급성을 요하는 ‘코드1’으로 분류된 사건인데도 신고한 김 양 어머니에게 김 양의 최종 행적조차 물어보지 않았다. 그때 김 양은 이영학 자택 안방에서 수면제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 서울지방경찰청 청문감사담당관실은 25일 이영학 사건 부실 수사 책임을 물어 조희련 중랑서장을 문책성 전보 조치하고 최민호 중랑서 여성청소년과장 등 8명에 대한 징계 절차에 착수했다. 중랑서 여성청소년수사팀은 지난달 30일 오후 11시 20분경 김 양 어머니가 112 신고를 해 출동 지시가 내려졌지만 무전으로 ‘알겠다’고만 답하고 사무실에 계속 앉아 있었다. 중랑서 망우지구대 순찰팀장 등 3명은 김 양 어머니가 딸의 최종 행적을 말했는데도 사실상 무시한 것으로 조사됐다. 실종수사팀은 사건 접수 당시 5명이 근무했고 다른 긴급 현안도 없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수사팀은 이날 4건의 실종 신고를 받았지만 단 한 번도 현장에 출동하지 않았다. 김 양 어머니가 신고한 지 2시간 반 뒤 김모 씨(54·여) 가족이 실종신고를 했지만 역시 수수방관했다. 김 씨는 약 11시간 뒤 강동구 천호대교 남단에서 투신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서울의 실종 수사 담당 경찰 A 씨는 “실종신고 10건 중 7건은 현장에 가지 않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실종 신고자의 90%가 24시간 안에 귀가하는 모습을 수년간 반복적으로 봤기 때문에 ‘실종=단순 가출’이라는 사고가 굳어졌다는 얘기다. 다른 경찰 B 씨는 “미성년자나 여성이 실종됐다는 신고는 상황 판단을 하지 않고 일제히 ‘코드1’으로 분류하다 보니 ‘출동하겠다’고 답하고는 잘 나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실종 사건이 가정폭력과 성폭력을 전담하는 여청수사팀 업무로 분류된 시스템도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서울 관내 31개 경찰서 중 실종수사전담팀을 둔 곳은 8개 서뿐이다. 일선 여청수사팀 경찰 C 씨는 “성폭력 사건을 처리하기도 빠듯한데 언제 귀가할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기 위해 일일이 수색하는 게 우선순위는 아닐 수밖에 없다”며 “실종신고는 24시간 동안 기다려 보고 그때도 귀가하지 않으면 수사를 시작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영학 모친의 사실혼 관계인 배모 씨(59)는 이날 강원 영월군 자택 인근 비닐하우스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배 씨는 이날 며느리이자 이영학 아내 최모 씨(32)를 수년간 성폭행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을 예정이었다. 배 씨 옷 주머니에서는 A4 용지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 형사들께 부탁드리는데 누명을 벗겨 달라. 지금까지 도와주신 분들께 죄송하고 형님한테 미안하다’고 적은 자필 유서가 발견됐다. 이영학을 도와 김 양 시신을 유기한 혐의를 받고 있는 딸 이모 양(14)은 이날 사체 유기 혐의 등으로 서울북부지검에 의해 구속영장이 재청구됐다.김예윤 yeah@donga.com·이지훈 / 영월=이인모 기자}

    • 2017-10-2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목줄 잡아라” “안 문다”… 곳곳 실랑이

    “변한 게 없네요.” 23일 경기 고양시의 대형 복합쇼핑몰 스타필드에서 만난 주부 이모 씨(34)가 불쾌한 듯 말했다. 이 씨의 시선은 쇼핑몰을 돌아다니는 반려견과 주인을 향해 있었다. 스타필드는 반려견 동반이 가능하다. 이날 반려견 대부분은 목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불편해하는 쇼핑객이 많았다. 이 씨는 “목줄만 한다고 능사는 아니다”라며 “개가 아이한테 가까이 다가와 깜짝 놀랐는데, 정작 주인은 ‘물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바라만 봤다”고 말했다. 평일 낮 시간이지만 이곳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반려견을 볼 수 있었다. 대부분 목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려견의 목줄을 풀어놓는 모습도 쉽게 눈에 띄었다. 한 중년 남성은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안고 있던 갈색 푸들 한 마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목줄은 풀어져 있었다. 푸들은 곧바로 근처 반려견 출입금지 매장으로 달려갔다. 스타필드는 반려견 동반이 가능하지만 매장에 따라 출입을 제한한 곳도 있다. 푸들이 들어가자 매장에 있던 손님들은 “당장 데리고 나가라”며 개 주인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반려견을 데리고 온 황모 씨(58)는 간이판매대에서 옷을 고르다 잠시 바닥에 목줄을 내려놓았다. 개가 목줄을 끌고 돌아다니자 곧바로 이곳저곳에서 “목줄 잡아라”는 외침이 들렸다. 유명 한식당 ‘한일관’ 대표가 ‘슈퍼주니어’ 멤버 최시원 씨의 프렌치불도그에게 물린 뒤 사망한 사건 후 공공장소에서 반려견을 둘러싼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곳곳에서 일반인과 개 주인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다. 주부들이 주로 찾는 인터넷 카페에는 “쇼핑몰 복도에서 ‘영역 표시’를 하는 모습을 봤다” “끈을 짧게 해달라고 요구했다가 개 주인으로부터 ‘레이저 눈빛’을 받았다” 등 일부 개 주인의 안일한 모습을 비판하는 내용이 이어지고 있다. 주부 윤모 씨(36)는 사건 이후 외출 때 아들에게 두꺼운 양말을 신게 한다. 공원 등지에서 만나는 반려견이 아들에게 다가와 발을 핥는 경우가 많아서다. 윤 씨는 “지금껏 물릴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하고 지켜만 봤는데 사건 후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정부는 내년 3월부터 ‘개파라치’ 제도를 도입한다. 공공장소에서 목줄을 채우지 않은 반려견과 그 주인을 신고하면 포상금을 지급하는 제도다. 신고를 하려면 개 주인의 이름 등 인적사항도 파악해야 한다. 이웃이 아닌 경우 정보를 알기 어렵다. 벌써부터 유명무실할 것이라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신고포상금제 시행에 앞서 반려견 인식표 부착이 하루빨리 뿌리내려야 한다는 의견이다. 인식표에는 주인의 이름과 전화번호, 동물등록번호 등이 명시돼 있다. 이형석 우송대 동물보호학과 교수는 “인식표가 없으면 주인을 알기 어렵다”며 “지금도 인식표 미부착 시 주인에게 과태료 20만 원을 부과하지만 이 역시 단속이 안 돼 지키지 않는 주인이 많다”고 말했다. 이웅종 연암대 동물보호계열 교수는 “개파라치 제도가 정착하려면 주인을 쉽게 특정할 수 있도록 외출 시 반드시 인식표를 부착하도록 해야 한다”며 “동물병원이나 지방자치단체에서 반려견 관련 교육 및 홍보를 확대해 인식표 부착에 대한 의식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고양=신규진 newjin@donga.com / 최지선·김예윤 기자}

    • 2017-10-2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사람 문 개는 또 물어… 목줄 의존말고 교정훈련 꼭 받아야

    “디지털 도어록을 물어뜯고 나갈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23일 오전 경기 김포시의 한 반려견 훈련소. 자신의 반려견 ‘망고’를 만난 김모 씨(38)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4개월 전 상황을 설명했다. 망고는 몸무게 약 50kg인 대형견 ‘카네코르소’. 이탈리아 원산으로 대표적인 사냥견 중 하나다. 망고는 문을 부수고 나간 후 이웃 할머니에게 달려들어 상처를 입혀 훈련소에 들어왔다. 사냥견이나 경비견은 반려견이 돼도 특유의 공격성 때문에 낯선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 종종 있다. 주인들은 예상치 못한 돌발행위에 당황할 수밖에 없다.○ 사고 수습보다 예방이 중요 32개월 된 망고는 김 씨의 눈에 ‘아기’였다. 하지만 망고는 김 씨가 잠시 외출한 사이 도어록을 물어뜯고 나가 사고를 쳤다. 피해 할머니는 2주 동안 치료를 받았다. 치료비를 내고 이사를 가겠다고 했지만 합의가 안 됐다. 김 씨가 “개를 훈련시설로 보내겠다”고 약속하고서야 마무리됐다. 망고는 훈련소 입소 후 산책 훈련, 경계심을 낮추는 훈련, 입마개에 익숙해지는 훈련 등을 받았다. 김 씨는 “(사람을 물까 봐) 불안했지만 망고가 입마개를 싫어할 것 같아 안 했다. 내가 현명했으면 사고도, 도망치듯 이사 갈 일도 없었을 것”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의 개들은 망고처럼 사고 전력이 있는 ‘문제견’이다. 사람을 물어 주인이 재판에 넘어갈 뻔한 개도 있다. 하지만 “내 개도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해 사고 전에 훈련소를 찾은 주인은 드물다. 윤재하 리더스독 훈련소장(36)은 “한번 사람을 공격해 상해를 입힌 개는 또 사람을 물 가능성이 높다. 여기 개들도 대부분 한 번 이상 사람을 물었다”고 말했다. 소형견도 안심하면 안 된다. 경기 고양시의 한 반려견 훈련소에는 약 20마리가 문제 행동을 고치기 위해 들어와 있다. 이 중 80%가 몰티즈 같은 소형견이다. 훈련사는 “소형견일수록 오히려 주인이 잘못 가르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수개월에 걸친 훈련 막바지에는 개 주인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준비돼 있다. 자신의 개를 정확히 알아야 제대로 관리할 수 있어서다. 하지만 대부분의 개 주인은 “바쁘다”는 이유로 참여하지 않는다. 윤 소장은 “산책 중 타인을 향해 공격적 성향을 보인다면 행동 교정이 반드시 필요한데 가볍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꼭 훈련소를 올 필요는 없지만 집에서라도 반드시 훈련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개파라치’ 뜨면 사고 줄어들까 ‘펫테러’를 일으킨 반려견은 평소 무는 행동을 주인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한일관 대표의 정강이를 문 프렌치불도그의 주인인 가수 겸 배우 최시원 씨는 서울지방경찰청 경찰홍보단에서 의무경찰 복무 당시 개에게 얼굴을 물려 한 달가량 홍보단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윤 소장은 “문제의 개는 승강기가 열리자마자 달려들었다. 이전에도 공격적 성향을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목줄과 입마개를 반드시 착용해야 하는 5종 맹견의 범위를 넓히기로 했다. 또 안전조치를 하지 않은 반려견과 개 주인을 사진으로 찍어 신고하면 포상금을 지급하는 ‘개파라치’ 제도도 내년 3월 도입된다. 개 주인이 부과해야 하는 과태료의 40% 수준을 받을 수 있다. 우송대 애완동물학부 이형석 교수는 “사람을 무는 개의 행동은 일종의 범죄인 교화처럼 전문가로부터 교정을 받아야 한다. 과태료 부과와 함께 교정 교육 이수를 의무화해야 한다”고 말했다.김포=김단비 kubee08@donga.com / 고양=김예윤 / 최지선 기자}

    • 2017-10-2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112 ‘코드1’ 내렸는데… 관할 경찰 “가출로 생각”

    “우리 딸 전화기가 꺼져 있어요. 여태 집에 안 들어왔는데 이런 적은 처음이거든요.” 지난달 30일 오후 11시 15분 여중생 김모 양(14)의 어머니는 112에 딸의 ‘미귀가’를 신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김 양이 ‘어금니 아빠’ 이영학(35)의 집에 있을 때다. 당시 김 양은 수면제 탓에 잠들었지만 아직 살아있었다. 신고를 접수한 서울지방경찰청 112종합상황실은 처리 내역서에 ‘코드1’로 분류했다. 실종자의 생명과 신체에 위험이 닥칠 가능성이 있어 긴급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코드1을 부여한다. 이 경우 최단시간에 출동해 수색해야 한다. 112상황실에서는 해당 사안이 긴박하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경찰의 조치와 움직임은 코드1과는 거리가 멀었다. 경찰 매뉴얼에 따르면 실종신고 접수 후 최우선 조치는 실종자의 ‘최종 행적’ 확인이다. 실종 직전 머물렀던 장소와 함께 있었던 인물이 특정돼야 수색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기본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김 양의 어머니는 112에 신고하고 약 30분 후 서울 중랑구 망우지구대를 찾았다. 김 양 어머니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경찰관에게 딸이 마지막으로 만난 게 이모 양(이영학의 딸)이라고 말했다. 내가 ‘얘한테 전화해서 물어보겠다’고 말한 뒤 이 양과 직접 2분 18초 동안 통화했다”고 주장했다. 사실이라면 경찰은 김 양 최종 행적의 핵심 단서를 놓친 셈이다. 이에 경찰은 “당시 지구대 주변이 시끄러워 이 양의 이름을 들었다는 사람이 없다. 신고자가 이 양에 대해 경찰에게 말한 시간은 1일 오후 9시경”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7일 더불어민주당 이재정 의원이 공개한 당시 지구대 폐쇄회로(CC)TV 화면을 살펴보면 경찰 해명과 거리가 있다. 김 양 어머니가 지구대에 머물렀던 약 50분 동안 크게 어수선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김 양 어머니는 담당 경찰관과 구석진 곳에서 대화를 나눠 다른 민원인과 가까이 있지도 않았다. 이후에도 김 양의 최종 행적 파악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민주당 박남춘 의원에 따르면 실종자 기초 조사를 위한 프로파일링 조서에는 최종 행적을 적는 부분이 비어 있다. 발생 개요란에 ‘미귀가자는 평소 가출 경력이 없는 자로 친구들을 만나러 나간 후 귀가하지 않은 것으로, 현재 휴대전화 전원이 꺼져 있는 상태’라고 기록하고도 적극적으로 행적을 파악하지 않은 것이다. 서울 중랑경찰서 관계자는 “추석 연휴에 친구 집에서 자고 올 수도 있기 때문에 단순 가출 사건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김 양의 통신기록도 확인하지 않았다. 김 양의 통화기록 확인은 사망 후 하루가 더 지난 2일에야 가족 협조로 이뤄졌다. 김 양의 최종 행적 파악이 늦어지면서 결과적으로 김 양은 부모의 실종신고 후 13시간가량 살아 있다가 이영학에게 살해됐다. 17일 서울지방경찰청에서 열린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위원들은 경찰의 부실수사를 질타했다. 김정훈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초동 수사 부실과 인수인계 미흡, 공조체제 미비 등으로 이런 결과가 나와 송구스럽다”며 “진상조사를 통해 책임을 가리고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이지훈 easyhoon@donga.com·김예윤 기자}

    • 2017-10-1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딸, 심리적 종속… 살인행위조차 수용

    “다 사정이 있을 거예요. 우리 아버지 그런 사람 아니에요.” 이영학의 딸 이모 양(14)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기색이 엿보였다. 12일 경찰에서 “아빠가 친구를 죽이려고 데려온 것 알고 있느냐”는 프로파일러 질문에 대답하는 순간이었다. 이어 “아빠에게 맞은 적 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프로파일러가 아버지 범행을 추궁하자 딸은 “그런 적 없고 굉장히 좋은 사람”이라고 잘라 말했다. 13일 경찰이 밝힌 이 양의 조사 결과 중 일부다. 이번 조사에 투입된 프로파일러 6명이 분석한 결과 이 씨와 이 양의 관계는 상식을 뛰어넘었다. 이 양은 친구 김모 양을 유인해 수면제를 먹이고 시신 유기에 가담하는 등 아버지의 범행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경찰은 “이 양은 아버지가 없으면 ‘내가 죽는다’고 생각할 정도로 강력한 심리적 종속 관계에 있다”고 설명했다. 이 양은 “○○이를 불러라”는 이 씨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이 씨는 수면제를 넣은 음료 두 병을 딸에게 건넸다. “한 병을 ○○이에게 먹여라”는 새로운 지시가 이어졌다. 이 양의 마음에 ‘아빠랑 잘하기로 약속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키지도 않은 수면제 음료 반 병과 ‘감기약’ 2알을 챙겨 친구에게 건넸다. ‘감기약’은 사실 신경안정제였다. 또 친구의 시신을 아버지와 함께 야산에 버리는 걸 도우면서 김 양을 애타게 찾는 가족과 친구에게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딸이 아버지를 두려워해 범행에 가담한 건 아니라는 게 경찰의 분석이다. 경찰 관계자는 “(이 양은) 아버지를 정말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며 “아버지에 대한 어떤 나쁜 이야기도 하는 걸 싫어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 양이 이영학의 공범이 된 원인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아버지의 유전병을 물려받았고 △친구 대신 같은 질병을 앓는 아버지에게 의지했으며 △아버지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한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이 양에게) 지능적 장애가 있는 건 아니나 기본적으로 사고가 왜곡된 상태”라며 “아버지가 하는 일이라면 비상식적이어도 의심 없이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김예윤 yeah@donga.com·이지훈 기자}

    • 2017-10-1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