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엽

조종엽 차장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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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종엽 차장입니다.

jjj@donga.com

취재분야

2025-11-25~2025-12-25
문학/출판25%
역사21%
정치일반14%
사회일반11%
문화 일반7%
칼럼7%
정당4%
검찰-법원판결4%
인사일반4%
산업3%
  • 대우재단, ‘미래로 사업’ 통해 학술성과 공유

     “만보산 사건(1931년 7월 중국 지린 성에서 벌어진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의 충돌) 이후 조선에서는 중국인 노동자 배척 사건이 일어났어요. 이후에도 일제는 중국인을 희생양 삼아 조선인의 불만을 해소시키려 한 것으로 보여요.”  ‘이주노동자, 그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왔나’의 저자인 김태웅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22일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학자와의 만남’ 행사에서 “수많은 이주노동자가 국내에 살고 있는 오늘날에도 이 같은 사건이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대우재단이 개최한 이날 행사에는 대우재단의 ‘미래로 클럽’ 회원들이 객석을 가득 채웠다. 대우재단은 학계의 연구 성과를 대중과 공유하는 ‘미래로 사업’을 시작한다고 최근 밝혔다. 1978년 설립된 대우재단은 1980년부터 대우학술총서와 대우고전총서 660여 권을 발간하는 등 기초학술연구를 지원해 왔다. 또 재단은 독자와 지식인들이 함께 책을 읽고 온라인에서 토론하는 지식 커뮤니티 ‘필담’()을 이달 초 만들었으며, ‘포스트휴먼사이언스 총서’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총서’ 등도 해마다 20권씩 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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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양반가서도 재테크 했다

     대(代)가 끊기지 않고 조상에 대한 제사가 계속되는 것이 지상 과제였던 조선의 양반가에 어느 정도 이상의 재산은 필수다. 그러나 여러 명의 자녀가 재산을 균분 상속했기에 후대로 내려갈수록 재산 규모는 당연하게 작아질 가능성이 크다. 실제 조선 후기 수많은 양반이 영세한 소농으로 변모하기도 했다.  최근 출간된 문숙자 서울대 법학연구소 책임연구원(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의 ‘조선 양반가의 치산(治産)과 가계경영’(한국학중앙연구원)을 중심으로 양반가의 ‘재테크’를 알아봤다. ○ 팽창형 경영―집중적 토지 매매 이 책에 따르면 공격적으로 재산을 불린 집안은 연동(蓮洞) 해남 윤씨 집안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윤효정(1476∼1543)의 후손들로 윤선도(1587∼1671) 윤두서(1668∼1715) 등을 배출한 명문이면서 ‘국부(國富·나라에서 손꼽히는 부자)’로 불렸던 집안이다. 이 집안은 특정 지역의 토지를 집중적으로 사는 방식으로 재산을 늘렸다. 남아 있는 토지 매매 문서 305점 중 301점이 해남 지역 내의 땅을 거래한 기록이다. 대부분 종가가 있는 해남읍 남쪽의 현산면과 화산면에 집중됐다. 또 16∼18세기에는 이 지역의 해택(海澤·갯벌)을 대규모로 개간하기도 했다. 문 연구원은 “토지를 상속할 때도 쪼개지 않고 지역 단위로 물려줘 재산으로서의 가치를 유지했다”며 “거주지와 멀어 관리가 어려운 땅을 파는 이매(移買)도 많았다”고 말했다. 전근대 시대 토지와 함께 주요 재산이었던 노비의 관리도 꼼꼼했다. 윤선도가 한글로 쓴 ‘노비성책, 신유년(1621년)’에는 ‘(노비로부터) 선물(膳物)은 참깨 닷 되씩 받아라’ ‘늙은 종들로 공물(貢物)이 면제된 이도 선물은 받아라’ 등의 내용이 나온다. 물론 이 집안은 노비와 지역민 구휼에 관한 미담도 적지 않다.○ 안정형 경영―상속인들의 공동 재산 관리 영해(寧海) 재령 이씨 집안은 16세기 경상도 영해에 살기 시작한 이애(1480∼1561)의 후손이다. 노비 750여 명을 소유한 대부호에서 16세기를 전후해 중소지주로 변모했지만 이후에도 재지사족(在地士族·향촌을 지배하던 양반층)으로서 안정적인 가계 운영을 했다. 임진왜란 때는 노비를 반값에 사들이면서 줄어든 가산을 다시 늘리기도 했다. 재령 이씨 집안도 노비를 가족이 공동 관리하는 등 철저히 관리했다. 도망 노비를 추쇄(推刷·조사하고 찾는 일)한 상속인에게는 그 노비를 쓸 권리를 줘 추쇄를 독려했다.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진주의 재령 이씨 집안이 했던 대규모 목축업이나 임산업은 근대적 경영과도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조선 후기에도 장자(長子) 단독 상속은 없다? 문 연구원은 통념과 달리 조선 후기에도 장자 단독 상속이 이뤄졌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조선 전기에는 자녀들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시는 윤회봉사(輪廻奉祀)와 함께 균분 상속이 이뤄졌지만 후기 종법(宗法)적 가족제도가 도입되면서 상속방식도 변했다고 알려져 있다. 문 연구원은 “제사에 필요한 재산을 종손에게 모아주면서 재산이 집중되는 경향은 확인할 수 있지만 이 재산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기 때문에 상속분과 성격이 다르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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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과학기술, 그 신비를 벗기다

     “자연, 그리고 자연의 법칙들은 어둠에 가려 숨어 있었다. 신이 ‘뉴턴이 있으라’고 말하자 세상이 빛났다.” 아이작 뉴턴의 묘비에 쓰인 추모사다. 뉴턴의 업적에 걸맞은 표현이기는 하지만 과학자를 지나치게 신비화하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도 있다. 보통 사람들에게 과학은 현실 사회와는 전혀 다른 논리로 작동하는, 나와는 동떨어진 것으로 인식된다. 책은 과학기술 역시 사회적 네트워크 속에서 만들어지고 발전하는 ‘사회적 현상’의 일부일 뿐이라고 바라보면서 이 같은 통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서울대 자연대 교수로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을 연구하는 저자는 과학적 사실은 명징하다는 통념에 반론을 제기한다. 일례로 물이 정확히 100도에서 끓는다는 것도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 갑상샘암의 수술 치료를 두고 의사와 역학 전문가들의 의견이 다른 것처럼 전문가 집단도 저마다의 패러다임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과학기술의 불확실성에 대한 서술은 꽤 놀랍다. 법정에서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인식되는 DNA 검사는 알려진 것보다 오류 확률이 크다고 한다. 2007∼2010년 미국에서는 부모들이 ‘백신 접종 때문에 자녀들이 자폐증에 걸렸다’는 소송을 냈다가 패소했는데, 저자는 이를 두고 “확실한 것이 논쟁에서 이긴 것이 아니라 논쟁에서 이긴 지식이 확실한 것으로 믿어지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렇다고 과학기술이 사상누각에 불과한 것은 아니라고 책은 말한다. 오히려 이처럼 완전하지 않은 토대 위에서도 과학기술은 잘 발전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현대 과학기술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네트워크’ 개념은 이 책만으로는 손에 딱 잡히지 않지만 소개된 수많은 흥미로운 사례들은 충분히 흥미롭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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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후기 ‘경영형 부농’은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 후기 양안(量案·토지대장)을 재검토한 결과 당시 광작(廣作)을 통해 자본주의적 농업 경영을 지향한 이른바 ‘경영형 부농(富農)’의 등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연구가 나왔다. 10여 년간 양안을 연구해 온 박노욱 박사는 최근 책 ‘조선후기 양안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경인문화사)에서 “기존 연구는 양안에 나오는 ‘기주(起主)’와 ‘시작(時作)’ 항목을 각각 지주와 소작인으로 봤지만 연구 결과 둘 모두 해당 전답의 경작자를 뜻한다”며 “이를 바탕으로 양안을 다시 분석하면 당시 대규모 소작 경영인(경영형 부농)의 존재를 발견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주장은 학계의 일반적인 해석과는 사뭇 다른 것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책은 ‘기주’ 항목에 나오는 인명은 해당 전답을 이전에 경작했던 소작인을 뜻한다고 했다. 박 박사는 “기존처럼 ‘기주’를 토지 소유자로 보고 양안을 분석하면 자신 소유 토지를 남에게 경작하도록 하고, 자신은 바로 옆 필지의 남의 토지를 소작하는 관행이 있었다는 결과가 나온다”며 “이는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책은 또 양안에서 ‘주(主)’와 ‘시작’의 인명이 같은 경우가 잦은데, 주를 토지 소유자로 보면 자신의 전답을 경작하는 지주를 소작자로 칭하는 것이어서 모순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기록은 이전 경작자(주)와 현 경작자(시작)가 동일인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박 박사는 “또 양안의 ‘동인(同人)’이라는 표현은 바로 앞에 기록된 사람이 아니라 동일한 성격의 앞 칸, 즉 앞의 기주나 앞의 시작을 지칭한 것”이라며 “이를 바탕으로 양안을 다시 분석하면 경작 규모가 커도 십여 마지기 정도에 불과하고 대규모 경작자는 거의 없었다”고 주장했다. 경영형 부농설은 1960, 70년대 김용섭 전 연세대 교수 등이 전라도 고부군 용동궁 전답 양안 등을 분석해 제창한 학설이다. 조선 후기 임노동자를 고용한 광작(廣作)이 이뤄졌고 시장 출하를 목적으로 상업 작물이 대규모로 재배되는 등 자본주의의 싹이 텄다는 ‘자본주의 맹아론’을 뒷받침한다. 이후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이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도 여전히 담겨 있는 통설이다. 책은 양안의 작성 목적이 토지 소유주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세금을 걷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정구복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최근 한국고문서학회 연구발표회에서 책을 논평하고 “책에 따르면 조선 후기 농촌 사회구조를 설명하는 정설로 거의 수용된 경영형 부농설이 통계 처리가 완전히 잘못돼 나온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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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부 총잡이들’ 잡은 ‘대한 의열단’

    올 추석 연휴 극장가에서는 의열단이 돌아온 벤허나 서부 총잡이들의 추격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의열단을 다룬 영화 ‘밀정’은 14∼17일 추석 연휴 나흘간 관객 290만6492명을 모으면서 1위를 기록했다. 밀정은 7일 개봉 이후 연휴 전인 13일까지 일주일 동안 267만여 명의 관객이 봤지만 그 뒤 나흘 동안 54만∼85만여 명이 들어 17일 개봉 11일 만에 누적 관객 수가 500만 명을 넘어섰다(558만4485명). 천만 영화 ‘변호인’(13일)과 ‘국제시장’(15일)보다 흥행 속도가 빠르다. 연휴 마지막 날인 18일에는 누적 600만 명을 넘었다. 2, 3위는 연휴 첫날인 14일 함께 개봉한 고전 리메이크 영화 ‘벤허’(72만5404명)와 ‘매그니피센트7’(55만947명)이 각각 차지했으나 1위와의 격차는 꽤 컸다. 찰턴 헤스턴 주연의 1959년 영화 벤허와 율 브리너 등이 나온 서부극 ‘황야의 7인’을 다시 만든 두 작품은 중장년층의 향수를 불렀다. 강우석 감독과 배우 차승원의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연휴 전까지 밀정에 이어 2위였다가 4위(40만9891명)로 밀려났다. 이 밖에 어린이와 함께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 ‘드림 쏭’, 영화 ‘거울 나라의 앨리스’ 등이 뒤를 이었다. 안방극장에서는 KBS, MBC, SBS 등 지상파들이 추석 파일럿 프로그램을 10여 편 선보였지만 ‘대체로 볼만한 것이 적었다’는 평이 나오는 가운데 노래 실력을 겨루는 프로그램이 지난 설에 이어 여전히 인기를 모았다. 시청률 조사회사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16일 오후 방송된 KBS2 TV의 ‘노래싸움―승부’ 2부의 시청률(전국 가구)이 추석 파일럿 중 유일하게 10.6%를 기록했다. 연예인들이 음악 감독과 조를 짜 트레이닝을 받은 뒤 노래 대결을 펼쳤는데 배우 등 가수가 아닌 연예인들의 숨은 실력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밖에 배우 이영애가 등장하며 화제를 모은 SBS ‘부르스타’(16일 오후)는 1, 2부 시청률이 5.2%, 6.9%를 기록했다. 노래를 통해 스타를 만나보는 음악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으로 이영애의 쌍둥이 자녀 육아기 등이 시선을 끌었다. 스타들이 지역 주민으로부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명령을 받아 미션을 수행하는 MBC ‘톡 쏘는 사이’(16일 오후)는 1, 2부 시청률 5.1%, 7.2%였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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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북선, 노 젓는 2층서도 화포 쐈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이 3층뿐 아니라 노를 젓는 2층에서도 화포를 발사할 수 있는 구조였다는 주장이 나왔다. 3차원(3D) 컴퓨터그래픽 시뮬레이션 기법으로 거북선의 형태를 연구해 온 홍순구 순천향대 디지털애니메이션학과 교수는 최근 ‘임진왜란 거북선의 전·후진 노 젓기와 화포 사용을 위한 방패의 구조’라는 논문에서 “거북선이 적진 속에 파고들어 주변의 왜선을 효과적으로 파괴하려면 2층에서도 화포로 쏴 왜선의 옆구리를 맞혔을 것”이라고 밝혔다. 3층에서만 화포를 쏘면 먼 거리의 왜선은 잘 맞힐 수 있지만 왜선이 근접한 상황에서는 공격이 제한된다는 게 홍 교수의 주장이다. 그동안 거북선은 2층 설이 통설이었으나 3층 설도 새롭게 힘을 얻고 있다. 논문은 또 ‘거북선이 전후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나는 것처럼 빨랐다’는 선조실록의 기사에 따라 후진이 가능한 거북선 내부 모형도 새로 제시했다. 2005년에 멍에와 멍에 사이에 노의 회전축을 위치시키면 전진·후진을 모두 할 수 있다는 연구가 나왔는데 이 모델은 노 때문에 멍에 사이에 화포를 놓을 수 없기 때문에 2층 화포설이 불가능하다는 게 홍 교수의 주장이다. 하지만 홍 교수는 화포가 멍에와 멍에 사이가 아니라 멍에 바로 위에 있어 노와 겹치는 현상 없이 포를 쏠 수 있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홍 교수는 “멍에 바로 위에 포 구멍이 있었고 바퀴 달린 동거(童車·작은 수레)에 실린 화포를 앞뒤로 움직이며 포를 쐈다”고 말했다. 논문은 ‘조형미디어학’ 논문집 8월호에 실렸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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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내 앞에 놓인 수많은 선택은 의지-결정 가능케 하는 것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2013년) 중 독재정권 치하에서 혁명의 대열에 합류한 청년 의사 아마데우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악명 높은 비밀경찰을 치료할 것인가 말 것인가. 결국 경찰의 목숨을 구한 아마데우는 동지들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힌다. 머리 속 혈관 질환 탓에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자신의 죽음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아마데우는 자신의 자유와 올바른 선택이 무엇인지 항상 고민하며 살았던 인물일 것이다. 자유 의지에 관해 묻는 이 책의 저자는 독일의 철학자로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원작소설 저자와 같은 이다. 책은 아마데우처럼 항상 선택 앞에 서는 우리가 자유로운 의지로 삶을 살아내기 위한 지침을 보여주려 한다. 저자는 책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장편 ‘죄와 벌’에 나오는, 전당포 노파를 죽인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에 대한 가상의 재판을 벌인다. “제 과거 역사가 저를 노파를 죽이도록 숙고하게 만들었고, 오랜 숙고 끝에 노파를 죽이겠다는 의지가 생긴 겁니다.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제겐 없었습니다. 저는 살인을 원해야 했던 겁니다.”(라스콜리니코프) “인간은 그러한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존재요. 당신은 다른 가능성을 숙고하고 원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소. 당신의 자유로운 의지로 사람을 죽였으니 유죄요.”(재판관) 재판관이 라스콜리니코프의 항변을 논파하는 가운데 우리가 처한 상황, 제약, 조건은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자유로운 의지와 결정을 가능케 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선택 앞에서 우리는 숙고를 해야 하고,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내적 간격’과 다양한 결과를 상상해 보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실 좀 뻔한 주제일 수도 있지만 철학책치고 비교적 대중적으로 쓰인 게 장점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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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이별 장소는 서대문 밖 ‘반송방’

    노래 ‘이별의 부산정거장’이나 ‘대전 부르스’에서 알 수 있듯 근대 한국인에게 이별을 상징하는 대표적 장소는 기차역이다. 조선시대는 어땠을까? 김지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전통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은 최근 서울학연구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18세기 문화·예술공간으로서의 반송방’에서 “조선시대 이별의 장소는 서울 돈의문(서대문) 밖에 있던 반송방(盤松坊)”이라고 밝혔다. 발표문에 따르면 서대문 밖과 현 독립문 부근인 한양 반송방은 한성부 산하의 ‘성중오부(城中五部)’에 속했다. 이곳에 경기도를 관할하는 경기감영, 말을 빌려주던 고마청(雇馬廳), 중국 사신을 영접했던 모화관 등이 있었다. 반송방이라는 이름은 모화관 근처에 그늘이 수십 보에 이르는 반송(盤松)이 조선 초기까지 있었다는 데서 나왔는데, 그 앞 연못에 연꽃을 가꾸었다고 한다. 반송방은 한양에서 의주에 이르는 의주로의 시작점으로 중국으로 가는 사신단이 지인들과 작별하는 장소였다. 또한 바로 북쪽의 무악재도 경기 북부와 평안도로 가는 길목이어서 수령이나 목사, 관찰사로 제수돼 떠나는 이들의 이별 공간이었다. “벗과의 이별에 원유가를 부르는데(故人別我歌遠遊)/어찌 은주발 한 쌍으로 전송할 수 있을까(何以送之雙銀)….” 조선 전기 문신 서거정(1420∼1488)이 이별을 노래한 시 ‘반송송객(盤松送客)’이다. 서거정은 ‘한도십영(漢都十詠)’을 통해 한양의 명소 열 곳을 뽑고 흥취를 노래했는데 그중 한 곳으로 반송방을 꼽았다. 김지현 전임연구원은 “반송방이 10경에 꼽힌 건 뛰어난 경관보다는 이별을 대표하는 장소였기 때문이었고, 이후에도 많은 시에서 이별의 상징으로 등장한다”며 “18세기 이후에는 당파를 초월해 시인 묵객들이 시회(詩會)를 즐기는 문화예술의 공간으로 변모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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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효하지 않은 왜간장 이제 그만 먹을때 됐죠”

    “맛이 좋은 감장(甘醬) 한 사발을 체에 걸러서 즙을 취하고 밀기울 4홉을 섞는다. 푸른 오이를 씻고 물기를 말린 뒤 여기에 섞어서 항아리에 담고 말똥 속에 묻어서 27일을 두었다가 쓴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규경(1788∼1856)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나오는 여름철 ‘즙장(汁醬)’ 만드는 법이다. “즙장은 집장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은 거의 사라졌어요. 통상 물을 타 걸쭉한 된장에 배추 같은 부재료를 넣은 뒤 항아리를 땡볕에 두고 삭혀 만드는데, 새콤하면서도 장의 독특한 감칠맛이 있지요. 보리밥하고 먹으면 참 맛있죠.” 장에 대한 고금의 기록을 망라한 책 ‘장보(醬譜)―동아시아 장의 역사와 계보’(따비)를 최근 펴낸 이한창 전 동덕여대 연구교수(88)는 지난달 30일 인터뷰에서 “즙장은 잘 다듬어 현대화되면 좋았을 텐데, 이제는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며 안타까워했다. 이 책은 1000쪽이 넘어 ‘베고 자도’ 좋을 만한 분량이다. 고서 사전 의약 구황 제조 동남아 편으로 나누어 주례(周禮)부터 조선왕조실록까지 한중일의 고서와 논문 등 351편에서 장에 대한 기록을 뽑았다. 장에 대한 기록이 그렇게 많을까 싶지만 19세기 중엽에 조선에서 나온 저자 미상의 ‘군학회등(群學會騰)’에만 장 담그는 법이 28가지나 나온다. ‘장의 나라’를 자처하지만 막상 현대에 즐겨 먹는 장은 된장 간장 고추장 청국장 쌈장 정도인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장은 놀랄 만큼 다채롭다. 이 전 교수는 1959년부터 국내의 한 간장 회사에서 연구부장으로 일하며 양조간장을 개발했다. 이후 대학에서 발효학을 가르치다가 은퇴하고 2000년경 이 책을 구상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 규장각을 비롯해 전국의 도서관을 다니며 10년 동안 각종 자료를 1000편 이상 모았다. 장 문화는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발달한 것이어서 한글과 한문, 일본어 자료를 고어(古語)까지 독해하는 게 특히 어려웠다. 이 전 교수는 “장은 동아시아 식문화의 중심”이라며 “그러나 막상 장의 역사가 담긴 문헌을 정리해 놓은 책이 없는 것을 보고 집필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실록에서도 장 관련 기록을 적지 않게 발견했다. 태조 때부터 장 관련 기록이 등장한다. 이 전 교수는 특히 ‘궁중에 장을 담당하는 부서(시전장·試典醬)가 있었다’(정조실록) ‘장이 군복을 염색하는 염료(포염장·布染醬)로 쓰였다’(영조실록) ‘뜸을 뜨는 데(장지구·醬之灸) 쓰였다’(숙종실록) 등의 기록에 주목했다. 그는 “우리 문헌에는 중국 일본에서 쓰이는 장유(醬油)라는 단어가 전혀 안 나온다”며 “한국의 장 문화는 독자적으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그는 염산으로 단백질을 분해한 뒤 가성소다를 넣어 만드는,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산분해간장’(왜간장)이 우리 간장 시장의 상당 부분을 점유하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1950, 60년대까지만 해도 집에서 담근 간장은 비위생적이고, 비과학적이라고들 생각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아주 잘못된 생각이지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발효를 하지 않은 간장은 장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제 그만 먹을 때가 됐어요.”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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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단위부터 금속까지…과학의 뼈대를 탐구하다

    저유가 시대지만 주유소 휘발유 값은 여전히 1L에 1300∼2000원가량이고, 우리나라가 주로 수입하는 원유인 중동산 두바이유 가격은 최근 배럴당 45달러 안팎이다. 휘발유와 원유의 가격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다면 단위를 통일해야 한다. 1배럴이 158.9L이니 원유가는 1L에 약 0.28달러(약 313원)다. 세금과 부가가치가 더해져 휘발유는 원유보다 L당 1000원 이상 가격이 비싸진 것이다. ‘별걸 다 재는 단위 이야기’는 일본의 중학교 교사가 학생들이 과학에 흥미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쓴 책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각종 단위가 어디서 유래됐고 어떤 양을 표시하는 것인지 친절하게 설명한다. 가게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의 단위인 ‘쿼터’나 ‘파인트’는 어떤 단위일까. 미국에서 쓰이는 도량형 단위계인 ‘야드파운드법’에서는 액체의 부피를 ‘갤런’으로 잰다. 갤런은 라틴어로 물이 든 양동이를 의미하는 ‘galleta’에서 나왔다. 미국의 1갤런은 3.785L로 쿼터는 4분의 1갤런(946mL), 파인트는 8분의 1갤런(473mL)이다. 과거에는 권력자의 몸이 길이 단위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지을 때 사용된 단위는 큐빗으로 파라오의 팔꿈치에서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다. 영국에서 생긴 길이 단위 ‘야드’는 헨리 1세의 몸이 기준이었다. 그는 “내가 팔을 옆으로 쭉 뻗었을 때 코끝에서 손끝까지의 길이를 1야드로 정한다”고 공포했다. 현대의 1야드는 미터 기준으로 0.9144m로 정의한다. 책에 나오는 단위의 의미를 따라가다 보면 흥미로운 점이 적지 않다. 튀김이 올라간 덮밥 한 그릇의 열량은 약 731Cal(73만1000cal)다. 1cal가 물 1g의 온도를 1도 올리는 데 필요한 열량이니 덮밥 한 그릇의 열량은 물 10kg을 0도에서 73.1도로 데우는 데 쓰인 열량과 같다. 저자의 “내가 거래하는 은행 보통예금 이율이 0.03%에 불과하니 차라리 100만분의 1을 뜻하는 ‘ppm’ 단위를 사용해 300ppm이라고 쓰자”는 주장에는 웃음이 나오고, 축구공의 질량이나 돈가스의 열량을 표시하면서 굳이 괄호 안에 ‘시합 전’ ‘안심’ 기준이라고 밝혀 놓은 것은 일본인다운 꼼꼼함으로 보인다. ‘세상의 금속’도 일본인 못지않은 철저함을 자랑하는 독일인 저널리스트가 썼다. 주기율표의 금속 원소에서 스마트폰 제조에 사용되는 희토류 금속까지 금속에 관한 이모저모를 담았다. 저자는 광부와 대장장이는 농업과 무관한 일 가운데 처음으로 전일제 직업이 됐다고 말한다. 45억 년 전 무거운 금속들이 지구의 핵 속으로 가라앉았는데도 지각에 금속이 많은 이유는 수십억 년 전 우주에서 떨어진 운석과 유성 때문이라고 한다. 두 권 모두 내용이 장절별로 독립적이어서 틈날 때마다 흥미로운 부분만 조금씩 읽어도 좋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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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후기 제작된 ‘문수사 삼불좌상’ 보물 된다

    문화재청은 17세기 불교 조각의 기준이 되는 ‘고창 문수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사진) 등 문화재 9건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고 30일 밝혔다. 문수사 삼불좌상은 석가여래를 중앙에 두고 좌우에 동방과 서방의 정토를 다스리는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배치된 불상이다. 1654년 벽암각성(碧巖覺性·1575∼1660)의 문도들이 주축이 돼 조각승 15명이 제작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다. 문화재청은 “통통한 양감이 강조된 인간적인 얼굴에 단순하고 기백 넘치는 주름 표현으로 조선 후기 불교조각이 추구한 담백한 미의식을 잘 담아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도 보물로 지정 예고됐다. 흙으로 형태를 만든 뒤 삼베를 입히고, 칠을 바르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한 뒤 조각한 불상으로 8세기 후반∼10세기 전반에 만들어졌다. 문화재청은 이 밖에 ‘고창 문수사 목조지장보살좌상 및 시왕상’ ‘양산 금조총 출토 유물’ ‘부산 복천동 출토 금동관’ ‘정조 어찰첩’ ‘조선경국전’ ‘묘법연화경 권5∼7’ 등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이 문화재들은 30일간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고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물로 지정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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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국 세계사 교육, 탈국가-탈서구 지구사연구 경향

    지구화가 날로 심화되는 한편 주요 2개국(G2) 사이의 갈등과 긴장의 한복판에 놓인 한국의 세계사 교육은 어떤 상황일까. 서양사학회는 26일 ‘한국의 세계사 교육과 교과서’ 학술대회를 열었다. 이날 김원수 서울교대 교수는 ‘역사들의 전구적(全球的) 전환과 세계사의 과제’라는 발표문에서 국가 중심의 기존 역사학과 교육의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며 그 방법론으로 ‘지구사’ 연구에 주목했다. 김 교수는 “국가가 아니라 지구를 틀로, 국경을 초월한 ‘트랜스내셔널’한 연관성을 다루는 ‘글로벌 히스토리(Global history)’ 연구가 1990년대 이후 활발하다”며 “이는 기존 역사 연구의 중심에 있던 유럽을 상대화하고, (대상이 되는) 시간과 공간을 넓히고, 더욱 다양한 주제를 검토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국가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게 목적이었던 근대 역사 교육을 넘어서야 한다는 얘기다. 박혜정 경기대 초빙교수는 미국과 독일의 세계사 교육 혁신을 분석했다. 그는 미국 4개 주의 세계사 교육 표준을 분석한 발표문에서 뉴욕 주의 경우 탈(脫)서구중심주의적 성향이 뚜렷하다고 했다. 혁명, 민족주의, 산업화, 제국주의 등을 서술하면서 남미 독립운동과 멕시코 혁명, 중국의 신해혁명, 일본의 메이지 유신 등 중남미와 동아시아의 정치혁명까지 함께 다루도록 권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미국은 ‘지구사’적 연구 성과를 적극 수용하고 세계사를 의무 이수 과목으로 바꿔나가고 있으며 독일도 작센 주가 동유럽사를 적극 서술하도록 하는 등 세계사 교육이 변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한경 교사(경기 부천 중원고)는 지난해 확정 고시된 ‘2015 역사과 교육과정’(2017년 교육 현장 적용)으로 나타날 수 있는 중학교 세계사 교육의 문제점을 짚었다. 그는 “새 교육 과정이 인도사와 이슬람사를 삭제함에 따라 우리나라의 불교 수용 과정이나 동서 문화 교류를 가르치는 데 무리가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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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일에 만난 사람]적을 베는 무술은 잊어라, 전통무예는 마음을 닦는 수련

    “휴대전화인 갤럭시1하고 갤럭시7은 기능이 천지 차이지요?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를 보세요. 시대 배경이 1988년, 1994년, 1997년으로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소품은 크게 다르지요. 그런데 우리 사극의 무구(武具)를 보면 고려 500년, 조선 500년이 똑같아요. 정통 사극에는 교육적인 역할도 있는 건데, 아주 잘못된 일입니다.” 최근 책 ‘조선의 무인은 어떻게 싸웠을까?―무지와 오해로 얼룩진 사극 속 전통 무예’(인물과사상사)를 낸 최형국 씨(40·한국전통무예연구소장)는 개탄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는 20여 년 동안 조선 정조 때 정리된 무예 24기와 전통 맨손 무술인 택견을 수련한 무예인이자 전통 무예사로 국내 1호 박사학위를 딴 ‘문무겸장’이다. 자신이 운영하는 경기 수원시의 무예 전수관에서 만난 그는 작지만 단단한 체구에 날래 보였다. 무인다운 풍모 뒤에는 아르바이트로 점철됐던 대학 생활과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에만 5수를 했던 ‘흑역사’가 있었다. 2005년 봄은 그에게 유난히 잔인했다. 벌써 2년 동안 네 번 박사과정에서 낙방했다. 학사, 석사 과정에서 모두 경영학을 공부한 사람이 역사학 박사과정에 진학하는 건 무리였을까. 수원대 경영학과 94학번인 그는 같은 대학 석사과정에서 마케팅을 공부한 뒤 2003년부터 봄가을마다 각기 다른 대학의 경영, 관광, 체육 전공 대학원 박사과정에 차례로 지원했지만 모두 떨어졌다. 네 번째로 역사 전공에 지원했지만 관련 전공도, 같은 학교 출신도 아닌 그를 서울의 한 명문대는 받아주지 않았다. ‘이제 그만하라는 뜻인가. 내가 공부를 하겠다는데 세상은 왜 기회를 주지 않나.’ 근본적인 회의가 밀려왔다. 생계도 문제였다. 당시 10년 동안 무예를 수련했지만 무예를 전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선배는 드물었다. ‘전통 무예는 굶어 죽기 딱 좋은 일’이라는 이도 있었다. 무예를 시범하는 행사 아르바이트를 뛰면 갑옷이나 칼 등 무구를 유지할 돈을 제하고 5만 원 정도 남았다. ‘그래도 나는 내 몸 하나만 챙기면 되니 한 달 생활비 25만 원이면 살 수 있다.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전통 무예를 수련한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최 씨는 대학 1학년 때 ‘탈패’ 동아리에 가입해 호남 동쪽 지역 농악 가락의 하나인 필봉 가락을 치고, 서울 송파산대놀이의 취바리를 연기했다. 탈춤을 추다가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은 채 수업에 들어가고, 여름에는 짚신을 신는 괴짜 학생이었다. 선배 손에 이끌려 전통 무예 동아리 ‘경당’을 만난 뒤로는 학교에 칼을 들고 돌아다니는 기행이 하나 추가됐다. 그는 진검을 처음 들어봤을 때의 그 무게감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환도를 사려면 60만 원이 필요했다. 쌀 배달 아르바이트가 일당이 셌다. 쌀포대를 지고 연립주택 4층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젊은 허리도 휘청휘청했다. 또 새벽에 벼룩신문을 돌리면 3만5000원을 벌었다. 에버랜드에서 풍물을 치면 조금 더 벌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산 106cm짜리 칼에 검명을 새겼다. ‘청도(靑刀)’였다. 평범한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도시로 유학온 그에게 ‘내핍 경제’는 익숙했다. 군대에 다녀와서는 한동안 자기 방 없이 살았다. 방값을 아끼기 위해 친구들 3명과 함께 방을 쓰거나 그마저도 마땅찮을 때는 한동안 학교 내 자치 공간에서 몰래 잤다. 어떤 겨울에는 후배에게 ‘이 겨울만 나겠다. 나를 멀리하지 말라’며 석 달을 얹혀 지냈다. 어찌어찌 대학을 졸업하고 2001년 경영학 석사과정에 입학했지만 생계와 무예, 공부 사이의 갈등은 계속됐다. 좋아하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조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때였다. 학부 시절인 1999년 경기 수원 화성에서 열린 ‘정조시대 전통무예전’이라는 행사에서 무예 24기 공연을 연출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무예로 먹고살아 보자. 근처에는 마침 수원 화성이 있지 않은가. 내가 수련한 무예 24기는 화성을 지키던 장용영 군사들이 익혔던 것이다. 화성에 무예 24기라는 콘텐츠를 결합해 관광 자원으로 만들면 인기가 있지 않을까.’ 2002년 월드컵 경기 식전 행사를 그가 연출한 무예 24기 공연이 장식했다. 무예로 ‘전통무예를 활용한 관광마케팅 전략’이라는 석사 논문도 썼다. 그가 연출하는 화성 신풍루 앞 무예 시범은 2003년 주말 상설로, 2004년부터는 평일 상설로 확대됐다. 2003년에는 ‘365일 중 360일’을 승마장에서 말을 탔다. 마상무예를 복원하기 위해서였다. 태풍이 오던 날 말을 타러 나가자 관리인이 ‘미친 ×’이라며 “죽든 말든 내가 책임진다”는 각서를 쓰고 타라고 했다. “마상무예는 말의 역할이 60∼70%입니다. 무기를 들고 타니 보통 말은 놀라거나 자빠져 나가지요. 먼저 말을 순치해야 해요. 옛날에 말을 어떻게 훈련시켰나 사료를 찾아보니 달랑 한 줄 나와요. 그렇게 1년여 말을 타고 수련생들을 가르쳐 2004년 마상무예 오픈 시범을 했지요.” 대학원을 졸업했지만 본격적으로 무예 전수와 공연만 할 것인지, 아니면 박사과정에서 관련 공부를 더 할 것인지는 여전히 고민이었다. 체육학을 공부하려다가 ‘무예와 전쟁의 역사를 이해해야 무예를 가능한 한 올바른 형태로 복원할 수 있겠다’ 싶었다. 대학원에 계속 떨어지는 동안 무예서를 독학했다. 한학을 익힌 수원의 선생들에게 모르는 부분을 한 줄 한 줄 물었다. ‘5수생’인 그를 받아준 곳은 중앙대 역사학과다. “막상 합격하니 좋기는 한데 더 두렵더군요. 전공 수업을 듣는데 혼자 공부했다고는 하지만 제가 역사에 완전히 깡통이잖아요. 학사 석사에서 역사를 공부한 이들을 따라가기에는 턱도 없었죠.” 그때부터 ‘논문을 씹어 먹듯이’ 공부만 했다. 하루에 무예, 군사, 역사 관련 논문 4, 5편을 읽었다. “1970년대 쓰인 논문은 토씨만 빼고 다 한자예요. 단어도 되게 어려워요. ‘포폄(褒貶·옳고 그름, 선악을 판단해 결정함)’이라는 단어를 공부하면서 처음 봤죠. 자전의 설명이 무슨 뜻인지 몰라 국어사전을 또 보기도 했어요. 박사 7년은 정말 ‘암흑기’였죠. 하하.” 2011년 가을 박사 논문 ‘조선 후기 기병의 마상무예 연구’가 통과됐다. 시기별로 달라지는 마상무예와 정치 사회에 대한 것이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실전성이 강조돼 둥근 표적을 쏘던 기사(騎射)가 짚 인형을 쏘는 것으로 바뀌죠. 또 전투마가 대량으로 필요해지니 말 관련 의학서가 나오고 마의(馬醫)가 군영에 배치되는가 하면 좋은 말을 청나라에서 수입해 왔죠.” 전통 무예를 전공한 역사학 박사는 최 씨 뒤로도 찾아보기가 극히 힘들다. 박사과정에 있으면서 오래전 지방 풍물패 전수장에서 만났던 여성과 결혼도 했다. 화성 행궁에서 올린 결혼식에서는 무예 24기 시범단이 칼과 창을 휘두르며 축하 시범을 했다. 시범단은 수원화성운영재단, 수원문화재단 소속을 전전하다가 지난해 수원시립으로 전환되면서 생활도 안정됐다. “조선이 무예를 천시했다는 건 일제 식민사관의 핵심코드로, 잘못된 인식입니다. 양반 자체가 문반과 무반을 가리키는 말이잖아요. 지금까지는 정치사와 문인 위주로 연구되면서 무예와 무인에 대한 연구는 소홀했어요. 전통문화를 균형 있게 이해하려면 무인의 역사에 주목해야 합니다.” 최 씨는 역사와 무예에 관해 ‘조선 무사’를 비롯해 6권의 책을 냈다. 공저를 더하면 9권이다. 사극과 영화 각각 서너 편, 다큐멘터리 10편 이상에 무예, 군사 분야에 대해 조언했다. 올 초 세워진 해군사관학교의 이순신 장군 동상의 갑옷과 무기에 대해 조언했고, 경남 통영에 새로 세워지는 장군 동상도 고증할 예정이다. 그에 따르면 드라마에서는 태조 이성계가 날이 곧은 환도를 쓰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날이 곧은 환도는 삼국시대에 쓰였고, 조선시대에는 곡선으로 휜 환도가 사용됐다. 사극에 나오는 무기와 무예는 왜 오류가 많을까. “제작진에 조언하면 그때는 알았다고들 해요. 한데 그게 실제 소도구 담당에게는 전달이 안 돼요. 그러다가 막상 ‘쪽대본’과 촬영시간에 쫓기면 ‘그냥 그것 가지고 찍어’라고 하지요. 그러다 보니 고려 갑옷을 조선 중기 무인들이 입는 이른바 ‘갑옷 돌려쓰기’가 벌어지는 거지요.” 최 씨는 조선왕조실록 기존 번역본도 무예에 관한 오역이 적지 않다고 한다. “편곤(鞭棍)으로 짚 인형을 때리는 무예를 편추(鞭芻)라고 해요. 편곤은 도리깨와 비슷한 무기인데 ‘채찍 편’자만 보고, 이를 ‘채찍으로 짚 인형을 때리는 무예’라고 번역했습니다. 안타깝죠.” 그는 우리 전통 무예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가 크다고 했다. 전통 무예는 ‘우리 방식으로 몸을 이해하는 최고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는 국궁(國弓)에서 쓰이는 ‘발이부중(發而不中)이면 반구저기(反求諸己)’라는 말을 예로 들었다. 활을 쏘아서 맞히지 못했으면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는 뜻이다. 남 탓 하지 말고 자신의 내면을 더 갖추라는 얘기다. “전통 무예는 자신의 마음을 닦는 인격 완성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소위 ‘신체에 대한 군사화’가 이뤄집니다. 학교에서 5무도라고 해서 사격 유도 검도 총검술 등 군사체육을 가르쳤지요. 그렇게 왜곡된 무예는 요즘에는 서양식 체육이 대체해 ‘경쟁을 통한 선의의 리더십’을 가르치지요.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우리 전통의 몸에 대한 인식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합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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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분노 살인’… 왜 평범한 사람이 惡이 되는가

    책의 원제는 ‘고잉 포스털(Going Postal)’이다. 이 단어는 1986년 이후 한동안 미국에서 ‘격분하다’라는 뜻으로 쓰였다. 1986년 우체국 직원 패트릭 셰릴이 분노한 채 총기 난사 사건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우체국에서만 집배원들의 난사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기 때문이다. 총기 난사 사건은 살인자 개인의 문제에서 연원한 것으로 치부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우체국에서만 살인이 일어났다면 다른 배경이 있는 게 아닐까. 저자는 그것이 ‘1970년 우체국 재조직법’이라고 본다. 미국의 우체국은 공기업으로 집배원에게 안정적인 직장이었지만 이 법 이후 이윤을 기반으로 운영되면서 대규모 구조조정을 했다. 집배원들은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가중된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살인자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곳’이 된 직장에서 극단적인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1989년에는 인쇄공 웨스베커가 이 같은 ‘분노 살인’을 저지른다. 그 역시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라 맡은 일을 잘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웨스베커는 힘든 업무를 10년 넘게 하면서 스트레스를 호소했지만 회사는 묵묵부답이었다. 그가 업무 전환 문제를 중재위에 제소한 뒤에는 임금 40%를 삭감했다. 동료들은 그를 괴롭혔다. 이 같은 일을 겪으며 평범한 사람이 살인자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살인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이뤄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2003년 7, 8월 동안 미국에선 직장 내 ‘분노 공격’ 사건으로 25명 이상이 죽었고, 17명이 다쳤는데 살인자들은 무작위로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대부분 자신을 괴롭힌 이들이나 회사 간부를 표적으로 삼았다고 한다. “난 정신이상이 아니야. … 줄곧 난 조롱과 증오의 대상이었고, 얻어맞으며 살았어. … 이건 순전히 너무 괴로워 몸부림치며 말하는 거야.” 미국 미시시피 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분노 살인을 저지른 학생의 말이다. 1990년대 초 이후 총격 사건은 백인 중산층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로 번진다. 2005년 정보당국이 범인인 학생들의 프로필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우등생과 문제아, 괴짜와 인기가 많은 학생, 성격이 천하태평이었던 아이와 반사회성을 보였던 아이가 마구 뒤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 가해자들은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했고, ‘학교는 지옥’이었다. 1999년 콜럼바인고교 총기 난사 사건을 일으킨 에릭과 딜런에 대해 나치 추종, 약물중독, 마피아를 비롯해 다양한 추정이 나왔다. 이들은 그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학생들이었다. 전교생이 이들을 게이라고 놀려대면서 일상적으로 폭력을 행사했지만 교사를 포함해 아무도 그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게 잘못이었다. 살인, 더구나 총기 난사 같은 대량 살인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살인자들을 악마화하지 말고 사건이 발생한 구조적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접근 방식이다. 저자가 원인으로 지목하는 소득 양극화와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확대, 정리해고, 교육 현장에서 무한경쟁 등은 한국과 다르지 않다. 한국에서도 ‘묻지 마 살인’이 일어나면 개인 성격의 문제나 불우함 등이 부각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 무고한 피해자들을 겨누던 그들의 잘못된 칼끝이 실제 겨눴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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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 80주년 “당시 부지기수로 지웠다”

    “동아일보가 일장기를 말소한 건 항다반(恒茶飯)으로 부지기수다.” ‘일장기 말소’를 주도한 이길용 전 동아일보 기자(1950년 납북)가 1947년 쓴 회고 글에는 과장이 없었다. 동아일보는 1936년 8월 25일자에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으로 세계를 제패하고도 일장기를 단 채 시상대에 올라가야 했던 손기정 선생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웠다. 일장기 말소 80주년을 맞아 사건이 벌어지기 2개월 전부터 발간된 동아일보 지면을 분석해 보니 일장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잉크를 떨어뜨린 듯 얼룩이 졌거나, 트리밍(trimming)을 통해 잘라낸 것으로 보이는 사진이 여럿 발견됐다.  ▼ 일장기 나온 부분 잘라내고… 다른 사진으로 슬쩍 가려 ▼“세상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의 일장기 말소 사건이 이길용의 짓으로 꾸며진 것만 알고 있다. (그러나) 사내의 사시라고 할까, 전통이라고 할까, 방침이 일장기를 되도록은 아니 실었다. 우리는 도무지 싣지 않을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길용 동아일보 기자가 ‘신문기자 수첩’(1948년 발간)에 실은 글 ‘세기적 승리와 민족적 의분의 충격-소위 일장기 말살 사건’의 일부다. 그는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이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숱하게 있었던 일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이 글에서 “지방이건 서울이건 신문지에 게재해야 할 무슨 건물의 낙성식이나 무슨 공사의 준공식이나, 얼른 말하자면 지방면으로는 면소니 군청이니 또는 주재소니 등의 사진에는 반드시 일장기를 정면에 교차해 다는데, 이것을 지우고 실리기는 부지기수다”라고 설명했다.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 80주년을 맞아 취재팀이 살펴본 당시 신문지면의 사진들은 이 기자의 회고와 다르지 않았다. 1936년 6월 25일자부터 일장기 말소 사건 전인 8월 24일자까지 두 달간의 동아일보 지면을 살펴봤다. 그 결과 일장기를 인위적으로 지웠거나 가린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 여러 장 발견됐다. 우선 일장기가 나온 부분을 다른 사진으로 가리는 방법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 1936년 7월 29일자 조간 5면에는 강원 통천군 고저읍의 항구 준공식 사진이 실렸다. 이 항구가 총독부의 주요 공사였던 점과 준공식장 중앙의 장식 모양을 고려하면 당연히 일장기가 위쪽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해당 부분을 묘향산 동룡굴 탐방단 사진이 덮고 있다. 이 밖에 7월 14일자 사리원시민대회 사진 등도 일장기가 있을 만한 상단이 같은 방식으로 잘려 있다. 8월 16일자를 보면 일장기가 다른 사진으로 가려진 게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당일자 5면에는 선천보성여학교 음악단 안동현 공연 사진이 실렸는데 이 역시 일장기가 있을 만한 단상 상단 중앙을 위쪽 사진이 부자연스러운 형태로 덮고 있다. 위쪽 사진은 진남포 소년육상경기대회 입장식 사진인데 아래쪽의 빈 운동장 바닥을 이례적으로 살려 놓았다. 무언가로 일장기를 지운 듯한 사진도 발견됐다. 7월 29일자 항구 준공식 사진 아래의 유치원 개원식 사진에는 건물 정면에 일장기가 ‘X’자 모양으로 가로질러 걸려 있다. 적어도 오른쪽 깃발은 일장기의 동그라미 모양이 보일 법한데 윤곽이 뭉개져 보이지 않는다. 또 6월 30일자에 실린 행사 사진은 단상 상단 일장기가 걸려 있을 부분이 마치 잉크를 떨어뜨린 듯 검게 물들어 있다. 고의로 해당 부분을 보이지 않게 만든 것처럼 보인다. 분석 대상인 두 달 치 동아일보에서 일장기가 드러난 사진은 약 6장이었다. 하지만 원거리에서 촬영된 해수욕장, 행사장의 일장기로 작심하고 찾아봐야 식별할 수 있는 정도였다. 점에 가깝게 나온 것도 있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시상대에 오른 일본인 선수의 8월 23일자 사진은 비교적 잘 보였고, 한눈에 보이는 일장기는 8월 20일자 하단 광고에 그려진 것뿐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조간 8면, 석간 4면(때로 8면)을 발행했고, 각 면별로 여러 장의 사진이 실렸다. 운동경기대회, 음악회, 재봉 자수 강습회, 학교 창립 기념식, 강좌, 시민대회 등을 비롯해 각종 행사 사진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는 상당수 행사 자리에 일장기가 걸려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처럼 일장기 사진이 적게 나타난 것은 사진 촬영 시부터 아예 일장기를 프레임 안에 넣지 않았거나, 트리밍해 보이지 않도록 처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원 사진의 화질, 인쇄 시 동판의 상태를 비롯해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어 일장기가 보이지 않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며 “그러나 이길용 기자의 회고와 현진건 동아일보 사회부장을 비롯한 당시 편집국 인사들의 면면과 분위기로 보아 가능하면 일장기를 지면에서 보이지 않게 했다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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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기정 선생과 함께 지내고 계실 것”

    “아버지(이길용 전 동아일보 기자)가 ‘대표 선발전에서 우리끼리 싸우지 말고, 일본 대표선수를 어떻게 견제할 것인지 대책을 세우라’고 했다고 손기정 선생이 생전에 말씀하셨어요.” 일장기 말소를 주도한 이길용 동아일보 기자의 3남인 이태영 씨(75·대한언론인회 감사·사진)는 19일 인터뷰에서 손 선생이 아버지를 회고하며 했던 말을 전했다. 이 씨는 아버지와 손 선생의 인연 덕에 손 선생과 가까이 지냈다. 손 선생은 이 씨에게 “이길용 기자는 선수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말을 자주 하셨고, 기자 이전에 애국지사로 존경했다”고 했다. 이길용 기자는 남만주철도회사 경성관리국에서 근무하던 1920년 반일 격문을 배포하다 발각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뒤에 동아일보 사장이 되는 고하 송진우 선생을 옥중에서 만난 인연으로 1921년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일장기 말소로 강제해직됐다가 1945년 동아일보 복간 뒤 재입사했다. 이 씨는 6·25전쟁 전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현 일민미술관)에 아버지를 만나러 가족과 가던 기억이 선하다고 했다. “제가 삐거덕거리던 동아일보 건물 계단을 올라가면 아버지가 밝게 웃으며 점심 값을 주시곤 하셨죠.” 그러나 아버지는 1950년 7월 납북됐다. 이 씨는 납북자가족회에서 일하며 아버지의 소식을 알아보려 했지만 아직도 정확한 사망 경위를 모른다. 당시 함께 납북됐다 도망쳐 나온 황신덕 여사(전 추계학원 이사장)로부터 “서대문형무소에서 북측으로 떠날 때는 같이 있었는데 평양에 도착해 보니 안 보이더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북한군이 평양에서 후퇴할 때 대동강변에서 자행된 집단 처형 와중에 돌아가셨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이 씨는 1995년 돌아가신 어머니를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통일동산 경모공원에 모셨다. 임진강에서 헤어진 두 분의 영혼이 혹시라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자신은 아버지를 비롯해 여러 인사들이 전쟁 당시 납북될 때 지나갔던 서울 구파발의 ‘납북길’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산다. 이 씨의 소원은 유해가 없어 묘를 쓰지 못한, 아버지의 뜻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는 것이다.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옥고를 치렀고 또 납북 전 잠시 감금됐던 서대문형무소(현 서대문 독립공원)에 비석을 세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아버지가 배재학당을 졸업했으니 서소문의 배재공원도 좋고요. 지금 손 선생과 아버지의 영혼은 함께 계시지 않을까요?”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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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밤낮이 뒤바뀐 탓? 올림픽 시청률 저조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의 중계방송 시청률이 예전 올림픽에 비해 상당히 저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시청률 조사회사 닐슨코리아의 최근 자료(전국)에 따르면 이번 올림픽에서는 지상파 3사의 시청률을 합해 30%를 넘긴 경기가 별로 없었고, 20%를 넘긴 경기도 많지 않았다. 합산 시청률 30%를 넘은 경기는 양궁 여자 개인 16강전과 축구 남자 8강전뿐이었다. 최미선이 러시아의 인나 스테파노바를 꺾은 양궁 여자 개인전 16강 경기가 재방송을 포함해 36.0%의 시청률을 보였고, 장혜진이 북한 강은주를 이기고 8강에 진출한 경기가 31.0%였다. 온두라스와 치른 축구 남자 8강전은 30.5%였다. 이에 따라 중계방송 평균 시청률이 한 자릿수에 머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이는 평균 시청률이 30%를 넘었던 2000년 시드니 올림픽(34.2%), 2004년 아테네 올림픽(31.5%), 2008년 베이징 올림픽(32.0%) 등에 견줘 한참 낮다. 시차가 12시간이어서 주요 경기가 심야와 새벽에 열렸고 메달 획득도 부진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한 방송광고업계 관계자는 “지상파 3사가 지불하는 중계권료가 440억 원인데, 광고 수입은 절반도 안 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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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바다 역사에도 눈 돌릴때”… 역사학회 25일 해양 학술대회

    최근 남중국해 등 바다를 둘러싼 갈등이 세계 곳곳에서 고조되는 가운데 바다의 역사에 관한 학술대회가 열린다. 역사학회는 25일 서울여대 50주년기념관 국제회의실에서 학술대회 ‘해양과 역사-경계를 넘는 상상력’을 연다. 강진아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발표문 ‘근대 아시아 해양과 과국적(跨國的) 상인 디아스포라의 형성’에서 19세기 중국의 개항장을 중심으로 활동한 서구의 회사들인 ‘양행(洋行)’과 중국에서 세계로 뻗어나간 광둥(廣東) 화상(華商)의 성격이 다르지 않다고 조명한다. 또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독도동해연구실장은 발표문 ‘근대 서양인이 바라본 한국의 영토와 해양’에서 간도와 독도에 관한 서양인들의 기록을 일괄한다. 이수열 국제해양문제연구소 교수는 ‘동아시아 해역 경제사와 일본의 근대’를 통해 일본 사학계의 한 조류인 동아시아 해역 경제사의 위치를 분석한다. 이 밖에 ‘근대 대서양 세계의 형성: 해양무역과 플랜테이션’(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1480년 예루살렘 순례 여행’(남종국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바다로 보는 한국사’(강봉룡 목포대 사학과 교수) 등이 발표될 예정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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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96세의 현역 철학자 “늙는 게 잘못은 아니잖소”

    3·1운동 즈음 태어난 사람이 쓴 새 책을 보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다. 1920년생인 저자는 중학교 3학년 때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를 자퇴했고, 대학을 졸업하면서는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가는 문제를 두고 절망하기도 했다. 연세대 명예교수로 1960, 70년대 여러 수필을 냈던 철학계 1세대 교육자다. 뭐, 101세로 침을 놓으며 환자를 보는 구당 김남수 옹을 생각하면 저자의 나이가 많다고 놀랄 일도 아니다. 책은 자신이 다니는 수영장의 최고령 회원이고, 하루에 50분은 걷고, 평소 버스와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저자가 낸 새 수필이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나이가 적어도 80대다. 지난해 가을 서울 영등포구 63빌딩의 한 식당에서 80세 전후의 노인 여러 명이 또 다른 노인에게 절을 하는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저자의 제자들이 은사에게 절을 한 것이다. 저자는 ‘나에게 시한부 인생이 주어진다면 그 남은 시간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한다. 젊었을 때는 삶의 시간적 단위가 길어 20, 30년의 계획을 세우지만 50고개를 넘기면 10여 년의 설계를 하고, 다시 세월이 흘러 70대가 되면 10년의 계획도 가능할까 싶어지고, 자신은 계획이 2, 3년으로 짧아졌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도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은 것은 여전하다. 저자는 사진 기술을 배워서 좋아하는 구름을 사진으로 찍어 남기고 싶다고 한다. 저자는 “늙는 것은 내 잘못은 아니다. 가만히 있어도 세월은 흐르게 돼 있다. 그런데 사회는 그 늙음을 바라지 않는다”고 꼬집는다. 수없이 지인의 죽음을 마주했을 저자다. 배우자를 잃고 혼자 남은 괴로움이나 벗을 잃은 슬픔을 저자는 담담하게 마주하고 이겨낸다. 90세가 넘으면서는 자신을 위해 남기고 싶은 것은 다 없어지고 더 많은 사람에게 더 큰 사랑을 베풀 수 있었으면 감사하겠다는 마음만 남았다고 한다. 저자는 “인간은 죽음을 전제로 하는 삶의 가치와 의미를 살피는 점이 다른 생명체와 다르다”고 말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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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의 눈/조종엽]강제징용자 恨 언제까지 외면할건가

    71주년 광복절인 15일, 좋지 않은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몰라 차일피일 미루다 뒤늦게 전화를 걸었다. “아유, 아유, 아유…. 딱해라, 우리 오빠….” 박남조 할머니(83·충북 충주시)는 전화기 너머에서 울먹였다. 할머니의 오빠 박태일 씨(1927년생)는 1944년 관동군으로 끌려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일제 패망 뒤 소련의 포로가 돼 시베리아 크라스노야르스크의 수용소에서 1947년 12월 6일 사망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8·15 기획으로 강제동원 뒤 잊혀진 피해자를 보도하면서 지난달 말 크라스노야르스크 매장지를 찾았지만 박 씨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출발 전 만난 할머니의 소망은 안타깝게도 이뤄지지 않았다. “오늘 마음이 더 썰렁해요, 8·15라…. 아이고, 거기까지 가서 못 찾고 오면 어떡해. 정부에서 찾아주면 좋겠는데….” 기자가 할 수 있는 말은 정부가 나서면 꼭 연락드리겠다는 것뿐이었다. 일본 정부는 현지에 묻힌 자국민 포로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까. 크라스노야르스크 시청 측의 기록을 줄이면 이렇다. “1994년 8월 일본 정부 관계자가 묘지를 방문했다. 1996년 일본 정부가 매장지를 조사하자는 청원서를 내 발굴이 시작됐다. 1998년 일본 정부가 매장지를 조사해 니콜라옙스크 묘지에서 유해를 찾았고, 화장해 일본으로 가져가서 도쿄 지도리가후치(무명용사 묘역)에 안장했다. 2000년 유족회 대표단이 방문해 묘지 3군데에 위령비를 세웠다. 2002년 사쿠라(벚나무) 묘목 110개를 기증했다. …” 여러 차례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도 있었다. 위령비에는 ‘준공 일본국 정부’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러시아 사할린에서 발견된 억류 한인 관련 새 명부를 보도한 뒤 황당한 일도 생겼다. 행정자치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이 “언론에 개인정보를 준 게 아니냐”며 명부를 찾아낸 연구자를 추궁한 모양이다. 기사에 밝힌 개인정보라면 경남 밀양군 출신 강제동원 피해자 김성동 씨 한 명인데, 이는 국가기록원에서 누구나 열람할 수 있는 ‘왜정 시 피징용자 명부’를 보고 쓴 것이다. ‘지원단’이 역사의 진실을 밝히겠다는 연구자에게 지원을 더 하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발목을 잡으려는 건 최근 정부의 미미한 대응을 감추고 싶어서인가.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 봉환의 1차 책임은 당연히 일본에 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우리 유족의 한을 내버려둘 것인가. 기자가 박 할머니에게 “우리 정부가 나섰다”는 전화를 걸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조종엽 문화부 jjj@donga.com}

    • 201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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