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종교학자의 눈으로 인류 진화의 역사를 바라봤다. 스페인의 고원 지대인 시에라 데 아타푸에르카의 동굴에서 발견된 30만 년 전 인간의 두개골에는 구멍이 나 있다. 구멍이 2개여서 누군가 주먹도끼 같은 무기로 되풀이해 내리쳤을 가능성이 높다. 저자는 여기서 구약성서에서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이야기를 떠올린다. “이 두개골은 최초의 살인사건에 대한 증언이고, 당시 인간 사이의 갈등을 볼 수 있는 창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책은 인간의 폭력성보다 이타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같은 동굴에서는 치명적인 선천성 두개골 기형을 앓았던 5세가량의 어린아이 뼈도 발견됐다. 생후 1년 동안 증상이 현격하게 나타나는 병인데도 5세까지 살 수 있었던 건 누군가 헌신적으로 돌봤다는 뜻이다. 저자는 “인류는 함께 모여 살면서 갈등이 생겨나고, 자신들이 개발한 무기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족과 사회의 약자를 돌보는 배려의 문화를 만들기 시작했다”며 “인간의 위대한 여정은 스스로를 ‘이타적 동물’로 변모시켰다”고 했다. 고인류학 소재의 기존 교양서들과 차별화되지 않는 부분도 꽤 되지만 저자의 전공인 고전문헌학과 연결되는 서술 등은 특히 흥미롭다. 고대 그리스인은 인간을 ‘안트로포스’로 불렀는데 이는 ‘얼굴을 위로 하고 하늘을 쳐다보는 존재’라는 뜻이라고 한다. 저자는 “눈이 양옆에 달려 자신을 공격하려는 다른 동물들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동물과 달리 생존을 위해 대상을 관찰하면서 눈이 정면으로 이동한 인간이라는 종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이름”이라고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도망은 갈 거 같아요. 그런데 (도망가다가 다시 택시를) ‘유턴’해 광주로 돌아갈지, 안 갈지는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주머니에서 전자담배를 꺼낸 뒤 “괜찮겠느냐”고 동의를 구한 배우 송강호(50)는 12일 인터뷰 중 이 대목에서 한참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담배를 한 번 빨았다. 내내 여유 있던 그의 눈빛도 살짝 흔들렸다. 그는 다음 달 2일 개봉하는 영화 ‘택시운전사’(감독 장훈)에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태우고 5·18민주화운동이 벌어지는 1980년 5월의 광주로 달려가 우여곡절을 겪는 택시운전사 만섭 역을 연기했다. “자신이 실제 만섭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물은 차였다. 그는 “‘유턴’했겠죠, 뭐. 하하하”라며 웃어넘겼다. 불의에 맞서 스스로를 던질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는 건 영화 속 만섭과 같은 보통 사람들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극중 만섭이 유턴하는 장면이 연기하면서 가장 ‘난코스’였다는 게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배우의 고백이다. “하필 제일 어려운 장면을 세트가 아니라 실제 운전을 하면서 찍었어요. 운전해야죠, 길이 짧은데 그 안에서 극적인 감정 표현해야죠, 클로즈업은 부담스럽죠….” 송강호는 극중 가장 울컥했던 장면으로 금남로의 시위, 학살 장면과 함께 택시가 처음 광주역에 도착해 시민들로부터 주먹밥을 받는 장면을 꼽았다. “그때 시민들의 모습이 정말 밝아요. 서로를 위하고, 끼리끼리 모여서 얘기를 즐기고, 주먹밥도 주고요. 그 장면이 촬영할 때는 몰랐는데 완성된 영화를 보니 정말 슬프더라고요.” 그는 5·18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라는 부담에 출연 결정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이런 얘기를 제가 감당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먼저 들었죠. 안 드는 게 이상하지 않나요? 그런데 주변에 출연할까 의견을 물었을 때 ‘이 영화 하지 말라’고 하면 화가 나고, 출연하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커지더라고요.” 송강호는 중학교 2학년이던 1980년 5월 새벽 라디오에서 ‘광주에서 폭도를 진압했다’는 방송을 들은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그때는 그 말을 믿고, 진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성인이 되고 연극배우로 일하면서 실제 힌츠페터 기자가 찍은 사진을 비롯해 광주의 진실을 담은 사진과 영상을 접했다. “아픈 비극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창하거나 잘난 정치인이 아니고, 택시기사처럼 아주 평범한, 사회의 맡은 바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이라는 것, 영화는 그걸 말하고 싶은 거 같습니다. 그런 이들의 건강한 의식이 역사를 지탱하고 만들어간다고 믿습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중국 정부가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의 고구려 문화재 유적 안내판에 “광개토대왕비는 중화민족의 비석”이라고 최근 새로 기술한 사실이 본보 취재를 통해 드러났다. “여기에서 오랫동안 명성을 떨쳐 온 중화민족 비석 예술의 진품으로 불리우는 ‘해동제일 고대 비석’ 즉 호태왕비(好太王碑)가 있고….” 동아일보가 동북아역사재단과 3∼6일 중국 랴오닝(遼寧)성 환런(桓仁)현과 지안시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한 결과 장군총, 광개토대왕비 등이 있는 지안시의 ‘고구려 문화재 유적 관광지’ 안내판에 중국어, 영어, 한국어, 일본어, 러시아어로 이같이 해설해 놓은 사실이 5일 확인됐다. 2007년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종료된 뒤에도 고구려사가 자국사라는 중국 측의 역사 인식은 박물관과 유적지 등에서 간간이 확인돼 왔지만 이번에 발견된 문구는 더욱 노골적이고 직설적으로 표현돼 심각성이 작지 않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조사해 온 조법종 우석대 교수는 본보를 통해 안내판 사진을 확인하고 “그간 유물 설명 등에서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취지의 서술이 가끔 발견됐지만 이번 표현은 고구려인이 중화민족에 속한다고 대중에게 명료하게 제시하면서 고구려사의 자국사 편입을 강력하게 재천명하고 있어 좌시할 수 없는 문제”고 강조했다. 중국은 2004년 우다웨이(武大偉) 당시 외교부 부부장이 방한해 ‘중앙·지방정부 차원에서 교과서 등에 역사 왜곡을 하지 않겠다’는 취지로 한국 당국과 구두 합의했다. 이후에는 전시 기법 등을 통해 우회적으로 자국의 입장을 표출했고 최근 중국 연호에 따라 고구려 등의 사료를 정리한 사서를 발간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갈등의 표면화는 회피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된 문구에서는 그런 방침의 변화가 감지된다. 조 교수는 “최근 한중관계 경색과 관계가 있을 수 있어 향후 이런 서술이 확대될까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이번에 발견된 안내판은 최근 1년 안팎 사이에 새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위치는 장군총 아래 주차장 정면으로 개별 유적이 아니라 고구려 유적지 전체를 설명하는 안내판이다. 조 교수는 지난해 봄 현지답사 당시에는 보지 못했다고 했다. 저탄소시범관광지 같은 최신의 개념이 설명에 포함된 것으로 보아 최근의 입장이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관람객이 직접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중국) 직원의 설명을 통역해서 옮길 수만 있습니다.” 안내판뿐 아니다. 역사 문제에 대한 중국 측의 방침 변화는 유적 설명에서도 감지됐다. 지안시 박물관, 장군총, 광개토대왕비 등에서 중국 직원들은 역사학 전공 교수 등으로 구성된 한국 탐방단과 가이드의 설명을 답사 중 번번이 가로막았다. 이 역시 지난해까지는 없던 일이다. 이유를 물었지만 ‘규정이다’ ‘지시다’ 같은 말만 들을 수 있었다. 중국 직원의 설명에는 농기구부터 무기까지 “고구려는 중원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였다”는 말만 가득했다. 지안시 환도산성 아래 고분군이 정비 중인 모습을 기자가 울타리 밖에서 스마트폰으로 촬영하자 현장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기자의 스마트폰을 강제로 빼앗았다가 항의를 받고 나서야 돌려주기도 했다. 동북아역사재단 관계자는 “중국의 유적지와 유물 관리 규칙 등이 정비되면서 동북공정의 역사 인식이 고착화되는 단계로 보인다”며 “최근 시진핑 주석의 발언 등으로 볼 때 겉보기와 달리 지방뿐 아니라 중앙 수뇌부의 역사 인식도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지안·환런=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계신데로/나의님은 가시니라//먼저가서 기다리리다/그대오길 기다리리다//언제던가 복도에서/손잡은 일도 있었건만…곁에 있던 간수께선/얼굴을 찡기더라.” 동아일보가 1926년 8월 3일자로 보도한 박열의 ‘옥중가(獄中歌)’다. 아나키스트 항일운동가 박열(1902∼1974)이 감옥에서 아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를 그리워하며 지은 것이다. 지난달 28일 개봉한 영화 ‘박열’이 주말까지 180만 관객을 넘은 가운데 동아일보 보도를 통해 박열의 얼굴을 더듬어봤다. “기자는 그들의 안부를 알기 위해 시곡(市谷·이치가야) 형무소를 방문했다. …박열은 뜨거운 악수로 기자를 맞으며 ‘이렇게 자주 찾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일본 신문은 나에 관한 기사로 우스운 말이 나돌고 있는 모양인데, 그것은 정(鄭)이란 사람의 소위란 것이 확실하며….” 1925년 12월 14일자에 실린 동아일보 기자의 면회기다. 일왕 폭살 시도 혐의로 옥에 갇힌 박열은 기자에게 “내 형이 매우 근심하는 모양이니 위안을 해 달라”고 부탁하는 한편 일본 신문의 기사가 왜곡됐음을 알렸다. 기사를 통해 가네코가 “이제부터는 조선 옷을 입겠습니다”라고 했다는 것과 두 사람의 혼인 수속 문제 등의 근황도 알 수 있다. 1926년 3월 2일자 동아일보에는 일제의 법정에서도 당당한 박열 부부의 모습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받쳐 입고 머리까지 조선 머리를 쪽진 금자문자(金子文子)가 법정에 나타나 먼저 간수에게 차 한잔을 청해 마시고 … 사모관대(紗帽冠帶)에 조복(朝服)을 입고 검은 혜자(鞋子)를 신은 박열이 법정에 나타나 자기 자리에 앉으며 …방청석에 섰던 조선 학생들이 웅성웅성하는 것을 들은 박열은 몇 번이나 돌아다보고 말 없는 웃음을 보내어 답례를 하였고….” 동아일보는 박열 사건의 첫 소식을 1923년 10월 18일자로 전했고, 총독부의 보도 통제가 해제된 1925년 11월 25일자 2면 머리에 “‘대중의 반역’을 표방하고 무정부주의를 선전”이라는 기사를 통해 박열의 혐의와 이력, 불령사의 성격 등을 보도했다. 박열의 정신감정 거부나 옥중결혼 소식도 속보로 전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공판이 열린 1926년에만 박열 관련 소식을 168건이나 보도했다. 동아일보가 1926년 1월 1일자로 실은 박열의 옥중시(獄中詩)에서는 항일운동가로서의 단단한 내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옥창(獄窓)의 겨울밤은/이슥히 깊었는데/찬 기운은 살을 어이고//…//고르지 못한 이 세상/생지옥의 이 세상/아! 원수의 생지옥//….” 박열 등이 조직한 ‘흑도회’의 창립을 공식 확인할 수 있는 통로도 동아일보 지면이다. 아나키스트 독립운동을 연구한 김명섭 단국대 박사는 “흑도회가 조선인 노동자 학살 사건을 진상 조사한 일도 함께 조사한 이상협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의 보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경북 문경시 마성면에 있는 박열의사 기념관은 1922∼1962년 박열에 관해 동아일보가 보도한 238개 기사를 소장하고 있으며 그중 일부를 전시하고 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박열 평전’(1996년)을 보완해 최근 출간한 ‘나는 박열이다’(책뜨락)에서 ‘동아일보의 박열 옥중면담기’를 따로 실으면서 “당시 동아일보는 총독부 당국의 치밀한 보도 통제에도 불구하고 박열 사건에 대해 여러 차례 보도했다”고 썼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목마른 나는 머리 긴 여자가 좋아요. 그리고 내가 배고플 때 라면을 사주면 더 좋고. 그리고 그리고 막걸리를 마실 수 있으면 더 좋구요.” 기형도 시인(1960∼1989)이 1982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말은 그가 얻어먹은 밥값 대신 즉석에서 시를 써서 건넨 여성의 일기장(사진)에 남아 최근 시와 함께 알려졌다. 이 여성은 짐을 정리하다가 시를 우연히 발견했다고 한다. 배고프고, 목마르고, 술도 고픈 청년들의 풋풋함이 전해진다. 아주 오랜만에 찾은 학교 근처 술집 벽의 낙서에서 지인의 이름을 발견하고 옛일을 회상하는 일, 오래된 노트를 버리려다 눈에 들어온 글에 얼굴을 붉히는 일 따위에도 시한이 있을 게다. 그런 술집이 사라졌을 때, 낡은 종이 위의 문장 같은 것에는 무감해져 더 이상 짊어지고 이사를 다니지 않게 될 때 그 사람은 옛날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 받는 이나 보내는 이 불명의 편지가 어디서 왔고, 누구에게 보내려던 것인지조차 잘 기억나지 않을 때….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언론, 집회에 대한 압박은 곧 사상에 대한 압박이요, … 미친 자의 손에 칼을 들림이 이 어찌 위험이 아니랴? 미친 자의 칼 아래서 항거가 어렵다 말라. 흐르는 피가 마침내 그 날을 꺾을 것이다.”(동아일보 1924년 6월 10일자 1면 사설 ‘항거와 효과’에서) 일제강점기 검열 관련 신문기사를 망라해 주석을 단 책 ‘미친 자의 칼 아래서 1, 2’(소명출판·한기형 엮음)가 최근 발간됐다. 책 제목은 일제 당국을 ‘미친 자’로 비판한 동아일보 사설에서 따왔다. 책에 수록된 7개 신문의 기사 2117건 중 동아일보가 절반(49.9%·1056건)을 차지한다. 지난달 29일 연구실에서 만난 한기형 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 교수(55·사진)는 “동아일보가 기사 삭제를 감수하면서 일제의 검열에 맞서 적극적으로 발언하려고 노력했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이게 6·10만세 다음 날 동아일보입니다. 어때요, 숨 막히는 긴장이 느껴지지 않나요?” 한 교수는 이날 1926년 6월 11일자 1면을 보여줬다. 머리기사 제목은 ‘각처에서 조선○○만세고창(高唱)’. ‘○○’라는 기호는 검열로 ‘독립’이라는 두 글자를 싣지 못하는 상황임이 전해진다. 제호 아래에는 ‘호외발행금지’라는 제목으로 “십일 국장 당일에 … 만세사건은 본보의 민활한 활동으로 호외를 발행하였으나 당국으로부터 인쇄까지 마친 호외의 반포를 금지함으로… ”라고 호외 압수 사실을 알렸다. “왼쪽 기사는 지워졌고, 사진은 왼편이 알아볼 수 없게 비늘처럼 돼 있죠? 윤전기 앞에서 대기하던 일제 검열관이 인쇄판에서 비판적인 내용을 조각칼로 쪼아낸 겁니다. 호외를 압수당하면 다시 발행하는 일을 되풀이해 호외를 세 번 내기도 했습니다.”(한 교수) 그는 언론 탄압에 항거하는 동아일보 영문 사설에도 주목했다. 1924년 7월 2일자는 ‘STRUGGLE FOR LIBERTY OF THE PRESS’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원문을 풀이하면 “조선인들은 한 몸이 되어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언론탄압에 저항하고 있다. … 이러한 상황에서 단순히 항의하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다. 이번 20일은 조선 전체의 시위일로 예정돼 있고…”라는 내용이다. 그해 11월 14일자는 제목부터 ‘CENSORSHIP’(검열)이었다. 한 교수는 “영문 기사에 상대적으로 날이 무뎠던 검열의 틈새를 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동포에게 드림(4)―동아일보를 통하야’라는 도산 안창호의 기고(1925년 1월 26일자)는 검열로 통째로 삭제됐다. 빈 기사 자리 맨 끝에는 “이 논문은 사정에 의하여 계속치 못하나이다”라고만 쓰여 있다. 그러나 일제를 비판하는 예리한 만평이 살아남았다. 게다를 신고 기모노를 입은 일본인이 ‘제국주의’라는 가면을 들었고, 앞에 러시아 혁명가 레닌처럼 생긴 러시아인이 “아주 벗는 것이 어때?”라고 그를 조롱한다. 한 교수는 “‘일본은 제국주의면서 아닌 척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된다”며 “검열관이 도산의 기고문을 자르다가 만평은 미처 못 봐 살아남은 듯하다”고 설명했다. 한 교수는 “독립군이 총격전을 벌였는데, ‘불온문서’가 발견됐다며 문서의 내용 자체를 전하는 기사도 적지 않다”며 “검열 속에서 보도하기 위한 기자들의 기지”라고 했다. 2002년경부터 검열을 연구한 그는 동아일보 등의 과거 기사가 디지털화하기 전까지는 신문 축쇄판과 마이크로필름을 한 장씩 수기로 옮겨 적으며 자료를 모았다. 박헌호(고려대) 정근식(서울대) 최경희(미국 시카고대) 한만수 교수(동국대) 등과 함께 ‘검열연구회’를 만들어 2011년 ‘식민지 검열: 제도·텍스트·실천’을 발간하기도 했다. 지금은 일제강점기 검열 전반을 다룬 저서를 모은 책을 준비하고 있다. 원래 한국 근대문학 연구자인 한 교수가 검열을 연구하는 이유는 뭘까. “식민지 시기 ‘왜 조선에서는 세계적인 걸작이 거의 나오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에 부딪혔어요. 검열 탓이었습니다. 일제는 본국에서는 사후 검열을 하면서 조선이나 대만 같은 식민지에서는 사전 검열을 했습니다. 식민지가 독자적인 지식문화를 키울 수 없도록 만든 겁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때 이른 폭염이 대지를 달구는 요즘이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계절은 겨울에 남아 있는 이들이 있다. 사고로 아이나, 남편을 잃은 이들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눈보라가 치고 있을 것이다. 책은 ‘비행운’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저자의 신작 소설집이다. 통상 소설집에 실린 소설 한 편의 제목을 책 제목으로 삼지만 저자는 ‘바깥은 여름’이라는 제목을 일부러 따로 지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 후진하는 어린이집 차에 치여 자식이 숨진 부부는 이런 말을 주고받는다(‘입동’). “많은 이들이 ‘내가 이만큼 울어줬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라’며 줄기 긴 꽃으로 아내를 채찍질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남겨진 이들을 구원하는 건 또 다른 남겨진 이의 공감이다. 물에 빠진 제자를 구하려다 자신까지 목숨을 잃은 남편을 원망하던 아내는 제자의 누나가 보낸 감사의 편지를 받는다(‘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상실의 윤리를 탐구하는 저자의 필봉은 그저 평면적인 도덕을 강조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소설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뒤의 풍경만큼이나 무언가를 떠나보내는 이들의 내면을 파고든다. 오래 사귄 남자 친구에게 이별을 통고하려는 여성은 오래전부터 남자 친구가 큰 잘못을 저질러주기를 기다렸다는 것을 깨닫는다(‘건너편’). 유기견을 거둬 동생처럼 키운 가난한 어린이는 노쇠해 병고에 시달리는 개를 ‘안락사’시킬 돈을 모으지만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휴대전화 케이스를 사는 데 헐어 쓴다(‘노찬성과 에반’). 책에 실린 7편의 소설 중 ‘사라지는 언어들의 영(靈)’이라는 독특한 화자를 내세운 ‘침묵의 미래’(2013년 이상문학상 수상작)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결국 용서에 대한 이야기일 게다. “없던 일이 될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는 일은 나중에 어떻게 되나. 그런 건 모두 어디로 가나.”(‘노찬성과 에반’) 인간의 기도는 ‘그저 한번 봐 달라’는 것일 뿐이다. 나중에 ‘세월호 문학’이란 게 생겨났다고 평가된다면 이 책은 그중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 같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920년 프랑스 파리 동쪽 약 200km에 있는 마른의 쉬프 마을에서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6000프랑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에 독립자금을 기부한 한인들이 있었다. 프랑스 최초의 한인단체인 ‘재법한국민회(在法韓國民會)’ 회원들이다. 이들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 북극해의 항구 도시 무르만스크에서 일하다 영국 에든버러를 거쳐 프랑스에 도착한 것은 알려져 있지만, 왜 무르만스크에 있었는지에 대해선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김도형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27일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월례발표회에서 발표할 예정인 논문에서 이들이 무르만스크로 가게 된 경위를 일제(日帝) 자료 등을 통해 최근 새로 밝혔다. 연구소는 일본 역사자료센터에서 일제의 청도(靑島) 수비군 민정장관 아키야마 기사노스케(秋山雅之介)가 1920년 1월 12일 육군차관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에게 보낸 문건 ‘구주에서 귀환한 조선인에 관한 건’을 찾아냈다. 이 문건은 무르만스크에 있던 이들이 “시베리아 방면에 출가(出稼·일정 기간 타향에서 돈벌이를 함) 중 과격파의 발발(볼셰비키 혁명)로 직업을 잃어 유랑하게 되었다”며 “대부분은 노국(露國·러시아) 내에 있어 가장 해륙(海陸)의 교통편인 무르만스크의 철도회사에 고용이 됐다”고 기록했다. 김 연구위원은 “즉 이들은 일제의 식민지배로 국내에서 살기 어렵게 되자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나간 노동자들”이라며 “영국군이 제1차 대전이 끝날 무렵 무르만스크를 점령했다가 철도회사에 고용된 한인 노동자들을 영국군 소속으로 전환해 잡역을 시켰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연구소가 최근 발견한 당시 영국 신문에는 영국군이 제1차 대전 뒤 러시아에 남아 있는 영국군 포로를 데려오기 위해 무르만스크에 갔다가 러시아인 피란민과 중국인, 한국인 노동자 등 800명을 데리고 1919년 10월 영국에 왔다고 보도됐다. 여기에 무르만스크 한인 노동자 200명이 포함됐다. 이들 중 147명은 일본에 의해 중국 청도를 거쳐 조선으로 귀국했다. 재법한국민회를 만든 건 파리위원부가 영국 외교부와 협상해 프랑스로 데려온 35명과 함께 별도로 프랑스에 와서 고학을 하며 학비를 벌던 조선인 유학생들이다. 이들은 제1차 대전 당시 격전지였던 쉬프에서 복구 사업에 투입됐다. 재법한국민회는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기념해 축하식을 열었을 뿐 아니라 6개월 만에 6000프랑을 모아 파리위원부에 기부하기도 했다. 김 연구위원은 “당시 프랑스의 한인 노동자가 50명 정도였고, 한 달 임금이 많아야 100프랑을 넘지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1인당 수입의 4분의 1 이상을 매달 모았던 것”이라며 “역사적으로 중요하지만 그동안 파악하기 어려웠던 재법한국민회의 실체에 한 걸음 접근했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이상이 얼마나 숱한 ‘가면’을 쓴 이인데요. 소설 속 등장인물에도 가면을 숱하게 씌우고 휘장을 쳐서 만들었는데, 그것들을 벗겨내지 못한 채 이상의 문학을 평면적이고 단선적으로 보는 비평가들을 신뢰할 수가 없었습니다.”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 겸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한국 문학 담당 교수가 최근 전한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1910∼1937)의 아내였던 변동림 여사의 회고다. 변 여사는 뒷날 김향안으로 개명했고 김환기 화백과 결혼했다. 권 교수는 올 3, 4월 ‘권영민 교수의 문학 콘서트’(해냄)와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탄생―이상과 그의 문학’(세창출판사)을 잇따라 펴냈다. 미국에서 강의가 없는 여름학기를 맞아 귀국한 그를 최근 서울 종로구 ‘이상의 집’에서 만났다. 이상의 문학을 연구하던 권 교수는 1990년대 초반 환기미술관 건립을 추진하러 서울에 와 있던 변 여사를 서울 평창동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고 했다. 당시 변 여사는 이상의 소설 ‘실화(失花)’가 이상과 아내인 자신의 이야기라는 평단 일각의 시선 탓에 고통을 받았다며 하소연했다. “변 여사는 ‘이상의 소설 속 아내가 모두 자신이라면 그게 무슨 문학이겠냐’고 했죠. 한국의 비평가들이 문학을 읽을 줄 모르고 이상을 모르면서 대가인 체한다며 비판하더군요. 사실 이상의 생애와 문학에 대한 오해는 지금도 너무 많습니다.” 권 교수는 이상이 대중문화 속에서 일종의 난봉꾼처럼 재현됐고, 심지어 평단에서도 곡해됐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게 ‘섹스 시’로 알려진 작품 ‘차8씨의 출발(且8氏の出發)’이다. 권 교수는 “‘且8氏’는 남성 성기를 표상하는 기호로 읽기보다는 이상이 즐겼던 ‘글자놀이’로 풀어야 한다”고 했다. 한자 ‘차(且)’와, 숫자 8의 한자(八)를 결합하면 ‘구(具)’가 된다. 이 시는 이상과 친했던 화가 구(具)본웅의 첫 개인전에 대한 헌사로 발표한 시라는 얘기다. 권 교수는 “대중매체가 이상을 신비화하거나 반대로 세속화하면서 오해가 전파됐다”면서도 “물론 역으로 그 덕에 이상이 기억된 면도 있다”고 했다. “이상이 도쿄에서 쓴 수필 ‘동경’은 식민지 예술가가 쓴 제국의 문명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적 에세이입니다. 이상은 식민지 근대의 후진성을 극복하려 했던 대표적 작가지요.” 그는 “근래 유럽 학자들이 일본 근대문학을 연구하다가 이상의 시를 발견하고 ‘식민지 조선에 어떻게 이런 인물이 있는가’라며 너무나 놀란다”고 덧붙였다. 유럽이나 일본에 유학한 것도 아니면서 당대 독일이나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보다 더 뛰어난 의미구조를 가진 시를 썼다는 데 경탄한다는 것이다. 권 교수는 이상이 조선총독부의 건축기사로 일하게 된 사정, 이상이 자란 큰아버지 집과의 관계, 일본 도쿄의 주소 등도 연구를 통해 새로 밝히거나 바로잡았다. 소속 대학에서 한국학 전공 개설을 추진 중인 그는 1, 2년 뒤 성과를 볼 수 있다고 했다. “‘한국 문화의 세계화’를 말한 게 한 20년 됐지만 대중음악, 드라마, 음식처럼 생활문화나 문화산업만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 바탕이 되는 문학을 비롯해 미술, 음악, 전통예술의 세계화에 대한 뒷받침은 부족합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겪고 나면 이전으로는 영원히 돌아가지 못하는 체험들이 있다. 동시대인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기는 것으로 전쟁만 한 게 있을까. 이제는 팔순이 넘은 인문학자가 중학교 5학년(지금의 고교 2학년)이던 때 맞은 6·25전쟁을 회고했다. 광복 뒤 월남해 서울 이촌동에 살던 저자의 가족들은 1950년 6월 28일 오전 2시가 넘어 한강철교의 폭파음을 지척에서 듣고 그길로 피란길에 오른다. 끊어진 줄 모르고 다리를 건너던 사람들과 차들은 깜깜한 밤중에 한강에 떨어져 죽는다. 날이 새고 한강을 건널 보트가 없어 발만 동동 구르던 피란민들에게 보트가 생기자 진짜 생지옥이 시작된다. 너도나도 먼저 타겠다고 결사적으로 보트에 기어오르는 통에 백사장은 아비규환이 된다. 저자 가족은 피란길이 남하하는 전선에 추월당해 전장의 한가운데 선다. 가족들은 정자리(지금의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의 한 집에서 양쪽에서 날아드는 총알을 피한다. 분당리는 동네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고, 집집마다 남아 있던 수백 개의 장독이 불길에 달아 장이 팥죽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저자는 “이제는 고층 아파트촌이 됐지만 내 머릿속의 분당리에서는 대지의 신이 뿜어내는 분노처럼 오늘도 장독들이 펄펄 끓고 있다”며 “그날 장독대의 이미지가 나를 반전주의자로 만들었다”고 썼다. 가족들은 피란을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온다. 열여덟 살 소녀의 감성은 공산치하의 서울이라고 어디 가지 않는다. 서울로 돌아온 저자는 서강에 물드는 노을을 보며 황홀해하고, 밤마다 뒷동산에서 별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 인민군은 병력을 보충하려고 길에서 청년들을 마구잡이로 끌고 갔다. 9·28 서울 수복 전까지 석 달은 집집마다 남자들을 숨겨야 하는 시기였다. 지하실, 마루 밑, 다락, 헛간에 숨겨도 가택 수색팀이 올 때마다 온 집안은 피가 마른다. 저자의 가족들은 공산군이 조직한 여성동맹에 나가는 친척 할머니의 딸 덕에 월남자 신분을 들키지 않고 살아남는다. 1·4후퇴 때 서울시민은 확실하게 서울을 떠나는 것을 택했다. 공산군은 자신들이 구제하려 한다는 빈민과 프롤레타리아까지 모조리 도망쳐 거의 비어버린 서울에 재입성한다. 1·4후퇴 당시 가족들의 피란길을 묘사하는 부분은 전쟁을 겪지 않은 독자로 하여금 눈을 떼려야 뗄 수 없게 만든다. 저자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아버지는 경영하던 싸전의 쌀을 피란 전 옮겨 놓으려 안성 죽산에 갔다가 방위선이 쳐지자 갇혀 서울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어머니는 피란 중 싸전 직원네 가족에게 아이들을 잠시 맡겨놓고 아버지를 찾아오려고 떠난다. 동생들과 함께 어머니를 기다리던 저자는 피란을 재촉하는 직원의 손에 동생 둘을 맡겨 떠나보내고, 자신은 어머니를 기다린다.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이 재회하는 과정은 거의 기적과 같다. 미군 쌕쌕이들은 신작로에 화톳불을 피운 피란민을 중공군 부대로 오해해 기관총을 난사하고, 저자의 가족들은 신작로에 오르는 게 한발 늦어 간신히 살아남는다. “거기에서 나의 소녀시절은 끝났다. 뿌리가 햇빛에 드러나서 설익은 채 늙어버리는 올감자처럼, 전쟁 때문에 우리는 질서의 고마움을 너무 일찍 터득해서, 겉늙어버렸다.” 저자는 건국대 국문학과 교수와 문학평론가로 일했고, 지금은 영인문학관 관장이다. 남편은 전시 부산의 서울대 문리대에서 만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다. 책 후반부는 당시 서울대의 얘기다. 정돈된 문장으로 비극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솜씨가 평생 문학을 연구한 이답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밥값 대신) 수표 하나 써 줄게.” 1982년의 어느 날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하며 경기 안양의 수리문학회 활동을 하던 기형도 시인(1960∼1989·사진)이 문학회와 가까이 지내던 한 살 어린 여성 A 씨에게 말했다. 그녀에게 라면과 막걸리를 얻어먹은 차였다. 기 시인은 그 자리에서 갱지에 볼펜으로 시를 써서 A 씨에게 건넸다. “당신의 두 눈에/나지막한 등불이 켜지는/밤이면/그대여, 그것을/그리움이라 부르십시오/당신이 기다리는 것은/무엇입니까, 바람입니까, 눈(雪)입니까/아, 어쩌면 당신은/저를 기다리고 계시는지요/손을 내미십시오/저는 언제나 당신 배경에/손을 뻗치면 닿을/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읍니다” A 씨가 보관해 오던 시가 19일 공개됐다. 박인옥 시인(한국문인협회 안양지부장)이 A 씨의 동의를 얻어 내놓은 것이다. 당시 기 시인을 비롯해 박인옥 홍순창 유재복 등 수리문학회원들은 동인 중 한 명이 운영하는 안양의 헌책방 ‘독서당 수리’에 자주 모여 서로의 작품을 품평했다. 주머니가 가벼웠던 그들은 A 씨가 헌책방에 오면 라면이나 막걸리를 사달라고 자주 청했다고 한다. A 씨는 1982년의 어느 날 일기에 이렇게 적기도 했다. “전철역 부근 선술집에 앉아 쭈그러진 냄비에 라면을 먹었다. 셋이서. 그리고 커다란 양은 사발에 막걸리를 마셨다. … 그의 24살의 눈을 기억한다.” 1989년 A 씨는 기 시인의 부고를 들었다. 유고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 초판 2쇄를 샀고, 시집 뒤편에 기 시인이 시를 써 건넨 종이를 붙여 놨다. “형도 오빠 작품이 제일 좋았어요(뛰어났어요).” 박인옥 시인이 동아일보에 전한 A 씨의 회고다. A 씨는 “형도 오빠가 저를 좋아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저에게 굉장히 잘해 줬던 것은 기억이 난다”고 했다. 기 시인이 A 씨에게 ‘밥값 대신’ 건넨 시는 2편이 더 있다. 육필로 쓰인 이 시들은 경기 광명시에 건립 중인 기형도문학관에 기증될 예정이다. “당신에게/오늘 이 쓸쓸한 밤/나지막하게 노크할 사람이/있읍니까/…/나는 그대에게 최초로/아름다운 한 점 눈(雪)으로/서있을 것입니다” “…아, 하루에도 언제나/긴 강은 소리 없이 흐르고/그 강물에 당신의 영혼이/미역을 감는 밤/아세요./나는 언제나 당신의 주위에서/튀어올라 물보라치는/물비늘임을 그대는 아세요?”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한국문집총간 등이 집대성된 ‘한국고전종합DB’를 모바일 기기에서도 검색할 수 있게 됐다. 한국고전번역원은 ‘한국고전종합DB’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며 19일 이같이 밝혔다. 고전번역원에 따르면 개편된 사이트는 기존에는 검색이 불가능한 한자 4000여자도 검색할 수 있도록 했고, 검색 속도가 높아졌으며,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과의 통합검색 연계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 한·중·일의 연호(年號)를 검색할 수 있으며 번역문과 원문, 교감 표점 원문, 원문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도록 이미지 뷰어를 개선했다. ‘한국고전종합DB’는 고전번역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고전원문, 한국문집총간, 해제, 목차 등 다양한 형태의 자료로 구성돼 있다. 2001년 서비스를 시작해 이용자가 현재 월 평균 10만 명을 넘어섰으며, 해외 한국학학자들도 즐겨 찾는다고 고전번역원은 밝혔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2명이 설악산에 오색케이블카를 설치해도 된다는 국민권익위원회 중앙행정심판위원회의 결정에 반발해 15일 사퇴서를 낸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사퇴서를 낸 건 문화재위원회 천연기념물분과 위원장인 전영우 국민대 명예교수와 위원인 김용준 전북대 명예교수다. 전 교수는 18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각 분야 전문가 15명이 5개월에 걸쳐 현장을 조사한 결과 산양 등의 야생동물 서식 환경과 자연경관에 악영향을 줄 소지가 커 현상변경안을 부결시켰던 것”이라며 “행정심판위원회가 ‘왜 문화재 활용을 고려하지 않느냐’며 양양군의 손을 들어준 건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중앙행정심판위원회는 15일 “문화재청이 현상변경허가 거부 처분을 하면서 문화 향유권 등의 활용적 측면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며 문화재 현상변경허가 거부 취소 결정을 내렸다. 전 교수는 “지방정부가 경제 논리로 자연유산의 가치를 훼손하는 걸 허용한다면 앞으로 개인이 문화재 보호구역 내 사유재산을 현상변경하려는 걸 무슨 명분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라며 “자연유산의 가치를 문화유산에 비해 덜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재청도 대오각성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양양군은 지난해 7월 ‘설악산 천연보호구역’인 남설악 지역에 케이블카를 설치하겠다며 문화재 현상변경허가 신청을 했다가 같은 해 12월 문화재청으로부터 거부 처분을 받았고, 올 3월 문화재 현상변경허가 거부 취소 심판을 청구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56년간 연기 한길을 걸어 온 ‘연극계 대모’ 윤소정 씨(사진)의 16일 별세(향년 73세) 소식이 전해지자 연극계의 애도 물결이 이어졌다. 서울성모병원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에는 배우 박정자 손숙 윤석화 길해연 최종원 명계남 씨, 연출가 이성열 정진수 씨를 비롯해 고인과 가까웠던 연극인과 지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17일 빈소를 찾았다. 연극평론가 김미도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고인은 연극계의 ‘큰 어른’이면서도 새 작품을 연기할 때마다 새로운 환경에 맞춰 자신을 던질 준비가 돼 있었다. 변신에 능할 뿐 아니라 다른 배우들과도 조화로운 앙상블을 구축했던 배우”라며 “연극계가 큰 별을 잃었다”고 말했다. 정대경 한극연극협회 이사장은 “고인은 특히 젊은 연극인들을 따듯하게 보듬으며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했던 분”이라고 말했다. 연기에 대한 고인의 열정은 나이가 무색했다. 고인의 마지막 연극 무대는 지난해 명동예술극장에 오른 프랑스 극작가 플로리앙 젤레르의 ‘어머니’였다. 고인은 ‘빈 둥지 증후군’에 시달리는 주인공 안느의 초조함과 공허함을 탁월하게 연기했다는 평을 받았다. 고인은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신경성 위염이 생길 정도로 어려운 작업이지만 연극은 이런 고통이 없으면 작업하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인의 장례는 대한민국연극인장으로 치러진다. 영결식은 20일 오전 9시 반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고인의 동료와 선후배 연극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된다. 연극인을 대표해 배우 손숙 길해연 씨가 조사를 낭독한다. 유족과 연극인들은 영정과 함께 고인이 즐겨 가던 대학로 곳곳을 찾을 예정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새에덴교회와 한민족평화나눔재단은 미국 휴스턴에서 6·25전쟁 67주년을 맞아 참전용사 초청 보은행사를 17일(현지 시간) 열었다. 새에덴교회에 따르면 이날 행사에는 미국 참전용사와 실종자 전사자 가족 등 500여 명이 참석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행사에 보낸 메시지에서 “참전용사와 가족 여러분께 깊은 감사와 존경의 인사를 전하며, 목숨으로 맺어진 한국과 미국의 우정이 영원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소강석 담임목사는 이날 행사에서 “6·25전쟁으로 풍전등화와 같던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싸운 참전용사들의 땀과 눈물, 피와 희생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주최 측은 참전용사에게 ‘평화의 사도메달’을 전달했다. 새에덴교회는 2007년부터 매년 6·25전쟁 참전용사를 초청하는 보은행사를 열어왔으며 미국 태국 필리핀 캐나다 호주 터키 등의 참전용사와 가족 3000여 명을 국내에 초청하기도 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청탁이죠.” ‘짧은 소설’을 쓰는 작가적 동기를 묻자 소설가 성석제 씨(57)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성 씨는 200자 원고지 10∼30장가량에 삶의 번득이는 순간을 담아낸 엽편(葉篇)소설 55편을 묶어 ‘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을 최근 냈다. 14일 서울 연희문학창작촌에서 만난 그는 말에도 해학이 넘쳤다. 소설가가 된 계기는 소설인지 산문시인지 수필인지 종잡을 수 없는 ‘전설적인’ 데뷔작 제목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1994)처럼, 다소 어처구니가 없다. “‘그곳에는…’에도 청탁받은 글이 3편 있어요. 시를 쓸 때인데, 서울시 반상회보인가? 비슷한 거에 싣겠다며 생활에 밀착된 글을 달라고 청탁이 왔어요. ‘알겠습니다’ 하고 20분 만에 보냈지요. ‘다음 주에 실을 글도 보내줄 수 있느냐’고 묻기에 있다고 했지요. 2주 뒤에 세 번째로 ‘글이 또 있느냐’고 묻는데 ‘얼마든지 있다’고 답할 뻔했어요.” 잘 알려져 있듯 성 씨는 1986년 시로 먼저 등단했다. “1994년 여름 너무 더웠고, 시로 잘 수렴이 안 되는 이야기를 다듬어서 짧은 글을 쓰는, 말하자면 ‘폭발물 처리 중’이었어요. ‘이것도 원고료를 주는구나’ 하면서 원고를 모아 낸 게 ‘그곳에는…’입니다. 그리고 이듬해(1995년) 첫 소설 청탁을 받았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시가 아니라 소설 청탁만 오는군요. 서울시가 제 인생을 바꿔 놓은 게지요.” 그는 자신의 짧은 소설은 ‘책상은 책상이다’ 등 함축적인 문장의 스위스 작가 페터 빅셀, ‘모세야 석유가 안 나오느냐’ 등 풍자적 소설을 쓴 이스라엘 작가 에프라임 키션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빛이 번쩍했을 때 잠시 드러난 얼굴이 인화된 듯한 이미지가 소설에 담겨 있기를 바라죠. 툭 건드리는 잽 같은 느낌, 길을 가다가 갑자기 빗방울이 한두 방울 이마에 떨어지는 느낌을 독자에게 주고 싶어요. 정색하고 눈을 응시하면서 ‘도를 아십니까’ 하는 것 말고요.” 짧은 소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길지 않은 글에 익숙한 요즘 읽기 경향과도 맞아떨어진다. 성 씨는 “SNS도 이야기의 한 형태다. 이야기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다하지 않을 것이고, SNS 등과 문학이 만나 공존할 수 있는 지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며 “짧은 소설은 변화가 심하고 적응이 빠른 장르적 속성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문장이라는 게 스마트폰의 ‘캐터필러’에 깔려 바스러질지, 하다못해 수레 앞에 선 사마귀처럼 저항이라도 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우연히 발견된 페니실린처럼 각자 실험을 계속하다 보면 길을 우연히 찾을 수도 있겠지요.” 그는 “시에 소설을 도입하고, 소설에 시를 도입하는 등 문학의 경계를 확장하는 걸 보면 새로운 우주가 생성되는 걸 목격하는 기분”이라고 덧붙였다. 성 씨는 ‘작가의 말’에 지금부터 9억7568만4612일(약 267만 년) 뒤에 은하계 전체의 공간에 최후의 이야기가 새겨질 것이라고 썼다. 종말 예언이냐고 묻자 “(종말까지 걸리는 시간을) 내가 많이 지연시킨 것”이라고 했다. “제가 어릴 적에는 소년 잡지 같은 데서 ‘20만 년 뒤에 인류가 멸망할 텐데 어떤 준비가 됐느냐’고 했지요. 그때 제가 멸망을 어떻게 막을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멸망까지 걸리는 시간이 더 늘어난 겁니다. 누구나 진심을 가지면 온 우주가 도와주니까요. 어, 요새는 우주, 혼 이런 말 못쓰겠어요.” 하여간 유쾌하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독립운동사 연구에 평생을 바친 박영석 건국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사진)가 15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5세. 고인은 경북 청도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사학자였던 박장현(1908∼1940)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남대 사학과 교수, 건국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 관장,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기획위원,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회장, 한국사학회 회장, 중국 연변대 명예교수 등을 역임했다. 1984∼1994년 5대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냈다. 고인은 만주 지역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선구적 업적을 남겼다. 저서로 ‘만보산사건 연구’, ‘재만(在滿)한인 독립운동사 연구’ ‘한민족독립운동사 연구’ 등이 있다. 건국대 학술연구상, 치암학술상, 국민훈장모란장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딸 주(대구가톨릭대 박물관장) 옥 씨(서양화가), 아들 환(수원대 사학과 교수) 단(서강대 사학과 교수) 강 씨(부산외국어대 역사관광학과 교수), 사위 임문혁(계명대 기계자동차공학부 교수) 황종환 씨(한남대 철학과 교수)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 강남세브란스병원, 발인은 17일 오전 7시. 02-2019-4000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즐겨 보는 웹툰 중 ‘호랑이 형님’(이상규 글·그림)이 있다. 산신령과 호랑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판타지물인데 이야기가 촘촘하면서도 비밀을 조금씩 드러내는 방식으로 흥미롭게 짜여 있고, 캐릭터마다 개성도 살아있다. 매력적인 악역인 ‘추이’(범을 잡아먹는다는 상상의 동물)의 모습을 우리 민화의 호랑이 그림에서 따오는 등 전래의 상상력을 재해석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물론 일본 만화 ‘드래곤볼’이나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를 오마주한 것으로 보이는 장면들도 일부 있다. ‘드래곤볼’은 주인공이 점점 ‘센 놈’과 맞붙게 되는 서사의 전범이라 할 만한데 ‘호랑이 형님’은 좀 다르다. 지금까지는 1부에서 끝난 호랑이 ‘산군’과 추이의 대결이 거의 최강자전이었다. 토너먼트 첫 경기가 사실상 결승전이었던 셈이다. ‘이런 걸작이 순위가 왜 1등이 아니냐’는 댓글이 종종 보이는데, 그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역시 ‘장르 비틀기’로 이해한다. 명실상부한 한국적 판타지물의 등장이 반갑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국,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 3국의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이 답을 내지 못한 테마, 즉 환경이나 포퓰리즘, 격차, 복지와 같은 공통의 문제를 함께 연구하는 게 돌파구가 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일본의 대표적 학술 출판사인 ‘이와나미 쇼텐(巖波書店)’에서 편집국 부장(한국의 편집장이나 국장)으로 출판 전체를 총괄하는 바바 기미히코(馬場公彦·59) 씨가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창립 6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최근 방한했다. 1913년 창업된 이와나미 쇼텐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지식인들부터 오늘날까지 읽히는 ‘이와나미 문고’와 잡지 시소(思想), 세카이(世界) 등을 비롯해 3만3000종의 책을 냈다. 13일 서울 종로구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바바 씨는 동아시아 3국 간에 역사, 영토, 안보 문제가 얽혀 갈등이 심화하는 오늘날 연구자들의 역할에 관해 “객관적 관찰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문제의 당사자라는 입장에서) 함께 토론하는 연구방법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바바 씨의 이 같은 주장은 그의 이력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1989년 이와나미 쇼텐에 입사해 시소와 세카이 편집부를 거쳐 학술·일반서 편집장을 지냈다. 와세다대에서 ‘전후 일본인의 중국상(像)’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책으로 출간된 논문은 2013년 중국에서 번역 출판되기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중국을 보는 일본인들의 시각도 마찬가지입니다. 1940년대 말 미군 점령기에 일본에서 중국과 국교를 맺어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히 제기된 배경에는 일본이 국제사회로 복귀하고 싶어 하는 심리가 깔려 있었지요. 1960년대 후반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당시에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에서 권력에 대한 저항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바바 씨는 “중국을 방문할 수 없었던 1980년대 이전 일본인들의 중국상(像)에는 이처럼 일본인들의 자화상이 투영돼 있었다”고 했다. 근래 일본의 ‘혐한’ 기류에 대해서는 “일본 사회는 계층 간 격차가 벌어진 뒤 타인을 용인하는 폭과 여유가 좁아졌다”며 “그게 가장 가까운 이웃인 한국에 대한 배외의식으로 표출되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바바 씨는 14일 오후 4시 서울 성북구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이와나미 쇼텐 100년과 동아시아 지식 교류’를 주제로 강연한다. 16일 오전 10시에는 서울 강남구 코엑스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출판사업의 미래를 주제로 발표한다. “‘두 사람이 사이좋게 지내면 둘 다 이득이지만 싸우면 둘 다 손해’라는 중국 속담이 있지요. 1990년대 후반 이후 동아시아 출판계는 각국의 정치 경제적 발전에 따라 교류가 활발해지고 상호 의존이 강해졌습니다. 학술 교류의 확대는 3국 관계에 긍정적인 효과를 낼 것이라고 봅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역사를 왜곡한다, 고유어를 금지하고 강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한다, 전통 문화를 열등한 것으로 비하하고 ‘우월한’ 문명을 이식한다, 기존 정치체제를 무너뜨리고 강제 병합한다, 땅과 자결권을 빼앗는다, 차별한다, ‘어차피 다른 열강에 의해 식민화될 운명이었으므로 이러한 행위는 정당하다’고 말한다….” 일제에 강점당한 한반도가 아니라 미국 하와이 얘기다. 하와이라고? 맞다. 아름다운 해변에서 원주민 여성이 훌라 춤을 추며 ‘알로하’ 인사하는 하와이, 한때 최고의 신혼여행지였던 ‘파라다이스’ 하와이, 지금도 ‘가보면 그렇게 좋다’는 하와이, ‘니가 가라 하와이’의 그 하와이다. 인디언 학살이라는 미국의 ‘원죄’는 잘 알려져 있지만 하와이 식민화는 비교적 낯설다. 미국은 1893년 하와이 왕조를 전복시켰고, 1898년 강제 합병했다. 오늘날 하와이는 엄연히 미국 국내와 국제법적으로 미국의 영토이며 50번째 주다. 책은 하와이 원주민의 시각에서 본 역사와 문화를 담았다. 1949년 태어나 하와이 원주민을 대표하는 저항운동가로 활동한 하와이대 명예교수가 1993년 썼다. 우리로 치면 한 권짜리 ‘기미 독립선언서’로 느껴진다. 폴리네시아인들이 하와이에 살기 시작한 건 기원 후 400년경이다. 하와이 원주민들은 1778년 제임스 쿡 선장이 도착하면서 서양과 처음으로 접촉했다. 이후 서양인들과 함께 들어온 전염병으로 하와이 인구는 급감했다. 서양인들은 토지의 사적 소유 제도도 들여왔다. 원주민은 토지를 뺏긴 채 굶어 죽어가는데 미국인들의 설탕 플랜테이션 농업은 번영했다. 저자는 미국인이 하와이 원주민을 억압적인 봉건제도에서 해방했다는 등의 ‘하올레’(백인) 역사학자들의 서술을 반박한다. “우리 과거를 폄하하는 건 그들(서양인)의 행위가 거울에 비춰진 것이다. ‘하와이의 왕은 토지를 소유하고 백성은 토지에 얽매여 있었다’는 건 누군가 토지와 인간의 관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서양의 무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 우리의 성생활이 문란하다는 건 서양의 기독교 사회에서는 연애가 죄악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 자연과 인간의 영적 힘을 믿는 것을 두고 미신을 섬긴다고 쓴다면 서양은 훨씬 전에 대지와의 깊은 정신·문화적 관계가 단절됐다고 폭로하는 것이다.” 물론 하와이와 한국은 다른 역사적 시간대를 산다. 억압당하는 원주민들의 하와이는 한국의 과거다. 그들에게 역사는 패전국들의 식민지에만 민족자결을 선언한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멈춰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반면 오늘날 상당수 한국인에게는 민족주의가 발전적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됐다. 한반도의 해방은 일제가 하와이 오아후 섬의 진주만 미 해군기지를 기습하며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가 패망한 결과로 얻어졌다는 점에서 북태평양 서쪽 한반도와 동쪽 섬의 식민 역사는 교차하고 엇갈린다. 그러나 섬 원주민―외지인의 구도로 보면 시사하는 점이 적지 않다.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는 책 해제에서 “하와이의 과거는 제주의 미래일 수 있다”며 저자의 연설문을 제주식으로 패러디했다. “우리 조상의 태곳적 터전이던 대지에 골프장과 테마파크가 들어섰습니다. 그 땅은 대부분 메밀이 재배되던 땅이며… 외지인의 손으로 넘어갔으며 속속 중국인에게도 넘어가는 중입니다. … 연간 10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을 담아내는 호텔과 펜션, 타운하우스 단지가 속속 건설되고 있습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