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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생명은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에 앞장서고 있다. 이 중 환경부와 함께 벌이는 환경교육 분야의 사회공헌 활동이 눈길을 끈다. 교보생명은 지난해 6월 환경부와 ‘지속가능한 미래 실현을 위한 환경교육 협력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보험, 금융, 유통, 식품, 항공, 교통 등 국민 일상생활과 밀접한 업계의 9개 기업이 협약을 맺었는데, 이 중 교보생명은 보험분야 대표 기업으로 참여했다. 교보생명은 환경교육 활성화와 탄소중립 실천 확산에 나서고 있다. 임직원 대상으로 다양한 환경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 기후변화에 따른 위기의식을 일깨우고, 환경보호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겠다는 것. 지금까지 교보생명 임직원 3350명이 환경보호 실천 다짐서약에 참여하고 환경보호 교육을 이수했다. 교보생명은 교육을 이수한 임직원 명의로 총 6700그루의 ‘환경 희망나무’를 베트남 빈곤 농가에 지원했다. 농가의 지속가능한 소득원 마련과 경제적 자립을 돕고 탄소중립을 실천하기 위한 취지다. 생활 속 환경보호 실천을 위해 임직원들이 참여하는 ESG 프로그램도 눈길을 끈다. 교보생명은 지난해 10월 편정범 사장 등 임직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플로깅(조깅을 하면서 쓰레기를 줍는 활동) 캠페인’을 진행했다. 강화도 동막해변을 시작으로 강화도 독립운동길을 걸으며 주변 쓰레기를 줍는 봉사활동을 펼쳤다. 연말 기부 프로그램 ‘굿윌마켓’을 통해서는 임직원들이 의류, 잡화, 도서 등 사용하지 않은 물품 3700점을 기부하는 리사이클링 환경보호 활동을 벌였다. 여기에서 거둔 수익은 장애인 경제자립 지원에 쓰였다. 교보생명은 올 6월 환경의 날과 환경교육 주간을 시작으로 ‘대국민 4대 환경교육 캠페인’을추진할 계획이다. 환경부와 함께 청소년과 일반시민이 참여하는 ‘환경미션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해 운영할 예정이다. 초중고생들이 앱 기반의 참여형 프로그램을 통해 환경보호 미션을 수행하는 프로그램이다. 교보생명은 우수학교를 선정해 시상하고, 나무 기부를 지원한다. 청소년들이 참여하는 ‘환경위기 지구본 만들기 공모전’도 개최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삼성생명은 업무 프로세스 전반에 걸쳐 디지털 혁신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고객 편의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가입, 유지, 지급 경험 개선에 집중했다. 올해도 각종 디지털 채널과 인공지능(AI) 기술 및 데이터를 활용해 고객 경험을 개선하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 삼성생명은 보험 가입과 계약 유지, 보험금 청구 등 각 단계에서 디지털화를 진행하고 있다. 먼저 가입 단계에서는 컨설턴트 상담 후 고객이 직접 계약 체결을 진행할 수 있는 ‘모바일 청약’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이를 통해 고객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보험 가입을 최종 확인하고 진행할 수 있다. 그 결과 태블릿 전자서명을 포함해 모바일 기기를 통한 개인보험 계약이 전체 계약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연간 청약에 필요한 종이 약 3800만 장을 절감하는 효과가 있어 ‘친환경 경영’에도 일조하고 있다. 올 6월부터는 컨설턴트가 태블릿PC뿐 아니라 스마트폰에서도 고객 등록부터 청약까지 가입 프로세스 전체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지난해 7월에는 비대면으로 보험을 선물하는 ‘보험 선물하기’ 서비스를 개시했다. 고객이 보험을 계약하고 지인에게 카카오톡 등을 통해 선물을 보내는 방식으로, 선물을 받은 사람이 해당 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한 번에 최대 30명까지 선물이 가능하고, 선물을 받은 사람이 전송받은 인터넷 주소를 누른 뒤 간단한 정보 입력과 본인인증을 마치면 별도 심사 없이 즉시 가입이 완료된다. 보험계약 유지 단계에서는 과거 플라자나 지점을 방문해 처리하던 업무를 고객이 직접 비대면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모니모(삼성 금융계열사 통합 애플리케이션)와 모바일 웹을 개선했다. 편리한 인증 방식, 빠른 속도, 쉬운 화면 구성으로 고객이 플라자를 방문하지 않아도 다양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보험료 납입도 모바일 웹이나 카카오페이 등을 통해 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통해 보험 가입 이후 모바일 웹에서 이뤄지는 고객의 디지털 업무처리율이 2020년 27.6%에서 2022년 42%로 높아졌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금 1g을 10개로 쪼개 살 수 있는 실물 기반의 대체불가토큰(NFT) 골드 교환권이 나왔다. 실물 기반으로 발행돼 투기를 막고, 금 거래 투명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상대적으로 값싸게 금을 살 수 있다는 것도 이점이다. 한국조폐공사는 1g의 카드형 골드바를 10개로 나눈 0.1g 미니골드 상품권을 시범 출시한다고 3일 밝혔다. 조폐공사 쇼핑몰에 접속해 미니골드(0.1g) 상품권을 구입하면 PIN 번호가 발급된다. 발급 사이트에 접속해 PIN 번호를 입력하면 NFT 골드교환권을 받을 수 있다. 교환권에는 고유번호가 매겨져 있으며, 교환권(0.1g) 10장을 모으면 카드형 골드 1g으로 바꿀 수 있다. 미니골드(0.1g) 상품권은 조폐공사가 처음으로 NFT를 적용한 디지털 제품교환권이다. NFT 골드교환권은 다른 NFT와 달리 실물기반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된다는 평가다. 조폐공사가 보유한 위변조 방지 및 정품인증 기술이 적용돼 보안이 한층 강화됐다. 특히 적은 금액으로 금 거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시장의 관심을 끌 것으로 보인다. NFT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지만 기존 가상자산과 달리 디지털 자산에 별도의 고유 값을 부여해 대체 불가능하다. NFT 골드교환권(0.1g)은 전자 형태로 발급돼 실물을 소지할 필요가 없다. 또 10개 교환권을 확보하면 고객이 원할 때 실물로 바꿀 수 있다. NFT골드교환권(0.1g) 10장으로 바꿀 수 있는 ‘디지털 제품교환권 카드형 골드’에는 중량 1g, 순도 99.99%로 정품임을 보증하는 잠상(숨겨진 이미지) 기술이 적용됐다. NFT골드교환권(0.1g)을 발급받을 수 있는 미니골드(0.1g) 상품권의 판매가는 1만4900원으로 조폐공사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조폐공사는 국내 금 거래소에서 거래되는 금 품질 인증을 전담하고 있다. 반장식 조폐공사 사장은 “실물 기반의 디지털 미니골드 상품권은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고 소액 거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금시장 투명화에 기여할 것”이라며 “화폐와 여권제조를 통해 구축한 공사의 위변조 방지 노하우를 디지털 세계에서도 적용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뉴질랜드 교포 골프 선수 리디아 고(25)가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의 아들 정준(27) 씨와 올해 말 결혼한다. 27일 금융업계에 따르면 두 사람은 올 12월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정준 씨는 현재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현대자동차 계열 법인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의 부친 정태영 부회장은 고 정경진 종로학원 설립자의 장남으로,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의 둘째 사위다. 리디아 고는 LPGA 투어 최연소 우승기록을 보유하고 있다.김상운기자 sukim@donga.com}

브렉시트와 샤이 트럼프의 공통점. 분노한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결집해 예상치 못한 정치적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와 트럼프 집권 모두 ‘설마…’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생존경쟁에 시달려 온 이들의 거센 반격에 이는 현실이 돼 버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복지국가의 꿀을 빨며 비교적 고분고분하게 살아온 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영국으로 이주해 현지인과 결혼한 일본인 여성 저자는 노동계층에 속하는 베이비붐 세대 이웃들을 세밀히 관찰하고 이 책을 썼다. 먹물 냄새 풍기는 학자들의 글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생생한 현실 묘사가 압권이다. 트럭을 모는 저자의 남편이 대처리즘과의 일전을 선포하며 생병을 앓는 대목이 특히 눈길을 끈다. 남편은 급작스러운 두통으로 국민보건서비스(NHS)의 무료 진료 서비스를 이용하려고 하지만 대기인원이 너무 많아 수개월째 병원 문턱조차 넘지 못한다. 저자는 돈을 써서라도 민간병원에 가자고 설득하지만 남편은 “NHS를 잃으면 영국이 복지국가였던 시절의 유산을 잃는 거다. 대처한테 지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린다. 그는 의료재정이 지금보다 풍족하던 시절 NHS 병원에서 말기 암을 치료한 경험이 있다. 저자는 몸뚱이가 전부인 영국 블루칼라 계층에게 무상진료 혜택은 큰 부분을 차지했지만, 신자유주의 정부의 재정긴축이 이를 앗아갔다고 주장한다. 우려스러운 건 이런 흐름이 외국인 혐오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 NHS 병원을 찾는 내국인 대비 이주민 수가 늘어난 데 따른 현상이다. 영국인들이 돈을 내고 의료서비스 질이 좋은 민간병원으로 몰리는 반면, 대출 여력조차 없는 이주민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NHS 병원을 이용하고 있어서다. 사정이 이런데도 극우 인사들은 NHS 재정을 외국인들이 축내고 있는 것인 양 사실을 왜곡하며 블루칼라 계층을 선동한다. 이들이 이민자 통제를 외치며 브렉시트를 지지하고 나선 배경이다. 복지와 경제효율이 상충하는 혼돈 속에서 노동계층과 이주민 사이의 간극이 벌어지는 비극은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남미의 대문호 마르케스가 냉전 초기 동유럽을 직접 둘러보고 쓴 책이라면 한 번쯤 호기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거다. 그의 소설 ‘백년의 고독’(1967년)과 ‘콜레라 시대의 사랑’(1985년)을 통해 현실과 환상이 절묘하게 결합된 ‘마술적 리얼리즘’에 빠져든 독자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언론인 출신답게 1950년대 동유럽 사회와 인간 군상의 민낯을 날카롭게 포착한 솜씨가 돋보인다. 시작은 한낮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나른한 카페에서 결행한 객기였다. 그의 이탈리아인 친구가 새로 뽑은 프랑스제 자동차를 어떻게 활용할까를 고민하다 “철의 장막 뒤에 무엇이 있는지 보러 가자”는 제안이 튀어나온 것. 아직 베를린 장벽이 들어서기 전이라 이들은 국경을 통과해 동독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한반도 분단과 맞물려 냉전 최전선이었던 베를린 기행이 특히 눈길을 끈다. 저자의 눈에 자유 진영의 서베를린과 공산 진영의 동베를린 모두 기묘하게 뒤틀린 도시로 비친다. 서베를린은 미국의 막대한 원조에 힘입어 거대한 ‘자본주의 선전장’이 돼 있었다. 거리마다 미국 수입품이 넘쳐나고 새로 건설된 건물들이 마구 들어서는 서베를린을 보며 저자는 “가짜 도시 같다”고 말한다. 동베를린에서는 ‘가짜 사회주의’의 폐해를 목도한다. 저자는 이곳에서 자본가 계층으로 분류돼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직후 자산을 빼앗긴 동독 남성 볼프를 만난다. 볼프는 자신의 사업체가 국유화된 뒤 정부로부터 자식에게 상속할 수 없는 조건의 배상금을 받는다. 볼프는 이 돈으로 외국인들이 이용하는 호텔, 바 등을 드나들며 의욕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는 저자와 밤새워 술을 퍼마시며 사회주의 정부를 욕하지만, 경찰이 감시하는 선거 때마다 결국 찬성표를 던졌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동독 시민들이 혐오하는 소련 주둔군에 대해서도 연민의 시선을 드러낸다. 이들과 우연히 가진 파티에서 정부 명령으로 낯선 땅에 파견되고서 모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고대하는 모습을 발견한 것. 결국 당시 냉전을 겪은 모두가 정치 체제의 희생양 아니었을까.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에세이의 힘은 자신의 치부마저 드러내는 ‘진솔함’에서 나온다.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한 유명인의 그것보다 생활인의 진심이 담긴 에세이 한 편이 훨씬 값진 이유다. 여기에 깊은 성찰이 담긴 시적인 문장까지 더해지면 더할 나위 없다. 이 모든 상찬은 오로지 이 책에 해당된다. 저자는 강원 속초시에서 8년째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장이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그는 “서점 한번 해보겠느냐”는 부친의 제안을 받고 20대 후반에 귀향한다. 그리고 거기서 아내를 만나 딸을 얻는다. 저자는 서점이라는 소우주에서 가족, 손님들과 겪은 일들을 자신이 추천하는 책 소개와 엮어 흥미롭게 풀어냈다. 유명 작가에게 북토크를 제안하는 장문의 편지를 썼지만 끝내 아무 답신을 받지 못하고 수치심에 빠진 일화가 눈길을 끈다. 이 문제로 고민하던 그는 그 속에서 자신의 마음에 똬리를 튼 ‘욕심’을 발견한다. 편지에 속초 산불로 침체에 빠진 지역 경기를 운운했지만, 결국 자신의 서점을 띄우기 위한 욕심이었음을 순순히 고백한 것. 그러면서 일본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통해 한순간의 잘못된 마음이 가져온 파국을 이야기한다. 딸을 어린이집에 보내기 전 서점에서 보살피며 매일 힘겹게 놀이터에 데려간 이야기는 묵직한 부정(父情)을 일깨운다. 서점에서 부부싸움을 하던 중 책을 추천해달라는 손님에게 줌파 라히리의 소설 ‘축복받은 집’을 소개한 뒤 아내와 화해한 이야기도 따스하게 다가온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2년 전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포드자동차 기자간담회를 취재한 적이 있다. 앨런 멀럴리 포드 회장 등 주요 경영진이 참석한 가운데 저녁식사를 겸한 자리였는데 만찬 장소에 놀랐다. 이 미술관의 백미(白眉)인 디에고 리베라(1886∼1957)의 걸작 벽화 ‘디트로이트 산업’(1933년) 바로 앞에 음식 테이블이 차려진 것. 미 연방정부의 국가사적(national historic landmark)으로 지정된 이 작품은 가로 23m, 세로 5m 벽면에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사실적으로 그린 대작이다. 1930년대 미국 자동차 산업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작품인 만큼 당시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벗어나 옛 위상을 되찾고자 한 포드의 목표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기업 주최 간담회를 많이 다녀봤지만 지금까지도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이유다. 만약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이건희 컬렉션 전시회에서 삼성전자가 이와 비슷한 행사를 치른다고 하면 어떨까. 당장에 “기부만 하면 다냐”며 국립박물관을 특정 기업이 사용하는 데 대한 ‘특혜 비판’이 쇄도할 것이다. 오래전 기억을 장황하게 꺼내든 것은 지난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공식 만찬을 놓고 불거진 논란 때문이다. 만찬 사흘 전에야 휴관을 통보해 사전에 예약한 일반 관람객들에게 피해를 끼쳤다는 비판이 나왔다. 일각에서는 1급 국가 유물이 즐비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높으신 분’들이 식사를 즐기는 게 온당하냐는 지적도 있었다. 이에 대해 K팝과 한국 영화의 위상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요즘 ‘문화 외교’ 차원에서 박물관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사실 대통령실의 서울 용산구 이전을 계기로 지척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의 국가 행사 활용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국빈 접대에서 장소가 주는 상징성이 작지 않아서다. 예컨대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흑해 연안 크림반도의 차르 여름궁전(리바디아궁)을 회담장으로 고집한 건 제2차 세계대전 승전 후 이곳과 연접한 동유럽 일대를 수중에 넣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었다. 한국 문화의 얼과 정수를 상징하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의 외교 만찬은 반만년 고유문화의 소프트파워를 각국 정상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다. 단, 국민들의 관람권 침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묘안이 필요하다. 예컨대 최소 일주일 전 임시휴관을 공지하거나, 가급적 폐관 시간 후 행사를 여는 식의 ‘국립박물관 및 미술관 활용 매뉴얼’을 만들어 대비하는 방안이 있겠다. 국빈 만찬 시 문화재 훼손을 막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유물들을 정상들의 동선상에 이동 전시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 만찬의 경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동문으로 입장해 만찬장인 으뜸홀로 이동하는 짧은 시간에 고려 전시실과 신라 전시실을 드나드느라 황남대총 금관 등 서너 점밖에 감상하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관람객 동선과 분리된 별도 행사 공간을 박물관 경내에 두자는 아이디어도 나온다. 문화재는 성물(聖物)이라는 고리타분한 생각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활용 방안을 찾아야 할 때다. 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바야흐로 ‘지정학의 귀환’ 시대다. 미국과 각을 세우는 중국은 ‘일대일로’ 정책을 앞세워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러시아는 흑해 연안의 요충지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했다. 첨단기술로 통신혁명이 이뤄졌지만 지리는 여전히 세계정치와 경제를 규정하는 핵심 요인이다. 약 100년 전 쓰인 지정학의 고전을 꺼내 봐야 하는 이유다. 영국 지리학자이자 정치인인 저자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듬해인 1919년 이 책 1부를 썼다. 당시는 유럽에서 장기 평화를 가능케 한 ‘빈 체제’가 붕괴되고, 대규모 살육전이 벌어진 직후라 지식인들이 1차 대전의 원인과 재발 방지에 골몰하던 때다. 그런데 저자는 지리 관점에서 베르사유 체제를 분석하며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가능성을 점치는 선견지명을 보여줬다. 자연환경과 자원이 편재된 탓에 지정학적 요지를 차지하려는 팽창주의 경쟁이 재현될 수밖에 없다고 본 것. 저자는 북극해와 고비·티베트 사막, 알타이·힌두쿠시 산맥에 둘러싸인 유라시아 중심부(러시아 서부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티베트·몽골까지 포함)를 ‘심장지대(heartland)’라고 부르며 중시하고 있다. 해양세력에 맞서 대륙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천혜의 요새인 이곳을 반드시 차지해야 한다는 것. 공교롭게도 구소련의 영토와 거의 겹친다. 2차 대전 종전 후 해양세력인 미국에 맞서 소련이 유라시아 대륙의 절대 강자로 부상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런데 바다, 산맥, 사막의 자연방벽에 둘러싸인 심장지대가 서쪽으로 동유럽에 열려 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심장지대를 뚫을 수 있는 일종의 급소인 셈. 2차 대전 때 히틀러가 독소 불가침조약을 깨고 동유럽을 침공한 이유다. 이는 현재에도 유효한 이야기다. 심장지대 서쪽 경계에 있는 흑해 연안에 우크라이나가 자리 잡고 있어서다. 결국 우크라이나 전쟁은 서방과 러시아의 갈등에서 지정학적으로 예정된 비극일 수 있다는 사실이 슬프게 다가온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야사(野史)는 언제 읽어도 재밌다. 여기에 마치 영화를 보듯 생생한 사람 이야기가 더해지면 게임 끝이다. 더구나 베일에 싸인 정보기관 이야기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영화로도 제작돼 큰 인기를 끈 베스트셀러 ‘남산의 부장들’ 저자가 속편을 냈다. 이번에는 저자 표현대로 시작부터 ‘유혈 낭자했던’ 제5공화국의 국가안전기획부장들 이야기다. 베테랑 언론인 출신답게 전직 안기부 요원부터 청와대 관계자, 외국 학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인터뷰를 통해 1980년대 한국 정보기관의 민낯을 생생히 드러냈다. 5공 안기부의 서막은 12·12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쿠데타 직후 중앙정보부(안기부의 전신) 부장에 ‘셀프 취임’한 전두환이 열었다. 그는 1980년 6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장에 취임하기 전까지 약 한 달간 중정을 직접 이끌며 연간 예산의 15%에 달하는 120억 원을 통치자금으로 쓴다. 국가안보 예산을 정치자금으로 전용한 것이다. 책에서는 검찰, 경찰, 군 수사기관 등 모든 사정기관 위에 군림하며 초법적 권한을 행사한 안기부의 파워게임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이 중 1982년 6월 터진 대원각 외화 밀반출 사건을 계기로 안기부가 검찰과 사법부를 옥죈 사례가 눈길을 끈다. 당대 유명 요정 대원각을 소유한 이경자 씨 등이 27만 달러를 해외로 빼돌리려다가 적발됐는데도 보석으로 석방된 데 이어 검찰이 항소를 포기한 것. 뭔가 수상한 냄새를 맡은 안기부가 대법원장 비서관과 변호사를 남산 지하실로 끌고 가 이 씨로부터 뇌물을 받고 사건을 무마했다는 자백을 받아낸다. 안기부는 이창우 서울지검장의 방을 몰래 뒤져 이 씨의 남편에게 받은 호텔 숙박권도 찾아낸다. 이로 인해 당시 검찰과 법원 간부들이 대거 옷을 벗었다. 저자는 증인들의 입을 빌려 안기부가 각종 시국사건에서 마찰을 빚은 검찰, 법원을 길들이고 조직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벌인 공작이었다고 분석한다. 이 과정에서 고문 수사의 명수였던 안기부가 대검 중앙수사부의 가혹행위를 고발한 대목은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떠올리게 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나의 가장 왕성한 활동기에 초점을 맞춰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음을 반성한다.” 김진현 전 과학기술처 장관(86)이 공직에서 물러나 1995년 서울시립대 총장으로 재직할 당시를 돌아보며 남긴 글이다. 동아일보 기자를 지낸 그는 당시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추진위원회 위원장과 한국경제신문 회장을 겸직했다. 통상 자화자찬이나 미화 일색인 고위공직자 회고록과 달리 저자는 이 책에 자기반성과 더불어 신랄한 정치·사회 비판을 담았다. 1992년 각 부처 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월성 원전 2호기 건설허가를 위해 열린 원자력위원회 회의 기록도 당시 공직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날 회의가 끝나자마자 한 장관이 “김 장관, 왜 인사가 없어”라고 소리쳤단다. 원전 공사 수주업체가 관행상 돌리던 뇌물이 왜 안 들어오느냐고 공개적으로 다그친 것. 나중에 해당 업체가 저자에게 억 단위의 수표를 보냈지만 이를 돌려보낸 일화도 남겼다. 저자는 “6·29선언 이후 정치 형식만 민주화되었지 비정도(非正道)의 관행은 건재했다”고 썼다. 이 책은 근대화와 민주화를 거치며 현존 세대 중 특히 역동적인 경험을 가진 1930년대생 원로의 일대기를 담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은 저자는 일제와 미군정, 대한민국, 북조선의 네 가지 통치 체제를 경험했다. 언론계와 관계, 학계를 두루 거친 그의 회고록을 되새겨 볼 만한 이유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윈스턴 처칠, 스탈린, 호찌민…. 국가도 인종도 다르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절체절명의 전쟁에서 역전에 성공한 지도자라는 사실이다. 처칠이 총리에 오를 당시 영국은 고립무원 그 자체였다. 러시아를 제외한 전 유럽대륙을 정복한 히틀러는 “영국의 독립만은 보장해주겠다”고 했다. 스탈린은 1941년 독소 불가침 조약을 깬 히틀러의 침공으로 연일 참패를 거듭했다. 호찌민은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를 가까스로 이겼지만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의 전쟁에 직면한다. 이들은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을까. 일본의 경영학, 군사학 전공학자들은 이 책에서 전쟁사를 통해 적을 이길 수 있는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손자병법부터 노장사상, 후설의 현상학에 이르기까지 동서양 고전에 담긴 지혜도 폭넓게 응용한다. 저자들에 따르면 처칠 등 역전의 명수들은 상황과 맥락의 변화에 따라 구체화된 전략을 실천하는 이른바 ‘지략(智略)’에 능했다. 과거의 승리 공식을 금과옥조로 여기다 새로운 국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 예컨대 저자들은 전작 ‘실패의 본질’에서 일본이 러일전쟁의 승전 경험에 집착한 탓에 태평양전쟁에서 패했다고 주장한다. 상황 변화에 따라 대립적 전술을 적절히 혼합 구사하는 유연성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전술의 양대 축인 소모전과 기동전 중 하나만 택하면 실패하기 쉽다는 것.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미국과 노르망디에서 제2전선을 구축할 때는 기동전을 구사했지만, 그 전까지는 독일의 런던 공습에 소모전으로 임했다. 독일의 도발에도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는 ‘전략적 인내’를 택했다. 그 결과 미국이 참전하기까지 시간을 벌면서 후일을 도모할 수 있었다. 호찌민도 베트남전 초기에는 방어전을 벌이다 이후 게릴라전으로 버티며 소모전을 벌였다. 막판에 전쟁이 장기화돼 미국 내 반전 여론으로 적의 사기가 꺾이자, 총반격을 가하는 정규전으로 전환해 승리할 수 있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맛집은 광화문 방면을 추천드립니다.” 12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춘추문 앞. 정장에 선글라스를 낀 대통령경호처 직원이 청와대 전면 개방 행사를 찾은 관람객에게 나긋한 목소리로 안내했다. 대통령 관저 뒤편 오운정(五雲亭·서울시 유형문화재)에서도 “이게 뭐냐?”는 관람객 질문에 다른 직원이 마치 문화해설사처럼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때 지은 건물”이라고 친절하게 답했다. 수년 전 문재인 대통령 집무실이 있던 ‘여민 1관’ 앞에서 굳은 표정으로 주위를 경계하던 직원들의 모습이 떠올라 순간 격세지감을 느꼈다. 최고 권부(權府)에서 국민 관광지로의 대격변이다. 이날 대통령실은 청와대 관람 신청 인원이 231만2740명에 이르자, 신청 기간을 연장하기로 했다. 국민의 관심이 이처럼 뜨겁지만 역사문화 공간으로서 청와대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마스터플랜은 아직 없다. 이곳은 고려시대 남경의 이궁부터 조선시대 경복궁 후원, 일제강점기 총독 관저를 거쳐 광복 후 경무대와 청와대에 이르기까지 약 900년의 장구한 역사를 품고 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청와대 안팎에 보물, 국가사적 등 61점의 문화재가 있다. 특히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관가(官街)가 들어선 광화문 육조거리를 비롯해 북촌, 서촌, 한양도성을 아우르는 역사 공간의 의미는 대통령실 이전 후에도 여전히 각별할 수밖에 없다. 문화계를 중심으로 문화유산으로서 청와대 활용 방안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현존 문화재와 건축물을 놓고 볼 때 조선시대 경복궁 후원과 권부로서 근현대 건축물의 두 가지 성격에 주목하고 있다. 전자를 우선시한다면 1990년 시작된 경복궁 복원사업과 연계해 국가사적으로 관리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사적으로 지정되면 주변 개발이 제한돼 주민 불편이 따를 수 있다. 청와대 본관이나 대통령 관저와 같은 현대 건물을 박물관 등으로 활용하는 데도 제약이 생긴다. 이에 따라 보존과 개발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근대역사문화공간’ 지정 방안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거론되고 있다. 기자는 수년 전 휴가를 맞아 전남 목포시 근대역사문화공간을 가족들과 둘러본 적이 있다. 구시가지 거리를 끼고 옛 일본영사관(현 근대문화역사관 1관)과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근대문화역사관 2관) 등 경제, 외교 침탈의 생생한 역사 현장이 늘어서 있어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역사관 내부는 각종 자료와 사진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꾸려졌다. 일제강점기를 책으로만 본 이들도 동양척식회사 건물 안의 거대한 금고를 보며 수탈의 실체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청와대 공간 활용과 관련해 참고할 만한 사례다. 지난달 한국건축역사학회가 주최한 ‘경복궁 후원의 역사적 가치와 현실적 의미’ 학술회의에서 전문가들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청와대 활용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직까지 고려시대 이궁 터 위치조차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자칫 열띤 분위기에 휩쓸려 일을 조급하게 추진하지 않기를 바란다.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숨겨진 1인치를 찾았다.’ 26년 전인 1996년 큰 주목을 받은 삼성전자 TV 광고 문구입니다. 축구 경기에서 화면에 보이지 않던 선수가 슛을 성공시키는 모습을 보여주는 명장면이죠. 유물도 눈에 당장 보이지 않는 가치가 더 빛날 때가 있습니다. 동아일보는 ‘이건희 컬렉션’ 기증 1주년을 맞아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유물 및 작품에 담긴 사연을 통해 숨은 가치를 발견하는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지난달 28일 개막한 국립중앙박물관의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에는 유독 중년 여성들이 몰리는 전시품이 있다. 자식 키우는 어머니 입장에서 280년 전 빛바랜 책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는 애틋함이 묻어 있다. 2부 중간 통로에 자리 잡은 ‘경현당 갱재첩(景賢堂 갱載帖)’이다. 1741년(영조 17년) 마흔일곱의 왕이 4년에 걸친 춘추집전(春秋集傳) 경연을 마친 것을 기념해 일곱 살의 사도세자와 신하 13명을 불러 경희궁에서 벌인 잔치(선온)를 그림과 글로 남긴 책이다. 전시장 벽면에는 ‘아들을 못 미더워하는 아버지의 불안함이 훗날 비극의 씨앗이 되고 말았습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문구가 붙어 있다. 그런데 과연 이때부터 부자간의 비극이 시작된 걸까. 가로 38.5cm, 세로 27.5cm의 이 작은 책에 담긴 진실은 무엇일까.○ 집착인가, 부정(父情)인가 “세자의 덕스럽고 총명한 모습은 근엄하고, 나라를 도울 공부에 박차를 가하니 국가의 끝없는 복이 참으로 여기 달렸습니다.”(좌승지 김상성) “세자가 노는 데 정신이 팔려 얼굴색이 매우 검다. 너는 여러 신하와 대면하면서 공부한 책을 읽을 수 있는가?”(영조) 갱재첩에는 영조가 지금의 대통령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承政院), 학문 및 정책 연구기관인 홍문관(弘文館) 관리들과 더불어 사도세자에 대해 대화하는 장면이 기록돼 있다. 자식 자랑을 하면 팔불출이 될까봐 그랬을까. 영조는 사도세자의 영민함을 칭찬하는 신하들에게 “노는 데 정신이 팔려 공부를 게을리한다”며 세자 앞에서 면박을 준다. 그러곤 잔치를 벌이기 전 학습교재(동몽선습)를 가져오게 한 뒤 세자가 배운 부분을 읽도록 했다. 세자는 이를 막힘없이 읽었다. 우승지 이도겸이 “1장을 강의한 지 100여 일이 지났는데도 잊은 곳이 없다. 어린 나이에 기억력이 뛰어나다”고 거듭 칭찬하지만 영조는 다른 시험을 낸다. 한자음 3개를 들려주고 해당 글자를 책에서 가리키도록 했는데 세자는 이번에도 통과한다. 영조는 그제야 “동궁(세자)이 처음에 3번 정도 읽고 겨우 음과 토에 익숙해지자 곧 암송할 수 있었다”며 은근히 자식자랑을 한다.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조선후기사)는 “아들이 자만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엄한 교육을 시킨 것이지 이때부터 사도세자와의 비극이 시작됐다고 보는 건 무리”라고 말했다. 반면 학문이 높았던 영조가 아들을 자신의 눈높이까지 끌어올리려 한 집착이 이 대목에서 읽힌다는 견해도 있다. 서자 출신으로 숙종의 적통이 아니라는 콤플렉스가 세자에 대한 과도한 훈육으로 이어졌다는 것. 허문행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영조는 유독 신하들 앞에서 어린 세자가 공부 못한다는 소리 듣는 걸 용납하지 못했다. 사도세자가 왜 비극적인 상황을 맞았는지에 대한 단초가 갱재첩에 담겼다고 보고 이를 전시에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통치 정당성’ 확보에 올인 사실 이날 잔치는 차기 권력인 세자에게 미래의 집권층을 형성할 젊은 관료들을 소개하고, 이들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리였다. 영조는 세자에게 “여기 있는 신하의 할아버지와 부친은 모두 역대 임금들을 섬겼다. 그리고 이들의 자식과 손자도 모두 너와 함께 늙어갈 사람이니 너는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날 등장하는 신하들 상당수는 40세 전후의 젊은 청요직(淸要職·언로 역할을 한 중하위직) 관리들로 당파 싸움에서 한발 떨어진 이들이었다. 흥미로운 건 이날 영조가 특별히 ‘당습(黨習·당파 싸움)’을 경계하는 발언을 한 사실이다. 왕권 강화를 위해 당쟁을 막은 자신의 강력한 탕평책이 세자 집권 후에도 유지돼야 함을 강조한 것. 이는 노론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과 소론 일부 세력이 일으킨 ‘이인좌의 난’(1728년)으로 영조가 즉위 4년 만에 위기에 빠진 경험이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상황은 영조의 콤플렉스는 물론 권력 기반과도 엮여 있었다. 이인좌의 난 때 반대파가 주장한 영조의 ‘경종 시해설’이 통치의 정당성을 훼손했기 때문이다. 이에 영조는 탕평책을 실시하며 자신의 이복형 살해 혐의를 벗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경종 시해 혐의로 노론 인사들이 대거 숙청된 1722년(경종 2년) 임인옥사(壬寅獄事)를 무고에 의한 억울한 옥사라고 판정한 1740년(영조 16년) 경신처분(庚申處分)이 대표적이다. 갱재첩이 발간되기 바로 직전 해에 벌어진 일이다. 이근호 충남대 교수(조선후기사)는 “영조는 자신이 형의 죽음과 관련이 없다는 걸 경현당 갱재첩이 발간된 1741년까지 강조한다”며 “갱재첩은 영조가 신하들과 더불어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천명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수년 전 이탈리아 피렌체 국립복원연구소(OPD)를 취재할 때 15세기 르네상스 거장 도나텔로의 ‘막달라 마리아’(1455년)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나무 조각상 곳곳을 채색해야 할 정도로 색이 바랬지만, 구도자의 처연한 표정과 몸짓에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나무의 물성 안에 500여 년 전 작가의 감성이 생생히 살아 숨쉴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작품을 다룬 이 책을 보며 예전 기억이 떠오른 건 저자가 피렌체에서 미술품 복원을 전공한 미술사학자여서다. 책에는 10년 넘게 유학 생활을 한 그의 경험이 작품 설명과 곁들여져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저자는 이성과 감성의 균형을 추구한 르네상스의 지성이 미술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도나텔로의 ‘다비드’ 청동상(1440년).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구약성경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은 서사보다 ‘몸’ 자체에 주목하고 있다는 게 그의 견해다. 다양한 표현 기법을 통해 매끄럽게 빛나는 인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했다는 것. 이에 비해 다비드의 모자에는 지성을 상징하는 그리스 신 헤르메스를 조각했다. 저자는 “야수적 본능을 상징하는 골리앗을 제압한 뒤 다비드가 짓는 미소는 인간 지성의 발견을 기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도나텔로를 비롯한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이 파고든 지성은 고대 그리스 문화로부터 깊은 영감을 받았다. 여기에는 피렌체를 다스린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의 영향도 컸다. 그는 1439년 동로마제국에 살던 그리스 석학들을 대거 초청해 피렌체 예술가, 학자들과 교류하도록 했다. 복원사 출신답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1494∼1498년)이 후세 복원 과정에서 오히려 훼손된 사례도 소개했다. 요즘에는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언제든 지울 수 있는 수채화로 미술품을 복원한다는 사실은 국내 문화재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제목에서부터 아날로그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이를 보고 금성(LG전자의 옛 이름) 브라운관 TV의 철제 원형 버튼을 ‘드르륵’ 돌리는 모습이 떠오른다면 당신은 이미 연식이 꽤 있는 사람이다. 화학자이자 공상과학(SF) 소설가인 저자는 넷플릭스 같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가 부재하던 시절, TV 채널을 무작위로 돌리다 ‘얻어걸린’ 영화에 푹 빠진 일화를 흥미롭게 소개한다. 그 시절, 별 기대 없이 지상파 영화 프로그램을 우연히 지켜보다 ‘인생 영화’를 만난 경험이 기자에게도 있다. 이 책은 SF 고전 영화들을 중심으로 저자의 감상과 기술문명에 대한 평론 등을 다각도로 엮은 에세이다. 이 중 1984년작 영화 ‘터미네이터’를 통해 로봇 영화의 계보와 의미를 분석한 장이 흥미를 끈다. 자신의 존재를 인식한 인공지능(AI)이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 핵전쟁을 유발하는 줄거리의 영화에서 터미네이터는 궁극적으로는 사람 이야기를 하기 위한 도구라는 게 저자의 견해다. 노예로 취급 받아온 로봇의 반란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말하고 있다는 것. 기계가 선사하는 달콤한 가상세계에 갇혀 사는 인류를 그린 영화 ‘매트릭스’(1999년)도 마찬가지다. 현란한 컴퓨터그래픽(CG) 기술로 날로 새로워지는 최신 SF 영화들도 결국 자유와 평등을 논하는 오랜 고전 작품들의 또 다른 변주가 아닐까.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독일인같이 교양 있고 책을 많이 읽으며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파시즘에 만족할 수는 없다.” 1934년 우익 지식인 에트가어 율리우스 융(1894∼1934)은 나치에 의해 살해당하기 전 이 말을 남겼다. 반(反)지성주의를 내건 파시즘은 이성적인 독일과 양립할 수 없다는 그의 말과는 달리 히틀러는 10년 넘게 철권을 휘둘렀다. 나치 집권으로 붕괴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은 비례대표 선거제와 인권보호 등 당시로선 최첨단의 민주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독일에서 어떻게 히틀러라는 괴물이 출현할 수 있었을까. 미국 역사학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히틀러 집권의 배경을 1930년대 당시 독일이 처한 국제정세와 국내 여론, 개별 정치인들의 의도와 맞물려 분석하고 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치는 존재할 수 없었다고 전제한다. 독일은 1차 대전 당시 전투부대가 궤멸당하지 않은 채 내부체제 붕괴로 패전했다. 그러고선 천문학적 배상금과 더불어 영토 상실을 겪어야 했다. “내부의 적 때문에 위대한 독일민족이 치욕을 당했다”는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강변이 독일인들에게 먹혀든 배경이다. 나치의 여론조작 책략도 한몫했다. 1933년 2월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 당시 히틀러는 이를 공산주의 음모로 규정하고, 정적을 탄압하기 위한 ‘비상대권’의 구실로 삼았다. 여기에 보수 우파와 군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자기편이던 돌격대(SA)마저 집단 학살한 무자비함도 권력 강화로 이어졌다. 저자는 현 시대가 탈냉전 직후 자유민주주의 승리를 외치던 1990년대보다 나치가 발흥한 1930년대에 오히려 더 가깝다고 말한다. 우파 포퓰리즘과 신냉전의 국제 갈등으로 점철된 현재가 민주주의와 세계평화를 파괴한 나치시대를 연상시킨다는 것. 전무후무한 여당의 입법 폭주로 법치주의 근간마저 흔들리고 있는 한국에도 남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아름답지 않네?” 최근 개봉한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서 북한 천재 수학자 이학성(최민식)이 수포자 고교생 한지우(김동휘)에게 이른바 ‘파이(π) 송’을 들려주며 건네는 말이다. 무리수인 원주율 3.141592…를 각각 음표로 바꿔 피아노로 친 것. 실제로 유튜브에는 파이송 연주 동영상들이 올라와 있는데, 신기하게도 누군가 작곡이라도 한 듯 독특한 분위기의 화음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영국 천문학자와 수학자가 공저한 이 책은 도넛부터 체스판, 우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수학 원리가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중 특히 음악과 수학의 밀접한 관계가 흥미롭게 서술돼 있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학파는 현악기를 짚는 위치가 정수비일 때 가장 조화로운 음정이 나온다는 것을 발견했다. 흥미로운 건 화음을 우주의 운영 원리와 결부시킨 이들의 시각이 17세기 유럽 천문학 발전에 일조한 사실이다. 독일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화음이 천상계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는 가설을 전제로 ‘행성운동의 3법칙’을 발견했다. 현의 진동 개념을 연역해 행성들과 태양 사이의 거리, 속도를 연구한 것. 그 결과 행성 공전주기의 제곱은 궤도 긴반지름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음악은 이처럼 수학원리를 내재하고 있기에 새소리 등 동물이 내는 음향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게 저자의 견해다. 다시 말해 사람과 같은 고등 생명체가 외계에 있다면 음악으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할 수 있다는 얘기다. 보이저호를 발사할 때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녹음한 레코드를 함께 넣은 이유다. 당시 어떤 곡을 선별할지 과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했는데, 바흐 곡이 3곡으로 가장 많았다고 한다. 대위법에 따라 선율을 엮은 그의 작품이 가장 수학적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수학은 아름답다’는 명제가 어딘가 있을지 모르는 외계인에게 닿기 전에 부디 중학생 아들에게 와 닿기를 바라본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허 참 누가 못 앉게 일부러 돌덩어리들을 올려놓았네.” 14일 정오 서울 종로구 북악산(백악산) 법흥사 터. 평일 점심시간인데도 빼곡히 몰린 등산객들 사이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5일 북악산 남측 탐방로 개방 행사 때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앉아 논란이 된 초석(礎石·주춧돌)을 포함해 18개 초석들 위에 기와 조각과 돌, 불상이 올려져 있었다. 이곳을 몇 차례 찾았다는 남성은 “대통령 논란 직후 ‘사진 명소’가 돼 방문객들이 초석에 떼 지어 앉아 사진을 찍곤 했다”며 “이를 보고 심기가 불편해진 누군가가 이런 일을 한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 이날 오후 문화재청은 법흥사 터 주변에 가림 막을 치고 초석 위에 올린 기와 조각 등을 치웠다. 앞서 8일 조계종은 “문화재청장과 국민소통수석이 비(非)지정 불교 문화재에 대해 천박한 인식을 공개적으로 드러내 사회적 논란을 가중시켰다”며 이들의 사퇴를 요구했다. 문화재청이 법흥사 터 초석은 지정 또는 등록문화재가 아니라는 입장을 밝힌 데 따른 반박이었다. 문화재계에서는 논란이 된 초석들이 문화재에 해당하는지에 대해 부정적 의견이 많다. 지난해 4∼11월 학계 전문가들의 북악산 남측 탐방로 일대 조사 결과를 담은 ‘백악산의 자연유산과 역사문화 종합 학술보고서’는 “법흥사 터 초석 20개는 역사적 건축물에서 느껴지는 단아하고 예스러움을 찾기 어렵다는 점을 봤을 때 1955년 이후 불전 조성 준비 과정에서 마련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결론 내렸다. 1955년 청오 스님이 법흥사 터에서 불전을 증축할 때 사용한 일종의 ‘건축 부재’라는 것이다. 현대에 지어진 이 사찰은 1968년 1·21 무장공비 침투 사태로 북악산 출입이 금지되면서 사라졌다. 현장을 조사한 한 전문가는 “초석 관련 역사 기록이 없어 근현대 문화재로 볼 여지도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번 논란에서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생각은 없다. 다만 이를 계기로 문화재를 보존하면서도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안을 고민해 봤으면 한다. 설사 법흥사 터 초석들이 지정문화재라고 하더라도 시민들을 위한 ‘쉼의 공간’으로 활용할 수는 없을까. 수년 전 취재차 터키의 고대 도시 히에라폴리스의 온천 수영장을 갔을 때 놀란 기억이 있다. 고대 수영장(antique pool)으로 불리는 이곳에는 2500년 전 로마시대 기둥과 조각상들이 바닥에 깔려 있다. 692년 큰 지진으로 무너진 고대 도시유적 위에 물이 들어차 독특한 온천장이 만들어진 것. 우리나라였다면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수장된 기둥과 조각상을 끌어내 보존 처리에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터키 정부는 오히려 이곳을 시민들이 유적과 함께하는 휴식공간으로 조성해 세계적 관광 명소로 만들었다. 만약 이것이 심각한 문화재 파괴였다면 유네스코가 히에라폴리스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천 년 된 고대의 기둥을 밟으며 힐링하듯, 초석만 덩그러니 남은 절터에 앉아 무념무상의 가치를 되새기는 건 욕심일까.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최근 가장 가시 돋친 반중(反中) 서적 중 하나는 클라이브 해밀턴 호주 찰스스터트대 교수가 쓴 ‘중국의 조용한 침공’(세종서적)이었다. 이 책은 호주인들의 반중 정서가 폭발한 2016년 ‘중국발 스캔들’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당시 중국 정부는 호주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주요 정당과 대학, 언론 등에 돈을 뿌렸다. 중국의 목표는 인도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강력한 동맹인 호주와 일본, 한국을 미국으로부터 떼어내는 것이라는 게 해밀턴 교수의 주장이다. 지리가 모든 걸 결정한다는 신념을 가진 영국 언론인 팀 마샬의 이번 신간은 미중 경쟁 구도 속 지정학 갈등을 다루며 호주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150만 부가 팔린 전작 ‘지리의 힘’이 미국, 중국, 러시아 등 국제정치 핵심 플레이어를 주로 다뤘다면 신간은 이들과 영향을 주고받는 호주,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견국(middle power)을 중심에 놓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호주의 중국 견제를 지리 요인으로 풀고 있다. 하나의 섬이자 그 자체로 대륙인 호주는 유라시아 및 아메리카 대륙에서 뚝 떨어져 거대한 태평양과 인도양에 둘러싸여 있다. 외침을 당하기 힘든 천혜의 요새이지만, 모든 무역통로가 쏠려 있는 북쪽 해협이 막히면 고사를 당할 위험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동남아를 휩쓴 뒤 파푸아뉴기니를 침공해 호주의 숨통을 조였다. 당시 광활한 대양을 넘어 일본과 싸워줄 구세주는 미국뿐이었다. 이로써 호주는 식민지 종주국 영국 대신 미국과의 동맹에 올인하게 된다. 문제는 과거 일본이 벌인 해상봉쇄를 중국이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은 남중국해의 80%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한 데 이어 남태평양에 인공 섬을 만들고 군사기지를 세우고 있다. 중국을 최대 교역국으로 둔 호주가 미국과 함께 대중 견제에 나선 이유다. 전작의 원서제목(Prisoners of geography·지리의 포로들)이 시사하듯 지정학이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설 수밖에 없다면 지금 호주의 상황은 중국을 지척에 둔 우리와도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