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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예하게 의견이 갈리는 오늘날의 역사 인식과는 별개로 미래의 역사 서술을 위해 묵묵히 사료를 수집하고 편찬하는 데 힘써야 할 곳이 ‘국사편찬위원회(국편)’다. 14일 동아일보와 만난 조광 국사편찬위원장은 “무엇보다 국편은 권력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편위원장으로 72주년 광복절을 맞는 소감은…. “‘신아구방(新我舊邦·묵은 나라를 새롭게 한다)’이라는 다산 정약용의 말이 생각난다. 해방은 우리나라를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진정한 계기였다. 지금이라도 각종 사료에 대한 철저한 정리가 요청된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에 맞춰 전국적인 시위정보를 총정리하고, 데이터베이스를 지리정보시스템(GIS)과 연계 구축해 인터넷 홈페이지에 공개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홀대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우해 왔는가, 그 자체도 역사다. 후손들의 증언을 듣는 구술사 작업을 내년부터 착수할 것이다. 제목은 ‘독립운동가 후손 고생담 사료집’ 정도 될까?” 그에게 해방둥이로서 광복절 소감을 다시 묻자 흥미로운 사연이 이어졌다. “사실 제 생일이 1945년 8월 15일이지만 호적에는 큰아버님이 10일로 잘못 올렸다. 해방 전날 이웃집에 일본군에 징집될 이가 있어 사람들이 모여 슬퍼하고 떠드는 통에 어머니는 진통이 더욱 힘들었다고 한다. 저를 낳은 뒤 끌려갈 뻔한 사람들이 다 집에 돌아왔다며 기뻐했다는 말도 들었다. 허허.” ―일본군 ‘위안부’ 정본 사료집 편찬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유엔이나 중국에서 사료집이 나온다 해도 우리의 시각으로 모으고 비판을 거친 사료집이 필요하다. 사료 수집이 부실하면 역사 서술은 사상누각이다. 국편이 꽤 오래전부터 이 작업에 관심을 뒀고, 지난 위원장님 때부터 착수한 사업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입맛에 맞는 역사 서술을 시도하는데…. “권력이 역사를 함부로 갖고 놀지 못하게 하려면 국편부터 독립해야 한다. 이 기사 보고 ‘너무 나갔는데…’라고 생각할 분들도 있겠다.” ―국편은 앞으로 교과서 검정 업무도 맡지 않나. “국편이 교과서와 무관할 때 설립 목적에 비로소 충실할 수 있다. 2011년 국편이 검정 업무를 맡은 건 교육부 내 국편 담당 부서가 초중등 교육을 관리하는 학교정책실이었다는 단순한 이유가 적지 않게 작용했다. 제가 취임 직후 담당 부서를 대학정책실로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국사편찬위원회라는 명칭도 바꿀 생각인가. “오래된 과제다. 내부적으로 새 명칭 후보를 추려 공청회 등 합의 과정을 거치고 학계의 동의를 받을 예정이다. 과거에는 국립역사원이나 국립한국사료원 등의 명칭이 대안으로 거론됐다고 한다.” ―국가기록원과의 통합에 찬성한다고 했지만 소속 부처가 달라 쉽지 않을 수 있다. “현대사 사료가 중요한데 해방 이후 사료집이 제대로 편찬되지 못했다. 중요 사료는 비공개로 분류돼 접근 자체가 어려운 것이 상당하다. 많은 국가가 기록 생산 20∼30년만 지나면 사료로 공개하고 있다. 국가기록원과 긴밀하게 협력해 정부 기록을 사료집으로 간행하겠다.” ―취임 후 두 달 동안 일하며 느낀 점은…. “직원들이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심적 고통이 컸다. 교과서 편찬이 국편의 일이라고 생각한 연구원은 사실 거의 없다. 국정화를 반대하던 단체들이 교과서 편찬에 관여했던 국편 직원의 ‘인적 청산’을 거론하기도 했지만 직원들은 자진해서가 아니라 상부의 명령을 받고 공무원으로서 일을 한 것뿐이다. ‘국편 명의의 대국민 사과’도 일부에서 권유받았지만, 이것이 다른 국정화 추진 주체들을 면책하는 일로 인식될 수 있다고 판단해 일단 보류하고 있다. 또 국편 연구직이 현재 40여 명인데 태부족이다. 기존 업무 부담이 적지 않아 새 사업 착수가 쉽지 않아 증원이 필요하다.” ―임기 중 ‘이것만은 꼭 이뤄내겠다’는 것은 무엇인가. “북한까지 포함해 해방 이후 남북한 사료 총서를 내는 것이다. 북한 사료를 평양에 가서 달라고 하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 등 해외에서 수집할 수 있다. 북한 역사 연구를 위한 사료도 적극 수집해야 한다.” ○ 조광 국사편찬위원장(고려대 명예교수)은 가톨릭사 연구의 권위자이자 조선후기 실학과 사상사 연구, 안중근 의사 연구 등에서 업적을 낸 한국사학계 원로다. 원래 신부가 될 생각으로 가톨릭대 신학과를 졸업했으나 역사 연구로 진로를 틀어 고려대 사학과에 편입한 흔치 않은 이력을 갖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와 문과대학장, 한국사상사학회·조선시대사학회·한국사연구회 회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국사편찬위원회(국편)는 앞으로 교과서 편찬은 물론이고 검정에도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교과서를 편찬하는 곳이라는 오해를 낳은 ‘국사편찬위원회’라는 이름부터 바꾸겠다. 국편이 정권의 입김에 휘둘려서는 절대 안 된다.” 72주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조광 국사편찬위원장(72·고려대 명예교수·사진)의 말에는 학자다운 단정함과 단호함이 함께 느껴졌다. 올 6월 취임한 뒤 두 달이 지난 그를 경기 과천시 국편에서 단독으로 인터뷰했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일 태어나 ‘해방둥이 중의 해방둥이’다. 그는 향후 국편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처럼 정권으로부터 제도적으로 독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그 가운데 사료 편찬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뚜벅뚜벅’ 수행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국편은 지난 정부에서 국정 역사 교과서 편찬 업무를 맡아 논란의 중심에 섰고 2011년부터는 역사 교과서의 검정 업무를 맡기도 했다. 해방둥이로 국편의 수장이 된 그는 광복절을 맞아 짙은 아쉬움도 토로했다. “광복 72주년이 됐지만 우리 손으로 만든 위안부 정본(正本) 사료집 하나 없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위안부 연구조차도 일본 측이 만든 자료집에 상당 부분 의존해야 하나? 해외에 산재한 일본군 전쟁 범죄 등 자료를 전량 수집, 편찬하는 사업에 최선을 다하겠다.” 조 위원장은 새 정부 들어 정치권 등에서 흘러나온 국편과 국가기록원의 통합설에 관해 “두 기관의 기능이 중복되는 부분이 많아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고, 최고의 협력은 통합”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본의 언론인들이 각각 오늘날 일본 우경화의 배경에 있는 조직과 과거 일제의 아시아 침략 실상을 취재해 쓴 책이다. ‘일본회의의 정체’는 일본 우경화를 추동해 온 우파조직 ‘일본회의’를 추적했다. “…빛나는 역사는 잊히고 오욕됐으며, 국가를 지키고 사회 공공에 힘쓰던 기개는 사라졌다.” 1997년 5월 30일 열린 ‘일본회의’의 설립대회에서 메이지 신궁의 신관인 다나카 야스히로가 이사장에 취임하며 발표한 설립 선언 중 일부다. 이 조직은 우파 성향 종교단체 ‘생장의 집’이 1974년 결성한 ‘일본을 지키는 모임’과 정·재계 및 학계의 우파가 1981년 만든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통합하며 만들어졌다. 전국에 243개 지부를 갖춘 풀뿌리 운동을 전개하면서 천황 숭배, 헌법 개정, 애국 교육, 역사 수정 등을 목표로 활동한다. 신사 등의 자금 후원을 받으면서 중앙 정계에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아베 내각의 각료 19명 중 15명이 이 ‘일본회의’에 속해 있다고 한다. 교도통신 기자 출신의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일본회의는 전후 일본 민주주의 체제를 사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악성 바이러스와 같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는 가해자입니다’는 일본 신문이 2014, 2015년 보도한 특집기사를 재구성했다.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의 침략 과정과 함께 난징대학살, 731부대 만행, 일본군 위안부 등 일본 군국주의가 저지른 전쟁범죄 중에서도 우익단체가 가장 외면하려 하는 사실들을 파고든다. “병사는 칼로 머리를 벤다. 토민(土民)은 총살.” “사단장 각하 ‘돼지 같은 놈들은 주저 없이 죽여도 된다’.” 중일전쟁에 종군했던 병사의 딸이 아버지가 1937∼39년 쓴 일지를 2015년 여름 아카하타신문에 보내왔다. 토민은 민간인을 가리키고 병사는 포로를 말한다. 일지가 기록한 민간인 살해만 15명이다. 일지를 쓴 고바야시 다로는 1938년 5월 27일 취사병이었던 중국군 포로가 살해당하는 모습을 담은 연속 사진 3장도 남겼다. “아베 총리는 중일전쟁이 침략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아버지의 일지를 보면 애초부터 침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이 일지가 평화를 위해 작게나마 보탬이 됐으면 합니다.” 이 신문은 1928년 일본공산당이 창간했다. 1930년대에도 ‘3·1기념일’ ‘조선민족 해방기념일을 맞아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 등의 논설을 1면에 게재하는 등 제국주의 반대 투쟁의 선두에 섰다. 싱가포르와 말레이반도에서 ‘항일 중국인을 일소한다’며 자행된 민간인 대규모 학살, 1943년 중국 후난성 창자오에서 일으킨 끔찍한 학살, 대만과 오키나와의 ‘위안부’ 등 일본군의 만행이 생존자의 증언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진다.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에 분노하더라도 식민 지배를 진심으로 반성하고 군국주의를 경계하는 양심적인 일본인이 적지 않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두 책은 다시금 하게 만든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본 정부가 조사하고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아시아여성기금)’이 발간한 ‘종군 위안부 자료집’에 일본군이 위안소 설립과 운영에 개입했음을 의미하는 언급이 담긴 원본 사료가 고의로 누락됐다.”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조광)는 2년여의 노력 끝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문서고에서 발견한 ‘위안부’ 관련 자료를 11일 공개했다. 일본군이 ‘위안부’와 위안소 운영에 개입했다는 사실, 각지에서 운영된 위안소의 규모와 운영 상황 등을 알려주는 사료다. “전투지역에 있는 최전선 군인들에게 강간과 약탈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강간과 약탈을 전쟁의 분리할 수 없는 한 부분으로 여겼던 중국 주둔군인들 사이에서 이런 일은 아주 흔했다. 강간을 방지하기 위해 군(軍)은 점령 후 즉각 허가된 공용 위안소를 설립했지만 강간은 흔하게 계속되었기 때문에 많은 말레이시아 여성들은 머리를 짧게 깎거나 남자처럼 옷을 입었다.” 미군이 2차대전 당시 작성한 ‘동남아시아번역심문센터 심리전 시보(時報) 제182호’(시보 제182호) 16쪽에 나오는 내용으로 이번에 국편이 공개한 사료 중 일부다. 특히 “…강간을 방지하기 위해 군(軍)은 점령 후 즉각 허가된 공용 위안소를 설립했지만…”이라는 포로의 진술은 일본군이 위안소 설립의 주체라는 걸 뒷받침하고 있다. 또 같은 사료 18쪽은 “몇 달간 여자를 보지 못했던 일부 군인들이 마을의 소녀들을 강간했다”라고 일본군의 성범죄를 증언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과거 일본의 ‘아시아여성기금’이 펴낸 위안부 자료집인 ‘정부 조사 종군위안부 관계 자료집성(政府調査從軍慰安婦關係資料集成)’에는 이 같은 내용이 빠져 있다. 이 자료집이 ‘시보 제182호’ 전체 46쪽 중 달랑 4쪽(목차, 표지, 19·20쪽)만 담고 있는 탓이다. ‘일본군이 위안소 설립’ 등의 진술이 담긴 페이지는 누락됐다. 김득중 국편 편사연구관은 “확인 결과 해당 자료는 46쪽이 한 덩어리로 돼 있는데도 일본군의 개입이 언급된 핵심 부분이 자료집에 빠진 건 고의로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아시아여성기금은 1995년 일본 민간단체가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사과금’을 모금해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부인하려는 시도”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기금이 발간한 자료집은 지금까지도 위안부 연구의 기초가 되고 있는 주요 사료집이다. 이 자료집에 중요 진술을 담은 원본 사료가 고의로 누락됐음을 뒷받침하는 정황은 더 있다. 자료집은 원본 사료의 출처, 즉 일본이나 미국 등 자료 소장처의 상세 소장 정보를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 ‘일본 방위성’ ‘미국 내셔널 아카이브’ 와 같은 식으로만 기록해 연구자가 원본을 확인하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문서고를 처음부터 다시 뒤져야 하는 것이다. 김득중 편사연구관은 “이처럼 원본을 확인하기 지극히 어려우면 학자들이 자료집에 포함된 사료에만 근거해 연구하는 방향으로 유도되기 쉽다”며 “헌데 이 자료집은 일부 사료를 번역하면서 일본군의 책임을 회피하는 방향으로 진술의 뉘앙스를 왜곡하고 있기까지 해 문제의 심각성이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일례로 이 자료집의 ‘포로심문보고서 94번 문서’는 “군이 위안소를 운영한 것은 아니지만…(the army did not run brothels, but…)”이라는 한 포로의 진술을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군이 위안소를 운영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이라고 원문에는 없는 ‘절대’라는 단어를 임의로 추가하기도 했다. 이날 국편이 공개한 또 다른 사료에는 일본군 위안소의 규모와 운영 상황 등에 관한 내용이 담겼다. 일본군 통신 감청과 포로 심문, 일본군 문서 번역 등의 임무를 담당했던 연합군 번역통역부(ATIS) 작성 일본군 심문 보고서 중 일부다. 그중 제91번 보고서는 파푸아뉴기니 라바울 지역에서 1943년 3월 11일 붙잡힌 일본군 하지메 나카지마에 대한 심문이 담겼다. 그는 “위안소가 군의 관리(army supervision) 하에 있다”고 진술했다. 제470번 보고서는 인도네시아 자바 섬 동부 말랑 지역에서 1944년 4월 29일에 체포된 일본군에 대한 심문보고서로 “군의 사법관할(jurisdiction) 내에 7개의 위안소가 설립됐고 조선인과 일본인, 인도네시아인 등 총 150여 명의 여성들이 있었다”고 나온다. 국편은 지난해 미국과 영국 등에서 일본군 ‘위안부’ 및 전쟁범죄 관련 사료 2만4000여 장과 단행본 439책, 마이크로필름 255릴을 수집했다. 이들 사료를 망라한 자료집을 올 연말부터 순차적으로 간행해나갈 예정이다. 국편 관계자는 “기존 자료집의 문제를 바로잡은 정본 자료집이 간행되면 ‘위안부’ 연구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그리워하지 마오. 편안히 계시오. 이루 다 말할 수 없어 이만.” 1592년 12월 퇴계 이황의 수제자인 학봉 김성일(1538∼1593)이 경상우도 감사로 부임 도중 아내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문장이다. 넉 달 뒤 그는 여러 고을에 왜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다 병으로 죽었다. 편지는 12월 16일까지 열리는 한국학중앙연구원(경기 성남시 분당구) 장서각의 특별전시 ‘옛사람들의 사랑과 치정(癡情)’에서 볼 수 있다. 전시 도록에서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옛사람들도 오늘날만큼이나 사랑을 진솔하게 표현했다! ‘선비 보쌈’ 이야기 등이 담긴 치정 부분은 더욱 놀랍다. 왠지 이름부터 경건한 시조집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원 나이트 스탠드’ 뒤에 지은 여성 화자의 사설시조가 들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연구원의 그간 전시를 생각하면 매우 이례적이다. 화려한 그림이나 서예 같은 건 전시에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짬을 내 선인들의 사랑 이야기에 빠져 보면 어떨까. “지난밤 그놈을 차마 못 잊어 하노라”로 끝나는 이 시조의 나머지는? 직접 읽어 보시라.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제강점기 수없이 많은 독립투사들이 활동했지만 아직도 그 가치가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이가 적지 않다. 한국민족운동사학회는 11일 서울 성북구 한성대에서 제72주년 광복절 기념 학술대회 ‘새롭게 밝히는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를 연다. 미리 받아본 발표문에서 황수근 평택문화원 학예연구사는 1934년 함경남도의 주재소에서 단독으로 무기를 탈취한 ‘함남 권총의거’의 주인공 김춘배(金春培·1904∼1946)의 활동을 들여다봤다. “자경단원을 시켜 콩을 구워먹고 앞잡이 세우고 도주… 어두운 속에서 돌연 발사하는 바람에 목하(木下) 순사부장이 왼편 어깨를 맞고….”(동아일보 1934년 10월 22일자 호외 중) 당시 동아일보 보도로 재구성한 김춘배의 의거 과정은 드라마틱하다. 김춘배는 1934년 10월 2일 북청군 신창주재소에 침입해 장총 6정, 기병총 5정, 보병총 1정, 권총 2정과 실탄 수백 발을 탈취했다. 그는 무기 일부를 숨긴 뒤 도주 중 자경단원이 모인 곳에 나타나 식사를 해결하고, 아내를 만나러 집에 들르고, 순사부장의 어깨와 갈비뼈에 총상을 입힌 뒤 기차로 경성으로 가려다가 19일 만에 붙잡혔다. 그를 잡기 위해 경찰과 자경단원 등이 연인원 2만 명 넘게 동원됐다. 황수근 학예연구사는 “김춘배는 1927년 정의부 의용군으로 간도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옥고를 치렀고 출옥 뒤 군자금을 마련해 만주에 건너가려 했던 것”이라며 “함남 권총의거는 1934년 국내 항일운동 중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대한제국 군인 출신으로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인물들에 대한 발표도 이뤄진다. 황민호 숭실대 교수는 노은 김규식(蘆隱 金奎植·1882∼1931)의 생애를 조명했다. 그는 북로군정서 교관, 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등으로 활동한 인물로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우사(尤史) 김규식과는 다른 인물이다. 황 교수는 “독립군은 1922년 말 연해주 도처에서 일본군을 철퇴시키기 위한 전투에 참여했다”며 “그해 11월 22일자 동아일보는 대한독립군이 적군(赤軍)과 함께 우수리스크를 점령할 때 수천 명이었고, 이들의 총사령이 김규식이라고 보도했다”고 말했다. 박환 수원대 교수는 대한제국 육군 정위(正尉) 출신으로 북로군정서와 신민부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한 나중소(1867∼1928)의 독립운동에 관해 기조 강연을 한다. ‘1930∼40년대 성북지역의 학생운동’(변은진 고려대 교수)도 발표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청와대 안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불좌상을 원래 위치인 경북 경주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진정서가 청와대와 국회에 7일 제출됐다.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의 혜문 대표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경주에서 약탈해 서울로 옮겨진 불상이 지금까지 청와대 경내에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에 진정서를 냈다”고 이날 밝혔다. 이 불상은 1913년 경주금융조합 이사였던 오히라(小平)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선총독에게 바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7년 경복궁에 총독 관저를 신축하면서 청와대 관저 뒤편의 현재 위치로 이전됐다. 8~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 이 불상은 경주 석굴암 본존불과 비슷한 형태라서 일명 ‘미남 불상’으로 불린다. 197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됐다. 혜문 대표는 “불상이 경주로 돌아간다면 일제강점기 문화재 약탈 문제를 환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제강점기 하시마(端島) 탄광에 징용된 조선인 소재의 영화 ‘군함도’(감독 류승완)는 개봉 닷새 만인 30일 약 400만 명의 누적 관객을 동원했다. 역대 최다 관객 ‘명량’에 견줄 만한 흥행 속도다. 그러나 온라인 리뷰는 대체로 냉랭하다. 한 포털 사이트의 누리꾼 평점은 10점 만점에 평균 5점이 안 된다(관객 평점은 7점대). 핵심은 영화의 ‘국뽕’(배타적이고 지나친 국수주의·민족주의를 비하하는 속어) 논란이다. 심지어 포털 검색창에 ‘국뽕’을 입력하면 연관 검색어로 ‘군함도’가 저절로 뜰 정도다. 일본 관방장관과 한국 외교부 대변인까지 나서 각각 ‘이 영화는 창작물’ ‘역사적 사실이 바탕’이라고 설전을 주고받았다. 대기업의 스크린 독과점 시비도 지속됐다. CJ엔터테인먼트가 배급하는 이 영화는 29일에만 2019개 스크린에서 1만808회 상영(상영 점유율 55.8%)됐다. 영화 ‘군함도’에 대해 정지욱 영화평론가(50), 관객 곽지윤 씨(27·대학원생), 조종엽 장선희 문화부 기자가 28일 영화 속 다양한 논란을 짚어봤다(기사에 스포일러 있음). ▽곽지윤=보는 동안 크게 지루하진 않았지만 여기저기서 봤던 상투적 요소들로 가득했어. 딱 흥행만 노린 영화 같다고 할까? ▽정지욱=전형적인 인물, 선악 구도로 상업영화의 전형성을 보여준 거지. 감독의 위상을 생각하면 범작 정도? 최칠성(소지섭)-오말년(이정현)의 러브라인, 이강옥(황정민)-소희(김수안)의 부녀애가 다양한 연령에 어필할 수 있고, 출연 배우 송중기(광복군 소속 특수요원 박무영 역)의 인기를 고려하면 흥행은 성공할 듯. ▽조종엽=도입부 하시마 탄광 갱도 표현이 인상적이었는데 거기서 끝이었어. 온라인에 ‘뻔한 반일영화’란 혹평이 상당해. 군함도라는 소재만 가져왔을 뿐 역사적 진실과 강제징용자의 고통 표현은 뒤로한 채, 허구인 대규모 탈출극과 총격전만 부각했다는 거지. 관객들의 눈높이가 높아. ▽정=내 주변 반응은 괜찮던데? 다만 인물의 변화가 예측 가능하고, 그마저도 ‘툭툭 끊어진다는 느낌’이 들더라. ▽장=‘나쁜 조선인’을 넣어서 이분법을 넘어서려 했다는데, 그 때문에 강제동원의 본질적 주체가 일제라는 점이 모호해졌다는 의견도 있더라. ▽조=이분법을 넘어서려면 ‘나쁜 조선인’을 강조하기보다 오히려 ‘착한 일본인’이 필요했던 것 아닌가? 일본인 노무자가 조선인 탈출을 방관하는, 딱 한 장면 나오더라. ▽장선희=그랬다면 욱일승천기를 찢는 장면 같은 데서 관객이 통쾌함을 느끼겠어? ‘군함도’는 류승완 감독이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장기를 잘 살린 상업영화지, 다큐멘터리는 아니잖아. 일부 혹평은 류 감독의 작품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서 그런 것 아닐까? ▽곽=박무영이 일본인을 단칼에 목 베는 장면은 어땠어? 너무 전형적이어서 실소가 나오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어. ▽조=광복군 요원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관동군이나 전국시대 사무라이 같더라. 그렇게 적과 닮은 모습이 거북했어. ▽장=나는 좋았는데? (일동 웃음) 카타르시스를 주잖아. ▽조=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각 독립운동 세력의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며 윤학철(이경영)을 구해오라고 지목하는데, 그 정도의 인물을 ‘민족의 배신자’로 묘사하는 건 말이 안 돼. 류 감독 영화가 엘리트에 대한 반감을 자극하는 측면이 있는데 이번에는 심한 듯해. ▽정=류 감독이 커다란 틀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되 내용은 영화적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다고 했잖아. 그 정도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장=하지만 류 감독도 실제 역사를 모티브로 했다고 분명히 했는데, 일본 정치인이나 극우 매체가 ‘날조 영화’라고 말하는 것은 진실을 외면하는 뻔뻔한 일이야. ▽조=홀로코스트 소재 영화를 보면 보편적 울림을 갖는 게 많잖아. 오늘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장벽 세우고 하는 현실 문제가 있는데도 그런 영화 보면 유대인 수난사에 동정적이게 된다고. 그런데 식민 지배를 진심으로 반성하는 일본인이 주변 사람들에게 손잡고 ‘군함도’ 보러 가자고 할 수 있을까? ▽정=일본 관객에게 보이기에는 일본어 대사부터 완성도가 떨어져. ▽곽=극장에서 오전 10시 45분, 11시, 11시 20분…, 이렇게 계속 ‘군함도’만 틀더라. ▽정=한 영화가 스크린을 2000개 넘게 차지하는 건 거의 폭력 수준 아닌가. 한 800∼1000개 스크린만 해서 오래 상영해도 될 텐데. ▽장=류승완 감독한테 일본인까지 설득하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것 같아. 영화는 영화일 뿐이지. 더구나 군함도를 모르는 국내 관객도 태반일 텐데, 강제징용 문제에 관심을 갖게 했잖아? 그것만으로도 점수를 주고 싶어. 정리=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황금박쥐’(1967년) ‘우주소년 아톰’(1970년) ‘마징가Z’(1975년) ‘캔디’(1977년) ‘독수리 오형제’(1979년) ‘은하철도999’(1981년)…. 이제는 다 알려진 사실이다. 그 시대 자라난 한국인 다수에게 ‘추억의 애니메이션’이 된 이 애니메이션들은 모두 일본산이다. 일본 대중문화가 공식적으로 금지됐던 시절이기에 방영이 국회에서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은 당시 어린이 시간대 편성에서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했다. 그뿐 아니다. 공식적으로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된 건 1998년이지만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도 일본 소설, 만화, 가요 등을 대중은 자연스럽게 소비했다. 이 같은 수십 년의 경험은 한국에서는 ‘한류’ 이전의 ‘지우고 싶은 기억’에 불과하다. 일본에서는 ‘혐한론’을 떠받치는 ‘한국의 문화적 후진성’으로 규정돼 있다. 책은 일본 대중문화 금지와 그를 뛰어넘는 문화의 역동성을 ‘금지의 구축’ ‘금지 메커니즘’ ‘금지의 해체 과정’으로 나누어 살폈다. 광복 이후 언론들은 왜색(倭色) 척결에 나섰다. 해방공간에서 ‘탈식민화’ 작업이었던 일본 대중문화 금지는 박정희 정권 들어 ‘정치적 검열’의 성격을 띠기 시작한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는 여론이 극심해지자 당시 큰 인기를 누리던 ‘동백 아가씨’를 ‘왜색풍’이라며 방송 금지한 것도 그 예다. 그러나 일본 대중문화는 부산까지 닿는 방송 전파나 해적판 음반 등을 통해 경계를 넘었다. 문화사회학자로 일본 홋카이도대 교수인 저자는 일본 대중문화 ‘금지론자’나 ‘개방론자’의 입장에서 책을 쓰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생각은 자신이 일본어로 쓴 책을 옮긴 이번 한국어판 서문에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정말이지, 문화란 이런 것이다. 아무리 힘을 들여 경계를 긋고, 바깥의 존재를 ‘위험하고 불결한 것’으로 규정하고 공고한 방어 장치를 작동시켜도, 어느새 뒤섞여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것들과 만나게 되는 그 과정이야말로 문화이며, 삶의 방식인 것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재외동포교육진흥재단(이사장 영담 스님)이 주관한 ‘2017년 제15회 재외한국어교육자 국제학술대회’가 22일 폐막했다. 이번 대회는 ‘인류의 지적 유산―아름다운 한글’이란 주제로 세계 29개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어 교육자 60여 명과 외국인 교육 관계자 등 83명이 참가했다. 17일부터 열린 이번 대회에서는 한국어 교육 정책 방향과 한글의 과학성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재외 한국어 교육자들의 학술포럼에서는 ‘대학·성인 학습자 대상 한국어 교육 주제’와 ‘초중고 학습자 대상 주제’에 관한 과제가 발표됐다. 연세대와 이화여대 한국어학당 교수를 초청한 ‘찾아가는 한국어학당 수업’과 함께 ‘해외 한국어 보급 정책’ ‘태국의 한국어 교육 운영 사례’ ‘한국어 교육의 현황과 미래’에 대한 토론도 열렸다. 교육부와 외교부, 문체부가 공동 개최한 ‘세계한국어교육자대회’도 18, 19일 진행됐다. 재외한국어교육자 국제학술대회는 △재외 한국어 교육자들의 자질과 전문성을 높이고 △교수법을 상호 교류하며 △교육자들 간의 인적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2003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적인 경제 침체 속에서 포퓰리스트들이 대중의 지지를 어떻게 얻어냈는지 살펴본 책이다. 사실 포퓰리즘은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꽤 애매하다. 해제를 쓴 서병훈 숭실대 교수의 말마따나 부정적 측면을 드러내는 ‘대중영합주의’나 사회적 약자들의 참여 확대라는 현상을 강조하는 ‘민중주의’ 모두 마뜩잖다. 책은 단어 정의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포퓰리스트로 불리는 사람, 운동, 정당을 배타적으로 정의할 만한 일련의 특성은 없다.” 정치적 성향에서도 포퓰리즘은 좌우와 중도를 막론한다. 책은 인민당(1890년대 만들어진 미국 정당)에서 조지 월리스(우익 포퓰리스트 정치인)까지 미국 포퓰리즘의 논리를 살핀다. 또 지난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한 ‘침묵하는 다수’와 민주당 경선에서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며 버니 샌더스 후보를 지지한 이들의 심리를 분석한다. 사실 샌더스도 무역협정과 해외투자에 관해 트럼프와 의견이 일치했다. “무역협정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수백만 개의 일자리를 잃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됐다”는 샌더스 역시 포퓰리즘의 테두리 안에 있다고 저자는 본다. 유럽 좌·우익 성향 포퓰리즘도 이 책은 분석했다. 미국의 정치 분야 저술가이자 칼럼니스트인 저자는 포퓰리즘의 득세를 ‘조기 경보’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익 포퓰리스트들이 이슬람교를 극단주의 종교로 보거나 공개적 탄압을 옹호하는 건 분명 잘못됐다. 그러나 적어도 이들은 최하층 이민자 공동체와 관련한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고심하고 있다. 실제로도 최하층 이민자 공동체는 복지국가에 필요한 대중의 신뢰를 손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곱씹을 만한 얘기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5일 중국 지안(集安)시의 고구려 유적 답사 중 태왕릉(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에서 동행이 돌무더기 속 기와조각(사진)을 주워 기자에게 건넸다. 손가락 자국이 두 개, 지문이 선명했다. 1600년 전 기와를 구운 고구려 도공의 지문일 게다. ‘한국인 최고(最古)의 지문 발견’이라는 1면 기사 제목이 잠깐 머리를 스쳤다. 시간을 초월해 지문 주인과 잠깐 이런 대화도 나눴다. “저는 한국인입니다.” “한국(韓國)이면 남쪽에 있던 작은 나라들을 말하는 건가?” “조선인입니다.” “옛 나라를 다시 세웠는가?” “좀 복잡한데…, 어쨌든 당신과 같은 고려(Korea)인입니다. 그런데 요즘 중국에서는 연인(燕人)과 도공 모두 중화민족이라고 합니다.” “그게 무슨 헛소리인가. 우리 대왕이 모용씨(연의 왕족)와 그리 전쟁을 치렀는데….” 변경의 민족주의가 불안했을 2000년대야 그렇다 치고, 지금 중국은 ‘G2’ 아닌가. 대다수 한국인들은 만주 수복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으니 ‘족보 왜곡’은 그만두길. 어쩌면 정복지 출신 노예였을 수도 있는 지문의 주인 역시 선린과 평화만을 바라지 않았을까.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기존 고(古)천문학 연구는 수학으로 분석해야 할 부분이 상당 부분 공백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 전공인 계량경제학의 수학으로 들여다보니, 새로운 것들이 보이더군요.”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의 연구총서 ‘서운관의 천문의기’(경인문화사)를 출간한 정기준 서울대 명예교수(76)는 최근 서울대 연구실에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 교수는 논문이 미국의 계량경제학 교과서에서 다뤄진 경제학자다. 지난해에는 제25회 수당상을 받기도 했다. “고천문학은 천체가 있는 3차원 공간을 2차원의 구면인 천구(天球)로 바꾼 뒤, 투영을 통해 이를 다시 평면으로 환원시켰습니다. 이를 이해하는 데는 다차원의 수량을 그보다 낮은 차원으로 바꾸는 계량경제학의 ‘좌표변환과 투영’ 기법이 매우 유용합니다. 사실 이 기법 자체가 원래 천문학과의 관련 속에서 발전한 것이죠.” 정 교수는 정년퇴임 뒤인 2006년부터 고천문학과 고지도를 파고들었다. 이 책은 여말선초 천문 관측기관인 서운관에서 사용한 천문의기(天文儀器)의 원모습과 제작 원리를 탐구한다. 그는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의 원래 모습에 관해 새로운 의견을 밝혔다. 세종 당시 제작한 앙부일구를 복원한 모형들에 마치 조선 후기 앙부일구처럼 ‘영침’(影針·그림자를 드리우는 바늘)이 사용된 건 잘못됐다는 것이다. “앙부일구가 시간과 절기를 정확히 나타내려면 수평, 방위를 똑바로 맞추는 일과 더불어 천구의 중심 위치가 정확해야 합니다. 조선 후기 앙부일구에서 ‘영침의 끝’이 자리한 곳이지요. 그러나 세종 대 앙부일구는 영침이 아니라 남북으로 가로질러 ‘둥근 막대’(圓距·원거)를 설치하고 정중앙에 ‘겨자씨 같은(芥然·개연)’ 구멍을 내 그리로 햇빛이 통과하도록 했습니다.” 정 교수는 조선 후기 앙부일구 모형 중에서도 엄밀하지 않게 복원된 것들이 있다고 지적했다. “경복궁 사정전 앞에 있는 앙부일구 모형은 정확히 중심에 있어야 할 영침의 끝이 옆에서 봤을 때 살짝 위로 튀어나와 있어요.” 기자가 경복궁에서 살펴보니, 일부러 신경을 써야 보이기는 했지만 0.5cm가랑 돌출돼 있는 건 사실이었다. 정 교수는 국립과천과학관에 복원 전시돼 있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세종 대 처음 제작된 해시계이자 별시계)는 “눈을 대고 관측하는 구멍이 있어야 할 자리가 막혀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의 천문서에 비해 조선의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1795년 편찬된 천문서) 같은 책은 더 이해하기 어렵고, 틀린 구석도 적지 않습니다. 중국은 서양의 천문학 지식을 선교사들로부터 직접 전수받았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한 탓입니다.” 정 교수는 “세종 이후 숙종 때까지 한양의 ‘북극고’(北極高·오늘날 위도와 비슷한 개념) 관측에 관한 기록이 없다”며 “세종 이래 열심히 천문의기를 제작하고, 천문을 관측해 온 서운관이 독자적 관측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건 풀리지 않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정조 독살설’에는 영남 남인들의 정치적 입장이 깊숙이 반영돼 있습니다. 정조가 진짜 독살됐느냐를 따지기 전에 어떤 맥락에서 독살설이 전해졌는지가 중요하지요.” 연구서 ‘조선왕실의 의료문화’(민속원)를 최근 낸 김호 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50)는 14일 이렇게 말했다. 김 교수는 책에서 정조 독살설의 기원과 확산 과정을 살폈다. 개혁군주 정조가 반대 세력인 노론 벽파에 의해 독살됐다는 정조 독살설은 1990년대 이후 소설과 사극, 대중역사서 등을 통해 확산됐지만 이후 학계에 의해 반박돼 왔다. 책에 따르면 1800년 정조의 죽음 당시에는 노론과 대립한 남인들 사이에서도 독살설이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김 교수가 주목한 건 당시 남인들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하와일록(河窩日錄)’이다. 김 교수는 “안동의 류의목(1785∼1833)이 남인이었던 할아버지 류의춘에게 들려오는 소식을 기록한 책인데, 당시 류의춘에게 전해진 정조의 죽음은 독살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고 말했다. 독살설의 뿌리에는 인동 장씨 집안의 비극이 있다. 1800년 인동부사 이갑회는 인동 장씨 집안의 장현경이 “(노론) 심환지가 정조에게 독약을 올리도록 했다”고 말했다고 ‘역모의 기미’를 보고한다. 장현경 집안은 역모를 꾸민 것으로 몰려 풍비박산 난다. 시골에 전해진 소문이 ‘역사’에 남게 된 것이다. 김 교수는 “하와일록은 이 사건 역시 광인이나 ‘망한(妄漢·망령된 놈)’이 저지른 해프닝으로만 봤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인동 장씨 역모 사건은 이후 영남 남인에 대한 정치 탄압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서술됐고, 이 집안의 억울함을 푸는 것은 남인 전체의 신원(伸원)이 걸린 문제로 확대됐다. 정조의 독살설 역시 힘을 얻게 된 것이다. 근대에 들어 정조 독살설이 ‘역사적 사실’로 제기된 것도 이 같은 남인들의 집단적 기억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독살설을 다시금 소개한 건 영남학파의 거유(巨儒) 면우 곽종석(1846∼1919) 문하에서 수학한 경북 울진 출신의 최익한(1897∼사망연도 미상)이다. 그는 1939년 동아일보 연재에서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 중 인동 장씨의 억울한 이야기에 관해 쓴 ‘기고금도장씨여자사(紀古今島張氏女子事)’를 근거로 정조 독살설을 주장했다. 김 교수는 “남인들의 정치적 재기를 바랐던 다산의 고금도 기사가 없었다면 정조 독살설은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며 “독살설의 기원과 확산에 담긴 당파성을 고려하지 않는 건 사료의 의도적인 오독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인동 장씨 후손들이 이 같은 기록을 남긴 다산의 은혜를 갚기도 했다. 인동 장씨인 위암 장지연과 일제강점기 대구 경일은행의 설립자인 장길상이 ‘여유당전서’ 간행을 추진했고, 장길상이 위당 정인보에게 초고 원고를 넘겨줬다. 사실 책 ‘조선왕실의…’에서 정조 독살설에 관한 내용은 말미의 한 절에 불과하다. 책은 왕실의 출산 문화, 식치(食治·음식물로 몸을 조리하는 것), 왕의 온행(溫幸·온천행차) 등을 통해 왕실의 의료가 성리학적 가치와 어떻게 연관돼 있는지 탐구한다. 김 교수는 “조선은 몸을 다스리는 일과 국가를 다스리는 통치 행위의 원리가 동일했다”며 “정치와 의료 모두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시중(時中)’을 찾고, 병의 예방을 중요시하는 한편, 왕도와 패도의 조화를 추구했다”고 설명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종교학자의 눈으로 인류 진화의 역사를 바라봤다. 스페인의 고원 지대인 시에라 데 아타푸에르카의 동굴에서 발견된 30만 년 전 인간의 두개골에는 구멍이 나 있다. 구멍이 2개여서 누군가 주먹도끼 같은 무기로 되풀이해 내리쳤을 가능성이 높다. 저자는 여기서 구약성서에서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이야기를 떠올린다. “이 두개골은 최초의 살인사건에 대한 증언이고, 당시 인간 사이의 갈등을 볼 수 있는 창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책은 인간의 폭력성보다 이타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같은 동굴에서는 치명적인 선천성 두개골 기형을 앓았던 5세가량의 어린아이 뼈도 발견됐다. 생후 1년 동안 증상이 현격하게 나타나는 병인데도 5세까지 살 수 있었던 건 누군가 헌신적으로 돌봤다는 뜻이다. 저자는 “인류는 함께 모여 살면서 갈등이 생겨나고, 자신들이 개발한 무기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족과 사회의 약자를 돌보는 배려의 문화를 만들기 시작했다”며 “인간의 위대한 여정은 스스로를 ‘이타적 동물’로 변모시켰다”고 했다. 고인류학 소재의 기존 교양서들과 차별화되지 않는 부분도 꽤 되지만 저자의 전공인 고전문헌학과 연결되는 서술 등은 특히 흥미롭다. 고대 그리스인은 인간을 ‘안트로포스’로 불렀는데 이는 ‘얼굴을 위로 하고 하늘을 쳐다보는 존재’라는 뜻이라고 한다. 저자는 “눈이 양옆에 달려 자신을 공격하려는 다른 동물들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동물과 달리 생존을 위해 대상을 관찰하면서 눈이 정면으로 이동한 인간이라는 종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이름”이라고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도망은 갈 거 같아요. 그런데 (도망가다가 다시 택시를) ‘유턴’해 광주로 돌아갈지, 안 갈지는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주머니에서 전자담배를 꺼낸 뒤 “괜찮겠느냐”고 동의를 구한 배우 송강호(50)는 12일 인터뷰 중 이 대목에서 한참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담배를 한 번 빨았다. 내내 여유 있던 그의 눈빛도 살짝 흔들렸다. 그는 다음 달 2일 개봉하는 영화 ‘택시운전사’(감독 장훈)에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태우고 5·18민주화운동이 벌어지는 1980년 5월의 광주로 달려가 우여곡절을 겪는 택시운전사 만섭 역을 연기했다. “자신이 실제 만섭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물은 차였다. 그는 “‘유턴’했겠죠, 뭐. 하하하”라며 웃어넘겼다. 불의에 맞서 스스로를 던질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는 건 영화 속 만섭과 같은 보통 사람들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극중 만섭이 유턴하는 장면이 연기하면서 가장 ‘난코스’였다는 게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배우의 고백이다. “하필 제일 어려운 장면을 세트가 아니라 실제 운전을 하면서 찍었어요. 운전해야죠, 길이 짧은데 그 안에서 극적인 감정 표현해야죠, 클로즈업은 부담스럽죠….” 송강호는 극중 가장 울컥했던 장면으로 금남로의 시위, 학살 장면과 함께 택시가 처음 광주역에 도착해 시민들로부터 주먹밥을 받는 장면을 꼽았다. “그때 시민들의 모습이 정말 밝아요. 서로를 위하고, 끼리끼리 모여서 얘기를 즐기고, 주먹밥도 주고요. 그 장면이 촬영할 때는 몰랐는데 완성된 영화를 보니 정말 슬프더라고요.” 그는 5·18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라는 부담에 출연 결정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이런 얘기를 제가 감당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먼저 들었죠. 안 드는 게 이상하지 않나요? 그런데 주변에 출연할까 의견을 물었을 때 ‘이 영화 하지 말라’고 하면 화가 나고, 출연하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커지더라고요.” 송강호는 중학교 2학년이던 1980년 5월 새벽 라디오에서 ‘광주에서 폭도를 진압했다’는 방송을 들은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그때는 그 말을 믿고, 진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성인이 되고 연극배우로 일하면서 실제 힌츠페터 기자가 찍은 사진을 비롯해 광주의 진실을 담은 사진과 영상을 접했다. “아픈 비극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창하거나 잘난 정치인이 아니고, 택시기사처럼 아주 평범한, 사회의 맡은 바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이라는 것, 영화는 그걸 말하고 싶은 거 같습니다. 그런 이들의 건강한 의식이 역사를 지탱하고 만들어간다고 믿습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중국 정부가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의 고구려 문화재 유적 안내판에 “광개토대왕비는 중화민족의 비석”이라고 최근 새로 기술한 사실이 본보 취재를 통해 드러났다. “여기에서 오랫동안 명성을 떨쳐 온 중화민족 비석 예술의 진품으로 불리우는 ‘해동제일 고대 비석’ 즉 호태왕비(好太王碑)가 있고….” 동아일보가 동북아역사재단과 3∼6일 중국 랴오닝(遼寧)성 환런(桓仁)현과 지안시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한 결과 장군총, 광개토대왕비 등이 있는 지안시의 ‘고구려 문화재 유적 관광지’ 안내판에 중국어, 영어, 한국어, 일본어, 러시아어로 이같이 해설해 놓은 사실이 5일 확인됐다. 2007년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종료된 뒤에도 고구려사가 자국사라는 중국 측의 역사 인식은 박물관과 유적지 등에서 간간이 확인돼 왔지만 이번에 발견된 문구는 더욱 노골적이고 직설적으로 표현돼 심각성이 작지 않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조사해 온 조법종 우석대 교수는 본보를 통해 안내판 사진을 확인하고 “그간 유물 설명 등에서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취지의 서술이 가끔 발견됐지만 이번 표현은 고구려인이 중화민족에 속한다고 대중에게 명료하게 제시하면서 고구려사의 자국사 편입을 강력하게 재천명하고 있어 좌시할 수 없는 문제”고 강조했다. 중국은 2004년 우다웨이(武大偉) 당시 외교부 부부장이 방한해 ‘중앙·지방정부 차원에서 교과서 등에 역사 왜곡을 하지 않겠다’는 취지로 한국 당국과 구두 합의했다. 이후에는 전시 기법 등을 통해 우회적으로 자국의 입장을 표출했고 최근 중국 연호에 따라 고구려 등의 사료를 정리한 사서를 발간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갈등의 표면화는 회피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된 문구에서는 그런 방침의 변화가 감지된다. 조 교수는 “최근 한중관계 경색과 관계가 있을 수 있어 향후 이런 서술이 확대될까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이번에 발견된 안내판은 최근 1년 안팎 사이에 새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위치는 장군총 아래 주차장 정면으로 개별 유적이 아니라 고구려 유적지 전체를 설명하는 안내판이다. 조 교수는 지난해 봄 현지답사 당시에는 보지 못했다고 했다. 저탄소시범관광지 같은 최신의 개념이 설명에 포함된 것으로 보아 최근의 입장이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관람객이 직접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중국) 직원의 설명을 통역해서 옮길 수만 있습니다.” 안내판뿐 아니다. 역사 문제에 대한 중국 측의 방침 변화는 유적 설명에서도 감지됐다. 지안시 박물관, 장군총, 광개토대왕비 등에서 중국 직원들은 역사학 전공 교수 등으로 구성된 한국 탐방단과 가이드의 설명을 답사 중 번번이 가로막았다. 이 역시 지난해까지는 없던 일이다. 이유를 물었지만 ‘규정이다’ ‘지시다’ 같은 말만 들을 수 있었다. 중국 직원의 설명에는 농기구부터 무기까지 “고구려는 중원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였다”는 말만 가득했다. 지안시 환도산성 아래 고분군이 정비 중인 모습을 기자가 울타리 밖에서 스마트폰으로 촬영하자 현장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기자의 스마트폰을 강제로 빼앗았다가 항의를 받고 나서야 돌려주기도 했다. 동북아역사재단 관계자는 “중국의 유적지와 유물 관리 규칙 등이 정비되면서 동북공정의 역사 인식이 고착화되는 단계로 보인다”며 “최근 시진핑 주석의 발언 등으로 볼 때 겉보기와 달리 지방뿐 아니라 중앙 수뇌부의 역사 인식도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지안·환런=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계신데로/나의님은 가시니라//먼저가서 기다리리다/그대오길 기다리리다//언제던가 복도에서/손잡은 일도 있었건만…곁에 있던 간수께선/얼굴을 찡기더라.” 동아일보가 1926년 8월 3일자로 보도한 박열의 ‘옥중가(獄中歌)’다. 아나키스트 항일운동가 박열(1902∼1974)이 감옥에서 아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를 그리워하며 지은 것이다. 지난달 28일 개봉한 영화 ‘박열’이 주말까지 180만 관객을 넘은 가운데 동아일보 보도를 통해 박열의 얼굴을 더듬어봤다. “기자는 그들의 안부를 알기 위해 시곡(市谷·이치가야) 형무소를 방문했다. …박열은 뜨거운 악수로 기자를 맞으며 ‘이렇게 자주 찾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일본 신문은 나에 관한 기사로 우스운 말이 나돌고 있는 모양인데, 그것은 정(鄭)이란 사람의 소위란 것이 확실하며….” 1925년 12월 14일자에 실린 동아일보 기자의 면회기다. 일왕 폭살 시도 혐의로 옥에 갇힌 박열은 기자에게 “내 형이 매우 근심하는 모양이니 위안을 해 달라”고 부탁하는 한편 일본 신문의 기사가 왜곡됐음을 알렸다. 기사를 통해 가네코가 “이제부터는 조선 옷을 입겠습니다”라고 했다는 것과 두 사람의 혼인 수속 문제 등의 근황도 알 수 있다. 1926년 3월 2일자 동아일보에는 일제의 법정에서도 당당한 박열 부부의 모습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받쳐 입고 머리까지 조선 머리를 쪽진 금자문자(金子文子)가 법정에 나타나 먼저 간수에게 차 한잔을 청해 마시고 … 사모관대(紗帽冠帶)에 조복(朝服)을 입고 검은 혜자(鞋子)를 신은 박열이 법정에 나타나 자기 자리에 앉으며 …방청석에 섰던 조선 학생들이 웅성웅성하는 것을 들은 박열은 몇 번이나 돌아다보고 말 없는 웃음을 보내어 답례를 하였고….” 동아일보는 박열 사건의 첫 소식을 1923년 10월 18일자로 전했고, 총독부의 보도 통제가 해제된 1925년 11월 25일자 2면 머리에 “‘대중의 반역’을 표방하고 무정부주의를 선전”이라는 기사를 통해 박열의 혐의와 이력, 불령사의 성격 등을 보도했다. 박열의 정신감정 거부나 옥중결혼 소식도 속보로 전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공판이 열린 1926년에만 박열 관련 소식을 168건이나 보도했다. 동아일보가 1926년 1월 1일자로 실은 박열의 옥중시(獄中詩)에서는 항일운동가로서의 단단한 내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옥창(獄窓)의 겨울밤은/이슥히 깊었는데/찬 기운은 살을 어이고//…//고르지 못한 이 세상/생지옥의 이 세상/아! 원수의 생지옥//….” 박열 등이 조직한 ‘흑도회’의 창립을 공식 확인할 수 있는 통로도 동아일보 지면이다. 아나키스트 독립운동을 연구한 김명섭 단국대 박사는 “흑도회가 조선인 노동자 학살 사건을 진상 조사한 일도 함께 조사한 이상협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의 보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경북 문경시 마성면에 있는 박열의사 기념관은 1922∼1962년 박열에 관해 동아일보가 보도한 238개 기사를 소장하고 있으며 그중 일부를 전시하고 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박열 평전’(1996년)을 보완해 최근 출간한 ‘나는 박열이다’(책뜨락)에서 ‘동아일보의 박열 옥중면담기’를 따로 실으면서 “당시 동아일보는 총독부 당국의 치밀한 보도 통제에도 불구하고 박열 사건에 대해 여러 차례 보도했다”고 썼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목마른 나는 머리 긴 여자가 좋아요. 그리고 내가 배고플 때 라면을 사주면 더 좋고. 그리고 그리고 막걸리를 마실 수 있으면 더 좋구요.” 기형도 시인(1960∼1989)이 1982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말은 그가 얻어먹은 밥값 대신 즉석에서 시를 써서 건넨 여성의 일기장(사진)에 남아 최근 시와 함께 알려졌다. 이 여성은 짐을 정리하다가 시를 우연히 발견했다고 한다. 배고프고, 목마르고, 술도 고픈 청년들의 풋풋함이 전해진다. 아주 오랜만에 찾은 학교 근처 술집 벽의 낙서에서 지인의 이름을 발견하고 옛일을 회상하는 일, 오래된 노트를 버리려다 눈에 들어온 글에 얼굴을 붉히는 일 따위에도 시한이 있을 게다. 그런 술집이 사라졌을 때, 낡은 종이 위의 문장 같은 것에는 무감해져 더 이상 짊어지고 이사를 다니지 않게 될 때 그 사람은 옛날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 받는 이나 보내는 이 불명의 편지가 어디서 왔고, 누구에게 보내려던 것인지조차 잘 기억나지 않을 때….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언론, 집회에 대한 압박은 곧 사상에 대한 압박이요, … 미친 자의 손에 칼을 들림이 이 어찌 위험이 아니랴? 미친 자의 칼 아래서 항거가 어렵다 말라. 흐르는 피가 마침내 그 날을 꺾을 것이다.”(동아일보 1924년 6월 10일자 1면 사설 ‘항거와 효과’에서) 일제강점기 검열 관련 신문기사를 망라해 주석을 단 책 ‘미친 자의 칼 아래서 1, 2’(소명출판·한기형 엮음)가 최근 발간됐다. 책 제목은 일제 당국을 ‘미친 자’로 비판한 동아일보 사설에서 따왔다. 책에 수록된 7개 신문의 기사 2117건 중 동아일보가 절반(49.9%·1056건)을 차지한다. 지난달 29일 연구실에서 만난 한기형 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 교수(55·사진)는 “동아일보가 기사 삭제를 감수하면서 일제의 검열에 맞서 적극적으로 발언하려고 노력했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이게 6·10만세 다음 날 동아일보입니다. 어때요, 숨 막히는 긴장이 느껴지지 않나요?” 한 교수는 이날 1926년 6월 11일자 1면을 보여줬다. 머리기사 제목은 ‘각처에서 조선○○만세고창(高唱)’. ‘○○’라는 기호는 검열로 ‘독립’이라는 두 글자를 싣지 못하는 상황임이 전해진다. 제호 아래에는 ‘호외발행금지’라는 제목으로 “십일 국장 당일에 … 만세사건은 본보의 민활한 활동으로 호외를 발행하였으나 당국으로부터 인쇄까지 마친 호외의 반포를 금지함으로… ”라고 호외 압수 사실을 알렸다. “왼쪽 기사는 지워졌고, 사진은 왼편이 알아볼 수 없게 비늘처럼 돼 있죠? 윤전기 앞에서 대기하던 일제 검열관이 인쇄판에서 비판적인 내용을 조각칼로 쪼아낸 겁니다. 호외를 압수당하면 다시 발행하는 일을 되풀이해 호외를 세 번 내기도 했습니다.”(한 교수) 그는 언론 탄압에 항거하는 동아일보 영문 사설에도 주목했다. 1924년 7월 2일자는 ‘STRUGGLE FOR LIBERTY OF THE PRESS’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원문을 풀이하면 “조선인들은 한 몸이 되어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언론탄압에 저항하고 있다. … 이러한 상황에서 단순히 항의하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다. 이번 20일은 조선 전체의 시위일로 예정돼 있고…”라는 내용이다. 그해 11월 14일자는 제목부터 ‘CENSORSHIP’(검열)이었다. 한 교수는 “영문 기사에 상대적으로 날이 무뎠던 검열의 틈새를 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동포에게 드림(4)―동아일보를 통하야’라는 도산 안창호의 기고(1925년 1월 26일자)는 검열로 통째로 삭제됐다. 빈 기사 자리 맨 끝에는 “이 논문은 사정에 의하여 계속치 못하나이다”라고만 쓰여 있다. 그러나 일제를 비판하는 예리한 만평이 살아남았다. 게다를 신고 기모노를 입은 일본인이 ‘제국주의’라는 가면을 들었고, 앞에 러시아 혁명가 레닌처럼 생긴 러시아인이 “아주 벗는 것이 어때?”라고 그를 조롱한다. 한 교수는 “‘일본은 제국주의면서 아닌 척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된다”며 “검열관이 도산의 기고문을 자르다가 만평은 미처 못 봐 살아남은 듯하다”고 설명했다. 한 교수는 “독립군이 총격전을 벌였는데, ‘불온문서’가 발견됐다며 문서의 내용 자체를 전하는 기사도 적지 않다”며 “검열 속에서 보도하기 위한 기자들의 기지”라고 했다. 2002년경부터 검열을 연구한 그는 동아일보 등의 과거 기사가 디지털화하기 전까지는 신문 축쇄판과 마이크로필름을 한 장씩 수기로 옮겨 적으며 자료를 모았다. 박헌호(고려대) 정근식(서울대) 최경희(미국 시카고대) 한만수 교수(동국대) 등과 함께 ‘검열연구회’를 만들어 2011년 ‘식민지 검열: 제도·텍스트·실천’을 발간하기도 했다. 지금은 일제강점기 검열 전반을 다룬 저서를 모은 책을 준비하고 있다. 원래 한국 근대문학 연구자인 한 교수가 검열을 연구하는 이유는 뭘까. “식민지 시기 ‘왜 조선에서는 세계적인 걸작이 거의 나오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에 부딪혔어요. 검열 탓이었습니다. 일제는 본국에서는 사후 검열을 하면서 조선이나 대만 같은 식민지에서는 사전 검열을 했습니다. 식민지가 독자적인 지식문화를 키울 수 없도록 만든 겁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