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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것이 동척(東拓·동양척식주식회사)인가 본데, 그 옆으로부터 둥그러진 남대문통의 길가는 듬성듬성 하늘을 정복하는 듯하다. 그러나 땅 위에서 제가 젠(잘난) 척 자랑하는 ‘미쓰고시’(미쓰코시백화점)며 조선은행도 발아래 깔고서 굽어보니 낮고 높은 차별도 아무것도 없다.”(동아일보 1933년 6월 15일자) 하늘에서 경성을 내려다보는 이길용 기자(훗날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의 시선이 작은 기와집이 모인 북촌에서 남산 아래 일본인들이 모여 사는 넓고 높은 집들로 옮겨간다. 기사는 1933년 6월 5∼26일 12회에 걸쳐 연재된 ‘신록의 대(大)경성 부감기(俯瞰記)’ 6회다. 조선의 어느 언론사도 아직 취재용 비행기를 갖고 있지 않던 때였다. 동아일보는 경비행기 ‘샘슨 2A2’를 전세 내 경성의 항공촬영 사진을 보도했다. 사진은 본보 사진반원 문치장이 찍었다. 인쇄 기술의 한계 탓에 화질이 오늘날처럼 선명하지는 않지만 당시 독자들에게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새로운 시각 경험을 제공한 것이다. 1963년 동아일보는 스틴슨 L-5형 경비행기를 구입해 취재에 활용했다. 이 비행기는 희망을 뜻하는 이름인 ‘파랑새호’로 불렸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스틴슨사에서 제작하기 시작한 군용 모델로 최대출력 190마력의 직렬 6기통 엔진을 장착했고, 최고속도 시속 208km, 최고고도 4680m로 2명을 태우고 날 수 있었다. 파랑새호는 이후 4년 동안 1963년 대통령선거와 1964년 가평 버스 추락사고, 1965년 제2한강교(양화대교) 개통 등의 취재에 활용됐다. 파랑새호에서 촬영한 항공 사진은 압도적인 비주얼로 여러 차례 동아일보의 1면을 장식했다. 파랑새호는 지금은 삼성화재교통박물관(경기 용인시 처인구)에 기증돼 전시되고 있다. 이처럼 대형 사건이나 자연재해가 일어났을 때 동아일보가 만든 전면 사진 화보는 세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1922년 황해도 수해, 1925년 을축년 대홍수, 1933년 8월 대형 태풍 발생 당시 현장 사진을 담은 화보로 막심한 피해를 전 조선에 시각적으로 알리고 구호와 위문을 이끌었다. 1926년 6월 6·10만세운동을 촉발한 순종 인산을 보도한 화보는 끝없이 이어지는 애도 행렬과 긴장된 분위기를 그대로 전해준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청년 세대는 왜 가상통화에 열광하는가. 가상통화는 규제해야 하는가.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51)와 박한우 영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47)가 16일 서울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에서 긴급 토론을 벌였다. 김 교수는 거시·화폐 경제학과 국제금융을 연구하고 있으며, 빅데이터 전문가인 박 교수는 디지털융합비즈니스도 가르치고 있다. 두 사람은 가상통화의 가치와 정부 규제에 대한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렸다. 가상통화의 가치에 대해 김 교수는 “거의 없다”고 했고, 박 교수는 “미래 가치”라고 역설했다. 김 교수는 “가상통화는 현재 투기의 대상이 되면서 폭락과 폭등을 반복하고 있다”며 규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반면 박 교수는 “2040세대는 취업과 결혼을 포기했거나 직장에서 슈퍼맨이기를 강요당하는 세대”라며 “‘흙수저’들은 인생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동아줄 같은 투자 기회로 가상통화를 생각했는데 정부가 찬물을 끼얹고 있다”고 규제를 반대했다. ―가상통화의 가치는…. △김=가상통화의 본질은 ‘(가치가) 거의 없다’고 보인다. 회사의 주식을 보유하는 건 기술력을 포함한 그 회사의 일부를 소유하는 것이다. 반면 비트코인을 보유한다고 구매자가 그 기술력을 가지는 게 아니다. 만약 정부가 정식으로 다른 전자 화폐를 발행하면 기존 비트코인 등은 사라질 수 있다. 그게 본질이다. △박=미래 가치다. 비트코인 이후 나온 토큰들은 다 각자 기능이 있다. 결제와 송금을 저렴하게 할 수 있는 코인이 있고, 이더리움 기반의 토큰에서는 계약도 할 수 있다. ‘암호화폐’라는 호칭이 더 적절하겠다. ―지금의 투자 열기는 버블인가. △김=버블로 보인다. 너무 단기간에 폭등했고 현재 본질에 비해 가격이 너무 높다. 기술적 결함이 발견되거나, 대체재가 생기면 바로 폭락할 것이다. 이를 그냥 뒀을 때 어떻게 될까. 한국에서 1000만 명이 투자했는데 폭락했다고 치자. 경제 전체에 위기가 온다.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도 금융 신기술이 버블을 만들었다가 터진 것이다. △박=기술 이노베이션 차원에서 봐야 한다. 신기술의 확산은 통상 S커브를 그린다. 아직도 블록체인 기술은 확산의 초기 단계다. 버블이라 할 때 기준이 뭔가. 부동산은 공시지가 감정가가 있지 않나. 정부가 여러 가상통화의 가치 평가를 해주면 어떤가. ―버블이 터질 시점인가. △박=온라인 폐쇄한다고 오프라인 거래가 없어지지 않는다. 개인 간 직접 거래도 된다. 마냥 금지했다가 기술이 뒤떨어지면 한국은 어떻게 되겠나. 거래뿐 아니라 채굴, 지갑, 결제 산업이 연관돼 있다. 거래소를 폐쇄한다든지, 사용을 불편하게 하면 다른 산업도 포기한다는 건가. △김=당분간은 상승할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버블은 터진다. 그러면 상투 잡은 사람이 다 뒤집어쓴다. 조개껍데기를 화폐로 상용하다가 어느 순간 안 쓰게 되면 집에 쌓아놓은 사람은 어떻게 되겠나. 아직까지는 경제위기로 번질 수준은 아니라고 본다. ―가상통화의 미래는…. △김=가상통화의 특성을 갖는 법정 전자화폐가 등장할 확률이 굉장히 크다.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각국은 금융 여건에 따라 통화량을 조정하고 거시경제 정책을 펴는데, 가상통화가 화폐처럼 기능하면 그게 잘 안 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융시스템 안정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모두 안다. △박=보통 가상통화라고 하면 기업과 소비자 거래(B2C)만 생각하는데, 기업 간 거래(B2B) 적용 가능성이 더 크다. 패션 헬스케어 항공 화물 등 전 방면에 기술이 적용될 것이다. 글을 써서 올리면 가상통화로 보상하는 온라인 커뮤니티 ‘스팀잇’처럼 온라인 커뮤니티 문화의 발전에도 기여하고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96개의 형형한 눈빛들이 1920년 7월 12일 동아일보 3면을 뒤덮었다. 주인공은 최남선 송진우 손병희 최린 현상윤 한용운을 비롯한 3·1운동 민족대표 48인.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서 관련 공판의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다는 보도다. 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해외로 피신한 김병조와 구금돼 사망한 양한묵을 뺀 31명에, 작성 및 배포에 적극 참여한 박인호 등 17명이 포함됐다. 지면 편집은 오늘날 봐도 강렬하고 파격적이다. 사진 아래 “작년 삼월 일일에 탑골공원에서 만세소리가 일어나며 명월관 지점 제 일호 실에서는”으로 시작하는 기사는 눈빛만큼이나 담담하면서도 결연한 기운이 글자마다 묻어난다. 3·1운동의 결과물로 태어난 동아일보는 운동의 정신을 잇는 데 앞장섰다. 창간 한 달 뒤인 1920년 5월 15일에는 독립만세운동을 수사하는 일제 경찰이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악랄하게 자행했다는 피고인들의 법정진술을 그대로 소개했다. 본보의 2차 무기 정간도 1926년 3·1운동 7주년에 소련국제농민회 본부가 조선농민에게 보내는 축전을 번역해 그해 3월 5일자에 실었다가 당했다. 광복 뒤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에 미처 다루지 못한 3·1운동의 진면목을 다시금 조명하기 시작했다. 복간 두 달 만인 1946년 2월 ‘삼일기념 전기(前記)’ ‘삼일운동의 회상’ 등을 연재했다. “천안만세주동자로 7년 구형을 받은 어린 유관순의 법정 투쟁도 또한 모질었다. ‘나는 당당한 대한의 국민이다. 대한사람인 내가 너희들의 재판을 받을 필요도 없고 너희가 나를 벌할 권리도 없다.’ 유관순은 이런 저항으로 법정모독죄까지 가산되어 여성 최고의 7년 징역형을 받았다.” 3·1운동이 50주년을 맞은 1969년 게재한 특집기사 ‘민족의 함성, 3·1운동’의 일부다. 독립운동가의 법정 투쟁을 생생하게 되살렸다. 동아일보가 그해 발간한 ‘3·1운동 50주년 기념논문집’은 오늘날까지도 연구자들의 기본 자료가 되고 있다. 본보 창간 45주년을 맞았던 1965년에는 3·1유적보존운동을 일으키고 기념비 건립을 위한 유적지 조사를 국사편찬위원회와 합동으로 추진했다. 첫 결실로 1971년 8월 15일 전북 이리(현 익산시) 역전광장에 3·1운동 기념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열었다. 1970년대 충북 영동, 강원 횡성, 전북 남원 등 전국 9개 지역에 3·1운동 기념비를 세웠다. 이 사업은 1980년대에도 계속 추진했다. 1989년에는 3·1운동 70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열기도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민족 고대(고려대)’라는 말은 어떤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을까. 1905년 보성전문학교(보전) 개교부터 6·25전쟁 무렵까지 고려대의 역사를 민족주의 시각에서 조명한 책 ‘안암골 호랑이―대한민국과 고려대학교’(고려대 3·3동지회 엮음·사진)가 최근 발간됐다. 3·3동지회는 1998년 시작된 고려대 동문 모임이다. 김현석 고려대 3·3동지회 회장은 책에 ‘충숙공 이용익 선생 보성전문학교 창학’을 실었다. 그는 “한일의정서 조인을 결사반대했던 대한제국 탁지부대신 이용익 선생이 일본에 압송됐다 신식 문물을 접하고 교육 구국을 위해 1905년 4월 설립한 것이 보성전문학교”라며 “초대 교장 신해영이 편술한 ‘윤리학 교과서’가 일제 통감부로부터 불온한 교과서라 하여 발매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고 썼다. 이후 운영난을 겪던 보성전문학교는 1910년 천도교가 인수했다. 천도교 교인인 임순화 3·3동지회 명예회원은 책에서 “천도교 교주였던 의암 손병희 선생과 보전 교장 최린이 투옥되는 등 보전 구성원들은 ‘3·1혁명’(3·1운동)에 민족대표 등으로 대거 참여했다가 일제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고 했다. 탄압으로 경영난에 빠진 보성전문학교는 민립대학 설립을 꿈꾸던 인촌 김성수 선생이 1932년 인수했다. 서석중 3·3동지회 상임고문은 “인촌과 민족의식이 뚜렷한 교수들의 영향을 받아 보전 학생들도 문자 보급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항일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고 썼다. 홍일식 이기수 전 고려대 총장,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가 한국 현대사에 관해 쓴 글도 함께 담겼다. 2016년 8·15 광복절에 ‘대한민국과 고려대’를 주제로 열린 시국강연회 내용을 보완해 엮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재(在)광동(廣東) 조선혁명군인회―만주와 서백리아(西伯利亞·시베리아) 방면에서 학생 1000명 모집 중.” 동아일보 1926년 6월 28일 1면 한가운데 실린 기사의 제목이다. 중국 국민혁명군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생긴 황포군관학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등과의 연계 속에서 조선 청년들을 다수 입교시켰다. 이 기사는 마치 이 학교의 학생 모집 광고와 다를 바 없다. “황포군감(관)학교에 재(在)한 조선인 장교와 학생 120명에 의하여 조직된 혁명군인회는…1000명의 학생을 신입하게 하기 위하여 비밀히 만주에서 시베리아 방면에서 모집 중이다. 차(此)는 예의 여운형 일파와 이(異)하여 혁명군인을 양성하여 조선의 독립을 계(計)하려는 목적이며….” 효과도 있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비서로 일했던 독립운동가 구익균은 회고록에서 “내가 하고 있던 중산대학과 광동 군관학교의 입학 안내 소식이 국내의 동아일보에 크게 보도되었다. 그 결과 한국과 만주, 중국의 여러 도시에서 한국인 청년들이 몰려왔다”고 썼다. 일본 경찰이 확보한 독립운동 수사 정보를 보도해 간접적으로 독립운동가들에게 알리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1925년 2월 21일 “중국 난징에 본거지를 둔…뢰선단(雷鮮團)에서는 비밀리에 단원 다수가 조선내지에 침입하고자…정보가 있어 경기도 경찰부에서는 크게 경계중이라더라”라고 보도했다. 신문을 본 이라면 누구나 ‘경찰이 뢰선단의 내부 정보와 동선을 파악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뢰선단의 실제 명칭은 뇌성단(雷聲團)이다. 단원들은 동아일보 보도를 보고 작전 유출과 밀정의 존재를 깨달았다. 일본 난징(南京) 영사는 1925년 4월 5일 본국에 “이곳 불령선인 뇌성단(雷聲團) 조직의 건은 동아일보에 게재된 것을 동 단원이 발견하여 이곳에 밀정이 있다고 몹시 경계함으로써 그 후 밀정의 활동이 용이하지 못해 수사에 지장을 낳고 있음”이라고 보고했다. 동아일보의 1차 무기 정간(1920년 9월 26일)은 “일제가 동아일보를 사전에 정간시켜 간도의 조선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경신참변(간도참변) 작전이 누설되지 않도록 조치한 것”이라는 학계 연구도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우리가 사는 세계와 우주는 외계인들이 갖고 노는 구슬 속이나 사물함 속에 있는 게 아닐까(영화 ‘맨 인 블랙’). 사실 지구는 이미 외계인에 의해 폭파됐고(‘지구를 지켜라’·감독 장준환) 우리는 우주를 떠도는 잔해나 흔적 같은 게 아닐까. 책은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에 있나’ ‘우리만 있나’ ‘왜 여기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화두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원제는 휴먼 유니버스(Human Universe). 2014년 BBC가 만들고, 이듬해 국내에도 방영된 동명의 과학 다큐멘터리를 다큐 진행자와 총괄 프로듀서가 책으로 옮겼다. 천동설에서 빠져나온 뒤, 우리 은하가 우주의 전부라는 생각에서는 어떻게 벗어났는지, 태양계 밖으로 날아간 보이저 호에 있는 황금 레코드에는 어떤 정보가 어떻게 담겨 있는지와 같은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천문학이나 우주론, 생명의 탄생과 진화에 관한 교양 도서가 익숙한 독자라면 책이 담고 있는 개별 정보는 다소 익숙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를 기반으로 한 만큼 사진과 일러스트, 도해 등이 풍부한 것이 큰 강점이다. 대부분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시원한 크기의 ‘올 컬러’에 질 높은 각종 시각자료가 많이 등장한다. 나란히 실린 발자국 사진 2개도 그렇다. 탄자니아의 화산재에 찍힌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발자국과 1969년 닐 암스트롱이 달의 고요의 바다에 남긴 발자국 사진으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도 실렸던 것이다. 두 발자국은 거리로는 약 40만 km, 시간으로는 약 370만 년 떨어져 있다. 저자들은 말한다. “이 둘은 우리가 동아프리카지구대로부터 별까지 올라온 믿기 어려운 위대한 여정을 아름답게 대변해준다.” 영국 맨체스터대 교수이자 입자물리학자인 브라이언 콕스는 ‘빅뱅 이전의 시간이 존재한다’는 다중우주론의 입장에 서 있다. 책에도 이 같은 입장이 가끔 등장하지만 이 우주론은 아직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건 아니라는 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올해부터 아마추어 예술 동아리를 정부가 지원해 시민 예술가를 양성하는 사업이 추진된다. 은퇴를 맞는 50, 60대 중장년층을 위한 문화예술학교도 운영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문화예술 교육 5개년 종합계획’(2018∼2022년)을 11일 발표했다. 문체부는 먼저 지역 문화예술 교육의 기반 생태계를 구축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문을 닫은 초등학교나 버려진 공장을 개조해 예술 교육 센터로 활용하는 핀란드, 벨기에처럼 지역 내 유휴 공간을 학교 밖 문화예술 교육 거점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올해에는 2, 3곳을 시범 운영하고 2019년 이후 단계적으로 확대하겠다고 한다. 지역 문화회관의 공연·전시와 관련된 감상 중심 예술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유아부터 고령자까지 생애주기에 맞게 교육 기회도 확대한다.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생애 전환기 중장년층’(50∼64세)을 위한 문화예술학교를 올해 전국 6곳에 신설한 후 점차 늘려갈 계획이다. 직장인을 대상으로 ‘저녁에 만나는 예술학교’도 추진한다. 각 지역의 특성을 반영해 아마추어 동아리에 대한 문화예술 교육을 지원한다. 올해는 700여 개, 2019년부터는 1000여 개의 동아리가 대상이 될 예정이다. 성폭력, 가정폭력 피해 여성이나 학교폭력 피해 학생, 도박 중독자 등을 위한 예술 치유 프로그램도 확대한다. 베트남에서 실시하고 있는 문화예술교육 공적개발원조(ODA)도 아프리카나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로 넓히겠다는 계획이다. 문체부는 “전국의 지역 곳곳에서, 일상 속에서 문화예술 교육을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창간 13주년 기념 우리 사(社)에서는…새 철자법을 채용하기로 하야 오늘부터 시행하게 되었다. 이것은 오직 우리 동아일보의 큰일일뿐더러 진실로 조선말과 글을 위한 큰 혁명이라고 할 것이다. … 말과 글이 한 민족의 문화의 어미인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다.”(1933년 4월 1일 동아일보 사설) 오늘날 한글맞춤법은 1933년 10월 조선어학회가 제정, 공포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수정한 것이다. 이 통일안을 가장 먼저 사용한 신문이 동아일보다. 동아일보는 공포 6개월 전부터 거의 완성된 이 통일안을 적용해 새 활자로 신문을 발간했다. 당일 부록으로 ‘신철자편람(新綴字便覽)’도 함께 보급했다. 동아일보가 앞서 나가자 다른 신문이나 잡지도 뒤따라 새 맞춤법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우리말과 한글을 바로 세우는 일은 ‘총칼 없는 독립운동’이었다. 동아일보는 “철자법을 통일 확장하는 것은 우리 민족문화운동의 기초 공사”라고 봤다. 인촌 김성수 선생이 맞춤법 통일안 제정에 필요한 기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를 결성할 때도 발기인 108명 가운데 동아일보 전현직 인사 10여 명이 참여했다. 조선어와 한글 교육을 수호하는 데도 적극 나섰다. 한글학자인 외솔 최현배 선생의 글을 연재했고, 조선어 교육을 제한하려는 일제의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글을 배우러 오는 아이들은 거의 날마다 늘었다.” 심훈이 1935년부터 이듬해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상록수’의 한 구절이다. 동아일보의 한글 사랑은 ‘브나로드’ 운동으로 꽃을 피웠다. 문맹률이 약 80%에 이르던 현실에서 동아일보는 1931년부터 ‘브나로드’ 운동을 벌이며 농촌계몽과 한글 보급에 앞장섰다. 동아일보가 배부한 ‘한글공부’ ‘신철자편람’ 등의 교재만 모두 210만 부에 달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하와이 사진신부라 불리는 이들이 있다. 20세기 초 미국 하와이에 노동이민을 간 남성과 서로 사진만 교환한 뒤 혼인한 여성을 일컫는다. 1910, 20년대에 600∼1000명이 이렇게 조선을 떠나 하와이로 갔다. 그런 사진신부였던 천연희 여사(1896∼1997)의 자전적 기록이 담긴 ‘하와이 사진신부 천연희의 이야기’(일조각)가 최근 출간됐다. “나는 소설가도 아니요, 작문가도 아니요, 시를 잘 짓는 사람도 아니다. …우리 한국 여자 사진 혼인해 온 이들이 대단히 일찍 깨었고 살기를 원해서 (하지만) 남편들은 나이 많고, 아무 재주 없고, 사역(일)도 잘 못하니 (더구나) 아이들은 많이 있어서 이 여자들이 살길을 찾아서 빨래숍도 내고, 바느질도 하고, 장사는 하려도 밑천이 없어 큰 회사나 청국 사람에게 헌집을 몇 해 세내어….” ‘하와이…’는 천 여사가 1971년부터 1984년까지 남긴 노트 7권을 현대 말투로 옮기고 해제를 달았다. 경남 진주의 비교적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난 천 여사는 1915년 하와이 마우이섬의 사탕수수농장 노동자 길찬록에게 시집을 왔다. 이민 배경에는 아버지가 부재한 상황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어머니의 허락과 지원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론 일제강점기란 식민지 현실이 있었다. “모든 것이 압박과 압제를 주었다. …제국 정치의 반대자라거나 도모자라고 하고 옥에 가두고 추달하여 병신을 만들어 정신병자 모양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등신을 만들어 버렸다. 그와 같이 자유 없는 나라 백성은 참으로 불쌍하였다. 이 모든 것이 내 마음에 상처가 되어 자유 세상을 찾게 되었다.” 천 여사는 노트와 함께 구술 녹음테이프 24개와 사진, 편지 등도 자료로 남겼다. 이런 소중한 기록을 남긴 하와이 사진신부는 그를 포함해 2명뿐이다. 천 여사의 자료는 이덕희 하와이이민연구소장 주선으로 미국 하와이대에 기증됐다가 2014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역주와 해제를 이끈 문옥표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머리말에서 “천연희는 온갖 역경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과 아이들을 지켜냈고 인간다움의 존엄을 보여준 여성이었다”며 “기록이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고 사회, 정치, 경제 상황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 하와이 이민 역사와 여성사 연구의 귀한 자료”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본 코미디 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2006년) 이야기다. 어느 마을에 평범한 서민으로 가장한 스파이들이 숨어 산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은 자그마한 라면 가게를 운영한다. 스파이로서 그의 우선과제는 라면을 ‘평범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음식이 맛있다고 소문나면 주목을 받을 테고, 그러면 수상쩍은 구석이 드러날 위험이 있으니. 그렇다고 아예 맛없으면 생활 자체가 안 될 수 있다. 어느 정도 손님이 들 만큼 적당히 맛을 유지하는 게 관건. 그는 맛이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닌, 그저 그런 라면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길 수십 년. 드디어 스파이의 정체를 드러내야 할 순간이 다가왔다. 그는 마지막으로 라면을 끓인다. 자신의 모든 실력을 쏟아부었다. 동료는 초일류인 그 맛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 오랜 세월, 이런 실력을 숨겨야 했을 줄이야. 이런 비극적 희극이라니! 세상의 평범함 뒤엔 얼마나 많은 위대함이 숨어있는지. 이런 찬사는 식상하지 않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KBS 이사회가 10일 고대영 KBS 사장 해임 제청안을 이사회 공식 안건으로 확정했다. 고 사장은 이에 “해임 사유는 모두 허위이거나 사실관계조차 파악하지 못한 억지 주장”이라고 반발했다. KBS 이사회는 이날 비공개 임시이사회를 열고 고 사장에게 15일 오후 예정된 임시이사회 개최 전까지 해임 제청안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해임 제청안은 해임 사유로 △지상파 재허가 심사에서 KBS의 조건부 재허가 결정 △공사의 신뢰도와 영향력 추락 △파업 사태 초래 등 직무수행능력 상실 △조직운영·인사관리 실패 △허위·부실 보고로 이사회 심의·의결권 침해 △보도국장 재직 시 금품수수 의혹 등을 담았다. KBS 이사회는 고 사장의 의견서를 살펴본 뒤 다시 이사회를 열고 고 사장에게 구두 의견 진술 기회를 부여할 예정이다. 고 사장 해임 제청안은 KBS 이사회 절반 이상이 찬성하면 통과된 뒤 대통령 재가로 결정된다. 최근 강규형 전 KBS 이사가 해임되고 김상근 목사가 보궐이사로 임명돼 KBS 이사회는 여권 6명, 야권 5명으로 재편된 상황이다. 고 사장은 이날 해임 제청안 상정 직후 발표한 입장문에서 “강규형 전 이사가 해임이 부당하다며 제기한 가처분신청이 결론도 나지 않은 만큼 현재 KBS 이사회가 법적 완결성을 지녔는지 다툼의 여지가 있다”며 “그런 이사회가 사장 해임이라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고 사장은 또 “KBS 이사진 교체과정은 과도한 인신공격과 폭력적 사퇴압박으로 점철돼 절차적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다”며 “감사원에서 방송통신위원회로 이어진 해임과정도 해임사유로 불충분한 표적감사라는 지적이 나온다”고 밝혔다. 아울러 자신의 해임 사유에 대해서도 “상황을 과장 또는 왜곡했다”고 반박했다. 고 사장은 “방통위 재허가 심사는 심사위원들이 자의적 평가가 가능한 항목들에서 점수를 대폭 낮춘 주관적 평가였기에 객관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해임 사유 중 하나인 ‘직무 수행능력 상실’에 대해서도 “파업이 교섭대표노조인 KBS 노조의 업무복귀로 공식적으로는 중단됐고, 민주노총 소속 KBS 본부노조가 법적근거 없이 직무를 거부하고 있지만 파업 참가율은 20% 정도에 그치고 있다”고 반박했다. 고 사장은 “여권 다수로 재편된 이사회가 정해진 수순대로 해임 결정을 내릴 경우 법적 대응도 불사하겠다”며 강경 대응할 뜻을 내비쳤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중국의 동북공정 5개년 사업은 2007년 ‘형식적으로’ 종료됐다. 하지만 중국의 고구려 역사 연구는 현재까지 오히려 확대되고 심화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도형)은 최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동북공정 이후 중국의 고구려사(史) 연구 동향’(역사공간)을 출간했다. 김현숙 동북아재단 한중관계연구소장은 책에서 “중국 학계의 ‘포스트 동북공정’ 연구는 동북공정식 역사인식을 변함없이 견지하며 보완·심화 단계로 나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의 고구려사 연구는 양부터 엄청나다.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끝난 뒤인 2007년 2월부터 2015년까지 발표된 관련 연구 논저는 모두 512편에 이른다. 단행본만 27권에다 박사논문 14편, 석사논문 44편, 학술지 논문 427편이다. 김 소장은 “동북공정 종료 이후 연구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배경에는 중국정부의 연구비 지원 확대가 크게 작용했다. 특히 지린(吉林)성 사회과학원이 기금을 관리하며 고구려 연구를 주도하고, 학술지 ‘동북사지(東北史地)’도 핵심역할을 하고 있다. 이 밖에 통화사범학원과 동북사범대 역사문화학원, 지린대 동북아연구중심, 연변대 등도 활발하다. 김 소장은 “전략적 분업이 이뤄진 것처럼 실력 있는 중견 학자들이 대거 포진해 논리 보완이 필요했던 주제의 연구를 주도하며 후진 양성도 적극적이다”고 말했다. 때문에 갈수록 연구 내용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 되고 있다. 조영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중국에서 ‘고구려사 연구의 2.5∼3세대’로 불리는 젊은 학자들은 연구 주제도 다양하고 실증적인 측면에서 강점을 지녔다”며 “국내 학계에선 생소하지만 중국 민족학 인구학 등에서 드러났던 특유의 방법론을 잘 살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가장 심각한 건 이런 연구들의 전체적 흐름이 이전 동북공정식 인식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다수 고구려 대외관계사 연구는 고구려와 중국 왕조를 아예 하나의 나라, 즉 일국(一國) 관계로 전제했다. 이준성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조공이나 책봉을 지역질서의 수단으로 보는 것에 동의하는 연구조차도 동아시아 세계의 성립과 발전을 오직 한화(漢化)로만 설명하는 중국 중심사관에 갇혀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유명 사학자인 거자오광(葛兆光) 푸단(復旦)대 교수가 “중국이 상상의 정치 공동체인지, 자기 동일성을 지닌 역사적 단위인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일부 학자들의 연구 도 주목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문헌사료와 사학사 연구를 분석한 이정빈 충북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동북공정 시기 중국학자들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외면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최근에도 중국 문헌과 비교해 고구려본기의 사료적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근대 이전 동아시아 외교 관례는 ‘광의의 국제법’(국제관습법)이며, 독도는 일본의 주장처럼 ‘무주지’였던 것이 아니라 국경 조약상 조선 영토였음이 명확하다는 연구가 나왔다. 재일 독도 연구자인 박병섭 ‘竹島=독도문제연구넷’ 대표는 최근 학술지 ‘독도연구’ 23호에 ‘독도 영유권에 대한 근대국제법의 적용 문제’를 게재했다. 17세기 말 조선과 일본은 울릉도의 귀속을 두고 외교 문서를 주고 받으며 교섭해 1699년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했다. 이른바 ‘울릉도 쟁계’다. 당시 양국은 낙도(落島)의 귀속에 관한 판단 기준으로 ‘어느 정부가 낙도에 영유 의사를 가지고 있는가’, ‘낙도는 어느 나라에 가까운가’ 하는 두 가지를 세웠다. 논문은 “이는 근대 이전 ‘광의의 국제법’이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 이후에도 일본은 일본에서 울릉도와 독도의 귀속이 문제가 될 때마다 이들 기준에 따라 조선의 영토로 판단했다. 에도 막부는 독도에 영유 의사를 가진 적이 없었고, 지리적으로 독도는 조선 땅인 울릉도에 가깝기 때문이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도 모리야마 시게루 등이 1870년 작성한 ‘조선국 교제 시말 내탐서’를 비롯해 이런 판단은 변함이 없었다. 이성환 계명대 교수도 같은 학술지에 실린 논문 ‘조일(朝日)/한일(韓日) 국경조약체제와 독도’에서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라는 1877년 일본 태정관(太政官) 지령은 ‘울릉도 쟁계’의 결과 1699년 성립된 한일 국경조약을 일본 국내법령으로 수용한 것”이라며 “이를 ‘조일/한일 국경조약체제’로 규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병섭 대표는 “일본은 1905년 무주지를 선점해 독도를 편입했다고 주장하지만 독도는 광의의 국제법상 한국의 영토였으며 편입은 무효”라고 강조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임진란, 거북선과 함께 역사를 지은 민족적 은인 이 충무공의 위토 60두락지기가 장차 경매에 넘어갈 운명에 있다고 한다.…모두 빈한한 살림이라 갚을 도리가 없어 오늘까지 왔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종손의 부채 때문에 위토가 경매에 부쳐질 예정이며 묘소와 사당, 종가가 모두 퇴락하고 있다는 르포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국난 극복의 상징인 충무공 유적지 보존을 위한 거족적 운동을 촉발시켰다. 동아일보는 “우리는 먼저 민족적 이상이 결여하고, 민족적 자부심이 마비된 조선의 사회를 스스로 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서러워한다”며 사설로 전 민족적 해결을 제안했다. 5월 21일에는 전 민중이 읽을 수 있도록 순 한글로 사설을 쓰기도 했다. 연이은 보도를 보고 명성여자실업학원 학생들이 눈물을 흘리며 주머니를 털어 1전, 2전씩 모아 동아일보에 성금을 보냈다. 동아일보는 5월 23일자부터 6월 말까지 1개 면 전체를 털어 성금 기탁자 명단을 실었다. 다음 해까지 1년간 성금을 보내온 사람은 2만여 명, 400여 개 단체. 총 1만6021원30전이 모였다. 직공부터 어린이까지 전 조선에서 10전, 20전씩 정성을 모은 것이다. 이광수 편집국장이 장편소설 ‘이순신’을 1932년 6월부터 178회에 걸쳐 연재했다. 이광수는 소설 마지막 문장에서 “그때 적을 보고 달아난 무리들이 정권을 잡아 삼백년 호화로운 꿈을 꾸는 동안에 조선의 산에는 나무 한 포기 없어지고 강에는 물이 마르고 백성들은 어리석고 가난해졌다”며 피폐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개탄했다. 1931년 5월 23일 저명인사들로 ‘충무공 유적보존회’가 결성됐고, 실무를 동아일보가 주관했다. 성금으로 부채를 상환하고 현충사를 중건했으며 새로 꾸민 사당에 충무공의 검, 금대, 일기, 칙지(勅旨) 등 유물을 안치했다. 위토를 추가로 매입하기도 했다. 1932년 6월 5일 동아일보 전속 화가인 청전 이상범 화백(1897∼1972)이 그린 충무공 영정을 새 사당에 봉안했다. 봉안식이 열리는 날 현충사 주변에는 3만여 명의 인파가 주변 산야를 뒤덮었고, 천안∼온양 간 임시열차가 운행됐다. 온 겨레가 함께한 잔치였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인사혁신처가 4일 시민단체 근무 경력을 공무원 호봉으로 인정하겠다고 밝히자, 공직사회는 엇갈린 반응을 보이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향후 공무원 보수규정이 어떻게 바뀔지, 시민단체 경력 인정이 공직사회에 어느 정도의 파장을 몰고 올지 등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는 분위기였다. 시민단체 경력 인정이 공직 개방의 문호를 넓힐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특정 단체에 대한 특혜가 없어야 공직사회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지적이 많다.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5일 본보에 “정부와 민간의 교류가 활발해지는 게 대세이니, 시민단체 경력 호봉 반영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의 한 간부는 “평생을 시민단체에 있다가 공직에 입문하면 나이는 많은데 호봉이 낮을 수 있다. 직급과 경력에 맞는 대우를 해주는 것이 맞는다고 본다”고 했다. 해양수산부 관계자는 “사회 각 부문과 정부가 활발하게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본다”고 평가했다. 현재 경력 공무원 채용에서 민간 경력 인정은 이미 시행을 하고 있는 제도다. 5, 7, 9급 공채로 뽑는 공무원 시험의 한계를 극복하고 민간 인재를 수혈하기 위해 호봉을 책정할 때 민간 경력을 환산해 반영한다. 과거에는 변호사 자격증이나 박사학위와 같은 특수경력을 가지고 동일 업무에 종사한 경력에 한해서만 그 기간의 최대 80%를 호봉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2012년 7월 1일부터는 동일 분야의 민간 경력도 최대 100% 인정하기로 공무원 보수규정을 개정했다. 시민단체 경력도 ‘관련이 있는’ 경우에 인정을 해준 것이다. 예를 들어 5급 1호봉으로 채용된 사람이 9년간 유관 시민단체에서 일했다면 5급 10호봉의 대우를 받는 방식이다. 문제는 이번 인사혁신처의 개정안이 해당 업무와 ‘관련이 없는’ 시민단체 경력도 ‘최대 70%까지’ 환산해 인정할 수 있도록 하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고용부의 한 관계자는 “객관적인 학위나 정부기관 근무 경력도 아닌, 불확실한 경력을 반영해서 호봉을 올려주는 것은 공무원 인사체계 자체를 뒤흔드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한 퇴직 관료도 “채용비리는 물론이고 정치권 ‘낙하산’들의 인사 청탁과 민원이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농림축산식품부에서는 “시민단체 경력을 분야에 상관없이 호봉으로 쳐준다면 전문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나왔다. 일부에서는 “특정 단체를 위한 봉급 잔치가 될 수 있다”는 불만의 목소리도 나온다. 김태영 경희대 행정학과 교수는 “시민단체와 정부의 역할에 공통되는 부분이 있는 만큼 능력 있는 시민단체 인력의 축적된 역량을 인정해 줄 필요가 있다”며 “다만 시민단체 외에도 다양한 전문가들이 공직사회에 진출해 ‘공무원 철밥통’을 깰 수 있도록 공정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노지현 isityou@donga.com·김윤종·조종엽 기자}

‘호외(號外)요!’ 1923년 3월 15일 동아일보 판매원이 달랑거리는 방울을 허리춤에 차고 일제강점기 서울의 거리를 뛰며 외친다. “총을 맞아 숨이 진한 후에도 육혈포에 건 손가락을 쥐고 펴지 아니하고 숨이 넘어가면서도 손가락으로는 쏘는 시늉을 하였다.” 손에 들린 호외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김상옥 의사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전했다. 두 달 전 벌어진 일이지만 일제 당국이 보도를 금지해 알리지 못하다가 해제 즉시 호외를 낸 것. 동아일보가 26일 지령 3만 호를 발행하지만 ‘호외’가 있기 때문에 실제 발행한 신문은 그보다 많다. 호외는 중요한 뉴스를 빨리 전하기 위해 임시로 발행하는 신문으로, 지령을 세는 호(號)에는 포함되지 않는다(外). 호외는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을 전한 뉴스 속의 뉴스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 소식을 담은 호외를 압수하는 당국과 동아일보가 힘겨루기를 하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나석주 의사의 폭탄 의거 보도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1927년 1월 13일 바로 호외를 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허락받지 않은 내용이 담겼다며 호외를 압수했다. 동아일보는 다음 날 또 ‘호외의 호외’를 발행하면서 “경무국이 기사 내용을 딕테이트(dictate)한다는 것은 경찰 만능의 조선에서도 초유의 사(事)엿다. 아모리 주책없는 경무당국이라도…”라며 날 선 비판을 가했다. 첫 호외는 창간 보름 만인 1920년 4월 15일 평양에서 벌어진 만세운동 기사로 신문이 발매 금지 처분을 당하자 다시 낸 것인데 남아 있지 않다. 순종 승하를 전한 호외(1926년 4월 27일),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소식을 알린 두 차례의 호외(1936년 8월 10일) 등 민족의 아픔과 기쁨이 호외로 전파됐다. 광복 이후에도 호외가 주요한 속보 매체였다. 6·25전쟁 발발 이틀 뒤인 1950년 6월 27일 오후에도 동아일보는 ‘적, 서울 근교에 접근, 우리 국군 고전 혈투 중’이라는 호외를 찍었다. 피란으로 배포할 사람이 없어 시경에서 빌린 지프차를 타고 기자들이 시청 앞, 광화문, 중앙청, 안국동을 돌며 포탄이 산발적으로 시내에까지 날아드는 가운데 호외를 뿌렸다. 동아일보의 호외는 민주주의의 전진을 이끈 신호탄이었다. 1960년 3·15부정선거가 일어나자 불법·무효를 알리고, 4월 11일 마산에서 시위에 참가했다가 사망한 김주열 군의 시신이 발견된 일을 알린 것도 호외다. 1990년대 이후에는 TV와 인터넷의 발달로 이전에 비해 호외를 내는 일이 확 줄었다. 그러나 △‘김일성 사망’(1994년 7월 9일) △‘성수대교 붕괴’(1994년 10월 21일) △‘대구 지하철 가스 폭발’(1995년 4월 28일) △‘삼풍백화점 붕괴 속보’(1995년 7월 3일) △‘KAL기 괌서 추락’(1997년 8월 6일) 등 굵직한 뉴스가 호외로 다뤄졌다. 21세기에도 호외는 월드컵 승전보나 김정일 사망,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전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국립민속박물관(서울 종로구 삼청로)은 2018년 무술년(戊戌年)을 맞아 2월 25일까지 특별전시 ‘공존과 동행, 개’를 연다. 이번 전시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십이지신 추(錘)’와 개와 사람이 함께 사냥하는 모습의 토우 장식이 달린 ‘굽다리접시’를 비롯해 여러 전통 유물을 만날 수 있다. 도화서 화원 김두량(1696∼1763)의 그림으로 전해지는 ‘모견도(母犬圖)’도 나온다.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어미 개의 모정이 잘 표현된 그림이다. 사도세자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개 그림(犬圖)도 볼 수 있다. 승정원일기 등의 자료를 통해 조선의 궁궐에서도 개를 길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개의 상징과 의미를 알 수 있는 유물도 많다. ‘개 부적’은 새해에 액을 쫓고 복을 빌며 대문이나 벽장에 붙였던 세화(歲畫)의 일종이다. 20세기 민화 ‘당삼목구’는 그림 상단에 ‘세 개의 눈을 가진 개가 짖어 삼재를 쫓는다(唐三目狗吠逐三災)’라고 적혀 있다. 개는 전통적으로 호랑이, 해태, 닭과 마찬가지로 벽사(辟邪·귀신을 물리침)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광복 이후 정부에서 처음 발행한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 ‘바둑이와 철수’도 볼 수 있다. 또 시각장애인 안내견, 인명 구조견 등 오늘날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개와 관련된 영상을 비롯해 70여 점의 자료를 전시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인간이 개를 바라보면, 개도 인간을 바라보고 눈을 맞춘다. 이것이 단순히 반려동물과 감정을 나누는 행동이 아니라 오늘날의 인류를 만든 중요한 사건의 하나라는 주장이 최근 제기됐다. ‘개의 해’ 무술년(戊戌年)의 시작을 앞두고 인간과 개의 역사에 대한 이모저모를 살펴봤다. ‘왜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하고 현생 인류는 살아남았는가?’는 인류학의 오랜 질문이다. 최근 발간된 ‘침입종 인간’(팻 시프먼 지음·푸른숲)은 그 답으로 ‘현생 인류와 개의 동맹’을 꼽는다. 책에 따르면 약 5만 년 전 유라시아 대륙에 도착한 현생 인류는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종류의 먹잇감을 사냥하며 경쟁했다. 그러나 인류는 적어도 3만6000년 전에 늑대를 ‘늑대-개’(원시 개)로 길들이면서 더 다양한 동물을 사냥할 수 있게 됐고, 사냥 성공률도 비약적으로 높이면서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주장이다. 왜 늑대였을까? 인간의 공막(눈의 흰자위)은 영장류 중 유일하게 희다. 멀리서도 시선의 방향을 알 수 있다. 소리 내지 않고 눈으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조직적으로 사냥하기에 좋다. 늑대도 그렇다. 갯과 동물 25종을 분석한 결과 대부분의 늑대는 얼굴과 눈 색깔, 홍채와 눈동자가 강하게 대비돼 시선의 방향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개가 늑대보다 인간을 응시하는 시간이 평균 2배 길다는 것도 인간이 그런 개체를 선택해 길들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보여준다. ‘침입종 인간’의 저자는 “인간이 개를 가축화한 건 도구의 발명과 맞먹는 도약”이라고 강조했다. 이렇게 길들인 개는 오랜 세월 충직함의 대명사였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에서 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오디세우스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때 그를 반긴 유일한 존재가 늙은 개 ‘아르고스’였다. 불길에서 주인을 구한 전북 임실의 ‘오수의 개’ 이야기도 유명하다. 최근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천진기)이 연 학술강연회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 문화 속의 개 이야기를 살펴봤다. “십이지의 열한 번째 동물인 개(戌)는 시간으로는 오후 7∼9시, 방향으로는 서북서, 달로는 음력 9월에 해당하는 방위 신(神)이자 시간 신이다. 개는 이 방향과 이 시각에 오는 사기(邪氣)를 막는 동물 신이다.”(천진기 관장) 천 관장에 따르면 개는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동물로 인식됐다. 이런 생각은 중앙아시아에 광범위하게 분포돼 있다. 알타이 샤먼은 저승에 갈 때에 지옥문에서 개를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 무속신화인 세민황제본풀이, 저승 설화에서도 그렇다. 제주도의 차사본풀이에서 염라대왕은 자신을 만나고 돌아가는 강림차사가 이승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흰 강아지 한 마리와 떡 세 덩이를 주면서 ‘떡을 조금씩 떼어 강아지를 달래며 뒤따라가면 알 도리가 있으리라’고 했다. 옛날에는 개의 이상한 행동이 미래의 일을 예견한다고 믿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진평왕 53년 춘2월에 흰 개가 궁중의 담장 위에 올라갔다. 5월에 이손과 아손이 모반한 것을 왕이 알았다”라고 나온다. 흰 개의 행동을 모반을 암시한 것으로 본 것이다. 백제본기에도 백제가 망하기 한 달 전 “들 사슴 모양을 한 개가 서쪽에서 와서 사비성 강둑에 이르러 왕궁을 보고 짖어대다가 갑자기 사라졌다”라고 기록돼 있다. 선조들은 ‘개가 지붕 위에 올라가면 흉사가 있거나 가운(家運)이 망한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개 그림도 적지 않다. 고구려 덕흥리 고분의 벽화 견우직녀도에는 직녀는 개를 데리고 서 있고 무용총과 각저총에도 충직해 보이는 개 그림이 있다. 신라 토우의 개는 외견이 아주 다채롭다. 조선시대에도 개를 많이 그렸다. 나무 아래 개가 그려진 그림은 ‘집을 잘 지켜 도둑을 막는다’는 것을 뜻한다. ‘개 술(戌)’자는 ‘지킬 수(戍)’자와 모양이 비슷하고 ‘나무 수(樹)’자와도 음이 같기 때문이다. 오동나무, 대나무, 복숭아나무 밑에 그려진 개는 각각 상서로움과 평화로움, 영생과 불변, 장생을 오래 누리기를 기원하는 뜻이다. 개 중 흰둥이는 전염병과 도깨비, 잡귀를 물리치고, 집안에 좋은 일이 있게 하고, 재난을 경고해 준다고 믿었다. 농가에서는 노란색이 풍년과 다산을 상징한다고 생각해 누렁이를 많이 길렀다. 물론 사람의 통제를 벗어난 들개는 위협이 됐다. 천명선 서울대 수의과대 교수의 발표에 따르면 ‘패관잡기’에도 조선 중종 말부터 서울 돈의문 근처 인가에서 키우던 개들이 북쪽 산에 올라가 살며 6, 7년 사이에 40∼50마리로 불었고, 떼를 지어 사람을 공격하기도 했다고 나온다. 천 교수는 “개가 위협하지 않아도 개에 공포를 느끼거나 공황에 빠질 수 있는 ‘개 공포증’이 오늘날 동물 공포증 가운데 35%를 차지한다”고 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3만 호에 이르는 동아일보의 족적에는 취재 현장을 지키다 불의의 사고로 순직한 기자들의 안타까운 죽음들이 있었다. 동아일보 창간 멤버인 장덕준 기자(1892∼1920)는 한국 언론사에서 첫 번째 순직 기자로 기록됐다. 1920년 독립군이 큰 전과를 올리자 일제는 간도의 한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통신부장 겸 조사부장이었던 장 기자는 이를 취재하기 위해 10월 간도 현지로 떠났다. 당시 본보는 무기정간을 당해 보도할 지면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주위에서는 위험하다며 간곡하게 말렸으나 “속간이 되면 반드시 보도해 국내외에 널리 알리겠다”는 장 기자의 결심을 꺾지 못했다. 11월 초순 룽징(龍井)에 도착한 장 기자는 일본 영사관과 군사령부를 찾아가 학살의 진상을 추궁했고, 한 여관에 묵었다가 일본군과 함께 떠난 뒤 실종됐다. 여러 기록은 그가 일본군에 피살됐음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장 기자는 간도에서 “나의 동포를 해하는 자가 누구이냐고 쫓아와보니 우리가 상상하던 바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고 첫 소식을 보내왔다.(동아일보 1925년 8월 29일자) 그로부터 77년 뒤인 1997년 7월 5일 본보 출판국 신동아부 이기혁 기자가 장 기자가 실종된 곳과 멀지 않은 중국 훈춘시 남방 두만강변에서 접경지역 취재 중 교통사고로 순직하는 일도 벌어졌다. 당시 34세였다. 생사가 교차하는 베트남전을 종군 취재하다가 유명을 달리하기도 했다. 백광남 기자는 1966년 11월 28일 적군 출몰이 심한 작전지구에서 비극적인 교통사고를 당했다. 디안에 있던 국군비둘기부대를 방문해 취재하고 모터사이클로 혼자 사이공으로 귀환하던 중 베트남 민간인 삼륜차와 충돌했다. 31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백 기자는 베트남 전선에서 숨진 유일한 한국인 기자다. 이중현 본보 사진부 기자는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양곤에서 일어난 북한의 아웅산 폭탄 테러로 순직했다. 당시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부 장관 등 대통령 수행단 17명과 미얀마인 7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했다. 정부 인사가 아닌 민간인으로 순직한 한국인은 이 기자뿐이다. 여러 차례의 보도사진전에 입상했고, 평소에도 취재 의욕이 남달랐던 그였다. 테러 당일에도 가장 앞줄에서 취재에 열중하다 참변을 당했다. 34세의 아까운 나이였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올해 95회를 맞은 ‘동아일보기 전국정구대회’는 단일 종목 스포츠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전국여자연식정구대회라는 명칭으로 시작한 이 대회는 남성이 아닌 여성들의 경기로 시작됐다. 1923년 6월 30일 서울 정동에 있던 경성제일고등여학교 코트. 무명치마를 입은 여학생들이 댕기머리를 휘날리면서 힘찬 스매싱을 했다. 서울의 진명 숙명 배화 동덕여고, 공주영명학교, 개성호수돈여고 등 8개교 40여 팀이 참가했다. 여성이 치마를 입은 채 코트를 누빈다는 건 사회 통념상 받아들이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해괴한 짓’이라는 비난도 나왔다. 대회 불가(不可) 여론이 워낙 거세자 ‘가족과 대회 임원 외 남성의 입장을 불허한다’는 조건을 걸고 겨우 대회를 열 수 있었다. 하지만 3만 명으로 추산되는 구름 관중이 몰렸다. 당시 경성 인구가 25만 명이었으니 대성황이라는 표현조차 부족할 지경이었다. 몰려든 남성 관중은 학교 담장 위로 촘촘히 머리를 내밀었고,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근처 나무에도 매달려 있었다. 대회 당일 동아일보 사설은 “모성의 권위를 역창(力唱)하야 남자의 반성을 촉구하는 것과 직업의 기회균등을 주장하야 전 세계의 남자와 당당히 맞서는 일반 부인운동의 대세는 물론이라”라며 스포츠를 통한 여성 지위 향상을 강조했다. 2006년부터 남자 선수의 출전을 허용했다. 동아일보는 2년 뒤인 1925년 3월 20일에는 조선 최초로 ‘전조선여자웅변대회’를 개최해 여권 신장의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 천도교 기념회관에서 열린 이 대회는 평양에서 온 김화진 여사가 ‘남녀평등을 부르짖노라’는 제목으로 힘찬 첫 연설을 시작했다. “남녀는 수레의 두 바퀴와도 같습니다. 우리 조선의 여성이 남자의 지위와 대등하게 된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살림살이다운 살림살이를 하게 될 것입니다!” 전조선여자웅변대회에는 전국에서 6개 단체와 6개 학교의 대표가 참가했다. 개막 한 시간 전에 초만원을 이뤘고 회관에 들어오지 못한 이들만 3000명이 넘었다. 전례 없이 청중 투표로 결정된 우승자는 평양의 여자엡윗청년회(단체부), 평양의 정미유치사범과 대표(학생부)였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