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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은 노예전쟁이기도 했던 것이다. 유럽의 노예상들 사이에 조선인 노예가 인기가 있어서 매매가 잘 이뤄졌다. 조선인은 근면 성실한 데다 아프리카 흑인 노예와 아메리카 원주민보다도 값이 쌌기 때문이다.” 전쟁의 피해는 임진왜란 때보다 몇 곱절 컸음에도 임진왜란에 묻혀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던 정유재란의 진면목을 살핀 책 ‘정유재란―잊혀진 전쟁’(안영배 지음·사진)이 발간됐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지 420년(7주갑)이 되는 2017년을 맞아 동아일보가 6개월에 걸쳐 연재한 시리즈에 내용을 추가하고 다듬어 묶은 것이다.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점령’을 목적으로 조선의 남부 4개 도, 특히 호남을 우선 빼앗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심지어 조선 남부 지역에 사는 조선인의 씨를 말려 버리고 대신 일본인을 이주시켜 살게 하겠다는 야욕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이 때문에 죄 없는 조선인들이 무참히 살육되고 수많은 백성이 일본에 노예로 끌려갔다. 왜군의 칼에 잘린 조선인들의 코는 일본으로 건너가 ‘전리품’으로 전시됐다. 약탈과 강간, 노예사냥 등 잔혹한 행위가 이 땅에서 벌어졌다. 2년간 이어진 전쟁의 피해는 임진왜란 때보다 몇 배나 컸다. 책은 정유재란이 ‘잊혀진 전쟁’이 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둔 명량해전과, 조선 수군과 명 수군이 최초로 연합 해전을 펼친 노량해전이 모두 정유재란 때 벌어진 일이다. 정유재란은 또 동아시아 3국이 싸운, 당시로선 드문 국제 대전이었다. 조-명 연합군과 왜군이 일진일퇴의 혈투를 벌였다. 저자는 420년 전 정유재란의 역사적 현장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그 결과 파괴되고 왜곡된 곳이 적지 않았다. 왜군들이 주둔했던 왜성들은 강제로 동원된 조선인들이 피땀 흘려 지은 성임에도 불구하고 왜색이라는 이유로 방치되거나 엉터리로 복원된 경우가 상당했다.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수군 주둔지였던 전남 순천의 장도 섬 역시 개발로 훼손됐다. 책은 칠천량해전으로 시작해 조선의 마지막 육전(陸戰)인 황석산성 전투, 호남을 빼앗긴 뒤 자행된 왜군의 살육과 노예사냥, 수군의 재건과 다시 일어선 의병들, 숨겨진 전쟁 절이도해전, 다국적 특수군 해귀(海鬼)와 거인(巨人), 한중일 장군들의 동상이몽 등의 이야기가 숨 가쁘게 펼쳐진다. 저자는 동아일보에서 30년 가까이 기자로 일하며 한국의 풍수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우리 역사에 관한 관심과 조예가 깊다. 그는 “시리즈를 연재하는 동안 전국 각지와 해외교포 독자들의 격려 메일을 받았다”며 “정유재란을 되짚어 보며 전쟁의 교훈을 찾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대순 한일협력위원회 부회장(전 경원대·호남대 총장)은 추천사에서 “국난을 극복한 동력이 정부보다 일반 백성들의 호국 혹은 국토수호 정신과 열정적인 헌신에 있었다는 저자의 관점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나는 캐나다인이라기보다 조선인이라고 생각됩니다.…저도 항시 조선인에 관하여 연설합니다.” 3·1운동 당시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린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조선 이름 석호필·石虎弼·1889∼1970) 박사. 1931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고하 송진우 동아일보 사장에게 보낸 성탄절 편지가 그해 12월 26일 동아일보 1면에 실렸다. 스코필드 박사는 제암리 학살 현장 사진을 촬영하는 등 3·1운동 현장과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전파한 인물이다. 본보는 1920년 4월 1일 창간호에 조선의 발전을 위해 조언한 그의 글을 실었다. 그는 일제의 강압으로 캐나다로 돌아가야 했지만 이후에도 동아일보는 동양척식회사를 비판하고 일경의 고문을 고발한 스코필드 박사의 글을 실었다가 발매반포금지 압수 처분을 받았다. 1926년 6월 그가 조선에 다시 왔을 때는 사진과 함께 기사로 환대했고 인촌 김성수 선생 자택에서 환영회를 열었다. 이처럼 동아일보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쓴 외국인들을 아끼고 사랑했다.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해 ‘일본판 쉰들러’로 불리는 후세 다쓰지(布施辰治·1879∼1953) 변호사도 본보와 인연이 깊다. 1923년 의열단 사건을 변호하기 위해 한국에 온 그는 본보 주최 ‘하기순회강연회’에서 연사로 나섰다. 1927년에도 후세 변호사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만나 총독정치의 문제점을 따졌고, 동아일보는 이를 6회 연재했다. 일본의 민예 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는 1922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새로 지으며 광화문이 헐리는 것을 반대하며 ‘아! 광화문’이란 글을 동아일보에 5회 연재했다. 본보는 창간 직후 일본인으로는 처음 그의 글 ‘조선 벗에게 정(呈)하는 서(書)’를 실었고 기사는 일제 당국의 게재금지 처분을 받았다. 1921년 그의 아내인 성악가 야나기 가네코(柳兼子)의 독창회를 본보가 주최하기도 했다. 고종의 측근으로 헤이그 특사증을 이회영을 통해 이상설에게 전했던 미국인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가 42년 만에 조선 땅을 밟았을 때도 지면으로 환대했다. 그가 안타깝게 방한 일주일 만에 병으로 세상을 뜨고 영결식이 열리기까지 상세하게 보도하고 추모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강원 강릉시 경포호에는 달이 뜨고, 평창올림픽플라자에는 ‘거북’이 나타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2일 2018 평창 겨울올림픽 기간 중에 펼쳐지는 공연과 전시, 축제 등 다채로운 문화올림픽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전통 재해석한 공연 먼저 세계적인 음악가 정명화, 정경화 자매가 예술감독을 맡은 ‘평창겨울음악제’가 눈에 띈다. 2005년 시작된 ‘평창대관령음악제’의 겨울 버전이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30일 개막해 2월 16일까지 강릉아트센터, 춘천문화예술회관, 원주 백운아트홀 등에서 열린다. 국내외 유명 성악가들의 갈라 콘서트와 피아니스트 손열음,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 국악인 안숙선 등의 협주 무대가 펼쳐진다. ‘K팝 월드 페스타’는 2월 10, 17, 24일 강릉원주대 강릉캠퍼스에서 열린다. 비투비, EXID, 비, 블락비, 슈퍼주니어 등이 출연한다. 2월 3∼24일 역시 강릉원주대 강릉캠퍼스에서 상설 공연하는 ‘테마공연 천년향’은 ‘단오제’를 모티브로 한국의 전통춤과 연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퍼포먼스다. 2월 4∼24일 고성 통일전망대에서는 비무장지대(DMZ)를 무대로 마임 음악 무용 전통연희 등 다양한 공연과 전시가 펼쳐진다. 평창올림픽플라자 전통문화관에서는 누비장, 침선장 등 무형문화재 시연과 대금, 가야금, 판소리 공연이 매일 펼쳐진다. 강릉 올림픽파크에서는 올림픽 마스코트인 수호랑과 반다비가 등장하는 ‘창작 퍼레이드 공연’을 볼 수 있다. 스트리트 댄스 등 거리 공연도 다양하다.○ 빛으로 가득 찬 전시 국내외 예술가들의 공공미술 작품도 전시된다. 작가 문주와 독일 조각가 랄프 잔더의 공동 작품인 ‘하나 된 우리(Connected One)’는 평창 개·폐막식장에서 볼 수 있다. 이용백의 작품 ‘바람에 몸을 맡기고(Leaning into the Wind)’는 강릉 아이스아레나에서 관객을 만난다. 강릉 경포대에서는 2월 2∼25일 ‘파이어 아트 페스타 2018’ 전시도 열린다. ‘헌화가’에서 영감을 얻은 이 전시는 해변에 설치된 미술 작품을 불태워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제의적 행사다. 경포호 한가운데 달 조형물과 함께 아름다운 조명을 비추는 ‘라이트 아트쇼 달빛호수’도 볼 수 있다. 평창올림픽플라자 문화아이시티(ICT)관 1층에서는 ‘빛을 따라가는 전시’가 열린다. 비디오 예술의 거장 백남준의 대표작 ‘거북’을 만날 수 있다. 평창과 강릉, 정선을 연결한 ‘올림픽 아리바우길’은 역사·문화·생태 탐방로다. 정선 5일장에서 시작해 강릉 경포해변까지 총 9개 코스, 131.7km에 이른다. 강릉 커피거리와 경포대 해변을 재즈로 물들이는 ‘강릉재즈프레소’도 열린다. 각종 음악 공연을 하는 ‘재즈 온 더 커피 쇼’, 강릉 카페 세계 커피 체험 행사도 즐길 수 있다. 자세한 행사 내용은 공식 웹사이트()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다만 우리의 앞길을 우리가 열어서 민복을 바라시던 성심(聖心)을 만일이라도 위로하여 드리려할 뿐이다. 슬프다. 우리의 눈물은 곧 대행(大行·임금이 죽고 시호를 올리기 전의 칭호)의 눈물이시라.”―1926년 6월 10일 동아일보 1면 사설 순종의 인산일, 망국의 황제를 떠나보내는 이 사설의 필자는 일제강점기 민족의 얼을 깨운 근대 국학 연구의 태두였던 위당 정인보 선생(1893∼1950)이다. 그는 1924년 5월 동아일보 논설반 기자(논설위원)가 된 이후로 동아일보에 수많은 논설과 기사, 논문을 발표했다. 동아일보는 위당이 직접 쓴 ‘5천년간 조선의 얼’을 1935∼1936년 무려 440회에 걸쳐 연재했다. 연재는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본보가 무기정간당할 때까지 계속됐다. 위당은 이 연재를 통해 한민족이 주체가 되는 역사체계를 수립하려 했다. “‘얼’이 없으면 곧 사람이 아니다.…‘저는 저로서’가 이른바 ‘얼’이니 여기 무슨 심오함이 있으며 무슨 미묘함이 있으랴?”(1935년 1월 3일, ‘5천년간 조선의 얼’) 오늘날까지도 연구가 활발한 다산 정약용의 학문을 당대로 불러낸 것 역시 정인보였다. 위당이 동아일보에 1934년 9월 10∼15일 6회에 걸쳐 기고한 ‘유일한 정법가 정다산 선생 서론’은 근대 최초의 실학 연구물로 꼽힌다. 위당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 유적 보존 사업 등 민족의식을 북돋우려는 동아일보의 사업에도 앞장섰다. 충무공 묘소의 위토 경매 소식이 알려진 뒤 1931년 5월 14일 본보 사설을 통해 “위토와 묘소마저 넘어갈 처지에 이르렀음은 민족적 수치에 그치지 않고 민족적 범죄”라며 “이것을 계기로 우리는 일층 민족문화에 대한 숭앙심과 애착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호소한 것도 그였다. 1931년 3월 30일자에는 독자의 요청으로 정인보의 서재 풍경을 소개한 기사가 실렸다. “비록 누더기 되고 좀은 먹었으나 그 속에는 고조선에 빛나는 역사와 문화 그리고 온갖 우리의 실물이 들어 있는 금광입니다. 이 광 속에서 작업하는 교수는 옛 보물을 찾기에 눈이 붉은 조선의 귀한 광부입니다”라고 했다. ‘조선의 귀한 광부’였던 위당은 광복 뒤 5대 국경일 중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의 노래를 작사했고, 초대 감찰위원장(감사원장)을 지내기도 했으나 6·25전쟁 당시 납북돼 사망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천문학의 역사를 비교적 쉽게 풀어 쓴 책이다. 빛의 성질에 대한 논쟁, 빅뱅 우주론의 등장, 중력파 검출, 우주 탐사를 통한 외계 행성 찾기 등을 다뤘다. 별을 쪼개볼 수 없기에 천문학은 실험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할 수 있는 건 관측뿐이다. 기술이 요즘 같지 않던 시절, 별들의 기원에 관해 설명하려는 천문학자의 흥미로운 가설이 적지 않다. 프랑스의 수학자 라플라스(1749∼1827)는 밤하늘에서 관측되는 희뿌연 가스구름, 즉 성운이 별들의 고향이라고 생각했다. 성운을 이루고 있는 작은 입자들이 중력에 의해 모이고 반죽되면서 별들이 만들어진다는 것. 이는 오늘날의 설명과도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거대한 성운이 수축해 태양이 되었다면 골고루 퍼져 있던 각운동(회전운동)량이 중심별에 모두 집중됐을 테니 태양의 자전 속도는 지금보다 훨씬 더 빨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얘긴가.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의 아름다운 회전 연기를 떠올려 보자. 빙판 위에서 한껏 팔다리를 밖으로 뻗은 상태로 돌 때 그의 회전은 우아하면서 속도가 느리다. 그러나 그가 뻗은 팔다리를 회전의 중심점에 가깝게 움츠려 모을수록 회전은 맹렬해지고 속도가 빨라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넓게 퍼져 느리게 돌던 가스구름이 태양으로 압축됐다면 태양의 회전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야 한다. 영국의 천문학자 제임스 진스(1877∼1946)는 태양에는 숨겨진 쌍둥이별이 있었다는 드라마틱한 가설을 내놨다. 이후 천문학자들은 이제 막 생겨나고 있는 별의 위아래로 길게 뻗어나가는 가스를 관측함으로써 아기별들이 각운동량을 우주 공간에 흩뿌린다는 것을 알게 됐다. 태양의 자전 속도가 느린 진짜 이유에 한 걸음 더 접근한 셈이다. 연세대 은하진화연구센터 연구원인 저자는 학자들이 별을 관측하는 행위의 의미를 알려주고 싶었다고 한다. 다양한 주제를 압축해 담으려 한 탓인지 설명이 성긴 부분도 일부 눈에 띈다. 그러나 “현장 연구자로서 고백하자면 ‘암흑 에너지’라는 멋들어진 이름은 정체를 잘 모른다는 말을 그럴싸하게 포장한 것” 같은 솔직한 표현이 재미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저것이 동척(東拓·동양척식주식회사)인가 본데, 그 옆으로부터 둥그러진 남대문통의 길가는 듬성듬성 하늘을 정복하는 듯하다. 그러나 땅 위에서 제가 젠(잘난) 척 자랑하는 ‘미쓰고시’(미쓰코시백화점)며 조선은행도 발아래 깔고서 굽어보니 낮고 높은 차별도 아무것도 없다.”(동아일보 1933년 6월 15일자) 하늘에서 경성을 내려다보는 이길용 기자(훗날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역)의 시선이 작은 기와집이 모인 북촌에서 남산 아래 일본인들이 모여 사는 넓고 높은 집들로 옮겨간다. 기사는 1933년 6월 5∼26일 12회에 걸쳐 연재된 ‘신록의 대(大)경성 부감기(俯瞰記)’ 6회다. 조선의 어느 언론사도 아직 취재용 비행기를 갖고 있지 않던 때였다. 동아일보는 경비행기 ‘샘슨 2A2’를 전세 내 경성의 항공촬영 사진을 보도했다. 사진은 본보 사진반원 문치장이 찍었다. 인쇄 기술의 한계 탓에 화질이 오늘날처럼 선명하지는 않지만 당시 독자들에게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새로운 시각 경험을 제공한 것이다. 1963년 동아일보는 스틴슨 L-5형 경비행기를 구입해 취재에 활용했다. 이 비행기는 희망을 뜻하는 이름인 ‘파랑새호’로 불렸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스틴슨사에서 제작하기 시작한 군용 모델로 최대출력 190마력의 직렬 6기통 엔진을 장착했고, 최고속도 시속 208km, 최고고도 4680m로 2명을 태우고 날 수 있었다. 파랑새호는 이후 4년 동안 1963년 대통령선거와 1964년 가평 버스 추락사고, 1965년 제2한강교(양화대교) 개통 등의 취재에 활용됐다. 파랑새호에서 촬영한 항공 사진은 압도적인 비주얼로 여러 차례 동아일보의 1면을 장식했다. 파랑새호는 지금은 삼성화재교통박물관(경기 용인시 처인구)에 기증돼 전시되고 있다. 이처럼 대형 사건이나 자연재해가 일어났을 때 동아일보가 만든 전면 사진 화보는 세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1922년 황해도 수해, 1925년 을축년 대홍수, 1933년 8월 대형 태풍 발생 당시 현장 사진을 담은 화보로 막심한 피해를 전 조선에 시각적으로 알리고 구호와 위문을 이끌었다. 1926년 6월 6·10만세운동을 촉발한 순종 인산을 보도한 화보는 끝없이 이어지는 애도 행렬과 긴장된 분위기를 그대로 전해준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청년 세대는 왜 가상통화에 열광하는가. 가상통화는 규제해야 하는가.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51)와 박한우 영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47)가 16일 서울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에서 긴급 토론을 벌였다. 김 교수는 거시·화폐 경제학과 국제금융을 연구하고 있으며, 빅데이터 전문가인 박 교수는 디지털융합비즈니스도 가르치고 있다. 두 사람은 가상통화의 가치와 정부 규제에 대한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렸다. 가상통화의 가치에 대해 김 교수는 “거의 없다”고 했고, 박 교수는 “미래 가치”라고 역설했다. 김 교수는 “가상통화는 현재 투기의 대상이 되면서 폭락과 폭등을 반복하고 있다”며 규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반면 박 교수는 “2040세대는 취업과 결혼을 포기했거나 직장에서 슈퍼맨이기를 강요당하는 세대”라며 “‘흙수저’들은 인생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동아줄 같은 투자 기회로 가상통화를 생각했는데 정부가 찬물을 끼얹고 있다”고 규제를 반대했다. ―가상통화의 가치는…. △김=가상통화의 본질은 ‘(가치가) 거의 없다’고 보인다. 회사의 주식을 보유하는 건 기술력을 포함한 그 회사의 일부를 소유하는 것이다. 반면 비트코인을 보유한다고 구매자가 그 기술력을 가지는 게 아니다. 만약 정부가 정식으로 다른 전자 화폐를 발행하면 기존 비트코인 등은 사라질 수 있다. 그게 본질이다. △박=미래 가치다. 비트코인 이후 나온 토큰들은 다 각자 기능이 있다. 결제와 송금을 저렴하게 할 수 있는 코인이 있고, 이더리움 기반의 토큰에서는 계약도 할 수 있다. ‘암호화폐’라는 호칭이 더 적절하겠다. ―지금의 투자 열기는 버블인가. △김=버블로 보인다. 너무 단기간에 폭등했고 현재 본질에 비해 가격이 너무 높다. 기술적 결함이 발견되거나, 대체재가 생기면 바로 폭락할 것이다. 이를 그냥 뒀을 때 어떻게 될까. 한국에서 1000만 명이 투자했는데 폭락했다고 치자. 경제 전체에 위기가 온다.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도 금융 신기술이 버블을 만들었다가 터진 것이다. △박=기술 이노베이션 차원에서 봐야 한다. 신기술의 확산은 통상 S커브를 그린다. 아직도 블록체인 기술은 확산의 초기 단계다. 버블이라 할 때 기준이 뭔가. 부동산은 공시지가 감정가가 있지 않나. 정부가 여러 가상통화의 가치 평가를 해주면 어떤가. ―버블이 터질 시점인가. △박=온라인 폐쇄한다고 오프라인 거래가 없어지지 않는다. 개인 간 직접 거래도 된다. 마냥 금지했다가 기술이 뒤떨어지면 한국은 어떻게 되겠나. 거래뿐 아니라 채굴, 지갑, 결제 산업이 연관돼 있다. 거래소를 폐쇄한다든지, 사용을 불편하게 하면 다른 산업도 포기한다는 건가. △김=당분간은 상승할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버블은 터진다. 그러면 상투 잡은 사람이 다 뒤집어쓴다. 조개껍데기를 화폐로 상용하다가 어느 순간 안 쓰게 되면 집에 쌓아놓은 사람은 어떻게 되겠나. 아직까지는 경제위기로 번질 수준은 아니라고 본다. ―가상통화의 미래는…. △김=가상통화의 특성을 갖는 법정 전자화폐가 등장할 확률이 굉장히 크다.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각국은 금융 여건에 따라 통화량을 조정하고 거시경제 정책을 펴는데, 가상통화가 화폐처럼 기능하면 그게 잘 안 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융시스템 안정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모두 안다. △박=보통 가상통화라고 하면 기업과 소비자 거래(B2C)만 생각하는데, 기업 간 거래(B2B) 적용 가능성이 더 크다. 패션 헬스케어 항공 화물 등 전 방면에 기술이 적용될 것이다. 글을 써서 올리면 가상통화로 보상하는 온라인 커뮤니티 ‘스팀잇’처럼 온라인 커뮤니티 문화의 발전에도 기여하고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96개의 형형한 눈빛들이 1920년 7월 12일 동아일보 3면을 뒤덮었다. 주인공은 최남선 송진우 손병희 최린 현상윤 한용운을 비롯한 3·1운동 민족대표 48인.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서 관련 공판의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다는 보도다. 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해외로 피신한 김병조와 구금돼 사망한 양한묵을 뺀 31명에, 작성 및 배포에 적극 참여한 박인호 등 17명이 포함됐다. 지면 편집은 오늘날 봐도 강렬하고 파격적이다. 사진 아래 “작년 삼월 일일에 탑골공원에서 만세소리가 일어나며 명월관 지점 제 일호 실에서는”으로 시작하는 기사는 눈빛만큼이나 담담하면서도 결연한 기운이 글자마다 묻어난다. 3·1운동의 결과물로 태어난 동아일보는 운동의 정신을 잇는 데 앞장섰다. 창간 한 달 뒤인 1920년 5월 15일에는 독립만세운동을 수사하는 일제 경찰이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악랄하게 자행했다는 피고인들의 법정진술을 그대로 소개했다. 본보의 2차 무기 정간도 1926년 3·1운동 7주년에 소련국제농민회 본부가 조선농민에게 보내는 축전을 번역해 그해 3월 5일자에 실었다가 당했다. 광복 뒤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에 미처 다루지 못한 3·1운동의 진면목을 다시금 조명하기 시작했다. 복간 두 달 만인 1946년 2월 ‘삼일기념 전기(前記)’ ‘삼일운동의 회상’ 등을 연재했다. “천안만세주동자로 7년 구형을 받은 어린 유관순의 법정 투쟁도 또한 모질었다. ‘나는 당당한 대한의 국민이다. 대한사람인 내가 너희들의 재판을 받을 필요도 없고 너희가 나를 벌할 권리도 없다.’ 유관순은 이런 저항으로 법정모독죄까지 가산되어 여성 최고의 7년 징역형을 받았다.” 3·1운동이 50주년을 맞은 1969년 게재한 특집기사 ‘민족의 함성, 3·1운동’의 일부다. 독립운동가의 법정 투쟁을 생생하게 되살렸다. 동아일보가 그해 발간한 ‘3·1운동 50주년 기념논문집’은 오늘날까지도 연구자들의 기본 자료가 되고 있다. 본보 창간 45주년을 맞았던 1965년에는 3·1유적보존운동을 일으키고 기념비 건립을 위한 유적지 조사를 국사편찬위원회와 합동으로 추진했다. 첫 결실로 1971년 8월 15일 전북 이리(현 익산시) 역전광장에 3·1운동 기념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열었다. 1970년대 충북 영동, 강원 횡성, 전북 남원 등 전국 9개 지역에 3·1운동 기념비를 세웠다. 이 사업은 1980년대에도 계속 추진했다. 1989년에는 3·1운동 70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열기도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민족 고대(고려대)’라는 말은 어떤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을까. 1905년 보성전문학교(보전) 개교부터 6·25전쟁 무렵까지 고려대의 역사를 민족주의 시각에서 조명한 책 ‘안암골 호랑이―대한민국과 고려대학교’(고려대 3·3동지회 엮음·사진)가 최근 발간됐다. 3·3동지회는 1998년 시작된 고려대 동문 모임이다. 김현석 고려대 3·3동지회 회장은 책에 ‘충숙공 이용익 선생 보성전문학교 창학’을 실었다. 그는 “한일의정서 조인을 결사반대했던 대한제국 탁지부대신 이용익 선생이 일본에 압송됐다 신식 문물을 접하고 교육 구국을 위해 1905년 4월 설립한 것이 보성전문학교”라며 “초대 교장 신해영이 편술한 ‘윤리학 교과서’가 일제 통감부로부터 불온한 교과서라 하여 발매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고 썼다. 이후 운영난을 겪던 보성전문학교는 1910년 천도교가 인수했다. 천도교 교인인 임순화 3·3동지회 명예회원은 책에서 “천도교 교주였던 의암 손병희 선생과 보전 교장 최린이 투옥되는 등 보전 구성원들은 ‘3·1혁명’(3·1운동)에 민족대표 등으로 대거 참여했다가 일제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고 했다. 탄압으로 경영난에 빠진 보성전문학교는 민립대학 설립을 꿈꾸던 인촌 김성수 선생이 1932년 인수했다. 서석중 3·3동지회 상임고문은 “인촌과 민족의식이 뚜렷한 교수들의 영향을 받아 보전 학생들도 문자 보급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항일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고 썼다. 홍일식 이기수 전 고려대 총장,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가 한국 현대사에 관해 쓴 글도 함께 담겼다. 2016년 8·15 광복절에 ‘대한민국과 고려대’를 주제로 열린 시국강연회 내용을 보완해 엮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재(在)광동(廣東) 조선혁명군인회―만주와 서백리아(西伯利亞·시베리아) 방면에서 학생 1000명 모집 중.” 동아일보 1926년 6월 28일 1면 한가운데 실린 기사의 제목이다. 중국 국민혁명군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생긴 황포군관학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등과의 연계 속에서 조선 청년들을 다수 입교시켰다. 이 기사는 마치 이 학교의 학생 모집 광고와 다를 바 없다. “황포군감(관)학교에 재(在)한 조선인 장교와 학생 120명에 의하여 조직된 혁명군인회는…1000명의 학생을 신입하게 하기 위하여 비밀히 만주에서 시베리아 방면에서 모집 중이다. 차(此)는 예의 여운형 일파와 이(異)하여 혁명군인을 양성하여 조선의 독립을 계(計)하려는 목적이며….” 효과도 있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비서로 일했던 독립운동가 구익균은 회고록에서 “내가 하고 있던 중산대학과 광동 군관학교의 입학 안내 소식이 국내의 동아일보에 크게 보도되었다. 그 결과 한국과 만주, 중국의 여러 도시에서 한국인 청년들이 몰려왔다”고 썼다. 일본 경찰이 확보한 독립운동 수사 정보를 보도해 간접적으로 독립운동가들에게 알리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1925년 2월 21일 “중국 난징에 본거지를 둔…뢰선단(雷鮮團)에서는 비밀리에 단원 다수가 조선내지에 침입하고자…정보가 있어 경기도 경찰부에서는 크게 경계중이라더라”라고 보도했다. 신문을 본 이라면 누구나 ‘경찰이 뢰선단의 내부 정보와 동선을 파악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뢰선단의 실제 명칭은 뇌성단(雷聲團)이다. 단원들은 동아일보 보도를 보고 작전 유출과 밀정의 존재를 깨달았다. 일본 난징(南京) 영사는 1925년 4월 5일 본국에 “이곳 불령선인 뇌성단(雷聲團) 조직의 건은 동아일보에 게재된 것을 동 단원이 발견하여 이곳에 밀정이 있다고 몹시 경계함으로써 그 후 밀정의 활동이 용이하지 못해 수사에 지장을 낳고 있음”이라고 보고했다. 동아일보의 1차 무기 정간(1920년 9월 26일)은 “일제가 동아일보를 사전에 정간시켜 간도의 조선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경신참변(간도참변) 작전이 누설되지 않도록 조치한 것”이라는 학계 연구도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우리가 사는 세계와 우주는 외계인들이 갖고 노는 구슬 속이나 사물함 속에 있는 게 아닐까(영화 ‘맨 인 블랙’). 사실 지구는 이미 외계인에 의해 폭파됐고(‘지구를 지켜라’·감독 장준환) 우리는 우주를 떠도는 잔해나 흔적 같은 게 아닐까. 책은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에 있나’ ‘우리만 있나’ ‘왜 여기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화두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원제는 휴먼 유니버스(Human Universe). 2014년 BBC가 만들고, 이듬해 국내에도 방영된 동명의 과학 다큐멘터리를 다큐 진행자와 총괄 프로듀서가 책으로 옮겼다. 천동설에서 빠져나온 뒤, 우리 은하가 우주의 전부라는 생각에서는 어떻게 벗어났는지, 태양계 밖으로 날아간 보이저 호에 있는 황금 레코드에는 어떤 정보가 어떻게 담겨 있는지와 같은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천문학이나 우주론, 생명의 탄생과 진화에 관한 교양 도서가 익숙한 독자라면 책이 담고 있는 개별 정보는 다소 익숙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를 기반으로 한 만큼 사진과 일러스트, 도해 등이 풍부한 것이 큰 강점이다. 대부분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시원한 크기의 ‘올 컬러’에 질 높은 각종 시각자료가 많이 등장한다. 나란히 실린 발자국 사진 2개도 그렇다. 탄자니아의 화산재에 찍힌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발자국과 1969년 닐 암스트롱이 달의 고요의 바다에 남긴 발자국 사진으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도 실렸던 것이다. 두 발자국은 거리로는 약 40만 km, 시간으로는 약 370만 년 떨어져 있다. 저자들은 말한다. “이 둘은 우리가 동아프리카지구대로부터 별까지 올라온 믿기 어려운 위대한 여정을 아름답게 대변해준다.” 영국 맨체스터대 교수이자 입자물리학자인 브라이언 콕스는 ‘빅뱅 이전의 시간이 존재한다’는 다중우주론의 입장에 서 있다. 책에도 이 같은 입장이 가끔 등장하지만 이 우주론은 아직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건 아니라는 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올해부터 아마추어 예술 동아리를 정부가 지원해 시민 예술가를 양성하는 사업이 추진된다. 은퇴를 맞는 50, 60대 중장년층을 위한 문화예술학교도 운영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문화예술 교육 5개년 종합계획’(2018∼2022년)을 11일 발표했다. 문체부는 먼저 지역 문화예술 교육의 기반 생태계를 구축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문을 닫은 초등학교나 버려진 공장을 개조해 예술 교육 센터로 활용하는 핀란드, 벨기에처럼 지역 내 유휴 공간을 학교 밖 문화예술 교육 거점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올해에는 2, 3곳을 시범 운영하고 2019년 이후 단계적으로 확대하겠다고 한다. 지역 문화회관의 공연·전시와 관련된 감상 중심 예술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유아부터 고령자까지 생애주기에 맞게 교육 기회도 확대한다.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생애 전환기 중장년층’(50∼64세)을 위한 문화예술학교를 올해 전국 6곳에 신설한 후 점차 늘려갈 계획이다. 직장인을 대상으로 ‘저녁에 만나는 예술학교’도 추진한다. 각 지역의 특성을 반영해 아마추어 동아리에 대한 문화예술 교육을 지원한다. 올해는 700여 개, 2019년부터는 1000여 개의 동아리가 대상이 될 예정이다. 성폭력, 가정폭력 피해 여성이나 학교폭력 피해 학생, 도박 중독자 등을 위한 예술 치유 프로그램도 확대한다. 베트남에서 실시하고 있는 문화예술교육 공적개발원조(ODA)도 아프리카나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로 넓히겠다는 계획이다. 문체부는 “전국의 지역 곳곳에서, 일상 속에서 문화예술 교육을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창간 13주년 기념 우리 사(社)에서는…새 철자법을 채용하기로 하야 오늘부터 시행하게 되었다. 이것은 오직 우리 동아일보의 큰일일뿐더러 진실로 조선말과 글을 위한 큰 혁명이라고 할 것이다. … 말과 글이 한 민족의 문화의 어미인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다.”(1933년 4월 1일 동아일보 사설) 오늘날 한글맞춤법은 1933년 10월 조선어학회가 제정, 공포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수정한 것이다. 이 통일안을 가장 먼저 사용한 신문이 동아일보다. 동아일보는 공포 6개월 전부터 거의 완성된 이 통일안을 적용해 새 활자로 신문을 발간했다. 당일 부록으로 ‘신철자편람(新綴字便覽)’도 함께 보급했다. 동아일보가 앞서 나가자 다른 신문이나 잡지도 뒤따라 새 맞춤법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우리말과 한글을 바로 세우는 일은 ‘총칼 없는 독립운동’이었다. 동아일보는 “철자법을 통일 확장하는 것은 우리 민족문화운동의 기초 공사”라고 봤다. 인촌 김성수 선생이 맞춤법 통일안 제정에 필요한 기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를 결성할 때도 발기인 108명 가운데 동아일보 전현직 인사 10여 명이 참여했다. 조선어와 한글 교육을 수호하는 데도 적극 나섰다. 한글학자인 외솔 최현배 선생의 글을 연재했고, 조선어 교육을 제한하려는 일제의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글을 배우러 오는 아이들은 거의 날마다 늘었다.” 심훈이 1935년부터 이듬해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상록수’의 한 구절이다. 동아일보의 한글 사랑은 ‘브나로드’ 운동으로 꽃을 피웠다. 문맹률이 약 80%에 이르던 현실에서 동아일보는 1931년부터 ‘브나로드’ 운동을 벌이며 농촌계몽과 한글 보급에 앞장섰다. 동아일보가 배부한 ‘한글공부’ ‘신철자편람’ 등의 교재만 모두 210만 부에 달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하와이 사진신부라 불리는 이들이 있다. 20세기 초 미국 하와이에 노동이민을 간 남성과 서로 사진만 교환한 뒤 혼인한 여성을 일컫는다. 1910, 20년대에 600∼1000명이 이렇게 조선을 떠나 하와이로 갔다. 그런 사진신부였던 천연희 여사(1896∼1997)의 자전적 기록이 담긴 ‘하와이 사진신부 천연희의 이야기’(일조각)가 최근 출간됐다. “나는 소설가도 아니요, 작문가도 아니요, 시를 잘 짓는 사람도 아니다. …우리 한국 여자 사진 혼인해 온 이들이 대단히 일찍 깨었고 살기를 원해서 (하지만) 남편들은 나이 많고, 아무 재주 없고, 사역(일)도 잘 못하니 (더구나) 아이들은 많이 있어서 이 여자들이 살길을 찾아서 빨래숍도 내고, 바느질도 하고, 장사는 하려도 밑천이 없어 큰 회사나 청국 사람에게 헌집을 몇 해 세내어….” ‘하와이…’는 천 여사가 1971년부터 1984년까지 남긴 노트 7권을 현대 말투로 옮기고 해제를 달았다. 경남 진주의 비교적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난 천 여사는 1915년 하와이 마우이섬의 사탕수수농장 노동자 길찬록에게 시집을 왔다. 이민 배경에는 아버지가 부재한 상황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어머니의 허락과 지원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론 일제강점기란 식민지 현실이 있었다. “모든 것이 압박과 압제를 주었다. …제국 정치의 반대자라거나 도모자라고 하고 옥에 가두고 추달하여 병신을 만들어 정신병자 모양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등신을 만들어 버렸다. 그와 같이 자유 없는 나라 백성은 참으로 불쌍하였다. 이 모든 것이 내 마음에 상처가 되어 자유 세상을 찾게 되었다.” 천 여사는 노트와 함께 구술 녹음테이프 24개와 사진, 편지 등도 자료로 남겼다. 이런 소중한 기록을 남긴 하와이 사진신부는 그를 포함해 2명뿐이다. 천 여사의 자료는 이덕희 하와이이민연구소장 주선으로 미국 하와이대에 기증됐다가 2014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역주와 해제를 이끈 문옥표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머리말에서 “천연희는 온갖 역경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과 아이들을 지켜냈고 인간다움의 존엄을 보여준 여성이었다”며 “기록이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고 사회, 정치, 경제 상황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 하와이 이민 역사와 여성사 연구의 귀한 자료”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본 코미디 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2006년) 이야기다. 어느 마을에 평범한 서민으로 가장한 스파이들이 숨어 산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은 자그마한 라면 가게를 운영한다. 스파이로서 그의 우선과제는 라면을 ‘평범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음식이 맛있다고 소문나면 주목을 받을 테고, 그러면 수상쩍은 구석이 드러날 위험이 있으니. 그렇다고 아예 맛없으면 생활 자체가 안 될 수 있다. 어느 정도 손님이 들 만큼 적당히 맛을 유지하는 게 관건. 그는 맛이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닌, 그저 그런 라면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길 수십 년. 드디어 스파이의 정체를 드러내야 할 순간이 다가왔다. 그는 마지막으로 라면을 끓인다. 자신의 모든 실력을 쏟아부었다. 동료는 초일류인 그 맛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 오랜 세월, 이런 실력을 숨겨야 했을 줄이야. 이런 비극적 희극이라니! 세상의 평범함 뒤엔 얼마나 많은 위대함이 숨어있는지. 이런 찬사는 식상하지 않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KBS 이사회가 10일 고대영 KBS 사장 해임 제청안을 이사회 공식 안건으로 확정했다. 고 사장은 이에 “해임 사유는 모두 허위이거나 사실관계조차 파악하지 못한 억지 주장”이라고 반발했다. KBS 이사회는 이날 비공개 임시이사회를 열고 고 사장에게 15일 오후 예정된 임시이사회 개최 전까지 해임 제청안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해임 제청안은 해임 사유로 △지상파 재허가 심사에서 KBS의 조건부 재허가 결정 △공사의 신뢰도와 영향력 추락 △파업 사태 초래 등 직무수행능력 상실 △조직운영·인사관리 실패 △허위·부실 보고로 이사회 심의·의결권 침해 △보도국장 재직 시 금품수수 의혹 등을 담았다. KBS 이사회는 고 사장의 의견서를 살펴본 뒤 다시 이사회를 열고 고 사장에게 구두 의견 진술 기회를 부여할 예정이다. 고 사장 해임 제청안은 KBS 이사회 절반 이상이 찬성하면 통과된 뒤 대통령 재가로 결정된다. 최근 강규형 전 KBS 이사가 해임되고 김상근 목사가 보궐이사로 임명돼 KBS 이사회는 여권 6명, 야권 5명으로 재편된 상황이다. 고 사장은 이날 해임 제청안 상정 직후 발표한 입장문에서 “강규형 전 이사가 해임이 부당하다며 제기한 가처분신청이 결론도 나지 않은 만큼 현재 KBS 이사회가 법적 완결성을 지녔는지 다툼의 여지가 있다”며 “그런 이사회가 사장 해임이라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고 사장은 또 “KBS 이사진 교체과정은 과도한 인신공격과 폭력적 사퇴압박으로 점철돼 절차적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다”며 “감사원에서 방송통신위원회로 이어진 해임과정도 해임사유로 불충분한 표적감사라는 지적이 나온다”고 밝혔다. 아울러 자신의 해임 사유에 대해서도 “상황을 과장 또는 왜곡했다”고 반박했다. 고 사장은 “방통위 재허가 심사는 심사위원들이 자의적 평가가 가능한 항목들에서 점수를 대폭 낮춘 주관적 평가였기에 객관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해임 사유 중 하나인 ‘직무 수행능력 상실’에 대해서도 “파업이 교섭대표노조인 KBS 노조의 업무복귀로 공식적으로는 중단됐고, 민주노총 소속 KBS 본부노조가 법적근거 없이 직무를 거부하고 있지만 파업 참가율은 20% 정도에 그치고 있다”고 반박했다. 고 사장은 “여권 다수로 재편된 이사회가 정해진 수순대로 해임 결정을 내릴 경우 법적 대응도 불사하겠다”며 강경 대응할 뜻을 내비쳤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중국의 동북공정 5개년 사업은 2007년 ‘형식적으로’ 종료됐다. 하지만 중국의 고구려 역사 연구는 현재까지 오히려 확대되고 심화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도형)은 최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동북공정 이후 중국의 고구려사(史) 연구 동향’(역사공간)을 출간했다. 김현숙 동북아재단 한중관계연구소장은 책에서 “중국 학계의 ‘포스트 동북공정’ 연구는 동북공정식 역사인식을 변함없이 견지하며 보완·심화 단계로 나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의 고구려사 연구는 양부터 엄청나다.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끝난 뒤인 2007년 2월부터 2015년까지 발표된 관련 연구 논저는 모두 512편에 이른다. 단행본만 27권에다 박사논문 14편, 석사논문 44편, 학술지 논문 427편이다. 김 소장은 “동북공정 종료 이후 연구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배경에는 중국정부의 연구비 지원 확대가 크게 작용했다. 특히 지린(吉林)성 사회과학원이 기금을 관리하며 고구려 연구를 주도하고, 학술지 ‘동북사지(東北史地)’도 핵심역할을 하고 있다. 이 밖에 통화사범학원과 동북사범대 역사문화학원, 지린대 동북아연구중심, 연변대 등도 활발하다. 김 소장은 “전략적 분업이 이뤄진 것처럼 실력 있는 중견 학자들이 대거 포진해 논리 보완이 필요했던 주제의 연구를 주도하며 후진 양성도 적극적이다”고 말했다. 때문에 갈수록 연구 내용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 되고 있다. 조영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중국에서 ‘고구려사 연구의 2.5∼3세대’로 불리는 젊은 학자들은 연구 주제도 다양하고 실증적인 측면에서 강점을 지녔다”며 “국내 학계에선 생소하지만 중국 민족학 인구학 등에서 드러났던 특유의 방법론을 잘 살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가장 심각한 건 이런 연구들의 전체적 흐름이 이전 동북공정식 인식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다수 고구려 대외관계사 연구는 고구려와 중국 왕조를 아예 하나의 나라, 즉 일국(一國) 관계로 전제했다. 이준성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조공이나 책봉을 지역질서의 수단으로 보는 것에 동의하는 연구조차도 동아시아 세계의 성립과 발전을 오직 한화(漢化)로만 설명하는 중국 중심사관에 갇혀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유명 사학자인 거자오광(葛兆光) 푸단(復旦)대 교수가 “중국이 상상의 정치 공동체인지, 자기 동일성을 지닌 역사적 단위인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일부 학자들의 연구 도 주목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문헌사료와 사학사 연구를 분석한 이정빈 충북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동북공정 시기 중국학자들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외면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최근에도 중국 문헌과 비교해 고구려본기의 사료적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근대 이전 동아시아 외교 관례는 ‘광의의 국제법’(국제관습법)이며, 독도는 일본의 주장처럼 ‘무주지’였던 것이 아니라 국경 조약상 조선 영토였음이 명확하다는 연구가 나왔다. 재일 독도 연구자인 박병섭 ‘竹島=독도문제연구넷’ 대표는 최근 학술지 ‘독도연구’ 23호에 ‘독도 영유권에 대한 근대국제법의 적용 문제’를 게재했다. 17세기 말 조선과 일본은 울릉도의 귀속을 두고 외교 문서를 주고 받으며 교섭해 1699년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했다. 이른바 ‘울릉도 쟁계’다. 당시 양국은 낙도(落島)의 귀속에 관한 판단 기준으로 ‘어느 정부가 낙도에 영유 의사를 가지고 있는가’, ‘낙도는 어느 나라에 가까운가’ 하는 두 가지를 세웠다. 논문은 “이는 근대 이전 ‘광의의 국제법’이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 이후에도 일본은 일본에서 울릉도와 독도의 귀속이 문제가 될 때마다 이들 기준에 따라 조선의 영토로 판단했다. 에도 막부는 독도에 영유 의사를 가진 적이 없었고, 지리적으로 독도는 조선 땅인 울릉도에 가깝기 때문이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도 모리야마 시게루 등이 1870년 작성한 ‘조선국 교제 시말 내탐서’를 비롯해 이런 판단은 변함이 없었다. 이성환 계명대 교수도 같은 학술지에 실린 논문 ‘조일(朝日)/한일(韓日) 국경조약체제와 독도’에서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라는 1877년 일본 태정관(太政官) 지령은 ‘울릉도 쟁계’의 결과 1699년 성립된 한일 국경조약을 일본 국내법령으로 수용한 것”이라며 “이를 ‘조일/한일 국경조약체제’로 규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병섭 대표는 “일본은 1905년 무주지를 선점해 독도를 편입했다고 주장하지만 독도는 광의의 국제법상 한국의 영토였으며 편입은 무효”라고 강조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임진란, 거북선과 함께 역사를 지은 민족적 은인 이 충무공의 위토 60두락지기가 장차 경매에 넘어갈 운명에 있다고 한다.…모두 빈한한 살림이라 갚을 도리가 없어 오늘까지 왔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종손의 부채 때문에 위토가 경매에 부쳐질 예정이며 묘소와 사당, 종가가 모두 퇴락하고 있다는 르포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국난 극복의 상징인 충무공 유적지 보존을 위한 거족적 운동을 촉발시켰다. 동아일보는 “우리는 먼저 민족적 이상이 결여하고, 민족적 자부심이 마비된 조선의 사회를 스스로 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서러워한다”며 사설로 전 민족적 해결을 제안했다. 5월 21일에는 전 민중이 읽을 수 있도록 순 한글로 사설을 쓰기도 했다. 연이은 보도를 보고 명성여자실업학원 학생들이 눈물을 흘리며 주머니를 털어 1전, 2전씩 모아 동아일보에 성금을 보냈다. 동아일보는 5월 23일자부터 6월 말까지 1개 면 전체를 털어 성금 기탁자 명단을 실었다. 다음 해까지 1년간 성금을 보내온 사람은 2만여 명, 400여 개 단체. 총 1만6021원30전이 모였다. 직공부터 어린이까지 전 조선에서 10전, 20전씩 정성을 모은 것이다. 이광수 편집국장이 장편소설 ‘이순신’을 1932년 6월부터 178회에 걸쳐 연재했다. 이광수는 소설 마지막 문장에서 “그때 적을 보고 달아난 무리들이 정권을 잡아 삼백년 호화로운 꿈을 꾸는 동안에 조선의 산에는 나무 한 포기 없어지고 강에는 물이 마르고 백성들은 어리석고 가난해졌다”며 피폐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개탄했다. 1931년 5월 23일 저명인사들로 ‘충무공 유적보존회’가 결성됐고, 실무를 동아일보가 주관했다. 성금으로 부채를 상환하고 현충사를 중건했으며 새로 꾸민 사당에 충무공의 검, 금대, 일기, 칙지(勅旨) 등 유물을 안치했다. 위토를 추가로 매입하기도 했다. 1932년 6월 5일 동아일보 전속 화가인 청전 이상범 화백(1897∼1972)이 그린 충무공 영정을 새 사당에 봉안했다. 봉안식이 열리는 날 현충사 주변에는 3만여 명의 인파가 주변 산야를 뒤덮었고, 천안∼온양 간 임시열차가 운행됐다. 온 겨레가 함께한 잔치였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인사혁신처가 4일 시민단체 근무 경력을 공무원 호봉으로 인정하겠다고 밝히자, 공직사회는 엇갈린 반응을 보이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향후 공무원 보수규정이 어떻게 바뀔지, 시민단체 경력 인정이 공직사회에 어느 정도의 파장을 몰고 올지 등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는 분위기였다. 시민단체 경력 인정이 공직 개방의 문호를 넓힐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특정 단체에 대한 특혜가 없어야 공직사회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지적이 많다.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5일 본보에 “정부와 민간의 교류가 활발해지는 게 대세이니, 시민단체 경력 호봉 반영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의 한 간부는 “평생을 시민단체에 있다가 공직에 입문하면 나이는 많은데 호봉이 낮을 수 있다. 직급과 경력에 맞는 대우를 해주는 것이 맞는다고 본다”고 했다. 해양수산부 관계자는 “사회 각 부문과 정부가 활발하게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본다”고 평가했다. 현재 경력 공무원 채용에서 민간 경력 인정은 이미 시행을 하고 있는 제도다. 5, 7, 9급 공채로 뽑는 공무원 시험의 한계를 극복하고 민간 인재를 수혈하기 위해 호봉을 책정할 때 민간 경력을 환산해 반영한다. 과거에는 변호사 자격증이나 박사학위와 같은 특수경력을 가지고 동일 업무에 종사한 경력에 한해서만 그 기간의 최대 80%를 호봉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2012년 7월 1일부터는 동일 분야의 민간 경력도 최대 100% 인정하기로 공무원 보수규정을 개정했다. 시민단체 경력도 ‘관련이 있는’ 경우에 인정을 해준 것이다. 예를 들어 5급 1호봉으로 채용된 사람이 9년간 유관 시민단체에서 일했다면 5급 10호봉의 대우를 받는 방식이다. 문제는 이번 인사혁신처의 개정안이 해당 업무와 ‘관련이 없는’ 시민단체 경력도 ‘최대 70%까지’ 환산해 인정할 수 있도록 하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고용부의 한 관계자는 “객관적인 학위나 정부기관 근무 경력도 아닌, 불확실한 경력을 반영해서 호봉을 올려주는 것은 공무원 인사체계 자체를 뒤흔드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한 퇴직 관료도 “채용비리는 물론이고 정치권 ‘낙하산’들의 인사 청탁과 민원이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농림축산식품부에서는 “시민단체 경력을 분야에 상관없이 호봉으로 쳐준다면 전문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나왔다. 일부에서는 “특정 단체를 위한 봉급 잔치가 될 수 있다”는 불만의 목소리도 나온다. 김태영 경희대 행정학과 교수는 “시민단체와 정부의 역할에 공통되는 부분이 있는 만큼 능력 있는 시민단체 인력의 축적된 역량을 인정해 줄 필요가 있다”며 “다만 시민단체 외에도 다양한 전문가들이 공직사회에 진출해 ‘공무원 철밥통’을 깰 수 있도록 공정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노지현 isityou@donga.com·김윤종·조종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