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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 작품을 자꾸 이렇게 난도질하는 거냐.” 최근 방송 중인 Mnet의 힙합 오디션 예능 ‘쇼미더머니’ 시즌9에 출연한 래퍼 스윙스는 지난달 2화 방송이 끝난 후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악마의 편집’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다. 제작진은 프로그램 막바지에 그의 경연 무대를 배치하면서 전체를 다 보여주는 대신 일부 장면만을 편집한 채 방송을 마무리했다. 언뜻 보면 다음 에피소드를 궁금하게 만들지만 시청자 대부분은 그가 경연에서 큰 실수를 저지른 듯한 분위기로 받아들였다. 실제 상황은 달랐다. 그가 심사위원들의 호평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무대를 마친 것. 스윙스는 방송 다음 날 “날 예능적으로 이용하는 거 좋다. 다 돈 벌고 보는 사람도 할 말 많아지면 그게 엔터테인먼트”라면서도 “그런데 내 음악을 있는 그대로 좀 내보내주면 시청률이 내려가냐. 왜 그렇게 과욕을 부리냐”며 제작진을 비판했다. 다음 화 방송에 이어 무삭제 버전 유튜브 영상을 접한 시청자들도 “일부러 논란인 것처럼 만드는 건 진짜 옛날 스타일이다. 촌스럽다”며 배신감을 나타냈다. 몇몇 해외 시청자 역시 “각본이 짜여진 예능 편집은 드라마랑 다를 게 없다”고 밝혔다. 한편으로는 이 프로그램에 수차례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며 흥행의 키를 쥔 스윙스의 불만 표출이 짜여진 각본에 따른 ‘노이즈 마케팅’의 일환이라는 견해도 있다. 동시에 덜 유명한 참가자였다면 편집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 공개적으로 문제 제기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결과적으로 제작진의 작전이 통한 걸까. 프로그램의 클립 영상 조회 수는 네이버 유튜브 등에서 2000만 회를 넘어섰다. 이는 지난 시즌 영상에 비해 회당 300만 회를 크게 웃도는 수치다. 경연,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 속 악마의 편집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특히 과도한 편집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피해자들이 잇따라 유튜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실상을 폭로하고 있고 시청자들은 악마의 편집에 흥미보다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악마의 편집은 본래 상황을 오해하도록 왜곡하는 편집을 비판하는 인터넷 용어에서 나왔다. 촬영한 순서를 재배치하고 자막 및 배경음악을 삽입하며 주변 반응을 짜깁기하는 등 편집을 할 때 의도를 갖고 특정 분위기로 몰아간다. 2010년 Mnet의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에서 한 출연자가 악의적 편집으로 비판을 받았던 사실이 알려지며 악마의 편집이라는 말이 널리 알려졌다. 악마의 편집은 출연자들의 경쟁심을 유발하는 서바이벌 예능이나 관찰·리얼리티 예능에서 주로 사용된다. 극적 상황이나 갈등을 연출하거나 출연자별 캐릭터를 설정하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한 출연자의 공연이 끝난 후 이와 상관없이 재채기를 하다 인상을 찌푸린 다른 참가자의 얼굴을 비춤으로써 ‘무대를 심각하게 망쳤다’는 의미를 전달하는 식이다. 여러 화면을 병치시킬 때 맥락, 연결 장면에 따라 같은 장면이라도 전혀 다른 정서적 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쿨레쇼프 효과’로 불리기도 한다. 최근 유튜브 채널 ‘VOTUS’에는 2015년 방송된 Mnet의 ‘언프리티 랩스타’의 래퍼 ‘졸리브이’가 등장해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는 래퍼 ‘치타’와 함께 오른 합동 공연에서 실력이 없어 무대를 망친 장본인에 비호감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져 비판받았다. 그의 영상은 수차례 편집, 확대 재생산되면서 놀림거리가 됐다. 그가 공연하는 사이사이 찌푸린 심사위원들의 얼굴이 나가면서 무대가 엉망인 것같이 보이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저는 ‘랩 대결 최강자’라는 캐릭터로 설정됐다. 무대가 떨려 과도하게 흥분했던 건 맞다”면서도 “방송을 보면 다른 래퍼의 공연에는 심사위원들이 화색인데 제가 공연할 때만 심하게 정색한다.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저렇게 정색하며 공연을 보는데 어떻게 제가 그걸 무시하고 공연을 하겠냐. 좀 이상하지 않냐”고 해명했다. 실제 촬영 중 몇몇 심사위원들이 그에게 따뜻한 조언을 건네는 장면도 있었지만, 그 장면은 방송되지 않았다. 과거 MBC ‘진짜사나이 여군 특집’에 출연했던 맹승지도 대표적 피해자다. 그는 훈련소 입소 과정에서 배꼽티에 핑크색 트렁크를 들고 간 ‘무개념녀’로 전파를 탔다. 고된 훈련 과정 중 “원래 여자는 이렇게 하는 겁니다”라는 발언은 편의를 봐달라는 요청으로 비치며 뭇매를 맞았다. 유튜브 채널 ‘까레라이스TV’에 출연한 그는 “소속사에서 어떤 프로그램 출연인지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다른 참가자처럼 고데기, 인형, 트렁크 등 특정 소품을 지참하라고 전해 들었다”고 밝혔다. 또 훈련에 대해선 “헬스장에서 배운 대로 무릎을 댄 채 팔굽혀펴기를 하면 훈련을 완수할 수 있을 것 같기에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한 말인데 ‘난 여자니까 우대해 달라’는 식으로 편집돼 인생 최대의 욕을 먹었다”고 말했다. Mnet의 쇼미더머니 시즌5에 출연했던 래퍼 ‘원썬’도 유튜브 채널 ‘근황올림픽’에서 웃음거리가 된 과거를 털어놨다. 그는 방송에서 자신의 연륜, 경력만 강조하는 ‘꼰대’로 비치며 대중의 욕설과 비난을 감내해야 했다. 그는 “누군가 희생양으로 삼을 베테랑 1세대 래퍼가 필요했던 것 같다. 제가 맡았던 역할은 쇼미더머니에서 바보였다”고 했다. 숱한 논란, 폭로, 비판에도 악마의 편집이 계속되는 이유는 뭘까. 화제성과 시청률이 도덕적 논란이나 무관심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한 방송국의 예능PD는 “시청자에게 기대감도 줘야 하고, 화제성도 얻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다. 비판이 있더라도 일정 수준의 편집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악마의 편집은 유독 약자에게 가혹하다. 인지도가 있는 사람은 사전 조율을 거치는 편이지만 출연 기회 자체가 중요한 약자들은 전권을 제작진에 맡기기 때문에 피해가 반복된다”고 분석했다. 이어 “원칙상 출연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방송에 나갈지 사전 동의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잘못된 방송 관행으로 모든 연출권이 PD에게 있고, 출연자는 이에 이의를 제기하면 눈치를 봐야 하는 풍토가 만들어졌다”고 지적했다.:: 쿨레쇼프 효과 ::소련의 영화감독 겸 이론가 레프 쿨레쇼프가 주창한 ‘숏(shot)’ 편집의 효과. 숏과 숏을 병치시키는 과정에서 편집에 의해 맥락에 따라 색다른 의미와 정서적인 효과를 유발할 수 있다고 말한 이론. 똑같은 표정의 인물도 함께 보여지는 이미지에 따라 완전히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왜 내 작품을 자꾸 이렇게 난도질하는 거냐.” 최근 방송 중인 Mnet의 힙합 오디션 예능 ‘쇼미더머니’ 시즌9에 출연한 래퍼 스윙스는 지난달 2화 방송이 끝난 후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악마의 편집’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다. 제작진은 프로그램 막바지에 그의 경연 무대를 배치, 전체를 다 보여주는 대신 일부 장면만을 편집한 채 방송을 마무리했다. 언뜻 보면 다음 에피소드를 궁금하게 만들지만 시청자 대부분은 그가 경연에서 큰 실수를 저지른 듯한 분위기로 받아들였다. 실제 상황은 달랐다. 그가 심사위원들의 호평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무대를 마친 것. 스윙스는 방송 다음날 “날 예능적으로 이용하는 거 좋다. 다 돈 벌고 보는 사람도 할 말 많아지면 그게 엔터테인먼트”라면서도 “그런데 내 음악을 있는 그대로 좀 내보내주면 시청률 내려 가냐. 왜 그렇게 과욕을 부리냐”며 제작진을 비판했다. 다음 화 방송에 이어 무삭제 버전 유튜브 영상을 접한 시청자들도 “일부러 논란인 것처럼 만드는 건 진짜 옛날 스타일이다. 촌스럽다”며 배신감을 나타냈다. 몇몇 해외 시청자 역시 “각본이 짜여진 예능편집은 드라마랑 다를 게 없다”고 밝혔다. 한편으로는 이 프로그램에 수차례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며 흥행의 키를 쥔 스윙스의 불만 표출이 짜여진 각본에 따른 ‘노이즈 마케팅’의 일환이라는 견해도 있다. 동시에 비교적 유명세가 덜한 참가자였다면 편집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 공개적으로 문제 제기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결과적으로 제작진의 작전이 통한 걸까. 프로그램의 클립 영상 조회 수는 네이버 유튜브 등에서 2000만 회를 넘어섰다. 이는 지난 시즌 영상에 비해 회당 300만 회를 크게 웃도는 수치다. 경연,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 속 악마의 편집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특히 과도한 편집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피해자들이 잇따라 유튜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실상을 폭로하고 있고 시청자들은 악마의 편집에 흥미보다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악마의 편집은 본래 상황을 오해하도록 왜곡하는 편집을 비판하는 인터넷 용어에서 나왔다. 촬영한 순서를 재배치하고 자막 및 배경음악을 삽입하며 주변 반응을 짜깁기하는 등 편집을 할 때 의도를 갖고 특정 분위기로 몰아간다. 2010년 Mnet의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에서 한 출연자가 악의적 편집으로 비판을 받았던 사실이 알려지며 악마의 편집이라는 말이 널리 알려졌다. 악마의 편집은 출연자들의 경쟁심을 유발하는 서바이벌 예능이나 관찰·리얼리티 예능에서 주로 사용된다. 극적 상황이나 갈등을 연출하거나 출연자별 캐릭터를 설정하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한 출연자의 공연이 끝난 후 이와 상관없이 재채기를 하다 인상을 찌푸린 다른 참가자의 얼굴을 비춤으로써 ‘무대를 심각하게 망쳤다’는 의미를 전달하는 식이다. 여러 화면을 병치시킬 때 문맥, 연결 장면에 따라 같은 장면이라도 전혀 다른 정서적 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쿨레쇼프 효과’로 불리기도 한다. 최근 유튜브 채널 ‘VOTUS’에는 2015년 방송된 Mnet의 ‘언프리티 랩스타’의 래퍼 ‘졸리브이’가 등장해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는 래퍼 ‘치타’와 함께 오른 합동 공연에서 실력이 없어 무대를 망친 장본인에 비호감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져 비판받았다. 그의 영상은 수차례 편집, 확대 재생산되면서 놀림거리가 됐다. 그가 공연하는 사이사이 찌푸린 심사위원들의 얼굴이 나가면서 무대가 엉망인 것 같이 보이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저는 ‘랩 대결 최강자’라는 캐릭터로 설정됐다. 무대가 떨려 과도하게 흥분했던 건 맞다”면서도 “방송을 보면 다른 래퍼의 공연에 심사위원들이 화색인데 제가 공연할 때만 심하게 정색한다.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저렇게 정색 하며 공연을 보는데 어떻게 제가 그걸 무시하고 공연을 하겠냐. 좀 이상하지 않냐”고 해명했다. 실제 촬영 중 몇몇 심사위원들이 그에게 따뜻한 조언을 건네는 장면도 있었지만, 그 장면은 방송되지 않았다. 과거 MBC ‘진짜사나이 여군특집’에 출연했던 맹승지도 대표적 피해자다. 그는 훈련소 입소 과정에서 배꼽티에 핑크색 트렁크를 들고 간 ‘무개념녀’로 전파를 탔다. 고된 훈련 과정 중 “원래 여자는 이렇게 하는 겁니다”라는 발언은 편의를 봐달라는 요청으로 비춰지며 뭇매를 맞았다. 유튜브 채널 ‘까레라이스TV’에 출연한 그는 “소속사에서 어떤 프로그램 출연인지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다른 참가자처럼 고데기, 인형, 트렁크 등 특정 소품을 지참하라고 전해 들었다”고 밝혔다. 또 훈련에 대해선 “헬스장에서 배운 대로 무릎을 댄 채 팔굽혀펴기를 하면 훈련을 완수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한 말인데 ‘난 여자니까 우대해 달라’는 식으로 편집돼 인생 최대의 욕을 먹었다”고 말했다. Mnet의 쇼미더머니 시즌5에 출연했던 래퍼 ‘원썬’도 유튜브 채널 ‘근황올림픽’에서 웃음거리가 된 과거를 털어놨다. 그는 방송에서 자신의 연륜, 경력만 강조하는 ‘꼰대’로 비춰지며 대중의 욕설과 비난을 감내해야 했다. 그는 “누군가 희생양으로 삼을 베테랑 1세대 래퍼가 필요했던 것 같다. 제가 맡았던 역할은 쇼미더머니에서 바보였다”고 했다. 숱한 논란, 폭로, 비판에도 악마의 편집이 계속되는 이유는 뭘까. 화제성과 시청률이 도덕적 논란이나 무관심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한 방송국의 예능PD는 “시청자에게 기대감도 줘야하고, 화제성도 얻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다. 비판이 있더라도 일정 수준의 편집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악마의 편집은 유독 약자에게 가혹하다. 유명세가 있는 사람은 사전 조율을 거치는 편이지만 출연 기회 자체가 중요한 약자들은 전권을 제작진에 맡기기 때문에 피해가 반복된다”고 분석했다. 이어 “원칙상 출연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방송에 나갈지 사전 동의를 거쳐야한다. 하지만 잘못된 방송 관행으로 모든 연출권이 PD에게 있고, 출연자는 이에 이의를 제기하면 눈치를 봐야하는 풍토가 만들어졌다”고 지적했다.김기윤기자 pep@donga.com}

당신은 굴욕 앞에 어떻게 행동하는가. 누군가는 와신상담하며 복수를 떠올리고, 누군가는 이를 참지 못해 바로 분개할지 모른다. 묵묵히 인내하거나, 굴욕적 경험마저 긍정한 채 여유로운 반응을 보이는 이도 있다. 17세의 한 소년은 어느 날 아침 아버지가 환관의 꾐에 넘어가 모질게 고문당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옥고를 치른 그의 아버지는 결국 숨을 거둔다. 소년은 슬픔과 절망 속에서 역사책을 집어 들었다. 얼마 뒤 나라가 적의 침공을 받자, 그는 아버지를 죽게 한 나라임에도 분연히 맞섰다. 적은 그의 재산, 나라까지도 빼앗았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책과 붓을 집어 들었다. 그 소년은 훗날 중국 전제군주제의 폐단을 지적하는 저서 ‘명이대방록’을 지은 대학자 황종희(黃宗羲)다. 굴욕에 맞선 ‘불굴의 의지’가 그를 만들었다. 동양사학을 전공한 두 저자가 홍범도, 대조영, 주더, 정도전, 광무제 등 한중 역사 속 인물들의 굴욕 일대기를 모았다. 부제는 ‘역사를 움직인 16인의 굴욕 연대기’. 이들이 굴욕을 딛고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를 과감함, 불굴, 긍정, 인내, 신뢰, 인정, 애민, 확신이라는 여덟 가지 주제어로 정리했다. 발해를 건국한 고구려 유민 출신의 대조영, 서요를 건국한 야율대석(耶律大石)은 굴욕 앞에 도리어 과감함을 보였다. 두 사람은 각각 당나라와 금나라의 공격에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잃은 이들. 속절없이 유랑하거나 적국의 신하가 되거나 죽는 길밖에 없었다. 그 순간 그들은 과거의 부활이 아닌 새 나라를 세우기로 결심한다. 굴욕이라는 신선한 테마로 이야기를 엮은 듯 하나, 사실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이들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인물들의 익숙한 일화와 영웅적 면모가 여럿 소개된다. 결국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하다. 위기와 굴욕을 지혜롭게 극복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 굴욕 없는 역사는 없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인생 경력 220년, 연극 경력 150년. 경기 수원시 경기아트센터 소극장에서 19일 개막하는 경기도극단의 신작 연극 ‘저물도록 너, 어디 있었니’에서 연출가 한태숙(70), 배우 손숙(76), 작가 정복근(74)이 의기투합했다. ‘저물도록…’은 집을 나간 운동권 딸을 찾아 헤매는 한 고위 공직자의 아내 ‘성연’을 통해 ‘존재는 사라져도 기억은 남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5일 만난 세 사람은 “조곤조곤하게 대신 지독하고 치열하게 싸우며 만든 작품”이라고 했다. 한 연출가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디테일과 방향성을 논할 때만큼은 날카롭게 토론했다”며 “특히 진보와 보수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달라 육탄전만 안 했을 뿐, 세 시간씩 다퉜다”며 웃었다. 정 작가가 극의 주제를 원칙적으로 흔들림 없이 표현하려 했다면, 한 연출가는 극의 리듬과 서사를 유연하게 흔들고 싶어 했다. 이 작품은 정 작가가 오랫동안 다듬어 왔다. 큰 야망 없이 보통 사람으로 살던 중년부부의 삶이 사회 문제 앞에 어떻게 무너지는지 세밀하게 그렸다. 정 작가는 “사회가 늘 싸우고 갈등하다 여기까지 왔는데 과연 지금 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지 생각했다. 진영 갈등이 심한 오늘날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했다. 손 씨는 성연이 마주치는 낯선 여자 ‘지하련’을 맡는다. 성연에게 불안함, 초조함과 동시에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인물이다. 그는 “매년 한두 편씩 연극을 해왔어도 선 굵은 작품에 대한 갈증이 컸다. ‘악바리’인 한 연출가, 정 작가와 함께한다고 해서 ‘얼씨구나 좋다’며 연습을 시작했다”고 했다. 세 사람의 의기투합은 경기도극단 단원들에게도 큰 자극이 됐다. 단원들은 “매일 에베레스트산을 오르는 기분인데 하산할 때 얼마나 뿌듯할지 궁금하다”는 반응이다. 한 연출가는 “연극은 신비한 생존력이 있다. 이념 갈등이 불거진 2020년이 훗날 어떻게 기록될지 관객과 소통하고 싶다”고 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오롯이 혼자 관객을 맞이하는 무서운 공연입니다.” 42년 전 서울 중구 남산예술센터 연습실. 연극을 동경하던 대학생이 뚜벅뚜벅 들어왔다. 무대에 대한 열망은 들끓어도 연극은 아무것도 몰랐다. 이 청년은 42년 후 같은 연습실에 다시 섰다. 그 사이 누군가의 연기 스승, 국민배우, 아티스트로 불렸지만 이곳에서 흘린 땀의 농밀함은 이전과 똑같다. 다만 이번엔 철저히 혼자다. 그에게 꽂히는 관객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7일 개막하는 1인극 ‘콘트라바쓰’의 배우 박상원(61)이다. 2014년 ‘고곤의 선물’ 이후 약 6년 만의 연극 무대 복귀이며, 첫 1인극 도전이다. 1일 남산예술센터에서 만난 그는 “연기를 40년 해도 관객은 늘 무섭다. 이기적이고, 까다롭고, 건방질 자격이 있는, 끝내 저를 용서하지 않을 자격이 있는 존재”라며 “그 잣대에 맞추려면 땀으로 승부하는 방법뿐”이라고 말했다. 작품은 독일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희곡을 각색했다. 오케스트라에서 비중이 적은 더블베이스 연주자로 나오는 그는 주목받지 못하는 악기와 그 연주자의 삶을 통해 인간 소외를 그린다. 작품은 3년 전부터 준비했다. 최근 코로나19 확산으로 공연 성사가 불투명했다. “종합운동장에서 달리기하듯 9월부터 두 달간 매일같이 ‘런(공연 시연)’을 했기에 연습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고 느꼈어요. 대면 공연을 앞두고 있어 기적 같죠. 하하.” 홀로 오르는 무대에는 든든한 친구이자 또 다른 자아, 콘트라베이스가 놓여 있다. 그는 “콘트라베이스는 애증의 존재다. 주인공의 생계를 책임지면서 어딘가 쓸쓸하고 소외된 모습은 닮았다. 현란하진 않아도 누군가를 ‘백업’해주는 소중한 존재”라고 했다. 이번 공연은 ‘박상원 종합선물세트’나 마찬가지다. ‘한국 남자 현대무용수 1호’인 그가 뛰놀며 춤도 춘다. 풀어헤친 머리와 동그란 뿔테 안경이 색다른 매력을 느끼게 한다. 그에게는 자신을 내려놓고 깊게 탐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제게 연극은 그냥 삶 자체죠. ‘나’라는 자아가 눈뜨면서부터 하고 싶은 일을 평생 할 수 있던 ‘덕업일치’죠. 인테리어, 사진, 무용, 음악, 그림, 모든 건 다 연기와 맞닿아 있습니다.” 29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5만, 7만 원. 14세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오뚜기 3세’ ‘연예인 주식부자’ 등 타이틀을 가진 함연지(28)가 본업인 뮤지컬 배우로 대중과 만난다. 지난달 29일 공개한 트레일러 영상을 시작으로 20~22일 케이블TV 방송과 네이버 온라인 상영을 계획 중인 웹뮤지컬 ‘킬러파티’서 ‘나조연’ 역을 맡는다. 양준모, 신영숙 등도 출연한다. 최근 서울 강남구 샌드박스네트워크 사무실서 만난 그는 “이 시기에 관객 앞에서 노래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진심으로 행복하다”며 밝게 웃었다. 초등학교 시절, 사촌 언니가 붓을 잡는 모습에 반해 예원중학교에 입학했다. 매일 목탄을 쥐고 살아 코를 풀 때마다 검은 콧물이 나올 정도였다. 목욕탕에 갈 때면 온몸에 묻은 검댕을 보고 아주머니들이 “너 어디 탄광에서 왔니?”라고 물을 정도였다. 하지만 디즈니에 푹 빠져있던 소녀는 뮤지컬이란 장르를 알게 된 뒤 새 목표가 생겼다. ‘뮤지컬 무대에 서야겠다!’ 3년이 흘러 외국어고등학교에 가면 유학을 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미국서 뮤지컬을 배우기 위한 단계였다. 우수한 성적으로 돌연 대원외고에 진학하더니, 졸업 후 미국 뉴욕대학교에 입학해 연기를 배웠다. 하고픈 것도 많았고 ‘재능 부자’였어도 꿈은 늘 확고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미국 미시건에서 열린 ‘뮤지컬 캠프’ 오디션에 혼자 갔어요. 통나무집에 뮤지컬 덕후인 또래들이 모여 하루 종일 뮤지컬 얘기만 했죠. 캠프 첫째 날 밤에 침대에 누웠는데 너무 행복해 천장에서 막 별이 보였어요.” 대학 시절엔 누구나 꿈꾸는 브로드웨이 문도 두드려봤다. 그는 “미국 영주권이 없어 배우 노조 가입도 안 되고, 오디션도 볼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도 “노래하고 춤추는 환상적인 느낌이 좋았다”며 국내로 발길을 돌렸다. 뮤지컬을 결코 멈출 수 없었고 지금도 ‘덕업일치’의 삶을 산다. 이번 작품은 한 저택 파티 중 벌어진 살인 사건이 배경이다. 현장에 도착한 수사관이 배우 9명을 각자 다른 방에 넣고 신문한다. 배우들이 한 연습실, 무대에 모이지 않고도 집에서 촬영을 진행하면서도 스토리와 어우러진 뮤지컬을 만들어냈다. ‘자가격리 뮤지컬’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함연지는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고 상대역 삼아 연기했다. 종종 옆에 있는 스태프가 상대역 대사를 읽어주기도 했다”고 했다. 이는 그야말로 실험에 가까웠다. 마냥 신기한 생각도 들었지만 넘버와 연기를 이어붙인 촬영·편집 결과물을 본 그는 “웹뮤지컬의 가능성을 봤다”고 했다. 낮에는 공인중개사로 일하고 밤에는 주연 배우를 꿈꾸는 ‘나조연’ 배역은 다소 노출이 있는 의상도 소화해야 했다. 극 안에 펼쳐진 또다른 상황극에선 ‘사자 조련사’ 역할을 맡기 때문. 집 안에서 무대의상을 소화했다. 가족은 이번에도 그의 든든한 우군이다. “아버지는 이미 제 대학시절 공연부터 쭉 보시면서 훨씬 노출이 심한 의상에 트월킹(골반을 흔드는 춤)까지 보셨죠.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이번 의상을 보고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 하세요. 하하.” 뮤지컬 음악보단 팝, 가요를 더 좋아한다는 그의 남편도 “내 눈에는 네가 천생 배우로 보인다”며 응원한다. 평소에도 힘든 일이 있으면 함연지는 퇴근한 남편을 보고 한바탕 크게 울며 스트레스를 푼다. “눈물에 순화 기능이 있잖아요. 제겐 울음이 제일 좋은 스트레스 해소법입니다. 숨도 못 쉴 것처럼, 꼭 누가 죽은 것처럼 남편을 부여잡고 엉엉 울어요.” 캐릭터를 혼자 연구하고 대본을 분석하는 과정은 늘 짜릿하다. “다 큰 어른들이 모여 나름의 규칙과 장면을 만들고, 특정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꼭 어린이들의 소꿉놀이 같은 거잖아요.” 이번엔 공인중개사 역할을 위해 극의 배경이 된 양수리 일대 지도를 훑으며, 실제 본인이 일하고 있을 법한 부동산 사무소를 정해 캐릭터에 몰입했다. 웹뮤지컬이 마냥 신나기도 했지만, 엄연히 새로운 장르라 연기 고민도 있었다. 그는 “드라마처럼 연기해야하는지, 웹툰처럼 딱딱 찍히는 연기를 해야 하는 건지 처음엔 감이 잘 안 왔다”고 했다. 그는 연구 끝에 함연지만이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런 매력을 배역에 입히기로 했다. 톡톡 튀고 발랄한 연기에 캐릭터가 가진 ‘백치미’를 살리며 생동감 넘치는 넘버를 선보인다. 그는 사실 대중에게 ‘오뚜기 창업주 손녀’로 먼저 각인됐다. 최근 예능, 유튜브서도 활발히 활약하고 있어 배우 자체보다는 인간 함연지의 모습이 더 주목받고 있다. 이미지 소비가 많아 배역에 큰 제약이 따를 수 있겠다는 고민도 있었다. 때로는 대중의 따가운 눈초리도 받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움츠러드는 대신 한 발 더 앞으로 나서기로 했다. “속상하게 생각하면 솔직히 한도 끝도 없죠. 숨기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결국 뮤지컬을 꾸준히 하면서 스스로 증명하는 게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저를 지켜봐주시는 건 배우로서 저를 알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버티면 승리한다는 말을 믿어요!”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장기화로 극장, 공연장, 무대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그나마 생긴 일자리도 갑자기 없어지기 일쑤다. 지난달 26일 제작사 대표가 잠적해 일찍 막을 내린 한 연극은 황폐화된 예술계 현실을 잘 보여준다. 이 현실은 무명의 예술인들에게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이다. 무력감이 밀려오지만 예술을 위해서라면 버텨야 한다. 코로나19로 본래 일터를 떠나 생계 전선에 뛰어든 배우, 인디밴드, 스태프 등 8명을 만났다. 볼멘소리를 꺼내기도 이들은 조심스러워 했다. “저희만 힘든가요. 예술인의 숙명인가 봅니다.”○연극배우의 ‘코로나 하루’ 지난해 국립극단 시즌제 단원으로 뽑혀 매일 연습실에 가던 배우 김한 씨(42)는 서울 마포구 집에서 경기 화성시 한 빵집으로 출근한다. 지난달 21일 오전 6시, 눈을 비비며 승용차에 오른 그는 동틀 무렵까지 1시간 20분을 달렸다.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을 지날 즈음 “여기서 얼마 전까지 공연했는데…. 11월까지 꽉 찼던 스케줄이 줄줄이 끊겼다”고 입을 뗐다. “배우는 몸 쓰는 직업이라 사고 위험이 있는 장거리 운송 알바는 가급적 안 할 생각이었는데….” 오전 7시 40분, 빵집에 도착하자 하얀 근무복으로 갈아입은 그가 빵을 진열하고 포장한다. 첫 손님이 들어오자 힘차게 “어서 오세요!” 외친다. 배우 활동이 아예 끊긴 건 아니다. 오디션이 가뭄에 콩 나듯 열린다. “다행히 강릉에서 촬영하는 영화 단역을 맡아서 다음 주엔 오전 4시쯤 일어나야 할 것 같다”며 엷게 미소 지었다. 최근엔 충남 천안에서 마당극 공연도 했다. 오전 10시, 빵집 건물 6층 빵 공장에서 인천에 배송할 빵을 받아 트럭에 옮겨 싣는다. 매일 경기 화성과 인천을 오가며 다른 매장에 배달한다. 일이 많은 때는 서울, 화성, 인천, 천안을 오가느라 일주일에 2000km를 달린다. “연기할 자리가 생기면 사장님께 양해를 구해 일정을 조율하는 게 더 힘들죠. 마당극도 사장님이 배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오전 11시를 넘겨 인천 남동구의 한 매장에 빵을 내려놓고 2차 배송이 예정된 화성으로 향한다. 끼니를 챙길 시간도 마땅치 않다. 2차 배송이 끝나면 서울에 가서 저녁 알바를 해야 한다. 그는 “예측조차 할 수 없는 공연계의 미래 때문에 더 힘들다”고 했다. 랜선 공연이 늘면서 배우로서의 정체성도 고민이다. “10년 후에도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요?” 오후 5시, 두 번째 직장으로 출근한다. 한 달 전부터 서울문화재단의 예술인 공공지원사업에 뽑혀 극장에서 일한다. 하루 8시간 언제 재가동할지 모르는 무대와 극장을 정비한다. 일을 마치고 침대에 누우면 다음 날 오전 1시. ○“돈을 바라면 못 한다는 일이지만, 그래도…” 생활고는 늘 함께였다. “돈을 바라면 예술을 오래 못 한다”는 말에 수긍해 왔지만 올해는 뼈아프다. 인디밴드 트레봉봉의 드러머 김하늘은 “경제적 어려움은 몸에 익었다. 관객을 못 만나는 상황이 더 힘들다”고 했다. “꿈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는 7년 차 뮤지컬 배우 김주왕 씨(34)도 고됨의 연속이다. 해외 할리우드 연예인 대상의 운동 수업도 병행했지만 일이 끊기자 스크린골프장 아르바이트를 했다. 스크린골프장 손님이 줄어 해고된 뒤 동창에게 부탁해 지금은 방역업체에서 일한다. 산업용 마스크에 방호복 차림으로 공연장 사무실 헬스장에 소독약을 뿌린다. 퇴근 후엔 뮤지컬 넘버 커버곡 유튜브 영상을 만든다. 예술을 이어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무대가 간혹 열리면 무대에 굶주린 이들이 모여든다. 올 9월 온라인 ‘인천 펜타포트 음악축제’에 설 수 있는 ‘펜타 유스스타’ 경연에 299개 밴드가 몰렸다. 1, 2등만 무대에 설 수 있어 경쟁률은 150 대 1이었다. 지난해 경쟁률은 20 대 1 수준이었다. 트레봉봉 리더 성기완(53)은 “3등을 해서 기회는 놓쳤지만 뮤지션들의 절박함을 느꼈다”고 했다. 11년 차 음향감독 김병주 씨(32)는 넓이 90m² 남짓한 창고로 출근해 음향장비를 쓸고 닦고 점검한다. 그는 “장비 상자에 거미줄 쳐진 거 처음 봤다. 너무 신기해서 사진도 찍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원래 9월부터 연말까지 성수기지만 지금은 대출로 버틴다. 2년 차 조명감독 이정수 씨(30)는 최근 대리운전을 시작해 오전 4시까지 일한다. 그는 “이건 기본”이라고 했다. 오랜만에 공연 현장에 일감이 생겨 충북 괴산에 1박 2일 다녀왔다. “집에 가면 씻고 바로 대리 뛰어야 합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이지윤 인턴기자 연세대 UIC 경제학과 졸업 이지윤 인턴기자 연세대 생활디자인과 4학년}

이달 20∼22일 케이블TV 방송과 온라인 상영 예정인 웹뮤지컬 ‘킬러파티’는 코로나19가 낳은 독특한 뮤지컬이다. 이 작품은 저택의 파티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다뤘다. 초대받은 9명의 손님을 수사관이 각자의 방에서 신문한다. 배우들이 실제 본인의 집에서 연기를 하고, 이 촬영본을 편집해 작품을 만들고 있다. 이렇게 제작된 10분 안팎의 웹뮤지컬은 ‘자가 격리 뮤지컬’이라고도 불린다. 여기서 나조연 역을 맡은 배우 함연지(28)는 최근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카메라를 상대역 삼아 연기하는 것이 이색적 경험이었다. 넘버와 연기를 이어 붙인 촬영과 편집기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봤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덕업일치’(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된 것)의 삶을 살아왔다. 과거 사촌언니가 붓을 잡은 모습에 반해 예원학교에 입학했고 3년 뒤 돌연 대원외고에 진학했다. 미국 뉴욕대에서 연기를 전공했다. 하고픈 게 많았지만 그에게 확고한 꿈은 뮤지컬 배우였다. 이번 작품에서도 캐릭터에 몰입하기 위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이번 배역이 공인중개사인데 뮤지컬 배경인 경기 양수리 지도를 훑으며 실제 일할 법한 부동산사무소를 상상하고 연기를 고민했어요.” 이번 작품에서 그는 다소 노출이 있는 의상도 소화했다. 가족은 항상 든든한 그의 우군. “대학 공연 때부터 훨씬 몸을 드러내고 트월킹(골반을 자극적으로 비트는 동작)까지 보신 아버지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 하세요. 뮤지컬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남편도 ‘내 눈엔 네가 천생 배우’라며 응원해주고요.” 그는 ‘오뚜기 창업주의 손녀’로 유튜브 채널에서 먼저 알려졌다. 발랄한 매력으로 호평받지만 따가운 시선도 있다. “(그 시선이) 속상해도 숨기만 하면 안 되죠. 뮤지컬로 실력을 증명하는 게 답입니다. 끝까지 버텨 대중으로부터 인정받겠습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국내 최대 교단 중 하나인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 교단의 총회장이 코로나19 상황에서 일부 교회의 대응이 잘못됐다며 사과했다. 합동교단 총회장인 소강석 목사(사진)는 3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예장합동 총회장·미래정책전략특별위원회 특별 기자회견’에서 “(코로나19 상황에) 한국 교회가 시대정신과 가치를 제시하지 못했고,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지 못했으며, 리더십을 세우지 못하는 세 가지 잘못을 했다”면서 사과했다. 소 목사는 “교회가 예배를 존중히 여기는 만큼 이웃의 생명도 존중했어야 했다.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며 현장 예배를 강행해 국민에게 거부감을 준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부 교회가 코로나19 감염의 진원지가 돼 국민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했다”고 덧붙였다. 국내 개신교계 주요 교단의 총회장이 공식 회견에서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의 뜻을 나타낸 건 처음이다. 소 목사는 경기 용인시 새에덴교회 담임목사로, 올해 9월 총회장에 취임했다. 소 목사는 “디지털 격차와 세대 간 격차 등으로 인해 젊은이들이 탈종교화할 가능성도 있다”며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불거진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미래전략본부를 만들어 해법을 찾겠다”고 밝혔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제작사 대표가 일주일 동안 연락이 되지 않아 조기 폐막을 결정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장기화로 예술인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극장, 공연장, 무대의 일자리가 사라졌고 그나마 생긴 일자리도 갑자기 없어지기 일쑤다. 지난달 26일 제작사 대표가 잠적해 일찍 막을 내린 대학로 연극판의 단면은 예술계 현실을 잘 보여준다. 이 현실은 상대적으로 무명의 배우 가수 방송인에게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이다. 무력감이 밀려오지만 예술을 위해서라면 버텨야 한다. 코로나19로 본래 일터를 떠나 손에 잡히는 대로 생계를 이어가는 배우(연극 뮤지컬), 인디밴드, 스태프 등 8명을 만났다. 볼멘소리를 꺼내기도 이들은 조심스럽다. “저희만 힘든가요. 예술인의 애환이자 숙명인가 봅니다.”● 김한 배우의 ‘코로나 하루’지난해 국립극단 시즌제 단원으로 뽑혀 매일 연습실에 가던 배우 김한(42)은 요즘 서울 마포구 집에서 경기 화성시 한 빵집으로 출근한다. 지난달 21일 오전 6시, 눈을 부비며 승용차에 올라탄 김한은 동 틀 무렵까지 1시간 20분을 달린다.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을 지날 때쯤 “여기서 얼마 전까지 공연했는데…. 11월까지 공연 스케줄이 꽉 차있었는데 줄줄이 끊겼다”며 입을 뗐다. “배우는 몸 쓰는 직업이라 교통사고 위험이 있는 장거리 운송 알바는 가급적 안할 생각이었어요.” 낮에는 빵집카페에서 일하고, 밤에는 극장에서 공공근로를 한다. 배우 활동이 아예 끊긴 건 아니다. 오디션이 가뭄에 콩 나듯 열린다. “다행히 강릉에서 촬영하는 영화 단역을 맡아서 다음주엔 오전 4시쯤 일어나야 할 것 같다”며 미소 지었다. 최근엔 충남 천안에서 마당극 공연도 했다. 오전 7시 30분, 빵집에 도착하자 하얀 근무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빵을 진열하고 포장한다. 첫 손님이 들어오자 힘차게 “어서오세요!” 외친다. 오전 10시, 빵집 건물 6층 빵공장에서 인천에 배송할 빵을 트럭에 분주히 옮겨 싣는다. 매일 경기 화성과 인천을 오가며 지점에 빵을 배달한다. 일이 많은 때는 서울, 화성, 인천, 천안을 오가느라 일주일에 2000km를 달린다. 운전대를 잡은 그는 “연기할 자리가 생기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사장님께 양해를 구해 일정을 조율하는 게 몸보다 더 힘들다”며 “마당극 공연도 사장님이 배려해주신 덕분”이라고 했다. 오전 11시를 넘겨 인천 남동구의 매장에 도착해 빵을 옮겨 놓고는 화성으로 향한다. 낮 12시 화성에서 2차 배송이 예정돼있다. 끼니를 챙길 시간도 마땅치 않다. “2차 배송도 끝나면 서울에 가서 저녁 알바도 해야 한다”는 그는 “제 미래만큼 예측조차 할 수 없는 공연계의 미래 때문에 더 힘들다”고 했다. 랜선 공연이 늘면서 배우로서의 정체성도 고민이다. “10년 후에도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요?” 오후 5시, ‘두 번째’ 직장으로 출근한다. 한 달 전부터 서울문화재단의 공공지원사업에 뽑혀 극장에서 일하고 있다. 예술인을 돕는 새 일자리다. 하루 8시간 언제 재가동할지 모르는 무대와 극장을 정비한다. 일을 마치고 침대에 누우면 다음날 오전 1시. 빼곡하게 짜인 그의 일과도 언제 갑자기 바뀔지 모른다.● “돈을 바라면 못한다는 일이지만, 그래도…”생활고는 늘 함께였다. “돈을 바라면 예술을 오래 못 한다”는 말에 수긍해왔지만 올해는 뼈아프다. 인디밴드 트레봉봉의 드러머 김하늘은 “생활고는 몸에 익었다. 관객과 대면하지 못하는 상황이 더 힘들다”고 했다. “꿈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는 7년차 뮤지컬 배우 김주왕(34)도 고됨의 연속이다. 배우들 대상으로 운동수업도 병행했지만 일이 끊기자 스크린골프장 아르바이트를 했다. 스크린골프장이 문을 닫은 뒤 지금은 동창에게 부탁해 방역업체에서 일한다. 퇴근 후엔 뮤지컬 관련 유튜브 영상을 만든다. 예술을 이어갈 방법은 유튜브가 유일하다. 소중한 무대가 간혹 열리면 무대에 굶주린 이들이 모여든다. 올 9월 열린 ‘펜타 유스스타’ 경연에는 299개 밴드가 몰렸다. 1, 2등에게만 온라인으로 열리는 ‘인천 펜타포트 음악축제’에 설 기회가 주어졌다. 경쟁률 150 대 1인. 지난해 경쟁률은 20 대 1 수준이었다. 트레봉봉 리더 성기완(53)은 “3등으로 기회는 놓쳤지만 뮤지션들의 절박함을 느꼈다”고 했다. 11년차 음향감독 김병주(32)는 요즘 넓이 90㎡ 남짓한 창고로 출근해 음향장비를 쓸고 닦고 점검한다. 그는 “장비상자에 거미줄 쳐진 거 처음 봤어요. 너무 신기해서 사진도 찍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9월부터 연말까지가 성수기지만 지금은 대출로 버틴다. 내년 2~3월이 최대 고비다. 대리운전을 시작한, 2년차 조명감독 이정수(30)는 “이건 기본”이라고 했다. 오전 4시까지 일하는 그는 오랜만에 공연 현장에 일감이 생겨 1박 2일로 충북 괴산에 다녀왔다. “집에 가면 씻고 바로 대리 뛰어야죠.” ‘뮤지션 유니온’이 9월 독립음악인 151명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올 상반기 음악활동을 통한 월 평균 수입은 지난해 같은 기간 53만 원에서 32만 원으로 줄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이지윤 인턴기자 연세대 UIC 경제학과 졸업이지윤 인턴기자 연세대 생활디자인학과 4학년}

“통장 잔고 빠지는 것보다 근육 빠지는 게 더 무서워요.” 2004년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쌍절곤을 휘두르며 근육을 뽐내던 권상우를 필두로 비, 이효리의 폭발적 인기는 몸짱 열풍을 불러왔다. 몸짱 신드롬은 육체·정신 건강의 조화를 추구한 웰빙, 힐링 바람에 차츰 스러졌다. 수년 전부터는 건강을 해칠 만큼 체중 감량에 몰입하거나 근육 불리기에만 집착하는 이를 일컫는 ‘헬창’이란 단어까지 탄생했다. 하지만 최근 ‘헬창’은 하나의 유머코드이자 ‘밈(meme·출처를 알 수 없이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특정한 문화 요소나 콘텐츠)’이 돼 음지에서 양지로 나왔다. 스스로 헬창임을 고백하며 라이프스타일을 공개하고 ‘자학 개그’ 소재로 활용해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다. 한때 비하나 멸시가 강했던 단어의 어감도 긍정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헬창들은 서로 “득근하세요”라는 덕담을 건네며 몸을 만든다. 이들의 철저한 생활수칙과 신념은 대중이 경탄하는 수준이다. ‘헬창’ 밈의 기원은 디시인사이드 등 인터넷 커뮤니티 유머 게시물이 시초다. ‘근손실’(근육이 빠지는 현상)을 극도로 경계하고 헬스 트레이닝을 최우선하는 ‘헬창 인지감수성’이 주된 유머코드다. “장례식장에 갔는데 근손실이 올까 봐 울음도 참는다”란 글에 “운구할 때 관을 들어 리프팅 훈련을 할 수 있다”는 댓글이 달린다. ‘언더아머 단속반’도 화제였다. 3대 운동(벤치프레스, 데드리프트, 스쾃)의 중량 총합이 500kg을 넘지 못하는 사람이 달라붙는 언더아머 티셔츠를 입으면 단속한다는 개그다. 미국 트레이너들 사이에서 유행한 ‘1000파운드 클럽’(약 450kg)에서 비롯됐다. “크리스마스이브에 혼자 운동한 적이 있다” “운동하는 꿈을 꾼다” “클럽보다 헬스클럽이 좋다”는 헬창 체크리스트도 인기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불러온 헬스장 운영 중단은 헬창들을 유튜브로 끌어들인 계기가 됐다. 가장 주목받은 이는 스스로 ‘타락 헬창’이라 칭하는 구독자 53만 명의 유튜브 채널 ‘핏블리’다. 전형적인 운동 콘텐츠를 소개하던 그는 9월 초부터 헬스장 운영을 중단해야 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시작한 ‘먹방’ 콘텐츠가 대박을 터뜨렸다. 피자, 치킨, 치즈볼 등 평소에 입에도 안 대던 고열량 음식을 삼키며 “이래서 회원님들이 식단 관리를 못 했구나” “이런 속세의 맛이 있는 줄 몰랐다”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타락한 그의 모습에 구독자들이 열광했고, 급기야 닭가슴살, 치즈볼 광고 촬영으로까지 이어졌다. 구독자 요청으로 제작한 한 보디빌더의 라면 먹방도 화제다. 수프를 넣지 않은 라면과 삶은 달걀 30개의 흰자를 함께 먹는 모습에 시청자들은 “반인륜적” “식욕이 사라지는 신기한 먹방” “존경스럽다”는 반응이 나왔다. 조회수는 112만 회에 달했다. ‘가짜사나이’를 기획한 유튜브 ‘피지컬갤러리’ 김계란의 ‘헬창의 삶’ 시리즈도 유명하다. 평균 조회수 200만 회에 육박하며 웹툰도 제작했다. 실내 헬스장이 문을 닫자 산, 한강, 공원 운동기구를 찾아 나서 야외 헬스장을 만들어낸 것도 이들이다. 남성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헬창은 여성들에게도 퍼지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근육질 몸매 인증 사진을 올리며 ‘근육질=남자’라는 편견을 깨고 있다. 인스타그램의 ‘#운동하는여자’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은 900만 건이 넘는다. 이 같은 헬창의 트렌드는 운동의 일상화와 밈 놀이문화가 결합된 산물이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최근 저서에서 “일상, 패션에도 운동 열풍이 스며들어 ‘헬창’이라는 단어는 어느새 표준어처럼 쓰이고 있다”며 “유튜브, SNS의 빠른 전파 속도로 인해 롤러코스터처럼 빠르게 하나의 밈으로 몰려갔다가 또 다른 밈으로 향하는 ‘롤코족’이 대세”라고 분석했다. ‘땅끄부부’ ‘말왕’ ‘흑자헬스’ 등 수십만 구독자를 가진 유튜브 채널의 성공에 컬트적 밈이 더해진 독특한 인터넷 놀이문화라는 분석도 나온다. 최근엔 코로나19로 홈트레이닝이 유행한 점도 인기에 한몫했다. 네이버, 카카오 트렌드 분석에 따르면 헬창 관련 데이터는 단어가 등장한 2018년에 비해 코로나19 이후 3∼4배 많이 검색됐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통장 잔고 빠지는 것보다 근육 빠지는 게 더 무서워요.” 바야흐로 때는 2004년,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쌍절곤을 휘두르며 근육을 뽐내던 권상우를 필두로 비, 이효리의 폭발적 인기는 얼짱에 이어 몸짱 열풍을 불러왔다. 너도 나도 몸매 가꾸기에 열을 올리던 몸짱 신드롬은 육체·정신 건강의 조화를 추구한 웰빙, 힐링 바람에 차츰 스러졌다. 수 년 전부터는 건강을 해칠 만큼 체중 감량에 몰입하거나 근육 불리기에만 집착하는 이를 일컬어 ‘헬창(중독 수준으로 헬스에 매달리는 사람)’이란 단어까지 탄생했다. 하지만 최근 ‘헬창’은 하나의 유머코드이자 ‘밈(meme·출처를 알 수 없이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특정한 문화 요소나 콘텐츠)’이 되어 음지에서 양지로 나왔다. 스스로 헬창임을 고백하며 라이프스타일을 공개하고 ‘자학 개그’ 소재로 헬창을 활용해 콘텐츠 생산 주체로 나선 것. 한때 비하나 멸시가 강했던 단어의 어감도 긍정적으로 완화돼 일반인들 사이에서 통용되기 시작했다. 서로 “득근하세요”라는 덕담을 건네며 몸을 만드는 헬창들의 철저한 생활수칙과 신념은 때때로 대중이 경탄하는 수준이다. ‘헬창’ 밈의 기원은 디시인사이드 등 인터넷 커뮤니티 유머 게시물이 시초다. ‘근손실(근육이 빠지는 현상)’을 극도로 경계하고 삶에서 헬스 트레이닝을 최우선하는 ‘헬창 인지감수성’이 주된 유머코드다. “장례식장에 갔는데 근손실이 올까봐 울음도 참는다”는 글에 “운구할 때 관을 들어 리프팅 훈련을 할 수 있다”는 댓글이 달린다. 단순덧셈을 할 때는 운동기구에 있는 쇠 바(Bar)의 무게(약 20kg)를 자동적으로 고려해 “20+20=60”이 된다는 식이다. ‘언더아머 단속반’도 화제였다. 3대 운동(벤치프레스, 데드리프트, 스쿼트)의 중량 총합이 500kg를 넘지 못하는 사람이 언더아머 의류의 달라붙는 티셔츠를 입으면 이를 단속한다는 개그다. 미국 트레이너들 사이에서 유행한 ‘1000파운드 클럽(약 450kg)’에서 비롯됐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혼자 운동한 적이 있다” “운동하는 꿈을 꾼다” “클럽보다 헬스클럽이 좋다”는 헬창 체크리스트도 인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감염증이 불러온 헬스장 운영 중단은 의도치 않게 헬창들을 유튜브로 끌어들인 계기가 됐다. 가장 주목받은 이는 스스로 ‘타락 헬창’이라는 구독자 53만 명의 유튜브 채널 ‘핏블리’다. 전형적인 운동 콘텐츠를 소개하던 그는 9월 초부터 헬스장 운영을 중단해야 했다. 이에 울며 겨자 먹기로 시작한 ‘먹방’ 콘텐츠가 대박이 났다. 피자, 치킨, 치즈볼 등 평소에 입에도 안 대던 고열량 음식을 삼키며 “이래서 회원님들이 식단관리를 못했구나” “이런 속세의 맛이 있는 줄 몰랐다”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타락해버린 그의 모습에 구독자들이 열광했고, 급기야 닭가슴살 치즈볼 등의 광고 촬영까지 이어졌다. 구독자 요청으로 제작한 한 보디빌더의 라면 먹방도 화제다. 스프를 넣지 않은 라면과 삶은 달걀 30개의 흰자를 먹는 모습에 시청자들은 “반인륜적” “식욕이 사라지는 신기한 먹방”이라거나 “존경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조회수는 약 120만 회에 달했다. ‘가짜사나이’를 방송한 유튜브 ‘피지컬갤러리’의 김계란도 유명하다. ‘헬창의 삶’ 시리즈는 평균 조회수 200만 회에 육박하며, 웹툰도 제작했다. 실내 헬스장이 문을 닫자 “근손실이 두렵다”며 산, 한강, 공원 운동기구를 찾아 나서 야외 헬스장을 만들어낸 것도 이들이다. 방송가에서도 이들은 러브콜을 받는다. 최근 SBS 예능 ‘미운 우리 새끼’에 출연한 김종국, 박준형, 김계란이 시종일관 서로의 운동 얘기에 공감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비싼 옷은 필요 없다. 반발, 반바지만 있으면 된다”거나 “디즈니랜드보다 국가대표 트레이닝센터가 좋다”는 고백이 이어졌다. 남성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헬창은 여성들 사이에서도 퍼지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근육질 몸매 인증 사진을 올리며 ‘근육질=남자’라는 편견을 깨고 있다. 인스타그램의 ‘#운동하는여자’ 해쉬태그를 단 게시물은 900만 건이 넘는다. 이 같은 헬창의 트렌드는 운동의 일상화와 밈 놀이문화가 결합된 산물이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최근 저서에서 “일상, 패션에도 운동 열풍이 스며들어 ‘헬창’이라는 단어는 어느새 표준어처럼 쓰이고 있다”고 분석했으며 “유튜브, SNS의 빠른 전파 속도로 인해 롤러코스터처럼 빠르게 하나의 밈으로 몰려갔다가 또 다른 밈으로 향하는 ‘롤코족’이 대세”라고 분석했다. ‘땅끄부부’ ‘말왕’ ‘흑자헬스’ 등 수십만 구독자를 가진 유튜브 채널의 성공에 컬트적 밈이 더해진 독특한 인터넷 놀이문화라는 분석도 나온다. 최근엔 코로나19로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홈트레이닝이 유행이 된 점도 인기에 한몫했다. 실제 네이버, 카카오 트렌드 분석에 따르면, 헬창 관련 데이터는 단어가 대중에게 쓰이기 시작하던 2018년에 비해 코로나19 이후 3~4배 이상 많이 검색됐다. 헬창 열풍에서 비롯된 ‘덤벨 경제’의 성장에 유통업계도 반응 중이다. 프로틴이 함유된 간식 박스, 프로틴 함유 아이스크림, 요구르트, 커피, 베이글 등이 연달아 출시되고 있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 장기화로 건강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졌다”며 “지난해 500억 원 수준이던 단백질 관련 식품 시장 규모는 올해 1000억 원 수준으로 커질 전망이며 업체 간 신제품 경쟁도 더 치열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연극 ‘신의 아그네스’에 화려한 리빙스턴 박사가 나타났다. 샛노란 금발에 깊고 진한 눈빛, 주머니에 한 손을 꽂은 채 다른 손에 쥔 담배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캐한 연기까지. 시종일관 칼처럼 냉철한 이성으로 무장한 그는 보는 이의 감정까지 압도한다. ‘맘마미아’의 ‘도나’,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등 뮤지컬, 드라마를 오가던 박해미(56)가 7일 개막하는 신의 아그네스로 돌아왔다. 작품은 갓 태어난 자신의 아기를 숨지게 한 수녀 아그네스(이지혜), 그녀를 보살피려는 원장 수녀(이수미)와 아그네스를 구하려는 의사 닥터 리빙스턴 등 3인이 펼치는 심리극이다. 뉴욕의 한 수녀원에서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했으며 신과 인간, 종교와 행복에 대해 질문한다. 박해미의 연극 무대는 1998년 ‘햄릿’ 이후 22년 만이다. 최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그는 “종교에 대한 이 작품을 연습하면서 제 삶의 종교는 곧 무대였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이화여대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1984년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로 데뷔한 그와 연극의 조합은 다소 낯설다. 그는 “뮤지컬 넘버의 멜로디, 가사에 기대어 연기하는 게 익숙하다. 어마어마한 대사량과 연기만으로 넓은 극장을 채우는 작품이라 꾀를 부릴 수 없었다”면서도 “나와의 마지막 싸움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신의 아그네스는 1982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처음 무대에 오른 후 ‘여배우의 에쿠우스’로 불린다. 국내에서는 1983년 초연했다. 박해미는 “‘대학로 우량주’들만 출연하던 명작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실제 고(故) 윤소정을 비롯해 윤석화 박정자 손숙 신애라 김혜수 전미도 등 쟁쟁한 배우들이 이 작품을 거쳤다. 닥터 리빙스턴은 과학과 이성을 상징하는 인물. 그는 “다른 이의 트라우마 극복을 돕는 강한 여자다. 겉은 차가워 보여도 인간적인 면을 가진 게 저랑 닮았다”고 했다. 다만 흡연 연기만큼은 고역이다. 집착, 고뇌를 상징하는 담배는 극 전개에 필수다. “평생 멀리한 담배를 손으로 쥐고 연기를 머금다가 뿜어내는 게 어렵다”며 웃었다. 작품은 여성극으로서 의미도 깊다. 그는 “여성들이 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고통당할 수밖에 없는지 다룬다. 여성 억압은 여전히 해결이 안 된 문제 같다”고 했다. 몇 해 전 가족 문제로 경제적, 정신적으로 곤두박질쳤던 그는 지난해 뮤지컬 ‘쏘 왓’ 총감독으로 복귀했다. ‘해미뮤지컬컴퍼니’ 대표인 그는 시종일관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시트콤 제작도 준비 중이다. 그는 종종 연출가들에게 “우는 연기 좀 하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할 만큼 “모든 작품은 해피엔딩이어야 한다”는 지론이 확고하다. 이번 작품에서는 윤우영 연출가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한바탕 제대로 놀 수 있는 무대를 부탁해요.” 7∼29일.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4만∼8만 원. 14세 이상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다?’ 어렸을 적부터 귀에 박히듯 들어오며, 인류의 우수성을 공인하는 듯한 이 명제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책에 따르면 이는 반드시 참일 수 없다. 인류는 가장 우수한 개체도 아니며, 가장 진화한 종도 아니라는 것. 일례로 인류의 허파는 조류의 허파 능력을 따라갈 수 없고, 직립보행 진화는 심장병, 난산(難産)과 요통을 불러왔다. 침팬지의 길쭉한 손 모양이 인간의 손 모양으로 진화한 게 아니라, 인간의 손에서 침팬지의 손으로 진화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도 소개된다. 분자고생물학, 동물의 골격 진화를 연구한 저자는 결국 책에서 인간 역시 미숙하고 불완전한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진화는 전진도 하고 후진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철저히 자연선택 진화론에 입각해 여러 가지 진화 이야기를 소개한다. 자원이 한정된 지구에 생명체가 사는 것을 입시에 비유했다. 당연히 생존경쟁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 필수가 됐다. 책은 생물학이나 진화론의 문외한이 보기에도 어렵지 않다. 복잡한 수식과 설명보다는 간결한 문장, 가설, 예시로 풀어냈다. 다양한 사례를 소개하다 갈래가 여기저기로 뻗어 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독자에게 진화의 기로에 선 한 생명체의 무수한 선택 과정과 알고리즘을 보여주고 있다. 인류가 밟아온 진화의 길이 최고라는 허상에서 벗어나게 해준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문화재청은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 보유자로 김수연 씨(72)를, 적벽가 보유자로 김일구 씨(80)와 윤진철 씨(55)를 인정 예고했다고 30일 밝혔다. 김수연 씨는 고 박초월 보유자에게 수궁가를 배웠다. 화려한 시김새(꾸밈음)와 깊은 성음이 특징이며, 크고 안정된 소리를 구사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일구 씨는 고 박봉술 보유자에게 적벽가를 배웠다. 1992년부터 적벽가 전수교육조교로 활동하고 있다. 윤진철 씨는 16세 때 전국판소리신인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고 정권진 보유자에게 적벽가와 심청가 등을 배웠다. 문화재청은 예고기간 30일 동안 의견을 수렴한 뒤 무형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결정할 예정이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한 달 동안 해변으로 퇴근합니다.” ‘집-회사’만 반복하던 출퇴근 공식에 ‘해변’을 더해 집-회사-해변-집이 된다면? 코로나19로 재택근무가 확산하면서 직장인들의 국내 ‘한 달 살기’가 큰 인기다. 코로나19 이전 한 달 살기는 태국 방콕, 치앙마이, 베트남 다낭, 프랑스 파리, 싱가포르 등 해외 유명 관광지나 국내에선 제주도를 중심으로 유행했다. 보통 휴직, 퇴직 또는 장기 휴가를 활용해 대학생이나 퇴직자, 은퇴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에 가까웠다. 하지만 최근 비대면 근무 확산으로 업무를 하면서도 국내 여러 중소도시를 거점으로 한 달 살기가 가능해졌다. 대도시를 벗어나 즐길 수 있는 ‘슬로 라이프’가 한 달 살기의 장점으로 꼽힌다. 8년 차 출판사 편집자인 안유정 씨(36)는 최근까지 집인 서울을 벗어나 강원 강릉시에서 지냈다.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집에서만 처박혀 일하기 싫다”는 생각이 어느 날 문득 머리를 스쳤다. 실제로 업무 효율도 나날이 떨어지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 일을 이어가야겠다고 막연히 생각하다 강릉을 찾았다. 시내에 한 달간 머물 방을 얻었고 매일 공유 오피스로 출근해 원격 근무를 시작했다. 일과는 이전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오전 8시 반쯤 일어나 개울을 따라 걷다 다리를 건너 공유오피스까지 이어진 1.5km 길을 걸어서 출근한다.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에는 주변 관광지를 돌아보거나 주로 사무실 근처 해변을 찾았다. 주말에는 동해안 일대를 편리하게 구경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안 씨는 “직장과 집이 있는 서울을 벗어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아무리 바빠도 지인, 업무 관계자가 미팅을 요청할 때마다 만나야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을 놓지 않으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업무 효율도 늘었다”고 했다. 그는 한 달 살기 후 매일 적어둔 일기를 묶어 책도 발간했다. 서울에 있는 금융회사에서 3년째 근무 중인 김모 씨(27)에게 원격 근무는 코로나19 이전까지 꿈도 꾸지 못했던 일상이다. 회사에서 노트북을 지급하며 재택근무를 권장했다. 김 씨는 “특정일에는 회사에 가야 하기 때문에 일주일, 며칠씩 강원도 공유오피스에서 근무한다. 사무실 개념이기 때문에 회사만큼 업무에 최적화되고 탁 트여 있는 주변 자연환경 덕분에 업무 효율도 높아진다”고 말했다. 강릉에서 공유오피스 ‘파도살롱’을 운영하는 최지백 대표는 “올해 고객은 한 달에 30명이 넘어 지난해보다 두 배 이상 늘었다”며 “서울 경기 지역에서 찾아오는 30, 40대 직장인이 많다”고 했다. 정보기술(IT) 개발자, 디자이너, 프리랜서에 국한됐던 고객의 업종은 점차 일반 기업 직장인으로 다양화하는 추세다. 지방자치단체들도 국내 한 달 살기, 일주일 살기 열풍을 탄 ‘디지털 노마드’ 직장인 모시기에 힘쓰고 있다. 전남, 전북, 경남 등에서도 시골 한 달 살기, 폐가 한 달 살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내놨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 공모사업으로 선정돼 참가자를 모집한 ‘강진에서 일주일 살기’에는 약 1000명이 몰렸다. 여행 및 액티비티 플랫폼 ‘와그’의 선우윤 대표는 “장기 숙박을 하며 여유를 즐기고 일도 하는 2인 이하 규모의 한 달 살기가 늘었다. 기존 유명 관광지인 부산, 제주, 강원도를 비롯해 여러 지역 도심 인근 소도시까지 한 달 살기 상품 종류를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한국 연극의 산실, 산울림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1969년 창단한 극단 산울림의 역사가 70분으로 압축돼 연극 ‘35년의 울림’으로 재탄생했다. 올해는 소극장 산울림이 문을 연 지 35주년이 된다. 당초 3월 막을 올릴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여파로 7개월이 지나서야 관객을 만났다. 사실 70분은 극단 산울림의 역사를 담아내기엔 한참 부족하다. 산울림의 ‘산파’ 임영웅 연출가의 아들인 임수현 연출가(서울여대 불문과 교수)는 극단의 대표작 7편의 명장면과 명대사를 추려내 엮었다.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 ‘고도를 기다리며’ ‘이방인’, 여성극 ‘그 여자’ ‘딸에게 보내는 편지’, 창작극 ‘카페 신파’ ‘챙’이 등장한다. ‘35년의 울림’에는 배우 박윤석(44) 임정은(42) 왕보인(38)이 과거 이 작품들을 빛낸 정동환 박정자 손숙 윤석화 강부자 전무송 이호재 등의 열연을 이어받아 몸을 불사르고 있다. 최근 서울 마포구 소극장 산울림에서 만난 이 세 배우는 “연극인들의 안부인사가 ‘공연 올라갔어?’인 시대, 산울림의 역사를 기억하고 관객과 만날 수 있어 우린 행운아”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 외에 산울림과 연이 깊은 배우 안석환은 ‘소리’로 극에 특별출연한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상우도 무대에 올라 라이브 연주를 선보이며 유려함을 더했다. 산울림의 대표 브랜드가 된 ‘고도를 기다리며’ ‘이방인’에서 열연한 박윤석은 “무대에 서니 바닥, 벽돌 한 장 한 장, 조명장치가 제게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 관객, 배우뿐만 아니라 이 공간의 이야기도 보여주겠다”고 했다. 산울림 고전극장에서 연기한 왕보인은 “추억을 불러일으키자는 취지도 있지만 마지막 대사 ‘그럼 갈까?’처럼 미래로 도약하는 의미도 있다. 관객과 미래를 함께 그려보고 싶다”고 했다. 산울림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시대를 앞서간 여성극이다. ‘산울림 편지콘서트’에 출연했던 임정은은 “대본을 보며 과거 여성상에 공감하고 연민의 감정도 느꼈다. 작품을 제가 이해하고 탐구한 대로 선배 여배우들 연기에 ‘임정은식’ 연기를 입혔다”고 설명했다. 산울림을 거쳐 간 배우의 이름만 나열해도 한국의 연극사를 읽어낼 수 있다. 이번 공연의 세 배우에게 이들은 오마주(경의) 대상이자 도전 과제이기도 했다. “단순히 과거 작품의 재현일 수도 있고, 재해석이 될 수도 있다. 선배들이 이 대본과 만났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떠올려 봤다. 세 배우가 새롭게 그려본 산울림의 35년을 즐겨주시기 바란다.”(박윤석) 임 연출은 “관객이 원하는 작품을 다 보여드리겠다는 생각으로 호기를 부려봤다. 단순히 장면만 이어붙인 게 아니라 한 작품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해 산울림의 역사를 조명했다”고 말했다. 11월 1일까지, 소극장 산울림. 전석 4만 원. 8세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암호의 세계로 빠져들기 전 간단한 퀴즈 하나. “4334 4424421514(사진①). M AERRE KS LSQI(사진②)”의 뜻은? (정답은 본문 말미에.)사진①은 그리스의 역사가 폴리비오스, 사진②는 로마의 카이사르가 주로 썼던 암호법이다. 표를 보면 비교적 쉽게 해독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주어진 표가 없다면? 정체불명의 알파벳과 숫자의 나열이 암호인지 아닌지조차 불확실하다면? 읽어내기란 꽤나 골치 아픈 일이 될 것이다. 암호에 능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적에게 메시지를 노출하지 않기 위해 섬뜩한 방법까지 고안했다. 삭발한 노예의 두피에 암호문을 문신으로 새겼고, 머리가 풍성하게 자란 노예를 직접 암호 수신자에게 보냈다. 수신자는 노예의 머리를 다시 밀어버리고 암호문을 읽었다. 암호는 은밀하게 탄생했고 집요하게 해독돼왔다. 고대 이집트 문서부터 오늘날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디지털 코드, 사이퍼(Ciphers·암호문)에 이르기까지 암호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짚은 책이다. 암호, 과학기술에 정통한 저널리스트 스티븐 핀콕, 코드 해독에 관심이 많은 작가 마크 프러리는 “스릴러 작가가 꾸며낼 수 있는 그 어떤 상황보다도 기묘”한 암호학에 천착했다. 암호 개발과 해독이 역사의 흐름을 어떻게 바꿔왔는지 파헤치며, 큼직큼직한 삽화와 함께 암호 이야기를 매혹적으로 풀어냈다. 암호 해석에 대한 최초 기록은 9세기 아랍 과학자 알 킨디의 ‘암호문 해독에 관한 원고’다. 암호는 비밀스럽게 통용됐지만 본격적으로 해독법이 언급된 건 이때가 처음이다. 유럽에서 암호문은 대개 수도원의 전유물로 남아 널리 퍼지진 못했다. 15세기가 돼서야 남유럽을 중심으로 텍스트를 뒤섞는 암호 형태인 ‘노멘클레이터(nomenclator)’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전쟁 중 암호문은 더욱 긴요했다. 적의 암호를 빠르게 해독할수록 치명타를 안길 수 있기 때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에니그마(수수께끼)’ 해독에 광적으로 집착했다. 런던 교외에 세워진 ‘암호학교’에는 전쟁이 임박하자 100여 명이 적군의 에니그마 분석에 돌입했다. 전쟁 막바지, 인원은 9000명까지 불어났으며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메시지가 낱낱이 분석됐다. 유명한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암호 천재 앨런 튜링도 이곳에서 일했다. 스파이, 정치 지도자 등에게 전해지는 메시지도 암호화는 필수였다. 암호 경쟁에서의 우위는 곧 승리를 의미했다. 암호를 만들고, 파헤치고픈 욕망 때문에 문학작품을 비롯한 스토리텔링에서 암호는 없어서는 안 될 소재다. 저자들은 암호가 본능적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강력하게 사로잡는” 힘이 있다고 봤다. 소설 ‘다빈치코드’에서 기독교에 관한 숨은 코드는 전개의 핵심이다. 오늘날 영화광들이 화면 곳곳의 미장센에 감독이 숨겨둔 메타포를 찾아내 해석하는 재미도 일종의 암호 해석의 쾌감이라 할 수 있겠다. 책에 등장하는 몇몇 개념 설명은 꽤나 복잡해 이해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언급된 사례들을 보면 우리가 스파이도 아니고, 암호 해석이 도대체 언제적 얘기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린 이미 인터넷뱅킹, 알고리즘, 비트코인 같은 암호에 둘러싸여 산다. 좀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보자. 누구나 친한 사람에게만 혹은 일기장에만 남기고픈 내밀한 메시지가 하나쯤은 있다. 예를 들어 서두에 적어놓은 암호문처럼 말이다. 정답은 “SO TIRED. I WANNA GO HOME(너무 피곤하다. 집에 가고 싶다).” 회사 상사 앞에서 하기 힘든 말도 암호문으로 전하면, 실수할 일도 적고 더 그럴 듯해 보이지 않을까. 이처럼 암호 발전의 역사는 내면의 목소리를 점점 더 세련되게 전하고픈 인간 욕망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겠다. 1123, 24 52113344 4434 2234 23343215.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눈물이 없는 저를 술자리에서 혼자 울게 만든 게 ‘베르테르’입니다.” 케이팝 아이돌의 ‘꿀 성대’가 짝사랑의 아픔을 노래한다. 콘서트에서 팬의 흥을 폭발시키던 목소리는 극장에서 객석의 눈물을 자아내고 있다. 아이돌 최상급 가창력과 섬세한 연기, 규현(32)은 올가을 베르테르가 됐다. 슈퍼주니어 15년 차, 뮤지컬 배우 10년 차. 뮤지컬 ‘베르테르’ 20주년 기념 공연에 출연하는 ‘규베르’(규현+베르테르) 규현을 20일 서울 강남구 광림BBCH홀에서 만났다. 규현은 “자체 팬 투표에서도 다시 보고픈 작품 1위로 뽑혔다. 20주년 공연은 무조건 하고 싶었다”고 했다. 예능, 뮤지컬, MC, 드라마와 웹툰 OST 등 분야를 넘나드는 대표 올라운드 플레이어 규현은 뮤지컬 안착에 성공한 몇 안 되는 아이돌이다. 호소력 짙은 가창력을 주무기로 2010년 뮤지컬 ‘삼총사’부터 올 초 ‘웃는 남자’까지 9개 작품을 거쳤다. 최근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그를 두고 일부 팬은 “뮤지컬 캐릭터에 몰입이 안 될까 우려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며 호평했다. 여인 ‘롯데’만을 그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의 주인공 베르테르의 감성은 발라드 가수 규현과 찰떡이다. “반항하지 않고 말 잘 듣는 착한 배우”라 자처하는 그는 2015년 첫 출연보다 캐릭터 완성도를 높였다. 그런데 친구들은 그의 베르테르 출연을 마뜩지 않아 했단다. “캐릭터에 너무 몰입하다 보니 친구들과 술 마시다 베르테르가 슬퍼져서 혼자 울었다. 극중 술에 취한 채 넋두리하는 ‘돌부리 장면’을 갑자기 연기하거나, 새벽에 자다 벌떡 일어나 ‘롯데!’를 외치니 친구들이 힘들어했던 것 같다.” 뮤지컬은 기 세고 개성 강한 슈퍼주니어 멤버 사이에서 돋보이려는 생존 수단이었다. 그는 “데뷔 초창기 슈퍼주니어 말고는 스케줄이 없었다. 알아보는 사람도 없어서 지하철을 타고 매일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에 연습하러 다니던 시절이 지금의 자양분이 됐다”고 했다. ‘아이돌 출신’이란 꼬리표와도 싸웠다. 뮤지컬 ‘삼총사’에 함께 출연한 배우 김무열은 그에게 친절했지만 엄기준은 유독 냉정했다. 하지만 몇 년씩 묵묵히 무대에 오르는 규현을 본 엄기준은 “계속 뮤지컬 할 거지?”라고 묻더니 그때부터 애정을 쏟았다. “전문적으로 연기를 배운 적도 없고 여전히 일반인은 ‘규현이 뮤지컬을?’이라며 의문부호를 붙입니다.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예능과 공연장을 오가는 중에도 본업은 놓지 않았다. 8일 발매한 싱글 앨범 ‘내 마음을 누르는 일’의 감성과 가사는 베르테르와 묘하게 닮았다. 함께 공연하는 배우 유연석을 섭외해 뮤직비디오 주인공으로 캐스팅하는 성과도 얻었다. 규현은 “일부러 기분 좋게 밥 먹을 때를 노렸다. 제가 아끼던 신곡을 들려주면서 뮤비 출연을 요청했더니 ‘좋다’고 하더라”며 웃었다. 그는 지금 새 1인 예능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와 ‘신서유기8’에 나온다. 유튜브 ‘규티비’와 게임방송 플랫폼인 트위치 채널도 개설했다. 골수팬들은 “노출이 잦아 ‘덕질’ 떡밥이 너무 많다”며 행복한 고민을 늘어놓는다. 그는 “어떤 도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다만 너무 앞만 보고 달리는 건 아닌지 돌아보고 있다”고 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라디오스타’ MC로 복귀하지 않은 것에 대해 “저를 성장시킨 방송이지만 캐릭터 설정상 누군가를 희화화해야 한다는 압박이 컸다”고 설명했다. ‘가늘고 길게.’ 소박하면서도 현실적인 그의 목표다. “거대한 한 획을 긋고 싶지는 않아요. 좋아해주시는 팬들 곁에 머물면서 가늘고 길게 살아남고 싶습니다. 앞으로 15년은 더 해야 하지 않겠어요. 하하.” 어느덧 ‘열성 숭배자’보다 ‘동반자’가 된 팬들에게 그는 당부의 말을 남겼다. “요즘 시국에 ‘퇴근길’(공연을 마친 뒤 공연장 뒷문이나 주차장 가는 통로에 진을 친 팬들이 배우와 인사하고 이야기하는 것)에는 오시지 말아달라고 말씀드렸어요. 팬들도 저랑 오래 같이 가야죠.” 11월 1일까지, 광림BBCH홀. 6만∼14만 원. 8세 관람가.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전 세계 극장이 멈춘 지금, 한국에서 뮤지컬 ‘캣츠’가 무대를 꿋꿋이 지켜갈 수 있어 정말 고마워요!”(조아나 암필) 1981년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뮤지컬 ‘캣츠’가 처음 공연한 지 40년. 그간 30개국을 돌며 열리던 ‘젤리클 고양이 축제’는 지금은 한국에서만 명맥을 잇고 있다. 12월 6일까지 서울 송파구 샤롯데씨어터에서 열리는 ‘캣츠’ 40주년 내한공연은 코로나19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무대에 오르는 오리지널 프로덕션의 작품이다. 20일 샤롯데씨어터에서 만난 ‘캣츠’의 주역 3인방 브래드 리틀(올드 듀터러노미 역), 조아나 암필(그리자벨라 역), 댄 파트리지(럼 텀 터거 역)는 “팬데믹으로 인한 중단 없이 40년 동안 지켜온 역사적, 전설적 공연에 참여할 수 있어 영광”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어 “아무도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철저한 방역수칙을 지키며 용기를 내 공연장을 찾아주시는 관객들 덕분에 가능했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이들이 인터뷰 도중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는 ‘러키(Lucky)’였다. ‘캣츠’ 공연이 한국에서 열린다는 소식이 미국, 영국에 있는 다른 뮤지컬 배우들에게 전해지며 “너는 행운아”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고 했다. 파트리지는 “우린 원래 하던 일을 하고 있을 뿐이지만 요즘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있음을 깨닫는다. 특히 사회적 거리 두기가 2.5단계까지 올라갔을 때 걱정이 많았는데 결국 한국이 해냈다”며 기뻐했다. ‘캣츠’가 계속 열릴 수 있었던 건 예술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방역수칙을 지킨 다양한 묘수 덕분이다. 특히 배우들이 객석을 누비는 작품 특성상 새롭게 고안한 ‘메이크업 마스크’는 큰 화제가 됐다. 브래드 리틀은 “마스크를 썼을 때 제 표정이 관객에게 안 보이는 점은 아쉽지만 저는 계속 미소를 유지하고 있다. 전염병으로 인한 어려움을 예술로 승화한 점이 정말 놀랍다”고 했다. 배우들에게 ‘캣츠’는 ‘철인 3종 경기’라 불릴 만큼 고양이를 모사한 고난도 안무, 노래, 분장으로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대표 넘버인 ‘메모리’를 소화하는 암필은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지만 고양이나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며 끝없이 연구하고 있다”며 “짧은 시간 동안 무대에 올라 깊은 이야기를 전하는 배역이기 때문에 관객을 빠르게 매료시키려 노력한다”고 했다. 파트리지는 “모든 동작과 안무를 고양이의 마인드에 맞게 해보려 노력한다. 저희 도전을 즐기고 지켜봐 달라”고 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