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2017년 한국계 작가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를 읽었을 때 테리사 강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 소설을 TV쇼로 만드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겠다.” 그녀는 2003년부터 미국 굴지의 에이전시 WME에서 일한 베테랑 에이전트였다.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감독 알폰소 쿠아론, 데이미언 샤젤 등과 일했고 폭발적 인기를 얻은 HBO의 TV시리즈 ‘왕좌의 게임’도 그녀의 손을 거쳤다. 그러나 ‘파친코’는 한국인 주연에 1910~1980년대를 아우르는 시대극인데다 배경도 부산 영도와 일본, 미국 등 스케일이 거대했다. 그만큼 많은 제작비가 필요했다. 이 때는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자막의) 1인치 장벽을 뛰어 넘어 달라”고 미국 관객들에게 당부하기 훨씬 더 전이었다. 그럼에도 강 씨는 이 소설이 나아갈 길이 있다고 믿었다. 지난달 25일 애플TV플러스로 공개된 ‘파친코’의 공동 총괄 제작자 테리사 강을 1일 화상 인터뷰로 만났다.○ 부모님을 위해 만든 시리즈 강 씨는 ‘파친코’를 읽고 떠올린 자신의 가족을 위해 이 시리즈를 만들어 내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소설 ‘파친코’는 일제강점기 부산을 떠나 일본에 정착하고, 또 다시 미국으로 이주하는 한국인 4대의 고난과 역경을 그린다. 그는 “‘파친코’의 이야기가 정말 아름다웠고, 1970년대 후반 미국으로 이주해 온 부모님을 생각하게 만들었다”며 “부모님을 위해서 이 책으로 무언가를 꼭 하고 싶었다”고 했다. “부모님이 나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해주셨지만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순 없었어요. 조부모님이 일제 강점기 많은 고난을 겪으셨다는 것을 알지만, 그분들은 제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셔서 만날 기회가 없었죠.” 그의 아버지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에서 비디오 대여 체인 ‘옴니 비디오’를 설립하고 운영했다.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2시간 씩 버스를 타고 부산에 가 영화를 볼 정도로 마니아였다는 그는 딸과 함께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즐겨 봤다. 강 씨에게 어떤 드라마와 영화를 봤느냐고 묻자 줄줄이 리스트가 나왔다. “모래시계는 아버지가 정말 재밌게 봤어요. 또 아버지가 박찬욱 감독의 팬이었기 때문에 ‘올드보이’가 나오자마자 저에게 보라고 했습니다. 그 때 제가 고등학생이거나 대학생밖에 안됐을 텐데 말이죠. 보고 나서 정말 깜짝 놀라고, 한국의 영화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리고 ‘살인의 추억’, ‘쉬리’, ‘달콤한 인생’, ‘놈놈놈’….” 아버지는 딸이 어린 시절 주말이나 여름 휴가철에 비디오가게에서 일하면 하루 20달러씩을 주었다. 강 씨는 “당시에는 좋아하는 영화를 보면서 돈도 번다니 이게 무슨 일이야! 하고 기뻐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너무 좋은 조건으로 일을 시켜주셨다는 걸 깨달았어요”하고 웃었다. 이런 부모님 밑에서 자라 자신이 할리우드에서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기모노 입고 유치원 졸업사진 찍은 사연 그녀가 ‘파친코’를 만들기로 한 또 다른 이유는 한국의 역사를 세계에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강 씨는 “미국에서 자라면서 아무도 한국에 대해 잘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유치원 시절을 이야기했다. 자신이 유일한 아시아인인 유치원에 다녔던 그녀는 졸업 사진에서 기모노를 입고 있다. 당시 전통 복장을 입고 사진을 찍는 것이 규칙이었는데, 선생님들이 한국을 몰라 그녀를 일본인이라 생각하고 기모노를 입혔다는 것이다.“그 때의 기억이 오래도록 남았어요. ‘파친코’에도 미국에서 아시아인을 만나면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라고 묻는다는 대사가 나와요. 그런데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 했다는 역사는 더더욱 아는 사람이 없죠. 저는 세계 사람들에게 한국의 역사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또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에서 아시아계 미국인과 인류학을 공부한 그는 대학 때 자이니치의 역사를 조사한 경험도 있었다. 한국인이 일본에 살고 있다는 것을 몰랐고, 그들이 온갖 차별을 겪는다는 것도 몰랐다. 자이니치가 핍박받는 현실을 알게 되고 그것을 기억했던 그녀가 ‘파친코’를 알아본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선자는 내가 해야겠다”고 말한 윤여정 강 씨는 먼저 ‘더 테러’와 ‘더 위스퍼스’ 등을 제작한 한국계 작가 수 휴에게 책 ‘파친코’를 건넸다. 이전 드라마 제작을 마치고 오는 비행기에서 ‘파친코’를 읽은 휴는 ‘역사를 딛고 선 느낌’을 받았지만,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작품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강 씨는 “또 다른 한국계가 당신의 위치에 오르려면 7~10년은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지금 이 이야기를 해야 하고 당신이 적임자”라며 설득했다. 제작사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야기 자체에는 흥미를 갖는 곳은 많았지만, 고액의 제작비를 투입하려는 곳은 많지 않았다. 제작진이 생각한 예산은 영국 왕실을 그린 대하드라마 ‘더 크라운’ 정도의 스케일이었다. 이것을 타협하지 않은 제작진은 결국 애플TV플러스와 함께 제작비 약 1000억 원을 투입한 8부작 드라마를 만들게 됐다. ‘파친코’를 연출한 2명의 감독 코고나다, 저스틴 전 또한 한국계이다. 또 출연진 650명 중 95%가 아시아인. 제작진이 영어로 대본을 쓰면 한국과 일본에서 번역해, 다시 감수하고 또 다시 이것을 번역하는 것은 물론 자막도 최소 3개의 언어가 필요한 엄청난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강 씨는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이야기에 개인적인 감동을 느낀 경험은 처음이라고 했다. “수 휴를 비롯한 제작자들이 모두 이 쇼를 좋아했지만 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며 “윤여정 선생님과는 이틀 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대본을 읽고 ‘선자는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어요. 선자의 심정을 자신이 이해한다고 느꼈기 때문이죠. 또 오디션을 통해 파친코에 합류한 배우 이민호 씨는 한수라는 캐릭터를 더 입체적으로 살려주었는데, 한국의 유명 배우가 우리 이야기에 공감한다는 것이 정말 고무적이었죠.” ‘파친코’가 마침내 세상에 나온 뒤에는 한국인뿐 아니라 다양한 국적의 시청자로부터 공감의 메시지를 받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파친코는 왕이나 여왕, 대통령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에서 생존하는 사람들(people)의 이야기입니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를 위해 희생하고, 또 그 다음 세대로 나아가는 이야기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죠. 유럽을 비롯해 여러 국가 출신의 친구들이 ‘나의 엄마와 할머니도 이런 삶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제작진도 모든 가족에겐 ‘선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거든요. 지극히 한국적인 이야기가 보편성을 갖게 됐다는 사실이 매우 기뻤습니다.”○ 영화 ‘기생충’ 기발함에 깜짝 놀란 미국 제작자들 ‘나의 부모님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강조한 강 씨에게 그가 본 한국 문화는 어떤 특성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우선 어릴 때부터 봤던 영화는 물론 김기영 이창동 박찬욱 김지운 김성수 연상호 황동혁 류승완 이경미 감독 등의 팬이라고 털어놨다. 또 BTS뿐 아니라 H.O.T., 1TYM, 쿨, 2NE1, 블랙핑크, 박효신, 크러시 등 케이팝 음악을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도 듣고 있다며, 한국 문화에 자신감이 있었다고 했다.“한국에는 많은 역경과 고난을 거치면서 생겨난 고유의 ‘한’과 ‘흥’이 있어요. 저에게 영화 제작은 이 ‘한’과 ‘흥’을 표현하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한국인들이 정말 노래를 잘 하잖아요. 미국의 팝 음악과는 감성이 다르죠. 저는 한국 영화와 음악의 그런 부분을 정말 존경합니다.”그래서 ‘오징어게임’을 비롯해 최근 한국 컨텐츠가 사랑받았을 때, 그것이 시간문제라고는 생각했지만 실제로 이루어져 기쁘고 행복했다고 말했다. 그는 “나의 부모님은 항상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했고, 올림픽 경기에서 미국과 한국이 싸울 때 늘 한국을 응원했다”며 웃었다. 또 영화 ‘기생충’이 개봉했을 때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많은 작가, 감독, 배우들이 곳곳에서 상영회를 열어 이 영화를 보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할리우드 업계 사람들은 “이런 아이디어를 생각할 수 있다니 놀랍다”고 했다. 그러면서 강 씨는 글로벌 스트리밍 플랫폼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고 있다고 봤다. 그는 “어릴 적에는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려면 그것을 잘 아는 사람을 찾아가야 했다”며 “지금은 누구나 핸드폰으로 손쉽게 볼 수 있으니 사람들이 한국 컨텐츠를 더 보고 싶어 할 것”이라고 했다.또 ‘파친코’를 통해 더 많은 기회의 장이 열리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파친코가 다양성의 문을 열 수 있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의 재능 있는 감독과 작가들의 이야기에 더 과감한 투자가 이뤄지길 바랍니다. 한국의 창작자들에게 스스로를 믿으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열정’은 전염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갖고 있는 열정이 점차 사람들을 타고 번져나가면서 그것은 현실이 되니까요. 그러니 당신의 본능, 당신의 직관을 믿으세요.”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지구에서는 문제가 있지만, 궤도에 함께 있는 우리는 한 팀입니다.” 러시아 우주비행사 안톤 시카플레로프(50)는 29일(현지 시간) 미국 항공우주국(NASA) TV로 중계된 국제우주정거장(ISS) 지휘권 이양식에서 ISS 열쇠를 미 우주비행사 토머스 마시번(62)에게 넘기며 이렇게 말했다. 지구에서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와 미국이 대립하고 있지만 우주에서는 양국 평화와 우정이 지속되는 분위기다. 시카플레로프는 지난해 10월 5일 ISS에 도착해 그해 11월 6일부터 ISS 사령관을 맡았다. 지구로 떠나기 하루 전인 29일 자신이 갖고 있던 열쇠를 후임 사령관에게 넘겨준 것이다. 다음 달 말 지구로 귀환할 예정인 마시번은 다시 러시아 우주비행사 올레크 아르테미예프에게 지휘권을 넘기게 된다. 시카플레로프를 태우고 30일 지구로 돌아온 러시아 우주선 소유스 MS-19호에는 미국인 우주비행사 마크 밴드 하이(56)도 함께했다. 미 육군 대령 출신인 밴드 하이는 미국인 ISS 최장 체류 기록을 세웠다. 그는 지난해 4월 ISS에 도착해 355일 동안 머물며 임무를 수행했다. 이 기간 지구를 5680바퀴 돌며 2억4000만 km를 비행했다. 이전 미국인 최장 체류 기록은 전 우주비행사 스콧 켈리(58)가 세운 340일이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지구에서는 문제가 있지만, 궤도에 함께 있는 우리는 한 팀입니다.” 러시아 우주비행사 안톤 슈카플레로프(50)는 29일(현지 시간) 미국 항공우주국(NASA) TV로 중계된 국제우주정거장(ISS) 지휘권 이양식에서 ISS 열쇠를 미 우주비행사 토머스 마시번(62)에게 넘기며 이렇게 말했다. 지구에서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와 미국이 대립하고 있지만 우주에서는 양국 평화와 우정이 지속되는 분위기다. 슈카플레로프는 지난해 10월 5일 ISS에 도착해 그 해 11월 6일부터 ISS 사령관을 맡았다. 지구로 떠나기 하루 전인 29일 자신이 갖고 있던 열쇠를 후임 사령관에게 넘겨준 것이다. 다음 달 말 지구로 귀환할 예정인 마시번은 다시 러시아 우주비행사 올레그 아르테미에프에게 지휘권을 넘기게 된다. 슈카플레로프를 태우고 30일 지구로 돌아온 러시아 우주선 소유스 MS-19호에는 미국인 우주비행사 마크 반데 하이(56)도 함께했다. 미 육군 대령 출신인 반데 하이는 미국인 ISS 최장 체류 기록을 세웠다. 그는 지난해 4월 ISS에 도착해 355일 동안 머물며 임무를 수행했다. 이 기간 지구를 5680바퀴 돌며 2억4000만㎞를 비행했다. 이전 미국인 최장 체류 기록은 전 우주비행사 스콧 켈리(58)가 세운 340일이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인터뷰에서 “전쟁에서 승리는 가능한 많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라며 “우리 땅은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영토일 뿐”이라고 말했다. 같은 날 러시아 독립 언론과 인터뷰에서 돈바스 문제를 협상할 의사가 있다고 밝힌 데 이어 영토 문제에 대한 시각 변화를 보여준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27일(현지 시간)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현 상황과 러시아를 보는 시각,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 대응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러시아가 “자국 군인의 희생조차 애도하지 않는 것이 이해 되지 않는다”며 “한 달에 1만5000여 명이 사망했는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병사들을 마치 연료처럼 전장에 던져 넣고 있다”고 비판했다. 반면 우크라이나 군인과 시민 자원봉사자들은 오래 전 나라를 떠날 수 있었지만 끝까지 (러시아군에 포위된) 마리우폴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그는 “그들은 숨진 사람을 묻고 부상자를 살리기 위해 끝까지 남겠다고 말한다”며 “이것이 전쟁을 바라보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근본적인 차이”라고 설명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군이 점령한 헤르손 지역에서 탱크를 막아선 평범한 시민들을 언급하며 “자발적으로 나라를 지키는 시민들과 함께할 것이다. 우리의 승리를 믿으며 그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강조했다. 다만 우크라이나인의 의지만으로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러시아군을 감당하기 힘들다면서 서방 국가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그는 “러시아군 장비가 밀려오고 있고 어떤 지역에서는 탱크가 너무 많아 교통 정체가 일어난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서구의 러시아 제재가 도발을 선제적으로 막는 것이 아니라 어느 선을 넘어야만 처벌하는 수준으로 고안된 것에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우리 입장에서 생각해 달라”며 “러시아가 화학무기를 사용할지에 따라 제재가 가해진다고 들었다. 우리는 실험대상이 아니다”라고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당신이 생각하는 승리는 어떤 모습인가’라는 질문에 잠시 고민하더니 “가능한 많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영토를 비롯한 모든 이익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일 수 있다고 인정했다. 그는 “전쟁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끝까지 우크라이나인의 삶을 지키기 위해 서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여러분 안녕하세요.작년 리움미술관이 오랫동안 멈추었던 기획전시를 다시 시작하면서 주목을 받았었는데요. 이 때 열린 전시 ‘인간, 7개의 질문’을 보고 싶었는데 예약 전쟁에서 밀려 기회를 놓친 분들이 제 주변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시가 순회전으로 전남도립미술관에서 다시 재구성되어 열리고 있다고 하네요.이불, 루이스 부르주아, 이브 클랭, 앤디 워홀, 브루스 노만 등 흥미로운 작품들이 다시 관객에게 공개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딱 한 작품이 포함되었지만 이 전시에서 가장 주목 받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작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에 대해 오늘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자코메티는 그동안 한국에서 작품의 높은 가격과 독특한 형태로만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여인’과 같은 모습이 나오기까지는 피나는 노력과 스스로를 믿고 견뎌내야만 하는 암흑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영감한스푼’은 미술관에서 얻을 수 있는 영감에 대해 이야기를 해 왔는데요. 오늘은 자코메티가 어떻게 영감을 얻었는지와 더불어 그 영감이 결실을 맺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영감 한 스푼 미리 보기: 맞지 않는 과거의 틀을 깨고 나오려는 노력의 결실알베르토 자코메티1. 예술가의 아들로 태어난 자코메티는 원근법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미술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2. 그러나 파리의 아방가르드 예술과 유럽을 벗어난 지역의 고대 미술을 보면서 점점 자신이 배워왔던 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3. 어릴 때부터 배워 온 틀을 벗어나려는 치열한 노력과 암흑의 시간 끝에 자코메티의 인체 조각상은 탄생할 수 있었다.○ 가늘고 긴 조각상은 외로운 사람일까?위 작품이 바로 전남도립미술관에 가면 볼 수 있는 자코메티의 ‘거대한 여인’입니다. 자코메티의 조각이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대표적인 작품 중에 하나죠. 자코메티가 이러한 형태의 조각을 처음 선보인 것은 1948년, 미국 뉴욕의 피에르 마티스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서였습니다.이 전시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자코메티는 이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도 개인전을 여는 등 주목받는 작가가 됩니다. ‘거대한 여인 III’이 1960년 작품이니 자코메티 특유의 스타일이 무르익었을 무렵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겠네요. 당시 사람들은 자코메티의 작품에서 어떤 매력을 느꼈던 걸까요?남겨진 기록에서 찾을 수 있는 단서 하나는 바로 ‘실존주의’입니다. 자코메티가 1948년 뉴욕에서 전시를 했을 때,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도록에 글을 써주었습니다.사르트르는 자코메티의 작품이 실존주의 철학을 표현하고 있다고 봤는데요. 그가 말했던 실존주의 철학은 ‘인간의 실존은 연약한 것이며, 죽음에 의해 언제든지 중단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인간을 신과 가장 가까운 창조물로 보았다면, 이 시기에는 인간 또한 죽음을 마주해야 하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실질적은 삶을 살아가자는 취지도 있을 것입니다.사르트르는 자코메티의 조각상에서 보이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위태로움을 실존주의 철학과 연결시킵니다. 실존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인들이 겪은 문명과 지성에 대한 환멸을 담고 있지요. 자코메티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인간 존재의 연약함을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또 도시에서 겪을 수 밖에 없는 고독과 소외를 표현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코메티가 이 작품에 붙인 제목, 바로 ‘거대하다’는 형용사에 있습니다. 작품 제목에 ‘거대함’을 붙였다는 것 또한 그것이 위태롭거나 약한 존재는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이 되죠. 자코메티 또한 사르트르와 절친하게 지냈지만, 자신의 작품이 ‘실존주의’나 ‘외로움’만을 표현한 것은 아니라고 부인한 바 있습니다.그러면서 자신의 작품 ‘광장’(City Square)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매 순간 사람들은 무리지어 가거나 흩어진다. . . 남자들은 서로를 쳐다보지 않고 지나치거나, 여자를 쫓아 가기도 한다. 한 여자가 서있고, 네 남자는 각기 다른 방향에서 여자가 있는 곳 언저리를 향해 걷는다.”네, 자코메티의 말은 위 작품의 겉모습을 그대로 묘사한 것인데요. 이 작품에서 팔을 붙이고 있는 사람은 여성, 팔을 벌리고 걷는 사람은 남성이라고 합니다. 자코메티는 즉 자신의 작품이 외로움이라는 감정 하나를 표현하기보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패턴’을 자신만의 시각 언어에 담아냈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그 속에는 외로움도, 불안도, 연약함도 있겠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을 껴안고도 바닥을 딛고 우뚝 선 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겠지요. 그래서 자코메티는 여인상에 ‘거대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인 것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자코메티의 가느다란 조각상이 나오기까지의 과정 때문인데요. 그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손을 대면 먼지가 될 것 같은 사람위 작품은 자코메티가 본격적인 조각가로 활동을 시작할 무렵 발표한 초기 작품입니다. ‘숟가락 여인’이라는 제목처럼 조각상의 배 부분이 숟가락을 연상케 하는 모양인데요.스위스에서 예술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그림과 조각에서 재능을 보였던 자코메티는 아버지의 권유로 프랑스 파리로 향합니다. 당시 아방가르드 예술의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자코메티는 유럽 예술뿐 아니라 식민지 개척으로 수입된 아프리카의 다양한 조각품들을 만나게 됩니다.위 작품 또한 아프리카의 댄(Dan) 부족이 사용하던 숟가락의 형태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비슷한 시기 아프리카 목조각의 영향을 받은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바로 파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이죠.학교에서 배웠던 것과 전혀 다른 문명의 시각언어를 자코메티는 스펀지처럼 흡수합니다. 여기다 당시 파리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초현실주의 작가들을 만나면서 무의식의 세계에도 눈을 뜨게 되지요. 자코메티가 살면서 받은 새로운 자극들은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이 작품은 자코메티가 초현실주의 예술과 결별한 직후 만든 것입니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것’은 인간의 무의식을 의미할 수도 있겠지요.그런데 자코메티가 고대 이집트 예술의 영향도 많이 받았음을 감안한다면 또 다른 의미가 보입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어도 그가 가졌던 기억과 성격, ‘바’(ba)는 계속해서 살아간다고 믿었습니다. 이 ‘바’가 고대 이집트 예술에서는 새로 표현됩니다.위 사진에서는 볼 수 없지만 이 작품 속 인물이 앉아있는 의자의 오른쪽 팔걸이에 새 머리 모양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즉 이집트인들이 믿었던 상징 세계를 자코메티가 차용하고 있는 것으로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자코메티는 실제로 고대 이집트 그림이 자신에게는 가장 사실적으로 느껴진다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유럽 미술에서 말하는) 리얼리즘은 엉터리다. 우리들이 정형화되어 있다고 말하는 스타일들이 사실은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시각을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해준다. 즉 많은 이들이 ‘사실적이지 않다’고 하는 비잔틴, 유럽 중세 미술, 중국 미술 등이 내겐 가장 현실을 닮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도 이집트 예술이 가장 사실적이다.”자코메티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자신이 배웠던 원근법 중심의 예술도, 파리에서 시도한 초현실주의 예술도 자코메티 개인이 세상을 보고 느끼는 감각을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그러던 어느날, 그는 자신과 만났다가 헤어져 집에 가는 친구를 보다가 영감을 얻습니다. 길을 걸어갈수록 친구가 멀어져 조그맣게 보이는데도 자코메티는 여전히 그 사람이 내 친구임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번뜩이는 영감이 다가온 순간, 자코메티의 ‘먼지처럼 작은’ 조각이 탄생하게 됩니다.이 무렵 그의 작품들은 아주 조그맣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자신의 감각에 더 집중하기 위해 모델을 두고 조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 의존해 조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그의 연인과 가족이 하루종일 모델을 서주곤 했습니다.) 심지어 바늘, 콩과 비슷한 크기로까지 줄어들었는데요. 자코메티는 이 작은 사이즈의 조각 작품들과 씨름하기에 이릅니다.“모델을 보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 의존하니 조각의 사이즈는 점점 작아졌다. 사이즈가 작을 때에만 내가 본 감각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큰 사이즈에서 시작해도 결과는 같았다. 큰 조각은 틀린 것처럼 보였고, 작은 조각은 불만족스러웠다. 너무 작아져서 나이프로 한 번 건드리면 먼지가 되어 사라질 지경이었다.”자코메티가 자신의 감각을 표현할 방식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동안 유럽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립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자코메티는 입대 신청을 했지만 1년 전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게 되어 거절당합니다.1940년 독일군이 프랑스로 쳐들어왔을 때 그는 결국 고향인 스위스로 피신했습니다. 그리고 1945년 9월 그는 성냥갑 6개를 들고 파리로 돌아옵니다. 그 속에는 스위스에서 만들었던 초소형 조각이 가득했습니다.이 때 자코메티는 작품도 거의 팔지 못해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며 생활했습니다. 크고 가느다란 조각이 탄생하기까지 무려 9년이 걸렸습니다. 이 시간은 자코메티가 자신의 감각을 보편적인 언어로 갈고 닦기까지 필요했던 암흑의 세월인 셈입니다.○ 흔들리는 가운데 우뚝 선 사람새로운 형태를 위해 분투하던 자코메티에게 또 한 번의 영감의 순간은 찾아왔습니다. 1946년 흑백 뉴스 화면을 보던 자코메티는 뉴스의 내용이 아니라 브라운관 표면에 집중을 합니다. 거기서 “평평한 표면 위에 흰색 점과 검은 점이 이동”하면서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포착하게 되죠.이 때 자코메티는 극도로 얇은 형태의 조각을 만들면 큰 사이즈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1940년대 후반부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48년 1월, 키 큰 조각들로 뉴욕 갤러리에서 전시를 열고 큰 성공을 거두기에 이른 것입니다.자코메티의 ‘거대한 여인’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다시 한 번 짚어볼까요. 먼저 아프리카 조각과의 만남이 있었고, 그 다음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기반으로 한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와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그 뒤에는 고대 이집트 예술, 또 그 다음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자코메티는 흡수했죠. 짧은 글에 담을 수 없는 또 다른 수많은 만남이 그의 작업 세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그가 영감을 얻고, 작업실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며 치열하게 만들어낸 과정을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늘 미술관에서 접하는 것은 작가의 결과물입니다. 그 결과물과 함께 가장 쉽게 관심을 끄는 것이 작품의 가격이지요. 이 두 가지만 놓고 보면 쉽게 ‘이게 이렇게 비싸다고?’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 과정에 대한 이해는 포기하게 됩니다.그러나 자코메티의 작품 세계를 조금만 깊이 보면 그의 작품에 매겨지는 값은 단순한 가느다란 형태에 대한 대가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가 시대의 최전선에 뛰어들어 살면서 몸으로 흡수한 사상과 철학, 시대의 감각에 매겨지는 값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가치가 터무니 없는 가격이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또 순간의 영감이 결실을 맺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자코메티가 길에서 헤어지는 친구를 보며 만들어 낸 작은 조각들이 빛나는 대표작으로 탄생하기까지는 9년의 암흑기가 있었습니다. 자신만의 감각을 믿고 따랐던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습니다.오늘은 자코메티의 작품을 보면서, 나에게 어느 날 찾아올 지 모르는 영감을 붙잡고 갈고 닦기 위한 의지를 다져보는 건 어떨까요?전시 정보인간, 7개의 질문2022. 2. 24 ~ 2022. 5. 29전남도립미술관(전남 광양시 광양읍 순광로 660)작품수 100여 점※‘영감 한 스푼’은 국내 미술관 전시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아래 링크로 구독 신청을 하시면 매주 금요일 아침 7시에 뉴스레터를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영감 한 스푼 뉴스레터 구독 신청 링크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최측근인 아나톨리 추바이스 기후특사가 전격 사임한 후 터키로 떠난 데 이어, 옐비라 나비울리나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가 푸틴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하는 등 러시아 지도부의 균열이 커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주도한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 발레리 게라시모프 총참모장도 11일 이후 약 2주간 공개석상에서 사라졌다. 수뇌부 분열 등으로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내에서도 고립되는 양상이 뚜렷하다. 23일 블룸버그 등에 따르면 나비울리나 총재는 지난달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사의를 밝혔으나 곧 반려됐다. 그는 지난달 28일 검은 옷을 입고 기자회견에 나와 기준금리 20% 인상을 발표했다. 침공 후 서방의 제재로 러시아 루블화 가치가 급락하자 기준금리 인상으로 통화가치 하락을 방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가디언은 그가 평소 정책과 연관된 복장을 즐겨 입었다며 “러시아 경제의 추락을 애도하는 드레스코드”라고 평했다. 추바이스 특사는 이스탄불의 한 현금인출기 앞에서 야구 모자를 쓰고 돈을 찾는 모습이 러시아 언론에 포착됐다. 그는 1996년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부시장이던 푸틴 대통령을 중앙정계로 발탁해 최고 권력자로 만든 인물이다. 그랬던 그조차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페이스북에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병합을 비판하다가 2015년 살해된 보리스 넴초프 전 부총리의 사진을 올렸다. 미하일로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고문은 텔레그램에 쇼이구 장관과 게라시모프 총참모장이 11일 훌루시 아카르 터키 국방장관과의 회담 후 공개석상에서 자취를 감췄다고 전했다. 푸틴 대통령이 지지부진한 전쟁 상황의 책임을 두 사람에게 지우는 등 ‘이너서클 숙청’에 나섰다는 평이 나온다. 최근 미국과 러시아의 고위급 회담에서 러시아 장군이 이례적으로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군 수뇌부도 동요하고 있다. 23일 CNN에 따르면 평소 냉정함을 보여 온 예브게니 일린 러시아 국방부 국제협력국 부국장이 대화 도중 우크라이나의 현 상황에 대해 “비극적이고 우울하다”며 악수도 하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러시아군의 사기가 떨어지는 징후도 농후하다. 탱크부대 병사가 부대원 1500명 중 절반이 사망하거나 부상한 것에 불만을 품고 지휘관을 향해 탱크를 몰고 돌진했다고 한 우크라이나 기자가 전했다. 이 부대 지휘관인 유리 메드베데프 대령이 양다리에 중상을 입고 들것에 실려 벨라루스 병원으로 이송되는 영상도 공개됐다. 우크라이나군의 반격도 거세졌다. 미 국방부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군은 수도 키이우 동쪽 최전선에서 러시아군을 격퇴해 키이우 도심 25km 거리에 있던 러시아군을 55km 밖까지 밀어낸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가 장악했던 키이우 북쪽 마카리우, 모스춘도 탈환했다. 키이우 인근 이르핀강의 범람 또한 러시아의 키이우 장악 시도에 장애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성명에서 “푸틴은 이미 우크라이나에서 실패했다”고 밝혔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93세 건축가 프랭크 게리 새 건축 공개93세 건축가이자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프랭크 게리가 로스앤젤레스의 예술학교 콜번스쿨의 신관 건축 디자인을 공개했습니다. ‘콜번 센터’로 이름 붙여진 이 건물에는 공연장을 비롯해 음악가와 안무가들의 스튜디오가 마련되었습니다.눈길을 끈 것은 콘서트홀입니다. 구름의 형태를 본딴 음향 차단판이 천정에 매달려 있고 그 위에는 채광창이 있어 구름 사이로 빛이 내려오는 광경이 연출된다고 합니다. 2003년 이 지역에 들어선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도 프랭크 게리의 작품입니다.가디언 평론가도 “NFT는 예술인가?”NFT에 대한 관심과 주목이 커져갈수록 이것이 예술인지에 대한 의구심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평론가 필리파 스노우가 가디언에 ‘NFT는 예술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습니다.스노우는 최근 미국의 셀러브리티를 중심으로 유명세를 퍼뜨리고 있는 ‘보어드 에이프’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정형화된 형태를 AI를 통해 다양하게 변주한 최근의 NFT 디자인의 경향이 예술보다는 브랜드의 로고처럼 변질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NFT 디자인이 작품 자체가 아니라 과시와 네트워킹만이 목적은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습니다.5월 크리스티 경매 나오는 마릴린, 앤디 워홀 작품가 기록 세울까?앤디 워홀의 대표작 ‘샷 마릴린’ 시리즈 중 한 작품이 5월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 출품될 예정입니다.유명 배우 마릴린 먼로의 얼굴을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제작한 이 작품은 워홀의 작업실에 놀러온 작가가 총을 쏜 일화로도 유명하죠.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이 작품의 호가(asking price, 판매자가 최소로 넘기길 원하는 가격)가 2억 달러(약 2400억 원)라고 합니다. 그간 이 작품이 팔린 내역을 보면 그럴듯한 가격인데요. 미술 시장이 이번에도 높은 가격을 향해 치솟을지 주목됩니다.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20323/112480748/1※‘이번 주 미술계’는 한 주 간 눈 여겨 볼만한 미술 소식을 정리해드리는 코너로 매주 금요일 발송되는 뉴스레터 ‘영감 한 스푼’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영감 한 스푼’은 국내 미술관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창의성의 사례를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아래 링크로 구독 신청을 하면 매주 금요일 아침 7시에 뉴스레터를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영감 한 스푼 뉴스레터 구독 신청 링크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51199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지난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러시아의 반정부 신문 ‘노바야 가제타’를 이끌고 있는 드미트리 무라토프 편집장(61)이 우크라이나 난민을 돕기 위해 자신의 노벨상 메달을 경매에 부치겠다고 밝혔다. 그는 생명의 위협에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각종 실정과 부정부패를 폭로한 보도를 이어온 공로로 필리핀 독립 언론 ‘래플러’의 창립자인 여성 언론인 마리아 레사(59)와 노벨상을 공동 수상했다. 무라토프 편집장은 22일(현지 시간) 웹사이트 성명, 텔레그램 게시물 등을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상을 경매에 내놓을 수 있는지 여러 경매 업체에 문의하고 있다”며 성사되면 그 돈을 우크라이나 난민 펀드에 기증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미 10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다. 응급 치료를 받아야 하는 난민 및 어린이들과 메달을 나누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날 미 워싱턴포스트(WP) 인터뷰에서도 “정부가 언론을 폐간하려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내가 소속 기자와 독자들의 뜻을 거슬러 먼저 신문의 불을 끄지는 않겠다”며 푸틴 정권의 탄압에도 우크라이나 침공의 참상을 상세히 전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이 정보 전쟁에서 도망가느니 스스로 내 발을 총으로 쏠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바야 가제타는 지난달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때부터 ‘특수 군사작전’을 주장하는 푸틴 정권의 행위를 ‘침공’ ‘전쟁’이라고 분명히 규정했다. 침공 다음 날인 지난달 25일에는 1면 기사의 제목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폭격하고 있다’로 달고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로 같이 내보냈다. 당시 무라토프 편집장은 화상 연설을 통해 “전쟁을 막을 사람이 없어 슬픔과 수치심을 느낀다. 우크라이나를 적으로 여기지 않으며, 우크라이나어 또한 적의 언어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푸틴 정권은 줄곧 노바야 가제타에 폐간 위협을 가하고 있다. 이달 4일에는 러시아군의 민간인 살상 등을 ‘가짜 뉴스’로 규정하고 이를 전하면 최대 징역 15년형을 부과한다는 법안도 통과시켰다. 무라토프 편집장은 1993년 여러 동료와 노바야 가제타를 만들었고 1995년부터 현재까지 편집장을 지내고 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지난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러시아의 반정부 일간지 ‘노바야 가제타’를 이끌고 있는 드미트리 무라토프(61) 편집장이 우크라이나 난민을 돕기 위해 자신의 노벨상 메달을 경매에 부치겠다고 밝혔다. 그는 생명의 위협에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각종 실정과 부정부패를 폭로한 보도를 이어온 공로로 필리핀 독립 언론 ‘래플러’의 창립자인 여성 언론인 마리아 레사(59)와 노벨상을 공동 수상했다. 무라토프 편집장은 22일(현지 시간) 웹사이트 성명, 텔레그램 게시물 등을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상을 경매에 내놓을 수 있는지 여러 경매 업체에 문의하고 있다”며 성사되면 그 돈을 우크라이나 난민 펀드에 기증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미 10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다. 응급 치료를 받아야 하는 난민 및 어린이들과 메달을 나누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날 미 워싱턴포스트(WP) 인터뷰에서도 “정부가 언론을 폐간하려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내가 소속 기자와 독자들의 뜻을 거슬러 먼저 신문의 불을 끄지는 않겠다”며 푸틴 정권의 탄압에도 우크라이나 침공의 참상을 상세히 전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이 정보 전쟁에서 도망가느니 스스로 내 발을 총으로 쏠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바야 가제타는 지난달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때부터 ‘특수 군사작전’을 주장하는 푸틴 정권의 행위를 ‘침공’ ‘전쟁’이라고 분명히 규정했다. 침공 다음날인 지난달 25일에는 1면 기사의 제목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폭격하고 있다’로 달고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로 같이 내보냈다. 당시 무라토프 편집장은 화상 연설을 통해 “전쟁을 막을 사람이 없어 슬픔과 수치심을 느낀다. 우크라이나를 적으로 여기지 않으며, 우크라이나어 또한 적의 언어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푸틴 정권은 줄곧 노바야 가제타에 폐간 위협을 가하고 있다. 이달 4일에는 러시아군의 민간인 살상 등을 ‘가짜 뉴스’로 규정하고 이를 전하면 최대 징역 15년형을 부과한다는 법안도 통과시켰다. 무라토프 편집장은 1993년 여러 동료와 노바야 가제타를 만들었고 1995년부터 현재까지 편집장을 지내고 있다. 체첸 전쟁의 참상을 폭로해 2006년 총격으로 피살된 안나 폴릿콥스카야 기자를 비롯한 6명의 소속 기자가 의문사를 당했지만 굴하지 않고 푸틴 정권의 각종 실정을 준엄하게 비판해 언론의 존재 이유를 보여줬다는 평을 얻고 있다. 무라토프 편집장 은 지난해 노벨상 수상 소감에서 폴릿콥스카야 기자를 비롯한 러시아의 반체제 언론인에게 공을 돌린다고 밝혔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국 팝아트를 대표하는 앤디 워홀(사진)의 작품이 5월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다. 21일(현지 시간) 크리스티는 워홀의 1964년 작품 ‘샷 세이지 블루 매릴린’이 출품된다고 밝혔다. 크리스티는 작품 추정가를 공개하지 않았지만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호가(asking price·판매자가 작품을 넘기길 원하는 가격)가 2억 달러(약 2400억 원)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이는 역대 경매에 나온 예술 작품 호가 중 최고 기록이다. 만약 경매에서 호가 이상으로 작품이 팔리면 워홀 작품의 경매 낙찰가 중 최고 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전 워홀 작품 낙찰가 최고 기록은 2013년 출품된 ‘실버 카 크래시’의 1억540만 달러(약 1280억 원)다. 경매가 아닌 거래로는 2017년 헤지펀드 사업가 케네스 그리핀이 같은 시리즈의 작품 ‘샷 오렌지 매릴린’을 최소 2억 달러에 매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전 경매에서 호가 1억 달러로 시작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토르 문디’는 4억5000만 달러(약 5470억 원)에 낙찰됐다. 이 작품은 유명 배우 매릴린 먼로의 사진 위에 실크스크린 판화 기법으로 색을 덧입힌 것으로, 워홀의 대표작 중 하나다. 가로세로 91cm 사이즈인 이 작품은 1964년 워홀의 작업실을 방문한 한 예술가가 쏜 총에 맞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예술가가 워홀에게 ‘쏴도(shoot)’ 되느냐고 물은 것을 워홀이 ‘사진을 찍어도(shoot)’ 되느냐고 물은 것으로 착각해 허락하자 그림 위에 총을 쏘았다는 것이다. 총알이 관통해 수리한 2점을 포함한 총 5점의 작품이 ‘샷 매릴린’ 시리즈로 불린다. ‘샷 매릴린’ 시리즈는 할리우드 인기 스타였던 먼로를 주제로 한 것에다 이처럼 극적인 이야기가 얽혀 있어 그간 높은 가격에 거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워홀의 잡지 ‘인터뷰’를 발행한 사업가 피터 브랜트가 1967년 ‘샷 블루 매릴린’을 5000달러에 매입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1994년에는 그리스 선박 재벌 필리포스 니아르호스가 ‘샷 레드 매릴린’을 경매에서 360만 달러에 낙찰받았다. 2007년에는 한 헤지펀드 매니저가 ‘샷 터쿼이즈 매릴린’을 8000만 달러에 산 것으로 전해졌다. ‘샷 세이지 블루 매릴린’은 스위스의 예술 작품 딜러 도리스 아만이 글로벌 미디어 기업 콩데나스트를 창설한 미국의 출판계 거물 새뮤얼 어빙 뉴하우스로부터 매입했다. 이후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 영국 런던 테이트 미술관 등에서 전시됐다. 지난해 아만이 사망하자 경매에 나왔다. 현재는 ‘토마스 앤드 도리스 아만 재단’ 소유다. 재단 측은 작품 판매 수익금을 어린이 지원 등 자선 사업에 사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WSJ는 이번 워홀 작품 경매가 최근 몇 달간 우크라이나 전쟁 등 변수에도 미술 시장이 영향을 받지 않고 계속해서 높은 관심을 이어갈 것인지 보여줄 지표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워홀은 평생 8000여 점의 작품을 창작했다. 그의 작품은 최근 수년간 매년 약 200점이 경매에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소설 ‘파친코’의 작가 이민진(54·사진)이 18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타임스(NYT)에 ‘아시아계 미국인은 항상 두려움에 떨었다’는 글을 기고했다. 지난해 3월 16일 미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6명의 아시아계가 총격으로 사망하는 등 각종 혐오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데도 미국 사회가 문제 해결을 외면해 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신과 가족 또한 수없는 차별에 직면했다고 회고했다. 1977년 세 딸을 데리고 서울에서 뉴욕으로 이주해 금은방을 운영했던 그의 부모는 수차례 강도 및 절도를 겪었다. 이민진 또한 고등학생 시절 그 가게에 갔다가 마스크를 쓰고 총을 겨눈 강도 3명을 직접 맞닥뜨렸다. 그는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총이 보인다”며 아직도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는 지하철역에서 낯선 남자의 공격을 받을 뻔했고 언니 역시 ‘칭크’(중국인을 가리키는 모욕적인 표현)라는 욕설을 듣고 지갑을 빼앗겼다. 예일대 재학 시절 퇴역 군인들이 “난 중국 여자가 좋다”며 자신의 몸을 움켜쥐고 성희롱을 했다고도 털어놨다. 그럴수록 남자처럼 입고 눈에 띄지 않으려 했지만 “내 피부색(인종·race)을 집에 놓고 다닐 순 없었다”고 했다. 그는 아시아계가 미국에 도착한 순간 차별과 혐오에 직면하는데도 피해자들이 알아서 조심하도록 하는 방식은 지속적이지도, 정당하지도 않다고 비판했다. 이어 “내 눈은 여느 아시아인처럼 작지만, 그 눈 너머에는 세상이 변하길 바라는 빛이 반짝인다”고 강조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국의 최고령 현역의원인 돈 영 하원의원(공화·알래스카)이 18일(현지 시간) 사망했다고 뉴욕타임스(NYT) 등이 보도했다. 향년 89세. 1973년 하원에 입성해 49년간 의원을 지낸 그는 공화당 역사상 최장수 의원이며 상하원을 통틀어 최고령 현역 의원이었다. 알래스카주의 유일한 하원의원인 그는 ‘알래스카의 세 번째 상원의원’으로도 불렸다. 미 50개주는 모두 2명의 상원의원을 두고 있으나 하원 의석은 주민 수에 따라 결정된다. 알래스카는 주민이 많지 않아 하원 의석이 하나뿐이다. NYT는 상대적으로 작은 지역구를 대표했음에도 워싱턴 의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강인한 개척자 이미지를 구축했다고 평했다. 2020년 NYT 인터뷰에서 ‘언제까지 의원직을 수행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 “신과 유권자가 결정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기후 위기가 ‘사기’(scam)라며 알래스카의 석유 광물 벌목 산업을 옹호했다. 역시 환경 보호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탄핵에도 반대했으나 조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이 확정됐을 때는 공화당 의원 중 가장 먼저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바이든 대통령은 19일 “그의 유산은 알래스카의 사회기반시설 및 그가 보호했던 원주민 부족을 통해 전해질 것”이라고 애도 성명을 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소설 ‘파친코’의 작가 이민진(54)이 18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타임스(NYT)에 ‘아시아계 미국인은 항상 두려움에 떨었다’는 글을 기고했다. 지난해 3월 16일 미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6명의 아시아계가 총격으로 사망하는 등 각종 혐오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데도 미 사회가 문제 해결을 외면해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달 초 소셜미디어에서 아시아계를 상대로 최근 공격 증가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묻자 ‘집에만 머무르고, 나갈 때는 후추 스프레이를 들고 다니며, 여유가 없어도 무조건 택시만 탄다’는 등의 답변이 나왔다고 공개했다. 자신과 가족 또한 수없는 차별에 직면했다고 회고했다. 1977년 세 딸을 데리고 서울에서 뉴욕으로 이주해 금은방을 운영했던 그의 부모는 수차례 강도 및 절도를 겪었다. 이민진 또한 고등학생 시절 그 가게에 갔다가 마스크를 쓰고 총을 겨눈 강도 3명을 직접 맞닥뜨렸다. 그는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총이 보인다”며 아직도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는 지하철역에서 낯선 남자의 공격을 받을 뻔했고 언니 역시 ‘칭크’(중국인을 가리키는 모욕적인 표현)라는 욕설을 듣고 지갑을 빼앗겼다. 예일대 재학 시절 퇴역 군인들이 “난 중국 여자가 좋다”며 자신의 몸을 움켜쥐고 성희롱을 했다고도 털어놨다. 그럴수록 남자처럼 입고 눈에 띄지 않으려 했지만 “내 인종을 집에 놓고 다닐 순 없었다”고 했다. 그는 아시아계가 미국에 도착한 순간 차별과 혐오에 직면하는데도 피해자들이 알아서 조심하도록 하는 방식은 지속적이지도, 정당하지도 않다고 비판했다. 이어 “내 눈은 여느 아시아인처럼 작지만, 그 눈 너머에는 세상이 변하길 바라는 빛이 반짝인다”고 강조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여러분 안녕하세요.지난주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예술 세계를 소개하고 여러 독자분들이 흥미로운 의견을 보내주셨답니다. 아래 ‘구독자 의견’ 코너에서 자세히 소개하겠지만, 그림이 단순히 대상의 묘사를 넘어 작가의 철학과 생각을 표현하는 장이 되었다는 이야기에 공감해준 분들이 계셔서 기뻤습니다.오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지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한국 작가의 작품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예술이 등장하고 벌써 100년이 지났지요. (검은 사각형이 1914년 작품입니다.) 그 후 미술은 또 다시 엄청나게 다양한 갈래로 전개되어왔습니다. 그런 경향 중 하나로 한국의 현대 미술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말레비치의 절대주의가 단순히 작가의 행위 그 자체를 강조하는 것을 통해 문을 열었다면, 그 장 위에서 현대미술 작가들이 어떻게 자신만의 예술을 펼쳐 보였는지를 살펴보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그림을 보면서 시작하겠습니다.영감 한 스푼 미리 보기: 나의 눈으로 본 세상을 나만의 시각언어로 표현하다서용선1. 작업 활동 초기에 소나무를 그렸던 서용선 작가는 누가 봐도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부었다.2. 그러나 절대적인 객관성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이런 생각을 과감하게 밀고 나가 역사의 이면(단종 역사화)과 도시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3. 사회가 정한 이데올로기(조선왕조실록)나 고정된 편견(도시의 겉모습)을 벗겨내고 나의 눈으로 본 대상의 속살을 그림으로써 작가는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나가고 있다.○ 보도블럭 격자와 건물 틈에 갇힌 뉴요커위 그림은 서용선 작가가 2019년 10월 미국 뉴욕 미드타운에 머물렀을 때 보고 느낀 바를 담고 있습니다. 제목에도 적혀 있듯이 56번가, 고층 빌딩이 화려하게 들어서 있는 맨하탄의 상업 지구를 표현한 그림입니다.보통 맨하탄이라고 할 때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요? 정장을 갖춰 입고 바쁘게 걸어 가는 사람들, 반짝이는 태양빛이 반사되는 거대한 유리 빌딩들, 세계를 이끄는 도시의 돈 냄새… 이런 것들일 것 같습니다.그런데 이 그림은 그런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엉뚱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지요.저는 이 그림을 처음 마주했을 때,“그림 속 사람들이 참 불편해 보인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뉴욕이 주는 클리셰적인 이미지를 벗겨내고 한 번 그림을 같이 보겠습니다.이번 전시에 공개된 ‘생명의 도시’는 가로 6m가 넘는 대작이라,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도록 나누어 보았습니다. 그림 왼쪽에 있던 인물의 모습인데요. 이 인물은 아래쪽 보도 블럭이 만들어낸 격자 위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얹고 있습니다.또 오피스빌딩 내부로 빽빽이 들어선 은행 ATM기가 보이시나요? 그 가운데 간신히 생겨난 틈에 인물이 배치되어 있어서, 왼쪽에 놓인 검은 공간으로만 겨우 움직일 것처럼 꽉 짜여진 틀에 놓여 있는 모습입니다.오른쪽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도블럭 격자를 마치 줄타기 하듯 올라서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금방이라도 밖으로 밀어낼 듯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는 체이스 은행의 로고.또 지하철 역 옆으로 간신히 열린 공간에도 빌딩숲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죠. 화려하고 정돈된 것처럼 보이지만, 저에게는 이런 도시가 만들어낸 격자무늬가 감옥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서용선 작가는 이 풍경에 대해 뭐라고 말했을까요?“이 공간은 제가 여러 차례 뉴욕을 드나들며 잠깐씩 방문을 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그 거리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노동하다 퇴역한 사람,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배달해주는 사람, 약속 시간이 비어서 건물에 기대어 약간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전해졌고, 그것이 56번가 거리의 성격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그가 느낀 거리의 성격을 명확하게 언어로 제시하진 않았지만, ‘노동하다 퇴역’, ‘배달’, ‘빈 시간을 보낸다’라는 말에서 저는 ‘어중간함’이라는 키워드가 느껴졌습니다. 이 거리에 속한 사람 대부분은 사실 차를 타고 다닐 것입니다. 빽빽한 오피스빌딩을 거니는 사람들은 즉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틈바구니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저는 이해가 되더군요.제가 이 부분을 계속 집중해서 파고드는 까닭은 이렇습니다. 보통 뉴욕을 그린다고 하면 화려하고 반짝이는 것, 클리셰적이고 대표적인 것을 상상할 것입니다. 그런데 서용선 작가는 그 가운데서도 현장에 가면 보이는 어색하고 독특한 부분을 포착해 도시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지요.중요한 것은 사회나 시스템이 정한 의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의미로는 담을 수 없는, 나의 눈과 몸의 감각으로 볼 수 있는 더 생생한 의미를 온 힘을 다해 느끼고, 그것을 시각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작가 고유의 의미 체계와 작품 세계를 작가는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그렇다면 서용선 작가는 어떻게 이런 작품을 하게 된 것일까요?○ 아름다움에는 객관적인 기준이 있을까?서용선 작가의 이야기를 계속 하기 전에 먼저 이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여러분은 아름다움에 객관적인 기준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쉽게 말하면, 객관적으로 잘생기거나 예쁜 사람이 있다고 보시나요? 저는 시대나 유행에 따라 사람들이 선호하는 얼굴은 있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과 욕망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객관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트렌드에 맞는 얼굴이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성격이나 스타일로 개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아름답게 보이기도 합니다.제가 왜 외모 이야기를 했냐면, 예술도 과거에는 객관적 아름다움, 눈이 번쩍 뜨일 것 같은 사실성을 추구한 시절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것이 20세기 초반 말레비치를 비롯한 여러 예술가들에 의해 깨어졌고 그 아름다움의 기준은 작가나 관객 등 여러 개별 주체에게 주도권이 쥐어지게 되었습니다.서용선 작가에게서도 이러한 과정이 있었음을 저는 수개월 전 대화를 통해 엿볼 수 있었습니다. 서용선 작가의 양평 작업실에 방문했을 때, 초기 작가가 그렸던 ‘소나무 시리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1982년 저는 작가로서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때 나온 것이 소나무 그림입니다. 지금은 이 그림이 나의 궁극적 표현 방법으로 맞지 않았다는 걸 알기에 반성을 하지만 당시에는 절박했죠. 그걸 깨달은 계기가 있습니다.그 때 저는 소나무 그림으로 순수한 형상에 이르고 싶었습니다.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누가 봐도 깜짝 놀라는 명징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파리 선 하나하나를 정말 긴장해 호흡을 멈추고 그으면서 1년 간 작업을 했습니다.한여름 연구실에서 얼마나 집중을 했는지 선을 긋다 기절해 바닥에 떨어졌어요. 기가 다 빠진거죠. 엉덩방아를 찧고 나서, ‘아 이러면 안 되는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저는 이 때 서용선 작가가 추구했던 그림이 바로 (흔히 존재한다고 믿는)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그림이 아니었을까, 추측했습니다. 그러면서 서용선 작가는 군에서 제대하고 그림을 그릴 때 이야기도 들려주었습니다.“(학원에서) 분명 나의 눈에는 내가 그린 것이 맞는데, 선생님은 자꾸 저의 그림을 고쳐주셨어요. 고쳐진 그림도 그럴 듯 했지만 제가 본 것과는 분명히 달랐지요.그런데 두 그림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달았어요. 그 분은 키가 크고 저는 앉은키가 작았거든요. 눈높이와 보는 시점이 달랐던 거죠.사람은 눈꺼풀의 두께 차이로도 보는 것이 차이가 납니다. 즉 개개인이 보는 세상은 다를 수밖에 없는데 그 땐 그것을 어렴풋이만 알았던 거죠.”개개인이 보는 다른 세상, 이 표현을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즉 모든 사람이 보는 세상은 저마다의 가치가 있는데, 객관적인 아름다움을 주장하는 것은 그 모든 다른 가치를 부정하는 일이 됩니다.서용선 작가의 ‘소나무’는 (존재하지 않는) 객관적 아름다움에 발을 맞추려는 시도였다면, 작가는 작업실에서 엉덩방아를 찧으며 그게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맞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것입니다.이 깨달음 뒤에 서용선 작가의 작품 세계는 한층 더 폭넓은 세계로 뻗어 나가게 됩니다.○ 문자에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살려내다앞서 작가가 일련의 경험을 통해 절대적인 객관성, 사회가 정한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탈피하는 과정을 보여드렸습니다. 그 다음에 작가는 이것을 한국의 역사 속 한 장면으로 확장시키기에 이릅니다. 바로 위 작품과 같은 ‘단종 시리즈’가 그것입니다.작가는 1987년부터 역사에는 왜곡된 기록 밖에 남지 않은 비운의 왕, 단종에 대한 이야기를 추적하며 그것을 작품으로 남깁니다. 시작은 1980년대. 개인적인 슬픔을 안고 우연히 찾은 영월에서 ‘이 물에 어린 왕이 빠져 죽었다’는 말을 듣고 단종에 대해 추적했습니다.흥미로운 것은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이 왕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설이나 설화처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고 있었다는 부분입니다. 작가는 이야기가 남은 지역을 직접 찾아 몸으로 느껴보고, 자료를 찾아보며 단종의 이야기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 넣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87년 처음으로 단종 시리즈를 발표합니다.이후 수십 년 간 이어진 단종 작품에서 왕권이라는 정해진 개념이나 이데올로기에서 외면 받은 사람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뉴욕이라는 이미지의 그림자 아래 저마다의 삶을 사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과, 권력의 그림자에 가린 인간 단종의 모습이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요.또 그 깊은 곳에는 작가 개인의 아픔도 서려 있습니다.“어릴 적 동생이 죽었을 때 우리 어머니의 오빠, 큰 아저씨가 조그마한 관을 지게에 지고 앞산을 걸어가는 장면을 5살 때 쯤 봤어요. 어린 아이가 그렇게 죽었으니 부모님은 완전히 넋을 놓으셨죠.당시 저는 너무 어렸지만 처연한 느낌은 남았습니다. 그 장면은 두고두고 나에게 남았죠. (처음 영월을 찾았다가) 서울로 오는 길에 어릴 적 그 장면이 오버랩 되면서, ‘이런 걸 그림으로 그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서용선 작가는 6.25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1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결국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이름도 없이 죽어야만 했던 사람들의 아픔이 작품 세계에 공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되는 대목입니다.서용선 작가는 제게 ‘선을 긋는 것은 용기다’라는 말을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작품 세계를 되돌아보며 이 말에서 ‘선을 긋는다’는 것은 결국 빈 종이 위에 선을 긋는 동작뿐이 아닌 것 같습니다.오히려 고정관념 속에 미처 조명받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 살아 숨쉬는 생명력, 이런 것들을 커다란 캔버스에 그려내고 그것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이 모든 것이 용기가 아닐까요?서용선 작가는 ‘개인의 몸이 삶의 중심이며 이것을 기반으로 각자가 자신만의 우주를 구축해 나간다’는 한국의 신자연주의 미술운동에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서용선 작가의 작품을 통해 나를 중심으로 뻗어 나가는 견고한 삶을 살아갈 용기를 가다듬어 보시길 바랍니다.한 줄로 보는 전시세상이 규정하지 않은 나만의 감각과 언어도 갈고 닦으면 고유의 아름다움과 가치가 될 수 있다.추천지수(별 다섯 만점) ★★★☆전시 정보정진국의 건축과 서용선 박인혁의 그림2022. 3. 9 ~ 2022. 3. 28토포하우스(서울 종로구 인사동11길 6)작품 수 14점※‘영감 한 스푼’은 국내 미술관 전시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아래 링크로 구독 신청을 하시면 매주 금요일 아침 7시에 뉴스레터를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영감 한 스푼 뉴스레터 구독 신청 링크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아내가 차를 마시고 싶을 것 같아요. 만나면 가장 먼저 차를 타줄 겁니다.” 영국인 리처드 랫클리프(46)는 16일 이란의 감옥에서 6년 만에 풀려난 부인을 맞으러 공항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의 부인 나자닌 자가리랫클리프(44)는 2016년 딸을 데리고 이란의 친정을 방문했다가 영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이란은 나자닌이 영국 자선단체 톰슨로이터재단에서 일하며 체제 전복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그를 테헤란 공항에서 체포했다. 곧 징역 5년형이 선고됐고, 갓 돌이 지난 딸은 친정에 보내졌다. 졸지에 부인과 딸을 볼 수 없게 된 리처드는 영국 총리와 이란 최고지도자에게 가족을 돌려보내 달라고 수차례 청원했다. 부부는 “체제 전복 모의를 결코 한 적이 없다”며 영국과 이란에서 동반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과 이란의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영국 정부는 리처드에게 “협상이 진행 중이니 잠자코 있어 달라”고 했다. 리처드는 외교 문서 등을 찾아보면서 부인이 이란에서 억울하게 간첩으로 내몰린 원인을 찾게 됐다. 문제는 영국이 이란에 갚지 않은 4억 파운드(약 6200억 원)였다. 1979년 이란 팔레비 국왕 정권은 무기 거래 목적으로 영국 은행에 4억 파운드를 넣어두고 있었다. 왕정 붕괴 후 이란 정부는 영국에 그 돈을 돌려 달라고 요구했으나 영국이 미국의 대이란 제재에 동참하며 돌려주지 않자 나자닌을 인질로 잡았다. 국가 간 빚 문제가 한 가족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나자닌은 5년간 복역 후 지난해 출소했지만 곧 다시 감옥에 갇혔다. 돈을 돌려받지 못한 이란이 과거 시위 참여 전력을 이유로 그를 추가 기소해 1년형을 선고한 것이다. 리처드는 다시 영국 외교부 청사 앞에서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나자닌 송환을 요구하는 국내외 여론이 거세지자 최근 영국 정부는 이란에 ‘인도주의적 사용’을 조건으로 4억 파운드를 갚았다. 제러미 헌트 전 외교장관은 “리처드가 아니었다면 나자닌은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나자닌은 17일 영국 옥스퍼드셔 공항에서 가족과 재회했다. 어느덧 일곱 살이 된 딸은 엄마에게 보여줄 장난감을 가슴에 끌어안고 있었다. 리처드는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순 없지만 우리는 미래를 살 것”이라고 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윤중식 화백 작품-자료 500점 기증 근현대화가 고 윤중식 화백(1913¤2012)의 유족이 11일 서울 성북구 성북구립미술관에 고인의 작품과 자료 500점을 기증했습니다.평양 출신인 이 작가는 6·25전쟁 때 월남했습니다. 피란길에 부산에 도착했던 그는 이중섭의 제안으로 그의 집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이중섭과 일본 제국미술학교를 함께 다녔고 1943년 평양에서 이중섭, 김병기 등과 6인전을 열었습니다.농촌이나 전원과 같은 목가적 풍경을 강렬한 색채로 그린 그의 작품에는 지난 시절과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향수가 담겨 있습니다. 성북구립미술관 기증작에는 ‘아침’(1987년) ‘석양’(2005년) 등 주요 유화 71점과 피란길을 기록한 드로잉 28점이 포함됐습니다.○ NFT 작가 비플, 이번엔 갤러리에서 개인전그래픽 아티스트 비플이 3월 3일 뉴욕 맨하탄의 한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비플은 지난해 크리스티 옥션에서 ‘Everydays - The First 5000 Days’를 6900만 달러에 팔아 NFT에 관심을 촉발시킨 인물입니다.13점의 그림과 판화가 공개된 전시에는 아마존, 페이스북 같은 회사들이 잔해로 남은 디스토피아적 세계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 가격은 7만5000~30만 달러 선. 그는 메타버스로 번 돈 대부분을 작품 제작에 투입했다고 밝혔습니다.○ 서울숲으로 이전한 디뮤지엄 개관전한남동에서 서울숲으로 자리를 옮긴 디뮤지엄이 개관전 ‘어쨌든 사랑: Romantic Days’를 엽니다.천계영 이은혜 이빈 이미라 원수연 박은아 신일숙 등 한국 순정만화 작가의 7개 작품 속 장면을 기준으로 7가지 사랑의 감정과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전시입니다.각각의 장면을 모티브로 사진, 만화, 일러스트, 설치 등 국내외 작가 23명의 작품 약 300점을 선보입니다.※‘이번 주 미술계’는 한 주 간 눈 여겨 볼만한 미술 소식을 정리해드리는 코너로 매주 금요일 발송되는 뉴스레터 ‘영감 한 스푼’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영감 한 스푼’은 국내 미술관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창의성의 사례를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아래 링크로 구독 신청을 하면 매주 금요일 아침 7시에 뉴스레터를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김민기자 kimmin@donga.com}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2년간 국경을 봉쇄해온 뉴질랜드 정부가 다음 달부터 백신 접종을 완료한 외국인 관광객의 입국을 순차적으로 허용한다고 16일 밝혔다. 다음 달 12일 오후 11시 59분부터는 호주 국민에게 국경이 개방되며, 한국을 포함한 비자 면제 협정 국가에서 온 여행객은 5월 1일 오후 11시 59분부터 입국이 가능하다. 여행객들은 자가 격리 없이 입국할 수 있다. 다만 백신 접종을 완료했더라도 출발지에서 코로나19 유전자증폭(PCR) 검사를 받아 음성 확인서를 제출하고, 입국 당일과 5일 차에 신속항원 검사를 받아야 한다. ‘방역 모범국’으로 꼽히는 뉴질랜드는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사망자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수준인 115명에 그치고 있다. 베트남 정부도 15일부터 외국인 관광객의 입국을 허용하며 한국 일본 영국 등 13개국 여행객에게 비자를 면제해 주기로 했다. 신화통신에 따르면 한국인은 이날부터 비자 없이 15일간 베트남 체류가 가능하며, 백신 접종 완료 혹은 코로나19 완치 증명서와 함께 코로나19 음성 확인서를 제출하면 된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어떤 아버지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나처럼 행동했을 겁니다.” 우크라이나에 있는 딸과 여권조차 없는 8개월짜리 외손자를 구하기 위해 두 번이나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은 미국인 아버지 윌리엄 허버드 씨의 사연이 큰 주목을 받고 있다고 AP통신 등이 13일(현지 시간) 보도했다. 미 북동부 매사추세츠주 피치버그에 사는 허버드 씨는 최근 두 번이나 우크라이나를 오가며 딸과 손자를 슬로바키아 국경 지대까지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그의 딸 에이슬린(19)은 2018년 키이우 무용대학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의 수석 발레리나를 배출한 명문으로 당시 이곳에 입학했다는 사실이 현지 언론에도 보도됐다. 에이슬린은 이곳에서 남자친구를 만나 지난해 아들 세라핌을 낳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당시 에이슬린은 집에서 출산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가정 분만을 할 때 출생 신고서를 받는 절차가 까다롭다. 이에 아직 출생증명서와 여권이 모두 없는 세라핌을 데리고 국경을 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허버드 씨는 딸의 출국을 돕기 위해 지난달 첫 번째로 우크라이나 땅을 밟았다. 친자확인 검사로 세라핌의 신분을 확인하고 여권을 만들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 와중에 러시아가 침공하자 그는 딸과 손자의 탈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우선 홀로 귀국했다. 기금모금 사이트 ‘고펀드미’와 지역 언론 등에 사연을 공개하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지지부진하자 다시 우크라이나행을 택했다. 그는 미국에서 터키 이스탄불까지 비행기를 타고, 이곳에서 폴란드 바르샤바로 가는 비행기를 또 갈아탔다. 바르샤바에서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접한 폴란드 남동부까지 갈 때는 기차, 도보, 모르는 이의 차를 얻어 타며 국경을 넘었다. 우크라이나 서부 르비우에서 수도 키이우까지 기차로 이동한 후에야 딸과 손자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했다. 세 사람은 피란민 수천 명과 함께 서쪽으로 이동해 11일 슬로바키아 국경 인근에 도착했다. 하지만 세라핌은 아직 여권이 없다. 허버드 씨는 “가족을 돌보는 것이 아버지의 일”이라며 딸, 손자와 함께 국경을 넘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어떤 아버지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나처럼 행동했을 겁니다.” 우크라이나에 있는 딸과 여권조차 없는 8개월짜리 외손자를 구하기 위해 두 번이나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은 미국인 아버지 윌리엄 허버드 씨의 사연이 큰 주목을 받고 있다고 AP통신 등이 13일(현지 시간) 보도했다. 미 북동부 매사추세츠주 피치버그에 사는 허버드씨는 최근 두 번이나 우크라이나를 오가며 딸과 손자를 슬로바키아 국경 지대까지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그의 딸 에이슬린(19)은 2018년 키이우 무용대학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의 수석 발레리나를 배출한 명문으로 당시 어린 미국 학생이 이 곳에 입학했다는 사실이 현지 언론에도 보도됐다. 에이슬린은 이 곳에서 남자친구를 만나 지난해 아들 세라핌을 낳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당시 에이슬린은 집에서 출산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가정 분만을 할 때 출생 신고서를 받는 절차가 까다롭다. 이에 아직 출생증명서와 여권이 모두 없는 세라핌을 데리고 국경을 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허버드 씨는 딸의 출국을 돕기 위해 지난달 첫 번째로 우크라이나 땅을 밟았다. 친자확인 검사로 세라핌의 신분을 확인하고 여권을 만들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 와중에 러시아가 침공하자 그는 딸과 손자의 탈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우선 홀로 귀국했다. 기금모금 사이트 ‘고펀드미’와 지역 언론 등에 사연을 공개하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지지부진하자 다시 우크라이나행을 택했다. 그는 미국에서 터키 이스탄불까지 비행기를 타고, 이 곳에서 폴란드 바르샤바로 가는 비행기를 또 갈아탔다. 바르샤바에서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접한 폴란드 남동부까지 갈 때는 기차, 도보, 모르는 이의 차를 얻어 타며 국경을 넘었다. 우크라이나 서부 르비우에서 수도 키이우까지 기차로 이동한 후에야 딸과 손자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했다. 세 사람은 피란민 수천 명과 함께 서쪽으로 이동해 11일 슬로바키아 국경 인근에 도착했다. 하지만 세라핌은 아직 여권이 없다. 허버드 씨는 “가족을 돌보는 것이 아버지의 일”이라며 딸, 손자와 함께 국경을 넘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러시아의 침공을 피해 혼자 기차를 타고 1200km를 이동한 11세 우크라이나 소년 하산 알 할라프가 11일(현지 시간)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열린 반전 집회에 참석해 화제를 모았다. 그는 “엄마는 내가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기를 바랐다. 엄마가 준 희망이 나를 이끌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할라프는 이달 초 우크라이나 남동부 자포리자에서 슬로바키아로 혼자 탈출했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과 사별 후 혼자 할라프를 포함한 아이들을 키웠고, 자신의 어머니까지 돌보고 있었다. 지난달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할라프의 어머니는 아들을 슬로바키아에 있는 친지 집에 맡기기로 하고 열차에 태웠다. 자신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자포리자에 남았다. 할라프가 천신만고 끝에 슬로바키아 국경에 도착했을 때 그가 가진 것이라곤 여권, 비닐봉지, 손등에 적힌 친지 연락처뿐이었다. 경찰이 그를 발견했고 할라프는 곧 친척을 만날 수 있었다. 할라프는 이날 집회에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돕고 있는 자원봉사자에게 큰 감사를 전하고 싶다”고 밝혔다. 조만간 어머니를 다시 만나고 싶다며 “행복한 결말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도 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