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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박물관을 찾으면 얻을 수 있는 장점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옛것에서 지금을 배우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고, 또 하나는 휴식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난 김쾌정 한국박물관협회장(69)은 “시국이 어지럽다 보니 사람들의 마음이 지쳐 가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요즘 박물관을 찾으면 숨 한번 고르는 ‘마음의 휴식처’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김 회장이 이끌고 있는 한국박물관협회가 올해 40돌을 맞았다. 협회 창립 당시에는 전국 박물관을 다 합쳐서 50곳도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전국에 1000곳 이상 생겼다. 박물관협회는 김 회장이 직접 제안하고 키워 온 단체다.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육군3사관학교에서 국사 교관으로 군 복무를 마친 김 회장은 은사의 추천으로 한독 의약박물관에 학예직원으로 취직하면서 박물관과 첫 인연을 맺었다. 이후 박물관장들의 친목 모임에서 김 회장이 “친목만 도모할 게 아니라 박물관 사업을 발전시키고 종사자들의 처우도 개선해 보자”며 협회 설립을 제안했다. 그는 “제안해 놓고 보니 나이가 제일 어린 사람이 나였다”며 “이 덕분에 정관 제정부터 시작해서 각종 업무를 다 처리하게 됐다”며 웃었다. 그는 지금까지 협회의 성과로 “박물관 업무 종사자들에게 가장 큰 국제행사인 세계박물관총회를 2004년 일본보다 앞서 개최하고, 학예사들에게 주는 정부 지원금이 늘어나도록 힘을 보탠 점”이라고 꼽았다. 그는 “이제는 각 박물관이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을 추구하는 전환점”이라고 말했다. 국립박물관들을 비롯해 3대 사립박물관인 간송미술관 삼성미술관리움 호림박물관이 지금까지는 소장품 수를 늘리는 데 치중했지만 지금은 전시 기획이나 전시 방법에 대한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고 했다. “요즘은 박물관에서 소장품 목록을 책으로 펴내는 도록 하나를 만들어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디자인이나 가독성, 기록으로서의 가치 등을 꼼꼼하게 따져 수준 높은 도록이 나오고 있더군요.” 박물관이 교육 기능을 강화하는 것도 요즘의 추세다. “책에서만 배우는 것보다 체험학습을 강조하는 최근의 교육 흐름을 박물관이 적극 수용하고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어린이 박물관이 따로 생겼고, 많은 박물관에서 단순히 소장품을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유물을 직접 만들어 보거나 하는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운영하고 있습니다.” 성인들은 요즘 박물관을 ‘힐링’ 코스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게 김 회장의 생각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주변 조경을 공원처럼 꾸민 후 용산가족공원과 연결해 놓았다. 박물관을 찾으면 자연스레 산책이나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최근에는 폐교한 시골 분교 건물을 박물관이나 미술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김 회장은 요즘 세계 어딜 가든 방문지의 박물관을 꼭 둘러본다. “세계 어딜 가서 봐도 똑같은 유물은 단 한 점도 없습니다. 모든 게 달라요. 수많은 전시품이 또 각각의 역사와 스토리를 담고 있습니다.” 김 회장은 앞으로 박물관이 ‘공감’의 기능을 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얼마 전 인천에 있는 이민사(移民史)박물관에 갔다가 당시 사람들의 처절함이 느껴져서 눈시울이 붉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과거와의 ‘교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박물관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책으로는 느낄 수 없는 감동을 박물관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이원주기자 takeoff@donga.com}

“언제부턴가 서울 홍익대 앞은 복잡한 밤 문화의 거리가 돼 버렸죠. 이곳에 밝고 조용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경의선 책거리’ 기획 책임자인 김정연 총감독(40)은 “예술의 거리에서 유흥가로 변한 홍대 앞에 공간의 정체성을 다시 심고 싶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경의선 책거리는 지하철 홍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시작해 길이 250m의 옛 경의선 철길 터에 들어선 공간이다. 공원과 서점 기능이 공존한다. 이곳은 책거리가 생기기 전까지 홍대 근처에서 가장 어둡고 으슥한 공간으로 인식됐다. 새로 조성된 책거리에는 문학부터 아동, 예술, 여행 서적까지 다양한 책이 9개 주제별로 분류돼 철길을 형상화한 가건물에 차례로 전시됐다. 가건물 안에서는 책을 읽거나 살 수 있다. 공간을 꾸미는 과정에서 김 감독이 우선 염두에 둔 것은 ‘지역 정체성’이었다. 특히 경의선 철길 바로 옆에 살던 주민들의 의견을 먼저 들었다. “경의선 철길은 과거에 살인 사건이 발생할 정도로 음침한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공간을 밝고 개방된 분위기로 만드는 데 신경을 썼죠.” 김 감독은 내년에 책거리의 조명을 보강할 예정이다. 서울 마포구에 가장 많은 업종이 여행사라는 점도 공간 배치에 반영했다. 책거리 초입에서는 여행 관련 책들이 먼저 보이게 했다. 김 감독은 공연, 전시 분야에서 보기 드문 ‘책 행사 전문 기획자’다. 연극제, 페스티벌을 기획하다 2005년 경기문화재단에서 도서관전을 기획한 것을 시작으로 책 행사와 인연을 맺었다. 그 뒤 ‘서울 와우북 페스티벌’ ‘서울국제도서전’ 등 굵직한 행사를 도맡아 왔다. 그는 “책은 정적인 매체처럼 보이지만 가장 빨리 트렌드를 흡수하고 무궁무진한 콘텐츠를 가진 매체”라며 “이런 점이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즐겁고 쉬운 일만 있는 건 아니다. 책 행사에서 필수인 ‘저자와의 만남’은 베테랑인 그에게도 아직 진땀 나는 일이다. 책을 쓰는 동안 외부와 연락을 끊는 작가도 많고 글로 소통하는 작가들의 특성상 독자를 직접 만나 말로 소통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저자도 적지 않다. 지금도 김 감독은 출판계 사람들과 수시로 만나 ‘얼굴 도장’을 찍으며 인맥을 쌓고 있다. 그는 책 행사 기획으로 전문 분야를 개척했지만 다양한 분야를 섭렵해왔다. 대학에서는 미술교육을 전공했다. 13년 전 우연히 배우게 된 살사·탱고 실력은 대학 강의까지 나갈 정도다.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은 행사 기획에도 반영된다. 그가 지휘하는 책 행사에는 관람객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다. 경의선 책거리에도 디자이너들이 만든 책 디자인 전시회와 ‘팝업북’(책을 펼치면 모형이 입체로 펼쳐지는 책 공예) 만들기 프로그램 등 이색 행사들이 잇달아 진행된다. “경의선 책거리는 앞으로도 참가자들의 의견을 반영하며 변화할 예정”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가장 해 보고 싶은 책 전시는 어떤 것인지 물었다. “어린이들이 마음껏 즐기고 책을 읽으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어요. ‘어린이 복합 문화공간’이라고 할까요. 아이들 가족도 편하게 찾아와 머물 수 있는 공간이면 더 좋겠죠.” 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프로농구 추일승 감독(53·사진)에게 지난해는 최고의 해였다. 그가 이끄는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농구팀은 파죽지세로 승리를 챙기며 14년 만에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추 감독 역시 개인 통산 첫 프로리그 우승이라는 감격을 맛봤다. 정상은 오르는 것보다 지키는 게 더 어렵다고 했지만 지금까지는 순항 중이다. 올해 리그가 개막한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리그 1위를 탄탄히 유지하고 있다. 그가 이끄는 팀은 올해도 우승 후보 1순위로 평가받는다. “사실 예전부터 책을 한 권 쓰고는 싶었는데, 우승 한 번 못 해본 감독이 무슨 책이냐 싶어서 참아 왔습니다. 이제는 그래도 자격이 생기지 않았나 싶었어요.” 추 감독은 최근 지도자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책 ‘심장을 뛰게 하라’를 펴냈다. 구상은 5, 6년 전부터 했던 책이다. 첫머리부터 그는 ‘소통’을 강조했다. 그는 ‘추젠틀’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작전타임 때 선수들을 다그치지 않고 훈련 때도 선수들의 얘기를 많이 듣는다. 소통의 중요성은 경험에서 배웠다. “안 겪어 본 게 없어요. 농구에 몸담은 사람 중 저만큼 많은 경험을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의 이력은 다양하다. 농구계에서 ‘비주류 중의 비주류’로 꼽히는 홍익대 농구부 창단 멤버로 뛰었다. 1985년 실업팀 기아에 입단했지만 허재, 강동희, 김유택 등 국가대표급 동료들의 활약을 보고 농구를 접었다. 이후 기아자동차 노무관리팀 사원으로 근무하다가 선수단 매니저로 들어가면서 농구와 인연을 다시 이어갔다. 이후 상무 감독을 거쳐 프로팀 감독이 됐지만 중간에 재계약 실패로 또 2년의 공백이 생겼다. 그 사이 방송 해설자, 스포츠의류 사업가, 농구 웹진 대표 등 명함을 수차례 바꿨다. 그는 “내가 원하는 결과를 내려면 함께 일하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게 우선이라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리더가 원하는 결과를 내려면 다양한 구성원의 장단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적재적소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주는 게 기본이더군요. 그러려면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훨씬 중요했습니다.” 추 감독은 “모든 선수는 필요할 때 필요한 역할이 있다. 그 역할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에이스라도 절대 기용하지 않는다”며 목소리에 힘을 줬다.이원주기자 takeoff@donga.com}

“법과 제도가 올곧게 서지 못하면 정치판이 사심과 불공정으로 물들게 되죠. 국가의 붕괴는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지난달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를 펴낸 정병석 한양대 특임교수(63·전 노동부 차관)가 쏟아낸 말 속에는 뼈가 있었다. 조선시대 실패한 제도를 오늘날에 비추어 봐도 별다른 시대적 차이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 중구 세종대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만난 그는 “두루뭉술한 제도 때문에 국가 경쟁력이 약해진 조선의 상황은 지금 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며 말을 꺼냈다. 정 교수는 노동경제학을 전공하고 30년 동안 노동부 주요 보직을 거쳐 노동부 차관을 지냈다. 그는 저서에서 조선시대 정치와 관료들의 행태가 당시 백성들의 의욕을 꺾었고 그로 인해 조선의 ‘국가 경쟁력’이 약화됐다고 분석했다. 정 교수의 궁금증은 성리학을 국가의 이념으로 삼은 한중일 3국 중 왜 유독 한국은 국력이 다른 두 나라보다 약했는가에서 출발했다. 관직에 오래 근무한 경력을 살려 조선과 성리학의 원조인 중국의 국가제도를 면밀히 분석하다 ‘디테일’의 차이가 작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는 결론을 냈다. “조선시대 법과 제도를 분석해 보면 ‘총론’만 있고 ‘각론’은 없었다”며 “백성들이 납득할 만한 균형 있는 국가 운영이 될 수 없는 구조”라고 설명한다. “조세제도인 공물제만 봐도 국가에서는 어떤 물품을 납품하라고 군·현 단위로 배정만 했습니다. 군수나 현감이 누구에게 어떤 물건을 내라고 하든 상관 안 했죠. 그러다 보니 양반은 납세 의무에서 쏙 빠지고 신분이 낮은 백성들만 무거운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이처럼 제도가 명확히 정비되지 않은 이유는 조선이 중국에서 도입한 성리학이 본토와 다르게 적용됐기 때문이라고 정 교수는 분석했다. 도덕을 최고 가치로 내세우던 조선 성리학자들이 법과 규정을 치밀하게 정비하는 것을 ‘성리학에 반하는 조치’라며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면서 적지 않은 관료들은 허술한 제도 아래에서 자신의 의무를 피해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덧붙였다. 조선시대 관료들 사이에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법망 사이로 쏙쏙 빠져나가는 권력형 비리, ‘흙수저’로 표현되는 사실상의 계급 등 조선시대 문제는 오늘날에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다. 조선시대에는 어떤 식으로 해법을 찾았을까. 정 교수는 “우선 공론의 장에 모든 것을 열어놓고 소통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100년에 걸쳐 완성된 조세제도인 대동법의 제정 과정을 보면 놀랍습니다. 왕부터 지방 향촌까지 조세제도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을 폭넓게 묻고 토론했습니다. 세금과 국가 재정담당자가 아니라도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었고, 그 시대에 17만 명분의 여론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정 교수는 “이처럼 모든 가능성을 열고 소통한 뒤 최고 권력층에도 성역(聖域)이 존재하지 않는 공평하고 강력한 법과 규정이 적용될 때 혼란스러운 질서가 다시 자리를 잡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정치인과 관료의 책임을 강조했다. “제도를 만드는 것도 결국 정치인과 관료들이기에 이들의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책을 쓰면서 절감했습니다. 그들이 딴생각을 하는 순간 국가 기반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이원주기자 takeoff@donga.com}

“시중에서 파는 전동 휠체어는 300만 원이 넘는 비싼 가격 때문에 선뜻 구입하지 못하는 장애인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수동 휠체어에 부착하는 보조 전동장치는 휠체어 아래쪽이나 뒤쪽에 붙이게 되어 있어 오히려 장애인을 넘어뜨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이런 단점을 모두 보완하기 위해 설계도를 세 번이나 완전히 갈아엎었습니다.” 대한기계학회가 주최하고 미래창조과학부, 경암교육문화재단, 동아일보가 후원하는 제6회 전국학생설계경진대회가 12일 서울 고려대에서 열렸다. 대상을 차지한 KAIST 팀은 수동 휠체어에 붙이는 전동 주행 보조기 작동 원리를 설명하면서 “몸을 굽히거나 틀지 않고 휠체어에 붙일 수 있도록 하면서 가격은 제작 원가 기준 20만 원대로 낮췄다”라고 설명했다. 심사를 총괄한 이재응 집행위원장(중앙대 기계공학부 교수)은 “비슷한 아이디어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착안점이 좋았고 곧바로 상품으로 팔아도 될 정도로 완성도도 훌륭했다”라고 평가했다. 이 대회는 사회적 이슈를 공학기술과 접목한 설계 작품을 학생들의 아이디어로 선보이는 행사다. 경쟁은 치열했다. 지난해보다 40여 팀 많은 170개 팀이 대회에 뛰어들었고 이 중 대학부 15팀, 고등부 15팀이 최종 본선까지 살아남았다. 올해 주제는 ‘안전’. 지하철 스크린도어 사고, 버스 전복 사고 등 운송 수단 안전사고가 잇따르면서 경각심을 갖자는 취지였다. 대학부는 ‘수송 수단 안전’에 초점이 맞춰졌다. 참가팀은 대부분 기존 상품의 단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도 단가를 낮춘 작품을 선보였다. 아기가 타고 있을 때 보호자가 손잡이를 놓으면 유모차가 자동으로 멈추는 ‘유모차용 안전 제동 장치’를 설계한 유한대 팀(금상) 역시 “전자센서를 쓰면 훨씬 편하게 만들 수 있었지만 제작 단가를 고려해 와이어와 스프링만으로 동작하도록 만들었다”라고 설명했다. 고등부 주제는 ‘가정 안전사고 예방 기술’이었다. 집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고를 막기 위한 아기자기한 작품들이 전시됐지만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 철저히 연구한 흔적이 역력했다. 대상을 탄 군산기계공고 팀이 설계한 ‘빨래걸이 비상 알람 방범창’은 방범창과 경보 알람, 빨래걸이 기능을 창틀 하나에 모아 놓은 ‘아이디어 집약체’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팀은 최근 잇따라 발생한 창문 낙상 사고나 허술한 방범창 때문에 생긴 범죄에 주목해 개선점을 찾아냈다. 정인곤 경암교육문화재단 이사는 “대회에 참가하는 학생들의 창의성과 작품 완성도가 매년 높아지고 있다”라며 “더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꿈을 구체화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라고 기대했다. 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44년 중 18년을 다른 사람처럼 살아온 사람이 있다. 자신의 본명도 감췄다. 하지만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인생’을 살며 식지 않은 인기를 얻었다. 지금은 “타인의 이름이 진짜 내 이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고 말한다. 성대모사의 달인 배칠수(본명 이형민·44) 씨를 서울 마포구 상암 디지털미디어센터(DMC)에서 만났다. “점심 먹으면서 인터뷰 하시죠.” 인터뷰 시간은 1시간을 넘길 수 없었다. 낮 12시에서 오후 2시까지 tbs라디오 ‘배칠수 전영미의 9595쇼’를 진행한 뒤 오후 3시 MBC라디오 방송에 출연하는 사이 짬을 내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서울 중구 남산에 있던 tbs 사옥이 올해 7월 DMC로 옮겨오면서 겨우 식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1주일에 약 30건. 체력 부담을 느껴 예전보다 크게 줄였다. 전성기 때는 하루 7건 이상씩 스케줄을 소화했던 그다. 그의 목소리는 1999년 ‘FM 음악도시’부터 전파를 탔다. 그 후 ‘배철수의 음악캠프’ ‘와와쇼’ ‘최양락의 재미있는 라디오’ 등 간판급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인생의 4할을 ‘이형민’이 아닌 ‘배칠수’로 살았다. 어릴 때부터 선생님 등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를 곧잘 흉내 내긴 했지만 그게 직업이 될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고등학교 때는 프로 보디빌더를 꿈꿨고, 대학도 재능대학 사회체육학과를 졸업했다. 잠시 헬스클럽도 경영하다 아내의 권유로 출전한 성대모사 대회 ‘슈퍼보이스탤런트 선발대회’에서 대상을 타면서 인생 행로가 크게 바뀌었다. 정작 ‘자신’이 지워져 아쉽지는 않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며 딱 부러지는 답이 돌아왔다. “가끔은 본명을 저도 의식하지 못하고 지내다 서류 같은 데 서명할 일이 생기면 그때야 ‘아, 내 본명이 이형민이었지’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 목소리를 빌렸을 뿐 내 생각을 얘기하고 내 연기를 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진행자, 담당 PD와 자신이 맡는 코너에 대해 의견을 나눌 때도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한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프로’ 의식에 놀란다. 지금까지 단 한 번의 방송도 그 때문에 차질이 생긴 적은 없다. 그는 다음 날 일할 때 컨디션을 최상으로 유지하고 싶어서 뒤풀이나 술자리도 전혀 가지 않는다. 그래도 배철수 씨를 비롯해 최양락 전영미 씨 등 그와 일을 해봤던 사람들은 그와 무척 가깝게 지낸다고 한다. 단순히 연기할 대상의 목소리를 듣고 따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말투나 습관이 생긴 배경까지 철저히 연구한다. 그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성대모사를 준비하면서 ‘에∼’ 하는 추임새의 배경을 찾아봤더니 즉흥 연설이 많기 때문이었다. 가장 적절한 용어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나왔던 것”이라며 “반면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별로 막힘이 없었는데, 미리 작성된 연설문을 낭독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그는 “일단 방송인 생활 20년을 채운 뒤 다음 인생을 고민하겠다”고 말해 왔다. 2년 후면 20년이 된다. ‘제2의 인생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형민의 목소리가 나왔다. “단종된 자동차를 새 차처럼 제작하는 자동차회사 ‘모헤닉 게라지스’의 톱 리더 직책을 9월부터 맡게 됐습니다. 최고경영자(CEO) 역할을 하는 책임 있는 자리입니다.” 그는 구형 자동차 모델 마니아였다. 지금도 1990년대 초 생산된 갤로퍼 승용차를 새 차처럼 만들어 타고 있다. “2년 뒤에도 방송 생활을 할지 안 할지는 모르겠지만, ‘얼굴 마담’으로 자동차 회사 일을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이원주기자 takeoff@donga.com}

“미국 교과서에 ‘East Sea(동해)’ 표기를 집어넣은 건 수많은 미국 교민들입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역사를 책으로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2014년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미국 교과서 동해 병기 운동’을 주도한 린다 한 글로벌한인연대 회장(65)이 방한했다. 5일 서울 팔래스호텔 출판기념회 및 동해 병기를 추진하는 모임(동추모) 발대식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그는 이날 행사장에서 가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2014년 동해 병기 운동 당시 한인들의 열의를 떠올렸다. 워싱턴 한인 연합회가 주도한 이 운동의 결과, 미국 교과서 지도에 표기된 ‘일본해(Sea of Japan)’를 ‘동해(East Sea)’와 함께 표기하도록 버지니아 주의 법이 개정됐다. 이 법이 발효된 뒤 미국에서는 버지니아 주, 메릴랜드 주 등 7개 주 학교에서 동해 표기가 된 지도를 볼 수 있게 됐다. 한 회장이 쓴 책 ‘동해 병기’에는 2013년부터 약 1년간 교민들이 이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했던 노력들과 함께 옛 지도 70여 장이 첨부돼 있다. 모두 한 회장과 교민들이 버지니아 주 의회에 제출한 자료들이다. 한 회장은 “당시 동해 병기 법안 통과를 방해하려는 일본의 방해가 극심했기 때문에 정확한 사료로 무장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일본은 대사관 차원에서 “독도가 일본 땅이니 동해도 당연히 일본해로 표기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로비스트까지 동원해 일본 사업체를 모두 철수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훼방을 놓았다. 일본의 조직적인 방해에 대응하려면 교민들이 최대한 힘을 합해야 했다. 한 회장은 워싱턴 한인협회와 함께 ‘교민 1명이 5달러 성금 내기 운동’을 벌여 활동 자금을 모았다. 버지니아 주 의회에서 해당 법안 통과를 결정하는 날에는 교민 400명이 한복을 입고 달려가 의회 안팎에서 동해 병기의 필요성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퍼포먼스도 벌였다. 버지니아 주 의원들이 15만 명에 이르는 한국 교민의 요구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가 주도한 운동이 성과를 내면서 교민 사회도 크게 고무됐다. “만리타향에서 산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힘들고 외롭고 서러운 일이 많아요. 하지만 동해 병기 운동을 통해 ‘우리가 뭉치면 법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이 교민 사회에 생겼죠.” 한 회장은 이 여세를 몰아 모든 교민들의 목소리를 한곳으로 모을 수 있는 방안을 구상 중이다. 글로벌 한인연대를 중심으로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교민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수렴하겠다는 것이다. 한 회장은 “여러 나라에 사는 교민들이 차별을 덜 받고 조금이라도 더 혜택을 볼 수 있도록 하려면 이런 하나 된 목소리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교민 사회에 대한 관심과 응원도 부탁했다. “교민들은 스스로를 독립군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상황에서 힘들지만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교민들도 외국의 법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국내에 살고 있는 국민들이 힘을 보태주면 교민들은 더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이원주기자 takeoff@donga.com}

“단순히 세계의 무형유산을 주제로 한 영화를 상영하는 축제만은 아닙니다. 한국이 각국의 무형유산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데 엄청난 노력과 공을 들이고 있다는 걸 세계에 알리는 작업이죠.” 30일부터 다음 달 3일까지 전북 전주시에서 열리는 ‘국제 무형유산 영상 축제’를 준비하고 있는 김건 집행위원장(전북대 기록관리학과 교수·51·사진)은 28일 이번 행사의 주안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국제 무형유산 영상 축제는 세계 각국의 무형유산을 주제로 제작된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집중적으로 상영하는 축제다. 한국에서는 2014년 처음 행사가 열렸고 올해로 3번째를 맞았다. 조직위원회는 올해 16개 국가의 무형유산을 담은 영상 총 26편을 준비해 상영한다. 김 위원장은 “특히 올해는 지난 1, 2회 행사에서 일반 관람객들로부터 ‘작품이 너무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 점을 반영해 영상 상영 전에 5∼10분간 해설사들이 관련 내용을 설명해 주는 프로그램을 추가했다”고 전했다. 어린 학생들이 접하기 쉽도록 애니메이션 상영도 늘렸다. 행사 중 상영되는 모든 상영물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김 위원장은 “축제에서 상영되는 영상물은 기록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영상미에서도 비상업 영화로서 가치가 높다고 영화인들이 인정한 작품을 골라낸 수작들”이라고 말했다. 이번 영상 축제는 한국의 무형유산 보존 노력을 세계에 알리는 기회다. 이번 행사가 끝나고 11월이 되면 제주 해녀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될지가 결정된다. 김 위원장은 “이번 축제는 전 세계에 한국이 무형유산 보존 작업에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려주는 홍보 효과도 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원주기자 takeoff@donga.com}

“문과로 치면 이런 겁니다. 경영자가 되어 재계를 이끌어 갈 사람들이 학부 1학년 때부터 ‘호텔경영’ ‘기업경영’을 배우는 것보다 경영학 외에도 인문학과 사회학 기초를 배우는 게 낫다는 거죠.” 최근 서울 덕수궁 인근에서 만난 김도연 포스텍(포항공대) 총장은 내년부터 학부생 전원을 학과 구분 없이 선발하기로 한 개혁안을 두고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해 9월 1일 취임한 그는 임기 2년째를 맞아 개혁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학부생 무전공 선발 외에도 교수 중 약 50명을 기업이 추천한 인사 중에서 뽑는 ‘산학일체 교수’ 제도를 도입하는 등 대대적인 개혁안을 내놓은 상태다. 김 총장은 개혁안을 장기간에 걸쳐 구상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서울대 학생부학장으로 재직하던 1990년대 초반에도 학과를 통합해 학부제로 개편하는 업무를 했다. 학부생들이 폭넓게 배워야 한다는 생각은 그때부터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스무 살 학생들이 자기 의지로 전공을 정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닙니다. 지금도 이과 학생들은 공부 제일 잘하면 의대 가고 그 다음 공대 인기 학과를 가는 등 전공이 점수에 따라 정해지잖아요.” 전공 없이 학생을 뽑으면 학생들이 원하는 전공을 선택하기 위해 학부 1학년 때부터 지나친 경쟁이 유발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김 총장은 “전공을 결정할 때 320명 전원이 한 학과로 몰리더라도 모두 받아 줄 계획”이지만 “학생들 간의 무의미한 경쟁은 시키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이 세계적인 인재가 될 거라고 믿습니다. 학교 내 경쟁, 국내 경쟁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경쟁 상대가 아니라 함께 앞으로 나가야 할 사람들이죠.” 다만 김 총장은 “세계와는 치열하게 경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여름방학을 3개월로 늘리고 해외 경험을 충분히 쌓도록 권장하는 이유도 앞으로 경쟁할 상대가 세계 대학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 프랑스 유학을 갔던 김 총장은 “당시 프랑스 뉴스 중 국제뉴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은 것을 보고 ‘쇼크’를 받았다”며 “그런 환경에서 어릴 때부터 뉴스를 접하면서 활동 무대를 세계로 확장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떠올렸다. 포스텍 개혁 바람은 교수들도 피해 갈 수 없다. 김 총장은 “앞으로 교수들이 쓰는 논문은 영향력과 질로 평가할 예정”이라며 “교수들이 논문 편 수 기준을 맞추기 위해 ‘논문 쪼개 쓰기’를 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겠다”고 말했다. 포스텍만 변한다고 대학이 바뀔까. 김 총장의 관심은 이제 한국 이공계 연구 풍토 전반에 대한 개혁으로 옮겨 가고 있다. 그는 다음 달부터 시간을 쪼개 최근 설립된 ‘여시재’의 이사로 참여해 과학기술 분야의 전문가로 활동한다. 여시재는 조창걸 한샘 명예회장이 사재 4000억여 원을 출연해 만든 민간 싱크탱크다. 김 총장은 “시간은 전혀 빼앗지 않겠다고 해서 참여하겠다고 했다”며 “동북아 정세 속에서 대한민국 발전 방향을 찾자는 취지에 동감했다”고 설명했다. 여시재에서 김 총장은 학생들에게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나 연구 주제를 제안받고 이를 발전시키거나 지원해 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앞으로 한국 과학기술 발전 방향이 크게 바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 과학기술은 선진 기술을 얼마나 잘 따라가느냐에 중점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잘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뛰어넘을 때가 됐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내고 다른 나라들이 우리를 따라오도록 해야 합니다. 시간이 많이 필요한 숙제겠지만, 지금부터 시작해야죠.” 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미국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미국의 유명 싱크탱크인 ‘카토(CATO) 인스티튜트’에서 연구원을 지낸 교육 정책 전문가 케이시 라티그 씨(사진). 연구소나 대학 등에서도 계속해서 ‘러브 콜’이 오지만 그는 한국에 남아 ‘북한 이탈 주민 글로벌 교육센터(TNKR)’를 운영하고 있다. ‘TNKR’는 탈북 뒤 남한에 온 새터민들에게 영어를 무료로 가르쳐 주는 비영리 교육기관이다. 운영 자금은 100% 후원금으로 마련하고, 영어를 가르쳐 주는 원어민 멘토는 모두 자원봉사자다. 운영이 될까 싶지만 2013년 3월 처음 만들어진 후 지금까지 새터민 250여 명이 영어 교육을 받았고 외국인 자원봉사자도 440여 명이 참여했다. 최근 서울 마포구 독막로 TNKR 사무실에서 만난 라티그 씨는 “새터민은 계속 찾아오는데 자원봉사자가 부족해 지금도 새터민 90여 명 정도가 원어민 멘토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수업 방식은 모두 ‘학생’인 새터민이 결정한다. 새터민은 자기를 가르쳐 줄 원어민 멘토를 자기가 직접 정한다. 공부할 교재나 수업 방식도 ‘학생 새터민’이 직접 결정하고, 원어민 강사가 자신과 맞지 않다고 생각하면 강사를 교체할 수도 있다. 이 같은 운영 방식을 만든 라티그 씨는 “새터민들이 큰 기관의 교육 방침을 따라가지 않고 철저하게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1990년대 후반에 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러 한국에 온 적이 있는 라티그 씨는 2010년 다시 한국을 찾았다. 처음엔 저소득층 교육에 관심을 두고 활동하다 북한의 실상을 담은 자료를 읽은 뒤부터 탈북자와 북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다. 2012년 2월 탈북자 31명이 중국에서 체포된 뒤 북한으로 강제 송환됐을 때는 아는 외국인들을 불러 모아 주한 중국대사관 앞에서 77일 동안 강제 송환을 중단하라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명문대 출신 외국인이 한국에서 소위 ‘돈벌이도 안 되는 일’을 하다 보니 일부에서는 그에게 의심 섞인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라티그 씨는 “내 연구 분야인 ‘자유로운 교육’이 새터민들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는 것을 보는 게 최고의 보람”이라며 “미국에서는 안정된 삶이 보장되겠지만 지금 이 일이 훨씬 재미있다”고 말했다. 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전·현직 서울대 교수들이 직접 만든 미술작품 60점을 한자리에서 선보인다. 21일부터 서울대 우석갤러리에서 열리는 ‘학자, 붓을 잡다’ 서화전에는 이미 ‘당대 학문의 고수’로 유명한 서울대 교수들이 ‘취미’와 ‘일탈’로 완성한 글씨와 그림들이 전시된다. 서울시장·한국은행 총재 등을 지낸 조순 전 경제부총리는 서예 글씨를, 암 권위자인 박재갑 국립암센터 석좌교수는 새 한 쌍이 새끼들에게 먹이를 주는 모습을 그린 동양화를 내놓았다. ‘고고학의 대가’로 불렸던 고 김원룡 인문대 교수가 그린 크로키(대상의 특징을 빠르게 스케치하는 서양화 기법)풍으로 그린 수묵화 ‘인문대 교수실 풍경’도 전시됐다. 한국 화학공학의 선구자로 올해 3월 타계한 고 이재성 전 공대 학장의 풍경화도 내걸린다. 이 전시회를 기획한 사람 역시 법학 연구로 이름을 알린 최종고 법대 명예교수다. “작품 60점을 모으는 데 1년 반이 걸렸습니다. 모아 놓고 나니 한국 현대 학문의 주축을 이루던 교수들의 ‘뒷모습’을 본다는 생각이 들었죠.” 최 교수는 17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가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최 교수는 법대생이면 누구나 교과서처럼 공부했을 ‘법학통론’의 저자이면서 ‘법과 미학’이라는 책도 썼을 정도로 미술에 조예가 깊다. 직접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면서 작품집을 내거나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 준비는 최 교수가 개교 70주년을 맞아 예술적 소질을 갖춘 서울대 교수들의 작품을 한꺼번에 모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동이 걸렸다. 그는 “지금까지 서울대가 배출한 졸업생들이 총 33만 명이고 석·박사만 11만 명”이라며 “졸업생들이 70주년을 맞아 전시회를 핑계 삼아 학교에 한번 찾아오고 만날 수 있는 계기라도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이미 고인이 된 교수들의 작품을 찾기 위해 유족들을 만나기도 했다. 2011년 타계한 신광현 영문학과 교수의 절명시를 우연히 발견해 내고는 신 교수의 딸을 찾았다. “신 교수의 딸이 홍익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바로 달려갔습니다. 아버지의 글이 작품으로 남을 수 있도록 붓글씨를 써 달라고 해서 그 글을 전시했죠.” 고인이 된 또 다른 교수의 서예 작품을 받기 위해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가 울먹이는 유족들을 달래기도 했다. 1947년생인 최 교수는 서울대와 나이가 같다. 최 교수가 입학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서울대에 몸담은 기간은 50년. 학교 사랑이 각별할 수밖에 없다. 이달 초에는 서울대의 1970년대 연건캠퍼스 시절 모습부터 현재 관악캠퍼스 모습까지를 두루 담은 시화집 ‘캠퍼스를 그리다’를 펴내기도 했다. 전시회가 서울대 출신, 그중에서도 서울대 교수들만의 행사가 아닐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하지만 최 교수는 되도록 많은 사람이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급변하는 사회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를 찾고 지켜내는 ‘대학다움’을 전시하는 행사인 동시에 프로가 아닌 사람들이 정성으로 작품을 다듬어낸 ‘자기계발’을 선보이는 자리입니다.” 최 교수는 “학자들의 작품에서 문자향(文字香·글의 향기)과 서권기(書卷氣·책의 기운)를 느껴 보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 “아유 부끄러워요. 돈을 조금 보탰을 뿐인데…”아프리카의 갈증 풀어준 ‘우물 할머니’75세 기부왕 노국자 씨# 국제 구호단체 기아대책이 6일부터 8일까지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아시아 및 아프리카 10개국 어린이 100여 명을 초청해 ‘희망 월드컵’ 축구대회를 열었습니다.이 곳에서 유독 돋보인 사람은 푸근한 인상의 노국자 할머니(75).#. 그는 이번에 네팔 어린이 10명의 항공료 및 체류비 3300만 원을 전액 부담했습니다.그는 이 큰 돈을 어떻게 마련했을까요?#“절대 저 혼자 힘으로 한 게 아니에요.네팔 어린이들을 초청할 비용이 필요하다고 얘기하니주변에서 십시일반으로 도와줬어요.원래 필요한 돈보다 더 많이 모였죠”-노국자 씨-#. 그가 기부에 관심을 가진 건 2006년아프리카 물 부족 국가의 현실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후입니다.“아이들이 물병 하나에 얼마나 기뻐하는지… 보기만 해도 마음이 아팠어요.헌 병을 주워 돈을 마련해야겠다 싶었죠”# 노 씨는 처음엔 길을 가다 보이는 폐품을 모아 팔았죠.이것이 폐품 수집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빈민에게 피해를 줄까 우려해이제는 자신과 지인 집에 있는 헌 옷, 빈 병을 모아 팝니다.이렇게 모은 귀한 돈을 저개발 국가에 기부하는 거죠.# 지난 10년간 기부한 돈은 1억 원이 넘습니다. 그의 기부로 만들어진 우물만 24개“우물 하나를 파는 데 600~700만 원이 들어요.아프리카 여성들의 직업교육을 위한 재봉틀, 아프리카 서민들이 최고 재산으로 인식하는 염소 등도 기부하고 있어요.”# 노국자 씨는 고액 기부자 모임 ‘필란트로피 클럽’의 최고령 회원입니다.그는 최근 북한 어린이에 관심이 많은데요.“기근 때문에 북한 어린이들이 무척 힘들잖아요. 작지만 도움을 주고 싶어요.”# 한 푼 두 푼 힘들게 모은 돈으로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는 노국자 씨.그 따뜻한 희망이 빛이 세계 곳곳에서 빛나고 있습니다.한가위를 맞아 우리 모두 이 ‘나눔의 천사’를 본받아야겠습니다.원본/이원주 기자기획·제작/하정민 기자·조현정 인턴}

국제 구호 단체 기아대책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10개국 어린이 10여 명씩을 초청해 6일부터 8일까지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희망 월드컵’ 축구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 유독 돋보인 사람은 70대 할머니 노국자 씨(75). 기업가도, 고액 자산가도 아닌데 어린이 대표선수의 교통비와 체류비를 후원한 구단주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교사 출신의 평범한 ‘옆집 할머니’지만, 이번에 네팔 어린이들의 항공료와 체류비 3300여 만 원을 모두 부담했다. “저 혼자 힘으로 한 게 절대로 아닙니다. 주변에서 모두 힘을 모은 거죠.” 8일 서울 동대문구의 한 식당에서 만난 노 씨에게 수천만 원을 어떻게 기부할 수 있었는지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네팔 어린이들을 초청할 비용이 필요하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광고하듯 얘기하고 다니다 보니 어느 새 필요한 돈보다 더 많은 돈이 모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한 것은 남들이 기부하는 만큼 나도 기부하고, 폐품을 모아 판 돈을 합친 것밖에 없다”며 벙긋이 웃었다. ‘왜 하필 폐품을 파는 방법을 택했느냐’는 질문에 노 씨는 “2006년 아프리카 물 부족 국가의 현실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고 기부를 처음 결심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물병 하나를 받아들고 무척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헌 병이라도 주워 팔아서 기부를 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길을 가다 보이는 폐품을 모아 팔았다. 그러다 길거리 폐품 수집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지금은 자신의 집이나 지인들의 집에 있는 헌 옷가지나 빈 병을 모아서 팔고 있다. 이렇게 모은 돈은 통장을 따로 만들어 기부금으로 보낸다. 가족부터 주변 지인들도 처음엔 모두 말렸지만 지금은 먼저 폐품을 가져다주고 좋은 데 같이 내 달라고 쌈짓돈까지 맡기고 있다. 10년간 노 씨가 모아 기부한 돈은 1억 원을 훌쩍 넘겼다. 그의 기부로 세계에 만들어진 우물은 지금까지 24개. 우물 하나를 파는 데 600만∼700만 원이 든다고 한다. 노 씨는 우물 외에도 아프리카 여성들의 직업교육을 위한 재봉틀이나 아프리카에서 재산으로 인식되는 염소 등도 기부하고 있다. 노 씨는 기아대책의 고액 기부자 모임인 ‘필란트로피 클럽’의 최고령 회원이기도 하다. 노 씨의 관심은 북한 어린이들에게도 쏠리고 있다. “기근 때문에 북한 어린이들이 무척 힘들어하고 있잖아요. 지금부터는 북한 어린이들이 건강하게 클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국채보상운동은 단순히 일제가 떠안긴 빚을 갚으려 한 운동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운동, 학생운동, 대규모 언론 캠페인이 이 안에 모두 녹아 있습니다. 시티즌 오블리주, 그러니까 시민들의 솔선수범이라고 할 수 있어요.” 1907년 2월 일제가 침략 자금을 차관 형식으로 떠넘긴 돈을 갚기 위해 온 국민이 일어선 국채보상운동이 내년이면 110주년을 맞이한다. 이를 앞두고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기획전 ‘국채보상운동―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가 열리고 있다.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와 함께 이 전시를 기획한 김영호 전 산업자원부 장관(76). 2일 전시장에서 만난 김 전 장관은 국채보상운동을 이렇게 정의했다. 그는 “서구의 시민운동과 혁명은 대부분 시민의 ‘권리’를 강조한 운동이었다”며 “국가 위기 상황에서 국민 스스로가 ‘책임’을 다하자며 일어난 운동은 세계적으로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경제사(經濟史)를 연구한 김 전 장관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이 뚜렷했던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던 상인 출신인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일으키고 확산시킨 점에 관심을 갖게 됐다. 나라가 어려워졌다고 힘들여 번 돈을 덜컥 내놓겠다고 한 장사꾼의 속마음이 궁금했다고. 그는 1973년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인 대구에 있는 경북대 교수로 발령받고 난 뒤 서상돈의 흔적을 찾으러 서문시장을 수시로 찾아갔다. 김 전 장관은 국채보상운동 기부금 영수증 딱 한 장만 들고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영수증에 적힌 이름의 후손을 찾아 다른 자료 하나를 찾고 대한매일신보 등 당시 신문기사에 등장한 지역을 찾아 사료를 기부받거나 구입했다. 김 전 장관은 “사료가 한곳으로 모일 구심점이 없었기 때문에 발로 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발굴한 사료는 1997년 90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대구에 지은 기념관으로 넘겨지고 있다. 김 전 장관은 국채보상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한 사람들이 여성, 학생, 상인 등 가장 천대받고 힘없는 계층들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새삼 놀랐다. 예술의전당에서 그가 보여준 자료는 ‘앵무’라는 기명을 가진 기생이 돈을 내며 남긴 말이었다. 당시 18세였던 그 기생은 집 한 채를 지을 수 있을 금액인 100원을 기부하며 거국적인 운동 참여를 촉구했다. 김 전 장관은 “기득권을 갖고 있었던 남자들을 부끄럽게 만든 여성이었다”며 “앵무를 주인공으로 전기(傳記)라도 써 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 전 장관은 “당시 어린이와 학생들이 푼돈을 모아 기부하고, 도적 떼마저 이름을 밝히지 않으며 돈을 기부했다는 내용이 숱하게 남아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일제의 방해로 실패했지만 당시 모인 돈이 나중에 학교 설립에 쓰이면서 국채보상운동은 민족 교육에도 큰 의미를 남겼다”고 평가했다.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는 110주년을 앞두고 당시 사료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준비하고 있다. 국내 심사는 지난해 통과했고 내년 가을 등재가 최종 결정되지만, 김 전 장관은 낙관하고 있다. 18일까지 열리는 예술의전당 전시회가 끝나면 김 전 장관과 사업회는 지방을 돌며 전시회를 계속 열어갈 계획이다. 사료들을 보관할 아카이브도 만들 예정이다. 김 전 장관은 “이름을 올리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국채보상운동 전체 참여자는 당시 인구의 20%에 가까운 350만 명으로 추산된다”며 “사료를 문화유산으로 올리고 아카이브를 관리하는 것이 국채보상운동 참여자들에게 일부 보답하는 길”이라고 말했다.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1923년 9월 10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본 총리 야마모토 곤노효에 앞으로 항의 공문을 발송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대신 조소앙의 이름으로 발송된 공문에는 ‘천재지변의 원인을 한인(韓人)에게 전가하여 방화를 하거나… 한인이 큰길에서 무자비하게 살해된 것이 매일 50명이나 된다’고 써 있었다. 이 공문은 간토(關東)대지진이 일어난 직후 일본 내무성이 각 경찰서에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공문을 보내면서 일본인 자경단들이 조선인에 대해 광기 어린 살인을 저지른 데 대한 항의 표시였다. 일본인 자경단은 죽창이나 몽둥이, 일본도 등으로 무장했다. 일부는 총기를 소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불심검문을 하면서 조선인으로 확인되면 가차 없이 살해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죽어야 할 이유는 조선인이라는 것 하나뿐이었다. 일본 정부는 나중에야 유언비어를 공식 확인했지만 참극은 이미 발생한 후였다. 조선인 무차별 학살에 대한 사법적 책임은 물론이고 도의적 책임을 진 일본인이나 기구는 전혀 없었다. 80년이 지난 2003년 8월 25일 일본변호사연합회는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은 일본정부가 유발한 책임이 있다며,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에게 사죄와 진상규명을 권고했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는 아직 없다. 일본 정부는 언급 자체를 회피하고 있다. 한국 정부 역시 무책임하기는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시기에 한 차례 공문으로 항의를 한 것 외에는 한국 정부가 일본에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한 적도, 증거 수집을 한 적도, 일본 정부와 공동조사를 한 적도 없다. 올해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93주년이다. 구천을 떠돌고 있을 조선인들의 넋을 생각한다. 억울함에 몸을 떨며 아우성치고 있을 그들이다. 역사에는 시효가 없다. 93년 전 9월 간토대지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박덕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연구실장}

2020년 도쿄 여름올림픽을 준비하는 일본은 22일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폐막 공연에서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자국의 컴퓨터 게임과 만화 캐릭터들을 대거 등장시켰다. 가장 먼저 등장한 캐릭터는 일본 컴퓨터게임 기업 닌텐도사가 1981년 첫선을 보인 게임 캐릭터 ‘마리오’. 지금까지 관련 게임만 5억 장 이상 판매됐고, 지금도 계속해서 새로운 게임이 출시되고 있을 정도로 전 세계적 인기를 누리는 캐릭터다. 1964년에 이어 두 번째 여름올림픽을 치르는 도쿄는 차기 개최지 소개 영상 ‘도쿄는 준비운동을 하고 있습니다(Tokyo Is Warming Up)’에서 마리오처럼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캐릭터를 줄줄이 등장시키며 친근함을 앞세웠다. 또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폐막식 참가에도 캐릭터를 빌려왔다. 아베 총리가 리우에 오기 위해 마리오로 변신해 도쿄 한복판인 시부야 사거리에 배관 파이프를 뚫고 지구 반대편인 리우까지 간 것이다. 아베 총리는 소개 영상이 끝날 무렵 실제로 배관공 옷을 입고 폐막식에 등장했다. 일본 인기 만화 주인공 ‘도라에몽’도 마리오가 지구 반대편까지 파이프를 뚫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로 나왔다. 도라에몽은 1977년 만화잡지에 처음 등장한 뒤 39년간 변하지 않는 인기를 끌고 있는 캐릭터다. 도쿄가 올림픽 유치에 뛰어들었을 때부터 홍보 마스코트로 등장한 도라에몽은 타임스 아시아판이 ‘아시아에서 가장 끌어안아 주고 싶은(cuddliest) 캐릭터’로 꼽았다. 그 외에도 종목별 스포츠 스타들이 순서대로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동그란 몸과 큰 입만 가진 게임 캐릭터 ‘팩맨’이 출연해 먹이를 먹어 치워가며 육상트랙을 달렸다. 일본을 대표하는 축구선수로 등장한 인물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축구만화 주인공인 ‘캡틴 쓰바사’였다. 캡틴 쓰바사는 축구가 최고 인기 스포츠인 남미와 유럽 등지에서 큰 인기를 모은 캐릭터다. 선수들을 응원하는 치어리더는 1974년 태어나 42세가 된, 지금까지 한결같이 귀여운 모습으로 전 세계 여성들에게 사랑받는 ‘헬로 키티’가 맡았다. 이 밖에 도쿄는 폐막식 공연에서 캐릭터 외에도 첨단 영상기술을 활용한 홀로그램 공연을 선보이는 등 2020년 올림픽을 ‘첨단 문화산업 올림픽’으로 치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2020년 도쿄 여름올림픽을 준비하는 일본은 22일 리우 올림픽 폐막 공연에서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자국의 컴퓨터 게임과 만화 캐릭터들을 대거 등장시켰다. 가장 먼저 등장한 캐릭터는 일본 컴퓨터게임 기업 닌텐도사가 1981년 첫 선을 보인 게임 캐릭터 ‘마리오’. 지금까지 관련 게임만 5억 장 이상 판매됐고, 지금도 계속해서 새로운 게임이 출시되고 있을 정도로 전 세계적 인기를 누리는 캐릭터다. 1964년에 이어 두 번째 여름올림픽을 치르는 도쿄는 차기 개최지 소개 영상 ‘도쿄는 준비운동을 하고 있습니다(Tokyo is Warming up)’에서 마리오처럼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캐릭터를 줄줄이 등장시키며 친근함을 앞세웠다. 또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폐막식 참가에도 캐릭터 이야기를 빌려왔다. 배관공인 마리오처럼 배관공 옷을 입은 아베 총리가 리우에 오기 위해 도쿄 한복판인 시부야 사거리에 배관 파이프를 뚫고 지구 반대편인 리우에 나타난 것이다. 아베 총리는 소개 영상이 끝나는 무렵 실제 배관공 옷을 입고 폐막식에 등장했다. 일본 인기 만화 주인공 ‘도라에몽’도 마리오가 지구 반대편까지 파이프를 뚫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로 나왔다. 도라에몽은 1977년 만화잡지에 처음 등장한 뒤 39년째 변하지 않는 인기를 끌고 있는 캐릭터다. 도쿄가 올림픽 유치에 뛰어들었을 때부터 홍보 마스코트로 등장한 도라에몽은 타임스 아시아판이 ‘아시아에서 가장 끌어안아 주고 싶은(cuddliest) 캐릭터’로 꼽았다. 그 외에도 종목별 스포츠 스타들이 순서대로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동그란 몸과 큰 입만 가진 게임 캐릭터 ‘팩맨’이 출연해 먹이를 먹어 치워가며 육상트랙을 달렸다. 일본을 대표하는 축구선수로 등장한 인물은 실존인물이 아니라 축구만화 주인공인 ‘캡틴 츠바사’였다. 이 선수들을 응원하는 치어리더는 1974년 태어나 42살이 된 지금까지 한결같이 귀여운 외모를 유지하며 전 세계 여성들에게 사랑받는 ‘헬로 키티’가 맡았다. 이밖에 도쿄는 폐회식 공연에서 캐릭터 외에도 첨단 영상기술을 활용한 홀로그램 공연을 선보이는 등 2020년 올림픽을 ‘첨단 문화산업 올림픽’으로 치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4년 만에 다시 선 올림픽에서도 메달을 목에 걸 순 없었다. 동메달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던 선수가 연기를 마친 뒤 전광판에 기록된 자신의 순위는 4위였다. 2012년 런던 올림픽(5위)보다 딱 한 계단 올랐다. 그러나 그는 눈물 대신 웃음을 지었다. 장내 아나운서는 “밝게 웃으며 연기를 펼친 손연재(22·연세대)가 끝까지 우리를 향해 웃고 있다”고 말했다. 손연재가 참았던 눈물을 쏟은 것은 모든 경기가 끝난 뒤였다. 메달리스트들을 축하해 주고 자리에 앉았을 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올림픽 메달에 대한 부러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손연재는 “너무 힘들어서 하루에도 수십 번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겨낸 내가 스스로 대견했다. 무거운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후련함 때문에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손연재는 21일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리듬체조 개인종합 결선에서 4종목 합계 72.898점으로 4위를 기록했다. 3위 간나 리자트디노바(우크라이나·73.583점)와는 0.685점 차였다. 손연재와 함께 훈련을 해 온 마르가리타 마문과 야나 쿠드(렵,엽)체바(이상 러시아)가 각각 1, 2위를 차지했다. 손연재는 올림픽 메달 획득에 대한 압박감에도 실수 없이 4종목 모두 18점대의 좋은 성적을 냈다. 하지만 ‘리듬체조 강국’ 러시아와 동유럽 선수들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손연재는 “많은 분이 원하셨던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4년 동안 쉬지 않고 열심히 노력해 온 끝에 런던 때보다 좋은 성적을 거뒀다”고 말했다. 실수가 나왔던 예선(20일)과 달리 결선에서 최고의 연기를 펼친 것에 만족한 듯 손연재는 “결과를 생각하지 말고 매트에 나가서 연습해 온 것을 다 보여주자고 다짐했는데 성공적으로 연기를 마쳐 기쁘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메달리스트가 아니지만 조금 느려도 끊임없이 노력해서 발전해 왔다는 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나 스스로에게 점수를 준다면 100점을 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앞서 손연재는 리우 올림픽이 자신의 마지막 올림픽일 수 있다고 밝혀 왔다. 그는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일단은 마지막 올림픽이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했다. 아직 올림픽 이후는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에서 쉬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1시간여의 도핑 테스트를 마친 손연재는 경기장을 나가기 직전 ‘두 명의 엄마’를 꼭 껴안으면서 감사를 표했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일기장에 ‘올림픽 등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손연재가 되자’고 써왔던 목표를 이뤄낸 것은 흔들릴 때마다 나를 붙잡아준 분들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딸의 경기복을 손수 만드는 열정으로 손연재를 키워 온 어머니 윤현숙 씨(48)에게도 리우 올림픽은 잊지 못할 기억이 됐다. 2년 전 인천 아시아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뒤 은퇴를 생각했던 딸의 마음을 돌려놓은 사람이 윤 씨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네가 보여주지 못한 것들이 많으니까 좀 더 노력해서 올림픽에서 멋지게 마무리하자고 설득했다. 내 말을 듣고 잘 따라와 준 딸이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아시아경기 뒤 손연재는 목표의식을 상실해 고민에 빠졌었다고 한다. 손연재는 “내가 즐거워서 운동을 해야 하는데 주위의 기대를 채워주기 위해 매트에 나선다는 생각이 들어 힘들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올림픽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끝까지 나를 붙잡은 어머니 덕분이다”라고 말했다. 이날 울고 있는 손연재를 가장 먼저 품에 안고 격려해준 사람은 ‘리듬체조 엄마’ 옐레나 리표르도바 코치(42·러시아)였다. 손연재는 2010년 광저우 아시아경기가 끝난 뒤부터 리표르도바 코치와 전담 계약을 맺고 함께 훈련을 해왔다. 손연재가 세계 최강 러시아 리듬체조 선수들이 가득한 노보고르스크에서 혹독한 전지훈련을 할 때 그를 지도한 사람이 리표르도바 코치다. 리표르도바 코치는 출산 후 몸조리를 제대로 못한 상태에서도 훈련장에 나와 손연재를 지도하는 열정을 보여주기도 했었다. 손연재는 “6년간 코치님과 정말 많이 싸우면서 밉기도 했고, 다시는 보지 말자고도 했다. 하지만 코치님은 2010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32등 한 나를 올림픽 4위로 만들어 주신 고마운 분이다”라고 말했다. 윤 씨는 “리표르도바 코치는 연재에게 ‘네가 없는 러시아는 이제 상상하기 싫다. 꼭 다시 돌아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손연재는 경기를 끝낸 뒤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후프 등 수구를 들고 걸어가다 뒤돌아보며 찍은 사진을 남기며 “진심을 다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해 경기를 끝냈다”며 “해 왔던 노력을 다 보여줬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었다”고 썼다. 또 “어떤 금메달보다 행복하고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누리꾼들은 “최고 수준의 연기를 보여준 노력과 도전 정신에 감사한다” “리듬체조에 바친 시간만큼 더 즐기며 지내길 바란다”는 글을 올리며 손연재를 응원했다. 외국인의 응원 댓글도 적지 않았다. 해외 누리꾼들은 “나에게 당신은 최고의 리듬체조 선수” “손연재는 한국에서 온 빛나는 별이며 특별하고 고귀한 존재” 등의 칭찬을 남겼다. 리우데자네이루=정윤철 trigger@donga.com / 이원주 기자}

“내가 없는 올림픽을 보고 있으니까 왠지 어색하네요. 하하하.”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은메달,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등 한국 여자역도의 꽃이었던 장미란(33). 16일 만난 장미란은 “올림픽을 선수가 아닌 관중으로 지켜보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며 “후배들이 하는 경기를 집 소파에 누워서 보다가 ‘이렇게 올림픽을 편하게 봐도 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2013년 은퇴한 장미란은 현재 자신이 만든 ‘장미란재단’을 통해 비인기종목 선수들을 후원하거나 유소년 선수들을 지원하는 공익 활동을 하고 있다.“저 자리에 서 있는 것만도 대단한 거죠”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은 장미란이 12년 만에 처음으로 주인공이 아닌 관중으로 지켜보는 올림픽이다. 그는 “선수 때보다 지금이 더 바쁘다”고 말했지만 올림픽만큼은 재방송이라도 꼭 챙겨 본다고 한다. “(선수가 아닌) 응원하는 위치에서 경기를 보니까 올림픽 메달을 딴다는 게 더 어려운 것 같아요. 한순간도 쉬운 게 없어 보여요.” 장미란은 “선수로 뛸 때는 배구 축구 등 구기 종목을 잘 보지 못했는데 이번에 경기를 보면서 구기 종목 후배들을 더 대단하게 보게 됐다”며 “역도는 그룹별 예선 경기를 뛰고 순위 안에 들면 바로 결승인데, 구기 종목은 메달을 따기 위해 32강, 16강, 8강 등 몇 번씩 경기를 치르지 않느냐. 메달이 문제가 아니라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다른 종목의 금메달 소식도 기뻤지만 그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함께 출전했던 윤진희의 동메달 획득 소식을 들었을 때 누구보다 기뻐했다고 한다. 그는 “오히려 선수로 뛸 때보다 지금처럼 옆에서 보는 게 더 힘들다”며 “역도가 메달 획득이 어렵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그런 가운데 진희가 동메달을 따내니 더 반가웠다. 은퇴했다가 복귀해서 올림픽에 나가는 것만 해도 쉽지 않았을 텐데 정말 잘됐다”고 말했다.“제 칭찬과 격려가 힘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올림픽에 출전하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에 장미란은 “아유∼ 전혀요∼”라고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지금은 지금 할 일이 있다는 것. 장미란은 2012년 자신이 설립한 장미란재단의 이사장이다. 재단에서는 어린 비인기종목 선수 후원, 전·현직 국가대표 선수 멘토링, 탈북 청소년이나 학교폭력 피해 학생들과 함께하는 체육 활동 등 공익 활동을 하고 있다. 그가 비인기종목 선수들을 위한 후원과 멘토링 활동을 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팬들에게 받은 과분한 사랑 때문이다. “여자 역도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처음 정식 종목이 됐어요. 그때까지 역도 선배들은 조명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참 서러웠어요.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과분한 사랑을 받았죠. 2012년 런던 올림픽 때는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냈는데도 국민들이 정말 많은 박수를 보내주셨잖아요.” 장미란이 자신이 받는 인기를 피부로 실감한 때는 금메달을 딴 베이징 올림픽 다음 해인 2009년이었다고 한다. 경기 고양시에서 역도 세계선수권 대회가 열렸을 때다. 비인기 종목의 특성상 올림픽이 아니면 크게 주목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경기장 밖에까지 줄이 길게 늘어설 정도로 관중이 몰렸던 것. 그 장면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고 한다. “경기장에 못 들어온 사람이 꽤 많다고 하더라고요. 저희 아버지도 못 들어오실 뻔했죠. 경기장엔 일찍 도착했는데 손님 모시러 밖에 나갔다가 못 들어오실 뻔했다더라고요. 하하.” 장미란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300일이 힘들어도 60일이 기쁘면 아무리 힘든 훈련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게 다 많은 분들이 격려하고 칭찬하고 응원해 주신 덕분이었다”며 “비인기 종목에서 땀을 흘리는 어린 선수들에게도 그런 응원과 칭찬을 제가 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장미란재단은 그가 은퇴하기 전해인 2012년에 만들어졌다. 아버지 장호철 씨의 권유가 큰 힘이 됐다. 재단 설립은 나이가 더 들면 할 일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등을 떠민 것. 아버지는 “조금이라도 더 주목받고 있을 때 재단을 세워야 더 많은 사람들의 도움도 받을 수 있고, 더 많은 도움도 줄 수 있다”고 장미란을 설득했다. 그는 “거창한 청사진을 그리는 것보다 오늘 하고 있는 일을 10년 후에도 계속 해 나가고, 가능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볼 수 있도록 재단을 잘 꾸려 나가고 싶다”며 “순간순간 열심히 사는 게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스포츠 외교? 한 걸음부터요” 결국 안 됐지만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에 도전했던 것도 재단 설립과 비슷한 이유에서다. 지금도 국제역도연맹(IWF) 선수위원으로 있는 장미란은 역도 개발도상국의 주니어 대회를 주로 찾는다. 어린 선수들에게 롤 모델이자 인기 스타인 장미란은 가는 곳마다 셀카를 찍자는 요청을 수도 없이 받는다고 했다. 그들에게 말 한마디, 동작 하나 가르쳐 줄 때마다 눈빛을 반짝이며 집중하는 어린 선수들을 보고 더 많은 나라에 도움을 주고 싶어서 IOC 위원에 도전했었다고 했다. 그는 또 “IOC 위원이 돼서 운동선수들의 좁은 시야를 좀 넓혀 주고, 분별력도 길러 줄 수 있는 활동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리우 올림픽에서 유난히 금지약물이 문제가 되고 있는 이유도 이런 점이 부족해서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선수들은 어릴 때부터 하루 대부분을 운동만 하면서 성적에 대한 압박을 심하게 받죠. 아직 분별력이 올바로 서지 않은 상태에서 지나친 성과를 요구받다 보면 옳지 않은 것에 손을 대는 일도 벌어집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해 주고 싶었어요.” “IOC 선수위원에 다시 도전할 생각은 없느냐”고 묻자 장미란은 “꼭 IOC 위원을 해야 할 수 있는 일들은 아니더라”며 웃었다. 한국은 리우 올림픽을 사실상 IOC 위원 없이 치르고 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와병 중이고, 문대성 선수위원은 논문 표절 여파로 직무 정지 중이다. IOC 위원이 있느냐 없느냐는 한 나라의 스포츠 외교력을 평가하는 기본 척도가 되기도 한다. 당장 리우 올림픽만 해도 레슬링에 출전한 김현우 선수가 심판진의 석연찮은 판정에 패자부활전으로 밀려났지만 엄중한 항의는 하기 힘들었고, 감독은 관중석으로 쫓겨났다. 장미란은 “지금 당장 IOC 위원이 생긴다고 그런 문제가 해결되진 않을 것 같다”며 “주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아서 해 나가려 한다”고 말했다. 꽃·책·혼자 있는 시간 인터뷰 내내 장미란은 한 번도 말이 막힌 적이 없다. 말투는 단정했지만 하고 싶은 말은 확실하게 했다. “책을 많이 읽은 탓이냐”고 물으니 “저한테는 쉬는 것”이라고 답했다. “선수 때부터 저한테는 휴식이란 게 여행을 가거나 기분전환을 하러 가는 게 아니라 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어요. 그러면서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책도 봤죠. 책을 많이 보는 건 아닌데, 마음에 드는 좋은 책이 있으면 수도 없이 읽는 습관이 있어요.” 그는 이해인 수녀의 시집과 이지선 씨의 ‘지선아 사랑해’ 등 ‘일상에 감사함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지선아 사랑해’는 교통사고로 큰 화상을 입은 이지선 씨가 장애를 극복하고 살아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책을 읽지 않는 시간에는 꽃꽂이를 했다고 한다. “선수 때 쉬는 날이 있으면 꽃을 꽂았죠. 예쁘게 장식해 놓고 나면 기분이 그렇게 좋더라고요. 지금은 재단 이사장, 대학 교수, IWF 선수위원까지 명함이 세 개나 될 정도로 바빠서 언제 꽃꽂이를 했는지 잘 생각도 나지 않네요. 하하하.” 대단하고 거창한 포부가 있을 것 같은 그. 하지만 그의 답은 “그저 열심히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저는 별로 잘하는 게 없으니까요, 그저 열심히 살고 싶어요.” “열심히 사는 게 어떻게 사는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똑같은 실수를 다시 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나중에 돌아봤을 때 후회를 덜 남길 수 있게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이 두 가지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해 왔던 것 같아요. 큰 꿈이 아니어도 작은 꿈을 꾸고 그걸 이뤄내다 보면 중요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장미란은 2004년 아테네, 2008년 베이징에 이어 2012년 런던 올림픽 메달리스트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됐다. 런던에서 4위로 메달을 못 땄지만 최근 IWF의 도핑 재검사 결과 런던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던 흐리프시메 쿠르슈[(아르메니아)이 금지약물을 사용한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현재 IOC는 쿠르슈[의 동메달을 회수해 장미란에게 수여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장미란은 “아직 결정된 것이 하나도 없다”며 “지금은 리우 올림픽이 한창 열리고 있고, 제 메달 소식보다는 땀 흘린 후배들이 더 주목받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역도 경기장은 키리바시에서 온 데이비드 카토아타우(32)에게 경기장일 뿐만 아니라 무대였다. 그는 15일(현지 시간) 경기를 끝낸 뒤 역기에 입을 맞추고 트위스트를 추며 경기장을 내려갔다. 남자 105kg급에 출전해 합계 349kg을 들어올린 그의 최종 성적은 14위. 하지만 그는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는 왜 춤을 췄을까. 그는 “지구 온난화로 우리나라가 사라져가는 안타까운 현실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호주 북동쪽에 있는 작은 섬나라인 키리바시는 날짜변경선에 붙어 있어 ‘세계에서 해가 가장 빨리 뜨는 나라’로 불린다. 국기도 태양이 떠오르는 바다 위로 갈매기 한 마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섬이 33개나 되지만 전체 국토 면적은 810km² 정도로 대구보다도 작다. 그나마 지구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해 국토 면적은 계속 줄어들고 있다. 이미 사람이 살던 마을 한 곳이 해수면 상승으로 사라졌다. 카토아타우는 “사람들은 키리바시가 어떤 나라인지 모르고, 우리는 조국을 스스로 지킬 충분한 힘이 없다”며 “내가 춤을 추는 이유는 키리바시의 상황을 전 세계에 더 많이 알리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의 춤은 태평양 한가운데 작은 섬나라가 전 세계에 환경 파괴를 중단하라고 촉구하는 가장 평화로운 경고다.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