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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션 영화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이하 분노의 질주9·사진)가 개봉 5일째에 누적 관객 100만 명을 돌파했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19일 개봉한 분노의 질주9는 23일 오전 11시 50분 기준 누적 관객 100만179명을 기록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극장가가 얼어붙은 지난해 이후 국내에서 개봉한 외국영화 가운데 최단기간에 관객 100만 명을 모았다. 지난해 8월 개봉한 액션 영화 ‘테넷’은 개봉 12일째, 올 1월 개봉한 애니메이션 ‘소울’은 개봉 16일째 누적 관객 100만 명을 넘겼다. 한국영화의 경우 지난해 7월 개봉한 ‘반도’, 지난해 8월 개봉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가 개봉 4일째에 관객 100만 명을 돌파했다. 2001년 시작한 분노의 질주 시리즈는 2019년까지 스핀오프 한 편을 포함해 총 아홉 편이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분노의 질주9는 주인공 도미닉 토레토(빈 디젤)와 연을 끊고 지냈던 형제 제이컵 토레토(존 시나)가 사이퍼(샬리즈 세런)와 연합해 세계를 위험에 빠뜨릴 계획을 세우고, 이를 알게 된 도미닉과 동료들이 지상과 상공을 오가며 반격을 펼치는 이야기다. 제작사인 유니버설스튜디오는 한국 극장의 코로나19 방역 수준이 높다고 판단해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이 영화를 개봉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길어지면서 산이나 바다에서 일을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노트북과 와이파이만 있으면 어디에서나 일할 수 있는 정보기술(IT) 종사자들이 대부분이다. 강원 양양군처럼 수도권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 특히 인기다. 바닷가 카페에서 일하다 오후 6시 1분만 되면 서핑보드를 들고 파도로 뛰어든다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우울한데 미세먼지까지 덮쳐올 때면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디지털 노마드’의 삶이 부러워 질투가 날 지경이다. 이 책엔 미국 뉴욕에서 한 달 동안 살다 온 디지털 노마드 2명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다양한 분야의 콘텐츠를 기획하는 둘은 그 나름 공유 사무실을 조사한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실상은 퇴근 후 뉴욕에서 놀기 위해 한국을 떠난다. 코로나19가 시작되기 이전인 3년 전 일이고, 지금은 해외로 떠나기 쉽지 않지만 저자들이 겪고 느낀 바는 재택근무가 활성화되는 지금 의미 있게 느껴진다. 업무 시간에 두 사람은 뉴욕의 공유 오피스를 조사한다. 한국에도 공유 오피스가 꽤 생겼지만 디지털 노마드가 많은 뉴욕엔 색다른 곳이 더 많다. ‘BKBS’라는 공유 오피스는 한쪽에 암벽등반을 할 수 있는 시설을 꾸며뒀다. 일하다 지치면 바로 옆으로 와 운동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라는 것이다. 공유 오피스 ‘어셈블리지’엔 2600여 종의 식물이 꽉 차 있다. 싱그러운 식물과 함께 있다 보면 일하는 시간이 조금 즐거워질지도 모르겠다. 숙박 공간인 ‘에이스 호텔’은 1층 로비를 공유 오피스로 만든 사례다. 한 달 살기를 계획하고 온 디지털 노마드에겐 일석이조인 셈이다. 퇴근 후 저자들은 뉴욕을 마음껏 즐긴다. 곳곳에 위치한 재즈바와 마카롱 판매점을 찾아가고, 센트럴파크에서 하루의 끝을 맞이한다. 한국에선 집에만 머물러 있던 이들이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도착한 곳에선 자유롭게 유랑한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짧게 느껴질 정도로 신나게 논다. 두 여자가 아무 생각 없이 놀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종종 이런 생각에 빠진다. 혹시 서울에서도 삶을 더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센트럴파크에서 보는 노을만큼 한강에서 보는 일몰도 아름답지 않았을까. 맛있는 음식을 찾아 먹으며 소소한 행복을 찾는 건 한국에서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여행 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새로워 보일 뿐이고, 내가 살던 그곳에서도 삶을 더 충실히 꾸밀 수 있지 않았을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디지털 노마드를 꿈꾸는 이들이 참고해야 할 팁도 얻어갈 수 있다. 자신이 가보고 싶었던 지역으로 갈 것. 퇴근 후 갈 만한 맛집을 미리 찾아둘 것. 홀로 외롭게 고립되기보단 함께 일하는 동료가 있으면 의지가 된다는 것. 가장 중요한 건 업무 시간과 휴식 시간을 명확히 구분해야 삶이 망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정한 디지털 노마드가 되려면 책임감이 따르는 법이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사람들은 슬픈 기억을 잊으려 한다. 친구와 싸우고, 대학 입학에 실패하고, 크게 다쳤던 과거를 떠올리기 싫어한다. 공동체가 재난을 대하는 방식 역시 마찬가지다. 마스크를 벗고 마음껏 숨 쉴 수 있는 시간이 오면 우리는 팬데믹에 대한 기억을 지워갈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힘들어했고, 어떻게 서로를 미워했으며, 어떤 노력으로 재난을 끝냈는지 망각할 것이다. 이 소설집엔 우리가 겪은 재난에 대한 기억이 담겨 있다. 임성순의 ‘몰:mall:沒’은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후 건물 잔해에서 발견되지 못한 시신을 다시 더 찾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을 통해 잊혀진 재난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강영숙의 ‘재해지역투어버스’에서 주인공은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강타한 미국 뉴올리언스를 둘러보는 관광버스에 앉아 끔찍한 비극이 일어난 과거를 응시한다. 최은영은 2014년 세월호 참사로 손녀를 잃은 친구를 찾는 할머니가 등장하는 ‘미카엘라’를 통해 재난은 얼마 전에도 일어난 일이라고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구제역에 걸린 돼지를 파묻기 위해 구덩이를 파는 굴착기 운전기사의 이야기가 담긴 김숨의 ‘구덩이’를 읽다 보면 여전히 재난은 우리 곁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조해진이 쓴 ‘하나의 숨’은 공장으로 현장실습을 나간 특성화고 학생이 크게 다치는 사고를 통해 매일 일어나는 인재(人災)를 응시한다. 이겨낼 수 없는 재난이 다가올 때 인간은 광기와 혼란에 지배당할까, 혹은 한 그루의 사과나무라도 심을까. 운석이 지구를 향해 날아와 곧 부딪힐 상황을 그린 최진영의 ‘어느 날(feat. 돌멩이)’에서 딸이 먼 곳에 있는 엄마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읽어보자. 절망의 순간에도 인간다움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희망을 품고 싶어진다. “내가 엄마 가까운 곳으로 얼마 가지 못하더라도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우린 이미 충분히 가까이 있다고, 우주는 무한하나 시작과 끝이 있기에 언젠가 지구가 없어진다고 해도 우린 어떤 식으로든 같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우주가 생기고 없어지고 다시 생기길 반복해도 우린 영영 같이 있을 거라고.”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서울 마포구 글밥아카데미가 이달 초 개설한 3개월짜리 영상 번역 강의에는 100명 넘는 수강생이 몰렸다. 지난해 같은 시기보다 두 배 이상으로 급증한 것.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100% 온라인 강의로 진행하는데도 열기가 뜨겁다. 수강생들은 영어회화 강사부터 영화사 직원, 실직자까지 다양하다. 김명철 글밥아카데미 원장은 “자투리 시간에 추가 수입을 올리려는 직장인 수강생이 상당수”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넷플릭스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가 늘어나고, 해외 콘텐츠들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영상 번역에 뛰어드는 사람이 늘고 있다. 과거에는 해외 영상물이 주로 불법 사이트에서 유통되는 바람에 온라인 동호회 등이 만든 자막이 많이 쓰였다. 전문 번역가의 손을 거치지 않다 보니 엉성한 자막이 적지 않았다. 반면 유료 서비스인 OTT는 번역가가 작업한 자막을 사용하기 때문에 영상 번역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OTT와 영상 번역가를 연결해주는 에이전시도 늘고 있다. 현재 운영 중인 번역 에이전시는 100여 곳으로 추산된다. 영상 번역 학원에서 1년 과정을 막 마친 초보자의 경우 1분짜리 영어 영상 번역에 2000∼4000원 정도를 받는다. 통상 1분짜리 영상을 번역하는 데 10∼20분이 걸린다고 한다. 문제는 영상 번역 시장이 급격히 커지는 상황에서 번역 수준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에이전시가 번역가를 모집할 때 재하청을 거치며 번역비를 과도하게 낮추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과학 다큐멘터리는 전문용어가 많아 번역에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일반 콘텐츠와 같은 단가가 적용되는 경우도 있다. 번역 에이전시 바른번역미디어의 정대은 감수팀장은 “재하청 구조와 일부 악질 에이전시 탓에 초보 번역가의 몸값은 떨어지는 추세”며 “OTT 붐에 휩쓸려 일을 시작했다가 금방 그만두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넷플릭스 등 글로벌 OTT의 영화나 드라마는 전 세계 동시 공개가 많아 신속한 번역까지 요구된다. 이에 따라 번역의 질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넷플릭스 미국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 시즌1 2화에선 “여자가 망신창이가 됐다”는 자막이 나온다. “여자가 만신창이가 됐다(beat the crap out of her)”의 오기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오역이나 오탈자는 OTT의 신뢰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말했다. 영상 번역 수준을 높이기 위해선 OTT 업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OTT 업체들이 자막 관리를 체계적으로 하지 않아서 잘못된 번역을 거르지 못하고 있다. 유능한 영상 번역가에게 합당한 대가를 치르는 등 자막 관리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19세기 고전 ‘월든’의 표지를 19, 20, 21세기의 시대감각을 담아 각각 디자인하면 어떤 느낌일까. 출판사 은행나무는 최근 주요 서점별로 월든의 세 가지 리커버 버전을 만들어 펴냈다. 리커버란 기존 도서의 디자인을 바꿔 재출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스24에서 판매하는 월든은 가죽 질감의 표지에 금박을 두른 1854년 초판본 양식으로 꾸몄다. 교보문고에선 녹색과 크림색으로 호수가 유려하게 그려진 1939년판 표지의 월든을 살 수 있다. 알라딘에선 식물 잎사귀를 가운데 넣고 간결하게 디자인한 2021년판 표지를 볼 수 있다. 월든은 미국 시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가 대자연에 대한 예찬을 쓴 에세이다. 은행나무는 200년 가까이 된 이 작품 표지를 독자들이 취향에 따라 고를 수 있도록 해 신선함을 줬다. 이다은 은행나무 디자이너는 “품질 높은 리커버 도서를 펴내기 위해 4개월간 디자인 작업에 매달렸다”며 “리커버 도서를 같은 시기 다른 서점에 각각의 버전으로 파는 건 이례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리커버 도서 시장이 커지고 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리커버 도서는 2016년 156건에서 지난해 468건으로 3배로 늘었다. 진영균 교보문고 브랜드관리팀 과장은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책 판매량이 늘었지만 미처 신간을 준비하지 못한 출판사들이 리커버 도서를 많이 펴냈다”며 “올해 리커버 도서 시장은 더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리커버 도서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건 2014년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다. 가격 경쟁력을 상실한 서점이 독점적으로 확보한 리커버 도서를 고객 유인책으로 내세웠다. 최근에는 고전뿐 아니라 신작도 리커버 형태로 출간되고 있다. 2019년 6월 나온 소설가 김초엽의 단편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은 지난해 11월 리커버 도서로 출간돼 20, 30대 여성에게 인기를 끌었다. 민음사가 올 1월 교보문고와 협업해 내놓은 ‘디 에센셜: 버지니아 울프’는 표지뿐 아니라 서체와 글자 정렬 방식까지 바꿔 출간됐다. 박정남 교보문고 마케팅추진팀 차장은 “최근 리커버는 편집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굿즈와 함께 패키지로 만들어 파는 전략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차별화된 리커버 도서를 확보하기 위한 서점 사이의 경쟁은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장은수 출판평론가는 “출판 시장 전체로는 바람직한 변화다. 하지만 리커버 도서가 대형서점에만 공급되면 소규모 서점이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인세계약 투명성을 놓고 작가들과 출판계가 갈등을 빚는 가운데 정부가 9월 가동을 목표로 추진 중인 출판유통통합전산망(출판전산망)이 제 기능을 못 할 위기에 처했다. 출판계가 ‘일부 출판사의 불공정 관행을 일반화한다’며 반발하는 데 따른 것이다. 17일 문화체육관광부와 출판계에 따르면 문체부 산하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은 26일 출판전산망 사업설명회를 열 계획이다. 문체부는 출판전산망이 구축되면 작가와 출판사가 실시간으로 책 판매량을 확인할 수 있어 출판시장의 투명성을 높일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출판계 대표 단체인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는 이날 사업설명회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대형 출판사와 유통사 등 약 700개사가 소속된 출협이 출판전산망에 참여하지 않으면 정상 운영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출협은 13일 입장문을 통해 “이번 사건은 출판사 ‘아작’ 한 곳에서 벌어진 일이고 모든 출판사에서 관행처럼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출협이 말한 ‘이번 사건’이란 최근 공상과학(SF) 출판사 아작이 장강명 등 여러 작가의 인세를 누락한 후 사과한 것을 말한다. 장강명은 이달 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작가들은 자기 책이 얼마나 팔리는지 출판사에 의존하는 것 외에 알 방법이 없다”며 정부의 출판전산망 가동을 촉구했다. 정부 감시하에 판매량 수치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인세 누락 같은 불공정 관행을 뿌리 뽑을 수 있다는 논리다. 문체부는 45억 원의 예산을 들여 2018년부터 출판전산망 사업을 추진했다. 이미 시범운영을 시작했고 올 9월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문체부 관계자는 “출판전산망을 제대로 운영하려면 출판계 도움이 필수”라며 “현행법상 출판사들에 전산망 참여를 강제할 수단은 없다”고 밝혔다. 반면 출판사들은 정부가 출판전산망 사업을 일방적으로 강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출협 관계자는 “문체부가 출판전산망 사업을 진행하면서 출판계 동의를 제대로 구하지 않았다”며 “독서 문화 진흥을 위해 마련한 ‘세종도서’로 출판사를 압박하는 모양새도 좋지 않다”고 말했다. 문체부는 출판사가 세종도서를 신청하려면 출판전산망에 의무적으로 가입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세종도서에 선정된 출판사는 공공도서관 등에 책 구입, 운송비용 명목으로 도서당 800만 원을 지원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일각에선 출판사와 서점들이 자신들의 영업 정보가 외부에 노출되는 걸 꺼리는 것이 출판전산망 가입에 부정적인 이유 중 하나라고 말한다. 장은수 출판평론가는 “캐나다, 일본 등은 민간 주도로 출판유통 시스템을 마련해 이 같은 갈등 소지가 적었다”며 “투명한 출판유통 시스템을 마련하자는 대의를 거부하는 출판사는 없는 만큼 문체부가 합리적인 유인책을 통해 출판사들의 자발적인 동의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반려동물과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많아졌다. 재택근무를 하는데 고양이가 키보드를 눌러 회사 단체 메신저에 오타를 올렸다거나 화상회의 중 개가 화면에 등장해 웃음이 터졌다는 해프닝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재발을 막으려면 반려동물에게 코로나19 시대에 지켜야 할 규범을 알려줘야 할 텐데 쉽지 않다. 인간은 왈왈 짖을 수도, 야옹야옹 울 수도 없으니 난감할 뿐이다. 반려동물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면 이런 문제가 조금 해결되지 않을까. ‘개와 함께한 10만 시간’의 저자는 11마리의 개를 관찰하면서 개를 이해하려 한다. 예를 들어 ‘미샤’라는 개는 자동차를 전혀 조심하지 않고, 보도로 다니지 않는다. 인간이 보기엔 위험천만하지만 미샤는 한 번도 자동차에 치이지 않았다. 저자는 이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미샤를 졸졸 쫓아다닌다. 자세히 보니 미샤는 교차로에 다가가면 눈을 두리번거리진 않지만 귀를 쫑긋 세웠다. 시각으로 물체의 접근을 판단하는 인간과 달리 개는 청각에 더 의존해 행동하면서 자신의 방식으로 위험을 피하는 것이다. 저자는 관찰을 통해 개가 충실히 인간을 사랑한다는 환상도 무참히 깨부순다. 개를 키우던 사람이 죽은 뒤 개의 행동을 면밀히 분석하니 개는 잠시 당황하거나 시무룩해하지만 곧 새로운 일상에 적응했다. 개들은 오히려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던 개가 죽었을 때 더 슬퍼했다. 개 ‘스웨시’가 죽자 스웨시와 절친한 개 ‘파티마’는 기운을 잃더니 결국 가출했다. 더 이상 집에 머물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이다. 저자는 “그(개)들은 서로를 원한다. 개에게 인간은 개와 비슷하게 인식되는 존재일 뿐”이라고 냉정한 분석 결과를 전한다. ‘고양이 철학’을 읽다 보면 왜 고양이가 주로 누워 있는지 알 것만 같다. 자신이 원하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인간 입장에서야 고양이가 한심해 보이겠지만, 고양이는 게으른 것이 행복한 상태다. 인간이 철학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불안해서인데, 집 안에 있는 고양이는 불안하지 않아 철학 따위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게 저자의 주장. 프랑스의 파스칼(1623∼1662), 네덜란드의 스피노자(1632∼1677) 등 유명 철학자들도 이렇게 고양이를 정의했단다. 저자는 행복한 고양이의 입장에서 불행한 인간을 향해 조언을 내놓는다. “고통에서 의미를 찾지 마라”, “수면의 즐거움을 위해서 자라”……. 저자의 말대로 행복의 의미를 각각의 생명체가 다르게 정의하듯 고양이의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는 인간도 있을 것이다. 다만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간 역시 반려동물에게 ‘이것이 행복이다’라고 강요할 권리가 없다. 이 책들을 읽다 보면 거실을 방방 뛰어다니는 개를 꾸짖거나 어둠을 찾아 방구석에 콕 박혀 있는 고양이를 애처롭게 바라보지 않게 된다. 이렇게 다른 종을 이해할 수 있다면 같은 종을 이해 못 할 것도 없지 않을까. 국가와 계급 간 갈등이 커져가는 팬데믹 시대에 어쩌면 반려동물은 우리에게 코로나19의 교훈을 던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다른 존재가 살아가는 방식을 이해하려 노력할 때 다른 존재 역시 나를 이해하려 노력할 것이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중국 전한(前漢) 시대 재상을 지낸 공손홍(公孫弘·기원전 200∼기원전 121)은 ‘흙수저’들의 희망이다. 그는 가난한 평민 출신으로 돼지를 키우며 살았는데 나이 들어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공손홍은 나이 육십에 한무제에 의해 요직에 전격 등용됐다.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탄 것이다. 지난달 30일 출간된 ‘한서열전’(민음사)을 번역한 신경란 번역가(58·여)는 9일 화상 인터뷰에서 “개천에서 용 나는 시스템을 확립한 전한 시대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한은 출신이나 배경이 아닌 능력으로 인재를 등용하는 시스템을 동아시아 고대국가 중 가장 먼저 확립했다. 전한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인재 발굴의 기준을 되새길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신 번역가는 “전한 황제들은 특권층인 귀족으로의 인사 쏠림을 막기 위해 다양한 경로로 인재를 발탁했다”며 “독자들이 한서열전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삶을 통해 문화를 융성하게 하고 제도의 기틀을 세운 전한의 비결을 배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서(漢書)는 중국 후한 시대 역사가 반고가 쓴 역사서다. 기원전 202년∼기원후 8년의 전한 시대를 다룬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더불어 동양 고전의 양대 산맥으로 꼽힌다. 한서는 80여만 자에 달하는데 이 중 영웅호걸 등 인물을 다룬 50여만 자를 한서열전이라고 부른다. 신 번역가는 “한서열전 등장인물들의 성공과 실패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전한 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신 번역가는 인물에 대한 평가에 객관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왕망(王莽·기원전 45∼기원후 23)이다. 왕망은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운 인물이다. 사마광 등 기존 사가들은 그를 갖가지 권모술수를 사용해 역성(易姓)혁명을 일으킨 인물로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후대에 와서 그는 이상적인 나라를 세우기 위해 개혁정책을 펼친 인물로 재평가되고 있다. 신 번역가는 “요즘 중국 연구자들 사이에서 왕망은 민생을 살리지 못한 나라라면 무너뜨릴 수 있다는 교훈을 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며 “최신 연구성과를 반영한 3200여 개의 주석을 달아 독자가 균형 있는 시각을 취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책은 총 3권으로 모두 3612쪽에 이른다. 분량이 방대하지만 쉽게 번역한 덕에 수월하게 읽힌다. 예를 들어 전한 당시 아랫사람이 존댓말을 할 때 과거에는 ‘∼옵니다’로 번역했지만 이 책은 ‘∼합니다’처럼 친근한 현대식 표현을 사용한다. 한자어를 최대한 줄이고 우리말로 쉽게 풀어쓴 점도 눈에 띈다. 그는 “평소 쓰지 않는 말투와 단어를 이해하기 쉬운 말로 바꿔 독자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이 책은 기획부터 출간까지 13년이나 걸렸다. 그는 2008년 출판사와 계약을 맺은 뒤 6년간 초벌 번역을 했다. 이후 5차례에 걸쳐 원문과 번역본을 읽으며 오류를 고치고 문장을 다듬었다. 중국 난징(南京)에 머물고 있는 신 번역가는 국내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후 중국 난징대에서 고대 중국어 문법을 전공했다. 반고가 집필하기 시작한 한서열전을 여동생 반소가 완성한 것처럼 이번 번역도 한 집안의 ‘집단지성’으로 이뤄졌다. 신 번역가는 “난징대에서 중국 고대 문학과 중국 고대사 박사 과정을 각각 밟고 있는 딸과 아들이 곁에서 번역을 도왔다. 아이들 덕에 오랜 작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달걀노른자에 설탕을 넣고 걸쭉해질 때까지 섞는다. 여기에 중탕해 녹인 초콜릿과 곱게 갈아낸 밤을 넣는다. 이를 사각형 틀 안에 부은 뒤 12시간 동안 냉장한다. 먹기 좋게 자른 뒤 캐러멜 소스를 얹으면 완성! 지난달 15일 출간된 요리책 ‘프랑스 쿡북’(세미콜론·사진)에 실린 요리 ‘밤 초콜릿 테린’ 조리법이다. 이 프랑스 요리에 들어가는 재료는 한국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요리법은 한국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한국에선 생소한 음식이라 만들고 싶어도 방법이 마땅치 않은 것. 김수연 세미콜론 편집자는 “책이 972쪽에 달하고 정가가 6만5000원이지만 프랑스 음식 마니아들이 출간 직후 책을 많이 구입하고 있다”며 “온라인에 떠도는 부정확한 음식 조리법에 지친 독자들의 만족감이 특히 높다”고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대가 길어지면서 요리책을 사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이달 3일까지 요리책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8.9% 증가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난 이들이 요리를 배우기 위해 실용적인 책을 사는 것으로 분석된다. 판매량 상위권을 차지한 건 ‘셀럽’의 책이다. 구독자 44만 명을 보유한 유튜버 영자씨의 ‘영자의 1시간에 만드는 일주일 반찬’(용감한 까치), 요리연구가 백종원의 ‘백종원이 추천하는 집밥 메뉴’(서울문화사)가 대표적이다. 최근엔 ‘런치 샌드위치’(리틀프레스), ‘1일 1채소, 오늘의 수프’(알에이치코리아) 등 특정 음식을 깊고 다채롭게 다룬 책들도 인기를 끌고 있다. 요리책을 사는 이유는 일부 요리법은 인터넷에 없는 데다 같은 요리법이라도 인터넷보다 책이 제공하는 정보가 대체로 더 정확하기 때문이다. 출판사들은 ‘카레의 기술’(그린쿡), ‘마늘이 다한 요리’(이덴슬리벨)처럼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내용을 자세하게 담은 요리책을 펴내고 있다.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요리책을 만드는 것도 출판사의 전략이다. 전면 컬러 편집을 하고, 음식 사진을 많이 넣어 독자를 유혹한다. ‘허니비케이크의 사계절 디저트’(아이엔지북스)처럼 400쪽짜리 두꺼운 요리책은 인테리어 소품처럼 쓰이기도 한다. 김현정 교보문고 브랜드관리팀 베스트셀러 담당은 “한식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요리뿐 아니라 다양한 음식을 소개하는 책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며 “코로나19 상황이 길어질수록 요리책에 대한 수요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달걀노른자에 설탕을 넣고 걸쭉해질 때까지 섞는다. 여기에 중탕해 녹인 초콜릿과 곱게 갈아낸 밤을 넣는다. 이를 사각형 틀 안에 부은 뒤 12시간 동안 냉장한다. 먹기 좋게 자른 뒤 캐러멜 소스를 얹으면 완성! 지난달 15일 출간된 요리책 ‘프랑스 쿡북’(세미콜론)에 실린 요리 ‘밤 초콜릿 테린’ 조리법이다. 이 프랑스 요리에 들어가는 재료는 한국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요리법은 한국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한국에선 생소한 음식이라 만들고 싶어도 방법이 마땅치 않은 것. 김수연 세미콜론 편집자는 “책이 972쪽에 달하고 정가가 6만5000원이지만 프랑스 음식 마니아들이 출간 직후 책을 많이 구입하고 있다”며 “온라인에 떠도는 부정확한 음식 조리법에 지친 독자들의 만족감이 특히 높다”고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대가 길어지면서 요리책을 사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이달 3일까지 요리책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8.9% 증가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난 이들이 요리를 배우기 위해 실용적인 책을 사는 것으로 분석된다. 판매량 상위권을 차지한 건 ‘셀럽’의 책이다. 구독자 44만 명을 보유한 유튜버 영자씨의 ‘영자의 1시간에 만드는 일주일 반찬’(용감한 까치), 요리연구가 백종원의 ‘백종원이 추천하는 집밥 메뉴’(서울문화사)가 대표적이다. 최근엔 ‘런치 샌드위치’(리틀프레스), ‘1일 1채소, 오늘의 수프’(알에이치코리아) 등 특정 음식을 깊고 다채롭게 다룬 책들도 인기를 끌고 있다. 요리책을 사는 이유는 일부 요리법은 인터넷에 없는데다 같은 요리법이라도 인터넷보다 책이 제공하는 정보가 대체로 더 정확하기 때문이다. 출판사들은 ‘카레의 기술’(그린쿡), ‘마늘이 다한 요리’(이덴슬리벨)처럼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내용을 자세하게 담은 요리책을 펴내고 있다. 소장욕구를 자극하는 요리책을 만드는 것도 출판사의 전략이다. 전면 컬러 편집을 하고, 음식 사진을 많이 넣어 독자를 유혹한다. ‘허니비케이크의 사계절 디저트’(아이엔지북스)처럼 400쪽짜리 두꺼운 요리책은 인테리어 소품처럼 쓰이기도 한다. 김현정 교보문고 브랜드관리팀 베스트셀러 담당은 “한식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요리뿐 아니라 다양한 음식을 소개하는 책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며 “코로나19 상황이 길어질수록 요리책에 대한 수요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이쯤이면 저자는 지독한 ‘짠돌이’가 아닐까 싶다. 새로 사는 물건이 거의 없다. 웬만하면 고쳐 쓴다.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1920년대 정장 한 벌을 수선해 입는다. 50년 전 어머니가 산 믹서가 고장 나자 부품을 구해 고쳐 쓴다. 20년 된 펌프를 고치기 위해서 전문가들만 찾는 자재상을 찾아가 나사를 산다. 놀라운 건 저자가 국립독일박물관 관장이라는 것이다. 이 박물관엔 라이트 형제가 만든 최초의 엔진 비행기 등 2만8000개의 전시품이 있다. 독일에서 꽤나 고위직이라는 뜻이다. 앞서 말한 행동들이 직급에 걸맞지 않는 것처럼 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가 이런 행동을 하는 건 많은 것을 생산하고 폐기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 의문 때문이다. 새로 만들고 버리며 성장하는 경제체제가 옳은가. 환경은 오염되는데 그만큼 우리는 만족하고 있는가. 저자는 자신의 자린고비 행동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며 우리에게 묻는다. 나도 무엇인가를 사고 버리는 걸 아까워한다. 물론 시스템에 대한 고민보단 돈이 아까워서다. 트레이닝복을 한번 사면 무릎이 다 늘어날 때까지 입는다. 10년 동안 입던 셔츠가 찢어졌을 땐 옷을 오랫동안 입었다는 만족감을 느꼈다. 매일 출근길에 메고 다닌 지 5년이 넘은 가방의 내구성을 주위에 자랑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 역시 거부하지 못하는 품목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스마트폰이다. 보통 스마트폰을 살 땐 2년 사용 약정으로 할부 혜택을 받는다. 약정 기간이 지나면 통신사나 요금제를 바꿀 수 있는 ‘자유의 몸’이 된다. 그런데 이때쯤 스마트폰은 이미 구형이 되어 있다. 3G 스마트폰 약정이 끝나면 4G 시대가 돼 있고, 4G 스마트폰 약정이 끝나면 5G 시대가 다가와 있다. 뚝뚝 끊기는 동영상의 품질에 화를 내면서 새 스마트폰을 구매하곤 한다. 최신 제품에 관해서는 저자도 나와 비슷한 것 같다. 요즘 나오는 제품들을 보며 화를 낸다. 내구성에 방점을 찍었던 과거 제품들과 달리 요즘 제품들은 별로 튼튼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스마트폰처럼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분야일수록 그런 점이 두드러진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 그 사이 환경은 망가지고 있다. 또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우리의 마음도 사라지고 있다. 저자는 정부의 정책이 오래 쓰는 제품을 우대하는 쪽으로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구성이 좋은 냉장고에 세금 혜택을 많이 주면 가격이 떨어지고, 사람들이 튼튼한 냉장고를 사서 오래 쓰면 그만큼 버려지는 물건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정책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헌옷 수선법 등을 가르쳐 주는 독일의 ‘리페어 카페’처럼 실생활에 가까운 방법도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한국엔 과거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는 ‘아나바다 운동’이 있었다. 요즘엔 온라인으로 중고거래를 하며 안 쓰는 물건에 새 활기를 불어넣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오늘은 중고거래 앱으로 무언가를 팔거나 사보는 건 어떨까.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완벽한 인생을 사는 남자가 있다. 아름다운 자택에서 하루 종일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며 산다. 미술품 경매장에선 남자의 그림이 비싼 가격에 팔린다. 아내는 그를 돌보고 지지하며 헌신한다. 남자는 자신이 마흔네 살이 되던 생일에 아내에게 말한다. “완벽한 하루야.” 하지만 남자의 행복은 곧 산산조각 난다. 생일 다음 날 아내가 사라진 것. 어디로 갔을까. 누구에게 행방을 물어야 할까. 남자는 아내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는다. 어쩌면 남자가 그동안 숨겨 왔던 ‘그 사건’ 때문에 아내가 사라진 것일까. 오랫동안 잊고 지내려 했으나 결코 지울 수 없는 그 사건을 남자는 기억해낸다. 아내를 찾기 위해 과거의 사건을 다시 수면 위로 올린다. 저자는 독자를 서서히 비밀스러운 사건의 중심부로 이끌고 간다. 조선 시대 화가 김홍도(1745∼?)와 신윤복(1758∼?)의 일대기를 다룬 대표작 ‘바람의 화원’(은행나무)처럼 속도감 넘치는 문체 덕에 소설은 술술 쉽게 읽힌다. 스릴러라는 장르는 조선 시대 훈민정음 반포 전 경복궁에서 벌어지는 집현전 학사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저자의 작품 ‘뿌리 깊은 나무’(은행나무)를 연상하게 한다. 저자는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팩션(faction·사실을 기반으로 한 허구) 소설로 유명하지만, 이번 작품은 현재를 배경으로 한다. 곳곳에서 마주치는 날씨에 대한 섬세한 묘사는 독자를 여름으로 데려간다. 소설 속에선 “스프링클러가 물을 뿜는 소리와 베어진 풀의 향기가 함께 밀려”오기도 하고, “태양의 고도가 기울고 곤충의 날개 마찰음이 귓전을 스”치기도 한다. 현실의 계절과 상관없이 독자는 여름의 한가운데 서 있을 것이다. 주인공의 직업을 화가로 고른 것도 이 같은 미묘한 날씨를 전달하기 위해서일 테다. 날씨는 날씨를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감정까지 전달하는 역할을 충실히 한다. 주인공은 온화한 바람이 불어올 땐 자만심에 빠지고, 따가운 햇볕 아래선 짜증을 낸다. 한여름 한 남자의 좌절감과 두려움을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자.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영화 ‘미나리’의 배우 윤여정이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아시아계 작품들은 미국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왜 그럴까. 영화 속 인종 등 불평등 문제를 연구하는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애넌버그 포용정책연구소 설립자이자 이 대학 애넌버그 언론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인 스테이시 스미스는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영화의 다양성을 논할 때 미국 내 아시아인의 비율보다 미국 영화에서 아시아 배우의 비율이 낮다는 ‘과소 대표성’ 문제 외에도 캐릭터에 대한 고정관념 등 살펴야 할 측면이 많다”고 지적했다. 영화의 배우 및 제작진을 구성할 때 유색인종을 일정 비율 포함하도록 하는 ‘포용 특약’의 개념을 2016년 처음 제시한 스미스 교수는 올해 1월 넷플릭스 작품의 다양성을 분석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동안 할리우드에서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아시아계 배우의 비중을 늘리자는 목소리가 나왔는데 이젠 이를 넘어선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스미스 교수는 “고정관념을 갖고 아시아 캐릭터를 잘못 묘사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살피고 있다”고 했다. 미나리에서 윤여정이 연기한 할머니 ‘순자’는 자녀를 위해 희생만 하는 전형적인 아시아 여성으로 표현되지 않았다는 점이 성공 요소였다. 돈밖에 모르는 부자(‘크레이지 리치 아시안’)나 공부벌레(‘시리어스맨’)처럼 오리엔탈리즘이 묻어난 영화와는 다른 점이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미나리의 경쟁작인 영화 ‘힐빌리의 노래’의 할머니는 자녀를 아끼는 여성을 평면적으로 그린 캐릭터다. 이에 비해 순자는 미국인이 상상하는 아시아 여성의 모습과 다르게 톡톡 튀는 모습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는 점이 의미가 있다”고 했다. 올해 골든글로브는 미나리를 작품상이 아닌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올려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였다. 2019년 중국계 미국인인 룰루 왕 감독이 중국계 이민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페어웰’도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지명해 비판을 받았다. 아카데미의 행보는 달랐다. 작품상 등 3개 부문을 수상한 영화 ‘노매드랜드’의 클로이 자오 감독은 중국 국적 여성이다. 미나리 역시 작품상 감독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미국 사회가 아시아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줬다. 스미스 교수는 “영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반영하고, 잘못된 점을 되돌아보게 한다”며 “영화에 여러 인종의 목소리를 포함시키면 관객은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고, 나아가 더욱 개선된 세상의 모습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어떻게 해야 ‘제2의 미나리’가 나올 수 있을까. 스미스 교수는 “카메라 너머의 아시아인 감독이나 작가, 프로듀서가 충분하지 않다”며 “창조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아시아인이 영화 산업에서 더 많아져야 한다”고 했다. 흑인과 남미 출신 제작자들이 할리우드 작품을 만들면서 편견을 극복해 나간 것처럼 영화 제작진의 구성부터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미나리의 정이삭 감독이 차기작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너의 이름은’을 선택한 건 아시아계의 정체성이 담긴 행보”라며 “미국 제작 시스템 내에서 활동하는 아시아계 영화인이 늘어나야 한다”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올해 3월 최영미 시인(60·사진)은 공항철도를 타고 가다가 차창 밖 한강을 바라봤다.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는 물길의 방향과 반대로 움직이는 열차에서 그는 시를 떠올렸다. ‘눈을 감았다/떠 보니/한강이/거꾸로 흐른다/뒤로 가는 열차에/내가 탔구나.’ 그의 시 ‘공항철도’는 이렇게 나왔다. 최 시인이 12일 7번째 시집 ‘공항철도’(이미)를 펴낸다. 4일 화상회의 플랫폼 줌(Zoom)으로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시집 이름이기도 한 이 시를 쓴 계기에 대해 그는 “어떤 일을 이루고자 애쓴다고 그 일이 이뤄지지 않는다. 사회가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고 우회적으로 답했다. 현 정치 상황에 비판적인 시선이 느껴지는 부분에 대해선 “개혁은 순리를 따르는 게 맞다. (이 시에) 꼭 정치적인 메시지만 있는 건 아니다”라고 말을 아꼈다. 시 공항철도 앞쪽엔 조선시대 문인 김시습(1435∼1493)이 “최선의 정치란 훌륭한 정치를 하고자 하는 바람을 갖고 의도적으로 일을 벌이는 게 아니다. 최선의 정치는 순리를 따르는 데서 이뤄진다”고 쓴 문장이 들어 있다. 김시습은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탈취하자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생육신 중 한 명. 그는 “쓰고 나서 보니까 시에 뼈가 있었다”고 했다. 최근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임명과 관련해선 “문화에 식견 있는 분이 문화부 장관을 해야 하는데 홍보 전문가에 불과한 사람이 장관이 됐다. 정권에 실망했다”고 말했다. 그는 고은 시인의 성추문을 처음 세상에 알리며 문화예술계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을 주도했다. 2018년 발표한 시 ‘괴물’에서 고은 시인을 뜻하는 ‘En 선생’의 과거 행동을 문제 삼았고 이 폭로가 미투 운동으로 이어졌다. ‘집이 아무리 커도 자는 방은 하나/침실이 많아도 잘 때는 한 방, 한 침대에서 자지/시골에 우아한 별장이 있고 이 도시 저 도시 옮겨가며 사는 당신/동서남북에 집이 널려 있어도 잘 때는 한 집에서 자지 않나?/그러니 자랑하지 마’(‘Truth’) 그는 부동산 대란을 풍자하는 시도 썼다. 이 시엔 개인적 경험이 담겨 있다. 그는 2019년 10월 원룸에서 투룸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원래는 어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마련한 집이지만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면서 홀로 살게 됐다. 혼자 쓰는 집은 넓지만 그만큼 낯설어 오히려 불면증이 생겼다. 베개를 들고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가며 잠을 청했으나 허사였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집이 넓다고 행복하게 사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아파트 값이 오를 때였는데 좀 심하다 싶어 써봤어요. 그런데 사람이 아무리 집이 많고 넓어도 자는 방은 하나예요. 넓은 곳에서 산다고, 많이 가졌다고 자랑할 필요가 없어요. 갖지 못했다고 위축될 필요도 없고요. 저는 올해 말에 다시 원룸으로 이사할 생각이에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종단 협의체인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종지협)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특별사면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지난달 30일 청와대에 전달했다고 3일 밝혔다. 종지협은 청원서에서 “삼성그룹은 대한민국을 경제 대국의 반열에 올리는 데 공헌했고, 문화, 예술,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 아낌없는 지원을 했다”며 “대한민국의 성장과 국익을 위해 삼성과 이 부회장에게 진심으로 참회할 기회를 주고, 이 부회장이 비상경영 체제의 삼성에 하루속히 복귀해 분골쇄신의 노력으로 우리 사회에 공헌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원 사유를 밝혔다. 종지협은 “이 부회장은 재판 과정을 통해 책임 있는 기업인으로서 지난 과오를 철저히 반성했다”며 “대국민 사과를 통해 과거의 악습을 단절하기 위한 윤리·준법 경영의 강화를 약속했다”고 덧붙였다. 이번 청원에는 종지협 공동대표 의장인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을 비롯해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원불교, 유교, 천도교, 한국민족종교협의회 등 6대 종단 지도자가 참여했다. 대표가 공석 상태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 부회장은 올 1월 국정농단 사건의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최근 공상과학(SF) 출판사 아작이 여러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 인세를 지급하지 않다가 문제가 되자 뒤늦게 사과하는 일이 벌어졌다. 지난해 1월에는 이상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김금희 작가가 저작권을 일정 기간 양도하라는 문학사상사의 요구를 비판하며 수상을 거부하는 일도 있었다. 유독 출판계에서 이런 문제가 반복되는 이유는 뭘까? 문학전문지 뉴스페이퍼의 이민우 대표는 3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작가들이 출판 계약금과 인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등 불합리한 출판업계의 분위기가 바뀌지 않고 있다”고 설명하며 “최근 작가들이 직접 출판사를 차리는 것도 책 판매량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불투명한 출판계 관행이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작가 김영하가 출판사 복복서가를 설립한 데 이어 임경선도 1인 출판사 토스트를 세웠다. 앞서 이슬아(헤엄)와 김서령(폴앤니나), 김민섭(정미소)도 출판사를 차렸다. 이 대표는 “무명작가들은 출판사가 책을 내준 것만으로도 감사해하며 계약상 불합리한 일이 벌어져도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보통 서점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납품받아 판매하고, 안 팔린 책은 다시 출판사로 반품한다. 이 과정에서 서점과 출판사는 책 판매 및 반품 수량을 공유한다. 반면 작가들은 이런 수치를 직접 확인하지 못하고, 출판사의 통보에 기대는 형편이다. 일부 출판사들이 인세 지급을 누락할 수 있는 배경이다. 아작 출판사 논란도 이런 출판계 구조와 무관치 않다. 박은주 아작 대표는 1일 사과문을 통해 여러 작가에게 판매 내역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작가 장강명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한국 영화는 전국 관객이 몇 명인지 실시간으로 집계되고 공개된다”며 “그런데 작가들은 자기 책이 얼마나 팔리는지 출판사에 의존하는 것 외에 알 방법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10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작가 1532명을 대상으로 벌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3%가 책 판매량을 출판사로부터 제대로 보고받지 못했다고 답했다. 인세를 현금이 아닌 현물로 받은 경험이 있다고 한 작가도 36.5%에 달했다. 조사 책임자인 공병훈 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는 “출판계에 공정한 유통 구조가 마련되지 않으면 향후 영화, 오디오북 등 2차 저작권으로 책을 활용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커질 것”이라며 “출판사들이 솔선수범해서 구조를 바꿔가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저자들이 자신의 책 판매량과 인세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한 일부 출판사처럼 관련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해 2월 저자와 인세 정보를 공유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든 다산북스의 김선식 대표는 “판매 부수를 정확하게 공개하지 않는 출판업계의 관행을 바꿀 필요가 있다”며 “저자들과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유하면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온라인으로 독자님들 뵙는 건 처음이네요. 정말 시대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가 신경숙(58)은 8일 화상회의 플랫폼 ‘줌(Zoom)’을 통해 진행된 독자들과의 만남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달 5일 장편소설 ‘아버지에게 갔었어’(창비)를 펴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1개월 넘게 강연이나 사인회를 열지 못하자 온라인으로 강연을 진행한 것. 독자들은 “코로나 시대에 맞춘 랜선 강연을 준비해줘서 고맙다”며 채팅창에 글을 올렸다. 이번 강연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온라인 서점을 통해 사전 신청을 한 독자 150여 명만 함께할 수 있었다. 신경숙은 줌 접속 환경이 마련된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의 한 강의실에서 커다란 화면을 통해 독자들의 얼굴과 생생한 반응을 지켜봤다. 박지영 창비 한국문학2팀장은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과 달리 줌으로 행사를 진행한 덕에 작가가 독자의 얼굴을 보며 강연을 진행할 수 있었다”며 “작가와 독자가 더 친밀감을 느낄 수 있었던 덕에 강연이 성공적이었다”고 했다. 줌과 같은 쌍방향 플랫폼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기를 원하는 작가와 출판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코로나19가 길어지면서 오프라인 강연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작가들은 책이 나온 뒤 독자들의 반응을 듣기를 원한다. 하지만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완전 공개 플랫폼에서 온라인 강연을 진행하기는 꺼린다. 누군가 호기심에 들어왔다 곧바로 방을 나가는 경우 강연의 흐름이 깨지기 때문이다. 작가 입장에서는 자신이 쓴 책을 제대로 이해하는 소수와 만나고 싶기도 하다. 작가들은 인원이 제한된 줌 강연을 통해 오프라인 만남처럼 밀접히 연결된 느낌을 받는다. 올 2월 학술서 ‘중국정치사상사’(사회평론아카데미)를 펴낸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55)는 14일 줌을 통해 온라인 강연을 진행했다. 사전에 신청한 독자 150여 명이 강연에 참석했다. 독자들은 채팅창을 통해 활발하게 질의응답을 했다. 강연을 1시간 진행한 뒤 추가로 1시간의 질의응답을 이어갔다. 이날 강연은 무료였지만 강연 도중 나가는 이는 거의 없었다. 채팅창에 악의적인 글을 올리거나 음성을 잘못 켜서 강연을 훼방하는 이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밝힌 이들을 대상으로 사전 신청을 받았기 때문에 강연 참가자들의 자세와 열의가 보장된 것이다. 최세정 사회평론아카데미 편집장은 “개인정보 제공 동의를 받고 신청자를 모집한 덕에 김 교수의 열렬한 팬들이 강연에 다수 참석했다”며 “수준 높은 독자들이 모였기 때문에 허가 없이 영상을 녹화해 불법으로 유통하는 문제도 겪지 않고 있다”고 했다. 코로나19 이후에도 줌 등 온라인 강연을 출판사들이 적극적으로 활발히 이용할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온라인 강연은 해외나 지방에 거주하는 독자들을 사로잡고, 책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이벤트 등 출판사마다 온라인 강연을 효과적으로 기획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한 시골마을 정류장. 어머니와 딸이 빨간색 버스에 몸을 싣는다. 버스 운전사의 별명은 ‘고맙습니다’. 좁다란 산길을 지날 때 버스에 길을 양보하는 마차와 인력거에 예의바르게 고맙다고 인사하기 때문이다. 길을 가는 내내 모녀는 제일 앞자리에 앉아 운전사를 바라본다. 운전사의 착한 마음씨를 보았기 때문일까. 목적지에 도착한 후 어머니는 운전사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한다. “내 소원일세. 두 손 모아 빌겠네. 어차피 내일부턴 생판 모르는 사람의 노리개가 될 거네.” 가난 탓에 딸을 팔 수밖에 없는 어머니가 딸을 맡아줄 것을 부탁한 것. ‘고맙습니다’라는 제목의 이 소설은 200자 원고자 15장 안팎이다. 일본어로 손바닥만 한 길이라는 의미로 손바닥 소설이라고 불린다. 읽는 데 드는 시간은 길어야 5분 남짓. 하지만 읽고 나면 오랫동안 여운을 남긴다. 저자는 이런 초단편 소설을 100여 편 썼다. 이 소설들에는 사랑, 이별, 꿈, 고독, 죽음, 늙음 등 삶의 단면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저자는 1948년 발표한 소설 ‘설국’으로 유명하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는 설국의 첫 문장은 간결한 언어로 독자를 빨아들이는 미학을 보여준다. 설국은 장편소설이지만 단편적인 에피소드로 구성돼 있다. 이야기의 호흡이 길지 않다. 설국의 문장전개 방식이 손바닥 소설과 빼닮았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손바닥 소설을 언급한 건 요즘 유행하는 웹소설 때문이다. 웹소설은 호흡이 짧다. 스마트폰으로 읽으면 한 화면에 20개 문장이 채 되지 않는다. 한 문장이 한 문단을 구성하기도 한다. 이제 스마트폰을 피해 갈 수 없는 시대다. 웹소설 콘텐츠는 스마트폰이라는 플랫폼에 맞게 창작될 것이다. 더욱 짧아질 가능성이 높다. 기존 문학이라고 다를까. 종이의 질감을 여전히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전자책 시장이 조금씩 커지고 있다. 소설을 보는 다른 전자기기가 나오지 않으라는 법도 없다.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면 플랫폼 변화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한기호 한국출판문화연구소장은 “요즘 어떤 작가들은 스마트폰으로 읽기 편한 글을 쓰기 위해 스마트폰으로 글을 쓴다”고 했다. 만년필로 원고지에 글을 쓰는 시대에서 손가락으로 스마트폰 자판을 두드리는 시대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지하철에 타면 웹소설을 보는 독자들을 보곤 한다. 그들은 빠르게 스크롤을 내린다. 얼굴은 무표정하기 일쑤다. 어쩌면 퇴근길에 아무 생각 없이 활자를 소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걸작 손바닥 소설같이 짧고도 감동을 주는 소설을 스마트폰으로 읽는다면 다르지 않을까. 소설 속에서 어머니가 딸이 팔려갈 몸이라고 말하는 순간, 잠시 스크롤을 멈추지 않을 이는 없을 것이다. 글을 저장하고 싶은 마음에 화면을 캡처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사심을 가득 담아, 짧고도 감동을 주는 소설을 스마트폰으로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2017년 6월 국제정책 자문가인 저자가 미국 CNN에 출연했다. 그는 “치명적인 질병이 세계적 보건위기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는 어떤 대비도 돼 있지 않다”고 경고했다. 3년이 지나지 않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엄습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코로나19 이후 우리 삶은 어떻게 변할까. 저자를 “가장 뛰어난 젊은 저술가”라고 극찬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의 추천을 믿고 책을 열어본다. 저자는 2001년 9·11테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류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코로나19는 양극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팬데믹이 유행할 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이들은 양질의 의료 서비스가 담보된 안전한 환경에서 일한다. 반면 가난한 이들은 바이러스의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개인뿐 아니라 국가도 마찬가지다. 관광업으로 돈을 벌어온 태국 필리핀 멕시코 등의 저개발국들은 코로나19로 경제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영국처럼 백신 접종률이 높은 선진국은 다시 관광객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불평등은 기업 사이에서도 심각해질 것이라는 게 저자의 견해다. 거대 정보기술(IT) 기업들은 몸집을 더 불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 비대면 쇼핑을 위한 실시간 가격비교 사이트가 대표적이다. 여기에선 생산단가를 낮출 여력이 더 큰 대기업이 중소기업보다 유리하다. 빅데이터를 활용하는 기업이 많아질수록 많은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는 대기업이 더 큰 이점을 누릴 수 있다. 저자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자국 중심주의가 더 확산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백신을 전략물자로 지정해 자국민에게 우선 공급하는 방침을 천명한 미국이 대표적이다. 미중 양국은 코로나19 책임론을 놓고 더 첨예한 갈등을 벌이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인류는 파멸할 운명이 아니다”라며 희망을 말한다. 국가 간 협력을 강조하는 다자주의를 확대하고, 공공 서비스를 통해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다는 것. “이 흉측한 팬데믹은 변화와 개혁의 가능성을 마련해 줬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낭비하지 않는 건 우리 몫이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19일 서울 종로구 북카페 ‘카페꼼마 삼일빌딩점’. 책 수백 권이 꽂힌 책장 바로 옆으로 식물가게가 있다. 가게에 들어서자 한참 꽃을 다듬던 중년 남성이 다정하게 인사를 건넨다. 앞치마를 한 얼굴이 익숙해 자세히 살펴보니 시인 이병률(54)이다. 이병률은 출판사 문학동네의 계열사인 ‘달’ 대표다. 출판사 달에서 펴낸 산문집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로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다. 유명 시인인 그에게 “왜 꽃을 다듬고 있느냐”고 물으니 “예전부터 식물가게를 열고 싶었다. 가게 이름은 ‘그대가 준 꽃’이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곳에서 식물을 보살피는 이병률을 보러 카페를 찾는 팬들도 많단다. “일주일에 3, 4일은 가게에서 시간을 보내요. 주말엔 식물 강의를 하며 독자들을 만나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와중에도 주요 출판사들이 북카페를 열고 있다. 문학동네의 카페꼼마가 대표적이다. 지난달 1일 삼일빌딩점을 오픈한 데 이어 8월에는 서울 강남구에 약 1650m² 규모로 신사점을 열 계획이다. 지문희 카페꼼마 이사는 “문학동네는 독자들과 오랫동안 소통해온 콘텐츠 생산자다. 카페꼼마에도 책을 매개로 저자와의 만남뿐 아니라 커피나 빵 관련 교육 프로그램 등 다양한 콘텐츠를 담을 것”이라며 “연내에 전국 지점을 8곳으로 늘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출판사가 운영하는 북카페가 수도권에만 생기는 건 아니다. 창비는 19일 부산 동구에 ‘창비 부산’ 카페를 열었다. 부산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어 여행자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곳에는 카페 이용자가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책 1500여 권이 비치돼 있다. 계간지 정기구독자나 온라인 홈페이지 가입자 등 창비 서비스를 이용하면 2시간 동안 카페에 머물 수 있다. 일반인들이 이곳을 방문했다가 현장에서 창비 서비스에 가입하기도 한다. 창비는 방역지침을 감안해 제한된 인원을 대상으로 젊은 작가들의 강연을 카페에서 진행할 계획이다. 장편소설 ‘달까지 가자’의 장류진 작가, 청소년 소설 ‘페인트’의 이희영 작가 등 창비가 펴낸 책의 저자들을 만날 수 있다. 강서영 창비 홍보부 과장은 “작가와의 만남 등 독서 행사 횟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비수도권 거주 독자들을 배려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사실 출판사가 북카페를 열기 시작한 건 약 10년 전부터다. 단순히 커피를 팔아 돈을 벌겠다는 목적은 아니었다. 우연히 카페에 들른 방문객들에게 책을 홍보할 수 있는 기회가 돼서다. 물론 출판사 문학 행사에 참여한 독자들이 북카페의 매력에 빠져 단골 고객이 될 수도 있다. 최근 코로나19로 카페들이 잇달아 폐업하고 있음에도 주요 출판사들이 북카페를 여는 건 출판시장이 쪼그라드는 상황에서 독자와의 접점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한 포석이다. 강서영 과장은 “창비 부산 개점에 앞서 코로나 유행이 시작돼 개점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며 “독자와 만나는 빈도를 높여야 한다는 판단하에 개점을 밀어붙였다”고 했다. 최근 출판사 북카페는 저자와 만나는 공간을 넘어 복합 문화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카페꼼마는 드라마 등 주요 방송 프로그램이나 영화 촬영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이병률 시인처럼 작가들을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 되기도 한다. 일부 건물주는 유동인구가 모이는 북카페가 건물에 입주하는 걸 선호해 임대료를 낮춰주기도 한다. 북카페가 다른 문화공간과의 차별화에 성공할 수 있을까. 장은수 출판평론가는 “주요 출판사들은 지명도 높은 저자와 책을 통해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한다”며 “북카페의 서비스를 통해 출판사의 질 좋은 콘텐츠를 고객에게 충분히 제공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