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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진구 아차산성이 16년 만에 다시 발굴된다. 장마철 수해를 방지하기 위한 보수정비 사업으로 아직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백제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광진구는 “다음 달부터 워커힐호텔 주변의 아차산성 터에 대한 발굴조사에 들어간다”고 21일 밝혔다. 이곳에는 신라가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남문(南門) 터와 성벽이 남아 있다. 고고학계 일각에서는 백제가 쌓은 성벽 혹은 유물 일부가 근처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현재까지 아차산성은 1997년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년 서울대 박물관의 시굴조사만 이뤄졌을 뿐 제대로 된 발굴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두 번의 조사에서는 주로 신라의 성벽과 유물이 나왔고, 백제시대 유물은 삼족기(三足器) 한 점만 지표에서 발견됐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책계왕이 고구려 침략을 대비해 아차성과 사성을 수축했다’는 기록이 적혀 있어 아차산에 백제 산성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흔히 사람 뼈는 사인을 규명하고 범인을 알아내는 데 결정적인 단서로 쓰인다. 그런데 보존 상태가 좋은 인골을 보고 열광하는 것은 비단 과학수사대(CSI) 요원뿐만이 아니다. 통일신라 이전 ‘고인골(古人骨)’을 집중 연구하는 고고학자들도 이에 못지않다. 문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선사시대 인류의 생활상을 파악하는 데 인골만큼 좋은 소재가 없기 때문이다. 고인골을 들여다보면 시신의 성별, 나이, 키 등은 물론이고 생전에 어떤 음식을 주로 먹었고 영양 상태는 어땠으며 특정 의식을 위해 신체를 의도적으로 변형시키거나 상처를 냈는지 등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피장자의 사회적 위치와 직업, 나아가 당시의 사회상을 추론하는 것도 가능하다. 국립김해박물관은 ‘뼈? 뼈!-고인골, 개인의 삶에서 시대의 문화를 읽다’ 특별전을 8월 16일까지 연다. 고인골만 다루는 특별전이 국내 박물관에서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두개골을 통해 생전 얼굴을 복원한 연구 사례와 고대인들의 먹을거리, 뼈의 변형으로 살펴본 고대인들의 육체 활동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이 밖에 고인골의 해부학적 분석을 통해 관절염과 결핵, 골종양, 충치, 치주염 등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앓았던 병력을 보여 준다. 우리나라 고인골 연구의 시발점이 된 충북 제천 황석리 출토 인골을 비롯해 전남 여수 안도패총, 경남 김해 대성동·예안리 고분군, 경북 경산 임당 유적 등에서 나온 다양한 고인골을 한꺼번에 모아 전시한다. 이와 관련해 27일 김재현 동아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가 고인골 연구를 주제로 김해박물관에서 강연회를 연다. 055-320-6834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이런 분들이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조용히 자기 직분에 충실한 사람들이 높이 평가받는 날이 언제 오려나….” 50년 동안 신라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 현역 최고참 최태환 작업반장과 수중 발굴의 산증인 박용기 잠수팀장을 인터뷰한 동아일보 18일자 기사를 보고 한 독자가 동아닷컴에 올린 인터넷 댓글이다. 경북 경주 월성과 충남 태안군 앞바다에서 이들의 얘기를 묵묵히 들으며 기자는 깊은 존경심과 더불어 미안함을 느꼈다. 문화재를 담당하면서 발굴 성과에만 관심을 기울였을 뿐 현장에서 묵묵히 땀 흘리는 이들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성의 심정으로 지면에 미처 쓰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를 몇 자 적어본다. 올해 73세인 최 반장은 평생 지은 논농사를 4년 전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칠순의 나이에 기력이 달려 부득불 자신의 땅을 한국농어촌공사에 임대로 넘겼다. 지금은 외손자들의 간식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조그만 텃밭에 고구마만 키우는 정도다. 그가 칠순까지 농기구를 든 것은 비단 땅을 사랑해서만은 아니었다. 발굴 보수만으로는 도저히 생활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올해로 49년차 작업반장인 그가 받고 있는 일당은 고작 5만3000원. 주말을 제외하고 한 달 내내 일한다고 쳐도 월 110만 원가량을 받는 셈이다. 그러나 비가 오면 유구 훼손을 막기 위해 발굴을 중단하는 작업 특성상 100만 원을 손에 쥐지 못할 때도 많다. 게다가 장마나 혹한기에는 발굴을 진행하지 않는다. 하지만 산전수전 겪은 노장은 푸념을 늘어놓지 않았다. 그저 천마총과 대릉원 등 굵직한 유적을 발굴하던 1970년대가 그립다고만 했다. 대통령이 경주 발굴 현장을 수시로 찾던 당시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새겨진 노란 모자를 쓰고 있으면 경주시내 모든 음식점에서 외상이 가능할 정도로 끗발이 있었단다. 물론 수입도 지금보다 훨씬 ‘쏠쏠’했다. 그는 “죽기 전에 월성까지 발굴을 해봐서 여한이 없다”고 했다. 수중 발굴 현장도 상황이 열악하기는 마찬가지다. 올해로 32년의 잠수 경력을 갖고 있는 박 팀장은 요즘도 간간이 부업을 뛴다. 파도가 높아져 수중 발굴을 할 수 없는 계절이 오면 산소통을 짊어지고 토목공사 현장을 찾는 것이다. 그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직원의 제안을 받고 2002년 이 일을 시작했지만, 보수가 적어 한동안 자신의 배로 조개잡이를 겸했다. 그러나 수중 발굴의 묘미에 서서히 빠져들면서 2004년에는 아예 배를 정리하고 발굴에 집중했다. ‘투잡’을 뛰며 힘들게 생활하는 데 후회는 없냐고 묻자 “바닷속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도자기에 한번 반하면 헤어 나올 수가 없다”고 답했다. 이들은 전쟁으로 치면 무명용사에 가깝다. 현장의 고고학자들만 이들의 공을 기억할 뿐이다. 최 반장과 더불어 1970년대 경주시내 주요 발굴을 이끈 작업반장 삼총사 가운데 김기출 반장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팔순을 넘긴 김용만 반장은 현장에서 은퇴했다. 더 늦기 전에 한국 발굴 역사의 산증인들을 제대로 예우하는 것이 문화강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 아닐까.김상운 문화부 기자 sukim@donga.com}

수천 년 묵은 유물을 꺼낼 때 가슴이 뛰는 건 비단 고고학자들뿐만이 아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현장에서 손수 연장을 들고 작업하는 숨은 이들의 땀이 없다면 발굴 자체가 불가능하다. 땅속에서 혹은 물속에서 오랫동안 발굴 현장을 지킨 백전노장들의 뒷얘기를 현장에서 들어봤다.○ 육상 발굴 현역 최고참 ‘최 반장’ 12일 경북 경주시 월성 발굴 현장. 칠순을 넘긴 백발의 노인이 꽃삽으로 조심스레 땅을 팠다. 불과 5분 정도 지났을까. 돌 사이에서 잿빛 덩어리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노인은 한번 스윽 훑어보고는 한마디를 툭 던졌다. “삼국시대 것은 아니고 통일신라 기와구먼.” 이 사람은 고고학자가 아니다. 하지만 월성 현장에 있는 어떤 학예연구사보다 훨씬 오랫동안 신라 유물을 만졌다. 천마총을 비롯해 황남대총, 안압지, 황룡사 터를 거쳐 월성에 이르기까지 근 50년 동안 경주의 발굴 현장을 지킨 작업반장 최태환 씨(73). 작업반장은 현장 인부들을 통솔해 유구(遺構·옛 건축의 구조를 알 수 있는 흔적)가 묻힌 흙을 걷어내고 유물을 출토하는 임무를 맡는다. 유구와 유물을 훼손하지 않고 발굴하는 작업은 아무나 할 수 없다. 그가 이 분야에 발을 들여놓은 건 경부고속도로를 내면서 정부가 실시한 1967년 경주 방내리 고분군 발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50년 발굴 인생에서 가장 인상적인 경험으로 그는 주저 없이 1975년 안압지 발굴을 꼽았다. 당시 연못 밑 진흙층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통나무배를 그가 직접 파냈다. 그의 역할은 유물 출토에 그치지 않고 통나무배의 보존 처리 작업까지 이어졌다. “그때만 해도 보존과학을 전공한 분들이 별로 없었어요. 서울에서 경주까지 출장을 오는 것도 한두 번이지. 결국 내가 약품 처리 방법을 전문가한테 직접 배웠습니다. 한 5년 동안 경주박물관 지하창고에 수시로 들어가서 통나무배가 잠긴 수조에 페놀 같은 화학약품을 섞어주고 그랬어요.” 당시 안압지에서는 통나무배를 비롯해 목간(木簡), 14면체 주사위 주령구(酒令具), 목제 남근(男根) 등 신라 유물들이 쏟아졌다. 그는 “다양한 유물이 많이 나와서 힘든 줄도 모르고 일했다”며 “10년을 해도 될 발굴인데 당시 여건상 1년 반 만에 끝내서 지금도 아쉽다”고 했다. 그에게 이번 월성 발굴은 특별하다. 사실상 그의 마지막 발굴이기 때문이다. 월성 발굴을 주축으로 한 ‘신라왕경 복원 정비사업’은 2025년까지 잡혀 있는데 그때는 이미 팔순을 훌쩍 넘게 된다. 최 반장은 “경주시내 주요 유적들을 모두 내 손으로 발굴해봤다는 데 한없는 자부심을 느낀다”며 “월성 발굴까지 해봤으니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수중 발굴 산증인 ‘박 팀장’ 지난달 29일 충남 태안군 마도(馬島) 앞바다. 보트를 타고 10분쯤 이동하자 노란색 부표가 파도에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마도 5호선’으로 추정되는 고선박 발굴 현장이다. 마도 5호선은 올 3월 3차원(3D) 지층탐사 때 우연히 발견됐는데, 선체를 뒤덮은 진흙을 잠수부들이 삽으로 파내고 있었다. 이들은 산소를 공급해주는 노란색 케이블을 연결한 채 약 50분 동안 작업을 이어갔다. 수중 발굴은 수압과 조류 때문에 체력 소모가 엄청나다. 이곳은 수심이 얕지만 지층이 워낙 단단해 잠수부들이 작업에 애를 먹고 있었다. 잠수부들에게 일일이 작업 지시를 하고 있는 박용기 잠수팀장(55)을 배 위에서 만났다. 해병대 출신으로 32년의 잠수 경력을 갖고 있는 박 팀장은 본격적인 첫 수중 발굴인 2002년 전북 군산 비안도 발굴부터 이 일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수중 발굴의 ‘산증인’인 셈이다. 비안도 발굴 당시만 해도 수중 발굴 전용선박이 없어 어선(통통배)을 타고 현장에 접근했다.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면 조그마한 배가 크게 흔들려 위험했다. 박 팀장은 “납으로 된 12kg짜리 벨트를 허리에 매다 넘어져서 갈비뼈가 부러진 적도 있다”며 “지금은 발굴 여건이 좋아져 과거보다 안전하다”고 했다. 발굴 보수가 적어 한동안 조개잡이를 겸하다가 한때 그만두려고도 했지만, 그는 결국 이 일을 접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박 팀장은 “물속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도자기를 보면 나도 모르게 빠져들게 된다. 체력이 다할 때까지 수중 발굴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경주·태안=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수 백, 아니 천년 이상의 신비를 간직한 유물이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과의 싸움이 필요하다. 학자가 아닌 현장 발굴팀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이들의 땀이 없다면 발굴 자체가 불가능하다. 고분과 수중에서 발굴 현장을 지켜온 이들의 얘기를 담았다. ○육상 발굴 현역 최고참 ‘최 반장’ 12일 경북 경주시 월성 발굴현장. 칠순을 넘긴 백발의 노인이 꽃삽으로 조심스레 땅을 팠다. 불과 5분 정도 지났을까. 돌 사이에서 잿빛 덩어리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노인은 한번 스윽 훑어보고는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삼국시대 것은 아니고 통일신라 기와구먼.” 이 사람은 고고학자가 아니다. 하지만 월성 현장에 있는 어떤 학예연구사보다 훨씬 오랫동안 신라유물을 만졌다. 천마총을 비롯해 황남대총, 안압지, 황룡사터를 거쳐 월성에 이르기까지 근 50년 동안 경주의 발굴현장을 지킨 작업반장 최태환 씨(73). 작업반장은 현장 인부들을 통솔해 유구(遺構·옛 건축의 구조를 알 수 있는 흔적)가 묻힌 흙을 걷어내고 유물을 출토하는 임무를 맡는다. 유구와 유물을 훼손하지 않고 발굴하는 작업은 아무나 할 수 없다. 그의 이 분야에 발을 들여놓은 건 경부고속도로를 내면서 정부가 실시한 1967년 경주 방내리 고분군 발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50년 발굴 인생에서 가장 인상적인 경험으로 그는 주저 없이 1975년 안압지 발굴을 꼽았다. 당시 연못 밑 진흙층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통나무배를 그가 직접 파냈다. 그의 역할은 유물 출토에서 그치지 않고 통나무배의 보존처리 작업까지 이어졌다. “그때만 해도 보존과학을 전공한 분들이 별로 없었어요. 서울에서 경주까지 출장을 오는 것도 한두 번이지. 결국 내가 약품처리 방법을 전문가한테 직접 배웠습니다. 한 5년 동안 경주박물관 지하창고에 수시로 들어가서 통나무배가 잠긴 수조에 페놀 같은 화학약품을 섞어주고 그랬어요.” ekdt 안압지에서는 통나무배를 비롯해 목간(木簡), 14면체 주사위 주령구(酒令具), 목제 남근(木製 男根) 등 신라 유물들이 쏟아졌다. 그는 “다양한 유물이 많이 나와서 힘든 줄도 모르고 일했다”며 “10년을 해도 될 발굴인데 당시 여건상 1년 반 만에 끝내서 지금도 아쉽다”고 했다. 그에게 이번 월성 발굴은 특별하다. 사실상 그의 마지막 발굴이기 때문이다. 월성 발굴을 주축으로 한 ‘신라왕경 복원 정비사업’은 2025년까지 잡혀있는데 그때는 이미 팔순을 훌쩍 넘게 된다. 최 반장은 “경주시내 주요 유적들을 모두 내 손으로 발굴해봤다는 데 한없는 자부심을 느낀다”며 “월성 발굴까지 해봤으니 더 이상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수중 발굴 산 역사 ‘박 팀장’ 지난달 29일 충남 태안군 마도(馬島) 앞 바다. 보트를 타고 10분쯤 이동하자 노란색 부표가 파도에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마도 5호선’으로 추정되는 고선박 발굴현장이다. 마도 5호선은 올 3월 3차원(3D) 지층탐사 때 우연히 발견됐는데, 선체를 뒤덮고 있는 진흙을 잠수부들이 삽으로 파내고 있었다. 이들은 산소를 공급해주는 노란색 케이블을 연결한 채 약 50분 동안 작업을 이어갔다. 수중 발굴은 수압과 조류 때문에 체력 소모가 엄청나다. 이곳은 수심이 얕지만 지층이 워낙 단단해 잠수부들이 작업에 애를 먹고 있었다. 잠수부들 사이로 일일이 작업지시를 하고 있는 박용기 잠수팀장(55)을 배 위에서 만났다. 해병대 출신으로 32년의 잠수경력을 갖고 있는 박 팀장은 본격적인 첫 수중 발굴인 2002년 군산 비안도 발굴부터 이 일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수중 발굴의 ‘산 역사’인 셈이다. 비안도 발굴 당시만 해도 수중 발굴 전용선박이 없어 어선(통통배)을 타고 현장에 접근했다.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면 조그마한 배가 크게 흔들려 위험했다. 박 팀장은 “납으로 된 12㎏짜리 벨트를 허리에 매다 넘어져서 갈비뼈가 부러진 적도 있다”며 “지금은 발굴여건이 좋아져 과거보다 안전해졌다”고 했다. 발굴 보수가 적어 한동안 조개잡이를 겸하다가 한때 그만두려고도 했지만, 그는 결국 이 일을 접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박 팀장은 “물속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도자기를 보면 나도 모르게 빠져들게 된다. 체력이 다할 때까지 수중 발굴을 계속 하고 싶다”고 말했다.경주·태안=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최치원과 이승만, 박정희의 공통점은? 당시 한반도의 운명을 좌지우지한 강대국으로 유학을 갔다 와서 문화 혹은 정치권력을 손에 쥐었다는 점이다. 신라시대 당나라에서 공부한 최치원과 일제강점기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박정희, 미국 프린스턴대 박사학위 출신의 이승만은 각각 중국과 일본, 미국에 대한 학문적 종속구조를 여실히 보여준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계층이론에서 따온 용어이자 이 책 제목이기도 한 ‘지배받는 지배자’ 역시 미국의 학문 시스템에 철저히 종속됐으나 한국 학계에서는 지배층으로 군림하는 미국 유학파들의 위상을 상징한다. 미국에서 사회학 석·박사를 딴 저자는 미국 유학파가 점령한 한국 학계가 미국의 학문 풍토와 달리 왜 후진적인 행태를 보이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 학계의 한심한 행태를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단순히 자료 분석에만 그치지 않고 10여 년에 걸쳐 80여 명의 유학생을 만나 생생한 인터뷰를 담았다. 저자는 “한국 지식인들은 정치, 시민사회에 민주화와 근대화를 거세게 요구했지만 정작 본인들은 비민주적이고 전근대적인 가장 모순된 집단”이라고 일갈한다. 미국 유학파들의 끝은 창대하나 시작은 미약했다. 책에서는 이들이 부족한 영어실력 때문에 미국의 토론식 수업에 적응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사례가 나온다. 한국에서 좋은 대학을 훌륭한 성적으로 마친 엘리트들이 언어장벽 앞에서 처참히 무너지는 것이다. 일단 시작부터 기가 죽은 유학생들은 점차 미국 대학에 적응하면서 미국 시스템의 우월성을 자연스레 체득하게 된다.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현지에 정착한 유학파들의 삶도 수월하지는 않다. 백인 중심의 인종질서와 더불어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언어장벽으로 인해 주류 사회에 쉽게 들어가지 못한다. 결국 상당수 유학파들이 도중에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이들이 한국에 돌아와서는 폐쇄적 학벌주의와 비민주적 소통, 후진적 대학 시스템이라는 또 다른 장벽을 마주하게 된다. 책에는 학회를 마친 뒤 회식자리에서 특정 명문대 출신들이 “형, 동생”을 불러대며 자기들끼리만 뭉치는 모습을 보고 실망한 한 교수의 경험이 소개됐다. 심지어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에도 분야별 전문가들을 모으기보다 학부 선후배를 중심으로 연구자들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교수 임용 과정에서도 미국 학위뿐만 아니라 국내 학부를 일일이 따진다. 저자는 “우리나라는 미국과 달리 학부 학벌과 대학원 학벌이 이중으로 작동하고, 학부 학벌의 인맥과 맞물려 종종 학벌정치로 비화된다”고 꼬집었다. 이와 함께 유교적 가부장 질서와 연공서열에 눌려 자유로운 학문비판이 이뤄지지 못하는 행태도 젊은 학자들의 의욕을 꺾는다. 기존 통설을 공박하는 새로운 학문적 시도를 ‘예의 없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결국 한국 학계에 실망한 상당수 유학파들은 틈나는 대로 미국을 찾아가 연구하는 방식으로 나름의 활로를 찾는다. 미국의 첨단 학문 트렌드를 좇고 이곳 연구자들과 브레인스토밍을 하는 것이 국내에서 연구를 하는 것보다 생산성이 훨씬 좋다는 얘기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미국의 시스템에 기대는 학문적 종속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셈이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연구를 이어가다 보니 창의성에 지장을 초래하기도 한다. 저자는 “미국 유학파들은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쳐야 하는 상황으로 인해 결국 집중력을 잃게 된다”고 썼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나이가 들면서 좀 더 지혜로워졌다고 해야 할까요? 문화 차이도 인생의 하나로 담담히 받아들이게 되더군요.” 20년 전 소설 ‘영원한 이방인’으로 이민 2세의 소외를 그린 재미작가 이창래 씨(50)는 서리가 내린 자신의 머리칼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 씨가 올해 등단 20주년을 맞아 처녀작 ‘영원한 이방인’(영어제목 네이티브 스피커·Native speaker)을 재출간하고 13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세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작가의 삶을 반영하듯 이 작품은 미국 사회에서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정체성 갈등을 겪는 한국인 2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995년 출간 당시 첫 작품으로는 이례적으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된 데 이어 ‘펜 헤밍웨이 문학상’ 등 미국 내 주요 문학상들을 휩쓸었다. 20년 전 첫 작품을 다시 꺼내 읽을 때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 작가는 “이 작품이 다룬 소외감과 언어의 힘은 데뷔작가가 쓸 만한 소재”라며 “유행을 좇기보다 마음에 계속 울리는 것을 소재로 삼으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간담회에서 “미국에 거주하며 영어로 소설을 쓰지만 미국인 독자들이 저를 한국인으로 여긴다면 자랑스러울 것 같다”며 모국에 대한 애정을 내비쳤다. 며칠 전 새벽에 혼자 종로의 순댓국집을 무작정 찾은 일화도 들려줬다. “조그마한 식당에서 택시운전사와 택배기사 아저씨들이 모여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치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먼 친척을 조금씩 알아나가는 과정처럼 느껴지더군요.” 하지만 중견 작가로서 관심의 대상은 비단 한국에만 머물지는 않는다고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계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어떤 것이 우리 삶에 영향을 주는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네 번째 작품 ‘생존자’와 다섯 번째 작품 ‘만조의 바다 위에서’는 이전 소설에 비해 넓은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소재와 형식으로 작품을 쓰려고 노력하지만 한국이 제 작품에서 빠질 순 없죠.” 이 씨는 현재 미국 프린스턴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지난해 연세대 석좌교수에 임용됐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일제강점기 인위적으로 훼손되기 이전의 신라 서봉총(瑞鳳塚) 금관은 본래 어떤 모습이었을까. 국립중앙박물관이 서봉총 금관에 달린 곡옥이 떨어지고 양대(梁帶·머리에 쓸 수 있도록 테두리 안쪽에 십자로 붙여 놓은 금띠)가 엉뚱한 데 붙여진 사실을 최근 발견한 가운데 관련 전시회를 열어 눈길을 끈다. 1926년 경북 경주시에서 발견된 서봉총은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 황태자가 봉황이 달린 금관을 발굴했다는 뜻에서 ‘서전(瑞典·스웨덴)’의 ‘서(瑞)’자와 봉황의 ‘봉(鳳)’자를 따서 명명됐다. 보물 제339호로 지정된 서봉총 금관은 봉황 장식을 갖춘 유일한 신라 금관이다. 2일 찾은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의 ‘과학으로 풀어보는 서봉총 금관’ 전시는 금관의 훼손 흔적을 과학적 기법을 동원해 밝혀내는 과정을 한눈에 보여줬다. 1926년 서봉총 출토 직후 찍힌 금관 사진과 실물 비교가 결정적인 단서였지만 본격적인 검증은 ‘X선 형광 분석(XRF)’을 통해 가능했다. 전시장 오른편으로 눈길을 돌리면 XRF를 통해 일제강점기 이후 급조된 금실이 금관의 어느 부위에 사용됐는지를 사진으로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신라시대 때 사용된 금실의 순도가 17∼19K로 나중에 만들어진 금실(23∼24K)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사실에 착안한 결과다. 이는 형광 X선을 유물에 쏘아 비파괴 분석으로 성분을 파악할 수 있는 XRF 장비 덕분에 알아낼 수 있었다. 금실의 제조기법 차이도 결정적이었다. 신라시대 금실을 확대 촬영한 고해상도 사진은 금박을 큰 구멍에서 작은 구멍으로 통과해 금실을 뽑아내는 ‘늘여 빼기’ 흔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반면 나중에 만들어진 금실의 표면은 사출 방식으로 제작돼 늘인 자국 없이 매끈하다. 일제강점기에 덧붙여진 금실의 위치는 금관의 원형을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했다. 실제로 이번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원형을 추정 복원한 금관 재현품이 전시장 한가운데에 있었다. 복원된 금관은 관테에서 떨어져 나간 4개의 곡옥을 다시 붙이고 양대를 원래 위치에 고정한 모습이었다. 복원된 금관을 머리에 쓰면 꼭대기에 있는 봉황 장식이 정확히 정수리 위에 놓이게 된다. 이 밖에 실제 금관(보물 339호)을 비롯해 금 허리띠 장식, 굵은 고리 귀걸이, 은그릇 등 57점의 서봉총 유물이 함께 전시돼 있다. X선을 이용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금귀고리의 제작기법을 규명한 전시물도 눈여겨볼 만하다. 다음 달 21일까지 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1층 테마전시실에서 관람할 수 있다. 02-2077-9459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최근 박물관 교육에 대한 학부모들의 관심이 높다. 박물관에서는 교과서에 등장하는 유물을 실제로 접하는 산 교육이 가능하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 등 여러 박물관이 어린이들을 위한 맞춤형 전시 교육을 위해 어린이박물관을 따로 두고 있다. 이처럼 교육 공간으로서 박물관의 역할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지만 자녀들이 유물을 바로 보고 배울 수 있도록 이끌 책임이 있는 부모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자기 자녀의 지식 습득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부모들의 이기적인 행태가 아이들의 참교육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 예컨대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박물관의 문화재 교육 프로그램에 저학년이나 심지어 미취학 아동을 무리하게 집어넣으려는 부모가 적지 않다. 마치 영재교육을 시키듯 다른 아이보다 자기 아이를 더 많이 가르치겠다는 부모들의 욕심이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최명림 중앙박물관 어린이박물관팀 학예연구사는 “자기 아이는 한글에 영어까지 할 수 있다면서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어린이를 취학 아동 대상 프로그램에 넣어 달라고 떼를 쓰는 부모들이 있다”며 “결국 수준 차 때문에 아이들이 교육에 흥미를 잃고 딴짓을 하거나 떠들기 일쑤”라고 말했다. 박물관 전시장에서 시험을 치르듯 자녀들을 다그쳐 주변 분위기를 흐리는 부모도 적지 않다. 많은 학교가 단기 방학에 들어갔던 지난주 연휴 기간에 찾은 국립중앙박물관 어린이박물관에서는 엄마들이 인기 있는 전시물 앞에서 미리 줄을 서 있고 큰 소리로 아이를 부르며 “빨리 다른 곳도 둘러보라”며 채근하는 모습이 왕왕 눈에 띄었다. 관심 있는 볼거리를 발견하고 진득이 지켜보던 다른 아이는 마지못해 엄마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전시를 지켜보던 한 외국인 관광객은 눈살을 찌푸렸다. 초등학생 아이를 둔 박신영 씨(37)는 “모처럼 박물관에 나온 김에 아이에게 최대한 많은 것을 보여 주고 싶은 엄마들의 마음은 이해된다”면서도 “엄마들이 줄을 서 있고 아이들을 풀어 놓으니 다른 관람객을 방해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박물관 교육은 속도전 위주의 주입식 교육이 통하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진정한 박물관 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보다 전통문화와 예술에 대한 정서적 교감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조혜진 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아이들은 여러 번 반복해 경험해야만 사물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며 “자녀들이 스스로 박물관을 즐길 수 있도록 부모들이 욕심을 버리고 기다려 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최근 박물관 교육에 대한 학부모들의 관심이 높다. 박물관에서는 교과서에 등장하는 유물을 실제로 접하는 산교육이 가능하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 등 여러 박물관이 어린이들을 위한 맞춤형 전시교육을 위해 어린이박물관을 따로 두고 있다. 이처럼 교육공간으로서 박물관의 역할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지만 자녀들이 유물을 올바로 보고 배울 수 있도록 이끌 책임이 있는 부모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자기 자녀의 지식습득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부모들의 이기적인 행태가 아이들의 참교육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 예컨대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박물관의 문화재 교육 프로그램에 저학년이나 심지어 미취학 아동을 무리하게 집어넣으려는 부모들이 적지 않다. 마치 영재교육을 시키듯 다른 아이보다 자기 아이를 더 많이 가르치겠다는 부모들의 욕심이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최명림 중앙박물관 어린이박물관팀 학예연구사는 “자기 아이는 한글에 영어까지 할 수 있다면서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어린이를 취학아동 대상 프로그램에 넣어달라고 떼를 쓰는 부모들이 있다”며 “결국 수준 차이 때문에 아이들이 교육에 흥미를 잃고 딴 짓을 하거나 떠들기 일쑤”라고 말했다. 박물관 전시장에서 시험을 치르듯 자녀들을 다그쳐 주변 분위기를 흐리는 부모도 적지 않다. 많은 학교들이 단기방학에 들어갔던 지난주 연휴 기간에 찾은 국립중앙박물관 어린이박물관에서는 엄마들이 인기 있는 전시물 앞에서 미리 줄을 서 있고 큰 소리로 아이를 부르며 “빨리 다른 곳도 둘러보라”며 채근하는 모습이 왕왕 눈에 띄었다. 관심 있는 볼거리를 발견하고 진득이 지켜보던 다른 아이는 마지못해 엄마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전시를 지켜보던 한 외국인 관광객은 눈살을 찌푸렸다. 초등학생 아이를 둔 박신영 씨(37)는 “모처럼 박물관에 나온 김에 아이에게 최대한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은 엄마들의 마음은 이해된다”면서도 “엄마들이 줄을 서 있고 아이들을 풀어놓으니 다른 관람객을 방해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박물관 교육은 속도전 위주의 주입식 교육이 통하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진정한 박물관 교육은 단순한 지식전달보다 전통문화와 예술에 대한 정서적 교감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조혜진 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아이들은 여러 번 반복해 경험해야만 사물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며 “자녀들이 스스로 박물관을 즐길 수 있도록 부모들이 욕심을 버리고 기다려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김상운 기자sukim@donga.com}

핀란드와 한국 학생들의 공통점은? 둘 다 교실에서 질문을 하지 않는다. 자기 의견을 밝히는 데 거리낌이 없는 서유럽 학생들과 달리 유독 핀란드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차이점은 무얼까? 한쪽은 학원 과외에 밤잠까지 줄이면서 공부하지만, 다른 쪽은 학업과 동시에 여가 활동도 충분히 즐긴다. 전자는 한국, 후자는 핀란드다. 그런데 비용 대비 효과로만 따지면 핀란드가 단연 한 수 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40개국의 만 15세 학생들을 대상으로 2000년 실시한 ‘학업성취도 국제비교연구(PISA)’에서 핀란드는 읽기 부문 1위를 차지했다. 3년 뒤에는 수학 부문 1위, 2006년에는 과학 부문 1위에 연달아 올랐다. 이 책은 한국인도 핀란드인도 아닌 네덜란드 국적의 부녀가 양국의 교육 시스템을 비교한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그저 자료만 인용하는 수준이 아니라 딸이 직접 핀란드로 날아가 인터뷰를 진행하고, 아버지는 한국에서의 교육 경험을 살려 현장감을 높였다. 아버지는 한국의 청심국제학교에서 10년째 교사로 일하고 있으며, 딸은 한국에서 중고교를 다닌 뒤 현재 런던대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독일에 머물고 있는 딸 레네 메이어 씨와 e메일로 인터뷰를 했다. ―미디어 전공인데 이런 내용의 책을 쓴 동기가 뭔가. “어렸을 적 꿈이 선생님이어서 교육 분야에 늘 관심이 많았다. 한국에서 중고교를 다니면서 이곳 선생님들이 일하는 만큼 사회적으로 보상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내가 가본 핀란드는 교사에 대한 처우가 남달랐다. 초등학교 선생님 출신이 대통령을 지낼 정도로 교사는 사회적 존경의 대상이다. 만약 내가 핀란드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면 선생님이 되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본인이 직접 겪은 한국 교육은 어땠나. “한국어에 서툰 데다 종일 학교에서 앉아만 있어야 해서 힘들었다. 시험 스트레스와 치열한 경쟁도 만만치 않았다. 점수 때문에 자살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심각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한국 학교에는 외국인 혹은 다문화가정 학생들에 대한 ‘왕따’도 있다. 다행히 나는 당시 좋은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나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핀란드 교육의 강점은 무엇인가. “핀란드 격언에 ‘카베리아 에이 예테테(Kaveria ei j¨atet¨a)’라는 말이 있다. ‘친구를 두고 떠나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핀란드 사람들이 러시아와 맞서 싸울 때 생겼다. 오늘날 핀란드 교육도 이 속담이 강조하는 공동체주의 내지 평등을 가장 중시한다. 교사들은 모든 아이들이 집에서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가정하고 학생들을 지도한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의 입장에서는 진도가 느리다고 할 수도 있다. 핀란드 사람들의 기초 학습능력이 높은 것은 이런 배경 덕분이다.” ―핀란드보다 한국 교육이 앞서는 점은 없나. “당연히 있다. 바로 가정교육이다. 핀란드는 부모가 자녀의 삶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자녀의 모든 진로를 부모가 함께 계획하고 심사숙고한다. 자녀 교육에 대한 부모의 헌신이야말로 한국이 지닌 최고의 자산일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조선인 강제징용자의 한이 서린 일본 산업시설들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확실시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4일 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산하 민간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메이지(明治)시대 일본 산업혁명 유산 23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도록 유네스코에 권고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세계유산 등재에 관한 최종 결정은 6월 말부터 7월 초까지 독일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표결을 통해 이뤄진다. 교도통신은 이와 관련해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추천한 문화유산 중 ICOMOS가 등재를 권고했다가 최종 단계에서 뒤집힌 사례는 없었다고 보도했다. 사실상 결정이 끝났다는 것이다. 일본 산업혁명 유산 23곳에는 하시마(端島·일명 군함도) 탄광을 비롯해 조선인 6만3700여 명이 징용된 시설 11곳이 포함돼 있다. 이 때문에 한국 정부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징용돼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했기 때문에 인류 보편적 가치를 기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논리를 내세워 강력 반대해 왔다. 한편 미륵사지와 공산성 등 백제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신라 유적과 북한에 있는 고구려 고분군에 이어 고대 3국의 문화유산이 세계문화유산에 모두 등재되는 쾌거를 이루게 됐다. 우리나라 문화유산 중에서는 석굴암과 불국사, 종묘 등에 이어 12번째다. ICOMOS는 “한국의 백제 역사유적지구에 대한 세계문화유산 ‘등재 권고’ 보고서를 유네스코에 제출했다”고 4일 밝혔다. 우리 정부가 신청한 백제 역사유적지구에는 △충남 공주시 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부여군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나성 △전북 익산시 왕궁리 유적, 미륵사지의 8곳이 포함돼 있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 조숭호·김상운 기자}

“사랑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부분에 오면 딱 막혀요. 진도가 안 나가는 겁니다. 사랑을 안 해본 것도 아닌데, 너무 애절해서 그랬던 게 아닐까….” 산전수전 모두 겪은 노작가는 마치 첫 작품을 발표하는 신인처럼 수줍어했다. 우리나라의 첫 밀리언셀러 소설 ‘인간시장’을 쓴 김홍신(68)이 신작 장편소설 ‘단 한 번의 사랑’(해냄·사진)을 펴냈다. 대하소설 ‘대발해’ 이후 7년여 만에 발표하는 작품이다. 그는 4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제대로 된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 작품은 제목에서도 언뜻 풍기듯 인생에서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 사랑을 좇는 중년 남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다. 소설은 유명 여배우이자 여주인공인 강시울이 재벌 2세와 이혼한 직후 기자회견을 자청해 자신이 말기 암 환자이며 첫사랑과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고 싶다는 충격 고백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강시울의 첫사랑으로 시인이자 교수인 홍시진은 아내와 사별하고 오랫동안 그를 사랑한 대학 후배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시울과 후배 사이에서 깊은 고민에 빠진 시진은 결국 목숨까지 잃을 사랑을 선택한다. 이번 소설에는 작가의 자전적인 내용이 녹아 있다. 김홍신은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나니 사랑은 영원한 숙제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누구나 자기 혼을 끄집어내 제대로 사랑해 보고 싶은 갈증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말랑말랑한 사랑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시장’ 작가답게 날카로운 사회비판을 곁들였다. 예컨대 강시울을 납치해 억지로 결혼한 재벌가는 호적을 조작해 독립운동가로 자처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다. 이것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국립현충원에 묻힌 가짜 독립유공자 명단을 발표한 작가의 의정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는 지난 3년간 두문불출하고 창작에만 몰입한 고통을 생생하게 들려줬다. 하루 12시간 넘게 만년필로 글을 쓰다가 팔과 목에 마비가 오고 요로결석과 피부병까지 앓았다고 한다. “예전에 한센병 환자 얘기를 쓸 때 병원에서도 못 고치는 가려움증으로 1년 동안 고생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소설을 끝내고 나니까 상처가 깨끗이 나았습니다. 이번 소설을 쓰면서도 (창작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은 작품에 대한 애절함 때문에 결국 빠져들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디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사랑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부분에 오면 딱 막혀요. 진도가 안 나가는 겁니다. 사랑을 안 해본 것도 아닌데, 너무 애절해서 그랬던 게 아닐까….” 산전수전 모두 겪은 노작가는 마치 처녀작을 발표하는 신인처럼 수줍어했다. 우리나라의 첫 밀리언셀러 소설 ‘인간시장’을 쓴 김홍신(68)이 신작 장편소설 ‘단 한번의 사랑(해냄)’을 펴냈다. 대하소설 ‘대발해’ 이후 7년여 만에 발표하는 작품이다. 그는 4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제대로 된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 작품은 제목에서도 언뜻 풍기듯 인생에서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 사랑을 하는 중년 남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다. 소설은 유명 여배우이자 여주인공인 강시울이 재벌 2세와 이혼 직후 기자회견을 자청해 자신이 말기 암 환자이며 첫사랑과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고 싶다는 충격 고백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강시울의 첫 사랑으로 시인이자 교수인 홍시진은 아내와 사별하고 오랫동안 그를 사랑한 대학후배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시울과 후배 사이에서 깊은 고민에 빠진 시진은 결국 목숨까지 잃을 사랑을 선택한다. 이번 소설에는 작가의 자전적인 내용이 녹아있다. 김홍신은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나니 사랑은 영원한 숙제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누구나 자기 혼을 끄집어내 제대로 사랑해보고 싶은 갈증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말랑말랑한 사랑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시장’ 작가답게 날카로운 사회비판을 곁들였다. 예컨대 강시울을 납치해 억지로 결혼한 재벌가는 호적을 조작해 독립운동가로 자처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다. 이것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국립현충원에 묻힌 가짜 독립유공자 명단을 발표한 작가의 의정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는 지난 3년간 두문불출하고 창작에만 몰입한 고통을 생생하게 들려줬다. 하루 12시간 넘게 만년필로 글을 쓰다가 팔과 목에 마비가 오고 요로결석과 피부병까지 앓았다고 한다. “예전에 한센병 환자 얘기를 쓸 때 병원에서도 못 고치는 가려움증으로 1년 동안 고생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소설을 끝내고 나니까 상처가 깨끗이 나았습니다. 이번 소설을 쓰면서도 (창작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은 작품에 대한 애절함 때문에 결국 빠져들 수밖에 없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디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589년(선조 22년)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알려진 정여립 모반 사건 때 일이다. 모반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이발의 팔순 노모와 어린 아들이 모진 고문 끝에 숨을 거뒀다. 노인과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에 비난 여론이 들끓자 늘 그랬듯 국왕 대신 오명을 뒤집어쓸 사람이 누구인지를 놓고 책임론이 불거졌다. 이 책은 당시 심문을 한 추국청의 책임자, 즉 위관(委官)이 서애 유성룡인가, 송강 정철인가에 대한 긴 논쟁에서 비롯됐다. 조선왕조실록에 이 기록이 누락되면서 빚어진 논쟁이다. 책임론의 당사자인 송강과 서애는 16세기 조선시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인물들이다. 송강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등 주옥같은 가사를 남긴 문호이고, 서애는 임진왜란 때 난국을 수습한 인물이다. 하지만 송강은 서인, 서애는 동인으로 정치적으로 대립적 관계에 있었다. 저자는 누가 위관이었느냐는 사실 추적에만 그치지 않고, 당파 싸움의 시각으로 이 사건과 역사를 바라보려는 시도를 비판하고 있다. 당쟁을 식민사관의 하나로 공박하는 차원에서 머물지 않는다. 사회의 제도와 우연한 일로 빚어지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개인에게 얼마만큼의 책임을 돌려야 하느냐는 철학적 문제와 맥이 닿아 있다. 예컨대 왕의 지휘 아래 위관-당상-낭청으로 이어지는 추국청의 구조에서 위관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조정의 중신으로 몸을 담았던 송강과 서애 모두 이런 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당쟁론은 정치사를 인간의 의지나 욕망만을 잣대로 설명할 때 나타나는 보편적 오류다. 객관적 조건과 안타까운 우연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8일 충남 태안군 마도 앞바다. 수중 발굴 전용선인 누리안호에서 소형 보트를 타고 신진도 방면으로 10분쯤 이동해 해저로봇 ‘크랩스터 CR200’의 해상 실험장을 찾았다. 이곳은 수중 발굴 탐사에 해저로봇을 처음으로 이용하는 현장으로 언론 공개 역시 처음이다. 실험은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와 해양수산부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가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다. 》○ 첫 수중 발굴 탐사 해저로봇 눈앞에 크랩스터는 게(크랩)와 바닷가재(로브스터)를 합친 이름. 집게발을 포함해 6개의 다리를 갖춘 ‘게’ 모양이었다. 게처럼 옆으로 움직이지는 않고 가재처럼 앞뒤로 움직인다. 가로, 세로 각 2.4m에 높이가 약 2m로 웬만한 자동차만 하다. 크랩스터에는 발광다이오드(LED) 등과 더불어 눈 역할을 하는 음파탐지기와 초음파 카메라, 광학 카메라 등 11개의 첨단 탐지장비가 붙어 있다. 이날 실험은 숨은 보물찾기처럼 바닷속에 미리 빠뜨린 철제 솥을 찾아내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크레인으로 크랩스터를 매달아 바닷속으로 서서히 내렸다. 이때부터 크랩스터를 통제하는 원격제어실 요원들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수심 5m의 바닥에 닿자 초음파 카메라로 찍은 영상이 제어실 모니터로 실시간 전송됐다. 물살이 거센 이 지역엔 부유물이 많아 광학카메라의 시계는 0에 가까웠지만 초음파 카메라는 전방 15m의 물체도 비교적 생생하게 보여줬다. 정용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해저로봇은 물살이 거세거나 시계가 좋지 않은 바다에서 사람 대신 수중 발굴 탐사를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제어실 한쪽에서는 크랩스터의 자세와 동작을 컴퓨터그래픽으로 보면서 마치 게임을 하듯 조이스틱으로 로봇을 움직였다. 6개의 다리가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어 울퉁불퉁한 해저지형을 무난히 걸을 수 있었다. 전봉환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 수중로봇연구실장은 “다리를 한꺼번에 움직여 보행 속도를 높이면 최대 초속 0.25m로 이동할 수 있다”며 “물속에서 헤엄을 치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크랩스터는 다른 실험을 함께 수행하면서 2시간 만에 철제 솥을 찾아냈다.○ ‘바다의 경주’ 태안 마도 해역 해저로봇 실험장이 있는 마도 해역은 수년 전부터 고고학계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마도 해역은 고려도경과 조선왕조실록에도 언급될 정도로 물살이 세고 암초가 많은 곳. 조운선 등이 남해안에서 곡식이나 자기 등을 싣고 개성이나 한양으로 가다가 마도 주변에서 좌초한 경우가 많았다. 이곳에서 대거 발견된 150여 개의 닻돌(닻으로 쓰는 돌)은 수많은 좌초의 증거로 꼽힌다. 이곳에서 잇달아 발견된 수중 고선박은 문화재의 보고로 통한다. 2007년 인근 대섬 해역에서 발견된 태안선에서 청자향로 등 유물 2만5000여 점이 수습됐는데 이 중 고려시대의 두꺼비모양 청자벼루가 보물로 지정됐다. 2010년 발굴된 마도 2호선에서 나온 유물 259점 중 청자 매병(梅甁) 두 개가 보물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은 마도 해역에서 발견된 첫 조선시대 선박인 ‘마도 4호선’을 다음 달 7일부터 본격 발굴할 예정이다. 4호선 선체 안팎에서 나온 분청사기와 조선백자의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해 도자기 연구자들을 흥분케 했다. 또 지난달 3차원(3D) 지층탐사 때 우연히 발견된 마도 5호선의 경우 현재 선체를 뒤덮고 있는 진흙을 잠수부들이 삽으로 퍼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곳은 수심이 10m도 채 안 되지만 지층이 워낙 단단해 잠수부들이 작업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현재까지 청자와 백자의 도자기편 4개가 나왔지만 마도 5호선의 것인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홍광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마도해역발굴팀장은 “마도 5호선은 탐사 결과 3호선보다 작거나 비슷한 규모의 화물선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태안=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드라마로 만듭시다!” “음식에 대한 사실적이면서도 적절한 비유가 어우러진 묘사가 정말 대단합니다.” “조선 후기 사회, 경제, 문화의 변화를 잘 보여 주는 사료입니다. 내용도 재밌어서 수업 시간에 교육 자료로 쓰기 좋을 것 같네요.” 동아일보가 24일자로 단독 보도한 ‘조선판 미슐랭 가이드 효전산고’ 기사를 본 독자들이 포털사이트에 남긴 댓글 중 일부다. 미각에 대한 세세한 기록이 드문 조선시대에 이처럼 다채로운 맛의 향연을 담은 문집이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에 의해 새로 발굴된 데 대해 독자들은 큰 관심을 보였다. 특히 효전이 미식에 대한 열정으로 유배지에 가서도 일본식 요리 도구를 구하거나, 사찰에서 냉면을 직접 뽑아 먹은 이야기 등은 스토리텔링 소재로도 흥미롭다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이 기사를 쓰면서 학술 담당 기자로서 의아한 부분이 하나 있었다. 시인으로 유명한 효전의 대표 문집인 효전산고(孝田散稿)가 세상에 나온 지 벌써 200년이 다 돼 가는데도 안 교수의 논문이 나오기 전까지 음식 기록에 대한 분석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효전은 어느 지방을 유람하건 그곳 음식에 대한 품평을 반드시 일기 형식으로 남겼다. 효전산고뿐만이 아니다. 걸핏하면 반만년의 유구한 전통과 문화 강국을 내세우는 우리지만 정작 고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절대 부족하다. 예컨대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정수로 꼽히는 ‘승정원일기’는 분량에 비해 번역 인력이 태부족해 한글 완역까지 최소 48년이 더 걸릴 것이라고 한다. 게다가 1993년 번역이 끝난 ‘조선왕조실록’도 오역이 많고 문장이 조잡해 다시 번역에 들어갔지만 현재의 속도라면 앞으로 20년 이상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조선의 대표적인 관찬 사서 두 가지에 대한 번역 수준이 이 지경이라면 나머지 사서나 문집의 사정이 어떨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도대체 조선시대를 전공하는 역사학자들은 온전한 1차 사료도 없이 광복 이후 70년간 어떻게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한문 고전 번역 인력에 대한 지원이 절대 열악하다는 점이다. 고전번역 전문가가 되려면 교육부 산하 한국고전번역원이 운영하고 있는 고전번역교육원에서 최소 5년 이상 공부해야 한다. 그런데 고전번역원이 외부 번역위원들에게 지급하고 있는 번역료는 원고지 한 장에 1만4000원. 주석에 대한 고증 작업이 까다로운 고전 번역의 특성상 번역위원들이 1년에 작업할 수 있는 원고량은 1200∼1800장쯤 된다. 연봉 기준으로 최대 2500만 원가량을 받을 수 있는 셈이다. 아무리 ‘열정 페이’를 들먹이더라도 이 정도의 보상만으로 5년 넘게 학업을 이어 가면서까지 누가 이 길을 선뜻 가려고 하겠는가. 우리는 1800년 5월 30일 ‘오회연교(五晦筵敎·오월 그믐 경연장에서 지시)’에서 정조가 격정을 토로한 장광설이 누구를 향한 것이었으며, 왜 그랬는지를 아직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노론 벽파에 대한 견제설부터 벽파 등용설, 탕평책 철폐설까지 온갖 추측만 나돌 뿐이다. 관련 사서에 대한 정확한 번역이 진작 이뤄졌더라면 역사 해석에 대한 혼란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말끝마다 역사를 바로 세우겠다는 위정자들은 우리 고전부터 찬찬히 읽어 볼 일이다.김상운 문화부 기자 sukim@donga.com}

생명과학에 일대 혁명을 일으킨 프랜시스 크릭과 제임스 왓슨의 ‘DNA 이중나선 구조’ 논문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놀라는 게 하나 있다. DNA 열풍을 불러왔고 노벨상 수상으로 이어진 이 기념비적 논문의 ‘간명함’ 때문이다. 너무도 간단명료해서 아름다운 논문이라는 칭송까지 받는다. 1953년 4월 25일 자 네이처지에 실린 이 논문의 분량은 A4용지 한 장에 불과하다. 복잡한 수식 하나 없이 이중나선 구조를 보여주는 간단한 삽화와 깔끔하게 정리된 글이 전부다. 심오한 지식은 복잡하지 않고 오히려 단순한 것이라는 진리를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다양한 사고의 틀을 제시하고 있는 이 책의 저자는 아마도 크릭과 왓슨의 간명함을 절대 신봉할 것임이 분명하다. 그는 책 곳곳에서 전문가들의 지적 기만을 질타하고 직관적이면서도 단순한 지식 추구를 강조하고 있다. 예컨대 자신의 수업시간에도 명망 있는 학자를 초빙한 뒤 대학원생이나 동료 학자들의 참여를 배제한 채 오로지 학부생들과 끝장 토론을 벌이는 식이다. 그는 서문에서 “나는 똑똑한 학부생들에게 내가 하는 일을 설명하지 못하면 실은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늘 생각한다”고 밝혔다. 저자는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분석을 이처럼 간명하게 해내려면 어떤 생각의 도구가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 논쟁을 벌일 때 ‘당연하다’는 표현이 사용된 부분을 먼저 찾아보라고 조언한다. 이것은 귀류법(歸謬法)의 접근방식과 유사한데, 당연히 전제하는 부분 안에 중요한 논리적 허점이 숨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서울에 살 때 일찍이 미식(美食)을 찾아 먹었는데 침교(沈橋·현 서울 종로구 재동)에서 파는 돼지고기가 가장 맛이 좋아 서경(평양)의 오수집 돼지국과 같았다. 서경에서는 기름진 비계가 손바닥처럼 두꺼운데 설편(雪片)처럼 얇게 잘라 입에 넣으면 얼음이 녹듯 했고, 불에 구워도 천하일미라고 할 만했다….” 조선후기 문인이자 관리였던 효전 심노숭(1762∼1837)이 자신의 문집 ‘효전산고(孝田散稿)’에 쓴 음식 품평이다. 당시 돼지국밥 요리로 유명했던 서울과 평양의 두 음식점을 언급하면서 조리 방식을 눈송이에 빗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얼핏 한가하게 식도락을 즐기면서 쓴 글 같지만, 효전이 이 글을 남긴 시기는 노론 벽파와 시파의 당파싸움에 얽혀 기장현(부산)으로 유배를 간 1801∼1806년 사이였다. 효전은 지방수령을 두루 역임한 관료로 로맨틱한 서정시를 여럿 남긴 시인으로 유명하다. 그가 서경의 돼지국밥을 떠올린 것은 유배지 근처에 사는 동네사람이 제사음식으로 돼지고기를 돌린 직후였다. 유배를 와서도 음식에 집착하는 자신이 스스로 부끄러웠을까. 그는 이 글 말미에 “궁지에 처한 사람이라 음식 생각이 가장 많아서 이렇게 말하니 우스운 일이다”라고 자조했다. 조선판 ‘미슐랭 가이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효전의 음식 기록에 대한 첫 연구논문이 최근 나왔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는 ‘18·19세기의 음식 취향과 미각에 관한 기록’ 논문을 동방학지에 최근 발표했다. 성리학적 도덕규범에 얽매여 일상의 욕구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을 꺼리던 조선시대에 효전산고처럼 다양한 음식 맛을 기록한 문집은 극히 드물다. 효전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지방의 음식 맛을 비교하는 시와 산문을 썼다. 유배조차 음식에 대한 그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일본 열도와 가까운 기장의 지리적 특성을 십분 활용해 일본제 난로를 어렵사리 구한 뒤 쇠고기를 즐겨 구워먹었다. 그것도 모자라 본가에서 음식을 잘하는 여자 노비를 데려오려고 했다. 일이 여의치 않자 자신이 가르치던 서동(書童) 중 한 명에게 서울식 요리법을 직접 가르쳐 전속 요리사로 삼았다. 그는 메밀 면을 특히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평양냉면을 으뜸으로 꼽았다. 효전은 “메밀 면의 품질은 관서지방이 최상으로, 차게 조리한 냉면이 한층 맛있다. 서울 냉면은 뜨겁게 조리한 온면보다 못하다. 며칠 사이 한 번이라도 메밀 면을 먹지 않으면 기분이 즐겁지 않다”고 했다. 냉면 마니아였던 효전은 심지어 여행 도중 사찰에서 직접 냉면을 만들어 먹기까지 했다. 1818년 금강산을 여행하면서 한동안 좋아하는 면을 먹지 못하자, 관아와 식당을 샅샅이 뒤져 국수틀이 있는 월정사를 찾아냈다. 그날 밤 스님들을 불러 모아 메밀가루로 면을 뽑아냈다. 하지만 노력의 결과는 썩 만족스럽지 못했던 듯하다. 효전은 “메밀가루가 마치 모래를 씹는 듯하여 냉면이든 온면이든 모두 수제비처럼 뚝뚝 끊어졌다. 이것을 어떻게 먹으랴. 메밀의 품질이 관서지방에 미치지 못한다”고 적었다. 미각에 대한 갈망을 숨김없이 드러낸 효전의 글은 읽을수록 입에 착 달라붙는다. “먹고 싶은 음식을 보면 보자마자 눈이 번쩍 뜨이고 식욕이 동해 군침이 고였다” “기름장을 둘러 불에 구운 산적은 내가 몹시 즐기는 것으로 3년을 맛보지 못하다가 오늘에야 한번 배불리 먹었다” “나는 근일에 시루떡 생각이 간절했다”는 식의 표현이 곳곳에 등장한다. 먹고사는 문제를 일부러 논하지 않은 다른 양반 문집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솔직한 내용이다. 효전은 음식뿐만 아니라 담배와 차 같은 기호품도 제대로 즐겼다. 당시 최고급 담배로 통한 평안도 담배 ‘서초(西草)’를 꿀에 적셔 피웠고, 일본 담배까지 따로 구했을 정도였다. 또 청나라에서 수입한 황차(黃茶)를 자주 마시기도 했다. 안 교수는 “효전산고는 18세기 조선사회가 금욕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욕망을 추구하고 소비를 과시하는 행태를 보이기 시작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고 설명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첨단 로봇장비를 투입해 조선시대 선박에 대한 대대적인 수중 발굴을 벌인다. 아직 시험단계여서 출토 작업이 아닌 수중촬영에 동원될 계획이지만 수중 발굴에 로봇을 활용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23일 충남 태안군 마도해역에서 개수제(開水祭)를 올리고, 지난해 10월 발견된 조선시대 선박 ‘마도 4호선’에 대한 발굴조사를 시작한다. 이번에 투입될 ‘크랩스터(Crabster) CR200’(사진) 해저로봇은 해저에서 유물을 건져 올리거나, 초음파 카메라와 수중 음파탐지기로 탐사를 벌일 수 있다. 가로, 세로 각 2.4m에 높이가 1.3m 정도인 이 로봇은 무게가 650kg가량 된다. 물건을 집어들 수 있는 집게발 2개를 포함해 총 6개의 발로 바닷속에서 초당 0.25m의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 해양문화재연구소와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가 공동 개발한 이 로봇은 수심이 깊거나 조류가 빠른 위험한 곳에서 사람 대신 작업을 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연구소는 다음 달 중순까지 1개월간 마도 4호선 발굴 현장에서 로봇에 대한 현장 적용 시험을 진행할 예정이다. 신종국 해양문화재연구소 연구관은 “마도 4호선은 조선 백자의 해상 유통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첫 사례”라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