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윤

김기윤 기자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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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 특파원

pep@donga.com

취재분야

2025-11-08~2025-12-08
문학/출판30%
인사일반22%
문화 일반11%
사회일반11%
음악7%
미술4%
교육4%
여행4%
만화4%
정당3%
  • [책의 향기]소설로 다시 태어난 ‘크리스티나의 세계’

    당신은 이 그림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앙상한 두 팔로 힘겹게 몸을 지탱한 여성. 그녀는 마른 풀이 무성한 들판에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외롭게 앉아 있다. 미묘하고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 그림에서 누군가는 동경을 읽어냈고, 다른 이는 동정심을 떠올렸다. 혹자는 인간 불굴의 의지와 정신력까지도 느꼈다고 한다. 미국 국민화가로 불리는 앤드루 와이어스(1917∼2009)가 명성을 얻게 된 건 그가 31세인 1948년에 내놓은 이 그림 ‘크리스티나의 세계(Christina‘s World)’ 덕분이다. 그림 속 모델은 미국 메인주에 살던 애나 크리스티나 올슨(1893∼1968)으로 와이어스가 알고 지내던 이웃이자 친구였다. 퇴행성 근육 질환을 앓던 그녀는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악화했지만 휠체어 사용을 거부했다. 그는 두 팔로 하체를 끌며 기어 다니는 것을 선호했다. 와이어스가 영감을 받아 화폭에 담은 그림은 현재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대표 소장품 중 하나다. ‘미국의 모나리자’로도 불리며 지금껏 많은 이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그림은 저자에게도 꽤나 큰 영감을 준 모양이다. 영국 태생으로 미국에서 소설가로 활동한 저자는 2013년 소설 ‘고아 열차’로 이름을 알렸다. 다음 작품을 위해 소재를 찾던 중 이 그림을 떠올렸다. 그림에 담긴 이야기와 직접 취재한 실존 인물의 삶을 토대로 거침없이 상상력을 뻗어냈다. 공교롭게도 미국 메인주에서 유년을 보내 그림 속 풍경이 익숙했던 저자는 후에 ‘크리스티나’라는 같은 이름을 가졌던 그림 속 모델에 묘하게 이입했다고 밝혔다. 책은 크리스티나가 세 살 때인 1896년에 시작하는 과거와 화가 앤드루 와이어스와 그녀가 만난 1939년 현재가 교차하며 진행된다. 소설은 그녀의 삶을 상상해 그린 일대기다. 동시에 그녀 마음속 여러 심경의 갈래를 훑어가는 지도를 보는 듯하다. 어린 시절 열병을 앓은 주인공 크리스티나는 장애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하고 활기가 넘쳤다. 왕복 5km가 넘는 거리를 걸어 등교했고 학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큰 농장을 짓고 살았던 그녀의 가족에겐 노동력이 더 절실했다. 학업을 중단한 채 그녀는 결국 집안일을 도맡았다. 와이어스와의 만남은 휴가 차 메인주 쿠싱에 놀러왔던 소녀 뱃시의 소개로 성사됐다. 처음엔 인근 풍경, 집 그리기에 관심이 있던 그는 크리스티나 내면에 숨쉬고 있던 세상에 대한 갈망을 포착했다. 그녀에겐 매일 보는 집, 언덕, 들판이 세상의 전부였다. 하지만 와이어스의 그림에서 그녀는 더 넓은 세상을 외치고 있는 듯하다. 미국 농가의 목가적 풍경 속에 묻어나는 인간의 세심한 감정선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최근 영화 ‘미나리’에서 의상감독을 맡은 한국계 디자이너 수재나 송도 그림 속 크리스티나로부터 영감을 받아 극 중 모니카(한예리) 캐릭터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고 밝혔다. 그림이 갖는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을 활자로 느껴보고 싶다면 책이 도움을 줄 수 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 2021-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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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콘텐츠 조연 아닌 주연으로… “자막 보는 맛에 구독해요”

    “이 채널은 자막 보려고 구독합니다.” 유튜브 ‘디스커버리 서바이벌’은 이른바 ‘자막 맛집’으로 유명한 채널이다. 채널 특성상 ‘인간과 자연의 대결’, ‘고독한 생존가’ 등 외국 자연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주로 편집해 방송한다. 소수 마니아층이 선호하는 ‘건조한’ 프로그램이 많지만, 채널은 자막의 날개를 달고 구독자가 120만 명에 이를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해외 다큐멘터리에서 자막은 출연자의 발언을 전달하는 수단이었지만 이 채널에선 새로운 맛을 입힌다. 영국 출신 탐험가 베어 그릴스가 사냥에 실패해 힘들어하는 상황에서 “형, 오늘 분량 부족하다”는 편집자의 속마음을 자막으로 넣는다. 그가 사냥한 물고기를 먹기 전 말없이 웃는 장면에는 하단에 “헿♥”라는 자막을 삽입해 보는 재미와 몰입도를 높인다. 시청자들은 “위험한 상황에서도 자막은 늘 유쾌하다”, “편집자 자막이 프로그램 살렸다”는 반응이다. 자막이 진화하며 프로그램에 재미와 의미를 더하는 독자적 콘텐츠로 거듭나고 있다. 특히 유튜브 플랫폼은 기존 방송 매체에 비해 심의가 적어 편집자의 재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편이다. 출연자의 숨소리, 먹는 소리부터 실제 편집자의 속마음까지 프로그램과 관련한 모든 게 자막이 될 수 있다. 최근 인기를 끄는 유튜브 채널은 자막의 역할이 크다. 특히 의성어 활용이 눈에 띈다. 유튜브 채널 ‘네고왕’에서는 장영란이 떡볶이를 먹는 장면에서 “호롭 짭 쭈압 Z”이란 자막을 쓰거나 “먹어봐↘요”처럼 말의 억양까지도 구현했다. 개그맨 이창호, 이은지가 출연한 웹예능 ‘해장님’에서는 세수하는 장면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푸르frfrrrrfr”라고 표현했다. 웃음은 “으Y하하”라고 적고 술에 취한 연기를 하면서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는 출연자의 말은 “한 꿔 이ㅏㅏㄹ”라는 식으로 쓴다. 출연자가 한 발언과 전혀 반대의 의미의 자막을 사용해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유튜브 채널 ‘하승진 HASEUNGJIN’을 운영 중인 전 농구선수 하승진은 한국 프로농구팀의 회식 문화를 설명하는 콘텐츠를 촬영했다. 그는 “우승한 뒤 갖는 회식 자리는 위계질서가 전혀 없는 날이다. 심지어 감독님한테 형이라고 부르는 애들도 있다”고 한 뒤 “나는 물론 안 그랬지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화면 하단엔 “내가 그랬어”로 자막이 나갔다. 시청자들은 “속마음을 읽는 자막”이라는 댓글을 남겼다. 형식, 문법에도 제약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과거 출연자의 얼굴 모양을 활용하는 자막이 인기를 끌다 최근에는 신체 여러 부위도 활용된다. 출연자의 웃음소리를 형상화한 글자가 화면 여기저기로 날아다니는 효과도 구현한다. ‘워크맨’은 숫자, 기호, 이미지도 자막으로 활용해 인기가 높은 채널이다. 유튜브는 물론 방송사 제작진도 자막에 더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한 지상파 예능 PD는 “유튜브 콘텐츠는 자막에서 승부가 난다고 할 정도로 재기 넘치는 자막 편집이 돋보인다”며 “자막이 화제가 되는 콘텐츠를 공유하며 논의하고 시청자들의 댓글도 면밀히 살펴보며 참신하고 재미있는 자막 아이디어를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 2021-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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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대 향한 쓴소리… 함께 이겨내자는 애정입니다”

    무대에 대한 애정이 큰 만큼 쓴소리로 대학로를 때린다. 원래 고됐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더 팍팍해진 공연계를 향해 전·현직 배우들이 책과 유튜브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 주인공은 배우 김윤후(34)와 전병준(33). 이들이 털어놓는 이야기엔 배우로서 겪은 부당하고 억울한 일도 많다. 하지만 억울함과 보상을 논하기보다는 동료, 선후배들이 기쁘고 떳떳하게 무대에 오를 날을 꿈꾼다. 12년 차 대학로 연극·뮤지컬 배우인 김윤후는 ‘나는 대학로 배우입니다’를 펴냈다. 그는 연극 ‘작업의 정석’ ‘루나틱’ 등에 출연했다. 최근 서울역 인근 카페에서 만난 그는 “운 좋게도 10년 넘게 무대에 섰다. 대학로 임대료가 오르며 제작자도 힘겨워하는 걸 봤다. 코로나19까지 겹치자 배우 임금은 더 줄었고, 설 무대도 사라지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주중 무대에도 오르던 그는 요즘엔 연극 ‘연애하기 좋은 날’의 금·토·일 공연에만 출연한다. 그 외 시간엔 배달이나 다른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는 “제 경험담으로 대학로가 다시 조명받고, 부활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다. 책에는 제작자가 두 달간 연습을 시키고는 공연이 갑자기 취소됐다며 연습 수당도 지불하지 않은 사례가 나온다. 배우들이 제작자의 집 앞에 찾아가 울며 사정했지만 돌아온 답은 “어쩔 수 없다”는 말뿐이었다. 수년간 동고동락하다 다단계 영업사원이 되거나 유흥업소로 떠나는 동료 배우들의 모습도 그려졌다. 그는 “임금 미지급, 공연 취소 통보, 캐스팅 변경, 생활고로 숱한 동료들이 무대를 떠났다”며 “하루아침에 모든 게 바뀌진 않아도 불공정한 관행에 상처받아 꿈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삼총사’를 비롯해 여러 뮤지컬 무대에 오르던 전병준은 자신의 유튜브 채널 ‘전병준의 Our Records 아워 레코즈’에서 애정 어린 쓴소리를 전한다. 그는 현재 배우 활동은 중단한 채 공연계와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있다. 유튜버이자 가수로 활동하며, 뮤지컬 넘버 커버 영상도 올린다. 그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해외에서는 임금이 미지급되면 배우들이 전부 공연을 보이콧하거나 제작사 관계자를 추방할 정도로 큰 일로 여기지만 한국에선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며 “배우의 힘이 약하고, 제작자가 너무 쉽게 작품을 만들어 손익분기점만 넘기려 하는 관행 때문이다”라고 일침을 가했다. 공개 오디션을 진행하면서 감독이나 제작자가 교수로 있는 학교 학생들을 캐스팅한 사례도 있다고 밝혔다. 그는 뮤지컬 배우 지망생들에게도 애정 어린 조언을 하기로 유명하다. 그는 “너무 간절하면 안 된다. 무대가 간절한 배우들은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화려해 보이고 돈을 잘 벌 것 같은 겉모습에만 빠져선 안 된다”고 충고했다. 배우의 목소리는 공연계 밖으로 나오기 쉽지 않다. 극소수의 톱 배우를 빼고는 연출자, 제작자에게 선택받아야만 하는 배우들의 특성상 비판은 캐스팅 과정에서 보복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 익명으로 목소리를 내더라도 ‘판이 좁아’ 금세 색출당하는 일도 많다. 김 배우는 “경험담을 ‘순한 맛’으로 표현했는데도 동료들은 ‘이렇게 적나라해도 괜찮겠냐’며 걱정했다”며 “시련을 안 겪는 게 제일 좋겠지만 이왕이면 꿈을 포기하지 말고 함께 시련을 이겨내자는 취지”라고 했다. 전 배우는 “돈 문제와 인맥으로 얼룩진 대학로가 바뀌길 바란다”고 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 2021-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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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웃을 일 사라진 시대… “날 웃기면 1000만원”

    웃음을 잃은 시대. 웃음거래소 ‘웃지모텔’에선 방문객이 한 번 웃을 때마다 돈을 지불한다. 금액은 1000만 원. 웃지 못하는 당신, 돈으로라도 웃음을 구매하시겠습니까? 유튜브 채널 ‘유병재’는 최근 웃지 못하는 모텔 ‘웃지모텔’이라는 콘텐츠를 선보였다. 빌린 실제 모텔 건물 한 채를 유병재가 돌아다니며 방마다 머무는 개그맨, 출연진의 코미디를 관람하는 콘텐츠다. 유병재는 “나는 절대 못 웃긴다. 여러 번 웃길 수 있으면 몇천만 원, 몇억이라도 낼 자신 있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건물을 다 돌았을 때쯤 그의 현금 가방서 수천만 원이 탈탈 털렸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 코미디 ‘전유성을 웃겨라’를 묘하게 섞은 이 콘텐츠는 서사와 실험성을 갖춰 마지막 7회까지 큰 호응을 얻었다. 이 웃음판을 깔고 기획한 건 코미디언이자 방송작가인 유병재(33)와 ‘밈의 달인’ 김성하 샌드박스네트워크 PD(32). 14일 서울 용산구 샌드박스 사옥에서 만난 두 사람은 “개그 전문가들이 잘 짜놓은 ‘웃음실험관’에 유병재라는 염산 한 방울을 떨어뜨려 화학반응을 지켜보는 마음이었다”고 밝혔다. 발단은 올해 1월 유병재가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누가 나 좀 웃겨줬으면 좋겠다” “웃기면 1000만 원도 주겠다”는 발언이었다. 이 ‘실언’을 들은 그의 매니저 유규선과 김 PD는 바로 내기를 걸고 작당을 시작했다. 판을 점점 키우더니 유병재는 사비 총 1억 원을 준비해 모텔로 입장했다. 유병재는 “워낙 잘 웃지 않는 데에 자부심 아닌 자부심이 있었다”고 했다. 김 PD는 “도전의식이 생겼다. 개그 달인들을 섭외하는 게 관건이었다”고 했다. 콘텐츠에는 김준호, 윤성호, 안일권 등 기성 개그맨부터 최근 인기를 끈 ‘피식대학’의 멤버 이용주 정재형 김민수와 이창호를 비롯해 유병재의 친누나까지 출연한다. 방법이야 어떻든 그를 웃게 해 1000만 원을 타는 게 목적. 이들 앞에서 안면근육을 부여잡고 웃음을 참는 유병재를 보는 것도 웃음 포인트다. 유병재는 개그맨 하준수, 최우선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최우선은 미모의 여성이 자신을 악착같이 따라다닌다는 상황극을 연출했다. 무릎 꿇고 바지 끝에 매달린 여성에게 “셋을 셀 때까지 손을 놓으라”고 하다 막상 손을 놓으면 “아니, 진짜 놓진 말고” 식의 역할극을 감칠맛 나게 했다. 1970년대 유랑극단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흉내 낸 피식대학 개그맨들도 웃음을 이끌어냈다. 유병재는 “봉준호 감독이 말한 ‘삑사리의 미학’이 웃음에도 있다. 의도치 않은 실수에서 웃음이 터져버렸다. 1억 원짜리 객기를 부린 게 후회스럽지만, 코미디를 즐기는 입장에서 고마운 콘텐츠”라고 했다. 김 PD는 ‘밈(meme·인터넷에서 유행하는 특정 문화 요소나 콘텐츠)’을 잘 활용하는 편집자로 인기가 높다. 그는 “시청자들은 유튜브 댓글에 콘텐츠의 웃긴 포인트, 배경지식을 설명해둔다. 그 덕분에 밈의 활용이 자유롭다”고 답했다. ‘웃지모텔’을 본 후 “고맙다” “따뜻하다”는 반응도 많다. 설 자리가 줄어든 개그맨이 재조명받도록 돕는다는 맥락에서다. 유병재는 “제가 누군가를 돕는다는 표현은 건방지다. 채널이 다 같이 재밌게 놀 수 있는 플랫폼이 되길 바랄 뿐”이라고 했다. 2019년 ‘카피추’라는 캐릭터로 사랑받은 개그맨 추대엽도 그의 채널을 통해 조명받기 시작했다. 시즌2 제작 요청에 이들은 “시즌2 준비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출연자를 공개모집하거나 유병재가 타인을 웃기는 방식도 고민 중이다. 김 PD는 “개그 능력을 평가하는 자리가 아니라 같이 웃음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답했다. 왜 이들은 매일 웃음에 골몰하는가. 유병재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분들도 누군가를 웃기고 싶어 하는 모습을 자주 봤다. 웃음은 우리 상상보다 큰 존재”라고 답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 2021-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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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웃기면 1000만원 줄게”…유병재 농담에서 시작된 ‘유튜브판 개콘’

    모두가 웃음을 잃은 시대. 웃음거래소 ‘웃지모텔’에선 방문객이 한 번 웃을 때마다 그 대가로 돈을 지불한다. 금액은 1000만 원. 웃지 못하는 당신, 돈으로라도 웃음을 구매하시겠습니까? 유튜브 채널 ‘유병재’는 최근 웃지 못하는 모텔 ‘웃지모텔’이라는 콘텐츠를 선보였다. 경기 파주에 있는 실제 모텔 건물 한 채를 빌린 뒤 유병재가 이곳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방마다 머무는 개그맨, 출연진의 코미디를 관람하는 콘텐츠다. 요즘 웃음을 잃었다는 유병재는 촬영 전 “나는 절대 못 웃긴다. 여러 번 웃길 수 있으면 몇 천만 원, 몇 억이라도 낼 자신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그가 건물을 다 돌았을 때쯤엔 사비 수천만 원이 탈탈 털렸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 코미디 ‘전유성을 웃겨라’를 묘하게 섞은 이 콘텐츠는 기존 유튜브에서는 볼 수 없던 서사와 실험성을 갖췄다. 마지막 7회까지 큰 인기를 끌었으며, 시즌2를 요구하는 구독자들의 목소리도 많다. 이 웃음의 판을 깔고 기획한 건 코미디언이자 방송작가인 유병재(33)와 ‘밈의 달인’ 김성하 샌드박스네트워크 PD(32). 14일 서울 용산구 샌드박스 사옥에서 만난 두 사람은 “코미디 전문가들이 잘 짜놓은 ‘웃음 실험관’ 안에 유병재라는 염산 한 방울을 떨어뜨려 화학 반응을 지켜보는 마음이었다”며 “전 국민이 열광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만족할 만한 뜨거운 반응을 얻어 감사하다”고 밝혔다. 콘텐츠의 발단은 1월 유병재가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누가 나 좀 웃겨줬으면 좋겠다” “웃기면 1000만 원도 주겠다”는 발언이었다. 이 ‘실언’을 들은 그의 매니저 유규선과 김 PD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내기를 걸어 작당을 시작했다. 판을 키워 유병재는 사비 총 1억 원을 준비해 모텔로 입장했다. 유병재는 “감정이 뜨겁거나 잘 웃는 성격이 아니다. 워낙 잘 웃지 않는 데에 자부심 아닌 자부심이 있다”고 했다. 김 PD는 “유병재 씨가 워낙 웃지 않는 걸 알고 있어 도전의식도 생겼다. 여러 개그 달인들을 섭외하는 게 관건이었다”고 했다. 콘텐츠에는 다수의 개그맨, 방송인, 배우를 비롯해 유병재의 친누나까지 출연한다. 웃기는 방법이야 어떻든 유병재가 이빨을 드러내고 웃기만을 기다렸다가 1000만 원을 받아가는 게 이들의 목적. 개그맨 김준호, 윤성호, 안일권부터 최근 인기를 끄는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 멤버도 나왔다. 이들의 개그와 안면근육을 부여잡고 웃음을 참는 유병재를 지켜보는 게 시청자들의 웃음 포인트다. 유병재는 “봉준호 감독님이 말씀하신 ‘삑사리의 미학’이라는 게 웃음에서도 있는 것 같다. 개그맨 윤성호, 최우선 씨가 출연한 에피소드처럼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실수들을 보고 웃음이 육성으로 터져버렸다”고 했다. 이어 “1억 원짜리 객기를 부려 후회스럽기도 하지만, 코미디를 즐기는 참가자 입장에서 고마운 콘텐츠였다”고 했다. 김 PD는 앞서 ‘디스커버리 채널 코리아’ ‘사사로운 스튜디오’ 등에서 ‘밈(meme·유행하는 특정 문화 요소나 콘텐츠)’을 잘 활용하는 편집자로 인기가 높았다. 그가 맡은 프로그램만 따라다니는 마니아 시청자도 생겼다. 그는 “유튜브에서는 시청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콘텐츠의 웃긴 포인트, 배경지식, 감상법을 댓글로 설명한다. 댓글 덕분에 밈의 활용이 자유롭다. 앞으로도 여러 소재, 코드를 적극 활용할 것”이라고 답했다. ‘웃지모텔’을 접한 시청자들의 반응 중에는 웃음과는 별개로 “고맙다” “따뜻하다”는 반응도 많다. 방송사의 공개 코미디 무대가 점차 사라지며 설 자리가 좁아진 개그맨들이 다시 조명받을 수 있도록 유병재가 돕는다는 맥락에서다. 유병재는 “제가 감히 누군가를 돕는다는 표현은 건방지다. 코미디를 하는 사람으로서 제 채널이 다같이 재밌게 놀 수 있는 장이자 플랫폼이 되길 바랄 뿐”이라고 했다. 2019년 ‘카피추’라는 캐릭터로 사랑받은 개그맨 추대엽도 그의 채널을 통해 처음 조명받기 시작했다. 이날 인터뷰 자리에는 유병재의 매니저로 대중에 얼굴을 알린 샌드박스네트워크 유병재 스튜디오팀의 유규선 매니저도 참석했다. 그는 이번 콘텐츠의 출연자인 동시에 기획도 맡은 주역이다. 그는 “개그맨 김준호 씨처럼 콘텐츠 취지에 공감하는 많은 분들이 출연료도 먼저 낮춰주신 덕분에 다른 TV 프로그램에 비하면 적은 제작비로 훌륭한 콘텐츠를 만들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시즌2 제작을 바라는 구독자들 요청에 이들도 “시즌2 준비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조만간 머리를 맞댈 계획이다. 이번 시즌에 출연자들을 직접 섭외했다면, 앞으로는 출연자를 공개모집하는 방식도 고민 중이다. 김 PD는 “사실 많은 개그맨, 방송인들에게 접촉했을 때 웃기지 못 했을 때의 리스크에 큰 부담을 느끼셨다. 웃기는 능력을 평가하는 자리가 아니라 같이 웃음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웃음이 좋다는 걸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터. 하지만 무엇 때문에 이들은 매일 웃음에 골몰하는가. 유병재는 “굳이 누군가를 웃길 필요가 없는, 이미 사회적으로 성공한 분들도 누군가를 웃기려고 노력하는 걸 자주 봤다. 웃음은 우리 상상 이상의 큰 존재”라고 말했다. 이에 김 PD는 “행복과 가장 친한 단어가 웃음이다. 그만큼 행복하시다는 거지”라고 답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 2021-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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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꿈의 무대 ‘佛 아비뇽 페스티벌’ 서울서 영상으로 만나보세요

    팬데믹으로 예술축제가 일상과 멀어진 지 오래. 서울에서 원격으로 프랑스 아비뇽 무대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LG아트센터가 세계 공연계에서 꿈의 무대로 불리는 ‘아비뇽 페스티벌’을 극장으로 들여왔다. 이 축제의 영상 상영은 국내에서 처음이다. 28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 LG아트센터는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에서 5편의 공연을 총 10회 상영한다. 프랑스 독일 벨기에 출신 연극, 무용계 거장들의 작품을 추렸다. 아비뇽 페스티벌은 매년 7월 50만 명의 관객이 찾는 예술축제로,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무대를 지향한다. 주로 야외공연이 많다. 특히 옛 교황청 건축물의 안뜰인 ‘명예의 뜰(Cour d‘Honeur)’에서 펼쳐지는 공연은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한다. 이번 상영작 중 네 편은 명예의 뜰에서 펼쳐진 작품을 촬영했다. 시대의 연출가로 불리는 독일 출신 토마스 오스터마이어의 ‘햄릿’(28일, 5월 1일·2008년 공연)이 첫 상영작이다. 비디오카메라를 손에 들고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독백하는 햄릿의 모습이 스크린을 채운다. 배우 6명이 등장인물 20여 명을 연기한다. 최근 프랑스 연극계에서 각광받는 연출가 토마 졸리의 ‘티에스테스’(29일, 5월 1일·2018년)는 왕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형제의 갈등과 잔인한 복수극을 그린다. 거대 석상과 다양한 음악으로 압도적 스펙터클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연출가가 주인공 아트레우스 역도 맡아 광기 어린 연기를 선보인다. 아비뇽 축제의 예술감독이자 연출가인 올리비에 피의 ‘리어왕’(30일, 5월 2일·2015년)도 상영한다. 원작을 생동감 넘치는 현대 시어로 옮겼다. 파멸을 향해 돌진하는 인물들을 그려낸다. 오전 4시 반 교황청 무대에 그린 큰 원 안에서 심호흡하며 시작을 알리는 무용극 ‘체세나’(30일, 5월 2일·2011년)는 무용단 로사스의 아너 테레사 더케이르스마커르의 작품이다. 어떠한 악기, 세트, 조명도 없이 19명의 무용수와 가수가 목소리와 몸짓만으로 극을 이끈다. 연극 ‘콜드룸’(5월 1, 2일·2011년)은 상영작 중 유일하게 실내에서 공연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극작가 겸 연출가 조엘 포므라의 작품으로 인간 내면을 세밀한 관찰과 탁월한 언어로 구현했다. 불치병을 앓는 직장 상사의 삶을 직원들이 연극으로 표현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전석 2만 원.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 2021-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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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몸짓으로 그리는 ‘세월호 참상’

    세월호 참사의 고통과 참상을 몸짓으로 그려내는 발레 ‘빛, 침묵, 그리고…’가 16∼18일 사흘간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무대에 오른다. 김용걸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가 안무·연출한 이번 작품은 2014년 9월 초연, 2015년 재연을 거쳐 6년 만에 관객과 만난다. 김 교수는 세월호 참사에 대해 “5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보고 겪은 수많은 일들 중 가장 비참했던 사건”이라며 “가장 비열한 인간들의 모습과 그들로 인해 고통스럽게 절규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동시에 봤다”고 밝혔다. 이어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될 참상을 통해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품은 2014년 4월 16일 참사 현장에서 시작한다. 구명조끼를 입은 채 울부짖는 여자아이가 등장하며, 아이는 검은 남자에 이끌려 지하로 내려간다. 무용수들의 처절하면서도 강렬한 안무는 비극과 숙연함을 불러일으키며, 객석에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 묻는다. 베를린국립발레단 출신의 이승현을 비롯해 김용걸댄스씨어터 무용수 19명이 무대에 나선다.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를 거쳐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에서 동양인 첫 솔리스트로 활동한 1세대 스타 발레리노인 그는 한예종 무용원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안무가로도 활발히 활동해왔다. 특히 2011년부터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만든 김용걸댄스씨어터를 통해 ‘수치심에 대한 기억들’ ‘Work’ ‘Inside of life’ ‘Bolero’ ‘Les Mouvement’ 등의 작품을 선보였다. “발레가 가진 제한적 움직임과 표현의 한계를 확장한다”는 지론을 갖고 움직임에 집중해왔다. 발레 대중화와 현대화에도 힘썼다. 김 교수는 “이번 공연은 참사 후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사건과 우리 자신에 대한 기록이자 되새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보다 많은 이가 공연을 볼 수 있도록 전석 무료로 진행된다. 아르코예술극장 홈페이지에서 1인 1장씩 예매가 가능하다. 8세 이상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 2021-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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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용수 44명 ‘물 위 역동적 群舞’… “모두에게 힘과 용기를”

    무대 위 가로 18m, 세로 12m의 대형 수조. 보일 듯 말 듯 잔잔하게 차있는 물은 무용수들의 격정이 더해질수록 조금씩 차오른다. 만물의 근원인 동시에 역경을 상징하는 물에 몸을 맡기듯 무용수들은 몸을 치켜세웠다가도 금세 앉았다 엎드리며 역동적 동작을 선보인다. 대표적인 댄스 영화 ‘스텝업’에서 물 위에서 현란한 군무를 선보이는 댄서들을 연상케 한다. 서울시무용단이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16, 17일 신작 ‘감괘(坎卦)’를 선보인다. 물을 소재로 삼아 진리를 풀어낸 작품으로 거대한 수조와 무용수 44명으로 구성된 대형 창작무용극이다. 감괘는 역학(易學)의 팔괘 중 하나로 하나의 양(陽)이 두 개의 음(陰)에 빠져있는 형상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고난을 헤쳐 나가려는 노력과 긍정의 메시지를 몸짓으로 표현한다. 정혜진 서울시무용단 단장은 “물에 갇혀 험난한 운명을 상징하는 괘의 모양이 모두가 처한 팬데믹의 고통을 뜻하는 것 같았다”며 “오래전부터 자연물을 소재로 삼은 작품을 구상했는데 감괘를 알게 된 순간 바로 작품을 떠올렸다”고 했다. 이어 “비바람 속에서 날갯짓하다 끝내 비상하고야 마는 인간의 모습을 선보일 것”이라고 했다. 정 단장이 총괄안무를 맡았고 전진희, 한수문 지도단원과 아크람칸 무용단 출신의 김성훈이 안무가로 참여했다. 통상 무대 여건과 부상 위험으로 물 위에서 무용수들이 춤추는 건 진귀한 풍경이다. 하지만 “신선한 공연을 위해 힘들어도 물을 사용해보자”는 정 단장의 의지가 반영됐다. 극 초반 발만 살짝 적실 수준으로 잔잔히 차있던 물은 극이 고조되며 4cm까지 찬다. 연습과정도 만만치 않다. 연습실에 물을 채우고 빼는 데만 몇 시간씩 걸린다. 한 번 춤추고 나면 무용수들이 땀과 물로 흠뻑 젖어 실제 공연처럼 하는 리허설인 ‘런스루’는 하루 한 번뿐이다. 맨바닥에서 추는 전통무용도 쉽지 않은데, 물의 무게감과 미끄러움을 감내하느라 동작 연습도 버겁다. 단원들은 차츰 적응 중이다. 고무재질의 특수신발도 고안했다. 8장의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된 작품은 활기찬 일상을 뜻하는 1장 ‘수풍정(水風井)’에서 시작한다. 2장 ‘수택절(水澤節)’에서 차츰 기미를 보이던 역경은 6장 ‘중수감(重水坎)’에 이르러 몰아친다. 무용수들도 격한 반복동작을 선보이며 숨을 거세게 몰아쉰다. 마지막 8장 ‘수화기제(水火旣濟)’에서 무용수들은 비로소 서로를 바라보며 필연적 상생을 표현한다. 정 단장은 “모두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작품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 2021-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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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대를 새빨갛게 뒤집어놨더니… 관객들 매일 ‘칼박수’로 화답

    ‘무대를 뒤집어 놓으셨다.’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 중 일부를 각색해 사랑과 고뇌를 다룬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은 한때 인터넷을 달궜던 ‘밈(meme·유행하는 특정 문화 요소나 콘텐츠)’처럼 진짜로 무대를 뒤집어놓은 작품이다. 무대는 1981년 리틀엔젤스예술회관으로 개관해 올해로 40주년을 맞는 유니버설아트센터. 고풍스러운 매력을 가진 이 전형적 프로시니엄 공연장(액자 형태의 건축 구조로 무대를 향해 한 방향으로 정렬된 객석으로 제작된 극장)은 ‘그레이트 코멧’과 만나 완전히 탈바꿈했다. 붉은 빛깔의 7개의 원과 반원을 겹쳐 구성한 무대에서 배우들은 원 안팎으로 설치된 객석 사이를 휘젓고 다닌다. 궤도를 떠돌다 부딪치고 폭발하는 혜성처럼 서로 충돌하고 화합하며 흥겨운 춤과 음악으로 인생을 노래한다. 지난해 국내 초연이 예정됐지만 팬데믹으로 한 차례 연기 후 드디어 지난달부터 빛을 봤다. 이 과격하면서도 세련된 난장은 김동연 연출가(46)의 손을 거쳐 완성됐다. 장르를 넘나들며 인기작을 쏟아낸 베테랑인 그를 8일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만났다. 김 연출가는 “배우도 미치고 관객도 미쳐야 하는 작품이다. 방역 수칙을 지키면서 표현하려던 흥을 약간 줄이느라 아쉬웠지만 ‘반만이라도 미치는’ 공연을 올릴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작품이 ‘미친’ 공연인 이유는 원작의 태생과도 관련이 있다. 미국 출신의 원작자 데이브 말로이는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를 읽다 인상 깊었던 2권 5장의 70페이지 분량을 뮤지컬로 제작했다. 2012년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첫선을 보인 무대는 공연장 대신 펍, 바, 식당 등을 오갔다. 배우들이 밥 먹고 술 마시는 관객 테이블 사이를 오가며 노래했다. 2017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 후 토니상을 휩쓸었다. 주인공 ‘피에르’(홍광호 케이윌) ‘나타샤’(정은지 해나) ‘아나톨’(이충주 박강현 고은성)이 겪는 사랑과 고뇌는 카타르시스를 전했다. 음악과 대본만 유지할 뿐 무대, 동선, 조명, 의상 등은 한국에서 전부 새롭게 태어났다. 결말에도 약간의 변화를 줬다. 배우들은 모두 악기 연주, 연기, 노래를 병행한다. 김 연출가는 “전통적 공연장에서 관객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치의 참여형 공연을 구현하려 했다”며 “미국인이 해석한 러시아 문학을 현대적 한국의 코드로 재해석하며 감정, 에너지에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모두가 처음 겪는 신선한 형태의 공연에 제작진, 배우가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라는 말을 많이 했다. 동시에 첫 공연을 마치고 “고생했다, 고맙다”는 위로도 서로에게 유독 많이 건넸다고 한다. 극을 이끌어가는 다른 핵심 축은 음악이다. 원작자는 자신의 공연을 ‘일렉트로 팝 오페라’라는 별칭을 붙였다. 19세기 러시아 전통음악을 기반으로 EDM, 힙합 등 여러 장르의 넘버가 뒤섞였다. 김 연출가는 “주·조연 배우, 앙상블 모두가 한 음악 안에서 즐기는 모습을 보면 정말 신난다”며 “김문정 음악감독이 무대 중앙에서 배우처럼 춤추는 장면은 제가 적극 권장했다”며 웃었다. 그는 순수한 인간의 모습을 노래하는 ‘그레이트 코멧’처럼 “오래도록 공연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이번 작품이 그의 머릿속에 깊게 박힌 건 관객의 박수 소리 때문이다. “신나도 환호성을 못 지르고 에너지와 흥을 눌러야 하니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한국 관객이 이렇게 박자에 맞춰 ‘칼박수’ 치는 걸 보고 매일 놀랍니다. 하하.” 5월 30일까지, 5만∼14만 원, 8세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 2021-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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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얼굴이 가짜? AI가 만든 가상인간에 화들짝

    “얼굴 사진을 합성한 인공지능(AI) 인플루언서라던데 어느 부분이 가상인가요?” “모든 것이 다 가상입니다.” 최근 유튜브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루이’는 dob스튜디오가 만든 가상 인플루언서다. 루이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일상이나 여행과 관련된 영상들을 올리며 구독자와 소통한다. 해외 유명 가수 빌리 아일리시, 저스틴 비버, 브루노 마스 등의 노래를 따라한 영상도 주요 콘텐츠다. 언뜻 보면 보통의 유튜버들이 제작할 법한 영상이지만 이 채널이 주목받는 건 루이가 딥페이크(deepfake) 기술이 적용된 가상 인간이라는 점 때문이다. 딥페이크는 인공지능의 딥러닝(deep learning)과 가짜(fake)의 합성어. 인공지능의 딥러닝을 통해 정교한 가짜 영상이나 사진을 만드는 걸 뜻한다. 루이의 자연스러우면서도 세련된 몸동작, 안무, 표정, 노래를 접한 이들은 “많이 본 것 같다. 주변에 있을 법한 사람인데 가상이라니 믿어지지 않는다” “위화감이 전혀 없다”는 반응을 내놓고 있다. 영상을 제작한 dob스튜디오는 “처음엔 가상 얼굴을 사람들이 너무 못 알아채서 AI의 딥러닝 수준을 일부러 낮춰야 했다”고 설명했다. 딥페이크 기술을 활용한 가상 인물 콘텐츠가 진화하고 있다. 미국의 ‘릴 미켈라’, 일본의 ‘이마’, 국내의 ‘로지’ 등 가상 인플루언서들이 웬만한 실제 인물보다 구독자가 많아진 지 오래다. 과거 가상 인플루언서의 경우 일반인도 부자연스러움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딥페이크 기술이 적용된 최근 가상 인물들은 진짜와 구분하기 힘든 수준이다. 로봇이나 동물 등을 볼 때 인간과 빼닮으면 오히려 불쾌감을 주는 이른바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 현상마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 옛 사진에 생명을 불어넣는 인공지능 서비스 ‘딥 노스탤지어(Deep Nostalgia)’도 화제다. 온라인 족보 사이트 ‘마이 헤리티지(My Heritage)’는 사진 속 인물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게 만드는 이미지 서비스를 선보였다. 일부 누리꾼은 이를 통해 유관순 열사나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의 사진을 업로드하기도 했다. 옛 사진에서 굳은 표정의 위인들이 마치 살아있는 듯 눈을 깜빡이고 미소를 짓는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으로 이 서비스를 이용한 정현영 씨(35)는 “어머니의 젊은 시절은 어땠는지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었다. 잠시나마 그리움을 달랬다”고 말했다. 애플리케이션 ‘Avatarify’도 딥페이크 기술로 사진 속 인물이 살아 움직이는 장면을 연출할 수 있다. 딥페이크 콘텐츠 기술에 대해선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실존 인물의 사진을 도용한 디지털 성폭력이나 사기, 신원 도용 등 범죄 가능성이 있어서다. 가상 인플루언서의 활동을 응원하는 이들 중에도 “부작용을 방지할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네덜란드 사이버 보안업체 딥트레이스에 따르면 인터넷에서 확인 가능한 딥페이크 콘텐츠는 지난해에만 1만4678건으로 전년 대비 84% 급증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중 유명 여배우의 얼굴 이미지를 합성한 딥페이크 포르노는 약 96%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K팝 아이돌 역시 타깃이 되고 있다.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무심코 올린 얼굴 사진을 삭제하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도 딥페이크 범죄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김재연 씨(31)는 최근 2년간 카카오톡 프로필에 본인이나 가족, 지인이 등장한 사진을 일절 올리지 않고 있다. 다른 개인 SNS에서도 얼굴이 나온 사진은 지운다. 김 씨는 “일상을 찍은 사진마저도 각종 딥페이크 범죄에 악용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사진이나 영상의 변형 여부를 탐지하는 프로그램도 개발되고 있다. KAIST의 이흥규 교수팀이 개발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카이캐치(KaiCatch)’는 사진의 위·변조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한다. 얼굴의 미세한 변형이나 기하학적 왜곡 등의 흔적을 분석한다. MS와 페이스북, IBM 등 해외 정보기술(IT) 기업들도 딥페이크 탐지 기술 개발에 공을 들이고 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 2021-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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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팬데믹-인공지능 화두로… 동시대의 SOS 조명”

    관객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게 연극의 힘이라면 극단 이와삼의 ‘싯팅 인 어 룸’은 꽤 강력한 작품이다. 대학로 이야기꾼으로 소문난 장우재(50·사진)가 쓰고 연출한 이 작품은 팬데믹과 인공지능(AI), 인간성 등의 화두를 객석에 던진다. 그는 ‘동시대성’을 목표로 창작극을 만들고 있다. 11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예술극장에서 펼쳐지는 극은 가까운 미래를 다룬 공상과학(SF) 소설과 닮았다. 지난해 제10회 미래연극제에서 서울 마포구 복합문화공간 행화탕에서 처음 선보인 뒤 제20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에서 최우수작품상, 연출상을 받았다. 장 연출가는 6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얼마 전부터 동시대의 문제들을 한두 마디로 정의하기 힘들었다. 팬데믹으로 모든 게 빨려 들어가듯 큰 변화를 겪는 시점에서 작게나마 2인극을 통해 현재를 조명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제목 싯팅 인 어 룸은 방에 갇혀 관계를 맺는 시대의 단면을 상징한다. 그는 “최근 우리 모두가 각자의 방 안에서 절박한 SOS를 보내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줄거리는 다소 복잡하지만 흥미진진하다. 쌍둥이 자매 제니와 지니는 치명적인 감염병으로 부모를 잃는다. 엄마는 먼저 감염된 아빠를 보살피기 위해 격리를 거부했다가 함께 세상을 떠난다. 이 사연을 접한 대중은 “무책임한 어머니” “죽음을 통한 진정한 사랑”이라며 엇갈린 반응을 쏟아낸다. 10년이 흘러 언니인 제니도 죽고 홀로 살아가던 지니는 어느 날 언니의 전 남자친구 리언으로부터 혼란스러운 이야기를 듣는다. 죽은 이를 디지털 기술로 살려내는 재현 시스템으로 언니를 복원했다는 것. 그리고 프로그램 속 제니를 업데이트하고 싶으니 언니에 대해 갖고 있는 기억과 자료를 제공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장 연출가는 “우린 자유롭기 위해 세상에 자신을 점점 더 최적화시켜야 하는 역설에 빠져 산다. 백신도 맞아야 하고 어딘가 항상 접속해 있어야 한다. AI 기술에도 적응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미래가 좋든 나쁘든 극을 통해서라도 마음의 준비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작품에는 국가가 탄소배출을 막기 위해 개인의 데이터 사용량을 통제하는 단말기, 죽은 이를 가상으로 되살리는 민간회사 등의 SF 소재가 많다. 그는 “SF는 극을 담는 도구일 뿐이다. 정재승 교수에게 과학 얘기를 듣고 여러 세미나에서 발표하는 미래 전망을 보면서 상상하기를 즐긴다”고 말했다. 공상과학이 가득한 무대는 지극히 단순하다. 소품은 의자 두 개, 테이블 1개, 슬리퍼 한 켤레뿐. 좌우로 11m가량 길게 뻗은 무대는 공허해 보인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지키기 위해 배우들은 멀리 떨어져 정면을 보고 대사를 뱉는다. 그는 “스펙터클을 완성하는 건 결국 배우다. 필요한 오브제만 신중하게 썼다”며 “환경, 탄소배출 문제도 언급하는 작품이기에 소품을 과하게 쓰지 않아야 한다는 책무도 있었다”고 했다. 넓은 무대는 소리와 영상이 채운다. 쌍둥이 자매를 혼자 소화하는 더블캐스팅의 조연희, 신정연 배우는 1인 2역을 위해 미리 일부 대사를 녹음했다. 장 연출가는 “자매가 대사를 주고받는 장면을 위해 극단 오퍼레이터는 녹음한 800여 개의 대사를 재생한다”고 설명했다. 무대를 가득 채운 정면의 스크린은 장면별로 등장인물의 얼굴을 확대해 비춘다. 그는 “차기작으로 청년세대의 우울증을 국가에서 관리하는 줄거리의 희곡을 집필 중이다. 스스로에게 한 번쯤은 질문했어야 하는 이야기를 쓰겠다”고 했다. 전석 3만 원, 15세 관람가김기윤 기자 pep@donga.com}

    • 2021-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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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의 비극 ‘애이불비’ 정서로 표현했죠”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고선웅 연출가(53)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코드는 애이불비(哀而不悲)다. 뮤지컬 ‘광주’에서도 마찬가지. “슬프고 고통스러운 상처지만 공연예술이기에 마냥 슬픔으로만 그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 고통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그의 지론이 작품에 투영됐다. 그가 그린 광주는 협화음과 불협화음을 오가는 최우정 작곡가(53)의 선율과 닮았다. 지난해 10월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선보인 뮤지컬 광주가 다시 돌아온다. 13∼25일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한다. 라이브㈜와 극공작소 마방진이 공동 제작한 작품은 지난해 서울 초연 후 경기 고양, 부산, 전북 전주, 광주 등에서 무대에 올랐으며 제5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창작부문 프로듀서상을 탔다. 초연 이후 한 차례 더 갈고닦는 과정에서 치열한 논의를 거친 끝에 극은 담백하게, 카타르시스는 좀 더 농밀하게 거듭났다. 5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만난 두 사람은 “지난해 작품이라는 숲 안에 갇혀 몰입했다면 이번에는 숲 밖으로 한 발 빠져나와 객관성을 확보하려고 했다”고 입을 모았다. 2019년 국립오페라단의 창작오페라 ‘1945’에서 처음 호흡을 맞춘 두 사람은 광주가 두 번째 공동 작업이다. 최 작곡가가 고 연출가에 대해 “음악을 듣는 걸 넘어 읽어낼 줄 아는 연출가”라고 하자, 고 연출가는 “최 작곡가는 음악을 넘어 극 전체를 건축하듯 꼼꼼하게 곡을 써낸다. 드라마를 따라가지 않는 살아 있는 음악이 장점”이라고 답했다. 작품은 국가 공권력의 계략에 굴복하지 않는 시민들과 그들을 지켜보는 편의대원이자 주인공 박한수의 고뇌를 그렸다. 편의대는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민간에 침투한 사복 군인이다. 2019년 이들이 민간인들의 폭력을 부추겼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극에서 제3자 입장인 박한수는 광주에서의 참상을 목도하며 통렬하게 반성한다. 여전히 상흔이 남아 있는 사건을 다룬 작품의 평가는 초연 당시 엇갈렸다. 한국 현대사에서 광주가 갖는 상징적 의미를 살리지 못했다거나, 편의대원을 주인공으로 삼은 게 공감하기 어렵다는 부정적인 의견도 있었다. 고 연출가는 “관객 의견은 전부 옳다. 첫 공연 후 뼈가 저릴 정도로 통렬한 비판 리뷰만 한 시간 내내 봤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작품을 봐주셨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40년간 광주라는 소재는 일률적으로 소비돼 자칫 비극이라는 늪에 빠질 우려가 있다. 비극을 비극적이지 않게, 슬픔을 꼭 슬픔으로 표현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게 예술”이라고 강조했다. 대본에서 군더더기를 많이 정리했지만 편의대원을 중심에 둔 설정은 바꾸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재미와 카타르시스를 동시에 추구하는 작품을 꿈꾼다”고 했다. 작품 음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불규칙성이다. 인물 성격과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불협화음이나 비정형적 리듬을 사용했다. 작품을 다듬으면서 새로운 음악도 추가했다. 최 작곡가는 “뭔가 일정하게 정해지지 않았다는 건 해결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의미”라며 “낯설고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불협화음도 주제의식의 일부”라고 설명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 2021-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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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많던 공연 소식지는 어디로 갔나

    ‘예술의전당 웹진(온라인 잡지)이 3월 발행되는 391호를 끝으로 여러분과 작별하게 되었습니다.’ 서울 예술의전당은 지난달 웹진 391호를 내놓은 이후 폐간 소식을 전했다. 지난해 2월 시작된 이 웹진의 전신은 종이 월간지 ‘Beautiful Life’다. 365호까지 발행된 종이 월간지는 지난해 1월호를 끝으로 격주 발행의 웹진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예산 축소로 이마저도 중단된 것. 독자들은 “마지막 종이 월간지도 아쉬웠는데 웹진마저 사라져 섭섭하다”, “다른 채널로 만날 모습을 기대하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공연예술계 소식지가 사라지고 있다. 수익성 악화에 따른 예산 축소가 주된 원인이다. 공연계가 재정 규모를 줄이는 상황에서 소식지가 가장 먼저 직격탄을 맞은 것. 특히 지난해부터 이어지고 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공연예술계 침체가 이를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유튜브, 포털 등 디지털 플랫폼을 통한 콘텐츠 전달이 더 효율적이라는 자체 판단도 한몫했다. 지난해 12월 뮤지컬 전문 잡지 ‘더 뮤지컬(The Musical)’의 무기한 휴간은 팬들의 가슴을 시리게 했다. 2000년부터 20년 동안 매달 뮤지컬계 소식을 전한 잡지다. 설도권 더 뮤지컬 발행인은 “독자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하다. 휴간이라는 단어를 떼는 날이 빨리 오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1977년 4월 창간한 국립극장의 ‘월간 국립극장’은 2000년부터 ‘미르’라는 새 이름을 달고 명맥을 이어왔다. 공연계 안팎의 뉴스를 밀도 있게 전달했으나, 지난해 12월호를 끝으로 종이잡지 발간을 끝내고 웹진으로 바뀌었다. 2015년부터 월간지 ‘문화공간’의 온·오프라인 발행을 병행하던 세종문화회관도 2018년부터 격주 발행의 웹진으로 전환했다. 뮤지컬 전문 극장으로 명성을 쌓은 충무아트센터는 2019년 3월 44호를 끝으로 웹진 ‘MUST’ 발행을 중단했다. 예술기관이나 단체가 직접 제작하는 잡지는 현장의 예술가들과 내밀하게 접촉할 수 있다는 차별성과 전문성을 지녔다. 더 뮤지컬의 지난해 12월호 표지와 커버스토리는 배우 조승우가 장식했다. 내한한 해외 유명 예술가들의 단독 인터뷰도 종종 소개하곤 했다. 힘든 상황에서도 관객과 소통하기 위해 꾸준히 명맥을 이어가는 곳도 있다. 공연문화 전문 월간지 ‘시어터플러스’를 비롯해 마포문화재단의 웹진 ‘MACZINE’,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예술경영 웹진’이 그렇다. 공연, 전시를 폭넓게 조명해온 서울문화재단의 월간지 ‘문화+서울’ 관계자는 “예산이 줄어든 데다 수요처인 문화예술 공간이 문을 많이 닫아 어려움이 크다”며 “지면과 온라인 독자는 다르기에 여력이 되는 한 온·오프라인 잡지를 동시에 배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 2021-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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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30 판소리꾼들의 참신한 소리판 기대하세요”

    2030 소리꾼이 들려주는 감각적인 창(唱)의 무대가 펼쳐진다. 국립창극단이 17, 18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 올리는 ‘절창(絶唱)’ 무대에 두 소리꾼 김준수(30), 유태평양(29)이 오른다. 절창은 빼어난 소리라는 뜻. 37년간 명맥을 지킨 국립극장 완창판소리가 한바탕 전체를 당대 명창의 소리로 전한다면 절창은 2030 소리꾼들이 빚는 참신한 소리를 기대할 만한 공연이다. 이번 무대에선 판소리 ‘수궁가’를 선정했다. 본래 4시간이 넘는 완창(完唱) 분량을 100분으로 압축했다. ‘고고천변’ ‘범피중류’ 등 주요 대목을 독창과 합창을 섞어 선보이되 리듬에 맞춰 가사를 주고받는 새로운 방식도 시도한다. 어려운 한자어를 쉽게 풀어내기 위해 공연자들이 작창(作唱)한 소리도 새로 추가된다. 남인우 연출가가 연출과 구성을 맡았다. 김준수와 유태평양은 창극단의 주요 작품에서 주·조역으로 활동하는 배우들로 어렸을 때부터 판소리를 익혔다. 무대 안팎에서 숱하게 호흡을 맞춘 이들은 빼어난 연기력과 재능으로 팬층이 두껍다. 2013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한 김준수는 창극 ‘춘향’에서 몽룡, ‘패왕별희’의 우희,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헬레네를 맡아 성별을 넘나들며 스펙트럼이 넓은 연기로 주목받았다. 유태평양은 여섯 살이 되던 해 역대 최연소로 흥보가를 완창하며 신동으로 불려왔다. 2016년 입단 후 ‘심청가’의 심봉사, ‘춘향’의 방자, ‘흥보씨’의 제비로 존재감을 뽐냈다. 두 소리꾼은 “절창의 첫 무대가 주는 부담감은 크지만 참신한 소리판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3만∼4만 원, 8세 이상 관람가.김기윤 기자 pep@donga.com}

    • 2021-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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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어쩌다가, 그 천문학자는 ‘명왕성 킬러’가 됐나

    “명왕성은 죽었습니다(Pluto is dead).” 이미 사람들의 뇌리에 박힌 우주관을 바꾸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1930년 미국 천문학자 클라이드 톰보가 명왕성을 처음 발견하고 약 70년이 흐른 어느 날. “태양계를 완벽히 알고 있다”던 천문학계가 그동안 굳건히 믿어온 우주관이 한 천문학자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한다. 당시 태양계와 우주에 대한 이해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태양계는 ‘수-금-지-화-목-토-천-해-명’으로 일컫는 9개 행성으로 구성돼 있다. 둘째, 더 이상의 태양계 행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훗날 ‘명왕성 킬러’라는 별명을 얻은 저자는 모두의 머릿속에 굳게 자리 잡은 우주관을 깨뜨려야 하는 고난의 길에 들어섰다. 자신은 결코 이를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에 그는 태양계의 10번째 행성을 찾아낸 줄 알고 들떠 있었다. 그가 2005년에 발견한 천체 ‘제나’(나중에 에리스로 개명)는 지름 약 2326km로 궤도에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명왕성(2306km)보다 조금 큰 크기가 문제였다. 이 천체를 행성으로 받아들인다면, 해왕성보다 바깥 궤도에 있으면서 비슷한 크기의 다른 천체들 200여 개까지 모두 행성으로 분류해야 했다. 결국 2006년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국제천문연맹(IAU) 회의에서 천문학자들은 ‘명왕성은 행성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투표로 답해야 했다. 그 결과 ‘아니요’를 뜻하는 노란색 카드 물결이 회의장을 뒤덮었다. 저자가 촉발한 논쟁은 명왕성은 더 이상 행성이 아니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이 책 제목에 들어간 ‘어쩌다’는 원제를 잘 의역한 단어다. 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 행성천문학과 교수인 저자는 1970년대 닐 암스트롱과 아폴로 프로젝트를 동경하며 자란 ‘아폴로 키즈’다. 그가 2005년 어쩌다 밤하늘에서 찾아낸 제나는 명왕성의 행성 지위를 박탈한 단초가 됐다. 학계와 주변 압박에도 그는 “명왕성은 ‘왜소행성’으로 강등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주를 사랑하는 어린이들은 “명왕성을 내쫓지 말라”는 내용의 간절한 편지를 그에게 보냈다. 이 책은 명왕성과 제나가 왜 행성이 될 수 없는지를 학문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이와 관련한 저자의 고민과 감정, 삶에 집중했다. 누군가는 조용히 밤하늘을 응시할 때, 천문학자들은 새로운 별을 찾아내 이름을 붙이고 논문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다른 사람이 먼저 찾아낸 천체를 나중에 가로채는 ‘별 도둑질’도 벌어진다.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천문학자들의 세계는 우주만큼이나 흥미롭다. 인간이 우주에서 인식의 범위를 넓혀간 동력은 무언가 더 있을 것이라는 상상력 덕분이었다. 역설적으로 명왕성이 왜소행성으로 강등된 것 역시 ‘명왕성 너머에도 무언가 존재하리라’고 상상한 결과였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도 새로운 행성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할 때 나는 그것을 도전이라고 받아들인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 2021-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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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외 도시 현지 라디오 들으며 드라이브’… 랜선 여행의 진화

    팬데믹으로 막힌 하늘길과 바닷길 대신 온라인으로 새 여행길이 뚫리고 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억눌린 여행 수요와 업계의 자구책이 맞물리며 ‘랜선 여행’ ‘가상 여행’이 진화하고 있다. 최근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를 끄는 랜선 여행 웹페이지는 ‘Drive & Listen’이다. “현지 라디오를 들으며 차를 타고 도시를 여행하자”는 게 모토다. 웹페이지에 접속해 서울, 뉴욕, 파리 등 세계 50여 개 도시 중 여행하고 싶은 곳을 클릭하면 현지 라디오 방송과 함께 차를 타고 도시를 누비는 듯한 영상이 재생된다. 이용자들은 “덕분에 코로나 우울감을 떨쳐냈다”며 뜨거운 반응을 보인다. 입소문을 타고 세계에서 이용자들이 몰리고 있다. 미국, 유럽 언론에서도 ‘팬데믹을 이겨낼 수 있는 핫한 서비스’로 소개했다. 놀랍게도 서비스는 무료다. 이는 독일 뮌헨 공대(TU M¨unchen)에 재학 중인 터키 출신 유학생 에르캄 세케르(25)가 지난해 5월 “고향 이스탄불이 너무 그리워서” 만든 사심 가득한 서비스다. 그는 최근 본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모든 게 온라인으로 대체됐지만 출퇴근, 등교, 여행 등 길 위에서 보내던 시간은 되찾지 못했다”며 “고향의 거리를 걷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 웹페이지를 제작했다”고 밝혔다. 이어 “도시 소음이 적절히 섞인 유튜브 영상과 드라이브 중 빼놓을 수 없는 실시간 FM 라디오를 연결했을 뿐”이라며 “가상 여행 도시를 늘려갈 예정”이라고 전했다. 전 세계에서 각자 사는 도시를 촬영해 사용해달라는 ‘영상 기부’도 이어지고 있다. 방문자는 수백만 명을 넘어섰다. 무료인 대신 그는 “커피 한 잔 사 달라”며 4유로 후원 배너를 달았다. 그는 “지금까지 커피를 1000잔 이상 후원받은 것 같다”며 웃었다. 마이리얼트립, 프립 등 여행업계도 랜선 여행 프로그램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현지 거주 가이드가 화상을 통해 직접 여행지를 소개하는 방식과 박물관, 미술관 등 특정 주제에 맞춰 도슨트 투어를 운영하는 방식으로 나뉜다. 여행상품을 중개하는 마이리얼트립은 지난해 4월 거래액이 10억 원까지 줄었지만 랜선 여행을 선보인 이후 지난해 10월 거래액이 100억 원까지 회복됐다. 라이브 랜선 투어만을 전문적으로 운영하는 스타트업 ‘가이드라이브’도 등장했다. 한 시간 정도 진행하는 투어는 회당 1만∼2만 원 수준. 가이드 신기환 씨(33)는 “영국 내셔널 갤러리 도슨트 투어는 회당 평균 15명씩 참여한다. 처음엔 누가 가상 여행을 하겠나 싶었지만 수요는 꾸준하다”고 했다. 국내 여행지도 랜선으로 들어오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최근 선보인 ‘집콕여행꾸러미’ 시리즈에서 군산, 경주 상품은 큰 호응을 얻었다. 에어비앤비, 클룩 등 해외 기업도 국내외 가상 여행, 랜선 체험 서비스를 선보였다. 미국 소셜 애플리케이션인 틴더도 1일 가상 체험, 여행을 즐길 수 있는 ‘패스포트’ 기능을 한 달간 무료로 제공한다고 밝혔다. 목적지를 선택한 뒤 현지에 있는 사람과 대화하거나 가상 체험을 즐길 수 있다. ‘구글어스’ ‘갈라360’은 가상현실(VR) 기술을 활용한 랜선 여행, 실감미디어 콘텐츠를 강화하고 있다. KT도 슈퍼VR 플랫폼에서 160여 편의 가상 여행 콘텐츠를 제공한다. 제주도 여행지 200여 곳을 360도 영상으로 서비스하는 ‘제주투브이알’도 인기다. CGV는 스크린으로 랜선 여행을 끌어왔다. 2월 처음 선보인 ‘Live 랜선 투어’의 여행지는 홍콩이었다. CGV는 “새 여행지도 확충할 계획”이라며 “여행에 목말랐던 이들에게 색다른 여행 트렌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 2021-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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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 짧게, 더 빠르게… 요즘 애니메이션 10분도 길다

    ‘날아라 슈퍼보드’ 러닝타임 25분, ‘곰돌이 푸’ 25분, ‘포켓몬스터’ 20분. 요즘 애니메이션은 평균 5분? 애니메이션이 짧아지고 있다. 과거 편당 평균 20분을 넘기던 애니메이션은 웹영화, 웹드라마, 유튜브 등 ‘쇼트폼(Short-form)’ 콘텐츠 바람을 타고 짧게 변신 중이다. 각종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도 잇따라 쇼트폼 영상 플랫폼을 선보이면서 애니메이션의 주 소비층이 점차 짧은 콘텐츠를 선호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CJ ENM 투니버스가 최근 내놓은 애니메이션 ‘마카앤로니’의 편당 길이는 4분 남짓. 각 회마다 독립적 서사를 갖춘 이 작품은 한 편이 유튜브 영상을 보듯 짧고 빠르게 지나간다. 천재 발명가와 그를 따르는 사고뭉치 조수의 발명 도전기를 담은 작품엔 리액션(반응) 외 별다른 대사가 없다. 등장인물이 슬랩스틱 코미디를 펼치는 작품이다. 22일 처음 전파를 탄 콘텐츠는 유튜브에서도 꾸준히 인기몰이 중이다. 청춘 공감 버라이어티 장르를 표방한 애니메이션 ‘된다! 뭐든!’ 역시 평균 4분 분량이다. 웹툰을 보는 듯한 작품은 ‘너튜브(NeoTube)’ 스타를 꿈꾸는 주인공 ‘된다’의 좌충우돌 일상을 유쾌하게 풀어냈다. 중고 거래부터 귀농 이야기까지 어린이와 성인이 모두 공감할 만한 에피소드로 구성됐다. TV 채널 방영 이전 OTT 플랫폼인 웨이브(wavve)를 통해 먼저 공개하는 전략을 택했다. 애니메이션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인 라프텔(Laftel) 역시 웹툰을 기반으로 자체 제작한 쇼트폼 애니메이션 ‘슈퍼 시크릿’을 내놓았다. 편당 10분 안팎의 짧은 러닝타임으로 구성됐다.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영화사 픽사는 단편선 시리즈 ‘Sparkshorts’를 선보이고 있다. 최근 큰 인기를 끈 두 작품 ‘윈드(Wind)’와 ‘플로트(Float)’는 모두 평균 8분짜리다. 각각 한국계, 필리핀계 주인공이 등장하는 작품은 유튜브에서 무료로 공개된 뒤 800만 회, 4600만 회의 조회수를 각각 기록하고 있다. 올 초 흥행한 영화 ‘소울’의 오프닝 애니메이션으로 주목받은 ‘토끼굴(Burrow)’과 한국계 에릭 오 감독의 ‘오페라’는 올해 아카데미상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후보에 오르며 인기와 작품성을 모두 인정받았다. 2011년부터 평균 3분 분량의 짧고 강렬한 구성으로 인기를 끈 ‘라바’ 시리즈를 제외하고 쇼트폼 애니메이션은 그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한 분야다. 물론 1990년대 편당 25분을 훌쩍 넘기던 구성에 비해 현재 10∼15분 수준으로 짧아졌다고는 하나, 최근 이마저도 10분 이내로 줄어든 것. 매체 이용 환경 변화가 가장 큰 원인으로 분석된다. 박석환 한국영상대 만화콘텐츠과 교수는 “TV, 극장 중심에서 스마트폰으로 주된 이용매체가 바뀌면서 제작사들도 스크린을 벗어난 유튜브용 쇼트폼 콘텐츠 제작에 점차 눈을 돌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애니메이션의 장르적 특성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우경민 마카앤로니 프로듀서는 “작품을 논버벌 슬랩스틱 포맷으로 제작한 이유도 짧은 시간에 특정 언어와 연령에 얽매이지 않고 콘텐츠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며 “제작 과정에서도 빠른 타이밍의 편집에서 오는 재미와 신선함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박석환 교수는 “향후 긴 서사보다 기술적 효과, 시청자의 놀람, 짧은 통찰을 주는 쇼트폼 애니메이션의 강세가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 2021-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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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훈아 하춘화도 검열받고 무대 오르던 그때 그 시절

    “퇴역 장군 역할은 다른 인물로 개작(改作)할 것.” “희곡으로서의 문학성 결여로 심의 결정할 수 없음.” 정성 들여 쓴 공연 대본에는 단어마다 빨간색 줄이 쫙쫙 그어졌다. 대본 한 페이지가 통째로 삭제 지시를 받는 일도 부지기수. 아예 첫 장에 “주제가 부적당하다고 사료되어 반려합니다”라는 한 문장이 적히면 두꺼운 대본은 한낱 종이뭉치가 되어버리곤 했다. ‘반려’ ‘개작’ ‘수정’ ‘조건부 통과’ 등이 찍힌 시퍼런 도장은 민주화 이전 국내 공연예술가들이 숱하게 접한 문구였다. 모든 공연이 국가기관의 심의를 거쳐야 무대에 오를 수 있던 시절. 당시 심의를 받은 대본 5900여 편의 원문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기록원이 공연예술 심의 대본 및 서류들을 최근 공개한 것. 심의 주체는 시대에 따라 문교부(1961∼1966년)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1966∼1976년) 한국공연윤리위원회(1976∼1986년) 공연윤리위원회(1986∼1997년)로 바뀌었다. 1960∼80년대에 군과 정부에 대한 소재는 금기에 가까웠다.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기관이 판단한 이야기는 물론이고 이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문구조차 반려되기 일쑤였다. 이강백의 희곡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사람 같소?’(1978년)에선 극 중 ‘퇴역 장군’이란 역할이 등장한다. 당시 심의위원은 군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대본 속 캐릭터를 새로 바꾸라는 지시를 내렸다. 윤대성의 희곡 ‘노비문서’(1978년)의 대본 두 번째 장에는 반려 표시가 짙게 남아 있다. 구체적인 사유조차 없다. 유신체제 말기 신분 해방을 둘러싼 갈등과 사랑을 소재로 한 작품이 부적절했을 것이라는 추정만 나왔을 뿐이다. 오태영의 희곡 ‘난조유사’(1977년)에서는 등장인물이 “초급대학을 나오고 몇 차례 시험을 쳤지만… 아직 합격이 안 돼서” 같은 문장이 사회 비관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이유로 삭제 조치를 받았다. 유해 표현, 외설적 표현으로 낙인찍는 사례도 많았다. 이근삼의 ‘국물 있사옵니다’(1975년)에서 “발자취엔 피 냄새가 따랐소. 피 냄새를 풍기며 짙은 피 냄새를 뿜으며 왕좌에 오른 거요” 같은 대사는 표현이 잔혹하다는 이유로 “발자취엔 그런 시련이 뒤따랐거든”으로 수정됐다. ‘일본인’ ‘영어잡지’ 등은 왜색(倭色)이나 외국 문물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수정됐다. 최인호의 ‘달리는 바보들’(1975년), 김광림의 ‘아침에는 늘 혼자예요’(1978년), 우디 앨런의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번’(1972년) 같은 유명 작품도 심의를 거쳐야 했다. 트위스트김 하춘화 나훈아 등 유명 가수들의 공연도 사전에 대본과 악보를 제출했다. 가수의 공연에 앞서 짤막한 ‘반공(反共)극’ 대본이 붙어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가사, 곡, 창법이 저속”하다는 이유로 금지 조치를 당하면 해당 노래는 공연에서 아예 부를 수 없었다. 공연 심의 제도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심의위원 명단 공개 등의 변화를 거쳐 1997년까지 유지됐다. 그러다 1996년 10월 헌법재판소가 영화 사전 검열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린 데 이어 2년 뒤 영상물등급위원회가 발족한 것을 계기로 이 제도가 폐지됐다. 김현옥 아르코예술기록원 학예연구사는 “심의와 검열에도 불구하고 공연예술인들은 끊임없이 대본을 고치고 작품을 새로 써가며 열정을 불태웠다. 현재 심의가 없어도 공연이 지나치게 외설적이거나 폭력적으로 흐르지 않는 건 예술인 스스로의 자정 노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 2021-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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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자폐증 소년이 발견한 자연의 아름다움

    스웨덴에 그레타 툰베리가 있다면 영국 북아일랜드에는 다라 매커널티가 있다. 환경운동가이자 에세이 작가로 활약하는 저자는 자폐증을 겪는 15세 소년이다. 교실에서 친구들로부터 따돌림, 괴롭힘을 당하며 상처 속에서 방황하던 소년이 자연을 발견한 뒤로 이를 찬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가 풀냄새, 동물의 몸놀림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느낀 감상을 그만의 호흡으로 풀어냈다. 자연을 바라보는 동안 그는 잠시나마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 찾았다. 글 자체만 본다면 일상을 담담하고 건조하게 적은 누군가의 일기장을 보는 듯하다. 다만 저자의 나이와 병세까지 고려한다면 그가 발견하고 적어 내려간 자연의 아름다움, 위대함은 꽤 뭉클하게 다가온다.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받았던 소년은 세상을 밀어내기보다 그가 푹 빠져든 자연을 닮아 되레 모두를 품는 듯하다. 섬세하게 기록한 자연, 환경의 모습 중에는 우리가 쉽게 떠올리지 못하던 통찰도 많다. “이 참나무가 생태계와 연결된 방식으로 우리도 참나무와 연결되어 있다면 좋을 텐데.” 각박한 세상에 지쳐 누군가 자연 속으로 황홀하게 몰입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싶은 이라면 이 책을 집어들 만하다. 그가 담담하게 쏟아내던 글 속에 내 번민과 지구의 고통까지 해결할 혜안이 나올지도 모른다. ‘방구석 자연 전문가’이던 다라 매커널티는 환경운동가로 거듭나는 중이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 2021-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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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칠흑같은 기내, 오직 소리로 관객을 지배한다

    온통 암흑이다.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분간이 안 될 만큼 빛 한 줄기 보이지 않는 철저한 암흑이다. 이 상황에서 헤드셋을 썼는데 누군가 갑자기 말을 건다면? 온몸의 감각이 곤두서고, 무한한 상상력을 뻗기 딱 좋은 환경이다. 우란문화재단이 4월 12일까지 선보이는 극단 다크필드(Dark Field)의 이머시브 오디오극 ‘Flight(비행)’는 무대를 기내 공간처럼 개조했다. 관객이 가상 출입국신고서를 적고, 비행기 티켓을 받아 자리에 앉으면 “저희 비행기를 이용해주신 승객 여러분 감사합니다”라는 기내 방송과 함께 항공기는 이륙한다. 소리로 극을 이끌어가는 오디오극은 국내엔 아직 낯선 장르다. 이번 작품을 제작한 다크필드는 2016년 설립한 뒤 음향 기술을 활용한 오디오극의 최첨단을 달리는 영국 극단. 세계 투어에서 관객 11만 명을 모았다. 암흑 속에서 소리, 진동, 번쩍이는 섬광 등을 활용해 공감각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극을 제작해왔다. 시각이 차단됐을 때 다른 감각이 예민해지는 동물적 본능을 노련하게 요리한다. 본래 40피트짜리 선박 컨테이너를 개조해 무대를 제작했으나, 이번 공연에서는 공연장을 개조해 완벽한 어둠을 연출했다. 개조한 무대는 보잉기 내부를 빼다 박은 듯하다. 공연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기발한 오디오극은 다크필드의 제작자 겸 예술감독인 글렌 니스와 데이비드 로젠버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두 사람은 23일 본보와 진행한 화상 인터뷰에서 “소리만으로 한 시공간에서 얼마든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테마파크에서 즐길 법한 경험을 ‘고급 예술’로 느끼는 게 매력”이라고 했다. 10여 년 전부터 소리를 갖고 놀며 극에서 다양한 실험을 즐기던 두 사람은 각각 현직 마취과 의사이자 순수미술 전공자이기도 하다. “인간 존재, 감각, 의식, 무의식에 대한 호기심이 잘 맞아” 다크필드를 함께 설립, 오디오극 제작에 나섰다. 2018년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내놓은 작품은 매진을 기록했다. “우리 공연은 관객 상상력이 전부다. 완성되지 않은 서사를 상상과 소리로 직접 채우면 된다”고 했다. 극 시작 전 “내리실 기회는 지금뿐”이라는 스산한 기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어, 어쩌지?’ 우물쭈물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늦었다. 헤드셋을 낀 채 끝까지 비행을 마치거나, 헤드셋을 벗고 잠시 고요와 암흑을 즐기는 방법뿐. “같은 시공간에서 청각에 따라 완벽히 달라지는 두 가지 세계”를 느낄 수 있는 극 취지와도 맞는다. 관객에 따라 헤드셋 너머 들리는 굉음에 깜짝 놀랄 수 있다. 두 사람은 “꼭 공포심만을 주려고 한 건 아니었다”며 웃었다. 4월 12일까지(화∼목요일은 공연 없음), 서울 성동구 우란문화재단 리허설룸, 전석 1만8000원, 16세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 2021-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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