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아

서영아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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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100세 시대를 생각합니다.

sya@donga.com

취재분야

2025-10-06~2025-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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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뇨-중성지방 경계하고 유산소운동-상대 있는 게임을 즐겨라[서영아의 100세 카페]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치매센터에 따르면 2021년 한국의 고령자는 858만여 명, 이 중 10.33%가 치매환자다. 치매를 부르는 가장 큰 요인은 슬프게도 ‘나이’다. 65∼69세 구간에서 4.4%에 불과했던 유병률은 85세 이상이 되면 36.66%로 올라간다. 문제는 인간 수명이 너무 급격히 늘었다는 점. 예컨대 1970년생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62.3세였지만 2020년에는 83.5세로 늘었다. 50년간 신체 수명이 20년 넘게 늘어났는데 뇌 수명은 이를 쫓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일본의 노년정신의학 전문가 아라이 헤이이(新井平伊) 박사가 저서 ‘뇌수명을 늘린다―인지증(치매)이 되지 않는 18가지 방법’(文藝春秋)을 통해 정리한,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뇌수명 늘리는 법을 재구성해 소개한다.》○ 생활습관병(성인병)은 뇌 혈관을 늙게 한다(1) 뇌의 작은 ‘변화’를 포착하라(2) 뇌 노화의 구조 4단계 ㉠신체 전체의 노화―생활습관병을 예방한다㉡뇌 혈관의 노화―생활습관병이 주원인㉢뇌 신경세포의 노화―‘즐거움’으로 커버㉣멘털의 노화―의욕을 높여 역할을 부과한다 뇌는 치매 판정 전에 두 가지 단계를 거친다. 먼저 ‘주관적 인지기능저하(SCD)’ 단계. 검사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변화를 ‘자각’하는 상태다. 다음 단계는 인지기능 저하를 확인할 수 있는 ‘경도인지장애(MCI)’다. 건망증이 주요 증상인데 일상생활에는 큰 지장 없고 치매에는 이르지 않은 상태다. 매년 MCI 진단자의 10∼15%가 알츠하이머병으로 이행한다. 뇌 노화를 늦추려면 조기 발견이 중요하다. 하지만 뇌의 노화는 알아채기 어렵다. 키워드는 ‘변화’다. 예컨대 △이유없이 짜증이 나고 초조하다 △잠이 오지 않는다 △외출이 귀찮아진다 △취미가 즐겁지 않아졌다 △건망증이 늘었다 △똑같은 것을 몇 번이나 물어본다 △두통이나 위통 등의 증세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3) 당뇨병은 치매 최대의 적(4) 콜레스테롤과 중성지방을 컨트롤(5) 혈압은 가급적 변동시키지 않는다(6) 적정 체중은 건강의 최종지표 당뇨병은 치매에 걸릴 가능성을 두 배로 높인다. 당 대사가 나빠지면 뇌 신경세포도 기능부전에 빠지고 신경네트워크에 손상이 생긴다. 나빠진 효능을 보완하기 위해 인슐린이 더 많이 분비되는데 이때 알츠하이머병을 일으키는 물질인 아밀로이드β(베타) 단백질이 뇌 신경세포에 쌓인다. 이상지질혈증(고지혈증)은 방치하면 협심증이나 심근경색, 뇌경색 뇌출혈 등 합병증을 일으키거나 혈관성 치매에 걸리기 쉽다.○치주병, 청력 저하, 수면장애, 음주(7) 치주병이 치매를 촉진(8) 청력 저하는 사회적 고립, 치매 불러(9) 질 좋은 수면은 뇌 건강에 불가결(10) 수면 무호흡증후군은 반드시 치료(11) 음주는 담배보다 뇌에 나쁘다 알츠하이머병 예방을 위해서는 구강 내 케어가 극히 중요하다. 2020년 일본 규슈대 연구진이 치주병 환자의 잇몸에 있는 진지발리스(gingivalis) 균이 뇌내 아밀로이드β 생산에 관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치주병은 당뇨도 악화시켜 치주병 당뇨병 알츠하이머병의 악순환이 형성될 수도 있다. 노화의 한 증상이기도 한 청력 저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 저하로 이어져 사회적 고립, 우울병, 치매로 이어지기 쉽다. 청력이 떨어지면 뇌에 주는 자극도 줄어든다. 이 문제는 수술이나 보청기 등 해결책이 많은 편이니 반드시 손을 써야 한다. 역학조사에서 하루 6.5∼7시간 자는 사람이 치매가 되는 확률이 가장 낮았다. 6시간 이하, 혹은 8시간 이상 수면을 취하는 층에서 치매는 두 배로 늘었다. 수면과 관련해 유의할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하루 6.5∼7시간 수면을 취한다 △낮의 각성과 밤의 수면, 리듬을 조절하자 △침구나 공기조절 등의 환경을 만든다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 △필요하다면 의사 처방에 따른 약 복용도 검토한다 △취침 전 음주는 수면의 질을 떨어뜨린다 △수면무호흡증은 반드시 필요한 처치를 할 것. 흡연은 담배에 포함된 유해물질이 혈관을 손상시키고 생활습관병을 악화시키는 간접적인 피해를 주는 반면, 알코올은 직접 영향을 준다. 여러 연구에서 술은 신경독(毒)임이 밝혀져 있다. 음주로 인한 건강 피해는 1차로 신경세포, 2차로는 혈관에 찾아온다. 알코올은 정신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 대사를 저하시킨다. 이 경우 기억계에도 장애를 준다는 동물실험 결과가 나와 있다.○고스톱은 치매 예방에 도움을 준다 (12) 유산소운동 주 3회, 30분 이상(13) 운동하면서 머리도 쓰면 일석이조(14) 뇌에 특효약 같은 음식은 없다(15) 건강기능식품에는 의존하지 않는다 (16) 사회적 고립은 뇌 건강의 적(17)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게임을 즐겨라(18) 뇌 건강에는 ‘의욕’이 중요 고령자의 운동은 근육이나 관절의 폐용성 퇴화(사용하지 않아 퇴화되는 것)를 방지하는 것이 최우선 목적이다. 호흡하면서 천천히 하는 유산소 운동이 권장된다. 산책이라면 빠르게 보폭을 넓혀 땀이 배어나올 정도로 몸 전체에 부하를 걸어주는 게 효과적이다. 운동하면서 동시에 머리를 쓰면 뇌의 각기 다른 장소를 동시에 움직이니 뇌 건강에 좋다. 예컨대 실내에서 운동하면서 암산을 하거나, 조깅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식이다. 사회적 고립은 몸과 마음에 폐용성 퇴화를 일으켜 고독감이 커지는 악순환을 낳는다. 우울증도 사회적 고립과 관련되는데, 스트레스로 인한 뇌 해마의 위축, 기분에 관여되는 신경전달물질인 노로아드레날린이나 세로토닌 저하에 의한다고 여겨진다. 우울증이 있으면 역학적으로는 1.7배 치매에 걸리기 쉽다. 청력 저하와 사회적 고립, 우울증은 서로 영향을 주며 뇌 노화를 진척시킨다. 트럼프, 바둑, 장기처럼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게임이 뇌 노화방지에 효과적이다. 즉 △현실세계에서 타인과 함께하는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되고 △단순 반복이 아니며 △즐길 수 있는 게임들은 전두엽을 많이 쓰게 하고 이기고 싶다는 의욕도 낳는다. 반면 ‘뇌 트레이닝’을 내세운 컴퓨터 게임이나 단어 퍼즐 등은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단순 반복 작업은 뇌의 한정된 부분만 쓰게 하고 충분한 자극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뇌에는 의욕과 감정, 지적 활동의 기능이 모여 있는데 의욕은 뇌 전두엽, 감정은 전두연합야, 지적 활동은 해마가 자리한 측두엽과 두정엽이 담당한다. 의욕이 움직이면 감정과 지능도 일하게 된다. 몸에 중요한 것이 혈관이라면 뇌에 소중한 것은 의욕이다. 몸과 혈관이 건강하고 의욕이 가득하면 감정과 지능이 작동해 뇌도 건강해진다.○20년 전부터 치매를 잡아내는 검사알츠하이머병의 주원인으로 꼽히는 아밀로이드β는 발병 20년 전부터 뇌에 쌓이는데, 양전자방출단층촬영(PET)으로 찾아낼 수 있다. 한국도 일본도 치매 환자 수는 65세부터 5년 단위로 배로 늘어난다. 조기 발견과 적절한 조치를 통해 각 개인의 발병을 5년씩 늦출 수 있다면 단순계산으로는 그 연령층의 환자 수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아라이 박사는 2019년부터 민간 클리닉에서 회원제 치매 예방클럽을 운영 중인데, 매년 회원들의 뇌 PET 검사와 생활습관병 체크 등 종합검진을 통해 치매를 예방 관리한다. 현재는 비용이 비싸지만 이런 검진에 의료보험을 적용시키는 게 목표라고 한다. (※보다 상세한 내용은 25일 디지털판 100세 카페에서 확인하세요.)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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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日 전통술-꽃꽂이 등 체험 풍성… 지속적 문화교류가 힘”

    한일 최대의 민간 문화교류행사인 ‘제 18회 한일축제한마당’이 25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3년 만에 대면행사로 열린다. 주제는 ‘다시 만나는 기쁨’. 지난 2년간은 코로나19 상황 탓에 일반인 입장 없이 유튜브로만 중계됐다. 한일축제한마당은 2005년 한일 국교 정상화 40주년을 기념한 ‘한일우정의 해’에 서울에서 시작된 행사다. 2009년부터 도쿄에서도 열리면서 매년 수만 명이 참여하는 한일 문화 교류의 장으로 자리매김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인 2015년에는 서울에서만 9만 명이 참여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2005년 첫 행사 당시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 부원장으로서 준비에 참여했던 추조 가즈오(中條一夫) 공보문화원장은 “2년 전 부임한 뒤 온라인 행사만 해왔는데, 이번에 ‘다시 만나는 기쁨’을 제대로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축제에서는 실무를 담당하는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올해 행사는 입장자들의 ‘체험’에 치중했습니다. 특히 일본 다도와 꽃꽂이 체험 부스는 우라센케(裏千家)와 오하라류(小原流) 등 일본 전통문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진행합니다. 이 두 행사는 입장자 수에 제한이 있어 이미 예약접수를 시작했습니다. 또 행사장에서 양국의 전통의상과 놀이문화를 체험하거나 지방자체단체나 기업 홍보 부스를 둘러볼 수도 있습니다. 양국의 전통무용과 악기, 아이돌그룹 공연 등 다채로운 무대공연도 볼거리죠.” 그는 ‘국제 사케 소믈리에’ 자격증 보유자로 한국과 일본의 전통주를 비교 체험하는 부스에서 한국 전통주 전문가와 토크쇼에 출연할 예정이다. 단순히 시음하고 즐기는 이벤트가 아니라 양국 문화의 유사성과 독자성을 체험하는 기회로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외교관으로서 술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에 대해 “벨기에에 주재할 때 와인에 밝은 유럽 분으로부터 일본 술에 대해 전문적인 질문을 받는 일이 많았다”며 “자기나라 술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 있어야겠다고 생각해 소믈리에 자격을 땄다”고 설명한다. 정작 본인의 주량은 맥주 1병, 사케 1~2잔 정도인데, 조금만 마실 수 있기에 술의 맛과 향 등에 더 깊이 천착하게 된다고 한다. 한일축제한마당이 지난 2년간 온라인 행사를 고수해온 것에 대해 그는 ‘계속(지속)은 힘이 된다’는 말로 의미를 부여했다. “(그것이 공부건 행사건) 무언가를 ‘계속’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계속은 성장을 낳는 원동력이 되지요. 온라인 행사는 미지의 작업이었지만, 양국 관계자가 코로나 상황에서도 계속을 모색하는 자세로 도전했고, 그 덕에 2005년 시작된 축제의 바통을 올해까지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한일관계가 어려울수록 민간교류와 문화교류의 힘에 거는 기대는 커지고 있다. “한일관계를 자동차에 비유하면 역사나 정치 등 현안이 브레이크, 교류가 엑셀레이터 역할을 합니다. 코로나 상황에서 국민간 교류가 끊어지다 보니 브레이크는 잘 듣는데 엑셀이 깨진 자동차가 돼 버린 감이 있었습니다. 코로나 상황을 극복하고 엑셀을 다시 밟는 첫걸음으로 이번 축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문화교류의 핵심은 체험을 공유하고 그 즐거움과 풍요로움의 기억을 미래를 향해 쌓아나가는 것”이라며 “한일국교정상화 60주년, 축제 시작 20주년을 맞는 2025년에는 이 축제가 지금 이상으로 한일 양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이벤트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행사는 민간인으로 구성된 ‘한일축제한마당 2022 실행위원회(위원장·손경식 CJ그룹 회장)’가 주최하고 외교부, 문화체육관광부, 해외문화홍보원, 서울시, 주한일본대사관, 일본 관광청, 서울재팬클럽 등이 후원한다. 입장 무료. 자세한 프로그램은 홈페이지 참조. 글·사진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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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네아저씨의 고즈넉한 삶…모르고 죽었다면 억울할 뻔했어요”[서영아의 100세 카페]

    한국의 1세대 정치평론가로 꼽히는 유창선 박사(62)는 요즘 ‘두 번째 삶’이란 표현을 많이 쓴다. 3년 전 느닷없이 찾아온 뇌종양 수술로 죽음의 문턱을 밟았고, 8개월 사투 끝에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뒤 삶의 모든 게 바뀌었다. 지난달 29일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나이 예순, 걸음마부터 다시 시작하다2019년 뇌 자기공명영상(MRI) 검사에서 연수(숨골) 부위에 꽤 오래된 종양이 발견됐다. 연수는 생명유지에 중요한 반사중추와 뇌의 신경세포들이 몰린 부위다. 의사는 종양의 위치가 나쁘다며 ‘(종양 자체는) 양성이지만 악성’이라 했다. 그냥 둔다면 어느날 길거리에서 돌연사할 가능성이 크지만, 워낙 어려운 부위라 수술이 가능한지조차 확답하지 못했다. 결국 10시간에 걸친 대수술로 종양은 깨끗이 제거됐지만 워낙 중요한 신경들을 다 건드린 상태. 엄청난 후유증이 남았다. 혈압조절이 안 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기만 해도 의식을 잃었고 혀가 마비돼 말을 할 수 없었다. 식도 괄약근이 열리지 않아 8개월 동안 튜브로 경관식을 했다. 삼키지 못한 타액이 폐로 들어가 폐렴만 세 번 앓았다. 그의 얘기를 듣다보면 사람이 자기 발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악전고투 끝에 조금씩 회복돼 스스로 걸어서 화장실에 가고 세면대에서 세수를 할 수 있게 된 날, 인간으로서 당당함을 느꼈다. 걷는 것, 먹는 것, 말하는 것. 무엇하나 당연하게 되는 건 없었다. 그게 가능하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감사한 일인지.” 입원할 때는 열흘 정도면 퇴원할 줄 알았지만, 8개월(대학병원 2개월, 재활병원 6개월) 뒤에야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걷는 것부터 다시 시작하는 삶, 그에게 예순살은 그렇게 찾아왔다. ● 행복하고 싶은 본성에 정직하게 살자그는 ‘살아있음을 확인하려고’ 수술 이틀 뒤부터 중환자실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에 글을 썼다. 두 달 뒤에는 시사주간지에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써낸 책이 퇴원 전 세상에 나온 ‘나를 위해 살기로 했다(사우)’이다. 최근에는 ‘나이 든다는 것은 생각만큼 슬프지 않다’는 부제가 붙은 인생에세이 ‘나를 찾는 시간’(새빛)을 펴냈다. -‘나를 찾는다’는 표현의 의미는. “‘행복하고 싶은’ 내 본성 앞에 정직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겁니다. 수술 뒤 만신창이 몸을 안고 투병과 재활의 시간을 거쳤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오히려 긍정의 정서가 지배하더군요. 가장 힘이 됐던 것은 나를 살리려고 애쓰던 가족이었습니다. 최후에 돌아갈 곳은 가족이구나. 내 인생 마지막은 가족과 함께 사랑하며 늙어가고 가족 안에서 죽어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까지 남은 시간 어떻게 좋은 사람으로 나이 들어갈 것인지 모색해야겠다고 말이죠.” -그간 자신의 행복은 뒷전에 두고 살아온 건가요. “운동권 문화 중에 그런 게 있었어요. 세상이 불행해 보이는데 나만 행복해선 안 될 것 같은 중압감을 젊은 시절부터 안고 살았지요. 나이 들어서도 나는 솔직히 행복한데 그렇다는 표정을 지어서는 안 될 것 같은 허위의식이랄까, 엄숙주의가 있었죠. 하지만 이제는 페이스북에도 행복하다는 표시를 합니다. ‘오늘 달리니까 너무 좋다’. ‘한강 풍경이 너무 예쁘다’…. 그게 가장 자연스럽고 내 본성에 정직하게 사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남을 행복하게 해줄 수도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상의 중압감을 내려놓고 자신으로 돌아가니 자연스레 ‘동네아저씨’로 살아가게 됐다. 글쓰고 운동하며 가족과 교감하는 생활. 이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기쁘고 소중하다고 한다. ●진영이 갈린 세상에서 자유로운 외톨이의 길 선택 대학시절에는 학보사 기자였고 운동권 서적 출판으로 몇 개월 구치소 생활도 했다. 한때 현실정치에 발을 담그기도 했지만 스스로 정치인이 될 마음이 도무지 생기지 않았다. 그 즈음 우연히 방송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정치평론을 직업으로 하는 길로 나섰다. 제대로 평론을 하기 위해 모교인 연세대로 돌아가 박사학위를 받은 2001년, 마침 ‘노풍(盧風)’을 타고 시사프로그램 바람이 불었다. 이때부터 그는 정치평론가로서 전성기를 맞았는데, 종편이 없던 시절인데도 공중파에 하루 5~6개씩 출연했다고 한다. 다만 그는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 대해서도 비판할 것은 비판하면서 ‘노빠’들로부터 공격을 받아야 했다. 방송은 외풍에 약했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렸다. 이명박 정권에서는 고정출연 프로그램들에서 줄줄이 하차 통보를 받았다. 방송이 출마자들의 대기소 같이 변해가는 것도 거북함을 넘어 모욕감을 안겨줬다. 권력이 5년을 못가는 세상에서 갈수록 명확히 진영이 갈라지자 그는 ‘내 힘으로 나를 지켜야 한다’며 스스로 고독의 길을 택했다. 어느 한 진영에 속하는 순간, 자기 진영에 대해 성찰할 수 없게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박근혜 정부 때는 3년간 동네 독서실에 들어가 인문학 공부를 하고 인문학 서적(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새빛)을 써내기도 했다. ●방송 대신 글로 쓰는 정치평론으로 전환-건강은 어떠십니까. “이제 일상생활은 대체로 정상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조심조심 하면서죠. 혀의 마비가 아직 조금 남았고 근육통도 심합니다. 식도를 보톡스 치료로 열고 삼키는 훈련을 해 먹을 수도 있게 됐어요. 먹고 싶은 것을 먹는 것, 그게 인간에게 정말 중요하다는 걸 절감합니다. 다만 전 아직 여러 불편이 남아있는데 수술해준 병원에서는 상대도 해주지 않아요(웃음). 이 정도로 회복된 것도 기적이라고들 하니까요. 아직 회복되지 않은 후유증은 제가 안고 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는 여전히 ‘정치평론가’다. 방송은 사실상 은퇴했지만 신문 잡지 등 8개 매체에 고정칼럼을 쓴다. 매일아침 늦어도 9시 이전에는 집 근처 카페에 착석해 공부와 글쓰기 작업을 한다고 한다. 페이스북을 통한 소통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그는 인터뷰 중 “끝난 줄 알았는데 끝난 게 아니었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예컨대 먹고사는 문제도 궁금했는데, 원고료 수입이 꽤 된다고 자랑한다. “제가 병원에 있을 때 큰아이가 취직했는데, 퇴원하면 매달 용돈을 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한 1년 주더니 슬그머니 그만두더군요. ‘어? 나름 버네?’라고 생각했는지…. 다행히도 아내가 들어놓은 연금저축이 있었고 곧 국민연금도 타게 됩니다. 살림 규모를 많이 줄이고 수입 지출 열심히 계산하면서 삽니다. 둘째딸도 최근 취직이 돼 두 아이 모두 앞가림은 하게 됐으니, 이제 저희 부부만 잘 살면 됩니다.” 그는 이번에 노후 경제적 대비의 중요성을 절감했다고 말한다. “연금 하나 더 있고 없고가 큰 차이를 낳더군요. 사실 젊어서 월 10~20만원은 있으나 없으나 별 차이 없잖아요. 술값 쓰고 놀러가는 정도죠. 그런데 그게 차곡차곡 쌓이면 나이 들어 연금으로 돌아오는데, 연금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노후 삶의 질을 좌우합니다. 느닷없이 아파보니 보험에 대한 생각도 많이 달라졌어요. 제가 수술 1년 전쯤 실손보험 가입 상담을 했는데, 제 건강을 과신하며 안 들었거든요.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살면서 나에게 벌어지지 않을 것 같은 일에 대해서도 겸허하게 대비하는 자세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상상도 못해본, 석양 속 한강다리를 달리는 기분3개월 전 우연히 트레일 런(달리기) 모임에 참석하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제가 몸을 치유하려고 엄청나게 걸었어요. 그걸 아는 지인이 같이 걷자며 모임에 불러줬는데, 10여 명이 처음엔 걷다가 ‘이제 뜁시다’하고 달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저로서는 혈압이 불규칙해 걷는 것도 조심하던 때거든요. 그런데 그분들 따라 조금 달려보니 기분이 너무 좋더라구요. 제가 달린 건 500m 정도지만 20대에서 60대까지, 그분들의 에너지가 제게 전해져오는 듯했어요. 그 뒤로 혼자서도 그 기분을 느끼기 위해 많이 달렸습니다. 사람 몸은 신기해서 뭐든 꾸준히 하면 조금씩 늡니다. 이제는 한번에 5km 정도는 달릴 수 있어요.” 요즘은 ‘달리기는 장비빨’이라며 여느 아마추어 러너들처럼 운동복이나 장비 쇼핑에 푹 빠져 있다고 한다. “아침에 눈뜨면 늘 뉴스검색부터 했는데 요즘은 러닝복 쇼핑코너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이 좋아요. 석양이 떨어지는 한강다리를 달리며 건너는 기분이란…. 이걸 모르고 죽었다면 억울했을 겁니다.” ●“나이 들어보니 이기고 지는 게 별 차이 없더라”-갈수록 진영 대결의 세상이 되어갑니다. 분명 같은 나라에서 사는데 서로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많은 광경들을 겪고 나니 세상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게 되더군요. ‘내 젊은 시절 옳고 그름을 따지고 혁명을 논했지만 나이 들어보니 이기고 지는 게 큰 차이 없더라’는 도로시 파커의 시 ‘베테랑’의 구절이 딱 제 마음입니다. 나이 들어서까지 앞줄에 서서 매달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나의 행복, 나의 평화를 추구하는 삶을 사는 게 맞겠다는 결론에 이른 거죠,” 6월에는 현 정부에서 자리 제안을 받았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인생에서 가장 고즈넉하게 동네아저씨로 살아가는 시간을 흔들고 싶지 않았다. 정부 일을 한다는 것은 여기저기 쓰는 글에 구애받거나 비판할 자유를 잃는다는 얘기이기도 하다.●‘나이 든다는 것은 생각만큼 슬프지 않다’-수술이 없었다면 박사님의 60대는 어떻게 흘러갔을까요? “여전히 방송 출연하고 글 쓰고 살았겠죠. 이 고즈넉한 세계의 느낌을 끝내 몰랐을 수도 있고요. 투병 이후 다른 인생을 맛본 지금, 그런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옵니다. 투병 이후 몸은 불편해졌는데 삶의 질은 오히려 좋아졌어요. 이건 내면의 정서인데, 설렘같은 게 생겼습니다. 하고 싶은 것 하며 수시로 ‘참, 좋다’는 그런 느낌이 옵니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충만함이 문득문득 수시로 와요. ‘와, 참 좋구나’하고. 가령 3-4년 전만 해도 내가 달리기하는 모습은 상상도 못했죠. 내가 이러고 살고 있을 줄이야.” -책 표지에 붙은 ‘나이 든다는 것은 생각만큼 슬프지 않다’의 뜻은. “전에는 60세를 넘긴 저에 대해 생각하기도 싫어했던 것같아요. 그냥 나이 60을 넘으면 인생을 정리하는 시간이라 생각했는데, 60이 넘어서도 앞날에 대한 기대 꿈 설렘을 가질 수 있다는 걸 체감하고 있어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더군요.” -60세 전후의 세대들은 고민도 생각도 많습니다. 동 세대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진부한 얘기 같기도 한데, 제2의 인생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흔히 은퇴하고 뒤로 물러서는 시기라고 하는데, 그 동안 해오던 일에서 은퇴한 것에 불과하죠. 내 인생은 그 순간부터 새로 시작됩니다. 은퇴 후 인생을 더 주도적으로 설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주 소소한 것들이라도 신명나게 기쁨을 맛보며 할 수 있는 뭔가를 찾아가는 것. 그게 필요한 나이가 우리 나이인 듯합니다. 그게 있냐 없냐에 따라 나이와 함께 늙어가느냐, 숫자는 늘어도 여전히 젊게 사느냐가 갈리지 않을까요.” ● 최후에 돌아갈 곳은 가족인터뷰하며 느낀 것은 그의 가장 든든한 원군이자 수호천사는 가족, 그 중에서도 부인이라는 점이다. 고비고비마다 부인이 등장해 현명하고 올바른 길로 가도록 도왔다. 문병 왔던 친구들조차 ‘못 살 것’이라고 봤던 남편을 꼬박 8개월간 보살피며 살려냈고 퇴원 뒤에는 제주도에서 함께 한달살기를 하며 좋은 길을 걷는 즐거움을 전수해줬다. 이런 의견에 유 박사는 흔쾌히 말한다. “남자들은 혼자 놔두면 망했을 사람이 부인 덕에 잘사는 경우가 많아요. 저희 아이들도 ‘아빠는 엄마 잘 만나서 평안하게 사는 줄 알라’고 하죠.” 2시간 가까운 인터뷰가 끝난 뒤 ‘집에는 어떻게 돌아가시느냐’고 묻자 부인이 근처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혹시 모르니 대기 중이라는 것. 역시나 이 부부, 2인3각이었구나 싶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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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뇌종양 수술후 나를 위한 삶 시작… “동네아저씨로 사는 게 너무 행복” [서영아의 100세 카페]

    한국의 1세대 정치평론가로 꼽히는 유창선 박사(62)는 요즘 ‘두 번째 삶’이란 표현을 많이 쓴다. 3년 전 느닷없이 찾아온 뇌종양 수술로 죽음의 문턱을 밟았고, 8개월 사투 끝에 생환했다. 그 뒤 삶의 모든 게 바뀌었다. 지난달 29일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나이 예순, 걸음마부터 다시 시작하다2019년 뇌 자기공명영상(MRI) 검사에서 연수(숨골) 부위에 꽤 오래된 종양이 발견됐다. 연수는 생명 유지에 중요한 반사중추와 뇌 신경세포들이 몰린 부위다. 의사는 종양의 위치가 나쁘다며 ‘(종양 자체는) 양성이지만 악성’이라 했다. 10시간에 걸친 대수술로 종양은 깨끗이 제거됐지만 엄청난 후유증이 남았다. 혈압 조절이 안 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기만 해도 의식을 잃었고 혀가 마비돼 말을 할 수 없었다. 식도 괄약근이 열리지 않아 8개월 동안 튜브로 경관식을 했다. 그의 얘기를 듣다 보면 자기 발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악전고투 끝에 조금씩 회복돼 걸어서 화장실에 가고 세면대에서 세수를 할 수 있게 된 날, 인간으로서 당당함을 느꼈다. 걷는 것, 먹는 것, 말하는 것, 무엇 하나 당연하게 되는 건 없었다. 그게 가능하다는 게 얼마나 대단하고 감사한 일인지.” 입원할 때는 열흘 정도면 퇴원할 줄 알았지만, 8개월(대학병원 2개월, 재활병원 6개월) 뒤에야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걷는 것부터 다시 시작하는 삶, 그에게 예순 살은 그렇게 찾아왔다. 그는 ‘살아있음을 확인하려고’ 수술 이틀 뒤부터 중환자실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에 글을 썼다. 두 달 뒤에는 시사주간지에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써낸 책이 퇴원 전 세상에 나온 ‘나를 위해 살기로 했다’(사우)이다. 최근에는 ‘나이 든다는 것은 생각만큼 슬프지 않다’는 부제가 붙은 에세이집 ‘나를 찾는 시간’(새빛·사진)을 펴냈다. ―‘나를 찾는다’는 표현의 의미는…. “‘행복하고 싶은’ 내 본성 앞에 정직한 삶을 살겠다는 겁니다. 수술 뒤 만신창이 몸을 안고 투병과 재활의 시간을 거쳤습니다. 이렇게 되니 오히려 긍정의 정서가 지배하더군요. 가장 힘이 됐던 것은 나를 살리려고 애쓰던 가족이었습니다. 최후에 돌아갈 곳은 가족이구나. 인생 마지막에는 가족과 함께 사랑하며 늙어가고 가족 안에서 죽어가겠구나. 그때까지 남은 시간 어떻게 좋은 사람으로 나이 들어갈 것인지 모색해야겠다고.” ―그간 행복을 뒷전에 두고 살아온 건가요. “세상이 불행해 보이는데 나만 행복해선 안 될 것 같은 중압감을 젊은 시절부터 안고 살았죠. 나이 들어서도 나는 솔직히 행복한데 그런 표정을 지어서는 안 될 것 같은 허위의식이랄까, 엄숙주의가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페이스북에도 행복하다는 표시를 합니다. ‘오늘 달리니까 너무 좋다’ ‘한강 풍경이 너무 예쁘다’…. 그게 가장 자연스럽고 내 본성에 정직하게 사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중압감을 내려놓고 자신으로 돌아가니 자연스레 ‘동네아저씨’로 살아가게 됐다. 글 쓰고 운동하며 가족과 교감하는 생활. 이것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기쁘고 소중하다고 한다.○진영이 갈린 세상서 자유로운 외톨이의 길 선택 대학 시절 학보사 기자였고 운동권 서적 출판으로 몇 개월 구치소 생활도 했다. 현실 정치에 발을 담그기도 했지만 스스로 정치인이 될 마음이 도무지 생기지 않았다. 그즈음 우연히 방송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정치평론을 직업으로 하는 길로 나섰다. 마침 ‘노풍(盧風)’을 타고 시사프로그램 바람이 불면서 정치평론가로서 전성기를 맞았다. 종편도 없던 시절, 공중파에만 하루 5∼6개씩 출연했다. 다만 그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도 비판할 것은 비판하면서 ‘노빠’들로부터 공격을 받아야 했다. 방송은 외풍에 약해 정권이 바뀌자 고정출연 프로그램에서 줄줄이 하차 통보를 받았다. 방송이 출마자들의 대기소같이 변해가는 것도 거북함을 넘어 모욕감을 안겨줬다. 갈수록 진영이 갈라지자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고독의 길을 택했다. 어느 한 진영에 속하는 순간, 자기 진영에 대해 성찰하는 자유를 잃는 게 두려웠다. 박근혜 정부 때는 3년 동안 동네 독서실에 들어가 인문학 공부를 하고 인문학 책을 써내기도 했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이제 일상생활은 조심조심 정상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혀의 마비가 조금 남았고 근육통도 심합니다. 식도를 보톡스 치료로 열고 삼키는 훈련을 해 먹을 수도 있게 됐어요. 이 정도로 회복된 것도 기적이라고들 합니다. 남은 후유증은 제가 안고 살아가야죠.” 그는 여전히 ‘정치평론가’다. 방송은 사실상 은퇴했지만 신문 잡지 등 8개 매체에 고정칼럼을 쓴다. 매일 늦어도 오전 9시 이전에는 집 근처 카페에 착석해 공부와 글쓰기 작업을 한다. 페이스북을 통한 소통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그는 인터뷰 중 “끝난 줄 알았는데 끝난 게 아니었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예컨대 생계 문제도 궁금했는데, 원고료 수입이 꽤 된다고 자랑한다. “제가 병원에 있을 때 큰아이가 취직했는데 퇴원하면 매달 용돈을 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한 1년 주더니 슬그머니 그만 뒀네요. ‘어? 나름 버네?’라고 생각했는지…. 다행히도 아내가 들어놓은 연금저축이 있었고 곧 국민연금도 타게 됩니다. 살림 규모를 많이 줄이고 수입 지출 열심히 계산하면서 살고 있죠. 둘째딸도 최근 취직이 돼 두 아이 모두 앞가림은 하게 됐으니, 저희 부부만 잘 살면 됩니다.” 3개월 전 우연히 트레일런(달리기) 모임에 참석하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제가 몸을 치유하려고 엄청나게 걸었어요. 그걸 아는 지인이 같이 걷자며 불러줬는데, 10여 명이 처음엔 걷다가 ‘이제 뜁시다’ 하고 달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혈압이 불규칙해 걷는 것도 조심하던 때거든요. 그런데 그분들 따라 조금 달려 보니 기분이 너무 좋더라고요. 제가 달린 건 500m 정도지만 그분들의 에너지가 전해져 오는 듯했어요. 그 뒤로 혼자서도 그 기분을 느끼기 위해 많이 달렸습니다. 사람 몸은 신기해서 뭐든 꾸준히 하면 조금씩 늡니다. 이제는 한 번에 5km 정도는 달릴 수 있어요.” ‘달리기는 장비빨’이라며 운동복이나 장비 쇼핑에도 푹 빠져 있다고 한다. “아침에 눈뜨면 늘 뉴스 검색부터 했는데 요즘은 러닝복 쇼핑코너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이 좋아요. 석양이 떨어지는 한강다리를 달리며 건너는 기분이란…. 이걸 모르고 죽었다면 억울했을 겁니다.”○후유증 남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6월 현 정부에서 자리 제안을 받았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인생에서 가장 고즈넉하게 동네아저씨로 살아가는 시간을 흔들고 싶지 않았다. 정부 일을 한다면 여기저기 쓰는 글에 구애받거나 비판할 자유를 잃는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수술이 없었다면 박사님의 60대는 어떻게 흘러갔을까요. “여전히 방송 출연하고 글 쓰고 살았겠죠. 이 고즈넉한 세계의 느낌을 끝내 몰랐을 수도 있고요. 투병 이후 다른 인생을 맛본 지금, 그런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옵니다. 몸은 불편해졌지만 삶의 질은 오히려 좋아졌어요. 하고 싶은 것 하며 수시로 ‘참, 좋다’는 느낌이 옵니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충만함이 문득문득 다가와요. ‘와, 참 좋구나’ 하고. 가령 3∼4년 전만 해도 내가 달리기하는 모습은 상상도 못했죠. 내가 이러고 살고 있을 줄이야.” 그는 9월과 10월 각각 열리는 마라톤대회 5km 단축코스에 도전한다. “이 정도도 감사한 일”이라면서도 내년에는 10km 코스에 나설 것을 꿈꾼다. ―책 표지의 ‘나이 든다는 것은 생각만큼 슬프지 않다’는 뜻은…. “평소 나이 60을 넘으면 인생을 정리하는 시간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요즘 앞날에 대한 기대, 꿈, 설렘을 가질 수 있다는 걸 체감하고 있어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거죠.”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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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후 최대 리스크, 황혼이혼[서영아의 100세 카페]

    지난 회 100세 카페에서 가족과 관련된 노후 복병으로 자식 리스크와 간병 리스크를 든 바 있다. 그런데 더 큰 위협요인으로 황혼이혼을 꼽는 사람이 적지 않다. 황혼이혼은 특히 남성에게 더 불리하다거나, 방심하고 있다가 ‘당하면’ 치명적이라는 지적도 들린다. 이 위기, 슬기롭게 피해갈 방법은 없을까.● 지난해 이혼 부부 10쌍 중 근 4쌍이 황혼이혼자녀를 모두 성장시킨 뒤 오랜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부부가 늘고 있다. 이른바 황혼이혼이다. 명확한 법적 정의는 없지만 한국의 대법원과 통계청은 결혼기간 20년 이상 부부의 이혼을 황혼이혼으로 분류한다. 1990년만 해도 전체 이혼건수의 5.1%에 불과했던 황혼이혼은 꾸준히 늘어나 지난해에는 38.7%를 차지했다(표 참조). 지난해 이혼한 부부 10쌍 중 거의 4쌍이 황혼이혼이었다는 얘기다.오랜 세월 해로한 부부가 갈라서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시대 변화도 큰 영향을 끼쳤다. 여성의 경제적 지위가 높아졌고 재산분할에서 여성 몫이 늘어나는 추세다. 이혼을 자연스러운 개인의 선택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도 한몫했다. 경제력을 가진 베이비붐 세대는 자신이 아직 젊다고 느끼는 데다 개인의 자유와 삶의 질을 중시한다. 여기에 고령화로 기대수명이 늘다 보니 “앞으로 30년을 더 참으며 살 수 없다”며 독립을 선언하는 것. 자산가들 사이에서는 다주택 중과세를 피해 결혼생활을 정리하는 노부부가 부쩍 늘었다는 얘기도 들린다.●“소중한 내 인생, 노후 30년이라도 자유롭게 살겠다”황혼이혼을 원하는 쪽은 아무래도 여성이 많다. ‘황혼이혼’이란 용어는 1990년대 중반 일본에서 유래했다. 남편이 은퇴하고 퇴직금을 받은 뒤 부인이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가 급증해 사회문제가 됐다.“남편이 집에 있다 생각하면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요”. 이보다 앞서 1991년 일본 정신신체의학 학회지에 은퇴남편증후군(RHS·Retired Husband Syndrome)이란 용어가 등장했다. 일밖에 모르던 가부장적 남편이 은퇴 후 집에만 머물자 스트레스를 받은 늙은 아내들이 각종 질환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증세는 심한 우울증, 불안증, 불면증, 위염, 두드러기 등 다양했다. 일종의 ‘화병’이라 할 수 있는데, 전문가들은 60%의 아내들이 RHS에 시달린다고 밝혔다.이런 은퇴 남편을 일컬어 한국의 ‘삼식이(세끼 모두 집에서 먹는 남편)’처럼 일본에서는 ‘젖은 낙엽족(낙엽이 비에 젖어 잘 쓸어지지 않는 상태를 빗댄 말. 귀찮게 방해만 되는 남편을 일컬음)’, ‘나도 족(私も族·아내가 가는 곳 어디든 “나도 가겠다”며 따라나서는 남편)’ 등의 유행어가 생겨났다.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한 별다른 준비 없이 은퇴해 거실 소파를 장악하고 TV나 신문만 보는 남편들은 ‘대형쓰레기’라 불리기도 하고 “모름지기 가장(家長)은 건강해서 외출한 상태가 최고”라는 말이 회자됐다.여기 더해 남편이 왕년의 ‘상사’ 기질을 발휘해 집안일에 일일이 간섭하며 잔소리를 시작하면 아내들도 폭발해 앙갚음하듯이 이혼장을 내밀게 된다. 인간의 노화는 정신적 영역에서도 나타나는 법. 나이 들수록 이해도가 떨어지고 고집이 강해지며 잔소리가 심해진다.●중년 남성들이 ‘나는 자연인’에 꽂히는 이유 반대로 최근 한국에서는 남편이 먼저 황혼이혼을 요구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한다. 늦게나마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거나 아내의 잔소리나 생활비 등 경제적 요구가 싫어 자유를 택하겠다는 남편들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남성들 사이에 ‘나는 자연인’류의 프로그램이 인기인 이유도 집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혼전문변호사들은 이 경우 새로운 파트너가 생긴 케이스가 적지 않다는 해석을 덧붙인다.조혜정 이혼전문 변호사는 수많은 상담 속에서 황혼이혼하는 부부의 공통점을 다음 8가지로 추려냈다. △정서적 이혼상태가 상당기간 이어졌다(한집에서 살지만 대화없이 몇년) △돈 때문에 심하게 싸운 경험이 있다 △돈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내 돈을 쓰는 가족을 가차없이 공격한다) △주로 생활비를 벌던 사람이 은퇴했다 △결혼해서 생긴 가족보다 원 가족(남성은 본가, 여성은 친정)과 더 가깝다 △집안이 갈라져 있다(자녀가 부모 중 한쪽 편을 든다) △한쪽이 지배하고 복종을 강요한다 △외도 폭언 폭행 중 한가지 이상이 나타난다 등이다. 조 변호사는 이중 5가지 이상 해당된다면 이혼상담을 받아볼 필요가 있지만, 2~3가지 정도라면 남들보다 나은 상태니까 문제를 개선할 길을 찾아보라고 권한다.● 황혼이혼에서는 재산분할이 큰 이슈젊은 부부의 이혼에서 위자료나 양육권, 양육비가 쟁점이라면 황혼이혼에서는 재산분할이 가장 큰 이슈가 된다. 분할 대상은 원칙적으로 혼인 중 부부가 함께 협력해서 모은 재산이다. 여기에는 퇴직금이나 연금 등 장래 수입도 포함된다.재산분할은 결혼기간이 길수록 부부 양쪽에 비슷하게 배분되기 쉽다. 예컨대 혼인 전부터 배우자가 소유하고 있었거나 상속 또는 증여받은 ‘특유재산’은 원칙적으로 분할대상에서 제외되지만, 혼인기간이 길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직업이나 경제활동이 없던 주부라도 그 재산의 유지 및 증식에 기여한 점을 인정받을 수 있다. 평생 외벌이로 혼자 벌어 자산을 형성했고 자신의 명의로 연금을 부었다 해도 그 기간 배우자의 내조가 있었다면 절반은 배우자의 몫이 된다. 법리가 이렇다보니, 시중에는 노후에 이혼당하기 싫은 쪽이 배우자에게 재산을 전부 넘겨놓으라는 ‘꿀팁’도 돌아다닌다. 집도 땅도 예금도 모두 배우자 이름으로 돼 있다면 배우자가 이혼을 요구하고 싶어도 자기 명의의 재산을 분할해줘야 할 판이니 이혼 방지효과가 있다는 얘기다. 황혼이혼에서는 합의이혼이 늘어나는 추세지만, 일단 소송으로 가게 되면 재산분할의 대상, 기여도에 대한 입증이 핵심 쟁점이 된다. 분할 결과에 따라 노후의 삶의 질이 결정되는 만큼, 이혼 소송에서는 피튀기는 ‘쩐의 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대부분 남성에게 더 치명적황혼이혼은 부부 모두에게 많은 스트레스와 상처를 안겨주지만 남성에게 더 치명적이라는 게 일반적인 지적이다.첫째 부부 모두에게 경제적인 타격이 크다. 평생 모은 노후자산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연금도 절반이 될 수 있다. 한 집이 두 집으로, 모든 것을 나누다 보면 낭비도 많다. 황혼이혼을 결심하는 순간 이후 경제적 생활수준은 확 떨어질 수 있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둘째 외로운 노년을 보낼 가능성이 커진다. 평생 열심히 살아왔는데 인생 황혼기에 잃어버린 동반자의 빈자리는 크다. 만약의 일이 생겼을 때 의지할 존재가 없어진다. 시기적으로 퇴직과 겹치다보니 급격한 삶의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고 모든 것에 실패했다는 허무감과 우울감에 휩싸이기 쉽다. 점차 사회활동이 줄고 고립된 생활을 하다보면 종착역은 고독사(死)가 될 수도 있다.셋째 살림 경험이 없는 남성이라면 갑작스런 자취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건강관리에 게을러지거나 삶의 동력을 잃기 쉽고 우울증이나 자살 빈도도 높아진다.이 부분은 특히 남성이 불리한데, 이는 사별 후 남녀의 반응차이를 보면 이해하기 쉽다. 많은 조사에서 남편이 먼저 사망한 부인들은 얼마간의 상실과 우울의 시간을 거치고 나면 건강이 좋아지고 인생만족도가 높아지며 장수했지만 부인을 먼저 떠나보낸 남편들은 건강이 나빠지고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황혼에 마주한 부부, 서로 존중과 배려를결혼도 이혼도 행복해지고자 하는 것이다. 불행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혼은 적극적으로 감행해야 한다. 예컨대 폭력이나 폭언, 외도가 상습적인 경우, 한쪽이 일방적으로 참으며 살아왔지만 개선의 여지가 없는 경우 과감하게 이혼에 나설 필요가 있다. 하지만 개선의 여지가 있다면 많은 리스크를 져야 하는 이혼보다는 현상유지를 위한 노력이 우선이다.고혜정 변호사는 “가장 큰 노후대책은 배우자와의 좋은 관계”라고 강조한다. “아무리 친한 친구가 많아도 내가 병으로 몸져눕게 된다면 곁에서 보살펴줄 사람은 결국 배우자입니다. 하지만 좋은 관계는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지지 않지요. 준비와 노력이 필요합니다.”관계는 누적되는 법이다. ‘노후의 재앙’ 황혼이혼을 피하려면 스스로 변화하고 가족, 특히 배우자와 평소에 돈독한 인간관계를 쌓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일본의 은퇴전문가 오가와 유리가 제시하는 ‘은퇴남편 관리법 15조’(그래픽 참조)는 이 시기 부부 모두에게 참고가 될 듯하다. ● 이혼은 현실-황혼이혼 사전 체크리스트그럼에도 이혼을 고려하는 경우라면 점검해볼 것이 있다. 시중에 도는 황혼이혼 사전 체크리스트를 살펴보자. 아래 질문에 ‘아니오’가 많다면 아직 준비가 덜 된 것이다. 이혼은 현실이다. 감정적으로 하는 이혼은 인생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냉정하고 신중하게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해야 한다. 황혼이혼 사전 체크리스트1. 내가 이혼을 통해 얻으려는 것이 무엇인가2. 이혼 후 살아갈 하루 일상을 구체적으로 그려보았나. 이때 후회 없이 행복할 수 있나3. 이혼 후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나4. 이혼 후 필요한 한달 생활비가 얼마인지 계산해봤나5. 부족할 수 있는 생활비는 어떻게 마련할지 준비돼 있나6. 이혼 후 경제적으로 전보다 못해지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7. 주변에 도움 받을 가족이나 지인이 있나. 특히 자녀들의 이해와 지지를 받고 있나8. 협의이혼을 할지 재판이혼을 할지 판단이 섰나9. 재판이혼을 해야 한다면 승소할 확률에 대해 변호사와 상담해본 적 있나 10. 재판에서 승소하기 위해 상대의 유책 또는 사실관계를 입증할 자료를 가지고 있나11. 실제 받을 수 있는 재산분할과 위자료 액수 범위를 대략이라도 알고 있나12. 배우자 재산상황을 파악하고 있나. 배우자가 임의로 하는 재산처분을 막아 공동재산을 보전할 방안을 알고 있나13. 노령연금을 비롯, 각종 연금에 대한 분할연금 수급권에 대해 확인해봤나14. 이혼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지낼 거처는 준비됐나15. 재판을 위한 변호사 선임비용이 얼마인지 알고 이를 마련할 수 있나16 이혼이 더 나은 삶을 위한 시작임을 확신하고 있나※ 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건강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서영아기자 sya@donga.com}

    • 2022-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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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날 많은데 더 못 참아”… 쪼개진 재산에 마음도 쪼그라들어[서영아의 100세 카페]

    지난 회 100세 카페에서 가족과 관련된 노후 복병으로 자식 리스크와 간병 리스크를 든 바 있다. 이보다 더 큰 위협 요인으로 황혼이혼을 꼽는 사람이 적지 않다. 황혼이혼은 남성에게 더 불리하다. 방심하고 있다가 ‘당하게’ 되면 더 치명적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슬기롭게 피해 갈 방법은 없을까.○지난해 이혼 부부 10쌍 중 4쌍이 황혼이혼자녀를 모두 성장시킨 뒤 오랜 결혼 생활에 마침표를 찍는 부부가 늘고 있다. 이른바 황혼이혼이다. 명확한 법적 정의는 없지만 대법원과 통계청은 결혼 기간 20년 이상 부부의 이혼을 황혼이혼으로 분류한다. 1990년만 해도 전체 이혼 건수의 5.1%에 불과했던 황혼이혼은 꾸준히 늘어 지난해에는 38.7%나 됐다(그래픽 참조). 지난해 이혼한 부부 10쌍 중 4쌍이 황혼이혼이었다는 얘기다. 오랜 세월 해로한 부부가 갈라서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시대 변화도 큰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 여성의 경제적 지위가 높아졌고, 재산 분할에서 여성 몫이 늘어나는 추세다. 이혼을 자연스러운 개인의 선택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도 한몫했다. 경제력을 가진 베이비붐 세대는 자신이 아직 젊다고 느끼는 데다 개인의 자유와 삶의 질을 중시한다. 여기에 고령화로 기대수명이 늘어나다 보니 “앞으로 30년을 더 참으며 살 수 없다”며 독립을 선언한다. 자산가들 사이에서는 다주택 중과세를 피해 결혼 생활을 정리하는 노부부가 부쩍 늘었다는 얘기도 들린다.○ “소중한 내 인생, 노후 30년은 자유롭게 살겠다”황혼이혼이란 용어는 1990년대 일본에서 유래했다. 남편이 퇴직금을 받은 뒤 부인이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가 급증해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1991년 일본 정신신체의학학회지에 은퇴남편증후군(RHS·Retired Husband Syndrome)이란 용어가 등장했다. 일밖에 모르던 가부장적 남편이 은퇴 후 집에만 머물자 스트레스를 받은 늙은 아내들이 각종 질환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증세는 심한 우울증, 불안증, 불면증, 위염, 두드러기 등 다양했다. 당시 전문가들은 60%의 아내들이 RHS에 시달린다고 밝혔다. 이런 은퇴 남편을 일컬어 한국의 ‘삼식이’(세 끼 모두 집에서 먹는 남편)처럼 일본에서는 ‘젖은 낙엽족’(낙엽이 비에 젖어 잘 쓸리지 않는 상태를 빗댄 말. 귀찮게 방해만 되는 남편을 일컬음) ‘나도족(私も族·아내가 가는 곳 어디든 “나도 가겠다”며 따라나서는 남편)’ 등의 유행어가 생겨났다. 퇴직 이후 삶에 대한 별다른 준비 없이 은퇴해 거실 소파를 장악하고 TV나 신문만 보는 남편들은 ‘대형 쓰레기’라 불리기도 하고, “모름지기 가장(家長)은 건강해서 외출한 상태가 최고”라는 말이 회자(膾炙)됐다. 여기에 더해 남편이 왕년의 ‘상사’ 기질을 발휘해 집안일에 일일이 간섭하며 잔소리를 시작하면 아내들도 폭발한다.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타인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고 고집이 강해지며 잔소리도 심해지기 쉽다.○중년 남성들이 ‘나는 자연인’에 꽂히는 이유반대로 최근 한국에서는 남편이 먼저 황혼이혼을 요구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한다. 늦게나마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거나 아내의 잔소리나 경제적 요구가 싫어 자유를 택하겠다는 남편들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남성들 사이에 ‘나는 자연인’류의 프로그램이 인기인 이유도 집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조혜정 이혼전문 변호사는 수많은 상담을 통해 황혼이혼을 하는 부부의 공통점을 8가지로 추려냈다. △정서적 이혼 상태가 상당 기간 이어졌다(한집에서 살지만 대화 없이 몇 년을 지냈다) △돈 때문에 심하게 싸운 경험이 있다 △돈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내 돈을 쓰는 가족을 가차 없이 공격한다) △주로 생활비를 벌던 사람이 은퇴했다 △결혼해서 생긴 가족보다 원가족(남성은 본가, 여성은 친정)과 더 가깝다 △집안이 갈라져 있다(자녀가 부모 중 한쪽 편을 든다) △한쪽이 지배하고 복종을 강요한다 △외도 폭언 폭행 중 한 가지 이상이 나타난다 등이다. 조 변호사는 이 중 5가지 이상에 해당된다면 이혼 상담을 받아볼 필요가 있지만, 2∼3가지 정도라면 남들보다 나은 상태니까 문제를 개선할 길을 찾아보라고 권한다.○황혼이혼에서는 재산 분할이 큰 이슈젊은 부부의 이혼에서 위자료나 양육권, 양육비가 쟁점이라면 황혼이혼에서는 재산 분할이 가장 큰 이슈가 된다. 분할 대상은 원칙적으로 혼인 중 부부가 협력해서 모은 재산, 퇴직금이나 연금 등 장래 수입도 포함된다. 재산 분할은 결혼 기간이 길수록 양측에 비슷하게 배분되기 쉽다. 예컨대 혼인 전부터 배우자가 소유하고 있었거나 상속 또는 증여받은 ‘특유재산’은 원칙상 분할 대상에서 제외되지만, 혼인 기간이 길면 얘기는 달라진다. 직업이나 경제 활동이 없던 주부라도 그 재산의 유지 및 증식에 기여한 점을 인정받을 수 있다. 평생 외벌이로 혼자 벌고 자신의 명의로 연금을 부었다 해도 그 기간 배우자의 내조가 있었다면 절반은 배우자 몫이 된다. 황혼이혼에서는 합의 이혼이 늘어나는 추세지만 일단 소송으로 가게 되면 재산 분할의 대상, 기여도에 대한 입증이 핵심 쟁점이 된다. 분할 결과에 따라 노후 삶의 질이 결정되는 만큼 피 튀기는 ‘쩐의 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대부분 남성에게 더 치명적황혼이혼은 부부 모두에게 많은 스트레스와 상처를 안겨주지만 남성에게 더 치명적이라는 게 일반적인 지적이다. 첫째, 부부 모두 경제적 타격이 크다. 평생 모은 노후 자산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연금도 절반이 될 수 있다. 모든 것을 나누다 보면 낭비도 많다. 이혼 이후 경제적 생활 수준이 확 떨어질 수 있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둘째, 외로운 노년을 보낼 가능성이 커진다. 인생 황혼기에 잃어버린 동반자의 빈자리는 크다. 만약의 일이 생겼을 때 의지할 존재가 없어진다. 시기적으로 퇴직과 겹치다 보니 급격한 삶의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고, 모든 것에 실패했다는 허무감과 우울감에 휩싸이기 쉽다. 점차 사회 활동이 줄고 고립된 생활을 하다 보면 종착역은 고독사(死)가 될 수도 있다. 셋째, 살림 경험이 없는 남성이라면 갑작스러운 자취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건강관리에 게을러지거나 삶의 동력을 잃기 쉽고 우울증이나 자살 빈도도 높아진다. 이 부분은 사별 후 남녀의 반응 차이를 보면 이해하기 쉽다. 많은 조사에서 남편이 먼저 사망한 부인들은 얼마간의 상실과 우울의 시간을 거치고 나면 건강이 좋아지고 인생 만족도가 높아지며 장수했지만, 부인을 먼저 떠나보낸 남편들은 건강이 나빠지고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있을 때 잘하자” 노부부, 서로 존중과 배려를결혼도, 이혼도 행복해지고자 하는 것이다. 불행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혼은 적극적으로 감행돼야 한다. 예컨대 폭력이나 폭언, 외도가 상습적인 경우 한쪽이 일방적으로 참으며 살아왔지만 개선의 여지가 없는 경우는 과감하게 이혼에 나설 필요가 있다. 하지만 개선의 여지가 있다면 많은 리스크를 져야 하는 이혼보다는 현상 유지를 위한 노력이 우선이다. 고혜정 변호사는 “가장 큰 노후 대책은 배우자와의 좋은 관계”라고 강조한다. “아무리 친한 친구가 많아도 내가 병으로 몸져눕게 된다면 곁에서 보살펴 줄 사람은 결국 배우자입니다. 하지만 좋은 관계는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지지 않지요. 준비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관계는 누적되는 법이다. ‘노후의 재앙’ 황혼이혼을 피하려면 스스로 변화하고 가족, 특히 배우자와 평소에 돈독한 인간관계를 쌓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일본의 은퇴 전문가 오가와 유리가 제시하는 ‘은퇴남편 관리법 15조’(그래픽 참조)는 이 시기 부부 모두에게 참고가 될 듯하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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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령화시대, ‘이제는 부모를 버려야 한다’?[서영아의 100세 카페]

    노후의 복병, 가족 리스크에 대비하라노후를 향해 돈 건강 행복을 챙기며 열심히 달려온 5060세대 앞에 느닷없이 등장하는 복병이 있다. 독립하지 못하는 성인 자녀, 갑자기 닥쳐오는 부모의 간병, 황혼이혼 리스크가 그것들로, 모두 사랑하는 가족과 관련된다. 인생의 함정과도 같은 이 위기를 잘 극복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부모 노후 갉아먹는 자녀 리스크부모 품으로 돌아가는 성인 자녀, 이른바 ‘캥거루족’이 늘고, 고령화되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6월 보고서에 따르면 만 19~49세 성인 남녀 중 29.9%가 부모와 동거 중이다. 미혼 성인자녀의 64.1%, 미취업 성인자녀의 43.6%가 캥거루였고, 40대라 해도 미혼자는 48.8%가 부모와 함께 산다. 만혼(晩婚)과 비혼(非婚) 풍조가 퍼지고 취업난과 주거비 부담이 겹치면서 자녀들이 독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캥거루족 증가는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가 고도경제성장에 편승해 사회적 입지를 굳히고 자산을 축적한 반면, 그 2세들은 산업이 성숙화하면서 성장이 둔화되는 시기에 사회에 진출했다. 고용과 자산축적에서 애초에 불리했던 것. 그래서 MZ세대(1980~2000년대 생)는 ‘부모보다 가난한 첫 세대’라 불린다. 캥거루들을 부르는 호칭도 국가마다 다양하다. 일본에서는 부모에게 기생하는 독신이라는 뜻의 ‘파라사이트 싱글’, 미국에서는 키덜트(Kid+Adult), 캐나다에서는 직장없이 떠돌다 집으로 돌아왔다고 ‘부메랑 키즈’, 영국에서는 부모 퇴직금을 축낸다는 의미에서 ‘키퍼스(Kids in Parent’s Pockets Eroding Retirement Savings)’, 여기에 결혼하고 일단 독립했다가 주거비와 육아의 어려움 때문에 부모 집으로 들어오는 리터루(return+kangaroo)족까지 있다.● ‘다 쓰고 죽어라’, 말은 쉽지만…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인구구조 변화에서 한국은 일본을 약 15~20년 시차를 두고 따라간다. 20년 전 일본에서 일어난 일이 오늘날 한국에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요즘 일본에서는 캥거루족의 극단적 형태인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의 고령화가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1990년대 ‘취직빙하기’에 캥거루족이 된 ‘잃어버린 세대(1975~1984년생)’가 그대로 나이를 먹으면서 향후 사회부담을 예고하고 있는 것. 그들의 부모인 7080세대가 언젠가 고령으로 사망하면 그들의 연금에 기대던 4050 자녀들은 생계가 끊기는 일마저 생긴다. 두 세대에 걸친 이런 고민을 ‘4070’ 또는 ‘5080 문제’라 부른다. 일본 정부는 숨은 히키코모리가 60여 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한국 부모들은 자녀에 대한 무분별한 지원이 문제가 된다. 많은 교육비를 투여한 것도 모자라 자녀가 결혼하면 집 팔고 대출받아 지원해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더 심각한 것은 결혼 후에도 사업자금이나 생활비, 교육비 등의 명목으로 손을 벌리는 자녀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노후 계획을 탄탄하게 세웠다 해도 무용지물이 된다. 우리 주변에는 자녀들의 등쌀에 “다 쓰고 죽겠다”며 세웠던 부모의 노후 계획이 흔들리는 슬픈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유전유효 무전무효’라거나 “(미리 재산을) 안 주면 시달려서 죽고, 찔끔찔끔 주면 졸려서 죽고, 다 주면 굶어죽는다”는 우스개마저 나돈다. 성인 자녀 입에서 “노인은 돈 쓸 일도 없지 않느냐”거나 “여유 있으면서 왜 안 도와주느냐”, “상속 미리 한다고 생각하시라”는 말이 나올 정도면 부모자식 관계는 악화될 대로 악화된 상태다. 하지만 평소 ‘자녀 리스크’에 대비할 것을 누누이 강조해온 강창희 트러스톤자산운용 연금포럼 대표는 “노후 자산을 너무 쉽게 내어주다가는 자칫 부모와 자녀 세대가 함께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계한다. ● 경제적 자립심 키우고 금융교육 시켜줘야 자녀리스크를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은퇴전문가들의 조언을 종합해보자. 첫째 자녀에게 경제적 자립심을 갖게 해주고 금융(재테크) 교육을 시키는 것이 명문대 졸업장보다 훨씬 중요하다. 자녀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는 얘기인데, 이게 가능하려면 부모 스스로도 자녀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강 대표는 특히 저성장시대에는 여건에 맞게 소비를 조절하고 ‘절약’하는 능력이 절실해진다고 강조한다. 둘째 ‘연금박사’로 알려진 이영주 CFP(재무설계사)는 목돈은 가능하면 현금흐름으로 바꾸라고 조언한다. 그는 “노인의 재산을 호시탐탐 노리는 세력은 도처에 있다”며 “목돈 그 자체가 폭탄같은 위험물”이라고 말한다. 목돈을 연금이나 배당수익이 나오는 형태로 묶어놓으면 자녀건 사기꾼이건 손댈 수 없고 노인은 시간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노인대상 강의에서 자주 언급하는 두 노인의 사례가 있다. 10억 이상의 현금을 가졌던 A노인과 해마다 4000만 원 연금을 받는 B노인의 노후 비교다. 두분 모두 노환으로 10년째 요양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다. 자녀들은 극진히 모시지만 ‘긴 병에 효자는 없는’ 법. 그런데 A노인의 자녀들은 시간이 갈수록 어머니가 빨리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반면, B노인의 자녀들은 오래오래 사시기를 바라더라는 얘기다. 목돈은 주인이 오래 살수록 줄어들지만 연금은 삶을 이어가는 한 따박따박 나오니 오래 살수록 유리하다. 셋째 부모의 자산 상태와 노후 계획에 대해 자녀들에게 정확히 설명해주고 부모의 노후도 소중하다는 점을 공유해야 한다. 부모 재산의 소유권은 부모에게 있다는 점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 효도하는 자녀가 부모를 죽인다?2020년생 기준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83.5세(남성 80.5세, 여성 86.5세)지만, 건강수명(유병기간 제외 기대여명)은 66.3세에 불과하다. 인생 막바지 17.2년을 시름시름 아픈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통계청 생명표를 뒤져보면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2012년 80.9세에 비해 2.6년 늘어났지만 건강수명은 0.6년 늘어나는데 그쳤다. 5060은 자녀교육에 다걸기(올인)하는 동시에 부모 봉양 부담도 짊어진 ‘낀’ 세대다. 부모세대가 80세를 넘어서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고 보살핌이 필요해지는 경우도 생긴다. 자신의 노후 준비도 안 돼 있건만, 기나긴 간병(개호·介護 포함) 부담에 맞닥뜨리는 것이다. 독박 간병의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 특히 노인의 정신적 퇴행을 가져오는 인지증(치매)은 간병하는 사람의 심신을 갉아먹는 재앙에 가깝다. ‘부모님은 내가 모시고 간다’. 2013년 한류스타의 아버지가 이런 유서를 남기고 부모님과 함께 세상을 뜬 사건이 일어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 평소 극진한 효자였던 아버지는 연예인인 자녀들을 배려해 혼자 부모 간병 부담을 짊어졌고, 우울증에 걸렸을지언정 힘들다는 내색조차 비치지 없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 부모님 밥을 떠 먹여 드릴 정도로 간병에 몸바쳐온 효자가 부모를 살해한 패륜아가 돼 버린 것이다.● 고령화 시대, ‘이제는 부모를 버려야 한다’?이 문제를 먼저 맞닥뜨린 일본에서는 노후 가장 큰 리스크로 ‘간병 파산’을 들고 있다. 돈 문제뿐 아니라 간병 탓에 직장을 포기하거나 이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간병퇴직’이 신조어가 됐을 정도다. 노인이 노인을 간병하는 노노(老老) 간병, 병자가 병자를 간병하는 상황을 견디다 못해 동반자살이나 간병살인도 자주 벌어졌다. 유하라 에쓰코 일본복지대 교수의 2016년 집계에 따르면 과거 18년간 일본 언론에 한 줄이라도 보도된 간병살인과 동반자살은 716건에 이르렀다. 부모 간병을 둘러싼 잔혹사는 각종 드라마와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하지만 ‘이제는 부모를 버려야 한다’(시마다 히로미·지식의 날개)라는 섬뜩한 제목의 책도 나왔다. 종교학자이자 전 대학교수인 작가는 “고령화 시대에도 과거처럼 자녀와 부모에 대한 유교적 관념에 집착하다가는 다 함께 쓰러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책 앞머리에 소개된 2016년 일본 도네가와 강 동반자살 미수사건이 그런 예다. 직장도 그만두고 노부모를 돌보던 40대 딸이 차에 부모를 태운 채 도네가와 강에 뛰어들어 노부부는 사망하고 자신만 살아남았다. 어머니는 10여 년 전부터 치매증세였고 아버지는 질병으로 열흘 전 일터를 그만뒀다. 사건이 벌어진 날은 가족이 생활보호를 신청해 통과된 날이었다. 피로와 비관에 찌든 아버지가 ‘다 함께 죽자’고 제의했고 딸이 동의했다. 작가는 이런 유형의 사건이 흔하다보니 이 사건은 매스컴에서 제대로 다뤄지지도 않았다며 “딸이 부모를 일찌감치 버렸다면 이같은 비극은 막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만약 직장까지 그만두고 희생을 자처한 딸이라는 ‘보호자’가 없었다면 노부부는 더 일찍, 더 많은 지역사회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고 ‘부모살해’라는 가족의 비극은 막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 내 간병, 자식에게 기대하기 어렵다노인 간병은 길게는 10년 넘게 이어질 수 있다. 간병 때문에 직장이나 결혼 등 자신의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독박간병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기 쉽다. 데이케어 센터, 방문요양, 요양병원, 요양원, 간병인 등 동원 가능한 사회적 지원을 모두 활용할 생각을 해야 한다. 다른 가족의 관심과 도움도 최대한 이끌어내야 한다. 세월이 흘러 현재의 5060세대가 간병이 필요해진다면 어떨까. 5060세대는 대체로 형제가 여럿이어서 간병의 부담을 나눌 수 있었지만 자녀세대는 1, 2명에 불과하다. 자녀가 결혼을 해도 각자 자기 부모의 간병조차 버거울 것임을 알 수 있다. 최악의 상상이지만 70대 부모와 90대 조부모가 모두 간병이 필요한 경우, 자녀세대 각자에게 4명분의 부하가 걸릴 수도 있다. 결국 5060세대는 자녀에게 간병을 기대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베이비붐 세대가 본격적으로 간병을 필요로 하기 전, 사회에 여력이 있을 때 간병의 사회적 지원방식과 서비스 질을 높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노후를 살아갈 다양한 공간과 방식에 대한 연구도 동반돼야 할 것이다. 5060세대는 밑빠진 독에 물 붓듯 교육비를 쓰는 대신, 훗날 사랑하는 자녀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간병을 준비한다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 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건강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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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후파산 낳는 자녀집착-간병희생… 자립교육-셀프간병 준비해야[서영아의 100세 카페]

    《노후를 향해 돈 건강 행복을 챙기며 열심히 달려온 5060세대 앞에 느닷없이 등장하는 복병이 있다. 독립하지 못하는 성인 자녀, 갑자기 닥쳐오는 부모의 간병, 황혼이혼 리스크가 그것들로, 모두 사랑하는 가족과 관련된다. 인생의 함정과도 같은 이 위기를 잘 극복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부모 노후 갉아먹는 자녀 리스크부모 품으로 돌아가는 성인 자녀, 이른바 ‘캥거루족’이 늘고, 고령화되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6월 보고서에 따르면 만 19∼49세 성인 남녀 중 29.9%가 부모와 동거 중이다. 미혼 자녀의 64.1%, 미취업 자녀의 43.6%가 캥거루였고, 40대라 해도 미혼자는 48.8%가 부모와 함께 산다. 만혼(晩婚)과 비혼(非婚) 풍조가 퍼지고 취업난과 주거비 부담이 겹치면서 자녀들이 독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캥거루족 증가는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가 고도경제성장에 편승해 사회적 입지를 굳히고 자산을 축적한 반면, 그 2세들은 산업이 성숙화하면서 성장이 둔화되는 시기에 사회에 진출했다. 고용과 자산 축적에서 애초에 불리하다. 그래서 MZ세대(1980∼2000년대생)는 ‘부모보다 가난한 첫 세대’라 불린다. 국가마다 호칭도 다양하다. 일본에서는 부모에게 기생하는 독신이라는 뜻의 ‘파라사이트 싱글’, 미국에서는 ‘키덜트’(Kid+Adult), 캐나다에서는 직장 없이 떠돌다 집으로 돌아왔다고 ‘부메랑 키즈’, 영국에서는 부모 퇴직금을 축낸다는 의미에서 ‘키퍼스’, 여기에 일단 결혼하고 독립했다가 주거비와 육아 등의 이유로 돌아온 ‘리터루’(return+kangaroo)족까지 있다. 요즘 일본에서는 캥거루의 극단적 형태인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의 고령화가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1990년대 ‘취직 빙하기’에 캥거루족이 된 ‘잃어버린 세대’(1975∼1984년생)가 그대로 나이를 먹으면서 사회 부담을 예고하고 있는 것. 그들의 부모인 7080세대가 언젠가 고령으로 사망하면 그들의 연금에 기대던 4050 자녀 캥거루들은 생계가 끊기게 된다. 두 세대에 걸친 이런 고민을 ‘4070’ 또는 ‘5080문제’라 부른다. 한국 부모들은 자녀에 대한 무분별한 지원이 문제가 된다. 많은 교육비를 투여한 것도 모자라 자녀가 결혼하면 집 팔고 대출받아 지원해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더 심각한 것은 결혼 후에도 사업자금이나 생활비, 교육비 등의 명목으로 손을 벌리는 자녀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노후 계획을 탄탄하게 세웠다 해도 무용지물이 된다. 자녀들 등쌀에 부모의 노후 계획이 흔들리는 슬픈 이야기들은 도처에 넘쳐난다. ‘유전유효 무전무효’라거나 “(미리 재산을) 안 주면 시달려서 죽고, 찔끔찔끔 주면 졸려서 죽고, 다 주면 굶어죽는다”는 우스개마저 나돈다. 평소 ‘자녀 리스크’에 대비할 것을 누누이 강조해온 강창희 트러스톤자산운용 연금포럼 대표는 “노후 자산을 너무 쉽게 내어주다가는 자칫 부모와 자녀 세대가 함께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계한다.○자녀에게 경제적 자립, 금융교육부터 자녀 리스크를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은퇴 전문가들의 조언을 종합해 보자. 첫째, 자녀에게 경제적 자립심을 갖게 해주고 금융(재테크) 교육을 하는 것이 명문대 졸업장보다 훨씬 중요하다. 자녀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키워야 한다는 얘기인데, 그러려면 부모 스스로도 자녀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강 대표는 특히 저성장 시대에는 여건에 맞게 소비를 조절하고 ‘절약’하는 능력이 절실해진다고 강조한다. 둘째, ‘연금박사’로 알려진 이영주 CFP(재무설계사)는 목돈은 가능하면 현금 흐름으로 바꾸라고 조언한다. 그는 “노인의 재산을 호시탐탐 노리는 세력은 도처에 있다”며 “목돈 그 자체가 폭탄 같은 위험물”이라고 말한다. 목돈을 연금이나 배당수익이 나오는 형태로 묶어놓으면 자녀건 사기꾼이건 손댈 수 없고 노인은 시간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 셋째, 부모의 자산 상태와 노후 계획에 대해 자녀들에게 정확히 설명해주고 부모의 노후도 소중하다는 점을 공유해야 한다. 부모 재산 소유권은 부모에게 있다는 점도 명확히 해둔다.○효도하는 자녀가 부모를 죽인다?2020년생 기준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83.5세(남성 80.5세, 여성 86.5세)지만, 건강수명(유병기간 제외 기대여명)은 66.3세에 불과하다. 인생 막바지 17.2년을 시름시름 아픈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5060은 자녀교육에 다걸기(올인)하는 동시에 부모 봉양 부담도 짊어진 세대다. 부모세대가 80세를 넘어서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고 보살핌이 필요해지는 경우도 생긴다. 자신의 노후 준비도 안 돼 있건만 간병(돌봄 포함) 부담에 맞닥뜨리는 것이다. 독박 간병의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 특히 노인의 정신적 퇴행을 가져오는 인지증(치매)은 자녀의 심신을 갉아먹는 재앙에 가깝다. ‘부모님은 내가 모시고 간다.’ 2013년 한류스타의 아버지가 이런 유서를 남기고 부모님과 함께 세상을 뜬 사건이 일어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 평소 극진한 효자였던 아버지는 연예인인 자녀들을 배려해 혼자 간병 부담을 짊어졌고, 우울증에 걸렸을지언정 힘들다는 내색조차 없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 간병에 몸바쳐온 효자가 부모를 살해한 패륜아가 돼 버린 것이다. 고령자 간병 문제를 먼저 맞닥뜨린 일본에서는 노후의 가장 큰 리스크로 ‘간병 파산’을 들고 있다. 돈 문제뿐 아니라 간병 탓에 직장을 포기하거나 이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간병퇴직’이 신조어가 됐을 정도다. 노인이 노인을 간병하는 노노(老老) 간병, 병자가 병자를 간병하다가 한계에 이른 듯 간병살인이나 동반자살이 자주 벌어졌다. 유하라 에쓰코 일본복지대 교수의 2016년 집계에 따르면 과거 18년간 일본 언론에 한 줄이라도 보도된 간병살인과 동반자살은 716건에 이른다. 부모 간병을 둘러싼 잔혹사는 각종 드라마와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하지만 ‘이제는 부모를 버려야 한다’(시마다 히로미·지식의 날개)는 다소 섬뜩한 제목의 책도 나왔다. 종교학자이자 교육자인 작가는 “고령화시대에도 과거처럼 자녀와 부모에 대한 유교적 관념에 집착하다가는 다 함께 쓰러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책 앞머리에 소개된 2016년 도네가와강 동반자살 미수사건이 그런 예다. 직장도 그만두고 10여 년간 노부모를 간병하던 40대 딸이 차에 부모를 태운 채 도네가와강에 뛰어들었다가 딸만 구조됐다. 피로와 비관에 찌든 아버지가 ‘다 함께 죽자’고 제의했고 딸이 동의했다. 작가는 이런 사건이 워낙 흔하다 보니 언론에서 제대로 다뤄지지도 않았다며 “딸이 부모를 일찌감치 버렸다면 이 같은 비극은 막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만약 딸이라는 희생을 자처한 ‘보호자’가 없었다면 노부부는 더 일찍 지역사회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고 ‘부모살해’라는 가족의 비극은 막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내 간병, 자식에게 기대하기 어렵다노인 간병은 길게는 10년 넘게 이어질 수 있다. 간병 때문에 직장이나 결혼 등 자신의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독박간병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기 쉽다. 데이케어센터, 방문요양, 요양병원, 요양원, 간병인 등 동원 가능한 사회적 지원을 모두 활용할 생각을 해야 한다. 다른 가족의 관심과 도움도 최대한 이끌어내야 한다. 세월이 흘러 현재의 5060세대가 간병이 필요해진다면 어떨까. 5060세대는 형제가 대체로 여럿이어서 부담을 나눌 수 있었지만 자녀세대는 1, 2명에 불과하다. 자녀가 결혼을 해도 각자 자기 부모의 간병조차 감당하기 힘들 터. 결국 5060세대는 자녀에게 간병을 기대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베이비붐 세대가 본격적으로 간병을 필요로 하기 전, 사회에 여력이 있을 때 간병의 사회적 지원 방식과 서비스 질을 높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노후를 살아갈 다양한 공간과 방식에 대한 연구도 동반돼야 할 것이다. 5060세대는 마구잡이로 교육비를 쓰는 대신 훗날 사랑하는 자녀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간병을 준비한다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또 하나의 노후 리스크인 황혼이혼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다루고자 한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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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속도로 와버린 디지털 세상, 노인도 빛날 수 있어야죠”[서영아의 100세 카페]

    “자아, 오늘은 네이버닷에 대해 배웁니다. 음성검색 기능을 활용해 내 주변 맛집, 명소 등을 찾아볼 거예요. 화면 아랫단의 녹색 동그라미를 눌러보세요.”5일 오후 2시 경기도 용인시 한 아파트단지의 ‘시니어클럽’(경로당). 임만식 씨(64)가 스마트폰 활용법을 강의한다. 삼삼오오 모여 앉은 어르신 20여 명이 각자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분주하다. “아니, 어딜 누르라는겨?”, “요기, 요거 눌러요”.조금만 방심하면 ‘지방방송’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니 강사는 진땀을 뺀다. 임영아(47) 강사가 어르신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뒤처지는 분이 없도록 살피고 돕는다.“3주 전 수업 때 ‘네이버 길 찾기’ 알려드렸는데 지금 하라면 못하시겠죠? 오늘 가르쳐드린 것도 내일 하라고 하면 못하실 거예요. 그쵸?”수업이 끝나갈 무렵 임 씨의 말에 일동은 까르르 웃는다.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임 씨는 “오늘 7가지 배웠으니 다음주 이 시간까지 하루 한가지씩만 복습하시면 잊지 않고 쓸 수 있다”고 당부한다. 학생 중 젊은 축인 권인순 씨(69)가 “지난주 서울에 놀러갔을 때 길찾기 써봤어요. 미리 버스시간도 알 수 있고 지도도 알아보기 쉬워 편하던데요”라고 응수했다.어르신들은 너도나도 “집에 가면 잊어버리지만 다시 배우면 기억이 살아난다”며 “새로운 것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한다. 한 어르신은 “손주들에게 사진 보내고 문자 보내는 재미에 푹 빠졌다”고 자랑한다.●“디지털 전문가가 경로당으로 찾아갑니다”임 씨는 6월부터 매일 경기도 의왕과 용인 일대 경로당을 누비고 있다. 이른바 ‘찾아가는 경로당 디지털 서포터즈’다. 하루에 두 곳씩, 합쳐서 3시간을 가르친다. 지난 한달 여간 10군데 경로당에서 강의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경로당에 찾아가야 하니 이동시간도 만만찮다.대한노인회 경기도연합회는 5월부터 스마트폰 활용지도강사 37명을 선발해 요청이 있는 경로당에 보내는 시범사업을 벌이고 있다. 경기도가 4억 원의 예산을 내주었고, 서포터들은 활동비로 월 90~100만 원 정도를 받는다.“처음에는 3시간 일하기 위해 하루를 다 썼는데, 이제 좀 여유가 생겼습니다. 제가 젊어서부터 봉사하는 인생2막을 꿈꿔왔어요. 이 일을 통해 꿈을 이뤘습니다.”그는 대한민국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 중에서도 머릿수가 가장 많다는 ‘58년 개띠’다. 인생1막 32년간은 IT전문가였다. 대기업 IT부서에서 13년, 그 뒤 중소 IT업체를 설립해 19년 일했고 5년 전, 만 59세에 은퇴했다.“은퇴 뒤 ‘혹시 몰라’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땄어요. 이듬해 한 요양원에 취직해 2년 반 정도 사회복지사로 일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어르신들을 접한 계기가 됐지요.” 꽤 적성에 맞았던 이 일을, 그는 지병인 허릿병이 심하게 도지면서 그만두게 됐다.●왜 경로당인가2020년 기준 전국의 경로당은 6만 7000여 개소. 외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공인 노인여가복지시설이다. 한때는 초고령 노인끼리 모여 고스톱이나 장기, 바둑이나 두는 어두운 이미지였던 경로당은 요즘 건강관리와 운동, 교육과 친목이 활발하게 벌어지는 공간으로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요양원에서 익히 본 어르신들의 상태를 상상했던 그에게도 이런 경로당은 신세계였다.“배우고자 하는 의욕도, 인지기능도 확연히 다르세요. 사소한 기능들을 가르쳐드려도 무척 고마워하시죠. 배운 걸 자꾸 잊어버리니 수업은 기초와 반복학습 위주로 합니다.”사실 스마트폰 활용교육은 노인복지관이나 문화센터에서도 한다. 하지만 굳이 경로당에 찾아가서 하는 이유는 고령자들을 배려해서다. 이날 수업장소였던 롯데캐슬레이시티 경로당 감승대 회장(79)은 “인근 노인복지관이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어 걸어가기도 차를 타기도 어정쩡하다. 아무래도 70대 중반 넘은 분들은 잘 가지 않게 되는데, 이렇게 찾아와서 가르쳐주니 고맙기 그지없다”고 말한다.오며가며 사이다 한 잔, 사탕 한 알 하는 식의 ‘촌지’도 받는다. 수업이 끝나면 수박 한쪽이라도, 두유 한 팩이라도 먹고 가라고 붙잡는 일도 다반사. 한때는 열심히 사양했지만, 냉큼 받아먹어야 다음 수업으로 빨리 이동할 수 있다는 요령도 터득했다.“봉사하는 마음으로 자세를 낮추고 눈높이를 맞추면 어르신들은 쉽게 마음을 엽니다. 뭔가 가르쳐드린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제가 배우는 게 더 많습니다.”어르신들과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진행하는 수업은 걸핏하면 샛길로 빠지지만,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가득하다. 임 씨는 이 일을 시작한 뒤부터 개점휴업상태였던 블로그에 글쓰기를 다시 시작했다. 이런 식이다.“한 어르신이 연락처 목록을 내밀며 ‘싸랑하는 영감’을 맨 위로 올려달라고 청하셨다. ‘자동으로 가나다순으로 정렬되니 어렵다’고 답했다가 수업이 끝난 뒤 ‘가장 싸랑하는 영감’으로 이름을 바꿔드리니 목록 맨 위에 뜬다. 혼자 뿌듯해했는데 알고 보니 목록 순서를 지정하는 기능이 따로 있다고 한다….”블로그에는 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스마트폰 사용 팁도 연재된다.●노인 ‘디지털 리터러시’를 막는 것들나이 들어 서러운 일 중 하나가 디지털 소외다. 세상은 빛의 속도로 바뀌는데, 평생 아날로그 시대를 살아온 노인은 인생 막판에 디지털 나라로 강제 이민당한 난민들과 같다. 문제는 디지털을 모르면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생존이 어려워진다는 점. 디지털 없이는 버스타기도, KTX 예매도, 식당 주문도 힘들어졌다. 경로당 학생들이 가장 원하는 것도 홈쇼핑과 배달앱을 활용하는 것. 하지만 장벽이 만만치 않다.“인터넷뱅킹이나 쇼핑, 배달 등을 가르쳐드리고 싶어도 개인정보보호 때문에 강사 입장에서 어려움이 큽니다. 은행계좌나 신용카드를 연결해야 하고 보안인증도 수차례 거쳐야 하니까요. 자식이 매번 결제해주는 게 안쓰러워 배우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셨지만 결국 포기하고 좌절하는 어르신을 바라보며 씁쓸했습니다. 배우려는 의지는 강하나 수전증이 심해서 포기하는 어르신도 계세요. 여하튼 안타까운 사연이 넘쳐납니다.”때로는 노인들의 디지털 자립에 보호자들이 걸림돌이 된다고도 느낀다. 뭘 물어보면 ‘알려’주기보다 ‘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아예 데이터를 차단해놓는 경우도 있다. “어느 어르신은 밖에 나가면 조용하던 휴대전화가 집에만 돌아가면 ‘카톡카톡’ 시끄럽다고 하셔서 살펴보니 데이터 차단을 해놓으셨더군요. 어르신은 그게 뭔지를 모르니 내 전화가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우뚱하시는 거구요. 사실 가르쳐드려도 해결 능력까지 갖추기는 쉽지 않죠. 그래도 ‘이건 아닌데’ 싶을 때가 간혹 있어요.”●시니어를 배려한 인터페이스 개발, 그거 어렵나요?그는 나아가 노인 디지털 복지 정책에 대해서도 가끔 의문을 품는다. “노년층이 디지털에 친숙해지려면 교육보다 친화성이나 접근성 확보가 먼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어르신들의 휴대전화를 들고 함께 씨름을 해볼수록 노인에 대한 배려가 별로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려요. 노인에게 친절한 인터페이스를 따로 개발하면 어르신들이 젊은이들과 똑같은 사용법을 익히려 애쓰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죠.”2년 전부터 ‘시니어 맞춤형 스마트폰’이 대거 보급되면서 어르신들이 가진 스마트폰은 특정 업체 특정 기종에 쏠려 있다. 대개 월 데이터 2기가 한도에 2만 원 아래 요금제가 적용된다.“어르신들은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큰 낭패를 느낍니다. 가령 바탕화면이 바뀌거나 앱 배치가 달라지면 패닉에 빠지시죠. ‘여기 있던 단추(앱) 어디 갔느냐. 원래대로 해 달라’고. 지금의 시니어 스마트폰은 이런 어르신들의 습벽이나 생활 속 필요성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어요. 그냥 보급형 기계를 싸게 많이 파는 데 치중하는 것 아닌가….”사실 일본에서 누적 700만대가 팔렸다는 라쿠라쿠스마트폰의 경우 교통안내, 지도, 라인(카톡), 문의전화 등 노인들이 많이 쓰는 기능들이 초기화면에 큼지막하게 고정배치 돼 있고 지문인증을 채용했다. 대단한 기술보다는 노인의 특성을 반영한 직관적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돋보인다.“장애인 수의 네 배가 넘는 노년층의 디지털 친화성을 어떻게 담보해줘야 하는지가 요즘 제 화두입니다. 장애인을 위한 인프라가 구축되고 법제화되듯이 노인을 위한 인프라와 법 제도에도 투자가 이뤄져야 합니다. 노년층을 거대한 소비층으로 인식해야죠.”●베이비붐 세대, 체면과 무기력 내려놓고 일거리 찾았으면그의 주변 58년 개띠들, 베이비붐 세대의 근황을 들어봤다. “자영업이나 의사 교수같이 정년이 늦은 직업 아니면 대부분 쉬고 있지요. 다들 ‘아직 일할 수 있는 나이’라는 생각에 ‘쉰다’는 말을 잘 못해요. ‘사무실 하나 내서 다닌다’거나 ‘주 1~2회 아는 회사에 가서 일을 돕는다’고 표현하지요. 비록 하루 3시간이지만 일하는 기쁨으로 충만한 저를 보며 ‘좋은 일 하네’, ‘넌 일거리가 있구나’라며 부러워하는 눈치예요.”그에 따르면 베이비붐 세대는 국민연금 등 생계는 어느 정도 준비돼 있고 돈보다는 삶의 보람을 위해 일할 곳을 찾는 분위기가 강하다고 한다. 다만 체면이나 무기력을 내려놓고 주변에서 일거리를 찾는 적극성이 아쉽다고 했다. 예컨대 그 자신은 디지털서포터 일을 군포시에서 낸 모집공고에서 발견해 지원했다.이번 시범사업은 11월 말로 끝난다. 내년에도 이어질지 여부는 정해진 바가 없다.“서포터스 사업이 내년에도 있다면 다시 도전할 생각이고, 없어진다면 제가 사는 군포시에 시니어를 위한 문화강좌를 열어달라고 건의하려 합니다. 이도저도 안되면 개인적으로 자원봉사 다닐 겁니다. 어르신들께 도움이 된다는 것만으로 삶이 충만해지니까요.”※ 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건강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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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지털 난민 구하는 족집게 강사… “어르신께 스마트세상 선물”[서영아의 100세 카페]

    “자아, 오늘은 네이버닷에 대해 배웁니다. 음성검색 기능을 활용해 내 주변 맛집, 명소 등을 찾아볼 거예요. 화면 아랫단의 녹색 동그라미를 눌러보세요.” 5일 오후 2시 경기 용인시 한 아파트단지의 ‘시니어클럽’(경로당). 임만식 씨(64)가 스마트폰 활용법을 강의한다. 어르신 20여 명이 각자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분주하다. “아니, 어딜 누르라는겨?” 조금만 방심하면 ‘지방방송’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니 강사는 진땀을 뺀다. 임영아 강사(47)가 어르신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뒤처지는 분이 없도록 돕는다. 임 씨는 “오늘 7가지 배웠으니 다음 주 이 시간까지 하루 한 가지씩만 복습하시면 잊지 않고 쓸 수 있다”고 당부한다. 학생 중 젊은 축인 권인순 씨(69)가 “지난주 서울에 놀러갔을 때 길찾기를 써봤어요. 미리 버스 시간도 알 수 있고 지도도 알아보기 쉬워 편하던데요”라고 했다. 어르신들은 너도나도 “집에 가면 잊어버리지만 다시 배우면 기억이 살아난다”며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한다. 한 어르신은 “손주들에게 사진 보내고 문자 보내는 재미에 푹 빠졌다”고 자랑한다.○“디지털 전문가가 경로당으로 찾아갑니다”임 씨는 6월부터 매일 경기도 의왕과 용인 일대 경로당을 누비고 있다. 이른바 ‘찾아가는 경로당 디지털 서포터스’다. 하루 두 곳씩, 합쳐서 3시간을 가르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경로당을 찾아가야 하니 이동 시간도 만만찮다. 대한노인회 경기도연합회는 5월부터 스마트폰 활용지도강사 37명을 선발해 요청이 있는 경로당에 보내는 시범사업을 벌이고 있다. 경기도가 4억 원의 예산을 내주었고, 강사들은 활동비로 월 90만∼100만 원을 받는다. “젊어서부터 봉사하는 인생 2막을 꿈꿔왔는데, 이 일을 통해 꿈을 이뤘습니다.” 그는 대한민국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 중에서도 머릿수가 가장 많다는 58년 개띠다. 인생 1막 32년간은 정보기술(IT) 전문가였다. 대기업 IT부서에서 13년, 그 뒤 중소 IT업체를 설립해 19년 일했고 5년 전 만 59세에 은퇴했다. “은퇴 뒤 ‘혹시 몰라’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땄어요. 이듬해 한 요양원에 취직해 2년 반 정도 사회복지사로 일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어르신들을 접한 계기가 됐지요.” 꽤 적성에 맞았던 이 일을, 그는 지병인 허리병이 심하게 도지면서 그만두게 됐다.○왜 경로당인가2020년 기준 전국의 경로당은 6만7000여 곳. 외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노인여가복지시설이다. 한때 노인끼리 고스톱이나 장기, 바둑이나 두는 어두운 이미지였던 경로당은 요즘 건강관리와 운동, 교육과 친목이 활발하게 벌어지는 공간으로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요양원에서 익히 본 어르신들의 상태를 상상했던 그에게도 이런 경로당은 신세계였다. “배우고자 하는 의욕도, 인지 기능도 확연히 다르세요. 사소한 기능을 가르쳐드려도 무척 고마워하시죠. 자꾸 잊어버리니 수업은 기초와 반복학습 위주로 합니다.” 이날 수업 장소였던 롯데캐슬레이시티 경로당 감승대 회장(79)은 “노인복지관이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어 70대 중반이 넘은 분들은 못 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찾아와서 가르쳐주니 고맙기 그지없다”고 말한다. 오가며 사이다 한 잔, 사탕 한 알 하는 식의 ‘촌지’도 받는다. 수업이 끝나면 수박 한 쪽이라도, 두유 한 팩이라도 먹고 가라고 내미신다. 한때는 열심히 사양했지만 냉큼 받아먹어야 다음 수업으로 빨리 이동할 수 있다는 요령도 터득했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자세를 낮추고 눈높이를 맞추면 어르신들은 쉽게 마음을 엽니다. 뭔가 가르쳐 드린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론 제가 배우는 게 더 많습니다.” 어르신들과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진행하는 수업은 걸핏하면 샛길로 빠지지만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가득하다. 그는 개점휴업 상태였던 블로그에 글쓰기를 다시 시작했다. ○ 노인 ‘디지털 리터러시’를 막는 것들나이 들어 서러운 일 중 하나가 디지털 소외다. 세상은 빛의 속도로 바뀌는데, 평생 아날로그 시대를 살아온 노인은 인생 막판에 디지털 나라로 강제 이민당한 난민들과 같다. 문제는 디지털을 모르면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생존이 어려워진다는 점. 디지털 없이는 버스 타기도, KTX 예매도, 식당 주문도 힘들어졌다. 경로당 학생들이 가장 원하는 것도 홈쇼핑과 배달앱을 활용하는 경지. 하지만 장벽이 만만치 않다. “인터넷뱅킹이나 쇼핑, 배달 등을 가르쳐 드리고 싶어도 개인정보보호 때문에 강사 입장에서 어려움이 큽니다. 은행계좌나 신용카드를 연결해야 하고 보안인증도 수차례 거쳐야 하니까요. 자식이 매번 결제해주는 게 안쓰럽다며 배우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던 어르신은 결국 포기하며 좌절하셨어요. 배우고 싶은데 수전증이 심해서 포기하는 분도 계시고요.” 때로는 노인들의 디지털 자립에 보호자들이 걸림돌이 된다고도 느낀다. 뭘 물어보면 ‘알려’주기보다 ‘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아예 데이터를 차단해놓는 경우도 있다. 그는 한국의 노인 디지털 복지 정책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는다. “노년층이 디지털에 친숙해지려면 가장 필요한 게 교육일까요. 가령 노인에게 친절한 인터페이스를 따로 개발하면 어르신들이 젊은이와 똑같은 사용법을 익히려 애쓰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죠.” 2년 전부터 ‘시니어 맞춤형 스마트폰’이 대거 보급되면서 어르신들의 스마트폰은 특정 업체, 특정 기종에 쏠려 있다. 월 데이터 2기가 한도에 2만 원 아래 요금제가 적용된다. “어르신들은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큰 낭패를 느낍니다. 가령 바탕화면이 바뀌거나 앱 배치가 달라지면 패닉에 빠지죠. 지금의 시니어 스마트폰은 이런 어르신들의 습벽이나 생활 속 필요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어요. 그냥 보급형 기계를 싸게 많이 팔려는 것 아닌가….” 사실 일본에서 누적 700만 대가 팔렸다는 라쿠라쿠 스마트폰의 경우 교통안내, 지도, 라인(카톡), 문의전화 등 노인들이 많이 쓰는 기능들이 초기 화면에 큼지막하게 고정 배치돼 있고 지문 인증을 채용했다. 대단한 기술보다는 노인에게 친절한 직관적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돋보인다. “장애인 수의 네 배가 넘는 노년층의 디지털 친화성을 어떻게 담보해줘야 하는지가 요즘 제 화두입니다. 장애인을 위한 인프라가 구축되고 법제화되듯이 노인을 위한 인프라와 법 제도에도 투자가 이뤄져야 합니다. 노년층을 거대한 소비층으로 인식해야죠.”○베이비붐 세대, 체면 내려놓고 일거리 찾았으면그의 주변 58년 개띠들, 베이비붐 세대의 근황을 들어봤다. “자영업이나 의사, 교수같이 정년이 늦은 직업 아니면 대부분 쉬고 있지요. 다들 ‘아직 일할 수 있는 나이’라는 생각에 ‘쉰다’는 말을 잘 못해요. ‘사무실 하나 내서 다닌다’거나 ‘주 1∼2회 아는 회사에 가서 일을 돕는다’고 표현하지요. 비록 하루 3시간이지만 일하는 기쁨으로 충만한 저를 보며 부러워하는 눈치예요.” 그에 따르면 베이비붐 세대는 국민연금 등 생계는 어느 정도 준비돼 있고, 돈보다는 삶의 보람을 위해 일할 곳을 찾는 분위기가 강하다고 한다. 다만 체면이나 무기력을 내려놓고 주변에서 일거리를 찾는 적극성이 아쉽다고 했다. 예컨대 그 자신은 디지털서포터 일을 군포시가 낸 모집공고에서 발견해 지원했다. 이번 시범사업은 11월 말로 끝난다. 내년에도 계속될지는 정해진 바 없다. “서포터스 사업이 내년에도 있다면 다시 도전할 거고, 없어진다면 제가 사는 군포시에 시니어를 위한 문화강좌를 열어 달라고 건의할 생각입니다. 이도저도 안 되면 개인적으로 자원봉사를 다닐 겁니다. 어르신들께 도움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삶이 충만해지니까요.”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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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금자산 10억 만들기, 나도 도전해볼까[서영아의 100세 카페]

    코앞에 닥친 퇴직과 미흡한 노후준비, 부모부양과 자녀교육 부담 사이에서 쫓기며 살아온 50대는 이른바 ‘100세 시대’가 황망하다. 부쩍 늘어난 수명은 부모와 자신, 두 세대의 노후라는 부담을 안겨주고 있지만 막상 손에 쥔 자산은 별로 없다. “그나마 국민연금이 있어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뒤늦게 퇴직연금에 관심을 기울여보지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파이어’족의 목표 100만 달러, 4%룰의 의미미국에서는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 ‘백만장자로 퇴직하기’가 유행 중이라고 한다. 실제로 401K 퇴직연금 계좌 중 지난해 2분기 기준으로 금융자산 100만 달러(약 12억 8300만 원) 이상을 확보한 근로자가 41만 명이 넘는다는 소식도 들려온다(피델리티자산운용). ‘경제적 자유’를 추구하는 파이어족들이 흔히 100만 달러(편의상 환율변동성 무시하고 10억 원으로 계산) 달성을 목표로 하는 이유는 이 돈이 ‘4%룰’을 따르면 여생을 파산하지 않고 여유있게 사용할 수 있는 액수이기 때문이다. 4%룰이란 1990년대 캘리포니아의 재무관리사 윌리엄 벤젠이 고안한 노후자산 관리법칙. 1년 생활비의 25배 은퇴자금이 있으면 돈 걱정 없이 은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은퇴 시점에 자산 10억 원이 있다면 원금의 4%인 4000만 원 정도를 은퇴 1년차 생활비(월 333만원)로 쓰고 2년 차부터는 4%에 물가상승률을 더한 금액을 빼 쓰면 30년 이상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이때 자산을 연 4% 수익률을 거두는 상품에 투자해둔다면 원금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고, 수익률이 그 이상이라면 원금은 오히려 늘어나게 된다. ● 국민연금 + 주택연금한국에서도 연금자산 10억원 은퇴가 가능할까.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은 “퇴직연금만으로는 어렵지만 국민연금을 포함한다면 일정 조건 하에서 가능하다. 나아가 한국인의 자산이 주택에 쏠려 있는 현실에서 주택연금을 일부 활용한다면 연금자산 10억 원은 쉽게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미국의 퇴직연금 401K가 회사 지원을 합쳐 수입의 13%가 넘는 액수를 적립하고 연평균 수익률 10% 이상을 올리며 복리로 운영되는 것에 비해 한국의 퇴직연금 사정은 미약하기 짝이 없지만, 대부분의 직장인이 국민연금만은 착실하게 ‘강제적으로’ 붓고 있다. 물가상승률에 연동되고 종신 지급되는 국민연금은 한국인의 노후보장에 굉장히 큰 힘을 갖는다. 예컨대 A씨 부부가 은퇴 후 연간 4000만 원의 소득이 필요하고 국민연금으로 2400만 원을 받는다면 추가로 필요한 자금은 연간 1600만 원이다. 1600만 원의 25배는 4억 원. 이 4억원이 은퇴시점까지 모아야 하는 목표금액이 된다. 부부의 국민연금 연 2400만원은 현금자산 6억원을 가진 것과 같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일 B씨 부부도 연간 4000만원 생활비를 써야 하는데 국민연금은 1200만 원에 그친다면 2800만원의 소득이 더 필요하다. B씨 부부는 연금자산 7억 원을 모아야 한다는 계산이 된다. ● 맞벌이, 5% 이상 수익률, 60세 이후 퇴직, 주택연금 활용이 조건지난달 29일 열린 동아 모닝포럼을 위해 김 고문은 남성 28세(연봉 2900만원) 여성 26세(연봉 2700만원)에 직장생활을 시작할 경우 퇴직연금(임금의 8.3%), 개인연금(연소득 4000만 원 미만은 연 400만원, 4000만 원 이상은 700만 원 저축) 및 국민연금 등을 넣은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그 결과에 따르면 외벌이의 경우 65세까지 일해도 연금 운용수익률이 8% 이상을 유지해야 은퇴시점에 연금자산 10억 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맞벌이는 5% 이상 운용수익률을 유지하며 부부 모두 60세까지 일한다면 가능했다. 여기에 주택을 연금으로 활용하면 목표 달성은 훨씬 쉬워진다. “결론적으로 연금자산 10억 만들기의 조건은 맞벌이, 5% 이상 수익률, 60세 이후 퇴직, 주택을 연금으로 활용할 때 가능하다.”(김경록) 직장생활 초입의 청년세대라면 맞벌이 등으로 수입을 늘리고 가급적 오래 일하며 연금자산의 운용수익률을 높인다면 퇴직 무렵 노후걱정 없는 연금 자산규모를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젊은 층은 시간 레버리지를 사용한 복리 효과를 최대한 살릴 수 있다. 마침 ‘쥐꼬리 수익률’이라 힐난 받던 한국의 퇴직연금도 7월부터 디폴트옵션 도입 등을 통해 수익률 제고에 나설 기세다. 하지만 이미 지나온 세월이 긴 50대 이상은 운용수익률을 높이고 일하는 기간을 길게 가져가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현실에서는 더욱 빠른 은퇴 압박을 느끼기도 한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 2020년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50대 직장인들의 가계 순자산은 5.9억원 수준이고 이중 주택이 71%(4.2억)을 차지한다. 퇴직연금은 6100만 원 수준이다. 대부분 교육비와 집값 등으로 쓰기 위해 퇴직금 중간정산을 해버린 데다, 운용수익률은 낮고 근무기간도 짧기 때문이다. 다른 자산 없이 살고 있는 집 한 채가 전부인 5060세대는 당장은 아니라도 주택연금을 적극 고려해볼 만하다.● 주택연금, 가급적 늦게 집값 높을 때 들어야 유리주택연금은 주택을 담보로 맡기고 매월 연금을 받는 금융상품이다. 내 집에 살면서 부부 모두가 사망할 때까지 연금을 받을 수 있으니 노후 주거와 생활비가 동시에 해결된다. 공시가격 9억원 이하(시세 약 12억 원) 주택을 소유한 부부 중 한 사람이 55세 이상이면 가입할 수 있다. 매달 받는 연금액수는 가입시점의 집값과 가입자의 연령을 기준으로 정해진다(표 참조).연금은 배우자중 한쪽이 사망하면 남은 배우자에게 승계된다. 가입자가 장수해 주택가격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아가도 사망할 때까지 약정된 연금은 보장된다. 그 반대의 경우 주택을 처분해 그간 받은 연금과 이자 등을 뺀 나머지 금액은 자식에게 상속된다. 자식들이 그간의 비용을 대신 갚고 집을 돌려받을 수도 있다. 주택연금 가입자는 2007년 500가구에서 시작해 2022년 5월 현재 9만 7600여 가구(누적)로 늘었다. 전국평균으로 보면 72세에 가입해 3억4500만원의 주택을 담보로 내놓고 월 112만 원씩을 받는다.● “주택연금 가입의 최대장벽은 자식들”이란 지적도 주택연금을 꺼리는 목소리도 상당하다. 우선 집 한 채는 갖고 있다가 자식들에게 남겨줘야 한다는 인식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주택연금 가입의 최대장벽이 자식들”이란 말도 돈다. 자식들 입장에서는 가만히 있으면 ‘내 것’이 될 집을 왜 건드리느냐는 반발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인지 주택연금에 가입하는 부모 중 상당수가 자식에게 미안해한다고 한다. 하지만 30년 뒤 집을 주기 위해 30년간 생활비를 자식에게 손을 벌리게 된다면 이 또한 서로에게 힘든 일이 될 것이다. 둘째 집값이 더 오를 것이라는 기대다. 주택연금은 가입 당시 집값에 기초해 연금액이 고정되고 집값 변동이나 물가상승분을 반영하지 않는다. 실제로 집값 상승이 가팔랐던 지난해와 올초 주택연금 해지가 많았다. 3억 원이던 주택이 2년 사이 6억 원으로 오른 경우를 예로 들면, 70세 기준 월 수령액은 92만 원과 180만 원의 차이가 있다. ‘지금 가입한다면 연금을 두 배로 받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다만 주택연금은 해지 뒤 해당주택으로 재가입하려면 3년을 기다려야 한다(다른 주택으로 이사해 그 집을 담보로 가입할 수는 있다). 셋째 주택연금은 ‘역(逆)모기지’ 개념의 대출로 이자 등의 비용이 복리로 계산된다. 정산 해보면 떼이는 비용이 생각보다 많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늦게 가입하고 집값 상승이 기대되지 않는 주택을 활용하는 게 좋다. 또 가입당시보다 집값이 하락한다 해도 연금은 그대로 유지되다보니 요즘처럼 집값이 많이 올랐을 때 가입하는 게 유리할 수 있다. 실제로 최근 제주 세종 대전 등 그간 집값 고점론이 나온 지역을 중심으로 가입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고 한다. ● 30년 뒤 집을 남길까 VS 30년 간 용돈 주는 할머니가 될까주택연금 체험수기 중 하나. 70세에 남편을 잃은 C씨도 주택연금을 알아볼 때 가장 마음에 걸린 게 아들이었다. 아들은 “엄마는 건강해서 100세까지 사실 텐데, 내가 30년 뒤 그 집 받아봤자 도움이 안 될 것 같다”며 가입에 찬성해줬다고 한다. “매달 일정 금액이 통장으로 들어오니 마치 월급을 받는 것처럼 든든하다. 전에는 차비가 아까워 움직이지도 못했는데 지금은 마음에 여유가 생겨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친구들과 어울려 외식도 한다.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운동도 열심히 하고…”(C씨의 수기에서) 다른 수기에는 딸에게 병원비와 생활비 부담을 주며 무거운 마음으로 살다가 주택연금에 가입한 뒤 마음의 빚을 털어버린 어르신, 79세에 주택연금에 가입해 당당한 월급쟁이로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어머니를 보며 기뻐하는 아들, 명예퇴직한 아들의 생활비 부담을 덜어주고 ‘연금 받는 부자 할머니’의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어르신 등의 인생스토리가 이어진다. 노후에 필요하다는 돈과 건강, 행복 중에서도 어찌보면 가장 현실적인 두려움을 안겨주는 게 ‘돈’이다. 국민연금 외에는 별다른 노후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5060세대라면, 그래도 집 한 채는 가지고 있다면 두려움에 시달리기보다 주택연금이란 선택지도 한번 고려해볼 만하다. 혹자는 국가가 주택연금 가입자격을 까다롭게 제한하는 이유야말로 혜택이 크다는 방증이라고 진단하기도 한다. ※ 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건강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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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부 모두 60세까지 일한다면 연금 운용 수익률 年 5% 넘어야”[서영아의 100세 카페]

    코앞에 닥친 퇴직과 미흡한 노후 준비, 부모 부양과 자녀 교육 부담 사이에서 쫓기며 살아온 50대는 이른바 ‘100세 시대’가 황망하다. 부쩍 늘어난 수명은 부모와 자신, 두 세대의 노후라는 부담을 안겨주고 있지만 막상 손에 쥔 자산은 별로 없다. “그나마 국민연금이 있어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뒤늦게 퇴직연금에 관심을 기울여 보지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파이어’족 목표 100만 달러, ‘4%룰’이 근거미국에서는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 ‘백만장자로 퇴직하기’가 유행 중이다. ‘경제적 자유’를 추구하는 파이어족들이 흔히 100만 달러(편의상 환율 변동성 무시하고 10억 원으로 계산) 달성을 목표로 하는 이유는 이 돈이 ‘4%룰’을 따르면 여생을 파산하지 않고 여유 있게 사용할 수 있는 액수이기 때문이다. 4%룰이란 1990년대 미 캘리포니아의 재무관리사 윌리엄 벤젠이 고안한 노후자산 관리 법칙. 1년 생활비의 25배 은퇴자금이 있으면 돈 걱정 없이 은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은퇴 시점에 자산 10억 원이 있다면 원금의 4%인 4000만 원을 은퇴 1년차 생활비(월 333만 원)로 쓰고 2년 차부터는 4%에 물가상승률을 더한 금액을 빼 쓰면 30년 이상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이때 자산을 연 4% 수익률 상품에 투자해 둔다면 원금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고, 수익률이 그 이상이라면 자산은 오히려 늘어나게 된다. 한국에서도 연금자산 10억 원 은퇴가 가능할까.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은 “퇴직연금만으로는 어렵지만 국민연금을 포함한다면 일정 조건하에서 가능하고, 주택연금을 일부 활용한다면 쉽게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A 씨 부부가 은퇴 후 연간 4000만 원의 소득이 필요하고 국민연금 2400만 원을 받는다면 추가로 필요한 자금은 연간 1600만 원이다. 1600만 원의 25배는 4억 원. 이 4억 원이 은퇴 시점까지 모아야 하는 목표 금액이 된다. 부부의 국민연금 연 2400만 원은 현금자산 6억 원을 가진 것과 같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일 B 씨 부부도 연간 4000만 원 생활비를 써야 하는데 국민연금은 1200만 원에 그친다면 2800만 원의 소득이 더 필요하다. B 씨 부부는 연금자산 7억 원을 모아야 한다는 계산이 된다. ○맞벌이-고수익률-만기퇴직-주택연금이 열쇠지난달 29일 열린 동아모닝포럼을 위해 김 고문은 남성 28세(연봉 2900만 원) 여성 26세(연봉 2700만 원)에 직장생활을 시작해 퇴직연금(임금의 8.3%), 개인연금(연소득 4000만 원 미만은 연 400만 원, 4000만 원 이상은 700만 원 저축) 및 국민연금 등을 운용하는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이에 따르면 외벌이의 경우 65세까지 일해도 연금 운용수익률이 8% 이상을 유지해야 은퇴 시점에 연금자산 10억 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맞벌이는 5% 이상 운용수익률을 유지하며 부부 모두 60세까지 일한다면 가능했다. 여기에 주택을 연금으로 활용하면 목표 달성은 훨씬 쉬워진다. “결론적으로 연금자산 10억 원 만들기의 조건은 맞벌이, 5% 이상 수익률, 60세 이후 퇴직, 주택을 연금으로 활용할 때 가능하다.”(김경록) 직장생활 초입의 청년세대라면 맞벌이 등으로 수입을 늘리고 가급적 오래 일하며 연금자산의 운용수익률을 높인다면 퇴직 무렵 노후 걱정 없는 연금자산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미 지나온 세월이 긴 50대 이상은 운용수익률을 높이고 일하는 기간을 길게 가져가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현실에서는 더욱 빠른 은퇴 압박을 느끼기도 한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 2020년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50대 직장인들의 가계 순자산은 5억9000만 원 정도이고 이 중 주택이 72%(4억2000만 원)를 차지했다. 퇴직연금은 6100만 원 수준이다. 이런 5060세대는 당장은 아니라도 주택연금을 적극 고려해볼 만하다.○주택연금, 물가상승분 반영 안되는 단점주택연금은 주택을 담보로 맡기고 매월 연금을 받는 금융상품이다. 내 집에 살면서 부부 모두가 사망할 때까지 연금을 받을 수 있으니 노후 주거와 생활비가 동시에 해결된다. 공시가격 9억 원(시세 약 12억 원) 이하 주택을 소유한 부부 중 한 사람이 55세 이상이면 가입할 수 있다. 매달 받는 연금 액수는 가입 시점의 집값과 가입자의 연령을 기준으로 정해진다(표 참조). 연금은 배우자 중 한쪽이 사망하면 남은 배우자에게 승계된다. 가입자가 장수해 주택 가격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아 가도 사망할 때까지 약정된 연금은 보장된다. 반대의 경우 주택을 처분해 그간 받은 연금과 이자 등을 뺀 나머지 금액은 자식에게 상속된다. 주택연금 가입자는 2007년 500여 가구에서 시작해 2022년 5월 현재 9만7600여 가구(누적)로 늘었다. 전국 평균으로 보면 72세에 가입해 3억4500만 원의 주택을 담보로 내놓고 월 112만 원씩 받고 있다. 주택연금을 꺼리는 목소리도 상당하다. 우선 한국인 대부분이 집 한 채는 갖고 있다가 자식에게 남겨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30년 뒤 집을 주겠다며 30년간 생활비를 자식에게 손 벌린다면 서로에게 힘든 일이 될 수도 있다. 둘째, 집값이 더 오를 거라는 기대다. 주택연금은 가입 당시 집값에 기초해 연금액이 고정되고 집값 변동이나 물가상승분을 반영하지 않는다. 실제로 집값 상승이 가팔랐던 지난해와 올 초 주택연금 해지가 많았다. 3억 원이던 주택이 2년 사이 6억 원으로 오른 경우를 예로 들면, 70세 기준 월 수령액은 93만 원과 180만 원의 차이가 있다. 지금 가입한다면 연금이 두 배라는 아쉬움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다만 주택연금은 해지 뒤 해당 주택으로 재가입하려면 3년을 기다려야 한다. 셋째, 주택연금은 ‘역(逆)모기지’ 개념의 대출로 이자는 복리로 계산된다. 떼이는 비용이 생각보다 많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늦게 들고 집값 상승이 기대되지 않는 주택을 활용하는 게 좋다. 또 가입 당시보다 집값이 하락해도 연금은 유지되다 보니 요즘처럼 집값 고점론이 나올 때 가입하는 게 유리할 수 있다. 실제로 최근 제주 세종 대전 등 지방을 중심으로 가입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30년 뒤 집 남길까 VS 30년간 용돈 줄까주택연금 체험수기중 하나. 70세에 남편을 잃은 C 씨는 주택연금을 알아볼 때 가장 마음에 걸린 게 아들이었다. 아들은 “엄마는 건강해서 100세까지 사실 텐데, 내가 30년 뒤 그 집 받아봤자 도움이 안 될 것 같다”며 가입에 찬성해 줬다고 한다. “매달 일정 금액이 통장으로 들어오니 월급을 받는 것처럼 든든하다. 전에는 차비가 아까워 움직이지도 못했는데 지금은 마음에 여유가 생겨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친구들과 어울려 외식도 한다.”(C 씨의 수기에서) 이 밖에도 딸에게 병원비와 생활비 부담을 주며 무거운 마음으로 살다가 주택연금에 가입한 뒤 마음의 빚을 털어버린 어르신, 79세에 주택연금에 가입해 당당한 월급쟁이로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어머니를 보며 기뻐하는 아들, 명예퇴직한 아들의 생활비 부담을 덜어주고 ‘연금 받는 부자 할머니’의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어르신 등의 인생 스토리가 이어진다. 노후에 필요한 돈과 건강, 행복 중에서도 어찌 보면 가장 현실적인 두려움을 안겨주는 게 ‘돈’이다. 국민연금 외에 별다른 노후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5060세대라면, 그래도 집 한 채는 가지고 있다면 두려움에 시달리기보다 주택연금이란 선택지를 고려해 볼 만하다. 혹자는 국가가 주택연금 가입 자격을 까다롭게 두는 이유야말로 혜택이 크다는 방증이라고 진단하기도 한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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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기업서 평생 누린 혜택, 일부라도 사회에 환원해야죠”[서영아의 100세 카페]

    한 회사 울타리 안에서 37년간 일했다. 26세 청년은 63세 초로의 나이가 됐다. 이쯤되면 그의 인생 전체가 회사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회사란 때가 되면 반드시 떠나야 하는 곳. 퇴직으로부터 2년이 더 지난 지금, 그의 인생2막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을까. 17일 금천구 본인의 사무실에서 만난 이웅범 전 LG이노텍 사장(65)은 “떠났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직 그때 사람들을 자주 만납니다. 사실 떠날 수 없죠. 제 인생 대부분이 거기 있었는데요. 여전히 프로야구에서 (LG 트윈스가) 지면 온종일 속상하고…” 그에게 회사는 고향같은 곳이 돼 있다. ● “이르는 곳마다 주인된 자세로” 그는 평사원에서 최고경영자(CEO)까지 올라간 입지전적 인물이다. 1983년 반도상사(현 LX 인터내셔널)에 입사해 LG전자, LG이노텍, LG화학 등을 거치며 17년을 직원, 18년은 임원으로 지냈다. LG이노텍 사장과 LG화학 전지사업본부장(사장)을 맡아 성공신화를 썼다. 최종이력은 LG가 설립한 연암공대 총장이었다. -처음부터 ‘여기 내 인생 다 걸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시죠? “당연하죠. 중간중간 그만둘 뻔한 일이 많았습니다. 함께 하는 사람들과 잘 맞았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고, 특히 윗사람 운이 좋았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봐주신 분들이 있었어요. 그건 결국 신뢰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 봅니다.” 조직은 팔로어십과 리더십의 상호작용을 통해 굴러간다. 매출이 급증하는 생산현장에서는 다소 무리한 계획도 세우곤 했지만 이런 때 “한번 해봐, 믿으니까”라고 말해주는 상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이 상사가 됐을 때도 후배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려 했다. 그는 직장생활의 자세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을 소개한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찾던 성지사 스님이 주신 편액에 쓰인 금언으로, 당나라 승려 임제가 한 말이라고 한다.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는 뜻이다. “이 금언은 늘 저를 더 높은 관점에서 바라보고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채근했습니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지침이 됐지요.” LG이노텍 카메라모듈 사업은 그가 LG전자 부품소재사업 본부장으로 일하기 시작한 2010년을 기점으로 급성장했다. 애플의 수주액은 첫해 3000억 원, 2011년 9700억 원으로 급증했다. 2011년말 그는 아예 LG이노텍 대표이사(부사장)로 취임했고 카메라모듈 매출은 2012년 2조 원, 이듬해 2조 5000억 원을 돌파했다. ●만년 야전사령관 그에겐 ‘야전사령관’이란 별명이 따라다녔다. 무용담이라 할 만한 일화 하나. 애플이 2012년 4분기 갑자기 발주물량을 늘렸다. 위기와 기회가 함께 찾아온 셈이다. “애플은 항상 두 개 이상 회사를 경쟁시켰는데 당시 우리 경쟁사는 일본의 샤프였습니다. 샤프에 재무상 문제가 있다는 애기가 나돌면서 애플이 저희에게 엄청난 물량을 몰아서 발주했습니다. 현장 인원 1000명을 새로 투입해야 할 물량인데, 신입사원 뽑을 시간도 없었죠. 며칠 궁리 끝에 노조위원장을 만나 전국 공장의 인력을 최대한 끌어모아 구미 생산라인에서 일하도록 협조를 구했습니다.” 전사적 동원체제였다. 공장 인력뿐 아니라 사무기술직, 연구소 직원, 본사 인사와 홍보부서 직원, 사내 변호사까지 구미 생산라인에 투입했다. “모두가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 잘 알았죠. 비록 손은 더뎠지만 품질이 높은 상품을 만들어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산성도 현장사원 수준으로 올라갔고요. 그 많은 물량을 높은 품질을 유지하며 납기를 맞추자 애플의 신뢰가 커졌고 주문증가로 이어졌습니다.”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다. 그때의 경험이 본인 업무에 도움이 됐다는 직원이 많았다. 예컨대 연구개발 부서 직원은 직접 만들어본 카메라 모듈을 떠올리면서 연구개발을 할 수 있게 됐고, 관리부서 직원은 원가를 계산하고 절감하는 연구를 더 생생하게 할 수 있었다. 최근 그가 출연한 직장인 대상 유튜브에 어느 시청자가 남긴 댓글에서 당시 분위기가 짐작된다. “열정과 패기로 위기를 기회로 삼아 기업을 회생시킨 야전사령관님! 성공체험으로 전 조직 구성원들이 한계돌파의 엄청난 에너지를 분출시켰던 그 시절 행복했습니다. 자부심과 보람으로 세상 부럽고 무서울 것이 없었습니다…. 사장님! 여전하십니다.” 그에게는 늘 ‘야전사령관’이란 별명이 따라다녔다. 청주와 평택 등 주로 3교대하는 생산공장을 지휘하며 밤샘근무를 끝낸 직원들과 아침 6시 ‘해장국 미팅’을 하곤 했다. ●“가야 할 때를 아는 아름다운 사람” 연암공대 총장 퇴임이 다가오면서 이런저런 제안들이 들어왔다. 가장 마음이 끌렸던 것은 기술력 있는 벤처기업을 경영해달라는 요청이었지만 부인의 만류가 컸다. “이제 놀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주장이었다. “‘평생 일했으면 됐지, 있는 돈이나 쓰고 갈 생각해라. 이 나이에 돈을 번들 뭐하겠느냐. 자식들 좋은 일이나 시키는 거지. 그냥 쉬엄쉬엄 사람들이나 도와주라’고. 똑소리나게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사실 새로 기업을 경영한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죠. ‘가야 할 때를 아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로 했습니다.” 그가 택한 일은 개인과 기업에 대한 코칭이다. 이 일을 통해 오랜 경영자 생활에서 얻은 노하우와 지식을 사회에 환원할 수 있겠다고 봤다. 퇴임과 동시에 갤럽 인증 ‘강점코치’ 자격증을 따고 자신의 이름을 건 ‘유비스(UB’s) 컨설팅‘을 만들었다. “저는 평생 대기업에서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둘러보니 제가 도와줄 중소기업이 많겠더군요. 실제로 벤처기업 코칭을 해보면 기술 하나 갖고 시작해 규모는 커졌어도 사람을 어떻게 관리할지 모르는 딱한 상황이었습니다. 중소기업들도 조직 구성원의 강점과 약점, 조직문화를 돌아볼 기회는 없죠. 진정성을 갖고 코칭해줄 수 있는 강사를 찾는 것도 쉽지 않고요. 그런 회사들을 위해 내가 봉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경영 컨설팅같은 건가요. “‘코칭’은 뭔가를 가르치는 ‘티칭’과 다릅니다. 상대가 지닌 역량을 끄집어내는 활동이죠. 그중에서도 강점코칭은 ‘잘 하는 것을 더 잘하게‘하는 코칭입니다. 흔히 강점과 단점이 있으면 먼저 단점을 보완할 생각을 하기 쉽지만 단점은 놔두고 강점을 더 키워 전체 역량을 강화하는 겁니다.” -변화가 보입니까. “석달에 한번씩 3년째 코칭하는 회사가 있는데 젊은 사원들의 호응이 높습니다. 조직 분위기가 좋아지는 것을 사원들이 느끼는 거죠. 회사 입장에서는 그래도 비용이 드는데 계속 코칭을 의뢰하는 이유가 그런 데 있겠지요.” 그는 유비스 컨설팅의 유일한 코치다. 회사 코칭은 에너지 소모가 많고 집중력이 필요한 일. 한달에 딱 한군데만 해주는 걸 원칙으로 한다. 또 조직문화를 바꾸는 일이다보니 반드시 사장부터 코칭을 시작한다. “사장이 안 오고 밑의 직원만 보내면 안 해준다”고 한다. 최근 ‘LG가 사장을 만드는 법(세이코리아)‘이란 저서를 내고 유튜브 방송에 출연하는 것도 자신의 노하우를 나눠주기 위해서다. 대상은 주로 젊은 직장인들. 책에서는 LG가 사원을 임원으로 발탁해 사업가 후보로 집중 관리하며 사장으로 길러내는 방법, 직장의 정점에 오르는 자가 지녀야 할 자질 등을 상세히 안내했다. “독자들에게는 제 모습이 모진 풍파를 겪고 항구에 묶인 배의 잔해처럼 보일 수도 있고, 꼰대세대의 자기자랑처럼 느껴질 수 있겠다는 걱정도 듭니다. 하지만 직장생활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싶다면 한번 참고해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서른 넘은 아들, 이제 철이 든 걸까”언제부턴가 그는 엉뚱하게도 연예가 뉴스에 등장한다. 아들 이경이 잘나가는 배우가 됐기 때문이다. 아들이 유명해질수록 아버지의 신원과 연봉 등도 ‘엄친아’ ‘금수저’ 등의 표현과 함께 기사화 됐다. 이런 이경이 2년 전쯤 올린 유튜브 영상 “부모님께 ‘갑자기’ 꽃을 드려봤습니다”가 눈에 들어왔다. 어느 날 갑자기 꽃다발 2개를 산 이경이 집에 가서 부모님께 전달하는 장면을 찍은 영상이다. 당시 아버지는 눈물을 흘렸지만 아들의 지적에 ‘우는 거 아니라’고 잡아뗐다. 이번에 그 이유를 물으니 “아이가 드디어 철이 들었나하는 생각에”라고 말한다. 실제 유튜브에서 이경은 이런 세레머니를 하는 이유를 “부모님과 더 자주 사진을 찍어놓고 싶어서”라 밝혔다. 머물 수 없는 세월의 섭리를 30대가 된 아들이 느낀 걸까. 한때는 게임에 빠졌고 고교를 자퇴했던 아들은 군대까지 마친 뒤 연기자가 되겠다고 나섰다. 아버지는 대개 자녀의 뜻을 따라줬고, 심지어 고교 자퇴를 권하기도 했다. 다만 방송가에서 기반을 잡아나가는 아들에 대해 아버지는 “부모도 자식을 다 모른다”고 고백한다. 베이비붐 세대인 아버지는 어릴 적 꿈이 스포츠캐스터였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야간고를 나와 공대에 진학했고 졸업과 동시에 취업했다. 회사에서 37년간 ‘수처작주’를 되뇌며 자신을 강제하고 책임을 다하는 삶을 꾸려왔다. MZ세대 이이경은 자신의 꿈을 좇아 이것저것 해보고 자신의 일을 한껏 즐기는 해맑음을 보여준다. 각자 시대배경에 따라 버전이 달라졌을 뿐, 열심히 사는 대목은 꼭 닮은 부자의 모습이다.※ 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건강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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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인의식 가지니 성공 따라와… 이젠 기업 강점 살려주는 코칭에 열정”[서영아의 100세 카페]

    한 회사 울타리 안에서 37년간 일했다. 26세 청년은 63세 초로의 나이가 됐다. 이쯤 되면 그의 인생 전체가 회사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회사란 때가 되면 반드시 떠나야 하는 곳. 퇴직으로부터 2년이 더 지난 지금, 그의 인생 2막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을까. 17일 서울 금천구 본인의 사무실에서 만난 이웅범 전 LG이노텍 사장(65)은 “떠났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직 그때 사람들을 자주 만납니다. 사실 떠날 수 없죠. 제 인생 대부분이 거기 있었는데요. 여전히 프로야구에서 (LG 트윈스가) 지면 온종일 속상하고….” 그에게 회사는 고향 같은 곳이 돼 있다.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는 자세로” 그는 평사원에서 최고경영자(CEO)까지 올라간 입지전적 인물이다. 1983년 반도상사(현 LX인터내셔널)에 입사해 LG전자, LG이노텍, LG화학 등을 거치며 17년을 직원, 18년은 임원으로 지냈다. LG이노텍 사장과 LG화학 전지사업본부장(사장)을 맡아 성공 신화를 썼다. 최종 이력은 LG가 설립한 연암공대의 총장이었다. ―처음부터 ‘여기 내 인생 다 걸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시죠. “당연하죠. 중간중간 그만둘 뻔한 일이 많았습니다. 함께하는 사람들과 잘 맞았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고, 특히 윗사람 운이 좋았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봐주신 분들이 있었어요. 그건 결국 신뢰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 봅니다.” 조직은 팔로어십과 리더십의 상호작용을 통해 굴러간다. 매출이 급증하는 생산 현장에서는 다소 무리한 계획도 세우곤 했지만 이런 때 “해 봐, 믿으니까”라고 말해주는 상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이 상사가 됐을 때도 후배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려 했다. 그는 직장 생활의 자세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을 소개한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찾던 성지사 스님이 주신 편액에 쓰인 금언으로,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는 뜻이다. “이 금언은 늘 저를 더 높은 관점에서 바라보고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채근했습니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지침이 됐지요.” LG이노텍 카메라모듈 사업은 그가 LG전자 부품소재사업 본부장으로 일하기 시작한 2010년을 기점으로 급성장했다. 애플의 수주액은 첫해 3000억 원, 2011년 9700억 원으로 급증했다. 2011년 말 그는 아예 LG이노텍 대표이사(부사장)로 취임했고 카메라모듈 매출은 2012년 2조 원, 이듬해 2조5000억 원을 돌파했다. ○만년 야전사령관 그에겐 ‘야전사령관’이란 별명이 따라다녔다. 일화 하나. 애플이 2012년 4분기(10~12월) 갑자기 발주 물량을 늘렸다. 위기와 기회가 함께 찾아온 셈. “현장 인원 1000명을 새로 투입해야 할 물량인데, 신입사원 뽑을 시간도 없었죠. 며칠 궁리 끝에 노조위원장을 만나 전국 공장의 인력을 최대한 끌어모아 구미 생산라인에서 일하도록 협조를 구했습니다.” 전사적 동원체제였다. 공장 인력뿐 아니라 사무기술직, 연구소 직원, 사내 변호사까지 구미 생산라인에 투입됐다. “모두가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 잘 알았죠. 손은 더뎠지만 품질이 높은 상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점차 생산성도 현장사원 수준으로 올라갔죠. 그 많은 물량을 높은 품질을 유지하며 납기를 맞추자 애플의 신뢰가 커졌고 주문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부수 효과도 있었다. 그때의 경험이 자기 업무에 도움이 됐다는 직원이 많았다. 예컨대 연구개발 부서 직원은 직접 만들어본 카메라 모듈을 떠올리면서 연구개발을 할 수 있게 됐고, 관리부서 직원은 원가를 계산하고 절감하는 연구를 더 생생하게 할 수 있었다.○ “가야 할 때를 아는 아름다운 사람” 연암공대 총장 퇴임이 다가오면서 이런저런 제안들이 들어왔다. 가장 마음이 끌렸던 것은 기술력 있는 벤처기업을 경영해 달라는 요청이었지만 부인의 만류가 컸다. “‘평생 일했으면 됐지, 이 나이에 돈을 번들 뭐하겠느냐. 자식들 좋은 일이나 시키는 거지. 그냥 쉬엄쉬엄 사람들이나 도와주라’고. 똑소리 나게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사실 새로 기업을 경영한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죠. ‘가야 할 때를 아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로 했습니다.” 그가 택한 것은 코칭. 개인과 기업에 대한 코칭을 통해 오랜 경영자 생활에서 얻은 노하우와 지식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생각했다. 퇴임과 동시에 갤럽사가 인증하는 ‘강점코치’ 자격증을 따고 자신의 이름을 건 ‘유비스(UB‘s) 컨설팅’을 만들었다. “저는 평생 대기업에서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둘러보니 제가 도와줄 중소기업이 많겠더군요. 실제로 벤처기업 코칭을 해보면 규모는 커졌어도 사람을 어떻게 관리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중소기업들도 조직 구성원의 강점과 약점, 조직문화를 돌아볼 기회는 없죠. 그런 회사들을 위해 내가 봉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경영 컨설팅 같은 건가요. “‘코칭’은 뭔가를 가르치는 ‘티칭’과 다릅니다. 상대가 지닌 역량을 끄집어내는 활동이죠. 그중에서도 강점코칭은 ‘잘하는 것을 더 잘하게’ 하는 코칭입니다. 흔히 강점과 단점이 있으면 먼저 단점을 보완할 생각을 하기 쉽지만 단점은 놔두고 강점을 더 키워 전체 역량을 강화하는 겁니다.” 그는 유비스 컨설팅의 유일한 코치다. 회사 코칭은 에너지 소모가 많고 집중력이 필요한 일. 한 달에 딱 한 군데만 해주는 걸 원칙으로 한다. 또 조직문화를 바꾸는 일이다 보니 반드시 사장부터 코칭을 시작하도록 하고 있다. “사장이 안 오고 밑의 직원만 보내면 안 해 준다”고 한다. 최근 ‘LG가 사장을 만드는 법(세이코리아·작은 사진)’이란 저서를 내고 유튜브 방송에 출연하는 것도 자신의 노하우를 나눠주기 위해서다. 대상은 주로 젊은 직장인들. 책에서는 LG가 사원을 임원으로 발탁해 사업가 후보로 집중 관리하며 사장으로 길러내는 방법, 직장의 정점에 오르는 자가 지녀야 할 자질 ‘‘‘등을 상세히 안내했다. “독자들에게는 제 모습이 모진 풍파를 겪고 항구에 묶인 배의 잔해처럼 보일 수도 있고, 꼰대 세대의 자기 자랑처럼 느껴질 수 있겠다는 걱정도 듭니다. 하지만 직장생활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싶다면 한번 참고해 보셔도 좋을 듯합니다.”○“서른 넘은 아들, 이제 철이 든 걸까”요즘 그는 엉뚱하게도 가끔 연예계 뉴스에 등장한다. 아들 이경이 잘나가는 배우가 됐기 때문이다. 아들이 유명해질수록 아버지의 신원과 연봉 등도 ‘엄친아’ ‘금수저’ 등의 표현과 함께 기사화 됐다. 이런 이경이 2년 전쯤 올린 유튜브 영상 “부모님께 ‘갑자기’ 꽃을 드려봤습니다”가 눈에 들어왔다. 어느 날 갑자기 꽃다발 2개를 산 이경이 집에 가서 부모님께 전달하는 장면을 찍은 영상이다. 당시 아버지는 눈물을 흘렸지만 아들의 지적에 ‘우는 거 아니다’라고 잡아뗐다. 이번에 그 이유를 물으니 “아이가 드디어 철이 들었나 하는 생각에”라고 말한다. 실제 유튜브에서 이경은 이런 세리머니를 하는 이유를 “부모님과 더 자주 사진을 찍어놓고 싶어서”라고 밝혔다. 머물 수 없는 세월의 섭리를 30대가 된 아들이 느낀 걸까. 베이비붐 세대인 아버지는 어릴 적 꿈이 스포츠캐스터였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야간고를 나와 공대에 진학했고 졸업과 동시에 취업했다. 회사에서 37년간 ‘수처작주’를 되뇌며 자신을 강제하고 책임을 다하는 삶을 꾸려 왔다. MZ세대 이이경은 자신의 꿈을 좇아 이것저것 해보고 자신의 일을 한껏 즐기는 해맑음을 보여준다. 각자 시대 배경에 따라 버전이 달라졌을 뿐, 열심히 사는 대목은 꼭 닮은 부자의 모습이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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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움큼 노인의 약, 누구에게 정리받아야?[서영아의 100세 카페]

    “고향에 혼자 계신 팔순 노모가 매일 한웅큼씩 약을 드신다. 의사들이 준 것이니 다 드셔야 몸에 좋다고 믿으시는데 걱정이 된다. 이걸 어디 물어봐야 할지도 막막하다.” 노인의학에 대한 기사에 달린 이런 댓글을 보며 노인 약에 대한 안전관리 시스템이 궁금해졌다. 한움큼 노인의 약, 어떻게 다뤄야 할까.● 약 부작용 치료 위해 또다른 약 처방하는 ‘처방연쇄’실상을 알기 위해 우선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에 내원한 케이스를 가져왔다. 낙상으로 누워 지내게 된 85세 여성 A씨의 병력을 보면 부작용을 치료하기 위해 새로운 약이 처방되는 ‘처방연쇄’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시작은 고혈압 약이었다. 그가 먹던 약은 칼슘채널차단제(CCB) 계열인데, 노인에서는 심하게 붓고 변비와 무기력증을 가져오는 부작용이 잦다. 다리가 퉁퉁 부어 병원을 찾은 그에게 의사는 강력한 이뇨제를 처방했다. A씨는 그 뒤 너무 자주 화장실에 가다보니 요실금이라 생각해 비뇨기과에서 요실금 치료제를 처방받았다. 이 약은 변비와 인지기능 저하를 유발했다. A씨는 이번에는 신경과에 가서 치매진단을 받고 치매약과 뇌영양제를 받았다. 치매약은 요실금을 악화시킨다. 밤에 소변 때문에 4번씩 깨다보니 다시 비뇨기과를 찾은 A씨에게 의사는 더욱 강한 항콜린성 약을 처방했다. 항콜린성 약은 졸음과 무기력증을 가져와 낙상 위험을 높인다. A씨에게 결국 낙상이 찾아왔다. 이처럼 증상만을 쫓아 내과와 비뇨기과, 신경정신과를 돌다보면 처방의 원인과 결과가 꼬리를 무는 무한반복이 일어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환자의 심신은 만신창이가 된다. 노년내과에서는 이런 상태를 ‘약으로 떡이 진’ 상태라 표현한다. 일본 고령자 의료에서는 흔히 ‘약 절임(藥漬け)’이라고 부른다. 이같은 연쇄의 악순환을 끊는 데는 ‘약을 걷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탈(脫)처방이라고 한다. 쇠약증으로 병원에 입원한 78세 여성 B씨 사례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시행중인 ‘다제약물 관리사업’에 포함돼 있었다. B씨는 그간 정형외과와 신경과, 내과에서 혈압약과 어지러움약, 위장약 등을 처방받아 먹어왔다. 서행성 보행과 손떨림 등 파킨슨병과 유사한 증세를 보였는데, 신경과 검사에서 B씨가 보이는 파킨슨병 증세가 약물유발성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정형외과에서 처방한 위장운동조절제에 유사 파킨슨병 유발 성분이 들어 있었던 것. 이 약을 끊자 환자는 점차 회복 양상을 보였다. 전신무기력 증세도 신경안정제와 근육이완제, 수면제 등 중추신경계 억제약이 처방돼 있는 것과 관련이 깊다고 판단해 근육이완제는 중단하고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는 감량했다. 이런 사례들은 요행히 전문가의 검토를 받은 경우지만 비슷한 처지에 이유도 모르고 시름시름 앓고 있을 고령자가 더 많을 것임은 불 보듯 뻔하다. 또 입원할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점진적으로 건강을 잃어가는 고령자들도 우려된다. 지역사회에서 진행되는 ‘다제약물 관리사업’의 대상이 된 노인 중에는 한사람이 30종 이상 약물을 복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예컨대 의원 3군데에서 각기 다른 위장약을 처방받아 모두 복용하거나 처방약과 동일한 일반의약품을 구매해 이중으로 복용하는 등 다양한 사례가 있었다. 또 기초생활수급을 받는 독거 노인이나 요양원 입소자들에서 약물 남용이 눈에 띄었다. ● 한국 노인 260만 명, 5개 이상 약제 90일 이상 복용고령화와 만성질환 증가로 다약제(polypharmacy) 복용인구는 갈수록 늘고 있다. 한국의 65세 이상 고령자 중 5개 이상 약물을 복용하는 사람이 약 260만 명, 10개 이상 약물을 복용하는 고령자는 81만 5000여명에 이른다. 복용약물 개수가 늘면 약물 상호작용과 중복처방의 위험도 커진다. 고령자는 약물대사능력이 떨어져 늘 먹던 약에 다른 반응을 나타내는 당혹스런 일도 생긴다. 약물로 인한 부작용은 흔히 인지기능저하, 낙상, 섬망, 욕창, 배뇨장애 등 노인증후군으로 나타난다. 노인의 다약제를 부추기는 원인 중심에는 진료과 중심의 의료제도가 있다. 환자는 증상에 따라 각기 다른 병원을 찾아가야 한다. ‘3분 진료’에 쫓기는 의사들은 각기 자기 과에 초점을 맞춰 약물처방을 하면 그뿐, 환자가 다른 과에서 어떤 약을 처방받아 복용하고 있는지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결국 각 진료과에서 그때그때 처방해주는 약들이 쌓이게 된다. 반대로 환자가 진료에 만족하지 않으면 쉽게 다른 의사를 찾아나서는 의료쇼핑도 약을 늘리는 이유가 된다. 이런 때는 누군가가 약물을 점검해 중복되거나 과다한 약물 복용을 줄이게 해야 하는데, 이같은 약물조정 작업은 전문성이 필요하고 상당한 수고가 따르지만 의료수가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현실적 문제가 있다. 쉽게 말해 무보수인 것.● 의료 선진국선 주치의가 걸러주고 연 1~2회 약국에서 약 정리받아고령화가 서서히 진행된 선진국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까. 영국에서는 1940년대부터 주치의 제도를 기반으로 한 의료시스템을 구축했다. 2005년부터는 지역약사가 환자의 약물복용 상황을 점검해주는 시스템이 가동됐다. 두가지 이상 약물을 복용하거나 고위험 약물(비스테로이드 항염증제, 항응고제, 항혈전제, 이뇨제) 중 하나를 복용하는 고령자는 1년에 한번씩, 10개이상 약물을 복용하는 고위험군의 경우 연 2회 약물검토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약사는 28파운드(약 4만 3800원) 가량의 수가를 받는다. 캐나다 호주 등 과거 영연방이던 국가들에서 비슷한 제도를 운영중이다. ‘노인 부적절 약물’을 따로 지정하는 움직임도 늘고 있다. 미국에서는 1991년 비어스(Beer‘s) 지침이 개발돼 업데이트를 거치며 사용된다. 노인에게 사용하면 효과가 없거나 부작용 위험이 높은 약물에 대해 사용하지 말 것을 권하는 목록이다. 2008년 아일랜드는 비어스 지침의 한계점을 보완한 노인주의약품 사전점검지침(STOPP)을 개발해 발표했다. 2003년 개정된 비어스 기준에 33개 약물을 추가하고 계통별로 65개의 항목으로 정리했다. 처방과 투여기간의 적절성, 약물-약물 상호작용, 약물-질병 상호작용, 약물 중복처방까지 범위를 확장했다. 캐나다와 프랑스 노르웨이 독일 등에서도 유사한 지침이 나왔다. 한국에서는 식품의약품 안전청이 2009년 낸 ’노인에 대한 의약품 적정사용 정보집‘이 첫시도라 할 수 있으나 국내 실정에 맞는 내용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5년 10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의약품안전사용서비스(DUR)을 통해 노인 주의(注意) 의약품 20개 성분(벤조다이아제핀 13개, 삼환계 항우울제 7개 대상)을 지정했고 지난해 7월 이를 102개 성분까지 확대했다. ● 갈 길 먼 한국의 다약제 관리 사업최근 노인의 다약제 관리를 위한 노력이 다방면에서 이뤄지고 있지만 갈 길은 멀다. 분당서울대병원 서울아산병원 신촌세브란스 등 대형병원들은 노년내과를 중심으로 탈 처방을 시도하고 있다. 특히 서울아산병원은 2018년 ’약물조화클리닉‘을 만들어 환자별 맞춤형 약물 최적화를 도모한다. 클리닉 전담약사가 노년내과 교수와 함께 외래진료실에 들어가 환자의 복약 현황과 병력을 듣고 의사와 함께 약물관리 방안을 짜는 방식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2018년부터 약사회와 함께 ’다제약물 관리사업‘을 시작했는데, 이 또한 시범사업 단계다. 첫해 9개 지역에서 약사가 가정방문을 통해 약물복용 지도를 시작해 지난해 106개 지역까지 확대됐다. 지난해에는 35개 병원도 참여했다. 다만 시범사업인 만큼 관리 대상은 한정적이다. 46개 만성질환자, 상시 복용하는 약 성분이 10개 이상이거나 마약성 진통제, 항응고제 등 ’집중관리약제‘를 처방받은 환자가 포함된다.건강보험공단 다제약물 관리사업-대상 만성질환(46개) 고혈압, 지질대사 장애, 만성 요통, 고도 시력 감퇴, 무릎 관절증, 당뇨병, 만성 허혈성 심질환, 갑상선 이상, 심부정맥, 비만, 대사교란/통풍, 전립선 비대증, 하지 정맥류, 간 질환, 우울증, 천식/만성 폐쇄성 폐질환, 비염증성 부인과 질환, 죽상동맥 경화증/말초동맥 폐색 질환, 골다공증. 신기능 부전, 만성 뇌졸증, 심부전증, 고도 청각손실, 만성 담낭염/담석, 신체형 장애, 치핵, 장 게실증, 류마티스 관절염, 심장 판막 질환, 신경장해, 어지럼증, 치매, 요실금, 요로 결석, 빈혈증, 불안, 건선, 편두통/만성 두통, 파킨슨병, 암, 알레르기, 만성 위염/위-식도 역류질환, 성기능 장애, 불면증, 담배 남용, 저혈압-집중관리약제(1) 마약성 진통제, (2) 항응고제, (3) 인슐린, (4) 삼환계 항우울제, (5) 중추신경계 억제약물 3성분. (6) 항콜린성 약제 2성분, (7) NSAIDs 2성분, (8) 부신피질호르몬제 (9) 경구 혈당 강하제 3성분, (10) 고혈압 약제 3성분, (11) 소화기관용 약제 3성분, (12) 흡입기다약제 관리사업 참여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고민은 “의사와 약사 간 소통의 통로가 없다”는 점이다. 영국 약사들은 주치의에게 처방 변경을 요청할 수 있지만, 한국은 제도화된 통로가 없다보니 처방변경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서울아산병원 이미리내 약사는 “고령자의 다약제 관리는 의사와 약사가 각기 다른 관점에서 환자의 병력청취와 현황파악을 통해 연관관계를 평가한 뒤 종합적 검토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며 의사와 약사의 협력을 강조한다. 배민숙 건보공단 만성질환관리실 의료이용지원부장은 “만성질환을 가진 고령자일수록 이 병원 저 병원에서 증세만 가지고 관리해서는 안된다”며 “환자를 온전히 포괄적 통합적으로 관리해주는 주치의같은 존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1월 ’노인의 다약제 사용 관리방안‘ 보고서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국내에서는 ’다약제 사용‘ 혹은 고위험 의약품을 정의하는 기준조차 명시적으로 합의된 바가 없다”는 것. “노인에게 위험도가 높은 다약제 사용 조합에 대해 기준을 도출해야 한다”는 얘기다.● 노인의 약 관리, 국가차원 로드맵 필요그러면 지금 당장 고향 어머니의 한움큼 약은 어디에 자문을 구해야 할까. 우선 노년내과가 설치된 병원들에 가서 의뢰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지만 매우 한정적이다. 서울시에서 운영중인 ’세이프약국‘을 찾아가는 것도 방법이다. 5개 이상 약물을 복용하거나 2가지 이상 만성질환을 앓는 사람의 약물상담과 복약지도를 해준다. 현재 400여개 약국이 등록돼 있는데 인터넷 서울열린데이터광장에서 검색하면 가장 가까운 약국을 찾을 수 있다.무엇보다 환자 스스로 똑똑해져야 한다. 자신이 복용하는 모든 약을 목록화하거나 처방전을 보관해두고, 필요시 병원이나 약국에 알려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운영하는 DUR의 ’내가 먹는 약! 한눈에‘ 서비스에 들어가면 자신의 투약이력을 들여다볼 수 있다. 한국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에서도 가장 빠르게 늙어가는 나라다. 궁극적으로는 노인의 약 관리를 위한 국가 차원의 로드맵이 필요하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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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작용 막는 약까지 한 움큼… 중복-과다복용 피할 ‘정책처방’ 절실[서영아의 100세 카페]

    “고향에 혼자 계신 팔순 노모가 매일 한 움큼씩 약을 드신다. 의사들이 준 거니 다 드셔야 한다는데 걱정이 된다. 이걸 어디 물어봐야 할지도 막막하다.” 노인의학에 대한 기사에 달린 이런 댓글을 보며 노인 약에 대한 안전관리 시스템이 궁금해졌다. 한 움큼 노인의 약, 어떻게 다뤄야 할까.○ 약 부작용 치료 위해 또 다른 약 처방 ‘처방연쇄’ 실상을 알기 위해 우선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에 내원한 케이스를 가져왔다. 낙상으로 누워 지내게 된 85세 여성 A 씨의 병력을 보면 부작용을 치료하기 위해 새로운 약이 처방되는 ‘처방연쇄’의 폐해를 볼 수 있다. 시작은 고혈압 약이었다. 그가 먹던 약은 칼슘채널차단제(CCB) 계열인데, 노인에게서는 심하게 붓고 변비와 무기력증을 가져오는 부작용이 잦다. 다리가 퉁퉁 부어 병원을 찾은 그에게 의사는 강력한 이뇨제를 처방했다. A 씨는 그 뒤 너무 자주 화장실에 가다 보니 요실금이라 생각해 비뇨기과에서 요실금 치료제를 처방받았다. 이 약은 변비와 인지기능 저하를 유발했다. A 씨는 이번에는 신경과에 가서 치매 진단을 받고 치매 약과 뇌 영양제를 받았다. 치매 약은 요실금을 악화시킨다. 밤에 소변 때문에 4번씩 깨다 보니 다시 비뇨기과를 찾은 A 씨에게 의사는 더욱 강한 항콜린성 약을 처방했다. 항콜린성 약은 졸음과 무기력증을 가져와 낙상 위험을 높인다. A 씨에게 결국 낙상이 찾아왔다. 이처럼 증상만을 좇아 내과와 비뇨기과, 신경정신과를 돌다 보면 처방의 원인과 결과가 꼬리를 무는 무한반복이 일어나게 된다. 환자의 심신은 만신창이가 된다. 이 같은 연쇄의 악순환을 끊는 데는 ‘약을 걷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탈(脫)처방이라고 한다. 쇠약증으로 병원에 입원한 78세 여성 B씨 사례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시행 중인 ‘다제약물 관리사업’에 포함돼 있었다. B 씨는 그간 정형외과와 신경과, 내과에서 혈압약과 어지러움약, 위장약 등을 처방받아 먹어 왔다. 서행성 보행과 손떨림 등 파킨슨병과 유사한 증세를 보였는데, 신경과 검사에서 B 씨가 보이는 파킨슨병 증세가 약물유발성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정형외과에서 처방한 위장운동조절제에 유사 파킨슨병 유발 성분이 들어 있었던 것. 이 약을 끊자 환자는 점차 회복 양상을 보였다. 전신무기력 증세도 신경안정제와 근육이완제, 수면제 등 중추신경계 억제약이 처방돼 있는 것과 관련이 깊다고 판단해 근육이완제는 중단하고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는 감량했다. 고령화와 만성질환 증가로 다약제(polypharmacy) 복용 인구는 갈수록 늘고 있다. 한국의 65세 이상 고령자 중 5개 이상 약물을 복용하는 사람이 약 260만 명, 10개 이상 약물을 복용하는 고령자는 81만500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한국에서 노인의 다약제를 부추기는 원인에는 진료과 중심의 의료제도가 있다. 환자는 증상에 따라 각기 다른 병원을 찾아가야 한다. ‘3분 진료’에 쫓기는 의사들은 각기 자기 과에 초점을 맞춰 약물처방을 하면 그뿐, 환자가 다른 과에서 어떤 약을 처방받아 복용하고 있는지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결국 각 진료과에서 그때그때 처방해 주는 약들이 쌓이게 된다. ○ 선진국선 주치의가 걸러주고 약국에서 약 정리 고령화가 서서히 진행된 선진국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까. 영국에서는 1940년대부터 주치의 제도를 기반으로 한 의료시스템을 구축했다. 2005년부터는 지역 약사가 환자의 약물 복용 상황을 점검해 주는 시스템이 가동됐다. 두 가지 이상 약물을 복용하거나 고위험 약물(비스테로이드 항염증제, 항응고제, 항혈전제, 이뇨제) 중 하나를 복용하는 고령자는 1년에 한 번씩, 10개 이상 약물을 복용하는 고위험군은 연 2회 약물검토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약사는 28파운드(약 4만3800원) 정도의 수가를 받는다. 캐나다 호주 등 과거 영연방이던 국가들에서 비슷한 제도를 운영 중이다. ‘노인 부적절 약물’ 지정도 늘고 있다. 미국에서는 1991년 비어스(Beer‘s) 지침이 개발돼 업데이트를 거치며 사용된다. 노인에게 사용하면 효과가 없거나 부작용 위험이 높은 약물에 대해 사용하지 말 것을 권하는 목록이다. 2008년 아일랜드는 비어스 지침의 한계점을 보완한 노인주의약품 사전점검지침(STOPP)을 개발해 발표했다. 2003년 개정된 비어스 기준에 33개 약물을 추가하고 계통별로 정리했다. 처방과 투여기간의 적절성, 약물-약물 상호작용, 약물-질병 상호작용, 약물 중복처방까지 범위를 확장했다. 캐나다와 프랑스 노르웨이 독일 등에서도 유사한 지침이 나왔다. 한국에서는 2015년 10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의약품안심서비스(DUR)를 통해 노인 주의 의약품 20개 성분(벤조다이아제핀 13개, 삼환계 항우울제 7개 대상)을 지정했고 지난해 7월 이를 102개 성분까지 확대했다.○갈 길 먼 한국의 다약제 관리사업 최근 노인 다약제 관리를 위한 노력이 다방면에서 이뤄지고 있지만 갈 길은 멀다. 대형병원에서는 노년내과를 중심으로 탈처방이 시도되고 있다. 특히 서울아산병원은 2018년 ‘약물조화클리닉’을 만들어 환자 맞춤형 약물 최적화를 도모하고 있다. 클리닉 전담 약사가 노년내과 교수와 함께 외래진료실에 들어가 환자의 복약 현황과 병력을 듣고 의사와 함께 약물관리 방안을 짜는 방식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2018년부터 약사회와 함께 ‘다제약물 관리사업’을 시작했는데, 이 또한 시범사업 단계다. 첫해 9개 지역에서 약사가 가정방문을 통해 약물복용 지도를 시작해 지난해에는 106개 지역으로 확대됐고 35개 병원도 참여했다. 다만 시범사업인 만큼 관리 대상은 한정적이다. 46개 만성질환자, 상시 복용하는 약 성분이 10개 이상이거나 마약성 진통제, 항응고제 등 ‘집중관리약제’를 처방받은 환자가 포함된다. 사업 참여자들은 “의사와 약사 간 소통의 통로가 없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한다. 영국 약사들은 주치의에게 처방 변경을 요청할 수 있지만, 한국은 제도화된 통로가 없다 보니 처방 변경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서울아산병원 이미리내 약사는 “고령자의 다약제 관리는 의사와 약사가 각기 다른 관점에서 환자의 병력 청취와 현황 파악을 통해 연관관계를 평가한 뒤 종합적 검토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며 의사와 약사의 협력을 강조한다. 배민숙 건보공단 만성질환관리실 의료이용지원부장은 나아가 “만성질환을 가진 고령자일수록 이 병원 저 병원에서 증세만 가지고 관리해서는 안 된다”며 “환자를 온전히 포괄적 통합적으로 관리해 주는 주치의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1월 ‘노인의 다약제 사용 관리방안’ 보고서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노인에게 위험도가 높은 다약제 사용 조합에 대한 명시적 기준부터 도출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당장 고향 어머니의 한 움큼 약은 어디서 자문을 구해야 할까. 우선 노년내과가 설치된 병원들에 가서 의뢰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매우 한정적이다. 서울시에서 운영 중인 ‘세이프약국’을 찾아가는 것도 방법이다. 5개 이상 약물을 복용하거나 2가지 이상 만성질환을 앓는 사람의 약물상담과 복약지도를 해준다. 현재 400여 개 약국이 등록돼 있는데 서울열린데이터광장에서 검색하면 가까운 약국을 찾을 수 있다.환자 스스로도 똑똑해져야 한다. 자신이 복용하는 모든 약을 목록화하거나 처방전을 보관해 두고, 필요시 병원이나 약국에 알려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운영하는 DUR의 ‘내가 먹는 약! 한눈에’ 서비스에 들어가면 자신의 투약 이력을 볼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노인의 약 관리를 위한 국가 차원의 로드맵이 필요하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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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퇴 후 수입공백, 연금투자 상품이 ‘효자손’

    50대 평범한 직장인 S 씨. 2년 전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법정 퇴직 연령이 10년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회사에서 이때까지 간신히 버틴다 해도 퇴직 후 국민연금이 나오기까지는 5년간의 소득 없는 기간이 기다린다. 노후 준비를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한 S 씨는 모바일을 통해 KB증권 IRP와 연금저축 계좌에 가입했다. 지금은 퇴직 때까지 장기 투자를 목표로 ELB, ETF, 리츠, 펀드 등 다양한 상품에 분산투자하고 있다.연금투자 3년차가 된 이제는 제법 주변 사람들에게 연금에 대한 아는 척하며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수준이 됐다. 그는 퇴직 후 보릿고개 시기에 이 연금이 효자 노릇을 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정년 이후 40년간 수입 공백 대비해야세상은 ‘100세 시대’를 논하지만 한국인의 법정 정년은 만 60세다. 정년을 꽉 채웠다 해도 재취업 기회가 생기지 않는 한 40년 동안 수입 공백이 생긴다. 한 달 생활비를 200만 원으로 가정하면 단순 계산으로 9억6000만 원의 노후 자산이 필요하다는 뜻이다.현실이 이런데도 직장인들의 노후에 대한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커지고 있다. 상당수 직장인이 ‘원금 보장’이란 가치를 쉽게 포기하지 못해 퇴직연금을 연 1% 수준 원금보장형 상품에 두고 있다.연금에 대한 무관심도 문제다. 처음 가입한 퇴직연금 상품을 ‘한 번도 바꾼 적 없다’고 답한 직장인이 68.4%나 된다는 통계가 있다. 자신이 직접 투자 상품을 고를 수 있는 계좌를 갖고 있는데도 이런저런 이유로 투자를 기피하곤 한다.하지만 연 1% 수준의 원금보장형 상품 수익률로는 물가상승률조차 따라가기 어렵다. 연금 운용 방법을 바꿔야 하는 이유다. 연금 투자는 다양한 상품에 분산투자하고, 경제 위기 등이 닥쳐 등락이 있다 해도 10년 이상 장기 투자하면 그만큼 리스크는 줄어든다. 증권업계 퇴직연금 사업자 중 최고 신용등급직장인이 현명하게 연금 투자하는 방법은 뭘까. 일단 노후 준비와 세액 공제 혜택을 위해 두 가지를 활용해야 한다. 첫째 연금저축펀드. 1인당 연간 1800만 원까지만 납입하도록 한도가 정해져 있다. 최소 5년을 납입하고 최소 55세 이후 인출하는 상품이다. 투자 상품이기에 중도해약 시 기타소득세가 매겨지며, 원금 손실 가능성도 있다. 다만 1800만 원 중 400만 원은 13.2%¤16.5%의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 주식형펀드에 투자해 손해 보더라도 50만¤60만 원은 돌려받는다는 얘기다.둘째 소득이 있는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IRP다. IRP로만 700만 원을 채워 세액 공제를 받거나, 연금저축 400만 원과 IRP 300만 원을 채워 같은 혜택을 받을 수도 있다. IRP 또한 55세 이후에 납입금을 받는다. 그전에 해지하면 세액 공제 받았던 걸 환급해야 한다. 금융기관을 선택할 때는 무엇보다 안정성을 따져봐야 한다. KB증권은 11개 증권업계 퇴직연금사업자 중 가장 높은 신용등급(AA+)을 보유하고 있으며, 해외 신용등급까지 획득했다. KB금융지주의 100% 자회사로 브랜드 인지도와 안정성을 가진다. 은행 증권 간 복합 점포를 중심으로 전국에서 108개 영업망을 제공한다. 경쟁력 있는 수수료율도 고려 대상이다. 대부분 증권사들이 계좌 개설과 상품운용 지시를 비대면으로 할 것을 조건으로 수수료 무료 혜택을 주는데, KB증권은 지난해 6월부터 비대면으로 IRP 계좌 개설만 해도 운용 지시 방법에 상관없이 전액 무료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KB증권 IRP, 리츠·ETF 등 다양한 투자 전략연금 계좌는 적립하고 불리고 수령하는 긴 안목이 필요한 계좌다. 자산 관리 관점에서 적립 시기와 인출 시기에 따라 변동하는 시장에 대응하며 수익률을 높여야 한다. IRP는 다양한 상품을 포트폴리오로 운영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 물가상승률과 수수료 등을 참고해 원리금 보장 상품 중에서도 수익률이 높은 저축은행예금이나 증권사 ELB, 보험사 GIC 상품 등으로 주기적으로 상품을 변경해가며 운용하는 것이 좋다. IRP는 상품 변경에 제한이 없고, 하나의 IRP 계좌에 본인이 원하는 상품들을 구성할 수 있어 운용의 묘를 살릴 수 있다.배당 이익과 시세 차익을 모두 원하다면 소액으로 부동산에 투자하고 언제든지 현금화도 가능한 상장 리츠도 있다. 최근 인플레이션과 금리 상승이 예상되면서 리츠는 고정 소득이 필요한 은퇴자에게 적합한 상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최근 4년간 국내 리츠 평균 배당수익률이 7.6%¤9.5%에 달한다.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수준이다.KB국민은행 계열사도 은퇴 자산관리 전문 컨설팅KB국민은행은 전국 11개 지역에 시니어전용 은퇴 자산관리 전문 상담센터로 ‘KB골든라이프센터’를 운영 중이다. KB생명보험은 기존 종신보험의 패러다임을 전환해 ‘고객 이익 최우선’ 가치를 반영한 ‘7년의약속 무배당 KB평생종신보험Ⅱ’를 비롯해 라이프 사이클에 맞춰 다양한 노후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했다. 푸르덴셜생명보험은 VIP 자산가들에게 체계적인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WM(STAR Wealth Management)’을 운영한다. 전문 자격을 보유한 종합금융 전문가들이 자산 성장과 상속, 은퇴, 노후 설계 등의 금융 서비스를 제공해 노후 준비를 충실하게 돕는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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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EO 은퇴한 60대, 교사가 되다 [서영아의 100세 카페]

    19일 오후 2시 경 경기도 안산시에 자리한 특성화고 경일관광경영고의 한 교실. 나이 지긋한 교사의 말에 학생들이 귀 기울이고 있다. 이대호 교사(62)가 진행하는 ‘비서학’ 수업이다. 해외 출장을 준비할 때의 행정업무에 대해 강의 중인데, 항공권이나 호텔 예약법 등 설명은 매우 구체적이다. 이 교사가 갑자기 물었다. “이 중에 해외여행 가 본 사람?” 교실 안은 조용하다. “요즘은 취직만 하면 무조건 최저임금은 보장받아요. 연봉으로 2300여 만 원은 받는 거죠. 여러분이 나중에 휴가 받아서 여행갈 때도 오늘 배운 것들을 써먹을 수 있지요.” 컴퓨터 앞에서 검색에 열중하는 학생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교사 정년 훌쩍 넘긴 기간제 교사 2년차 이 씨는 이 학교의 취업전담 교사다. 지난해 초 경기도 교육청 공모에 응해 기간제 교사로 채용됐다. 그의 인생 2막이 극적인 반전처럼 찾아왔다. 산전수전 다 겪은 끝에 “어, 여기 내 천직이 있었네?”라고 깨닫는 느낌이랄까. “제 인맥과 정보, 경험을 총동원해서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일자리를 매칭시키는 일을 합니다. 30여 년 간 다양한 직장을 경험해왔지만 가장 보람이 느껴집니다.” 주 4시간씩 수업하고 나머지 시간은 학생들의 취업처 발굴과 현장실습 운영, 취업 지원에 바친다. 안산 일대는 반월·시화공단과 안양·가산 벤처단지 등 지속적으로 일손수요가 많은 지역. 하지만 중소기업들은 구인난에 시달리고 학생들은 구직난에 힘들어한다. 그는 이런 미스 매치를 해결한다는 보람을 느끼고 있다. “지역 특성상 다문화 가정도 많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도 있습니다. 가장이나 다름없는 학생들을 취업시키고, 열심히 회사 생활 하는 것을 보면 뿌듯하기 그지없죠.” 매일 아침 7시면 학교에 출근해 취업정보실을 개방한다. 집에서 컴퓨터 작업을 못한 학생들을 받아주기 위해서다. 본인도 취업정보를 검색해 학생들에게 맞는 것들을 추려 공지한다. 대졸 위주인 정보의 바다 속에서 ‘고졸’을 위한 취업정보를 솎아내는 작업이다. 다문화 가정 자녀들이 졸업과 동시에 취업할 수 있도록 F4 비자 발급도 돕고 있다. “제 자신이 지방에서 상고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대학과 대학원을 마쳐 학생들의 고충을 잘 아는 편입니다.” 간혹 학생들이 인터넷에서 그의 신상을 검색해 ‘대표이사’ ‘벤처기업인’ 등의 수식어를 찾아 들고 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과거를 잊고 산 지 오래”라고 말한다. 그는 고교 졸업 직후부터 여러 회사를 거쳤다. 10여 년간 근무했던 회사는 외환위기(IMF) 때 해체됐다. 2002년 당시 방과후학교 회사인 ‘에듀박스’(현 골드앤에스)에 들어가 대표이사까지 올랐다. 당시 그가 런칭시킨 초등학생 말하기 영어학원 ‘이보영의 토킹클럽’은 한때 전국에 500개까지 늘어나며 ‘대박’을 쳤다. 2017년부터는 다른 회사로 자리를 옮겨 코딩교육사업을 벌이기도 했지만 2년 만에 사업을 접게 됐다. 동시에 그의 직장생활도 끝났다. ●구인과 구직의 미스매치그와 손발 맞춰 일하는 안산시청 일자리센터 소속 박상임 취업지원관은 “학교들도 대개 정년이 지난 사람은 잘 안 쓰려 하지만 이 분은 특별케이스”라고 귀띔한다. 교사들보다 회사를 잘 이해하기 때문에 기업 대응에서 유연하고 인맥을 살릴 수도 있다는 것. 그는 인맥을 활용해 골프장 등 새로운 취업처를 발굴하는가 하면 취업처 발굴을 위해 화성 용인 당진 등 원거리 출장을 도맡아 동료교사들의 수고를 덜어주고 있다고 한다. 그는 늘 면접에는 학생을 자신의 차에 태우고 함께 간다. “길도 잘 모를 거고, 선생이 있으면 아이들이 안심도 되지요. 머뭇거릴 때 추임새도 좀 넣어줄 수 있고요. 또 고용주 측도 조심하게 되죠.” -청년들이 취업시장에서 홀대받는 모습만 봤는데 우리 학생들이 복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직 온실에서 자란 새싹들인데 그냥 내놓으면 다 죽죠. 보호해줘야죠. 늘 사장님들에게 ‘학생들을 내 가족이라 생각하면서 가르쳐달라’고 당부드립니다. 그는 한국 프랜차이즈산업협회 부회장, 코스닥협회 자문위원 같은 일을 오래 해서 큰 회사 대표나 임원들 사이에 발이 넓다. 여차하면 도움을 요청할 곳이 많은 것. 직장생활할 때 사용하던 마케팅 기법을 응용해 한번 학생들을 보낸 곳일수록 자주 방문해 관심을 보이고 거기서 추가채용이 일어나도록 애쓴다고 한다. 요즘은 특성화고라 해도 졸업생 절반은 진학을 택한다. 지난해 이 학교 졸업생 270여 명중 40%가 취업했고 40%는 상급학교에 진학했다. 취업은 2~3개월의 현장실습을 거쳐 이뤄지는데 학교 측은 사전에 기업 측으로부터 ‘특별한 일 없으면 채용한다’는 약정서를 받는다. 학교와 교육청, 학부모 학생들이 약정이 지켜지는지 수시로 감시한다. ”지역사회와 학교가 ‘빽’이 되는 셈이죠. 정부도 든든히 받쳐줍니다. 업체 입장에서도 특성화고 학생들을 많이 받으면 정부로부터 혜택이 늘어나니 서로가 ‘윈윈’이지요.“●“얘들아. 딱 3개월만 참아보자” 가장 큰 고민은 애써 취직시키면 1년 안에 30% 정도가 그만둬버린다는 점. 기업 측으로부터도 강력한 항의가 들어온다. “일껏 일할 만하게 가르쳐놓으면 그만두는 경우가 많거든요. 아예 ‘공부 못해도 좋으니 10여 년 이상 일할 착실한 직원을 원한다’며 ‘우리가 시집도 보내고 학교도 보내주겠다’고 말해오는 회사도 있어요.” -요즘 인력송출업체를 통해 젊은 인력을 2년 쓰고 버리는 식의 고용이 많은데, 이 지역은 안 그런가보네요.“저희는 정규직 아니면 보내지 않습니다. 젊은이의 기회비용을 소중히 여겨야지요. 그런만큼 저는 학생들에게 ‘힘들고 어려운 것 많겠지만 딱 3개월만 참고 버텨보자’고 말하곤 합니다. 3개월을 버티고 나면 1년을 버틸 힘이 생기고 1년을 일하면 자리를 잡을 수 있지요. 3년을 근무하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재직자 전형’도 있어요. 인근 한양대(에리카) 한국공학대 등 좋은 대학 가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그는 반 년 전 서울 청담동의 회원제 고급레스토랑에 취업시킨 졸업생으로부터 최근 받은 문자 얘기를 꺼냈다. “‘아직 잘 다니고 있다. 감사하다’고. 집에서 출근하려면 전철 3개 노선을 갈아타고 1시간 반 걸리는데, 잘 버티고 있네요. 그런 친구는 분명히 성공할 거라 봅니다. 출퇴근 왕복 3시간을 견뎌낼 정도 뚝심이라면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이겨낼 수 있어요.”●“죽는 날까지 일하고 싶다” -인생 2막에 즈음해 중장년들의 가장 큰 고민이 적절한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는 점일 겁니다. 드물게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자리를 찾으신 듯합니다. 비결은 뭘까요. “귀를 열어둔 게 도움이 된 것 아닐까요. 우연히 나간 모임에서 이런 직업이 있다는 얘길 듣게 됐습니다. 마침 대학 다닐 때 교사자격증을 따놓았거든요. 평생 꿈꾸던 교직 생활을 했으니 더 이상 욕심이 없어야 하는데 초롱초롱한 학생들을 보며 그들의 꿈과 희망을 어떻게건 돕고 싶은 의욕이 마구 솟구칩니다. 올초 교사정년 나이가 지나 걱정했지만 기간제 교사로 재계약 됐을 때는 무척 기뻤습니다.” 그는 2019년 마지막 직장을 정리한 뒤 1인출판사를 준비했지만 코로나 상황이 겹치면서 아무것도 못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자기자본 들여서 하는 일에 집안의 반대가 컸다고. “IMF 이후 회사 차렸다가 망하고 자사주 매입했다가 손해보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거든요.” 부천 자택에서 학교까지 25km를 운전해 출퇴근한다. 국민연금이 올 2월부터 나오고 학교에서 받는 급여는 과거 수입의 3분의 1 수준이지만 대만족이다. -노후준비는 괜찮으신지요? “많지는 않지만 국민연금도 있고, 개인연금도 조금 있어요. 집 한 채 있으니 여차하면 주택연금 받으면 됩니다. 이제 돈 쓸 일도 많지 않죠. 그래도 안 되면 더 줄여 살면 되죠.”- 이 일은 언제까지? “매년 재계약해야 하고 그것도 만 65세면 끝납니다. 제 인생 목표는 평생 일하다 일터에서 죽는 거예요. 앞으로도 보수 안 받더라도 공공기관이나 학교 등에서 사회에 도움되는 일을 하고 싶어요.”-혹시 한국의 중장년 남성에게 많은 ‘일중독’ 아니신지? “글쎄요. 한국인 대부분이 그런 것 같습니다. 놀 줄 모른다고 해야 할까요. 논다면 골프 정도 하는 거고, 혼자서 힐링하거나 휴식하거나 하는 경험은 생소해요. 저는 뭔가 놀 때도 바쁘더라구요.”● 솔선수범하면 ‘꼰대’가 아니다 그의 일터인 취업정보실은 종일 개방돼 있다. 인터뷰 중 여학생 두 명이 “쌤, 상담 좀….”하고 찾아왔다가 쪼르르 사라졌고 1명이 컴퓨터 작업을 위해 잠시 머물다가 나갔다. 그는 “학교에서 제가 제일 나이가 많고 직급은 제일 낮습니다.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매사 낮은 자세로 임합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다보면 일이 재미가 있어요”라고 말한다. 감수성 예민한 학생들에게 ‘꼰대’가 아닌 존재로 다가가기 위해 솔선수범에 애쓴다.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는 대신 실천으로 보여줘서 뭔가 느끼게 하는 식이다. “학생들 생일날이나 명절이면 카카오톡으로 인사카드를 보냅니다. 절반 정도는 답이 와요. ‘감사하다’거나 ‘어떻게 아셨어요?’라거나. 이런 것들은 제 나름의 교육이예요. 직장 상사건 부모님이건, 다른 분들께 이렇게 해보라는 메시지죠. 때때로 카드라도 보내 인사하고 긍정적인 관심을 보여드리면 그분들도 너희를 그렇게 대할 거라는. ‘이렇게 하라’고 대놓고 말하면 잔소리가 되겠지만 솔선수범해 느끼게 하면 다르죠. 그러니 저는 늘 바쁩니다.” 각자의 인생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다. 더 좋은 인생은 남의 인생도 소중하게 여기고 키워주려 애쓰는 인생 아닐까. 거창할 것 없지만 나름의 보람을 찾아 분주한 한 교사의 인생 2막이 거기 있었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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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년 경험 살려 일자리 찾아주는 ‘취업 마스터’… “내 인생 가장 큰 보람”[서영아의 100세 카페]

    19일 오후 2시경 경기 안산시에 자리한 특성화고 경일관광경영고의 한 교실. 이대호 교사(62)가 진행하는 ‘비서학’ 수업이 한창이다. 해외 출장 준비에 대해, 항공권이나 호텔 예약법 등 설명은 매우 구체적이다. 이 교사가 갑자기 물었다. “이 중에 해외여행 가본 사람?” 교실 안은 조용하다. “요즘은 취직만 하면 무조건 최저임금은 보장받아요. 연봉 2300여만 원이죠. 오늘 배운 것들은 여러분이 휴가 여행 갈 때도 써먹을 수 있지요.” 컴퓨터 앞에서 검색에 열중하는 학생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교사 정년 훌쩍 넘긴 기간제 교사 2년 차 이 씨는 이 학교 취업전담 교사다. 지난해 초 경기도교육청 공모에 응해 기간제 교사로 채용됐다. 인생 2막이 극적인 반전처럼 찾아왔다. “제 인맥과 정보, 경험을 총동원해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일자리를 매칭시키는 일을 합니다. 30여 년간 다양한 직장을 경험해왔지만 가장 보람이 느껴지네요.” 주 4시간씩 수업하고 나머지는 학생들의 취업처 발굴과 현장실습 운영, 취업 지원에 바친다. 면접 때면 학생을 자신의 차에 태우고 함께 갈 정도로 정성을 쏟는다. 안산 일대는 반월·시화공단과 안양·가산의 벤처단지 등 일손 수요가 많은 지역. 중소기업은 구인난에 시달리고 학생들은 구직난에 힘들어하는 가운데, 이런 미스 매치를 해결한다는 보람을 느끼고 있다. “지역 특성상 다문화 가정도 많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도 있습니다. 가장이나 다름없는 학생들을 취업시키고, 열심히 회사 생활 하는 것을 보면 뿌듯하기 그지없죠.” 매일 오전 7시면 학교에 출근해 취업정보실을 개방한다. 집에서 컴퓨터 작업을 못 한 학생들을 받아주기 위해서다. 다문화 가정 자녀들이 졸업과 함께 취업할 수 있도록 F4 비자 발급도 돕고 있다. “저 자신이 상고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대학과 대학원을 마쳐 학생들의 고충을 잘 아는 편입니다.” 사회에서 여러 회사를 거쳤다. 10여 년간 근무했던 회사는 외환위기 때 해체됐다. 2002년 당시 방과후학교 교육서비스 회사인 ‘에듀박스’(현 골드앤에스)에 들어가 대표이사까지 올랐다. 당시 그가 론칭한 초등학생 말하기 영어학원 ‘이보영의 토킹클럽’은 한때 전국에 500개까지 늘었다. 2017년부터 시작한 코딩교육 사업을 2년 만에 접으면서 그의 직장생활도 끝났다.○구인과 구직의 미스매치 그와 함께 일하는 안산시청 일자리센터 소속 박상임 취업지원관은 “학교들은 대개 62세 정년이 지난 사람은 잘 안 쓰려 하지만 이분은 특별 케이스”라고 귀띔한다. 교사들보다 기업계 생리를 잘 알고 있어 대응에 유연하고, 인맥을 살려 새로운 취업처를 발굴해준다는 것. 과거 한국 프랜차이즈산업협회 부회장, 코스닥협회 자문위원 같은 일을 오래 해서 도움을 요청할 큰 회사 대표나 임원들을 많이 안다. 한번 학생들을 보낸 곳은 자주 방문해서 관심을 보이고 거기서 추가 채용이 생길 수 있도록 애쓴다. 요즘은 특성화고라 해도 졸업생 절반은 진학을 택한다. 이 학교도 지난해 졸업생 270여 명 중 40%가 취업했고 40%는 진학했다. 취업은 대개 2∼3개월의 현장실습을 거쳐 이뤄지는데, 실습 전에 기업 측으로부터 ‘특별한 일 없으면 채용한다’는 약정서를 받는다. 학교와 교육청, 학부모, 학생들이 약정이 지켜지는지 수시로 감시한다. “지역사회와 학교가 학생들의 든든한 ‘빽’이 되는 셈이죠. 정부도 든든히 받쳐줍니다. 업체 입장에서도 특성화고 학생들을 많이 받으면 정부 혜택이 늘어나니 서로 ‘윈윈’이지요.” 가장 큰 고민은 애써 취직시켜도 1년 안에 30% 정도가 그만둔다는 점. 기업 측으로부터도 강력한 항의가 들어온다. “일껏 일할 만하게 가르쳐놓으면 그만두는 경우가 많거든요. 아예 ‘공부 못해도 좋으니 10년 이상 일할 착실한 직원을 원한다’며 ‘우리가 시집도 보내고 학교도 보내주겠다’고 말해 오는 회사도 있어요.” 인력송출 업체를 통해 젊은 인력을 2년 쓰고 버리는 식의 고용은 이들에게는 턱도 없는 얘기다. “저희는 정규직 아니면 보내지 않습니다. 젊은이의 기회비용을 소중히 여겨야지요. 그런 만큼 저는 취직하는 학생들에게 ‘힘들고 어려운 것이 많겠지만 딱 3개월만 참고 버텨보자’고 말하곤 합니다. 3개월을 버티고 나면 1년을 버틸 힘이 생기고 1년을 일하면 자리를 잡을 수 있지요. 3년을 근무하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재직자 전형’도 있어요. 인근 한양대(에리카캠퍼스), 한국공학대 등 좋은 대학에 가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그는 반년 전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회원제 레스토랑에 취업시킨 졸업생으로부터 최근 받은 문자 얘기를 꺼냈다. “‘아직 잘 다니고 있다. 감사하다’고. 집에서 출근하려면 전철 3개 노선을 갈아타고 1시간 반 걸리는데, 잘 버티고 있네요. 그런 친구는 분명히 성공할 거라 봅니다. 출퇴근 왕복 3시간을 견뎌낼 정도 뚝심이라면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이겨낼 수 있어요.” ○“죽는 날까지 일하고 싶다” ―인생 2막에 즈음해 중장년들의 가장 큰 고민이 적절한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는 점일 겁니다. 드물게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자리를 찾으신 듯합니다. 비결은 뭘까요. “귀를 열어둔 게 도움이 된 것 아닐까요. 우연히 나간 모임에서 이런 직업이 있다는 얘길 듣게 됐습니다. 마침 대학 다닐 때 따놓았던 교사자격증이 톡톡히 역할을 했고요. 올해 초 교사 정년 나이가 지나 걱정했지만 기간제 교사로 재계약됐을 때는 무척 기뻤습니다.” 부천 자택에서 학교까지 25km를 운전해 출퇴근한다. 국민연금이 올 2월부터 나오고 학교에서 받는 급여는 과거 수입의 3분의 1 수준이지만 대만족이다. ―노후 준비는 괜찮으신지요. “많지는 않지만 국민연금도 있고, 개인연금도 조금 있어요. 집 한 채 있으니 여차하면 주택연금 받으면 됩니다. 이제 돈 쓸 일도 많지 않고, 그래도 안 되면 더 줄여 살면 되죠.” ―이 일은 언제까지…. “매년 재계약해야 하고 65세면 끝납니다. 제 인생 목표는 평생 일하다가 일터에서 죽는 거예요. 앞으로도 보수 안 받더라도 공공기관이나 학교 등에서 사회에 도움 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솔선수범하면 ‘꼰대’가 아니다 그의 일터인 취업정보실은 종일 개방돼 있다. 인터뷰 중 여학생 두 명이 “쌤, 상담 좀…” 하고 찾아왔다가 쪼르르 사라졌고 1명이 컴퓨터 작업을 하기 위해 잠시 머물다가 나갔다. 그는 “이 학교에서 제가 제일 나이가 많고 직급은 제일 낮습니다.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모든 일에 사명감을 갖고 임하면 일 자체가 재미있어요”라고 말한다. 감수성 예민한 학생들에게 ‘꼰대’가 아닌 존재로 다가가기 위해 솔선수범에 애쓴다.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도 이를 대신 실천으로 보여줘 뭔가를 깨닫게 하는 식이다. “학생들에게 생일날이나 명절이면 카카오톡으로 인사카드를 보냅니다. 절반 정도는 답이 와요. ‘감사하다’거나 ‘어떻게 아셨어요?’라거나. 이런 것들은 제 나름의 교육이에요. 직장 상사건, 부모님이건 다른 분들께 이렇게 해보라는 메시지죠. 평소 긍정적인 관심을 보여드리면 그분들도 너희를 그렇게 대할 거라는. ‘이렇게 하라’고 대놓고 말하면 잔소리가 되겠지만 솔선수범으로 느끼게 해주면 다르죠. 그러니 저는 늘 바쁩니다.” 각자의 인생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다. 더 좋은 인생은 남의 인생도 소중하게 여기고 키워주려 애쓰는 인생 아닐까. 거창할 것 없지만 나름의 보람을 찾아 분주한 한 교사의 인생 2막이 거기 있었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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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잡하게 바뀐 노인의 몸, 질병만 봐서는 치료 어렵다[서영아의 100세 카페]

    4월16일자 ‘100세카페’에 실린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 인터뷰에 대해 독자들의 반응이 각별했다. 인터뷰 계기는 그가 최근 낸 저서 ‘지속가능한 나이듦(두리반)’이었지만, 다중질환에 시달리는 노인일수록 환자 위주의 종합적인 진료가 필요하다는 노년의학의 취지에 적잖은 응원 댓글이 달렸다. 정교수로부터는 기사를 보고 노년내과를 찾아와 약의 처방연쇄에서 벗어난 환자분이 여럿 계시다는 얘기도 들었다. 초고령사회로 치닫는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노년의학은 어떤 모습일까. 지난번 인터뷰에서 소화하지 못했던 의료현장의 움직임을 서울아산병원 사례를 중심으로 소개해본다. 다음 기회에는 노인의 약에 얽힌 문제도 다뤄보고자 한다. ● 폐렴 생겼는데 섬망이…노년의 몸은 다르게 반응한다 권영혜 서울아산병원 간호사는 병원 내 유일한 ‘노년전담간호사’다. 매일 새로 입원하는 65세 이상 환자들의 진료기록을 점검한 뒤 노쇠와 질환이 겹친 환자를 찾아가 적절한 지원프로그램과 연결해주는 일을 한다. 1년 전 병원 측이 시니어 환자관리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이 일을 시작했다. 그는 노년 환자의 임상적 특성을 ‘비전형성’이라고 말한다. “이쪽에 문제가 생겼는데 엉뚱한 데서 증세가 나타납니다. 예컨대 뇌경색으로 입원한 80대 환자가 식사량이 줄고 섬망(갑자기 의식과 주의력이 흐려지고 인지 기능이 떨어지는 상태) 증세를 보이는데, 원인을 추적해보면 폐렴이 와 있는 식입니다. 폐에 염증이 생겼지만 열이 나거나 호흡에 문제가 생기는 대신 축 처지고 섬망이 나타난 거죠. 다행히 환자가 입원중이라 원인을 찾아 치료할 수 있었지만 집에서 이런 일이 생기면 보호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어요.” 이 환자는 뇌경색을 앓은 뒤 안면이 마비되고 음식물을 제대로 삼키지 못하는 연하장애가 왔다. 연하보조식을 먹었지만 음식물이 조금씩 폐로 넘어가 흡인성 폐렴을 일으킨 것. 노인환자에서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고 한다. “노인의 몸은 아주 복잡하게 변합니다. 노쇠가 쌓인 위에 더 큰 스트레스가 오면 가장 취약한 곳에서 터집니다. 댐에 물이 한방울씩 차오르다가 일정 수위를 넘기면 넘쳐흐르는 것과 비슷하죠. 예컨대 같은 폐렴이 생겼다 해도 평소 근력이 약했던 노인은 넘어져 낙상을 당하고 인지기능이 약했던 노인에게는 섬망이 옵니다. 비뇨기계가 안 좋았던 노인에겐 실금(失禁)이 오지요. 노년의학 의사들은 의료기록과 현재 환자의 모습, 말, 보호자 증언 등 데이터를 조각조각 모아 종합판단을 해야 합니다.” 정희원 교수의 말이다. ● 각 과 뺑뺑이 돌던 환자, “내 말 들어주는 의사가 없었다” 노년내과 외래 환자들의 케이스만 살펴봐도 종합판단이 도외시된 노인 진료가 얼마나 위험한지 금새 드러난다. 휠체어에 의지해 찾아온 80대 여성환자 A씨는 1년 반 동안 체중이 16kg나 빠져 40kg이 됐다. 항우울제를 복용한 지도 반년이 돼 간다. 그의 처방이력을 약물조화클리닉 이미리내 약사가 면밀하게 조사했다. 정교수가 이런 기록들과 A씨 진찰을 통해 내린 진단은 이렇다. 평소 먹는 고혈압약이 부종과 변비를 불렀다. 여기 더해 골다공증에 대처하기 위해 먹은 칼슘약도 변비를 일으켰다. 메스껍고 못 먹고 체중 빠지고…. 이때 내과에서 준 소화제에는 항콜린성 성분이 있었다. 이 성분은 온몸의 민감도를 낮추다보니 노인들을 처지게 만든다. 우울증으로 찾은 병원에서는 체중증가 효과가 있는 우울증 약을 처방해줬다. 그런데 약을 먹으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견딜 수가 없었다. 약을 못 먹겠다고 의사에게 호소하자 연배가 있는 이 의사는 “환자가 약을 먹어야지 무슨 소리냐”고 꾸짖으며 계속 그 약을 처방했다. 심지어 다른 약도 추가했다. A씨는 이 모든 약을 먹고 돌덩이같은 변을 보며 점점 더 우울해졌고, 활동감소와 식욕저하의 악순환 속에 결국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됐다. 정 교수는 “환자의 처방전과 병력을 살펴본다면 어떤 의사라도 약을 바꿔보고 변비를 해결해줄 필요를 느꼈을 겁니다. 가장 안타까운 건 환자가 그간 많은 의사를 만났지만 본인의 병력에 대해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의사들을 탓할 수도 없습니다. 저마다 ‘3분 진료’에 쫓기는 의사들이 다른 병원 다른 과의 처방내용이나 병력을 살펴볼 여력은 전혀 없었을 테니까요.”● 연령친화적 의료시스템 만들기 서울아산병원의 환자 중 65세 이상이 40%를 차지한다. 병원에서는 의사와 약사, 간호사, 의료사회복지사가 협력하는 시니어환자위원회를 중심으로 연령친화의료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모색이 한창이다. 그 시범사업이 권 간호사가 하고 있는 일이다. 고령 환자가 입원에서 퇴원까지 순조롭게 치료할 수 있도록, 환자를 전체로 파악하고 환자의 말을 들어주는 창구가 되는 것이다. “먼저 차트를 본 뒤 직접 환자를 찾아가 신체적인 노쇠 정도를 파악하고 복용약물에 문제는 없는지 살펴봅니다. 또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없는지, 퇴원 뒤 돌봄 여부, 치료비용 문제까지도 종합적으로 물어봅니다.”(권 간호사) 이때 사용하는 것이 ‘4M’ 개념이다(표 참조). △상황 관리(What Matters) △약제 관리(Medication) △정신 관리(Mentation) △거동 유지(Mobility)의 4M의 영역을 두루 물어보고 파악한다. 질환을 살펴보고 약을 관리하고 인지와 우울 등 정신적인 부분을 해결하며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 개념은 미국에서 개발한 연령친화의료시스템 내용을 노년내과에서 번안해 한국의료시스템에 맞게 디자인했다. 약물조화클리닉도 같은 맥락에서 운영된다. 다중질환을 가진 노인환자들은 노년내과의 표현대로라면 여러 약물로 ‘떡이 져’ 있다. 증상에 따라 대응하며 다양한 전문과를 돌다보면 처방연쇄가 일어나 증상의 무한반복이 벌어지게 된다. 이 연쇄의 악순환을 끊고 약을 걷어내는 일을 맡는다. ● 노쇠 정도에 따라 치료법 달리 적용 지난해 가을부터는 환자의 노쇠 정도를 점수로 객관화하는 방법을 도입했다. 임상노쇠척도(CFS)는 1-9점까지 나뉘는데(표 참조), 서 있던 사람이 점점 침대로 다가가는 과정을 점수화한 것과 비슷하다. CFS 척도에 따라 치료방법이 확연히 달라진다. 가령 같은 77세 환자라 해도 CFS 7점인 환자와 3점인 환자는 딴판으로 다르다. 7점은 휠체어에 의지해 간신히 온 환자인데 이송부터 시작해 기저귀와 간병인이 필요하고 밤에 섬망을 일으킬 수 있고 욕창이 생길 가능성에 대비해 체위변경도 해줘야 한다. 약을 조심해서 써야 하고 대변을 파내야 할 수도 있다. 반면 3점은 어느 정도 젊은 성인에 준한 치료를 해도 큰 문제가 없다. 임상에서는 ‘경미한 노쇠’인 CFS 5점 이상 환자는 작은 실수만 있어도 순식간에 6점 이상으로 상태가 나빠지기 때문에 신중하게 접근한다고 한다. “노쇠는 노화의 축적된 결과입니다. 노쇠의 원인과 결과가 상호작용하며 악순환 사이클에 들어섭니다. 노인환자의 치료는 이 악순환을 끊어내고 하나씩 선순환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과정이죠. 궁극적으로는 4M, 즉 질환과 약, 정신상태, 움직임을 모두 선순환으로 되돌려야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몸이 안 좋으니 식욕 떨어지고 우울해지는데, 우울하고 잘 안 먹으면 몸은 더 안 좋아지죠. 밥을 못 먹는 원인도 여러 가지입니다. 소화기관에 질병이 있을 수도 있고 약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배우자의 사망으로 슬픔에 잠겼을 수도 있고, 심지어 밥을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서일 수도 있지요. 전체적으로 봐야 하고 해결도 전체적으로 해야 합니다. ‘노인의학적 중재’가 필요한 이유죠.”● 급성기 퇴원환자, 요양병원 아닌 집으로 시니어환자위원회가 지향하는 것은 노쇠가 진행된 어르신들이 급성기 병원을 이용한 뒤에도 기능을 잃지 않고 퇴원해 살던 곳으로 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관절 골절 환자에 대해 과거 병원에서는 뼈를 붙이면 할 일 다 했다고 생각했고, 이후 환자 대부분이 요양병원으로 전원했습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돌봄 모델들이 개발되고 있지만요. 집에서도 자활할 수 있지만 케어해줄 환경이 안 돼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기저질환이라도 있으면 더욱 엄두를 못 내죠. 하지만 이렇게 요양병원으로 보내진 노인 중 완쾌해 집으로 돌아가는 분이 얼마나 될까요.” 그래서 시니어위원회는 가용한 모든 자원을 동원해 시범케이스를 만들어내려 노력한다. 1월 고관절 골절과 탈수 증세로 입원했던 80대 여성환자를 본인과 딸의 희망에 따라 집으로 돌려보냈다. 콧줄과 소변줄이 필요한 환자였지만 딸에게 간단한 가정간호법을 가르쳤고 데이케어센터 간호사와 연결해줘 수시로 상의할 수 있게 했다. 방문간호사가 정기 방문하고 요양보호사가 매일 방문해 낮시간에는 딸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요즘 환자는 많이 호전돼 의자에 앉아 지내며 인지기능도 좋아져 입원 전의 ‘귀여운 할머니’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런 시스템이 작동하면 기능이 떨어진 분들도 걱정 없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지요. 연령친화 의료시스템은 궁극적으로는 병원 의료뿐 아니라 약, 커뮤니티 케어 등을 묶어서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만이나 싱가포르, 영연방 국가들에서 이런 개념의 노인의학이 시행되고 있습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 2022-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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