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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혹시?’ 일상 속으로 파고든 코로나19는 언제 누가 감염되어도 놀랍지 않은 상황. 혹한에도 임시선별진료소마다 중무장을 하고 늘어선 행렬에서 나와 내 가족의 건강을 걱정하는 마음들이 전해져 온다. 14일부터 설치된 임시선별검사소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검사방법은 세 가지다. 기존 ‘비인두도말(콧속분비물) 유전자증폭(PCR) 검사법’과 타액 PCR, 신속항원검사가 그것들인데, 언급된 순서대로 검사 정확도가 낮아진다. ▷신속항원검사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들어올 때 면역반응으로 생기는 항체를 검사하는 방식이다. PCR 검사가 4, 5시간 기다려야 하는 데 비해 약 15분이면 결과를 알 수 있다. 그 대신 정확도가 낮아 여기서 양성이 나오면 다시 PCR 검사를 받아야 한다. 현재 국내 사용 허가를 받은 신속항원검사 진단키트는 한 가지인데 임신 진단키트처럼 생겼다. 면봉을 콧속 깊숙이 밀어 넣어 검체를 채취한 뒤 시약이 담긴 추출용액에 넣고 5회 이상 저은 뒤 진단키트에 세 방울 떨어뜨리면 몇 분 안에 결과창에 음성인지 양성인지 뜨게 된다. ▷더 많은 사람이 더 손쉽게 진단검사를 받게 하려는 취지에서 신속항원검사를 둘러싼 논쟁도 커지고 있다. 지난달 말 서정진 셀트리온 대표가 전 국민 자가진단 검사를 제안했지만 방역당국은 부정적이었다. 최근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국민 누구나 신속 진단키트로 1차 자가 검사를 하고 결과에 따라 추가 정밀 검사를 받게 하는 방안을 논의하자고 제안했지만 당국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자가 검사 도입은 안 하는 걸까, 못하는 걸까. 두 가지 모두인 듯하다. 우선 현재 국내에서 사용되는 검사 키트는 의료진만 사용하는 조건으로 허가를 받았다. 콧속 깊은 곳에 면봉을 찔러 넣어야 하기 때문에 일반인이 하기도 어렵고 정확도도 떨어진다. 검체 채취를 의료행위로 보는 의료법도 장애물이다. 국내 몇몇 제약사가 신속 진단검사를 위한 키트를 개발해 유럽 미국 등지에 수출하고 있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 ▷마침 미국식품의약국(FDA)이 15일 호주 제약사가 개발한 자가 진단키트에 사용 승인을 내줬다는 소식이다. 일반인이 코에 면봉을 넣어 검체를 채취한 뒤 스마트폰에 부착한 진단키트로 15분 만에 감염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이전에도 가정용 진단키트는 몇 가지가 사용돼 왔지만 처방전이 필요하거나 검체를 병원으로 보내 감염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백신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상황이다. 자가진단이 가능한 길이 열리고, 한계점을 인정하는 범위에서 적절한 활용방안을 찾는다면 감염 확산을 막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검찰이 8일 라임자산운용(라임)의 핵심 인물인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으로부터 ‘술 접대’를 받은 검사 3명 중 1명만 청탁금지법(김영란법) 위반혐의로 기소했다. 모두 536만 원 상당의 향응이 제공됐다고 한다. ▷기소와 불기소를 가른 기준은 향응 수수금액이다. 검찰은 불기소 처분된 검사 2명이 오후 11시 이전에 귀가했으므로 이후 추가된 밴드 팁 등 55만 원을 제외하고 1인당 96만2000원 상당의 접대를 받았다고 계산했다. 처벌 기준금액 100만 원을 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적의 계산법’ ‘검사들을 위한 안전한 술 접대 받기 가이드’ 등의 조롱이 줄을 잇는다. ▷온라인에서는 ‘검사님들을 위한 99만 원짜리 불기소 세트’ 포스터가 만들어져 화제가 됐다. 흔히 알려진 김영란법의 ‘식사접대 3만 원 한도’는 뭐냐는 질문도 꼬리를 물었다. 김영란법에 따르면 1인당 접대 금액이 1회 100만 원 이상이면 형사 처벌 대상이고 접대 한도 3만 원은 소속 기관의 징계 기준이다. 두 검사도 검찰 징계를 받게 된다. ▷n분의 1 계산법은 전체 비용을 인원수대로 나누는 것이고 더치페이는 각자 주문, 각자 계산하는 방식이다. 검찰 계산은 이를 시간대별로 배합한, ‘신박한’ 것이기는 하다. 검찰로서는 두 검사를 기소할 경우 법정에서 당사자들의 항변이 이어질 것임을 의식했을 것이다. 어찌됐건 업자들이 호화 룸살롱에서 술을 살 때는 상대에게 공범의식을 심어주고 보험을 들려는 것임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쥐꼬리만 한 권력이라도 가진 애주가라면 이참에 술은 자비로 마셔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 ▷각자 진영논리에 갇혀버린 걸까. 이날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에 대한 반응은 양 갈래로 나뉘었다. 검찰은 술 접대 사실 외에도 김봉현이 10월 자필 입장문을 통해 주장한 ‘검사 술 접대 의혹 은폐’ ‘여권 정치인 표적 수사’ ‘야권 정치인 수사 무마’ 의혹은 모두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추미애 법무장관이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해 수사지휘권을 발동한 근거를 모두 부정한 것이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검사 불기소만 조롱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추 장관의 성급함만을 강조한다. ▷윤 총장은 10월 국감에서 “검사 접대가 사실이라면 사과하겠다”고 발언한 바 있다. 깔끔하게 사과하고 당사자들을 징계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정파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이 문제를 지나치게 과장하고 비약해서 해석하려는 시도 또한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법치주의와 정의’는 누구나 지켜야 할 가치이고 어느 한편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마스크와 고글로 무장한 스튜어디스가 내민 쟁반을 승객이 받아드는 사진. 쟁반 위 별것 아닌 기내식이 왈칵 향수를 부른다. 지난달 24일 인천공항을 출발한 아시아나항공 ‘A380 한반도 일주비행’ 승객들이 기내식 서비스를 즐기는 장면이다. 이들은 동해 바다가 보이는 강릉, 제주도 한라산 백록담을 지나 두어 시간 만에 출발지로 돌아왔다. ‘비행기라도 타고 싶다’는 소비자들이 몰려 만석에 가까운 탑승률을 보였다. ▷코로나19 탓에 ‘집콕’이 대세라는 뉴노멀을 맞이한 여행객들은 호소할 곳도 마땅치 않은 금단 증세를 느끼고, 항공업계는 생존이 위협받는 위기에 빠졌다.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도착지 없는 비행 상품’이다. 비행기로 유람하듯 상공을 선회하고 회항해 ‘상공 여행’, ‘무착륙 여행’이라고도 불린다. 이미 대만과 호주, 일본에서 열풍을 불렀고 국내에서도 평균 80%에 이르는 탑승률을 기록했다. ▷정부가 그제 이 상품을 국제선에도 1년간 한시 허용하기로 했다. 관련 업계를 지원한다는 취지다. 대개 일본, 중국, 대만행 항로로 20만∼30만 원(일반석) 정도 운임이 될 것이라 한다. 인천공항을 출발해 일본 후지산이나 중국의 만리장성, 혹은 대만을 상공에서 구경하고 돌아오는 식이다. 철저한 검역·방역 관리를 전제로 입국 후 격리조치와 진단검사를 면제해주되 일반 여행자와 똑같은 면세 혜택도 준다. ▷아예 해외여행 상품 판매를 시작하는 여행사도 등장했다. 국내 3, 4위권 참좋은여행은 다음 주부터 동남아 유럽 미주 전 노선 상품을 판다. 상품명은 ‘희망을 예약하세요’. 코로나 이후 새로 개발한 방역 우수국가 여행과 기존 패키지여행에서 인원을 줄이고 안전요소를 강화한 상품들이 대상이다. 대만·태국 등 방역 우수국가들은 내년 3월, 유럽·미주는 내년 7월 15일 이후 출발하는 조건이다. ▷화이자, 모더나의 백신 개발 소식이 힘을 줬고 방역 우수국가끼리 자가 격리 의무를 면제해주는 ‘트래블버블’ 협약 체결에 대한 기대감도 있다. 재미있는 건 기사에 딸린 댓글들인데, 부정적 반응이 거의 없다. “건투를 빈다”거나 “아무리 지독한 바이러스도 결국 극복 가능하다”며 “모든 인류에게 파이팅”을 외치는 사람도 있다. 결국 모두가 똑같은 마음인 거다. ▷오늘 유럽 자유여행 패키지를 예약하는 우리에게 내년 여름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찌 알랴. 그래도 인간은 희망을 먹고사는 동물이다. ‘방콕’에 ‘확찐자’가 되어가는 무력감을 떨쳐내고 내일을 기약해 보는 것, 그게 희망이다. ‘사람이 여행을 하는 것은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행하기 위해서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일본 출신 방송인 사유리(후지타 사유리·41) 씨의 출산 소식이 화제다. 무엇보다 결혼 없이 정자 기증을 받아 아들을 낳았다는 점이 관심을 끌었다. 아기를 가슴에 안은 그는 “너무 행복해 꿈일까 봐 두렵다”고 말한다. ▷사유리는 한국에 유학 중이던 2007년부터 많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한국인들에게 친숙해졌다. ‘언젠가는’ 아기를 갖기를 간절히 원해 방송 중에 “난자를 여러 개 얼려놓았다”고 고백했을 정도. 하지만 지난해 병원에서 시험관 시술조차 쉽지 않다는 진단을 받고는 더 늦기 전에 엄마가 되기로 했다. 아이를 낳기 위해 급히 배우자를 찾기보다는 혼자 엄마가 되는 ‘자발적 비혼모(Single Mother by Choice)’의 길을 택했다. 자발적 비혼모는 결혼은 하지 않고 애인 또는 정자은행을 통해 아이만 낳아 기르는 경우를 지칭한다. 미혼모에 비해 여성 본인의 선택과 의지가 강조된다. ▷한국인들의 반응은 ‘멋지다’거나 ‘용기 있다’는 축하와 격려가 많았다. 아빠 없이 자라날 아이의 처지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충분히 헤쳐 나갈 것이란 응원이 압도적이다. 정치권에서도 축하인사가 답지했다. ▷국내에도 ‘결혼은 싫지만 아이는 갖고 싶은’ 사람은 적지 않지만 실행에 옮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사유리가 굳이 활동무대인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출산한 이유는 한국에서는 이 모든 과정이 불법이기 때문이다. 우리 생명윤리법은 여성이 임신하기 위해 정자를 기증받으려면 법적 남편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시험관 시술 등 난임 지원도 받을 수 없다. 결혼이란 절차를 거쳐 제도 안으로 진입해야만 임신 출산에 대해 합법적 지원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진보정당인 정의당은 ‘비혼 출산 합법화’를 꺼내들었다. 경제학자 우석훈에 따르면 제도권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 대비 그렇지 않은 자녀의 비율인 혼외출산율은 한국이 1.9%로 세계 최저권인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은 40%라고 한다. 혼외출산율이 높은 나라일수록 전체 출산율도 높다. ‘정상적’이란 고정관념에 갇혀버린 결혼과 출산에 대한 강박이 아기들이 태어나고 성장할 기회를 막고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3일 새벽 서울 관악구에서 베이비박스 앞에 버려져 밤새 방치됐던 갓난아기가 숨이 끊어진 채 발견됐다는 가슴 아픈 뉴스가 있었다. 중고물품 거래사이트에 갓난아기를 올린 미혼모 뉴스도 기억에 새롭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2년째 0명대(지난해 0.92명)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현실은 여전하다. 어떤 처지와 조건이건 어려움 없이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미국 역대 대통령 부인들의 직업은 영부인이었다. 잘나가는 변호사였던 힐러리 클린턴 여사도, 미셸 오바마 여사도 백악관 입성과 함께 본업을 내려놨다. 하지만 이런 전통은 내년 1월 20일 취임하는 조 바이든 당선인의 부인 질 여사(69)에서 끝나게 된다. 평생 고교와 대학에서 가르쳐온 그는 영부인이 된 뒤에도 강의를 계속하겠다고 일찌감치 선언했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백악관에서 출퇴근하는 ‘투잡(two job)’ 영부인이다. ▷남의 아내를 높여 부르는 말에서 이제는 선출직 국가원수의 부인, 즉 퍼스트레이디를 일컫는 말이 된 영부인은 사실 직업이라 하기에는 좀 특별하다. 보수는 없지만 대통령을 보좌하고 여러 행사에 참석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사실상 사생활을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남편이 대통령에 선출되면 아내는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고 내조에 적극 나서는 게 당연시됐다.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영부인은 엘리너 루스벨트(1884∼1962)라는 데 별 이견이 없다. 그는 불행을 기회로 만드는 ‘행복의 연금술사’라고 불렸는데, 적극적인 내조로 장애인이 된 남편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는가 하면, 4번이나 연임에 성공시켰다. 1945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재임 중 사망할 때까지 남편의 손과 발, 눈이 되어 그림자처럼 도우며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남편 사망 후에도 유엔 등을 무대로 ‘인권의 대모’라 불리며 영부인의 새로운 영역을 구축했다. ▷미 언론들은 질 여사를 바이든 당선인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 ‘바이든의 최종 병기’라 표현한다. 질 여사는 카멀라 해리스를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로 선택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등 이번 선거 기간을 통해 ‘내조형’인 동시에 ‘참모형’ 아내의 면모를 두루 보여줬다. 이런 그가 “나만의 정체성과 직업을 갖길 원한다”고 했다. 26세 나이에 두 아들이 딸린 35세 바이든과 결혼해 세 아이를 키우며 석박사 학위 3개를 따낸 감투정신이라면 무엇이건 못하랴. 질 여사는 바이든이 부통령으로 일한 2009∼2017년 ‘에어포스투’ 안에서 시험지 채점을 한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미국의 한 연구자는 “과거 영부인들의 경우 일과 가정의 양립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질 여사는) 21세기에 맞는 영부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바이든 당선인은 평소 질을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이라고 말해왔고 지난해 4월 첫 유세에서 자신을 ‘질의 남편’이라고 소개했을 정도로 그녀를 밀어준다. 비록 78세, 69세 고령인 당선인 부부지만 사고방식은 그 누구보다 젊은 커플이 아닐까 싶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2018년 10월 대법원 판결과 지난해 여름 수출규제 등을 거치며 증폭된 갈등 탓일까. 근래의 한일 관계에는 흔히 ‘해방 이래 최악’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지난해 12월 도미타 코지(冨田浩司) 주한 일본대사는 부임 일성으로 “양국 간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지만 양국 관계는 줄곧 어두운 터널 속에 머물러 왔다. 이런 가운데 9월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 취임을 계기로 양국 간에도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가 조금씩 감지된다. 한일 외교의 최전선에 선 도미타 대사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현직 외교관이기에 갖는 발언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긴 안목’과 ‘인내’를 강조하며 낙관적 미래를 내다봤다. 인터뷰는 지난달 30일 서울 성북구 일본대사관저에서 이뤄졌다. 부임 후 중앙일간지와 가진 첫 인터뷰다.》 “한일 관계, 긴 안목으로 보면…”“한일 관계가 나쁘다, 어렵다고들 하지만 긴 안목에서 보자면 1965년 국교 정상화로부터 ‘불과’ 50여 년 사이에 여기까지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낙관주의를 가질 만하죠. 반면 한일 간에는 역사적 경위가 있어 무언가를 진전시키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전후 국교 정상화에만 20년, 그로부터 김대중-오부치 파트너십 선언(1998년)까지 30여 년이 걸렸습니다. 인내심이 필요한 거죠. 물론 낙관주의는 낙천주의와 달라서, 눈앞의 과제를 해결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요구합니다.” ―한국에서는 스가 총리 취임을 계기로 양국 관계 개선의 기대가 있었다. “새 정권 출범을 계기로 관계 개선의 기운이 생겨나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 스가 총리는 스스로 외교에서 아베 신조 노선을 계승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한국과 일본이 서로 중요한 나라라는 점, 그리고 이 지역 안정을 위해 일한·일미한 연대가 중요하다는 기본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 한국 측이 정권 출범 직후 전화회담을 요청한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외교의 과제는 이런 긍정적 기운을 관계 개선을 향한 구체적인 움직임으로 바꿔 나가는 일이다.” ―올 연말경으로 예상되는 한중일 정상회담에서 한일 정상이 만난다면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일본 측이 스가 총리 방한 조건으로 징용 피해자 배상 소송과 관련한 한국 정부의 선조치를 요구하고 있다는 말이 흘러나온다. “일한중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일정이 나온 게 아니니 일반론만 말할 수 있다. 우선 스가 총리와 문재인 대통령이 개인적 관계를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동시에 정상들이 만났을 때 국민이 기대할 만한 성과를 낼 필요도 있다. 그에 어울리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외교적 대화를 계속하고 있다. 며칠 전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이 방한한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여러 가능성에 대해 다각도로 모색 중이다.”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는 실타래가 너무 꼬였다는 지적이 많다. “이런 상황을 풀기 위해 대화가 필요한 것이다. 낙관주의는 문제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자세다. 무엇보다 이 문제가 잘못될 경우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위기감, 그런 사태를 피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양국 정부가 공유한다고 생각한다.”한일 정상, 개인적 관계 만들어야 ―또 하나의 현안으로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처리수 문제가 있다. “후쿠시마 제1원전의 폐로 과정에서 언젠가는 피해갈 수 없는 문제인 것으로 안다. 다만 폐수 처리의 모든 과정은 국제적 기준을 준수하며 국제원자력기구(IAEA) 등의 승인과 협력하에 이뤄지게 된다.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와도 긴밀히 연락하고 투명성을 가지고 임한다는 각오다.” ―코로나19 문제와 관련해 그간 한일 간 협력이 몇 가지 성과로 나타났다. 제3국에서의 자국민 대피 과정에서의 협력, 일본계 기업인 도레이 구미 공장의 마스크 소재 생산 협력 등이 그런 예다. 좀 더 서로 도울 여지는 없을까. “방역은 국가마다 사정이 다르다는 점에서 국제협력에 제약이 있지만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내다본다면 여러 가능성이 생긴다. 가령 스가 총리는 포스트 코로나를 겨냥해 디지털 이노베이션에 투자하겠다고 하는데, 문 대통령이 내건 한국판 뉴딜 정책과 공통점이 많다.” ―3월 이래 멈췄던 한일 간 인적 교류가 최근 기업인부터 풀렸다. 코로나 확산 여하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우문이긴 하지만 일반인 왕래는 언제쯤 풀릴 것으로 예상하나. “비즈니스 트랙 외의 폭넓은 구조를 준비하고 있다. 특히 올림픽과 방역을 어떻게 양립시킬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아베 전 정권은 관광입국을 내걸고 민간 경제활동의 상당 부분을 관광업에 투여했다. 지금 국내 관광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외국인 관광도 하루빨리 정상화하길 염원하고 있다.” ―반일 혐한 등 민족주의 감성이 기승을 부리는 반면 젊은이들은 음식이나 문화 등 독자적 감성으로 상대국에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젊은이들은 공감을 비교적 순수하게 표현하니까. 사실 서로에 대한 친근감은 다른 세대들도 가졌다고 본다. 한국 드라마가 일본에서 인기 있는 이유도 공감이 되기 때문이다. 연애 감정, 가족의 소중함…. 느끼는 것이 비슷하다. 저도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시종 흥미진진하게 봤고 최종회에서는 울었다. 교류를 통해 이런 공감대를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처칠-대처 전기 저술 위기 리더십 연구 그는 현역 외교관으로서 윈스턴 처칠과 마거릿 대처에 대한 저서를 낸 작가이기도 하다. 이 중 대처 전기는 지난해 일본의 권위 있는 출판상인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상을 받았다. 미디어에 보도되지 않은 사실들을 일일이 찾아내 공들인 저술이다. ―왜 처칠과 대처인가. “정치 지도자의 역할은 크게 자원 배분과 국가 위기에 대한 대처, 이 두 가지라고 본다. 처칠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국가적 위기 앞에서 역사에 남을 궤적을 남겼다. 대처는 대처리즘으로 불리는 변혁을 통해 정치적 ‘자원 배분’을 새로이 해 영국병을 치유하고 영국 경제를 부활시켰다. 인간적인 그릇은 처칠이 더 크고 매력적이지만 영국 사회에 미친 업적은 대처가 더 컸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처칠이나 대처의 시대만 해도 리더의 역할이 크고 대중에게 리더십이 받아들여졌다. 요즘은 자국제일주의가 우선시되면서 포퓰리즘과 독재가 뒤섞인 리더십이 세계를 풍미한다. “리더는 국가를 이끌지만 국민에게 이끌려가기도 한다. 한 시대는 지도자와 국민의 상호 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리더를 고르는 것은 국민이므로 국민의 현명한 판단이 중요해진다.” 그는 “현직 외교관으로서 현실 정치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더 이상의 말을 아꼈다. 하지만 그의 저서를 펼쳐보면 어느 정도 답이 나와 있다. “민주주의하에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리더는 국민에 영합하게 된다. 세상이 복잡 다양해지면서 정당들은 모두 중도로 수렴돼 차별성이 없어졌다. 불만이 쌓인 국민에게 리더들은 극단적인 주장으로 대중의 공감을 얻고 정치의 권좌를 차지하는 수법을 쓰게 된다….” 한일축제한마당… “계속의 힘” 그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 이래 20번째 주한 일본대사다. 2004∼2006년 주한 일본대사관 참사관과 정무공사로 근무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는 가족이 함께 서울에서 지냈지만 이번에는 혼자다. 자녀들은 이미 장성했고 부인은 지난해 태어난 첫 손자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다고 한다. ―한국에서 내정 단계부터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1925∼1970)의 사위로 소개되면서 경계의 대상처럼 인식돼 버렸다. ‘금각사’의 작가로 한때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던 미시마는 점차 극우 사상에 경도돼 자위대의 궐기를 외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남겨진 딸은 11세에 불과했다. “장인은 아내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제 직업이나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밝혀둔다.” 10일에는 제16회 한일축제한마당이 온라인으로 개최된다. 주한 일본대사관은 코로나로 인해 거리 두기 단계가 높아지는 가운데서도 5월부터 축제 준비를 위한 실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수차례 회의를 거듭했다. 도미타 대사는 그때마다 “계속(繼續)은 힘(力)이 된다”는 일본의 격언을 강조하며 어떤 형식으로건 축제를 지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계속은 힘…’은 당장 화려하고 눈에 띄지 않더라도 해오던 것을 꾸준히 이어가는 정신을 말한다. “축제한마당은 제가 서울서 근무하던 2005년 ‘한일 우정의 해’ 기념사업으로 시작돼 15년간 이어온 행사다. 코로나 때문에 고민이 많았지만 계속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온라인이라 한계가 있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참가 못 하던 분들이 찾아줄지도 모른다. 되도록 많은 분이 관심 갖고 즐겨 주시길 기대한다.” 소소한 일이라도 꾸준히 계속해 나가다 보면 무언가를 이룰 힘을 얻는다. 향후 한일 관계 여러 장면에서 이런 정신은 꾸준히 지켜져야 할 것이다. 도미타 코지 주한 일본대사―1957년 후쿠오카 출신. 도쿄대 법학부 졸업. 1981년 외무성 입성, 주영 공사, 주미대사관 차석공사, 북미국장, 주이스라엘 대사를 거쳐 현직―저서: ‘마거릿 대처-정치를 바꾼 철의 여인’(2018년), ‘위기의 지도자 처칠’(2011년)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05년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1988년 일본 사회에 충격을 던진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을 소재로 했다. 도쿄 도심, 부모가 모두 가출한 뒤 세상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었던 어린 4남매의 이야기다. 영화에서는 12세 장남이 가출한 엄마를 기다리며 가족을 꾸리는 과정의 막막함이 그려져 있다. 실화에서는 이웃의 신고로 경찰이 들이닥쳐 아이들은 복지시설로 보내졌고 엄마는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엄마(30)가 외출한 집에서 배가 고파 라면을 끓여 먹으려다 화재로 중상을 입은 인천의 ‘라면 형제’ 중 여덟 살 동생이 그제 하늘로 떠났다. 지난달 14일 화재가 난 뒤 37일간이나 병마와 싸웠고 한때 의식을 찾는 등 상태가 호전되기도 했다는데,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열 살과 여덟 살. 불이 나자 아이들은 다급하게 119를 눌렀지만 “살려주세요”만 외친 채 전화를 끊었다. 2분 뒤 이웃이 신고해 화재 위치 등을 알렸다고 한다. ▷형제는 오랫동안 돌봄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었던 듯하다. 다만 어른들이 부실하면 아이들은 일찍 철이 든다. 형제는 늘 함께 다니며 서로를 챙겼다. 야심한 시각에 편의점에서 먹을거리를 고르는 폐쇄회로(CC)TV 영상에서 아이들의 힘든 생활을 눈치챌 수 있다. 한창 개구쟁이 노릇을 할 아이들이 비쩍 마른 몸으로 컵라면이니 도시락을 챙기곤 했다. 서로가 유일한 친구였다는데, 이제 형 혼자 남겨졌다. 어른들이 너무 많은 빚을 졌다. ▷코로나19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감염된다는 점에서 공평하지만 돌봄 사각지대의 사람들에게 유난히 가혹하다. 형제도 학교가 비대면 수업을 시행하면서 급식 대신 직접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엄마는 수년 전부터 형제를 학대·방임한 혐의로 8월 검찰에 송치됐고 가정법원은 이 가족에게 상담을 받으라는 보호처분을 내렸지만 이 또한 코로나 사태로 방치돼 버렸다. ▷아이들에게 부모 혹은 가족은 자신에게 주어진 전 세계와 같다. 그곳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아이들이 ‘내게도 돌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이웃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이유다. 형제가 끔찍한 화상을 입고 병원에 누워 있는 사이, 쾌유를 비는 성금이 2억 원가량 모였다. 아이들로선 그저 ‘천문학적 숫자’일 뿐인 2억 원보다 당장 편의점에서 쓸 수 있는 2만 원이 좋았을 것이고, 2만 원보다는 따뜻한 어른의 보살핌이 자연스러웠을 터다. 이번 동생의 사망 소식에 맘카페 엄마들 사이에서 “가슴 아프다” “안타깝다”만큼이나 “미안하다”는 댓글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1980년대 대학생, 특히 운동권 학생들은 군대 가기를 꺼렸다. 군사독재정권의 ‘군바리’가 되기 싫기도 했지만 군=강제징집=최전방으로 통하던 무서운 시절이었다. ‘녹화사업’이라 하여 학원 프락치 활동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당시 ‘동 뜬다’는 은어가 돌았는데 순번을 정해 가두시위의 주동자로 나서는 것을 뜻했다. ‘동’은 시위의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현장에서 체포됐다. 당시에는 폭력행위특별법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으면 군대에 갈 자격이 박탈됐다. 병역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1986년 1200여 명이 구속된 건국대 점거농성 사건 때는 병역면제 요건에 미달하는 집행유예 3개월이 무더기로 선고됐다. 그런데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한시적으로 3개월 집유도 병역을 면제해줬다. 뛸 듯이 기뻐하던 주변 친구들이 많았다. ▷우원식 윤미향 우상호 등 여당 의원 20명이 민주화운동 당사자와 그 가족에게 교육 취업 의료 금융 등의 혜택을 주는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을 추진하고 있다. 지원 대상은 2000년 설립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인정받은 사람 중 사망자, 행방불명자, 상이자(장해등급 판정을 받은 자)와 그 가족이다. 우 의원은 총 829명이라며 전태일, 박종철, 이한열을 예로 들었지만 국회예산정책처의 법률안 비용추계서는 수혜 대상이 가족을 합해 2021년 3753명에서 2025년 3792명으로 늘어날 거라고 추산한다. ▷이 법안이 알려지자 민주당의 ‘셀프 특권’ 법안이란 비판이 쏟아진다. 특히 가뜩이나 ‘공정’을 중시하는 청년세대에게 입시와 취업에서의 특혜는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민주화 유공자들에 대해선 이미 명예회복과 보상이 이뤄져 왔다. 여권 고위층에도 억대의 보상금을 받은 이들이 적지 않다. 반면 신청자격이 충분하지만 보상 신청을 사양한 이들도 있다. 그중 한 명인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은 “지식인으로서 민주화운동을 한 거면 충분하다. 국민 세금으로 보상을 받는다면 내 명예는 어떻게 되는가”라고 말한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유명을 달리한 분들과 그 가족이 겪는 고통에 대해선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과유불급이 된다면 민주화운동의 순수한 뜻을 욕보이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민주화는 거리에서 최루탄 가스를 마시며 독재 타도를 외쳤던 수백만 시민이 함께 만든 것이다. 그들이 예우나 보상을 바라는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싸웠고 자긍심과 보람, 인간적인 성장을 얻었다면 그게 보상 아닌가. 생각 짧은, 혹은 흑심 있는 국회의원들이 민주화 인사들을 욕먹이고 있는 건 아닌지 안타깝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1980년대 대학 신입생은 고교 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지식의 세례를 받았다. 읽어야 할 도서 목록 가운데는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1979년)도 들어 있었다. 한국 ‘여성운동의 교과서’로 불리는 이이효재 이화여대 명예교수의 저서다. 이 교수가 4일 향년 96세로 영면에 들었다. ▷선생은 한국 여성학의 선구자였다. 강단에서는 불평등한 여성의 현실을 이론화했고 여성민우회, 여성단체연합,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정의기억연대의 전신) 등 단체 활동을 통해 현실을 바꿔 나갔다. 호주제 폐지, 부모 성 같이 쓰기, 동일노동 동일임금, 비례대표제 도입 등 그가 강단과 단체를 오가며 맺은 열매는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어렵다. ▷말년은 더욱 멋졌다. 1990년 정년을 맞은 그는 7년 뒤 부모의 고향인 경남 진해로 내려갔다. “어느 순간 내가 한 말을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나 자신이 중요한 자리를 맡거나 선두에 나서기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는 이유에서다. 진해에서 ‘기적의 도서관’을 운영하면서 지역사회 풀뿌리운동에 헌신했다. 2008년 그는 한 인터뷰에서 “교수 대신 지역활동을 했더라면 세상이 조금 더 변화했을 것”이라며 자신의 진로 선택에 뒤늦은 ‘후회’를 고백하기도 했다. ▷올 5월 윤미향 당시 국회의원 당선자의 횡령·배임 의혹 논란이 일파만파로 번지자 일부 정대협 원로들이 초대 대표였던 이 선생과 윤정옥 이화여대 명예교수(95)의 명의를 넣은 12인 원로 성명을 발표했다. 윤미향을 두둔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윤 교수는 “그런 말 못 들었다”며 발끈했고, 이 선생도 제자를 통해 유감을 전했다. 무엇보다 출범 당시 정대협은 모금운동을 벌이거나 정치권에 참여하는 요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선생을 비롯한 여성운동 1세대에는 유복한 집안 출신이 많다. 딸이라는 이유로 학교도 못 가던 1950, 60년대에 미국 유학까지 간 것은 엄청난 혜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자신이 가진 지식과 능력을 불행한 여성들을 일깨우는 데 바치려 노력했던 듯하다. ▷선생의 타계 소식에 여야 막론하고 애도의 목소리가 쏟아진다. 요즘처럼 진영으로 갈라진 세상에서 드문 일이다. 사리사욕을 멀리하고 헌신한 진정성은 당파 관계없이 통하는가 보다. 평생 여권 신장을 위해 싸워온 이 선생은 10여 년 전 자신을 찾아온 후배들에게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랑의 능력을 키우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사랑’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질임을 이제야 깨닫게 됐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추석(秋夕)은 ‘가을 저녁’, 즉 가을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이라는 뜻이다. 오곡이 무르익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이 좋은 날을 가족과 함께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 산업화 이후 도시로 떠난 자식들은 아무리 길이 막혀도 고향을 찾아 ‘민족 대이동’을 해왔다. 1996년 강원도에서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일대에 통행금지령이 내려져 강원도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이번에는 오지 말라”고 당부한 일은 있었을지언정, 고향을 향하는 발길은 그 어떤 것도 막지 못했다. ▷코로나19가 우리 민족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언택트 추석’을 강요하고 있다. “추석 때 오지 말그라. 나중에 더 반갑게 만나제이. 사랑한다.” 경북 의성군은 최근 홀로 사는 노인 1873명의 영상을 촬영했다. 머리 위로 ‘손하트’를 그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영상이 객지로 떠난 자식들의 휴대전화로 보내졌다. 자식들보다 더 손꼽아 기다렸을 어르신들이지만 명절을 포기하는 아쉬움보다 학교도 못 가는 손주들 걱정이 앞선다. ▷우리 조상들은 명절과 예법을 중시했지만 융통성이 있었다. 각종 문헌에는 나라에 역병이 창궐하거나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제사나 차례를 생략했다는 사례가 많이 나온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의 류의목이 지은 ‘하와일록’(1798년)에는 “마마(천연두)가 극성을 부려 마을에서 의논해 추석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는 대목이 있다. 유교의 경전 ‘중용’에는 시중(時中)이란 표현이 있는데, ‘지금 처한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방법을 추구한다’는 뜻이라 한다. 코로나 시대에는 감염 방지를 최우선으로 하면서 예를 갖추는 것이 유교적 예법이 될 것이다. ▷안동의 유림 명문가인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의 후손들은 26년 전부터 모든 제사는 광복절 하루에 몰아 지내고, 추석 차례는 10월 말 산소를 찾는 걸로 대신한다. 자손 이창수 씨는 “조상을 기리는 마음만 있다면 그 형태는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추석 연휴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가을겨울 코로나19 유행의 양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한다. 예절도 의례도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의 건강을 위해서도 부모님을 찾아뵙지 않고, 친지들과 거리를 두며, 최대한 ‘집콕’ 하는 것이 올 추석 최선의 예법이다. 자식들을 만나지 못해 서운할 어르신들께 손자들이 재롱떠는 동영상을 보내드리고, 영 서운하다면 온라인 제례를 시도하는 등 현명한 선택지도 찾아보면 적지 않을 것이다. 팬데믹(pandemic) 시대의 신예기(新禮記)는 ‘거리 두기’로 완성된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2일 자민당 총재 선거 출마를 선언하는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베 신조 총리가 재임한 지난 7년 8개월간, 매일 오전 정례 기자회견을 주재하던 그에게서는 볼 수 없던 표정이다. 늘 피로에 찌들고 뭔가 포기한 듯한 굳은 얼굴이었고, 뻔한 답변을 영혼 없이 되풀이하는 듯 보이곤 했다. 그도 최장수 아베 총리와 함께하면서 최장수 관방장관 기록을 세웠다. ▷관방(官房)장관은 흔히 ‘총리의 마누라’라 불린다. 총리를 도와 주요 정책의 기획·조정, 정보 수집 등을 총괄한다. 정부 대변인과 총리비서실장도 겸하지만 무대 뒤 스태프 역할이다. 실제 그는 매일 TV에 등장했지만 개성도 존재감도 없었다. 그러다 지난해 4월 1일 새 연호 ‘레이와’를 발표하면서 ‘레이와 아저씨’라는 별명이 붙었고 ‘정치인 스가’로 조명받는 기회가 늘었다. ▷일본 정가에서 보기 드문 ‘흙수저’ 출신. 아키타의 농가에서 태어나 고교 졸업 뒤 상경해 고학으로 호세이대 야간 법학부를 졸업했다. 요코하마 시의원 등을 거쳐 48세 때인 1996년에야 초선 배지를 달았다. 지역 기반의 세습 정치인들이 선대로부터 ‘지반(지연) 간반(간판) 가반(가방·자금)’의 ‘3반’을 물려받아 20대부터 정치에 입문하는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늦깎이인 셈이다. ▷아베 총리와 정치 노선을 같이했지만 아베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반대하는 등 ‘뼛속까지 우파’는 아니라는 평도 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들어 “리더가 좋은 사람이면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고 설파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을 이룬 배경에는 언제나 뒤에서 지켜준 이복동생 히데나가가 있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아베 정권의 독주가 가능했던 데는 관료집단을 장악한 스가의 공이 크다. 그는 2014년 부처 간 칸막이 행정을 없앤다는 명분으로 내각인사국을 설치해 고위관료 인사권을 손에 쥐었다. 이후 관가에서 스가는 ‘저승사자’로 통했다. 관료들은 스가에게 ‘찍히지’ 않기 위해 윗분의 의중을 알아서 챙기는 ‘손타쿠’를 했고, 이는 정권 후반에 터져 나온 각종 스캔들의 화근이 되기도 했다. ▷그는 14일 선출되면 아베의 남은 임기인 2021년 9월까지만 총리직을 맡게 된다. 자민당으로서는 지난 8년여간 아베와 일심동체였던 그가 ‘위기관리 내각’ 적임자일 것이다. 혹자는 파벌도 배경도 없는 그가 전국시대에 군주를 보호하기 위해 내세워진 가게무샤(影武者·그림자 무사)로 끝날 수 있다고 본다. 아베 상왕(上王)설, ‘아베스(아베+스가) 정권’ 등이 다 같은 맥락이다. 과연 그는 ‘스가 시대’를 열 수 있을까.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노인에겐 서러운 일이 많다. “난 가만히 있는데 세상이 자꾸 바뀐다”는 탄식도 그중 하나다. 어느 날 갑자기 열차표 예매 방법이 인터넷 중심으로 바뀌고 햄버거 가게나 푸드코트에서 음식을 주문하기도 어려워졌다. 2G폰이면 충분했는데 어느 틈에 대세는 스마트폰. 덩달아 바꾸고 보니 소소한 사용법 하나하나가 거대한 장벽이 된다. 코로나 위기 재난지원금도 은행에 줄서서 신청하는 사람 대부분이 고령자들이었다. ▷노인들이 느끼는 디지털 소외는 정보기술 세계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는 데서 온다. 기계도 프로그램도 익숙해질 만하면 체제부터 사용법까지 휙휙 바뀐다.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 보니 뒤처지는 사람들까지 배려할 여력은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대학교수도, 회사 간부도 은퇴가 두려운 이유 중 하나로 컴퓨터 관련 잡무를 도와줄 사람이 없어진다는 점을 들 정도다. ▷좀 더 심각한 노인 소외도 있다. 가령 초고령사회 일본에서는 노인, 특히 치매환자 소유로 은행에 잠겨버린 돈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런 금융자산이 2030년이면 215조 엔(약 2400조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데, 가뜩이나 소비가 위축되고 돈이 순환되지 않아 고민인 일본의 또 하나 골칫거리다. 치매 환자는 2030년이면 830만 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돼 이 무렵 전체 금융자산의 50%가 75세 이상의 소유일 것이라 한다. 일본 사회가 미리미리 이들의 돈을 신탁 관리할 ‘성년 후견인 제도’ 등 보완책 마련에 바쁜 이유다. ▷2025년이면 초고령사회를 맞는 우리나라도 어르신들을 위한 맞춤형 금융서비스를 마련한다고 한다. 금융위원회가 그제 발표한 ‘고령친화 금융환경 조성방안’에 이런 내용이 담겼다. 예컨대 노인이 고액을 결제하면 보호자 휴대전화에 결제내용이 자동 통보되는 신용카드, 기능을 단순화한 고령자 전용 스마트폰 앱이 나온다. ‘노인금융피해방지법’(가칭)을 만들어 노인 대상 금융사기는 물론 보호자나 지인이 노인의 재산을 빼앗는 것을 막고, 치매 노인의 후견인 역할을 지원하는 일명 ‘치매 신탁’도 활성화한다. ▷이 소식에 달린 댓글 반응이 각양각색이라 놀랐다. “내 돈 내가 쓴다는데 웬 참견이냐”거나 “감시 사회를 만드느냐”며 발끈하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치매어르신의 씀씀이 탓에 고생해본 경험을 들어 환영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상대적 약자인 노인들이 살기 편한 사회는 모든 세대가 살기 편한 사회일 수 있다. 다만 부쩍 늘어나는 세금에 데어서일까. 정부가 노인들의 주머니사정도 통제하고 싶은 건가 하는 의구심이 슬쩍 드는 것도 사실이다. 동네 곳곳에 CCTV를 설치하면 안전은 얻지만 자유를 잃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2799일(만 7년 244일). 아베 신조가 어제 역대 일본 최장수 총리로 등극하며 기록한 연속 재임일수다. 메이지유신 중추 세력들이 1885년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총리로 추대한 이래, 일본 정치의 수장직을 가장 길게 수행한 것. ▷장기집권이 훌륭한 리더십을 뜻하는 건 아니다. 아베 총리는 평화헌법 개정과 러시아로부터의 북방영토 반환, 북한 납치피해자 문제, 도쿄 올림픽을 통한 경제 부흥 등을 추진했지만 무엇 하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장기집권이 가능했던 비결로는 흔히 ‘야당복(福)’이 거론됐다. 아베 정권의 폭주와 우경화 등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왜 정권이 바뀌지 않느냐’는 질문에 단골로 나오는 답은 “대안이 없다”였다. 자민당 내 총리 교체를 두고도 ‘포스트 아베는 아베’라는 말이 유행했다. 배경에는 일본 국민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야당 집권 3년간의 기억이 자리하고 있다. ▷1955년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이 ‘보수연합’이란 명목으로 합당해 ‘자민당 체제’가 출범한 이래, 야당인 민주당이 제대로 정권을 잡은 것은 2009년부터 3년간이었다.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 노다 요시히코의 세 총리가 탄생했는데 그 기간 일본인들이 겪어보지 못한 일들이 이어졌다. 미국 중국과 외교 마찰을 빚는가 하면 엔화 가치 급등으로 기업 실적은 곤두박질쳤다. 설상가상으로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다. 사망·실종자 2만여 명에, 원전 폭발이 겹친 끔찍한 재난의 수습 과정에서 민주당 정권은 아마추어 정부의 민낯을 보여줬다. ▷일본의 역대 총리는 메이지 유신의 중심 세력이던 조슈(長州·지금의 야마구치현)와 사쓰마(薩摩·현 가고시마현) 출신들이 가장 많다. 이토 히로부미와 아베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등이 모두 조슈 출신이다. 과거 자민당 내엔 몇 개의 파벌이 있어 매파와 비둘기파 역할을 하며 총리 교체를 통해 정권 교체 효과를 대신했는데 아베에겐 당내에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었다. ▷지금도 아베 내각 지지율은 바닥 수준이지만 야당 지지율은 더 낮다. 23일 마이니치신문 조사에서 자민당 지지율은 29%, 제1 야당인 입헌민주당은 9%, 제2 야당인 국민민주당은 2%에 그쳤다. 여기에는 해온 방식, 알던 사이를 선호하는 일본인들의 보수적인 ‘의리 문화’도 한몫하는 듯하다. 아베 총리에게 피로감을 느끼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이나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같은 이들이 거론되지만 아베 스스로 권력을 내어주는 게 먼저다. 아베 총리는 어제도 병원에 갔다. 더 이상 ‘포스트 아베는 아베’가 아닐 것 같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이번엔 ‘우다 쿠다 슈다’식 선거가 되면 안 된다.” 민주당 전당대회 셋째 날인 19일 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이런 표현을 썼다. 자신이 도널드 트럼프 후보에게 총득표 수에서 280여만 표 앞서고도 대통령직을 내준 4년 전 선거를 빗대, 올 11월 대선에서는 조 바이든 전 부통령에게 확실하게 표를 몰아줘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다. 이날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등도 총출동해 트럼프 공격에 화력을 집중했다. ▷‘우다 쿠다 슈다!’ 마녀의 주문 같기도 한 이 말은 여성 뉴요커 4명의 이야기로 선풍을 불렀던 옛 미드 ‘섹스 앤드 더 시티’에서 주인공들이 입버릇처럼 외친 말이다. “그렇게 할걸(would have+PP·과거분사),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could have), 그렇게 했어야 하는데(should have)”를 뭉뚱그려, 과거를 후회하는 말이다. 가령 “I should have gone”은 “갔어야 했는데 가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불상사가 벌어진 뒤, 돌이켜보며 탄식하는 후회막급한 마음이 전해져 온다. 나아가 “후회하면 뭐 하나”, “세상사, 아무도 모른다”는 푸념으로도 쓰인다. 단어의 리듬감이 재미있는 데다 인생살이나 러브스토리에서 흔한 상황이다 보니 이를 제목으로 한 노래도 여럿 있다. ▷민주당 전당대회에는 공화당 유력인사들도 줄줄이 참석해 “트럼프를 다시 뽑느니 바이든에게 표를 주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을 정상적이지 못한 국가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클린턴 전 장관은 이날 미국인들에게 “여러분의 삶과 생명이 걸려 있는 투표처럼 한 표를 행사해 달라”고 당부했다. 다만 투표권은 국민의 것이다. 4년 전 미국민이 트럼프 대통령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기존 정치인 등 엘리트들보다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대변해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바이든을 지지하는 엘리트들의 목소리는 어떻게 들릴지 궁금하다. ▷개인이건 조직이건 잘못된 길로 들어선 패착의 순간들이 있다. 국가의 앞날을 결정하는 중요한 투표들도 그럴 수 있다. 훗날 “내 손가락을 자르고 싶다”거나 “그때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라며 후회해 보지만 한번 지나간 일은 고칠 수 없다. 앞으로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경계할 따름이다. 선택지는 두 가지. 계속 잘못된 길로 직진하며 올바른 길을 찾아보거나 원점으로 돌아와 다시 시작하거나.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같은 잘못을 반복한다. 인간이기에. ‘과거는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을지라도, 분명 그 운율은 반복된다’(마크 트웨인).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일본 총리의 모든 활동은 언론을 통해 공개된다. 조간들은 2면쯤에 ‘총리 동정’란을 두고 전날 총리의 행적을 분 단위로 기록한다. 정치부 막내 기자의 첫 임무가 관저 입구를 지키며 들고 나는 사람들을 확인하고 기록하는 일이다. 이 관행을 두고 프라이버시와 보안 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총리의 일거수일투족은 견제와 감시의 대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늘 이겼다. 총리가 하루 한 번 이상 관저 로비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약식 기자회견(부라사가리) 전통도 이어져왔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심각해 보인다. 공식 기자회견은 물론이고 부라사가리도 한 달 반 넘게 하지 않는가 하면, ‘피를 토했다’는 보도에 이어 걸음걸이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제 게이오대 병원에 입원해 7시간 반이나 검진을 받은 일은 건강이상설에 기름을 부었다. ‘동정’에 가끔 총리가 호텔 피트니스센터에서 3∼4시간을 보냈다는 기록이 실리는데, 호텔방에서 진찰을 받은 것이란 소문이 있었다. ▷2007년 9월 집권 1년 만에 갑작스레 총리직을 내던진 당시의 데자뷔를 말하는 언론도 적지 않다. 당시 참의원 선거 참패와 연이은 내각 스캔들로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사퇴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 있었다. 오전까지도 머리를 젓던 그는 점심 때 사퇴를 발표한 뒤 병원에 입원해 버렸다. 당시 온갖 추측이 무성했다. 지병인 궤양성 대장염이 도져 하루 수십 번 화장실을 오가던 상황이었다는 설명이 나온 것은 수개월 뒤였다. 2009년 개발됐다는 신약 덕인지, 2012년 12월 두 번째 집권한 그는 예전보다 눈에 띄게 활동적이었다. 약의 부작용으로 약간 ‘업’된 상태라는 소문도 돌았다. ▷코로나와 함께 닥친 불운일까. 한때 그가 누렸던 모든 행운이 빛을 잃어가는 듯하다. ‘아베노믹스’를 구가해온 경제는 이 상태라면 올해 GDP 증가율이 ―27.8%로 전망되고 있다. 국운 도약의 목표로 삼았던 2020년 도쿄 올림픽도 길을 잃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남길 레거시를 찾아 헤매지만, 확실한 것은 역대 최장수 총리라는 기록뿐인 듯하다. 지난해 11월 20일을 기해 통산 재임 2887일로 최장수 기록을 깼는데도, 24일이면 ‘연속 재임일수’에서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의 2798일 기록을 추월한다고 강조한다. ▷그간 양국을 다 아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양국의 수장을 맡는 한 한일관계가 개선될 여지는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포스트 아베 시대에는 한일관계가 나아질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일본 총리는 하루아침에도 바뀐다는 점이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당연한 얘기지만 양복은 한반도에 처음 들어왔을 때 ‘서양의 옷’이란 뜻이었다. 조선 말기 개화파 정객들이 제일 먼저 양복을 입었는데, 1880년대 초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파견됐던 김옥균 서광범 유길준 윤치호 등이 그들이다. 그래서 한때 양복의 다른 이름은 ‘개화복’이었다. ▷조선에서 서양식 양복을 받아들인 것은 이로부터 10여 년이 더 지난 1894년 갑오개혁 이후다. 1895년 단발령이 내려졌고 1896년 고종의 칙령으로 서양식 육군복장을 제정했다. 1900년에는 문관들의 관복도 일본이 전수한 서양식으로 바꿨다. 1898년 배재학당이 검정 양복 스타일의 교복을, 1907년 숙명여학교가 자주색 원피스로 된 서양식 교복을 채용했고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는 한복 교복이 금지돼 양복식 교복이 퍼졌다. ▷‘상의와 하의를 같은 천으로 만든 한 벌의 양복’으로 대표되는 양복 정장은 한국의 현대사와 호흡을 함께하며 일상 속에서 격식을 갖춘 옷차림으로 정착했다. 경조사나 중요한 만남, 공적인 행사, 면접 등 TPO(시간·장소·상황)에 맞춰, 패션과 의전 사이를 오가며 드레스코드를 충족해 줬다. ▷이런 양복의 시대가 끝났다는 진단이 패션업계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코로나19로 재택근무가 늘면서 정장 수요도 줄었기 때문이다. 화상회의에 상의는 격식을 갖추고 하의는 반바지 차림으로 참석해도 되는 요즘 세태가 영향을 끼쳤다. 미국에서는 브룩스브러더스 등 전통 있는 정장 기업이 줄파산하고 국내 남성복 시장 규모도 8년 새 40%나 졸아들었다. 한 글로벌 의류업체 사장이 말한 대로, 코로나19는 “10년간 이뤄질 변화를 1년 만에 가져다주고 있다”. ▷양복, 특히 50대의 남성이 입은 양복은 최근 기성세대의 권위나 관행과 동의어가 돼 뭇매를 맞기도 했다. 이달 초 국회 본회의에 빨간 원피스를 입고 나타나 논란의 중심에 선 류호정 정의당 의원은 “국회 권위가 양복으로 세워지지 않는다”고 일갈했다. 관행이나 TPO가 영원히 한결같은 것은 아니라고도 했다. 일할 수 있는 복장이면 된다는 주장이다. ▷요즘은 맞춤정장보다 경제적인 기성복이 대세지만 양복의 본고장 유럽에서는 여전히 맞춤양복을 선호하는 문화가 남아 있다. 맞춤정장 가게가 즐비한 영국의 새빌로(Savile Row) 거리는 ‘원탁의 기사’를 모티브로 한 영화 ‘킹스맨’의 무대이기도 하다. 인류를 위협하는 악의 무리를 막아내는 조직의 핵심에 양복점이 등장하는 상상력에서, 유럽사회가 갖는 장인들에 대한 존경과 경외가 슬쩍 엿보였다. 양복과 언택트 시대의 복장, 합일점을 찾을 수 있을까.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 사태 이후 드러나는 시장실 운영 실태가 충격적이다. 피해자 측 주장에 따르면 시 간부들은 시장의 심기 보좌에 매달렸고 그 도구로 여비서라는 공무원을 활용했다. 여비서에게 시장 낮잠 깨우기나 혈압 측정을 전담시키고 샤워 뒤 속옷 챙기기에 주말 조깅까지…. 명색이 진보라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시장 심기나 챙기고, 피해자의 문제 제기는 모른 체하거나 방조했다는 얘기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심리학에 동조(conformity) 현상이란 게 있다. 인간이 암묵적 집단 압력을 느껴 집단 규범에 가까운 행동을 하는 현상이다. 누가 봐도 답은 명확하지만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틀린 답을 말하면 그 답이 옳다고 믿게 되는 솔로몬 아시의 ‘선분(線分) 실험’이 유명하다. 인간에게는 다른 인간의 힘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잘 선별된 엘리트 집단일수록, 그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할수록 신념과 행동 양식은 서로 닮기 쉽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책임감이 분산되는 제노비스 신드롬(방관자 효과)도 단서를 준다. 1964년 3월 뉴욕타임스가 대서특필한 키티 제노비스 살인 사건은 미국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새벽 3시경 퇴근하던 28세 여성 제노비스가 따라오던 괴한에게 난자당해 사망했다. 여성은 30여 분에 걸쳐 세 번이나 칼에 찔리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38명에 달했던 목격자들은 모두 “누군가 이미 경찰을 불렀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박 시장의 정무라인을 뜻하는 소위 ‘6층 사람들’은 2011년 박 시장 취임 뒤 여당과 시민사회단체 출신이 기용된 ‘어공’들이 대부분이다. 이들 개개인에게 “어떤 공공조직에서 한 직원이 여성이고 젊고 미모라는 이유로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되느냐”고 묻는다면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뛸 것이다. 그런데도 현실에서는 다르게 행동했다. 피해자는 성추행 피해를 누차 호소했지만 번번이 묵살당했고, 부서 이동을 요청했으나 “시장님은 그럴 분이 아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6층의 그들은 지금쯤 자각하고 있을까. 눈감고 외면했던 자신들의 행동이 박 시장을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가도록 방조한 것일 수도 있음을. ▷6층 사람들 중 지방별정직 27명은 박 시장 사망이 확인된 10일 자동 면직됐고 임순영(젠더특보) 등 몇 명만 임기가 남았다. 이들 대부분이 연락 두절 상태라 한다. 이들이 일말의 책임이라도 느낀다면 진상 규명에 적극 응해야 한다. 만약 심리적 집단 동조 현상 같은 수렁에 빠져 직분을 다하지 못하거나 사태를 은폐로 이끈 잘못이 있다면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1997년 중국 반환 직전의 홍콩을 취재하러 간 적이 있다. 금융가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반환 이후 홍콩을 낙관하고 있었다. 첨단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회주의 중국의 품으로 돌아가는 운명의 지역…. 세계의 우려 섞인 시선과 달리, 반환 이후 홍콩은 국제금융 허브로 한 단계 부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 5년 전인 1992년 미국은 ‘홍콩정책법’을 만들어 홍콩에 중국과 다른 특별지위를 부여했다. 고도의 자치 보장을 조건으로 비자 발급이나 관세, 금융, 민감한 기술제품의 수출 등에서 특별대우를 하기로 했다. 그 덕분에 홍콩은 중국 반환 후에도 글로벌 무역·금융 허브로 기능했고 미국과 중국, 홍콩 모두 ‘윈윈’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환율도 한몫했다. 홍콩달러(HKD)는 1983년부터 미화 1달러당 7.75∼7.85홍콩달러 범위 내에서 움직였다. 금융 당국이 외환시장에 개입해 고정환율을 유지시키는 ‘홍콩달러 페그(peg·고정용 못, 말뚝)제’다. 홍콩 당국은 페그제 유지를 위해 전체 통화량의 2배에 달하는 달러를 비축해 놓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주초에 홍콩 특별대우를 종식한다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중국이 홍콩 국가보안법을 제정한 것에 대해 ‘홍콩이 중국 땅이라고 주장한다면 정말 그렇게 대접하겠다’고 나선 셈이다. 한동안 만지작거리던 홍콩달러 페그제 폐지 카드는 일단 보류했다. 이미 각계에서 “글로벌 금융전쟁 선전포고나 다름없다”며 경계하는 메시지들이 쏟아져 나온 터다. ▷벌써부터 홍콩에서 돈과 인재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헥시트’(Hexit·Hongkong+Exit)가 시작됐다. 자금 유출은 지난해 2월부터 늘어나기 시작해 홍콩 보안법이 시행된 이달 들어 3배까지 급증했다. 100원이 들어오면 300원이 빠져나갔다는 뜻이다. 사태가 악화돼 만에 하나 홍콩 정부가 외화보유액을 소진한다면 최악의 경우 페그제가 깨질 수도 있다. 중국 정부가 미국의 달러화 패권에 맞서기 위해 위안화 국제화에 박차를 가하지만 현실은 초라하다. ▷전문가들은 홍콩발 위기가 글로벌 금융위기로 번질 가능성을 거론한다. 홍콩은 한국의 네 번째 수출국이고 홍콩을 통한 자금 조달 규모도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많다. 우리나라 전체 ELS(주가연계증권) 가운데 홍콩H지수에 근거한 잔액이 28조 원으로 전체 ELS 잔액의 60%를 넘는다. 독일 국채금리연계상품(DLS, DLF)이 많은 개인투자자들의 눈물을 흘리게 했듯이 홍콩 사태는 한국의 개인투자자들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홍콩의 민주주의 위기가 미칠 숱한 파장이 우려스럽고 안타깝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팬데믹이 된 코로나19에 대해, 인류는 모르는 게 많다. 요즘 떠오른 미스터리는 아시아와 서구의 사망자가 너무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인구 100만 명당 사망은 벨기에가 840명대로 가장 많고, 영국 650명대, 스페인 640명대, 이탈리아 570명대 등 유럽 선진국이 줄줄이 수백 명대를 기록했다. 반면 한국은 5.5명, 일본은 7.5명, 중국은 3.2명에 그쳤다. 위생이나 의료 수준을 논하기 전에 뭔가 ‘다른 요소’가 작동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프랑스의 몽펠리에대 폐의학과 연구진은 한국의 비결로 ‘김치’를 들었다. 아시아에서는 한국, 유럽에서는 독일의 사망자가 상대적으로 적은데 그 이유가 발효된 배추류를 상식(常食)하기 때문이라는 것. 발효된 배추는 사람 세포막에 있는 ACE2(앤지오텐신전환 효소2)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는데, 코로나바이러스는 바로 이 ACE2와 결합해 세포 속으로 침투한다. 독일의 사워크라우트(양배추를 절여 발효시킨 독일식 김치)도 효자식품으로 꼽혔다. 그리스와 불가리아가 이탈리아나 스페인보다 상대적으로 코로나19 피해를 덜 입은 것도 요거트 등 발효 음료 덕이라고 지적했다. ▷김치는 2002∼2003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유행 때도 한국이 피해를 비껴간 비결로 꼽히며 주목받았다. 김치에 들어간 마늘이 효자라거나 유산균이 효험이 있다는 등의 주장들이 나왔으나 과학적으로 똑 떨어지게 입증해내지는 못한 듯하다. 김치는 미국의 건강 연구지 ‘health’가 2008년 스페인 올리브유, 그릭 요거트, 인도 렌틸콩, 일본 낫토와 함께 세계 5대 건강식품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결핵예방백신인 BCG가 다시금 주목받았다. 과거 ‘불주사’라 불렸던 BCG는 폐결핵뿐 아니라 전반적인 호흡기 감염 진행을 막아주는 것으로 추정된다. 3월 통계에서 BCG를 접종하는 55개국보다 비접종 국가들에서 사망자가 21배 많았다. 한국과 일본, 중국은 모두 BCG 의무접종 국가인 데 반해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벨기에는 비접종국으로 꼽힌다. 일본 연구진은 결핵이 만연한 국가가 사망자가 적다는 점에도 주목하고 있다. BCG 혹은 결핵균이 인체의 자연면역을 활성화시키는 ‘훈련면역’ 효과를 낳았을 수 있다는 추론이다. ▷과거에 비슷한 바이러스에 감염돼 생긴 면역이 코로나19에도 작동한다는 ‘교차면역설’도 일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아시아의 낮은 사망률에는 이런 여러 요인이 상호보완하며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손 씻기나 마스크 착용, 김치 등 발효식품을 섭취하는 식습관도 중요한 요소로 작동할 것이다.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코로나19 종식은 불가능한 목표다.” 21일 신종감염병 중앙임상위원회 오명돈 위원장의 기자회견 발언은 섬뜩할 정도로 명쾌했다. 그는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돼 집단면역이 형성되지 않는 이상…방역 목표는 코로나 종식이 아닌 인명 피해의 최소화”라고 잘라 말했다. 마음은 오히려 가벼워졌다.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될 때까지’ 코로나와 동거할 수밖에 없다는 건 어렴풋이나마 각오하고 있던 터였다. ▷문제는 백신이나 치료제에 대한 기대에도 불안감을 안겨주는 최신 연구 결과들이다. 최근 중국에서 재확산 중인 바이러스는 우한에서 시작된 1차 유행 바이러스의 변종(‘D614G’)으로 코로나 완치 환자도 면역이 안 되고 항체 치료와 백신 개발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초기 바이러스보다 침투 능력은 2.4배, 전염성은 10배 강해졌다. 우한 바이러스를 기반으로 한 현재의 백신 개발 경쟁은 쓸모없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인류가 20세기 초에야 바이러스의 존재를 발견했을 정도로 바이러스의 세계는 미지의 영역이 많다. 1918∼19년 5000만 명을 희생시킨 스페인독감의 원흉이 조류인플루엔자A(H1N1) 바이러스였음은 2005년에야 밝혀졌다. 인류에게 치명적 상흔을 남긴 세균·바이러스들은 대부분 어느 지역의 풍토병이 다른 대륙으로 확산된 것들이다. 가령 콜레라는 인도 갠지스강 유역, 에볼라 출혈열이나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은 아프리카 일부 지역의 오랜 풍토병이었다. ▷코로나19도 감기나 인플루엔자(독감)처럼 계절성 풍토병으로 정착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그러기엔 높은 치사율이 마음에 걸린다. 21일 현재 치사율은 한국 2.3%, 미국 5.3%지만 프랑스는 18.5%에 이른다. 메르스는 치사율이 30%지만 전염력이 코로나에 비교도 안 된다. 스페인독감 2.5%(2차 유행 시), 인플루엔자는 1% 미만이다. 사스와 스페인독감은 흔적을 감췄지만 인플루엔자는 변종이 많아 매년 새 백신을 개발해야 하는 풍토병으로 정착됐다. ▷코로나와 함께 사는 세상은 앞으로도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세계는 언택트와 4차 산업혁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방역과 경제가 조화된 ‘뉴 노멀(New Normal·과거와 다른 새로운 일상)’이 부상했고 코로나가 사라지더라도 이전 세상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빌 게이츠는 최근 팬데믹 극복의 힘을 인류의 ‘혁신 능력’에서 찾자고 했다. 다만 전염병이 몰고 온 ‘단절’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남는다. 국경이 닫히고 교류가 줄며 사람 간 만남과 접촉이 회피되는 세상에서, 인류는 또 어떤 ‘즐거운 일’을 찾아낼까.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