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운

김상운 기자

동아일보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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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학술 분야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단행본 ‘국보를 캐는 사람들’(글항아리)을 냈고,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을 제작했습니다.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sukim@donga.com

취재분야

2026-01-09~2026-02-08
칼럼51%
문학/출판17%
역사10%
미국/북미7%
국제일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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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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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3%
  • 경주 금관총 주인 ‘이사지왕’ 유력해져

    베일에 싸여 있던 경주 신라 금관총(金冠塚)의 주인이 이사지왕(尒斯智王)임을 밝혀 줄 결정적 유물이 발견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최근 금관총 재발굴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尒斯智王刀(이사지왕도·이사지왕의 칼)’라는 글자가 새겨진 칼집 끝 장식이 출토됐다”고 30일 밝혔다. 이와 함께 ‘가는 고리 귀걸이(細環耳飾·세환이식)’ 3점과 ‘굵은 고리 귀걸이(太環耳飾·태환이식)’ 1점, 유리구슬 여러 점도 함께 출토됐다. 앞서 2년 전에는 금관총에서 나온 다른 둥근고리칼(環頭大刀·환두대도)의 칼집 2점에서 ‘尒(이)’와 ‘尒斯智王(이사지왕)’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사실을 발견했다. 금관총에서 출토된 둥근고리칼 세 점 모두에 이사지왕과 관련한 명문이 새겨져 있는 것. 특히 2년 전 칼집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던 ‘刀’자가 이번에 추가로 나옴에 따라 이사지왕의 칼이라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칼집 석 점에 적힌 명문은 특유의 삐뚤빼뚤한 글씨체가 똑같다. 이는 둥근고리칼 석 점이 모두 한 사람의 것임을 뒷받침한다. 5세기 말 조성된 금관총의 주인은 1921년 발굴 이후 94년간 풀리지 않은 고고학계의 오랜 미스터리였다. 이번 발견은 무덤의 주인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라는 평가다. 최근까지 학계에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1921년 발굴을 주도한 일본 교토대 교수 우메하라 스에지가 그린 유물 배치도에 둥근고리칼의 위치가 착장이 아닌 부장품 쪽에 표기된 점을 들어 일부 학자들은 이사지왕이 무덤 주인에게 칼을 하사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반면 다른 학자들은 금관총 발굴이 비전문가들에 의해 졸속으로 이뤄진 사실을 들어 유물 배치도를 믿을 수 없다고 본다. 또 금관에 연결돼 늘어뜨린 ‘가는 고리 귀고리’를 주로 남성이 사용했다는 점을 들어 무덤 주인이 이사지왕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그런데 이번에 ‘이사지왕의 칼’임을 밝힌 명문이 또다시 발견됨에 따라 이사지왕이 금관총의 주인이라는 쪽에 무게가 실리게 됐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한 세트의 칼 세 자루를 한꺼번에 피장자에게 하사했다고 보기는 힘들다”며 “이번 발견은 이사지왕이 무덤의 주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유물 배치도에 근거한 반론에 대해 이 교수는 “왕이 묻힌 게 확실한 황남대총 남분에서도 부장부에서 수십 점의 칼이 출토됐다”며 “더구나 유물 배치도를 그린 우메하라가 발굴이 끝난 뒤에야 현장에 도착했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담았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덧붙였다.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도 “칼을 석 점씩이나 하사할 필요는 없다”며 “더구나 모든 칼이 이사지왕과 연관돼 있기 때문에 무덤의 주인을 이사지왕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설명했다. 만약 무덤 주인이 이사지왕이라면 그가 누구였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남은 과제다. 학계는 이사지왕이 당시 신라 최고 지배자인 마립간(왕)이거나 이른바 ‘차칠왕(此七王)’ 등으로 불린 유력 귀족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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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베 비판’ 더든 - 언어학 거두 촘스키 동참

    세계 지식인 공동성명에 참여한 각국 학자들의 면면은 화려하다. 일본 근대사를 전공한 알렉시스 더든 코네티컷대 역사학과 교수는 올 5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역사 왜곡에 항의하는 역사학자들의 집단성명을 주도했다. 그는 미국을 비롯해 일본 영국 독일 노르웨이 브라질 등 세계 각국 학자 500여 명의 참여를 이끌어 냈다. 더든 교수는 아베 총리가 방미했을 때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인신매매’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쓰자 “‘인신매매’ 발언에는 누가 위안부 문제에 책임이 있는지가 없다. 책임 있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또 5월 성명에 참여했던 에즈라 보걸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이번 성명에도 참여했다. 그는 6월 도쿄에서 자민당 소장파 의원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아베 총리가 8월 종전 70주년 담화에서 한국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있었다고 확실히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29일 새벽 거의 막차로 이번 성명에 참여한 놈 촘스키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는 현대 언어학계의 거두로 미국의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이다. 이 밖에 차기 미국역사학회장에 선출된 패트릭 매닝 피츠버그대 교수와 한반도 전문가인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 등도 동참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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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시아 시민세력 힘모아 ‘민족주의 정치’ 맞서야”

    “동아시아의 양심적 시민세력이 단결해야 합니다. 그것이 동아시아가 과거사에서 해방돼 평화로운 미래를 그릴 수 있는 길입니다.” 이번 세계 지식인 공동성명을 주도한 와다 하루키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와 김영호 한국학중앙연구원 초빙교수는 민족주의를 자국 정치에 이용하는 행태에 맞서 건전한 동아시아 시민세력이 연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2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가진 동아일보와의 대담에서 “일본의 과거사 왜곡은 지역 이슈를 넘어 세계적 차원에서 명명백백하게 논의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번 성명은 5년 전 성명과 달리 미국, 유럽 학자들까지 가세해 의미가 남다른 것 같다. ▽김영호 교수(이하 김)=미국 교수들이 마치 자신의 일처럼 서명에 동참해 깜짝 놀랐다. 얼마 전 만난 알렉시스 더든 코네티컷대 교수는 성명서를 쭉 읽더니 “글에 담긴 진정성에 몸이 떨린다”며 미국 학자들의 서명 작업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더라. 그 덕분에 차기 미국 역사학회장에 선임된 패트릭 매닝 피츠버그대 교수 등 저명 학자들의 참여가 가능했다. 조만간 중국과 동남아 학자들도 서명에 나설 것으로 기대한다. 세계 각국의 지지 성명을 바탕으로 1951년 전후 책임 문제를 다룬 샌프란시스코 강화회담이 열린 장소에서 각국 학자들이 만나는 자리를 내년쯤 만들 계획이다. ▽와다 하루키 교수(이하 와다)=한일 문제는 동아시아 전체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중국과 북한 지식인들의 참여도 필요하다. ―이번 성명을 계기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다음 달 담화 내용이 전향적으로 바뀔 가능성은…. ▽와다=아베 총리가 담화문에 이번 성명을 반영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지만 상황이 바뀔 여지는 충분하다고 본다. 현재 아베 총리는 일본 내에서 정치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지경에 빠져 있다. 개헌 추진에 대해 시민과 지식인들의 반대가 상당한 데다 지지율도 떨어지고 있다. 시민들의 바람을 반영해 사죄하는 표현을 넣을지, 자신의 역사적 신념을 그대로 관철할 것인지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진 상황이다. 일본에서 고노 요헤이(河野洋平)와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담화를 부정하고서는 총리직을 계속 수행하기 힘들다. 만약 아베 총리가 고노 담화 등을 부정한다면 이미 이를 인정한 천황의 뜻과도 충돌하는 것이 된다. ―아베 담화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야 한다고 보나. ▽김=기존의 고노, 무라야마, 간 나오토(菅直人) 담화를 인정하고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또 위안부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고, 강제 징용을 명백히 인정하는 것도 기본이다. 아시아의 진정한 역사적 화해를 가져올 수 있는 담화가 되어야 한다. 이번 세계 지식인 공동성명도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간절한 바람이 들어 있다. ―성명서에 반일감정을 국내 정치에 이용하는 행태에 대한 비판도 있던데…. ▽와다=기본적으로 일본이 반성하지 않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다. 다만 반일 감정을 이용하는 움직임을 지적한 것은 일본 보수주의자들을 설득하려는 측면이 강하다. 그 점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김=한중일 모두 국내의 시민세력을 컨트롤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이 틀을 깨려면 각국의 양심적인 시민세력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인식이야말로 이번 성명이 나온 중요한 배경이기도 하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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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금보검 등 1급 신라유물 600점 출동

    아라비아 왕자가 차고 다녔을 것 같은 황금 보검(寶劍)이 눈부시게 빛난다. 수많은 금 알갱이들로 칼의 테두리를 세밀하게 장식한 모습은 신라 금귀고리에서 보이는 누금세공(鏤金細工)을 연상케 한다. 금으로 만든 칼집의 상단에는 태극 문양의 빨간색 석류석이 박혀 있어 이국미를 더한다. 하단은 타원형의 유리를 씌운 흔적이 뚜렷하다. 1973년 경북 경주시 계림로 14호 무덤에서 발견된 일명 ‘계림로 보검’(보물 제635호·사진)은 신라가 글로벌 사회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이다. 이것과 흡사한 보검이 카자흐스탄 보로보예에서도 출토됐다. 학계는 계림로 보검이 중앙아시아나 흑해 연안에서 만들어진 뒤 신라까지 흘러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유라시아 대륙을 넘나드는 문명 교류의 발자취로 이처럼 이국적인 양식의 신라 유물은 계림로 보검이 유일하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최근 개최한 ‘신라의 황금문화와 불교미술’ 특별전은 신라 왕도(王都)에서 열린 전시회답게 1급 신라 유물들이 총출동했다. 계림로 보검을 비롯해 금동 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 금관총 금관(국보 제87호), 보문동 합장분 금귀고리(국보 제90호) 등 신라 문화재 600여 점(국가지정문화재 30점 포함)을 대거 선보인다. 이 중 금동 반가사유상은 경주에서 처음 전시된다. 이번 전시는 방대한 작품 수만큼이나 신라의 대외교류와 종교상, 장례문화 등을 종합적으로 아우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신라의 국호가 유래한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덕업이 날로 새롭고 사방을 망라하다)’이 상징하듯 신라의 개방성을 현대적으로 조명한 전시도 눈길을 끈다. 예컨대 3부 대외교류 섹션에서 부리부리한 서역인의 얼굴을 닮은 무인석상은 계림로 보검과 황남대총 봉수형 유리병, 식리총 금동 신발과 더불어 신라의 활발한 대외교류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4∼6세기 신라의 황금 유물과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이 북방 초원지대에서 비롯됐다는 학설이 나오는 등 신라 문화의 글로벌 역동성을 짐작할 수 있다. 11월 1일까지. 054-740-7535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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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등생 눈높이에 맞춘 ‘교과서 고전회화’展

    교과서에 등장하는 고전 회화와 첨단 미디어아트가 만났다. 간송미술관은 ‘매난국죽 선비의 향기’ 전시회를 초등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춰 감상할 수 있도록 한 방학 특별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김홍도의 ‘백매’를 비롯해 이정의 ‘풍죽’ ‘순죽’ 등 조선시대 화가 31명이 그린 사군자 100여 점을 선보인다. 미술관 측은 초등학교 4∼6학년생을 대상으로 교과서에 수록된 고전회화의 작품 이해를 돕는 전시장 투어와 강의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특히 이번 전시회는 단순히 고전 회화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디어 세대의 기호에 발맞춰 전통회화를 동영상으로 재해석한 미디어아트 작품을 함께 전시해 눈길을 끈다. 이정의 17세기 그림인 ‘풍죽’ 옆에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대나무가 흔들리는 동영상을 틀어준다. 차동훈 작가의 미디어아트 작품(풍죽예찬)을 감상하면 이정이 풍죽을 그리며 마음속에 품었을 법한 감동을 영상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게 미술관 측 설명이다. 이번 방학 프로그램은 다음 달 22일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매회 선착순으로 진행된다. 초등생 1만5000원, 학부모 1만 원(전시 관람 포함). 02-2113-3428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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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日 국민, 후쿠자와 거짓 신화에 현혹”

    “동양의 노후한 거목(巨木)을 일격에 꺾자!” 1882년 6월 흥선대원군을 등에 업은 구식 군대가 임오군란을 일으키자, 일본의 근대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는 조선 정벌을 강하게 주장했다. 2년 뒤 개화파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일으켰을 때 후쿠자와는 직접 무기를 제공하기까지 했다. 그는 “조선 경성에 주둔 중인 지나(중국) 병사를 몰살하고 곧바로 베이징을 함락시켜야 한다. 천황 폐하의 친정을 기필코 단행해야 한다”고 외쳤다. 일본의 최고액 지폐인 1만 엔권에 등장하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 아베 신조 총리와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 도지사 등 일본 극우세력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숨을 거둔 지 벌써 100년이 넘었지만 후쿠자와 유키치를 둘러싼 평가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후쿠자와 서거 100주기였던 2001년 아사히신문과 일본경제신문 등 일본 유수의 언론이 그를 대대적으로 조명했다. 나고야대 교수 출신의 원로 학자인 저자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물론이고 전후 일본 학계에서 ‘덴노(天皇·천황)’로 불리며 최고의 정치사상가로 군림한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1914∼1996)도 신랄하게 공격한다. 마루야마가 전후 민주주의를 강조하면서 전체주의적 보수주의자에 불과했던 후쿠자와를 마치 시민자유주의의 선구자인 것처럼 왜곡했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주제다. 후쿠자와와 마루야마를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 현 일본 학계에서는 지극히 파격적인 주장이다. 저자가 논거로 드는 것은 후쿠자와가 설립한 시사신보(時事新報)의 사설이다. 이 중 천황이 국민의 교육지침으로 1890년 내린 ‘교육칙어’에 대한 내용에 주목하고 있다. “천황 폐하가 우리 신민의 교육에 노심초사하는 성려의 깊으심에 감읍하지 않은 자 누가 있으랴. 생도로 하여금 가슴 깊숙이 새기게 해야 함은 충국애군(忠國愛君)의 정신을 빛나게 하여 폐하의 의중을 관철하게 함에 있다.” 마치 조선시대 용비어천가를 보는 것처럼 찬양일색이다. 저자는 시사신보의 당시 사설 대부분이 후쿠자와의 손을 거쳤다며 “후쿠자와가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교육칙어에 찬성하지 않았다”는 마루야마 등 다수 학자의 주장은 분명 잘못된 것이라고 강조한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아래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는 후쿠자와의 명언을 천부인권의 자유주의 사상으로 해석한 마루야마의 이론도 정면으로 공박한다. 원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위 문장이 ‘∼라고 한다’ 식의 전언체로 돼 있는데 이는 후쿠야마 자신의 주장이라기보다 서구의 천부인권 사상을 단순히 인용한 데 불과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후쿠자와는 저서 ‘학문의 권장’에서 “일본 국민의 유순함은 집에서 기르는 비쩍 마른 개와 같다” “인민은 여전히 무기력한 우민(愚民)일 뿐”이라며 일반 대중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저자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라면 철저하고 신중한 연구로 유명한 마루야마가 후쿠자와를 높이 평가한 이유는 뭘까. 저자는 “일본에도 이렇게 위대한 민주주의 사상의 선구자가 있었다는 신화를 만들어 민주화를 장려하고자 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마루야마 자신의 민주주의 신념을 후쿠자와 사상에 투영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정치적 의도가 깔린 학문 연구는 일본 사회를 제대로 변혁할 수 없다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이 책은 후쿠자와를 시종일관 거침없이 비판했지만 그를 위한 단 하나의 변명을 남겼다. “필자는 후쿠자와의 한계를 그의 사상적 책임으로만 치부할 생각은 없다. 국가권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된 시민사회를 형성할 수 없었던 일본 자본주의의 역사적 조건을 읽어내지 않는다면 (후쿠자와에 대한 비판은) 공평성을 결여한 논의가 될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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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랑 만난 조선 선비의 대륙 종횡 오디세이

    조선시대 선비 중 유일하게 중국 베이징(北京)∼항저우(杭州) 대운하를 종단한 것으로 확인되는 최부(1454∼1504)의 148일간의 좌충우돌 여행기록이 공개된다. 국립제주박물관은 1488년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중국 남부지방에 표류한 그가 고국으로 돌아오기까지 여정을 다룬 ‘조선 선비 최부, 뜻밖의 중국 견문’ 특별전을 21일 개막했다. 조선 성종 때 문신으로 제주도에 관리로 부임한 최부는 부친상을 당해 일행 42명과 함께 배를 타고 나주로 가던 도중 거센 풍랑을 만났다. 겨우 목숨을 건져 중국 저장(浙江) 성 닝보(寧波) 부에 닿은 최부 일행은 해적에게 잡히는 등 갖은 고초를 겪었다. 그는 조선 관료 신분을 인정받고 대운하를 통해 항저우에서 베이징까지 이동한 뒤 다시 육로로 조선에 돌아왔다. 중국 명나라 당시 강남과 강북, 요동지역을 모두 가본 조선인은 최부 일행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은 외적의 정탐을 막는다는 취지로 외국인들의 강남 지역 여행을 금지했다. 최부는 조선에 돌아오자마자 부친상도 미룬 채 왕명에 따라 자신의 여행기록을 정리해 ‘중조문견일기(中朝聞見日記)’로 남겼다. 30년 뒤 중종 때 ‘표해록(漂海錄)’으로 간행됐는데, 일본에까지 전해졌다. 이번 전시에서는 고려대 소장본과 일본 번역본까지 총 8종의 표해록 관련 서책을 선보인다. 특히 최부가 표해록에서 다룬 당시의 생활문화를 고증하기 위해 중국 저장성박물관에서 오량관(五梁冠·고위직 관원이 머리에 쓰던 관) 등 명나라 복식과 그림, 조각 등 각종 유물을 대여해 왔다. 내년에는 같은 전시가 중국 저장성박물관에서도 열릴 예정이다. 10월 4일까지. 064-720-8102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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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선비 최부 ‘좌충우돌 중국 종단여행기’ 공개

    조선시대 선비 중 유일하게 중국 베이징(北京)~항저우(杭州) 대운하를 종단한 것으로 확인되는 최부(1454~1504)의 좌충우돌 여행기록이 공개된다. 국립제주박물관은 1488년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중국 남부지방에 표류한 그가 고국으로 돌아오기까지 여정을 다룬 ‘조선 선비 최부, 뜻밖의 중국 견문’ 특별전을 21일 개막했다. 조선 성종 때 문신으로 제주도에 관리로 부임한 최부는 부친상을 당해 일행 42명과 함께 배를 타고 나주로 가던 도중 거센 풍랑을 만났다. 겨우 목숨을 건져 중국 저장(浙江)성 닝보(寧波)부에 닿은 최부 일행은 해적에게 잡히는 등 갖은 고초를 겪었다. 그는 조선 관료 신분을 인정받고 대운하를 통해 항저우에서 베이징까지 이동한 뒤 다시 육로로 조선에 돌아왔다. 중국 명나라 당시 강남과 강북, 요동지역을 모두 가본 조선인은 최부 일행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은 외적의 정탐을 막는다는 취지로 외국인들의 강남 지역 여행을 금지했다. 최부는 조선에 돌아오자마자 부친상도 미룬 채 왕명에 따라 자신의 여행기록을 정리해 ‘중조문견일기(中朝聞見日記)’로 남겼다. 30년 뒤 중종 때 ‘표해록(漂海錄)’으로 간행됐는데, 일본에까지 전해졌다. 이번 전시에서는 고려대 소장본과 일본 번역본까지 총 8종의 표해록 관련 서책을 선보인다. 특히 최부가 표해록에서 다룬 당시의 생활문화를 고증하기 위해 중국 저장성박물관에서 오량관(五梁冠·고위직 관원이 머리에 쓰던 관) 등 명나라 복식과 그림, 조각 등 각종 유물을 대여해왔다. 내년에는 같은 전시가 중국 저장성박물관에서도 열릴 예정이다. 10월 4일까지. 064-720-8102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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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난당한 조선불화 美서 되찾아와 공개

    도난당한 조선시대 불화가 최근 환수돼 일반에 공개됐다. 문화재청과 대한불교조계종은 “미국 경매시장에 출품된 조선 불화 ‘동악당재인대선사진영(東岳堂在仁大禪師眞影)’을 최근 환수했다”고 21일 밝혔다. 이 작품은 18세기에 활동한 승려 동악당재인대선사를 비단에 그린 채색 초상화(65×97cm)로 전남 순천 선암사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1990년대 도난당했다. 동악당재인대선사는 17세기 후반부터 선암사의 각종 불사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난 직전까지 달려있던 화기(畵記)에 따르면 이 불화는 1738년경 그려졌다.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올 3월 이 불화가 미국 경매시장에 나온 사실을 파악하고 경매소 측에 경매 중지를 요청했다. 재단 측은 불화를 경매시장에 출품한 소유주와 협의를 거쳐 무상으로 환수하는 데 합의했다. 조계종은 불화를 국내로 들여오는 비용을 부담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이번 환수를 계기로 문화재청과 조계종이 해외 소재 불교 문화재에 대한 정보 공유에 적극 나서기로 했다”며 “개별 문화재의 반출 경위를 체계적으로 조사해 도난 문화재로 확인될 경우 이번처럼 무상 환수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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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적 실학 모색… 다산의 세계 꿰뚫어”

    “돌아가시기 직전 저를 부르시더니 비석 같은 번거로운 것은 일절 세우지 말라고 하십디다. ‘학자는 오직 책으로만 자신을 알린다’고 하시면서요.” 칠순을 넘긴 노학자의 눈시울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벌써 17년이 흘렀건만 그는 스승의 마지막 모습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오종일 전주대 명예교수는 “선생님은 말년에도 하루 10시간 이상 책상에 앉아계셨다. 숨을 거두기 석 달 전까지 논문 ‘한국실학 자생론(韓國實學自生論)’을 펴내실 정도였다”고 말했다. 다산학(茶山學)의 거두 현암 이을호 선생(1910∼1998) 얘기다. 현암의 각종 논문과 저서를 모은 27권짜리 ‘현암 이을호 전서’(한국학술정보)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최근 출간됐다. 이 전집 출간에 힘을 보탠 현암의 직계 제자 세 명을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만났다. 이들은 스승에 대해 “전 재산을 교육사업에 쾌척할 정도로 순수했던 동시에 학문의 세계에서는 추상같이 엄격한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현암이 전남대 인문대학장으로 재직할 때 교수들의 연구실에 놓여 있던 바둑판을 엎었던 얘기가 대표적이다. 한가하게 바둑이나 둘 시간에 한 자라도 더 책을 보라는 준엄한 질책이었다. 현암은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에 나서 옥고를 치를 당시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를 감옥에서 일독한 뒤 본격적인 학자의 길로 들어섰다. 본래 현암은 경성약전을 졸업한 뒤 약국을 차린 약사 출신. 오 교수는 “당시 최승달 선생을 통해 이제마의 사상의학(四象醫學)을 공부한 것도 실학 연구에 나서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사상의학이 중의학에서 벗어나 한국인의 체질에 맞는 독자 의학을 추구한 것처럼 현암도 주자성리학 일변도에서 탈피한 주체적인 실학을 모색했다는 것이다. 평생 학문 연구에서 한국적 시각을 중시한 현암의 노력은 고전 번역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논어를 한글로 번역할 때 다산의 주석을 참고하면서 우리 시각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또 딱딱한 번역투가 아닌 깔끔한 한글 번역으로 눈길을 끌었다. 최근 인기를 모은 올재클래식스 시리즈의 ‘한글논어’는 50여 년 전 현암이 집필한 책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명작은 살아남는다는 진리를 새삼 일깨워준다. 무엇보다 현암이 이룬 금자탑은 1967년 쓴 ‘다산경학사상연구’. 다산학 최초 논문으로 방대한 다산의 저작을 명쾌한 논리로 꿰뚫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금도 다산학 입문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로 통한다. 이향준 장복동 전남대 교수는 “이 논문 속에 다산학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모두 담겨 있다”며 “선생은 시대를 앞서간 분이었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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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국가 vs 개인… 두 야망, 서로 다른 곳을 향하다

    이 책은 개인적 혹은 국가적 야망이 꿈틀대는 어느 나라의 이야기다. 한때는 두 야망이 한 방향을 향했지만 이제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국면에 이르렀다. 국가의 발전이 곧 나의 발전이라는 시대는 흘러간 지 오래. 이제 개인의 욕망이 철의 장막을 친 국가를 위협한다. 국가의 입장에서는 마치 온 가족의 희생 덕에 합격한 사법고시생이 자기 욕망을 좇아 가족을 배반한 꼴과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사설이 길어졌다. 이 나라는 바로 중국이다. 중국 특파원 출신의 미국인 저자는 1970년대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정책 이후 급변한 이 나라 국민들의 다양한 삶을 세밀하게 추적했다. 특히 주요 인사들을 직접 인터뷰해서 국가와 개인의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중국인들의 미묘한 심리를 제대로 파고들었다. 대표적 사례가 경제잡지 차이징(財經)의 설립자 후수리(胡舒立). 그는 이 책의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복잡 미묘한 캐릭터 중 하나다. 차이징은 철저한 언론 검열의 나라 중국에서 2003년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사태의 원인과 문제점을 심층 보도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이는 검열 지침의 빈틈을 적절히 파고드는 동시에 상업 언론이 나아갈 방향을 정확히 파악한 후수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기자 초년병 시절 여러 지방정부를 출입하면서 시진핑 주석 등 권력층과 안면을 익힌 후수리는 중앙정부가 결정적으로 아파하는 곳은 건드리지 않는다.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것은 나무를 쓰러뜨리기 위한 게 아니라 더 곧게 자라게 하기 위해서”라는 후수리의 명언은 그의 언론 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중국 사회의 붕괴를 원하는 게 아니라 개선, 발전을 지향한다는 논리다. 이를 두고 혹자는 후수리를 권언유착의 상징으로 비판하지만 그 어떤 중국 언론인보다 사회의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 저자의 냉정한 평가다. 하지만 엄청난 비용을 들여가며 국민을 통제하려는 중국 공산당의 노력은 결국 평범한 중국인들의 삶과 모순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고도 자본주의와 정보기술(IT) 시대의 세례를 받은 국민들이 더 많은 정보와 권리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중국 공산당은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거대한 인간 잠재력의 확장을 가져왔고 어쩌면 그럼으로써 자신의 생존에 가장 큰 위협을 맞게 됐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을 서구화 내지 민주주의의 단초로 보는 것은 섣부른 판단일 수 있다. 서구식 자유주의를 희구했던 톈안먼 광장의 젊은이와 요즘 중국의 젊은이들은 다르다는 것이다. 예컨대 2008년 티베트 시위 사태 때 ‘2008년 중국이여, 일어나라!’는 동영상을 제작해 서구 언론을 공격한 탕제를 보면 그렇다. 당시 푸단대 대학원생이던 그는 서구 언론들이 중국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내용의 동영상으로 온 중국 대륙을 민족주의 물결로 물들였다. 결국 중국의 미래는 수많은 중국인의 욕망만큼이나 다양한 경우의 수를 갖고 있지 않을까.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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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인의 욕망? 국가적 야망? 갈등하는 중국의 미래는…

    이 책은 개인적 혹은 국가적 야망이 꿈틀대는 어느 나라의 이야기다. 한때는 두 야망이 한 방향을 향했지만, 이제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국면에 이르렀다. 국가의 발전이 곧 나의 발전이라는 시대는 흘러간 지 오래. 이제 개인의 욕망이 철의 장막을 친 국가를 위협한다. 국가의 입장에서는 마치 온 가족의 희생 덕에 합격한 사법고시생이 자기 욕망을 좇아 가족을 배반한 꼴과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사설이 길어졌다. 이 나라는 바로 중국이다. 중국 특파원 출신의 미국인 저자는 1970년대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정책 이후 급변한 이 나라 국민들의 다양한 삶을 세밀하게 추적했다. 특히 주요 인사들을 직접 인터뷰해서 국가와 개인의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중국인들의 미묘한 심리를 제대로 파고들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경제잡지 차이징(財經)의 설립자 후수리(胡舒立). 그는 이 책의 등장인물 중 가장 복잡 미묘한 캐릭터 중 하나다. 차이징은 철저한 언론 검열의 나라 중국에서 2003년 사스(SARSㆍ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사태의 원인과 문제점을 심층 보도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이는 검열 지침의 빈틈을 적절히 파고드는 동시에 상업 언론이 나아갈 방향을 정확히 파악한 후수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기자 초년병 시절 여러 지방정부를 출입하면서 시진핑 주석 등 권력층과 안면을 익힌 후수리는 중앙정부가 결정적으로 아파하는 곳은 건드리지 않는다.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것은 나무를 쓰러뜨리기 위한 게 아니라 더 곧게 자라게 하기 위해서”라는 후수리의 명언은 그의 언론 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중국 사회의 붕괴를 원하는 게 아니라 개선, 발전을 지향한다는 논리다. 이를 두고 혹자는 후수리를 권언유착의 상징으로 비판하지만, 그 어떤 중국 언론인보다 사회의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 저자의 냉정한 평가다. 하지만 엄청난 비용을 들여가며 국민을 통제하려는 중국 공산당의 노력은 결국 평범한 중국인들의 삶과 모순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고도 자본주의와 정보기술(IT) 시대의 세례를 받은 국민들이 더 많은 정보와 권리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중국 공산당은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거대한 인간 잠재력의 확장을 가져왔고 어쩌면 그럼으로써 자신의 생존에 가장 큰 위협을 맞게 됐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을 서구화 내지 민주주의의 단초로 보는 것은 섣부른 판단일 수 있다. 서구식 자유주의를 희구했던 천안문 광장의 젊은이와 요즘 중국의 젊은이들은 다르다는 것이다. 예컨대 2008년 티베트 시위 사태 때 ‘2008년 중국이여, 일어나라!’는 동영상을 제작해 서구 언론을 공격한 탕제를 보면 그렇다. 당시 푸단대 대학원생이던 그는 서구 언론들이 중국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내용의 동영상으로 온 중국 대륙을 민족주의 물결로 물들였다. 결국 중국의 미래는 수많은 중국인들의 욕망만큼이나 다양한 경우의 수를 갖고 있지 않을까.김상운 기자sukim@donga.com}

    • 2015-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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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1600년전 백제인, 폭 20m 포장도로 깔았다

    지난해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도로는 폭이 약 20m에 이르는 ‘대형 포장도로’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지금까지 발굴된 백제 도로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이다. 이와 함께 요즘 고속도로의 중앙분리대 역할을 하는 ‘중앙 도랑’을 갖추고, 회(灰)와 자갈을 섞어 표면을 포장한 사실도 새로 드러났다. 최근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가운데 초기 한성 백제시대(4∼5세기) 왕성(王城)의 위상을 알 수 있는 유적이다. 한성백제박물관은 올 3월부터 시작한 서울 송파구 몽촌토성 내 북문(北門)터에 대한 2차 발굴조사 결과 지난해 7월 발견된 백제 도로 2개가 폭이 15∼20m에 이르는 대형 포장도로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9일 밝혔다. 이 중 북문에 가까운 2번 도로는 너비 3.4m의 도랑을 가운데 두고 폭이 3.1∼3.6m인 노면 2개가 나란히 평행을 이루고 있다. 각 노면 양끝에는 배수로 역할을 하는 폭 4∼5m의 측구(側溝)가 50cm 깊이로 파여 있다. 박중균 한성백제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측구 2개와 중앙 도랑, 노면 2개를 포함한 2번 도로의 전체 폭은 약 20m에 이른다”며 “현재까지 확인된 이 도로의 길이만 35m가량 된다”고 밝혔다. 발굴팀은 이곳이 수레가 드나든 왕복 2차로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2번 도로에서 남동쪽으로 20m가량 떨어져 있는 1번 도로 역시 마찬가지로 중앙 도랑을 사이에 두고 2개의 노면과 측구가 나란히 배치돼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금까지 26m의 길이가 확인된 1번 도로의 폭도 최소 15m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규모가 더 크고 몽촌토성 북문과 맞닿아 있는 2번 도로가 왕경 대로(大路)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지금의 광화문 세종대로를 연상하면 알기 쉽다. 흥미로운 것은 두 도로의 진행 방향이 몽촌토성의 옛 북문을 거쳐 이로부터 700m쯤 떨어져 있는 풍납토성으로 향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고고학계에서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 백제시대 당시 각각 남성(南城)과 북성(北城)이었고 이 중 한 곳에 왕궁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인숙 한성백제박물관장은 “이번에 발굴된 백제시대 도로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아우르는 백제 왕도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역사적인 유적”이라고 말했다. 도로 노면의 경우 자갈과 점토를 섞어 다진 뒤 시루떡처럼 쌓아올리고 표면을 회와 자갈을 혼합해 포장한 사실도 눈길을 끈다. 이렇게 하면 도로의 내구성이 한층 강화된다. 실제로 인근의 통일신라시대 도로에 숱한 수레바퀴 흔적이 남아 있는 반면 백제 도로에서는 지금까지 단 하나의 수레바퀴 흔적만 발견됐다. 그만큼 도로 표면이 단단해 지반이 쉽게 내려앉지 않았다는 얘기다. 회를 사용한 것과 관련해 학계 일각에서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백제의 ‘증토축성법(蒸土築城法)’이 도로에 응용된 게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증토축성법은 석회를 물에 개어 마치 시멘트처럼 사용하는 축성 방식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개로왕이 이 방식으로 수도 한성의 성곽을 쌓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박순발 충남대 교수(고고학)는 “이번에 발견된 백제시대 대형 포장도로는 규모로 볼 때 백제 왕성의 중심 도로였음이 틀림없다”며 “왕궁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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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자모양 조선시대 왕비 내교인장 첫 공개

    익살스러운 표정의 사자 한 마리가 떡하니 앉아 있는 조선시대 도장. 뒤를 돌아보며 ‘씨익’ 웃는 모습이 여유롭기까지 하다. 사자의 남성성을 떠올린다면 이 도장의 주인공은 의외일 수도 있다. 사자 모양 손잡이의 이 놋쇠 도장은 조선시대 왕비가 사용한 ‘내교 인장(內敎 印章)’이다. 조선시대 왕실 사유재산을 관리한 궁방(宮房)의 각종 지출명세서에는 이 인장이 찍혔다. 국립고궁박물관은 7일 개최한 ‘오백년 역사를 지켜온 조선의 왕비와 후궁’ 특별전에서 내교 인장을 처음 공개했다. 이번 전시는 고궁박물관의 개관 10주년을 맞아 세도정치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에 가려 그동안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조선 왕비와 후궁들의 삶을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됐다. 박물관은 왕실 밖 사대부 여성이 간택을 거쳐 왕비나 후궁이 된 뒤 별궁에서 예비 신부교육을 받고 왕과 가례를 올리는 과정을 소개한다. 또 이들의 중요한 사명이었던 왕손 출산을 비롯해 왕비가 직접 뽕을 따고 누에를 치는 의식인 친잠례(親蠶禮), 왕비와 후궁의 죽음을 추모하는 상장례(喪葬禮) 등을 다뤘다. 이 밖에 왕실 여성들의 위계를 보여주는 황원삼, 홍원삼, 녹원삼 등의 궁중 복식 등 왕실 유물 300여 점을 선보인다. 다음 달 30일까지 열린다. 02-3701-7633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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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궁박물관,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 삶’ 재조명 특별전

    익살스런 표정의 사자 한 마리가 떡하니 앉아 있는 조선시대 도장. 뒤를 돌아보며 ‘씨익’ 웃는 모습이 여유롭기까지 하다. 사자의 남성성을 떠올린다면 이 도장의 주인공은 의외일 수도 있다. 사자모양 손잡이의 이 놋쇠 도장은 조선시대 왕비가 사용한 ‘내교 인장(內敎 印章)’이다. 조선시대 왕실 사유재산을 관리한 궁방(宮房)의 각종 지출명세서에는 이 인장이 찍혔다. 국립고궁박물관은 7일 개최한 ‘오백년 역사를 지켜온 조선의 왕비와 후궁’ 특별전에서 내교 인장을 처음 공개했다. 이번 전시는 고궁박물관의 개관 10주년을 맞아 세도정치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에 가려 그동안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조선 왕비와 후궁들의 삶을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됐다. 박물관은 왕실 밖 사대부 여성이 간택을 거쳐 왕비나 후궁이 된 뒤 별궁에서 예비 신부교육을 받고 왕과 가례를 올리는 과정을 소개한다. 또 이들의 중요한 사명이었던 왕손 출산을 비롯해 왕비가 직접 뽕을 따고 누에를 치는 의식인 친잠례(親蠶禮), 왕비와 후궁의 죽음을 추모하는 상장례(喪葬禮) 등을 다뤘다. 이밖에 왕실 여성들의 위계를 보여주는 황원삼, 홍원삼, 녹원삼 등의 궁중 복식 등 왕실 유물 300여 점을 선보인다. 이 가운데 혼례잔치인 동뢰연(同牢宴)에서 쓰이는 돗자리 ‘교배석(交拜席)’과 ‘동자상(童子像)’도 처음 공개된다. 미국 LA카운티 미술관(LACMA)이 소장한 신정왕후(헌종의 어머니)의 회갑 잔치를 병풍에 그린 ‘무진진찬도병(戊辰進饌圖屛)’(1868년)과 문정왕후(명종의 어머니)가 발원해 완성된 ‘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1562년) 역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다음달 30일까지 열린다. 02-3701-7633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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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재 활용이냐, 보존이냐”…‘宮스테이’ 찬반 논란 팽팽

    정부가 문화재인 창덕궁 낙선재 권역 내 일부 전각에서 숙박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궁(宮)스테이’를 추진한다는 보도 이후 찬반 논란이 뜨겁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정부는 창덕궁뿐 아니라 고궁과 경주 서악서원 등 지방에 산재한 서원, 향교, 옛 지방 관아에서의 숙박프로그램을 하나로 묶는 통합 브랜드 ‘케이 헤리티지 인(K-Heritage Inn·가칭)’을 이르면 내년에 출범시킬 계획이어서 문화재 활용을 둘러싼 논란은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 보존이냐, 활용이냐 ‘궁스테이’ 사업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선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위원회의 승인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문화재청은 본보 보도 직후인 지난달 30일 일부 문화재위원들과 함께 창덕궁과 경복궁의 현장 답사를 마쳤다. 아직 사적분과위원회 심사 날짜는 확정되지 않았다. 사적분과위원회는 문화재 전문가 12명으로 구성돼 있으며 승인 심사에서 재적 과반 참석에 출석 과반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궁스테이에 대해서는 문화재 전문가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가 깃든 궁궐에 담긴 정신적 가치를 훼손한다는 것. 김광현 서울대 교수(건축학)는 “모든 문화재에는 각각의 역사적 기억이 오롯이 담겨 있다”며 “다른 곳이면 몰라도 한 나라의 왕궁을 숙박시설로 활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7년 전 숭례문 화재 참사의 트라우마도 궁스테이 추진에 적지 않은 걸림돌이 되고 있다. 서양과 다른 목조 문화재의 특성상 화재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홍성걸 서울대 교수(건축학)는 “우리나라 목조 문화재는 지붕이 특히 화재에 취약하다”며 “활용도 좋지만 보존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문화재청을 비롯한 상당수 전문가들은 ‘활용을 통한 보존’이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사람이 집에 살지 않으면 곧 폐가가 되듯 최선의 문화재 보존은 활용이라는 것.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건축학)은 “일부에서 화재 위험성을 거론하는데 빈집에서 오히려 방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며 “고택(古宅)도 일단 사람이 사는 게 보존을 위한 최선의 방책”이라고 말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세계적인 흐름도 ‘박제된 문화재’로 보존하기보다는 일상에서 적극 활용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이 모델로 삼고 있는 건 스페인 파라도르(parador) 호텔. 그라나다와 세고비아, 톨레도 등 유서 깊은 도시에 자리 잡은 고성과 수도원, 요새 등을 현대식으로 개조한 체인 숙박시설이다. 스페인 전국에만 90여 개에 달하는 파라도르 호텔이 있다. 외관은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내부만 리모델링해 편의성을 높인 것이 특징이다.○ 합리적인 문화재 활용 방안 이처럼 언뜻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문화재 보존과 활용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 전문가들은 원형 훼손을 막기 위해 내부 개조를 최소화하고 관람객은 어느 정도 불편을 감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건물 외관과 주요 구조를 보존하되 내부에 약간의 변화를 주는 방식이다. 이영훈 국립경주박물관장은 “관람객으로선 불편하더라도 오히려 그것이 본래의 고궁 생활을 제대로 체험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했다. 이재인 명지대 건축학과 교수는 “화재를 방지하는 차원에서 궁궐 내 취사를 아예 금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숙박뿐만 아니라 고궁 전각 내부를 전시장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최근 복원된 덕수궁 석조전 내부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게 대표적인 사례.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꼭 숙박시설이 아니더라도 강의장이나 세미나실, 박물관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하는 방식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김상운 sukim@donga.com·조종엽·민병선 기자▼한복 차림 외국인 20여 명, 시습당서 茶道수업에 한창… 마치 조선시대로 돌아간 듯▼개방 5년 만에 지역 명물 된 경주 서악서원3일 경북 경주시 서악서원(西岳書院). 무열왕릉을 지나 호젓한 산길을 따라 한 30분쯤 걸었을까. 진흥왕릉과 서악동 삼층석탑(보물 제65호) 아래로 산뜻한 단청을 두른 서원이 나타났다. 신라시대 설총과 김유신, 최치원의 위패를 나란히 모신 사당을 중심으로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좌우로 배치한 전형적인 조선시대 서원이다. 이곳은 경북도 지정문화재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다. 1563년 설립돼 452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보통 서원들이 그렇듯 으레 엄숙하고 조용한 나머지 썰렁하기까지 한 분위기를 상상했지만 실제는 달랐다. 중앙의 시습당(時習堂)은 마치 조선시대로 돌아간 듯 한복을 갖춰 입은 외국인 20여 명이 수업에 한창이었다. 이들은 유생들이 배웠던 경전 대신 찻잔을 손에 쥐고 다도(茶道)를 배웠다. 동재와 서재는 쉴 새 없이 드나드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안에 들어가 보니 에어컨부터 전기장판까지 냉난방을 갖춘 숙박시설로 꾸며져 있었다. 그야말로 사람 사는 집 같았다. 그러나 이곳은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폐가와 다름없었다. 평소 서원은 꽁꽁 잠겨 있었고 매년 두 차례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잠깐 문을 열었다. 사람이 살지 않다 보니 400년 넘은 목조건물에는 거미줄이 쳐졌고 내부는 곳곳이 뒤틀려 틈까지 벌어졌다. 관리에 애를 먹던 문중은 문화재 위탁 운영기관에 서원을 맡기고 외부에 공개했다. 조선시대 서원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낮에는 활쏘기와 다도, 국악공연, 붓글씨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생겼다. 폐가는 곧 지역 명물이 됐다. 인근 무열왕릉에서 진흥왕릉, 서악동 삼층석탑, 도봉서당을 거쳐 서악서원을 잇는 40분짜리 산책 코스까지 생겼다. 지난해 서악서원을 방문한 인원은 1만5000명에 이른다.진병길 신라문화원장은 “고택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환기가 제대로 안 되고 습기 때문에 집이 망가지게 마련”이라며 “최선의 문화재 보존은 활용”이라고 강조했다.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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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古代 한중일 교류 잘 보여줘… 백제 독창적 건축-예술 인정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최종 등재됐다. 2000년 신라의 경주역사유적지구와 2004년 북한 고구려 고분군에 이어 고대 삼국의 문화유산이 모두 인류사적 가치를 인정받은 쾌거다. 충남 전북 등 옛 백제 지역에는 일제히 환영 현수막이 내걸렸다. 한국은 지난해 등재된 남한산성에 이어 총 12건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외교부와 문화재청은 “4일(현지 시간)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최종 등재됐다”고 5일 밝혔다. 세계유산위원회는 “백제역사유적지구는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고대 왕국들의 상호 교류사를 잘 보여 주고 있다”며 “문화 교류에 따른 건축 기술 발전과 불교 확산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고 밝혔다. 이번에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충남 공주시의 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충남 부여군의 관북리 유적 및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나성 △전북 익산시의 왕궁리 유적, 미륵사지 등 총 8곳이다. 주로 백제 사비시대로 대표되는 후기 도읍지 위주의 문화유산이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 포함된 무령왕릉은 세계유산위원회가 언급한 동아시아 문화교류사를 확실하게 보여 주는 증거다. 무령왕릉의 연꽃무늬 벽돌은 중국 양나라에서 들여온 ‘볼트형 벽돌무덤(전축분)’ 양식을 보여 준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탁 은잔’(청동 받침에 뚜껑이 달린 은잔)은 일본 군마(群馬) 현 ‘간논즈카(觀音塚)’ 고분에서 발견된 ‘동탁유개동합’의 모델이 됐다. 세계유산위원회는 백제 문화유산이 동아시아 3국 간 교류사를 보여 주는 동시에 백제만의 독창적인 문화적 가치를 담고 있다고 봤다. 백제사 연구 권위자로 지난 3년간 등재 작업 실무를 이끈 노중국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등재 추진위원장(계명대 명예교수)은 “지금까지 신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한 백제의 문화유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감회가 남다르다”고 말했다. 백제 선화공주의 전설이 서린 서동연꽃축제 개최를 닷새 앞둔 이날 오후 부여 읍내 곳곳에는 환영 현수막이 일제히 나붙었다. 회의가 열린 독일까지 간 안희정 충남지사는 “백제 역사 유적은 고대 한중일과 동북아의 평화와 교류, 번영의 결과물”이라고 말했고, 함께 독일을 찾은 송하진 전북지사는 “백제 문화와 역사의 재조명 작업을 적극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부여읍에 사는 김달호 씨(52)는 “앞으로 관광 활성화로 지역 경제가 활짝 기지개를 켜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백제시대 전반기(기원전 18년∼기원후 475년)를 아우르는 이른바 ‘한성 백제시대’의 문화유산은 이번에 제외돼 아쉬움을 남겼다. 왕성(王城)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 등 주요 유적지가 도시 개발로 인해 훼손이 심해 복원에 시간이 걸린 때문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이미 4, 5년 전부터 세계유산 등재를 준비한 공주, 부여 등과 달리 서울은 이 과정을 함께하지 못했다”고 말했다.김상운 sukim@donga.com·이철호 / 부여=지명훈 기자}

    • 2015-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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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필멸의 현실’ 부정하는 능력, 인류 진화의 원동력되다

    #1. 몇 년 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인은 끝까지 자신이 암이라는 사실을 전해 듣지 못했다. 그의 자녀들은 의사로부터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직후 말싸움을 벌였다. 어머니에게 인생을 정리할 시간을 줘야 한다는 쪽과 환자 본인이 병명을 모르는 것이 투병에 도움이 된다는 의견으로 갈렸다. 결국 담당 의사의 조언에 따라 병명을 숨겼고 지인은 그로부터 1년을 더 살다가 숨을 거뒀다. 그의 자녀는 “막판에 통증이 심해지면서 눈치를 챘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그런 현실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며 “마지막까지 편한 마음을 유지하셔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2.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원인의 하나로 당시 영국 정부의 유화책이 꼽힌다. 히틀러의 무리한 영토 요구에도 영국은 타협으로만 일관했다. 그사이 전비를 급격하게 늘린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한 뒤에야 영국은 1939년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많은 학자들은 1937∼1940년 영국 총리를 지낸 네빌 체임벌린이 전운이 감돌던 당시 현실을 외면하는 바람에 일이 더 커졌다고 비판한다. 이 책은 인류의 기원을 ‘현실 부정’의 심리기제에서 찾는 독특한 시도를 담았다. 누구든 태어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필멸의 현실을 부정하는 능력이 오직 사람에게만 있고, 그것이 인류 진화의 원동력이 됐다는 주장이다. 현실 부정은 흔히 체임벌린 전 총리의 사례처럼 부정적인 인상을 주지만, 말기 암 환자와 같이 오히려 삶의 활력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제기한 모든 의문은 ‘왜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 동물들은 수백만 년의 세월 동안 인간과 같은 고등 생물로 진화하지 못했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다. 특히 자신을 특별한 개체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일부 침팬지와 오랑우탄, 돌고래 등에서 발견됐음에도 왜 이들은 다른 개체의 존재를 인식하고 공감할 수 있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지 못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중요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어떤 생물이 이 단계에 이르면 자신도 같은 종류의 다른 개체처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인식한 개체는 치열한 경쟁의 위험이 도사리는 짝짓기에 나서지 않게 된다. 이는 자신의 죽음을 피하려는 개체가 종의 죽음보다 자신의 안전을 더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죽음에 직면한 진화의 장벽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가. 저자의 답은 간단하다. “어느 한 종이 죽음-불안 장벽을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이런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현실 부정의 심리기제는 과감한 모험주의부터 내세를 그리는 종교성까지 다양한 인간의 성향을 해석하는 데 유용하다. 저자는 현실 부정이 종의 계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반대로 인류 비극을 초래할 소지도 있다고 말한다. 기후변화의 명백한 증거가 도처에 있지만 환경 파괴를 지속하고 있는 형국이 대표적이다. 저자는 “모든 인류의 복지를 위해, 아울러 우리의 생물권과 지구를 위해 현실 부정 능력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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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룸/김상운]‘궁스테이’ 맛보기 체험

    ‘출입금지’의 위압적인 푯말을 훌쩍 뛰어넘어 궁궐 전각 안을 여유롭게 거니는 기분은 확실히 남달랐다. 그것은 단순히 ‘금단의 영역’을 범했다는 묘한 쾌감 그 이상의 것이었다. 조선 헌종의 애틋한 사랑과 구한말 덕혜옹주, 이방자 여사의 비극적인 삶이 모두 깃들어 있는 창덕궁 낙선재(樂善齋)에 와 있기에 느낄 수 있는 감흥이었다. 지난달 29일 낙선재 권역 내 석복헌(錫福軒). 후궁 경빈 김씨의 생활공간답게 2중의 행각으로 둘러싸여 은밀하면서도 포근한 느낌마저 줬다. 168년 묵은 목조건물의 진한 목향(木香)을 맡으며 대청마루를 지나 경빈이 묵었을 안방에 들어가 봤다. 가로세로 약 5m 크기의 안방 한쪽에 상대적으로 좁은 윗방이 딸려 있었다. 안방 주인을 모신 여종이 살던 공간이다. 윗방에 앉아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다 초여름 햇살이 스며든 창문을 아무 생각 없이 열어젖혔다. 붉으락푸르락 온갖 꽃들이 층계마다 심긴 전통 ‘화계(花階)’의 아름다움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서양의 중정(中庭)처럼 아늑한 뒤뜰에 눈요깃거리 하나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화계 위로는 한정당(閒靜堂) 현판이 걸린 정자가 운치 있는 모습을 드러냈다.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던 경빈과 그의 여종은 화계와 정자를 보면서 궁중생활의 답답함을 달랬을 것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전각 안에 들어와 보면 궁중 사람들의 실생활을 구체적으로 상상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의 ‘궁(宮) 스테이’ 추진을 놓고 최근 논란이 뜨겁다. 지난달 30일 동아일보의 단독 보도로 창덕궁 낙선재 권역 내 일부 전각을 숙박시설로 활용하는 방안을 문화재청이 추진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포털사이트에서는 다양한 찬반 의견이 쏟아졌다. 아이디 keiz****를 쓰는 한 누리꾼은 “목조건물인데 화재로 훼손되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따졌고, 이에 다른 누리꾼(gnas****)이 “원래 궁궐은 사람이 살던 곳이다. 직접 사용해 보고 느껴야 하는 것이다. 수백 년 된 법당을 지금도 잘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반박했다. 기자의 ‘궁 스테이’ 맛보기 체험은 불과 몇 시간에 그쳤지만 잊지 못할 여운을 남겼다. 밖에서 스윽 둘러보고 지나가는 관람과는 확실히 차원이 달랐다. 그러나 현재 낙선재 권역은 마당까지만 일반에 공개돼 있다. 관람객들은 보물 제1764호로 지정된 본채 건물은 물론이고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돼 있지 않은 전각인 석복헌과 수강재(壽康齋) 내부에도 들어가 볼 수 없다. 물론 숭례문 화재의 비극을 떠올리며 궁궐 전각의 공개를 반대하는 여론도 이해는 간다. 목조건물이 화재에 취약하다는 지적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화재 위험이 적은 난방패널을 사용하고 곳곳에 화재감지기 등을 설치하는 노력을 충분히 기울이면 못할 것도 없다는 것이 상당수 전문가의 의견이다. 무엇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금방 폐가가 된다. 실제로 창덕궁을 비롯한 궁궐 전각 내부는 목조건물 특유의 뒤틀림 현상이 종종 목격되곤 한다. 문화재 보존과 활용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합리적인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때다.김상운 문화부 기자 sukim@donga.com}

    • 2015-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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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뢰-진심의 조선통신사 정신으로 한일관계 풀어야”

    무려 120m에 이르는 장대한 두루마리에 1711년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담은 그림. 영화는 두루마리에 그려진 조선인과 일본인 4800명의 얼굴을 세밀하게 포착했다. 이 그림에서 100여 년 전 임진왜란의 어두운 그림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만 고품격 문화교류에 대한 현지인들의 기대감이 넘실거릴 뿐이다. 30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조선통신사 선린외교의 재조명’ 기념강연회에서 고 신기수 선생의 기록영화 ‘에도 시대의 조선통신사’가 상영됐다. 한일의원연맹과 동서대 일본연구센터가 주최하고 동아일보가 후원한 이날 행사에서 참석자들은 양국 선린외교의 아이콘으로 조선통신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데 공감했다. 한일의원연맹 회장인 서청원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환영사에서 “1964년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 데모에 나서 4개월 동안 옥살이를 한 제가 이제 한일의원연맹을 이끌게 돼 감회가 남다르다”며 “올해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양국 간의 실타래처럼 꼬인 문제를 풀고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벳쇼 고로 주한 일본대사는 축사에서 “조선통신사는 상호 신뢰와 진심을 바탕으로 교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며 “오늘날 양국 관계를 정립하는 데 선조들의 선린외교 정신을 깊이 되새겨야 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영화 상영에 앞서 진행된 강연에서 정재정 서울시립대 교수는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배경과 영향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알기 쉽게 풀어냈다. 정 교수에 따르면 통신사 호칭이 처음 쓰인 것은 1375년 고려시대였다. 당시 고려 말의 정치적 혼란과 겹쳐 왜구가 극성을 부렸는데 고려 조정이 이들에 대한 통제를 요구하기 위해 무로마치 막부에 통신사를 파견했다는 것이다.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분기점은 임진왜란이었다. 임진왜란 이전만 해도 조선통신사와 더불어 일본 측이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사절단인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가 교차로 양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일본국왕사의 한반도 입국을 불허했다. 이들이 일본 열도에서 한양까지 도달한 통로가 임진왜란 당시 침략 루트로 고스란히 활용됐기 때문이다. 또 양국 간 신뢰를 상징하는 통신사 호칭도 임진왜란 직후 한동안 쓰이지 않았다. 조선은 1607∼1624년 사절단의 명칭을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만 불렀다. 일본이 보낸 국서에 대한 회답과 조선인 포로를 환국시키겠다는 사절단의 목적만 내세운 것이다. 하지만 1636년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은 다시 조선통신사의 호칭을 회복하게 된다. 명에서 청으로 권력이 교체돼 중화질서가 붕괴되면서 조선과 청이 책봉체제에서 벗어난 독자적 외교관계를 수립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날 행사에는 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과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 김태환 정우택 새누리당 의원,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 오재희 전 외무부 차관, 강남주 조선통신사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학술위원장, 정태익 한국외교협회장, 정구종 동서대 석좌교수 등 220여 명이 참석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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