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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평안북도 영변 핵시설에서 핵무기용 고성능 폭발물을 조립하거나 보관하기 위한 건물을 짓고 있다고 미국의 북한전문 웹사이트 ‘38노스’가 26일 밝혔다. 이는 북한이 핵무기 소형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고성능 기폭장치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는 관측이어서 파장이 예상된다. 38노스의 윌리엄 머그퍼드 연구원은 이달 21일 촬영한 상업용 위성사진을 분석한 끝에 영변 우라늄 농축단지에 짓는 건물 중 하나에 다른 곳과는 구별되는 모양과 색의 벽들이 세워지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머그퍼드 연구원은 “(건물의 외벽을 보면) 건물 안에서 폭발이 일어났을 때 정해진 방향으로만 압력을 내보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이 건물을 핵무기 기폭에 사용되는 고성능 폭발물을 조립하거나 보관하기 위한 건물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머그퍼드 연구원은 플루토늄을 사용하는 실험용 경수로(ELWR) 주변에서 건설작업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원자로 건물 맞은편에 변전소로 보이는 시설이 건설되고 있다”며 “아직 모든 시설이 다 갖춰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완성된다면 북한은 경수로 운영을 위한 또 다른 단계를 완성하게 될 것”이라고 풀이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이 나선경제특구에 진출한 중국 기업들을 상대로 최근 일방적으로 토지 사용료를 10배나 올리고 50년이었던 토지 임대 기간도 20년으로 대폭 축소했다고 대북 소식통들이 16일 밝혔다. 이런 조치는 올 들어 중국의 적극적인 투자를 구애하던 분위기와 완전히 상반되는 것으로 향후 북-중 관계뿐만 아니라 북한의 대외 신용도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의 조치가 사실로 밝혀질 경우 나선 지역에 제2의 개성공단을 설립하려는 한국 정부의 구상 역시 재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새 법을 따르지 않으면 압류하겠다” 나선에서 무역업을 하는 중국인 소식통 A 씨에 따르면 북한 당국은 7월 들어 중국 기업들에 “기존의 계약서는 효력을 상실했으니 새로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통지했다. A 씨는 “새 계약서엔 토지 임대 기간이 기존의 50년에서 20년으로 변경돼 있었고, 평당 수십 달러 수준이던 토지 사용료도 10배나 높이 책정돼 있었다”며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라 짐을 싸는 (중국) 기업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A 씨는 또 중국 기업인들이 항의하자 북한 당국은 “우리 땅에서 우리 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공장을 압류하고 내쫓겠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소식통 B 씨도 “중국이 설비와 자재를 공급하고, 북한이 인력을 제공하는 합작기업에도 최근 북한이 인사와 직원 관리 권한을 전적으로 행사하겠다고 통지했다”고 밝혔다. 소식통들은 이번 조치가 사실상 중국 기업을 내쫓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북한 당국이 나선 이외 지역에 진출한 중국 기업들에도 같은 내용의 통보를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중국 기업에 대한 일방적인 조치와 더불어 북한 내 중국인들에 대한 압박과 처벌도 최근 대폭 강화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나선에서 사업하던 중국인 사업가 C 씨는 올 초 간첩으로 몰려 북한 보위부에 수개월 동안 감금됐다. 북한 당국은 영사 접근권조차 허용하지 않고 조사했다. C 씨가 평소 앓던 당뇨와 신장병이 악화되자 북한 당국은 합의금 명목으로 수십만 위안을 받고 석방했다고 소식통들은 전했다. 나선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중국인 D 씨는 지난해 말 북한 종업원이 음란물을 봤다는 이유로 보위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영업정지와 함께 벌금 폭탄을 맞았다. 큰 손해를 본 D 씨는 식당 문을 닫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이 외에도 차명 전화 사용 등을 평소 묵인해 오다 갑자기 불법이라며 체포하는가 하면 북한 당국이 발급한 ‘차량통행표’를 부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국인 관광객 차량을 압수한 사례도 있다. 북한은 체포된 중국인들에게서 숙박비와 조사 비용까지 받아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중 관계 악화에 따른 보복성 조치 나선에서 벌어지는 조치들은 올 5월 중국 조선족 기업인들을 북한으로 초청해 “북한은 안정적인 투자처”라고 선전하며 원산-금강산 국제관광지대에 적극 투자하라고 권유하던 움직임과 완전히 상반된 기류다. A 씨는 “북한이 (대표적인 친중 인사인) 장성택을 처형한 이후 북-중 관계가 악화되고, 중국이 대북 제재에 동참하는 움직임이 나타나자 김정은이 즉흥적인 보복성 조치를 내놓은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이번에 중국 기업들이 큰 피해를 보고 쫓겨나면 앞으로 북한에 투자하겠다는 중국 기업인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A 씨는 “예전엔 지인에게 ‘나선이 북한에서 가장 개방된 곳이니 투자하라’고 권유하던 일부 기업인들이 요즘엔 ‘중국 기업은 완전히 봉이니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 기업의 피해가 확산되면 중국 정부의 개입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북-중 관계가 악화될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의 반북 정서 역시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2012년에도 중국 시양(西洋)그룹이 2억4000만 위안(약 444억 원)을 북한 옹진광산에 투자했다가 북한의 일방적인 계약 파기로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쫓겨나자 중국 국민이 분노한 사례가 있다. 북한 최초의 경제특구인 나선엔 현재 대북 진출 중국 기업의 절반 이상이 몰려 있다. 파악된 중국 기업만 수십 개에 이른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이란 핵협상 타결에는 국제사회의 강력한 경제 및 금융 제재가 큰 압박으로 작용했다. 국가 경제가 석유 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이란으로서는 석유 수출 금지가 곧 국가 경제의 붕괴를 의미한다. 똑같은 경제 제재가 북핵 협상에도 유효하게 먹힐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부정적이다. 이미 북한은 오래전부터 각종 제재를 받고 있는 상태다. 2006년 10월 북한이 첫 핵실험을 한 뒤 지금까지 유엔 안보리는 대북제재 결의안을 5차례나 내놓았고 제재 지침도 32건이나 공지했다. 하지만 이런 제재 때문에 북한이 핵을 폐기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이란과 북한은 정치 체제와 경제 상황 등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우선 안보에 대한 불안감이 다르다. 이란은 핵무기가 없어도 국가 존립이 위태롭진 않다. 하지만 북한은 세계 최강 미군과 한국군과 직접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라 핵무기가 없다면 군사적 열세를 극복할 대안이 없다. 이란과 북한은 정권의 형태도 아주 다르다. 이란은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뽑는 국가이지만 북한은 사실상 세습 종신 집권 국가이다. 대선을 치르는 이란은 민심을 매우 중시할 수밖에 없지만 북한은 공포 독재를 통해 민심을 통제할 수 있다. 대외무역에 대한 의존도도 양국은 크게 다르다. 이란은 원유 매장량 세계 4위, 천연가스 매장량 세계 2위의 자원 강국이다. 하지만 북한엔 이렇다 할 자원이 없고 수출입 규모도 크지 않다. 제재를 받아도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현재 북한은 수출의 절반가량인 15억 달러를 무연탄과 철광석을 팔아 벌고 있지만 이 정도 규모의 대외거래는 중국에만 의존해도 충분하다. 대북제재 자체의 한계도 분명하다. 미 회계감사원(GAO)이 5월 상원 외교위원회에 제출한 ‘대북제재 보고서’에 따르면 유엔 193개 회원국 중 82%에 해당하는 158개국이 제재 이행보고서를 제출하지 않고 있다. 더구나 각 회원국이 대북제재 결의안을 위반 또는 무시한다 해도 처벌하거나 이행을 강제할 방법이 전무한 상태다. 그러니 북한엔 유엔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 충분히 열려 있는 셈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엊그제 국정원은 국회 정보보고에서 김정은과 이설주가 스위스 브랜드인 모바도 시계를 차고 다니고, 영국 명품 원단인 스카발 정장을 입고 다닌다고 보고했다. 이설주가 프랑스 명품 백인 디오르 클러치를 제일 좋아하고, 100만 원대 모바도가 김정은 부부의 커플 시계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으니 새삼 정보랄 것도 없다. 아마 김정은은 남쪽엔 20일 전에 출시된 애플워치를 이미 차보고 “역시 미제가 최고야”를 외치고 난 뒤일 것 같다. 김정은은 널리 알려진 ‘애플빠’다. 애플 아이맥 컴퓨터로 업무를 보고, 최신 아이패드가 발매될 때마다 시리즈별로 꼬박꼬박 구매해 간다. 그러니 북한 외교관이 애플워치를 예약 주문해 기다리다 맨 먼저 사들여 갔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유엔에서 북한 사치품 수입 통제라는 제재를 내렸어도 김정은의 호화생활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 시계나 가방은 물론 수십만 달러짜리 요트에 이르기까지 김정은이 대북 제재 때문에 갖고 싶은 것을 못 가졌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다. 지금도 프랑스에선 북한 무역대표부 일꾼들이 김정은이 좋아하는 ‘메종 미셸 피카르’ 의 부르고뉴 와인을 구매 흥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대북 제재가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북한 제재에 미온적이던 중국이 팔을 적극 걷어붙이면서 이곳저곳에서 북한이 괴로워하는 징후가 속속 포착되고 있다. 1일 북한이 준공식을 가진 평양 순안국제공항이 북한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11월 순안공항을 시찰한 김정은은 주체성과 민족성이 부족하다며 다시 지을 것을 지시했다. 급히 해외에서 이것저것 자재를 사와 다시 지으려 하니 외국 업체들이 선금을 먼저 보내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대북 제재로 대다수 송금망이 차단된 상황이라 돈을 결제하는 데 상당한 애로가 발생했다. 요즘 중국은 예전 같지 않다. 겨우 북한이 우회 송금루트를 뚫으면 어떻게 알고 또 찾아내 차단하고 있다. 하지만 마원춘 국방위 설계국장이 숙청되는 것을 본 북한 간부들도 필사적이었다. 북한의 모든 능력과 대외 연고가 총동원돼 겨우 기한을 맞췄다고 한다. 이런 공사가 몇 개만 더 진행됐다면 얼마나 많은 간부의 목이 날아갔을지 모르겠다. 대북 제재로 러시아 등을 통해 들여오던 전략물자의 흐름도 적잖게 끊겼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이 그만큼 늦어진다는 의미다. 외화를 적잖게 벌어다 주던 무기 밀매도 시원치 않다. 사정이 이런데도 김정은은 아래 간부들의 어려움 따윈 관심이 없다. 이것도 하라, 저것도 하라 지시를 내리고 집행이 되지 않으면 무자비하게 숙청한다. 이러니 대외 활동에 종사하는 간부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른다. 여건은 점점 어려워지는데 처벌은 잔인해지니 견디다 못해 일부는 돈을 싸들고 한국 등으로 탈출한다. 이란 핵 협상이 타결됨에 따라 앞으로 국제사회의 관심사는 북핵 문제로 옮겨지고 제재도 강화돼 북한의 괴로움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이렇게 대북 제재로 북한이 가난해지면 김정은 체제는 위태로워질까. 충성심이 사라지고 돈맛을 안 젊은 장마당 세대가 불만 끝에 폭동이라도 일으킬까. 개인적으로 그건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본다. 원래 의도적 빈곤은 반란을 막고 장기 독재를 유지하는 독재자의 아주 유효한 수단이다. 나도 북한에서 배고픈 고생을 워낙 많이 해봐서 안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내일은 뭘 먹지 하는 생각만 떠오르지, 정치니 사회문제니 하는 주제로 고민할 여유가 없다. 무기력해진 대중에게 공포까지 더해지면 반항할 생각보다는 순종할 생각을 먼저 한다. 북한이 가난해지고 피폐해지는 것이 역설적으로 김정은 독재 유지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미국이나 한국이 계속 요란스레 대북 압박을 가하면 김정은에겐 명분까지 생긴다. “북한이 가난한 것은 내가 통치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미제(美帝)와 남조선 괴뢰도당의 고립 압살책동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런 메시지를 북한 인민에게 끊임없이 주입할 수 있다. 그러면 가난해진 북한 인민은 미제를 타도하라며 분노로 부글거릴 것이다. 그 뒤에서 김정은은 미제(美製) 애플 시리즈를 탐닉하며 오래오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이쯤 되면 대북 제재로 얻으려는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 재점검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제재를 통해 북한이 핵을 폐기할 수 있다고 보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나부터도 북한이 끝까지 핵을 놓지 않겠다는 진짜 속내는 어쩌면 대북 제재를 계속 받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럼에도 이란 핵 협상 타결 이후 “이제 남은 것은 북한, 압박을 강화해야”라는 기사가 쏟아진다. 김정은이라면 “그러시든지”라고 대꾸할지도 모른다. 김정은의 최대 관심사는 독재 체제 유지이지, 경제가 거덜 나고 인민이 굶어죽는 것 따위가 아니기 때문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그리스가 채권단의 가혹한 긴축안을 받아들이며 사실상 ‘백기 투항’한 것은 ‘벼랑 끝 전술’의 한계를 보여준 사례로 평가된다.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이탈)’도 용인할 수 있다는 독일 등 채권국의 최후통첩에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결국 손을 들었다. 이를 두고 일부 외신은 독일인들보다 그리스인들 스스로가 그렉시트를 더 우려했다(월스트리트저널)고 평가하고 있다. 지난달 27일 치프라스 총리가 채권단이 제시한 구제금융 긴축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전격 발표했을 때만 해도 협상의 기선을 잡는 모양새였다. 급기야 5일 국민투표에서 그리스 국민의 61.3%가 채권단의 긴축안을 거부하자 국제사회는 그렉시트 현실화 가능성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치프라스 총리의 초강수는 더이상 먹혀들지 않았다. 채권단은 12일까지 만족할 만한 개혁안을 내지 않으면 그렉시트를 피할 수 없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특히 최대 채권국인 독일은 5년간의 ‘한시적 그렉시트’까지 거론하며 그리스를 강하게 압박했다. 그리스를 무릎 꿇린 결정적 이유는 급박한 경제 사정 때문이었다. 지난달 30일 기술적 디폴트(채무불이행) 사태를 맞은 그리스는 만약 이번 협상마저 결렬된다면 은행들이 줄줄이 파산하는 등 최악의 사태를 맞을 뻔했다. 그리스가 처한 현실에 눈을 뜬 치프라스 총리는 채권단의 긴축안보다 강도가 센 개혁안을 스스로 마련해 협상 테이블에 앉았고 결국 긴축 요구를 거의 대부분 받아들였다. 보름간의 벼랑 끝 전술로 치프라스 총리가 얻은 것이 전혀 없지는 않다. 유럽재정안정화기구(ESM)를 통해 3년간 최대 860억 유로(약 108조 원) 규모의 어마어마한 돈을 지원받게 됐다. 이는 그리스 정부가 애초에 요구한 535억 유로보다 325억 유로가 늘어난 액수다. 또 채무 원금 탕감 요구는 관철하지 못했지만 대출금리 인하, 채무이자 상환 기간 유예와 만기 연장 등 채무 경감을 받아냈다. 일단은 파국을 피할 수 있는 ‘생명 연장의 시간’을 얻어낸 것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미래의 전쟁 양상이 서서히 바뀌고 있다. 레이저무기 시대로 바뀌는 것이다. 가장 앞서 나가는 나라는 역시 세계 최강 대국 미국이다. 미국은 ‘꿈의 신무기’로 불리는 레이저포를 세계 최초로 실전 배치했다. 지난해 말 미 해군 수륙양용수송함 ‘폰스’에 3개월의 시험 운용을 거쳐 설치된 30kW급 레이저포는 날아오는 드론을 격추시킬 수 있는 위력을 갖고 있다. 지금 단계에선 사거리가 1.6㎞에 그치고 고성능 폭탄보다 파괴력이 떨어지지만 앞으로는 출력을 150kW까지 높일 계획이다. 이럴 경우 사거리와 파괴력은 훨씬 커진다. 최근 미국 항공기 제작사인 보잉은 원거리 목표물을 격파할 수 있는 휴대용 레이저포를 개발하고 있다. 이 레이저포는 35㎞ 이상 거리의 표적을 포착, 식별해 격파할 수 있다. 레이저포의 무게는 295㎏으로 8~12명 규모인 해병대 보병 분대 병력이 쉽게 운반할 수 있는 게 특징이다. 또 15분 만에 이를 조립해 조작할 수 있다고 보잉 측은 설명했다. 레이저 무기는 발사 비용이 저렴하고 동력이 있으면 무한정 발사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또 레이저의 속도는 포탄보다 빨라 움직이는 포탄도 쏘아 맞출 수 있다. 실제로 올 초 미군은 뉴멕시코 주의 화이트샌드 미사일 실험장에서 날아오는 포탄을 고출력 레이저로 격추하는데 성공했다. 10kW의 레이저를 발사해 날아오는 90발의 포탄을 요격했고, 드론도 여러 대 격추시켰다. 레이저포의 출력을 100kW로 높이는 경우 조준한 순간 타격 목표가 파괴되는 시대가 올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레이저포는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고, 멀리 날아갈 경우 빛이 분산돼 위력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어 현재 연구는 이를 극복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2013년 레이저포 시장은 연구개발비까지 포함해 31억 달러(3조 5000억 원) 규모였으나 2018년에는 81억 달러(9조1570억 원)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된다. 특히 미국에선 그동안 항공 분야에서 저조한 실적을 거두어온 보잉이 레이저포 개발에 적극 뛰어들어 관련 연구를 선도하고 있다. 독일 MBDA사 역시 최근 유럽국방원 및 독일연방기술도입국과 공동으로 미사일, 박격포, 급조폭발물, 초소형 무인기를 레이저로 저격하는 첨단 레이저무기를 개발했다. 이 무기는 10kW 레이저 4대를 결합해 총 40kW의 출력으로 3㎞ 이내 비행물체를 몇 초 만에 격추시킬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군의 오버예덴베르크와 슈로벤하우스 시험장에서 진행된 성능실험에서 이 레이저는 3㎞ 떨어진 소형 무인기를 3.39초 안에 격추시켰다. MBDA사 관계자는 “5년 안에 레이저의 출력과 사거리를 각각 100kW, 5㎞로 늘려 차세대 방공체계를 독일군에 공급할 것”이라고 전했다. 중국도 국방 연구진이 레이저포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중국의 개발 정보는 거의 공개되지 않았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김정은의 처형 정치에 북한 민심이 등을 돌리고 있다. 노동당 핵심 부서인 조직지도부 간부들조차 김정은의 통치 방식에 공포를 느끼고 있다. 현재 북한 지도부가 느끼는 공포심은 바깥에서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이런 상태에서 외부 충격이 있을 경우 김정은 체제는 3년 이상 버티기 힘들 것이다.” 북한 김정은의 공포정치가 점점 심해지는 가운데 최근 제3국을 거쳐 탈북한 북한 노동당 고위급 인사 A 씨가 전한 김정은 체제 이후 북한 지도부의 분위기이다. A 씨는 채널A가 단독 보도(본보 4일자 A1면)한 망명설의 주인공 박승원 상장보다 북한 권력 내부 사정을 더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의 요구에 따라 인적사항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기자는 그를 만나 최근 북한 간부들의 움직임을 들을 수 있었다. 정황 자체가 매우 구체적이어서 새겨들을 대목이 많았다. 다음은 그가 전해준 최근의 북한 내부 사정을 일문일답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북한 간부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는가. “재작년 12월 장성택 처형이 직접적 계기가 됐다. 남쪽에선 노동당 조직지도부가 처형을 주도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조직지도부조차 처형을 반대했다. 고모 김경희도 조연준 조직지도부 1부부장에게 조카(김정은)를 좀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을 정도였다. 조연준은 김정은을 독대해 김경희의 뜻을 전했지만 처형을 막지 못했다. 북한에서 장성택 처형을 찬성한 간부는 없었다. 장성택은 북한에서 가장 간부들의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장성택은 김일성의 핏줄이 아니기 때문에, 이른바 백두혈통이 아니라 처형된 것 아닌가. “모르는 소리다. 김일성의 사위로 40년 넘게 살았는데 어떻게 김일성 가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쩌면 그는 북한 주민들에겐 김정은보다 더 확실하게 각인된 백두혈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또 40년 넘게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북한 고위 간부들 중에 장성택과 연고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金, 바늘 소리도 보고하라고 지시” ▼―그런 사람이 왜 처형됐나. “김정은이 자기보다 더 신망을 받는 실세를 옆에 두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던 것 같다.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 사망으로 권력을 잡기 전 북한군 총정치국에 1년 정도 있었던 것이 경력의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당과 내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조차 잘 알지 못했고, 정치 경제 외교 등에도 무지했다. 집권 첫 1년 반 동안엔 장성택이 먼저 서명을 한 서류만 승인하며 수렴청정에 의존했다. 하지만 점점 사람들이 자신에게 환호하는 모습을 자주 보면서 ‘장성택 없이도 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가진 것 같다. 보다 직접적인 이유로는 처형 직전 경제발전 노선을 두고 알력이 심했다.” ―그게 무엇인가. “내세울 경력이 없는 김정은으로서는 집권 이후 자기 치적이라 선전할 것들이 중요하다. 그래서 평양 창전거리, 문수 물놀이장, 마식령 스키장 건설에 열심이었다. 처음엔 장성택도 김정은이 하자는 대로 돈을 투자해 주었다. 그러다가 너무 지나치다고 판단했는지 이제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 투자를 해야 할 때라고 주장한 것이다. 아파트나 놀이장 같은 비생산적인 곳에 투자하지 말고 경제특구 같은 데 집중해 확대재생산이 가능한 투자를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것이 김정은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다.” ―장성택은 미래에 대해 어떤 구상이 있었나. “그는 북한이 갑자기 개혁개방을 하면 흔들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경을 중심으로 경제특구를 많이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중국과도 많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런데 김정은이 스키장이니 물놀이장이니 하는 곳에 자꾸 돈을 쓰니 이건 아니다 생각했을 것이다. 장성택 처형 이후 중국 지도부는 김정은에게 개혁개방의 의지가 없다고 판단해 격앙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장성택 처형 이후 잇따라 많은 사람들이 처형된 것 같다. “심지어 최룡해도 처형될 뻔했다가 살아났다. 지난해 4월 말 당시 북한군 총정치국장이던 최룡해가 체포돼 한 달 넘게 감금돼 있었던 적이 있다. 한국에선 최룡해가 장성택 처형에 가담했다고 알려졌지만 두 사람은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김정은은 최룡해 숙청의 빌미를 만들기 위해 대좌(대령)인 총정치국 소속 행사과장을 사소한 트집을 잡아 체포하고 바로 다음 날 숱한 사람들을 참관시켜 고사기관총으로 처형했다. 그리고 바로 최룡해를 숙청하려 했는데,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살려두고 대신 총정치국장 직위에서만 해임시키고 근로단체비서로 강등시켰다.” ―장성택 숙청이 북한 체제에 미친 영향은 어떤 것인가. “장성택이 국가 장기 발전 계획을 구상하고 우수한 인재들을 자기 주변에 모았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다 숙청됐다. 지금 북한 지도부에는 인재가 없다. 숙청 이후 분위기가 경직돼 누구도 책임질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창의적 계획을 내놓았다가 김정은의 눈 밖에 나면 처형될지 모르기 때문에 몸을 사린다. 아마 논란의 여지가 있는 계획은 위에 올라가지 못할 것이다. 박봉주 총리도 책임이 두려워 아래에서 올라오는 서류에 서명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니 김정은에게 직언을 할 사람은 북에 아무도 없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은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북한이 어디로 갈지 뻔하지 않겠는가.” 그는 “지금 북한 간부들은 하루하루 숨쉬기조차 조심스러워한다. 눈 밖에 나면 바로 처형되기 때문”이라며 내부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처형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장성택 숙청 직후 김정은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보고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이후 사람들에 대한 감시가 정말 엄격해졌다. 지방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평양에선 작년 초부터 유치원 아이들에게까지 매일 집에서 보고 들은 어른들의 동태를 적어내게 한다. 집에서 부모가 어떤 말을 나누었는지, 어떤 영화를 보았는지, 뭘 보았는지 시시콜콜한 사항들을 모두 적어내야 한다. 아이들에게 이럴 정도인데 어른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는 더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지금 보위부(비밀경찰)에도 지원자들이 없다. 지방 같은 경우 정원의 절반이 빈 곳이 많다. 사람 죽이는 일에 편승하다가 김정은 체제가 붕괴되면 어떤 처벌을 받을지 모른다는 공포와 걱정 때문에 과거 선망받던 권력기관인 보위부에도 지원자가 없는 것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663년 백강전투에서 치명적 피해를 입은 왜(倭)는 이후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한 전국적인 방어망을 구축한다. 여기에는 왜로 대거 건너온 백제의 귀족과 백성들도 동참한다. 사실 천신만고 끝에 바다를 건너온 백제 유민들에겐 또다시 건너갈 바다가 없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방어 준비를 한다. 첫 번째 방어가 바로 ‘수성(水城·미즈키)’ 건설이었다. 수성은 규슈 후쿠오카(福岡)에서 내륙으로 15km 정도 떨어진 작은 도시 다자이후(大宰府)시에 있었다. 시내로 들어서 덴만구(天滿宮)에서 후쿠오카 쪽으로 가다 보면 상록수와 대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진 높은 흙 제방 사이로 도로가 지나가는데 모르는 사람은 그냥 무심코 지나치기 십상이다. 조금 관심을 갖는다 하더라도 “허허벌판에 왜 이런 제방을 쌓았지” 하며 머리를 한번 갸웃하고 지나갈 따름으로 보인다. 길가에 ‘역사유적 수성’이라는 표지판이 없다면 말이다. 표지판 옆으로는 주차장이 있는데 길 건너편으로 잘려 나간 수성 한쪽 자락 위까지 올라가면 반대편에 있는 수성의 자취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수성은 백강 전투에서 대패하고 왜로 대거 건너온 백제 유민들이 눈물을 삼키며 왜인들과 함께 쌓은 성이란 점에서 백제인들의 한이 서린 흔적이라 할 수 있다. ○ 물로 방어한다는 의미의 수성 수성이 있는 다자이후는 바다로 향하는 서쪽만 벌판으로 열려 있고 동남북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수성은 이 서쪽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다. 길이 1.2km, 높이 10m, 하단 폭 77m에 이르는 이 거대한 성을 불과 1년 만에 쌓았다고 하니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나당연합군의 추격에 공포를 느꼈을지 짐작이 간다. 이런 역사를 알고 보면 바람에 설레는 대나무 숲 사이에서 “적군이 쳐들어오기 전에 빨리 성을 쌓으라”고 독려하는 백제 장수의 목 쉰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수성 아래 누런 황토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밤낮으로 흙을 메고 날랐을 백제 유민들의 땀방울이 배어 있으리라. 수성은 얼핏 3∼4세기 건설된 서울의 몽촌토성과 흡사하다는 평을 듣는다. 하지만 몽촌토성보다 진일보한 기술이 숨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수성의 특이점은 바로 성벽을 꿰뚫고 있는 목통(木桶)이다. 이 목통은 세 군데에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평소에 안쪽 해자에 물을 채워두고 바깥 해자는 비워 두고 있다가 외부의 침공이 있을 때 목통을 통해 바깥쪽 해자로 물을 내보내 침공을 막도록 설계된 것이다. 백제 유민들과 왜인들은 숨 가쁘게 성을 쌓았지만, 다행히 나당연합군은 공격의 칼끝을 고구려로 돌렸고 일본으로 건너오진 않았다. 성은 점차 허물어지고, 숲 속에 묻혔다. 수성 외에도 다자이후엔 백제 유민들이 만든 백제식 산성 흔적이 많다. 다자이후 뒷산이기도 한 해발 410m의 대야(大野·오노) 산에 665년 산허리를 따라 8km 정도 성벽이 축성됐다. 같은 시기에 다자이후 남쪽에도 기이성(基肄城)이 만들어졌다. 수성이 무너질 경우에 대비한 2차 방어선인 셈이다. 일본서기는 이 성들이 망명한 백제 귀족 출신인 달솔 억례복유(億禮福留)와 달솔 사비복부(四比福夫)의 지휘하에 건설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달솔은 백제의 16관등 중 2품에 해당하는 고위직이다. 수성 역시 이들의 지휘로 건설됐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왜는 피란 온 백제 고위직 70여 명에게 관직을 주었다고 한다. 백제 유민을 피란민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당시 자리가 많지 않았음을 감안할 때 70여 명이란 수는 상당한 비중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백제의 멸망과 함께 많은 유민들이 왔다는 것, 양국 언어가 소통에 큰 불편함이 없었다는 것 등을 유추할 수 있다. 오늘날 대야성은 불과 수백 m 구간만 보존돼 있다. 이 수백 m의 성벽이 백제에는 마지막 성이요, 일본엔 최초의 성이기도 하다. 그때까지 일본은 방어를 위해 해자를 파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대야성 축성 이후 일본 성 건축 기술은 비약적으로 늘어 훗날 성벽과 해자가 결합돼 방어력이 뛰어난 일본 성으로 발전했다. 대야성이 있는 오노 산에 오르면 무연한 벌판 너머 멀리 후쿠오카 시내와 바다가 바라보인다. 1500년 전 고향 땅을 떠난 백제의 어느 병사가 눈을 비비며 매일 바라봤을 그 바다다. 뒤로 돌아서면 905년에 건립된 유명 사찰 ‘덴만구’가 발밑에 보인다. ‘학문의 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를 모시는 덴만구는 매년 약 600만 명이 찾아오는 유명 관광지인데, 특히 소원을 빌면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간다는 설이 전해져 내려와 입시철이면 일본 학부모나 학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 ○ 최대 관청이 있던 다자이후 지금의 다자이후 시는 규슈에서 가장 큰 도시인 후쿠오카 그늘에 가려진 인구 6만 명 정도의 작은 변두리 도시이지만 율령제하 나라와 헤이안 시대(710∼1185) 내내 일본 서부의 군사 행정 외교 무역 등을 관할하는 특수지방관청이 있었던 중심도시였다. 일본 서부의 9국 3도, 즉 규슈에 있던 9개의 소국(오늘날의 9주)과 쓰시마 이키노시마 다네가시마 등 3도를 다스리는 총독부로서 당시 일본에서 헤이안(교토의 옛날 이름) 다음으로 중요한 행정기관이었다. 현재 시 이름도 그대로 옛날 관청 이름을 따 붙인 것이다. 사실 수성 대야성도 백강전투 이후 다자이후를 앞뒤에서 지키는 방위시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자이후는 또 당나라 신라 등 외교 사절을 맞을 때 의전을 베푸는 곳이기도 했다. 8세기에 들어서 청사 앞에 광장이 만들어졌고 주변에 20여 개 관아가 배치되었으며 학교지구도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고 한다. 7세기 말경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다자이후 청사의 위상과 권위는 시대에 따라 부침을 겪었다. 번영기에는 관청 부지만 25만4000m²에 달했다고 하니 현재 한국 여의도 국회의 총부지 면적(33만579m²)과 거의 맞먹는 수준이었다. 941년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의 해적 반란 때에는 불에 타고 약탈당해 제 모습을 잃었다가 1019년 여진족이 규슈에 쳐들어온 것을 계기로 다시 방어 거점으로 부상했다. 그러다 1192년 일본에 막부 정권 시대가 시작되면서 점차 쇠락해 아예 관청이 헐리고 터는 논밭으로 변했다. 일본 정부는 1968년부터 이곳에서 발굴조사를 시작했고, 이후 유적공원으로 지정했다. 기자가 다자이후 관청 터를 방문했던 올해 5월에 넓은 풀밭에서는 종이비행기 동호회 회원들로 보이는 노인 몇 명이 열심히 하늘에 비행기를 날리고 있었다. 풀밭 가운데 과거 관청 건물 주춧돌들만 드문드문 보였다. 눈길을 끄는 점은 주춧돌들에 바람개비 형상을 한 파형동기(巴形銅器)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파형동기 문양은 천황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욱일승천기가 이 문양을 본떠 만들어졌다. 그러나 1990년 한국 김해시 대성동의 고분에서 일본보다 150년이 앞선 파형동기 9개가 발굴됐다. 천황의 상징 역시 한반도에서 건너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청 터 옆에 있는 박물관에는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이곳에서 나온 기와 막새와 도깨비 문양 기와는 한반도 백제 유적에서 출토된 기와와 모양이 똑같았다. 다자이후 관청 역시 백제 유민들이 건설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귀신을 쫓고 화재를 막기 위해 붙이는 귀와(鬼瓦)엔 “디자인은 신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 율령국가 ::율령(律令)을 기본으로 통치한 국가. 율은 형법(刑法)이며 영(令)은 행정조직과 백성의 조세, 노역, 관리의 복무를 규정한 것. 모든 토지가 국가 소유였다는 점에서 토지의 사적소유가 허용된 봉건국가와 구별된다. 다자이후=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13회 ‘백제 신도시’로 이어집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 나치 치하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유대인 어린이 669명을 구한 ‘영국의 쉰들러’ 니컬러스 윈턴 경(사진)이 1일 별세했다. 향년 106세. 가족 측은 윈턴 경이 딸 바버라와 손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다고 밝혔다. 영국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윈턴 경은 런던에서 주식중개인으로 일하던 1938년 말 친구의 도움 요청을 받고 체코의 유대인 난민 수용소를 방문한다. 이곳에서 그는 전쟁 위기를 직감하고 나치의 눈을 피해 몰래 기차로 유대인 어린이들을 먼저 네덜란드로 보냈고 그곳에서 배 편으로 다시 영국으로 보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영국 신문에 광고를 내서 아이들을 돌봐줄 영국 위탁 가정을 찾았다. 필요한 서류가 충분치 못한 아이들을 보내기 위해 영국 세관당국도 설득했다. 이런 방식으로 그가 1939년 3월부터 8월까지 8차례 열차 편으로 영국으로 빼돌린 아이는 모두 669명. 그해 9월 1일 250명의 아이를 태운 9번째 열차는 프라하를 떠나지 못했다. 2차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그 열차에 탔던 아이들의 생사는 더이상 확인되지 않았다. 유대인 수용소에 끌려가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2차대전이 발발하자 윈턴 경은 영국 공군에서 복무했다. 아이들을 죽게 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윈턴 경은 전쟁이 끝난 뒤 자신의 선행을 어디에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8년 아내 그레타가 다락방의 낡은 서류가방에서 윈턴의 일기, 아이들의 이름을 적은 명부, 아이들의 편지 등을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때까지 그는 아내에게도 과거를 털어놓지 않았다. 윈턴 경은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적절할 때 적절한 장소에 있었을 뿐”이라며 1100명의 유대인을 수용소에서 구출한 독일인 오스카어 쉰들러와 자신을 비교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쉰들러처럼 목숨까지 걸고 모험을 한 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영국 BBC는 “윈턴 경이 숨을 거둔 7월 1일은 그가 가장 많은 241명의 아이를 런던으로 구출한 날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트위터에 “수많은 아이를 홀로코스트(나치 대학살)에서 구한 윈턴 경의 인도주의를 잊어선 안 된다”며 조의를 표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1999년 6월 15일 제1연평해전 때 나는 북한 인민이었다. 전투가 끝난 뒤 북한 사회를 사로잡았던 복수의 정서를 직접 경험했다. 뒤늦은 이야기지만 “남쪽 애들에게 당한 것을 무조건 되갚아줘야 한다”는 당시 북한의 격앙된 분위기를 한국 군부가 알았다면 미리 교전수칙을 바꾸어 이후 희생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도 있다.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이 일어났을 땐 나는 한국 국민이 돼 있었다. 이번엔 남쪽의 분노를 목격했다. 남과 북은 서로가 아프게 당한 상처만 뼈에 새기고 있었다. 1해전은 알려진 대로 북한의 일방적인 패배였다. 북한은 37t급 어뢰정 1척이 침몰했고 80t급 경비정과 420t급 경비함을 포함해 5척 이상이 크게 파괴됐다. 한국 해군은 7명이 부상한 데 비해 북한은 수십 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최대 13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관측도 있다. 남쪽은 2해전이 북한의 선제 포격으로 시작됐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1해전에서 교전이 시작된 상황에 대해서는 엇갈린 주장들이 있다. 국방부는 북한 중형 경비정이 먼저 기관포를 쏘았다고 발표했지만 북한군이 수류탄을 던져 교전이 시작됐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숫자상 열세인 북한 함정들이 무모한 공격을 시작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더구나 북한 함정들의 배수량을 합쳐도 현장에 출동한 한국 초계함 한 척의 배수량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충돌 과정에 힘에서 밀려 화가 난 북한 병사들이 흩어진 반찬용 염장 무를 닥치는 대로 집어 한국 함정에 던졌는데 이를 수류탄으로 오인한 한국군이 사격하면서 교전이 시작됐다”고 한 황해남도 간부의 증언(자유아시아방송 2013년 9월 5일자 보도)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1해전의 가장 큰 책임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온 북한에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누가 먼저 쐈는지도 명확해야 한다. 만약 북한이 자기들이 먼저 맞았다고 인식했다면 우리는 보복 공격을 대비해야 했다. 전투복 차림이 아닌 러닝셔츠를 입고 충돌에 열중하다가 예상치 못한 교전으로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수많은 동료를 잃은 북한 해군의 복수심은 2해전으로 이어졌다. 1해전 때 북한 주민들은 어땠을까. 북한 해군 기지로 원호물자를 갖고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당시는 군인들의 도둑질이 기승을 부려 부모들이 아이에게 “군대만 나타나면 무조건 문을 잠그라”고 주문하던 때였다. 그렇게 북한군을 ‘공산비적’ ‘토벌대’라고 멀리하던 주민들이 정작 전투가 벌어지자 “배부르게 먹고 꼭 이기라”고 달려가 응원한 것이다. 황해남도 옹진에서 분위기를 목격했던 한 지인은 “앞바다에서 전투가 벌어지니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지더라”며 “아무리 군을 욕해도 전쟁이 나면 똘똘 뭉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남북 간 교전이 벌어지면 사이좋게 어울려 지내던 개성공단의 북한 근로자들도 군을 찾아가 한국에 본때를 보여주라고 응원할 것이라 생각한다. 24일 2해전을 소재로 한 영화 ‘연평해전’이 개봉됐다. 생명을 바치면서도 자기 위치를 지킨 병사들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영웅들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연평해전 전사자들을 ‘공무상 순직자’로 처리했다니 할 말을 잃는다. 영웅에 대한 태도는 남과 북이 많이 다른 것 같다. 북한은 주요 훈장은 누구나 알아보고 영웅에겐 본인과 가족에게까지 배려와 존경을 표한다. 하지만 나는 남쪽에서 13년째 살면서도 훈장 종류와 등급을 잘 모른다. 훈장 달기 쑥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무공훈장을 알아볼 사람은 얼마나 될까. 전투가 벌어져도, 단순 사고가 나도 천편일률적으로 보상금 액수부터 세는 사회가 나는 안타깝다. 공동체를 위한 헌신과 희생에 우리가 맨 먼저 바쳐야 할 것은 돈이 아니라 잊지 않는 존경이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나는 이 땅에 전투 영웅이 늘어나는 걸 원치 않는다. 남북엔 명령에 따라 목숨 바칠 각오를 가진 청년들이 살고 있다. 남쪽엔 2해전에서 숨이 멎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타기를 틀어쥔 한상국 중사가 있다. 북한은 1해전 때 물에 잠겨 죽을 때까지 기관총 방아쇠를 당겼다는 병사를 영웅으로 내세운다. 이런 희생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렇게 서로 적개심과 복수심을 불태우며 이기고 지고를 거듭할 때마다 누군가의 귀한 자식과 남편, 형제가 가슴 허비는 아픔을 남기고 죽어간다. 언제면 한반도는 동족상잔의 이 지긋지긋한 증오와 복수의 악순환을 벗어버릴 수 있을까. ‘연평해전’을 보고 나오며 든 먹먹한 생각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수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김용운 전 한양대 교수는 최근 펴낸 ‘풍수화(風水火)-원형사관(原型史觀)으로 본 한중일 갈등의 돌파구’라는 책에서 663년 백강(白江·지금의 금강 하구)에서 신라-당(唐) 연합군과 백제-왜(倭) 연합군이 맞붙은 ‘백강 전투’가 오늘날 한중일 관계의 틀을 만든 핵심적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소한 데다 우리 역사교과서에서조차 거의 언급되지 않는 전투를 그는 왜 이렇게까지 주목한 것일까. 여기에는 그럴 만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전투에 참여한 백제군(5000명) 왜군(4만2000명) 신라군(5만 명) 당군(13만 명)의 수만 해도 총 22만70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대규모였다. 김현구 선생은 ‘백강 전투는 당시 가장 많은 국가와 군사가 참전해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동북아 최초의 대전이었다’고 평한다. 백제는 이 전투를 계기로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신라는 당과 더욱 가까워지고 왜와는 멀어진다. 한반도와 왜는 각자 통일국가를 형성하면서 독자적인 정치체제와 문화를 갖게 된다. 중국은 백강구(白江口), 일본은 백촌강(白村江) 전투로 기록하고 있는 백강 전투가 일어났던 1300여 년 전 한반도로 가 보자.○ 백제의 항전(抗戰) 우리는 흔히 의자왕 하면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삼천궁녀에 둘러싸여 나라를 망친 망국의 대표 인물로 생각한다. 하지만 백제는 멸망 직전까지 융성했고 막강한 국력도 갖췄었다. 의자왕은 즉위 이듬해인 642년부터 659년까지 총 8차례 신라를 공격했고 대부분 승리했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에는 “백제를 치자”고 건의하는 김유신에게 진덕여왕이 “큰 나라를 침범했다가 위험하게 되면 어찌 하려는가”라고 말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만 해도 백제가 큰 나라, 신라는 작은 나라였던 것이다. 655년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즉위하자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신라 북부를 침공해 30여 개 성(城)을 무너뜨린다. 659년 4월 백제가 다시 신라를 침입해 2개 성을 함락하자 신라는 당에 구원을 요청한다. 당 소정방은 이듬해인 660년 6월 13만 대군을 이끌고 내려온다. 당군(唐軍)은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 병사 5만 명과 함께 백제 도성인 사비성을 공격한다. 계백 장군이 5000여 병사와 황산벌에서 결사항전했지만 결국 사비성은 함락된다. 의자왕은 왕자와 장군 88명, 백성 1만2807명과 함께 당의 수도 장안으로 끌려간다. 이 사비성의 함락 시점을 백제의 멸망 연도로 보지만 사실 백제의 저항은 이후 3년이나 이어질 정도로 끈질겼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운 ‘백제부흥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백제 유민들은 사비성 함락 4개월 만인 660년 10월 주류성(周留城·용어 설명)을 임시 왕성으로 삼는 한편 왜에 긴급지원군을 요청한다. 20년 넘게 왜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왕자 풍(豊)을 급거 귀국시켜 달라는 청도 함께였다. 이후 왜가 보여준 대응은 마치 혈육을 대하는 듯 헌신적인 것이었다. 당시 왜왕은 사이메이 여왕(齊明天皇·재위 655∼661년)이었는데 여왕은 백제와 가까운 후쿠오카로 직접 가서 구원군을 준비시키고 오사카로 가서는 무기를 준비시킨다. 예순을 넘긴 나이에 동분서주하니 몸에 무리가 올 수밖에 없었다. 여왕은 661년 1월 6일 오사카 항을 출발해 여러 곳을 돌며 군사를 모으다 7월 24일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 혈맹이었던 백제와 왜 출병은 아들 덴지 왕 대(代)에서 이뤄진다. 덴지(天智) 왕은 어머니의 시신을 당시의 수도였던 아스카로 옮긴 다음 11월에 상을 치르자마자 출병 준비를 한다. 그리고 2년 뒤인 663년 총 4만2000명이나 되는 왜군을 주류성으로 파견한다. 육로는 신라군이 지키고 있어 부득이 바다로 갈 수밖에 없었다.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나라 수군은 663년 8월 27일 주류성과 가까운 금강 하구(백강)에서 백제와 왜군 연합군을 맞닥뜨린다. 일본서기는 당시 왜군의 전투 과정을 이렇게 전한다. “당나라 장군이 전선 170척을 이끌고 백촌강(백강)에 진을 쳤다. 일본의 수군 중 먼저 온 군사들과 당 수군이 대전했다. 일본이 패해 물러났다. 당은 진을 굳게 해 지켰다.…다시 일본이 대오가 난잡한 병졸을 이끌고 진을 굳건히 한 당의 군사를 나아가 쳤다. 당은 좌우에서 군사를 내어 협격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관군(왜군)이 적에게 패했다. 물에 떨어져 익사한 자가 많았다. 뱃머리와 고물을 돌릴 수 없었다.”(김용운 책에서 재인용) 당시 동원된 왜 수군의 배는 무려 1000여 척에 이르렀다고 한다. 중국의 ‘구당서(舊唐書·당나라 왕조의 정사를 기록한 책)’는 ‘왜국 수군의 배 400척을 불태웠는데 그 연기가 하늘을 덮었고 바닷물이 왜군의 시체들로 핏빛이었다’고 적고 있다. 막대한 희생을 치른 덴지 왕은 정권 자체가 흔들린다. 그가 죽자 아들 고분(弘文) 왕이 이어받지만 곧 작은아버지 덴무(天武)에게 살해당한다. 덴무는 백강 전투를 치른 지 9년 만인 672년 왕위에 올랐다.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한국판 세조가 된 것이다. 일본 역사학계는 이를 ‘진신(壬申)의 난’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인들의 집단 이주 나라를 잃은 백제인들은 너도 나도 배를 타고 일본 열도로 건너간다. 3년 전 사비성이 함락되었을 때에도 왜로 건너간 백제인이 많았지만 대거 집단 이주가 시작된 것은 백강 전투가 결정적 계기였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주장이다. 일본 고고학회 회장을 지낸 니시타니 다다시(西谷正) 규슈대 명예교수는 “백제 멸망과 유민의 대규모 이주는 일본 역사를 새롭게 쓰는 계기가 됐다”며 “백강 전투를 치른 7년 뒤인 670년에 왜는 국호를 일본(日本)으로 바꾸고 새롭게 태어난다”고 전했다. 김용운 선생도 왜로 망명한 백제인 중에는 왕족은 물론이고 귀족들과 지식인이 많았는데 이들의 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왜가 통일국가 수립에 박차를 가한다고 전한다. 그는 앞서 언급한 책에서 “전투 이후 한반도(통일신라)와 일본 열도가 각각 통일정권을 이룬 것까지는 공통적이었지만 신라는 당 눈치를 살피느라 군사력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은 개척과 확대의 노선을 택하게 돼 한일 민족 간의 원형은 크게 갈라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반도와 열도라는 지형적 차이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국과 일본은 백강 전투 후 각각 율령제와 봉건제, 문(文)과 무(武), 중국으로의 질서 편입과 이탈이라는 정반대의 국가 체제로 갈라진다는 것이다. 다시 그의 말이다. “백강 전투 후 한국인들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들을 거의 잊었으나 일본인들의 집단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멸망한 백제에 대한 한과 복수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663년 일본서기는 ‘오늘로서 백제의 이름은 끝났다. 고향땅 곰나루(웅진)에 있는 조상의 묘를 언제 다시 찾을까’라는 비통한 글로 ‘백제의 한’을 기록하고 그 좌절감을 일본신국론으로 조작해 억지스러운 우월의식으로 전환한다. 이는 조선과 중국(신라와 당) 땅을 뺏어야 한다는 정한론으로 이어진다.” 백강은 오늘날 금강이 서해와 만나는 군산 앞바다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 주변은 가을이 되면 은빛 갈대밭이 장관을 이루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국과 일본 고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던 주변에 표지판이라도 하나 세워 한일 관계의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는 장소로 만든다면 이것이야말로 미래의 신(新)한일관계를 만드는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 주류성 ::백제의 마지막 거점. 위치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지금의 충남 서천군 한산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지만 충남 청양군 정산이라는 주장, 전북 부안군 위금산성이라는 주장도 있다. 허문명 angelhuh@donga.com / 다자이후=주성하 기자※12회 ‘수성과 다자이후’로 이어집니다.}

경제위기로 대혼란에 빠진 그리스에서 국민투표 용지가 논란의 대상으로 새롭게 떠올랐다. 그리스 정부가 5일 실시할 국민투표의 투표용지를 6월 29일 공개했는데 찬성과 반대를 찍는 칸이 상식과는 반대로 배열돼 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이 요구한 추가긴축안에 대한 의견을 묻는 투표용지에는 ‘오히(OXI·아니다의 그리스어)’를 선택하는 칸이 위에 있고 ‘네(NAI·그렇다)’는 아래쪽에 있다. 양식으로만 보면 ‘찬반’ 투표가 아닌 ‘반찬’ 투표인 셈이다. 그리스에선 정부가 EU의 추가긴축안에 대한 유권자의 반대를 유도하기 위해 투표용지를 조작했다는 논란이 커지고 있다. 투표용지에 인쇄된 문구도 난해하다. 용지에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이 2015년 6월 25일 (추가긴축) 협상안을 제안했으며, 이 제안은 두 개 부분으로 구성돼 있고, 첫 번째 문서는 ‘현재 프로그램과 그 이후의 완결을 위한 개혁’이며 두 번째 문서는 ‘예비부채지속성 분석’인데, 이를 받아들여야 할까”라고 나와 있다. BBC방송은 “일반인들이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차라리 ‘유로존에 남을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이번 사태의 본질을 더 잘 나타낸다”고 밝혔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가카라시마는 후쿠오카에서 한 시간 동안 지하철을 타고 가라쓰까지 간 뒤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요부코 항으로 와 여객선을 타고 20분 정도 가야 한다. 항에 도착하니 사카모토 쇼이치로(坂本正一郞) 백제무령왕국제네트워크협의회 부회장이 기자를 맞아 주었다. 이 단체는 백제 문화와 무령왕을 매개체로 한일 민간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해 한일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단체다. 사카모토 부회장에게 “여객선에 탄 사람이 기자밖에 없었다”고 했더니 “본래 평소에도 사람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 거친 바다 동굴에서 태어난 무령왕 둘레가 약 12km인 이 섬 인구는 불과 108명. 어업이 번창했던 1952년엔 560명이 살기도 했지만 지금은 거의 떠났다고 한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주로 도미와 오징어잡이에 종사한다. 섬에 뚜렷한 관광자원도 없다 보니 낚시꾼들이나 오는 섬이라고 주민들은 전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百濟武寧王生誕地(백제무령왕생탄지)’라고 새겨진 커다란 기념비가 보였다. 2006년 6월 25일 충남 공주와 일본 가라쓰 시민들이 모금해 세운 높이 3.6m의 기념비는 무령왕릉 입구의 아치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돌은 한국 최고 화강암 산지인 전북 익산에서 다듬어 배로 실어왔다고 한다. 기념비를 지나 15분 정도 더 걸어가자 오늘의 답사 목적지인 무령왕이 태어났다는 해안 동굴이 나왔다. 섬사람들은 동굴이 있는 해변을 ‘오비야우라(オビヤ浦)’라고 불렀다. 오비는 일본어로 기모노 등을 묶는 허리띠를 의미하니 허리띠를 풀고 아이를 낳은 포구란 뜻이다. 오랜 기간 파도에 부딪친 탓인지 벼랑 아래쪽이 2m 정도 깎여 들어간 작은 굴이었다. 사카모토 부회장은 “예전에는 좀 더 깊었지만 풍화 작용으로 위가 무너져 내렸다”고 했다. 동굴 안 판자 팻말에는 ‘百濟第二十五代武寧王生誕の地(백제 제25대 무령왕이 태어난 곳)’라는 글이 적혀 있었고, 그 앞에는 누가 갖다 놓았는지 작은 화분과 술잔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작아서 “여기가 무령왕 탄생지 맞느냐”고 묻자 사카모토 부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 섬에 배가 정박하고 비를 피할 만한 곳은 이 동굴밖에 없다”고 했다. 동굴과 바다는 거친 자갈밭을 사이에 두고 불과 5m 정도 떨어져 있었다. 태풍이라도 불 때면 파도가 동굴 안까지 들어올 것 같았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1500여 년 전 이 낯선 땅 거친 야생 동굴에서 혹독한 산고(産苦)를 치르며 아이를 낳았을 백제국 왕비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짠했다. 이렇게 춥고 어두운 동굴에서 갓 세상 밖으로 나온 무령왕은 또 얼마나 두려웠을 것인가. ○ 왜국과 얼마나 친한 관계였으면 무령왕이 이곳에서 태어나 백제로 다시 돌아가 훗날 왕위에 올랐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지금도 건강한 성인 남자도 힘든 뱃길에 동생(곤지)이 탄 배에 임신한 자신의 왕비를 태웠던 무령왕의 아버지 개로왕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것일까…. 선뜻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해로(海路)가 그만큼 안전했다는 뜻도 되고 무엇보다 왜(倭)와의 친선관계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긴 했다. 동굴을 나와 50m 정도 걸어가니 갓 세상 밖으로 나온 무령왕이 첫 목욕을 했다는 우물이 나왔다. 계곡 옆에 깊이 수십 cm 구덩이를 파놓고 판자 몇 개로 대충 둘러친 형태를 띠고 있었다. 물맛이 어떨까 궁금해 떠서 마셔 보니 특별한 맛은 없었다. 가카라시마는 침체돼 가는 섬 경제를 살리기 위해 백제 왕이 태어난 곳이란 점을 부각시켜 한국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싶어 한다. 섬에선 2002년부터 매년 6월 첫 번째 토요일에 한일 관계자들이 참석하는 무령왕 탄생제가 열린다. 14회인 올해에도 한국에서 건너간 31명을 포함해 200여 명이 모였다. 올해는 첫 번째 토요일이 현충일임을 감안해 7일에 행사가 열렸다. 섬이 속한 가라쓰 시내에선 무령왕 관련 공연과 연극도 진행됐다. 한국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기 위한 노력에 고맙고 미안하고 또 친근감이 느껴졌다. 문제는 교통이었다. 후쿠오카에서 지하철 버스 여객선을 갈아타고 와야 한다. 다른 관광자원이나 편의시설도 별로 없는데 백제왕이 태어난 동굴을 구경하겠다고 한국 관광객이 한나절을 투자하기가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바다 건너를 바라보니 무령왕이 태어난 지 1000여 년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한반도를 바라보며 대륙 진출의 꿈을 꾸었다는 히젠 나고야 성이 있는 언덕이 보였다. 자신을 포함해 왕실 가족들이 수시로 오갈 만큼 가까웠던 왜와 먼 훗날 후손들이 동아시아 전쟁을 펼치게 될 줄 무령왕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역사는 국력이 강한 쪽에서 약한 쪽을 향해 영향력이 확장되게 마련이다.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이다.○ 백제 부흥을 이끈 왕 무령왕은 백제의 부흥을 이끈 왕이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장수(61세)하면서 외교 군사 경제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백제의 비약적인 성장을 이끌어 냈다. 종교와 사상 등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 중국 남조를 통해 수입된 유학과 도교 사상은 백제에서 다듬어져 일본으로 전해졌다. 국가를 운영할 제도와 이념에 목말라하던 일본의 지배층들은 백제를 통해 수혈되는 고급 학문과 사상에 크게 의지했으며 이러한 사조는 성왕 대까지 이어진다(권오영 저 ‘무령왕릉’·돌베개). 당시 백제와 왜의 긴밀한 교류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로도 확인됐다. 우선 시신을 모신 목관의 재료가 일본에서만 나는 금송(金松)이었다. 금송은 햇빛이 솔잎에 비칠 때 황금빛을 낸다고 해 붙여진 이름인데 일본어로는 ‘고야마키(高野전)’라고 한다. 곧게 잘 자랄 뿐만 아니라 내수성과 내습성이 좋아 일본에서는 후지와라 궁, 헤이조 궁 등의 중요 건축물 자재로 이용되었으며 고대에는 귀족층의 목관 재료로 널리 사용되었다. 실제로 무령왕이 태어난 동굴 바로 위쪽 산허리에는 빼곡히 우거진 잡관목을 걷어내고 심은 수령 2∼3년 된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띄었는데 나무 앞에 ‘高野전’라고 적힌 작은 팻말이 있었다. 권오영 교수는 책 ‘무령왕릉’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고대 일본인은 석관을 선호했고 목관을 사용하더라도 백제 것과는 달랐다. 따라서 무령왕 부부의 목관이 일본에서 제작되었다고 보기는 곤란하다. 통나무나 약간의 가공을 거친 상태로 백제로 들어왔을 것이다. 목관을 제작하려면 운반 후에도 건조, 가공, 못과 관 고리의 제작, 옻칠, 비단 제작 등 여러 공정이 필요하므로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또한 주인공이 돌아가신 뒤 곧바로 관에 모셔진 채 무덤 안으로 이동하였을 터이므로 생전에 미리 관을 만들어 두었을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당시 백제에서는 일본에서 금송을 입수하여 관리하는 체계가 이미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밖에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둥근고리자루칼(둥글게 처리된 끝 부분에 묶은 끈을 손목에 감싸 전투할 때 떨어뜨리지 않도록 고안된 칼)로 불리는 ‘환두대도(環頭大刀)’나 청동거울도 일본 내 고대 무덤에서 비슷한 것들이 발견되어 백제와 왜의 긴밀한 교류를 짐작하게 했다.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의 저자 김현구 선생은 책에서 “6세기 양국은 혈연적 관계로 묶였었다”면서 “개로왕의 동생 곤지뿐 아니라 여러 명의 백제 왕자들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왕녀와 결혼했을 가능성이 큰데 이는 당시 백제 왕족들이 일본인들이 이상향으로 삼던 선진국 최고 신분의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 일본서기 :: 720년에 편찬된 일본의 역사서. 일본의 건국 신화로부터 41대 지토 천황(持統天皇)이 사망한 697년까지 역사를 연대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사기’와 더불어 일본 고대사 연구의 핵심 사료이다. 가카라시마=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8회는 무령왕의 후손 간무 천황 이야기입니다.}
가카라시마는 후쿠오카에서 한 시간 동안 지하철을 타고 가라쓰까지 온 뒤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요부코 항으로 와 여객선을 타고 20분 정도 가야한다. 항에 도착하니 사카모토 쇼이치로(坂本 正一郞) 백제무령왕국제네트워크협의회 부회장이 기자를 맞아 주었다. 이 단체는 백제 문화와 무령왕을 매개체로 한일 민간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해 한일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단체다. 사카모토 부회장에게 “여객선에 탄 사람이 기자밖에 없었다”고 했더니 “본래 평소에도 사람이 없다”는 답을 돌아왔다. ●거친 바다 동굴에서 태어난 무령왕 둘레가 약 12㎞인 이 섬 인구는 불과 108명. 어업이 번창했던 1952년엔 560명이 살기도 했지만 지금은 거의 떠났다고 한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주로 도미와 오징어잡이에 종사한다. 섬에 뚜렷한 관광 자원도 없다보니 낚시꾼들이나 오는 섬이라고 주민들은 전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百濟武寧王生誕地(백제무령왕생탄지)’라고 새겨진 커다란 돌 기념비가 보였다. 2006년 6월 25일 충남 공주와 일본 가라쓰 시민들이 모금해 세운 높이 3.6m의 기념비는 무령왕릉 입구의 아치 모양을 본 따 만들었다. 돌은 한국 최고 화강암 산지인 전라북도 익산에서 다듬어 배로 실어왔다고 한다. 기념비를 지나 15분 정도 더 걸어가자 오늘의 답사 목적지인 무령왕이 태어났다는 해안가 동굴이 나왔다. 섬사람들은 동굴이 있는 해변을 ‘오비야우라(オビヤ浦)’라고 불렀다. 오비는 일본어로 기모노 등을 묶는 허리띠를 의미하니 허리띠를 풀고 아이를 낳은 포구란 뜻이다. 오랜 기간 파도에 부딪친 탓인지 벼랑 아래쪽이 약 2m 정도만 깎여 들어간 작은 굴이었다. 사카모토 부회장은 “예전에는 좀 더 깊었지만 풍화 작용으로 위가 무너져 막혔다”고 했다. 동굴 안 판자 팻말에는 ‘百濟第二十五代武寧王生誕の地(백제 제25대 무령왕이 태어난 곳)’라는 글이 적혀 있었고, 그 앞에는 누가 갖다 놓았는지 작은 화분과 술잔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작아서 “여기가 무령왕 탄생지 맞느냐”고 묻자 사카모토 부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 섬에 배가 정박하고 비를 피할만한 곳은 이 동굴 밖에 없다”고 했다. 동굴과 바다는 거친 자갈밭을 사이에 두고 불과 5m 정도 떨어져 있었다. 태풍이라도 불때면 파도가 동굴 안까지 들어올 것 같았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1500여 년 전 이 낯선 땅 거친 야생 동굴에서 혹독한 산고(産苦)를 치르며 아이를 낳았을 백제국 왕비 생각에 가슴 한 구석이 짠했다. 이렇게 춥고 어두운 동굴에서 갓 세상 밖으로 나온 무령왕은 또 얼마나 두려웠을 것인가. ●얼마나 왜국과 친한 관계였으면 무령왕이 이곳에서 태어나 백제로 다시 돌아가 훗날 왕위에 올랐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지금도 건강한 성인남자도 힘든 뱃길에 동생(곤지)이 탄 배에 임신한 자신의 왕비를 태웠던 무령왕의 아버지 개로왕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것일까…선뜻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해로(海路)가 그만큼 안전했다는 뜻도 되고 무엇보다 왜(倭)와의 친선관계가 지금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하는 확신이 들긴 했다. 동굴을 나와 50m 정도 걸어가니 갓 세상 밖으로 나온 무령왕이 첫 목욕을 했다는 우물이 나왔다. 계곡 옆에 깊이 수십cm 구덩이를 파놓고 판자 몇 개로 대충 둘러친 형태를 띠고 있었다. 물맛이 어떨까 궁금해 떠서 마셔 보니 특별한 맛은 없었다. 가카라시마는 침체돼 가는 섬 경제를 살리기 위해 백제왕이 태어난 곳이란 점을 부각시켜 한국 관광객들을 끌어 들이고 싶어 한다. 섬에선 2002년부터 매년 6월 첫 번째 토요일에 한일 관계자들이 참가하는 무령왕 탄생제가 열린다. 14회인 올해에도 한국에서 건너간 31명을 포함해 200여명이 모였다. 올해는 첫 번째 토요일이 현충일임을 감안해 7일에 행사가 열렸다. 섬이 속한 가라쓰 시내에선 무령왕 관련 공연과 연극도 진행됐다. 한국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기 위한 노력에 고맙고 미안하고 또 친근감이 느껴졌다. 문제는 교통이었다. 후쿠오카에서 지하철 버스 여객선을 갈아타고 와야 한다. 다른 관광자원이나 편의시설도 별로 없는데 백제왕이 태어난 동굴을 구경하겠다고 한국 관광객이 한나절을 투자하기가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바다 건너를 바라보니 무령왕이 태어난 지 꼭 1000여년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한반도를 바라보며 대륙진출의 꿈을 꾸었다는 히젠 나고야성이 있는 언덕이 보였다. 자신을 포함해 왕실 가족들이 수시로 오갈만큼 가까웠던 왜와 먼 훗날 후손들이 동아시아 대 전쟁을 펼치게 될 줄 무령왕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역사는 국력이 강한 쪽에서 약한 쪽을 향해 영향력이 확장되게 마련이다.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이다. ●백제 부흥을 이끈 왕 무령왕은 백제의 부흥을 이끈 왕이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장수(62세)하면서 외교 군사 경제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백제의 비약적인 성장을 이끌어 냈다. 종교와 사상 등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 중국 남조를 통해 수입된 유학과 도교사상은 백제에서 다듬어져 일본으로 전해졌다. 국가를 운영할 제도와 이념에 목말라하던 일본의 지배층들은 백제를 통해 수혈되는 고급 학문과 사상에 크게 의지했으며 이러한 사조는 성왕 대까지 이어진다(권오영 저 ‘무령왕능’). 당시 백제와 왜의 긴밀한 교류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로도 확인됐다. 우선 시신을 모신 목관의 재료가 일본에서만 나는 금송(金松)이었다. 금송은 햇빛이 솔잎에 비칠 때 황금빛을 낸다고 해 붙여진 이름인데 일본어로는 ‘고야마키(高野¤)’라고 한다. 곧게 잘 자랄 뿐만 아니라 내수성과 내습성이 좋아 일본에서는 후지와라 궁 헤이조궁 등의 중요 건축물 자재로 이용되었으며 고대에는 귀족층의 목관 재료로 널리 사용되었다. 실제로 무령왕이 태어난 동굴 바로 위쪽 산허리에는 빼곡히 우거진 잡관목을 걷어내고 심은 수령 2~3년 정도 된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띄었는데 나무 앞에 ‘고야마키(高野¤)’라고 적힌 작은 팻말이 있었다. 권오영 교수는 책 ‘무령왕릉’(돌배게)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고대 일본인은 석관을 선호했고 목관을 사용하더라도 백제 것과는 달랐다. 따라서 무령왕 부부의 목관이 일본에서 제작되었다고 보기는 곤란하다. 통나무나 약간의 가공을 거친 상태로 백제로 들어왔을 것이다. 목관을 제작하려면 운반 후에도 건조, 가공, 못과 관 고리의 제작, 옻칠, 비단 제작 등 여로 공정이 필요하므로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또한 주인공이 돌아가신 뒤 곧바로 관에 모셔진 채 무덤 안으로 이동하였을 터이므로 생전에 미리 관을 만들어 두었을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당시 백제에서는 일본에서 금송을 입수하여 관리하는 체계가 이미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밖에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둥근고리자루칼(둥글게 처리된 끝부분에 끈을 묶어 손목에 감싸 전투할 때 떨어뜨리지 않도록 고안된 칼)로 불리는 ‘환두대도(環頭大刀’나 청동거울도 일본 내 고대 무덤에서 거의 비슷한 것들이 발견되어 백제와 왜와의 긴밀한 교류를 짐작케 했다.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의 저자 김현구 선생은 책에서 “6세기 양국은 혈연적 관계로 묶였었다”면서 “개로왕의 동생 곤지 뿐 아니라 여러 명의 백제 왕자들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왕녀와 결혼했을 가능성이 큰데 이는 당시 백제 왕들이 일본인들이 이상향으로 삼던 선진국 최고 신분의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일본서기 : 720년에 편찬된 일본의 역사서. 일본의 건국 신화로부터 41대 지통천황(持統天皇)이 사망한 697년까지 역사를 연대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사기’와 더불어 일본 고대사 연구의 핵심 사료이다.8회는 무령왕의 후손 간무천황 이야기입니다.가카라시마=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옛 문헌에는 백제인들이 왜(倭)로 갈 때 이용하던 주요 해상로로 쓰시마(對馬)∼이키(壹岐)∼가카라시마(加唐島)를 표지(標識) 섬으로 삼고 갔다는 기록이 많다. 2년 전인 2013년 6월 일본 규슈 국립박물관은 한일 역사학자들을 모아 옛날 백제인들과 왜인들이 오가던 이 바닷길을 검증하는 시도를 했었다. 그 결과 문헌 기록이 맞다는 결론을 얻었다. 실제 이키 섬을 출발하면 앞에 보이는 섬은 가카라시마뿐이다. 가카라시마는 수천 년 동안 우리 선조들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갈 때 나침반 역할을 했던 중요한 섬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 섬사람들에게는 전설처럼 ‘먼 옛날에 어떤 여인이 이 섬에서 아기를 낳고 샘물을 마셨다, 그때 태어난 아기는 훗날 매우 귀한 분이 되었다’는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다 720년 편찬된 일본서기에 그 ‘귀한 분’이 바로 ‘백제 무령왕’이라는 기록이 나오게 된다. 일본서기의 내용을 현대식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461년 4월 백제 개로왕(蓋鹵王·재위 455∼475년)이 일본 유랴쿠 천황(雄略天皇·재위 456∼479년)에게 백제 여인을 왕비로 추천해 보냈는데 그녀가 입궁하기 전 간통한 사실이 알려졌다. 유랴쿠 천황은 그녀를 죽인다. 개로왕은 동생 곤지에게 분노한 일왕을 달래고 나라 운영을 보좌하라고 지시한다. 곤지는 ‘임금의 명은 어길 수 없지만 형님의 여인(군부·君婦)을 주시면 명을 받들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개로왕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부인을 곤지에게 내주며 ‘여인이 산달이 가까워오고 있다. 만일 가는 도중에 아이를 낳으면 부디 배에 태워 속히 돌려보내도록 하여라’라고 했다. 개로왕과 곤지 두 사람은 작별인사를 나누고 곤지는 왜로 가는 항해에 나선다. 그러다 결국 임신한 여인이 곧 산통을 느꼈고 배는 가카라시마에 정박했다. 곧 아이가 태어났고 아이의 이름은 섬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사마(斯麻)’라 하였다. 일행이 배 한 척을 내어 아이를 돌려보내니 이가 곧 무령왕이다.” 일본어에서 한자 ‘사(斯)’는 ‘시’로 발음되기 때문에 시마 왕으로 읽으며 이는 곧 섬에서 태어난 ‘도왕(島王)’이라는 뜻이다. 일본서기의 내용들은 오랫동안 한국인들의 신뢰를 받지 못했다. 특히 왜왕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동생을 보내면서 임신한 자신의 부인을 딸려 보냈다는 대목은 현대적 시각으론 도저히 이해가 안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김현구 전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시 한국과 일본에는 임신한 부인을 총신(寵臣·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에게 하사하는 풍습이 있었다. 따라서 개로왕이 임신한 부인을 동생 곤지에게 하사했다는 기록도 못 믿을 이유가 없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일본서기의 기록은 더욱 설득력을 얻었다. 발굴된 무령왕릉 지석에 무령왕 이름이 ‘일본서기’와 완전히 일치하는 ‘사마(斯麻)’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곤지가 일본으로 가는 길에 태어난 아이가 무령왕이라는 이야기나 무령왕이 일본에서 태어난 뒤 귀국해 즉위했다는 것은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시계를 돌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되는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그해 7월 한여름 전국은 긴 장마로 신음하고 있었다. 삼국시대 백제 고분군이 밀집해 있던 충남 공주시 서북쪽 송산리(오늘날 금성동) 언덕에서는 문화재 발굴단이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7월 6일 배수로 공사를 하느라 무심코 땅을 파던 한 인부의 삽에 뭔가 단단한 물체가 부딪쳤다. 손으로 헤집어 보니 흙을 구워 만든 벽돌이었다. 그런데 한두 개가 아니었다. 조금씩 더 파고 들어가 보니 이 벽돌은 거대한 아치형 구조물의 일부였다. 처음엔 다들 기존에 발굴한 6호 고분의 연장이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이 구조물이 또 다른 무덤의 입구라는 것을 알고 현장은 충격에 빠진다. 이튿날 서둘러 김원용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단장으로 하여 문화재관리국 학예직들로 발굴단이 구성되어 공주에 집결했다.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자 무덤은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입구는 벽돌 구조물로 막혀 있었고 그 틈을 석회가 단단히 봉하고 있었다. 석회를 제거하고 입구 아래까지 내려간 시간이 오후 4시. 누구의 무덤인지는 모르겠으나 백제 왕릉급이 분명해 보이는 옛 무덤 앞에서 발굴단은 왕의 영면(永眠)을 방해하는 것을 사죄하는 위령제를 올렸다. 위령제라고 해봐야 흰 종이 위에 북어 세 마리, 수박 한 통, 막걸리를 올려놓는 게 전부였다. 맨 윗단의 벽돌 두 장을 제거하는 순간 마치 한증막처럼 흰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1400년 넘게 밀폐 상태로 있던 무덤 내부의 찬 공기가 바깥의 더운 공기와 만나 일어난 현상이었다. 숨을 죽이고 들어간 발굴단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컴컴하고 깊은 연도(羨道·고분 입구에서 시신을 안치한 방까지 이르는 길)였다. 연도 중간쯤 엽전이 올려져 있는 석판으로 다가가자 석판 위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 발굴단은 다시 한번 놀랐다. 사마왕은 다름 아닌 백제 무령왕(武寧王·461∼523)이었기 때문이다.(이상은 권오영 씨의 책 ‘무령왕릉’에 나온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4년 전 무령왕릉이 140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후손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은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긴장과 박진감이 넘친다. 일제강점기 전국 각지의 고분이 파헤쳐지고 도굴꾼들이 활개를 치던 상황에서도 용케 완전한 형태로 살아남은 고분이 있다는 것 자체도 신기했지만 무덤의 주인이 꺼져가던 백제의 맥박을 다시 힘차게 돌려놓았던 무령왕이었다는 게 알려지자 한여름 전국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당시에는 먹고살기에도 바빴던 형편이라 조상들이 남긴 숭고한 문화유산을 감당할 수준이 못 됐다는 게 권오영 씨의 말이다. “지석(誌石)을 통해 무덤 주인이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이라는 발표가 나오자 현장은 집단 패닉 상태에 빠졌다. … 보도진들은 앞다투어 무덤 안으로 들어가려 했고 무덤 안에 들어가 유물을 촬영하다가 청동 숟가락을 밟아 부러뜨리는 불상사마저 일어났다. 밀려오는 구경꾼들을 통제해야 할 경찰마저 ‘나도 한번 구경하자’며 앞장설 정도였다.” 하기야 그때만 해도 그만큼 중요한 유적을 우리 손으로 발굴 조사한 경험도 없을뿐더러 발굴 조사와 관련된 행정조치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을 터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한국 못지않게 무령왕릉 발굴 소식에 흥분한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 언론들은 발굴 시점부터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이듬해까지 현장 답사기를 싣고 관련 심포지엄을 열면서 발굴의 의미를 찾고자 부산했다. 발굴 직후 아사히신문은 ‘백제 왕릉 발굴조사는 역사적인 대발굴’이라면서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백제 성왕의 아버지이면서 일본서기에도 이름이 나오는 백제의 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이라고 판명됐다’고 대서특필했다. 동시에 갑자기 일본인들의 눈길이 쏠린 곳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무령왕이 태어난 섬 가카라시마였다. 기자는 이달 초 가카라시마를 향해 길을 나섰다.:: 지석(誌石) ::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이나 업적, 자손 등을 기록하여 묻은 판석이나 도판을 말한다. 무덤의 내역을 밝힐 수 있기 때문에 고분 발굴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7회는 가카라시마 답사기입니다.}

“노년이 먹으면 정력이 세지고, 아이가 먹으면 성장호르몬이 많이 분비된다.” 북한 외국인용 잡지에 최근 실린 정력제 광고 내용이다. ‘체력활성 영양알’이란 상표가 붙은 이 약의 효능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근육 강화, 학습 집중력 제고, 피곤 해소, 멀미와 빈혈에 특효, 안정적 숙면 보장” 등 다양하다. 이에 영국 데일리메일은 15일 ‘김정필: 북한의 슈퍼 비아그라’라는 기사를 썼다. 김정필은 ‘김정은’과 ‘알약(pill)’의 합성어다. 물론 기사는 “정력 강화와 잠에 곯아떨어지는 효과는 아마도 같은 시간에 나타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등 비아냥 일색이다. 나도 광고를 보고 이 좋은 약을 김정은은 챙겨 먹는지가 궁금해졌다. 김정은은 지난해 11월 정성제약공장을 시찰했는데, 이 공장에서 비아그라가 생산된다. 이왕 간 김에 약 먹는 장면까지 연출했다면 그만한 광고가 어디 있을까 싶다. 참, 좋은 소리 다 적으면서 남쪽 사람들이 솔깃할 ‘살까기(다이어트의 북한 말)’ 효능이 있다고는 왜 적지 않았을까. 차마 못쓰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만약 근력 강화 효과가 정말 있다면 외국산 근육 강화제를 먹고 호르몬 부작용을 앓는다는 김정철은 참 억울하겠다. “진작 이런 약이 나왔다면 지금쯤 ‘위대한 영도자 김정철 동지’가 됐을 텐데” 하고 말이다. 그래도 이번 광고는 북한의 원조 슈퍼 비아그라라고 할 수 있는 ‘네오비아그라 Y.R.(북에선 ‘청춘1호’라고 소개한다)’ 설명서보다는 노골적이지 않다. 네오비아그라의 설명서에는 ‘2차 이상의 성교 시 발기복귀시간이 15분 주기로 짧아 남녀가 원하는 대로 4∼8회의 연속되는 성교를 실현할 수 있는 다회성기능부활제. 발기지속시간 24∼36시간. 피로감은 1회 성교와 6회 성교가 같습니다. 피로가 회복되며 활력이 넘칩니다’라고 적혀 있다. 설명서에 나와 있는 여성 성기능 개선 효과까지 적으려니 민망해서 여기서 그만. 여기에다 “콩팥염 허리아픔 어깨아픔 간염 관절염 뇌동맥경화증에도 효과가 있으며 부작용은 전혀 없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이 약을 2006년 당시 한국 식품의약품안전청이 분석해 보았더니 중금속과 마약 성분이 검출됐다. 수은이 기준치의 7.5배가 나왔고, 향정신성의약품으로 분류돼 있는 디아제팜도 검출됐다. 당시만 해도 평양과 금강산을 가는 남쪽 사람이 많을 때였다. 방북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북한 기념품 가게에서 아리따운 여성 안내원이 “선생님, 이 약 한번 드셔 보시라요. 정력이 끝내줍니다” 하며 붙잡던 경험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남쪽의 분석 결과 발표 이후 북한은 잇달아 신제품을 내놓았고, 생약 성분으로 만들어 부작용이 없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상표명도 ‘양춘삼록’ ‘청활’ ‘천궁백화’ ‘네오비아그라’ 등 다양하다. 요즘 이런 슈퍼 비아그라는 북한의 주력 외화벌이 상품으로 떠오르고 있다. 물론 북한은 만병통치 건강식품이라고 주장하지만 대다수가 정력제 기능을 강조하고 있어 비아그라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이런 약들은 해외 북한 식당에서 예외 없이 팔고 있다. 술 팔고 약 팔고 일석이조인 셈이다. 원가를 알 수 없는 캡슐 하나가 5달러 이상에 거래된다. 중국 러시아 동남아지역이 요즘 북한산 비아그라의 집중 공략지이다. 지난달 방글라데시 다카의 북한 식당 여성 지배인이 비아그라와 술을 불법 판매한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 이런 북한을 보면 1992년 한중 수교 직후 한국에 건너온 조선족들이 백두산에서 나는 특효 명약이라면서 웅담이니 녹용이니 경쟁적으로 갖고 왔던 것이 연상된다. 조선족들이 북한에 가면 “내가 왕년에 웅담 좀 팔아봤는데 말이야” 하며 할 말이 많을 듯하다. 북한이 비아그라와 건강식품을 내세우며 약장사하는 걸 보면 솔직히 진짜 웃기는 일이다. 성교육은 고사하고 영화 속 키스 장면조차 허용되지 않는 곳, 주민 건강상태는 세계적으로도 열악한 북한이 믿기 힘든 슈퍼 비아그라와 건강식품을 개발했다니 말이다. 어머니날까지 새로 만들며 출산을 독려하는 것도 미스터리한 일이다. 피임도 힘들고, 낙태는 허용조차 안 되는데, 36시간 효능이 유지된다는 저 슈퍼 비아그라를 남녀노소에게 나눠주면 북한에 아기 울음소리가 넘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진짜 효능이 있다 해도 문제이긴 하다. 살림집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북한은 작은 집에 부모 자식 3대가 함께 사는 게 일반적이다. 네오비아그라를 먹고 도대체 어찌 살라는 건지…. 특히 젊은 연인은 절대 복용 금지. 북한엔 모텔도 없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지금으로부터 1만여 년 전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때쯤 중국 대만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하나의 땅덩어리였다. 빙하기가 끝나 수천 년 동안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낮은 지대에 바닷물이 차오르기 시작하면서 서해가 생겨나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땅은 반도가 됐고, 대한해협이 생겨나 동해가 태평양과 연결되면서 일본은 섬나라가 됐다. 일본이 떨어져 나간 뒤에도 한반도와 일본의 교류는 이어졌다.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규슈는 일본 열도와 한반도를 이어주는 통로였다. 규슈 가라쓰 시에 가면 우리 옛 조상들이 뗏목을 타고 거친 바다에 나가 위험한 항해 끝에 일본에 도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오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름 아닌 쓰시마(對馬) 섬 때문이다. 경남 함안 지역에 존재했던 아라국(561년 멸망) 후예들의 일본 이주를 연구한 정효운 동의대 교수에 따르면 쓰시마섬은 양국 해상 교류를 쉽게 만드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부산에서 멀리 쓰시마섬이 보이듯 가라쓰에서도 쓰시마섬이 보인다. 이는 일본으로 배를 타고 간 우리 조상들에게 정처 없는 항해가 아닌 정확한 목적지를 보면서 가는 항해였다는 것을 뜻한다. 정 교수는 “전라도 영산강이나 섬진강 하구 등의 한반도 서남해안에서 출발하여 남해안의 섬들을 거점으로 삼아 쓰시마섬까지 가는 해로가 백제가 이용한 주요 해상교통로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바다의 흐름인 해류(海流)도 교류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요즘도 가라쓰 해변을 거닐다보면 한국 상표가 붙은 생수 병이나 라면 봉지 같은 한국에서 떠내려온 각종 쓰레기를 볼 수 있다. 가라쓰 시 이데 겐조(井手憲三) 국제교류과장은 “그 옛날 한반도인들도 이 해류를 타고 일본 섬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했다. 가야 고구려 백제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일부는 자신들의 국가가 멸망하자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부흥의 꿈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멀리 보이는 일본 땅은 그들에게 또 다른 희망이었다. 그리고 한반도와 매우 비슷한 이곳 규슈에서 일본인들과 함께 새로운 나라 건설에 힘을 보탰던 것이다.가라쓰=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한국과 더불어 수천 년 동안 자포니카(단립종) 쌀을 주식으로 먹고 살아 온 나라는 일본이 유일하다. 둥근 모양의 자포니카 쌀은 밥을 지으면 차진 것이 특징으로 동남아에서 생산되는 길고 점성이 없는 인디카(장립종) 쌀과 밥맛이 확연히 다르다. 일본의 논농사는 2500∼2600년 전 한반도에서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벼농사 유적이 있는 곳은 규슈(九州) 사가(佐賀) 현 가라쓰(唐津) 시이다. 가라쓰 시는 규슈의 최대 도시 후쿠오카(福岡)에서 서남쪽으로 약 40km 떨어져 있다. 인구는 약 13만 명. 후쿠오카 공항에서 내려 JR 지쿠히(筑肥)선을 타고 환승 없이 1시간 만에 닿을 수 있었다. 가라쓰는 부산까지의 거리가 약 180km로 일본에서 한국과 가장 가까운 도시다. 가라쓰의 ‘가라’는 일본말로 ‘외국’이란 뜻으로 본래는 한국을 의미한다는 게 일본 학계의 정설이다. 현재 가라쓰를 표기하는 한자 ‘唐津’은 옛날에는 ‘한진(韓津)’이라고 쓰고 가라쓰라고 불렀는데, 이후 당나라와의 교역이 늘어나면서 ‘韓’ 자만 ‘唐’으로 바뀌었다고 일본 고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이런 지리적 요인 때문에 가라쓰는 오래전부터 한반도와의 교류가 활발했다. 훗날 조선 도자기가 처음 전해진 곳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전 병력을 집결시켰던 히젠 나고야 성도 이곳에 있다. 이런 지역에서 일본 최초의 벼농사 유적이 발견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유적이 발견된 가라쓰 나바타케에는 ‘마쓰로칸(末盧館)’이라는 이름의 벼농사 박물관이 있다. 기원전 가라쓰 지역에 존재했다는 마쓰로(末盧)란 원시 국가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마쓰로칸은 가라쓰 시내를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자락 안에 있었다. 가라쓰 역에서 걸어서 1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일본식 주택들이 늘어서 있는 동네에 높은 통나무 울타리로 가려져 있어 대문에 ‘마쓰로칸’이란 표지판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치기 쉬웠다. 현장에 와 보면 왜 옛날 사람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뒤에는 울창한 산이 있고, 1km 정도 평지를 사이에 두고 바다가 있다. 수렵과 채집, 어업이 가능한 데다 산골짜기로 흘러내려오는 물을 이용해 논농사를 짓기엔 최적의 장소로 보였다. 다지마 류타(田島龍太) 마쓰로칸 관장의 안내를 받으며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일요일인데도 찾아오는 관람객은 한 명도 없었다. 마쓰로칸은 땅에 기둥을 박고 그 위에 집을 짓는 고상식(高床式) 형태의 특이한 2층 목조 건물이다. 고상식 가옥은 맹수나 독충을 피하고 장마철 습기를 최소화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신석기시대 동굴을 벗어난 원시인들의 대표적 주거 형태이다. 나바타케 유적에서도 고상식 가옥 흔적으로 보이는 나무 말뚝이 2개 발견됐다. 박물관에 들어서니 입구에 이 일대에서 발굴된 검은색 탄화미(炭化米)를 확대경으로 볼 수 있게 전시해 놓았다. 나바타케 유적에서 발견된 탄화미는 기원전 600년경 재배된 것으로 분석됐다. 주요 전시물은 2층에 있었다. 2층 중앙에는 조몬시대(기원전 1만3000년∼기원전 300년) 말기 이 지역에 존재했던 마을을 상상으로 복원해 만든 큰 모형이 놓여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벼농사와 수렵, 축산업, 어업을 어떤 방식으로 진행했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이때 이미 제사를 지내는 풍습도 있었다. 마쓰로칸에 전시된 유물들을 보면 한반도 고유 문명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발굴된 독 항아리 사발 굽접시 등은 토기의 주둥이 부분에 검은 반점이 있거나 소뿔형 손잡이로 마무리한 점이 눈에 띈다. 이는 한반도와 규슈 지역을 중심으로 공통적으로 발굴되는 유물의 특징이다. 홈자귀라고 불리는 돌도끼나 손잡이 부분을 깊게 판 마제석검, 버들잎 모양의 석촉 등 한반도에서 고유하게 발굴되는 석기들도 이곳에서 나왔다. 다지마 관장은 석검 하나를 가리키며 “이것을 만든 재질의 돌은 일본에 없으니 한반도에서 넘어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마쓰로칸을 둘러보면 일본의 농경문화는 한반도에서 농경문화를 향유하던 주민들이 직접 일본 열도로 이주함으로써 개화한 문화라는 확신이 굳어진다. 박물관 안내문에도 ‘나바타케는 2500∼2600년 전 조선 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에 의해 벼농사가 전해진 곳으로, 이는 일본 벼 재배의 시작으로 알려졌다’라고 적혀 있다. 눈에 띄는 것은 이곳 유적 발굴 과정에 다양한 석기와 함께 세형단검, 청동거울 등 청동기문화 유적도 나온 것이다. 벼농사와 청동기의 도입은 수렵과 채집에 의존하던 일본의 신석기시대 조몬인들을 농경문화에 기반을 둔 야요이(彌生) 시대로 이끌었다. 동국대 윤명철 교수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벼농사를 전했다는 것은 단순한 식량 문제의 해결을 넘어서 농업 기술력은 물론이고 식량을 담는 그릇 문화(토기)에서부터 무기의 전파까지 이뤄지는 과정으로 원시인들을 촌락에 이어 국가로까지 만드는 결정적 계기”라며 “한반도가 일본에 벼농사를 전한 것은 명실상부하게 일본인들이 공동체를 만들게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전수”라고 했다. 그의 말은 나바타케 유적에서 산 하나를 넘어 약 40km 떨어진 일본 청동기 문화 유적 요시노가리(吉野ヶ里)에서 확인할 수 있다. (2회는 요시노가리 유적편으로 이어집니다.):: 탄화미(炭化米) ::불에 타거나 지층 안에서 자연 탄화된 쌀을 말한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을 통해 분석한 재배 연도는 벼농사의 기원과 전래를 밝혀내는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된다. 가라쓰=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미국 육군의 공식 홈페이지(www.army.mil)가 8일 정체불명의 인물에 의해 해킹을 당했다. 지금까지 미군 사령부 단위의 트위터나 유튜브가 해킹 당한 적은 있으나, 미군의 공식 홈페이지가 해킹 공격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맬컴 프로스트 미 육군 대변인은 이날 “군 홈페이지의 콘텐츠 중 일부가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을 확인했다”며 “적절한 보호조치를 취한 결과 정보 유출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육군 공식 홈페이지에는 군사 기밀이나 사적인 정보가 아닌 대중에게 공개되는 정보만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커들은 홈페이지에 일반인이 접속하면 ‘당신은 지금 해킹 당했다’ ‘테러리스트 훈련을 중단하라’ ‘당신의 사령관들이 나가서 싸워 죽을 사람들을 훈련하고 있다고 인정했다’는 등의 문구가 담긴 팝업 창이 뜨도록 했다. 해킹 공격 직후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지지하는 국제적 해커 집단인 ‘시리아전자군(SEA)’은 트위터를 통해 해킹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SEA는 최근 AFP통신과 같은 언론사와 월마트 등 기업의 웹사이트를 해킹하면서 악명을 떨쳤다. 특히 이번 사건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이날 독일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끝난 뒤 ‘해커와의 전쟁’을 강조한 직후 나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이 해커 공격에 취약한 컴퓨터 시스템을 갖고 있다”며 “방어 능력을 강화하는 데 훨씬 더 공격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앞서 4일에는 미국 인사관리처(OPM) 전산망이 해킹당해 공무원 400만 명 이상의 정보가 유출된 것으로 확인됐다. 미 사법당국은 이 해킹의 배후가 중국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나 중국은 “가설에 근거한 속단”이라며 반박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중국 창장(長江) 강에서 1일 밤 발생한 유람선 ‘둥팡즈싱(東方之星·동방의 별)’ 침몰 사고는 7일까지 승객과 승무원 456명 중 431명이 사망하고 11명이 실종됐으며 14명이 탈출하거나 구조된 것으로 일단락됐다. 이로써 이번 사고는 1948년 상하이(上海) 황푸(黃浦) 강에서 폭발해 2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증기선 ‘장야호’ 사고 이후 최악의 선박 사고로 기록됐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정치국 상무위원 회의에서 철저한 사고 조사를 지시한 만큼 사고 조사가 강도 높게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통신 내용과 기관 상태, 속력 등의 운항 자료를 자동 기록하는 장치인 ‘블랙박스’는 물론이고 사고 발생 시 주변 선박 등에 위험 상황을 긴급하게 알리는 ‘자동경보장치’가 침몰 선박에 장착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나면서 과학적인 사고 원인 조사는 힘들어졌다. 결국 사고 조사는 선장과 선원들의 진술에 의존할 것으로 보이는데 피해자 가족들이 조사 결과를 받아들일지는 불투명하다. 특히 △기상 당국이 사고 당일 7차례나 악천후를 경고했는데 운항을 강행한 이유 △1994년 건조 이후 수차례 진행된 선박 개조의 적법성 △2년 전 안전 검사에서 통과하지 못했는데 계속 운항한 경위 등이 조사의 초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 당국은 7일을 전통 관습에 따라 망자를 추도하는 ‘7일제(頭七)’ 행사일로 정하고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한 장소에서 묵념과 경적 울리기 등으로 애도를 표하도록 했다. 이날은 현장 접근 통제도 해제해 가족의 접근을 허용했다. TV 방송사들도 추도 분위기 조성을 위해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으로부터 7일부터 황금시간대 오락 프로그램의 방송을 잠정 중단하라는 지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 현장에서 가까운 후베이(湖北) 성 젠리(監利) 현의 위사(玉沙)초등학교 담장에는 이번 사고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글이 적힌 노란 리본이 가득 매달려 지난해 4월 세월호 사고 발생 이후 팽목항 주변을 연상케 했다. 중국군과 교통부 등은 생존 가능 시간(골든타임)인 72시간이 지나자 4일 밤부터 사실상 선체 인양 작업에 들어가 이튿날 오전 7시경부터 선체 바로 세우기 작업을 벌였다. 관영 중국중앙(CC)TV가 생중계하는 가운데 5000t급 크레인선 2척과 160t급 크레인선 1척이 선박 뒤집기 및 들어올리기에 나서 2시간 50분 만에 4층 구조의 유람선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당국은 시신 및 유품 유실을 막기 위해 강 하류 200m 지점에 그물을 설치했다. 중국 당국은 이번 사고 수습 과정에서 유족들에게 사고 및 희생자 정보를 신속히 제공하지 않거나 구조 작업에 유족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아 불만을 사기도 했다. 일부 관영 언론은 리커창(李克强) 총리가 신속히 현장에 도착해 지휘한 것을 칭송하다 일부 누리꾼들로부터 “이 마당에 누굴 칭송하냐”는 비난을 샀다.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 주성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