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주성하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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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관련 사이트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http://nambukstory.com)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zsh75@donga.com

취재분야

2025-11-18~2025-12-18
남북한 관계67%
칼럼23%
사회일반7%
경제일반3%
  • 무령왕 태어난 섬 동굴엔 초라한 판자 팻말만 덩그러니

    가카라시마는 후쿠오카에서 한 시간 동안 지하철을 타고 가라쓰까지 간 뒤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요부코 항으로 와 여객선을 타고 20분 정도 가야 한다. 항에 도착하니 사카모토 쇼이치로(坂本正一郞) 백제무령왕국제네트워크협의회 부회장이 기자를 맞아 주었다. 이 단체는 백제 문화와 무령왕을 매개체로 한일 민간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해 한일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단체다. 사카모토 부회장에게 “여객선에 탄 사람이 기자밖에 없었다”고 했더니 “본래 평소에도 사람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 거친 바다 동굴에서 태어난 무령왕 둘레가 약 12km인 이 섬 인구는 불과 108명. 어업이 번창했던 1952년엔 560명이 살기도 했지만 지금은 거의 떠났다고 한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주로 도미와 오징어잡이에 종사한다. 섬에 뚜렷한 관광자원도 없다 보니 낚시꾼들이나 오는 섬이라고 주민들은 전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百濟武寧王生誕地(백제무령왕생탄지)’라고 새겨진 커다란 기념비가 보였다. 2006년 6월 25일 충남 공주와 일본 가라쓰 시민들이 모금해 세운 높이 3.6m의 기념비는 무령왕릉 입구의 아치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돌은 한국 최고 화강암 산지인 전북 익산에서 다듬어 배로 실어왔다고 한다. 기념비를 지나 15분 정도 더 걸어가자 오늘의 답사 목적지인 무령왕이 태어났다는 해안 동굴이 나왔다. 섬사람들은 동굴이 있는 해변을 ‘오비야우라(オビヤ浦)’라고 불렀다. 오비는 일본어로 기모노 등을 묶는 허리띠를 의미하니 허리띠를 풀고 아이를 낳은 포구란 뜻이다. 오랜 기간 파도에 부딪친 탓인지 벼랑 아래쪽이 2m 정도 깎여 들어간 작은 굴이었다. 사카모토 부회장은 “예전에는 좀 더 깊었지만 풍화 작용으로 위가 무너져 내렸다”고 했다. 동굴 안 판자 팻말에는 ‘百濟第二十五代武寧王生誕の地(백제 제25대 무령왕이 태어난 곳)’라는 글이 적혀 있었고, 그 앞에는 누가 갖다 놓았는지 작은 화분과 술잔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작아서 “여기가 무령왕 탄생지 맞느냐”고 묻자 사카모토 부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 섬에 배가 정박하고 비를 피할 만한 곳은 이 동굴밖에 없다”고 했다. 동굴과 바다는 거친 자갈밭을 사이에 두고 불과 5m 정도 떨어져 있었다. 태풍이라도 불 때면 파도가 동굴 안까지 들어올 것 같았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1500여 년 전 이 낯선 땅 거친 야생 동굴에서 혹독한 산고(産苦)를 치르며 아이를 낳았을 백제국 왕비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짠했다. 이렇게 춥고 어두운 동굴에서 갓 세상 밖으로 나온 무령왕은 또 얼마나 두려웠을 것인가. ○ 왜국과 얼마나 친한 관계였으면 무령왕이 이곳에서 태어나 백제로 다시 돌아가 훗날 왕위에 올랐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지금도 건강한 성인 남자도 힘든 뱃길에 동생(곤지)이 탄 배에 임신한 자신의 왕비를 태웠던 무령왕의 아버지 개로왕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것일까…. 선뜻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해로(海路)가 그만큼 안전했다는 뜻도 되고 무엇보다 왜(倭)와의 친선관계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긴 했다. 동굴을 나와 50m 정도 걸어가니 갓 세상 밖으로 나온 무령왕이 첫 목욕을 했다는 우물이 나왔다. 계곡 옆에 깊이 수십 cm 구덩이를 파놓고 판자 몇 개로 대충 둘러친 형태를 띠고 있었다. 물맛이 어떨까 궁금해 떠서 마셔 보니 특별한 맛은 없었다. 가카라시마는 침체돼 가는 섬 경제를 살리기 위해 백제 왕이 태어난 곳이란 점을 부각시켜 한국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싶어 한다. 섬에선 2002년부터 매년 6월 첫 번째 토요일에 한일 관계자들이 참석하는 무령왕 탄생제가 열린다. 14회인 올해에도 한국에서 건너간 31명을 포함해 200여 명이 모였다. 올해는 첫 번째 토요일이 현충일임을 감안해 7일에 행사가 열렸다. 섬이 속한 가라쓰 시내에선 무령왕 관련 공연과 연극도 진행됐다. 한국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기 위한 노력에 고맙고 미안하고 또 친근감이 느껴졌다. 문제는 교통이었다. 후쿠오카에서 지하철 버스 여객선을 갈아타고 와야 한다. 다른 관광자원이나 편의시설도 별로 없는데 백제왕이 태어난 동굴을 구경하겠다고 한국 관광객이 한나절을 투자하기가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바다 건너를 바라보니 무령왕이 태어난 지 1000여 년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한반도를 바라보며 대륙 진출의 꿈을 꾸었다는 히젠 나고야 성이 있는 언덕이 보였다. 자신을 포함해 왕실 가족들이 수시로 오갈 만큼 가까웠던 왜와 먼 훗날 후손들이 동아시아 전쟁을 펼치게 될 줄 무령왕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역사는 국력이 강한 쪽에서 약한 쪽을 향해 영향력이 확장되게 마련이다.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이다.○ 백제 부흥을 이끈 왕 무령왕은 백제의 부흥을 이끈 왕이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장수(61세)하면서 외교 군사 경제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백제의 비약적인 성장을 이끌어 냈다. 종교와 사상 등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 중국 남조를 통해 수입된 유학과 도교 사상은 백제에서 다듬어져 일본으로 전해졌다. 국가를 운영할 제도와 이념에 목말라하던 일본의 지배층들은 백제를 통해 수혈되는 고급 학문과 사상에 크게 의지했으며 이러한 사조는 성왕 대까지 이어진다(권오영 저 ‘무령왕릉’·돌베개). 당시 백제와 왜의 긴밀한 교류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로도 확인됐다. 우선 시신을 모신 목관의 재료가 일본에서만 나는 금송(金松)이었다. 금송은 햇빛이 솔잎에 비칠 때 황금빛을 낸다고 해 붙여진 이름인데 일본어로는 ‘고야마키(高野전)’라고 한다. 곧게 잘 자랄 뿐만 아니라 내수성과 내습성이 좋아 일본에서는 후지와라 궁, 헤이조 궁 등의 중요 건축물 자재로 이용되었으며 고대에는 귀족층의 목관 재료로 널리 사용되었다. 실제로 무령왕이 태어난 동굴 바로 위쪽 산허리에는 빼곡히 우거진 잡관목을 걷어내고 심은 수령 2∼3년 된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띄었는데 나무 앞에 ‘高野전’라고 적힌 작은 팻말이 있었다. 권오영 교수는 책 ‘무령왕릉’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고대 일본인은 석관을 선호했고 목관을 사용하더라도 백제 것과는 달랐다. 따라서 무령왕 부부의 목관이 일본에서 제작되었다고 보기는 곤란하다. 통나무나 약간의 가공을 거친 상태로 백제로 들어왔을 것이다. 목관을 제작하려면 운반 후에도 건조, 가공, 못과 관 고리의 제작, 옻칠, 비단 제작 등 여러 공정이 필요하므로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또한 주인공이 돌아가신 뒤 곧바로 관에 모셔진 채 무덤 안으로 이동하였을 터이므로 생전에 미리 관을 만들어 두었을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당시 백제에서는 일본에서 금송을 입수하여 관리하는 체계가 이미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밖에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둥근고리자루칼(둥글게 처리된 끝 부분에 묶은 끈을 손목에 감싸 전투할 때 떨어뜨리지 않도록 고안된 칼)로 불리는 ‘환두대도(環頭大刀)’나 청동거울도 일본 내 고대 무덤에서 비슷한 것들이 발견되어 백제와 왜의 긴밀한 교류를 짐작하게 했다.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의 저자 김현구 선생은 책에서 “6세기 양국은 혈연적 관계로 묶였었다”면서 “개로왕의 동생 곤지뿐 아니라 여러 명의 백제 왕자들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왕녀와 결혼했을 가능성이 큰데 이는 당시 백제 왕족들이 일본인들이 이상향으로 삼던 선진국 최고 신분의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 일본서기 :: 720년에 편찬된 일본의 역사서. 일본의 건국 신화로부터 41대 지토 천황(持統天皇)이 사망한 697년까지 역사를 연대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사기’와 더불어 일본 고대사 연구의 핵심 사료이다. 가카라시마=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8회는 무령왕의 후손 간무 천황 이야기입니다.}

    • 2015-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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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 왕족은 고대 일본인들이 이상향으로 삼던 선진국 왕족”

    가카라시마는 후쿠오카에서 한 시간 동안 지하철을 타고 가라쓰까지 온 뒤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요부코 항으로 와 여객선을 타고 20분 정도 가야한다. 항에 도착하니 사카모토 쇼이치로(坂本 正一郞) 백제무령왕국제네트워크협의회 부회장이 기자를 맞아 주었다. 이 단체는 백제 문화와 무령왕을 매개체로 한일 민간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해 한일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단체다. 사카모토 부회장에게 “여객선에 탄 사람이 기자밖에 없었다”고 했더니 “본래 평소에도 사람이 없다”는 답을 돌아왔다. ●거친 바다 동굴에서 태어난 무령왕 둘레가 약 12㎞인 이 섬 인구는 불과 108명. 어업이 번창했던 1952년엔 560명이 살기도 했지만 지금은 거의 떠났다고 한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주로 도미와 오징어잡이에 종사한다. 섬에 뚜렷한 관광 자원도 없다보니 낚시꾼들이나 오는 섬이라고 주민들은 전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百濟武寧王生誕地(백제무령왕생탄지)’라고 새겨진 커다란 돌 기념비가 보였다. 2006년 6월 25일 충남 공주와 일본 가라쓰 시민들이 모금해 세운 높이 3.6m의 기념비는 무령왕릉 입구의 아치 모양을 본 따 만들었다. 돌은 한국 최고 화강암 산지인 전라북도 익산에서 다듬어 배로 실어왔다고 한다. 기념비를 지나 15분 정도 더 걸어가자 오늘의 답사 목적지인 무령왕이 태어났다는 해안가 동굴이 나왔다. 섬사람들은 동굴이 있는 해변을 ‘오비야우라(オビヤ浦)’라고 불렀다. 오비는 일본어로 기모노 등을 묶는 허리띠를 의미하니 허리띠를 풀고 아이를 낳은 포구란 뜻이다. 오랜 기간 파도에 부딪친 탓인지 벼랑 아래쪽이 약 2m 정도만 깎여 들어간 작은 굴이었다. 사카모토 부회장은 “예전에는 좀 더 깊었지만 풍화 작용으로 위가 무너져 막혔다”고 했다. 동굴 안 판자 팻말에는 ‘百濟第二十五代武寧王生誕の地(백제 제25대 무령왕이 태어난 곳)’라는 글이 적혀 있었고, 그 앞에는 누가 갖다 놓았는지 작은 화분과 술잔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작아서 “여기가 무령왕 탄생지 맞느냐”고 묻자 사카모토 부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 섬에 배가 정박하고 비를 피할만한 곳은 이 동굴 밖에 없다”고 했다. 동굴과 바다는 거친 자갈밭을 사이에 두고 불과 5m 정도 떨어져 있었다. 태풍이라도 불때면 파도가 동굴 안까지 들어올 것 같았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1500여 년 전 이 낯선 땅 거친 야생 동굴에서 혹독한 산고(産苦)를 치르며 아이를 낳았을 백제국 왕비 생각에 가슴 한 구석이 짠했다. 이렇게 춥고 어두운 동굴에서 갓 세상 밖으로 나온 무령왕은 또 얼마나 두려웠을 것인가. ●얼마나 왜국과 친한 관계였으면 무령왕이 이곳에서 태어나 백제로 다시 돌아가 훗날 왕위에 올랐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지금도 건강한 성인남자도 힘든 뱃길에 동생(곤지)이 탄 배에 임신한 자신의 왕비를 태웠던 무령왕의 아버지 개로왕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것일까…선뜻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해로(海路)가 그만큼 안전했다는 뜻도 되고 무엇보다 왜(倭)와의 친선관계가 지금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하는 확신이 들긴 했다. 동굴을 나와 50m 정도 걸어가니 갓 세상 밖으로 나온 무령왕이 첫 목욕을 했다는 우물이 나왔다. 계곡 옆에 깊이 수십cm 구덩이를 파놓고 판자 몇 개로 대충 둘러친 형태를 띠고 있었다. 물맛이 어떨까 궁금해 떠서 마셔 보니 특별한 맛은 없었다. 가카라시마는 침체돼 가는 섬 경제를 살리기 위해 백제왕이 태어난 곳이란 점을 부각시켜 한국 관광객들을 끌어 들이고 싶어 한다. 섬에선 2002년부터 매년 6월 첫 번째 토요일에 한일 관계자들이 참가하는 무령왕 탄생제가 열린다. 14회인 올해에도 한국에서 건너간 31명을 포함해 200여명이 모였다. 올해는 첫 번째 토요일이 현충일임을 감안해 7일에 행사가 열렸다. 섬이 속한 가라쓰 시내에선 무령왕 관련 공연과 연극도 진행됐다. 한국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기 위한 노력에 고맙고 미안하고 또 친근감이 느껴졌다. 문제는 교통이었다. 후쿠오카에서 지하철 버스 여객선을 갈아타고 와야 한다. 다른 관광자원이나 편의시설도 별로 없는데 백제왕이 태어난 동굴을 구경하겠다고 한국 관광객이 한나절을 투자하기가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바다 건너를 바라보니 무령왕이 태어난 지 꼭 1000여년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한반도를 바라보며 대륙진출의 꿈을 꾸었다는 히젠 나고야성이 있는 언덕이 보였다. 자신을 포함해 왕실 가족들이 수시로 오갈만큼 가까웠던 왜와 먼 훗날 후손들이 동아시아 대 전쟁을 펼치게 될 줄 무령왕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역사는 국력이 강한 쪽에서 약한 쪽을 향해 영향력이 확장되게 마련이다.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이다. ●백제 부흥을 이끈 왕 무령왕은 백제의 부흥을 이끈 왕이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장수(62세)하면서 외교 군사 경제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백제의 비약적인 성장을 이끌어 냈다. 종교와 사상 등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 중국 남조를 통해 수입된 유학과 도교사상은 백제에서 다듬어져 일본으로 전해졌다. 국가를 운영할 제도와 이념에 목말라하던 일본의 지배층들은 백제를 통해 수혈되는 고급 학문과 사상에 크게 의지했으며 이러한 사조는 성왕 대까지 이어진다(권오영 저 ‘무령왕능’). 당시 백제와 왜의 긴밀한 교류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로도 확인됐다. 우선 시신을 모신 목관의 재료가 일본에서만 나는 금송(金松)이었다. 금송은 햇빛이 솔잎에 비칠 때 황금빛을 낸다고 해 붙여진 이름인데 일본어로는 ‘고야마키(高野¤)’라고 한다. 곧게 잘 자랄 뿐만 아니라 내수성과 내습성이 좋아 일본에서는 후지와라 궁 헤이조궁 등의 중요 건축물 자재로 이용되었으며 고대에는 귀족층의 목관 재료로 널리 사용되었다. 실제로 무령왕이 태어난 동굴 바로 위쪽 산허리에는 빼곡히 우거진 잡관목을 걷어내고 심은 수령 2~3년 정도 된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띄었는데 나무 앞에 ‘고야마키(高野¤)’라고 적힌 작은 팻말이 있었다. 권오영 교수는 책 ‘무령왕릉’(돌배게)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고대 일본인은 석관을 선호했고 목관을 사용하더라도 백제 것과는 달랐다. 따라서 무령왕 부부의 목관이 일본에서 제작되었다고 보기는 곤란하다. 통나무나 약간의 가공을 거친 상태로 백제로 들어왔을 것이다. 목관을 제작하려면 운반 후에도 건조, 가공, 못과 관 고리의 제작, 옻칠, 비단 제작 등 여로 공정이 필요하므로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또한 주인공이 돌아가신 뒤 곧바로 관에 모셔진 채 무덤 안으로 이동하였을 터이므로 생전에 미리 관을 만들어 두었을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당시 백제에서는 일본에서 금송을 입수하여 관리하는 체계가 이미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밖에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둥근고리자루칼(둥글게 처리된 끝부분에 끈을 묶어 손목에 감싸 전투할 때 떨어뜨리지 않도록 고안된 칼)로 불리는 ‘환두대도(環頭大刀’나 청동거울도 일본 내 고대 무덤에서 거의 비슷한 것들이 발견되어 백제와 왜와의 긴밀한 교류를 짐작케 했다.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의 저자 김현구 선생은 책에서 “6세기 양국은 혈연적 관계로 묶였었다”면서 “개로왕의 동생 곤지 뿐 아니라 여러 명의 백제 왕자들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왕녀와 결혼했을 가능성이 큰데 이는 당시 백제 왕들이 일본인들이 이상향으로 삼던 선진국 최고 신분의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일본서기 : 720년에 편찬된 일본의 역사서. 일본의 건국 신화로부터 41대 지통천황(持統天皇)이 사망한 697년까지 역사를 연대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사기’와 더불어 일본 고대사 연구의 핵심 사료이다.8회는 무령왕의 후손 간무천황 이야기입니다.가카라시마=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5-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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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령왕릉 지석의 ‘사마왕’, 일본서기 기록과 완전 일치

    옛 문헌에는 백제인들이 왜(倭)로 갈 때 이용하던 주요 해상로로 쓰시마(對馬)∼이키(壹岐)∼가카라시마(加唐島)를 표지(標識) 섬으로 삼고 갔다는 기록이 많다. 2년 전인 2013년 6월 일본 규슈 국립박물관은 한일 역사학자들을 모아 옛날 백제인들과 왜인들이 오가던 이 바닷길을 검증하는 시도를 했었다. 그 결과 문헌 기록이 맞다는 결론을 얻었다. 실제 이키 섬을 출발하면 앞에 보이는 섬은 가카라시마뿐이다. 가카라시마는 수천 년 동안 우리 선조들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갈 때 나침반 역할을 했던 중요한 섬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 섬사람들에게는 전설처럼 ‘먼 옛날에 어떤 여인이 이 섬에서 아기를 낳고 샘물을 마셨다, 그때 태어난 아기는 훗날 매우 귀한 분이 되었다’는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다 720년 편찬된 일본서기에 그 ‘귀한 분’이 바로 ‘백제 무령왕’이라는 기록이 나오게 된다. 일본서기의 내용을 현대식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461년 4월 백제 개로왕(蓋鹵王·재위 455∼475년)이 일본 유랴쿠 천황(雄略天皇·재위 456∼479년)에게 백제 여인을 왕비로 추천해 보냈는데 그녀가 입궁하기 전 간통한 사실이 알려졌다. 유랴쿠 천황은 그녀를 죽인다. 개로왕은 동생 곤지에게 분노한 일왕을 달래고 나라 운영을 보좌하라고 지시한다. 곤지는 ‘임금의 명은 어길 수 없지만 형님의 여인(군부·君婦)을 주시면 명을 받들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개로왕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부인을 곤지에게 내주며 ‘여인이 산달이 가까워오고 있다. 만일 가는 도중에 아이를 낳으면 부디 배에 태워 속히 돌려보내도록 하여라’라고 했다. 개로왕과 곤지 두 사람은 작별인사를 나누고 곤지는 왜로 가는 항해에 나선다. 그러다 결국 임신한 여인이 곧 산통을 느꼈고 배는 가카라시마에 정박했다. 곧 아이가 태어났고 아이의 이름은 섬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사마(斯麻)’라 하였다. 일행이 배 한 척을 내어 아이를 돌려보내니 이가 곧 무령왕이다.” 일본어에서 한자 ‘사(斯)’는 ‘시’로 발음되기 때문에 시마 왕으로 읽으며 이는 곧 섬에서 태어난 ‘도왕(島王)’이라는 뜻이다. 일본서기의 내용들은 오랫동안 한국인들의 신뢰를 받지 못했다. 특히 왜왕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동생을 보내면서 임신한 자신의 부인을 딸려 보냈다는 대목은 현대적 시각으론 도저히 이해가 안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김현구 전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시 한국과 일본에는 임신한 부인을 총신(寵臣·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에게 하사하는 풍습이 있었다. 따라서 개로왕이 임신한 부인을 동생 곤지에게 하사했다는 기록도 못 믿을 이유가 없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일본서기의 기록은 더욱 설득력을 얻었다. 발굴된 무령왕릉 지석에 무령왕 이름이 ‘일본서기’와 완전히 일치하는 ‘사마(斯麻)’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곤지가 일본으로 가는 길에 태어난 아이가 무령왕이라는 이야기나 무령왕이 일본에서 태어난 뒤 귀국해 즉위했다는 것은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시계를 돌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되는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그해 7월 한여름 전국은 긴 장마로 신음하고 있었다. 삼국시대 백제 고분군이 밀집해 있던 충남 공주시 서북쪽 송산리(오늘날 금성동) 언덕에서는 문화재 발굴단이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7월 6일 배수로 공사를 하느라 무심코 땅을 파던 한 인부의 삽에 뭔가 단단한 물체가 부딪쳤다. 손으로 헤집어 보니 흙을 구워 만든 벽돌이었다. 그런데 한두 개가 아니었다. 조금씩 더 파고 들어가 보니 이 벽돌은 거대한 아치형 구조물의 일부였다. 처음엔 다들 기존에 발굴한 6호 고분의 연장이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이 구조물이 또 다른 무덤의 입구라는 것을 알고 현장은 충격에 빠진다. 이튿날 서둘러 김원용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단장으로 하여 문화재관리국 학예직들로 발굴단이 구성되어 공주에 집결했다.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자 무덤은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입구는 벽돌 구조물로 막혀 있었고 그 틈을 석회가 단단히 봉하고 있었다. 석회를 제거하고 입구 아래까지 내려간 시간이 오후 4시. 누구의 무덤인지는 모르겠으나 백제 왕릉급이 분명해 보이는 옛 무덤 앞에서 발굴단은 왕의 영면(永眠)을 방해하는 것을 사죄하는 위령제를 올렸다. 위령제라고 해봐야 흰 종이 위에 북어 세 마리, 수박 한 통, 막걸리를 올려놓는 게 전부였다. 맨 윗단의 벽돌 두 장을 제거하는 순간 마치 한증막처럼 흰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1400년 넘게 밀폐 상태로 있던 무덤 내부의 찬 공기가 바깥의 더운 공기와 만나 일어난 현상이었다. 숨을 죽이고 들어간 발굴단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컴컴하고 깊은 연도(羨道·고분 입구에서 시신을 안치한 방까지 이르는 길)였다. 연도 중간쯤 엽전이 올려져 있는 석판으로 다가가자 석판 위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 발굴단은 다시 한번 놀랐다. 사마왕은 다름 아닌 백제 무령왕(武寧王·461∼523)이었기 때문이다.(이상은 권오영 씨의 책 ‘무령왕릉’에 나온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4년 전 무령왕릉이 140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후손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은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긴장과 박진감이 넘친다. 일제강점기 전국 각지의 고분이 파헤쳐지고 도굴꾼들이 활개를 치던 상황에서도 용케 완전한 형태로 살아남은 고분이 있다는 것 자체도 신기했지만 무덤의 주인이 꺼져가던 백제의 맥박을 다시 힘차게 돌려놓았던 무령왕이었다는 게 알려지자 한여름 전국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당시에는 먹고살기에도 바빴던 형편이라 조상들이 남긴 숭고한 문화유산을 감당할 수준이 못 됐다는 게 권오영 씨의 말이다. “지석(誌石)을 통해 무덤 주인이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이라는 발표가 나오자 현장은 집단 패닉 상태에 빠졌다. … 보도진들은 앞다투어 무덤 안으로 들어가려 했고 무덤 안에 들어가 유물을 촬영하다가 청동 숟가락을 밟아 부러뜨리는 불상사마저 일어났다. 밀려오는 구경꾼들을 통제해야 할 경찰마저 ‘나도 한번 구경하자’며 앞장설 정도였다.” 하기야 그때만 해도 그만큼 중요한 유적을 우리 손으로 발굴 조사한 경험도 없을뿐더러 발굴 조사와 관련된 행정조치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을 터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한국 못지않게 무령왕릉 발굴 소식에 흥분한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 언론들은 발굴 시점부터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이듬해까지 현장 답사기를 싣고 관련 심포지엄을 열면서 발굴의 의미를 찾고자 부산했다. 발굴 직후 아사히신문은 ‘백제 왕릉 발굴조사는 역사적인 대발굴’이라면서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백제 성왕의 아버지이면서 일본서기에도 이름이 나오는 백제의 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이라고 판명됐다’고 대서특필했다. 동시에 갑자기 일본인들의 눈길이 쏠린 곳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무령왕이 태어난 섬 가카라시마였다. 기자는 이달 초 가카라시마를 향해 길을 나섰다.:: 지석(誌石) ::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이나 업적, 자손 등을 기록하여 묻은 판석이나 도판을 말한다. 무덤의 내역을 밝힐 수 있기 때문에 고분 발굴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7회는 가카라시마 답사기입니다.}

    • 2015-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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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북한産 슈퍼 비아그라의 미스터리한 효능

    “노년이 먹으면 정력이 세지고, 아이가 먹으면 성장호르몬이 많이 분비된다.” 북한 외국인용 잡지에 최근 실린 정력제 광고 내용이다. ‘체력활성 영양알’이란 상표가 붙은 이 약의 효능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근육 강화, 학습 집중력 제고, 피곤 해소, 멀미와 빈혈에 특효, 안정적 숙면 보장” 등 다양하다. 이에 영국 데일리메일은 15일 ‘김정필: 북한의 슈퍼 비아그라’라는 기사를 썼다. 김정필은 ‘김정은’과 ‘알약(pill)’의 합성어다. 물론 기사는 “정력 강화와 잠에 곯아떨어지는 효과는 아마도 같은 시간에 나타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등 비아냥 일색이다. 나도 광고를 보고 이 좋은 약을 김정은은 챙겨 먹는지가 궁금해졌다. 김정은은 지난해 11월 정성제약공장을 시찰했는데, 이 공장에서 비아그라가 생산된다. 이왕 간 김에 약 먹는 장면까지 연출했다면 그만한 광고가 어디 있을까 싶다. 참, 좋은 소리 다 적으면서 남쪽 사람들이 솔깃할 ‘살까기(다이어트의 북한 말)’ 효능이 있다고는 왜 적지 않았을까. 차마 못쓰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만약 근력 강화 효과가 정말 있다면 외국산 근육 강화제를 먹고 호르몬 부작용을 앓는다는 김정철은 참 억울하겠다. “진작 이런 약이 나왔다면 지금쯤 ‘위대한 영도자 김정철 동지’가 됐을 텐데” 하고 말이다. 그래도 이번 광고는 북한의 원조 슈퍼 비아그라라고 할 수 있는 ‘네오비아그라 Y.R.(북에선 ‘청춘1호’라고 소개한다)’ 설명서보다는 노골적이지 않다. 네오비아그라의 설명서에는 ‘2차 이상의 성교 시 발기복귀시간이 15분 주기로 짧아 남녀가 원하는 대로 4∼8회의 연속되는 성교를 실현할 수 있는 다회성기능부활제. 발기지속시간 24∼36시간. 피로감은 1회 성교와 6회 성교가 같습니다. 피로가 회복되며 활력이 넘칩니다’라고 적혀 있다. 설명서에 나와 있는 여성 성기능 개선 효과까지 적으려니 민망해서 여기서 그만. 여기에다 “콩팥염 허리아픔 어깨아픔 간염 관절염 뇌동맥경화증에도 효과가 있으며 부작용은 전혀 없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이 약을 2006년 당시 한국 식품의약품안전청이 분석해 보았더니 중금속과 마약 성분이 검출됐다. 수은이 기준치의 7.5배가 나왔고, 향정신성의약품으로 분류돼 있는 디아제팜도 검출됐다. 당시만 해도 평양과 금강산을 가는 남쪽 사람이 많을 때였다. 방북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북한 기념품 가게에서 아리따운 여성 안내원이 “선생님, 이 약 한번 드셔 보시라요. 정력이 끝내줍니다” 하며 붙잡던 경험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남쪽의 분석 결과 발표 이후 북한은 잇달아 신제품을 내놓았고, 생약 성분으로 만들어 부작용이 없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상표명도 ‘양춘삼록’ ‘청활’ ‘천궁백화’ ‘네오비아그라’ 등 다양하다. 요즘 이런 슈퍼 비아그라는 북한의 주력 외화벌이 상품으로 떠오르고 있다. 물론 북한은 만병통치 건강식품이라고 주장하지만 대다수가 정력제 기능을 강조하고 있어 비아그라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이런 약들은 해외 북한 식당에서 예외 없이 팔고 있다. 술 팔고 약 팔고 일석이조인 셈이다. 원가를 알 수 없는 캡슐 하나가 5달러 이상에 거래된다. 중국 러시아 동남아지역이 요즘 북한산 비아그라의 집중 공략지이다. 지난달 방글라데시 다카의 북한 식당 여성 지배인이 비아그라와 술을 불법 판매한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 이런 북한을 보면 1992년 한중 수교 직후 한국에 건너온 조선족들이 백두산에서 나는 특효 명약이라면서 웅담이니 녹용이니 경쟁적으로 갖고 왔던 것이 연상된다. 조선족들이 북한에 가면 “내가 왕년에 웅담 좀 팔아봤는데 말이야” 하며 할 말이 많을 듯하다. 북한이 비아그라와 건강식품을 내세우며 약장사하는 걸 보면 솔직히 진짜 웃기는 일이다. 성교육은 고사하고 영화 속 키스 장면조차 허용되지 않는 곳, 주민 건강상태는 세계적으로도 열악한 북한이 믿기 힘든 슈퍼 비아그라와 건강식품을 개발했다니 말이다. 어머니날까지 새로 만들며 출산을 독려하는 것도 미스터리한 일이다. 피임도 힘들고, 낙태는 허용조차 안 되는데, 36시간 효능이 유지된다는 저 슈퍼 비아그라를 남녀노소에게 나눠주면 북한에 아기 울음소리가 넘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진짜 효능이 있다 해도 문제이긴 하다. 살림집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북한은 작은 집에 부모 자식 3대가 함께 사는 게 일반적이다. 네오비아그라를 먹고 도대체 어찌 살라는 건지…. 특히 젊은 연인은 절대 복용 금지. 북한엔 모텔도 없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5-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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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반도인 어떻게 日에 갔을까

    지금으로부터 1만여 년 전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때쯤 중국 대만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하나의 땅덩어리였다. 빙하기가 끝나 수천 년 동안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낮은 지대에 바닷물이 차오르기 시작하면서 서해가 생겨나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땅은 반도가 됐고, 대한해협이 생겨나 동해가 태평양과 연결되면서 일본은 섬나라가 됐다. 일본이 떨어져 나간 뒤에도 한반도와 일본의 교류는 이어졌다.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규슈는 일본 열도와 한반도를 이어주는 통로였다. 규슈 가라쓰 시에 가면 우리 옛 조상들이 뗏목을 타고 거친 바다에 나가 위험한 항해 끝에 일본에 도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오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름 아닌 쓰시마(對馬) 섬 때문이다. 경남 함안 지역에 존재했던 아라국(561년 멸망) 후예들의 일본 이주를 연구한 정효운 동의대 교수에 따르면 쓰시마섬은 양국 해상 교류를 쉽게 만드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부산에서 멀리 쓰시마섬이 보이듯 가라쓰에서도 쓰시마섬이 보인다. 이는 일본으로 배를 타고 간 우리 조상들에게 정처 없는 항해가 아닌 정확한 목적지를 보면서 가는 항해였다는 것을 뜻한다. 정 교수는 “전라도 영산강이나 섬진강 하구 등의 한반도 서남해안에서 출발하여 남해안의 섬들을 거점으로 삼아 쓰시마섬까지 가는 해로가 백제가 이용한 주요 해상교통로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바다의 흐름인 해류(海流)도 교류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요즘도 가라쓰 해변을 거닐다보면 한국 상표가 붙은 생수 병이나 라면 봉지 같은 한국에서 떠내려온 각종 쓰레기를 볼 수 있다. 가라쓰 시 이데 겐조(井手憲三) 국제교류과장은 “그 옛날 한반도인들도 이 해류를 타고 일본 섬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했다. 가야 고구려 백제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일부는 자신들의 국가가 멸망하자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부흥의 꿈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멀리 보이는 일본 땅은 그들에게 또 다른 희망이었다. 그리고 한반도와 매우 비슷한 이곳 규슈에서 일본인들과 함께 새로운 나라 건설에 힘을 보탰던 것이다.가라쓰=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5-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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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 지명 ‘韓津’ 쓰던 가라쓰, 日엔 없던 볍씨-석검 고스란히

    한국과 더불어 수천 년 동안 자포니카(단립종) 쌀을 주식으로 먹고 살아 온 나라는 일본이 유일하다. 둥근 모양의 자포니카 쌀은 밥을 지으면 차진 것이 특징으로 동남아에서 생산되는 길고 점성이 없는 인디카(장립종) 쌀과 밥맛이 확연히 다르다. 일본의 논농사는 2500∼2600년 전 한반도에서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벼농사 유적이 있는 곳은 규슈(九州) 사가(佐賀) 현 가라쓰(唐津) 시이다. 가라쓰 시는 규슈의 최대 도시 후쿠오카(福岡)에서 서남쪽으로 약 40km 떨어져 있다. 인구는 약 13만 명. 후쿠오카 공항에서 내려 JR 지쿠히(筑肥)선을 타고 환승 없이 1시간 만에 닿을 수 있었다. 가라쓰는 부산까지의 거리가 약 180km로 일본에서 한국과 가장 가까운 도시다. 가라쓰의 ‘가라’는 일본말로 ‘외국’이란 뜻으로 본래는 한국을 의미한다는 게 일본 학계의 정설이다. 현재 가라쓰를 표기하는 한자 ‘唐津’은 옛날에는 ‘한진(韓津)’이라고 쓰고 가라쓰라고 불렀는데, 이후 당나라와의 교역이 늘어나면서 ‘韓’ 자만 ‘唐’으로 바뀌었다고 일본 고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이런 지리적 요인 때문에 가라쓰는 오래전부터 한반도와의 교류가 활발했다. 훗날 조선 도자기가 처음 전해진 곳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전 병력을 집결시켰던 히젠 나고야 성도 이곳에 있다. 이런 지역에서 일본 최초의 벼농사 유적이 발견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유적이 발견된 가라쓰 나바타케에는 ‘마쓰로칸(末盧館)’이라는 이름의 벼농사 박물관이 있다. 기원전 가라쓰 지역에 존재했다는 마쓰로(末盧)란 원시 국가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마쓰로칸은 가라쓰 시내를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자락 안에 있었다. 가라쓰 역에서 걸어서 1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일본식 주택들이 늘어서 있는 동네에 높은 통나무 울타리로 가려져 있어 대문에 ‘마쓰로칸’이란 표지판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치기 쉬웠다. 현장에 와 보면 왜 옛날 사람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뒤에는 울창한 산이 있고, 1km 정도 평지를 사이에 두고 바다가 있다. 수렵과 채집, 어업이 가능한 데다 산골짜기로 흘러내려오는 물을 이용해 논농사를 짓기엔 최적의 장소로 보였다. 다지마 류타(田島龍太) 마쓰로칸 관장의 안내를 받으며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일요일인데도 찾아오는 관람객은 한 명도 없었다. 마쓰로칸은 땅에 기둥을 박고 그 위에 집을 짓는 고상식(高床式) 형태의 특이한 2층 목조 건물이다. 고상식 가옥은 맹수나 독충을 피하고 장마철 습기를 최소화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신석기시대 동굴을 벗어난 원시인들의 대표적 주거 형태이다. 나바타케 유적에서도 고상식 가옥 흔적으로 보이는 나무 말뚝이 2개 발견됐다. 박물관에 들어서니 입구에 이 일대에서 발굴된 검은색 탄화미(炭化米)를 확대경으로 볼 수 있게 전시해 놓았다. 나바타케 유적에서 발견된 탄화미는 기원전 600년경 재배된 것으로 분석됐다. 주요 전시물은 2층에 있었다. 2층 중앙에는 조몬시대(기원전 1만3000년∼기원전 300년) 말기 이 지역에 존재했던 마을을 상상으로 복원해 만든 큰 모형이 놓여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벼농사와 수렵, 축산업, 어업을 어떤 방식으로 진행했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이때 이미 제사를 지내는 풍습도 있었다. 마쓰로칸에 전시된 유물들을 보면 한반도 고유 문명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발굴된 독 항아리 사발 굽접시 등은 토기의 주둥이 부분에 검은 반점이 있거나 소뿔형 손잡이로 마무리한 점이 눈에 띈다. 이는 한반도와 규슈 지역을 중심으로 공통적으로 발굴되는 유물의 특징이다. 홈자귀라고 불리는 돌도끼나 손잡이 부분을 깊게 판 마제석검, 버들잎 모양의 석촉 등 한반도에서 고유하게 발굴되는 석기들도 이곳에서 나왔다. 다지마 관장은 석검 하나를 가리키며 “이것을 만든 재질의 돌은 일본에 없으니 한반도에서 넘어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마쓰로칸을 둘러보면 일본의 농경문화는 한반도에서 농경문화를 향유하던 주민들이 직접 일본 열도로 이주함으로써 개화한 문화라는 확신이 굳어진다. 박물관 안내문에도 ‘나바타케는 2500∼2600년 전 조선 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에 의해 벼농사가 전해진 곳으로, 이는 일본 벼 재배의 시작으로 알려졌다’라고 적혀 있다. 눈에 띄는 것은 이곳 유적 발굴 과정에 다양한 석기와 함께 세형단검, 청동거울 등 청동기문화 유적도 나온 것이다. 벼농사와 청동기의 도입은 수렵과 채집에 의존하던 일본의 신석기시대 조몬인들을 농경문화에 기반을 둔 야요이(彌生) 시대로 이끌었다. 동국대 윤명철 교수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벼농사를 전했다는 것은 단순한 식량 문제의 해결을 넘어서 농업 기술력은 물론이고 식량을 담는 그릇 문화(토기)에서부터 무기의 전파까지 이뤄지는 과정으로 원시인들을 촌락에 이어 국가로까지 만드는 결정적 계기”라며 “한반도가 일본에 벼농사를 전한 것은 명실상부하게 일본인들이 공동체를 만들게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전수”라고 했다. 그의 말은 나바타케 유적에서 산 하나를 넘어 약 40km 떨어진 일본 청동기 문화 유적 요시노가리(吉野ヶ里)에서 확인할 수 있다. (2회는 요시노가리 유적편으로 이어집니다.):: 탄화미(炭化米) ::불에 타거나 지층 안에서 자연 탄화된 쌀을 말한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을 통해 분석한 재배 연도는 벼농사의 기원과 전래를 밝혀내는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된다. 가라쓰=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5-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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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번엔 육군 홈피… 해킹에 또 뚫린 美

    미국 육군의 공식 홈페이지(www.army.mil)가 8일 정체불명의 인물에 의해 해킹을 당했다. 지금까지 미군 사령부 단위의 트위터나 유튜브가 해킹 당한 적은 있으나, 미군의 공식 홈페이지가 해킹 공격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맬컴 프로스트 미 육군 대변인은 이날 “군 홈페이지의 콘텐츠 중 일부가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을 확인했다”며 “적절한 보호조치를 취한 결과 정보 유출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육군 공식 홈페이지에는 군사 기밀이나 사적인 정보가 아닌 대중에게 공개되는 정보만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커들은 홈페이지에 일반인이 접속하면 ‘당신은 지금 해킹 당했다’ ‘테러리스트 훈련을 중단하라’ ‘당신의 사령관들이 나가서 싸워 죽을 사람들을 훈련하고 있다고 인정했다’는 등의 문구가 담긴 팝업 창이 뜨도록 했다. 해킹 공격 직후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지지하는 국제적 해커 집단인 ‘시리아전자군(SEA)’은 트위터를 통해 해킹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SEA는 최근 AFP통신과 같은 언론사와 월마트 등 기업의 웹사이트를 해킹하면서 악명을 떨쳤다. 특히 이번 사건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이날 독일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끝난 뒤 ‘해커와의 전쟁’을 강조한 직후 나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이 해커 공격에 취약한 컴퓨터 시스템을 갖고 있다”며 “방어 능력을 강화하는 데 훨씬 더 공격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앞서 4일에는 미국 인사관리처(OPM) 전산망이 해킹당해 공무원 400만 명 이상의 정보가 유출된 것으로 확인됐다. 미 사법당국은 이 해킹의 배후가 중국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나 중국은 “가설에 근거한 속단”이라며 반박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5-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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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블랙박스 없어 침몰원인 규명 난관

    중국 창장(長江) 강에서 1일 밤 발생한 유람선 ‘둥팡즈싱(東方之星·동방의 별)’ 침몰 사고는 7일까지 승객과 승무원 456명 중 431명이 사망하고 11명이 실종됐으며 14명이 탈출하거나 구조된 것으로 일단락됐다. 이로써 이번 사고는 1948년 상하이(上海) 황푸(黃浦) 강에서 폭발해 2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증기선 ‘장야호’ 사고 이후 최악의 선박 사고로 기록됐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정치국 상무위원 회의에서 철저한 사고 조사를 지시한 만큼 사고 조사가 강도 높게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통신 내용과 기관 상태, 속력 등의 운항 자료를 자동 기록하는 장치인 ‘블랙박스’는 물론이고 사고 발생 시 주변 선박 등에 위험 상황을 긴급하게 알리는 ‘자동경보장치’가 침몰 선박에 장착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나면서 과학적인 사고 원인 조사는 힘들어졌다. 결국 사고 조사는 선장과 선원들의 진술에 의존할 것으로 보이는데 피해자 가족들이 조사 결과를 받아들일지는 불투명하다. 특히 △기상 당국이 사고 당일 7차례나 악천후를 경고했는데 운항을 강행한 이유 △1994년 건조 이후 수차례 진행된 선박 개조의 적법성 △2년 전 안전 검사에서 통과하지 못했는데 계속 운항한 경위 등이 조사의 초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 당국은 7일을 전통 관습에 따라 망자를 추도하는 ‘7일제(頭七)’ 행사일로 정하고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한 장소에서 묵념과 경적 울리기 등으로 애도를 표하도록 했다. 이날은 현장 접근 통제도 해제해 가족의 접근을 허용했다. TV 방송사들도 추도 분위기 조성을 위해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으로부터 7일부터 황금시간대 오락 프로그램의 방송을 잠정 중단하라는 지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 현장에서 가까운 후베이(湖北) 성 젠리(監利) 현의 위사(玉沙)초등학교 담장에는 이번 사고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글이 적힌 노란 리본이 가득 매달려 지난해 4월 세월호 사고 발생 이후 팽목항 주변을 연상케 했다. 중국군과 교통부 등은 생존 가능 시간(골든타임)인 72시간이 지나자 4일 밤부터 사실상 선체 인양 작업에 들어가 이튿날 오전 7시경부터 선체 바로 세우기 작업을 벌였다. 관영 중국중앙(CC)TV가 생중계하는 가운데 5000t급 크레인선 2척과 160t급 크레인선 1척이 선박 뒤집기 및 들어올리기에 나서 2시간 50분 만에 4층 구조의 유람선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당국은 시신 및 유품 유실을 막기 위해 강 하류 200m 지점에 그물을 설치했다. 중국 당국은 이번 사고 수습 과정에서 유족들에게 사고 및 희생자 정보를 신속히 제공하지 않거나 구조 작업에 유족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아 불만을 사기도 했다. 일부 관영 언론은 리커창(李克强) 총리가 신속히 현장에 도착해 지휘한 것을 칭송하다 일부 누리꾼들로부터 “이 마당에 누굴 칭송하냐”는 비난을 샀다.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 주성하 기자}

    • 2015-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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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둥팡즈싱’ 침몰사고로 431명 사망·11명 실종, 지금 중국은…

    중국 창장(長江) 강에서 1일 밤 발생한 유람선 ‘둥팡즈싱(東方之星·동방의 별)’ 침몰 사고는 7일까지 승객과 승무원 456명 중 431명이 사망하고 11명이 실종됐으며 14명이 탈출하거나 구조된 것으로 일단락됐다. 이로써 이번 사고는 1948년 상하이(上海) 황푸(黃浦)강에서 폭발해 2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증기선 ‘장야호’ 사고 이후 최악의 선박 사고로 기록됐다.○사고 원인 조사 난항 예상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정치국 상무위원 회의에서 철저한 사고 조사를 지시한 만큼 사고 조사가 강도 높게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통신 내용과 기관 상태, 속력 등의 정보를 자동 기록하는 항해자료 기록장치인 ‘블랙박스’는 물론 사고 발생시 주변 선박 등에 위험 상황을 긴급하게 알리는 ‘자동경보장치’가 침몰 선박에 탑재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나면서 과학적인 사고 원인 조사는 힘들어졌다. 결국 사고 조사는 선장과 선원들에 대한 진술에 의존할 것으로 보이는데 피해자 가족들이 조사 결과를 받아들일지는 불투명하다. 특히 △기상 당국이 사고 당일 7차례나 악천후를 경고했는데 항해를 강행한 이유 △1994년 건조 이후 수차례 진행된 선박 개조의 적법성 △2년 전 안전 검사에서 통과하지 못했는데 계속 운항한 경위 등이 조사의 초점이 될 전망이다.○유족 현장 방문 등 추모 행사 허용 중국 당국은 7일을 전통 관습에 따라 망자를 추도하는 ‘7일제(頭七)’ 행사일로 정하고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한 장소에서 묵념과 경적 울리기 등으로 애도를 표하도록 했다. 이날은 현장 접근 통제도 해제해 가족의 접근을 허용했다. TV방송들도 추도 분위기 조성을 위해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으로부터 7일부터 황금시간대 오락 프로그램의 방송을 잠정 중단하라는 지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 현장에서 가까운 후베이(湖北) 성 젠리(監利) 현의 위사(玉沙)초등학교 담장에는 이번 사고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글이 적힌 노란 리본이 가득 매달려 지난해 4월 세월호 사고 발생 이후 팽목항 주변을 연상케 했다. ○신속하게 이뤄진 선체 인양 및 시신 수습 중국군과 교통부 등은 생존 가능 시간(골든 타임)인 72시간이 지나자 4일 밤부터 사실상 선체 인양 작업에 들어가 이튿날 오전 7시경부터 선체 바로 세우기 작업을 벌였다. 관영 CCTV가 생중계하는 가운데 5000t급 크레인선 2척과 160t급 크레인선 1척이 선박 뒤집기 및 들어올리기에 나서 2시간 50분 만에 4층 구조의 유람선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당국은 시신 및 유품 유실을 막기 위해 강 하류 200m 지점에 그물을 설치했다. 중국 당국은 이번 사고 수습 과정에서 유족들에게 사고 및 희생자 정보를 신속히 제공하지 않거나 구조 작업에 유족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아 불만을 사기도 했다. 일부 관영 언론은 리커창(李克强) 총리가 신속히 현장에 도착해 지휘한 것을 칭송하다 일부 누리꾼들로부터 “이 마당에 누굴 칭송하냐”는 비난을 샀다.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5-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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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인 수학천재 김정윤양, 하버드-스탠퍼드 동시입학

    수학과 컴퓨터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한국인 천재 여학생이 미국 최고 대학들의 러브콜을 한 몸에 받고 있어 화제다. 주인공은 미국 최고의 공립학교 중 하나인 버지니아 주 토머스 제퍼슨 과학고 12학년인 김정윤(영어명 세라 김·18·사진) 양. 하버드대는 올해 졸업 예정인 김 양을 일찌감치 지난해 말 조기 합격시켰다. 스탠퍼드대도 이에 질세라 교수들이 총동원돼 김 양에게 매달렸다. 결국 김 양은 두 학교에서 모두 공부해 본 뒤 졸업할 대학을 결정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2년은 스탠퍼드대에서, 2∼3년은 하버드대에서 각각 공부할 예정이다. 연간 6만 달러에 이르는 학비도 전액 학교 측이 부담한다. 내로라하는 명문대들이 김 양을 놓고 경쟁하는 것은 그가 수학경시대회 등에서 놀라운 성과를 보였기 때문이다. 김 양은 11학년 때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주최한 리서치 프로그램에서 ‘컴퓨터 연결성에 대한 수학적 접근’이란 주제의 발표를 했는데 대학 교수도 풀기 힘든 고난도의 과제를 해결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 발표 이후 유수의 대학들은 교수들을 통해 자신의 학교에 와달라는 메시지를 꾸준히 보내는 등 치열한 스카우트전을 벌였다. 스탠퍼드대의 제이컵 폭스 교수는 김 양에게 “너의 수학적 증명이 완성되면 전 세계는 또 한 번의 거대한 컴퓨터 혁명을 맞게 될 수도 있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미국 최고의 수학자인 아서 루빈 박사도 김 양을 직접 찾아 격려했고,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인 마크 저커버그도 김 양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김 양은 학점 받기가 어렵다는 토머스 제퍼슨 과학고에서 4년 내내 줄곧 A학점을 유지해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5-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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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서울 수돗물보다 맛있다는 평양 수돗물의 비밀

    “어, 곱등어(돌고래)가 살아 있네.” 화면을 되돌려 봐도 분명 곱등어가 맞았다. 미국 CNN 방송이 지난달 평양에 들어가 찍어온 영상 중에는 능라인민유원지 곱등어관의 모습도 담겨 있었다. 지난해 말 한국의 일부 언론에서는 김정은이 야심 차게 만든 곱등어관에서 스파르타식 훈련과 수질 오염 등으로 인해 돌고래들이 폐사했다는 소문이 평양에 돌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래서 돌고래 대신 여성들이 수중발레 공연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 죽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혹은 그 보도 이후에 돌고래를 다시 사왔을지도 모른다. 북한은 자신들에 대한 잘못된 소문을 불식시키려 지난달 CNN 방송을 불러 여기저기를 보여주었다. 곱등어관을 구경시켜준 속내도 어쩌면 “봐, 돌고래가 살아 있잖아” 하는 메시지를 남쪽에 보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돌고래가 살아 있다고 써준 한국 언론은 당연히 없다. 북한 안내원은 CNN 특파원에게 “대북 제재 때문에 돌고래를 사올 수 없어 어려움을 느낀다”고 했다. 서울에선 8억 원이 넘는 돈을 들여 돌고래를 바다로 되돌려 보내는데, 평양에선 돈이 있어도 돌고래를 살 수 없다고 푸념을 한다. 참고로 훈련되기 전 돌고래는 1마리에 2만 달러, 훈련되면 20만 달러 정도에 거래된다고 한다. 돌고래를 찾다 보니 내가 본 어느 돌고래 쇼장보다 훨씬 큰 수조가 눈에 들어온다. 그 넓은 수조엔 바닷물이 찰랑찰랑 가득 차 있었다. 이 바닷물은 2012년 남포에서 평양까지 60여 km 구간에 주철관을 묻고 끌어온 것이다. 그때도 곱등어 쇼를 위해 막대한 돈을 들여 바닷물을 평양까지 끌고 왔다고 보도한 언론들이 있었다. 하지만 바닷물을 평양까지 끌고 온 목적은 곱등어관에 공급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평양 시민들의 식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과거 평양도 수돗물 소독에 외국과 똑같이 액체염소와 표백제를 사용했다. 하지만 북한의 경제난 때문에 염소 공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수돗물을 마시고 배탈이 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양 상하수도관리국 연구사들은 바닷물을 활용한 소독방법을 연구 도입했다. 소금기가 많은 바닷물을 전기 분해하면 강력한 살균력을 갖는 산성수와 알칼리수가 나오는데, 이를 민물에 섞어 소독제로 활용하는 것이다. 새 소독방법을 도입하고 바닷물을 남포에서 끌고 오기까지 연구사들은 국가 지원이 제대로 되지 않아 엄청나게 고생했다고 한다. 북한이 많이 부패돼 있는 와중에도, 시민들을 위해 뇌물 받지도 못하는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양심적 과학자들이 있다는 점이 반갑다. 하지만 소독을 잘한다고 해서 깨끗한 물이 모든 평양 시민에게 공급되는 것은 아니다. 수도관이 워낙 노후해 장마철에 흙탕물이 나오는 지역도 많다. 그래서 요즘엔 평양에서 수도관 교체 공사도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 물론 아직은 멀었다. 평양에서 아파트가 고층일수록 가격이 떨어지고 20층 이상이 되면 입주하지 않으려 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가장 큰 원인도 바로 수돗물 때문이다. 펌프 수압을 고층까지 충분히 올려 보내는 걸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통일거리나 광복거리의 고층 아파트들은 한 달에 한 번 수돗물이 나올 때도 적지 않다. 그나마 평양이니 이 정도지, 지방은 수질이나 수압이나 더 논할 형편이 안된다.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바닷물로 소독한 평양의 수돗물은 어쨌든 수돗물 특유의 염소 냄새를 없애버렸다. 지난해 탈북한 평양 시민에게 물어봤더니 “염소 냄새가 없어져 물맛이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또 전해수를 활용해 수영장 물을 소독하니 눈이 시리지도 않다고 한다. 바닷물 소독방법의 장단점이나 비용에 대해선 좀 더 따져봐야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염소를 활용한 전통적인 소독방법에 비해 최근에 도입되기 시작한 기술이라는 점이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있다. 매우 궁박한 처지에 이르게 되면 도리어 펴나갈 길이 생긴다는 말이다. 결과적으로 서울의 수돗물에선 아직 없애버리지 못하고 있는 염소 냄새를 평양의 수돗물에선 없애버렸다. 이걸 보니 유선전화망이 열악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곧바로 휴대전화 시대로 넘어간 아프리카의 사례가 떠올랐다. 북한도 휴대전화 붐이 그렇게 일어났다. 어쩌면 북한에서 모자라다는 것, 없다는 것이 곧바로 최신 기술을 도입할 수 있는 바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금과 의지가 따라야 함은 필수불가결적 조건이다. 허나 여전히 돌고래쇼나 양식 따위에 집착하는 김정은을 떠올리면 다시 답답해진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5-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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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IFA 고위 간부 6명 체포…블래터 5선 도전 빨간불

    5선을 노리는 제프 블래터(79)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이 회장 선거를 이틀 앞두고 최대 위기를 맞았다. 외신들에 따르면 스위스 당국은 27일 취리히의 한 5성급 호텔에서 29일 열릴 회장 선거를 앞두고 모여 있던 FIFA 고위임원 6명을 한꺼번에 체포했다. 체포된 임원 중에는 회장 선거에서 블래터 회장 지지 연설을 맨 첫 번째로 할 것으로 알려진 에우헤니오 피게레로 FIFA 집행위원회 부회장도 포함돼 있다. 스위스 당국은 당초 10명 이상을 체포할 계획이었으며 현장에 없어 체포를 면한 임원들도 곧 체포될 것으로 예상된다. 스위스 법무부는 성명을 발표해 이번 체포 작전은 미국 법무부의 요청으로 이뤄졌다고 밝혔다. 체포된 인물들은 범죄인 인도요청에 따라 즉각 미국으로 이송될 수 있으나 본인들이 거부할 경우 최장 40일 간 추방이 유예될 수 있다. 이와 관련 뉴욕타임스(NYT) 등 미국 언론들은 최대 14명의 FIFA 임원들이 부패혐의로 기소될 전망이라고 전했다. 이들은 산하 FIFA 간부들과 조직, 스포츠 미디어와 프로모션 업체들로부터 1억 달러(약 1100억 원) 이상의 뇌물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미국 검찰과 연방수사국(FBI)은 러시아와 카타르 월드컵 개최지 선정과정에서 뇌물이 오간 정황을 포함해 1990년대 초반까지 거슬러 올라가 FIFA 임원들의 부패 혐의를 조사하고 있으며, 구체적 증거도 다수 확보한 것으로 전해진다. 2010년 열린 2022년 월드컵 개최지 선정투표에서는 막대한 오일 머니를 뇌물로 썼다는 의혹을 받는 카타르가 경쟁자인 미국을 14 대 8로 누르고 유치에 성공했다. FBI의 수사는 이때부터 본격화됐고, 이에 체포될 것이 두려운 블래터 회장이 최근 4년 동안 미국을 방문하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FIFA 고위간부들이 대거 체포되면서 29일 회장 선거에서 승리가 확실시 됐던 블래터 회장은 최대 악재를 만났다. FIFA 회장 선거는 209개 회원국의 투표로 이뤄진다. 4선까지만 하겠다던 약속을 깨고 5선에 도전한 블래터 회장은 FIFA 6개 대륙연맹 가운데 5곳의 지지를 받아 회장 유임이 유력시됐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블래터 회장 체제의 부패가 부각될 경우 이탈표가 나올 가능성이 커졌다. 블래터 회장은 1998년 회장으로 집권해 지금까지 17년 동안 재임해왔다. 1981년부터 FIFA 사무총장을 지낸 점을 감안하면 무려 34년이나 FIFA 조직을 장악했다. FIFA는 ‘블래터의 왕국’으로 불리기도 했다. 블래터 회장이 오랫동안 왕국을 관리해온 방식은 지구상의 독재자들이 권력을 유지해 온 방식과 일맥상통하다. 월드컵을 비롯한 각종 FIFA 주관대회 개최지를 선정하는 집행위원회는 25명의 위원으로 구성돼 있다. 13명의 지지만 얻으면 어떤 나라던 개최지로 선정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월드컵 개최지 선정 과정에 집행위원들이 수백 만 달러 이상의 뇌물을 받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로 통해왔다. 섭씨 40도의 날씨로 축구 대회를 열기 최악의 조건을 가진 카타르가 2022년 월드컵 개최지로 선정된 이후 여러 명의 집행위원들이 뇌물 혐의로 수사 대상에 올랐지만, 증거를 찾기가 워낙 쉽지 않은 구조여서 실제 처벌된 위원은 없다. 블래터 회장이 부패를 눈감아주는 대가로 측근들로부터 충성심을 얻어왔다는 의혹도 제기된 상태다. 회장 선거는 209표 중 105표만 얻으면 된다. 블래터 회장은 측근들이 포진된 회원국 축구협회에 ‘축구발전 보조금’을 뿌리고, 측근들이 이를 착복하는 것을 묵인하는 방식으로 표밭 관리를 해오고 있다고 미국 외교안보전문지 포린폴리시가 22일 보도했다. 지난달에도 블래터 회장은 카리브해 25개국 축구협회의 지지가 흔들리자 급히 바하마를 방문해 재선되면 4년 동안 최대 1억8000만 달러의 보조금을 이 지역 축구협회에 뿌리겠다고 공약했다. 유럽에선 블래터 회장에 대한 반감이 팽배해 있다. 하지만 회장 선거에선 바하마와 같은 이름 없는 국가가 영국 독일 이탈리아와 같은 축구 강국과 똑같은 1표를 행사한다. 29일 열릴 FIFA 회장 선거에는 블래터 회장의 대항마로 알리 빈 알 후세인 요르단 왕자(40)가 나섰다. 외신들은 측근들이 대거 구속된 상황에서도 여전히 막대한 돈을 틀어쥐고 뿌릴 수 있는 블래터 회장의 당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전망하고 있다. FIFA는 축구 관련 보유 현금이 15억 달러가 넘으며, 지난해 월드컵축구대회 중계권과 마케팅 권리를 팔아 57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그럼에도 스위스 취리히에 비영리 단체로 등록돼 세금도 내지 않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5-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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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카소 최고가 그림, 카타르 왕실서 구매? “사실 아니다”

    최근 피카소 작품 중 최고가를 기록한 유화 ‘알제의 여인들(Les Femmes d’Alger)’의 구매자가 카타르 왕실이라는 보도는 사실이 아니라고 경매회사가 밝혔다. 미국 뉴욕 크리스티경매 측은 11일 진행된 경매에서 1억7936만5000달러(약 1975억 원)에 매각된 이 유화의 최종 낙찰자가 하마드 빈 자심 빈 자베르 알타니 전 카타르 총리라는 보도를 부인했다. 하지만 실제 낙찰자가 누군지는 공개하지 않았다. 다만 크리스티 측은 이번 경매에 35개국에서 참여했으며, 유럽과 아시아의 수집가들이 미국 수집가들과 경쟁하는 양상이었다고 밝혔다. 앞서 미국 뉴욕포스트와 영국 텔레그래프 등 서방 언론들은 피카소 작품이 알타니 전 총리에게 낙찰됐다고 보도했다. 서방 언론이 피카소의 그림 매각에 큰 관심을 보인 이유는 고가라는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유화 ‘알제의 여인들’은 벌거벗은 여인의 자유분방한 모습을 입체파 화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런 그림은 이슬람교 국가인 카타르에서 공개 전시가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서방 언론에서는 유명한 작품이 지하 금고에 들어가 빛을 볼 수 없고, 대중이 관람할 수 없을 것이란 추측이 나돌았다. 카타르 왕가는 올해 2월 약 3억 달러(약 3300억 원)에 팔려 미술품 개인 거래 최고가 기록을 세운 폴 고갱의 ‘언제 결혼하니?(Nafea Faa Ipoipo: When Will You Marry?)’를 비롯해 영국 작가 데미안 허스트의 ‘봄의 자장가’,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등의 구매자로도 지목됐다. 유럽 예술인들 사이에서는 국보급 작품들이 중동의 오일 머니에 팔려가는 현실에 대한 자괴감이 커지고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5-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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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목숨을 저당 잡히고 얻는 부패의 자유

    “이 자는 당의 신임을 저버리고….” 북한에선 제일 끔찍한 말이다. 장성택, 현영철을 포함해 숙청된 북한 간부들의 판결문에는 꼭 신임을 저버렸다는 ‘죄명’이 붙는다. 이 말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김정은이 너를 핵심 통치 계층에 뽑아주었는데, 이제 더 믿지 못하겠으니 죽이고 그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대신할 것이다.” 통치 계층의 상위로 올라가는 사다리엔 조상 때부터 김씨 일가에 충성한 ‘뼈대 있는’ 집안 출신만 매달릴 수 있다. 경쟁자를 물리치며 한발 한발 위로 올라갈수록 꼽기조차 아름찬 갖가지 특혜들이 기다리고 있다. 고급 주택, 외제 차, 자녀 대학 입학권, 최고 의료 수급권부터 시작해 북한 돈 1원으로 1달러짜리 상품도 살 수 있는 특권까지…. 자신이 어디쯤 올라왔는지는 어떤 공급을 받는지를 보고도 가늠할 수 있다. 최상위 ‘1일 공급제도 대상’이 되면 식모가 주문한 각종 육류, 과일, 수산물 등이 매일 오전 6시 냉동차에 실려 집에 배달된다. 중앙당 비서, 내각 총리, 군단장 이상 군 장성, 각 도 책임비서 정도가 이에 해당된다. 그 아래 3일에 한 번 냉동차가 오는 ‘3일 공급제도 대상’이 있는데 노동당 과장, 내각 장관급이 해당된다. 항일빨치산 연고자, 남쪽에서 송환한 비전향 장기수도 이런 공급을 받는다. 이런 식으로 북한의 계층별 공급 제도는 주 공급 대상, 월 공급 대상까지 매우 세분화됐고, 운명도 특권을 누리는 자와 뜯기기만 하는 자로 갈린다. 1990년대 중반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한 ‘고난의 행군’ 시기 1일, 3일 공급 대상들의 특권은 오히려 더 커졌다. 김정일은 백성이 아무리 많이 굶어 죽더라도 측근들은 절대 등 돌리지 않게 아낌없이 보상해야 한다는 독재 정권 유지의 규칙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북한 경제가 오랫동안 마비되다 보니 핵심 계층의 충성을 사던 김정일의 돈주머니도 점점 고갈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일이 꺼낸 카드가 바로 ‘부패 허가’였다. 김정일은 직접적인 보상을 줄이는 대신 부패를 눈감아 줌으로써 특권층에 우월감과 보상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이때부터 북한의 통치 계층은 큰 간부는 크게, 작은 간부는 작게 각자 인민을 수탈하며 살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은 김정은 시대에서도 전혀 달라지지 않고 있다. 그 결과 북한에서 부유함은 곧 권력과 비례하게 됐다. 북한판 태자당이라고 표현되는 북한 신흥 부자층에는 당정군을 가리지 않고, 핵심 고위계층의 자녀들이 부모 권력순으로 포진돼 있다. 부패는 한편으로는 김씨 집안이 쥔 칼자루이기도 하다. 마음에 안 드는 인물은 부패로 몰아 죽이면 그만이다. 태자당의 운명도 부모의 용도가 끝나는 순간 함께 끝나는 것이다. 얼마 전 김원홍 보위사령관의 아들인 김철의 외화벌이 세력에 대해 내사가 있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하지만 아직까지 김원홍이 무탈한 것으로 보면 여전히 그가 효용가치가 있다고 김정은이 판단한 듯하다. 목을 맡기고 사는 고위층은 “당의 신임을 저버렸다”는 무시무시한 판결을 받고 사다리에서 굴러떨어지지 않기 위해 목숨 내놓고 충성하게 된다. 사실 이런 식의 통치 방식은 세계의 가난한 장기 독재 국가들에서 아주 보편적인 것이다. 결국 죽어가는 것은 북한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가난한 인민들뿐이다. 하지만 독재 국가에서 병들고 굶주려 나약해지고 위축된 인민이 반란을 일으키는 사례는 거의 없다. 고위층 역시 부패한 체제가 자기의 부를 담보해주기 때문에 배신할 생각을 갖지 않는다. 결국 북한에서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세력은 몹시 궁핍하거나 몹시 윤택한 계층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시장에서 돈을 축적하는 시장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김정은 체제 들어 시행되는 시장 및 농업 개혁으로 이들의 만족도는 커지고 있다. 이들 역시 부패의 사슬 속에서 통치 계층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며 자신의 부를 키우고 있다. 이런 북한에선 오랫동안 시민혁명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전만 하더라도 북한의 부패 정도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 수위를 다툴 정도다. 나는 북에서 그 변질 과정을 직접 목격했다. 북한이 뇌물 없이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는, 어딜 가나 구린내가 풀풀 풍기는 나라가 되기까진 10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되돌리자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청렴한 북한은 내 생전엔 볼 수 없을 것 같다. 정권 유지를 위해 북한을 완전히 썩게 만든 것, 이는 김씨 일가가 민족 앞에 용서받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5-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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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동당 조직지도부 빼곤 北에 ‘숙청 안전지대’는 없다

    현영철 북한 인민무력부장의 숙청으로 김정은의 ‘공포 통치’가 다시 한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국정원은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에서 처형된 주요 간부가 70명이라고 발표했다. 지난 3년 반 동안 행해진 김정은 숙청사를 돌아보면 여기에도 교묘한 규칙이 작동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번 현영철 처형이 사실이라면 김정은식 통치방식을 한층 선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김정은의 숙청사’를 들여다보면 현 체제에서 안전한 그룹과 미래에 위태로운 그룹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예상이 가능하다.○ 김정은은 왜 軍 인사들을 숙청하나 북한 독재 체제를 지탱하는 3대 핵심 축은 노동당, 군, 국가안전보위부(비밀경찰)이다. 김일성 시대부터 시작해 김정은 시대까지 달라지지 않고 있는 굳건한 시스템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적잖은 변화가 감지된다. 세 축 간의 역학관계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대에서 약간씩 달라졌기 때문이다. 김일성 시대에는 노동당 군 보위부 순으로 권력이 배분됐으나 김정일 시대로 접어들면서 군이 정점에 서게 된다. 김정일이 1990년대 중반 이후 경제 파탄으로 민심이 흔들리자 “권력은 총에서 나온다”며 ‘선군정치’를 표방했기 때문이다. 당시 군은 북한에서 가장 우대받는 조직이 되었고 다음으로 국가안전보위부, 노동당 순이었다. 김정은 시대에는 다시 노동당이 약진했다. 노동당 내 인사권을 틀어 쥔 조직지도부가 김정은이 후계자이던 시절부터 꾸준히 그에게 충성을 바쳐 신임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노동당 내 권력구조도 달라졌다. 김정일 시대에는 장성택이 장악했던 행정부가 중심이었지만 김정은 시대에는 조직지도부가 권력의 핵심이 됐다. 주지하다시피 장성택은 막대한 세력과 재력을 움켜쥐고 있다가 김정은 장기 집권에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혀 2013년 12월 비참하게 처형됐다. 김정은 시대에 위상이 가장 많이 변한 것은 군부였다. 지난 3년 반 동안 처형된 사람들도 주로 군부 인사가 많다. 그렇다고 김정은 체제에서 군의 중요성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군이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에 숙청의 칼날을 받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어떻든 지금 북한에서 군 인사들이 표적이 되는 이유는 김정은이 준비된 지도자가 아닌 상태에서 통수권자가 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권력 기반을 다져온 김일성과 김정일 시대에는 한 번 인민무력부장이 되면 10년 넘게 자리를 지키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자신들이 가장 믿는 사람을 군부 수뇌로 앉혀 ‘총구의 배반’을 막았다. 그러나 김정은에게는 믿을 만한 사람이 별로 없다. 황병서 최룡해 같은 인물을 등용해 총정치국장을 맡겨 군부를 장악하려 하지만 민간 출신인 이들은 군 조직 장악에 한계가 있다. 결국 김정은의 군부 통치 전략은 “믿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어떤 한 사람이나 집단이 세력화될 시간을 주지 않으며, 숙청 같은 공포심을 조장해 반역 움직임을 차단한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최근 군부 인물에 대한 숙청 및 계급 강등과 복권을 수시로 반복하는 ‘왕별 놀이’가 계속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안전한 그룹과 위태로운 그룹 이 같은 김정은 체제의 통치 방식을 알면 향후 숙청에서 가장 안전한 그룹과 위태로운 그룹도 예상할 수 있다. 가장 안전한 그룹은 황병서를 중심으로 한 노동당 조직지도부 그룹이다. 조직지도부는 수십 년간 한솥밥을 먹으며 끈끈하게 의리로 다져온 북한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다. 이 그룹에선 아직 숙청된 인물이 한 명도 없다. 다음으로 비교적 안전한 그룹은 최룡해 최태복 등 오랜 가신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수십 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은 북한 내 인지도는 상당히 높지만 김정은을 위협할 만한 세력 기반을 갖고 있지 않다.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보안성(치안을 맡는 일반 경찰)은 숙청과 사회 기강 유지를 위해 매우 필요한 조직이다. 더구나 군부가 흔들리는 와중에 국가안전보위부까지 등을 돌리면 체제는 한층 위험해진다. 현재 김원홍 보위부장은 계속 숙청 예상 인물로 지목되고 있지만 김정은이 군부를 틀어쥘 때까지는 필요한 인물이라고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 군부는 김정은이 핵심 심복을 찾았다고 판단될 때까지 계속 숙청의 칼날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 상황이라면 전쟁이 날 경우 김정은을 위해 목숨 걸 군인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김정은에게 필요한 군은 ‘체제를 향해 총구를 쏘지 않을 군’이지 전쟁에서 이길 군이 아니다. 그러나 국지도발에서는 죽기 살기로 싸울 가능성이 높다. 패할 경우 숙청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5-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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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은의 숙청 칼날에 숨겨진 북한 통치의 룰

    현영철 북한 인민무력부장의 숙청으로 김정은의 ‘공포 통치’가 다시 한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국정원은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에서 처형된 주요 간부들이 70명이라고 발표했다. 지난 3년 반 동안 행해진 김정은 숙청사를 돌아보면 여기에도 교묘한 규칙이 작동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번 현영철 처형이 사실이라면 김정은식 통치방식을 한층 더 선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김정은의 숙청사’를 들여다보면 현 체제에서 안전한 그룹과 미래에 위태로운 그룹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예상 가능하다. ●김정은은 왜 軍 인사들을 숙청하나 북한 독재 체제를 지탱하는 3대 핵심 축은 노동당, 군, 국가안전보위부(비밀경찰)이다. 김일성 시대부터 시작해 김정은 시대까지 달라지지 않고 있는 굳건한 시스템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적잖은 변화들이 감지된다. 세 축 간의 역학관계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대에서 약간씩 달라졌기 때문이다. 김일성 시대에는 노동당 군 보위부 순으로 권력이 배분됐으나 김정일 시대로 접어들면서 군이 정점에 서게 된다. 김정일이 1990년대 중반이후 경제 파탄으로 민심이 흔들리자 “권력은 총에서 나온다”며 ‘선군 정치’를 표방했기 때문이다. 당시 군은 북한에서 가장 우대받는 조직이 되었고 다음으로 국가안전보위부, 노동당 순이었다. 김정은 시대에는 다시 노동당이 약진했다. 노동당 내 인사권을 틀어 쥔 조직지도부가 김정은이 후계자이던 시절부터 꾸준히 그에게 충성을 바쳐 신임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이에따라 노동당 내 권력구조도 달라졌다. 김정일 시대에는 장성택이 장악했던 행정부가 중심이었지만, 김정은 시대에는 조직지도부가 권력의 핵심이 됐다. 주지하다시피 장성택은 막대한 세력과 재력을 움켜쥐고 있다가 김정은 장기집권에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혀 2013년 12월 비참하게 처형됐다. 김정은 시대에 위상이 가장 많이 변한 것은 군부였다. 지난 3년 반 동안 처형된 사람들도 주로 군부 인사들이 많다. # 그렇다고 김정은 체제에서 군의 중요성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군이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에 숙청의 칼날을 받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어떻든 지금 북한에서 군 인사들이 표적이 되는 이유는 김정은이 준비된 지도자가 아닌 상태에서 통수권자가 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권력 기반을 다져온 김일성과 김정일 시대에는 한번 인민무력부장이 되면 10년 넘게 자리를 지키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자신들이 가장 믿는 사람을 군부 수뇌로 앉혀 ‘총구의 배반’을 막았다. 그러나 김정은에게는 믿을 만한 사람이 별로 없다. 황병서, 최룡해와 같은 인물을 등용해 총정치국장을 맡겨 군부를 장악하려 하고 있지만, 민간 출신인 이들은 군 조직 장악에 한계가 있다. 결국 김정은의 군부 통치 전략은 “믿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어떤 한 사람이나 집단이 세력화될 시간을 주지 않으며, 숙청같은 공포심을 조장해 반역 움직임을 차단한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최근 군부 인물에 대한 숙청과 계급강등과 복권을 수시로 반복하는 ‘왕별 놀이’가 계속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안전한 그룹과 위태로운 그룹 이같은 김정은 체제의 통치 방식을 알게 되면 향후 숙청에서 가장 안전한 그룹과 위태로운 그룹도 예상할 수 있다. 가장 안전한 그룹은 황병서를 중심으로 한 노동당 조직지도부 그룹이다. 조직지도부는 수십 년간 한솥밥을 먹으며 끈끈하게 의리로 다져온 북한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다. 이 그룹에선 아직 숙청된 인물이 한 명도 없다. 다음으로 비교적 안전한 그룹은 최룡해, 최태복 등 오랜 가신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수십 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은 북한 내 인지도는 상당히 높지만, 김정은을 위협할만한 세력 기반을 갖고 있지 않다.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보안성(치안을 맡는 일반 경찰)은 숙청과 사회 기강 유지를 위해 매우 필요한 조직이다. 더구나 군부가 흔들리는 와중에 국가안전보위부까지 등을 돌리면 체제는 한층 위험해진다. 현재 김원홍 보위부장은 계속 숙청 예상 인물로 지목되고 있지만, 김정은이 군부를 틀어쥘 때까진 아직은 필요한 인물이라고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 군부는 김정은이 핵심 심복을 찾았다고 판단될 때까지 계속 숙청의 칼날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 상황이라면 전쟁이 날 경우 김정은을 위해 목숨 걸 군인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김정은에게 필요한 군은 ‘체제를 향해 총구를 쏘지 않을 군’이지 전쟁에서 이길 군이 아니다. 그러나 국지도발에서는 죽기 살기로 싸울 가능성이 높다. 패할 경우 숙청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한편 노동당 다른 부서의 경우 언제든 숙청돼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이들은 체제 유지의 핵심 축이 아니기 때문에 각종 실패의 책임을 전가해 처형되어도 김정은 체제를 절대 위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5-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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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북단속 공 세워 변방서 벼락출세, 軍 통솔은 미숙… 수차례 강등-복권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에 대한 불경·불충죄로 잔혹하게 처형된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은 김정은이 북한의 권력을 넘겨받는 과도기에 큰 공을 세워 승승장구했던 인물이었다. 2008년 8월 뇌중풍(뇌졸중)으로 쓰러졌던 김정일이 본격적으로 아들 김정은에게 권력을 넘기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2개월여가 지난 그해 10월경이었다. 북한 소식통들에 따르면 김정은은 바로 다음 달인 2008년 11월 아버지로부터 군 지휘권을 넘겨받았고, 이듬해 3월까지 순차적으로 보위부와 정찰총국을 장악하게 된다. 김정은은 군 지휘권을 넘겨받으면서 제일 먼저 아버지에게 “조국을 배신해 달아나는 자를 없애겠다”고 공언했다고 한다.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내건 첫 번째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당시만 해도 2006년 2000명을 넘어선 한국 입국 탈북자가 매년 수백 명씩 늘어날 때였다. 현영철은 당시 백두산에서 신의주까지 국경 경비를 관장하는 8군단장이었다. 김정은과의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김정은의 명을 받은 현영철은 국경경비대원들에게 “탈북자들을 신고하면 그들이 여러분에게 갖다 바친 뇌물들은 절대 빼앗지 않겠다. 오로지 탈북자들만 잡아오라. 노동당 입당과 승진을 보장하겠다”고 했다. 그는 북한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파격적인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해 엄청난 효과를 냈다. 군인들이 뇌물을 받은 뒤 탈북자를 신고하는 사례가 급증하자 돈이 있어도 탈북이 불가능해진 상황이 만들어졌다. 국경경비대와 탈북자 사이에 신뢰가 끊기자 2009년 2914명이던 탈북자 수는 2010년 2401명으로 줄었고 지난해엔 1396명으로 크게 줄었다. 이 공로로 현영철은 김정은의 눈에 들어 1선 군단장 출신이 아님에도 2010년 9월 인민군 대장 겸 당 중앙위원에 임명됐다. 김정은은 2012년 7월 군부 1인자였던 이영호 군 총참모장이 숙청되자 그를 후임 총참모장으로 임명했다. 현영철의 계급도 차수로 올랐다. 이때가 그의 전성기였다. 현영철은 벼락출세로 총참모장에 올랐지만 군 통솔을 김정은의 뜻대로 잘하진 못했다. 김정은은 김정일 사망 애도기간이 끝나자마자 군부 수중에 있던 엄청난 규모의 외화벌이 권한을 자기 수중에 넣으려 했다. 군부는 당연히 이에 반발했고 이런 기득권의 충돌이 이영호의 숙청까지 이어졌다. 총참모장에 오른 현영철은 김정은과 장성택의 뜻에 따라 군부의 돈줄을 순순히 넘겨주고 반발도 다독여야 했지만 수하에 내로라하는 군 선배들이 즐비한 현실에서 그로서는 힘에 부친 과제였다. 마침내 2012년 가을 김정은은 군인들의 영양상태가 안 좋다는 이유로 현영철을 현지 해안포 중대 중대장으로 한 달 동안 있게 하고 계급도 차수에서 대장으로 강등시켰다. 이듬해 5월에는 전방 군인 3명이 잇따라 귀순하자 그 책임을 지고 전방 5군단장으로 좌천됐고, 계급도 다시 상장으로 강등됐다. 그리고 지난해 6월 다시 인민무력부장이라는 대장 자리로 복권한 것이다. 파란만장 부침이 심했던 그가 바야흐로 중심 권력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지배적이었지만 이번 숙청으로 마지막이 됐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5-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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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일 지시로 SLBM 10년째 개발”

    북한이 8일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직접 참관한 가운데 동해상에서 발사 시험을 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은 2006년경 김정일 국방위원장(사진)의 지시로 개발이 본격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국방과학 분야에서 20년 가까이 일하다 탈북한 김준익(가명) 씨는 12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북한의 SLBM 개발은 김정은의 단독 작품이 아니라 김정일의 유훈”이라며 “옛 소련 출신 미사일 과학자 20∼30명이 북한에 머물며 미사일 개발의 핵심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美 본토 타격 투 트랙 전략 김 씨에 따르면 김정일은 2006년경 국방연구를 담당한 제2자연과학원에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두 종류의 미사일 개발을 빠른 시일 내 마무리하라고 지시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되, ICBM이 요격될 가능성에 대비해 잠수함으로 미 본토에 접근해 발사할 수 있는 SLBM도 개발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현재 북한 미사일 요격을 위해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의 한반도 배치를 검토하고 있으나 북한이 향후 SLBM을 실전 배치할 경우 완벽한 요격은 어려워지게 된다. 결국 김정일의 ‘두 종류 미사일 개발’ 지시는 미국의 미사일방어(MD)망 강화를 염두에 둔 투 트랙 공격 전략인 셈이다. 북한은 이후 2009년 4월과 2012년 4월 장거리 로켓으로 광명성 2호와 3호를 잇달아 발사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2012년 12월에 광명성 3호 2호기를 목표 궤도에 진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북한은 매번 인공위성 발사라고 주장했지만 전문가들은 ICBM 개발을 위한 시도로 평가했다. ICBM 개발에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북한은 김정일의 유훈에 따라 SLBM 개발에 매진한 것으로 관측된다. 한미 정보당국에 따르면 북한은 광명성 3호 2호기 발사 성공(2012년 12월) 이듬해인 2013년 함경남도 신포에 지상 미사일 수직발사 시험시설을 설치했다. 북한은 이후 모의탄 해상 수직발사 사출시험(2014년)과 모의탄 수중 사출시험(2015년)에 이어 이달 8일 모의탄 수중 잠수함 사출시험까지 실시하며 SLBM 개발에 한층 더 다가갔다.○ “미사일 개발 주역은 옛 소련 과학자들” 김 씨는 “북한의 미사일 개발에 옛 소련 과학자들이 대거 참가하고 있다”며 “옛 소련 과학자 20∼30명이 평양시 만경대구역 축전동 광복거리의 아파트에 가족과 함께 거주하면서 북한 미사일 개발의 중추로 활동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엔진과 동체, 연료, 송수신, 탄두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어 이들이 북한의 미사일 기술 향상에 절대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게 김 씨의 설명이다. 실제로 북한의 SLBM 개발 속도는 한미 정보당국의 예상을 뛰어넘고 있어 이 증언이 사실인지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옛 소련 과학자들은 1991년 소련 붕괴 당시 사회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 때문에 북한에 망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이들은 북한의 166(로켓공학)·628(로켓엔진)연구소에 소속돼 비행거리 향상과 요격미사일 회피 기술 발전 등을 연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사일 잠수함 건조 중 김 씨는 또 북한은 최근 함남 신포에 위치한 ‘봉대보일러공장’에서 미사일 발사가 가능한 약 3000t급 잠수함을 건조 중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군수공장에 보일러공장, 트랙터공장 등의 위장명을 사용한다. 그는 “봉대보일러공장은 북한의 유일한 잠수함 건조 기지이며, 지붕을 모두 덮어 군사위성으로 잠수함 건조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봉대보일러공장이 있는 신포 앞바다 마양도에는 북한 동해함대사령부와 잠수함 기지가 있다. 또 남포 와우도에는 서해함대 잠수함 수리를 맡은 군수공장도 위치해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5-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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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네스북 오른 중국 단체 관광객 6400여 명, 뭘 했기에…

    중국 단체 관광객 6400여 명이 8일 프랑스 관광도시 니스에서 기네스 신기록을 세웠다. 이들은 이날 니스 해안도로에 늘어서서 ‘코트다쥐르에서 꾸는 텐사의 꿈은 훌륭하다(Tiens’ dream is Nice in the Cote d‘Azur)’라는 문장을 써 보였다. 이 문장은 반점까지 포함하면 30자를 넘어 사람이 만든 가장 긴 문구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코트다쥐르는 니스가 위치한 지방의 이름이다. 니스에서 기네스 신기록을 세운 이들은 모두 중국 텐사그룹 소속 직원들이다. 생명공학에서부터 여행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업종을 거느린 텐사그룹은 회사 창립 20주년을 맞아 전체 직원 1만2000명 중 절반이 넘는 6400여 명을 단체로 5일부터 8일까지 프랑스에 관광을 보냈다. 전세기가 84대나 동원됐고 방문지인 칸과 모나코에는 4성급, 5성급 호텔 79곳의 객실 7900개가 이들 이름으로 예약됐다. 이들이 한 번 움직일 때면 버스 146대가 동원됐다. 이중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 기념일인 8일 니스 해안에 모여 전승 기념행사를 치른 뒤 만든 인간 글씨 새기기는 단연 압권이었다. 리진위안(李金元·57) 톈사그룹 회장은 마치 개선장군마냥 2차 대전에서 사용했음직한 미국제 구형 군용 지프차를 타고 대열을 지어 서 있는 직원들 앞을 사열했다. 텐사그룹이 프랑스에서 대규모 행사를 치르기 위해 쓴 비용은 천문학적이다. 현지 업계는 이들이 파리에서 머무르며 루브르박물관, 에펠탑 등을 돌아보는데 1300만 유로(약 160억 원), 니스에서 2000만 유로(약 245억 원)를 지출해 합계 3300만 유로(약 405억 원)를 썼다고 보도했다. 프랑스를 방문하는 중국인 관광객 1명이 보통 1500유로(약 184만)를 쓴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이 쇼핑에 쓴 돈 역시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텐사그룹의 통 큰 씀씀이에 프랑스 정부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프랑스 외무장관이 6일 텐사그룹 임원들을 초대해 환영할 정도로 귀빈 대우를 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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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차대전 승전기념일, 서방은 5월 8일인데 러는 왜 9일?

    러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일을 5월 9일로 정하고 있다. 반면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은 8일이다. 이유가 뭘까. 1945년 5월 7일 알프레트 요들 독일군 작전참모장은 프랑스 랭스 연합군사령부에서 “5월 8일 오후 11시부터 모든 군사행동을 중단한다”는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 역할은 소련군이 했고, 나치의 심장부는 베를린이기 때문에 항복 문서는 베를린에 있는 소련군사령부에서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박할 이유가 궁색한 연합군은 이를 받아들였다. 결국 8일 오후 10시 43분 베를린 근교 소련군사령부에서 빌헬름 카이텔 독일군 총사령관이 게오르기 주코프 소련군 총사령관 앞에서 항복문서에 다시 서명했다. 이 시간이 모스크바 시간으론 9일 0시 43분이었다.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도 전승 기념행사를 서방은 8일에, 러시아와 사회주의권 국가들은 9일에 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보듯 러시아는 연합군의 2차 대전 승리의 주역이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러시아인들은 1812년 나폴레옹을 몰아낸 전쟁을 ‘조국전쟁’, 2차 대전을 ‘대(大)조국전쟁’이라고 부른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이 세계를 두 번씩이나 구해냈다는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도 2차 대전에서 소련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에 동의한다. 2차 대전 내내 소련은 독일군 병력의 60∼80%와 홀로 상대해 싸웠다. 러시아인들은 2차 대전의 전세를 바꾼 계기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아닌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격전이라고 여긴다. 1942년 7월부터 6개월간 벌어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은 포로 9만1000명을 포함한 85만 명의 병력을 잃으면서 파죽지세가 꺾였다. 이 승리를 위해 소련군은 무려 113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1943년 7월 쿠르스크 격전에선 130만 명의 소련군이 80만 명의 독일군을 물리치고 전세를 뒤집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미영 연합군은 서부전선에서 독일군 56만 명과 싸웠을 뿐이지만, 소련군은 동부전선에서 홀로 450만 명의 독일군과 싸웠다. 소련군은 장비가 열세인 조건에서 싸우다 보니 희생이 컸다. 2차 대전에서 소련 측은 군인 1000만 명 이상을 포함해 최대 2700만 명이 희생됐다. 당시 소련 인구의 12%에 해당하는 수치다. 또 국토의 3분의 1이 잿더미로 변했다. 세계 제패를 꿈꾸던 최강 나치 독일군을 전 국민이 애국심으로 단결해 물리치고 세계도 구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한 러시아는 아무리 경제 사정이 어려워도 매년 승전 기념일 행사만큼은 성대하게 치르고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5-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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