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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개신교 단체가 우크라이나 피란민을 위한 모금과 긴급 구호 활동에 나섰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는 8일부터 우크라이나 피란민을 지원하기 위해 모금을 하고 있다. 본부 측은 긴급 구호자금 1억2355만 원(약 10만 달러)을 우선 지원하고 다음 달 말까지 특별 모금을 진행한다. 한국교회봉사단과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는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모여 있는 루마니아로 긴급 구호 실사단을 8일 파견했다. 실사단은 13일까지 우크라이나 난민 현황을 파악하고 긴급구호를 할 예정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한국정교회는 4일부터 우크라이나 국민을 위한 모금을 하고 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20대 남성 준수는 동갑내기 여성 지윤과 로맨스 영화를 보고 레스토랑에서 식사한다. 만나지 않는 날에도 휴대전화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하지만 준수는 지윤에게 사귀자고 고백하진 않는다. 자신이 지윤에게 끌리는 게 외로워서인지, 사랑해서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준수는 지윤과 친구보다는 가깝지만 연인까지 이어지지 않는 이른바 ‘썸타기’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왜 준수는 썸만 타는 청년이 된 걸까. 15일 교양철학서 ‘썸타기와 어장관리에 대한 철학적 고찰’(필로소픽)을 펴낸 최성호 경희대 철학과 교수(50)는 7일 전화 인터뷰에서 “취업, 결혼 등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늘어나면서 나타난 문화가 썸타기”라고 말했다. MZ세대(밀레니얼+Z세대)가 썸타기를 선택한 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는 시대상과 관련 있다는 것. “남녀가 서로의 마음을 떠보는 일은 과거에도 있었어요. 하지만 썸타기는 자기 마음을 결정짓지 못하는 상태인 ‘의지적 불확정성’과 관련 있습니다. 무엇을 원하는지 결정 못 하는 거죠.” 최 교수는 썸타기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탐색형 썸타기’와 ‘쾌락형 썸타기’로 나눈다. 연애 전 상대방이 어떤지 살펴보는 행동이 탐색형 썸타기다. 쾌락형 썸타기는 썸을 타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다. 2018∼2019년 연재된 네이버웹툰 ‘알고 있지만’에서 22세 여자 주인공 유나비는 동갑의 남자 주인공 박재언에게 호감을 느낀다. 하지만 박재언이 여자관계가 복잡한 ‘나쁜 남자’라는 소문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고 ‘탐색형 썸타기’를 한다. 반면 박재언은 유나비의 마음을 알고도 연애 자체를 할 생각이 없이 ‘쾌락형 썸타기’만 즐긴다. 최 교수는 남녀가 연애하기 전 상대방과 심리전을 벌이며 밀고 당기는 이른바 ‘밀당’과 썸타기는 다르다고 했다. 밀당은 상대방의 호감을 얻기 위해 자기 마음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는 행위인 만큼 그 중심이 상대방에게 있다. 반면 썸타기는 자신이 상대방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라 자신이 탐구 대상이라는 것. 최 교수는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썸타기는 ‘자기지향적인 활동’에 해당한다”며 “썸타기는 상대방에 대한 호감을 받아들일지 배제할지에 대해서도 명확한 태도를 취하지 못한다”고 했다. MZ세대가 연애를 시작하며 “우리 오늘부터 1일”이라고 하는 건 공적인 관계를 선언하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의무와 제약이 부과되는 관계를 받아들이는 말이라는 것. 최 교수는 “‘우리 오늘부터 1일’이라고 말하는 순간 나의 개별적인 믿음을 넘어 나와 너 사이에 존재하는 공적인 담화의 역할을 한다”며 “다른 이성과 사귀지 말아야 한다는 의무도 생기는 발화”라고 했다. 최 교수는 상대방과 사귈 것처럼 행동하며 여러 이성을 동시에 만나는 ‘어장관리’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자신의 마음을 일부러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상대를 기만하는 행위라는 것. 최 교수는 “어장관리자는 호감이 담긴 문자메시지를 보내거나 부재중 전화를 남기는 ‘떡밥’을 던지며 상대의 마음이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며 “상대를 속임으로써 마음을 통제하는 행태는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행위”라고 했다. 지난해 1학기엔 대학원 철학과 학생들과 썸타기와 어장관리에 대해 수업했다. 신조어를 통해 철학적인 탐구를 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진지하게 답했다. “젊은 세대의 연애 문화는 철학적으로 탐구하기에 충분히 가치 있고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애들’의 언어로 한국 사회의 현주소를 분석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2000년 조창인 작가(61·사진)가 발표한 장편소설 ‘가시고기’(밝은세상)는 300만 부가 판매된 베스트셀러다. 당시 이 소설이 불티나게 팔린 건 시대상 때문이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후 직장을 잃은 아버지가 백혈병에 걸린 아들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각막을 판 뒤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이야기는 당시 실직 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한국인의 마음을 절절히 울렸다. 알을 낳고 떠나는 암컷 대신 알과 새끼를 지키다 죽음을 맞는 가시고기의 습성을 딴 이 소설의 제목은 부성애(父性愛)를 상징하는 단어가 되기도 했다. 조 작가가 최근 후속작 ‘가시고기 우리 아빠’를 들고 돌아왔다. 그는 왜 22년 만에 다시 가시고기 이야기를 꺼냈을까. 그는 4일 동아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자영업자들이 파산하고 수많은 아버지들이 실직하는 모습을 보며 1997년 외환위기 직후가 떠올랐다”며 “위기가 올수록 사람들이 다시 가족의 사랑을 깨달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후속작을 쓰게 됐다”고 했다. 그는 2000년 가시고기가 흥행한 후 출판사와 독자들로부터 후속작을 써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다. “베스트셀러의 다음 작품이라는 부담감 때문에 오랫동안 마음에만 담아 놓고 집필하지 못했어요. 코로나19 상황을 보며 결심을 한 뒤 지난해 5월부터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신작은 전편의 20년 후를 다룬다. 아버지의 희생으로 새 생명을 얻게 된 9세 아들 다움이는 아버지와 이혼한 뒤 프랑스에 살던 어머니의 도움으로 성장해 29세가 된다. 영화 조명감독으로 일하던 다움이는 업무 차 20년 만에 한국으로 온다. 다움이는 한국에서 아버지가 남긴 흔적을 찾으며 아버지가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희생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조 작가는 “아버지의 죽음을 모른 채 낯선 땅 프랑스로 간 다움이의 그리움은 미움과 분노가 된다”며 “다움이는 어떻게 성장했을지, 얼마나 아버지를 그리워했을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을지 상상하며 작품을 썼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한국에서 아버지의 희생을 깨달은 다움이는 아픔과 상처를 씻고 화해와 사랑으로 새롭게 나아간다”며 “아버지는 아이가 흔들릴 때 중심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장편소설 ‘등대지기’(밝은세상·2001년), ‘길’(밝은세상·2004년) 등 가족의 사랑과 공동체의 가치를 강조하는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다. 신작의 의미를 묻자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 답했다. “서툰 소통 방식 때문에 아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힘들어하던 제 모습을 투영해 가시고기를 썼어요. 신작은 장성한 아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버지의 마음을 아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썼죠.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젊은이를 향한 어른의 응원을 담았습니다. 독자들이 신작을 보고 난 뒤엔 울지 말고 웃었으면 좋겠습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2000년 조창인 작가(61)가 발표한 장편소설 ‘가시고기’(밝은세상)는 300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다. 당시 이 소설이 불티나게 인기를 끌었던 건 시대상 때문.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직장을 잃은 아버지가 백혈병에 걸린 아들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각막을 판 뒤 암으로 죽는 이야기가 IMF 직후 가족애에 목말랐던 한국인의 마음을 절절히 울린 것이다. 알을 낳고 떠나는 암컷 대신 알과 새끼를 지키다 죽음을 맞이하는 가시고기의 습성을 딴 이 소설의 제목은 부성애(父性愛)를 상징하는 단어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조 작가가 최근 후속작 ‘가시고기 우리 아빠’를 들고 돌아왔다. 왜 22년 만에 그는 다시 가시고기 이야기를 꺼냈을까. 그는 4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이 파산하고 수많은 아버지들이 실직하는 모습을 보며 IMF 직후가 떠올랐다”며 “위기가 올수록 사람들이 다시 가족의 사랑을 깨달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후속작을 쓰게 됐다”고 했다. “2000년 가시고기 흥행 이후 출판사와 독자들이 후속작을 써달라고 많이 요청했어요. 하지만 베스트셀러의 다음 작품이라는 부담감 때문에 오랫동안 마음에만 담아 놓고 집필하지 못했죠. 코로나19를 보며 결심을 한 뒤 지난해 5월부터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신작은 전편의 20년 후를 다룬다. 아버지의 희생으로 새 생명을 얻게 된 9세 아들 다움이는 아버지와 이혼한 뒤 프랑스에 살던 어머니의 도움으로 장성해 29세가 된다. 영화 조명감독으로 일하던 다움이는 업무 차 2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다움이는 한국에서 아버지가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희생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조 작가는 “아버지의 죽음을 모른 채 낯선 땅 프랑스로 간 다움이의 그리움은 미움과 분노가 된다”며 “하지만 한국에서 다움이는 아픔과 상처를 씻고 화해와 사랑으로 새롭게 나아간다”고 했다. 그는 장편소설 ‘등대지기’(밝은세상·2001년), ‘길’(밝은세상·2004년) 등 꾸준히 가족의 사랑과 공동체의 가치를 강조하는 작품을 발표했다. 신작의 의미를 묻자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 답했다. “서투른 소통 방식 때문에 아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힘들어하던 제 모습을 투영해 가시고기를 썼어요. 신작은 장성한 아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버지의 마음을 아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썼죠.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젊은이를 향한 어른의 응원을 담았습니다. 독자들이 신작을 보고 난 뒤엔 울지 말고 웃었으면 좋겠습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21세기 한국에 새로운 세계문학전집이 필요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우리의 지성과 감성의 기준에 부합하는 세계문학을 다시 구상할 때가 됐다.” 10년 전 대학에서 문학 수업을 들었을 때다. 담당 교수는 수업 첫날 학생들에게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에 실린 발간사를 소리 내 읽으라고 했다. 그동안 영미권 문학에 치중돼 있던 세계문학전집의 외연을 확장하고자 한 출판사의 의도를 이해시키기 위해서였으리라. 실제로 2009년 시작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은 페루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86), 콜롬비아 소설가 알바로 무티스(1923∼2013) 등 제3세계 여러 작가들을 한국에 알렸다. 그날 이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을 사면 꼭 이 발간사를 먼저 읽는다. 내가 읽는 이 책이 문학사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되새겨보기 위해서다. 최근 이 발간사를 다시 찾아 읽게 됐다. ‘여성’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새로 시작된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들 때문이다. 출판사 은행나무는 올 1월부터 세계문학전집을 펴내기 시작했는데 여성을 주제로 삼았다. 출판사 휴머니스트가 지난달부터 내놓은 세계문학전집의 첫 주제도 여성이다. 이제 제3세계에 이어 여성이 세계문학의 핵심 주제로 떠오른 것이다. 이 소설집은 휴머니스트 세계문학전집의 두 번째 작품이다. 영국의 여성 작가 엘리자베스 개스켈(1810∼1865)은 당대 영국 현실에 대한 소설을 썼는데 당시 여성이 느끼는 생생한 공포가 담겨 있는 게 특징. 표제작인 단편소설 ‘회색 여인’은 주변의 권유로 원치 않은 결혼을 하게 된 여성이 남편이 사실 잔혹한 살인마라는 사실을 알아채면서 벌어진 일을 그린다. 중편소설 ‘마녀 로이스’는 중세시대 여성을 상대로 벌어진 마녀재판을 다룬다. 단편소설 ‘늙은 보모 이야기’는 부모가 죽은 뒤 방황하는 자매의 이야기로, 살아남기 위해 불합리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당시 여성들의 마음이 묘사돼 있다. 어떻게 저런 억압을 받았을까 싶지만 200년 전 여성들에게는 일상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독자들도 신선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일까. 그동안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책인데도 출간 직후 여러 서점에서 고전 분야 베스트셀러 순위에 들었다. 2016년 출간된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민음사) 이후 한국문학을 주도하던 여성이라는 주제가 이제는 세계문학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제 다음 세계문학전집의 주제는 무엇일까. 지난해 한국 독자들을 사로잡은 판타지나 공상과학(SF) 소설일 수도 있고, 부동산이나 가상화폐 등 자본주의와 관련된 작품일 수도 있겠다. 그동안 발굴되지 않은 옛 국내 작가나 동남아시아 작가가 새롭게 조명될 수도 있다. 고전은 늘 변화하는 법. 다음 세계문학전집의 주인공은 누구일지 기대된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지난달 26일 별세한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은 평생 베스트셀러 작가로 살아왔다. 한국 문화의 본질을 파고든 에세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3년), 일본 문화를 파고든 문화비평서 ‘축소지향의 일본인’(1982년),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융합을 강조한 미래전망서 ‘디지로그’(2006년)…. 고인이 생전에 펴낸 책만 300여 권에 달한다. 그의 책을 찾는 독자들의 발길로 서점이 붐비는 이때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남긴 저작 2권과 ‘아버지 이어령’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책을 소개한다. ‘한국인 이야기: 너 어디에서 왔니’는 한국인의 탄생 문화를 파고든 인문학서다. 고인은 출산 전 태아에게 태명을 붙이는 문화는 여러 나라에 있지만 한국에서 이 문화가 크게 발달했다고 말한다. 서양과 달리 어머니 배 속에 있는 시간도 한 살로 치듯 생명을 존중하는 한국인의 사상이 담겨 있다는 것. 그는 갓난아기를 포대로 업는 어부바는 사랑과 정이 담긴 문화라고 강조하고, 돌잔치에서 아이가 집는 물건으로 아이의 미래를 점치는 돌잡이를 스스로 운명을 택하는 한국인의 특성이 반영됐다고 짚는다. 이처럼 고인은 우리의 일상에서 한국 문화의 특수성을 포착해낸다. 이 책은 총 10권에 걸쳐 출간되는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고인은 2009년 이 시리즈를 계획한 뒤 암에 걸렸지만 집필을 포기하지 않았다. 컴퓨터를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나빠지자 구술로 글쓰기를 이어갔다. 젓가락 문화, 인공지능(AI), 일제강점기에 대한 작품들이 연내 출간된다니 기대할 만하다. 병마와 싸우던 시절 고인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대화록 ‘메멘토 모리’를 펼쳐볼 만하다.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걸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인 메멘토 모리는 고인의 좌우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1910∼1987)이 세상을 떠나기 전 신부들과 이야기를 나눈 24가지 주제를 고인이 다시 꺼내 들었다. 기독교 신자인 고인은 무병장수의 시대가 와도 사람들이 신을 믿을 것인지 묻는다. 또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죽음이라는 고통을 줬는지, 죽은 후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말을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한다. 이 책은 앞으로 출간될 총 20권짜리 ‘이어령 대화록’ 시리즈의 첫 작품. 앞으로도 대화록 시리즈는 계속된다. 평범한 아버지로서의 고인이 궁금하다면 에세이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를 펼쳐보자. 딸 이민아 목사(1959∼2012)는 시대의 지성인으로 바쁘게 살아온 아버지가 한때는 자식들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선지 딸이 세상을 떠난 뒤 눈물과 회한 속에서 살아온 고인이 딸에게 바친 이 반성문은 절절하기 그지없다. 이 목사의 10주기인 3월 15일을 앞두고 세상을 떠난 고인은 딸처럼 끝까지 항암치료를 거부했기에 부녀(父女)의 모습은 더 특별하다. 책의 서문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들을 향한 유언처럼 느껴진다. “이제 마음 놓고 울어도 된다. 그 눈물과 울음소리는 슬픔이 아니라 황량한 불모의 땅을 적시는 비요, 겨울이 가고 꽃피는 봄을 노래하는 새소리가 됐으니까. 쓴 사람과 읽는 사람의 영혼이 달라진 게다. 선혈이 흐르던 상처가 아물고 그 딱지가 떨어진 아픈 살에서 새살이 돋는다. 찬란한 아침을 약속하는 굿나잇 키스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지난달 26일 별세한 고(故)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은 평생 베스트셀러 작가로 살아왔다. 한국 문화의 본질을 파고든 에세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3년), 일본 문화를 파고든 문화비평서 ‘축소지향의 일본인’(1982년),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융합을 강조한 미래전망서 ‘디지로그’(2006년)…. 고인이 생전에 펴낸 책만 300여 권에 달한다. 그의 책을 찾는 독자들의 발길로 서점이 붐비는 이때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남긴 저작 2권과 ‘아버지 이어령’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책을 소개한다. ‘한국인 이야기: 너 어디에서 왔니’는 한국인의 탄생 문화를 파고든 인문학서다. 고인은 출산 전 태아에 태명을 붙이는 문화는 여러 나라에 있지만 한국에서 이 문화가 크게 발달했다고 말한다. 서양과 달리 어머니 뱃속에 있는 시간도 한 살로 치듯 생명을 존중하는 한국인의 사상이 담겨있다는 것. 그는 갓난아기를 포대로 업는 어부바는 사랑과 정이 담긴 문화라고 강조하고, 돌잔치에서 아이가 집는 물건으로 아이의 미래를 점치는 돌잡이를 스스로 운명을 택하는 한국인의 특성이 반영됐다고 짚는다. 이처럼 고인은 우리의 일상에서 한국문화의 특수성을 포착해낸다. 이 책은 총 10권에 걸쳐 출간되는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고인은 2009년 이 시리즈를 계획한 뒤 암에 걸렸지만 집필을 포기하지 않았다. 컴퓨터를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나빠지자 구술로 글쓰기를 이어갔다. 젓가락 문화, 인공지능(AI), 일제강점기에 대한 작품들이 연내 출간된다니 기대할 만하다. 병마와 싸우던 시절 고인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대화록 ‘메멘토 모리’를 펼쳐볼만하다.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걸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인 메멘토 모리는 고인의 좌우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1910~1987)이 세상을 떠나기 전 신부들과 이야기를 나눈 24가지 주제를 고인이 다시 꺼내들었다. 기독교 신자인 고인은 무병장수의 시대가 와도 사람들이 신을 믿을 것인지 묻는다. 또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죽음이라는 고통을 줬는지, 죽은 후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말을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한다. 이 책은 앞으로 출간될 총 20권짜리 ‘이어령 대화록’ 시리즈의 첫 작품. 앞으로도 대화록 시리즈는 계속된다. 평범한 아버지로서의 고인이 궁금하다면 에세이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를 펼쳐보자. 딸 이민아 목사(1959~2012)는 시대의 지성인으로 바쁘게 살아온 아버지가 한때는 자식들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선지 딸이 세상을 떠난 뒤 눈물과 회한 속에서 살아온 고인이 딸에게 바친 이 반성문은 절절하기 그지없다. 이 목사의 10주기인 3월 15일을 앞두고 세상을 떠난 고인은 딸처럼 끝까지 항암치료를 거부했기에 부녀(父女)의 모습은 더 특별하다. 책의 서문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들을 향한 유언처럼 느껴진다. “이제 마음 놓고 울어도 된다. 그 눈물과 울음소리는 슬픔이 아니라 황량한 불모의 땅을 적시는 비요 겨울이 가고 꽃피는 봄을 노래하는 새소리가 됐으니까. 쓴 사람과 읽는 사람의 영혼이 달라진 게다. 선혈이 흐르던 상처가 아물고 그 딱지가 떨어진 아픈 살에서 새살이 돋는다. 찬란한 아침을 약속하는 굿나잇 키스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한 시대의 정신문화를 일깨운 우주를 휘두르는 빛의 붓, 뇌성벽력의 그 생각과 말씀 천상에서 더 밝게 영원토록 펼치옵소서.” 이근배 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은 2일 오전 10시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린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의 영결식에서 직접 지은 시 ‘한 시대의 새벽을 깨운 빛의 붓, 그 생각과 말씀 천상에서 밝히소서’를 읊었다. 이 전 회장은 고인과 1972년 월간 ‘문학사상’을 함께 창간한 인물. 이 전 회장은 “(고인은) 20세기 한국의 뉴 르네상스를 떠받친 메디치로 영원히 새겨질 것”이라고 추모했다. 영결식에서 장례위원장인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고인의 업적을 기리며 “우리는 꺼져가는 잿더미의 불씨를 살리는, 시대의 부지깽이를 잃었다”며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는 그 말에 늦었지만, 같은 말로 화답드리고 싶다”고 했다.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는 “8자를 옆으로 눕히면 무한대의 기호 뫼비우스의 띠가 된다던 선생님이기에 90을 문턱에 두고 영원을 보려고 그리 서둘러 떠나셨습니까”라며 “죽음을 기억하는 일이 삶을 진정하게 사는 것임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 메멘토 모리”라고 했다. 앞서 이날 오전 8시 이 전 장관의 발인식은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유족과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애도 속에 진행됐다. 고인의 영면을 기원하는 발인 예배는 이 전 장관의 조카인 여의도 순복음교회 강태욱 목사가 인도했다. 고인의 부인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은 예배를 마치고 빈소를 나서다 영정을 돌아보며 눈을 감은 채 남편을 향해 다시 한번 작별 인사를 건넸다. 고인 영정과 위패는 손자가 들었고 유족들이 그 뒤를 따랐다. 운구차는 빈소를 떠나 이 전 장관 부부가 설립한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과 옛 문화부 청사 자리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거쳐 영결식 장소로 향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외벽에 마련된 초대형 미디어 캔버스 ‘광화벽화’에는 “인간이 선하다는 것을 믿으세요. 그 마음을 나누어 가지며 여러분과 작별합니다”, “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나는 돌려주려고 해요. 애초에 있던 그 자리로, 나는 돌아갑니다”라는 고인의 생전 메시지가 띄워졌다. 이 전 장관은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자택에서 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이 전 장관의 장례는 5일간 문화체육관광부장으로 치러졌다. 빈소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이재명 윤석열 안철수 등 각 당 대선 후보들을 비롯해 조정래 이문열 윤후명 박범신 김홍신 작가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대거 조문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방금 주문한 사람인데요. 제가 음식을 담을 용기를 가게로 가져가 포장해 오려 합니다.” 지난달 초 소설가 박서련(33)은 ‘배달의민족’ 애플리케이션으로 매운 갈비찜을 주문한 뒤 가게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앱에선 포장 주문은 가능하지만 포장 용기를 고객이 선택하는 옵션은 없다. 그 대신 그는 앱 주문 시 가게 주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로 “용기를 가져가겠다”고 쓰고 전화를 걸어 자신의 특별한(?) 요청을 알렸다. 그는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가게에 간 뒤 자신의 냄비에 음식을 담아 와 먹었다. 그가 최근 배달 앱 회사가 운영하는 블로그 배민다움에 연재한 에세이 ‘소설가가 입사했다’의 내용이다. 지난달 28일 화상으로 만난 그는 “배달 앱 회사와 협업하며 에세이를 쓰던 중 한식, 중식, 일식 가게에서 10번에 거쳐 플라스틱 용기를 줄이는 시도를 했다”며 “매일 배달 앱을 이용하기에 환경 보호를 실천하려 했다”고 말했다. “혼자 서울에서 자취하다 보니 배달 앱을 통해 식사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아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최근엔 사용량이 더 늘었죠. 월 20회 이상 주문을 해 고객 등급 중 가장 높은 ‘천생연분’ 등급을 받을 정도여서 이런 생각이 났는지도 몰라요.” 지난해 9월 배달의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은 박 작가에게 협업을 제안했다. 소설가로서 회사에 가상으로 입사해 자유롭게 업무를 체험하고 글을 써달라는 것. 박 작가는 지난해 12월부터 올 1월까지 2개월 동안 취재했다. 음식가게 주인, 고객, 우아한형제들 직원 등 그가 만난 이들은 40여 명. 그는 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을 때 회사 내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채식 주문이 얼마나 많은지를 5편의 에세이로 풀었다. 고객이 음식을 주문하고 받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다투며 치열하게 움직이는 모습도 담았다. 지난해 젊은작가상을 받은 순수문학 작가로서 기업과의 협업에 부담은 없었는지 묻자 그는 자신 있게 답했다. “애용하던 기업에 관해 자유롭게 썼는데 꺼릴 것이 뭐가 있나요. 이 에세이는 해당 배달 앱이 최고라고 외치는 ‘용비어천가’가 아니에요. 기업에서 근무해 본 경험이 없었는데 세상에 대해 배우는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방금 ‘배달의 민족’으로 주문한 사람인데요. 제가 음식을 담을 용기를 가게로 가져가 포장해오려 합니다.” 지난달 초 소설가 박서련(33)은 배달 애플리케이션 배달의 민족으로 매운 갈비찜을 주문한 뒤 가게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배달의 민족에선 포장 주문은 가능하지만 포장 용기를 고객이 직접 선택하는 옵션은 없다. 대신 그는 앱 주문 시 가게 주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로 “용기를 가져가겠다”고 쓰고 전화를 걸어 자신의 특별한(?) 요청을 재차 알렸다. 그는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가게에 간 뒤 자신의 냄비에 음식을 포장해 집에 와서 맛있게 먹었다. 그가 최근 배달의 민족의 블로그 배민다움에 연재한 에세이 ‘소설가가 입사했다’의 내용이다. 지난달 28일 화상회의 플랫폼으로 만난 그는 “배달의 민족과 협업을 하며 에세이를 쓰던 중 한식, 중식, 일식 가게에서 10번에 거쳐 플라스틱 용기를 줄이는 색다른 시도를 했다”며 “매일 배달의 민족을 이용하는 이용자로서 환경 보호를 실천하려 했다”고 했다. “혼자 서울에서 자취하다보니 배달의 민족으로 식사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아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최근엔 사용량이 더 늘었죠. 배달의 민족으로 월 20회 이상 주문을 해 고객 등급 중 가장 높은 ‘천생연분’ 등급을 받을 정도인 저라 생각해 낸 아이디어일지도 몰라요.” 지난해 9월 배달의 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 형제들은 박 작가에게 협업을 제안했다. 소설가로서 우아한 형제들에 가상으로 입사해 자유롭게 업무를 체험하고 글을 써달라는 것. 박 작가는 지난해 12월부터 올 1월까지 2개월에 거쳐 직접 취재를 했다. 음식가게 주인, 배달의 민족 고객, 우아한 형제들 직원 등 그가 만난 이들만 40여 명. 그는 배달의 민족 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을 때 회사 내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배달의 민족에서 채식이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우아한 형제들 본사 내부는 어떻게 생겼는지를 5편의 에세이로 풀었다. 영국 작가 알랭 드 보통이 영국 런던 히드로 공항에 머물며 기업으로서의 공항의 모습을 쓴 에세이 ‘공항에서 일주일을’(청미래·2009년)이 생각난다. 지난해 젊은작가상을 받을 정도로 촉망받는 순수문학 작가로서 사기업과의 협업에 부담은 없었을까 묻자 그는 자신 있게 답했다. “제가 평소에 자주 애용하던 기업에 관해 자유롭게 썼는데 꺼릴 것이 뭐가 있나요. 이 에세이는 배달의 민족이 무조건 최고라고 외치는 ‘용비어천가’가 아니에요. 기업에서 근무해 본 경험 없는 소설가로선 세상에 대해 배우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이 시대를 대표하는 석학(碩學)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사진)이 26일 서울 종로구 자택에서 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향년 88세.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1956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고인은 같은 해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 비평문을 발표해 문단에 파문을 일으켰다. 33세에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1972년 출판사 ‘문학사상사’를 설립해 월간 ‘문학사상’을 창간하고 ‘이상문학상’을 제정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을 맡아 냉전 종식을 호소하는 명문 ‘벽을 넘어서’를 만들었고, 굴렁쇠 소년을 기획해 평화의 가치를 세계에 고요하고도 강렬하게 알렸다. 1990년 노태우 정부에서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내며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을 설립했다. ‘축소 지향의 일본인’ 등 저서 300여 권을 낸 고인은 학문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 통섭의 대가였다. 산업화는 뒤졌지만 정보화만큼은 앞서 가야 한다며 아날로그와 디지털 문명을 합친 ‘디지로그’ 개념을 제시하는 등 시대를 꿰뚫고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지녔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집필을 이어간 고인은 지식을 행동으로 실천한 진정한 거인이었다. [이어령 1934∼2022]웃으며 떠난 ‘시대의 석학’22세에 쓴 문단 비판 기고로 파란…‘문학사상’ 창간 ‘이상문학상’ 제정서울올림픽-한일월드컵 등 기획자…새 변화 탐구하며 미래학자 역할도항암치료 거부…친병생활하며 집필 26일 낮 12시 20분경 서울 종로구 자택에서 영면한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은 끝까지 진통제를 먹지 않았다. 죽음이 다가온 순간에도 초롱초롱한 눈빛을 잃지 않았다. 그가 항상 강조하던 ‘메멘토 모리’(“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를 최후의 순간까지 실천하며 죽음 앞에서 의연했던 것. 장남 이승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돌아가시기 30분 전까지 가족을 향해 활짝 웃으시고 손을 흔들었다”며 “호기심에 가득 차서 죽음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끝까지 관찰하시는 듯했다”고 전했다. 고인은 지난해 12월 22일 동아일보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집필) 시간이 없어 절박하다. 어쩌면 내일 해를 보지 못한다”며 집필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밝혔다.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친병(親病)’ 생활을 한 이유도 글쓰기 때문이었다. 300여 종의 책을 낸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출간 계약한 책만 40권. ‘한국인 이야기’ 두 번째 책은 이르면 다음 달, ‘이어령 대화록’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인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어요’는 4월에 각각 출간될 예정이다. 윤재환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사무국장은 “별세 전날인 25일 오전까지 다음 주 일정을 확인하고 아이디어 회의를 열 정도로 생생한 아이디어가 넘쳤던 분”이라고 말했다. 그가 세상에 이름을 알린 건 얼굴의 여드름도 채 가시지 않은 스물두 살 때였던 1956년. 한국일보에 기고한 ‘우상의 파괴’로 문단에 파문을 일으켰다. 당대 거장들을 ‘우상’으로 몰아붙이며 소수 원로 문인들에 좌지우지됐던 한국 문단의 권위주의와 위선을 아프게 꼬집었다. 고인은 1972년 월간 ‘문학사상’을 창간하고 주간을 맡아 한국의 대표 문학잡지로 키워냈다. 서울대 국문과 재학 시절 ‘이상론’을 발표하며 평론가로서의 첫발을 내디딘 그는 1977년 문학사상에서 ‘이상문학상’을 제정했다. 고인과 문학사상을 함께 창간한 이근배 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은 “고인은 당시 ‘천재 비평가’라는 평가를 받으며 문학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다”며 “문학 강연을 다닐 때면 줄을 서서 입장할 정도로 한국 문학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말했다. 고인은 문화 연구에도 탁월한 안목을 지녔다. 1년에 걸친 일본에서의 연구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어로 집필해 1982년 펴낸 일본 문화비평서 ‘축소지향의 일본인’이 대표적이다. 이 책은 “일본인보다 일본인과 일본사회를 날카롭게 파악했다”는 현지의 찬사를 받으며 한일 양국에서 ‘이어령 신드롬’을 일으켰다. 동서양 문화와 한중일 3국의 문화적 차이에 대한 관심은 기호학회 창립과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개소로 이어졌다. 수많은 직함과 호칭 중 고인이 가장 좋아했던 건 ‘문화 창조자’였다. 고인은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 식전행사 기획자, 1990년 초대 문화부 장관, 2002년 한일 월드컵 총괄기획자 등 굵직한 직책을 맡았다. 방대한 활동을 펼친 데 대해 그는 “난 평생 지적 호기심으로 우물을 판 사람”이라고 말했다. 여러 대의 컴퓨터와 모니터를 두고 글을 쓸 정도로 늘 새로운 정보와 변화에 목말라 했던 고인.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엄청난 독서량과 예민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그는 시대를 관통하는 새 개념들을 제시한 미래학자이기도 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문명의 융합인 ‘디지로그’를 주창하며 이를 한국인이 주도해 나갈 첨단정보사회의 핵심으로 꼽았다. 말년엔 생명이 자본이 된다는 ‘생명자본주의 운동’에 큰 애착을 보이며 생명 가치를 중시했다. 고인은 지난해 10월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강인숙 영인문학관장, 장남 이승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차남 이강무 백석대 교수가 있다. 장녀 이민아 목사는 2012년 위암으로 별세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네가 간 길을 이제 내가 간다. 그곳은 아마도 너도 나도 모르는 영혼의 길일 것이다.”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은 별세 나흘 전인 22일 곧 출간될 시집 ‘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에 실릴 서문을 썼다. 딸 이민아 목사(1959∼2012)의 10주기인 3월 15일을 앞두고 자신이 같은 길을 갈 것을 예감한 것이다. 딸이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세상을 떠난 모습을 보며 그는 자신의 마지막도 비슷한 모습이기를 바랐다고 한다. 1981년 이화여대 영문학과를 조기 졸업한 이 목사는 김한길 전 의원과 결혼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로스쿨을 마치고 캘리포니아주 검사로 임용됐지만 결혼 5년 만에 이혼했다. 이 목사는 무신론자였던 이 전 장관을 개신교 신앙으로 이끌었다. 이 목사는 에세이 ‘땅끝의 아이들’(2011년)에서 “아버지에게는 돈 걱정이나 장래에 대한 불안 등 당신이 겪었던 두려움을 아이들에겐 안 줘야겠다는 책임감이 사랑의 표현 방법이었던 것 같았다”고 썼다. 이 전 장관은 딸의 3주기를 맞아 2015년 에세이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를 출간하며 애틋함을 표현했다. 책에는 이 목사가 어릴 때 ‘굿나잇’ 인사를 제대로 해주지 못한 데 대한 미안함과 함께 전하지 못한 사랑을 담았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은 먼저 작고한 딸 이민아 목사(1959∼2012)의 10주기인 3월 15일을 앞두고 별세했다. 이 전 장관은 평소 딸이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세상을 떠난 모습을 보며 자신의 마지막도 비슷한 모습이기를 바랐다고 한다. “최후의 순간, 항암치료보단 삶에 대한 의지를 강조한 부녀(父女)의 마지막이 닮았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1981년 이화여대 영문과를 조기 졸업한 이 목사는 김한길 전 의원과 결혼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서 로스쿨을 마치고 캘리포니아 주 검사로 임용됐지만 결혼 5년 만에 이혼했다. 이 목사는 2007년에는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 재학 중이던 아들이 원인 모를 병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는 아픔을 겪었다. 이 목사는 1992년 세례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교회에서 신앙 고백을 하는 등 개신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 2009년 목사가 됐다. 이성주의자이자 무신론자였던 이 전 장관을 개신교 신앙으로 이끈 인물이기도 하다. 이 목사는 위암 말기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뒤엔 항암치료를 거부하다 2012년 세상을 떴다. 이 전 장관은 이 목사의 3주기를 맞아 2015년 에세이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를 출간하며 딸에 대한 애틋함을 표현했다. 이 전 장관은 이 책에서 “아버지들은 딸을 구한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딸이 아버지를 구하는 일이 더 많다”고 고백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이 시대 지성을 대표하는 석학(碩學)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이 26일 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향년 88세. 그는 지난해 12월 22일 동아일보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시간이 없어 절박하다. 어쩌면 내일 해를 보지 못한다”고 밝혔다. 고인은 암 투병 사실이 알려진 뒤에도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죽음이 목전에 와도 글을 쓰겠다”며 집필을 이어왔다.● 88올림픽 식전행사 기획한 르네상스인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6년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했다. 1955년 서울대 문리대학보에 발표한 ‘이상론’으로 신진 문학 평론가로서 가능성을 보인 그는 1956년 한국일보에 게재한 ‘우상의 파괴’ 비평문으로 문단에 파문을 일으켰다. 1960년에는 26세의 나이로 서울신문 논설위원에 발탁됐고 이후 한국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 조선일보를 거쳤다. 고인은 1967년 33세의 나이로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로 임용돼 30년 넘게 강단에 섰다. 1973년에는 잡지 ‘문학사상’과 출판사 ‘문학사상사’를 설립했고, 1977년 국내 최고 권위의 문학상 중 하나로 꼽히는 ‘이상 문학상’을 제정했다. 고인은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막식 식전행사 기획자로도 활약했다. ‘화합과 전진’이라는 주제의식과 역동성을 모두 표현해낸 명문으로 평가받는 ‘벽을 넘어서’ 구호와 개막식에 등장한 굴렁쇠 소년 기획 모두 고인의 아이디어였다. 1990년 노태우 정부에서 초대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고인은 당시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을 설립했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는 경복궁 복원계획을 수립했다. 미술 대중화에 기여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움직이는 미술관’ 행사를 기획하기도 했다. 또 문화예술상(1979), 체육훈장맹호장(1989), 일본문화디자인대상(1992), 대한민국녹조훈장(1992), 대한민국 예술원상(2003), 3·1문화상 예술상(2007), 자랑스러운 이화인상(2011), 소충사선문화상 특별상(2011) 등을 받았다.● 마지막까지 빛난 통찰력 이 전 장관은 동아일보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코로나 사태 등에 대한 통찰력있는 전망을 내놓았다. 그는 “독재자를 피해선 도망갈 수 있지만 지금은 도망가면 백신도 맞을 수 없다”며 “각국 지도자들이 백신을 배급해 생명을 살려주는 신과 같은 존재로 군림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포스트 코로나를 이끄는 건 주류가 아니라 보리밭처럼 밟히고 올라온 마이너리티가 될 것”이라며 “사람들의 편견을 바로잡는 역할을 지식인이 해야 한다. 하지만 요즘 지식인들은 정치, 경제에 종속됐다. 정치 밖에서 정치를 객관화하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코로나 사태로 생명가치에 대한 중요성이 커질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았다. 그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전 국가를 판단하던 기준인 GDP(국내총생산) 수치가 환자 수, 사망자 수로 바뀌었다. 물질 가치가 ‘생명 가치’로 바뀐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고인이 말년에 가장 큰 애착을 보였던 것은 ‘생명자본주의 운동’이었다. 그가 2014년 벽두에 출간한 ‘생명이 자본이다’는 ‘생명애’와 ‘장소애’ ‘창조애’라는 세 가지 사랑을 키워드로 우리 삶을 지배하는 산업·금융자본주의 모델의 대안을 탐색하는 책이다. 유럽과 미국발 금융위기를 지켜보며 생명 자본주의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어왔다는 그는 “생산이 아닌 살아있는 번식을 모델론 한 경제, 생명과 사랑이 녹아있는 경제, 돈이 자본이 되는 시대가 아니라 생명이 자본이 되는 시대가 오고 있다”고 예견했다.유족으로는 부인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 장남 이승무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 교수, 차남 이강무 백석대 애니메이션과 교수가 있다. 고인의 장녀 이민아 목사는 2012년 위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고 장례는 5일간 문화체육관광부장으로 치러진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2001년 영국 시골 마을에서 한 여성의 시신이 여행용 트렁크 안에서 발견됐다. 시신은 태아처럼 팔과 다리를 웅크린 상태였다. 얼굴과 몸은 심하게 훼손돼 있었다. 영국 경찰은 시신의 유전자, 지문을 분석했으나 영국인 중에선 신원을 확인하지 못했다. 결국 해부학적 지식을 활용해 법률적 문제를 해결하는 법의학자인 저자가 수사에 투입됐다. 시신의 뼈를 분석한 저자는 시신을 20∼25세 여성으로 추정했다. 가슴 한가운데에 있는 세로로 길쭉하고 납작한 ‘복장뼈’의 모양이 그 근거였다. 보통 인간의 복장뼈는 어릴 때 6조각으로 쪼개져 있지만 20대가 되면 3조각으로 합쳐진다. 시신의 복장뼈는 3조각에 가까웠으나 아직 완전히 합쳐진 모습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이를 추정할 수 있었다. 저자는 또 시신의 두개골과 치아를 분석해 동아시아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 냈다. 경찰은 법의학적 소견을 바탕으로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와 공조수사를 벌였고 시신은 21세 한국 여성으로 확인됐다. 영국 여행 중 머물던 민박집 주인에게 살해당했던 것이다. 범죄 수사에서 법의학의 힘은 강력하다. 피부, 지방, 근육, 장기가 다 썩어 흙으로 돌아간 뒤에도 뼈는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의 저명한 법의학자인 저자는 자신이 직접 수사에 참여한 사건들을 풀어놓는다. 저자가 범죄의 실마리를 찾는 이 논픽션은 영국의 의사이자 작가인 아서 코넌 도일(1859∼1930)의 소설 셜록 홈스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뼈는 범죄자가 말하지 않는 진실을 이야기한다. 이른바 ‘간병인 살인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어느 날 한 영국인 여성은 과거 자신이 노부인의 시신을 인근 건물의 뒷마당에 묻었다고 경찰에 자수했다. 여성은 약 20년 전 자신이 간병하던 노부인이 죽은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지만, 경찰과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암매장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하지만 저자는 시신의 목뼈에서 둔기로 최소 2회의 타격이 가해졌을 때 생기는 골절 흔적을 찾았다. 사고사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증거였다. 여성은 결국 자신이 노부인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억울한 죽음의 진실이 법의학으로 인해 밝혀지기도 한다. 영국의 11세 소년이 스스로 목을 매 숨진 사건이 어느 날 벌어졌다. 유서는 없었다. 경찰은 가족과 친구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소년이 학대받은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엑스레이 촬영 결과 정강이뼈에서 가늘고 비스듬한 3개의 ‘해리스선’이 발견됐다. 해리스선은 발육이 중단됐다 재개됐을 때 뼈에 남는 흔적이다. 시신이 스트레스로 인해 성장에 문제를 겪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단서였다. 결국 경찰은 재수사에 돌입했고, 소년이 가족의 학대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물론 법의학이 모든 사실을 밝혀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저자는 유골을 분석하다 인간이 아닌 동물의 뼈라는 사실을 알고는 허망해하고, 심하게 훼손돼 범죄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뼈를 두고 좌절한다. 하지만 뼈에 남은 사소한 단서는 망자가 죽은 이유를 밝혀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내기도 한다. 어쩌면 법의학자란 범죄 피해자의 가족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 아닐까. 시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고, 망자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알아야 한을 풀어줄 수 있을 테니.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국민이 시를 많이 읽어야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힘이 생겨납니다.” 정철원 협성종합건업 회장(76·사진)은 24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국민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선 시를 읽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고, 이 때문에 영랑시문학상을 지원하고 있다는 것. 정 회장은 2020년 영랑 선생의 시문학정신을 높이는 데 써 달라며 9000만 원을 강진군에 기탁했다. 정 회장은 “요즘 사람들이 시를 등한시하고 잊어버리는 게 안타까워 영랑시문학상 지원을 시작했다”며 “시를 읽으면 섬세한 감정을 지닐 수 있기에 주변 사람들에게도 항상 시를 읽으라고 권한다”고 했다. 정 회장은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 1학년 때 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읽고 반했다. 그는 영랑 생가가 있는 강진을 10여 차례 찾았고 직접 지은 아파트 단지 3곳의 벽면과 돌담에 영랑의 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을 쓴 조형물을 설치할 정도로 영랑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그는 “60여 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도 영랑의 토속적 시어와 민요적 운율을 늘 가슴에 담고 있었다”며 “영랑의 시와 영랑시문학상이 널리 알려져 제2의 영랑이 배출되기를 기원한다”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동아일보와 전남 강진군이 공동 주최하는 제19회 영랑시문학상 본심에 오른 후보작이 선정됐다. 영랑시문학상 예심 심사위원회는 18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동아일보 사옥에서 심사를 진행해 5개 작품을 선정했다고 24일 밝혔다. 영랑시문학상은 섬세하고 서정적인 언어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영랑 김윤식 선생(1903∼1950)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그의 시 세계를 창조적으로 구현한 시인을 격려하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영랑시문학상 운영위원회(위원장 신달자 시인)는 올해 운영 요강과 심사위원 위촉 및 심사 기준을 확정하고 예·본심 심사위원단을 구성했다. 예심 위원인 박종국 홍일표 이은규 시인은 등단한 지 20년 이상 된 시인이 2020, 2021년 출간한 시집을 대상(기존 수상작 제외)으로 올 1월부터 15개 작품을 선정했다. 이 중 심사를 거쳐 5개 작품을 본심에 올렸다. 본심에 오른 작품은 △김후란 시인의 ‘그 별 우리 가슴에 빛나고’ △나희덕 시인의 ‘가능주의자’ △신용목 시인의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 △이재훈 시인의 ‘생물학적인 눈물’ △이현승 시인의 ‘대답이고 부탁인 말’이다(작가명 가나다순). 김 시인의 ‘그 별 우리…’에는 박목월, 윤동주, 정지용, 한용운 시인에 대한 헌사가 담긴 시들이 실려 있다. 한국 시인들이 비극적 역사를 어떻게 견디며 시의 명맥을 지켜왔는지를 엿볼 수 있다. 예심 심사위원들은 “시가 그려내는 별자리는 어느덧 한자리에 모여 미학에 이른다”고 평가했다. 나 시인의 ‘가능주의자’에서는 오랫동안 시에 천착한 작가의 시선이 깊어졌다. 시인은 사회문제에 대해 회의적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삶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제한된 상황에 굴하지 않고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어보도록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신 시인의 ‘비에 도착하는…’은 일상에서 무심히 지나친 감정을 곱씹는다. 시인은 사랑과 이별, 운명과 필연, 생성과 소멸을 애잔하게 노래한다. 심사위원들은 “지난 과거와 돌이킬 수 없는 관계에 대한 아름다움과 슬픔이 녹아 있다”고 평가했다. 이재훈 시인의 ‘생물학적인 눈물’은 슬픔을 부정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대면해야 하는 물질로 바라본다. 시인은 힘든 현실을 버텨내기 위해 환상으로 도망치지 않고 고통을 끌어안는다. “슬픔을 물질화한다는 것은 온전히 그것과 대면하는 행위”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현승 시인의 ‘대답이고 부탁인 말’에는 삶을 둘러싼 질문과 대답이 가득하다. 하지만 시인은 질문에 대해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뿐 단언하지 않는다. “시인의 언어는 일상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수용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는 심사위원들의 평가가 나온 이유다. 심사위원들은 “다양한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시집들이 다수 출간됐다는 사실에 놀랐다”며 “중견 시인들의 아름다운 시들이 내포하고 있는 미적 감각과 깊이 있는 성찰에 가슴 벅찬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본심은 다음 달 18일 열린다. 시상식은 4월 28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동아일보 사옥에서 개최된다. 상금은 3000만 원.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난 카페서 매일 공부하는 할머니”… 48세부터 4개 언어 학위 따 번역 일 도서관 사서로 20년 가까이 일하던 어느 날 은퇴가 다가오는 게 실감났다. 다 큰 자식들은 집에 늦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유시간이 생겼고 체력은 여전했다. 친구들과 수다 떠는 일로 여생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뒤늦게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한국방송통신대에서 영문학 중문학 불문학 일본학을 전공했다. 번역가 양성 학원도 다닌 덕에 번역가라는 제2의 직업을 얻었다. 여태 번역한 책이 약 20권. 최근 에세이 ‘카페에서 공부하는 할머니’(더퀘스트)를 펴낸 심혜경 씨(64) 이야기다. 성균관대 국문과를 졸업한 후 서울시교육청 산하 공공도서관 사서로 27년간 일한 그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50대가 되자 슬슬 은퇴 후의 삶이 고민됐다. 은퇴를 10년 앞둔 48세부터 외국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학부 3학년으로 들어가는 방송통신대 학사편입을 통해 8년간 4개 전공을 하며 외국어 4개를 익혔다. 전공별로 편입 후 졸업까지 4학기 동안 집중 수강해 짧은 기간에 외국어 기초를 익힐 수 있었다. 그는 “사서여서 책읽기를 좋아한 데다 다양한 원서를 읽고 싶은 마음에 외국어 공부에 도전했다”고 말했다. 늦은 나이의 공부가 쉽지는 않았다. 퇴근 후 오전 2, 3시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공부했다. 빨래, 청소 등 일거리가 쌓여 있는 집에서는 집중하기 힘들어 휴일이나 밤마다 카페로 갔다. 서울 경복궁역 근처 카페와 동네 카페 창가 자리, 서촌 한옥카페가 그의 공부방이 됐다. 그는 “걸으며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들고 다니면서 약속 장소 앞 카페에서 틈틈이 공부했다”고 말했다. 그는 언론사 문화센터에 개설된 번역가 양성 과정도 다녔다. 번역을 전문적으로 배우면 원서를 읽을 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취미라고 여겼지만 수업을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번역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그렇게 시작한 번역가 경력이 올해로 13년째. 영국 작가 헬레인 한프의 에세이 ‘마침내 런던’(에이치비프레스·2021년) 등 번역한 신간이 쌓이면서 이제는 관련 강연에도 종종 초청받는다. 요즘은 바이올린, 기타, 수채화를 배우고 영화 이론을 공부하는 등 각종 예술 분야를 파고들고 있다. 공부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는 이유를 묻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환갑이 넘었지만 저는 정말 건강해요. 아이들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며 살고 싶지도 않고요. 공부야말로 권태기에서 벗어나 인생을 성실히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에요. 앞으로도 매일매일 공부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습니다.”“타인 의식 않고 하고 싶은 일 해… 평생 바코드 찍는 아줌마로 살 것” 40대에 문예학 박사 학위를 땄다. 이를 살려 중국 시장 조사 업무를 하는 1인 기업을 세워 운영하기도 했다. 남들 앞에 자랑하기엔 회사를 운영하는 일, 박사 학위를 지닌 건 폼 났다. 하지만 책상 앞에 앉아 하는 일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게 편의점이었다. 몸을 조금씩 움직이는 육체노동을 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단골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크게 두렵지 않았다. 남들 시선에 연연하기보단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 편의점 점주로 살기 시작했다. 18일 에세이 ‘싸가지 없는 점주로 남으리’(몽스북)를 펴낸 박규옥 씨(55) 이야기다. 그는 18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처음엔 늦게까지 공부해서 박사 학위까지 받아놓고 ‘겨우 장사나 하려고 그랬느냐’는 주변 시선을 의식했다”고 했다. 1991년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그는 학원 강사로 일하다 가족 때문에 중국에 10여 년 머물렀다. 뒤늦게 다시 공부를 시작해 2006년 중국 선양 랴오닝대에서 중국 근·현대문학 석사, 2010년 같은 대학에서 문예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2016년부터 경기 성남시에서 전업으로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다. “오랫동안 중국에서 공부를 하고 회사 일도 했지만 작은 가게에서 단순한 일을 하는 게 낫다 싶었어요. 일터로 나오는 것이 즐겁고 즐거운 일을 하니 남들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게 됐죠.” 지적인 업무에만 익숙하던 그가 24시간 운영하는 편의점 일을 하는 게 만만치는 않았다. 새벽에 들어오는 물건을 나르다 근육통을 앓기도 하고, 밤마다 행패를 부리는 ‘진상 손님’과 마주칠 때도 있었다. 편의점 일을 버티기 위해 그는 지나치게 친절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려 노력한다. 본사 가이드라인을 벗어나는 과도한 친절은 일을 계속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생각.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들에게도 상식선에서 친절하면 된다고 알려준다”며 “편의점에서 밤낮 없이 일하면서 부당하게 욕을 들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침마다 우유를 사가는 대학생, 퇴근길에 간식거리를 사는 회사원…. 그는 가게에 자주 오는 단골손님과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서류와 싸움하는 회사 일보다 자영업자가 얻을 수 있는 기쁨은 소소한 소통이다. 힘들게 얻은 박사 학위가 아깝지 않으냐고 묻자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세상의 축소판인 편의점에서 삶의 교훈을 배우고 있기에 후회하지 않아요. 평생 바코드 찍는 아줌마로 살고 싶습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도서관 사서로 평생을 일하다 은퇴가 다가왔다. 자식들은 다 커서 집에 늦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시간은 생겼고 체력은 여전했다. 친구들과 수다 떠는 일로 여생을 보내고 싶진 않았다. 뒤늦게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한국방송통신대에서 영어영문학과·중어중문학과·프랑스언어문화학과·일본학과 학사를 땄다. 번역가 양성 학원도 다닌 덕에 이젠 번역가라는 제2의 직업을 얻었다. 여태 번역한 책이 약 20권이다. 최근 에세이 ‘카페에서 공부하는 할머니’(더퀘스트)를 펴낸 심혜경 씨(64) 이야기다. 그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아침에 남편과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면 하루 내내 집에 사람이 없지만 은퇴한 난 카페로 출근한다”며 “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카공족’이 바로 나”라고 웃었다. 그는 볕이 잘 드는 카페 창가에 앉아 매일 3, 4시간씩 공부를 하거나 번역 업무를 한다. “매일 어느 카페에 갈 지를 고른 뒤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서요. ‘집순이’에서 출근하는 직장인으로 나를 전환하는 거죠. 경복궁역 근처 프랜차이즈 카페 의자, 동네 개인 카페의 창가 자리, 서울 종로구 서촌의 골목길에 있는 한옥 카페 구석이 제 방입니다.” 성균관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그는 27년 동안 공공도서관 사서로 일했다. 일을 좋아했지만 50대가 되자 슬슬 은퇴 이후의 삶이 고민됐다. 그때 찾은 게 외국어 공부였다. 총 8년 동안 방송통신대 학사 학위를 4개 취득했다. 학사 학위가 있으면 3학년으로 편입하는 방법을 이용한 덕이다. 그는 “두 아이가 다 크고 나서 퇴근 후 나만을 위한 시간이 생기니 학교를 다시 다니고 싶었다”며 “편입해서 졸업할 때까지 4학기 동안 전공과목만 수강해서 들어 짧은 기간 안에 외국어 기초를 습득했다”고 했다. 그는 은퇴 전부터 문화센터에서 운영하는 번역가 양성 학원도 다녔다. 번역을 배우면 원서를 직접 읽을 정도로 외국어 능력이 오르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취미라고 생각했지만 수업은 한번도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참석했다. 그러다 우연히 번역 업무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조금씩 번역 일감을 받다간 사서 은퇴 후엔 출판 번역가로 산다. 이젠 강연회에도 불려갈 정도로 번역가로 커리어를 쌓았다. 가끔씩 바이올린, 기타, 수채화, 영화이론도 공부한다는 그. 이토록 공부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은 이유를 묻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환갑이 넘었지만 아직 전 너무 건강해요. 아이들이 집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며 살고 싶지도 않고요. 공부야말로 삶의 권태기를 덜어내고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에요. 앞으로도 매일매일 공부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습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주인공 김독자는 늘 패배자의 삶을 살아왔다. 중학교 땐 왕따를 당했고, 20대인 지금은 대기업 계열사의 계약직 직원으로 살고 있다. 김독자의 유일한 희망은 웹소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을 읽는 일이다. 10년간 연재된 이 인기 없는 웹소설의 독자는 오직 김독자뿐이다. 그런데 퇴근길 지하철에서 마지막 회를 읽는 순간 사건이 벌어진다. 웹소설에 등장하던 도깨비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고, 지하철에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존 미션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 그 순간 김독자는 자신이 읽던 웹소설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웹소설의 결말을 아는 유일한 독자인 김독자는 소설인지 현실인지 모를 이 세계 안으로 뛰어든다. 이 책은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을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다. 원작 웹소설은 조회수가 2억 회를 넘을 정도로 웹소설 업계에선 이미 화제성과 작품성을 입증받은 작품. 웹소설 팬들 사이에서 터져 나온 요구 덕에 종이책으로도 만나게 됐다. 예약 판매만으로 온라인 서점 알라딘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점은 문학 지형의 변화를 보여주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은 기존 문학작품과 비교해도 완성도가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주인공이 웹소설 안으로 들어간다는 설정을 통해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붕괴하는 소설적 기교는 정밀하다. 사회에서 낙오된 패배자의 삶을 그리며 현실 문제를 치밀하게 파고든다. 주인공이 현재의 기억을 가지고 자신의 과거로 돌아간다는 웹소설의 ‘회귀’ 설정을 뻔하지 않게 변주한 점도 매력적이다. 올해 종이책으로 출간된 장편소설 중에 이 정도 흡인력을 지닌 작품이 있는지 되돌아보게 될 정도다. 출판계가 웹소설에 문을 여는 현상은 반가운 일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국내 웹소설 시장 규모는 2013년 약 100억 원에서 지난해 약 6000억 원으로 성장했다. 전체 출판시장이 쪼그라드는 가운데서도 웹소설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만큼 출판계가 웹소설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특히 스마트폰으로 주로 소비하는 웹소설과 달리 단행본은 소장 욕구를 자극할 수 있어 출판사 판매에도 유리하다. 다만 소장욕을 더 자극하기 위해서 이 작품을 페이퍼백이 아닌 양장본으로 출간했으면 어땠을까. 교보문고는 7일 기존에 운영하던 웹소설 플랫폼 ‘톡소다’에서 웹툰 서비스를 시작하고 톡소다에서 연재된 웹소설을 직접 웹툰으로 제작할 계획이다. 예스24도 웹소설 플랫폼 ‘북팔’을 인수했다. 웹소설과 웹툰을 단행본으로 펴내기 위해 준비하는 여러 출판사들의 소식도 들린다. 앞으로도 출판계가 웹콘텐츠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모습을 더욱 기대해 본다. 그래야 출판계가 새로운 성장 동력을 놓치고 있다는 독자들의 불만을 듣지 않을 테니.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