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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해보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살금살금 다가와 딱 보름이 남았다! 산타 할아버지가 떨어뜨린 선물을 대신 전하려는 눈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 ‘크리스마스 선물’(강산 지음·한솔수북·1만2500원)과 많은 아이들이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이유를 깜찍한 상상력으로 풀어낸 ‘백만 억만 산타클로스’(모타이 히로코 지음·마리카 마이야라 그림·우리나비·1만2000원)는 마음을 포근하게 데워준다. ‘산타 할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라면’(허은미 지음·이명애 그림·풀빛·1만2000원)은 한번쯤 상상해봤을 법한 소망을 그렸다. ‘삐삐 롱스타킹’으로 유명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쓴 동화 ‘에밀의 크리스마스 파티’(비에른 베리 그림·논장·9000원)에는 마을 사람들이 벌이는 소동이 유쾌하게 펼쳐진다. 반짝이는 전구와 캐럴이 없어도 책으로 만나는 크리스마스는 정겹다.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진이 다 빠져서 퇴근하면 아이도, 남편도 온통 해 달라는 것 투성이야. 나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 맞벌이를 하는 친구가 호소했다. 친구도 자신을 챙겨줄 존재가 절실히 필요하단다. 바로 아내다. 호주의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고위직에 오르는 여성이 여전히 부족한 건 가사노동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주당 70시간을 일해야 성공할 수 있는 직업군에서 남성들은 아이를 키우고 살림하는 아내가 있기에 업무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맞벌이를 해도 집안일 대부분을 떠안아야 하는 여성이 승진할 확률은 낮을 수밖에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14년 여성은 하루 평균 4시간 33분 가사노동을 하는 데 비해 남성은 2시간 21분으로 절반에 그친다. 한국은 격차가 더 크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여성이 집안일을 한 시간은 3시간 14분이었지만 남성은 5분의 1인 40분에 불과했다. 저자는 여성의 승진을 제한하는 유리천장이 아니라 남성이 일터에서 집으로 향하는 것을 가로막는 ‘유리 비상계단’에 대해 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은 새롭지 않다. 그럼에도 이를 어렵게 하는 사회구조를 촘촘히 짚어내고 자신의 경험과 각종 사례를 발랄한 문체로 맛깔스럽게 버무려내 설득력을 높인 것이 이 책의 강점이다. 세 자녀의 엄마인 저자는 캥거루 봉제인형과 함께한 활동을 사진 찍어 스크랩하는 아이의 과제를 깜빡 잊고 챙기지 못했을 때 ‘인간으로서 실패한 것 같았다’고 토로한다. 커피숍에 가려 해도 분유, 기저귀, 손수건 등 온갖 물건을 ‘우주탐사’하듯 챙겨야 하고, 집에서 일하더라도 집요하게 저자의 콧구멍에 시리얼을 집어넣는 아이를 상대해야 한다. 출장으로 집을 비울 때는 오전 7시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도 오전 1시까지 식사를 미리 준비해 놓고 가야 뭔가 속죄하는 기분이 든단다. 남성이 집안일을 하려면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을 줄이거나 원하는 시간에 근무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근무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늘리기보다는 현재 있는 직원에게 더 많은 업무를 안긴다. 노동운동 역시 정규직 유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꼬집는다. 근무시간을 줄이거나 원하는 시간에 일하는 탄력 근무를 지원하는 남성은 승진할 생각이 없는 인물로 간주된다. 아이를 학교에서 데려오기 위해 오전 7시부터 오후 3시까지 근무하는 남성은 퇴근할 때마다 동료에게서 “일찍 가서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전업주부 남성을 바라보는 시선도 따갑다. 사람들은 “취직이 안 돼요?”, “언제 복직해요?”라고 묻거나 무능한 사람으로 여기며 어색해한다. 한 전업주부 남성은 아이의 담임교사로부터 “학부모 모임에서 다른 엄마들이 굉장히 불편해한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남성 스스로도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다. 여성 변호사의 전업주부 남편은 이따금 발을 동동 구르며 “나는 부엌데기 남편은 되지 않을 거야”라고 절규한단다. 하지만 아빠에게도 아이가 태어나서 걷기 시작하고 말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볼 권리가 있다는 대목은 가슴을 울린다. 최고경영자부터 육아휴직을 사용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이 실현될 날이 올지는 미지수지만 행복한 삶을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아내가 되어주는 건 꼭 필요한 일이다. 원제는 ‘The Wife Drought’. 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올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가수 밥 딜런(75)이 쓴 유일한 소설이 국내에 소개된다. 문학동네는 딜런이 25세였던 1966년 완성한 소설 ‘타란툴라’(사진)를 20일 출간할 예정이라고 8일 밝혔다. 이 작품은 시, 산문, 노랫말을 결합한 소설로, 기승전결의 서사 구조 없이 대중문화와 사회에 대한 관점을 47꼭지에 담았다. 문학동네는 딜런의 가사를 한 권에 모은 ‘밥 딜런: 시가 된 노래들(1961∼2012)’도 함께 출간한다고 덧붙였다. 그가 출판을 고려해 쓴 책은 ‘타란툴라’와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뿐이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대통령은 없다’, ‘바꾸어라, 정치’,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촛불집회에서 나온 구호가 아니다. 최근 출간된 책 제목이다. 현 시국을 비판하거나 시국과 직접 관련되지 않아도 이를 활용해 제목을 달거나 홍보를 하는 책들이 적지 않다. 출판사들이 ‘분노 마케팅’에 본격적으로 돌입한 것이다. 21세기북스는 대통령의 리더십을 다룬 ‘대통령의 조건’(월러 R 뉴웰·2012년)의 내용은 그대로 둔 채 제목만 ‘대통령은 없다’로 바꿔 최근 다시 내놓았다. 이 책은 링컨, 루스벨트, 닉슨, 케네디, 클린턴 등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공과(功過)를 분석해 대통령이 지녀야 할 덕목을 제시했다. 김수현 21세기북스 편집자는 “대통령이 갖춰야 할 여러 자질을 살펴볼 때 한국에 과연 그런 대통령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담아 새 제목을 정했다”고 말했다. 스페인에 정치 개혁 바람을 몰고 온 마누엘라 카르메나 마드리드 시장이 쓴 ‘바꾸어라, 정치’(푸른지식)도 나왔다. 원제는 ‘세상은 달라질 수 있다’이지만 현 정국을 반영해 이렇게 제목을 달았다. 책 띠지에는 ‘들어라, 시민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라는 문구까지 넣었다. 출판사는 지난달 말부터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책 내용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모두 500여 명이 공감을 표했다. 연재물을 읽은 독자들은 ‘조속히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 ‘광장의 촛불이 흐지부지 흘러버리는 가벼운 정치 이슈처럼 묻히지 말길’ 등의 댓글을 달고 있다. ‘정상인간’(김영선)은 현 정부가 주요 모토로 내건 ‘비정상의 정상화’를 비꼰 제목이다. 장시간-저임금 노동이 일상화된 현실을 정상이라고 여기게 만든 사회 구조를 비판했다. 이 책을 출간한 박재영 오월의봄 대표는 “‘정상인간’은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이기도 하지만 너무나 비정상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면서도 그것이 ‘정상’이라고 외쳤던 현 정부를 풍자하는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에서 보듯이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지켜주는 최소한의 역할도 못 하면서 국가의 명예와 성장만을 앞세운 현실을 질타한 ‘국가 이성 비판’(김덕영·다시봄)도 나왔다. 출판사는 ‘이게 나라냐?’라는 물음에 답한 책이라고 소개했다. ‘이게…’는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많이 들고 나온 피켓 글귀 가운데 하나다. 불신과 절망만을 안기는 사회구조를 뜯어고치려면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엄기호·창비)는 노력한 만큼 성취할 수 없고 생존을 위해 발버둥쳐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서 필요한 건 ‘리셋’이라고 주장한다. 출판계에서는 출판사들이 현 시국에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콘텐츠로 독자를 공략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민들의 관심이 정치로 급격히 쏠리면서 책 판매량이 ‘반 토막’ 나자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주제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독자들의 속내를 직설적으로 반영한 책이 각광받고 있다”며 “시대의 변화를 담은 책은 더 많아지고 출간하는 속도도 한층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나락으로 떨어진 건 한순간이었다. 서울 강남 8학군에서 초중고교를 나와 한국외국어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뉴욕대 의료경영석사 학위를 딴 정재엽 씨(42)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제약회사에 합류해 일하던 중 2013년 부도를 맞았다. 집은 경매에 넘어갔고 아버지는 부정수표단속법 위반으로 수감됐다. 빛 한 줄기 보이지 않던 삶의 밑바닥에서 그가 절박하게 부여잡은 건 문학이었다. 그래야만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일어섰다. 이런 경험을 담은 ‘파산수업’(비아북)을 출간한 그를 최근 서울 서초구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정 씨는 기적적으로 회사를 회생시켜 매각한 후 올해부터 직원 3명을 두고 의약품과 의료기기를 수입하는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올해 광복절 특사로 석방된 아버지도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채권자들에게 멱살을 잡히고 쏟아지는 욕설을 들으면서도 어떻게 틈틈이 책을 읽는 게 가능했는지 궁금했다. “제 주머니에 꽂힌 책을 본 채권자들이 ‘뻔뻔한 거니? 아니면 강한 거니?’라며 어이없어 했어요. 하지만 저는 책이 주는 에너지 때문에 말 그대로 숨을 쉴 수가 있었어요.” ‘금수저’에서 하루아침에 파산자가 되자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벌레로 변해 경제력을 잃은 주인공 그레고르가 바로 자신이었기에.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보며 늘 어렵기만 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보게 됐다. 암 투병 중에도 삶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이해인 수녀의 시집 ‘희망은 깨어 있네’,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을 보며 세상을 버리려 했던 마음도 되돌렸다. “제가 사라져도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책은 상황에 감정적으로 휩쓸리지 않고 거리를 두게 만들어 줬어요. ‘자기 앞의 생’(에밀 아자르 지음)을 보며 제 처지가 세 살 때 버림받은 모모보다는 낫다는 위안을 얻기도 했고요.” ‘파산수업’에서 이해인 수녀의 시집을 인용하고 싶어 일면식도 없는 이 수녀에게 원고를 보냈다. 이 수녀는 흔쾌히 수락한 것은 물론이고 휴대전화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비롯해 테레사 수녀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주며 힘내라고 격려했다. ‘파산수업’ 부제의 아이디어도 제안하고 추천사까지 보내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깜짝 놀랐어요. ‘무너진 우리를 다시 세우는 문학의 힘’이라는 부제는 수녀님 말씀의 일부분이 반영된 거예요.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어요.” 부도 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봤던 그는 올해 2월 ‘안데르센 자서전’ 중고책을 샀다. “새 책은 못 사지만 중고책이라도 3년 만에 살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울컥하더라고요. 역경을 많이 겪었던 안데르센의 일생에 공감을 느껴 꼭 갖고 싶었거든요.” 그는 이제 다시 회사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붙잡고 일어설 수 있는 무언가를 꼭 찾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제게는 그게 책이었어요. 공황장애와 불면증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고통스러웠던 그 시절에 바람막이가 돼 주고 에너지를 준 책이 없었다면 절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나락으로 떨어진 건 한 순간이었다. 서울 강남 8학군에서 초중고교를 나와 한국외국어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뉴욕대 의료경영석사 학위를 딴 정재엽 씨(42)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제약회사에 합류해 일하던 중 2013년 부도를 맞았다. 집은 경매에 넘어갔고 아버지는 부정수표단속법 위반으로 수감됐다. 빛 한 줄기 보이지 않던 삶의 밑바닥에서 그가 절박하게 부여잡은 건 문학이었다. 그래야만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일어섰다. 이런 경험을 담은 '파산수업'(비아북)을 출간한 그를 최근 서울 서초구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정 씨는 기적적으로 회사를 회생시켜 매각한 후 올해부터 직원 3명을 두고 의약품과 의료기기 수입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사무실의 한 벽면은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채권자들에게 멱살을 잡히고 쏟아지는 욕설을 들으면서도 어떻게 틈틈이 책을 읽는 게 가능했는지 궁금했다. "제 주머니에 꽂힌 책을 본 채권자들이 '뻔뻔한 거니? 아니면 강한 거니?'라며 어이없어 했어요. 하지만 저는 책이 주는 에너지 때문에 말 그대로 숨을 쉴 수가 있었어요." '금수저'에서 하루아침에 파산자가 되자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벌레로 변해 경제력을 잃은 주인공 그레고르가 바로 자신이었기에.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보며 늘 어렵기만 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보게 됐다. 암 투병 중에도 삶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이해인 수녀의 시집 '희망은 깨어 있네',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을 보며 세상을 버리려 했던 마음도 되돌렸다. "제가 사라져도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책은 상황에 감정적으로 휩쓸리지 않고 거리를 두게 만들어 줬어요. '자기 앞의 생'(에밀 아자르 지음)을 보며 제 처지가 세 살 때 버림받은 모모보다는 낫다는 위안을 얻기도 했고요." '파산수업'에서 이해인 수녀의 시집을 인용하고 싶어 일면식도 없는 이 수녀에게 원고를 보냈다. 이 수녀는 흔쾌히 수락한 것은 물론 휴대전화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비롯해 테레사 수녀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주며 힘내라고 격려했다. '파산수업' 부제의 아이디어도 제안하고 추천사까지 보내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깜짝 놀랐어요. '무너진 우리를 다시 세우는 문학의 힘'이라는 부제는 수녀님 말씀의 일부분이 반영된 거예요.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어요." 부도 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봤던 그는 올해 2월 '안데르센 자서전' 중고책을 샀다. "새 책은 못 사지만 중고책이라도 3년만에 살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울컥하더라고요. 역경을 많이 겪었던 안데르센의 일생에 공감을 느껴 꼭 갖고 싶었거든요." 그는 이제 다시 회사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붙잡고 일어설 수 있는 무언가를 꼭 찾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제게는 그게 책이었어요. 공황장애와 불면증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고통스러웠던 그 시절에 바람막이가 돼 주고 에너지를 준 책이 없었다면 절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겁니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은퇴 후 농사를 짓겠다는 이들이 있다. 실제 집에서 온갖 채소와 과일을 키우며 차근차근 준비하는 경우도 봤다. ‘윤구병 일기 1996’(윤구병 지음·천년의 상상·3만5000원)은 철학과 교수였던 저자가 농부가 된 후 1996년에 쓴 일기를 묶은 책이다. 920쪽에 달하는 일기에는 아침에 일어나 닭 모이를 주고, 장독 뚜껑을 열고, 검정콩과 고추를 볕에 말리는 일상이 펼쳐진다. 저자는 사람이 함께 사는 건 고슴도치가 서로 껴안는 것과 같아 상처가 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를 치유하는 건 자연이다. 씨알 하나만 심으면 수백, 수천 알을 주고, 아끼려 해도 썩기 때문에 나누는 걸 배우게 된단다. 농촌 사람들이 활기차고 밝은 건 자연이 하라는 대로 하기 때문이라는 것. 자연 속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담백한 일상에 삶에 대한 묵직한 성찰이 녹아 있다.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딸 바보에, 입학 정원 때문에 똑똑한 학생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어 가슴 아파하고, 아내가 만든 동물무늬 넥타이를 즐겨 매는 남자. 연설하기를 두려워하고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바랐던 만큼 훌륭한 자연학자는 되지 못했다고 말하는 남자. 리처드 도킨스다. 맞다. 생명체는 유전자를 운반하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이기적 유전자’,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만들어진 신’, 창조론을 신랄하게 반박한 ‘눈 먼 시계공’을 쓴 그 과학자 말이다. 탄탄한 논리를 바탕으로 도발적인 주장을 거침없이 펼쳐 세계를 지적 충격에 빠뜨린 그이기에 까칠하고 예민할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한데 첫 회고록에서 의외의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영국인으로, 1941년 식민지였던 케냐에서 태어난 그는 자연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그 시절의 경험이 생물학자가 되는 데 도움이 된 건 아니란다. 전갈을 도마뱀으로 착각해 발을 내밀었다 물려 기절하는가 하면, 마을 사람들이 사냥에 성공한 사자 떼를 구경하러 간 곳에서는 장난감 자동차에 빠져 사자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물론 두 살 때 산타클로스로 변장한 아저씨가 아이들과 즐겁게 놀아주고 떠나자마자 “샘 아저씨가 갔네!”라고 말해 어른들을 놀라게 한 대목에서는 아기 때부터 범상치 않았다는 생각은 든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숭배해 그의 음악 ‘나는 믿습니다’를 들으며 엘비스가 자신에게 신의 존재를 알렸다고 믿고,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친구를 도와주지 못해 미안함을 느끼는 보통 소년이었다. 하지만 다윈의 ‘눈부신’ 이론에 강렬하게 끌리면서 16세부터 전투적인 무신론자가 돼 학교 예배당에서 무릎을 꿇지 않았다. 진화생물학자의 기질이 본격적으로 꿈틀대기 시작한 것이다. 역작이 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는 적잖다. ‘이기적 유전자’는 옥스퍼드대에서 강의하던 당시 파업으로 전력 사용이 제한되는 바람에 탄생할 수 있었다. 전기를 이용한 연구를 할 수 없어 이동식 타자기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 전기가 다시 들어오면서 첫 장만 쓴 채 글쓰기는 중단됐다. 서랍 속에서 잠자던 원고는 1975년 안식년을 맞으면서 집필에 속도가 붙었다. 그는 농담처럼 “내 베스트셀러”라고 말하며 썼는데, 35세였던 1976년 책이 출간되자 이는 현실이 됐다! 1권은 개인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 수월하게 읽힌다. 2권은 학자로서 그가 걸어온 길을 세밀하게 정리했다. 그의 업적에 관심이 많은 이라면 2권에 눈길이 더 갈 것 같다. 학문적 라이벌이었던 스티븐 제이 굴드(1941∼2002)의 견해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데 상당 부분을 할애한 걸 보며 학자로서 여전히 뜨거운 피를 가졌음을 확인하게 된다. 세 번 결혼한 그이지만 연애사를 상세하게 밝히지는 않았다. 스물두 살 때 여성 첼리스트와 가진 첫 경험에서 원시적 충만감을 느꼈다고 고백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두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줄리엣이 암으로 고통받다 떠난 엄마를 지켜보던 모습을 떠올리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눈물이 날 것 같단다. 세계적인 과학자도 자식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아버지였다. 혹멧돼지 넥타이를 맸다가 영국 여왕이 “왜 그렇게 못생긴 동물이 그려진 넥타이를 맸나요?”라고 묻자 무의미한 인사치레 대신 자기 생각을 솔직히 밝힐 만큼 손님을 존중한다고 여기는 모습에서는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그의 삶을 따라가는 여정은 만만치 않지만 세계적인 과학자들과의 교류와 연구의 세계를 엿보는 건 지적으로 많은 자극을 준다. 원제는 ‘An Appetite For Wonder’(1권), ‘Brief Candle In The Dark’(2권).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공부 안 하면 어떻게 된다고?” 서너 살쯤 돼 보이는 남자 아이의 엄마가 지하철에서 10대 소년을 검지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한눈에 봐도 지적장애가 있는 소년이 승객들에게 생활비와 치료비가 필요하다며 도와달라고 더듬더듬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이는 엄마의 말에 고개를 몇 번이나 깊숙이 끄덕이며 소년이 지하철 옆 칸으로 옮겨갈 때까지 뚫어져라 바라봤다. 아이 엄마의 손에는 영어학원 이름이 큼직하게 써진 가방이 들려 있었다. 수년 전 지하철에서 본 광경이다. 하염없이 소년을 바라보던 맑은 눈망울의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공부가 일신의 평안을 추구하는 도구가 돼 버린 현실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확인한 순간이었다. 따지고 보면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학에 가기 위해, 취직하기 위해, 승진하기 위해, 공부는 그 무엇을 위한 수단이 된 지 오래다. ‘공부해서 남 주자’는 말은 낭만적이지만 뒤집어보면 그만큼 나만을 위한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걸 방증한다. 국회의원을 지낸 한 변호사는 법조인, 정치인이 된 이유를 묻자 “출세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편한 자리에서 오간 말이었기에 솔직한 답변이었다고 생각한다. 요즘 사회적 현안이 불거질 때마다 관련 책의 판매가 급증하고 있다. 최순실 씨의 국정 농단으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급물살을 타자 헌법을 소개하고 의미를 짚은 ‘지금 다시, 헌법’을 비롯해 사회 문제에 맞서 싸우라고 호소한 ‘분노하라’,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한 ‘한국이 싫어서’ 등의 판매가 껑충 뛰었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가 격돌했을 때는 ‘김대식의 인간 vs 기계’, ‘인간은 필요 없다’처럼 인공지능(AI)을 다룬 책이 주목받았다. 책을 읽고 이슈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려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이다. 이들이 공부하는 이유는 순수한 앎을 위해서일 수도 있고, 변화하는 미래에 대처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공부가 나쁜 게 아니다. 사회적 약자를 ‘공포의 타산지석’으로 삼아 이기적인 공부를 강요하는 게 문제다. 그런 시각이 확장되면 시간과 노력을 들여 공부했다는 이유만으로 과도하게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커진다. 이런 경향은 소위 ‘가방 끈이 긴’ 사람이나 각종 고시에 합격한 이들에게서 강하게 나타나는 듯하다. 대학 때 특강에서 여성학자이자 가수 이적의 어머니인 박혜란 씨는 남녀평등에 대해 강의한 후 이렇게 당부했다. “많이 배울수록 자기만 챙겨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여성학 수업에서 의외의 마무리였다. 돌이켜보면 여성학을 비롯해 어떤 종류의 학문이든 나만 잘살기 위한 공부는 진정한 공부가 아니라는 의미였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손효림 문화부 기자 aryssong@donga.com}

채널A가 12월 1일 개국 5주년을 맞아 ‘하이파이브 북카페’를 열고 청년 공공미술 프로젝트인 ‘청춘과 하이파이브’를 진행한다. 교보문고와 함께 운영하는 ‘하이파이브 북카페’는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동아미디어그룹 사옥 앞에 설치한 투명 컨테이너에서 30일부터 다음 달 9일까지 열흘간 문을 연다. 북카페에서는 채널A의 개국 5주년 슬로건인 ‘하이파이브’의 취지에 맞춰 응원과 격려, 소통을 주제로 한 책들을 선보인다. 교보문고가 특정 주제에 맞춰 책과 소품을 소개하는 큐레이션 코너인 ‘편집샵: K’에서는 청춘을 테마로 한 책과 함께 관련된 물건과 문장 등을 전시한다. 교보문고의 지식서비스 ‘북모닝CEO’가 청춘에게 보내는 격려와 응원을 다룬 50여 종의 책도 만날 수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트럼프카드’와 조향제 등 책과 관련된 생활용품인 ‘굿즈’도 진열된다. 북카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이벤트에 참여한 방문객에게는 현장에서 도서 할인 교환권을 증정한다. 투명한 컨테이너 외관은 디스플레이 기능을 갖춰 청춘을 향한 응원과 격려, 희망의 메시지도 접할 수 있다. 북카페 운영 시간은 오전 11시 반부터 오후 6시까지. 12월 1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대통령직속 청년위원회와 함께 진행하는 ‘청춘과 하이파이브’ 프로젝트는 폭 10m, 높이 2.4m의 대형 캔버스에 그라피티 형태의 미술작품을 제작하는 아트 퍼포먼스다. 사람의 손바닥이나 손바닥 모양의 도장을 캔버스에 찍는 모자이크 방식으로 진행한다. 프로젝트에는 최민주 일러스트&디자인 대표와 청년위원회 청년문화예술기획단 소속의 청년작가 10여 명이 참여한다. 최 대표는 ‘남이섬 대문 일러스트’, ‘상상꿀벌 프로젝트’, ‘대한민국상상엑스포’ 등에 참여한 중견 일러스트레이터다. 이 행사는 시민들이 직접 손바닥이나 손도장에 페인트를 묻혀 캔버스를 채우는 방식으로 작가들과 함께 작업을 진행한다. 완성한 작품은 서울 마포구 매봉산로 동아디지털미디어센터(DDMC) 로비에 전시된다. 행사는 이날 오전 11시에 시작한다. 작품 제작 과정은 동영상으로 촬영해 채널A 홈페이지, SNS 등을 통해 공유할 예정이다. 제작에 참여한 시민이 행사 장소에서 사진을 촬영해 SNS에 올리면 푸짐한 경품도 받을 수 있다. 채널A와 청년위원회는 “다 함께 캔버스를 채워나가는 방식을 통해 청년들에게 희망과 응원, 격려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 결혼식에서 채 1분이 걸리지 않는 ‘신랑 신부 행진’을 무려 42일간 한 부부가 있다. 올해 3월부터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900km를 걸은 이혜민(29) 정현우 씨(30) 얘기다. 많은 비용이 드는 데다 정신없이 치러지는 결혼식 대신 이들이 선택한 길이다. 두 사람은 순례 중 마음에 드는 곳이 나오면 작은 면사포와 나비넥타이를 꺼내 수시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 이 이야기를 담은 책 ‘세상에서 가장 긴 결혼행진’(사진)을 최근 펴낸 부부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20일 만났다. 카페 한쪽 벽에는 순례길에서 찍은 사진 20장이 전시돼 있었다. 두 사람의 손가락에는 심플한 디자인의 커플링이 반짝거렸다. 이 씨는 손가락을 쫙 펴 보이며 “양가 어머니들이 주신 목걸이를 녹여 만든 유일한 예물”이라며 미소 지었다. 그래픽디자인 회사 편집자였던 이 씨와 웹디자이너인 정 씨는 사표를 내고 길을 떠났다. 한 달에 하루 이틀밖에 쉬지 못하고 매일 밤 12시가 넘어 퇴근하는 삶에 지쳤기 때문이다. 가장 큰 고비는 양가 부모님 설득하기. 의외로 ‘쿨하게’ 허락이 떨어졌다. 사전에 서울 성곽길과 제주 올레길을 걸으며 ‘전지훈련’을 했지만 순례길은 만만찮았다. 갑자기 눈이 펑펑 내리는가 하면 수시로 폭우가 쏟아져 진흙탕 속에서 헤맸다. 하지만 6년간 연애한 것보다 42일간 서로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됐단다. “데이트할 때는 제가 모든 걸 결정했는데 순례길에서는 현우 씨가 길을 척척 찾고 제 다리에 붕대도 감아주며 이끄는 거예요. 이렇게 듬직한 면이 있나 싶어 놀랐어요.” “혜민이가 발목과 무릎의 통증이 심한데도 끝까지 걸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빚내는’ 결혼식 대신 ‘빛나는’ 결혼식을 하고 싶었던 이들의 행진은 외롭지 않았다. 순례길에서 만난 스페인과 호주 음악가는 축가를 불러줬고, 한국에서 온 스님은 주례사 같은 덕담을 건넸다. 이들은 순례를 마친 후 1개월 반 동안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를 여행했다. 3개월간 쓴 돈은 1200만 원으로, 예단과 신혼여행비까지 포함한 보통 결혼 비용의 5분의 1 수준이다. 귀국 후 이 씨는 1인 출판사 ‘900km’를 차려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책을 냈다. 초판 700권 가운데 후원자 300명에게 보내고 난 나머지 책이 모두 팔려 2쇄로 1000권을 더 찍었다. 순례 뒤 이들의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 게임회사에 취직한 정 씨는 “승진, 커리어 등을 고민하며 앞날을 불안해하거나 조급해하지 않게 됐다”, 이 씨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며 살지 않기로 했다. 조금 벌더라도 재미난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합창하듯 당부했다. “두 사람의 의미 있는 행위만으로도 결혼이 성사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이들의 표정은 햇살처럼 환했다. 순례길에서 등산복에 작은 면사포를 쓰고 넥타이를 맨 채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속 모습처럼.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2008년 13세 소말리아 소녀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수도 모가디슈에 사는 할머니를 만나러 가다 세 남자에게 강간당했다. 소녀가 보호를 요청한 당국은 간통 혐의를 씌우고 사형을 선고했다. 소녀는 경기장 바닥에 목까지 파묻혔고, 10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50명의 남자가 돌을 던졌다. 충격적인가. 하지만 ‘강간은 강간이다’의 저자는 강간 피해자를 비난하고 처벌하는 수백 년 묵은 관습이 극단적으로 나타났을 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2007년 미국 공군이던 19세 여성 커샌드라 허낸데즈는 파티에서 동료 공군 세 명에게서 강간을 당했다고 신고했다. 그가 법률자문단에서 가혹한 심문을 받은 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고소를 포기하자 공군은 그를 음주와 풍기문란으로 법정에 세웠다. 남성들은 풀려났다. 두 사건은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 여성 폭력 전문 변호사인 저자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강간이 삶을 얼마나 오래, 갈가리 찢어놓는지를 보여준다. 첫 데이트에서 강간당한 라일리는 수치심과 공포에 시달리며 “강간은 사랑을 표현하는 능력을 빼앗는 행위”라고 절규한다. 남성과의 두 번째 만남에서 강간당한 트레이시는 스스로를 “깨진 도자기처럼 고칠 수 없는 존재라고 느낀다”고 토로한다. 미국 질병관리본부(CDC)에 따르면 2010년 조사에서 18세 이상 미국 여성의 12.3%가 평생 한 번 이상 강간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모르는 사람에게 당한 경우는 전체 피해자의 14%에 불과했다. 허위 강간 신고율은 2∼8%인데도 이 수치를 부풀리며 남성을 음해하는 수단으로 여성들이 강간을 이용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일부 페미니스트조차 데이트 강간 문제를 제기하는 건 힘겹게 이룬 여성의 성적(性的) 자유를 가로막는다고 주장한다. 여성이 가해자와 친했거나 술이나 약물을 복용하면 재판에서 불리하게 작용한다. 강간 문제가 얼마나 복잡하고 해결하기 만만치 않은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구체적인 사례와 피해자들의 고통스러운 고백은 강간이 가해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 엄연한 범죄임을 거듭 확인시켜 준다. ‘미성년자와의 섹스’ ‘합의되지 않은 섹스’로 표현하지 말고 ‘강간’이라고 말하라는 저자의 당부도 호소력을 지닌다. 무심코 사용하는 단어도 강간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원제는 ‘Rape is Rape’. ‘거리에 선 페미니즘’은 올해 5월 벌어진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같은 달 20일 한국여성민우회가 서울 서대문구 신촌에서 마련한 ‘여성 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에서 42명이 8시간 동안 발언한 내용을 담았다. 지하철, 버스에서 옆자리 남성에게 추행을 당한 여성, 밤늦게 택시를 타자 기사가 “남자친구랑 이렇게 늦게까지 뭐하고 놀아?”라고 물으면서 계속 힐끔거리며 쳐다봐 두려웠다는 여성, 친오빠가 자신을 지속적으로 성추행했지만 부모는 용서하라며 오빠가 기죽을까봐 걱정하는 걸 보며 자란 여성….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여성이라면 낯설지 않은 경험이다. 피해자의 무너진 삶보다 가해자가 살아갈 삶을 걱정하는 사회가 두렵다는 말은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준다. 여성 폭력에 침묵하지 말자는 선언문이 가슴에 와 닿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 발언자가 소개한 미국 언론인 밀턴 마이어의 글귀를 많은 사람이 기억하기를 소망한다. ‘전환기의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 끼치는 침묵이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책값이 부담스럽다는 이의 손에 5000원 가까운 유명 브랜드의 커피잔이 들려 있는 모습을 종종 본다. 커피 살 때와 책을 살 때 돈의 가치를 다르게 느낄 수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되는 순간이다. 신생 출판사 ‘위고웍스’가 최근 내놓은 ‘우리는 왜 구글에게 돈을 벌어주기만 할까’(안현효 지음) ‘당신의 기부금은 잘 쓰이고 있습니까’(김종빈) 등 4권은 각각 4700원이다. 문고판 크기에 페이지 수는 책별로 72∼144쪽이어서 금방 읽힌다. 차 한잔 마실 수 있는 시간과 돈으로 필요한 내용을 접하게 한다는 취지로 기획했단다. ‘당신의…’는 관심 있는 분야를 찾아 최소 3년간 기부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1년만 기부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면 교육 등의 지원이 효과를 거두기 어렵기 때문이다. 책들은 작지만 알차다. 부담을 줄이고 책을 접할 기회를 늘리는 참신한 시도에 응원을 보낸다. 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최순실 씨의 국정 농단 사태가 사회를 뒤흔드는 가운데 한국 현실을 비판하거나 현재 시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의 판매가 급증하고 있다. 이번 사태로 예년에 비해 책 전체 판매량이 크게 줄어든 것과는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차병직 변호사 등이 쓴 ‘지금 다시, 헌법’(로고폴리스)의 인기는 책의 성격상 이변에 가깝다. 18일 출간되자마자 일주일 만에 초판 5000권이 대부분 소진돼 곧바로 2쇄를 찍을 예정이다. 2009년 출간한 ‘안녕 헌법’의 개정판으로, 헌법을 소개하고 행간에 담긴 의미를 찬찬히 짚었다. 이처럼 폭발적인 반응은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외쳤고, 대통령에 대한 수사와 탄핵 등을 둘러싸고 헌법이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김경은 로고폴리스 편집자는 “출간 시기가 현 사태와 우연히 맞아떨어졌다. 헌법에 관심을 갖는 독자들이 크게 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다”고 말했다.돌베개 출판사가 이달 초부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전국 20개 서점에서 ‘순siri 도서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선보인 ‘이것이 인간인가’(프리모 레비 지음), ‘분노하라’(스테판 에셀), ‘국가란 무엇인가’(유시민)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레지스탕스 투사이자 외교관을 지낸 저자가 무관심은 최악의 태도라며 프랑스가 처한 여러 가지 문제에 맞서 싸우라고 호소한 ‘분노하라’는 매달 100권 정도 나가다 이달에는 3주간 320여 권이 판매됐다. ‘이것…’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저자가 직접 경험한 공포와 극한의 폭력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고찰한 책이다. 평소 한 달에 200여 권이 판매되던 이 책은 이달 들어 매주 100권이 나가고 있다. 묵직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순siri 도서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면서 책 제목 때문에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국가에 대한 저명한 철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며 바람직한 국가관을 모색한 ‘국가…’는 월평균 500여 권이 판매됐는데 이달에는 3주 만에 2300여 권이 나갔다. 이 컬렉션을 판매하고 있는 경기 고양시 일산 한양문고 김민애 실장은 “출간된 지 5년 이상 돼 관심이 높지 않았던 책들인데, 현 시국에 맞춰 따로 모아 선보이니 흥미로워하며 눈여겨보는 고객이 많다”고 말했다. 한국의 부조리한 현실을 조목조목 비판한 소설 ‘한국이 싫어서’(장강명 지음·민음사)는 지난해 5월 출간됐지만 최근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달 말부터 판매 속도가 2배로 늘어 한 주에 500권 이상 나가는 추세다. 박혜진 민음사 편집자는 “제목이 현 시국에 분노한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데다 한국의 사회 시스템을 비판한 내용에 공감하는 독자들이 많아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출판계에서는 국가를 지탱하는 시스템이 참담하게 붕괴돼 버린 현실 앞에서 나라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근본적인 고민을 하는 이들이 늘었다고 진단한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정책에 대한 최소한의 선의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근거로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려는 노력이 반영된 현상”이라고 말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최순실 씨의 국정 농단 사태가 사회를 뒤흔드는 가운데 한국 현실을 비판하거나 현재 시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의 판매가 급증하고 있다. 이번 사태로 예년에 비해 책 전체 판매량이 크게 줄어든 것과는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차병직 변호사 등이 쓴 '지금 다시, 헌법'(로고폴리스)은 이달 18일 출간되자마자 일주일 만에 초판 5000권이 대부분 소진돼 곧바로 2쇄를 찍기로 했다. 2009년 출간한 '안녕 헌법'의 개정판으로, 헌법을 소개하고 행간에 담긴 의미를 찬찬히 짚었다. 이처럼 폭발적인 반응은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외쳤고, 대통령에 대한 수사와 탄핵 등을 둘러싸고 헌법이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김경은 로고폴리스 편집자는 "출간 시기가 현 사태와 우연히 맞아떨어졌다. 헌법에 관심을 갖는 독자들이 크게 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돌베개 출판사가 이달 초부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전국 20개 서점에서 '순siri 도서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선보인 '이것이 인간인가'(프리모 레비 지음), '분노하라'(스테판 에셀), '국가란 무엇인가'(유시민)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국가에 대한 저명한 철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며 바람직한 국가관을 모색한 '국가란…'은 월 평균 500여 권이 판매됐는데 이달 들어서는 3주 만에 2300여 권이 나갔다. 레지스탕스 투사이자 외교관을 지낸 저자가 무관심은 최악의 태도라며 프랑스가 처한 여러 가지 문제에 맞서 싸우라고 호소한 '분노하라' 역시, 매달 100권정도 나가다 이달에는 3주간 320여 권이 판매됐다. '이것이…'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저자가 직접 경험한 공포와 극한의 폭력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고찰한 책이다. 평소 한달에 200여 권이 판매되던 이 책은 이달에는 매주 100권이 나가고 있다. 묵직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순siri 도서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면서 제목 때문에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김민애 일산 한양문고 실장은 "출간된 지 5년 이상 돼 관심이 높지 않았던 책들인데, 현 시국에 맞춰 따로 모아 선보이니 흥미로워하며 눈여겨보는 고객이 많다"고 말했다. 한국의 부조리한 현실을 조목조목 비판한 소설 '한국이 싫어서'(장강명 지음·민음사)도 지난달 말부터 판매 속도가 2배로 늘어 한 주에 500권 이상 나가고 있다. 박혜진 민음사 편집자는 "제목이 현 시국에 분노한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하는데다 한국의 사회 시스템을 비판한 내용에 공감하는 독자들이 많아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출판계에서는 국가를 지탱하는 시스템이 참담하게 붕괴돼 버린 현실 앞에서 나라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근본적인 고민을 하는 이들이 늘었다고 진단한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정책에 대한 최소한의 선의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근거로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려는 노력이 반영된 현상"이라고 말했다.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도서정가제 실시에 불황까지 맞물리면서 어린이 책 시장이 위축된 가운데서도 선전하는 책들이 눈길을 끈다. 영국의 유명 그림책 작가인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웅진주니어)은 얼마 전 100쇄를 돌파해 지난달 100쇄 기념 한정판을 제작했다. 2001년 출간된 이 책은 15년간 모두 75만 권 넘게 판매됐다. 권정생 작가의 ‘강아지똥’ ‘몽실언니’, 황선미 작가의 ‘마당을 나온 암탉’ ‘나쁜 어린이표’, 김중미 작가의 ‘괭이부리말 아이들’ 등 동화책이 100쇄를 넘은 경우는 상당수지만 그림책이 100쇄를 넘은 경우는 이례적이다. 표지 바탕을 새로 디자인하고 작가의 사인을 넣은 ‘돼지책’ 한정판은 2만 권 찍었는데 지금까지 5000권 넘게 나갔다. 이 작품은 네 식구 중 엄마 홀로 가사 노동을 짊어져야 하는 문제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했다. 아이들도 좋아하지만 특히 엄마들에게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종이 오락기’라는 별명을 가진 ‘13층 나무집’(시공주니어) 시리즈의 돌풍도 거세다. 호주 작가인 앤디 그리피스와 테리 덴턴이 만화와 동화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 이 책은 색칠하기, 점 잇기, 미로 찾기 등 각종 놀이를 할 수 있는 게 특징이다. 나무집은 13층씩 올라간다. 지난해 국내에 출간한 ‘13층 나무집’은 7만 권이 판매됐고, 이후 나온 26층, 39층, 52층, 65층 나무집은 모두 합쳐 19만 권이 나갔다. ‘13층 나무집’은 248쪽이지만 층이 높아질수록 페이지 수가 늘어나 ‘65층 나무집’은 388쪽에 이른다. 이 두꺼운 책을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도 집중력을 보이며 독파할 정도라고 한다. 역시 각종 놀이가 가능한 ‘나무집 펀 북’은 지난달 말 내놓은 초판 5000권이 모두 소진돼 5000권을 더 찍는 중이다. 박진희 시공주니어 아동청소년팀장은 “‘13층 나무집’ 시리즈는 쉴 새 없이 모험과 상상이 이어져 아이들이 정신없이 빠져든다는 반응이 많다”며 “다음 책이 언제 나오는지 궁금해 하는 학부모의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생의 마지막 순간,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있을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숨을 거두기 전까지는 어디서 지낼 것인지 구체적으로 고민해 봤는가. 저서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로 유명한 사회학자인 우에노 치즈코 도쿄대 명예교수는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에서 1인 가구 증가로 홀로 죽음을 준비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누구나…’는 ‘싱글 행복하면 그만이다’, ‘독신의 오후: 남자, 나이듦에 대하여’에 이은 싱글 3부작이다. 올해 6월 한국을 찾은 저자는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 페미니즘을 추구하는 것도, 노인을 연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혹자는 ‘혼밥, 혼술에, 이제는 혼죽음이냐’고 탄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엄연한 현실이다. 가정을 꾸렸더라도 이혼, 사별을 하거나 자녀가 독립하면 혼자 살 수밖에 없다. 저자가 주목한 건 집이라는 일상의 공간이 가진 힘이다. 며칠 후 숨질 것이라는 선고를 받고 집으로 와 몇 달을 더 산 환자, 병원에서는 음식물을 못 삼켰지만 집에 와서 잘 먹는 할머니 등은 이 불가사의한 힘을 입증한다. 죽음을 앞두고 홀로 생활하는 게 가능한지, 일본 곳곳을 조사한 저자의 결론은 ‘그렇다’이다. 이를 위해서는 혼자 생활하겠다는 의지와 24시간 간병과 진료가 가능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히로시마 현의 소도시 오노미치 시는 ‘집은 병원, 도로는 복도, 병원은 너스스테이션(간호를 지휘하는 곳)’을 기치로 내걸고, 의사들은 정기적으로 노인의 집을 찾아 진료하고 긴급 상황 시 조치를 취한다. 식사, 목욕, 배변을 돕는 이들도 있다. 지방의 빈집을 빌려 노인 주거 시설로 만든 후 노인 5명이 개별 방을 쓰도록 한 ‘홈 호스피스’도 확산되고 있다. 노인마다 케어매니저가 배치된다. 비용은 한 달에 15만 엔(약 162만 원) 정도다. 독거 치매 환자의 가방에는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달아 밖을 돌아다녀도 찾을 수 있게 조치한 곳도 있다. 이런 시스템은 왕진을 꺼리지 않는 의사들의 헌신이 있기에 가능하다. 전문적인 간병인과 자원봉사자가 필요함은 물론이다. 빠른 속도로 1인 가구가 늘어나는 한국에서 눈여겨볼 대목이 적지 않다. 세상을 떠난 이들의 모습은 삶을 곱씹어 보게 만들기도 한다. 어떻게 죽느냐는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말해 주기에. 침실 벽면에 고흐의 ‘밤의 테라스카페’를 가득 채워 놓고 여기저기 구멍을 뚫어 빛이 나오게 한 놀라운 작업을 완성하지 못하고 암으로 세상을 떠난 60대 전기배선공 남성, ‘원숭이가 고구마를 바닷물에 씻어 먹는 광경을 발견한 영장류 학자’가 자신임을 알아본 저자에게 진주 반지를 남기고 떠난 여성은 이들이 환자, 노인이기 이전에 하나의 역사를 지닌 존재임을 보여 준다. 죽음을 맞는 지극히 현실적인 방법을 살펴본 후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 싶다면 ‘죽음에 대하여’를 권한다. 프랑스 철학자인 저자(1903∼1985년)가 방송사와 대담한 내용을 정리한 이 책은 난해하지 않게 죽음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저자는 인간이 자신의 죽음은 1인칭, 가까운 이의 죽음은 2인칭, 타인의 죽음은 3인칭으로 두고 죽음을 타인의 것으로 취급하며 마주하기를 미룬다고 간파했다. 죽음을 3인칭으로 치부하는 건 삶을 지속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단다. 삶과 죽음을 시적으로 응축해 낸 그의 말은 몇 번이고 읽어 보게 한다. “어디로 가는지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은 삶을 한없이 소중한 것으로, 경이롭고 매우 신비로운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존재가 잠시나마 머물렀던 세계는 짧은 체류가 일어나지 않은 세계와는 돌이킬 수 없이, 그리고 영원히 다릅니다.”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예상치 못한 누군가의 공격으로 가족을 잃는다면 분노를 다스릴 수 있을까. ‘당신들은 나의 증오를 갖지 못할 것이다’(앙투안 레이리스 지음·양영란 옮김·1만2000원·쌤앤파커스)는 지난해 11월 파리 바타클랑 극장에서 발생한 테러로 아내를 잃은 프랑스 언론인이 일상을 부여잡으려 애쓰며 담담히 써 내려간 기록이다. 사건이 난 지 사흘 뒤 저자가 페이스북에 올린 같은 제목의 편지는 테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단호하면서도 시적으로 쓴 명문이다. 엄마가 세상에 없다는 사실에 처음 슬픔을 맛보며 대성통곡하는 17개월 된 아들을 지켜봐야 하고, 아내가 좋아한 향수를 발견하고는 그녀의 몸 하나하나를 떠올리는 모습은 애잔하다. 아내의 무덤에서 아들이 찾아내 손에 쥔 아내의 사진을 들고 돌아오며 ‘우리는 언제까지나 세 명일 것이다’라고 다짐한다. 강인함이란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이색 책방은 전국 곳곳에 숨은 진주처럼 콕콕 박혀 있다. 숙박이 가능한 북스테이 책방부터 그림책, 문학, 독립출판물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책방 등 다양하다. 이들 책방은 단순히 책을 판매하는 것을 넘어서 문화 행사를 개최하며 복합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자연 속에서 책과 노닐다 책에 둘러싸여 여유 있게 지내고 싶다면 북스테이를 해보자. 충북 괴산군에 자리한 ‘숲속 작은 책방’은 부부가 운영하는 예쁜 책방으로 유명하다. 가정집 1층은 서점, 2층은 숙박 공간으로 운영한다. 한 번에 한 팀만 받는다. 백창화 대표는 “최대 10명까지 가능하지만 8명을 넘지 않아야 여유 있게 지낼 수 있다”고 말했다. 두 달씩 묶어서 예약을 받는데 인기가 많아 서두르는 게 좋다. 북콘서트와 북클럽, 작은 전시회도 열고 있다. 경남 통영시 ‘봄날의 책방’도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한다. 책방과 게스트하우스는 출판사인 ‘남해의 봄날’과 한 몸이다. ‘봄날의 책방’에서는 통영 장인들이 만든 나전함, 연필통, 베개 등도 판매하고 있다. 낭독회, 음악 공연을 열고 저자 강연회도 한다. 통영12공방과 장인을 소개하는 장인지도를 비롯해 박경리 유치환 이중섭 등 통영과 인연이 있는 예술가들이 작품을 구상하거나 술잔을 기울이던 곳 등을 모아 문학지도도 만들었다. 교육, 낭독, 여유 부산 수영구 수영로에 자리한 ‘인디고 서원’은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이다. 오랜 기간 인문학을 가르쳐 온 허아람 대표가 2004년 문을 열었다. ‘입시가 아닌 의미와 관계를 지향하는 수업’을 진행하는 문화 교육 공간이기도 하다. 매달 두 차례 ‘수요독서회’를 열고 청소년 교양 인문잡지 ‘인디고잉’도 발행한다. 출판사 궁리도 운영한다. 허 대표는 “문을 열 당시 찾았던 청소년들이 이제 대학생이 돼 돌아와 풍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커피, 맥주, 위스키를 즐기며 책을 보고 싶다면 ‘미스터버티고’(경기 고양시 일산동구)가 안성맞춤이다. 미국 소설가 폴 오스터를 좋아하는 신현훈 대표가 오스터의 소설 제목을 따서 지었다. 신 대표는 “혼자 와 술이나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는 손님이 많다”고 말했다. 대구 중구 북성로의 ‘더 폴락’은 독립출판물을 주로 판매한다. 소설 낭독 및 인문학 모임, 영화 감상 모임도 운영하고 있다. ‘도어북스’(대전 중구 테미로)는 대전 토박이인 박지선 씨가 2014년 문을 열었다. 편집디자인을 전공한 박 씨는 독립출판물, 디자인책을 비롯해 에코백, 문구류도 판매하고 있다. 제주를 방문한 이들이 자주 찾는 책방 가운데 하나는 칠성로길에 있는 ‘라이킷(like it)’이다. ‘진짜 제주’의 저자인 안주희 씨는 전주에서 내려와 정착했다. 제주 관련 책과 독립출판물을 많이 소개하고 있다. 그림책, 문학 그리고 시간의 힘 ‘책방 같이[:가치]’(전북 전주시 덕진구)는 자매가 운영하는 그림책 전문 서점이다. 이 지역의 그림책 동아리인 ‘내 마음의 그림책’을 꾸리는 전선영 씨가 언니다. 전 씨는 자녀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다 그 매력에 푹 빠졌다. 개구리가 나오는 그림책을 읽고 개구리 모양 햄버거를 만드는 등 매주 토요일에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요리 수업도 한다. 소설가 김종호 씨는 올해 7월 광주 동구 조선대 정문 앞에 문학 전문 서점인 ‘검은 책방 흰 책방’을 열었다. 커피와 그가 직접 만든 목공예 소품도 판매한다. 낭독회와 미학공부 모임도 운영한다. 김 씨는 “다음 달부터 5, 6명 규모로 소설 창작 모임을 꾸려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오랜 세월을 견딘 서점은 지역의 명소다. 강원 속초시 동아서점과 경남 진주시의 진주문고가 대표적이다. 1956년 문을 열어 올해로 60주년을 맞은 동아서점에선 독립출판물부터 단행본, 수험서까지 모든 분야의 책을 만날 수 있다. 3대째 운영 중인데, 매장을 리뉴얼해 이용하기 편하게 동선을 짰다. 397m²(약 120평)의 공간은 아기자기하고 아늑하다는 반응이 많다. 진주토박이인 여태훈 대표가 운영하는 진주문고는 올해 30주년을 맞았다. 진주시민의 20%가량인 7만여 명이 회원이다. 특정 주제에 맞춰 책을 소개하는 편집 진열로 유명하다. 알파고와 이세돌이 격돌할 때는 ‘사이보그 시티즌’, ‘인공지능과 딥 러닝’ 등 인공지능 관련 책뿐 아니라 ‘판을 엎어라’ 같은 바둑 책도 함께 선보였다. ‘펄북스’ 출판사도 만들었다. 여 대표는 “단단하고 좋은 책을 찾아내 널리 소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서점이 속속 생겨나는 건 2014년 시행된 도서정가제가 영향을 미쳤다. 서점이 일정 부분 수익률을 확보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출판계에서는 상대적으로 문화 시설이 많지 않은 지방에서 서점이 문화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뉴욕 브루클린이 예술가들이 모여 핫 플레이스로 거듭난 것처럼 각 서점의 노력과 함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이 뒷받침된다면 서점이 공동화(空洞化)된 지역 도심을 살리는 데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21일은 책의 할인 폭을 최대 15%로 제한한 도서정가제가 시행 2년을 맞는 날이다. 정가제 실시로 ‘동네 서점’이 살아나고 신간도서 시장에 활기가 돌고 있다. 반면 전집을 대폭 할인해 판매하던 아동책 출판사들은 직격탄을 맞은 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 서점 꿈틀, 신간 활성화 음악책 전문서점 ‘라이너 노트’(서울 마포구), 문학전문서점 ‘검은책방 흰책방’(광주 동구), 그림책 전문서점 ‘책방 같이[:가치]’(전북 전주시), 고양이책 전문 책방 ‘슈뢰딩거’(서울 종로구)…. 지난해와 올해 문을 연 책방이다. 한국서점조합연합회에 따르면 문구 판매점을 제외한 순수 서점 수는 2015년 1559개로 2013년에 비해 4.1% 줄어드는 데 그쳤다. 2년마다 집계하는 이 통계에서 2013년의 경우 2011년 대비 감소율이 7.2%였다. 박대춘 한국서점조합연합회장은 “서점의 이익이 어느 정도 확보돼 숨통이 트이면서 개성 있는 책방이 생겨나고 있다”고 말했다. 출판사는 할인 폭 제한에 따라 매출이 감소돼 일부는 서점에 책을 넘기는 가격인 공급률을 높였다. 개별 출판사와 서점 간의 계약이어서 일률적이진 않지만 대형서점에 들여놓는 단행본의 공급률은 60∼65%로, 이전에 비해 5%포인트가량 오른 곳도 있다. 중소형 서점의 공급률은 70∼75% 정도로 알려졌다. 다만 공급률을 올리지 못한 출판사도 적지 않아 조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연도별 책 발행 종수는 2014년 6만7062종에서 지난해 7만91종으로 늘어나 변화된 환경에서도 책을 꾸준히 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출판사들도 신간 중심으로 홍보 전략을 짜고 있다. 예스24에 따르면 전체 매출에서 신간이 차지하는 비율이 60%에서 정가제 후 70%로 늘었다. ○ 도서관, 중고책으로 눈 돌리는 독자 독자들은 책 가격이 인상된 것과 마찬가지여서 부담스럽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김선혜 씨(39)는 “과거 30∼40%씩 할인해줄 때는 두 달에 한 번 정도 전집을 샀지만 지난해부터는 1년에 한 번 정도 구입한다”며 “도서관을 먼저 이용하고 책이 없으면 중고책을 찾아본 후 정 안 되면 새 책을 산다”고 말했다. 아동책 출판사 가운데 상당수는 정가제 실시 후 매출이 20∼30% 급락한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반면 중고책 시장은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다. 윤철호 한국출판인회의 회장은 “중고책 시장이 비대해져 신간 서적을 낼 동력까지 약화시키면 결국 독자도 피해를 입게 된다”고 말했다. 경기 침체까지 맞물리면서 가구당 서적 구입비는 매년 줄어들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국 2인 이상 가구의 월평균 서적 구입비는 2013년 1만8690원에서 지난해 1만6623원으로 감소했다. 올해 2분기(4∼6월)에는 1만2449원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가격 거품이 빠지면서 책값이 내려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책의 평균 정가는 2014년 1만5631원에서 올해 상반기에는 1만7356원으로 올랐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종이값, 인건비가 오른 데다 초판을 찍는 물량도 과거 5000권에서 요즘은 2000∼3000권으로 줄어 권당 제작비가 늘었기 때문에 가격을 내리기가 힘들다”고 설명했다. 재고 서적을 처리할 통로가 사라진 것도 출판사들의 고민거리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재고 서적이나 반품된 책은 도서전이나 책 축제에서 싸게 판매하는 방안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며 “정가제는 과당 할인 경쟁을 제어하는 데 기여했지만 카드 할인 등 각종 할인이 여전해 책 가격을 신뢰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