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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캠프(해발 4200m)에 있던 대원들과 네팔인 조리사가 히말라야 촐라체 북벽( 6440m)에서 추락하는 대원들을 본 것은 11일 오후 4시 15분(한국 시간 오후 7시 30분)이었다. 수색에 나선 베이스캠프 대원들은 오후 6시에 시신을 발견해 베이스캠프로 옮겼다. 촐라체 북벽 원정대 김형일 대장(44)과 장지명 대원(32)이었다. 김 대장은 북벽을 오르기 시작한 지 10시간 만인 이날 오전 8시 약 5800m 지점에 올라 무전기로 "설사면을 극복했다. 힘들고 배고프다"고 말했다. 이 때 칼날능선을 만난 김 대장은 체력소모가 심한 상태에서 비박지로 예정했던 얼음동굴을 찾았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는 "칼날능선 진입에 실패했다. 능선 앞에 눈가루가 많아 등반이 어렵다. 탈수증세가 심하다. 휴식할 얼음동굴을 계속 찾고 있다"고 말했다. 이 것이 베이스캠프와의 마지막 교신이었다. 약 6000m 지점이었다. 이로부터 약 1300m를 추락한 이들은 촐라체 북벽 4700m 지점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이 벽에서는 2005년 박정헌 대장 등 2명이 얼음 틈에 빠진 뒤 닷새 만에 기적적으로 살아온 적이 있다. 히말라야에 있던 김 대장은 지난달 18일 박영석 대장 일행이 실종된 뒤 등반 일정을 미루고 구조작업에 나서기도 했다. 한국 산악계는 박 대장 일행이 실종된 지 한 달도 안돼 또 다시 유망한 산악인을 잃었다. 김 대장은 2009년 스팬틱 골든피크(7027m) 코리아 신 루트를 개척했다. 이 해 한국산악회 황금피켈상을 받았다. 장 대원은 지난해 가셔브롬 5봉(7321m) 등을 등반한 유망주였다. 이들을 후원한 K2코리아 정영훈 대표이사 등 사고대책본부 관계자들과 유가족은 14일 네팔로 출국한다. 시신은 화장하지 않은 채 서울로 옮길 예정이다.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올림픽 축구대표팀 수비수 조영훈(동국대)이 9일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그랜드힐튼호텔에서 열린 프로축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469명 중 전체 1순위로 대구의 지명을 받았다. 조영훈은 2009년 20세 이하 대표팀에 선발됐고 대학선발팀과 올림픽대표팀에서 수비수로 활약했다. 드래프트 2번 지명권을 받은 포항은 춘계대학축구연맹전에서 우수선수상을 받은 김찬희(한양대)를 지명했다.}
대한축구협회는 이회택 기술위원장이 사의를 표명함에 따라 후임에 황보관 기술위원을 임명했다고 9일 밝혔다. 이 위원장은 2004년부터 2005년까지, 2008년부터 현재까지 두 차례 기술위원장을 맡았다. 황보 신임 위원장은 1988년 유공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입문해 국내와 일본 프로축구에서 활약했다. 지난해 말 FC 서울 감독을 맡았다가 올 시즌 도중 사임했다.}

무함마드 알리(69)와 1970년대 세기의 대결을 펼쳤던 조 프레이저(이상 미국)가 사망했다. 두 사람의 대결에 필적할 만한 현 시대 최고의 대결 카드는 무엇일까. 플라이급에서 시작해 몸무게를 20kg이나 불려가며 상위 체급을 차례로 정복해온 아시아의 ‘복싱 신(神)’과 복싱 가문에서 태어난 천부적인 자질의 흑인 천재. 복싱 관계자들이 꼽는 최고의 빅 매치는 WBO(세계복싱기구) 웰터급 챔피언 마니 파키아오(33·필리핀)와 WBC(세계복싱평의회) 웰터급 챔피언 플로이드 메이웨더(34·미국)의 대결이다. 두 선수는 ‘링’지와 각종 복싱 사이트들이 선정하는 ‘파운드 포 파운드(체급 구분 없이 매기는 랭킹)’에서 세계 1, 2위에 올라 있다. 파키아오는 복싱 역사상 처음으로 8체급을 석권했다. 그는 1998년 WBC 플라이급 챔피언에 올랐다. 이어 12년간 슈퍼밴텀, 페더, 슈퍼페더, 라이트, 주니어웰터, 웰터급을 차례로 정복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안토니오 마르가리토(33·멕시코)를 꺾고 WBC 슈퍼웰터급 타이틀까지 차지했다. 몸무게 48∼51kg의 선수들이 출전하는 플라이급에서 69.85kg 이하의 선수들이 나서 슈퍼웰터급까지 체중을 20kg 가까이 불렸지만 스피드를 크게 잃지 않았다. 기존의 스피드에 파워가 실리면서 천하무적이 됐다. 그는 오스카 데 라 호야(38·미국) 등 기존의 슈퍼스타들을 샌드백 두들기듯 하면서 압도적인 기량 차를 보였다. 필리핀에서 절대적 인기를 얻고 있는 그는 하원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53승(38KO) 2무 3패를 기록 중인 그는 12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후안 마누엘 마르케스(38·멕시코)와 WBO 웰터급 3차 방어전을 치른다. 메이웨더는 아버지와 삼촌 등이 복싱을 했던 복싱 가문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다른 꼬마들이 야구놀이를 할 때 그는 복싱을 흉내 내며 자랐다. 42전 전승(26KO)을 달리고 있는 그는 슈퍼페더, 라이트, 슈퍼라이트, 웰터, 슈퍼웰터 등 5체급을 석권했다. 메이웨더 역시 슈퍼스타였던 오스카 데 라 호야와의 2007년 경기에서 승리하면서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당시 12회 판정승을 거두며 WBC 슈퍼웰터급 타이틀을 따냈다. 파키아오는 2008년 호야와의 논타이틀 매치에서 8회 KO승을 거뒀다. 파키아오와 메이웨더의 대결은 지난해 성사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양측에서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합의에 실패했다. 특히 약물 검사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메이웨더 측은 올림픽 수준에 버금가는 약물 검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아무 때나 불시에 약물 검사를 실시하자고도 했다. 파키아오는 정해진 기간을 두고 약물 검사를 하자는 쪽이었다. 검사 기간을 정해 놓지 않으면 집중력이 분산돼 훈련 리듬이 망가진다는 이유였다. 두 선수의 대결이 성사되면 각각 5000만 달러(약 558억 원)에 이르는 대전료를 챙길 것으로 보인다. 양측은 공식적인 견해를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복싱 팬들의 고조되는 기대감 속에 2012년 맞대결설이 흘러나오고 있다.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 마니 파키아오△국적: 필리핀 △생년월일: 1978년 12월 17일△키: 169cm △팔 길이: 170cm △전적: 53승 (38KO) 2무 3패 △주요 타이틀: WBC 플라이급 챔피언(1998), IBF 슈퍼밴텀급 챔피언(2001), 링페더급 챔피언(2003), WBC 슈퍼페더급 챔피언(2008), WBC 라이트급 챔피언(2008), IBO 주니어웰터급 챔피언(2009), WBO 웰터급 챔피언(2009), WBC 슈퍼웰터급 챔피언(2010)■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국적: 미국 △생년월일: 1977년 2월 24일 △키: 173cm △팔 길이: 183cm △전적: 42승(26KO) 무패 △주요 타이틀: WBC 슈퍼페더급 챔피언(1998), WBC 라이트급 챔피언 (2002), WBC 슈퍼라이트급 챔피언(2005), IBF-WBC 웰터급 챔피언(2006), WBC 슈퍼웰터급 챔피언(2007)}

복싱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일전을 치렀던 철권이 스러졌다. 전설의 한 페이지에 마침표가 찍혔다. 전 세계복싱협회(WBA) 헤비급 챔피언인 조 프레이저가 7일 간암으로 숨졌다. 향년 67세.프레이저의 생애는 살아있는 전설 무함마드 알리(69)의 생애와 떼어내 설명할 수 없다. 가난한 농장 일꾼이었던 프레이저는 프로복싱에 입문한 뒤 폭풍 같은 질주를 계속했다. 1971년 3월 8일 미국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 26전 전승에 23KO승을 기록 중이던 그는 WBA 헤비급 챔피언 2차 방어에 나섰다. 상대는 31승(26KO) 무패의 무함마드 알리였다. 알리는 베트남전 징집을 거부한 뒤 1967년 챔피언을 박탈당했다. 4년 만에 정상에 재도전하는 순간이었다.프레이저는 1970년 지미 엘리스에게 도전해 5회 KO승을 거두며 챔피언이 됐다. 반전운동과 흑인 인권운동에 앞장선 알리는 프레이저를 ‘고릴라’ 또는 ‘백인의 하수인’으로 놀려댔다. 알리는 이 대결에 인종문제와 인권문제를 끌어들이며 경기 외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이로 인해 알리와 프레이저는 평생 원수가 됐다.무패의 철권들이 맞선 당시의 승부는 ‘세기의 대결’로 명명됐다. 지난 100년간 가장 유명한 경기였다. 3억 명이 이 경기를 TV로 지켜봤다. 프레이저를 키운 명트레이너 에디 푸치는 알리가 오른손 올려치기를 하기 전 주먹을 아래로 길게 떨어뜨리는 습관을 발견했다. 알리가 오른손을 내리는 순간 번개 같은 레프트 훅을 날릴 것을 요구했다. 프레이저의 레프트 훅에 걸린 알리는 15회에 다운됐다. 프레이저의 만장일치 판정승이었다. 그러나 프레이저는 1974년 뉴욕, 1975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알리에게 잇따라 졌다. 프레이저는 이후 또 다른 전설 조지 포먼(62)에게 두 번 패한 뒤 은퇴했다. 통산 32승(27KO) 1무 4패.가난했던 프레이저는 손에 아버지의 낡은 넥타이를 감고 버려진 스타킹과 헌 옷을 채운 백을 두드렸다. 영화 ‘록키’에서 주인공이 푸줏간에 걸린 고기를 두드리며 주먹을 단련하던 장면은 프레이저의 실제 삶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어렸을 때 농장에서 덩치 큰 돼지를 곯리다 화가 난 돼지에게 쫓겨 넘어지면서 왼팔을 다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왼팔은 조금 굽었다. 그는 평생 왼팔을 제대로 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왼팔로 세계를 정복했다.프레이저는 1964년 도쿄 올림픽에 예비 선수로 참가했다가 주전 선수가 주먹을 다치는 바람에 대신 출전했다. 왼손 엄지가 부러졌지만 투혼을 발휘하며 금메달을 땄다. 그는 전형적인 ‘헝그리 복서’로서 주먹 하나로 출세했지만 경쟁자인 알리나 포먼에 비해 자신의 명성을 쌓는 데 서툴렀고 재산도 크게 불리지 못했다. 알리와는 평생 말다툼을 그치지 않았지만 최근엔 “알리에게 더는 악감정이 없다”며 알리를 용서했다. 알리도 그의 쾌유를 빌며 간절히 기도했다. 두 사람은 평생 다퉜지만 죽음 앞에서 서로 화해했다.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복싱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일전을 치렀던 철권이 스러졌다. 전설의 한 페이지에 마침표가 찍혔다. 전 세계복싱협회(WBA) 헤비급 챔피언 조 프레이저가 7일 간암으로 숨졌다. 향년 67세. 프레이저의 생애는 살아있는 전설 무하마드 알리(69)의 생애와 떼어내 설명할 수 없다. 가난한 농장 인부였던 프레이저는 프로복싱에 입문한 뒤 폭풍 같은 질주를 계속했다. 1971년 3월 8일 미국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 26전 전승에 22KO승을 기록 중인 그는 WBA 헤비급 챔피언 2차 방어에 나섰다. 상대는 31승(25KO) 무패의 무하마드 알리였다. 알리는 베트남전 징집을 거부한 뒤 1967년 챔피언을 박탈당했다. 4년 만에 정상에 재도전 하는 순간이었다. 프레이저는 1970년 지미 엘리스에게 도전해 5회 KO승을 거두며 챔피언이 됐다. 반전운동과 흑인 인권운동에 앞장섰던 알리는 프레이저를 '고릴라' 또는 '백인의 하수인'으로 놀려댔다. 알리는 이 대결에 인종과 인권 문제를 끌어들이며 경기 외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이로 인해 알리와 프레이저는 평생 원수가 됐다. 무패의 철권들이 맞선 당시의 승부는 '세기의 대결'로 명명됐다. 지난 100년간 가장 유명한 경기였다. 3억 명이 이 경기를 TV로 지켜봤다. 프레이저를 키운 명 트레이너 에디 푸치는 알리가 오른손 올려치기를 하기 전 주먹을 아래로 길게 떨어뜨리는 습관을 발견했다. 알리가 오른손을 내리는 순간 번개 같은 레프트 훅을 날릴 것을 요구했다. 프레이저의 레프트훅에 걸린 알리는 15회에 다운됐다. 프레이저의 만장일치 판정승이었다. 그러나 프레이저는 1974년 뉴욕, 1975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알리에게 잇달아 패했다. 프레이저는 이후 또 다른 전설 조지 포먼(62)에게 두 번 패한 뒤 은퇴했다. 통산 32승(27KO) 1무 4패. 가난했던 프레이저는 손에 아버지의 낡은 넥타이를 감고 버려진 스타킹과 헌 옷을 채운 백을 두드렸다. 영화 '록키'에서 주인공이 푸줏간에 걸린 동물을 두드리며 주먹을 단련하던 장면은 프레이저의 실제 삶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졌다. 프레이저는 '록키'에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어렸을 때 농장에서 덩치 큰 돼지를 곯리다 화가 난 돼지에 쫓겨 넘어지면서 왼손을 다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왼팔은 조금 굽었다. 그는 평생 왼팔을 제대로 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왼팔로 세계를 정복했다. 프레이저는 1964년 도쿄 올림픽에 예비 선수로 참가했다가 주전 선수가 주먹을 다치는 바람에 대신 출전했다. 왼손 엄지가 부러졌지만 투혼을 발휘하며 금메달을 땄다. 그는 전형적인 헝그리 복서로서 주먹 하나로 출세했지만 경쟁자인 알리나 포먼에 비해 자신의 명성을 쌓는데 서툴렀고 재산도 크게 불리지 못했다. 알리와는 평생 말다툼을 그치지 않았지만 최근엔 "알리에게 더 이상 악감정은 없다"며 알리를 용서했다. 알리도 그의 쾌유를 빌며 간절히 기도했다. 두 사람은 평생 다퉜지만 죽음 앞에서는 서로 화해했다.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잉글랜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6일 취임 25주년을 맞았다. 수많은 선수가 명장 퍼거슨 감독 밑에서 빛을 발했지만 그렇지 않은 선수도 있다. 영국 대중지 더 선은 7일 ‘퍼거슨의 실패작’ 10명을 선정했다.1위는 포르투갈 3부 리그에서 뛰다 지난해 맨유에 합류했던 베베(포르투갈)다. 그는 이적료 740만 파운드(약 132억 원)를 기록했지만 기량이 기대 이하인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시즌 맨유에서 7경기에 출전해 2골을 넣는 데 그쳤다. 맨유는 베베를 임대 형식으로 터키의 베식타쉬로 보냈다.두 번째는 ‘장님’이라는 별명을 얻은 은퇴한 골키퍼 마시모 타이비가 꼽혔다. 이탈리아 출신인 그는 1999년 450만 파운드(약 80억 원)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베네치아에서 이적했다. 그는 리버풀과의 데뷔전에서는 훌륭한 기량을 선보였지만 이후 연달아 대실수를 저지르며 짐을 꾸려야 했다. 한때 중국의 자랑이던 둥팡줘(미카 FC)도 혹평을 피해가지 못했다. 그는 최악의 선수 7위에 올랐다. 2004년 맨유에 입단한 둥팡줘는 많은 중국인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프리미어리그에서 한 경기만 출전했다.특이한 점은 지난해 남아공 월드컵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던 우루과이의 디에고 포를란(인터밀란)이 명단에 든 것이다. 더 선은 포를란에 대해 “그는 늘 세계적인 스트라이커였다. 맨유에서 활동할 때만 빼고…”라고 표현했다. 포를란은 2002년부터 2004년까지 맨유에서 뛸 당시 교체 멤버로 활동했고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63경기 10골에 그쳤다. 그러나 그는 이후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비야 레알로 옮겨 2005년 25골로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 펄펄 날았고 올해 이탈리아 무대로 옮겼다.이 밖에 ‘토털사커’의 창시자로 불리는 네덜란드 축구 영웅 요한 크라위프의 아들 요르디 크라위프, 미드필더 에릭 드젬바드젬바(카메룬), 2800만 파운드(약 500억 원)의 이적료를 기록한 미드필더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아르헨티나), 수비수 윌리암 프뤼니에(프랑스) 등이 최악의 선수로 꼽혔다. 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잉글랜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6일 취임 25주년을 맞았다. 수많은 선수들이 명장 퍼거슨 감독 밑에서 빛을 발했지만 그렇지 않은 선수도 있다. 영국 대중지 더 선은 7일 '퍼거슨의 실패작' 10명을 선정했다.1위는 포르투갈 3부 리그에서 뛰다 지난해 맨유에 합류했던 베베(포르투갈)다. 그는 이적료 740만 파운드(약 132억원)를 기록했지만 기대 이하의 기량을 지닌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시즌 맨유에서 7경기에 출전해 2골을 넣는데 그쳤다. 맨유는 베베를 임대 형식으로 터키의 베식타스로 보냈다.두 번째는 '장님'이라는 별명을 얻은 은퇴한 골키퍼 마시모 타이비가 꼽혔다. 이탈리아 출신인 그는 1999년 450만 파운드(약 80억 원)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베네치아에서 이적했다. 그는 리버풀과의 데뷔전에서는 훌륭한 기량을 선보였지만 이후 연달아 대실수를 저지르며 짐을 꾸려야 했다. 한때 중국의 자랑이었던 덩팡저우(미카 FC)도 혹평을 피해가지 못했다. 그는 최악의 선수 7위에 올랐다. 2004년 맨유에 입단했던 덩팡저우는 많은 중국인들의 기대에도 프리미어리그에 1경기만을 출전했다.특이한 점은 지난해 남아공 월드컵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던 우루과이의 디에고 포를란(인터밀란)이 명단에 든 것이다. 더 선은 포를란에 대해 "그는 늘 세계적인 스트라이커였다. 맨유에서 활동할 때만 빼고…"라고 표현했다. 포를란은 2002년부터 2004년까지 맨유에서 뛸 당시 교체 멤버로 활동했고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63경기 10골에 그쳤다. 그러나 그는 이후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비야 레알로 옮겨 2005년 25골로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 펄펄 날았고 올해 이탈리아 무대로 옮겼다. 이밖에 '토털사커'의 창시자로 불리는 네덜란드 축구 영웅 요한 크루이프의 아들 요루디 크루이프, 미드필더 에릭 드젬바-드젬바(카메룬), 2800만 파운드(약 500억 원)의 이적료를 기록했던 미드필더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아르헨티나), 수비수 윌리엄 프루니어(프랑스), 미드필더 클레베르손(브라질), 미드필더 다비드 벨리온(프랑스) 등이 최악의 선수로 꼽혔다.이원홍기자 bluesky@donga.com}

“위대한 도전과 탐험정신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이어가겠습니다.”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실종된 박영석 대장과 신동민 강기석 대원의 합동 영결식이 3일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에서 열렸다. 이인정 대한산악연맹회장은 조사를 통해 “이들이 남긴 뜨거운 열정의 메아리는 역사로 기억될 것”이라며 실종자들을 기렸다. 박 대장의 모교인 동국대 김희옥 총장은 “박 대장이 추구한 높이는 물리적 높이가 아니라 인류정신의 높이였다”며 “대자연과 하나 되는 경지, 백전불굴의 정신이 박영석 정신이었다”고 추도했다.이날 영결식에는 유인촌 대통령실 문화특별보좌관, 박 대장과 친분이 두터웠던 만화가 허영만 씨와 엄홍길 씨를 비롯한 많은 산악인이 참석했다. “산을 제일로 사랑했던 그 악우(岳友)여. 어이해 눈보라 속에 사라졌나 그 친구, 그 악우여….” 산악인들이 ‘악우가’를 부르는 동안 식장엔 흐느낌이 가득했다.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 본보 기자들이 지켜본 박영석 ▼박영석 대장(사진)의 도전에는 동아일보도 함께했다. 박 대장의 2005년 북극 원정과 안나푸르나 트레킹, 2006년 에베레스트 횡단, 2007년 베링해협 횡단 때는 전창 기자가, 2008년 중국 쓰촨 성 미답봉 원정에는 김성규 기자가 한 달가량 동행했다. 2009년 ‘코리안 루트’를 냈던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 때는 황인찬 기자가 두 달 넘게 원정대와 함께했다. 동아일보는 2004년부터 박영석 대장이 대학생들과 함께했던 국토 순례 행사 ‘대한민국 희망원정대’도 후원했다.박 대장의 원정대는 상명하복의 질서가 뚜렷했다.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였다. 하지만 엄한 겉모습 뒤로 일일이 대원들을 챙기는 ‘따뜻한 맏형’이었다.김 기자는 “내가 3900m 높이의 베이스캠프에서 고산병에 걸려 식음을 전폐했을 때 취사 담당이었던 신동민 대원에게 ‘식욕 좀 돋우게 맛있는 저녁을 준비하라’고 말하는 등 마음이 따뜻한 대장이었다”고 회상했다.김 기자는 “지친 대원들에게 먹이기 위해 한국에서 가져온 30만 원짜리 6년산 홍삼을 배낭에서 주섬주섬 꺼내 박 대장이 손수 달이곤 했다.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김 기자는 “원정 지역에서 무언가를 끓이는 냄비는 모두 뚜껑을 열어보고,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이라면 꼭 맛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등 호기심이 왕성했다”고 기억했다.황 기자는 “처음에는 거만하고 무례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볼수록 잔정이 많았다”고 했다. 동행 취재가 확정되자 박 대장은 “대원이니까 이제 말 놔도 되지”라고 말해 기자를 잠시 당황하게 만들었다.황 기자는 한 달 반 동안 해발 5364m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면서 단것이 너무 먹고 싶었다. 밤에 몰래 비품 텐트에서 500mL 콜라 한 병을 꺼내 먹었다가 이튿날 박 대장에게 호되게 혼났다. 대원의 몫을 기자가 축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며칠 뒤 박 대장은 콜라와 사이다를 비롯한 탄산음료를 한 무더기 구입해 줬다. 희망원정대를 동행 취재했던 한우신 기자는 “박 대장은 대학생들이 ‘힘들다’ ‘아프다’고 말하면 감싸 주기보다는 더 호되게 꾸짖는다. 학생들은 원정 중에 박 대장의 독선적 태도에 자주 불만을 토로했지만 끝난 다음에는 박 대장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따랐다”고 했다. 한 기자는 원정이 끝난 뒤 박 대장이 대학생들에게 남긴 말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여러분, 많이 비웠습니까. 이제 그 속에 꿈을 채워 넣으세요.”정리=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위대한 도전과 탐험정신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이어가겠습니다."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실종된 박영석 대장과 신동민 강기석 대원의 합동 영결식이 3일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이인정 대한산악연맹회장은 조사를 통해 "이들이 남긴 뜨거운 열정의 메아리는 역사로 기억될 것"이라며 실종자들을 기렸다. 박 대장의 모교인 동국대 김희옥 총장은 "박 대장이 추구한 높이는 물리적 높이가 아니라 인류정신의 높이였다"며 "대자연과 하나 되는 경지, 백전불굴의 정신이 박영석 정신이었다"고 추도했다. 이날 영결식에는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박 대장과 친분이 두터웠던 만화가 허영만 씨 및 엄홍길 씨를 비롯한 많은 산악인들이 참석했다. "산을 제일로 사랑했던 그 악우(岳友)여. 어이해 눈보라 속에 사라졌나 그 친구, 그 악우여…." 산악인들이 '악우가'를 부르는 동안 식장엔 흐느낌이 가득했다.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2010년 3월 12일 선발대가 출국해서 5월 23일 귀국할 때까지 73일간의 등반기간 중 매일같이 내리는 눈 때문에 눈사태의 위험이 크다고 판단해 철수를 결정했다.’지난달 18일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실종된 박영석 대장과 신동민 강기석 대원(사진)은 이미 지난해 초 안나푸르나 남벽에 도전했다 철수했다. 그들은 1년 뒤의 운명을 예감하지 못했던 것일까. 당시 원정기에는 이미 눈사태의 위험이 생생히 적혀 있었다. 한국산서회(山書會)의 이병태 고문(치과의사)은 실종 대원들의 합동 영결식을 하루 앞둔 2일 박영석 원정대가 지난해 안나푸르나 남벽에 나섰을 때의 기록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겼다. 강 대원은 산을 좋아하는 인사들의 모임인 산서회 총무로 활동했다. 지난해 말 산서회에 글을 남겼다.기록에 따르면 박 대장은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4월 3일 한국으로 떠나 14일 다시 베이스캠프에 돌아왔다. 이때 박 대장은 술에 취해 울면서 “밖에서는 영웅 대접을 받지만 가족들에게는 (위험한 일을 한다며) 그렇지 못했다”면서 자책했다. 하지만 부친상을 치르자마자 다시 산으로 돌아오는 집념을 발휘했다.부상도 잇따랐다. 강 대원은 떨어지는 돌에 맞아 오른 무릎이 10cm가량 찢어져 인대가 파열됐다. 그러나 원정대는 포기하지 않았다.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렸다. 이들은 기존 루트의 이점을 이용하지 않기로 했다. 그 위험성에 대해 강 대원은 이렇게 적었다.‘한번 올라가면 후퇴할 고정 로프가 없고, 확보물 부족으로 내려가는 상황이 더 어려워진다. 한정된 장비와 식량을 대원들이 배낭에 지고, 미리 설치된 고정 로프와 캠프도 없이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 단 한 번의 시도로 성공해야 한다.’하지만 강 대원은 ‘끝없이 내리는 눈 때문에 눈사태 위험이 커져 원정대는 철수를 결정했다. 박영석 대장과 대원들은 2011년 가을 시즌에 다시 도전할 것을 약속했다’고 글을 맺었다. 그들은 약속대로 올해 가을 다시 이곳을 찾았지만 눈사태로 실종됐다. 한편 이 고문은 이인정 대한산악연맹회장과 박 대장이 한때 남북한 합동 에베레스트 등반을 구상했던 일화를 밝혔다. 이 회장과 박 대장은 이를 위한 남북한 산악인 교류를 위해 2006년 1월 북한을 방문했다. 당시 이 회장과 박 대장은 북한의 치과병원이 낡은 것을 보고 건물을 수리해주기도 했다고 이 고문은 회고했다.최광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2일 합동분향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을 찾아 실종자들에게 체육훈장을 추서했다. 대한체육회 박용성 회장, 박선규 문화부 차관, 산악인 엄흥길 오은선 씨, 박 대장의 원정활동을 후원해온 동아일보사 김재호 사장, 배인준 주필 등도 분향소를 찾아 헌화하고 실종자 가족들을 위로했다. 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돌아오지 않은 이들을 향한 통곡과 눈물이 뜨겁고 깊게 흘렀다. 가지런히 놓인 흰 국화 사이로 그들이 더 높은 곳에서 새 삶을 살기를 바라는 염원이 향과 함께 피어올랐다. 남은 이들의 슬픔을 위로하듯 사진 속의 그들은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1일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안나푸르나 남벽 원정대 박영석 대장과 신동민 강기석 대원의 분향소.남편을 잃은 신동민 대원의 부인 조순희 씨는 아들 호준 군(8)의 손을 잡고 들어와 함께 절을 올렸다. 아들의 실종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기절했던 강기석 대원의 어머니 최시연 씨는 울다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갔다. 아들이 히말라야에 간 소식을 모른 채 자궁경부암 수술을 받고 난 뒤였다. 링거를 맞으며 남편의 무사귀환을 빌었던 박영석 대장의 부인 홍경희 씨는 큰아들을 끌어안고 울었다. 박 대장의 두 아들 성우, 성민 씨는 눈물을 참으며 천장을 바라보았다.가족들은 분향소가 문을 열기 전 미리 입장해 실종자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언니를 부축하고 들어온 강 대원의 이모 최주희 씨는 “기석이 불쌍해서 어떡해…. 결혼도 안 하고 애인도 없어요. 부모한테만 잘하고…. 산에 갈 때 한 번도 산에 간다 말한 적이 없어요. 이번 원정에 나서기 전 ‘엄마 아프지 말아요’라고 한 게 마지막이었어요. 우리 기석이는 죽으면 안 돼요. 죽으면 안 되지…”라고 했다.박 대장의 누나 혜록 씨는 “영석이가 아버지 장례식 때 술에 취해 울면서 그러더라고요. 밖에서는 영웅 대접 받아도 형제들한테는 인정을 못 받았다고. 형제들은 너무 위험한 일을 한다고 산악 활동을 말리고 있었어요. 내가 영석이 오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영석이는 밖에서도 영웅이었지만 우리한테도 영웅이었어요”라고 말했다.이인정 대한산악연맹 회장은 “그들을 다시 찾아와야 하는데 큰 고민이다. 날씨가 좋아지면 찾아오겠다. 그 생각밖에 없다”고 했다. 침통한 표정의 이 회장은 “그러나 박영석과 대원들은 거기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며 실종자들을 기렸다.이명박 대통령은 박범훈 교육문화수석비서관을 통해 보낸 친서에서 “박 대장은 세계 최고의 산악인이었습니다. 한평생 사랑하던 산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국민과 전 세계 산악인들은 박 대장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떠나보내야 하는 가족들의 슬픔이야 이루 말할 수 없겠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박 대장이 남긴 위대한 용기와 불굴의 도전정신을 오랫동안 잊지 않을 것임을 아시고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전했다.산악인 엄홍길 대장은 “얘들아 얼마나 춥겠니. 모든 한을 다 풀고 좋아하던 안나푸르나에서 편히 쉬어라”라고 힘겹게 말했다.박 대장 일행을 후원해 왔던 LIG손해보험 구자준 회장, 영원무역 성기학 회장이 직접 분향소를 방문했다. 민주당 손학규 대표와 김희옥 동국대 총장은 조화를 보냈다. 각계의 헌화와 조문이 이어졌다. 이재오 전특임장관, 만화가 허영만 씨, 박 대장 일행의 탐험을 소재로 했던 ‘남극일기’의 주연배우 송강호 유지태 씨, 체육인 이에리사 장미란 씨 등이 분향소를 찾았다.정부는 실종자들에게 체육훈장을 추서할 것으로 알려졌다. 산악계는 3일 합동영결식을 치른다. 연맹은 실종자들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별도의 장지를 마련하지는 않을 계획이지만 가족들과 더 논의하기로 했다.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정윤식 기자 jys@donga.com }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실종된 박영석 대장(48) 일행의 구조작업을 진행하던 한국구조대가 수색을 거의 종료할 즈음 박 대장의 부인이 한국에서 전화를 했다.남편의 실종소식에 쓰러져 한국에서 링거를 맞고 있던 부인은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했다. 구조대는 이때 그동안 박 대장 일행이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던 균열지역 수색을 마친 뒤 절벽 밑의 빙하지역을 살피던 중이었다. 구조대의 김창호 대원이 직접 균열 속에 들어간 뒤 균열 내 좌우 벽에 긁힌 흔적이 없고 바닥에도 별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였다.구조대는 수색 범위를 넓힌 결과 박 대장 일행이 베이스캠프로 이동하는 경로에서 사용한 로프를 추가로 발견했다. 로프는 바위에 매어져 있었고 일부는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대원들이 균열지역을 벗어나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던 길이었음이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일대는 높은 봉우리에서 쏟아진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고 탐침봉으로 얼음 밑을 수색하기는 불가능했다. 대원들은 더는 수색이 어렵다고 판단했다.이때 박 대장의 부인이 수색지역 경사면의 오른쪽을 한 번만 더 살펴 달라고 부탁했다며 구조대의 이한구 대원이 지난달 30일 실종자 가족을 위한 마지막 브리핑에서 밝혔다. 꿈이라도 꾼 것일까. 부인의 예감은 적중하는 듯했다. 대원들이 오른쪽 측면을 살피자 그곳에 깊이 4m의 동굴이 나타났다. 대원들은 서둘러 동굴을 수색했다. 그러나 동굴엔 아무것도 없었다. 남편을 찾지는 못했지만 부인의 특이한 예감은 바다 건너에서도 미처 찾지 못했던 동굴로 구조대를 이끌었다. 박 대장 일행이 눈사태를 피해 이 동굴로 피신했다면 살았을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박 대장 일행의 실종 유력 지역이 균열지역이 아닌 베이스캠프 이동경로 일대임을 확인한 것은 구조대의 마지막 성과였다. 이인정 대한산악연맹회장은 “실종 추정지가 균열지역이 아닌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고 말했다. 실종자들이 균열 속에 빠졌다면 찾기가 어렵지만 다른 평탄한 지역에 묻혔다면 눈과 얼음이 녹는 계절에 발견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한편 가족들과 구조대원, 사고대책반 관계자들은 이날 저녁 함께 식사를 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구조대 진재창 대원은 “박 대장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는 울면서 수색지역의 눈 속에 박 대장 일행의 사진과 책을 묻고 왔다. 김재수 대원은 “후배들이 희생돼 누구보다 괴로운 사람은 박 대장이었을 것”이라고 했다.카트만두=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실종된 박영석 대장(48) 일행의 구조작업을 진행하던 한국구조대가 수색을 거의 종료할 즈음 박 대장의 부인은 한국에서 전화를 했다.남편의 실종소식에 쓰러져 한국에서 링거를 맞고 있던 부인은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했다. 구조대는 이 때 그동안 박 대장 일행이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던 균열 지역 수색을 마친 뒤 절벽 밑의 빙하 지역을 살피던 중이었다. 구조대의 김창호 대원이 직접 균열 속에 들어간 뒤 균열 내 좌우 벽에 긁힌 흔적이 없고 바닥에도 별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였다.구조대는 수색 범위를 넓힌 결과 박 대장 일행이 베이스캠프로 이동하는 경로에서 사용한 로프를 추가로 발견했다. 로프는 바위에 매어져 있었고 일부는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대원들이 균열 지역을 벗어나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던 길이었음이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일대는 높은 봉우리에서 쏟아진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고 탐침봉으로 얼음 밑을 수색하기는 불가능했다. 대원들은 더 이상의 수색은 어렵다고 판단했다.이 때 박 대장의 부인은 수색 지역 경사면의 오른쪽을 한 번만 더 살펴 달라고 부탁했다고 구조대의 이한구 대원이 지난달 30일 실종자 가족을 위한 마지막 브리핑에서 밝혔다. 꿈이라도 꾼 것일까. 부인의 예감은 적중하는 듯했다. 대원들이 오른쪽 측면을 살피자 그 곳에 깊이 4m의 동굴이 나타났던 것이다. 대원들은 서둘러 동굴을 수색했다. 그러나 동굴엔 아무것도 없었다. 남편을 찾지는 못했지만 부인의 특이한 예감은 바다 건너에서도 미처 찾지 못했던 동굴로 구조대를 이끌었다. 박 대장 일행이 눈사태를 피해 이 동굴로 피신했다면 살았을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박 대장 일행의 실종 유력 지역이 균열 지역이 아닌 베이스캠프 이동 경로 일대임을 확인 한 것은 구조대의 마지막 성과였다. 이인정 대한산악연맹회장은 "실종 추정지가 균열 지역이 아닌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고 말했다. 실종자들이 균열 속에 빠졌다면 찾기가 어렵지만 다른 평탄한 지역에 묻혔다면 눈과 얼음이 녹는 계절에 발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한편 가족들과 구조대원, 사고대책반 관계자들은 이날 저녁 함께 식사를 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구조대 진재창 대원은 "박 대장의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는 울면서 수색 지역의 눈 속에 박 대장 일행의 사진과 책을 묻고 왔다. 김재수 대원은 "후배들이 희생돼 누구보다 괴로운 사람은 박 대장이었을 것"이라고 했다.모두가 힘겨운 시간이었지만 가족들은 고생한 구조대원들을, 구조대원들은 아픔을 안고 살아가야 할 가족들을 위로했다. 박 대장 일행을 묻은 설산 아래의 밤은 상처받은 자들이 서로를 다시 이해하는 가운데 깊어갔다.카트만두=이원홍기자 bluesky@donga.com}

설산은 말없이 그들을 품에 안았다. 지구상의 3극점인 남극, 북극, 에베레스트와 히말라야 8000m급 14좌, 그리고 7대륙 최고봉에 모두 올라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던 산악인 박영석 대장(48)의 위령제가 30일 네팔 안나푸르나의 해발 4200m 베이스캠프에서 열렸다. 박 대장과 함께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실종된 신동민(37) 강기석 대원(33)의 위령제도 함께 열렸다.실종자 가족들은 헬리콥터 2대에 나눠 타고 현지에 도착한 뒤 돌탑과 장대를 세우고 깃발을 매단 제단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이어 한국에서 가져온 막걸리가 뿌려졌다. 가족들은 네팔 카트만두 시내 보우다 사원에서 영정을 모시고 지상에서 한 번 더 위령제를 지냈다. 위령제는 티베트 불교인 라마교 형식으로 치러졌다.대한산악연맹은 11월 1일부터 사흘간 서울대병원에 위패를 모시고 산악인장으로 장례를 치를 계획이다. 산악인장은 국내 최초다. 연맹 이인정 회장은 “11월부터 날씨가 나빠지고 낙석이 심해 추가 수색이 어렵다. 올해 수색은 종결한다. 현장 구조대가 더 이상 수색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내년 봄에 날씨가 좋아지면 다시 이들을 찾으러 올 것이다. 이들의 흔적이라도 찾기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고 말했다.연맹은 18일 대원들이 실종된 뒤 이례적으로 한국에서 구조대와 사고대책반을 급파해 총력을 기울였으나 대원들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한편 대한산악연맹은 최종 브리핑에서 박 대장 일행이 지금까지 파묻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균열지역 밖의 빙하지대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구조대와 사고대책반 및 실종자 가족들은 31일 귀국할 예정이다. 카트만두=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여신의 뜻인 걸까. 아침부터 까마귀가 몹시 울었다. 이곳에서 까마귀는 신성한 동물이다. 영혼을 하늘로 인도한다고 여긴다. 영원히 녹지 않는 흰 눈을 쓰고 있는 ‘풍요의 여신’ 안나푸르나(8091m). 30일 여신의 품속인 해발 4200m의 산기슭. 헬리콥터가 수차례 절벽을 선회한 뒤 내렸다. 가족들은 차가운 돌로 쌓은 제단 앞에 섰다. 돌탑에 꽂힌 장대 위에 수많은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산에서 잠든 영혼들이여, 이 장대를 이정표 삼아 하늘로 오르소서. 깃발엔 영혼을 기리는 문구가 새겨졌다. 이곳 사람들은 깃발이 펄럭일 때마다 영혼이 바람을 따라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는다.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실종된 박영석 대장(48)과 신동민(37) 강기석 대원(33)의 위령제가 열렸다. 박영석 대장의 동생 박상석 씨, 아들 박성우 씨, 신동민 대원의 부인 조순희 씨, 강기석 대원의 동생 강민석 씨가 차례로 절을 올렸다. 절을 마친 이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바람결에 가족들의 염원과 회한이 높고 깊은 봉우리 사이로 흩어졌다. 이제 불러도 더는 대답 없는 이름들이었다.열 살 연하의 남편을 보내야 하는 신 대원의 부인 조순희 씨는 한때 식사를 거의 못했다. 절을 한 뒤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여성 산악인으로 활동했던 그는 산에서 남편을 만나 산으로 보내야 했다. 10년 전 히말라야 푸모리에서 친구와 함께 산에 오르다 친구가 사망했고 그때 신 대원이 위로하며 사랑에 빠졌다. 그때도 지금도 슬픔은 눈물로 위로를 받는다. 끼니를 거르던 부인은 한국구조대의 유학재 대원이 산에서 내려와 대성통곡을 한 뒤에야 겨우 조금씩 식사를 하는 형편이었다. 구조작업을 하던 이한구 대원이 손목에 감고 있던 팔찌를 꺼내 박성우 씨에게 건넸다. “이거 아버지께서 갖고 있으라고 한 거야. 이제 너에게 줄게.” 아들은 소리 없이 울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인정 대한산악연맹 회장이 울먹였다. “이제 어떻게 하나….”가족들은 산에서 내려와 카트만두 시내의 보우다 사원에 들렀다. 이곳에 실종자들의 사진을 놓고 라마식 위령제를 다시 지냈다. 심벌즈처럼 생긴 전통악기 묵찰이 은은히 울려 퍼졌고 승려들은 불경을 외우며 모두를 위로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지상에서 영원히 이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대한산악연맹은 27일 오후 늦게 가족들에게 수색 중단을 통보했다. 가족들은 서운했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절망과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 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었다. 이인정 회장은 진정제를 꺼내 들었다. 구조대에게 수색 종결을 지시한 그는 “나는 이제 평생 박영석 얼굴을 똑바로 못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회장은 “박영석을 산에 가지 못하게 하면 그것이 그에게는 죽음이었다”며 “영석이는 산에서 죽음으로써 영원히 살아난 것이다”라고 말했다.가족들은 대원들을 가슴에 묻었다. 누군가 떠난 사람을 기억하는 한 그는 여전히 살아있다는 말을 했다. 그들은 떠난 이들을 오래도록, 어쩌면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몸은 떠났지만 그들을 마음속에서 살려낼 것이다. 그들을 왜 일찍 데려갔는지, 차가운 여신은 말이 없었다.카트만두=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박영석 대장을 가까이서 지켜봐 온 지인들은 하나같이 “이번에도 틀림없이 살아 돌아올 것이라 기대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 대장은 소식이 끊긴 18일 이후 12일째인 30일까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무사귀환을 기도했던 산악인과 지인들의 회고를 정리했다.○ 이인정 대한산악연맹 회장영석이는 1980년 마나슬루 원정대가 등정에 성공한 뒤 귀국해 카퍼레이드를 하는 것을 보고 산악인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당시 마나슬루 원정대장은 나였다. 영석이는 유명해지기 위해 산에 오르는 게 아니었다. 산이 좋아 오르다 보니 숱한 기록을 세우게 됐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유명해졌다. 영석이는 산에서 죽음으로써 영원히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번 수색은 종결하지만 날이 풀리면 영석이를 찾으러 다시 안나푸르나를 찾을 것이다. ○ 산악인 엄홍길 씨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긴 후배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영석이는 산 하나를 등정하면 내려오는 도중에 다음 목표를 얘기할 정도로 끊임없이 도전하고 탐험하던 산악인이었다. 나는 한때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동생을 잃었고 대한민국은 산악계의 큰별 하나를 잃었다.○ 여성 산악인 오은선 씨영석이 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집념의 사나이’다.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등반할 때는 예상하지 못한 돌발 상황이 최소한 세 가지는 벌어진다는 각오를 하고 시작하라던 영석이 형의 가르침을 지금도 늘 가슴에 새기고 있다.○ 만화가 허영만 씨2001년 7월 히말라야 K2봉 등정에 따라 나선 것이 계기가 돼 10년 넘게 박 대장과 인연을 이어왔다. 겁이 없었고 주저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이는 한참 어린 후배지만 박 대장한테서 배우려고 애썼던 게 있다. 한번 약속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킨다는 것이다.○ 익스트림스포츠 칼럼니스트 송철웅 씨동국대 산악부였던 영석이가 83학번, 국민대 산악부였던 내가 82학번으로 산악부 교류를 하다 처음 알게 돼 1990년대 중반부터 가까워졌다. 영석이는 산에 가지 않고는 못 사는 사람이었다. “산에 있지 않으면 불편하다. 도시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카트만두=이원홍기자 bluesky@donga.com 이종석기자 wing@donga.com }

“그대 더 높은 눈으로, 더 높은 산 위에서 바라보기 위해 함께 왔던 악우(岳友), 남원우 안진섭 여기 히말라야의 하늘에 영혼으로 남다.”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50m)로 가는 길 언덕엔 산악인 박영석 대장이 새긴 비석이 서 있다. 그가 1993년 5월 16일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도전했다 후배 두 명을 잃고 세운 비석이다. 그는 2007년 같은 장소에 도전했다가 오희준 이현조 대원 두 명을 더 잃었다. 공교롭게도 똑같은 5월 16일 사고를 당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2009년 마침내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올라 4명의 사진을 꺼낸 뒤 “고맙다”며 울었다. 2005년 최초로 지구상의 3극점인 에베레스트, 남극, 북극과 히말라야 8000m급 14좌, 7대륙 최고봉을 모두 오르는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그였지만 대기록을 세운 뒤에도 마음의 빚이 있었다. 후배 4명의 목숨을 앗아간 에베레스트 남서벽이었다. 다리 근육이 파열된 채로 올랐다. 새 길을 뚫었다. ‘코리안 루트’라 이름을 붙였다. 히말라야 8000m급 14좌에 모두 코리안 루트를 내려 했다. 그의 남은 인생 최대 프로젝트였다. 극한지역에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 한국인의 도전정신을 영원히 기록하는 것이 목표였다.○ 기록과 업적네 살 때 아버지와 북한산 백운대에 올랐다. 생애 첫 ‘완등’이었다. 재수 끝에 산악부로 유명한 동국대에 입학했다. 1993년 아시아 최초 무산소 에베레스트 등정을 했다. 8년 2개월에 걸친 히말라야 8000m급 14좌 등정의 서곡이었다. 1997∼1998년 1년 동안 8000m급 6좌에 올랐다. 1년간 최다 8000m급 등정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2001년 악명 높은 K2(8611m)를 끝으로 8000m급 14좌에 모두 올랐다. 2002년 남극의 빈슨 매시프(5140m)에 올라 7대륙 최고봉에도 모두 올랐다. 2004년 남극, 2005년 북극에 갔다. 산악 그랜드슬램이었다.○ 부상과 오뚝이박영석은 1991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 100m를 굴러 얼굴뼈가 보일 정도로 다쳤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꿰맸다. 1996년 에베레스트 북동릉에서는 눈사태에 휩쓸렸다. 700m를 추락했다. 갈비뼈 두 대가 부러졌다. 함께 간 셰르파는 목숨을 잃었다. 부러진 뼈를 스스로 맞추고 돌아온 적도 있다. ○ 동료들의 희생과 방황그의 길에서 여러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늘 후배들이 기꺼이 동참했다. 고집도 셌지만 맏형 같았다. 2007년 두 명의 대원을 잃었을 때 은퇴를 생각했다. 그들은 그의 전셋집에서 몇 년간 같이 살던 사이였다. 삭발한 뒤 매일 술을 마셨고 방황했다. 환청에도 시달렸다. 그러나 “나는 쉴 수가 없다”고 말했다. “걔네들 몫까지 살아야 한다”고 했다.○ 산으로 간 이유대답은 “산에 가면 마음이 편하다”였다. 한편으로는 한민족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산에 가서 가장 지독한 근성을 보이는 것은 언제나 한국 산악대였다며 “대단한 민족, 악바리 민족”이라고 했다. 그는 이런 한민족의 근성을 떨쳐 보이고 싶어했다. 전 세계에 코리안 루트를 내려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의 슬로건은 “땅덩어리가 좁으면 생각의 크기로 맞서라”였다.○ 성공에 대한 부담과 식객(食客) 박영석그는 “가장 두려운 건 나 자신”이라고 했다. 등반대장으로 잘못된 결정을 내릴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각종 후원을 받은 원정대는 성공에 대한 부담도 컸다. 아웃도어 활동가로 그와 가깝게 지내온 송철웅 씨는 “칼을 뽑기보다 칼집에 칼을 넣기 어려웠다는 말을 자주했다”며 박 대장의 고민을 떠올렸다. 욕심 부리면 모두 위험해진다. 박 대장은 이 점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산에서의 생활을 위해 요리의 달인이 됐다. 특히 회를 잘 떴다. 산악인 치고는 수영과 낚시, 작살 등 물질이 수준급이었다.○ 경제문제와 가족생활등반 때문에 신혼예물을 팔기도 했다. 결혼 8년 만에 첫 월급을 가져다줬다고 했다. 부인이 한때 닭칼국수 식당을 운영했다. 전세금을 빼서 나선 적도 많다. 원정대의 짐이 규정 무게를 초과해 별도의 요금을 내야 했을 때 “나는 학생이다. 돈이 없다”며 몇 시간을 버텨 통과하기도 했다. 애창곡은 ‘바보처럼 살았군요’였다. 이제 그 노래를 더 들을 수 없다. 2남 중 큰아들은 세미 프로골퍼다.한편 대한산악연맹은 박영석 대장과 신동민, 강기석 대원에 대한 국내 위령제가 11월 1일부터 사흘간 서울대병원에서 산악인장으로 엄수될 예정이라고 밝혔다.카트만두=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

그들은 눈 쌓인 험난한 산 위에서 함께 울었던 사이였다. 2009년 5월 20일 오후 6시 15분. 14시간이 넘게 목숨을 걸고 올라간 산 위에서 그들은 기쁘고도 서러워 울었다. 히말라야에서 최고로 험난하다는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함께 올라 코리안 루트를 개척한 박영석 대장과 신동민 강기석 대원 및 진재창 부대장. 이 벽에서 이미 4명의 선후배를 잃었던 서러움의, 그럼에도 기어코 올랐다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박 대장은 여러 차례 이 벽에 도전했다가 후배 4명을 잃은 뒤에 정상에 섰다.그들의 운명은 그 뒤에 바뀌었다. 4명 중 박 대장과 신, 강 대원은 이번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 도중 실종됐다. 산악구조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진 부대장은 이들을 구하기 위해 한국에서 급파됐으나 그들을 찾지 못했다.신 대원은 박 대장의 뒤를 이을 한국 산악계의 차세대 주자였다. 185cm의 키에 74kg의 건장한 체격을 지닌 그는 별명이 ‘괴력의 사나이’였다.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오를 때 모두가 지친 상태에서 마지막 고비가 되었던 최후의 절벽에 먼저 올라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 준 것도 그였다. 조리사 출신인 그는 음식 담당이기도 했다. 50가지 이상의 반찬과 음식을 준비해 산상의 호화로운 음식으로 대원들의 건강을 챙겨주었다. 2001년 네팔 푸모리 등반 때 산 위에 자신을 응원하러 찾아온 열 살 연상의 여성 산악인 조순희 씨(47)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산악인의 마음을 아는 부인은 산에 가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준비를 철저히 하라는 당부를 하곤 했다. 신 대원은 부인과 아들 호준 군(8)을 남기고 산의 품에 안겼다.미혼인 강 대원은 등반기술이 좋은 테크니션으로 알려졌다. 신 대원과 함께 2007년부터 박 대장을 따랐다. 33세인 그는 박 대장을 따라 에베레스트 남서벽 공격조로 나서는 등 자신의 등반기술과 경험을 익혀가는 중이었다. 박 대장이 계획했던 히말라야 8000m급 14좌에 모두 새로운 루트를 내는 과정에서 세계적인 등반가로 성장할 기회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카트만두=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그들은 눈 쌓인 험난한 산 위에서 함께 울었던 사이였다. 2009년 5월 20일 오후 6시 15분. 14시간이 넘게 목숨을 걸고 올라간 산 위에서 그들은 기쁘고도 서러워 울었다. 히말라야에서 최고로 험난하다는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함께 올라 코리안 루트를 개척한 박영석 대장과 신동민 강기석 대원 및 진재창 부대장. 이 벽에서 이미 4명의 선후배들을 잃었던 서러움이, 그럼에도 기어코 올랐다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박 대장은 여러 차례 이 벽에 도전했다가 후배 4명을 잃은 뒤에 정상에 섰다.그들의 운명은 그 뒤에 바뀌었다. 4명 중 박 대장과 신, 강 대원은 이번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 도중 실종됐다. 산악구조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진 부대장은 이들을 구하기 위해 한국에서 급파됐으나 그들을 찾지 못했다.신 대원은 박 대장의 뒤를 이을 한국 산악계의 차세대 주자였다. 185cm의 키에 74kg의 건장한 체격을 지닌 그는 별명이 '괴력의 사나이'였다.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오를 때에도 모두가 지친 상태에서 마지막 고비가 되었던 최후의 절벽에 먼저 올라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 준 것도 그였다. 조리사 출신인 그는 음식 담당이기도 했다. 50가지 이상의 반찬과 음식을 준비해 산상의 호화로운 음식으로 대원들의 건강을 챙겨주었다. 조기구이 김치국 어묵우동 족발 간장게장 닭곰탕 등 다채로운 음식솜씨를 발휘했다. 2001년 네팔 푸모리 등반 때 산위에 자신을 응원하러 찾아온 10살 연상의 여성 산악인 조순희 씨(47)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산악인의 마음을 아는 부인은 산에 가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대신 준비를 철저히 하라는 당부를 하고는 했다. 신 대원은 부인과 아들 호준 군(8)을 남기고 산의 품에 안겼다.미혼인 강 대원은 등반기술이 좋은 테크니션으로 알려졌다. 신 대원과 함께 2007년부터 박 대장을 따랐다. 33세인 그는 박 대장을 따라 에베레스트 남서벽 공격조로 나서는 등 자신의 등반기술과 경험을 익혀가고 있는 중이었다. 박 대장이 계획했던 히말라야 8000m급 14좌에 모두 새로운 루트를 내는 과정에서 세계적인 등반가로 성장할 기회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한국산악계는 신, 강 대원의 실종으로 현 세대를 이끌고 있는 박 대장과 그의 뒤를 이을 차세대 유망주를 한꺼번에 잃었다.카트만두=이원홍기자 bluesky@donga.com▼신동민, 강기석 대원 약력▼◇신동민 대원 (1974년 제주 생, 대구대산악부OB)1995년 알프스 3대 북벽, 드류 등정2000년 에베레스트 북릉-북동릉 등반2007년 로체샤르 남벽 등반2008년 에베레스트 남석벽 등반2009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코리안 루트 등정2010년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강기석 대원 (1978년 안동 생, 안동대산악부OB)2003년 로체 서벽 등정2006년 로체 남벽 등반2008년 가셔브룸Ⅱ 등반2008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2009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코리안 루트 등정2010년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2011년 가셔브룸Ⅱ 등정※등정은 정상에 오른 것, 등반은 다녀온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