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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5~2025-12-05
칼럼100%
  • [오늘과 내일/박용]가계부채 대국 대통령들의 금리 걱정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기준금리가 너무 높다고 불만이다. 한국 대통령들은 시중 금리에 무척 민감하다. 한국이 가계부채 대국이기 때문이다. 가계부채는 2013년 말 1000조 원을 넘었다. 12년이 지난 9월 말 현재 역대 최대인 1968조 원으로 불었다. 6·27 부동산 대출 규제로 증가 폭이 줄어든 결과를 위안 삼아야 할 처지다. 가계부채 관리에 실패하다 보니, 역대 대통령들이 서민 금리 걱정을 하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은행 종 노릇, 금융계급 탓한 대통령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코로나19 사태로 가계부채가 1년 만에 155조 원 불어난 2021년 3월 국무회의에서 “신용이 높은 사람은 낮은 이율을 적용받고, 경제적으로 어려워 신용이 낮은 사람들이 높은 이율을 적용받는 구조적 모순”을 지적했다. 정치인 눈에 모순처럼 보여도 신용을 근간으로 하는 금융 시장에서는 거래 상대방 위험을 따지는 게 상식이다. 국가도 다르지 않다. 문 전 대통령 논리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워 신용이 낮은 국가가 높은 이율을 적용받는 구조적 모순”을 주장한다면 국제 금융시장에서 우리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정치적 수사가 통했다면 1997년 말 외환위기도 없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한국은행이 코로나19로 풀린 시중 돈을 빨아들이고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기준금리를 연달아 올리는 시점에서 ‘은행의 종 노릇’ ‘갑질’이란 거친 표현을 쓰며 고금리를 탓했다. 당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은행을 돌며 금리 인하를 압박하자, 은행 대출금리가 내려가고 주택담보대출이 불어났다. 가계빚을 줄여야 할 긴축 시기에 시중 금리와 부채가 역주행하는 일도 일어났다. 경제 성장률이 1% 턱걸이를 하는 저성장 국면에서 집권한 이재명 대통령은 문 전 대통령처럼 금리와 소득을 연계한 인식을 보였다. 이 대통령은 13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현재의 금융 제도는 가난한 사람이 비싼 이자를 강요받는다”며 “금융계급제가 된 것 아니냐”고 했다. 저소득층이라고 해도 모두 비싼 금리를 강요받는 건 아니다. 금리는 신용에 따라 달라진다. 천하람 개혁신당 의원은 “저소득층 중 고신용자가 202만 명이 있다”며 ‘저소득층=고금리’ 주장을 반박했다. 금융계급제를 우려한다면 금리 격차를 탓하기 전에 금융 접근성 격차로 발생하는 경제적 불평등부터 관리해야 한다. 최근 대출 규제는 소득에 따른 상환 능력을 따진다. 부동산과 주식 시장이 상승할 때 고소득층은 금융회사 대출을 받아 투자하고 자산을 불릴 수 있지만, 저소득층은 은행 돈으로 투자하는 게 어렵다. 자산 시장에 거품이 끼지 않도록 관리하고 저소득 고신용자들이 금융 시장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챙겨야 한다. 국가데이터처의 2024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금융부채 보유 가구의 80%는 “대출기한 내 빚을 갚을 수 있다”고 했다. 4.5%는 “상환이 불가능하다”고 응답했다. 이들에겐 채무 재조정 등을 통해 재기 기회를 마련해 주되 성실하게 빚을 갚으려는 80%의 의지를 꺾는 역차별은 없어야 한다.금리 고통 키울 ‘3L’ 경계해야 대통령들의 걱정에도 서민들의 금리 고통은 여전하다. 고통의 발원지인 저성장 고부채의 뒤틀린 경제 구조가 해소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부채 보유 가구의 46.2%는 1년 후 부채 증가 원인으로 주택 구입, 전월세 보증금 등 부동산을 꼽았다. 18.5%는 생활비 마련을 걱정했다. 은행을 압박해 장기 연체자의 채무 조정을 위한 배드뱅크 재원을 마련한다고 해도 부동산 안정, 일자리 대책이 함께 가지 않으면 빚의 수렁에 다시 빠지는 연체자들이 생긴다. 은행이나 금융 당국의 노력만으로는 어렵다. 특히 지금은 해외 언론에서도 경고하듯이 금리 고통을 키울 과도한 ‘빚투’(leverage), 지나친 유동성(liquidity), 투자 광기(lunacy) 등 ‘3L’을 경계할 시기다. 금리 탓할 때는 아니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 202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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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강제 마취된 부동산, 수술 집도의는 어디 있나

    집을 사고팔 때 정부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건 비정상적인 일이다. 서울 전역과 경기 12개 지역을 이 같은 토지거래허가구역(토허구역)과 규제 지역으로 묶은 10·15 부동산 대책 이후 서울 아파트 거래량과 가격 상승폭이 전주의 절반으로 줄었다. 매수 심리도 두 달 만에 꺾였지만 단지 시간을 벌었을 뿐이다. 시장 심리는 여전히 사려는 사람이 팔려는 사람보다 많다. 집값도 아직 오름세다. 시중에 돈이 풀리고 주택 공급 걱정이 큰 상황에서 수요 억제 효과는 대출을 6억 원 이하로 묶은 6·27 대책처럼 언제든 증발할 수 있다.시장 정상화할 집도의 안 보인다 초강력 규제로 강제 마취된 서울 부동산 시장이 수술대에 누워 있는데도 집도의는 안 보이는 형국이다. 서울 부동산 문제는 수십 년간 누적된 문제다. 정치인과 정책 당국자는 누구도 책임을 부인하기 어려운데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둔 여야 의원들은 부동산 실정과 상대의 주택 보유를 문제 삼으며 본질과 거리가 먼 정쟁을 하고 있다. 수술을 집도할 정책 당국은 믿음을 잃고 있다. 이상경 전 국토교통부 차관은 이재명 대통령 부동산 공약의 핵심 브레인으로 꼽혔지만 갭 투자(전세 끼고 주택 매입)가 드러나 물러났다. 가계대출 관리가 급한 금융당국은 강남 아파트 2채를 가진 다주택자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의 주택 처리 문제가 더 급해 보인다.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이 풀어 놓은 막대한 돈이 부동산 시장에 쏠리고, 국토부와 서울시가 주택 공급에 실패했는데도 내 탓이라며 책임을 지려는 당국자도 안 보인다. 시장에서 10·15 대책으로 대출이 막히자 “주거 사다리(housing ladder)를 걷어찼다”는 비판이 거세지만, 주거 사다리는 작은 집을 더 크고 좋은 집으로 키워가는 과정을 말한다. 대출은 주거 사다리의 보조 수단일 뿐이다. 영미권에선 주택대출 원리금과 세금을 포함한 주거 비용이 소득의 28%를, 모든 대출은 36%를 넘지 말아야 한다는 28/36 원칙이라는 말까지 있다. 과도한 대출이 주거 사다리를 오르는 데 오히려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은행 돈을 빌려 집을 사는 일이 원래는 어려웠다. 외환위기 이후 시중은행들이 기업 대신 가계 대출에 손을 대면서 은행 돈이 흘러 들어왔다. 집값도 뛰었다. 주택담보대출(주담대)에 전세대출까지 증가하고 전세 낀 갭 투자까지 성행했다. 여기에다 정부가 전세대출 보증까지 섰다. 집값보다 전세금이 더 비싼 ‘마이너스 갭 투자’까지 생기고 약 3만4000명의 전세사기 피해자가 발생했다. 청년과 무주택자들이 진입하는 주거 사다리는 맨바닥인 빌라와 오피스텔부터 무너져 내렸다.빚이 아닌 진짜 주거 사다리 복원해야 부동산 시장 정상화는 집값 폭등과 은행 이익을 키운 ‘주담대-전세대출-전세보증’의 한국식 빚의 사다리 대신 무너진 진짜 주거 사다리를 복원하는 일이어야 한다. “기다렸다가 집을 사라”고 강요할 게 아니라 “기다려도 괜찮겠다”는 믿음부터 만들어야 한다. 2600만 명이 가입한 청약저축은 미래를 위한 투자 기회로 바꾸고 청년과 무주택자가 직장 가까운 곳에서 출퇴근할 수 있는 저렴하고 괜찮은 징검다리 주택을 획기적으로 늘려야 한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인공지능(AI) 등으로 오피스 수요가 더 감소할 것”이라며 오피스 공급을 주택으로 전환하는 대책도 제안했다. 저금리 시대 월세화에 맞춰 저소득층 주거 바우처를 늘리는 고통 완화책도 시급하다. 올해 초 오세훈 서울시장이 강남 3구(강남, 서초, 송파)에 대한 토허구역을 해제하자 집값이 급등했다. 규제를 묶는 일보다 언제 어떻게 풀고 시장을 정상화할지가 더 어렵고 중요하다. 여야가 민생을 위한다면 더 늦기 전에 초당적, 범정부 부동산 정상화 기구를 마련하고 중장기 대책까지 포함한 대출, 세제, 공급의 3종 패키지를 내놔야 한다. 강제 마취된 시장이 깨어나기 시작하면 늦는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 2025-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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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똘똘한 한 채’ 출구 정책 필요하다

    이재명 대통령이 6·27 대출 규제 발표 2주 뒤 김윤덕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을 국토교통부 장관에 지명했다. 4년간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서 활동한 3선 의원 출신 김 장관이 대통령실 설명처럼 “서민 눈높이에서 부동산을 해결할 적임자”일 수 있으나 시장에서 영향력이 있는 부동산 정책 전문가는 아니다. 장관 인선을 통해 시장에 강력한 주택 공급 의지를 전달할 첫 기회는 놓쳤다. 오히려 시장 불안을 잠재울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아파트가 빵이라면 밤을 새워서라도 만들겠다”고 했던 문재인 정부의 정치인 출신 김현미 국토부 장관 데자뷔를 떠올리게 할 위험이 있다.불장 공포와 두더지 잡기식 규제 재연 시장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김 장관이 9·7 공급 확대 대책을 발표했는데도 서울 집값은 올랐다. 공급 대책은 먹히지 않았다. 6억 원 대출 규제에도 9월 서울에서 거래된 아파트 5채 중 1채가 15억 원 이상의 거래였다. 시장이 당국 규제를 예측하고 먼저 움직인 것이다. 마포 성동 광진구 등 비강남 한강벨트 지역에서 규제 전 ‘똘똘한 집 한 채’를 사두려는 갭 투자(전세 끼고 매수) 선수요가 몰렸다. 결국 정부는 3차 대책을 내놓기로 했다. 부동산 불장 공포와 두더지 잡기식 규제가 되풀이될 조짐이다. 부동산 시장 쏠림을 초래한 똘똘한 한 채 선호 현상은 2017년 다주택자 세금 중과 정책 이후 생겼다. 다주택자 부동산 투기를 막자는 취지였지만 서울에 고가의 똘똘한 한 채를 가진 사람이 지방에 저가의 여러 채 집을 가진 사람보다 양도소득세, 재산세를 더 적게 내는 과세 불균형이 나타났다. 당연히 서울로, 한강 변으로, 강남으로 투자 수요가 몰렸다. 9월 동아일보와 채널A 주최 재테크쇼 강연장에서 한 재테크 강사는 지방 건물을 팔고 서울 아파트에 투자한 지방 부자 사례를 소개했다. 10년 전엔 지방 건물을 팔아 서울 강남 아파트 여러 채를 살 수 있었지만 이젠 한 채도 못 산다는 하소연이었다. 노동력 이촌향도에 이어 똘똘한 한 채를 찾아 움직이는 자본의 상경 매수까지 막지 못하면 지방 소멸은 피할 수 없다. 홍수에 불어난 강물에 떠내려가는 부유물은 막다른 곳에 차곡차곡 쌓인다. ‘똘똘한 한 채’ 쏠림 속에서 강남 아파트도 출구 없는 막다른 종착역이 되고 있다. 지난해 개인의 고가 주택에 부과되는 종합부동산세의 절반을 60세 이상이 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65세 이상 가구주의 자산 중 85%가 주택 등 부동산 자산이다. 노년에 고가 주택을 팔고 외곽이나 지방으로 이주하는 주택 다운사이징을 하고 싶어도 세금이 무서워 버티는 이들도 있다. 수요 억제를 위해 더 센 대출 규제나 규제지역 확대가 필요하면 해야 한다. 다만 시장에서 이미 읽힌 패여서 남발하면 규제 내성을 키운다. 자산 시장의 불안 심리를 해소하려면 시장 예상보다 더 선제적이고 과감한 공급 대책과 함께 똘똘한 한 채 쏠림 현상을 차단하는 수요 분산 정책이 필요하다. 지방 이주 주택 다운사이징 지원해야 김 장관은 “장관이 아닌 인간(개인) 김윤덕으로서는 보유세를 늘려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수요 억제를 위해 보유세를 손댄다면 정치적 부담을 지더라도 보유 주택 수가 아니라 주택 가액을 기준으로 과세 체계를 개편하거나 서울 집을 팔고 지방에 투자하는 주택 다운사이징에 세제 혜택을 주는 똘똘한 한 채 출구 정책도 함께 준비해야 한다. 영국 호주처럼 주택 매각 대금을 연금 계좌에 넣을 때 비과세 혜택을 확대해 똘똘한 한 채에 갇힌 노년 자산을 풀어주는 ‘햇볕 정책’도 필요하다. 부동산 시장을 왜곡한 똘똘한 한 채 선호가 사라지지 않으면 부동산에 쏠린 돈을 주식시장으로 유도하겠다는 이재명 정부의 목표도 물 건너간다. 오히려 주식으로 번 돈을 똘똘한 한 채에 투자하려는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 2025-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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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이재명의 베이컨, 트럼프의 달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정치 입문 전 뉴욕에서 부동산 개발 사업을 하며 뉴욕시 당국과 마찰을 빚었다. 그는 검사관이 건물에 과태료를 부과해도 끝까지 버텼다.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을 특종 보도했던 밥 우드워드 워싱턴포스트(WP) 부편집인은 2024년 출간한 저서 ‘전쟁(War)’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과거 인터뷰 내용을 인용하며 그가 버틴 전략적 의도를 소개했다. “만약 돈을 내면 그들은 계속 온다. 한 달을 버텼더니 ‘내버려둬. 못된 녀석이야’라며 다른 사람에게 갔다. (중략) 검사관, 마피아, 노조(가 다 그렇다). 알겠나.”(트럼프) 우드워드는 “그것이 트럼프의 기본 철학”이라고 했다. 미국이 지금처럼 일방적 희생을 강요한다면 미국을 돕겠다고 나선 동맹국들의 기본 철학도 하나둘씩 그처럼 바뀔지 모른다.일방적 희생 감수하며 대미 협상 불가능 한국과 미국은 7월 말 관세협상 타결을 발표했다. 한국은 3500억 달러를 미국에 투자하고, 미국은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깎아주기로 했다.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말 정상회담까지 하며 정치적 성과로 포장했지만 한국 자동차 관세는 아직 25%다. 투자 방식을 놓고 현금을 요구하는 미국과 대출과 보증 형태를 주장하는 한국의 이견은 여전하다.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린 것이다. 한국인들은 1997년 달러가 모자라 온 나라가 도탄에 빠진 외환위기의 악몽을 잊지 못하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국면에서 해외 투기 자본이 외환보유액 유동성을 문제 삼아 한국 경제를 공격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당시 폭락하던 원화를 안정시킨 게 원화를 달러로 바꿔주는 한미 통화스와프였다. 미국이 한국 외환보유액(4162억 달러)의 84%에 이르는 뭉칫돈을 달러 현금으로 내놓으라고 한다면 기축통화국인 일본처럼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안전판으로 요구할 수밖에 없는 게 한국 경제의 현실이다. 거액이 미국 투자 펀드에 묶이면 유사시 가용 외환보유액이 줄어든다. 한미 통화스와프를 해도 미국이 중단하겠다고 하면 한국 경제는 불시에 위기에 빠질 수 있다. 무제한 무기한 한미 통화스와프 없이는 대출이나 보증 형태로 투자하는 게 현실적 해법이다. 만일을 대비해 투자금 회수 조건도 명확히 해야 한다. 미국인이 먹을 아침 식사(제조업 부활)를 함께 준비하자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달걀’(관세 인하)을 줄 테니 이재명 대통령이 ‘베이컨’(3500억 달러 현금 투자)을 내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모습이 요즘 한국인의 눈에 비친 한미 관세협상이다. 단순 참여(involvement)와 일방적 희생이 뒤따르는 헌신(commitment)은 다르다. 암탉은 달걀을 또 낳을 수 있어도 돼지는 뱃살을 베어 베이컨을 내놓는 순간 생사의 기로에 선다. 이 대통령이 미국의 투자 요구에 대해 “요구를 받아들였다면 탄핵됐을 것”이라고 한 건 엄살이 아니다.미 제조업 부활, 한미 ‘헌신의 균형’ 필요 미국의 제조업 붕괴와 중산층 일자리 감소 걱정을 이해하지만 경쟁국 기업 탓만 할 수 없다. 미국의 그 많은 억만장자들과 펀드들은 그동안 왜 자국 제조업 투자를 외면했나. 그럼에도 한국은 인도 호주 싱가포르보다 미국에 더 많이 투자했다. 그런데도 전문직 비자조차 할당받지 못했다. 그 홀대가 조지아주 한국인 기술자 구금 사태로 이어졌다. 한미가 합심해 미 제조업 부활이라는 공동 목표로 나아가려면 우선 한국 기술자들이 미 공사 현장에 복귀해야 한다. 그러자면 미국에서 비자와 구금 걱정 없이 일할 환경부터 마련해줘야 한다. 관세협상에서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헌신의 균형’도 맞춰가야 한다. 투자와 이민, 관세 정책이 따로 놀며 가속 페달과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는 나라에서 경제 붕괴와 자국인 구금 위험을 무릅쓰고 함께 아침밥을 차리고 싶은 국가는 아마 없을 것이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 2025-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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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모두의 AI, 네이버를 위한 AI는 아니다

    세계 인공지능(AI) 투자의 90% 이상은 민간기업이 한다. 데이터센터와 전력, 연구개발(R&D), 인재 육성과 같은 인프라 투자를 늘려 국가적 AI 투자 매력을 높이는 일은 정부의 몫이다. 여기에 투자의 씨앗을 뿌리고 수확하는 건 민간기업의 역할이다. 연매출 10조 원을 넘긴 한국의 간판 빅테크 회사 네이버가 ‘소버린 AI’(자국 AI) 개발을 위해 정부에 손을 벌리는 건 한국 AI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뜻이며, 그간 자신들의 AI 농사도 실패했다는 걸 자인하는 일이다. AI 주권론은 검색 주권론 판박이 미국 오픈AI의 대화형 AI인 챗GPT의 하루 한국인 활성 이용자는 330만 명을 넘었다. 네이버는 2023년 거대언어모델(LLM) 기반 대화형 AI 모델 ‘하이퍼클로바x’를 선보였지만 존재감은 아직 미미하다. 하이퍼클로바x조차 ‘사용자가 몇 명이냐’는 질문에 “베타 버전이기 때문에 초기 사용자 수는 제한적”이라고 답한다. 네이버가 실력을 입증했다면 정부에 손을 벌리기 전에 국내외 민간 자본의 투자가 쇄도했을 것이다. 네이버 AI 개발을 주도한 하정우 전 네이버 퓨처AI센터장은 ‘모두의 AI’를 공약한 이재명 정부의 초대 AI미래기획수석이 됐다. 하 수석은 “미국 데이터로 학습한 AI를 쓰면 미국 가치관에 편향된다”고 주장한다. 한글과 우리 데이터로 학습한 자국 AI는 필요하다. 하지만 ‘김치를 한국 고유 식품’이라고 제대로 답하는 자국 AI를 확보하더라도 제대로 된 모델이어야 한다. 실력이 부족해 다른 나라에서 쓰이지 않으면 영향력은 제한적이다. 자국 AI와 같은 기술 주권론은 1990년대 통신 시장 개방 압력이 거셀 때는 ‘통신 주권론’으로, 2000년대 구글 등의 공세 앞에서는 ‘데이터 주권론’ ‘검색 주권론’으로 변주됐다. 기술 주권을 위한 투자와 보호막이 필요하다고 해도 산업 생태계를 위협하는 독과점 폐해까지 용인할 수 없다. 1999년 창업한 네이버는 포털이라는 울타리를 치고 검색과 콘텐츠 서비스를 제공하며 광고 등의 수수료로 큰돈을 벌었다. 동시에 수많은 창작자와 콘텐츠 기업을 폐쇄적인 ‘포털 동물원’의 하청업체로 전락시켰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네이버는 6월 다른 빅테크 AI가 자사 데이터를 긁어가지 못하도록 크롤링(온라인상 데이터 수집)을 차단하는 기술을 적용했다. 그러면서도 자국 AI 생태계의 한 축인 한국 콘텐츠 대접에 인색하다. 네이버는 허락 없이 AI 학습에 콘텐츠를 활용해 놓고 비용도 제대로 치르지 않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네이버는 7월 WBL(월드 베스트 LLM) 챌린지 사업을 위한 그래픽처리장치(GPU) 임차 사업자로 선정됐다. 8월에는 국가대표 AI 모델 개발 경쟁에 나설 ‘독자 AI 파운데이션(기초) 모델 사업 정예팀’으로 뽑혔다. 탈락한 회사들 사이에서 “네이버 병풍만 서고 있다”는 불만이 나온다. 시장에선 자국 AI를 명분으로 한 정부의 세금 퍼붓기가 네이버의 손실 만회용 프로젝트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있다. 네이버 내부에서도 “국민투표로 1, 2등을 가리는 미인대회 방식으로 시장 경쟁력 있는 주권 AI를 만들 수 없다”는 걱정이 있다.투자 사회화, 수익 사유화는 없어야 미국은 민간의 AI 모델에 강점이 있다. 중국은 AI 기술을 로봇 등 산업 현장에 응용하는 ‘통용 AI(通用人工智能)’에 역점을 두고 있다. 후발 주자인 한국이 AI 3대 강국으로 올라서려면 특정 기업, 특정 모델 의존도를 줄이고 한국 AI 산업 생태계를 성장시키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네이버도 과거와 같은 폐쇄적 플랫폼 모델부터 바꿔야 한다. 정부 지원으로 개발한 AI 모델을 이용해 광고 등의 수수료로 돈을 버는 ‘AI 동물원’을 다시 만든다면 투자는 사회화하고 수익은 사유화하는 일이다. 모두를 위한 AI가 네이버를 위한 AI는 아니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 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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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국회, 추석 전 ‘이춘석 방지법’부터 해보라

    더불어민주당은 3월 공직자 재산등록에서 공개된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2억 원 상당 30년 만기 미국 국채 투자를 문제 삼았다. 최 부총리는 “미국채 투자는 공직자 윤리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해명했지만, 민주당은 “원화 가치를 방어하는 경제 사령관이 제정신이냐”며 호되게 비판했다. 민주당이 행정부 공직자에게 들이댄 이 엄격한 기준을 소속 의원부터 적용하고 실천했다면 국회 본회의장에서 보좌관 명의로 특정 주식을 거래한 이춘석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의 일탈은 충분히 막았다. 이번 일로 민주당은 또 말 따로, 행동 따로 정당이 됐다.의원 재산 등록, 차명거래 취약 드러나이 의원은 논란이 일자 법사위원장을 사퇴하고 민주당을 탈당했다. 민주당 윤리심판원은 차명거래 의혹이 제기된 이 의원을 제명 처리했다. 이번 일을 개인의 사퇴와 사후 엄벌로 끝내선 안 된다. 민주당은 2년 전에도 소속 의원의 코인 거래 논란과 탈당을 경험했다. 당시 민주당 소속이던 김남국 의원은 코인 보유와 상임위원회에서 코인 거래 논란이 확산되자 탈당했다. 하지만 1년 뒤 복당했다. 이재명 정부에서 대통령실 국민디지털소통비서관의 중책도 맡았다.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은 일을 저지른 문제 정치인이 탈당으로 소나기를 피하고 복당해 권력 핵심으로 복귀하는 과정을 국민은 어떻게 볼까. 일부 의원들은 이런 일쯤은 이제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김남국 사건은 이춘석 사건의 예고편이었다.김남국 사건 때 이미 1년에 한 번 재산 현황과 변동 내역을 공개하는 공직자 재산 등록 제도의 허점이 드러났다. 당시 미국 의회처럼 의원들이 주식이나 코인 거래를 할 때마다 수시 보고하게 해야 거래 시점의 이해충돌, 미공개 정보 이용을 감시할 수 있다는 대안까지 거론됐다. 떳떳하다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런데도 툭하면 무더기 법안을 쏟아내던 의원들이 이 개혁을 뭉갰다. 이번 이춘석 사건에서는 의원 재산 등록 시스템의 또 다른 허점이 드러났다. 의원이 주식 거래를 수시로 신고하더라도 보좌관의 차명계좌로 자금을 운용하면 잡아내지 못한다. 의원과 보좌관은 인공지능(AI) 지원처럼 기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책과 법안에 관여한다. 필요하면 정부, 공공기관, 단체 등을 통해 기업이나 금융사의 원가나 수수료와 같은 민감한 자료도 요구한다. 자본시장법은 상장기업 내부자가 아니더라도 정부 기관이나 공적 기관에 종사하는 사람도 직무상 알게 된 미공개 중요 정보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의원-보좌관 공동체의 미공개 정보 이용이나 이해충돌 논란을 원천적으로 막으려면 보좌관까지 재산 등록을 의무화하고 코인이나 주식 거래를 수시 보고하게 하는 ‘이춘석 방지법’이 필요하다. 의원-보좌관 공동체 감시 강화해야민간이 느끼는 국회는 과거의 국회가 아니다. 권한과 영향력이 커지면서 의원 보좌관 출신을 찾는 민간 수요가 많지만 감시망은 헐겁다. 국회공직자윤리위원회에 따르면 7월 국회 퇴직공직자 취업심사 11건이 모두 통과됐다. 이 가운데 의원 보좌관 출신 5명은 태광산업 토스증권 쿠팡 네이버웹툰에 취업했다. 기업이나 금융사는 온갖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보좌관이 경쟁 기업으로 가는 게 부담스럽다. 국회에서 자료를 요청할 때는 공식 문서로 근거와 요청자료를 명확히 밝혀야 나중에 탈이 나지 않는다.10월 추석이 끝나면 의원들의 증인 신청과 자료 요청이 쏟아지는 국정감사 시즌이다. 국회에서 과반인 166석을 확보한 민주당이 개혁에 진심이라면 추석 전 이춘석 방지법부터 앞장서 해보라. 세상에 개혁을 요구하기 전에 국회가 국민의 이름으로 특권 괴물이 돼가고 있지 않은지 ‘거울 속의 나’부터 바라보고 먼저 달라져야 한다. 그럴 때 개혁의 진정성과 힘이 생긴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 2025-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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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소비자 보호 실패한 관치금융의 몸집 불리기

    새 정부가 들어서면 관행처럼 정부 조직 개편이 시작된다. 이 어수선한 틈을 타고 부처, 기관끼리 영역 다툼과 몸집 불리기가 벌어진다. 이재명 정부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외환위기 이후 26년 만의 금융감독 체제 개편이 논의되는 가운데 금융소비자 보호를 위한 금융소비자보호원 신설 논란이 불거졌다.소비자 보호 명분 기관 신설 필요한가 금융감독 개편을 주도하고 있는 국정기획위원회 내에서 금융감독원의 금융소비자보호처(금소처)를 떼어내 ‘금융소비자보호원’(금소원)을 신설하는 방안이 거론된 것으로 알려지자, 금감원 노조는 국정위 청사 앞에서 금융소비자 보호 기능 분리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임직원들은 반대 호소문을 냈다. 조직이 쪼개질 것을 우려해 실력 행사에 나선 것이다. 금감원 예산의 85%인 연간 3300억 원의 감독 분담금을 내는 금융회사들은 기관 신설에 따른 중복 규제와 감독 분담금 증가를 걱정하고 있다. 금감원 금소처를 독립기관으로 만들면 원장 자리 1개가 생기고 인사 총무 홍보 등 관리 부서가 함께 늘어난다. 금융소비자 보호 강화는 세계적 흐름이지만 그 수단으로 막대한 비용이 드는 규제 기관을 또 만들어야 하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정부 규제는 정확성이 높고 효과적인 반면 디지털 금융과 같은 기술과 시장 변화에 적응하는 속도가 더딘 약점이 있다. 경직된 규제가 금융산업을 세계적 흐름과 동떨어진 ‘갈라파고스 금융’으로 만들 수 있다. 영국은 2012년 금융감독 기관을 금융사의 건전성을 감독하는 기관과 영업 규제 및 소비자 보호를 전담하는 기관으로 이원화했다. 영국 의회 금융서비스규제위원회는 지난달 내놓은 보고서에서 “규제 당국의 관할 확장과 중복으로 복잡한 규제 환경과 높은 규제 준수 비용이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한번 만들어진 규제 기관은 인허가나 제재 권한을 이용해 자가 증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신설은 특히 신중해야 한다. 금감원은 1999년 은행감독원, 증권감독원, 보험감독원, 신용관리기금을 통합해 설립됐다. 은행 증권 보험 제2금융권 감독 업무를 물리적으로 통합하는 바람에 현재도 업권별 종적 규제 체계가 유지되고 있다. 당장 검사와 감독 권한이 있는 금융소비자 보호기관을 새로 만들면 중복 규제와 업권별 감독 체계와 충돌이 불가피하다. 이 같은 현실적 한계 때문에 검사와 감독 권한 없이 기관만 독립하는 방식도 논의되고 있다. 이 경우 소비자 분쟁을 해결할 실질적 수단이 부족해 분리의 실익이 떨어진다.처벌에서 피해 예방과 구제로 규제 기관을 새로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도 있다. 당국의 제재는 금융회사 및 임직원을 사후적으로 처벌하는 데 효과적이지만 소비자 피해를 예방하거나 구제하는 데는 비효율적이다. 사후 제재 중심의 규제를 소비자 피해 회복과 구제의 관점에서 재설계하는 일이 필요하다. 당국의 조사에 시간이 걸리고 막상 부당이득을 얻은 금융회사에 과징금을 부과해도 이 돈은 피해자가 아닌 국고로 들어간다. 이 때문에 규제 기관의 검사 자료 공유나 과징금 일부를 기금화하는 방식으로 소비자 피해 회복 지원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자는 제안도 있다. 이런 변화는 금융업계 및 사회적 공감대 없이는 만들 수 없으며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금감원 산하 금소처는 2012년 설치됐다. 그사이 역대 정부는 금융감독 개혁을 명분으로 교수, 관료에 이어 검사 출신 금감원장까지 앉혔다. 하지만 금융 사고는 되풀이됐고, 소비자 피해는 계속됐다. 문제는 조직이 아니라 이를 운영하는 사람과 제도다. 지난 13년간 관치금융의 실패를 바로잡지 않고 규제 기관을 새로 만들어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는 발상은 소비자 보호를 핑계로 한 위인설관 몸집 불리기일 뿐이다. 정책 공급자가 아닌 소비자 관점에서 봐야 해법이 보인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 2025-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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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대출 부자’만 양산한 관치 부동산의 실패

    6·3 대선이 끝난 뒤 서울 중구 한 아파트단지에 큰 평수보다 더 비싼 20평대 매물이 등장했다. 시세보다 2억 원 높게 매물을 내놓은 집주인이 갑자기 1억 원을 더 올려 호가가 뒤집힌 것이다. 단지의 한 부동산 공인중개사는 “외국인이 집주인인데 팔 생각이 없고 가격만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은평구의 대단지 아파트는 대선 전 비싼 분양가 때문에 계약 포기자가 속출했는데 한 달 만에 무순위 청약 경쟁률이 10 대 1을 넘었다. 정부가 6억 원 넘는 주택담보대출을 막는 6·27 대출 규제를 꺼낸 건 부동산 불장이 서울 전역으로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금융의 부동산 중독, 서울 불장 키워 서울의 주택 가격은 연 소득의 10.1배로 전국 평균(3.9배)의 두 배가 넘는다. 그런데도 집주인들은 몇억 원씩 호가를 턱턱 올린다. 은행 대출이라는 믿는 구석이 있어서다. 은행은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 대출보다 담보가 확실한 주택 대출을 선호한다. 은행 자본 규제도 주택 대출이 기업 대출보다 위험 가중치가 낮다. 금융의 수도꼭지가 산업 부문보다 부동산 시장으로 쏠리게 잘못 설계된 것이다. 여기에다 국토교통부가 디딤돌, 버팀목 등 미사여구를 붙여 저리로 푼 주택 정책대출이 9년 만에 200조 원이 늘었다. 주택 관련 대출 대비 정책대출 비중은 2015년 17%에서 지난해 말 28%로 올랐다. 형평성을 이유로 신생아 대출 소득 상한을 연 소득 2억 원으로 높이자 작년 말 5대 은행 신규 주택담보대출 중 정책대출 비중이 56%까지 치솟는 황당한 일까지 벌어졌다. 경기 침체 우려에도 서울 집값이 뛰는 건 정부가 계속 뒷돈을 대고 있기 때문이다. 국토부 등은 정책대출이 9억 원 이하 주택만 지원해 영향이 제한적이라고 하지만, 이재명 대통령이 돈의 순환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한 ‘호텔경제론’으로도 간단히 반박할 수 있는 어설픈 해명이다. 예를 들어 김모 씨가 정책대출을 받아 수도권에 9억 원 이하의 주택을 구입하면, 김 씨에게 집을 판 이모 씨는 이 돈에 은행 대출을 얹어 서울에 입성하고, 이 씨에게 집을 판 박모 씨는 대출을 더 얹어 서울 강남에 입성하는 식의 돈의 순환이 일어난다. 이런 식으로 서울에는 빚으로 만들어진 집과 이를 보유한 ‘대출 부자’가 급증했다. 국토부가 뿌린 주택 정책대출은 심지어 무주택자 등이 낮은 이자를 무릅쓰고 내 집 마련을 위해 차곡차곡 모은 청약저축 등으로 조성된 주택도시기금에서 나간다. 서민을 위한 주택 공급을 위해 쓰여야 할 이 돈이 정책대출과 전세보증 정책금융에 동원되면서 부동산 시장을 위한 버팀목으로 변질됐다. 주택 공급 우려는 여전한데 정책금융에 돈이 흘러 들어가 여윳돈이 고갈되고 있다. 대출 부자를 위해 청약저축 가입자가 희생하는 기울어진 금융 운동장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집은 성실하게 모은 돈이 아니라 급전이라도 당겨서 당장 사야 하는 투기 대상이라는 인식을 잠재우지 못한다. 투기 심리가 불붙으면 주택을 식빵처럼 찍어낸다고 해도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 관치 부동산 실패부터 바로잡아야 서울 불장은 금융규제와 정책대출로 운영되는 부동산 관치의 실패다. 시장 참여자는 정부와 한국은행이라는 DJ가 요란한 댄스 음악을 틀 때 격렬하게 몸을 흔든 죄밖에 없다. 이 결과 한국은 최악의 가계 빚 대국이 됐다. 이제는 경기를 살리려 금리를 내리고 싶어도 가계 빚이 무서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부채의 덫’에 걸렸다. 금융당국과 한은이 금융 시스템 안정에 매달리고 국토부는 건설시장이 무너질까 봐 조바심을 내지만 망국병 가계부채와 부동산 거품을 예방하고 관리하는 데는 실패했다. 6·27 규제는 투기 심리 확산을 막는 초기 방화선이다. 대통령실이나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기획재정부가 사령탑으로 나서 시장에 불을 지른 부동산 관치의 잘못된 인센티브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 2025-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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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박정희 대통령이 칭찬한 참모의 조건

    이재명 대통령은 4일 취임 후 첫 인사를 단행하고 “국민에게 충직한 것이 제일 첫 번째고 다음으로 유능함”이라며 인선 기준을 밝혔다. ‘국민에게’라는 전제를 달았어도 대통령이 유능보다 충직을 제일로 꼽은 점은 눈에 띈다.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영향이 있겠지만, 경기도지사로 일했던 이 대통령을 겪어본 인사의 얘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충성심으로 복잡한 국정 운영 어려워 한 경기도 출신 인사는 “이재명의 사람이 되려면 3가지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고 전했다. 첫째는 충성심이라고 했다. 배신하지 않고 임무를 완수할 충직한 사람이다. 둘째는 나이다. 이 대통령은 일할 때는 원로나 선배를 예우하는 성향이 아니어서 대체로 자신보다 젊은 인사를 중용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자신의 세력화를 하지 않을 인물이다. 이 대통령이 첫 인사에서 동갑인 김민석 수석최고위원을 국무총리 후보자로, 열한 살 젊은 1970년대생 강훈식 의원을 비서실장으로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대통령이 능력보다 충직을 우선시한 건 자신이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 등을 거친, 실무와 현장에 밝은 정치인이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설령 대통령 생각이 그렇지 않더라도 밖에서 이렇게 생각하면 그런 사람이 꼬이고 충성 경쟁하는 인물로 주변이 채워질 수 있다. 동질 집단에서 일어나는 ‘집단사고’ 오류는 흔한 의사 결정 실패 원인이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곁에 많아질수록 경계해야 한다. 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박정희 정책도, 김대중 정책도 필요하면 쓰겠다”고 했다. 2번째 인선 기준인 유능함의 조건은 과거에서 배울 수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칭찬한 유능한 참모의 조건은 제한된 자원으로 모순된 상황을 극복하는 문제해결 역량이었다. 2019년 별세한 오원철 전 대통령경제제2수석비서관은 생전 인터뷰에서 “참모들은 대통령이 요구하는 답을 늘 갖고 있어야 한다”며 “머리 좋다는 대통령의 칭찬 한마디를 들으려고 늘 생각하고 고민했다”고 말했다. 오 전 수석은 돼지콜레라가 발병해 돼지고기 수출길이 막히자 고기로 독일처럼 햄과 소시지를 만들고 가죽으로 군화를 생산하자는 아이디어를 내 박 전 대통령의 칭찬을 받았다고 했다. 대통령이 고속도로를 지나다가 터널 내부에 붙은 시커먼 매연을 없앨 방법을 묻자, 닦기 쉽게 타일을 벽에 붙이자는 대책을 내놨다. 터널 타일벽이 그때 생겼다. 중화학공업 육성 과정에서 조선소 인력 부족 문제가 불거지자 일자리가 부족한 여성 인력을 투입해 해결했다. 2025년 국정은 그때보다 훨씬 복잡다단하다. 미국과 관세 협상을 매듭짓기 위해 대미 무역흑자를 줄여야 한다고 해도 한국 수출기업과 일자리는 지켜야 한다. ‘제로 성장’ 위기를 벗어나려 재정을 풀더라도 미래 세대를 위해 국가 부채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 수도권 경쟁력을 유지하며 지방 경제를 키워야 하고, 청년 부담을 덜면서 노년 소득을 보장하는 연금개혁도 해야 한다. 건설 경기를 살리면서 부동산 과열은 피하고, 자영업자의 빚 부담을 덜어주되 도덕적 해이와 역차별은 막아야 한다. 코스피 5,000 시대를 위해 주주가치를 보호하더라도 기업가치 훼손은 없어야 한다. 모두 반목과 갈등이 예상되는 난제들이다.서생-상인 넘어 장인의 문제해결력으로 유능한 대통령도 홀로 나라를 이끌 순 없다. 김밥 한 줄 놓고 촌각을 다투는 회의를 해도 365일 해법을 고민하는 참모들의 열정과 문제해결 역량이 없으면 말짱 헛일이다. 특히 경제와 금융, 산업기술이 패권 경쟁의 무기가 되는 지경학 시대를 살아가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강조한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에 박 전 대통령이 칭찬한 ‘장인의 문제해결력’까지 필요하다. 이런 조건을 갖춘 참모와 각료, 공공기관 책임자를 찾아내는 일이 국민에게 충직한 인선이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 2025-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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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청년은 기회, 노년은 소득이 없는 나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진짜 대한민국’,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는 ‘새롭게 대한민국’,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는 ‘새로운 대통령’의 구호로 경쟁하고 있다. ‘진짜’ ‘새롭게’ ‘새로운’이라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무엇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방향성은 빠진 정치적 구호다. 후보들은 18일 경제 분야 TV토론에서도 설득력 있는 비전을 내놓지 못했다. 기업 경영에선 ‘측정할 수 없으면 관리할 수 없고 개선할 수 없다’고 한다. 이 점에서 후보들이 쏟아낸 경제 공약은 ‘왜’와 ‘어떻게’가 빠진 낙제생 답안지처럼 허술하다.‘왜’ ‘어떻게’ 빠진 묻지마 공약들 살기 좋은 나라는 적어도 청년에겐 일할 기회가 넘치고, 노년엔 안정적인 소득이 있는 나라다. 우리는 청년에겐 일자리가 부족하고, 노년은 빈곤에 시달리는 거꾸로 된 나라로 전락했다. 그런데도 정부 정책은 일자리를 원하는 청년에게 돈을 뿌리고, 소득이 필요한 노년엔 더 오래 일하게 하는 ‘청개구리 대책’으로 문제를 덮는 데 급급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제조업 일자리는 지난달까지 10개월째 줄었다. 제조업 일자리 비중도 15%대로 쪼그라들었다. 지난달 청년 고용률은 45.3%로 전 연령층 중 유일하게 감소했다. ‘그냥 쉬고 있다’는 청년 비중은 5년 만에 가장 높다. 이 정도면 ‘일자리 비상’이 걸려야 정상인데 후보들은 왜 일자리 가뭄이 이어지는지, 무엇을 바꿔야 해결되는지 유권자들이 원하는 진단과 대안보다 청년 구직 지원금, 대출 확대, 임대주택 공급과 같이 당장의 고통을 덜어주는 진통제 청년정책을 일방적으로 늘어놓고 있다. 노인의 삶이 편안한 것도 아니다. 지난해 말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면서 65세 이상 인구가 1000만 명이 넘는다. 노인 빈곤 문제가 개선되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심각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고령 자영업자 수는 2015년 142만 명에서 2032년엔 248만 명으로 불어난다. 치밀한 준비도 없이 노인 기준 연령을 높이거나 정년 연장을 추진하는 건 고령화로 불어날 국가 재정 부담을 개인이나 기업의 몫으로 전가하려는 ‘폭탄 돌리기’에 가깝다. 이재명, 김문수 후보는 뜬금없이 인공지능(AI) 등 투자를 위한 100조 규모 펀드를 만들겠다는 유행 공약을 앞다퉈 내놨다. 중국이 돈이 없어서 엔비디아와 같은 회사를 못 만드는 건 아니다. 효율적인 자원 배분, 인재 확보, 연구개발 인프라가 갖춰져야 성공할 수 있는 일이다. 검증도 없이 장밋빛 수익 공유를 명분으로 국민 돈까지 끌어오겠다는 건 자칫 투자 리스크를 국민에게 떠넘길 수 있다.거꾸로 선 한국경제 바로 세워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세계는 패권 경쟁을 위해 경제정책을 동원하는 ‘지경학(geoeconomics) 시대’로 진입했다. 좋은 일자리를 차지하려는 산업정책 역할은 커지고 국가 간 경쟁은 치열해질 것이다. 한국이 낙오하지 않으려면 선거철 등장하는 틀에 박힌 규제개혁이나 재정 투입만으로 어렵다. 필요하면 과거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인재 육성을 주도한 경제기획원과 같은 경제산업 정책 컨트롤타워를 지경학 시대에 맞게 정비하고 경제의 큰 그림을 다시 그려야 한다. 청년 일자리 대책과 함께 젊어서 노후를 대비할 수 있게 소득 재분배 기능에 무게가 실린 국민연금 역할 조정 등이 포함된 연금 구조개혁도 병행해야 한다. 이번 대선이야말로 젊은이는 일이 없어 방황하고, 노인들은 소득을 찾아 공공근로 현장을 헤매는 거꾸로 선 한국 경제를 바로 세우는 전환점이 돼야 한다. 그리고 다음 선거에서 청년에겐 기회, 노년엔 소득이 얼마나 늘었는지 성과를 측정하고 매섭게 심판해야 한다. 기업이든 국가 경영이든 측정할 수 없으면 개선은 영원히 없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 2025-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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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기업자살’ 등떠미는 코스피 5,000 희망고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21일 17명의 증권사 리서치센터장과의 간담회에서 “지금은 휴면 개미(투자자)지만 (과거엔) 꽤 큰 개미였다”며 주식 투자에 대한 자신감을 보였다. 기업이 증시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지 보여주는 지표인 주가순자산비율(PBR)을 언급하면서 “BPL”로 헷갈리는 모습도 보였다. 정치인이 전문 금융용어까지 술술 댈 필요는 없다. 그에 비해 “PBR이 0.1, 0.2인 기업은 빨리 사서 청산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거침이 없었다. 한국선 시장 활성화, 해외선 ‘기업자살’ 특히 이 후보는 이날 페이스북에 “주가지수 5,000 시대를 열겠다”며 “상장회사의 자사주는 원칙적으로 소각해 주주 이익으로 환원될 수 있도록 제도화하겠다”고 했다. 자사주 소각은 펀드 매니저 등 투자자가 주축인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이 내놓은 차기 정부 7대 과제에 포함된 내용이다. 이 후보가 이를 언급하면서 특정 집단의 주장에 한쪽 귀를 내어준 모양새가 됐다. 기업들은 주가 부양, 경영권 방어, M&A 등을 위해 자사주를 사들인다. 기업이 자사주를 사들여 주가가 유지될 때 주식을 팔고 빠져나가는 출구 전략을 구사하는 헤지펀드들은 당연히 자사주 매입과 소각을 요구한다. 배당에는 배당소득세가 붙지만, 자사주 매입이나 소각으로 주가가 올라 얻는 금융투자소득엔 세금이 없다. 금투세 도입은 이 후보가 지난해 폐지에 찬성하면서 없던 일이 됐다. 기업이 자사주를 소각하면 발행 주식이 줄어 주당순이익(EPS)이 오르고 주가가 상승하는 효과가 있다. 수치만 변할 뿐 기업가치는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투자나 경영권 방어 수단, 노동자에게 돌아갈 몫은 사라진다. 논쟁적 사안을 코스피 5,000 시대를 위한 모범답안처럼 제시하며 희망 고문할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 자사주 매입은 원래 불법이었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때인 1982년 허용했다. 이후 미 주식시장은 기업의 돈을 빼가는 현금인출기로 변질됐다는 비판을 받았다. 미국 대기업은 2015년 이익의 110%를 자사주 매입과 배당에 썼다. 대출까지 받아 주주 환원에 쓴 것이다. 투자에 진심인 한국 중국 일본 기업과의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미 제조업이 무너지고 중산층 일자리는 사라졌다. 로버트 에이어스 프랑스 인시아드(INSEAD) 경영대학원 교수는 “자사주 매입은 기업 자살(corporate suicide)”이라고 비판했다.경고산업 밸류업 위한 대타협 나서야 한국 기업의 PBR이 낮은 건 낮은 주주환원만의 문제는 아니다. 기업의 수익성과 성장성이 떨어져도 주식이 저평가된다. 한국경제인협회에 따르면 국내 상장사 19.5%는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내는 게 현실이다. 실적과 미래 가치의 결과인 주가 자체를 정책 목표로 두면 문재인 정부에서 실패한 소득주도성장처럼 마차가 말을 끄는 식의 ‘주가주도성장론’의 모순에 빠지게 된다. 국가 경제를 책임지겠다는 대선 후보라면 한쪽 귀는 주주가치에 기울이더라도, 다른 쪽은 기업가치에 열어둬야 한다. 이번 대선에서는 1400만 주식투자자의 표심을 핑계로 기업과 소액주주의 갈등을 부추기는 자해성 공약은 내놓지 말아야 한다. 기업이 자사주 매입에 회삿돈을 쓰지 않고 생존과 성장, 일자리를 위해 적극 투자하게 만든다면 독일처럼 가업 승계를 위한 상속세 감면이나 미국처럼 차등의결권 등 경영권 방어장치 등을 두는 방안을 함께 논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제는 기업 지배구조와 주주환원 논란을 넘어 기업 영속성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산업 밸류업’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으로 한국 기업의 몸값을 올려야 한다. 그것이 코스피 5,000으로 가는 순방향의 길이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 2025-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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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직을 건 이복현의 4가지 잘못

    고 이채욱 전 CJ그룹 부회장은 사원으로 출발해 외국계 기업, 공기업, 대기업에서 모두 최고경영자(CEO)로 일한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이다. 영남대 법대를 졸업한 이 전 부회장은 사법시험을 준비하다가 1972년 삼성물산에 입사했다. 그는 생전에 일에 대한 책임을 얘기할 때 자신의 실패담을 털어놓곤 했다. 대표적 일화가 삼성물산 과장 때 사표를 썼던 감천고해(甘川苦海) 사건이다.직을 건 이채욱과 이복현의 차이 그는 1979년 폐선을 수입해 고철로 파는 사업을 맡았다. 당시 고철용 폐선 4척이 부산 감천항에서 태풍 어빙을 만나 침몰하고 말았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했다. 그는 “배를 모두 건져 올리고 나면 회사를 떠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1년 반 동안 바닷속에서 배를 해체하고 대형 크레인으로 조각조각 건져 올렸다. 배를 모두 인양한 그는 진짜 사표를 냈다. 회사는 끝까지 최선을 다한 그에게 두바이 지사장의 중책을 다시 맡겼다. 이 부회장은 그때 힘든 기억을 잊지 않으려고 ‘甘川苦海’라는 글을 집무실 책상에 넣고 일했다고 한다. 직(職)을 건다는 건 고통을 감내하며 책임을 완수하는 일이다. 이사의 충실 의무를 주주로 확대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안에 “직을 걸겠다”고 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의 처신은 이에 비하면 깃털처럼 가볍다. 그는 직을 걸지 않아야 할 일에 직을 걸었다. 금융위원회 설치법에 따르면 금감원은 금융기관에 대한 검사·감독 업무나 금융위 업무 지원 등을 수행한다. 상법 개정은 법무부 소관이다. 금융감독 관점에서 의견을 낼 수 있으나 통제할 수 없는 일에 공직을 거는 건 무책임하다. 직을 거는 방식도 잘못됐다. 금감원은 무소불위의 기관이 아니다. 금융위나 증권선물위원회의 지도·감독을 받아 일하는 무자본 특수법인이다. 예산도 금융회사들이 검사 수수료 명목으로 갹출한 돈에서 나온다. 금융위 등 정부 부처가 상법 개정 대신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가닥을 잡았는데도 고집을 피우고 라디오에 나와 대통령까지 거론해 월권 논란을 자초했다. 정작 직을 걸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금융시장에선 검사와 감독 소홀로 금융사고가 터졌다. 이 원장은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손실, 티몬·위메프 사태, 오락가락 대출 정책 혼란에 사과했지만 공개적으로 물러나겠다고 하진 않았다. 직을 걸어야 할 일은 말로 때우고, 그렇지 않은 일엔 직을 걸면 딴 뜻을 품고 있다는 의심을 받는다. 직을 걸 의지가 있다면 진작에 해야 했다. 두 달 뒤면 끝날 임기를 걸고 ‘당신은 무엇을 걸 것이냐’는 투로 고집을 피워 빈축을 샀다. 공직을 두고 도박꾼처럼 흥정하는 건 말 한마디도 천금처럼 무거워야 할 공직자의 자세가 아니다.두 달 뒤엔 이복현, 손 떼라 검찰 출신 이 원장은 이미 사표 전력이 있다. 윤석열 사단의 막내로 불리던 그는 윤 전 대통령 취임 한 달 전인 2022년 4월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한 검찰 수사권 박탈 법안에 항의하는 ‘사직 인사’를 검찰 내부망에 올리고 사표를 냈다. 두 달 뒤엔 검사 출신 최초, 최연소 금감원장의 타이틀을 달고 공직에 복귀했다. 사표(辭表)가 출사표(出師表)가 된 것이다. 금융계에서 “이번에도 새로운 말로 갈아타려는 출구 전략 아닌가”라고 의심한다. 이 원장의 남은 임기 두 달은 조기 대선과 겹친다. 돌출 행보가 잦은 그가 당장 짐을 싸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미국의 상호관세 부과로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한국 수출이 13% 감소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기업 부실은 금융권으로 전이될 수 있다. 이 원장은 감천고해의 정신으로 위기관리 책임을 끝까지 완수해야 한다. 두 달 뒤 바라던 대로 손을 떼고, 말하던 대로 개업 변호사의 길로 가면 된다. 공직은 지금까지 일으킨 혼란만으로도 충분하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 2025-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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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민주당은 어쩌다 ‘더불어펀드당’이 됐나

    1903년 미국 포드자동차를 세운 헨리 포드는 혁신가였다. 몇몇 부자나 타던 고가 자동차를 저렴한 가격에 대량 생산해 ‘마이카 시대’를 열었다. 직원 임금을 올리고 주 5일 근무제를 시행해 두툼한 미국 중산층을 만들었다. 그런 포드도 처음엔 투자자들의 강한 반대에 시달렸다. 투자자들은 소량의 고가 자동차를 만들어 이익을 극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포드가 그들에게 굴복했다면 지금의 포드차나 양질의 일자리, 막대한 투자 수익은 없었다.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한 상법 개정안의 문제는 이런 것이다.상법 개정안은 펀드 자본의 ‘트로이 목마’ 상법은 기업 이사들에게 주주가 아니라 ‘회사를 위해 의무를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민주당도 그간 이를 근거로 ‘대주주의 이익을 위해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논리로 대기업 경영진을 비판했는데 이번에는 ‘이사 충실 의무’를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을 들고 나와 멋대로 골대를 옮겼다. 1400만 주식 투자자의 표를 의식해 ‘회사 대 대주주’의 갈등 프레임을 ‘회사 대 소액주주’ ‘대주주 대 소액주주’로 정치적 편가르기를 한 것이다. 개정안에는 ‘총주주의 이익을 보호하고 전체 주주의 이익을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는 모호한 조항도 신설했다. 장기적 회사 이익과 단기적 총주주 이익이 충돌한다면 이사는 무엇을 보호해야 하나. 이해관계가 각각 다른 전체 주주 이익을 공평하게 대하라는 건 ‘1인 1표’의 민주주의 원칙은 몰라도 ‘1주 1표’의 주식회사 원칙에 맞지 않는다. 이런 식이면 포드가 회사의 미래를 위해 보급형 자동차 ‘모델T’ 생산을 결정하거나 직원 임금을 올리려고 할 때 주주 이익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소송을 당할 수 있다는 얘기다. 민주당 의원들은 소송 남발 우려에 대해 “합당한 경영 판단은 대법원 판례로 면책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법정에서 다투려면 상당한 시간과 돈이 든다. 경영자들이 법정을 들락거리는 사이 경영은 위축되고 기업은 혁신 경쟁에서 밀려날 수 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기는커녕 추가할 수 있다. 민주당이 주장하는 이사의 주주 충실 의무는 경제 8단체와 벤처기업협회까지 모두 반대하지만 사모펀드 관계자, 금융투자 전문가 등이 주축인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등의 단체는 찬성한다. 법조계에서는 소액주주 보호라는 의도와 달리 행동주의 펀드나 소액주주 플랫폼 등이 적은 지분으로 기업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트로이 목마’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 금융 전문 변호사는 “지분을 매입해 주주총회에서 표 대결을 하는 비용보다 주주 충실 의무 위반으로 소송을 거는 게 훨씬 저렴할 것”이라고 했다. 기업들 사이에서 “민주당이 어쩌다 ‘더불어펀드당’이 됐느냐”는 말까지 나온다.최 대행, 거부권 행사해도 놀랍지 않아 사모펀드 MBK가 인수한 홈플러스의 실패나 1990년대 이후 주주가치론이 득세한 미국 제조업 생태계 붕괴는 시사점이 있다. 펀드자본이 기업 가치를 높일 수도 있지만 차입 매수, 자사주 소각과 배당을 통해 기업 자금을 빼가는 ‘약탈적 가치 착취’ 창구로 변질될 수 있어 감시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좋은 일자리를 만든다’는 강령까지 만든 민주당이 새로운 시장과 일자리에 도전하는 ‘헨리 포드’들의 손발을 묶고 눈앞의 수익을 좇는 펀드자본에 날개를 달아줄 이유는 없다. 한국 주력 사업은 반도체 자동차 전자 등 투자가 많이 필요한 업종이다. 증권 은행 보험 등 금융업종과 달리 주주 환원이 기업가치로 이어진다고 단정할 수 없다. 한국 기업의 가치를 높이려면 논란이 큰 주주 충실 의무 도입보다 이사들이 회사를 위해 의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도록 기본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가 상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한다고 해도 놀랍지 않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 202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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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애플서 1년 할 일, 한국선 기약 없다”는 경고

    세계 반도체 전쟁의 한복판에서 전체 수출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반도체 업종에 대한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적용 논쟁이 이렇게 오래 끌 일인지 의문이다. 맥킨지가 한국 경제에 대해 ‘끓는 냄비 속의 개구리’ 신세라고 경고한 지 10년이 지났고, 이제는 뜨거운 물을 끼얹어서라도 서둘러 탈출시켜야 한다는 경고까지 나오는데도 위기 불감증은 바뀌지 않았다. 변화에 둔감해도 살아남는 ‘우물 안 정치’가 세계 시장에서 경쟁해야 하는 한국 기업을 끓어오르는 냄비 속에 가두고 있다.6년 넘은 주 52시간제 예외 논쟁 반도체 업계가 주 52시간제를 해보지도 않고 반도체특별법에 예외 조항을 넣어달라고 요구하는 건 아니다. 6년 8개월간을 해보고 내린 결론이니 답을 해야 한다. 이 예외 적용을 반대하는 더불어민주당은 주 52시간제를 뺀 보조금 지원만이라도 넣어 반도체법을 통과시키자고 한다. 기업들은 복잡하고 힘든 건 피하고 보는 정치권의 ‘회피 기동’에 이미 6년 넘게 허비했다. 주 52시간제가 우리 사회에 도입된 건 저녁이 있는 삶에 공감하고 투입 노동시간보다 생산성이 중요하다는 데 동의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국 특유의 경직된 노동시장과 획일적 주 52시간제의 조합이 만들어 낸 부작용이다. 2020년 미국에서 코로나19가 확산되고 재택근무가 증가하자 세탁기 냉장고 등 가전제품 특수가 생겼다. 한국 전자회사 미국법인 대표는 당시 “주문이 늘어도 주 52시간제 때문에 한국 생산량을 크게 늘리기 어렵다. 나중에 수요가 감소할 때를 생각하면 한국 생산라인 직원을 무작정 늘릴 수도 없다”며 발을 굴렀다. 노동계와 야당은 재해·재난, 인명·안전, 돌발 상황, 업무량 폭증, 연구개발 등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고용노동부 장관의 인가와 노동자의 개별 동의를 받아 특별연장근로 제도를 활용하라고 주장한다. 근무시간 연장을 위해 노동부 장관 승인과 노동자 개별 동의를 매번 받으라는 건 세계 시장에서 촌각을 다투는 초격차 경쟁을 하고 있는 기업에 할 얘긴 아니다. 우리끼리 경쟁한다면 몰라도 노동시간 규제가 없는 다른 나라와 경쟁하는 상황이라면 역차별이 될 수 있다. 전 세계 기업과 금융시장을 상대로 일하는 금융회사와 기업 본사가 밀집한 세계 금융수도 뉴욕은 ‘잠들지 않는 도시’로 불린다. 주 52시간 제도가 도입됐을 때 글로벌 금융회사의 한국법인 대표는 “서울을 글로벌 금융허브로 만들겠다면서 금융사 직원들이 주 52시간에 맞춰 ‘칼퇴근’하라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은 은행원 연구원 등에 대해 근로시간 제한을 두지 않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조항’을 두고 있다. 일본도 고소득 전문직에 대해 비슷한 제도가 있다.한국 기업, 강점인 ‘속도’를 잃어 한국 기업의 최대 강점은 속도였다. 이젠 업계에서 “애플에서 1년이면 개발할 일을 미국 경쟁사에선 2년을 하고 한국 기업에선 언제 끝날지 모른다”거나 “한국 반도체가 압도적이었을 때 인재들이 모여들었지만, 지금은 미국 중국 경쟁사에 사람을 뺏기고 남은 인력은 주 52시간에 묶여 있다”는 한탄이 나온다. 기업들이 원하는 주 52시간제 예외는 외면하는 민주당이 기업들이 반대하는 이사의 충실 의무를 주주로 확대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안은 제 일처럼 속도를 내고 있다. 일자리를 만들 장기 투자에 족쇄를 달고 자사주 소각이나 배당을 요구하는 펀드자본주의에 날개를 달아줄 수 있다는 기업의 걱정까지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일인가. 한국 경제의 실속(失速) 위기를 주 52시간제로 모두 설명할 순 없지만, 적어도 자국 기업에 불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은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 기업들이 6년 넘게 해봤으니 주 52시간 제도의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고쳐 써보고, 문제가 생기면 다시 고치면 된다. 그게 실용이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 2025-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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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트럼프와 이재명의 차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두 달 전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떤 이는 내가 ‘한국의 트럼프’ 같다고 한다”며 자신은 “현실주의자(realist)”라고 소개했다. 정파에 극단적으로 치우치지 않는 실용주의자라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는 강성 지지층이 있고 사법 리스크를 안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경제를 보는 현실 감각은 닮은 점보다 다른 점이 많다. 트럼프 대통령과 이 대표는 모두 인공지능(AI)과 같은 첨단 기술 투자를 중시하지만 접근법이 다르다. 이 대표는 신년 기자회견에서 “인공지능 시대의 기본적 삶이 보장되는 삶은 피할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이라며 AI의 일자리 대체를 기정사실화하고 기본소득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에 도전하는 중국의 현실적 위협을 주목하고 AI 첨단 기술을 산업과 국가 안보가 연계된 패권 경쟁의 틀로 바라본다. 이 같은 관점의 차이는 결과로 나타난다. AI 기술 관점 차이가 만든 한미 격차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첫날 180일 이내에 미국의 AI 우위 확보를 위한 행동계획 수립을 지시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중국에 대한 첨단 AI 반도체 수출을 금지하는 채찍을 휘두르고 있다. 오픈AI 오라클 소프트뱅크가 AI 인프라 확보를 위해 5000억 달러를 투자한 ‘스타게이트’ 프로젝트 발표 자리에도 함께했다.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를 위한 전력 확보 지원도 약속했다. AI 세계 최강국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한국은 말만 무성하다. 전력 소모가 많은 AI 인프라 투자를 위해 필요한 전력망 확충 특별법,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특별법은 아직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챗GPT에 푹 빠져 있다”는 이 대표가 AI 투자에 진정성이 있다면 이렇게 시간을 끌 일이 아니다. 이 대표는 “기업이 앞장서고 국가가 뒷받침해, 다시 성장의 길을 열어야 한다”고 했지만 ‘민간 주도 정부 지원’ 구호는 10년 넘게 정부 정책, 정치인 공약에 단골로 등장하는 구호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 대표는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들을 호출하거나 “비정상적 지배 경영구조를 혁신해야 한다”며 기업 경영에 대한 개입을 당연시했다. 기업들이 “투기자본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하는 이사의 주주 충실 의무 등을 담은 상법 개정안도 민주당이 밀어붙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가 주목하는 취임식에 미국 빅테크 CEO들을 상석에 앉혀 힘을 실어주었다. 중국 AI 스타트업 ‘딥시크’가 10분의 1의 투자와 인력으로 챗GPT에 필적하는 추론 능력을 보유한 ‘R1’을 공개했을 때는 “(딥시크의 AI가) 미국 제품보다 더 빠르고 훨씬 저렴해 보인다”며 오히려 미국 기업을 압박했다. 경쟁자인 중국 기술을 무시하지 않고 자국 기업을 밀고 당기며 경쟁과 혁신을 이끌어내는 게 트럼프 방식이다.성장론에 저성장 탈출 위한 ‘킥’ 없어“검든 희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이 대표는 “성장의 기회와 결과를 함께 나누는 공정 성장이야말로 실현 가능한 양극화 완화와 지속 성장의 길”이라고 강조했다. 공정 성장은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이 10년 전에 들고나왔던 구호다. AI 로봇 스마트폰 로봇청소기와 같은 기술 제품은 물론이고 석유화학 철강 조선 자동차 등 한국 주력 산업조차 중국 기업의 밀어내기 공세에 시달리고 1%대 저성장을 우려하는 현실에서 ‘성장 기회와 결과를 함께 나누자’는 공정 성장은 이상론에 가깝다. 트럼프 대통령이 두 번의 대선에서 승리한 건 민생을 파고든 미국 우선주의 공약이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 대표가 트럼프 대통령과 가장 다른 점은 그의 성장론에 아직 사람들의 가슴을 펄떡펄떡 뛰게 하는 ‘킥(매운맛)’이 없다는 것이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 2025-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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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규정 괴물’ 된 국토부의 ‘셀프 조사’ 끝내라

    국토교통부는 10년 전 “항공사고 조사기관의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고 있다”는 언론 보도에 대해 해명 자료를 내고 “조사의 독립성은 법률에 따라 엄격히 보장돼 있다”고 반박했다. 국토부가 당시 거론한 항공·철도 사고조사에 관한 법률 제4조는 ‘국토부에 항공·철도 사고조사위원회(사조위)를 두고, 국토부 장관은 사고 조사에 대해 관여하지 못한다’는 규정이다. 이는 조사 업무의 독립성에 대한 것이지 독립 조사기관에 대한 규정은 아니다. 국토부가 논점을 바꿔 비판을 피해 간 것이다. 국토부 소속 사조위를 일찌감치 독립시켰더라면 지난해 12월 29일 전남 무안 제주항공 참사 수습 과정에서 벌어진 ‘셀프 조사’ 논란은 피했다.규제-조사 한 몸, ‘셀프 조사’ 논란 되풀이 국민과 해외 전문가들은 무안공항에 동체 착륙한 제주항공 여객기가 활주로 밖 로컬라이저가 설치된 콘크리트 둔덕에 충돌하고 폭발하는 동영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왜 저런 시설을 저곳에 두었을까”라며 한탄했다. 국토부는 달랐다. 한밤에 “무안공항의 로컬라이저는 관련 규정에 맞게 설치됐다”는 보도자료를 뿌리며 또 규정을 들고나왔다. 국민들은 생명과 안전을 걱정하는데, 뜬금없이 ‘규정 준수’로 맞받아치며 논점 변경을 시도한 것이다. 콘크리트 둔덕에 대한 비판이 확산되자, 박상우 국토부 장관은 참사 9일이 지나서야 “규정 준수 여부를 떠나 안전을 보다 고려하는 방향으로 신속히 개선하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그러면서도 ‘규정 위반은 없었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허술한 규정도 지키면 그만이라는 건가. 국토부는 “해당 시설과 사고 관련성은 사조위에서 종합 조사할 계획”이라고 했다. 문제가 된 무안공항 로컬라이저 시설의 인허가는 국토부 부산지방항공청이 했다. 사고 원인을 조사하는 사조위 역시 국토부의 한 지붕 아래에 있다. 조사위 위원장은 국토부 출신이고, 상임위원은 국토부 항공정책실장이다. 국토부 관리들이 밤낮없이 사고 수습에 힘을 기울였지만, 유족들이 ‘셀프 조사’라고 들고일어난 건 객관성과 신뢰성을 의심받는 ‘셀프 조사’의 근본적 한계 때문이다. 결국 경찰이 나서 부산지방항공청 무안출장소 등을 압수수색하며 수사에 착수했다. 국내에선 대형 재난사고가 벌어지면 규제 기관의 ‘셀프 조사’ 논란이 불거지고, 경찰이 시비를 가리기 위해 개입하는 참사 수습 공식이 되풀이된다. 세계적으로 항공 철도 등 재난사고에 대한 기술적 조사와 사법적 조사는 분리돼야 한다는 원칙이 통용된다. 사고 원인을 찾는 기술적 조사와 책임 소재를 밝히는 사법적 조사가 뒤섞이면 관련자들이 민형사상 책임을 피하려고 솔직한 진술을 피하기 때문이다. 사고 원인 조사와 책임 규명이 혼재되면 실패에서 찾아야 할 문제는 꽁꽁 숨어버린다.미 NTSB처럼 독립기관이 사고 원인 규명해야 미 의회는 1974년 사고 조사기관인 국가교통안전위원회(NTSB)를 교통부에서 독립시키는 법안을 통과시키며 “조사기관이 완전히 분리되고 독립돼 있지 않다면 어떤 연방기관도 조사 기능을 적절하게 수행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NTSB는 경찰 수사와 독립적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조사 보고서를 의회에 보고한다. 재판 증거로는 쓰이지 않는다. 국회입법조사처에 따르면 국내에는 부처별로 25개의 재난사고 조사기구가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NTSB처럼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곳은 없다. 사조위 독립을 외면하던 국토부는 ‘셀프 조사’ 비판이 커지자 뒤늦게 총리실로 이관하거나 독립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4월에 항공안전 혁신방안을 내놓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규정 괴물’이 된 국토부의 ‘셀프 조사’를 바꿔야 한다. 그래야 사고 원인을 규명하는 기술적 조사와 책임을 묻는 사법적 조사를 분리해 접근하는 선진국형 사고 수습 체계도 정착된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 2025-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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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12월3일 한국 경제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2019년 미국 뉴욕 외신기자 취재 현장에서 당시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던 홍콩의 유력 언론사 기자를 만났다. “한국 특파원이라는 걸 알고 있다”며 명함을 건넨 그는 “시민의 힘으로 민주화를 이룬 한국이 부럽다”고 말을 걸어왔다. 결연한 그의 표정에서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묵직한 믿음이 느껴졌다.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계엄군이 국회로 난입하는 한국 상황을 지켜봤다면 그는 무슨 말을 했을까. 45년 만의 계엄 선포 이후 대한민국에 대한 세계의 시선은 달라졌다.경제와 민주화 성공한 韓 모델 의심받아 한국은 경제 발전과 민주화에 모두 성공한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6시간 계엄’은 세계가 칭송한 한국 민주화의 유산을 걷어찼다. 계엄이 해제되지 않았다면 ‘의회와 정당 활동, 집회와 시위가 금지되고 군이 모든 언론과 출판을 통제하며 이를 어기면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당하는 나라’가 됐을 것이다. 누가 이런 나라에 투자하겠나. 윤석열 대통령은 ‘경고성 계엄’이라고 했지만, 해외 언론은 ‘GDP(국내총생산) 킬러’라고 불렀다. 한국에 대규모 투자를 약속한 유럽계 제조회사 한국 법인 직원은 계엄 직후 “밤새 본사에서 e메일이 많이 왔고 오전부터 긴급회의가 잡혔다”고 걱정했다. 외국 방산기업은 한국 법인 직원을 철수시켰고, 해외 정상과 바이어들의 방한 계획도 줄줄이 취소됐다. 그나마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보다 한국 경제의 대외 건전성이 크게 나아진 건 다행이다. 외환보유액은 글로벌 금융위기 때의 갑절로 늘었고 단기외채 비중도 당시의 절반에 불과하다. 문제는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과 대외 환경이 악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행은 중국 특수가 있었던 2004년과 반도체 호황기인 2016년의 탄핵 국면보다 현재의 대외 여건이 좋지 않다고 진단했다. 한국의 기술적 우위가 사라지고, 중국 기업의 밀어내기 공세는 철강, 석유화학에서 반도체, 자동차로 확산되고 있다. 내년 성장률은 1%대로 떨어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5분의 1이 넘는 ‘초고령사회’에 처음 진입한다. 내년 1월 ‘미국 우선주의’를 내건 도널드 트럼프 2기 미국 행정부가 출범한다. 미국이 국제질서에서 발을 빼는 ‘미국 없는 세계’에 대한 투자자들의 불안감도 크다. 글로벌 투자은행 JP모건의 제이미 다이먼 최고경영자(CEO)는 “3차 세계대전은 이미 시작됐다”며 “다수의 국가가 관여하는 전장이 이미 벌어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해외 투자자들의 위험회피 성향은 앞으로 더 강해질 것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경제 문제에 관해서는 정치 문제에 개의치 않고 돌아가는 메커니즘이 있다”고 했지만 ‘경제안보’ 시대엔 구두선에 가깝다.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국회에서 불신임안이 통과돼 내각이 붕괴된 프랑스의 국가 신용등급을 떨어뜨렸다. 한국의 정치 리스크가 장기화하면 한국 경제도 ‘탄핵’하려 들 것이다. 정치가 경제 망친 ‘한국화’ 선례 막아야 정치가 경제를 망친 ‘한국화’의 선례를 남기지 않으려면 해외 투자자들의 위험 회피 성향을 자극하는 정정 불안을 최소화하고 단기 대책보다 민관이 중장기 성장 잠재력 확충에 매진하게 하는 정공법이 필요하다. ‘거대 야당’이 초유의 감액 예산안을 단독 통과시키고 탄핵 국면에서 승자처럼 군림하며 지역화폐나 정책 대출 등의 선심성 돈풀기 정책이나 기업 반발이 큰 상법 개정안 등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 역풍을 맞는다. 여야 이견이 적은 인공지능(AI) 반도체 지원과 국가전력망 확충을 위한 산업 경쟁력 복원 법안부터 처리하는 게 순리다. 한국 사회는 계엄 해제부터 탄핵 표결까지 질서 있게 치러 내 미국이 평가하듯이 ‘민주주의 회복력’을 확인시켰다. 이제는 한국 경제의 복원력을 보여줄 차례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 2024-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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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트럼프 월드의 포식자와 약자

    2019년 6월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 암웨이센터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재선 도전 출정식을 취재했을 때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연단에 서기 전 흥미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트럼프의 ‘영적 조언자’로 알려진 여성 전도사 폴라 화이트였다. 그는 무대에 올라 “트럼프 대통령을 반대하는 모든 ‘악마의 네트워크’가 무너지게 하라”며 “트럼프 대통령은 지옥과 적의 전략을 이겨내고 운명과 소명을 다할 것”이라고 큰소리로 기도했다. 상대를 악마화하고 적대시하는 기도에 환호하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보며 내 편과 네 편으로 갈라진 미국의 ‘부족주의 정치’ 현실을 실감했다.친구와 적으로 구분하는 ‘트럼프 월드’ 재선을 노렸던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 확산 충격으로 2020년 대선에서 낙선했지만 세상을 적과 친구로 나누는 ‘트럼프 월드’의 이분법적 세계관과 미국 우선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미 유권자들은 올 11월 제47대 미 대통령 선거에서 표를 몰아주며 그를 다시 선택했다. 트럼프를 겪을 만큼 겪고 내린 두 번째 선택이니 진짜 민심을 반영한다고 봐야 한다. 미국인의 지지와 1기 학습효과가 생긴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2주도 안 돼 2기 행정부 주요 인선을 거의 마무리할 정도로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에서 “트럼프 1기 때는 행동이 정치적 수사와 달랐지만 이번에는 제약받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트럼프 재집권 리스크는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됐고, 세계는 바삐 움직이고 있다. 한국처럼 막대한 대미 흑자를 내고 있는 유럽연합(EU)은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 구매를 통해 무역흑자 폭을 줄이는 대안을 고려하고 있다.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는 트럼프 당선인에게 자국 천연자원 접근권이나 투자자 심사 권한 등을 부여하는 ‘승리 계획’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고 60%의 고율 관세가 예고된 중국은 트럼프 1기 때 무역전쟁을 치르며 미국에 대한 교역 의존도를 낮춰 과거보다 피해가 덜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트럼프 포비아’ 현실화, 우리 하기에 달려 문제는 한국이다. 2016년 트럼프 등장에 놀라고, 8년 뒤 재집권에 다시 당황하고 있다. 미국에 가장 많이 투자하고 가장 많은 일자리를 만드는 나라지만 대중·대미 수출 의존도가 높고 산업도 무역전쟁의 직격탄을 받는 반도체 자동차 이차전지 등에 편중돼 있기 때문이다. 위기라고 호들갑을 떨다가 막상 위험이 코앞까지 닥치면 어쩔 줄 모르고 당하는 ‘회색 코뿔소’ 리스크를 없애려면 한 번 더 고민하고 한 발 더 빨리 행동해야 한다. 예를 들어 EU의 구상처럼 미국산 LNG 수입을 늘리거나 미국산 원유 도입으로 대미 무역흑자를 줄일 수 있겠으나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의 첫 방미 때 이미 꺼냈던 카드이며 그냥 될 일도 아니다. 중동보다 먼 미국에서 LNG나 원유를 들여오려면 운송비 비축비 등의 추가 지원이 필요할 수 있다. 트럼프 당선인이 환경청장으로 지명한 리 젤딘 전 하원의원은 “트럼프는 ‘친구는 친구처럼, 적은 적처럼 대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했다. 1983년 완공된 뉴욕 트럼프타워 건설 책임자였으며 트럼프 당선인과 18년간 일했던 바버라 레스는 2017년 제작된 넷플릭스의 4부작 다큐멘터리 ‘트럼프: 미국인의 꿈’에 출연해 “트럼프는 자신을 공격한 사람을 공격한다. 더 세게 반격한다. 약한 사람도 공격한다. 약점을 알고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미국에 이익에 도전하는 포식자나 약점이 잡힌 약자로 인식되면 트럼프의 공격을 피하기 어렵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전 나토 사무총장의 말을 빌리면 트럼프 공포의 실현 여부는 우리 하기에 더 달려 있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 2024-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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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브루노 마스와 블랙핑크 로제가 만났을 때

    지난 주말 K-팝 스타 블랙핑크 로제와 미국 팝스타 브루노 마스가 함께 만든 ‘APT.’ 뮤직비디오 영상이 공개됐다. 두 팝스타의 협업은 단연 화제였다. 영상은 공개 하루 만에 유튜브 조회 수 4000만 건을 훌쩍 넘었다. ‘21세기 마이클 잭슨’으로 불리는 브루노 마스가 K-팝 스타와 함께 음원과 뮤직비디오를 만들 것이라고 10년 전엔 상상이나 했겠나. K-팝은 아시아의 한계를 뛰어넘어 한 단계 더 진화했다.브루노 마스와 협업 만든 ‘K-소프트파워’ 두 스타의 만남만큼 흥미로운 건 음악에 깔린 진한 한국 감성 코드다. 영어로 노래를 부르지만 소재는 한국 젊은이들의 술자리 게임이다. 브루노 마스가 ‘아파트 게임’을 하며 벌주를 마시고, 노래 중간에 “건배”를 외치거나 태극기를 흔드는 영상을 보면서 미국인들은 한국 문화에 빠진다. 아파트먼트를 한국식으로 줄인 아파트를 구글로 검색하고 한국 청년들의 술자리 문화를 궁금해한다. 뉴욕에서 20년째 살고 있는 한 교포는 “요즘 K자만 붙어도 인기”라며 “코리아타운 한국 노래방은 예약해야 갈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김치 불고기 김밥 등 한국 음식이 유행하면서 뉴욕 한국문화원에서 한국의 반찬을 소재로 한 대담까지 열렸다. 미국인에게 ‘사이드 디시(side dish)’라고 설명하던 반찬은 이제 우리말 그대로 ‘Banchan’이라고 쓴다.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기 때문이다. 세계인이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운다는 건 K-콘텐츠 경험을 촉진하는 소비자본(Consumption Capital)이 세계 시장에서 차곡차곡 축적되고 있다는 뜻이다. K-콘텐츠가 소비될수록 문화와 지식을 토대로 한 소프트파워(연성권력)가 커지고 한국 상품과 서비스의 수출에 도움을 주는 ‘코리아 프리미엄’이 생긴다. K-푸드가 인기를 끌면 한국식 젓가락, 그릇, 식재료 등 관련 상품과 한국 음식 체인점 같은 다양한 서비스 수출도 늘어난다. 한국수출입은행에 따르면 K-콘텐츠를 1억 달러 수출할 때 소비재 수출이 1억8000만 달러 증가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K-콘텐츠의 성가에 박수만 칠 게 아니라 소비자본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산업적, 경제적 부가가치를 키워야 한국 경제의 활로가 뚫린다.‘하드파워’ 중국과 맞설 소비자본으로 키워야 K-콘텐츠가 쌓아올린 소프트파워는 과학기술과 제조업을 무기로 미국과 패권 경쟁을 벌이고 남중국해에서 주변국과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의 하드파워와 시장에서 차별화할 수 있는 경쟁력이다. 필리핀 매체 필리핀스타의 편집장은 칼럼에서 “필리핀인은 K-팝 K-드라마 떡볶이 빙수 삼겹살의 즐거움을 알게 됐다”며 “한국은 해상 영토를 빼앗거나 경제적 협박으로 교역 상대국을 소외시키지 않고 소프트파워를 이용해 세계를 정복했다”고 평가했다. 소프트파워는 중국 밖 시장을 개척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한국은 1970, 80년대 중동에서 건설 노동자들을 보내 달러를 벌었고 2000년대는 중동 원전 수출에 도전했다. 요즘은 엔터테인먼트, 로봇, 인공지능(AI) 등의 소프트파워로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네이버와 카카오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와 기술 협력을 추진하고, CJ그룹 이재현 회장이 사우디를 방문해 엔터테인먼트 등에 대한 투자와 협력을 논의할 정도로 중동도 한국의 소프트파워를 인정하고 있다. 한국은 미 US뉴스와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이 발표하는 문화적 영향력 순위에서 2017년 세계 31위에서 올해 7위로 상승했다. 일본은 5위, 중국은 14위다. 일본을 따라잡고,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려면 소프트파워에 대한 국가적 관심과 집중 투자가 더 필요하다. 브루노 마스와 로제의 협업처럼 세상을 놀라게 하는 도전도 더 많아져야 한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 202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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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국뽕 경제’에 진짜 민생은 없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중 틈만 나면 경제 성과를 자랑했다. 북-미 정상회담이 실패하고 난 뒤엔 ‘관세 폭탄’으로 얻은 미중 경제 전쟁의 성과가 대단하며 미 증시가 얼마나 잘나가는지를 부쩍 강조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에 지친 민심은 냉랭했다. 그는 결국 2020년 대선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패했다.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는 얘기보다 권력자가 보여주고 싶어하는 ‘국뽕(자국 찬양) 경제’로는 민심을 크게 얻기 어렵다.이탈리아-일본 따라잡는다 해도 민심 냉랭 정치 지도자들은 민심이 흔들리면 경제 성과를 강조한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는 ‘국뽕 경제’가 단골로 등장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코로나19 위기 때인 2021년 1월 신년사를 통해 “1인당 국민소득이 사상 처음으로 주요 7개국(G7) 국가를 넘어설 것”이라며 “14년 만에 주가 3,000시대를 열며 주요 20개국(G20) 중 가장 높은 주가 상승률을 기록했다”고 자랑했다. 최악의 집값 급등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상황에서 이탈리아를 앞지른 1인당 소득과 주가 자랑은 민심을 파고들지 못했다. 더불어민주당은 결국 ‘부동산 실정’의 책임을 안고 2022년 대선에서 패배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지난달 29일 기자회견에서 “3년 만에 일본을 턱밑까지 따라잡고 세계 수출 5대 강국의 자리를 바라보게 됐다”며 “작년 1인당 국민소득이 일본을 넘어섰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수출 증가를 ‘블록버스터급’이라고 평가한 외신 보도도 언급했다. 대통령의 말처럼 과거에는 꿈조차 꾸지 못했던 일이 눈앞의 현실이 됐는데도 지지율은 여전히 낮다. 정치인과 관료들은 통계 숫자로 경제를 얘기하지만, 기업인과 서민들은 시장에서 가슴으로 직접 느낀다. 자영업자들은 경제가 살아나고 수출이 블록버스터급이라는데 내수는 왜 나쁘고 장사는 안 되는지 더 궁금하다. 청년들은 열심히 일해서 집도 장만하고 결혼도 하고 싶은데 질 좋은 일자리도, 알맞은 주택도 별로 없다고 하소연한다. 30, 40대 중년들은 빚을 갚느라 쓸 돈이 별로 없고 50대 이상은 자산 격차를 실감하며 노후를 걱정한다. 민생과 직결된 일자리와 소득, 집값과 가계빚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데 수출과 국민소득과 같은 거시경제 지표로 서민의 가슴을 두근두근 뛰게 만들긴 어렵다. 금융투자세나 전 국민 25만 원 지급이 민생 정치라고 우기는 여야 정치인들도 자신들의 지지율이 왜 오르지 않는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대통령은 수출이 잘되고 있다고 하지만 기업 현장은 살얼음판이다. 미국과 유럽 중앙은행들은 금리를 내리며 경기 침체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독일 폭스바겐, 벤츠까지 밀어내고 있는 중국산 전기차의 공세는 매섭다. 국내 가전회사 최고경영자(CEO)는 “중국은 이제 무서워해야 할 대상”이라고 긴장한다.국민 눈높이에서 ‘설득의 소통’ 노력해야 위기 상황에서 희망의 길을 제시하는 건 지도자의 책무다. 그렇다고 알리고 싶은 것만 알리면 반향이 없다.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설득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은 ‘공감과 이해-문제의 인정-가능한 대안 제시-최적의 해법 선택’의 순이다. 민생의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문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제대로 된 해법도 제시할 수 없으니 민심을 움직일 수도 없다. 공감과 이해, 문제 인식보다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잘할 것”이라는 국뽕 경제 인식이 앞서면 코로나19 위기로 분노한 민심에 주가 성적표를 들이대고, 집값 급등에 화난 사람들에게 1인당 소득 자랑을 하는 ‘소통 참사’가 일어난다. 진짜 민생은 그들의 자랑이 아닌, 말하지 않은 것에 있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 2024-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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