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에게 말 걸기 20선]<6>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 입력 2009년 6월 17일 03시 00분


《“다른 곳에 나오는 ‘渡(도)’자의 별획이나 날획은 모두 고구려 식 예서체, 즉 광개토대왕비체로 씌어 있어서 결구나 장법으로 보아 기맥이 상통하는데 유독 신묘년 기사의 ‘渡’자는 광개토대왕비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해답은 간단하다. 이 글자는 1500년 전 고구려의 누군가가 쓴 원래 비문의 글자가 아니라 변조해 놓은 글자이기 때문이다. ‘渡’자의 날획이 이런 모양이 된 것은 비문을 변조한 사람의 무의식적인 습관에서 비롯했을 가능성이 높다.”》

日帝가 변조한 광개토대왕비문

‘來渡海破(내도해파).’ 일본 사학계는 광개토대왕비에 등장하는 이 네 글자를 근거로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4세기 후반∼6세기 중반까지 한반도 남부지역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해 왔다. 전북대 중어중문학과 김병기 교수(55)는 2004년 4월 한국고대사학회에서 발표해 주목받은 논문을 보완한 이 책에서 비석의 서체를 분석해 이 중 ‘渡海破’ 세 글자가 일제에 의해 변조됐다고 주장한다.

문제의 신묘년 기사는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이다. 일본 측은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어서 줄곧 조공해 왔다. 그런데 왜(일본)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와 신라를 깨부수어 (일본의)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한다.

김 교수에 따르면 신묘년 기사 ‘渡’의 마지막 부분 ‘乂’의 별획(별)은 광개토대왕비체의 별획처럼 곧은 사선이 아니라 중간 부분이 아래쪽으로 상당히 굽어 있다. 날획(d)도 획의 시작 부분이 위쪽으로 약간 꺾인 기세를 띠고, 필세도 파도가 출렁이는 듯한 파책(가로획을 쓸 때 붓을 누르면서 조금씩 내리다가 오른쪽 위로 튕기면서 붓을 떼는 방법) 모양이다. 渡자 윗부분에 나란한 세 개의 가로획은 밑으로 갈수록 오른쪽 끝 부분의 길이가 짧고 약간씩 위로 치켜 올라가 있다. 이는 광개토대왕비체가 아닌 해서의 특징이다.

김 교수는 “비문을 변조한 사람이 광개토대왕비체의 필획과 결구에 대해 서예학적인 눈으로 치밀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 겉모양만 대강 본떠 ‘渡’자를 만들어 넣었다”고 말한다.

‘海’자 역시 ‘母’ 부분 첫 획과 두 번째 획이 광개토대왕비에 등장하는 다른 海자와 달리 오른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다. ‘破’자도 왼쪽 石의 두 번째 획이 불룩하게 활처럼 굽어 있다. 비에 나오는 다른 破자는 왼쪽 石의 첫 획인 가로획과 皮의 두 번째 획인 가로획의 높이가 나란하지만 신묘년 기사의 破자는 皮가 石보다 아래쪽에 있다. 이 역시 해서의 특징이다.

김 교수는 ‘渡海破’의 서체적 특징을 통해 원래의 글자도 추론한다. ‘渡海破’로 변조가 가능한 글자는 ‘입공우(入貢于)’라는 것이다. ‘渡’자가 오른쪽으로, 海자는 왼쪽으로 치우쳐 줄이 틀어져 있는 것도 글자의 구조로 볼 때 원래 글자가 ‘입공우’라는 증거가 된다.

김 교수의 주장에 따라 이를 다시 해석하면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 그래서 줄곧 조공을 해 왔다. 그런데 왜(일본)가 신묘년 이래로 백제와 □□와 신라에 대해 조공을 들이기 시작하였으므로, (고구려는) 왜도 고구려의 신민으로 삼았다’가 된다.

김 교수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중국 시와 서예학 연구자다. 1982년 대만에 유학 중이던 김 교수는 타이베이의 한 서점에서 광개토대왕 비문 탁본집을 보고 서체의 아름다움에 반해 이를 임서(臨書·옛 필적을 옆에 두고 보면서 따라 씀)했다. 저자는 “‘渡海破’ 부분에 이르자 붓이 멈칫하더니 콱 막히는 일을 경험했다”며 “악보를 보며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갑자기 다른 악보를 들이댔을 때 느끼는 황당함 같았다”고 회상한다. 김 교수는 3년 뒤 재일 사학자 이진희 교수의 특강을 듣고 나서야 이 부분에 변조설이 제기됐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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