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취한 듯 감성 충만한 글, 누구 작품인가 봤더니…국내 첫 AI 글짓기 대회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1월 24일 17시 23분


코멘트
“바람이 잎사귀에 정갈하게 흔들린다. 달과 별을 만나는 이 소리는 날이 갈수록 그리움으로 ”집을 불린다….“

가을에 취한 듯 감성 충만한 글. 하지만 인간의 작품이 아니다. ‘글쓰기 인공지능(AI)’ 프로그램에 ‘가을이 오면’이라고 입력하자 AI는 연필로 꾹꾹 눌러쓰듯 유려한 문장을 20초에 하나씩 이어갔다. ”캄캄한 밤하늘의 허공에 떠있는 연인이 손에 잡힐 듯 하다“는 문장으로 문단을 끝마쳤다.

성균관대는 21, 22일 이틀간 경기 수원시 성균관대 자연과학캠퍼스에서 국내 첫 AI 백일장 행사인 ‘AI X Bookathon(부커톤)’ 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는 해커톤(해킹과 마라톤의 합성어로 한정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결과물을 완성하는 대회) 방식을 본 따 21일 오후 3시 반부터 다음날 오후 4시 반까지 약 25시간 동안 진행됐다.

제시어는 ‘만약(IF)’. 참가자들은 고전문학이나 수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다양한 텍스트를 AI 프로그램에 입력했다. 대회에 사용된 AI는 미국의 비영리 AI 연구단체인 ‘Open AI’가 개발한 AI 모델인 ‘GPT-2’다. 바둑 AI인 ‘알파고’가 인간이 알려준 기보 데이터를 이용해 바둑 두는 법을 스스로 학습(딥러닝)하듯 GPT-2는 인간이 제공하는 글 데이터를 통해서 스스로 글을 쓰는 방법을 익힌다.

자정이 지나자 참가자들은 학습을 마친 AI와 함께 창작에 돌입했다.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는 내용의 문학 작품을 쓰기로 결심한 한 참가자는 ”어릴 땐 서른이면 멋진 어른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라고 입력했다. AI는 곧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내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고 받았다.

어떤 제시어에도 거침이 없었다. 한 참가자가 ‘스님’이란 단어를 입력하자 AI는 ”나는 스님이 되어 배우고 깨달음을 얻기 시작했다. 진리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마음을 비워 버려야 보일 것 같다“는 식으로 글을 이어갔다.

글의 내용이나 문체는 사람이 AI를 어떻게 학습시키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SNS)에 올라온 글을 학습한 AI의 문체는 통통 튀었다. 한 참가팀의 AI는 ‘뇌피셜’(공식적으로 검증된 사실이 아닌 개인적인 생각)이란 신조어까지 쓰며 글을 이어갔다. 반면 고전문학이나 수필, 원로 작가가 쓴 작품의 텍스트를 학습한 AI는 한자어나 사자성어를 자주 사용했다. 학습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AI는 이해할 수 없는 엉성한 수준의 글을 내놨다.

심사위원들은 AI 활용도와 문학성을 기준으로 출품작들을 평가했다. 이날 대상을 수상한 작품은 노인인 화자가 과거의 삶을 회상하면서 여러 가지 ‘만약’의 경우에 대해 생각하는 회고록 형태의 글이었다. 대상 수상자인 성균관대 신소재공학부 4학년 김형준 씨(24)는 ”AI 스피커를 볼 땐 AI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기술이라고 생각했는데 높은 완성도의 글을 내놓는 것을 보고 저희도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대회에는 성균관대 학부생과 대학원생 등 43명이 3, 4명씩 팀을 짜 참가했다. 성균관대는 이날 참가팀들이 쓴 글을 책으로 묶어 내년에 출간할 계획이다.

김소영 기자 ksy@donga.com

::제시어를 입력하자 AI가 쓴 문장::

◇‘스님’
-나는 스님이 되어 배우고 깨달음을 얻기 시작했다. 진리라는 것은 어디에나 다 있다. 진리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마음을 비워 버려야 보일 것 같다.

◇‘나는 도망치듯 군대를 갔다’
-나에게는 쉬는 시간이 필요했다.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모든 것은 흘러간다’는 말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24개월 동안 나는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깨달았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