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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 붕괴 30년… “독일 통일은 필연”이라지만 후회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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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 붕괴 30년… “독일 통일은 필연”이라지만 후회 없었을까

주성하 기자 입력 2019-07-05 16:47수정 2019-07-05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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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올해로 30년을 맞았다. 지난달 22일 찾은 베를린 장벽은 ‘이스트사이드갤러리’라는, 화가 100여 명이 그린 거대한 벽화로 채워져 있었다. 서베를린을 포위했던 총길이 약 160㎞의 장벽 중 약 1.3㎞ 구간을 남겨 시내에 복원해 명소로 자리 잡았다.

베를린을 찾은 여행객들은 높이 3.6m의 장벽에 그려진 다양한 벽화를 사진에 담느라 분주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이들이 몰린 곳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에리히 호네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이 키스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형제의 키스’였다. 옆 가게에선 무너진 장벽의 콘크리트 조각이 기념품으로 팔리고 있었다.

이제 베를린 장벽은 과거의 추억으로 남았다. 독일은 장벽이 무너진 뒤 통일을 맞았지만 통일의 후유증은 30년이 지나도록 남아 있었다.



극우의 유령이 떠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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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유령,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에 떠돌고 있다.”

1848년 저술된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첫 구절이다. 그 유령은 20세기 나치즘의 득세와 더불어 세계사를 바꾸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년을 맞은 오늘날 독일인들은 반(反)난민, 반이슬람이라는 유령의 배회에 공포를 느끼고 있다.

2013년에 창당된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동독 지역에서 높은 지지를 받아 2017년 9월 총선에서 12.7%를 얻어 제3정당으로 연방하원에 진입했다. 지난해에는 독일의 16개 주 의회에 모두 진출했고 정당 지지도 조사에서 2위에 올랐다. AfD는 여세를 몰아 프랑스 극우 포퓰리즘 성향 정당 ‘국민연합(RN)’ 등과 연대해 ‘정체성과 민주주의’라는 범유럽을 아우르는 극우 정치그룹을 만들었다. 이 그룹은 유럽의회에 73명의 의원을 둔 제5당으로 부상했다. 이들의 약진은 이제 시작이다.

AfD의 지지 기반은 동독이다. 왜 동독인들은 극우 정당에 빠졌을까.

통일 전 동독 라이프치히대에서 저널리즘을 가르쳤던 불프 스카운 박사는 “20년 전만 해도 작센주(옛 동독)는 사회주의자들이 득세해 ‘붉은 작센’이라고 불렸는데, 지금은 이곳에서 AfD가 가장 강한 정당이 됐다”고 말했다. 과거의 사회주의자들이 이제는 극우로 변신했다는 것이다.

베를린자유대 앙케 피들러 교수는 “동독인은 2등 국민이라며 불만이 많다”며 “극우의 득세는 동독인들이 통일 이후에 갖는 불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했다. 통일의 후유증이 30년 뒤 극우 정당의 득세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독일의 난민 정책은 동독 지역의 불만을 키워왔다. 분단 시절 동독에선 외국인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적극적인 난민 수용 정책을 편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100만 명의 난민을 젊은 인력들이 빠져나가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심각한 동독 지역에 대량으로 보냈다. 주민 500명이 살던 마을에 1000명의 난민이 배정되기도 했다.

통일 후 30년 동안 이러한 과정을 겪은 동독인들은 난민들이 똑같은 사회보장과 기초생활보장을 받으며 이웃으로 정착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베를린자유대 김상국 교수는 “동독인들은 극우 정당 지지를 현실에 대한 실망감과 박탈감을 표시하는 가장 효과적인 저항이라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현재의 정치 기득권에 대한 불만이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지지로 분출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극우가 득세하면서 독일 내에 인종차별과 혐오 발언이 확산되고 한국인들까지 피해를 입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과연 독일 통일에 후회는 없었을까

통일은 동독인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지난달 18~26일 베를린과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등 동독 지역을 다니며 만난 20여 명의 정치인, 학자, 언론인,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모두 “독일 통일은 필연”이라고 입을 모았다.

정범구 주독일 한국대사는 “6월 초 베를린 훔볼트대와 ‘장벽은 과연 사라졌는가’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는데 ‘독일 통일은 전반적으로 성공적’이라는 게 현지의 보편적 평가”라고 전했다.

동독은 통일 후 경제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었다. 지난해 독일 경제·에너지부의 발표에 따르면 동독 사회의 가처분 소득은 서독의 85% 수준에 도달했다. 현실적인 수치로는 아직 차이가 있지만 분단 이전에도 독일의 주요 산업이 서독 지역에 몰려 있었고, 젊은 인력들이 서독으로 빠져 나가 동독의 고령화가 심각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서독과 동독의 격차는 많이 좁혀진 셈이다. 한국의 도시와 농촌 간 격차를 감안하면 같은 국가 내에 이 정도의 소득 격차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동독 자체로만 따져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약 3만8000유로(약 5000만 원)로 이미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비교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동독인들은 왜 불만을 갖는 것일까. ‘라이프치거 폴크스자이퉁’의 얀 에멘되르퍼 편집장은 “과거 사회주의권 국가 중 동독만큼 정치 사회적으로 발전한 곳이 없다. 그러나 동독인은 이웃 나라와 비교하지 않고 서독과 비교하기 때문에 불만이 크다”고 말했다.

허물어지지 않은 심리적 장벽

동독 지역에서 만난 사람들은 불만과 갈등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경제적 문제가 아닌 심리적 장벽 문제를 꼽았다. 통일은 동독인의 정체성을 지웠다. 일했던 직장과 경력이 사라졌다. 동독인들이 훌륭했다고 자부하는 의료제도, 교육제도는 물론 축구팀, 깃발, 노래 심지어 신호등까지 서독식으로 바뀌었다. 동독인들은 내가 어디서 일하던 누구인지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라이프치히 현대사포럼 위르겐 라이히 박물관장은 “독일 통일의 시초가 됐던 라이프치히 시위를 주도한 20대 청년들이 지금 50대가 되면서 현실에 절망했고 극우파를 지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독인들에게 당한 차별도 동독인들에게는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다. 당사자인 스카운 박사는 “통일이 되자 수준 낮은 서독 사람들이 식민지로 물밀듯 몰려와 동독 최고 엘리트들을 무시하면서 쓴맛을 느꼈다”고 거친 분노를 쏟아냈다.

독일 중부방송의 아나이스 로스 편집자는 역사적인 1989년 9월 10일 라이프치히 비폭력 시위 장면을 유일하게 촬영해 위험을 무릅쓰고 서독에 전송한 인물이다. 그는 서독과 동독 사람들에게 라이프치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려 했다. 통일이 되자 그가 일하던 중부방송의 경영진은 기술 담당 임원 단 한 명만 빼고 모두 서독 사람으로 바뀌었다. 동독 주민이 동독 임원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동독에서도 40대 이하 세대에겐 통일이 먼 과거 일로 기억된다. 하네스 모슬러 독일자유대 교수는 “일반적인 독일인이 갖고 있는 통일에 대한 생각은 기억하면서도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40대 이하 세대에게 통일은 기념일과 다큐멘터리, 자서전에서나 볼 수 있는 과거이며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앞으로 살아야 할 시대라는 것이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서독으로 옮겨가고, 동독에는 과거의 향수에 잠긴 노령 세대가 남아 늙어가고 있다. 통일 전 동독의 인구는 1600만 명, 서독은 6000만 명이었다. 현재 동독 인구는 1400만 명으로, 서독에서 약 200만 명이 이주해왔음을 감안하면 400만 명 이상의 동독인이 통일 후 서독에 간 것으로 추정된다.

장벽 붕괴 30년 뒤 독일의 모습은 통일을 지향하는 한국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통일 후 동독에서 가장 빠르게 변신한 이들은 정보기관인 슈타지 요원들이었다. 이들은 슈타지에서 쌓은 정보와 네트워크를 활용해 경비회사, 보험회사, 공해제거회사 등을 차려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반도가 통일되면 주민들을 탄압하고 감시하던 북한 보위부 요원들이 어떻게 변할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라 할 수 있다.

김상국 교수는 “독일과 한국의 통일은 상황이 너무 달라 비교하기는 어렵다. 다만 우리는 통일 과정에서 더욱 어려운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동독 마지막 총리 “천천히 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통일 독일 됐을 것”

한스 모드로프 전 동독 총리(91)는 동독 공산당 시절의 마지막 총리다. 1989년 11월 13일 빌리 슈토프 총리의 사임으로 총리가 된 뒤 그해 12월 7일 에곤 크렌츠 통일사회당 당수가 축출당하면서 사실상 동독의 통치자가 됐다. 그리고 1990년 3월 18일 자유선거 후 총리에서 물러났다.

모드로프 전 총리는 4개월 남짓한 재임 시절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와 동독의 미래를 놓고 4차례 담판을 벌였다. 지난달 22일 베를린 좌파당 당사(옛 공산당 청사)에서 만난 그는 통일을 지향하는 한반도에도 참고가 될 만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통일 직전 동서독 회담의 과정을 회상하며 “통일을 밀어붙이는 콜과 미국에 대항해 양국이 조약공동체 관계를 맺자는 제안을 했지만 거절당했다”고 말했다. 다음 대안으로 그가 준비한 방안은 3, 4년의 조약 공동체를 거쳐 국가연합으로 가고, 이후 연방제를 하는 3단계 통일 방안이었다. 그는 “모스크바를 두 번이나 찾아가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회담을 했지만 이미 체제 불안에 빠진 소련은 독일의 통일 과정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말했다. 힘이 없는 동독의 방안은 어디서도 통하지 않았다. ‘통일을 결정하는 주체는 힘’이라는 것을 보여준 교훈이었다.

모드로프 전 총리는 천천히 통일을 추진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통일 독일이 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콜 전 총리와의 회담 과정에서도 그는 150억 마르크를 지원해주면 동독을 재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그는 “150억 마르크는 사실 큰 금액이 아니었다”며 “동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1000억 마르크의 전쟁 보상금을 소련에 냈지만, 서독은 소련에 한 푼도 안 내고 오히려 서방의 마셜플랜(1947년부터 1951년까지 미국이 서유럽 16개 나라를 대상으로 한 대외원조계획)으로 지원을 받았다”고 했다. 이어 “전후 1000억 마르크는 1990년쯤엔 이자까지 계산해서 6000억 마르크나 되는 큰돈”이라고 덧붙였다. 2차 세계대전의 엄청난 보상을 동독이 다 감당했기 때문에 서독은 동독을 마땅히 지원했어야 했다는 의미로 읽혔다. 이는 한반도 통일 과정이 시작되면 북한도 다양한 논리로 남한의 경제 지원을 당연한 것으로 요구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는 동독 지역에서 극우 세력이 세력을 키우는 것에 대해 동독 출신의 요아힘 가우크 전 대통령(2012~2017년 재임)의 말을 빌려 우회적으로 의견을 밝혔다. 가우크 전 대통령은 “통일의 잘못된 결과로 나타나는 정치적 변화지만 ‘독일을 위한 대안(AfD)’을 적으로 간주하지 말고, 그들과 대화하고 협상해야 한다. 이미 의회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독일 주요 정당이 AfD와의 연정을 거부하는 것과 다른 태도다.

인터뷰를 마치며 1971년 동독이 서독 방송 시청을 허용한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금지 정책은 관철시킬 수 있을 때만 해야 한다.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관철시키지 못한다면 오히려 권력을 잃게 된다. 당시 기술적으로 금지해 봐야 막을 방법이 없었기에 방송 시청을 허가한 것이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KPF 디플로마-평화저널리즘 교육과정의 하나로 작성되었습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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