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성의 盤세기]키가 큰 예기는 鶴이나 鳳자를 넣고, 소리 좋은 예기는 玉으로 이름 지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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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권번의 작명법

경기민요의 대가 한정자 명창. 김문성 씨 제공
경기민요의 대가 한정자 명창. 김문성 씨 제공
김문성 국악평론가
김문성 국악평론가
고음반을 듣다 보면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소리꾼 이름에 관한 겁니다. 남성 소리꾼은 평범하지만 여성 소리꾼은 ‘채선’ ‘홍도’ ‘운선’ ‘모란’ ‘연옥’ ‘옥엽’ ‘동정월’처럼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예기(藝妓)였습니다. 이런 이름을 어떻게 지었을까요?

고 한정자 명창은 예기 양성소인 권번에 들어가면 누구나 본명 대신 예명을 갖게 된다고 했습니다. 권번의 행수(우두머리 기생) 출신인 수양어머니가 지어주거나 스스로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특별히 스승이 작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작명에는 외모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키가 큰 예기는 다리가 긴 새를 연상해 학(鶴)이나 봉(鳳)자를 넣어주었다고 합니다. 컬럼비아, 오케 레코드에 ‘수심가’, ‘다리굿’을 취입한 평양 예기 장학선(張鶴仙)을 비롯해 주학선(朱鶴仙), 이비봉(李飛鳳) 등이 대표적인 장신 예기입니다.

얼굴이 예쁜 예기는 사군자와 꽃, 나무를 넣어 작명합니다. 한성권번 예기로 빅타레코드에 가곡 음반을 취입한 이난향(李蘭香)을 비롯해 최홍매(崔紅梅), 조모란(趙牧丹), 이반도화(李半島花) 등이 대표적인 미인 예기입니다.

평양의 예기 김옥엽 명창의 ‘토끼화상’ 음반. 김문성 씨 제공
평양의 예기 김옥엽 명창의 ‘토끼화상’ 음반. 김문성 씨 제공
소리가 좋은 예기는 구슬옥(玉)을 부수나 글자로 넣어 줍니다. 일제강점기 가장 많은 민요 음반을 발매했으며, 김동인과 염문을 뿌렸던 평양 명기 김옥엽(金玉葉)을 비롯해 김옥심(金玉心), 이은주(李銀珠), 김연옥(金蓮玉) 등이 그들입니다.

성정(性情), 즉 기가 센 기생은 사계절 또는 구름, 바람 등으로 작명해 기를 눌렀다고 합니다. 평양 예기로 서도소리 고음반을 많이 남긴 김춘홍(金春紅)을 비롯해 김추월(金秋月), 유운선(柳雲仙) 같은 명창은 성정이 무시무시했다고 합니다.

미스코리아 대회 1위를 ‘진’으로 명명하는 것처럼 동기(同期), 즉 권번 입학연도가 같은 예기들 중 3년 학습 동안 가장 우수한 사람에게는 스승이 특별히 ‘진(眞)’자 또는 ‘일(一)’자를 넣어주기도 했답니다. 대감놀이 명창으로 한남권번을 1등으로 졸업한 이진홍(李眞紅)을 비롯해 평양 기성권번 1등 졸업생 선우일선(鮮于一扇)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상은 소리도 좋고, 얼굴도 예쁜데 스승으로부터 정자(貞子)라는 예명을 받고 속이 상해 사흘 밤낮을 눈물로 보내야만 했다는 고 한정자 명창에게 들은 1930년대 권번 작명법 이야기였습니다.
 
김문성 국악평론가
#소리꾼 이름#예기#한정자 명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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