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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장원재]이영길과 탁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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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장원재]이영길과 탁경현

장원재 도쿄 특파원 입력 2017-08-09 03:00수정 2017-08-0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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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 도쿄 특파원
지난주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다.

도쿄(東京)의 재일동포 사찰에서 강제징용 등으로 끌려와 일본에서 세상을 떠난 무연고 유골 재포장 작업을 도왔다. 한국에서 온 시민단체 관계자 및 사찰 주지 스님과 함께 옛 유골함에서 신원 증명서와 화장된 유골을 꺼내 새 유골함으로 옮겼다.

문제는 기내 반입을 위해 유골을 최대한 잘게 부숴야 했던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고국을 그렸을 분들의 유골을 모두 돌려보내야 한다는 말에 공이를 든 손에 힘을 줬다. 이 과정을 거쳐 6일 1차로 33구의 유골이 한국으로 돌아갔다. 앞으로 총 101구가 한국에 보내질 예정이다.


유골함 속 서류를 보면 고인들은 대부분 식민지 시절 일본에 와 광복 후 혼자 살다 세상을 떠났다. 집주인이나 관리인이 사망한 이들을 발견해 화장 후 재일동포 사찰에 보낸 것이 일반적이다. 주지 스님은 “가족이 없다 보니 왜 일본에 왔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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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구 중 1991년 78세로 세상을 떠난 이영길(李永吉) 씨는 비교적 삶의 궤적이 잘 알려진 편이다. 그는 태평양전쟁 중이던 1942년 일본인 군속으로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에 파견돼 포로수용소 감시원이 됐다. 전후 연합군에 체포돼 B·C급 전범으로 10년 형을 선고받고 인도네시아 형무소에 갇혔다. 감옥에서 정신병을 얻었고 일본에 돌아온 후 죽을 때까지 40년 동안 병원에서 생활했다. 그는 매년 여름 병원 인근에서 불꽃놀이를 할 때마다 ‘함포 사격’이라며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반강제로 끌려가 악역을 강요당한 한반도 출신 B·C급 전범들. 이들은 일본에선 외국인이라며 보훈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고, 한국에선 일제의 앞잡이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정신적 경제적 괴로움에 자살을 택한 이도 여럿이었다. 이 씨의 정신병도 그런 고통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당시 이 씨처럼 포로 감시원이 된 한반도 청년은 3000명에 이르렀다. 전후 군인과 군속을 포함해 한반도 출신자 148명이 전범이 됐고 23명이 처형됐다. 한국 정부는 2006년 이들 중 상당수를 피해자로 인정하고 명예를 회복시켜 줬다. 하지만 일본 정부로부터는 아직 보상을 받지 못했다.

유사한 사례는 더 있다. 일본에서 최근 출간된 책 ‘꿈의 전후(前後)’는 지한파 여배우 구로다 후쿠미(黑田福美) 씨가 가미카제(神風) 자살특공대원으로 숨진 탁경현 씨의 위령비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던 과정을 다루고 있다.

구로다 씨는 2008년 탁 씨의 고향 경남 사천시에 귀향기원비를 세우려 했지만 ‘반민족 행위자를 미화한다’는 시민단체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결국 비석은 현재 수도권의 한 사찰에 눕혀져 있다. 지난주 책 출간 행사에서 만난 구로다 씨는 “탁 씨는 당시 조선 민족의 지위 향상을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정치적 의미는 전혀 없었고, 순수한 위령의 의미로 비석을 세우려 했다”며 아쉬워했다. 탁 씨는 출격 전날 단골 식당을 찾아 눈물을 흘리며 큰 목소리로 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침략전쟁에 동참했지만, 제국주의의 피해자로도 볼 수 있는 이 씨와 탁 씨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기자 역시 이들에게 면죄부를 주거나 낙인을 찍을 위치에 있지 않다. 다만 식민지의 모순된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형태로 몸부림쳤던 이들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만은 기억했으면 한다. 최근 개봉된 영화 ‘군함도’와 ‘박열’에 나오듯 당시 한일 양국에는 ‘나쁜 일본인’과 ‘착한 조선인’이라는 두 개의 단어로 규정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장원재 도쿄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도쿄 재일동포 사찰#무연고 유골 재포장 작업#영화 군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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