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승헌]내가 만났던 존 매케인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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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 정치부 차장
이승헌 정치부 차장
걸어오는데 175cm쯤 되는 듯싶었다. 하도 베트남전 ‘전쟁 영웅’이라고 해서 거구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이(81세)를 고려하면 작은 키는 아니지만, 71세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90cm에 육박하니 백인치고 큰 덩치는 아니다. 목소리는 카랑카랑하고 전달력도 좋았지만 톤은 높지 않았다. 고령에 말을 힘겹게 이어가거나 잘 안 들릴 때도 있었다. 마른기침도 했다.

지난해 9월 미국 워싱턴 특파원 시절 인터뷰차 만난 존 매케인 미 상원 군사위원장 얘기다. 매케인이 얼마 전 한국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지난달 25일 뇌종양 수술 후에도 상원의 오바마케어 폐지 토론에 나선 그에게 동료 의원들의 기립 박수가 쏟아진 장면이었다. 그는 토론에 참석하려고 지역구인 애리조나주에서 5시간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 더불어민주당 의원 26명이 문재인 정부의 첫 추가경정예산안 처리를 위한 본회의에 효도관광, 출장 등의 이유로 빠진 것과 맞물려 “우리 국회엔 왜 매케인 같은 정치인이 없느냐”는 보도와 인터넷 댓글이 줄을 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의회주의의 화신’처럼 묘사된 매케인은 실제론 앞서 말한 대로 하루하루 의정활동을 충실히 하려는 노(老)정객에 가깝다. 뇌종양 수술 때문에 부각됐을 뿐 영웅과는 거리가 멀다. 알고 지내던 매케인의 보좌관에게 엊그제 전화해 “한국에서 당신네 의원이 떴다”고 했더니 “관심을 부담스러워하신다. 별거 아니지 않으냐(Not a big deal)”고 했다. 2008년 공화당 대선 후보를 지낸 거물이지만 아들뻘인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언제 봤다고 “헬로, 마이 프렌드(안녕, 친구)”라며 당시 터진 북한의 5차 핵실험 등 한반도 이슈를 놓고 진심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기자는 그가 군사위의 각종 회의, 청문회에 빠졌다는 말을 의회나 언론을 통해 들어본 적이 없다.

트럼프 이후 미국 정치가 꼭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미국엔 여전히 매케인 같은 원로 정치인이 꽤 있다. 민주당 하원을 이끄는 낸시 펠로시 원내대표는 정력적인 활동 때문에 못 알아볼 뿐이지 77세의 할머니다. 2014년 상원 정보위원장으로서 미 중앙정보국(CIA)의 불법 고문 실태를 파헤친 민주당의 ‘여걸’ 다이앤 파인스타인 상원의원은 우리 같으면 은퇴했을 84세다. 이들을 보면 미국인이 왜 종종 직업을 ‘job’ 대신 ‘calling(소명)’이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다. 치열하게 살아가며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고, 정치적 무게를 쌓으며, 어느 덧 원로가 된다.

우리에겐 왜 매케인이 없느냐는 질문은, 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왜 누구나 존중하고 의지할 어른이 없느냐는 갈증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김정은의 핵장난으로 6·25전쟁 이후 최대 안보 위기를 맞고 있는 요즘 어떤 중진이 나서 국민적 단합을 울림 있게 호소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북핵에 대한 각 정당의 메시지는 전부 다르다. 여전히 당 대표나 원내대표는 물론 3선만 돼도 뒷짐을 진다. 본회의장 좌석을 보면 중진은 대부분 단상에서 가장 먼 맨 뒷줄에 앉아 있다.

우리도 여의도에서 매케인을 보고 싶은가? 유감스럽지만 공짜 점심은 없다. 정치권만 욕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거다. 결국 정치라는 공공 서비스의 수요자인 우리 수준을 높이고 눈을 더 부릅뜰 수밖에 없다. 아이돌 가수에 대한 팬덤(fandom)처럼 바람에 휩쓸리거나, 문재인 대통령 공격했다고 문자 폭탄 보내는 수준으론 어림없다. 선수(選數)에 기대 폼만 잡는 사람은 표로 꾸짖고, 제대로 된 정치인을 키우고 응원해야겠다는 절박한 자각과 노력이 있어야 우리도 언젠가 매케인의 투혼을 한국에서도 구경할 토양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승헌 정치부 차장 ddr@donga.com
#존 매케인#오바마케어#원로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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