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원 나왔지만 돌아갈 곳 없는 환자 사회복귀 돕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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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복지법 5월 30일 시행

서울 용산구 백범로의 정신질환 직업재활시설 겸 플라워카페 ‘스롤라인’에서 환자들이 꽃꽂이를 배우고 있다. 이처럼 정신병원 장기입원자의 사회 복귀를 돕는 재활·생활시설의 수요가 늘고 있다. 태화복지재단 제공
서울 용산구 백범로의 정신질환 직업재활시설 겸 플라워카페 ‘스롤라인’에서 환자들이 꽃꽂이를 배우고 있다. 이처럼 정신병원 장기입원자의 사회 복귀를 돕는 재활·생활시설의 수요가 늘고 있다. 태화복지재단 제공
#장면1. 조현병 환자 A 씨(47)는 유일한 피붙이인 형과 4년 전 연을 끊었다. 어머니의 유산을 정리할 때가 되자 형수가 정신병원에 찾아와 의사에게 “A 씨를 금치산자로 처리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크게 상심해 극단적인 생각까지 품었던 A 씨는 정신질환자 재활시설 ‘스롤라인’에서 화분 관리와 꽃 배달을 배우며 안정을 찾았다. 3일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에서 화분 관리를 마친 A 씨는 “동료 환자들과 가족처럼 지내며 사회로 복귀할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5월 30일 시행되는 개정 정신건강복지법(현 정신보건법)에는 이처럼 정신병원에서 퇴원했지만 갈 곳이 없는 환자에게 직업재활·주거생활시설을 제공해 사회 복귀를 돕는 내용이 담겼다. 증상이 경미한데도 돌아갈 곳이 없어 정신병원에 머무르는 ‘사회적 입원’ 탓에 정신병원 평균 입원 기간이 207일(6개월 27일)로 이탈리아(13.4일) 독일(26.9일) 프랑스(35.7일) 등 선진국보다 훨씬 길기 때문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장기 입원 환자의 보호자에게 퇴원을 꺼리는 이유를 설문해보니 ‘같이 살 곳이나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라는 응답이 ‘증상 악화·재발이 두려워서’라는 답보다 배 이상 많았다.

정신질환자 생활시설은 환자와 정신보건사회복지사가 모여 사는 일종의 기숙사다. 2일 오후 한울정신건강복지재단이 운영하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조현병 환자 주거시설 ‘조은집’에는 각각 아르바이트와 사이버대학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이모 씨(55·여)와 김말숙 씨(52·여)가 과일을 깎아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김 씨는 “12년간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됐다가 퇴원하기를 반복했지만 생활시설로 옮겨 동료 환자들과 살면서 숨통이 트이고 상태도 훨씬 나아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갈 길은 멀다. 국립정신건강센터가 추계한 국내 미입원 정신질환자 43만780명 중 지역 정신건강증진센터에 등록돼 관리를 받는 환자는 5만8369명에 불과하다. 특히 생활시설과 재활시설은 전국 337곳뿐이고 절반 이상이 서울·경기·인천에 집중돼 있어 이용자가 6685명에 불과하다. 이는 인력·예산 부족과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합쳐진 결과다. 지난해 ‘강남 화장실 살인 사건’처럼 정신질환자의 강력범죄 사건이 발생한 뒤에는 “생활시설을 없애라”는 이웃의 민원이 빗발치고, 재활시설을 통해 어렵사리 취업했던 환자들이 무더기로 해고되기도 했다.

정신질환자의 증상이 급격히 악화돼 돌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막으려면 이들을 지역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인프라가 반드시 필요한데, 환자에 대한 두려움이 이를 가로막는 역설적인 상황이 반복되는 것. 조현병 환자 이모 씨(43)는 “살면서 남을 해치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일부 환자의 사례를 들며 ‘위험하니 모두 격리시켜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장면2. 지난달 ○○대교 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던 20대 초반 남성이 국립정신건강센터 응급실로 실려 왔다. 심각한 우울증 탓에 스스로 입원했다가 호전돼 3개월 전 퇴원한 환자 B 씨였다. 그간 상담을 빼먹고 치료제도 복용하지 않다가 증상이 재발한 것. 담당의는 B 씨가 다른 수많은 정신질환자처럼 퇴원 후 아무런 치료나 관리를 받지 않고 방치돼 다시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악순환에 빠질까 봐 걱정이다.

보건복지부는 B 씨처럼 꼭 필요한 외래 진료를 거부하는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정신보건심판위원회가 환자에게 ‘외래치료 명령’을 내리고 이를 어기면 강제 입원시킬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현재는 병원장이 외래치료 명령을 지방자치단체에 건의할 수 있지만 제재 조항이 없어 활용 사례가 거의 없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 따르면 퇴원 후 지속적인 진료를 위해 2개월 내에 정신병원을 찾는 환자의 비율은 62.6% 정도였다.

의료계에선 중증 환자가 퇴원 후에도 병원에 있을 때처럼 하루 24시간 언제든 치료와 관리를 받을 수 있도록 지역 정신건강증진센터와 의료진이 긴밀히 연계한 ‘집중사례관리(Assertive Community Program·ACT)’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유제춘 을지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치료 체계의 중심을 입원·격리에서 사회 복귀로 전환한 뒤 대대적인 ACT 프로그램을 시행한 미국의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보호자들의 목소리는 엇갈린다. “환자와 하루만 같이 살아 보면 우리가 왜 이러는지 알 것”이라며 정신병원 강제 입원을 선호하는 쪽과 “장기 입원이 오히려 재활 가능성을 줄인다”며 지역사회와 연계된 치료·관리 프로그램을 늘려달라는 쪽이다. 조현병 환자(70)의 동생 장모 씨(68)는 “형이 병원에 입원해 있던 10년 동안은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퇴원한 뒤 재활시설에 다니며 회복하는 모습을 보니 ‘왜 진작 퇴원시키지 않았나’라는 후회가 든다”고 말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정신질환자 생활시설#정신보건사회복지사#국립정신건강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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