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잔향]정보는 충분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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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없던 시절에 10대를 보내 다행이었다고 종종 생각한다. 호기심에 대해 즉각 답해줄 통로가 없었기에 구해 얻은 모든 답이 귀하고 소중했다. 그릇된 답을 인지한 탓에 다듬어 보정하는 데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던 질문도 여럿 있었지만.

ⓒ오연경
10대 후반 가장 왕성하게 솟구쳤던 호기심은 당연히 성(性)과 관련된 것이었다. 샤론 스톤의 ‘다리 바꿔 꼬기’가 온 서울 극장가를 들끓게 했던 해가 고2 때였으니, 성에 대한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줄 글도 자료도 이미지도 어디서든 도무지 접하기 어려웠다.

홀로 찾은 희미한 해답의 길은 아버지의 서재에 있었다. 부모님이 외출하실 때마다 서재 책꽂이 맨 위 칸에 꽂혀 있던 묵직한 백과전서 중 ‘ㅅ’ 권을 빼내 거듭 탐독했다.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차이, 호르몬이라는 것의 작용, 성적 접촉에 대한 정보가 매우 딱딱한 글로 풍성하게 정리돼 있었다. 첨부 이미지는 인체 단면도뿐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남녀 학생의 생활 동선(動線)마저 분리했던 중학교를 다닌 경험은 성에 대한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전혀 보탬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구체적 이미지를 통해 모든 호기심을 즉시 남김없이 풀 수 없던 건 다행이었다고, 이제 와서 돌이키게 된다. 누나 덕에 여성에 대한 ‘환상’ 같은 건 아예 품은 적조차 없었지만 적어도 스무 살 첫 연애는 온통 두근거렸으므로.

아기의 잉태 과정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덴마크의 어린이 그림책, 다양한 성폭행 상황을 세세히 담은 영국 만화책이 최근 잇달아 출간됐다. 모두 좋은 책이다. 하지만 성과 관련된 우리 사회의 무거운 난제가 과연 ‘정보 부족’ 탓일는지.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성#호기심#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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