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명인열전]“자연에 둘러싸인 한국식 정원… 후손들도 즐겨 찾는 명소 만들 것”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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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정원 가꾸는 박태후 화가

박태후 화백이 죽설헌 원림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 중 하나가 왕버들나무가 감싸고 있는 연못이다. 박 화백은 “한국 정원은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자연 속으로 들어가서 숨 쉬는 곳”이라고 말했다.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박태후 화백이 죽설헌 원림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 중 하나가 왕버들나무가 감싸고 있는 연못이다. 박 화백은 “한국 정원은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자연 속으로 들어가서 숨 쉬는 곳”이라고 말했다.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자연으로 둘러싸인 집에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21일 찾아간 죽설헌(竹雪軒)은 전남 나주시 금천면 촌곡마을의 야트막한 능선에 자리하고 있다. 주변의 논밭과 과수원은 황량했지만 죽설헌은 원림(園林)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초록을 뽐내고 있었다. 죽설헌을 알게 된 건 책을 통해서였다. 이곳의 주인장이자 한국화가인 박태후 화백(62)이 3년 전 펴낸 ‘죽설헌 원림’은 사계절 정원의 아름다움을 사진과 함께 보여 준다. 수백 종의 자생 꽃과 토종 나무, 과실수와 화초 등을 가꾸며 느낀 자연의 섭리와 경험담을 일기 형식으로 쓴 에세이집이다. 책장을 넘기면서 토종 수목과 화초가 거대하고 아름다운 자연 생태계를 이루며 멋진 숲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 개인이 3만9600m²(약 1만2000평)에 이르는 정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부러웠다. 그래서 죽설헌을 찾아가는 발걸음은 쟀고 마음은 설렜다.

○ 맨손으로 일군 가장 한국적인 정원


박 화백을 따라 정원의 오솔길을 걸었다. 호랑가시나무와 대나무, 소나무 등은 여전히 푸른빛을 머금고 있었다. 왼편에 탱자나무가, 오른편에 꽝꽝나무가 도열한 길을 지나자 숲이 주는 청아함이 느껴졌다. 어른 허리만큼 쌓아 올린 기왓장이 숲과 오솔길의 경계를 이뤘다. 박 화백은 “오솔길은 여름이면 질경이가 카펫을 이루고 기와 담 사이로 피어난 옥잠화가 진한 향을 내뿜는다”고 자랑했다.

걸으면서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가꾼 듯 아니 가꾼 듯 자연스러웠다. 정원의 숲이 제 집인 양 찾아든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이 교향악처럼 들렸다. 동화 속 비밀의 화원을 걷는 느낌이랄까. 작은 산책로를 한 바퀴 둘아 내려가자 작은 연못이 나타났다. 죽설헌에는 크고 작은 연못 7곳이 있다. 수령이 50년 정도 된 왕버들이 연못을 감싸고, 물가에는 노랑꽃창포의 푸른 잎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5월이면 노란색 물감을 풀어 놓은 듯한 연못에 왕버들이 긴 가지를 드리울 것이다. 순간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가슴 깊이 그리워지면’이라는 노랫말이 떠올랐다.

죽설헌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서구식 또는 일본식 정원과는 달리 철저하게 자연의 섭리를 따라 조성한 토종 정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잔디를 깎는 대신 키 작은 야생화들이 스스로 피어나도록 하고 가지치기 같은 인위적 수형(樹形)의 변형을 추구하지 않고, 자랄 수 있는 주변 환경만을 조성해 준다. 최소한의 관리를 통해 한국식 정원을 구현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정원은 인공 연못을 파고 거대한 괴석을 가져다가 조성하는 중국이나 나무와 바위를 인공적으로 다듬어 조성하는 일본과는 달리 손댄 것 같지 않은 자연미가 특징입니다. 이런 전통 정원의 계보를 잇는 곳이 바로 죽설헌입니다.”

정원 투어를 마치고 박 화백이 집안으로 안내했다. 그의 동갑내기 아내 김춘란 씨가 정성스레 우려낸 황차를 내왔다. 호젓한 숲길을 걸은 뒤 마시는 황차여서 그런지 맛이 유난히 그윽했다. 거실은 바깥의 정원과 하나가 된 듯하다. 통유리 너머로 대숲이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거실과 연결된 화실에 들어가니 화선지에 채색을 하다 만 그림이 놓여 있다. 화실에서 보면 자연이 집이고 정원이 방이다. 그래서일까. 화가는 늘 자연을 꿈꾸며 자연을 화선지 여백에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세월이 잠시 멎은 듯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자연이 느껴진다. 그래서 모든 작품의 이름은 ‘자연 속으로…’다.

○ 후대에도 명소로 남을 죽설헌

어릴 적 집이 가난했던 박 화백은 집 근처 호남원예고에 진학하면서 자연스레 나무와 친해졌다. 그는 산을 돌아다니며 열매와 종자를 주워 자갈 섞인 황토밭에 심었다. 잘 자란 나무는 내다 팔고 덜 자란 것은 남기기도 했는데 그때 남은 나무와 화초가 40년 넘게 자라 죽설헌으로 거듭났다. 군 제대 후 당시 4급(지금의 7급) 행정직과 농촌지도직 시험에 동시에 합격했다. 다들 행정직으로 가라고 했지만 그는 농촌지도직을 택했다. 그의 인생에서 첫 번째 갈림길이었다. “학창시절부터 화가의 꿈을 키우고 있었어요. 낮에는 일하고 밤에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아무래도 행정직은 무리겠다 싶더라고요.”

공직 생활 만 20년 되던 42세 때 그는 농촌지도소를 그만두고 본격적인 전업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매달 100만 원이 넘는 연금이 나오기에 연탄과 쌀값 걱정이 없다며 아내를 설득했다고 한다. 인생의 두 번째 갈림길에서 평범한 공무원의 삶은 포기한 그는 이후 조금씩 정원을 넓혀 갔다. 여유가 생기면 주변의 땅을 매입하고 그 땅을 담보로 융자를 받아 또 땅을 샀다.

그는 해외 배낭여행이 한국 전통 정원을 만드는 원동력이었다고 회고했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우리 것은 그 어디에도 없는 고유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나의 정원과 작품은 가장 한국적이고 가장 박태후다워야 한다’고 결심했다.

“영국 정원은 100∼200년 전통을 가지고 있어요. 규모나 가치로 본다면 우리와 게임이 안 되죠. 하지만 거기에 없는 것이 우리에겐 분명히 있습니다.”

그는 화려한 외국 꽃 못지않게 우리의 야생화, 채소 꽃도 저마다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 가치를 모르는 게 안타까웠다. 그래서 우리 꽃과 나무가 아름답다고 이름난 곳을 찾아다녔고 그 열매나 종자를 주워 와 정원에 심었다.

나뭇가지에 달린 채 시들어 지저분해 보이는 외국산 겹동백과는 달리 봄에 송이째 뚝뚝 떨어져 운치를 더해주는 야생 홑동백은 해남 대흥사에 갔다가 알사탕만 한 열매를 주워 와 그 속의 종자를 받아 심었다. 가을이면 어김없이 붉은 물감을 들이는 토종 단풍 종자는 장성 백양사에서, 일본 벚나무에 비할 바 없이 청순한 야생 산벚나무도 인근 다도면 불회사에서 가져온 종자로 심었다.

그는 이제 세 번째 인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정원을 사유재산으로 남기지 않고 재단법인을 설립해 사회와 공유하는 것이다. “마음에 맞는 사람과 이곳 정원을 공동 작품으로 만들었으면 해요. 500년 후에도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그런 명소로 꾸미고 싶습니다.”

박 화백은 외롭지만 의미 있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가지 않은 길’에서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고, 그래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고 했던 것처럼.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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