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조사…” 말 꺼내자마자 뚜 뚜∼ 전화가 끊겼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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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여론조사의 허와 실
본보 기자 조사원 체험

8일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서치앤리서치(R&R)’에서 동아일보 정치부 박성진 기자가 여론조사원 체험을 하고 있다. 이날 박 기자는 여론조사를 체험하는 한 시간여 동안 응답자와의 전화 연결에 애를 먹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8일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서치앤리서치(R&R)’에서 동아일보 정치부 박성진 기자가 여론조사원 체험을 하고 있다. 이날 박 기자는 여론조사를 체험하는 한 시간여 동안 응답자와의 전화 연결에 애를 먹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21번째 전화 연결이 끝나자 어깨가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응답자가 성의껏 설문에 답해 줄 거라는 기대는 이미 무너졌다. “한 명만, 딱 한 명만”이라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외쳤지만 여론조사를 시작한다는 문구를 채 읽기도 전에 이미 ‘뚜∼ 뚜∼ 뚜∼’ 통화 종료음이 들려왔다. 예비 유권자들이 바라는 다양한 정치적 의견을 들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한 건 너무 순진했던 걸까. 부지불식간에 긴 한숨이 나왔다. 긴장한 탓인지 오른쪽 다리도 떨렸다.

동아일보 정치부에서 야당을 출입하고 있는 기자는 여론조사기관 ‘리서치앤리서치(R&R)’에서 대선 여론조사를 실제 경험해 보기 위해 8일 하루 동안 여론조사원으로 활동했다.

‘난공불락(難攻不落)’ 20, 30대 여성과 충청권

22번째 통화가 시작됐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에 위치한 여론조사 전문 기관 리서치앤리서치입니다….” 무의식적으로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반응을 기다렸다.

“네….” 응답자가 ‘말’을 했다. 통화 종료음 대신 전해져 오는 음성은 처음이었다.

“선생님의 나이는 만 몇 세이십니까?” “스물둘요.”

20대였다. 게다가 여성이었다. 여론조사에서는 20, 30대 한 명의 응답이 전체 신뢰도를 좌우할 수 있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그만큼 귀한 표본이다. 특히 20, 30대 여성은 응답률이 가장 낮은 표본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응답자의 목소리에서 잔뜩 귀찮음이 묻어났다. 게다가 잠에서 막 깬 듯했다. 설문 문항을 불러 주던 말이 빨라졌다. 조사원의 입장인데도 ‘설문 문항이 왜 이렇게 많지’라는 짜증이 밀려왔다. 끝이 보일 무렵. 전화가 갑자기 끊겼다. 멍해졌다. “어렵다…”라는 말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여론조사 업체를 난감하게 만드는 공포의(?) 표본군은 또 있다. 바로 충청권 응답자들이다. 여론조사기관에서 15년간 근무한 송미라 R&R 운영본부 차장은 “지역별로 응답 성향이 뚜렷하다”고 전했다. 송 차장에 따르면 충청권 응답자들은 설문을 진행하기 가장 어려운 상대다.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조사원의 질문을 가만히 듣다가 “질문에 대한 답은 내 마음속에 있다”며 응답을 피하기 일쑤다.

반면에 호남과 영남권 응답자들은 여론조사에 적극적이다. 특히 호남 지역 응답자들은 정치에 관심이 많아 정치인들의 이력이나 행보를 바탕으로 설문 문항의 허점을 지적하는 경우도 많다. 영남 지역도 응답률이 높은 편이다.

여론조사 업체들의 고군분투

여론조사는 응답률과의 싸움이다. 일반적으로 평균 응답률은 8∼15%다. 전화 여론조사는 임의전화걸기(RDD) 방식을 이용한다. R&R의 경우 1000명의 응답을 받기 위해 무선전화 번호 1만5000개와 유선전화 번호 2만 개를 프로그램으로 생성해 무작위로 통화 연결을 시도한다. 유·무선 3만5000개의 번호를 응답 후보군으로 두고 이 중 1000명이 설문을 완료하면 결과를 공표할 수 있다. 인구 구성에 맞춰 사전에 정해진 △성별 △지역별 △연령별 표본 할당을 채워 가는 식으로 진행한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20, 30대와 같은 ‘마(魔)의 연령대’도 문제지만 근본적인 장애물은 따로 있다. 유선전화를 이용하지 않고 휴대전화만 사용하는 가구가 늘고 있는 시대적 흐름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최근에는 여론조사 업체 발신 번호를 스팸 번호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에 등록해 번호를 차단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양하랑 R&R 사회조사분석본부 연구원은 “전국에 ‘착한 응답자’ 1000명은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기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응답자들이 개인정보 유출을 의심하면서 답변을 꺼리는 것도 여론조사의 장애물이다. RDD 방식은 프로그램이 임의로 번호를 생성한다. 따라서 여론조사기관 입장에서는 특정 번호가 실제 존재하는 전화번호인지, 특정인의 번호인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전화를 받는 사람은 자기 번호를 여론조사기관이 어떻게 알았는지 의구심이 들게 마련이다. 조사원들이 여론조사기관임을 밝히면 가장 먼저 듣는 대답 중 하나가 “제 번호를 어떻게 알았어요?”라는 질문이다. 송 차장은 “여론조사기관의 가장 중요한 홍보 전략 중 하나가 ‘절대 개인정보를 알 수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여론조사는 소수 표본을 조사해 일반 대중의 여론을 파악하는 일이다. 조금이라도 대표성을 확보하기 위한 ‘오차 줄이기’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이를 위한 장치도 여럿 있다. △응답률 높이기 △임의로 질문 문항 섞기 △대선 주자 순서 임의 설정 △조사원의 실수 등 ‘비표본 오차’ 검증 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는 태생적으로 실제 여론이 될 수는 없는 한계가 있다.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정일권 교수는 “여론조사 결과가 각 정당의 대통령 후보를 결정하는 핵심 기준으로 활용되는 등 선거에 미치는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지만 이를 실제 여론으로 간주해선 안 되고 여론의 방향성을 가늠하는 정도로 참고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박성진 기자 psjin@donga.com
#여론조사#조사원#전화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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