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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수세식 공중화장실-화려한 정원… 절터 아래 펼쳐진 백제 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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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수세식 공중화장실-화려한 정원… 절터 아래 펼쳐진 백제 왕궁

김상운 기자 입력 2017-01-11 03:00수정 2017-01-11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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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익산 왕궁리 유적 발굴한 최맹식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이주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 전용호 학예연구사
최맹식 국립문화재연구소장(가운데)과 이주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오른쪽), 전용호 학예연구사가 9일 전북 익산시 왕궁리 유적 내 백제시대 ‘왕궁 정원 터’를 둘러보고 있다. 이들 발아래에 있는 직사각형 돌이 석축 수조로, 조경용 괴석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이곳에 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번째 사진은 당시 정원을 상상 복원한 그림. 익산=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9일 찾은 전북 익산시 ‘왕궁리 유적’은 이름에 걸맞은 위용을 자랑했다. 축구장 20배 크기(21만 m²)의 부지에 홀로 우뚝 솟은 오층석탑(국보 제289호)이 멀리서도 보였다. 석탑 주변엔 1400년 전 궁궐터와 절터 흔적을 보여주는 초석과 적심(積心·기둥을 올리기 위해 밑바닥에 까는 돌)이 숱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곳을 발굴한 최맹식 국립문화재연구소장(60), 이주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54), 전용호 학예연구사(43)와 함께 석탑과 금당, 강당을 거쳐 후원(後苑)으로 들어갔다. 사찰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옛 백제의 화려한 왕궁 정원이 펼쳐졌다. 얕은 구릉의 정원 터에서는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괴석(怪石)들이 눈길을 끌었다. 물길을 따라가자 직사각형 모양의 석축 수조가 나온다. 졸졸 흐르는 물이 괴석을 지나 수조에 넘쳐흐르는 광경은 상상만으로도 운치를 더했다. 최맹식은 “1992년 3월 왕궁리 유적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만 해도 왕궁 정원은 상상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 백제시대 ‘수세식 공중화장실’ 발견

왕궁리 유적 북서쪽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공중화장실 유구.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곡식이 썩었더라도 이 정돈 아닐 텐데… 희한하게 구린 냄새가 참 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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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여름 발굴팀은 왕궁리 유적 북서쪽에서 길이 10.8m, 폭 1.8m, 깊이 3.4m의 기다란 구덩이를 발견했다. 구덩이 밑 유기물 층에서 나무막대와 씨앗, 방망이 등이 출토됐는데 유독 냄새가 심했다. 발굴팀은 곡식이나 과일을 저장한 구덩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자문위원으로 현장을 찾은 이홍종 고려대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유구 양상이 일본 고대 화장실 터와 비슷하다”며 유기물 층에서 흙을 채취해 생물학 분석을 의뢰했다. 조사 결과 다량의 기생충 알이 확인됐다. 삼국시대 공중화장실 유구가 국내에서 최초로 발굴된 것이다.

 조사 결과 발을 올릴 수 있도록 구덩이에 나무기둥을 박고, 내부 벽을 점토로 발라 오물이 새지 않도록 했다는 게 확인됐다. 특히 왕궁리 화장실은 첨단(?) 수세식이었던 걸로 드러났다. 화장실 서쪽 벽에 수로를 뚫어 경사를 이용해 오물을 석축 배수로로 빠지도록 한 것.

 이와 관련해 ‘자’로 추정된 나무막대기가 실은 대변을 본 뒤 뒤처리용이라는 사실이 이주헌에 의해 밝혀졌다. 이른바 ‘측주((치,칙)籌)’라고 불리는 나무막대기로 고대 중국과 일본에서도 사용된 도구였다. 왕궁리 화장실 터는 백제인들의 식생활을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했다. 육식성 기생충인 조충이 검출되지 않은 반면, 채식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주로 감염되는 회충이나 편충이 집중적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2004∼2007년 발굴된 정원도 왕궁리 유적 중 백미로 꼽힌다. 특히 2006년 11월 발견된 어린석(魚鱗石) 2점은 이름처럼 물고기 비늘을 닮아 신비한 느낌마저 주는 조경석으로 유명하다. 어린석을 발굴한 전용호는 “무르고 연해서 처음에는 흙을 뭉친 걸로 착각했다”며 “각력암 계통인데 워낙 희귀해 백제 왕실이 중국에서 수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 사찰 들어서기 전 백제 왕궁 있었다


전북 익산시 왕궁리 유적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왕궁리 오층석탑’. 익산=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왕궁리는 1989년부터 현재까지 28년 동안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우리나라 최장 발굴 유적이다. 그만큼 규모가 큰 데다 백제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도 지대하다. 오랫동안 발굴된 곳답게 유적에 대한 해석은 시대에 따라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발굴 초기엔 유일하게 남은 지상건조물인 오층석탑의 영향으로 사찰을 중심으로 조사가 진행됐다. 왕궁리가 백제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遷都)를 단행한 증거라는 시각도 있었지만 소수설에 불과했다. 오히려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익산에 세운 보덕국 터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왕궁리에 사찰이 들어서기 전 백제 왕궁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결정적인 계기는 1993년 8월 최맹식의 목탑 터 발견이었다. 그는 당시 오층석탑 동쪽, 지표로부터 1m 깊이에서 목탑을 올리기 위해 목봉(木棒)으로 땅을 다진 흔적을 찾아냈다. 이어 목탑 터 아래서 백제시대 왕궁 건물 터를 추가로 발견했다. 왕궁을 지은 뒤 어느 순간 이를 폐기하고 목탑을 올렸다가 또다시 이를 허물고 석탑을 지었다는 얘기였다. 최맹식은 “왕궁 건물 터를 파괴하고 중심부에 목탑과 금당이 들어선 걸 감안하면 통일신라 이후 사찰이 조성된 걸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왕궁리에서 궁장(宮墻·궁궐을 둘러싼 담장)과 더불어 2000년대 이후 대형 정전(正殿) 터와 정원, 공방, 수세식 화장실 등이 잇달아 발굴됨에 따라 백제 왕궁이 조성된 사실은 확실히 굳어지게 됐다.
 
익산=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국의 인디아나 존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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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왕궁리 유적#왕궁리 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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