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중현]혼밥남 엘레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14일 03시 00분


코멘트
박중현 소비자경제부장
박중현 소비자경제부장
“뭘 그렇게 많이 담아? 집에 잔뜩 쌓였는데.” “아니야, 거의 다 떨어졌다니까….”

대형마트 식품매장의 라면 코너에서 자주 듣는 중년 아내와 남편 간의 대화다. 과일, 채소, 육류 코너에서 아내가 물건을 고르는 동안 잠이 덜 깬 표정으로 카트 뒤를 따르던 남편은 간편식품 코너에 이르러 눈빛이 반짝이고 손발이 바빠진다. 레토르트 카레, 즐겨 먹는 라면, 캔 참치와 햄 등을 카트에 최대한 싣기 위해서다.

아내의 감시망을 벗어났을 때 카트를 돌려 즉석식품 코너로 단독 질주하는 남편들도 있다. 그러다 반대편에서 달려온 다른 집 남편과 눈이 마주치면 따뜻한 무언의 교감이 둘 사이에 오간다. “그래, 너도…. 다 이해한다.”

뒤늦게 만행을 발견한 아내의 타박에 떠밀려 골랐던 상품을 다시 진열대에 올려놓는 남편들의 손길에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시간대가 주말이면 그나마 낫다. 평일 낮 점퍼 차림으로 나온 남편들의 눈빛 대화에는 더 복잡하고 슬픈 감정이 담긴다.

한 온라인 쇼핑사이트가 지난해 이곳을 통해 50대 이상 남성이 산 라면, 반찬, 참치, 햇반 등 4가지 품목의 매출액이 같은 연령대 여성을 넘어섰다는 분석을 내놓으면서 혼자 밥 먹는 남자, 혼자 밥 먹는 남편이란 뜻의 ‘혼밥남’이 최근 주목을 받았다. 2013년 50대 이상 여성의 4분의 1이던 50대 남성의 구입액은 2014년에 4분의 3으로 급속히 상승한 데 이어 지난해 드디어 동년배 여성을 뛰어넘었다.

대형마트에서 카트 좀 밀어본 중년 남성이라면 놀랄 것 없는 결과다. 어떤 간편식이 더 맛있는가는 은퇴한 남성들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다. 라면 광고 모델이 대부분 중년 남성인 것도 이 때문이다. 다만 인터넷, 모바일 쇼핑 경험이 없는 50대 이상 남성들이 기술적 한계까지 극복하고 즉석식품, 간편식을 사들였다는 점에서 생존 본능의 경이로움을 느낀다.

자녀가 대학에 가자마자 갈라서는 ‘대입이혼’, 자녀를 결혼시키고 난 뒤 헤어지는 ‘황혼이혼’ 등으로 홀로 된 남자가 많은 탓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아들딸을 위해 오밤중이라도 식사를 준비하던 엄마들이 자녀들이 장성해 외식을 하면서 더이상 남편을 위해 따로 밥상을 차려주지 않기 때문이란 설명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수십 년간 자녀, 남편의 식사를 챙긴 중년 주부들에겐 당연히 남편 밥 바라지를 중단할 만한 권리가 있다. 문제는 스스로를 위해 밥상을 차려본 적이 없는 남편들 쪽에 있다. 2007년 개봉한 영화 ‘우아한 세계’에서 가족을 해외에 보내 놓고 홀로 라면을 먹다 눈물 흘리는 송강호처럼 많은 기러기 아빠들이 이런 어려움을 견뎌 왔다. 60세로 늘어난 정년을 앞두고 지난해 말 희망 퇴직한 많은 남성들이 이런 현실에 직면해 있다.

다행히 눈 빠른 식품·유통업체들이 이런 움직임에 반응하고 있다. 1인용 보쌈, 1인용 떡볶이·튀김·순대 세트 등 1인용 메뉴들을 속속 선보이고 있다. 한 유통업체는 채소 등을 썰어 넣어 불에 볶아야 완성되는 간편식을 새해 승부수로 내걸었다. 혼밥남들에게 요리한 듯한 만족감까지 제공한다는 취지다. 간단한 계란요리와 토스트, 커피를 곁들인 브런치 세트를 내놓은 커피전문점도 있다. 경제적 여유만 뒷받침된다면 집 주변 카페에서 할리우드 영화 속 꽃중년처럼 신문을 읽으며 아침 식사를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고 있다.

혼자 밥 먹는 남자라는 걸 슬퍼해야 하는 시대는 끝났다. 적응의 문제일 뿐이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 한 가지. 밥을 챙겨 먹은 뒤에는 곧바로 설거지를 시작하는 게 좋다. 외출했다 돌아온 마나님이 싱크대에 쌓인 식기를 보고 짜증 내지 않도록….

박중현 소비자경제부장 sanjuck@donga.com
#혼밥남#간편식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