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남자에게 007이란… 남자에게 스포츠카란…

영화속 ‘멋진 악당’의 차
‘C-X75’-‘레인지로버 스포츠 SVR’

영화 ‘007 스펙터’에 등장한 ‘랜드로버 디펜더 빅풋’ (왼쪽)과 레인지로버 스포츠 SVR.

‘영국 감성’이 남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비틀스, 셜록 홈스, 여왕 폐하… 영국은 풍부한 소프트파워 덕에 이런 ‘감성몰이’를 하기에 유리한 나라다. 그중 최근 가장 인기를 끄는 것은 영화 속 ‘스파이’ 아닐까. 오랜 시간 ‘007’이 쌓아온 영국 스파이의 이미지는 ‘킹스맨’으로 이어지면서 패션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대니얼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 역을 맡으면서 007시리즈는 본 시리즈와 비슷해졌다는 평을 듣기도 했지만, 그래도 스타일 면에서 ‘본’은 아직 ‘본드’를 따라올 순 없다. 왜냐고? 아마 ‘본 카’가 없기 때문 아닐까.

영화 ‘007 스펙터’ 스태프들이 로마 시내 자동차 추격신 촬영을 준비하고 있다. 가운데가 ‘악당의 차’로 등장한 재규어 C-X75, 왼쪽 뒤편이 ‘본드카’ 애스턴마틴 ‘DB10’. 재규어랜드로버코리아 제공

007시리즈의 자동차 추격신은 많은 남성팬들을 가슴 뛰게 한다. ‘카지노 로얄’과 ‘퀀텀 오브 솔러스’의 숨막히는 자동차 추격신을 기억하고 있는 필자도 설레는 마음에 최신작 ‘스펙터’를 보려고 극장을 찾았다. 스펙터에 등장하는 ‘영국 감성’ 충만한 차들의 매력을 살펴보자.

‘좋은 놈’의 차로는 애스턴마틴 ‘DB10’이 나온다. 007은 BMW 등으로 ‘외도’했던 몇 작품을 빼고는 대개 애스턴마틴, 로터스, 벤틀리 등 영국차들을 본드카로 써왔고, 최근작들에서는 주로 애스턴마틴을 택하고 있다. 지금껏 24편의 시리즈 중 12편에서 본드카로 등장했다.

과거 본드카들이 물속에서 잠수함으로 변신하고 빛을 통과시켜 투명해지는 ‘묘기’를 부리는 등 현실과는 조금 동떨어진 모습을 보여줬다면, 최근에는 그런 ‘최첨단’ 기능은 없지만 세련된 스타일로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이번 ‘스펙터’에 등장하는 ‘DB10’이 장착한 기능은 뒤로 불을 뿜거나 전투기에서처럼 탈출할 수 있는 등 지금 시점에선 오히려 ‘고전적인’ 느낌이 들 정도. 옛 007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나쁜 놈’이 타는 차로는 재규어와 랜드로버가 나온다. 바야흐로 ‘멋진 악당’이 대세인 시대. 광고에서도 세계 정복을 꿈꾸는 영국인 악당을 내세우고 있는 재규어는 이번 영화에서도 악당 역할을 자처했다. 바로 ‘C-X75’와 ‘레인지로버 스포츠 SVR’가 주인공.

솔직히 말하자면, 욕심이 조금 과했다. C-X75는 더할 나위 없이 멋지긴 하지만 재규어의 정체성을 보여주기엔 ‘지나치게’ 슈퍼카였다. 재규어의 부드러움과 중후함은 사라지고 ‘스포츠카’ 이미지만 남았는데, 이 때문인지 한 일간지의 영화평론가는 ‘람보르기니’라고 잘못 쓰기도 했다. 하지만 ‘재규어가 F1 머신처럼 생긴 고성능차도 만드네’라는 인식은 확실히 심어준 듯하다.

하얀 설원을 달리는 레인지로버는 함께 등장한 ‘랜드로버 디펜더 빅풋’의 각 잡힌 매력과 대조되는 유려한 디자인을 뽐낸다. 하지만 성능으로서는 최고 출력 550마력에 정지상태에서 시속 98km(60마일)에 도달하는 시간이 4.5초밖에 걸리지 않아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중 단연 최고다.

아, 롤스로이스도 악당이 본드와 본드걸을 데려가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영화 제목인 ‘스펙터’와 마찬가지로 ‘유령’이라는 뜻을 가진 ‘실버 고스트’ 모델이라 그런지 사막에서 유령처럼 유유히 나타난다. 이 차는 큰 역할이 없는데도 “저건 1948년식 롤스로이스요”라고 설명해주는 본드의 ‘친절한 배려’를 받는다. 힘들게 로마 시내를 질주한 재규어가 질투하지 않을까.

김성규 기자 sunggy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