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정조, 일사병 치료제 대량생산… 왕의 고민이 화성축조 앞당겨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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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의 연구개발 리더십

가을은 시험의 계절이다. 수능시험이 예정돼 있고 그보다 더 힘들다는 입사시험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오랜 시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시험장에 들어가고 면접을 보지만 떨리는 마음을 어쩌기 힘들어 ‘청심환(淸心丸)’을 먹는 사람들이 많다.

청심환은 잘 알려져 있지만 ‘척서단(滌暑丹)’ ‘광제단(廣濟丹)’ ‘제중단(濟衆丹)’ 같은 약은 일반인에게 생소하다. 이는 모두 조선시대 정조의 명령으로 새로 개발된 일사병 치료제로, 더위를 먹었을 때 구토를 완화시키고 몸에 기운을 돋우는 약효를 지녔다.

이 중에서 특히 흥미로운 게 바로 척서단이다. 척서단은 화성을 건축할 때 일꾼들에게 주기 위해 정조의 특별 지시로 연구개발(R&D)해 만든 신약이다. 1794년(정조 18년) 6월 25일에 척서단 4000정을 만들어 인부들에게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조는 왜 신약까지 개발해서 인부들에게 제공했을까. 조선시대 평민들은 하루에 두 끼 먹는 사람도 드물었다. 평소 영양이 부족했고 혹서기에 일할 때는 일사병의 위험이 더 컸다. 당연히 약에 대한 수요는 컸지만 문제는 약이 너무 비쌌고 그 약을 구성하는 한약재도 귀했다. 개중에는 수입해야만 구할 수 있는 비싼 약재도 있어서 이런 약을 대량 제조해 일반 인부들에게 공급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정조는 연구개발을 통해 대량 생산의 길을 열고 척서단 개발에 성공했다. 특히 환으로 제조해 공사 현장에서 응급약으로 사용하기 쉽도록 했다.

척서단이 주는 교훈은 연구개발을 통해 대량 생산의 길을 열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그렇게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러한 시도는 상당히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이것이 단지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자는 애민정신에서 나온 것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작업의 능률, 생산성 향상과 같은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의 소산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약을 구하기 힘들어 약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일종의 특권으로 인식됐다. 수입 약재가 들어가는 귀한 약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귀하고 특권처럼 여겨지는 약이 화성 공사에 참가한 인부들에게 내려졌다. 물론 성분은 좀 다르겠지만 왕이 하사한 약이 배포된 것이다. 왕이 하사하는 약을 받고 국가의 거대한 사업에 참여한다는 인부들의 자부심이 화성 건설공사의 공사기간을 크게 단축하는 견인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하다.

화성 건설공사는 임금제 고용노동을 체계적이고 대규모로 시행한 최초의 공사였다. 그 덕분에 공사비가 처음 예상보다 3배나 많이 지출됐다. 하지만 당초 10년을 예상했던 공사를 2년 8개월 만에 끝내는 데 성공했다. 이는 당시 평민들이 얻기 힘든 귀한 약까지 나눠주며 인부들의 복지를 챙김으로써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 합리적 경영의 힘이다.

기술로 난관을 극복하려는 시도, 구성원들에게 신분을 뛰어넘는 혜택과 긍지를 부여하는 시도는 오늘날에도 결코 진부하지 않은 스토리다. 세계는 빠르게 변하고 우리에게는 항상 새로운 과제가 닥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견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에 대해 정조와 같은 자각과 합리적인 사고로 도전하는 자세다.

노혜경 덕성여대 연구교수 hkroh68@hotmail.com
#dbr#정조#일사병#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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